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나는 누구인가- 동양사상을 중심으로 본문

연구원들의 이야기/오세철의 글모음

나는 누구인가- 동양사상을 중심으로

사회실천연구소 2015. 1. 19. 22:08


동양사회에 대한 서구사회의 관심은 순수한 관심도 있지만 강대국으로서의 중국, 일본, 그리고 강대국으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라고 볼 수 있다.

 

사예간(D.Shaygar)은 그를 오늘의 도전과 문화적 정체성”(동아시아 문화연구, 16, 1977, 31-44)에서 다음과 같이 동·서양을 비교하고 있다. 서구 사상의 진화에 있어서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그 중심이 지능에서 본능으로, 종말론에서 역사로, 영혼에서 이성으로, 자아를 절대에서 상실되는 무아의 영성으로부터 신과 자연에 대항하는 강한 긍정으로 보는 반면, 동양 사상에서의 인간은 다면적 우주이며 세계는 이성과 투영이나 수학적·물리적 논리의 망이 아닌, 객체의 객관화로 나타나지 않는 전체로서의 존재라고 보고 있다. 동양과 서양 사회의 차이를 내 나름대로 몇 가지 정리해보고 몇몇 학자의 견해를 살펴보기로 하자.

 

첫 번째는 인간의 평등과 계급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다. 서양은 인간이 태어날 때 불평등하게 태어난다고 보아왔다. 타고난 인간성과 관련 없는 구조적 조건, 보기를 들어 부모의 계급, 재산 등과 같은 외부적 조건이 인간의 불평등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적 불평등을 인간이 살아가면서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생겨났으며, 이는 그들의 양심으로 부르짖어지든지, 아니면 혁명과 같은 구조적 탈바꿈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구조적으로 얽매인 불평등을 비인간화로 보고 계급 현상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려는 흐름이 생겨났다. 이는 구조 변동을 통한 사회변혁이라는 구조적 결정론이며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왔다.

 

반면 동양에서는 보수적인 공·맹 사상이나 혁신적인 노·장 사상이 모두 인간의 평등의 문제를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유가에서의 성()이나 도가에서의 도()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모두 평등하게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사물을 판별할 수 있는 마음이나 도를 지니고 있는데 실제로 현실세계에서 드러나는 계급·계층의 현상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그 마음을 닦는 차이에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내면적 차이(도덕적 수양)가 인간이 사회에서 형성되는 계급·계층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적으로 높은 계급·계층에 있는 사람은 당연히 도덕적 수양을 높이 쌓은 사람이라고 내면화시킨다. 이는 서양과 달리 내면적 결정론을 의미하며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발생했을 때 이를 좁히는 구조적 변혁을 위한 실천을 하지 못하게 하는 수동성으로 표현될 수 있다.

 

물론 동양의 이상은 높은 계층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깨달아 내면적 마음 구조의 차이를 만드는 것일 것이다. 이 때에 모든 사회구성원은 도덕적 수양의 차이를 스스로 인정하고 끊임없이 그 차이를 좁히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당위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동양의 문제는 겉으로 드러난 계급·계층의 차이를 마치 내면적 수양의 차이로 돌리는 내면화가 일어나기 쉽고 이러한 심성이 굳어지면 막연하게 기다리거나 초월적인 힘(천지개벽 등)이 문제를 해결해 주겠지 하는 심성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잘못되면 무조건적 복종이나 주술적 경향을 불러일으킨다. 권위주의, 독재, 파시즘 같은 문제는 이러한 동양의 평등사상과 무관하지 않다. 이를 우리는 자연적 평등사상이라고 부르고 평등해야 한다는 서양의 당위적 평등사상과 대비시키고 있다.

 

두 번째로 비교할 것은 동서양 사회의 발전의 논리이다. 서양의 발전의 개념은 변증법 논리 위에 기초하고 있다. 세상이 인간(주체)과 자연·사회(객체)로 구성되어 있다면 그 구성요소 사이의 모순과 갈등의 관계를 인식하고 그 관계를 적극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생물학적 조건의 차이를 비롯하여 심리적 차이, 이해관계의 차이에 이르기까지 항상 대립과 갈등이 존재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참여를 강조하는 민주제도일 수도 있고 더 근본적 모순과 갈등을 해결하는 뿌리로부터의 혁명적 투쟁일 수도 있다. 또한 인간과 물질 사이에도 대립·갈등이 존재하는데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한 것이 과학의 발전과 산업화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서양에서의 발전 개념은 양적 기준으로 보는 성장이 아닌 모순·갈등을 넘어서는 정신과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된 제도와 사회의 변동이다. 물론 서양은 상대적으로 인간과 물질의 관계보다 인간고나 인간의 관계를 소홀히 해 왔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반면 동양의 발전의 논리는 궁극적 화합에 기초를 둔 음··태극 사상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물질의 궁극적 화합을 그 사회의 발전으로 본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궁극적 화합에 대한 해석이다. 만일 이를 적당한 타협이나 얼버무림, 또는 강제적 억압에 의한 동질화나 일체감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동양 사상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것이다.

 

궁극적 화합은 항상 갈등과 대립 그리고 모순을 전제로 한다. 갈등의식이 없이는 서로를 넘어서고 스스로 극복하는 긍정적 화합인 태극에 다다를 수 없다. 보기를 들어 가정의 화합을 생각해 보자. 이를 표면적으로 해석하면 아버지의 권위가 적당히 누르면 된다든지 또는 어머니 주장이 적당히 지배하면 된다든지 하면 화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진정한 화합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갈등, 부모와 자식의 갈등, 형제의 갈등을 깊이 인식하고 난 뒤 서로가 가정의 총체적 발전을 위하여 노력할 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동서양 사회의 가치관의 변동의 문제이다. 가치관을 부성적 가치와 모성적 가치로 구분되는데 부성적 가치는 힘을 바탕으로 한 수직적 가치관이고 모성적 가치는 사랑과 정을 바탕으로 한 수평적 가치를 뜻한다. 서양 사회는 이 두 상대적인 가치가 교차하면서 변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암흑시기(A.D.400-1000)에는 모성, 후기 중세(1000-1400)에는 부성, 문예부흥기에는 모성, 루터의 개혁시기에는 부성, 계몽주의 시기에는 모성, 빅토리아 시기에는 부성, 그리고 1880년부터 100년은 모성,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서서 다시 부성이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시대구분은 거친 것이지만 대체로 서양사회는 근세에 들어 100년 주기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부성과 모성이 교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성이 꽃피는 초기에는 순수한 형태의 인본주의로 나타나는데, 후기에 들어서서는 모성이 변질되어 도덕적 타락이나 쾌락주의로 나아간다. 이 때 타락한 모성을 바로잡는 순수한 부성이 나타나며 인간의 합리적 이성에 호소하게 된다. 그러나 부성이 오래가면 권력의 부패로 변질되기 때문에 다시 이를 바로잡는 순수한 모성이 출현하는 변증적 과정을 밟게 되는 것이다.

 

반면 동양사회는 지금까지 부성과 모성이 강하게 공존해 온 역사적 과정의 특성이 있다. 동양을 부성의 가치만이 지배한다고 보는 것도 동양의 숨겨진 본질인 모성을 보지 못하는 표피적 관찰이다. 따라서 동양사회의 가치관의 기본구조가 흔들리지 않으려면 부성을 강하게 하는 것(보기를 들어 충효사상, 권위주의 등)이 아니라 산업화, 자본주의화의 과정에서 잃어가는 모성((), 신의 등)을 되살리는 것이 길이다. 


흔히 동양을 전근대성·보수성·원시성의 구조를 가진 사회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이는 동서양을 비교문화적 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단견과 편견이라고 볼 수 있다. 가족을 통한 생활방식 자체에서 동서양 사회의 근본적인 차이를 밝힌 슈(Francis L.K. Hsu)는 가족의 중요성을 새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과 그 동료와 맺어지는, 또 그들을 통하여 자신의 부분으로 존재하는 사회를 지배하는 생각과 행동의 전반적 유형과 연결짓는 관계의 원초적 망이라고 본다. (나는 가족의 주제를 다음의 핵심주제로 더 깊이 다룰 것이다.)

 

가족의 유형을 네 가지로 구분한 그는 부자(父子)관계를 중시하는 A유형(중국·한국·일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의 생활방식을 영속성, 포괄성, 상호의존성으로 분석한다. 부부중심의 서구사회는 B유형, 모자중심의 무슬림·힌두사회를 C유형, 형제 중심의 아프리카 사회를 D유형으로 설명한다. A 가족유형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 성장경험이 복수 중심적이어서 세상을 절대적 기준으로 보기 보다는 상대적 관점에서 보려하고 추상적 쟁점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족 안에서의 진정한 단합이 중요하기 때문에 새로운 통치자가 개인의 사생활이나 관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치적 변화에서 개인을 고려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동양의 정치조직이 서방국가와 대면했을 때 무기력하게 보였다고 말한다.

 

변동에의 원동력이 대체로 결여되어 있는 동양사회의 특성도 가깝고 영원한 인간의 유대가 사람들로 하여금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그리고 물리적으로 아직 경험하지 않은 미지의 길로의 탐험을 막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추상적이고 직접 이해할 수 없는, 현실과 괴리된 이념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경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가 변동의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경우에는 불가피한 확장을 강요하는 인구의 증가가 있거나 외부의 압력과 침략이 있는 경우이다. 군사적이나 문화적인 외부의 압력에 대항하여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동양 사회의 기본적인 단합 때문이며 비록 정복당했다 하더라도 전통적인 요소와 이질적 요소 사이의 새로운 통합을 통하여 쉽게 회복된다. A형 가족제도의 사람들은 이질적 요소의 강압적 주입에 대하여는 무장 항거보다는 조심스럽고 지속을 통하여 그 강압과 효과를 무산시킨다. 이러한 생활방식의 강한 힘은 죽은 자와 산 자와 태어날 자 사이의 영원한 단합에 있다. 그들은 지속의 과정 속에서 조금씩 변모할 뿐이다. 현란하고 급격한 변화는 그 뿌리가 약하여 오히려 문화의 지속을 공고하게 한다. 이러한 유형의 사회(동양)는 정복·자원의 고갈 같은 물리적 수단을 통하거나 심지어 생활방식을 외부의 압력에 종속시킨다 하더라도 쉽게 소멸되지 않는다.

 

한편 일본사회에 대한 구조적 분석을 통하여 일본의 틀 조직(frame oragnization) 성향을 설명하는 나카네 지에의 견해에 대하여 드보스(George A. Devos)는 가족 내에서의 상호의존성을 계속적으로 강조하는 일본인의 사회 경험이 뒷받침하고 있음을 심리인류학적 관점에서 보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일본인은 자선적인 기대감이 충족되지 않을 때 외부사회나 특정 개인을 비난하기를 꺼리는 문화적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사회적 항거를 경원시하는 심리적 메카니즘을 지니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는 일본문화가 근대화를 수행하면서도 일본적인 것이 산업화된 서구의 과학적이고 미학적인 전통을 흡수하고 법·제도·기술의 변화를 가져오면서까지 지속하는가를 들여다본다. 인생의 후반부에 학습된 의식적인 사회적 태도와 이념이 가족 내의 초기 사회화 과정에서 학습된 깊숙한 정서적 반응보다 빨리 변할 수 있음을 심리적 지연이라고 부르는 그는 의식적 태도 밑에 깔려있는 일본인의 정서적 생활을 분석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현대 일본인의 사회적 역할 행위를 분석한 와가츠마(Hirosh Wagasuma)변화하는 일본의 지위와 역할: 심리문화적 연속성”(1973)이라는 글에서 성취·능력·책임·통제·경쟁·협동 같은 도구적 행동유형은 과거 일본문화에서 발견되는 것과는 조금 상이하지만, 서구의 근대화의 행위와도 일치하지 않으며, 자기표현·애정·조화·자애 같은 행동유형과 도구적 행동유형이 일본문화에 의해 사회화되어온 일본인의 대인적 욕구 측면에서 보았을 때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중국에서도 사람들은 집단 문맥을 떠나서는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고 믿게 되는 어린 시절과 성인 시절의 사회화 과정 속에서 체면의 손상을 개인적 문제로 보지 않고 전체 집단의 불명예로 보는 심리적 메카니즘을 지니고 있다. 미국인과 중국인을 비교한 슈(Hsu)는 중국인의 복종지향성이 서양에서의 타자지향성과 동일시되거나 중국의 생활방식을 산업사회 이전의 유럽사회로 해석하는 견해를 비판한다(그의 미국인과 중국인(1970)). 그는 리스만(David Riesman)의 견해에 대하여 두 가지를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첫 째는 복종에의 지나친 강조가 극단적 자주라는 불가피한 부수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자주적 인간은 자기 위에 있는 자와 같아지려고 애쓰고 있는 동시에 자기 밑에 있는 자에 대한 부단한 방어의식을 가지는데, 항상 동료와 경쟁해야 하며, 지위부여집단에 소속해야만 하고, 그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게임의 관습이나 열망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면지향성이 타자지향성과 역함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함수관계에 있다고 본다.

 

둘 째로 슈(Hsu)는 중국이 전통지향성이 아니라 타자지향성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다. 다만 타자로부터의 신호가 먼 서양의 경우 멀거나 가깝고, 그 원천이 다양하며, 그 속도가 빠를 것이 아니라 복잡한 수신장치가 필요없는 문화적 단조성에서 온다고 그 차이를 분석한다.

 

중국인에게 계급의 문제는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구분을 부정하고 고전을 설립한 자와 나머지 민중의 두 계급으로 분류한다. 근본적 계급구분은 사람들이 계급이라는 생각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중국인의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접근도 세속적인 것에 대한 접근과 동일하다고 본다. 그들은 당장 부딪힌 곤경에 대하여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도움을 받는 한 어떠한 초월적인 힘에도 의존한다. 중국인의 종교의식은 점(다신론이다. 중국인은 초자연적 존재의 공존을 믿으며 신의 선과 악을 동시에 믿는다. 막스 베버(Max Weber)가 서구의 자본주의와 합리성을 중국문화의 비합리성, 신비주의, 물확성과 대비시킨 것은 인종주의적 오류라고 비판한 그는 신교윤리와 자본주의의 발전과의 인과적 관계(또는 친화적 관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를 서양의 기본적 생활방식인 개인주의적 지향성의 결과로 해석한다.

 

슈가 지적하는 또 하나의 심리적 요인의 비교는 민중과 권력층과의 거리감이다. 민중과 정부와의 관계가 중국의 경우 존경과 거리감으로 표현된다면, 미국은 평등과 동일시로 표현된다고 본다. 민중은 관료를 사랑하지도 않으며 증오하지도 않는다. 관료의 종교와 도덕은 그들의 문제이고 민중이 관여할 필요가 없으며, 어린이의 교육과 처우는 민중의 개인적 문제이므로 정부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중국인은 가정을 떠난 더 넓은 세상에서의 사람들과 사물들 사이의 사회적이고 정서적인 안정을 구태여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중국 왕권의 근거는 합법성이나 쟁점보다는 항상 당연지사로 다루어져 왔다. 지식 관료들이 바뀐 왕권에 충성을 하는 것이 변절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중국인의 계급·성공·영웅·정치에 관한 관심은 원초적 인간관계의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한정되어 있고, 통치자가 전통과 관습에 따라 다스리는 한 그저 순종할 뿐이다.

 

지금까지 동양 사회가 지니고 있는 구조적 특성을 서양과 비교했는데 한국인에 대해서는 나는 누구인가(4) - 한국인을 중심으로에서 자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동양의 전통문화(사상)가 이른바 혁명이후(그것이 부르주아 혁명이든 사회주의 혁명이든 간에) 어떻게 지속되는지를 중국의 마오사상의 보기를 들어 설명함으로써 동양 사상의 끈질긴 심리적 영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이 사회주의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의 한 유형인가에 대하여는 연재글 (12) 자본주의(세계)(13) 혁명,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더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인간의 사상은 그의 모든 심적 활동, 행동의지와 행위를 지칭하는데 인간의 행위는 사상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올바른(정치적) 사상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영혼이 없는 사람으로 여긴다. 따라서 마오주의(Maoism)라는 용어는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첫 째는 모든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으로서 사상의 개념을 고려에 넣고 있지 않고, 둘 째, 주의(ism)라는 말이 중국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따라서 마오사상이라는 용어는 개인숭배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의 이론과 실천의 종합이며 둘을 용해시키는 힘이다. 그들에 의하면 사상은 독립적 존재로서 맑스(K.Marx)의 상부구조 개념 안에서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다룰 것이다) 즉 사상은 반드시 경제적 토대에 따를 필요가 없으며 사회주의가 자동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을 창조하지 않는다. 인간의 정신 상태는 그가 사회계급에서 가지는 성원자격을 결정하는데 맑스주의자로 변화된 부자는 프롤레타리아이며 옛날 관습에 매달리고 있는 빈농이나 노동자는 부르주아에 해당된다고 본다.

 

모든 물질적 장애를 극복하는 주체적 능력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 째는 인간의 힘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인간 자원을 지나치게 혹사하는 문제와 맑스주의와의 이론적 충돌을 가져온다는 점이며 둘 째는 유교와 신유교가 말하는 마음()의 개념과의 유사성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가 더 이상 외부세계에 존재하지 않고 마음()자체라고 하는 왕양명(1492-1529)의 사상은 마오사상과 극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하나는 객관적 진실이나 원칙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완전성이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것으로 이념적 자기규율에 의해 평등주의가 유지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지식과 행위의 통일(知行合一)을 주장함으로써 올바른 사상을 통해 객관적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신유교와 마오사상의 차이는 마오사상이 형이상학의 체계가 아니라 당에 개인을 연결시키는 수단이며, 신유교의 마음()이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라면 마오사상은 투쟁의 수단으로 자연과 사회적 환경을 변화시킨다는 점에 있다.

 

중국에서 지성사를 더듬어 볼 때 독창성보다는 종합을 더욱 바람직한 것으로 본 것을 알 수 있다. 공자도 그러했고 마오도 그러했다. 물론 전통문화에 대한 중국 코뮤니스트의 태도를 이중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전통의 철저한 파괴로 해석하는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체로 중국에 대한 학자들의 인식은 전통과의 연계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전통 중국 사상 중에서 유교와 도교가 강조했던 조화와 고요라는 유산은 버려야 할 유산으로 중국 코뮤니스트들은 보았다. (), 충성심, 이타심은 오히려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부자, 그리고 가난한 사람을 다스리는 사람과 인민 사이의 관계를 조화시키려고 했다는데 문제가 있다고 보았으며 도교에서 궁극적으로 반대가 사라진다는 주장도 변증법의 입장애서 배격되었다. 마오는 모순의 끊임없음을 강조하면서 현대 수정주의자들이 모순의 법칙에 대한 맑스주의의 가르침을 왜곡시켜 모순의 조화를 강조했다고 비난하였으며 인간 본성에 관한 이론을 추상적 수준의 친애감으로 대체시킴으로써 계급 분석과 계급투쟁의 관점으로부터 이탈하고 있음을 경고하였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형제라는 대동(大同)은 유교의 슬로건인 동시에 코뮤니즘의 원칙으로 존재하는데 이는 19세기 말 강유의가 부활시켰으며 마오사상의 뿌리가 되었다. 먼로(D.J.Munro, 그의 책 초기 중국에서의 인간의 개념, 스탠포드 대학교 출판사, 1969)는 전통 중국 사상의 의식적인 유산으로서 음양오행설(陰陽五行設)에 기초한 초보적 유물론, 무신론, 그리고 미완성의 변증법을 들고 있는데 음양철학과 변증법은 비슷한 구조로 인식되기는 하나 음이 양의 반대가 아닌 보완물이나 반영으로 보는 점이 다르다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변증법은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며 마오에 있어서 모순도 사물 사이가 아닌 사물 안에 내재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또는 그는 무의식적 유산으로 도덕적 훈련으로서의 교육이 인간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열쇠라고 말한다. 교육을 통하여 사회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고 이상적 인간으로서의 모범을 닮음으로써 새 인간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모범닮기가 옛날 중국 사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모범 사이의 경쟁이 강조된다는 점이다. 모범은 통치자들이 대중이 배웠으면 하는 덕이나 행동의 표본으로서 유일하게 제시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며 구체적으로는 전문기술과 혁신적인 능력을 나타내는 표본을 만드는 작업이다.

 

도덕적 훈련으로서 교육이 지니는 의미는 기존하는 규범에 대한 인민의 태도를 바꾸게 하는데 중점을 둠으로써 통제를 내면화시킨다. 공자는 올바른 정신의 탈바꿈이 행동으로 나타난다고 하였으며 왕양명도 지행합일과 중국 코뮤니스트의 자원주의(volutarism)는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는 이론과 실천에 대한 마오사상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이론은 몇 가지 방식으로 실천에 의존한다. 첫 째, 실천은 이론보다 우선한다. 왜냐하면 한 인간의 사상의 범위와 성격은 그가 세계와 맺는 상호작용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실천적 활동의 원초적 국면은 생산이며 사회적 실천은 계급투쟁, 정치 활동, 그리고 과학적, 예술적 추구를 포함한다. 둘 째, 개별 이론은 실천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사물에 대한 지식은 그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의 경험을 통해 습득되기 때문이다. 셋 째, 이론은 자기의 생활을 개선시키려는 능력으로부터 인간을 위한 가치를 창출하는데 이는 이론이 실천으로부터 나오며 실천을 통하여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론과 실천의 합일은 두 가지 방식으로 성공적인 행동을 유발시킨다. 하나는 교조적이며 주관적인 정책의 준수에 반대하는 경험과 객관적 조건을 강조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잘못된 정책을 올바른 정책으로 전환시켜 상황발전에 상응하는 정책 변화를 유도하게 한다.

 

또 하나의 무의식적 유산으로는 인간이 자연스럽게 덕스러운 모범에 이끌린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맑스주의와 다시 모순을 일으키는 문제를 스스로 안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중국의 전통사상과 마오사상이 인간관에서 어떻게 결합하며 또한 단절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 사회에 있어서 전통문화의 지속과 변동은 인간을 보는 관점에서 공통적 기반을 지니는 측면과 전통적 인간관의 극복이라는 다른 측면을 함께 살피는 일이다. 인간의 사회성, 즉 인간의 본질이 타고난 자연적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본질 속에 들어있다는 사상의 지속성이다. 유교학자들이 줄곧 주장했던 것은 개인의 신분이 그가 소속한 집단에서 유래했다는 점인데, 이를 넓혀서 해석한다면 개인의 감정, 목표, 기술, , 그리고 지식이 사회적 생산물이고 집단에서 유도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맑스주의자들도 마찬가지로 개인을 완전하게 설명하려면 소속 집단이 변화되어도 그 집단에 대해서 계속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의 사회성에 대한 인간관의 공통적 기반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가변성에 대한 견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중국에서는 인간의 본질적인 사회성에 대하여 과거와 현재 사이에 보존의 연속성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맑스이론이나 소견의 이론을 뛰어넘는 현대 중국의 인민이해는 사람들의 개성과 능력이 무한히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유학자들의 견해는 인간 본성이 선천적이고 변화될 수 없으며 교육적 가능성을 제한하는 인간 속성이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인간성과 같은 것이 있는가? 물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것에만 존재하고 추상적인 것에는 인간성이 없다. 계급 사회에서는 계급의 인장이 찍혀있는 인간성만 존재한다. 계급을 초월한 인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도널드 먼로 지음(김덕중 옮김), 현대 중국의 인간이해, 서울:청사, 1982:47)는 말과 같이 인간성에 대한 불변론과 일원론을 배척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중국의 경우에는 같은 계급 내의 동질성에 대한 맑스주의자들의 전통적인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인간성의 본질을 이해하는 유교적이며 마오주의적인 관점은 정부가 어떤 형태로 존재해야 정당한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부가 자신의 의무를 실행하는데 어떤 방법이 정당한지를 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결합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결합성은 세 가지 정신 현상, 즉 인식, 감정, 그리고 행동의지의 결합을 뜻한다. 결합성은 모든 전통적인 중국학자들의 인식에 관한 토론에서 명백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도교와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정신에 대한 토론에서도 분명하지 않고 모든 유교원전에서도 우연히 접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근세 이전 수세기 동안 맹자와 주희의 저작 속에 나타나거나 정이(程頤)와 같이 주희에게 영향을 주었거나 왕양명 같이 맹자로부터 영향을 받는 저자들의 저작에서는 나타난다.

 

우선 인식과 감정의 결합으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중요한 결론은 도덕적 법칙에 대한 인식이 자신을 위하여 받아들이려는 것이며 이를 찬성하는 감정도 바로 그것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 한 가지의 결론은 유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마음의 가장 중요하고 뚜렷한 목적은 다른 존재들에 대해 감정을 갖는다는 것이며 그 감정들을 자신의 자아로 하여금 개개의 주체를 넘어 구체화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행동을 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은 방해받지 않을 때 인간관계의 조직 속에서 개개인의 위치가 존재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인간 마음에 관한 유교적 개념이 인간의 편협한 본성을 강조하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유산 속에 있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인 입장에 서도록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또한 유교에서는 인식과 행동의지 사이에도 결합성이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주나라 시대의 사상에 뿌리를 둔 의() 개념이 이를 말해준다. 즉 의는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생각뿐만 아니라 행동 판단에 따르는 책임에 대한 인식도 의미한다는 것이다. 참된 지식은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사상도 인식과 행동의지와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몰론 결합성 속에 포함된 심리학적 사실들의 상세한 구성요소에 관하여 유교는 중국의 맑스주의자들과 다르게 설명하지만, , 감정, 의지 등의 마음의 구성요소가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믿음은 둘 다 같이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현대의 중국철학자와 심리학자들은 인식과 감정을 결합시키고 있다는 뜻이다. 마오는 인식과 감정이 이론적으로 구분되어야 하지만 둘은 나란히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하면서 감정도 계급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그는 다른 맑스주의자들과 달리 모든 마음속의 활동들이 계급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중국에서 심리적 사실이 계급의 표시라고 말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째, 어떤 신념이나 감정이 본래부터 한 인간의 의식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며, 둘 째는 인간의 계급의식이 많은 심리적 활동을 조절한다는 것이다. 이는 동기, 목표, 사유, 신념 같은 마음 속 활동이 집합적인 계급의식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하나의 연결고리로서 이해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인식과 행동의 관계에 대해서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중국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인 차이에 대한 공자의 말을 잘 알고 있는 중국인은 그 차이를 노동이라고 말하는 중국 맑스주의자들의 견해에 별로 놀라지 않는다. 현대 중국의 심리학 저술에서는 인간의 본성으로 사상의 두 가지 특성을 강조하고 있다. 첫 째, 사상은 다른 동물들이 얻는 것으로는 가장 높은 수준인 지각에 의해 얻는 지식보다 더 높은 수준의 의식이다. 왜냐하면 사상도 사물의 본질이나 내부 모순을 변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 째, 사상은 선악의 평가에 따라야 한다. 그런데 생리적인 반사작용은 그렇지 않다. 중국인들은 인간의 독특한 활동은 윤리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가변성은 인간의 마음에 있는 모순되는 생각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차원에서 논의되었는데 그 해결은 무엇보다도 긍정적인 면을 재강화시킴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고 중국인들은 보았다. ‘자아개조라는 말은 도교와 유교의 수신자화(自化)’라는 용어와 비슷한 점이 있다. 차이점이 있다는 현대 중국에서는 공식적인 외부의 교육기관의 요구에 순응하는 정도가 큰 반면 전통사상에서는 개인적인 의무에 의존하는 폭이 넓다는 점일 것이다. 중국인에게는 올바른 사상, 소망과 같은 내적 요인들이 물질세계를 변화시키는데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지만 현대 중국 사상은 전통적인 유교학자들과는 달리 인간이 태어날 때 선하거나 악한 본성을 지니지 않고 객관적인 환경이 주는 교육에 달려 있다고 보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교육의 기적에 대한 신념은 그들 선조와 마찬가지다.

 

인간관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이 전통 중국과 현대 중국에서 지속성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정부의 기능과 학교의 역할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유교적인 용어에 있어서 교정 행위는 본래의 성격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조금 더 소망스러운 개인의 특성을 갖추는데 있어서 선천적인 장애요인은 없다고 본다. 또한 유교는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주요한 속성, 즉 모든 사람이 배울 수 있다는 천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믿음은 국가양성이 성공할 수 있다는 신뢰성을 심어주었다. 따라서 인간에게 선천적인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게 선천적인 결합이 없기 때문에 진실을 이해할 수 있는 잠재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낙관적으로 평가한다. 이러한 잠재능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통치자들에게는 대중을 학습시킬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유교에 있어서 연약함 속에 강력함의 근원이 있다는 원칙은, 외형적으로는 약해보이나 실제적으로는 덕망 있는 통치자가 모범이 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끌고 강대해질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였으며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통치자의 의무라고 기록하고 있다(도널드 먼로, 현대 중국의 인간이해, 1982, 148)

 

통치자가 그의 방법들이 법과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선과 공정의 도움을 추구할 때는 그에게 명성을 확보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그것이 대다수를 움직일 수는 없다. 만일 그가 국민을 개조하고 그들의 방식과 관습들을 완전하게 하기를 원한다면, 학교 수업으로부터 출발해서는 안되는가? 아직 갈지 않은 옥은 쓰기 좋은 그릇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만일 사람이 배우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가야만 할 길을 알지 못할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해서 고대의 제왕들은 국가를 세우고 국민들을 통치할 때, 교육을 시키고 학교를 짓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또 하나의 유교의 전통은 정당성의 기준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이다. 신유교에 있어서 성인(聖人)은 마음속에 사실과 가치가 항상 적절하게 결합되어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기준은 그대로 중국에서 지속되었다. 하나는 홍()과 전()의 결합으로 나타났다. 혼과 전을 이분법으로 보고 이를 대립적 관계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이 중국학자들의 보편적인 견해이다.

 

혼과 전은 관계는 상대적인 것들의 융합이다. 그들은 밀접하게 연관되고 나누어질 수 없다. 그들은 서로 물리치지 않는다. ‘은 정치이다. 그것은 모든 과업의 전신이고 지도자이다. ‘은 전문적인 직업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도구이고 무기이다. 이 두 가지는 밀접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그들의 위대한 효용성을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노동자 계급의 지식인들이 발전시켜야 할 재질과 미덕을 결합시키는 기준이다.”(투 웨이밍, “유교: 현대의 상징과 본질”, 윌슨 등, 중국 사회의 가치변동, N.Y:Praeger, 1979, 23-25)

 

또 하나의 기준은 더 적지만 더 좋은(少而精)”이라는 구호로서 대중화되었다. 중국은 문화혁명 이후 학교에서 노동으로 대체할 수 있는 학술적 과목을 없애지 않았다. 정규 문화과목에 적어도 90% 이상은 교내에서 수업하도록 하였는데 전형적인 도시 중학교의 교과과정은 다음과 같아. (1) 수학, 언어, 물리, 화학, 역사, 지리, 체육 (2) 일반 정치, 농장, 공장 작업, 혁명적 예술문화 학습, (3) 마오 저작 학습이고 1년에 8주일은 농장이나 공장에서 작업하는 등 노동경험이 모든 학생에게 요구되며 변증법적 유물론을 구체적으로 교육한다는 기준도 만들었는데 결국은 모든 대중에게 모범이 될 수 있는 인간 양성에 그 정당성의 기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모범 경쟁이론은 전통적인 중국 철학에 강한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맑스주의 인식론과도 같은 것으로 인식되어 있다. 이를 중국식으로 해석할 때 인간은 물질의 표본을 실천 속에 노출함으로써 그 물질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유교적 전통에서는 인간 정신을 변형시켜 완전한 성격을 만들려는 방법에 대한 믿음이 인간이 배우는 방법에 대한 여러 가지 가정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 인간은 주로 모법을 모방함으로써, 비의도적으로 일어나거나 혹은 덕망 있는 모범의 태도와 행동을 모방하려고 의식적인 시도를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몸으로 가르치는 것이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 낫다(有敎勝於言敎)”는 격언이 오늘날 중국에서도 여전히 쓰이고 있는 것이다.

 

유교는 또한 인간의 정당한 목표가 모범을 찾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스스로 모방됨으로써 생기는 존경을 물질적 보상보다 더 좋아한다는 뜻이다. 도덕적 모범이 되는 것으로부터 쉽게 모범으로 모방될 수 있는 더 큰 기회를 주는 관직을 차지함으로써 덕망 있는 모범이 정치적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윤리학과 정치학의 결합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모범의 사용은 강제와는 반대로 설득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러한 모범이론에 맑스주의적 변증법은 모순하는 대립물에 따라 세계 속의 사물을 분류하는 영구적인 중국식의 경향을 강화시켜 왔다. 마오는 변증법적 용어로 모범과 경쟁자 사이의 불균형에 대한 인식과 그 뒤에 따르는 개선과 또 그 뒤에 나타나는 새로운 불균형을 설명하고 있다.

 

사용되는 방법은 비교이다. 동일한 조건아래 놓여있는 진보자와 진보자를 비교하고 퇴보자가 진보자를 따라잡도록 북돋는다. 그들은 한 모순의 두 극단이며 비교는 그들의 통일이다. 불균형은 기없들, 세계 상점들, 단체들, 그리고 개인들 사이에 존재한다. 불균형은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규칙이다. 끝이 없는 주기는 불균형으로부터 균형으로 그리고 나서 다시 불균형으로 지노하한다. 그러나 각 주기는 더 높은 발달수준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균형이 일시적이며 상대적인 반면에 불균형은 일상적이며 절대적이다.” (Ch’en Jeronme(eds.)Mao Papers: Anthology and Bibliology, London: Oxford Univ. Press, 1970, “Sixty Points on Working Methods”, 65-66)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우리는 전통 중국의 인간관이 마음사상과 현대 중국의 맑스주의와 변증법적으로 결합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인식, 감정, 행동의 결합성에 대한 총체적 이해와 모범을 사용할 인간양성의 실천은 전통문화의 지속적 국면을 잘 대변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_동양사상을 중심으로.hwp
0.04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