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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 (1997년) -익숙했던 삶의 끝에 서서… 본문

실천복간호/실천 복간 5호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 (1997년) -익숙했던 삶의 끝에 서서…

사회실천연구소 2022. 9. 8. 11:20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 (1997년)

-익숙했던 삶의 끝에 서서…

이글은 한 20여 년 전에 처음 보고 가끔 찾아서 다시 봐도 - 글쓰기를 위해 두 번이나 반복해서 또 보았지만 - 여전히 비슷한 감정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이어지는 생각의 편린과 상상마저도 유사한 것들을 자극하는 한 영화에, 아니 그 영화로 인해 지금 다시 일어선 머릿속 것들에 대한 것이다. 그러기에 영화 비평이나 리뷰는 분명 아니다. 영화 핑계 삼아 하고 싶던 말이나 짧게 멋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얼마 전, 공연 제작에 관심을 갖는 모 회사 직원들과 관련 일을 논의하기 위해 점심식사를 함께하게 되었다. 처음 갖는 자리였기에 두서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가며 식사 자리가 이어졌다. 중간에 공연시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지만, 공연 쪽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 특별히 들려줄 만한 꺼리가 없었기에 어물쩍 넘어갔다. 이야기는 OTT 서비스나 유튜브를 통해 국내에 유통되는 영상들과 최근 핫한 관심을 두고 있다는 드라마 등과 같은 콘텐츠 산업에 관한 것들에 이르게 되었다. 많은 자본이 제작과 유통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 소비 패턴에 뭔가 큰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국내 생산 콘텐츠도 즉각적인 글로벌한 유통망 덕에 예전과는 비교되지 않는 수준의 수익구조도 가능해졌다는 것과 같은 충분히 검증되진 않았지만 그럴듯한 말들을 나누며 공감하거나 조금 다른 견해를 가볍게 피력하는 수준에서 이야기는 지속되었다.

 

그러다, 그 중 한 사람이 자기 지인의 이야기라며 들려준 이야기에는 웃픈 현실이라며 모두가 공감하였다. 시작은 이렇다.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를 필모로 가진 영화감독이면서 영화사 대표인 어떤 이가 있는데, 그는 십여 년 전, 제작한 영화의 흥행 실패로 몇십 억대에 빚더미에 올랐다. 재기를 위해 멈추지 않고 노력하고 있지만, 미국으로 유학 보낸 자식 교육 탓에 골머리를 앓다, 결국은 그나마 여유 있는 친구 감독에게 아쉬운 손길을 내밀러 찾아가게 되었다.

 

친구는 흔쾌히 그의 도움 요청에 응했지만 다른 방식을 선택했다. 돈을 빌려주긴 하겠지만, 그 돈을 지인의 통장이 아닌 딸이 공부하는 대학의 계좌로 졸업할 때까지 입금하겠다는 것이었다. 친구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도박판과 비슷한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같은 처지여서 잘 알기에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고마운 일이기에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친구는 끝까지 약속을 지켜 지인의 딸은 대학에서 예술경영을 온전히 전공하고 졸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운 좋게도 글로벌 OTT 서비스 회사에 입사하게 되고, 기획과 마케팅에 두각을 발휘하여 한국 지사의 중요 간부가 되어 최근 부친 근처에 집을 얻어 함께 지내게 되었다. 고액 연봉과 성과급 덕에 자신의 빚 청산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며,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더란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으면, 굳이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지인도 그런 자랑이나 하려고 꺼낸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딸이 하는 일이 기획 마케팅이다 보니 술자리가 잦았고, 딸의 안전이 걱정된 아빠는 몇 번 딸의 차를 대신 운전해 귀가하는 데 도움을 주었는데, 그게 이제는 술만 마시면 아빠를 대리기사처럼 부른다는 것이다. 한 날은 만취한 딸의 연락을 받고 택시를 타고 달려가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뒷좌석에 널브러져 있던 딸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아빠에게 주사라도 하듯, “아빠, 이젠 영화의 시대는 한물갔어. OTT용 드라마 찍어. 내가 유통시켜 대박 내줄게. 영화에 그만 매달려.”라며 훈계하는 것이었다. 술에 취한 딸이 귀엽기도 당돌하기도 하고, 자기 일에 당당한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였지만, 여전히 자신 품 안에 있는 자식인 줄만 알았는데 갑자기 낯선 느낌으로 곁에 있는 딸의 말 너머로부터 밀려오는 격세지감과 스멀스멀 올라오는 웃픈 감정에 차창을 모두 열어 찬바람으로 차 안을 가득 채웠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되었다.

 

이 일화가 세대 간의 차이나 세대교체, 세월의 무상함에 대한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고 모두가 생각한다고 느꼈고, 코로나 팬더믹이 그 속도를 가중시켰을 뿐이지 언젠가부터 분명 무언가 달라지는 것들이 있다는 데엔 어느 정도 동의해서인지 자리한 이들은 서로 구체적인 말들로 확인하진 않았지만 오가는 표정에서 공감을 표하는 듯했다. 좀 결은 다르지만, 연극을 하면서 힘들 때 가끔 매체 쪽 일들과 비교하며 갖는 잠깐의 생각들이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상품성의 유효기간은 정해져 있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이 글을 통해 하려는 말의 핵심을 어렴풋하고 담고 있다고 생각해서이다.

 

요즘은 정말, 미디어 콘텐츠의 홍수라도 해도 될 정도로 1분 미만의 영상 콘텐츠에서부터 몇십 편으로 되어 시리즈로 이어지는, 각 편의 완성도도 뛰어난, 수십 시간의 드라마, 마블 세계관이니, DC 세계관이니 하며 거대한 서사의 끈으로 이어진 연작 영화들로 넘쳐나고 있다. 간혹 관객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며 대중의 입으로 회자되는 단편 작품들이 나오기도 한다. 더욱이 지난 세월 동안 생산되어서 축적된 것들까지 포함한다면 평생의 시간을 들여 화면 앞에 앉아도 세상의 디지털 영상은 다 보지 못할 정도이다. 그런데도 잠깐의 쉼과 사색을 위한 영화 한 편을 추천한다면 이 영화를 추천할 것이다. 설령 이미 보았다 하더라도 한 번 더 보시라고.

 

본 사람에게는 추천한 이유를, 처음 본 사람에겐 그 감상을 안주 삼아 데낄라 같은 독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영화가 불후의 명작이거나 대단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이 이성적이든 감성적이든 간에 근원적인 질문 하나를 던지게끔 이끄는 힘이 있는 작품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한다. 제목에 천국이 있다고 해서 종교적인 영화는 아니다. 차라리 반종교적인 정서에 가깝다고 본다.

 

이 영화는 1997년 공개된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에서 로케이션한 토마스 얀 감독의 독일작품이다. 그 밖의 영화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 포털에 잘 소개되어 있기에 여기까지만 한다. 영화는 단순한 줄거리에 로드무비와 버디무비의 화법에 맞추어 적절한 코미디와 드라마, 총알이 난무해도 단 한 명도 죽거나 다치지 않는 피 없는 폭력과 젠더 감수성 풍부한 이들에겐 조금은 불편할 수도 있는 마초들에게 어울리는 대사와 장면들이 가미된 시퀀스로 이루어진 플롯으로 구성되어있다.

 

그 단순한 줄거리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주먹만 한 혹이 뇌에 생겨 뇌압으로 생이 며칠 남지 않은 급성 뇌종양의 마틴과 불치병인 골수암으로 시한부인 루디가 병원의 의사에게 이를 진단 받고 같은 병실에서 만나, 평생 바다를 보지 못했다는 루디의 말이 계기가 되어, 술에 취해 함께 바다를 보기 위해 길을 떠나기로 하고, 그 여정의 첫 시작부터 무모한 일들을 벌이고 그로 인해 이어지는 여타의 일들을 겪는 과정을 그린다. 끝내 서로 단짝이 되어 파도가 몰아치는 일몰인지 일출인지가 모호한 시점을 앞둔 바닷가에서 바다를 쳐다보다 생을 마감하는 마틴을 옆에서 바라보는 루디의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끝을 맺는다는 것이다.

 

이런 줄거리와 구체적인 플롯을 안다고 해서 이 영화를 보는 재미가 사라지진 않는다. 왜냐하면 영화는 오로지 마지막 엔딩 3분을 향해 집중되어 있는데, 그것이 설령 무엇인지 알아도 직접 보지 않고서는 그 감동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단순하고 감각적인 그러다 마지막 장면에 얻어걸린 감동을 선사하는 그런 작품으로 보면 큰 오산이다. 나름 의미심장한 상징과 메타포가 아주 정교하게 잘 짜여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을 알고 보나, 그런 것 다 무시하고 가볍게 따라가며 즐기며 보나 마지막에 묵직하게 밀려오는 감동은 매한가지이다.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이며 매력이다.

 

그래도 영화를 끌어가는 중요한 소재와 오브제, 그와 연관된 인상적인 대사 몇 개를 소개하도록 한다. 물론 더 중요한 것들이 있지만, 감상을 위해 빼도록 한다.

 

영화엔 프롤로그가 있는데, “I will Survive"란 곡 - “난 괜찮아”란 곡으로 소개되기도 한 - 이 깔리며 시작된다. 장사가 끝나고 청소하는 비질을 따라 여러 명의 남자 발걸음을 따라가다 ‘True Romance'라고 적힌 네온 앞에서 춤을 추는 무희들의 모습이 보이고 안무가인 듯한 이의 멈춤 사인 후에, “여긴 볼쇼이 극장이 아니라 창녀촌이야. 예술은 집어치우고 손님들의 성욕을 자극하라고.”란 말로 영화는 시작된다. 이곳은 영화에서 중요한 서브플롯을 만들어 내는 곳으로 쇼하는 매춘업소인데, 중요한 오브제인 트렁크에 돈 가방이 실린 벤츠 자동차가 첫 등장 한다.

 

영화의 오프닝엔 기차역에서 이동하는 전혀 상반된 이미지의 마틴과 루디를 소개하다 타이틀이 뜨고, 기차에 올라 담배 연기로 가득 찬 흡연 칸의 담배 연기에 질려 도망 나온 루디가 비흡연 칸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마틴과 마주 앉아 이곳이 비흡연 칸임을 알리지만 무시하는 모습으로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후에 각자 진단을 받고 같은 병실을 배정 받은 마틴과 루디, 서로의 처지를 확인한 마틴은 루디에게 “사형수 감방에 온 기분이군 아니, 쓰레기장인가?”라는 말을 뱉는데, 그 순간 둘 사이에 매달려 있던 십자가 고상이 수납장 위로 갑자기 떨어진다. 마치 계시처럼 그 충격에 수납장 문이 열려 그 안에 놓여 있던 'Toro' 데킬라 한 병이 그들의 눈에 들어오고 술병을 손에 쥔 그들의 여정이 시작된다. 이어 병원 주방, 지하 주차장, 도로, 강가, 주유소, 수트샵, 은행, 도로, 고급호텔, 시골길, 시내 길가의 바닷가 그림 앞, 약국, 터키 식당, 경찰과 갱단의 추격, 대치와 총들의 난사, 옥수수밭으로의 탈주, 공단 뒷길, 중고차 판매점, 마틴의 엄마 집, 도로, 국경, 주유소 편의점, 트루 로맨스(true romance), 지하창고, 해변으로 가는 도로와 그 끝, 모래사장으로 공간이 횡적으로 이동되며 그들의 길이 이어진다.

 

이 영화에서 자동차와 섹스는 중요한 의미 작용하는데, 그것에 대해선 각자 감상하며 유추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 밖에 약 처방전, 추락한 십자가, 데낄라, 소금, 레몬, 권총, 돈과 가방, 수트로 드러나는 패션, 버킷리스트, 이민자, 납치, 헬싱키 신드롬, 담배와 불꽃 등과 같은 것들이 풍성한 상징과 메타포를 만들어 낸다. 더불어 마틴과 루디 말고, 이 둘을 쫒는 두 개의 집단-매춘업소를 운영하는 조직과 경찰-을 대표하는 2명의 커플이 있는데, 이들의 캐릭터를 비교하며 영화를 감상하는 것도 또 다른 재미를 줄 것이다. 그리고 마틴과 루디의 여정을 약간은 떨어져 미소 지으며 지켜보거나 동행하는 사람들, 마틴의 엄마와 최후에 이 둘을 놓아주는 최고 보스의 입장을 상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인상에 남는 웃픈 장면 하나, 영화 말미에 마틴과 루디는 결국 제 발로 찾아간 매춘업소에서 잡히는데, 중간 보스가 그들에게 자신들의 돈을 내놓으라고 총으로 협박하며 이렇게 말한다. “돈의 행방을 말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이 말에 마틴과 루디는 웃음을 터트리는데 영문도 모른 채 다른 이들도 따라 웃는다.

 

중간중간 죽음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마틴의 모습이 비치는 장면들과 마틴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는 가슴 한쪽이 괜히 저리는 장면 빼놓고선 영화의 톤과 리듬은 가볍고 경쾌하지만, 그 가벼움과 경쾌함이 앞서 말한 장면들과 만나면서 전혀 다른 시너지를 발휘하며 마지막 3분 엔딩을 극대화하는 것을 보면, 이 영화가 얼마나 치밀하게 계산되어 구성되어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마지막에 조직의 최고 보스와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사로 영화 소개를 마친다.

 

“자네들 문제를 알고 있지. 계획은 세웠나?”

“바다에 갈 겁니다. 본 적이 없거든요.”

“바다를 본 적이 없다..... 그럼 뛰어. 시간이 얼마 안 남았거든. 천국에는 주제가 하나지 바다지. 노을이 질 때, 불덩어리가 바다로 녹아드는 모습은... 장관이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불은 촛불 같은 마음속의 불꽃이야.”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이 영화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처음 접했는지는 정확하게 생각나진 않는다. 단지 첫 관람이 인생의 급변기에 너무나 우연스럽게 이루어졌고, 영화를 본 후 엄청난 감정의 쓰나미에 휩쓸렸다는 것과 영화 초반에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기차역과 기차 차창으로 지나가는 풍경이 왠지 가본 곳 같다는 느낌이 들며 혹시 거기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었다는 기억만이 얼핏 떠오르는 걸로 봐서는 한국에 개봉한 1998년 시점 이거나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은 때에 서울이 아닌 다른 지방 어딘가에서 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98년은 외적이나 내적으로 큰 삶의 변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였고, 96년 중반에 혼자서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의 유사한 곳들을 기차 여행하며 돌아다닌 경험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사실 뭐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다. 단지, 98년이란 때를 언급하는 것이 필요해서 말을 꺼낸 것뿐이다.

 

이 땅에서 98년은 97년 IMF 사태 이후, 대중들의 머리에서 박정희 군사독재로부터 시작되어 만들어진 산업화 세대 신화가 국가부도란 초유의 사태로 산산이 깨져나가던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미 87년 직선제로 대통령이 선출되었고 문민정부를 지나며 군부 핵심인 하나회가 해체되면서 군부독재는 끝나고 제도적으로 안정적인 상태로 국민의 정부로 넘어가던 때였지만, 이전까지는 산업화 세대 신화는 아직 그대로 살아있지 않았나 싶다. 물론 87년 이후에 새롭게 만들어지기 시작한 민주화 세대 신화는 점점 더 그 위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하던 때이기도 하다. 그리고 25년 가까이 시간이 지난 2022년 지금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 민주화 세대 신화 역시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고 본다. 개인적인 의견으로 산업화 세대나 민주화 세대로 네이밍한 신화는 사실 없다고 확신한다. 삶을 위해 노동하고 자신과 가족, 가까운 이들이 좀 더 나은 인간으로서의 생존과 즐거울 수 있기를 바라며 염려하고 수고하는 다수의 대중이 있을 뿐이며, 그 네이밍으로 이득을 챙기며 재미 보는 이들이 있을 따름이다. 그들 뒤에 진짜 숨어있는 신화는, 식민지 시절 이식된 자본주의와 국가주의를 기반으로, 한국전쟁 이후의 만인은 만인에게 늑대일 뿐인 열악한 현실과 만난, 그 뿌리의 기원은 오래전인 가부장적 가족주의와 엘리트주의가 만들어낸 ‘현실제일주의 신화’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그것을 늘 국민의 이름으로 이런저런 이름을 바꾸며 재생산하여 대중의 머리와 골수에 각인시키려 애써왔고 여태껏 그것을 통해 꿀 빨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제 이런 것을 이용해 먹던 이들이나 가슴 깊숙이에서 허구임을 감지하면서도 따르며 그럭저럭 강박 되어 살던 대중에게도 그 유통 기한이 끝나가고 있다. 현실 그 자체가 전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치 영화에서 암세포가 숙주인 마틴과 루디의 머리와 골수에서 기생하며 마구 증식하여 숙주마저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여기서 자유로운 이들이 과연 있을까? 이와 같은 현실은 비단 이 땅의 사람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양상을 조금 달리할 뿐, 전 인류적 문제이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현실은 그 현실을 멈추고 다른 무엇을 위해 나서지 않는 이상 현실로서 끝까지 남는다. 길을 떠나야 한다. 그건 누군가 대신해줄 수 없는, 직접 걸어서 나아가야만 하는 행위이다. 절망적이긴 하지만 이 현실 덕에 우리는 이미 시한부 선고를 받았고, 반드시 죽는다. 그래도 바다는 봐야 하지 않을까. 주위를 둘러보면 분명 손을 내밀고 끌어줄, 함께 걸어가며 서로 격려하고 동행할 벗이 있을 것이다. 혹시 모른다. 바닷가에 이르러 죽어가는 우리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봐 줄 새로운 인류가 이미 눈을 뜨고 있을지. 여행의 시작과 끝에 마틴과 루디가 서로가 격려하며 번갈아 던진 “두려울 것 하나도 없어!”란 말이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글을 마무리하며 다시 한번 스스로 질문한다. 익숙했던 삶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는데, 과연 내게, 우리에게 바다는 무엇이고 어떤 의미일까? 솔직하게 그 바다를 직접 본 적이 있었나? 그것을 보기 위해 자릴 박차고 떠날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하고 망설이고 주저앉는다면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최철 | 사실연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