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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커(Joker)’, 돌아갈 수 없는 일상 본문

실천복간호/실천 복간 4호

영화 ‘조커(Joker)’, 돌아갈 수 없는 일상

사회실천연구소 2022. 9. 8. 02:44

영화 ‘조커(Joker)’, 돌아갈 수 없는 일상

이 글은 DC 필름스와 워너브라더스 등의 헐리우드 자본이 제작하고 배급한, 토드 필립스가 감독하고 호아킨 피닉스란 배우가 주연한 ‘조커’란 영화를 보며 들었던 감상과 그로 인해 추동된 생각을 정리한 글이다.

 

감상은 영화 제목이 주인공 캐릭터의 명칭인 만큼, 아서 플렉이라는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겪는 핵심적인 사건이 어떻게 그를 조커란 캐릭터로 변화시키는지에 몰입하며 보고 느낀 걸 정리할 것이고, 배경이 되는 고담시란 곳에서 주인공이 놓여 있는 현실로서의 상황이 과연 무엇인지를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추동된 생각은 영화를 여러 차례 반복해서 보고 이 글을 쓰는 때를 중심으로, 영화 감상자의 가까운 현실에서 이 영화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라는 것과, 그 성찰을 좀 더 확장해 현재 우리를 규정하는 보편으로서의 일상-자본주의에 이 영화를 통해 가질 수 있는 문제의식은 무엇일까를 고민해본 것이다.

 

이 글은 영화 감상문이나 리뷰, 또는 비평의 글을 목적으로 쓴 것은 아니다. 이 영화가 매개해준 여러 감상을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에서 지평을 넓혀, 지극히 글쓴이의 입맛대로 정리한 것이다. 물론 영화에 표현되지 않은 것을 글의 논리를 위해 멋대로 가공하거나 억지로 꿰맞추진 않았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은 있을 수 있음을 밝힌다. 인용한 영화의 대사는 국내에 개봉되었을 때 쓰인 자막을 기본으로 이런저런 인터넷 검색을 활용했다.

 

이 영화의 제목인 ‘조커’는 DC 코믹스라는 만화 시리즈물에서 구축한 세계관에 등장하는 악당 캐릭터의 명칭이다. 주로 배트맨 시리즈에서 고담시의 영웅처럼 그려지는 배트맨과 대척점에 있는 악당으로, 이 영화가 영웅이 아닌 악당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어서 주목을 끌었다고 한다. 그는 범죄계의 광태자(Clown Prince of Crime)로 불리며, 혼돈과 사악함의 숭배자이자 광기와 불확정성의 화신으로, 예측 불가능한 인물로 그려진다. 홀로 활동하기도 하지만 추종자가 많아서 언제든지 필요한 자본과 인력을 지속해서 활용하는 등 상당한 통솔력을 갖고 있으며, 그의 광기와 예측 불허함이 엄청난 싸움꾼으로 만들어, 의외로 다른 범죄자들조차 무서워한다. 고통을 느끼면서 즐거워하며 폭력을 즐기는 마조히즘과 사디즘을 동시에 느끼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고통을 사랑한다고 할 정도라서 신체적 고통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날뛸 수 있으며, 치명상을 입고도 재미있다는 듯 웃는 섬뜩한 모습으로 종종 그려진다고 한다. 말하자면 악당들의 영웅이다. 그래서인지 헐리우드 영화 배트맨 시리즈에서 조커 역을 맡아 연기한 이들은 연기파 배우인 시저 로메로, 잭 니콜슨, 히스레저 등과 같은 배우였다. 그만큼 표현이 까다롭고 반(反)영웅으로서 중요한 캐릭터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런 사전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도 내용을 따라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이 구성되었다. 오히려 ‘조커’란 말의 사전적 의미인 ‘우스갯소릴 잘하는 실없는 사람, 비격식으로 쓰일 때는 멍청한 사람, 트럼프 카드라고 흔히들 말하는 플레잉 카드놀이에서 52장 외 추가되는 2장의 엑스트라 카드로, 게임의 룰에 따라 와일드카드나 핸디캡 카드로 쓰이기도 함’이라는 말뜻을 염두하고 영화를 따라가는 것이 영화 감상에 더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아서 플랙이라는 주인공이, DC코믹스의 ‘조커’든 또는 자신을 조커란 상징의 이름으로 불리길 원한 인물이든, 다른 어떤 캐릭터로 변모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그리고 그가 원래부터 조커였으나 그 사실을 몰랐다가 스스로 각성했는지, 아니면 일련의 사건을 통해 평범한 사람에서 조커로 거듭났는지를, 과연 그것이 주인공에게 필연적인 과정인지 아니면 선택적인 과정인지를 지켜보라는 것 같다.

 

그러면서 묻는다. 당신은 과연 그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인가? 동정, 연민, 혐오, 비난, 동조, 공감, 처벌, 격리, 복수, 극형 등등 중에서. 재밌는 건, 이 영화는 철저하게 주인공에게 몰입되도록 잘 구성된 영화임에도, 보는 이가 스스로 주인공과 동일시하며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어려움이 있다. 비극성을 한층 극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주는 데 무심하거나 모호한 탓도 있지만, 주인공의 너무나 암담하고 꽉 막힌 현실과 거리두기 하며 위안하기에 바쁠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저 사람보다 정상의 범주에 있지 않을까? 나의 일상은 저 상황보다는 훨씬 좋은 거 아닐까? 나는 많이 다르지.’라며 그 거리감에 안심하면서. 하지만 과연 그럴까?

 

분명, 이 이야기는 비극이다. ‘비극은 보통보다 잘난 사람, 희극은 보통보다 못난 사람을 그리는 것’이라는 원칙을 틀어놓은 것 빼놓고선,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술한 ‘시학’이 논의하는 비극론을 교과서 삼아 모범 답안처럼 구성되었다. 이 영화로 시학을 가르쳐도 될 정도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 원칙도 어겼다고 단정 짓기 어려운 건, 주인공은 분명, 고담시의 가장 갑부이며 영향력이 큰 토마스 웨인-고대로 치면 최고 귀족 같은 위치의 사람-이란 인물과 어떤 연관이 있는데, 그 관계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토마스 웨인은 바로 훗날 배트맨이 되어 조커를 응징하는 브루스 웨인이란 인물의 부친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충실하게 따르는 ‘시학’의 비극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인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려 애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몰입을 방해하며 다른 목적을 추구하는 브레히트가 말하는 ‘소격이론’ 같은 걸 따르는 것도 아니다. 지켜보는 사람이 경험해야 할 카타르시스를 극 내부에서 주인공이 허물을 벗어 버리듯, 자신의 몸짓으로 휘발시켜 버리고선, ‘카타르시스는 개나 줘버리고, 나 어때?’라며, 오히려 오물 같은 불편함을 스크린 너머로 던지는 것 같다.

 

영화의 프롤로그는 한 남자가 분장실로 꾸며진 곳의 거울 앞에서 분장하다, 양 손가락으로 자기 입을 억지로 찢듯이 벌리고, 웃는 표정을 만들며 눈물 한 방울을 흘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마치 어느 대중가요의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냐~’라는 가사를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이어지는 장면은 그가 광대분장을 하고 고담시의 길거리에서 연주되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이다. 어느 악기사의 폐업정리를 알리는 ‘몽땅 팝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손 간판을 들고 흥겹게 춤추며 홍보를 하는 것인데, 그가 영세한 광대 이벤트 회사에 소속되어 불경기-이에 대한 내용은 뒤에 덧붙여 이야기할 것이다-에도 나름 열심히 일하는 서비스업 노동자임을 알 수 있다.

 

그런 그에게 한 무리 거리의 아이들이 다가오더니 손 간판을 뺏어 달아나기 시작한다. 그는 도움을 요청하며 아이들을 쫒지만, 아무도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위험한 도로 횡단을 하며 아이들을 쫒던 그는 골목길에 다다르고, 멈춰선 아이들에게 뛰어가는데, 숨어 있던 한 아이가 휘두른 손 간판에 맞아 쓰러진다. 손 간판은 산산이 부서지고 아이들은 쓰러진 그를 마구 구타하다 주머니를 뒤진 후 유유히 사라진다. 바닥에 쓰러진 채 고통에 숨을 몰아쉬던 그는 아픈 부위에 손을 가져가는데, 그로 인해 광대분장의 소품인 가슴에 달려있는 꽃장식에서 눈물처럼 물이 흘러내린다. 그리곤 ‘JOKER' 타이틀이 화면 전체에 삽입된다. 이 프롤로그는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와 결말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다음으론, 27분여의 런닝 타임 동안, 아서 플랙이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프롤로그 역시 그에 대한 소개인만큼 영화 전반 30여 분의 분량을 주인공의 상태와 처지에 대해 인물 탐사하듯이 보여준다.

 

그는 시에서 운영하는 시설에서 정기적으로 상담을 받으며 자신의 일기마저 보여줘야 하고, 7가지 약을 처방 받아야 하는, 과거 수감형 병원에 갇혔을 정도의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정신질환이 정확히 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는다. 단지 그가 지니고 다니는 그의 증상 카드에 적힌, ‘웃어서 죄송해요. 전 병이 있어요. 기분과 상관없이 갑자기 웃음이 터지는데 뇌를 다쳤거나 신경 문제래요. 감사합니다.’라는 글귀 외에 다른 내용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게 없다.

 

‘나의 죽음이 나의 삶보다 가치 있기를.’이라는 조크를 일기에 적을 정도로 그가 우울증 증세를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걱정할 정도로 늘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과 다른 이의 말에 대한 반응이 조금 다르다는 점, 화가 났을 때 혼자서 화풀이하는 것은 정신질환 범주에 넣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유추해 볼 수 있는 건, 이런 형편 덕에 그가 살아오는 동안 학교에서나 직장에서 의도하지 않게 다른 이들로부터 배제당해 왔으며, 그로 인해 겪은 일로 분노와 상처가 무의식에 쌓여있을 수는 있다.

 

그의 형편은 여유롭지 않으나 생계를 위해 영세한 광대 이벤트 회사에서 부당한 대우와 무시를 당하면서도 나름 열심히 일하며, 변두리의 허름한 임대 아파트에서 홀어머니를 부양하며 살고 있다. 모친은 자식에 대한 걱정보다는 토마스 웨인이라는 사람과의 연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활력이 없고 건강도 온전치 않은 상태다.

 

그러나 그에게도 꿈이 있다. 바로 코미디언이 되는 것이다. 늘 즐겨보는 유명한 TV쇼 ‘머레이 프랭크 쇼’의 앵커이며 코미디언인 머레이에게 중요한 존재로 인정받는 상상을 하며 행복해하고, 자신도 코미디언이 되고 싶어 틈틈이 아이디어 노트도 작성하고, 코미디 쇼를 하는 술집에서 다른 이의 코미디를 관찰하며 무대를 준비한다. 그의 아이디어 노트에 적은 조크 중에, ‘정신질환이 제일 나쁜 점은, 사람들 앞에서 아닌 척해야 한다는 거다’라는 말은 자신을 소재삼은 너무나 웃픈 말이다.

 

또한 그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마주친, 자신에게 머리에 손가락 총을 대고 당기는 조크 같은 행동을 해 준 여자를 선망하며, 그녀와의 친밀한 관계의 망상을 이어갈 정도로 심각한 외로움을 가지고 있다. 이상이 그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이다. 직장 동료로부터 권총을 얻게 되는 장면처럼, 중간마다 앞으로 벌어질 사건들과 밝혀질 장면들이 떡밥처럼 던져지지만, 그 내용은 생략한다.

 

그리곤, 본격적으로 결정적인 사건과 이어지는 일련의 일들이 충분한 개연성과 적합성이 뛰어난 음악과 함께 펼쳐지기 시작한다. 이후에 전개되는 영화는 마치 광대 일을 하는, 광대 그림이 그려진 조커 패를 든 아서 플랙이, 삶이라는 플레잉 카드 게임에 뛰어들어 자신의 패를 쥐고, 과연 어떤 게임을 할 것인지를 모여 주는 것처럼 진행된다. 그러나 게임의 룰과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 하지만 주인공은 끝까지 게임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과정은 플레잉 카드 게임의 4가지 패-스페이스(검)는 명예, 다이아(화폐)는 돈, 하트(성배)는 사랑, 클로버(곤봉)는 지혜-를 상징이라도 하듯 4가지의 카테고리로 4단계를 거쳐 전개된다. 살인의 4단계, 비극적 인식의 4단계, 사회적 고립과 상실의 4단계, 신체적, 정신적 일탈의 4단계가 그것이다.

 

살인의 4단계-영화 엔딩에서 다섯 번째 살인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있지만 구체적인 장면으로 보여주지 않기에 제외한다-는 방어목적의 우발적 살인, 끓어오르는 분노를 표출하는 복수로서의 살인, 냉정한 앙갚음으로의 살인, 대놓고 하는 공개 처형식의 살인이다. 이 배경과 대상에 대한 건, 영화 전체의 내용이기에 생략한다. 살인을 통해 아서 플랙은 조커가 되어간다. 살인의 성격은 각 과정마다 주인공이 뱉는 대사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데,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젠장, 빌어먹을.”

“내 웃음이 병 때문인 거고 내게 문제가 있다고 했죠. 없어요. 그게 진짜 나에요. 지금껏 살면서 단 1분도 행복하지 않았어. 뭐가 웃기게? 날 웃게 만드는 거? 내 삶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까 개(fucking comedy) 같은 코미디야.”

“머레이쇼 봐? 나 오늘 출연해. 미쳤지? 내가 TV에 나간다니. 괜찮아, 개리 (왜소증을 앓고 있는 직장 동료의 이름), 가도 돼. 널 해치진 않아. 개리 나 한테 잘해준 건 오직 너뿐이야”

“정신질환이 있는 외톨이를 무시하고 쓰레기 취급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 아? 내가 말해줄게. 바로 뒈져도 싼 놈이라고 하는 거야.”

 

첫 대사의 상황도 그렇고 사건의 경위도 우발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두 번째 대사는 정확한 대상을 가지고 있으며, 담긴 내용엔 긴 시간 누적된 감정이 담겨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뱉는 게 듣고 있는 당신 탓이라는 원망을 읽을 수 있다. 세 번째 대사는 두 사람 중 한 명을 잔인하게 해치고 남은 한 명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이라고 보기에 놀라울 정도다. 이처럼 남은 이를 안심시킬 만큼 차분하다. 네 번째는 생중계 TV쇼에 출연하여 앵커에게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에 한 말이다. 말을 끝내곤 확신에 차서 망설임 없이 격발한다.

 

인식의 4단계는 정신과적 상담이라는 형태로 진행된다. 첫 번째는 평상시에도 진행되었을, 고담시에서 운영하는 시설의 담당자와의 대화 중 다음의 말에서 드러난다.

 

“갈수록 세상이 미쳐가는 거 같아요. (중략) 병원에 갇혔을 때가 더 좋았어요. 누가 알겠어요? 약 늘려주라고 의사한테 말해 줄래요. 우울한 게 싫어서요.”

 

그는 약에 의지하여 겨우겨우 현실을 놓지 않고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처음 살인을 저지르고도 태연하게 진행되는 같은 상담사와의 대화인데, 사실 여기서 상담사가 그의 다음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응대했다면, 영화 내용은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내 말 안 듣지? 단 한 번도 귀담아들은 적이 없어. 일은 어때요? 부정적 인 생각을 해요? 내 머리 속엔 부정적인 생각뿐인데. 당신은 듣질 않아. 이렇게 말했어. 난 평생을 존재감 없이 살았다고. 하지만, 이젠 달라. 모두가 내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시설은 곧 폐쇄되고 그 상담사 역시 직장을 잃기 직전에 하는 마지막 상담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상담사는 그의 가슴에 쐐기를 박는 말을 한다.

 

“시가 복지 예산을 대폭 줄여서 오늘 상담이 마지막이죠. 당신 같은 사람한텐 아무도 관심 없어요, 아서. 나 같은 사람한테도.”

 

그는 더 이상 약에도 어느 누군가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처지에 방치된다.

 

세 번째는 상담이긴 한데 조금 다른 형태로 진행되는데, 그는 혹여 자신을 버린 아버지일지 몰라, 어렵게 찾아가 대면한 토마스 웨인에게 무시와 폭행을 당한다. 진위를 알기 위해 찾은, 아캄 주립병원에서 모친인 페니 플랙의 진료기록을 억지로 얻어낸다. 그것을 읽으며 자신의 과거를 확인하는 가운데 상상한 걸 표현한 것이다. 과거 ‘망상장애와 자기애적 성격장애’ 진단을 받은 그녀에게 이루어졌던 상담을 참관자처럼 지켜본다. 아서의 상상으로 그려내는 페니와 상담사와의 대화다.

 

상담사    그 아이를 입양했잖아요. 페니. 서류도 다 있어요.

페니       사실이 아녜요. 다 토마스가 꾸민 거예요. 애 존재를 숨기려고.

상담사   애인 중 하나가 지속해서 아이를 학대하고 당신을 폭행했는데, 가만히 있었군요. 페니, 아들이 난방기에 묶여있었어요. 집은 난장판이고 영양실조에 온몸에 멍 자국, 머리에는 외상을 입었어요.

페니    우는 걸 못 봤어요. 갠 항상 해피한 아이죠.

 

이 장면에서 아서는 미친 듯이 웃는데, 그 웃음은 너무나도 처절하다.

 

네 번째는 수갑을 차고 정신병동에 수감된 상태로 하는 상담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는 아서는 더는 아서가 아니라 조커다. 조커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데, 이 대사 때문에 이 글을 쓴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의 처지와 사건의 전개는 사방이 꽉 막힌 사우나의 고열처럼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우리를 괴롭힌다. 짧고 단순한 말로 특별한 내용은 없지만 유일하게 이 대사만이 다른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열린 환풍기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상담자     뭐가 그렇게 웃기죠?

조커       조크가 생각나서.

상담자    뭔지 말해 줄래요.

조커      이해 못 할 거야.

 

과연 조커가 떠올린 이해하지 못할 조크는 무엇일까? 결론 부분에서 글쓴이의 상상으로 덧붙이겠다. 그리곤, 수감병동 방을 빠져나와 복도를 천천히 걷는 조커의 뒷모습이 보이는데, 그의 발걸음 따라 붉은 발자국이 남는다. 그가 복도 끝에서 춤을 추다 오른쪽 통로로 사라졌다, 누군가에게 쫒기 듯 다시 등장하여 왼쪽으로 사라진 후에 화면은 화이트 아웃되고 영화는 끝난다.

 

영화 초반부에 아서의 인식은 차라리 격리되어 있던 때가 좋았다고 느낄 만큼, 정신질환을 지닌 자신이 자존감을 갖고 살기에 세상은 점점 더 팍팍해져서, 7가지 약보다 더 많은 약을 먹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랬던 그가 무언가 우연히 했는데, 그 행위로 뭔가 변화를 느꼈고 존재감을 얻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상황이 좋아진 건 아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모든 상황이 가장 가까운, 이 벅찬 삶을 견뎌내야 했던 이유에서 기인했고, 이젠 그걸 견딜 한 줌의 이유도 없어졌다. 그래서 바닥부터 모든 걸 해체하니 진짜 나-조커로 살 수 있게 됐는데, 그걸 세상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서는 이런 인식 단계를 거쳐 조커가 된 것이다.

 

살인과 인식의 단계를 거치면서 아서는 사회적 고립과 상실의 4단계는 밟는다. 직장으로부터, 사회적 안전망으로부터, 가족관계로부터, 그리고 선망의 대상으로부터 순차적으로 고립되며 모든 것을 잃어간다. 사실 그가 고립되어가는 관계들은 현실을 지탱하는 것이면서도 어쩌면 그를 옭아매는 쇠사슬이었을지 모른다. 이것들 가운데 가족이라는 굴레 중, 그것이 사실이었든 왜곡된 것이었든 확실하진 않지만, 부재했던 부친-토마스 웨인과 관계된 내용은 여러 장면을 할애하여 보여주는데, 그것마저도 아서의 심장에 꽂히는 비수다. 그리고 선망의 대상은 결국 망상의 대상이었으며 잔인한 쇼였음을 확인할 뿐이다. 직장과 사회적 안전망과의 연결고리는 너무나 쉽게 해체되며 거기서 아서가 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가족과 선망의 대상과는 사실 그 시점이 문제였지 언젠간 끊어질 운명과도 같았다. 발밑에 도사리고 있었던 지뢰와도 같은 것이 순차적으로 터진 것뿐이다. 누구 탓을 하리오. 사람들 앞에서 하는 자신의 고립과 상실에 대한 그의 말은 여운이 크다.

 

“난 잃을 게 없어요. 속상할 일도 없고, 내 삶은 코미디 그 자체예요.”

 

살인, 비극적 인식, 고립과 상실 가운데 일어나는 신체적, 정신적 일탈의 4단계는 예상외로 참담하지 않다. 오히려 아서는 관객을 대신해서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이것을 음악과 몸짓, 빛을 오브제 삼아 그린 장면들은 이 영화의 백미로 아름답다고 할 정도로 잘 표현되었다. 사실 일탈이라고 이야기했지만, 해방이라고 말하는 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장면들이 살인과 연결되어 그려지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일탈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평소 아서의 등은 굽어있고 늘 근육은 갑옷 같이 경직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심리적 상태와 조절이 잘 안되는 웃음에 대한 긴장감이 그런 몸을 갖게 했을 거라고 진단하고 싶다. 이런 몸이 단계별로 달라진다.

 

처음 살인 후 도망쳐 숨은 공용 화장실에서 혼자 추는 춤은, 굳은 몸을 이완시켜 풀어주며 추는 발레 같은 느낌의 몸짓이다. 두 번째 살인 후 창문 너머에서 내리쬐는 햇볕을 받으며 처연하게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의 그것처럼 보인다. 세 번째 살인 후 계단을 내려오며 추는 일명 ‘계단춤’은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장면으로 흥겨움을 넘어 자유로움마저 느껴진다. 그리고 공개 살인 후, 경찰에 연행되는 과정에서 시위 군중의 도움으로 풀려나, 부서진 경찰차 위에서 자신이 흘린 피로 그린 입술 분장을 하고선, 수많은 시위 군중 앞에서 환호 받으며 추는 춤은 스스로 구원받아 해방된 자의 몸짓이다. 역설적으로 콤플렉스와 스트레스로 인한 긴장으로 병증처럼 굳어진 몸과 정신은 극단적 범죄, 비극적 인식과 고립을 통해 이완과 해소의 과정을 거쳐, 그 자체로는 치유를 얻은 것이다.

 

여기까지가 아서 플랙이 조커가 되어 가는 과정을 동행하는 시선으로 정리한 내용이다. 언급하진 않았지만, 이 영화는 상황에 부합되는 적확하게 계산된 주옥같은 대사와 의도적으로 차용한 ‘택시 드라이버’, ‘코미디의 왕’이란 영화의 명장면과 서양의 명화를 옮겨놓은 것 같은 장면들이 영화 전체에 잘 편집되어 배치되어 있다.

 

그럼 이쯤에서 영화가 던지는 ‘당신은 과연 그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해야 할 것 같다. 그 답은 명료하다. 아서에서 조커로 변한 결과는 필연성이 내재한 선택의 강요에 순응한 너무나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오히려 자살이라는 길로 빠져들 개연성이 더 컸지만, 극단으로 치닫는 범죄자가 되었더라도 끝까지 살아남는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일상에서 일탈하여 어쩌면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일지 모른다. 정상성의 범위를 벗어난 정신질환자 이어서, 양심이란 게 없는 악인이고, 공감 능력이 제로인 사이코패스여서 그렇다는 다른 판단을 위한 어떤 정보도 이 영화엔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동정이나 연민, 혐오나 비난에 앞서, 그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더불어 그가 뭣 같은 코미디처럼 펼쳐진 상황에서도 자살을 선택하지 않은 점과, 그가 머레이 쇼에서 당당하게, 지하철에서 홀로 있는 여성을 괴롭히다 터져버린 웃음 때문에 힘들어하는 자신에게 몰려온, 자신의 증상에 대한 설명을 무시하고 무자비하게 구타하던 3명의 금융맨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진 살인에 대해, “개들이 뭐라고 그렇게 슬퍼해? 내가 죽었다면 내 시체를 밟고 갔겠지. 난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토마스 웨인이 추모하니 놈들 죽음은 슬프다?”라고 말하는 것엔 왠지 동조와 공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추가해서 “코미디는 주관적인 거예요. 안 그래요? 잘나디잘난 당신들과 사회는 뭐가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지. 뭐가 웃기고 안 웃긴지 판단하는 것처럼.”라는 말에도. 거기 까지다. 처벌이나 격리, 극형은 엄연히 존재하는 법과 공권력의 작동원리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며, 복수는 배트맨이 알아서 할 문제다.

 

아서에게 현실이었던 고담시의 상황과 거기서 벌어지는 사건은 단 하나의 CG 없이 구현되었는데, 블록버스터를 지향하는 히어로 장르에서 드문 경우라고 한다. 고담시의 상황은 미디어-뉴스와 신문-를 통해 반복적으로 전달된다. 그러나 오늘날 현실에서의 미디어가 그렀듯이, 저널리즘을 바탕으로 한 사실 보도와 사건의 배경과 원인에 대한 추적보다는, 자극적인 흥미 유발과 다분히 정치적 이해와 계산이 반영된 수사들로 이어진다. 오히려 아서가 걷는 거리의 풍경과 지나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프롤로그 장면에서 음향효과처럼 흐르는 뉴스가 있는데, 그걸 통해서 보도 형태를 단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앵커       미화원 파업 18일째를 맞아 매일 1만 톤의 쓰레기가 쌓여 고급 주택가마저 빈민가처럼 변하자 오로크 보건국장이 비상사태를 선포했습니다.

리포터   이대로 가다간 장티푸스가 창궐할 겁니다. 그 정도로 심각해요.

앵커       지역을 막론하고 모두가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인터뷰   쓰레기가 넘쳐나고 쥐가 들끓어요. 가게 입구가 막혀서 망하게 생겼 어요. 냄새도 그렇고 쳐다보기에도 역겨워요. 이 나라에서 50년을 살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지. 얼마가 걸 리든 모두 모여서 대화로 풀어야 해요. 방위군을 투입해 청소하는 것도 방법이죠.

앵커      한편, 건축 업계와 건물주들이 난방유 인상에 우려를 표한 가운데 세입자들이 직격탄을.......(볼륨 작아지며 음악으로 넘어감)

 

이 뉴스는 청소 노동자들이 왜 파업했는지, 파업을 멈추기 위해 고담시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는 전혀 다루지 않는다. 두려움을 부추기며 사람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는 보도만 내보내면서 파업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을 부각시킬 뿐이다. 그러면서 살짝, 가진 자들의 입장을 대면한다. 이와 같은 형태의 뉴스는 아서의 살인을 보도하는 데서도 반복되는데, 그것이 오히려 대중들을 흥분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

 

그런데도 앞선 뉴스와 뒤에 이어지는 내용들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높은 실업률과 불경기로 인해 다수의 사람은 삶의 위기에 처했으며, 정부에 의한 공공부문에 대한 예산 삭감으로 불만이 증폭되어, 결국 떠밀리듯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려있다는 것이다. 감독이 밝혔듯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기가 1980년대 초반인 점을 보면, 대처리즘과 함께 대표적인 신자유주의-보수주의 정책인 레이거노믹스 정책이 서슬 퍼런 기세를 펼치며 다수의 노동자와 서민의 삶에 공격을 시작한 때를 그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더불어, 쇼 프로그램에서도 현실이 다루어지긴 하는데, 진지한 성찰을 기대하는 건 무리겠지만, 비아냥거리며 희화화시켜 웃음거리로 활용할 뿐이다. 그래서 뉴스보다 더 역겹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거리에서 시위하는 대중들도 중요하게 다뤄지는데,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분노와 노력해서 성공한 부유층에 대한 반감을 무질서하게 폭력적으로 표출하는, 조커와 같은 인물에게 쉬 현혹될 수 있는, 길을 잃고 홧김에 고담시를 불태울 불장난을 하는 어린아이처럼 그린다는 점에서, 영화 속의 미디어나 감독이나 그걸 다루는 시선에는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다. 그러면서 그런 대중을 이끌 새로운 지도자를 요청하는데, 그가 ‘고담은 길을 잃었다. 그들에겐 제가 유일한 희망이다. 그래서 출마한다.’라는 내용으로 인터뷰하는 금융맨들과 부자들의 대부인 토마스 웨인인 것이다.

 

여기서 잠깐,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웃음이 터지는 장면이 하나 있다. 토마스 웨인을 비롯하여 여유 있는 이들이, 밀려드는 시위대를 힘겹게 막아내는 경찰들의 보호를 받으며 공공극장에서 자선 행사를 하는데, 품위 있게 양복을 갖춰 입고 깔깔거리며 영화 한 편을 보고 있다. 바로 찰리 채플린이 감독, 제작, 각본, 주연한 ‘모던 타임즈’라는 흑백 무성영화이다. 이 영화는 대공황 당시, 산업혁명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자본주의의 물신성과 인간소외를 웃프게 그리고 있다. 채플린은 이 영화가 발단이 되어 나중에 공산주의자로 몰려 미국에서 쫓겨나게 된다. 참으로 난센스고 코미디다. 이런 현실을 배경으로, 아서 플랙은 위에서 이야기한 과정을 거쳐 조커가 되었는데, 우리라면 달랐을까? 자살? 조커가 아닌 배트맨이 되었을까? 과연?

 

이 영화를 보며 깊게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주인공이 광대 일을 하는 직업적 환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하고, 예를 들면, 더운 여름 무더운 고양이 인형 탈과 털옷을 입고 홍보용 전단지를 돌리거나, 눈에 띄는 분장을 하고 춤을 추거나 이목을 끄는 움직임을 하며 이벤트 일을 진행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나는 연극을 하는 사람이다. 물론 연극 작업에는 전문적인 여러 가지 역할이 있다. 그렇게 따지면 연극 공연을 위한 극작과 연출을 하는 게 나의 일이다. 그런데도 연극을 하는 사람이라고 밝히는 이유는 연극공연을 할 때마다 만나는 제작 여건이 기획, 무대, 조명, 의상, 음향뿐 아니라, 공연에 필요한 효과를 위한 장치의 오퍼레이터까지 맡을 수밖에 없는 열악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배우 일정상 무대에 설 수 없었을 때가 있었는데, 공연을 취소할 수 없어서 그 배우의 대역을 한 적도 있다.

 

그나마 이런 작업도 1년에 한 번 이상 할 수 있다면 고마운 일이다. 조금 형편이 허락되어 자체적으로 공연을 위한 경비를 마련할 수 있었던 때는, 1년에 한 편은 정기적으로 공연할 수 있었다. 그 형편마저 허락되지 않으면 국가지원금에 의존해야 하는데, 실력이 영 부족한지 무난하게 지원받는 다른 팀에 비해 지원 대상이 되는 문턱을 넘는 일이 무척이나 어렵다.

 

더불어 연극이라는 일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대다수 연극인은 이런저런 다른 일을 하며 연극이라는 세계에 머문다. 예외는 있다. 국공립 예술단체에 소속되어 국가공무원으로 임금을 받으며 연극을 하거나, 대학 강단에서 연극 관련 학문의 교수직을 맡아 임금을 받고, 국가지원금 심사를 하기도 하며, 여러 혜택 가운데 고상하게 연극을 하는 방법도 있다.

 

사설 학원에서 입시지도나 연기자 수업을 진행하며 거기서 만들어진 비용으로 연극을 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건 연극인들이 하는 이런저런 일들에 속하는 것이라 제외한다. 보통은 연극과 무관한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고, 기업, 단체, 국가에서 진행하는 행사나 축제에 참여하거나, 이벤트 업체에서 일하며, 건수대로 임금을 받는 것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 이와 같은 상황은 비단 연극계뿐만 아니라 다른 여타의 공연예술계 전반이 마찬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이마저도 여의찮아졌을 뿐 아니라, 공연을 올리는 그 자체마저도 힘들어졌다.

 

더군다나 나 같은 문제의식-이 문제의식에 대한 설명은, 과거 노동문화예술 운동을 했다던 선배가 2006년 올렸던 <코뮌>이란 작품을 보고선 충고라며 했던 말, “넌 아직도 ‘선언’이나 인용하면서 혁명이니 뭐니 하는 작품을 붙들고 있니? 세상이 변했어.”라는 말로 대신한다-을 가지고 연극을 하는 사람에겐 오아시스 없는 사막을 횡단하는 것처럼 연극 현실은 더욱 녹록지 않다. 뒤늦게 연극판에 뛰어들어 혁명을 주제 삼아 3부작을 기획하고, 첫 작품을 자력으로 올리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힘들게 노동하고 준비하며, ‘그래도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면 좀 더 나아지겠지.’라고 위안했었다. 그 위안을 반복하며 버틴 시간이 벌써 20년 가까이 흘렀다.

 

그런데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문화 생태계의 자율성과 자립성을 파괴하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수면으로 끌어올린 사람이 문광부 장관을 역임했고, 큰 목소릴 냈던 이들이 문화예술 정책을 입안하고 예산 집행을 관장하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음에도 그 시혜는 나에겐 오리무중이다. 블랙리스트에 끼지도 못해서 그러나?

 

내게 충고했던 선배는 이명박 정권을 지나 박근혜 정권이 들어섰을 때, 다른 선배를 통해 말로 사과를 전했다. 직접 해도 됐는데. 물론 그 선배는 지금 어느 국공립 문화 시설의 중요한 보직을 수행하는 고임금 관료다. 그렇지만 이제 난, ‘그래도 난 잘 해냈어.’라고 정신 승리하며 버티던지, ‘난 너무 무능해.’라고 자책하며 주저앉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렇다고 아서처럼 조커의 길로 접어들 만큼 아직 바닥은 아닐 것이다. 연극 현실은 어제나 오늘이나 팍팍한 건 변함없고, 어느새 내겐 의도하진 않았는데, 내구성과 게으른 변명의 논리가 생겼다.

 

단지 참기 힘든 건, 이미 도래하여 일상이 되어버린, 산업화 세대의 역군들을 이끌었다고 자처하는 이들이 기초를 닦고, 민주화 세대의 주역이라며 자부하는 분들이 완성시킨 신자유주의의 천국을 눈앞에 두고도 어찌하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견디는 것이며, 국민 교육으로 순치되고 민중 담론으로 고양되어 국익 제일주의와 국뽕에 취해서 자화자찬하는 우리들 자화상의 일부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나도 어느새 적폐가 되어있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인간 삶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이 상품이 되어버린 오늘의 자본주의 세상에서, 누군가를 향해 무언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야기하는 그 개별적 존재(또는 인간)가 그 무언가와 관계있는 개별 상품들에 대한 숨기고 싶은 소유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거나 또는 그것들을 소비했을 때 얻게 되는 사용 후기이며, 그것도 아니면 그 무언가를 통해 혹시나 이어질 수 있는 파생 상품들에서 거둘 수 있는 이윤 창출을 위한 기획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이야기의 방향이 자신을 향할 때조차도 그렇다. 너무 나간 억측일까? 하지만 난, 누가 뭐래도 그렇게 확신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오늘의 현실을 가능하게 하였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소유, 소비, 이윤 창출의 과정이 아무에게나 다 해당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한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꼭 이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대중문화 산업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화 산업의 생산물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피해왔다. 연극쟁이 입장에서 왠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영화 ‘조커’는 히어로 영화로서는 최초로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베니스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데 이어, 코믹스 캐릭터 영화 최초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였고,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11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최다 노미네이션되었으며, 이중 음악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흥행 역시 매우 성공해서 중국에서 개봉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R등급 영화 최초로 전 세계 흥행 수익 10억 달러를 돌파했을 만큼 대단한 상품이다. 그런 상품의 사용 후기까지 굳이 내가?

 

영화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너희들 가진 것 없는 이들이 돌아갈 수 있는 지속적으로 안정적인 일상은 없어. 그거 다 환상이며 쇼야. 아니다 망상이야. 그래서 늘 불안한 거야. 그걸 아직도 몰랐어? 그리고 그런 일상으로 안내해 주는 수고를 대신해주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그 불안을 자양분 삼아 자신의 부를 키우는 가진 사람들이야. 그러니 자신들을 위한 일은 너희들이 스스로가 직접 행동해야 해. 그런데 너희들 그럴 만한 능력은 있어? 고작해야, 어린아이처럼 결핍에서 오는 설움과 분노를 정확한 대상 없이 파괴적으로 쏟아붓고 말겠지. 부르르 끓었다 식는 냄비처럼. 아니면 그 분노마저도 대리해 줄 안티히어로를 찾아 헤매다 지쳐 주저앉고 말 거야. 그래도 알려 줄게 어떻게 하면 대중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힘을 얻는지. 잘 봐! 여기 웰 메이드 된 샘플을 싼값에 보여주는 거니까. 보고 나서 어쩌는 지는 네 문제야.” 이런 불편한 주제의 영화를 자본이 만들어 흥행시키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자본의 자신감이여!

 

하여튼, 나는 영화보기를 무척이나 즐기고, 결국 이렇게 영화에 대한 글을 썼다. 예전에 ‘청년 마르크스’란 영화에 대한 글을 쓰다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경험이 있다. 마르크스가 영화 상품화 되어 유통되는 게 너무나 싫었던 이유가 컸지만, 이 영화에서 받은 만큼의 감흥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글쓰기의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단 자꾸 보면 보이는 감독의 세심함에 놀라워, 어쩌다 보니 집중해서 5번 이상을 반복해서 봤다. 아마도 다른 목적으로 여러 차례 더 보게 될 것 같다. 셀 수 없이 본 수많은 영화 중에 의도적으로 3번 이상 보고, 생각나면 다시 보는 영화가 3편이 있었다. 이제 이 영화를 포함해서 4편이 되었다.

 

알란파커 감독에 밥겔도프 주연의 1982년 영화 <핑크 플로이드: 더 월 (Pink Floyd: The Wall)>, 아서 밀러 원작에 더스틴 호프먼과 존 말코비치가 출연하고 1985년에 개봉된 <세일즈맨의 죽음 (Death of a Salesman)>, 1997년에 개봉한 밥 딜런이 부른 동명의 노래가 주제곡인 독일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 (Knocking on Heavens Door)>가 그렇다. 이 영화들을 반복해서 보는 이유는 처음 봤을 때도, 지금도 여전히 말을 걸기 때문이다. 기회가 되면 이 영화들에 대해 글쓰기를 시도해 볼까 한다.

 

글을 마무리 지으며, 주인공 조커가 마지막으로 던지려던 조크를 상상해 본다.

 

조커   
너희들 애국이니 산업화니, 민주화니 하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어린앨 어르고 달래듯이 우리를 동원하여 우리 삶의 에너지로 세상 을 돌렸잖아.
그리곤 세상이 맺어낸 열매를, 니들끼리 배 채우고, 겨우 허기나 때 울 정도를 선심 쓰듯 던져주며 삶의 명분  마저도 쥐고 흔들었고.
근데 말이지, 그 계산, 그냥 그렇게 안 끝난다.
언젠가 살인도 분장도 하지 않고, 맨얼굴 그대로 웃는 조커들이 자 발적으로 모여서, 너희들 자식들 손에 들린 물려받은 것들이 쓸모없 는 세상을 만들고선 노래하며 춤추며 알려 줄 거야.
야! 몰랐어? 너희들 돌아갈 일상이란 거, 이제 없어.

노래   
그게 삶이지.
어떤 사람들은 꿈을 차 버리지만
나는 그러지 않아, 우울하지도 않고
세상은 돌고 도니까.
몇 번이나 관둘 뻔했지만
내 마음은 포기를 모르더라고
하지만 이번 7월까지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면
모든 걸 포기하고 그냥 죽어버려야겠어.
- 플랭크 시나트라의 ‘That's life 가사 일부.

 

최철 l 사실연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