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서구노동자평의화와의회주의 본문

실천지 (2007년)/2007년 8월호

서구노동자평의화와의회주의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4:00

 

 

 

 

 

서구 소비에트로서의 노동자평의회와 의회제도와의 비교: 1915-1920

(The Western Soviets Worker's Councils Versus Parliament 1915-1920)

 

- Donny Gluckstein -

 

 

 

 

 

 

 

 

 

 

 

 

 

 

 

 

 

<감사의 글>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준비하고 집필하는데 도움을 주셨습니다. 특히 알렉스 캘리니코스(Alex Callinicos), 토니 클리프(Tony Cliff), 피터 굿윈(Pete Goodwin), 크리스 하먼(Chris Harman), 데이브 힐(David Hill), 데이비드 커비(David Kirby), 제임스 힐튼(James Hinton), 피터 마스댄(Peter Marsden), 해리 맥샤인(Harry Mcshan), 패니 팩햄(Penny Packham), 거윈 윌리엄스(Gwyn Whilliams) 등등의 분들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책을 라이안(Rhian)과 오웬(Owen)에게 바칩니다.

서론

 

자본주의는 다시금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1960-70년대 들어 자본주의 체제의 옹호론자들은 경제적 붕괴와 불가피한 계급전쟁에 대한 맑스주의자들의 예견들이 일련의 현실사건들에 의해 거짓으로 증명된다는 점, 그리고 사회변화는 의회민주주의의 정상적인 경로를 통하여 달성될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의회주의적 변화 방법론이 계급착취의 본질을 뒤흔들기에도, 심지어 대량실업과 기초적 복지제도의 축소에 대해서도 노동자의 생존조건을 방어할 수조차 없는 비굴한 실패작이었다는 점은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다시금 우리에게 혁명적 변혁이라는 문제를 주요하게 제기하도록 만든다.

비록 많은 노동자들이 의회 제도를 의혹과 냉소를 가지고 바라볼지라도, 동유럽의 스탈린주의 통치방식 이외에, 무기명 투표방식이라는 의회제도에 대한 대안을 사고하는 노동자는 거의 없다. 하지만 역사는 노동자 평의회가 의회제도와 스탈린주의 통치방식에 대한 진정한 대안이었으며, 이 대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노동자 평의회는 어떤 천재적인 사회구조 설계자(social planner)에 의하여 고안된 것이 아니다. 1905년과 1917년 러시아에서, 1918년 독일에서, 1956년 헝가리에서, 1972년 칠레에서 노동자와 농민들은 면밀한 사회변화의 설계도에 따라 움직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노동자 농민들은 대다수인 민중의 입장에서 자본주의가 파생시킨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중 민주주의를 창조해내었다. 역사적으로, 평의회(또는 러시아에서의 소비에트)로 조직된 노동자 권력은 자본주의 국가권력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이었다. 자본주의 체제가 점점 더 쇠퇴하고 있는 바로 지금, 노동자 평의회의 기풍은 이에 대한 반대자인 반동주의자, 개량주의자, 스탈린주의자들이 의도했던 애매모호함으로부터 재발견되어야만 한다.

본서는 지금까지의 노동자 평의회 활동의 모든 사례들을 살펴보는 역사기술적인 목적을 의도하지는 않는다. 본서는 러시아에서의 경험에 대한 간략한 개관에서 시작하여, 의회주의적 질서와 대중적 개량주의라는 상황에서 활동했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관련된 몇몇 사례들에 집중하고자 한다. 노동자 평의회 활동의 3대 핵심지역인 - 각기 다른 나라지만 - 영국, 독일, 이탈리아를 좀 더 집중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본서는 가장된 중립성과는 거리를 두고자 한다. 맑스주의자는 역사서술이 계급사회 내의 지적추구를 넘어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의 근본적인 사회적 분화를 초월하여 집필될 수 있다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맑스주의자의 출발점은 자본주의체제가 혁명적 전복을 필요로 한다는 점, 그리고 그 과제가 노동 계급의 활동과 조직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점이다. 노동자 평의회는 이러한 혁명과정의 수단 중에 하나이다. 본서는 오늘날 노동 운동을 고취시키고, 혁명정당이 건설되는데 한 몫을 하고, 과거의 투쟁을 이해하는데 얼마간의 도움을 준다면, 그 목적을 충분히 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1차 세계대전 동안 그리고 바로 이후, 유럽은 제국주의로 인한 위기와 볼셰비키 혁명의 영향으로 혁명적 활동의 폭발을 경험하였다. 러시아, 이탈리아, 영국, 독일과 같이 다양한 국가간의 차이들을 비교해 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비교를 통해 일반적 교훈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한 나라만 연구하는 것은 국지적 전통들에 의해 채색되는 경향이 있다. 이 시기 영국에서는 노동조합에 대한 문제로만 집착하고 있었으며,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회피하고 있었다. 대조적으로 독일에서는 주로 정치적 문제에 사로잡혀 있지만, 반면 작업장 수준에서 벌어졌던 변화들에 대해서는 거의 고려하고 있지 않았다. 한 국가의 사례로 제한된 연구는 본서의 다음 각 장에도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본서가 의도하는 목적은 어떻게 노동 운동이 일국의 국경을 넘어서는 전체적인 계급투쟁의 일부가 되었던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본서가 의도하는 국제적인 비교연구방법은 당시에는 더욱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1차 세계대전이 유럽을 가로질러 진행되므로 인해 일국 노동 계급의 투쟁으로 발생된 수많은 차이가 제거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노동자 평의회 운동은 제도화된 정치 수준에서 형성되지 않았다. 그람시가 언급하였듯이, 사람들은그 저변을 바라보아야 한다. 공장의 그리고 자본주의가 자신의 법으로 지배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호한 의식 속에는 …… 그 속에는 억압받는 자와 억압하는 자의 관계만이 존재하며,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관계만이 존재한다. 그곳에서 노동자는 자유도 없고, 민주주의도 없다.”

이 지점에서 역사가들은 회피할 수 없는 문제들을 부딪치게 된다. 지배계급은 상당수의 공무원, 비서, 정치평론가를 동원하여 자신의 논쟁과 결정사항들을 기록하고 유포하려고 한다. 억압받는 계급의 조직으로서 노동자 평의회는 결코 자신의 진행사항에 대한 기록을 수행하는 의사 진행록(Hansard)를 갖고 있지 않다. 월급을 받는 상근직원도 없이 거친 계급투쟁의 한 가운데서 움직이기 때문에, 현장(rank-and-file) 활동가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적절하게 기술한 표현물을 거의 발견하지 못한다. 노동자 평의회와 현장조직(shop steward)들은 흔히 노동자 정당들에 있는 정례화된 의사록 작성조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장조직 활동가들과 노동자 평의회의 회의장소, 혹은 정기적인 노동자 평의회의 회의기간, 심지어는 출석수준과 대표하는 범위에 관한 정보를 안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때때로 이러한 노동자 평의회에 대한 정확하고 세부적인 정보가 부재하는 사실은 평의회를 실체가 없는 것으로도 보이게 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문건화된 정보부재는 노동자들의 자율적 활동의 증거에 의하여 충분히 보완된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노동자 평의회는 무엇보다도 행동을 위해 고안된 조직이기 때문이다.

각 사업장과 각 산업부문에서 산재된 현장 노동자의 투쟁과정을 밝혀내기 위해서, 본서의 연구범위를 글래스고우, 베를린, 튜린으로 한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이곳 투쟁에서의 의미를 충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투쟁들이 러시아 특히 페트로그라드라는 도시를 출발점으로 하여 유럽으로 확산된 더욱 광범위한 운동의 일부이었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1. 페트로그라드에서의 소비에트와 혁명

 

서유럽 노동자 평의회 운동은 매우 폭넓게 발생한 노동계급의 분규(revolte)의 하나로서, 이는 피로 뒤덮였던 끔직한 1914-18년 전쟁(1차세계대전)으로 인해 발생되었다. 1300만 명이 죽었고, 3600만 명이 부상당한 이 전쟁은 자본가 간의 시장경쟁이 주된 원인으로 발생하였다. 이 전쟁은 시장에서의 경쟁관계가 전쟁터에서의 제국주의 전쟁으로 한발 짝 더 나아간 것이었다.

1915년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가 감옥에서 쓴 편지에 의하면부르주아지 사회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 사회주의로 이행할 것인가 아니면 야만으로 돌아갈 것인가라는 딜레마에 처해있다.....우리는 선택에 직면해 있다: 제국주의 승리 즉 문명의 쇠퇴....절멸, 파멸, 퇴폐, 파헤쳐진 묘지들이냐. 아니면 사회주의 승리 즉, 제국주의와 그 위기해결방식에 대해 목적의식적으로 대응하는 국제 노동자 계급의 승리냐라는 선택 말이다라고 이야기 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 자본주의 세계가 눈앞에서 파멸되고 있다고 느꼈던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들만은 아니었다. 로이드 조지(Lloyd George)는 파리평화회담에 모인 각국 정치가들에게현재 유럽은 혁명적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전 유럽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현존하는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질서를 의심하고 있다라고 두려워 했다. 유럽 국가들 중 가장 안정적이었던 영국에서조차도 1918년 말 발표된 정부비밀문서에 의하면볼쉐비즘이라는 박테리아의 확산이라는 제목 하에왕권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며, 소비에트가 민주주의를 위한 최상의 정부형태가 될 것이라는 정서가 노동자 계급 속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다. 이러한 정서는 혁명가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닌 듯 싶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 기간 동안 계급투쟁은 광범위 규모와 다양한 모습을 취하면서 확산되었는데, 1916년 더블린(Dublin)에서의 부활절 봉기에서 시작되어 러시아 혁명까지, 시애틀(Seattle)의 총파업에서부터 암리짜(Amritsar)의 폭동들에까지 확산되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 중부유럽 대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제국은 노동자들의 봉기에 의해 붕괴되었다. 프랑스에서 파업물결은 철도 노동자 파업에 부두노동자들, 선원들, 광부들 그리고 기술자들이 동참하였을 때 그 절정에 이르렀다. 러시아, 헝가리 그리고 독일의 바이에른에서는 소비에트 공화국이 등장했고, 유럽의 나머지 지역들에서는 노동자 평의회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 위기의 정점인 1919, 새롭게 형성된 공산주의자 (3) 인터내셔널의 서기장 지노비에프(Zinoviev)이러한 운동노선들이 현실에 자신의 궤적을 남기며 진행된다면, 우리는 세 개가 아니라 여섯 개 혹은 더 많은 소비에트 공화국을 갖게 될 지라도 놀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구 유럽은 지금 맹렬한 속도로 혁명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라고 예견하였다.

의심할 나위 없이, 주목할 만한 시기에 발생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1917년 러시아 혁명이다. 1917년에 (러시아) 노동자들은 짜르를 타도하고, 짧은 이행기를 거친 후에 권력을 장악했다. 이러한 최초로 성공한 노동자혁명은 세계 모든 곳에서 사회주의자들을 고무시켰다. 러시아 혁명은 혁명정당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혹은 노동자 평의회에 기반한 새로운 유형의 국가창출에 대한 가능성도 보여주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19세기에 걸친 부르주아 혁명 전체과정을 평가할 수 있게 해주는 시금석이었다. 부르주아계급은 프랑스 혁명의 체험이라는 눈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계급)발전을 인식하였다. 부르조아 계급들은 각자 자신의 의회, 자신의 쟈코벵당(Jacobins), 심지어 자신의 나폴레옹을 가지고 있었다. 191710월 러시아 혁명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맑스주의자들에 기여하였으며, 세계 어느 곳의 혁명적 운동도 최초이자 최고 수준이었던 러시아 혁명이라는 시금석에 의해 비교되어 평가되었다.

 

레닌과 소비에트 국가

 

노동자 평의회는 실천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러시아에서의 소비에트를 통해 가장 최고 수준의 형태를 드러냈다. 특히 레닌은 실천적, 이론적 두 측면들에서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레닌이 19178월에 국가와 혁명이라는 소책자를 썼을 때, 파리코뮌에 나타난맑스의 가르침과 러시아에서의 두개 혁명 -1905년의 혁명과 19172월 혁명- 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묘사할 수 있었다.

레닌은국가와 혁명에서 국가란 계급 적대에 있어 화해불가능함을 표현하는 것이자 그 산물이라는 점이라며 논의를 시작하였다. 결국 소수가 사회적 부를 통제하고, 다수를 착취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라는 특수한 억압기구는 계급지배를 유지할 목적으로 사용된다. 그에 의하면 국가라는 기구는자신의 통제 하에 감옥 등을 가진 무장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특수한 기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로부터 레닌은억압받는 계급의 해방은 지배계급에 의해서 창출된 국가권력의 기구를 파괴해야만 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것은 억압받는 계급이 자신을 억압하는 계급에게 도전하여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 스스로의 권위를 창조해야 하는 혁명과정을 포함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엥겔스는 이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 명쾌하게 언급하였다.

 

혁명은 그 어떤 것보다 가장 권위적인 것에 틀림없다. 혁명은 전체인구 중에서 하나의 집단이 다른 집단에 대해 총검, 대포 등의 강제력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부과하는 행동이다. …… 그리고 만약 승리한 당이 그 싸움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자신들의 무기가 불러일으키는 반-혁명세력 내의 두려움을 통해 자신의 통치규율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맑스주의 국가론은 국가의 권위를 찬양하는 찬송가는 아니다. 오히려 논지는 완전히 그 반대이다.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은 노동계급의 승리 후에, 코뮤니즘 하에서 계급들이 종국적으로 사라지는 과정은 국가도소멸되는 과정과 동시에 이루어 질 것임을 보여준다. 일단은 국가라는 억압적 기구가 사라진 후에야 오직 그런 다음에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혁명시기와 무계급 사회 사이는 이행기간이 있어야 한다. 그 이행기간 동안에는 :

 

억압은 여전히 필요하다. 하지만 이제는 착취받던 다수가 착취하던 소수를 억압하는 것이다. …… 국가여전히 필요하다. 그러나 …… 이 국가는 더 이상 문자 그대로의 통상적 의미에서의 국가는 아니다. 왜냐하면 과거 임금노예였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소수의 착취자들을 억압하는 것은 비교적 너무나 쉽고, 단순하며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억압과정은 과거 노예, 농노, 임금 노동자의 봉기에 대한 억압보다 훨씬 적은 유혈만을 수반할 것이고 또한 사람들을 거의 희생시키지 않을 것이다. 특수한 억압기구의 필요성이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인민에게로 민주주의가 확장되는 과정과 양립가능하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이 결론 맺는다.

 

민중들은 매우 단순한기구를 가지고서 …… (노동자, 병사 위원회의 소비에트와 같이) 민중의 단순한 무장조직으로도 …… 착취자를 억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논지에서 볼때,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은 1920년대 이후에 성장하여, 소수의 국가 관료들이 다수민중을 지배하는 스탈린주의 체제와는 어떠한 공통점도 갖지 않는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레닌에게 핵심적인 문제는 헌법의 족쇄들도 아니었고, 통치 체제가 스스로 붙였던 명칭(비록 스탈린은 계속해서 소비에트라고 말했지만)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피착취 계급이 착취계급을 지배하느냐, 마느냐 즉 임금 노예들이 자본가들을 통제하느냐, 마느냐의 여부였다. 스탈린 치하 러시아에서 국가는 인간의 필요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구와 마찬가지로 자본축적을 우선적인 목적으로 하는 소수 지배 계급에 복무하였다. 이것이 스탈린 시대 이후의 러시아가국가자본주의로 불릴만한 이유이다. 그 국가는 레닌이국가와 혁명에서 기술했던 노동계급의 독재와는 전혀 관련성이 없다.

불행히도 레닌은국가와 혁명에서 자신의 주장을 좀 더 심화시킬 수가 없었다. 그 소책자는 앞으로 이어질 소비에트에 대한 분석을 암시하는‘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라는 표제에서 갑자기 끊긴다. 그러나 레닌이 언급하고 있듯이, ‘“혁명의 경험을 겪어보는 것은 그것에 대해 글을 쓰는 것보다 훨씬 즐겁고 유익한 것이다.’ 이후의 저작에서 레닌은 러시아혁명이 맑스주의 국가이론에 실제적으로 기여한 바를 넌지시 말하고 있다. 그는 1917년에 출현했던 소비에트 공화국을 다음과 같이 바라 보았다.

 

국가가 소멸될 때까지 과도기에 존재하는 새로운 유형의 국가 …… 부르주아-민주주의 공화국은 착취 받는 대중에게 기껏해야 자신을 조직할 수만 있는 자유를 입법화함으로써 그들의 조직을 용인해줄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 부르주아-민주주의 공화국은 피착취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조직화하는 과정에 무수히 많은 장애물을 설치해 놓으며 나아가 항상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와 깊은 관련이 있는(를 보호하는) 무수한 장애물들을 제거 불가능하겠금 한다. 역사상 처음으로, 소비에트 권력은 대중조직들을 매우 효과적으로 움직이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 그 조직을 전체 국가기구의 본질적이고 지속적인 토대로 만들었다…….

소비에트 유형의 국가에서는 노동자 대중들이 국가와 행정부에 더 직접적으로 영향력 -보다 상위형태의 민주주의-을 미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 증대된 영향력은 우선 선거절차의 개선 및 선거빈도의 확대 가능성을 통해, 그리고 대표자들에 대한 재선거/소환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고 …… 그 다음으로는 이전의 지역적 선거단위구분이 아니라, 경제적 산업단위(공장)를 기초선거단위로 설정함에 의하여, 이를 소비에트 권력 하의 국가구조 기반으로 만드는 것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자본주의로 인해 단결된, 진보한 프롤레타리아트 대중들과 국가기구간의 밀접한 상호결합 과정은, 보다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를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착취 받는 민중들과 밀접히 연계된 노동자, 농민의 군대를 창출함으로서 더욱 심층적인 사회주의적 변혁들을 달성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전의 모든 국가들은 소수 착취계급의 재산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반면 소비에트라는 국가유형은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피착취 계급 자신들을 토대로 구성된다는 점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소비에트와 이에 체화된 직접 민주주의는 우연히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맑스가 파리 꼬뮌의 시기에 지적했듯이,‘노동자 계급은 단순히 기존의 국가장치를 장악하여 이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없다.’ 새로운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국가는, 그 형태가 무엇이든 간에, 자본주의적 이해를 체질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국가들의 외적 모습이 나라마다 다를지라도, 그 공통점은 부르주아적 지배의 기반 즉, 생산수단(공장과 사무실)과 사회의 물리력(군대, 경찰, 감옥) 양자에 대해 통제함에 있어, 노동자 대중들을 배제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생산되어진 부를 독점적으로 유용하며 관리자의 감시, 실업의 공포 등을 통해 노동력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규율하고 협박한다. 또한 자본가에 의해 독점된 부는 두 번째 방어선 - 국가라는 물리력을 형성하는 무기들과 인원 - 을 구매하고 (전열을) 갖추기 위해 사용된다.

자본가가 이러한 두가지 과제(생산영역에서의 노동력 규율과 국가영역에서의 강제력 구축)를 수행하는 것에는 그 형태와 방식에 있어 피상적인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1930년대 독일이나 이탈리아와 같은 파시스트 독재나 혹은 오늘날 러시아나 중국과 같은 국가자본주의에서의 스탈린주의 일당독재(물리력을 폭넓게 사용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음)에서 시작하여,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과 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시장의 채찍 또는 노동조합 관료들의 협조가 항상 충만해있는)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가) 다양하다. 후자의 형태에서 부여된 투표권 및 다른 정치적 권리들은 결코 다수의 근로인민에게 권력을 제공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자본가 계급의 절대적 권력을 더 크게 만들 뿐이다. 이에 대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가 더욱 고도로 발전하면 할수록, 부르주아지 의회는 주식 거래소와 은행가들에게 더욱 더 종속된다 …… 가장 민주적인 부르주아 국가에서 조차도, 억압받는 인민은 매 순간마다 자본주의의민주주의가 선포한 형식적 평등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임금노예로의 전락하도록 하는 수 천 가지의 실질적 한계 및 속임수 사이에 심각한 모순이 발생됨을 마주치게 된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할 때, 그 지배의 형태는 유연할 수 있다. 외견상의 민주주의는 다양한 지배방식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노동 계급에게는 맥락이 완전히 다르다. 자본주의를 전복하기 위해서 노동 계급도 역시 중앙 집중화된 국가 권위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노동 계급은 성숙한 자본주의 사회의 경우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또 다른 사안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맑스가 언급하였듯이,‘노동 계급의 해방은 노동 계급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이루어진다.’이것은 도덕적 원칙에 대한 선언이 아니다. 자본가들의 거대하며 집중된 경제적, 정치적인 힘을 전복하기 위해서는 노동 계급 대다수의 직접적이며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이러한 대중참여는 계급을 위해서 활동하는 소규모 관료 집단에 의해 성취될 수는 없으며, 단지 권력 장악과 유지를 위해서 스스로를 조직하는 대중들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그러한 조직은 가능한 한 직접적으로 대중의 의지를 표현하여야 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관료제도 최소화시켜야 한다. 그 조직은 또한 자유롭게 형성되어야 하고, 다수의 지시를 받아야 하며, 철저하게 민주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노동자들에게 단지 추가적인 선택사항(optional extra)이 아님에 틀림없다. 그것은 노동자 국가의 건설에서 핵심적인 요소인 것이다. 실질적 민주주의가 없다면, 그러한 국가조직은 대중의 동원된 역량을 결여하게 될 것이다. 반면 중앙 집중화된 권위가 없다면, 노동자들은 자본으로부터 저항을 돌파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 계급에게 있어 민주주의와 독재는 모순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다. 노동자의 민주주의와 노동자의 독재는 평의회 국가 -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구체화된다. 생산이 이루어지는 지점에서 대의원이 선출되었기 때문에, 평의회 국가의 대의원들은 공장과 사무실에 있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직접적 통제를 받게 된다. 동시에 평의회 및 소비에트는 계급의 집단적인 권력을 지배를 위한 무기로 통일시킨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은 개별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부의 집합적 생산자로서만이 사회적인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소비에트는 생산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힘을 집중시키며 나아가 국가 권력의 최정상이 될 것을 요구받는다.

소비에트는 모든 점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는 다르다. 부르조아 민주주의에서는 다수의 사람들이 국가에 대해 영향을 줄 수 있는 기회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있다. 선거는 단지 몇 년마다 한번씩 일어난다. 지역 선거구 투표는 공장선거와는 달리, 노동자에게 어떠한 실질적인 이점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공장선거의 경우에 대표자들은 그들을 뽑아준 사람들의 기대로부터 어긋났을 때, 언제나 감사를 받고 소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 현장보다는 거주지에 기반한 선거는 노동자가 집합적인 정치적 토론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투표자들은 자본가가 소유하고 있는 대중 매체의 내용들에 더 민감해지고 계급의 구성원으로서보다는 고립된 가족 속의 개인들로서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선거 결과와 부르주아 의회 구성이 어떻게 되는 간에 주요한 의사결정들은 항상 자본가의 경제적 이해에 의해 이루어지며 더욱이 선출직이 아닌 사람들 즉 공무원들, 판사들, 경찰서장들의 처분에 따라 결정된다.

위선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소비에트는 맑스나 레닌에 의해서 창안된 것이 아니라, 1905년 러시아에서 처음 나타났던 노동자 자신들의 투쟁들로부터 직접적으로 생성된 것이다.

 

1905

 

1905년 혁명은 당시 러시아 수도였던 성 페터스부르크(St Petersburg) 겨울궁전 앞에서 시위를 하던 대중들에게 군대가 무차별적으로 발포하면서 시작되었다. 대중들의 행동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페터스부르크 소비에트가 형성되었다. 페터스부르크 소비에트는 1013일부터 시작하여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던 123일까지 50일 동안 유지되었다. 트로츠키에 의하면, 그때 페터스부르크 소비에트는모든 사건의 중심축으로서, 모든 노선들(threads)이 소비에트로 향했으며, 모든 행동에 대한 지침이 그것으로부터 퍼져 나왔다.’

페터스부르크 소비에트는 정치 총파업을 조직하기 위해 대표자들이 모임을 시작함으로서 탄생되었다. 소비에트는 원래 러시아 사회주의 멘셰비키파에 의해 제기되었으며, 대중 조직화를 위한 노동자들의 자발적 요구에 의해 발생되었다. 3일 만에 페터스부르크 소비에트는 공장 노동자들 500명 당 한 명의 대표자를 선출하여 226명의 대표자들을 집결시켰다. 이 시기에 러시아에는 조직화된 노동조합은 전혀 없었고, 좌익 정당들도 단지 일부의 노동자 집단들만을 조직하고 있었고, 그것도 경찰의 감시활동에 의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당시 소비에트가 페터스부르크 노동자들의 명실상부한 집합적 대중조직이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트로츠키도 쓰고 있듯이, 소비에트의 자생적인 대중성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났다.

 

객관적인 필요성 -사건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제기되었던 필요성- 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소비에트. 소비에트는 권위있는 조직이었지만, 아직 정착된 전통이 없었으며, 실질적으로 어떤 조직적 기구도 가지지 않은 채 흩어져 있는 수십만 명의 민중들을 즉시 포괄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내의 혁명적인 흐름들을 통일시켰다. 그리고 그것은 독창적이고 자발적인 자기 통제를 수행할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에트가 24시간 만에 비합법영역(underground)으로부터 형성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시작부터 소비에트는 목적의식적으로 정치적 성격을 띠었다. 소비에트는 최초의 선언에서전 세계 노동 운동의 결정적이고 강력한 무기 -총파업-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발생된 총파업은 일주일동안 도시를 마비시켰다. 그 총파업이 끝나자마자 노동자들은 18시간 노동제를 자발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는 그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단지 부분적인 승리만을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이 알게 된 공장수준에서의 투쟁들과 국가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 사이의 밀접한 연관들은 켐페인 속에서 강조되어 표현됬다. 한 소비에트 연설가가 말했듯이,‘8시간 노동제와 총! 이라는 슬로건은 모든 페터스부르크 노동자의 심장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전쟁법이 공표되고 페터스부르크 인근의 크론슈타트(Kronstadt) 해군기지에서 항명자(mutineer)들이 사형 집행되어 대중운동이 위협받았을 때, 대중 자신들은 자신의 부분적 이익을 뛰어넘는 이슈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1월 초에 수십만 명이 소비에트의 지도 하에 다시 한번 총파업을 일으켰다.

이러한 투쟁들이 이루어지는 동안 소비에트는 자신의 군대를 만들고 노동자들을 무장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단지 소규모적으로만 가능했다. 곧 짜르 정부는 자신감을 회복하였고, 소비에트 지도자들을 체포하였으며, 소비에트 조직을 붕괴시겼다. 그 시기 모스크바에서 발발하였던 봉기는 진압되었고 러시아는 곧 암울한 반동의 시기로 들어갔다.

1905년 소비에트는 러시아 자체의 역사에 있어서도 독특한 것이었다. 이 시기 전까지는 사회민주당들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며 동시에 잘 만들어진 노동자 조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민주당은프롤레타리아트 내부의(within the proletariat)조직이었지만, 프롤레타리아들 중에 좀 더 선진적인 부분만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소비에트는 그 모두를 포함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of the prolerariat)' 조직이었다. 이를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당은 자발적인(voluntary) 조직이다. 개인들이 거기에 가입하는 이유는 이들이 당의 정치적 지향점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비록 혁명적 노동자당이 노동계급의 이해에 상응하는 세계관에 의해 지도될지라도, 혁명 이전에 당은 자신의 지향점을 공유하는 소수만을 가입시킨다. 1905년의 소비에트는 그람시가자생적노동자들의 조직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자발적(non-voluntary)이었다. 이런 점에서 소비에트는 집합적 단위들, 즉 개량주의자이건 혁명주의자이건 생산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노동자들의 집합적 단위들에 기반하고 있었다.

레닌은 1905년 이후에는 당과 소비에트간의 차이들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노동자의 두가지 조직형태 모두를 중요하다고 보았다:‘노동자들의 대표체인 소비에트를 선택할 것인가 당을 선택할 것인가? 나는 이러한 방식으로 질문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확실한 해답은 노동자들의 대표체인 소비에트와 당 둘 모두 필요하다이어야 한다.’ 레닌도 소비에트의 한계들을 막연하게나마 감지하고 있었다. 소비에트는 노동 계급의 의지를 조직하고 반영할 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혁명 기간을 제외하고는 자기 자신의 계급 이해에 대해 명확한 목적의식성을 획득할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가 계급과 다르다. 자본가 계급은 봉건제도를 타도할 즈음에 이미 자신들의 부를 수단으로 하여 (자유도시들, 대학들 등등을 통해) 독자적인 자신만의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확보했다.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의 부르주아 혁명은 이전 봉건시대의 틈새 속에서 자본주의가 건설되어 왔던 매우 오랜 과정을 마무리 짓는 행동이었다.

자본가 계급과 달리, 노동 계급은 착취의 직접적인 대상이다. 노동 계급은 독립적인 부와 문화를 박탈당하며, 매체, 교육, 상품생산 그 자체에 의해 지배계급의 독점적 이데올로기에 실질적으로 종속된다. 대중들은 혁명 시기 동안에 최고점에 이르게 되는 자기활동(self-activity)에 의해 스스로를 변화시킴으로써 그 자신의 이해에 대한 의식성을 획득하여야 한다. 그러한 시기가 도달해야 만이, 민주주의 기관으로서의 소비에트는 대중들의 의식변화를 반영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때에도 이미 대다수 노동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들로부터 독립되어서는 소비에트가 대중들을 지도하거나 이끌 수는 없다.

지도성은 혁명에 참여하여 앞서서 최종적인 목표를 인식하고, 그 목표를 향해 노동자들을 인도할 전략을 제공해줄 수 있는 조직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러한 조직이 당인 것이다. 이러한 구별을 염두에 두면서 레닌은 이렇게 썼다.‘소비에트 및 그것과 유사한 대중조직들은 그 단어의 엄밀한(narrow) 의미에서 볼 때, 투쟁의 역량을 즉각적으로 조직하거나, 봉기를 조직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1905년 혁명의 실패는 소비에트를 역사의 뒤편으로 밀어 넣었지만, 러시아 노동자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19172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는 농업 중심의 사회였다. 당시 전체 인구 12천만 명 중에서 단지 천만 여 명만이 노동계급을 형성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1917년에 이르러 페트로그라드(Petrograd)로 개명된 러시아의 수도는 발전된 자본주의의 모든 특성들을 극단적인 형태로 지니고 있었다. 튜린(Turin)나 베를린처럼 페트로그라드는 거대한 산업의 중심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1890년과 1914년 사이에 공장 노동자의 숫자는 세 배로 늘어, 그 수가 243,000여 명에 이르렀다. 1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150,000여 명이 더 추가되어 1917년 이 도시에는 러시아 노동 계급의 1/8이 거주하게 되었다. 신규 노동자 대부분은 당시 성장하고 있던 군수산업 부문에 채용되었는데, 3년간 금속 노동자의 숫자는 135%까지 증가했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 2/3이 금속산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글라스고우(Glasgow)나 베를린처럼 금속산업 노동자들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유럽 도시들처럼 소수의 거대한 회사들이 산업을 통제했고, 그 회사들은 수천 명의 노동자들을 공장으로 밀집시켰다. 페트로그라드는 19172,000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38개의 주요 공장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미 베를린조차도 앞서고 있었다.

이들 공장들 내에는 수많은 숙련공들이 있었으나 서유럽과는 달리 러시아의 숙련공들은 어떠한 분파적인(sectional) 직종별 노동조합 조직을 가질 수 없었다. 이것은 서구 유럽의 주목할 만한 특징인 숙련 노동귀족과 반-숙련 또는 비숙련노동자들 사이의 심원한 간극이 페트로그라드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914년 온 유럽을 삼켜 버렸던 애국주의적 광란의 물결은 러시아에서 만은 매우빨리 사라져 갔다. 인플레이션의 요동이 거세지자, 잠시 잠잠했던 파업의 물결이 1914년 들어 거세게 재등장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선두에 페트로그라드가 섰으며, 페트로그라드는 러시아 전체의 정치적 파업 중 72%를 차지했다. 통계적으로 볼 때 처음부터 정치적 쟁점들을 둘러싼 파업들이 경제적인 분쟁들보다 훨씬 많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 사이에서 즉자적 이익을 위한 경제적 투쟁들과 정치적인 행동 사이의 연관관계를 인식하기 시작한 실질적인(substantial) 운동세력가 있었다는 확고한 증거는 1915년에 그들이 볼셰비키들로부터 지원을 받았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볼셰비키당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당(Russian Social Democratic and Labour Party)에서 떨어져 나와 1903년에 설립되었다. 레닌에 의해 지도되면서, 볼셰비키들은 가장 용맹스러웠던 현장 투쟁성에 더하여 높은 수준의 혁명적 사회주의적 원칙들을 결합시켰다. 전쟁 기간동안 볼셰비키는 러시아의 패배가 노동자들에게는 득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비록 볼셰비키의 한 극단인 국제주의적 관점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전시산업위원회(War Industry Committees)-짜르정부가 군수품 생산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설립-1915년 선거에서 다수파가 되었다. 1903년의 분리로부터 생겨난 또 다른 당은 멘셰비키였다. 그들은 러시아 노동계급 안에서 주로 개량주의적 경향을 대변하였고, 멘셰비키의 많은 지도자들은 전쟁을 지지하였다.

짜리즘은 19172월 혁명으로 결국 붕괴될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는 다음의 두 가지 직접적인 원인에 기인하였다. 하나는 페트로그라드의 푸틸로프(Putilov) 공장 노동자들의 학살(victimisation)에 대항했던 파업이고 다른 하나는 주로 여성 노동자들이 외쳤던 빵을 달라는 요구였다. 223일 거리시위들은 군대와 대치하기에 이르렀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수의 군인들이 노동자의 편으로 넘어오게 됬다. 5일 뒤에 짜르 체제는 붕괴되었으며, 두개의 새로운 권력들이 창출되었다: 임시정부(러시아 자본주의를 대변하고, 과거의 국가유산을 계승함)와 소비에트가 그것이었다.

비록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227일에 형성되었지만, 노동자들에게는 2월 혁명의 시작에서부터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필요성에 대한 단상들이 널리 회자되고 있었고, 몇몇 대표자들은 224일에 곧바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동자의 노력들을 총화시킨 최초의 실질적인 조치는 2월 혁명을 통해 감옥에서 풀려난 우익 멘셰비키에 의해 형성되었다. 멘셰비키들은 1,000명의 노동자 당 한명의 대표자를, 군인 한 중대 당 한명의 대표자를 뽑는 것을 기초로 한 선거를 요청했다. 일주일 내에 약 1,200명의 대표자들이 매일매일의 회의들을 통해 만났다.

소비에트는 어떠한 질서정연한 구조적 틀거리로부터 성장하지는 않았다. 소비에트의 첫 모임을 목격했던 슈카노프(Sukhanov)에 따르면, 당시 소비에트 의장은

 

행동을 위한 총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지도 않았고, 회의가 왁자지껄하면서, 아주 혼란스럽게 진행되며 회의 자체를 통제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는 결코 소비에트가 이 첫 회의에서 자신의 기본적인 과제 즉 혁명의 사활이 걸린 과제 -페테스부르크 민주주의의 모든 이념적, 조직적 힘을 하나의 중심으로 집중시키는 일- 을 방해하지 않았고, 소비에트는 의심의 여지없이 권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신속하게 결단력 있는 행동을 할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1905년에 소비에트가 결여하고 있었던 핵심적인 요소는 군의 지지였다. 하지만 19172월은 그렇지 않았다.

 

의자(stools)에 서있는 군인대표자들의 손에는 소총이 쥐어져 있었고, 흥분되고, 무언가를 더듬거리며 말하면서도, 그들 각자에게 부과된 연설메시지를 결합시키기 위해 온힘을 다하였으며 …… 군인 대표자들은 번갈아가며 자신의 중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말했다. ……

혁명에 착수했던 위대한 각 연대의 이름들이 호명될 때마다 태풍처럼 몰아치는 박수갈채를 받았다. ‘우리는 모임을 가졌다……’ ‘우리는 의무적으로 말을 하도록 하였다……’ ‘장교들은 숨었다……’ ‘노동자평의회에 참여할 것……’ ‘우리모임에서는 우리가 더 이상 민중을 억압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거부하자는 의지를 소비에트 당신들에게 전달하도록 결의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노동형제들과 함께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민중의 대의를 방어하기 위해서 뭉쳤다 …… 우리는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목숨까지도 바칠 것이다.’ ‘우리 모임에서는 대표로 하여금 소비에트 당신을 환영한다라고 선언하도록 하였다……’ ‘혁명이여 영원하소서!’군인 대표자들의 외침은 모임의 격정적인 시끌벅적함에 묻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7백만 명에 이르는 러시아 군인들 중 얼마나 많은 수가 짜르를 거부하게 될 것인지 여전히 불투명했던 당시에, 이러한 물리적 힘의 후원은 소비에트의 사활이 걸린 정도로 중요했다.

몇 시간 내에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위원회의 소비에트는 과감하게 1905년의 한계를 넘어서 지배계급을 억압할 수 있는 권력 -국가의 성격- 을 획득하였다. 1905년 소비에트의 경우는 주로 정치적 총파업을 이끌던 위원회의 성격을 지녔다. 트로츠키가 설명했듯이 그 당시에는,‘파업의 혁명적 힘은 그것이 국가권력을 해체한다는 …… 사실에 있었다.’ 1917년 소비에트의 경우는 지배계급을 해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피지배 자신의 국가권력을 조직하는 것으로 나아갔는데, 이는 단지 페트로그라드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러시아 전역을 가로지르며 이루어졌다. 317일까지 49개의 도시들에서 소비에트가 구성되었다. 5일 후에는 그 숫자가 77개가 되었으며, 6월에 이르러서는 519개가 되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탄생한 후 바로 몇 시간 동안에 엄청난 통제력을 실행할 수 있었다. 그 맞은 편에는 적법한 국가권위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임시정부가 있었다. 당시 전체 정치권력 지형에서 임시정부의 위상은 322일 전쟁 장관인 구크코프(Guchkov)에 의해 다음과 같이 요약되었다.

 

임시정부는 어떠한 실질적인 권력도 갖고 있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명령은 단지 군대, 철도, 우편과 전보설비와 같이 권력의 핵심적인 구성요소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가 승인해 주는 한에 있어서만 실행될 뿐이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임시정부는 그것이 오로지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가 승인해주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확고한 정치권력 지형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자들은 2월에서 10월 사이에 존재했던 상황을이중권력의 한 유형으로 보았다. 트로츠키는 이중권력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혁명의 정치적 메커니즘은 하나의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권력이 이동함으로서 이루어진다. 강렬한 전복은 보통 짧은 시간에도 달성된다. 그러나 어떠한 역사적 계급도 하룻밤 사이에 종속적인 위치에서 지배자의 위치로 자신을 상승되지 못한다. 심지어 혁명의 밤일지라도 말이다 …… 역사적으로 혁명의 준비기간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발생시킨다. …… 새로운 사회체제를 실현하도록 요청받은 계급이 아직 국가의 지배자는 아닐지라도 국가권력의 중요한 부분을 자신의 수중에 실질적으로 집중시켜 나간다. 동시에 그러는 동안에도 국가 내 공공기관들은 여전히 구래 지배자들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 이것이 모든 혁명과정에서 나타나는 초기의 이중권력상태이다.

 

2월에 노동자들은 빵을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스스로가 군대에 도전하여야 하며, 병사들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여 조직적으로 이들을 소비에트에 결합시킬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빵을 위해 효과적으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 곧 부르주아 국가를 파괴하고 의식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려는 일반적의 의지가 있다는 것을 함의하는 것은 아니다. 맑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심지어 혁명의 시기에도죽은 세대의 낡은 전통이 살아있는 자들의 두뇌를 악몽처럼 내리 누르고 있었다.’2월 시기에도 러시아 노동자와 농민들은 소비에트를 통해 권력의 독점적 쟁취를 추구하지는 않았으며, 과거의 국가잔재를 일소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자본가들에게도 자신들의 임시정부를 조직하는 것이 허용되었던 것이다.

당시이중권력상태는 전쟁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전개된 일시적인 힘의 균형상태이었던 탓에 본래적으로 불안정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중권력은 혁명과 더불어 대중 활동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창출했다.

권력을 한 계급으로부터 다른 계급으로 이전시키기 위해서는 국가의 강제력이라는 외피(이는 생산의 사회적 관계를 방어하고 영속화시킴)를 파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사회혁명은 단순히 국가를 변화시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내에도 분명히 국가권력의 극적인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자본주의적 지배의 한 형태를 다른 형태로 바꾸었을 뿐, 계급권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데 실패한 많은 사례(1945년 이후의 동유럽과 1948년의 중요한 사례를 보라)들이 있다. 사회혁명은 사회의 근본적 토대를 -생산에서의 권력관계- 관통해야 한다. 사실상 이러한 상황은 2월 혁명 이후에도 일어났다. 짜르는 사라졌지만, 혁명은 위기발생의 근본적인 원인들을 -전쟁, 농민들의 토지소유욕, 공장에서의 자본주의의 야만적 지배- 해결하는데 실패하였다. 노동계급의 주도 하에, 대중들은 이러한 쟁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들을 즉각적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비록 상이한 접근법들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대중 스스로 조직하는 일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확산되었다.

여성 노동자와 같은 중요한 집단은 자신의 행동을 직접적이지만 탈-중심화된 투쟁을 통하여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다. 선전 선동의 경험부족으로 인해 그들에게는 잘 조직된 집단들에서 보여지는 고질적인 보수적 경향(conservatism)도 없었다. 그래서 여성들은 심지어 볼셰비키와 같은 혁명가들조차도 처음에는 주저하고 있을 때, 짜르에 맞서서 전면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운동이 형성되고, 운동에 일관된 형식이 부여되고 있는 시기에 여성들은 거의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사(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에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어떠한 방식으로 자기-활동성(self-activity)의 중심으로서 행동했는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부문들 사이의 일정한 불균등성도 보여줬다.

 

대중들은 집단을 이루어 사회주의자로 전향했는데,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을 소비에트와 동일시하고 있었다. 노동자들 그리고 후방의 거대한 주둔지에 있던 군인들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와 그 사무국에 대해 소외감을 느끼고 있던 도시의 다양한 소규모 인민들 -기계공, 노점상, 하급 공무원, 택시 운전사, 수위, 모든 종류의 고용된 자들- 은 더욱 가깝고, 더욱 접근 가능한 권위를 찾고 있었다. . .

고통 받고 있던 대중들 모두가 소비에트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즉 그 모두가 한꺼번에 자각했던 것이 아니었고, 억압받던 자의 모든 계층이 대담하고 즉각적으로 혁명이 자신과 관련이 있다고 믿었던 것도 아니었다. 많은 사람의 의식 속에는 다만 혼재된 희망만이 들끓어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대중들의 모든 활동적인 요소들은 소비에트로 흘러 들어갔으며, 활동성은 혁명의 기간 동안에 퍼져나갔다. …… 이것만이 혁명의 유일한 참된 토대였다.

 

소비에트의 방어를 위한 무장력에 보호받게 되자 광범위한 영역에서 대중조직들이 나타났다. (지역적 수준에서 중앙 소비에트의 일들을 수행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중앙 소비에트의 권위에 도전하기도 했던) 지역 소비에트, 노동조합, 다양한 의용군, 다양한 위원회 -군사 위원회, 농민 위원회, 공장 위원회, 주택 위원회, 대기행렬들(queses)을 줄이고 관리하기 위한 위원회- ,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었는데, 이를 통해 대중들의 창조적인 재능이 해방되었다.

아무래도 이러한 대중조직들에서 가장 중요한 집단은 혁명의 중심에 서서 사회적 힘을 이끄는 노동계급이었다. 왜냐하면, 대중 내의 다른 집단도 중요하기는 했지만, 내적인 단결력이나 생산과정에서의 위치로 인해, 핵심적인 역할은 산업 노동계급에게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를 둘러싼 가장 중요한 집합적인 기구는 공장위원회이었다. 공장위원회는 각 공장들에서 개최된 대중회합을 통해 선출되었다. 그들은 가끔 다른 부문에서 선출된 현장위원(shop stewards)으로 보충되거나 대체되었다.

소비에트와 공장위원회를 떠받치고 있던 현장조직화를 위한 실천과 선거는 20세기 초에 있었던 집단적 조직화를 위한 최초의 노력들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지속적으로 억압되어 왔지만, 그것은 기회가 주어질 때면 항상 표면에 재등장하곤 했다. 현장 조직화는 영국에서 볼 수 있었던 경향 -협소하게 정의된 직종별로 이루어진 분파적 조직으로부터 전개되었던- 과는 상반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현장조직화 경향성은 많은 산업을 성장시켰던 대량생산이라는 조건들을 반영하였다. 1905년의 경험이‘8시간 노동제와 총이라는 슬로건 속에서 정치와 경제를 결합시켰듯이, 국가의 구체제에 맞선 1917년의 소비에트의 공세는 공장에서의 자본에 대한 직접적 공세와 동시적으로 진행됬다.

이러한 두 번째 전선(공장에서의 자본에 대한 직접적 공세)의 적절한 사례는 여성이 대부분이었던 케레스텐(Keresten)의 뜨개질 노동자들이 제기했던 요구목록들이다.

 

1)‘그의 취임에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고', ‘그가 노동자들을 야만적인 방식으로 다루었으므로뜨개질 부서장()에 대한 즉각적인 해임.

2)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즉각 도입하고, 임금 수준에 대한 정밀조사에 근거해 총임금을 50%까지 상승시킬 것.

3) 혁명 기간 동안에 대한 임금 지급

4) 임금이 2주마다 지급되도록 할 것.

5) 불량품은 노동자들에게 한정된 가격으로 판매할 것.

6) 초과노동은 자발적이게 하며 1.5배의 임금을 지급할 것.

7) 공장장이나 관리자 대표의 허락없이도, 참석없이도, 모임을 가질 수 있는 권리.

 

이러한 요구들은 당시에 가장 일반적인 요구들로, 모임을 가질 권리라는 단순한 요구에서부터, 가장 진보된 권리 즉, 경영할 사람을 결정할 권리와 혁명적 파업 행동의 시기 동안에 임금을 받을 권리까지 망라되어 있다.

과거의 공장 관리자(administration)에 대한 제거는 노동자 모두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실시되었다. 푸틸로브 공장에서는 감독관들과 그 측근들이 실제로 살해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또 다른 40명의 관리자는 쫓겨났다. 3월에 공통되게 목격되던 광경은 특별히 미움을 받고 있었던 고용주와 공장 감독관이 작업수레에 실려 생산 현장밖으로퇴출된 것이었다. 임금 잇슈 또한 공장위원회의 핵심적인 관심사였으며,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는 7월까지 매월 적어도 평균소득의 두 배를 받을 수 있었다.

2월 혁명은 경찰력을 파괴하였으며, 4만정의 소총들과 권총들을 확보하였다. 두 개의 의용군(militia forces)이 경찰력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 중 하나는 시민의용군으로, 이들은 대체로 임시정부를 지지했다. 다른 하나는 주로 공장단위에기반하여 직접 결성된 노동자 의용군이었다. 페트로그라드 전선 공장을 예로 들자면, 천명의 노동자 당 100명의 자원병들이 소집되었다. 노동자 의용군에 대한 임금은 고용주들에게서 징수됬으며 노동자 의용군의 지원자들은 순번제로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대중의 외부에서, 그리고 대중에 반하여 조직되었던 구래의 경찰력이 구성되었던 방식은 심각하게 해체되었다.

공장위원회의 대표자들은 외견상으로는 지협적인 문제들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대개는 당 노선에 기초하여 선출되었다. 이러한 점은 대부분의 노동계급이 지녔던 심오한 정치적 성격을 반영한다. 소비에트처럼 공장위원회도 처음에는 개량주의자들 즉, 농민대중의 지원을 받으며 일부 노동자들의 동조를 받았던 당인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SRs)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공장위원회 지도자들도 소비에트의 핵심에 있었던 개량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혁명을 자본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지 않고, 단지 비민주적인 짜르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만 인식하였다. 그들의 우선적인 목표는 생산과 분배와 관련하여 노동자 통제를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공장에서 일종의 이중권력을 수립하는데 있었다. 임시정부가 수행하는 일들에 대해서 조사하고 감독할 권리를 주장하고 있던 소비에트처럼, 공장위원회는 공장 경영에 대하여 감시만을 지속하려 하였다. 그러나 작업현장에서의 이중권력은 국가적 수준에서의 이중권력 만큼 안정적이지 못했다.

국영기업에 대한 경영권이 맨 먼저 대체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국영기업의 경영권이 짜르 체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생산을 중단하고, 사업장을 폐쇄하려고 한 민간부문 사적자본가들도 대체가 곧 뒤따랐다. 현장노동자들은 2월 혁명 이후에 만들어진 대중조직들 중에서, 지역 소비에트나 중앙 소비에트보다는 공장위원회에 가장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대개 지역 소비에트나 중앙 소비에트에서는 상대적으로 더욱 후진적이었던제복을 입은 농민들’-군대-이 더욱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공장위원회는 계급적 분위기의 많은 변화들을 가장 먼저 드러내었다.

노동조합도 역시 2월 혁명 이후의 놀랄만한 성장을 향유하였다. 혁명 전 페트로그라드에는 14개의 작고 영향력 없는 노동조합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11개가 불법 노동조합이었다. 그러나 6개월 동안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 중에서 약 390,000 명이 아주 다양한 노동조합들에 가입했다. 이로 인해 이 도시는 전 세계에서 노동조합 가입률이 가장 높은 도시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노동조합들도 다른 노동 계급의 대중조직들처럼 혁명 이후에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지배 하에 놓였다.

다양한 대중조직들은 이러 저러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민중들의 긴급한 요구들을 반영하면서 서로 결합되어 나갔다. 소비에트는 완전한 국가권력으로까지는 성장할 수 없었는데, 이는 10월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노동자, 농민, 군인의 다양하고 즉자적인 투쟁이 의식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는 공장위원회나 연대 단위의 군대위원회와 같은 부문 조직들로 구성된, 분절적인 조직형태를 띄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소비에트가 이러한 부문조직들이 활동할 수 있었던 정치적 자유의 공간을 지탱하여 주지 않았다면, 이러한 부문조직들은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비에트에서의 정치

 

당원 자격은 소비에트나 공장위원회 같은 대중 조직들보다 더욱 엄격하였다. 해당 도시나 공장의 노동자 모두를 통합시켜낼 수 있었던 소비에트나 공장위원회와 같은 대중조직들과는 달리, 당들은 동질적인 정치적 이념들을 폭넓게 공유하고 있는 그러한 집단만을 포괄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정치지향적인 당조직은 대중조직 내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할 수 없었던 의식의 통일성과 일관성을 지닐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필연적으로 소비에트나 공장위원회들을 지도하게 되었다. 이 점은 바로 그 시작부터 명백한 것이었다.

19172월부터 8월까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연합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들은 주로 관료주의적인 일처리 방식들을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소비에트에 그들의 영향력은 막강하였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들의 생각들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에서 나왔다. 3월 동안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소비에트 총회에서 2,800명 대표자 대부분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주요한 반대 세력이었던 볼셰비키는 겨우 65명의 대표자들에게만 지지 받았다.

멘셰비키-사회혁명당의 프로그램은 노동 계급이 권력을 쟁취할 수는 없으며, 임시정부로 대표되었던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이 짜르체제를 대신할 것이라는 전망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멘셰비키인 체레텔리(Tseretelli)는 이르쿠츠(Irkutsk)에서의 망명에서 돌아와 소비에트 내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멘셰비키-사회혁명당의 프로그램을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물론 당신들은 부르주아 계급과의 타협이 과연 필요한가를 논쟁하려고 할 것이다. 그것 이외에는 혁명을 위한 다른 경로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임시]정부는 우리가 손가락만 까딱해도 사라질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대재앙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정치적 전망은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로 하여금 임시정부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되도록 많이 철회하도록 하였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모든 소비에트에 대한 지침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임시정부는 전 러시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임시정부의 모든 결정사항은, 소비에트에 의하여 이의가 제기되지 않는다면, 수행되어야만 한다. 그들이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자유의 근원을 침해하지 않는다면, 모든 임시정부의 기관들과 위원(comissar)은 합법적인 권위들로서 간주되어야만 한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민주주의적인 문구들로 자신의 프로그램을 위장하려 했다. 예를 들면, 그들은 보통선거에 의해 선출된 제헌의회(Consituent Assembly)만이 러시아 민중을 대표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반면 소비에트는 소수의 사람들만을 대표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재로는 그들의 정책은 한줌의 러시아 부르주아지 계급의 지배에 수백만 명의 노동 계급과 농민 계급을 종속시키겠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또한 매 시기마다 좌파적 문구들로 자신을 숨기려고 했지만, 그것은 사실상 부르주아지 계급의 정치적 프로그램 대부분을 수용하겠다는 것에 불과했다. 예를 들어 소비에트의 지도자들은 전쟁의 지속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협상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소비에트는 자본주의의 유지를 지지했지만, 자본가들에게 그들의 노동자를 친절하게 대하라고 촉구했다. 농민대중을 기반으로 했던 사회혁명당은 명목상으로는 농민의 토지 소유를 지지했지만, 미래의 어느 때가 되면 실행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결국 토지에 대한 농민의 직접적인 점거를 반대했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집행위원회를 좌우했던 이들의 일반적인 정책들은 지속적으로 소비에트가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인민들의 직접적인 요구들과 부딪혔다. 이것의 분명한 사례는 그 유명한 명령 1’(Oder No 1)였다. 이 명령은 군대에 관련된 것으로, 모든 부대 단위에서의 위원선출, 소비에트의 권위에 맞서는 어떠한 지시도 받아들이지 않을 권리, 병사 위원회의 수중으로 무기를 통제해야 한다는 점을 포함해 총 7개의 사항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데네킨(Denikin) 장군에 따르면, 이러한 단순한 조치들만으로도낡은 군대의 해체과정에 처음이자 가장 주요한 영향을 주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낡은 군대(Old army)는 절대 권력을 쥐고 있던 상류 계급의 소수 장교집단을 의미했다. 이제 낡은 군대는 대중들과 그들의 대표 조직에 대변하는 새로운 군대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병사대표들 사이의 미묘한 의견 차이들은 짜르 편에 있던 장교계급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로 인해 통일될 수 있었다. 병사대표들은 소비에트의 지도부에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했다. 그들은 집행위원회을 포위하여, 집행위원들이명령 1를 쓰도록 강제하였다. 그러나 한 역사가가 다음과 같이 말했듯이,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이 문서에 대해 매우 혼란스러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으로, 그들은 소비에트로 반란자들의 지지가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고 시도했는데, 그 이유는 그러한 집중된 지지가 불가피하게 소비에트가 권력을 획득하라는 요구로 나아가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병사들이 느끼던 강렬한 분노와 두려움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는데 이는 병사들이 장교들에 대한 광범위한 살인을 유발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소비에트 내 지도부와 기층 대중간의) 의견충돌은 하루 8시간 노동제가 뜨거운 쟁점이 되었을 때 명확해 졌다. 많은 노동자들은 혁명을 촉발시킨 총파업이 짜르를 처단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노동일의 단축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멘셰비키 의장이었던 치크하이드체(Chkheidze)는 군수산업에서의 작업혼란을 당장 끝내기를 원했다. 37일부터 업무에 복귀할 것을 요구하는 그의 안건이 소비에트 의회에서 통과되었지만, 그 결정사항은 기층대중으로부터의 저항에 부딪혀야 했다. 페트로그라드의 공장 소유주 단체는 복귀가 명시된 날에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공장이 111개 공장 중 28개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침내 소비에트 지도부는 또다시 인민의 요구에 응답하라는 외적인 압력에 굴복하여, 310일에 고용주와 8시간 노동제를 협상할 수밖에 없었다.

명령 1의 통과과정과 노동시간 단축 운동은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와 대중정서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사이의 벌어짐은 집행위원회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지도 하에서 활동할 때마다 나타났다. 집행위원회 구성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수카노프(Sukhanov)는 이후에 소비에트의 전체 회기 동안우리는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은 채, 우리 일에만 집중했다'고 썼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노동자 대표들과 병사 대표들의 첫 모임을 조직해왔던 지식인 집단에 의해 임시적으로 구성됬다. 소비에트의 위상은 첫번째 전체회의를 통해 확고해졌다. 주도적인 멘셰비키들과 사회혁명당이 첫 모임을 통해 공동 추인되자, 집행위원회는 긴급한 문제들을 처리할 수 있는 12개의 하부위원회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조직을 확대시켰다. 이후에 7명으로 이루어진집행위원회 사무국’(Bureau of the Executive Committee)이 수많은 일상적인 의사결정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대중들과 분리되어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특정집단이 등장하는 것은 소비에트와 같은 민주적인 대중조직들에서 조차도 관료제가 등장할 수 있는 위험성을 알려주었다. 또 다른 혼란스러운 면도 있었다. 150,000명 병력의 페트로그라드 수비대는 약 2,000 명의 대표들을 소비에트에 파견했다. 반면에 노동자들은 그 수가 병사들보다 두 배나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8백 명의 대표들만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 대표구성에 있어 이러한 불균형은 노동 계급이 얼마나 군인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희망하였는가를, 그리고 농민계급과의 동맹을 확고히 하고자 했는가를 보여줬다 (왜냐하면 군인들의 대부분이제복 입은 농민들이었기 때문이다). 농부 개인들은 산업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집단적인 경험과 연대의식이 결여되어 있었고, 군대에 징집되기 전까지 그들의 사회적 지평은 경작하던 논밭의 범위로 제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비에트 대표들 중에서 병사들의 우세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정치를 왜곡시켰고 병사들의 보수적인 측면에 (소비에트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가질 수 없었던, 강한 목소리를 제공하였다.

공식적 관점에서 이 모든 요소들은 소비에트를 비민주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적인 조직들은 무엇보다도 규정(regulation)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직이 체화하고 있는 계급적 내용과 그들이 대표하는 계급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통해 만들어진다. 권력을 갖지 못한 계급에게는 어떠한 민주주의도 있을 수 없다. 소비에트의 불안정함 - 즉흥적인 성격과 대중 속에서 통치경험 부족과 정치적인 이해의 결여 - 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매우 면밀한 선거과정에 의해 선출된 의회보다도 더욱 민주적이었다. ‘명령 18시간노동제의 실시 과정 속에서 대중들은 자신들의 수중에 물리력을 장악하고 있는 한, 민주주의는 오히려 더 활기를 띠게 된다는 점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주의는 소비에트 내부로부터 지속적으로 침식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소비에트의 지도 집단이 임시정부의 권력을 보강해주려고 하는 한, 소비에트는 자신의 실질적인 대중 기반을 상실할 위험 즉 마치 여느 부르주아 의회처럼 민주주의로 위장하고 있지만 사회 안의 중요한 결정사항에 대해서는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속 빈 껍데기, 말만 무성한 곳이 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볼셰비키 당은 소비에트 내의 논쟁에서 좌파의 입장이었지만, 3월 동안에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바이보그(Vyborg)라는 금속노동자 구역에 있는 볼셰비키의 조직이 극좌적 입장, 강력한 반 임시정부 노선을 취했다. 반대로 당의 중앙 기관지 프라우다(Pravda)를 장악하고 있던 스탈린과 카메네프(Kamenev)는 다른 정치 정당들에 대해서나 임시정부에 대해서 다소 타협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4월에 와서야 망명지로부터 돌아온 레닌에 의해 이러한 당 내 불일치들이 해소될 수 있었다. 그는 2월 혁명이 별 어려움없이 진행된 것을 이유로 하여, 계급간 협력을 통해 평화로운 진보가 가능할 것이라는 환상에 대해 즉각 단절해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함으로서 당을 설득하고 장악했다.

레닌이 1917년 소비에트를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은 자신이 기존에 주장했던 원칙이라기 보다는, 당시 계급역량의 수준에 대한 엄밀한 판단에 기반해서 였다. 그가이중권력’(Dual Power)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듯이 말이다.

 

모든 혁명의 기본적인 문제는 국가권력의 문제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 혁명에 대한 지도는 말할 것도 없고, 혁명에 대한 어떠한 지적인 참여도 할 수 없다.

 

대안 권력으로서의 소비에트의 중요성은 그것의 제도적 절차들에 있지 않았다.

 

이러한 정부(소비에트)의 정치적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혁명적 독재이다. , 혁명적인 장악, 아래로부터 인민의 직접적인 주도성에 기반한 권력이지 법률에 기반한 중앙 집중화된 국가권력이 아니다.

 

4월 테제(April Theses)에서, 레닌은 앞으로 나아가야할 경로이라고 판단된 것을 설명했다. 레닌은 노동자 국가를 만듬에 있어 소비에트를 당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라든지, 반대로 당을 소비에트에 합침으로 인해 목표가 국가권력이라는 점을 망각하는 것이든지 이후 과정에서 소비에트를 무시하려는 경향의 위험성을 지적하였다.

 

나는 4월 테제에서 매우 명시적으로 산업 노동자와 농업 노동자의 소비에트와 농민과 군인의 평의회 내부에서 영향력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 나는 테제에서 대중실천적인 요구에 부합할 수 있도록 참을성과 끈기 있는설득(explanatory)’작업이 필요하다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 블랑키주의는 소수에 의한 권력 장악을 의미한다. 반면에 소비에트는 명실상부하게 인민 대다수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조직이다. 소비에트 속에서 영향력을 획득하기 위해 투쟁으로 집중시키려는 과제로 인해 (역주: 소비에트 기층대중이 아니라 소비에트 대표들에게만의 비공식적 영향력 획득으로 관심을 좁히는) 블랑키주의라는 함정으로 빠져들어서도 정말로 안 된다. 그것은 아나키즘의 함정에 빠져서도 안 되는데 왜냐하면 아나키즘은 이행시기에 국가와 국가권력에 대한 필요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레닌은 다음과 같은 점을 명백히 하고자 하였다. 즉 볼셰비키 당은 소비에트 내부에서 활동해야 하는데, 이는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자본주의적 지배를 위장하는 뒤범벅된 당의 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대중들 스스로의 힘으로 국가권력을 철저히 장악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말이다. 이를 요약해 주는 슬로건이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이다. 레닌이 주장하는 입장의 명확함은 민주주의 제도 및 이에 대한 추상적 요구들로 파생되는 환상에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었으며, 오히려 모든 것을 현실 계급투쟁과정에 대한 냉정한 판단에 근거하도록 함으로서, 당이 철저하게 혁명을 급진전시키고 전환시킬 수 있도록 하는데 귀중한 지침을 주었다는 점이다.

 

세 가지 시위

 

비록 혁명이 대중의 모든 영역들에 활기를 불어 넣었지만, 근저에 깔린 사회적 세력간의 역관계가 변화하는 것은 쉽게 파악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회적 세력간의 역관계는 다음의 세 가지 정치적 위기들을 통해 구체화되었는데, 그 위기의 폭발은 사회적 토대에서의 쌓여진 긴장들의 결과이자 동시에 앞으로 투쟁과정의 향방을 결정하였다.

정치와 경제의 상호작용, 즉 정치적으로 앞서 있던 노동계급의 정치적 전위집단과 전투적이기는 하지만 경제적인 문제로만 집착했던 현장투사집단 사이의 상호작용은‘4월의 날들’,‘6‘7월의 날들에 있었던 시위의 배경을 이룬다. 당시 레닌은 이러한 시위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세 번의 위기들 모두에서, 운동은 시위의 형태를 취했다. 반정부 시위였다는 점이 당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가장 정확한 공식적인 설명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평범한 시위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즉 그것은 시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기는 했지만, 혁명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혁명과 반혁명이 함께 폭발했던 것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종종 중간계급의 요소들이 갑작스럽게 제거되고, 프롤레타리아적 요소들과 부르주아적 요소들이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보였다.

 

4월에 있었던 첫 번째 위기는 임시정부 외무장관인 밀류코프(Miliukov)가 동맹국들에게 현재 진행된 평화에 대한 모든 논의들은 무시되어야 한다는 문서를 발행했을 때 일어났다. 그에 의하면, 임시정부의 진정한 의도는세계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얻는 것이라고 하였다. 420, 이에 항의하는 노동자들과 병사들의 대중시위가 거리를 매웠고, 밀류코프의 제국주의 노선을 옹호하는 우익 시위대와 충돌했다. 볼셰비키의 슬로건(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이 노동자의 측에게 많은 각광을 받았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기관지인 이츠베스타(Izvestia)에서 다음과 같이 불만을 토로했다.

 

소비에트는 자신의 수중으로 권력을 획득하고자 갈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의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던 현수막들에는 정부 타도 및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전시키라는 요구들이 쓰여 있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임시정부로의 권력이전을 반대하는 시위대와 마주치지 않고자 하였다. 그들은 더 이상의 거리 활동들을 금지한다고 공표했다. 거리활동의 금지가 공표되어 관철된 것은 소비에트에 대한 계속적인 신망과 더불어 볼셰비키가 즉각적인 봉기보다는 자신의 정책들을끈기 있게 설명하는정책을 펼쳤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임시정부가 이전의 입장으로 되돌아간 새로운 외교문서를 발행하고, 밀류코프와 전쟁장관 구크코프(Guchkov)가 사임하였을 때, 위기는 종결되었다.

이러한 사건들 속에서 소비에트가 했던 역할에 관해서 쓴 트로츠키의 설명 역시 이어질 위기에 대해 다루고 있다.

대중의 공세적인 결의와 이를 마지못해 정치적으로 반영하려는 것 사이에서의 좌시할 수 없는(crying) 모순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혁명의 시기에, 억압받는 대중들은 자신들의 대표들을 통해 공식적인 요구를 표현하는 것을 배우기 전에 보다 쉽고 빨리 직접 행동(direct action)을 시도한다. 대의 체계가 더욱 추상적일수록, 그것은 대중들의 활동성을 결정하는 사건들의 리듬에 뒤떨어질 것이다. 가장 적게 추상화된 소비에트라는 대의 체계는 혁명의 조건 속에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

그러나 공장들과 군대들과의 -, 활동적인 대중들과의- 유기적 결합이라는 장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는 대의 기관이기 때문에, 결국은 의회주의로의 수정과 변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대의성(representation)에 내재하고 있는 모순은, 비록 소비에트 형태라도 할지라도, 그것이 한편으로는 대중의 행동을 위해 필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의성은 쉽게 대중의 행동에 보수적인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실천적 방법은 지속적으로 대표들(representation)을 갱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단순할지라도 그 대의체계 운용은 혁명 속에서의 직접적 행동의 결과이므로 늘 행동에 뒤쳐져 벌어질 수밖에 없다. 어쨌든 4월의 봉기시기 이후에도 …… 동일한 소비에트 위원(역주: 4월 혁명기간 동안 대중의 의지에 반해 행동했던 소비에트 위원)들이 예전처럼 소비에트에 앉아 있었다. 일단 평상시 익숙한 상황이 다시 돌아오자, 대중들은 익숙한 지도자의 행동에 투표를 했다.

 

‘4월의 날들’(April Days)2월 이후로 존재하고 있던 내적 긴장들을 더욱 악화시켰다. 소비에트의 지도력은 우파 쪽으로 옮겨갔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 기반하고 있던 멘셰비키-사회혁명당 지도자들은 임시정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로지 소비에트가 임시정부에 대해 직접적으로 개입함으로서만이 가능하다고 인식했다. 그래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연립내각구성에 6명의 장관급 직책을 받아들이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더욱 직접적인 책임을 담당하는데 동의했다. 다른 한편으로 소비에트의 기층현장 분위기는 그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볼셰비키는 금속산업 공장들에서 첫 결실을 맺었던 대표자 재선출을 위한 대대적인 켐페인을 시작했다. 5월이 되어서는 바이보그(Vyborg)와 바슬리에프스키(Vasilievsky)와 콜롬마(Kolomna)에서 좌익세력이 지역 소비에트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특히 우익 멘셰비키의 기반은 붕괴되었다.

한 역사학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오로지 사회혁명당의 상대적인 쇠퇴와 더불어 공장에서 멘셰비키가 실질적으로 사라지고, 반대급부로 볼셰비키가 성장하였던 현상은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지지가, 비록 배타적이지는 않았지만, 노동계급의 숙련공 집단으로부터 온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노동 계급의 숙련공 집단이 바로 좌익과 우익의 주요한 전투장이었던 사회 민주주의적 지지기반이었다. 6월 말까지 여기에서의 투쟁은 대체로 끝이 났다. 반면 비숙련 노동자 집단에서의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투쟁은 거의 결정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비숙련 노동자 집단의 지지를 받기 위한 볼셰비키의 노력은 이후 몇 년 동안 민감한 사안으로 등장할 경제위기에 대하여 당의 입장을 명확히 함으로서 원칙적으로 승리하였다. 정치적으로 경험이 많은 숙련공 집단은 계급투쟁에 새롭게 합류한 집단들에 비해 더 쉽게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대안에 도달하였다. 반면 계급투쟁에 새롭게 합류한 집단들이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대안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국지적인 경제투쟁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실제적 경험을 해야만 했다.

6월에 전개된 사건들은 그 다음에 다가올 위기를 예견하였다. 63일 처음으로 러시아 소비에트 전국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약 2천만 명의 유권자를 선거에 등장시켰다. 혁명 집단은 3월보다는 그 영향력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유권자의 1/5 이하의 지지만을 받았다. 소비에트 전국회의에서 여전히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지지기반은 3달 여 동안 혁명적인 폭풍을 목격하였던 페트로그라드보다는 여타 지역에서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당시 소비에트 대의원들은 임시정부와 타협하려는 정책에 대해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지만, 곧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볼셰비키 당은 610일에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이슈를 걸고 시위를 하였다. 나아가 페트로그라드 공장 위원회의 1차 회의는 경제적 혼란(dislocation)의 유일한 대안은권력을 소비에트의 수중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라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규율 잡힌 볼셰비키 당은 있는 힘을 다해 위기에 대한 해결책 및 프로그램을 설명함으로서 공장수준에서 나타나는 이중권력과 국가수준에서의 위기를 상호연계시겼다. 볼셰비키는 공장에서 경험하는 노동자들의 체험을 토대로 하여 이를 기초적인 장기적인 이익을 가능케하는 정치적 조치로 까지 연계시킴으로서 (공장체험과 정치적 요구간의) 상호연관성을 보여 주고자 노력했었다. 이러한 투쟁은노동자 통제를 위하여라는 슬로건 하에서 전개되었다. 스티븐 스미스(Steven Smith)민주화된공장 생활에 대한 욕구가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개념까지 이르게 되었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노동자 통제는 기초적 단계에서 생산을 감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생산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시도로까지 발전했다. …… 3월부터 4월까지의 첫 번째 시기에 노동자 통제는 주로 국영기업들에 한정되어 있었다. 공장 위원회들은 모든 곳에서 공장 내 관계의 민주화를 위하여 고용 및 해고에 대하여 일정한 통제력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시기에 자본가들은 대체로 미래에 대해 불안해 하지 않았고 또한 노동자들에게 일정한 양보를 할 준비도 하고 있었다. 5월부터 6월까지의 두 번째 국면에 들러서면서 대부분의 공장 위원회들은 원자재 및 연료 공급에 대한 감시와 더불어 공장들에 대한 효율적 가동여부를 점검/개입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가 이러한 노동자 통제 운동에서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했던 것은 이 시기였다. 7월부터 8월까지의 세 번째 국면에는 경제 위기가 분출했고 계급갈등은 심화되었다. …… 9월부터 10월까지의 네 번째 국면에는 …… 심각한 경제적, 정치적 위기가 있었고 계급투쟁은 극단으로 치닫았다. …… 공장 위원회들은 권력을 소비에트에 이전시키기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정부를 설립하자는 요구에 대해 소비에트 전국회의(Congress of Soviets)는 그러한 요구가 공식화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처럼 소비에트로의 권력을 요구하는 시위가 소비에트 이에 대한 전국회의(Congress of Soviets)의 저항과 동시적으로 진행되었던 역설(paradox)적 과정은 현실에서 회피될 수는 있었지만, 그 과정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소비에트 전국회의는 공장들과 각 부문들에서 소비에트의 국가권력화 반대안에 찬성하도록 하기 위해 과반수가 넘는 대의원들을 공장과 각 연대(regiments)에 파견하는데 69일 밤을 다 소모했다. 하지만 그들이 다음날 발표했던 아래와 같은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대중들의 시위를 막은 것은 그들의 노력들이 아니었다.

 

대의원들은 어디에서든 극도의 적의를 가진 사람들과 마주쳐야 했고 긴 논쟁들을 거친 후에야 다음 장소로 이동할 수 있었다. …… 중앙의 소비에트 전국회의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든 조그만 권위도 갖지 못 했다. 그것들은 단지 임시정부와 다름없는 것처럼 이야기되었다. 예컨대 멘셰비키-사회혁명당 다수파가 부르주아지와 제국주의에 스스로를 팔아먹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 오로지 볼셰비키들만이 신뢰를 받고 있으며 시위가 발생하느냐 마느냐는 오로지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달린 문제였다.

 

610일의 시위를 취소하게 만든 것은 때 이른 한 판 대결을 방지하려 했던 볼셰비키의 노력이었다.

소비에트 내에서의 지도력은 한번의 혼란을 겪은 이후민주주의 세력들(democratic forces)’간의 단결성을 보여주는 시가행진을 즉각적으로 전개함으로써 투쟁의 다른 형태를 창조해냈다. 이러한 사건 전개는 볼셰비키의 완벽한 승리이자소비에트 다수파의 면전에 내리꽂히는 통렬한 채찍질에 다름아니었다. 618일에 행진했던 40만 명의 사람들 중 대다수는 공식적으로 소비에트의 플래카드를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배후에는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10명의 자본가 장관(Down with Ten Capitalist Ministers) 타도라는 볼셰비키의 슬로건이 있었다.

6월의 위기는 국방장관 케렌스키(Kerensky)가 새로운 무력 공세를 취함으로써 다시금 싹트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무력공세는 다만 위기를 1~2주 지연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임시정부가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에게 공세를 취하라고 명령했을 때 위기는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73, 1 기관총 연대는 이 명령에 불복하여 무기를 들고 거리로 나오기로 결정했다. 1 기관총 연대는 수도에 있는 노동자들과 병사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운동의 추진력을 확보하기 위해 이들은 볼셰비키당의 일부를 자신의 운동에 참여시키기도 하였다. 비록 볼셰비키당의 당시 정책적 방향에 반대될지라도 말이다. 4월과 6월에 드러났던 계급 적대의 심화는 수도를 전쟁 상태로 이끌 수도 있는 어떤 거대한 시위가 있을 것을 암시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페트로그라드가 러시아 전체를 대표하지는 않았다. 수도에 사는 대중들은 당시 그 어느 곳보다도 훨씬 앞서 나갔다. 이러한 진보적인 발전은 볼셰비키당의 성장 과정에도 반영되었는데, 5월 경에 들어 볼셰비키 당은 공장위원회의 다수파가 되었고 지역 노동조합들에도 약간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군대 역시 점차 볼셰비키의 생각에 찬성해갔다. 하지만 그 구성이 복잡했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들과 경직된 멘셰비키-사회혁명당 다수파들에게는 아직은 혁명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단지 노동 계급만이 재선거를 통해, 73일 저녁 늦게 볼셰비키를 다수파로 만듦으로써 상황을 반전시켜냈다.

시위의 자생적인 폭발현상에 직면하여 레닌은 다음의 세 가지 핵심적인 요소들을 고려해야 했다: 소비에트의 현재 상태, 첨예화된 계급투쟁. 페트로그라드에서의 혁명적 전위들이 고립될 위험성. 레닌은 상황을 다음과 같이 파악했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있어] 소비에트로 권력을 평화롭게 이전시킬 수 있으리라는 환상은 땅에 파묻어버려야 한다. 권력은 이전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총으로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일련의 사태들은 다음과 같이 진행될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우리 조직의 힘을 파악하고, 대중들이 거기에 참여하는 무서운 속도에 대해 고려한 후, 우리에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주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며, 대중들을 탄압할 빌미를 주고 이들을 분쇄하고 분리시킬 수 있는 시위를 촉발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 기울일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명확한 슬로건(평화적인 수단으로 권력을 획득할 수 없다는 슬로건)을 제시함으로써 바로 당장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가까운 미래에 어떤 사건을 통해서든 가능한 한 가장 강력한 방식으로 우리 스스로를 조직할 수 있도록 하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볼셰비키 중앙 지도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73일과 4일에는 무장 시위대들이 페트로그라드 거리를 가득 매웠다. 시위대들은 광범위한 공장들 및 군대의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운동 전략은 혼란스러웠다. 예를 들어 제1 기관총 연대(regiments)는 오로지정부가 노동자, 병사, 농민 대표들(deputies)로 이루어진 전 러시아 소비에트로 대표되는 민주주의 세력에 의해 장악될 때에만그 정부의 명령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같은 이유에서 그들은 현재의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 도전하기 위해 무력을 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만약노동자, 병사 대표들의 소비에트가 우리 또는 여타의 혁명적인 연대들(regiments)을 강제 해산시키겠다고 위협한다면, 우리는 이에 대응해 임시정부 및 이를 지원하는 다른 조직들을 분쇄시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두 개의 또 다른 진술들이 ‘7월의 날들(July Days)'의 모순들을 선명하게 묘사해준다. 사회혁명당의 지도자였던 빅토 체르노프(Victor Chernov)가 시위자들을 잠잠하게 만들려고 노력했을 때, 어떤 사람이 외쳤다. ‘개새끼, 너에게 권력이 주어지면 그걸 가지고 꺼져버려라!’ 다음에는 한 공장 대표가 손에 총을 쥐고 소비에트 집행위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우리는 10명의 자본가 장관들이 [임시정부에서] 물러나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소비에트를 신뢰한다. 하지만 소비에트가 신뢰하는 자들은 신뢰하지 않는다.’

트로츠키는 이러한 태도들을 다음과 같이 적절히 묘사했다.

 

7월의 시위자들은 소비에트로 권력을 이전시키기를 원했으며 이 때문이라도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권력을 접수하는 것에 동의해야만 했다. 그러나 비록 수도에서는, 대다수의 노동자와 수비대 중 적극적인 집단들은 이미 볼셰비키를 지지하고 있었을지라도 소비에트의 다수파는 -모든 대의제 체제에 적용되는 관성의 법칙으로 인해- 여전히 쁘띠부르주아 정당들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부르주아지에 맞선 시도들을 곧 자신들에 맞서는 시도라고 간주하였다.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소비에트 다수파들의 성향과 소비에트의 정책 사이의 차이, -다시 말해, 그들의 현재와 과거 사이의 차이를 충분히 명확하게 느꼈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소비에트 정부 수립에 지지를 보낼 때, 그들은 소비에트 내 타협주의적인 다수파들을 결코 신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 다수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 방도를 알지 못했다. 폭력으로 그들을 쓸어버리는 것은 소비에트에 권력을 부여하는 대신에, 오히려 소비에트를 해체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소비에트의 인적 구성을 변화시키는 방도를 찾아내기 전에 노동자들 및 병사들은 직접행동이라는 방법을 통해 소비에트를 그들의 의지에 종속시키려고 노력했다.

 

비록 당시 시위에는 반대했지만, 대중의 분위기는 볼셰비키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최고 50여 만 명이 참여했던 이 운동에 있어, 지도력(leadership)을 행사하도록 요구하였다. 볼셰비키는 충돌이 더욱 격해지지 않도록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볼셰비키들이 대중들을 조직화하고 이를 통해 자제시키지 않았더라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7월의 운동은 레닌이 예상했던 대로 페트로그라드를 고립시키려는 반혁명 시도가 움직일 기회를 제공하였다. 시위는 멘셰비키-사회혁명당 지도자들의 분노를 촉발시켰으며 그들은 볼셰비키 당을 금지시키고 우익 관료들과 군대들을 끌어들여 질서를 잡고자 하였다. 많은 노동자들은 구체적인 성과를 획득하는데 실패하였고 동시에 레닌은독일의 첩자다라는 비방으로 인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좌편향에 있던 대중들의 운동은 일시적으로 답보상태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7월의 날들(July Day)은 소비에트, 대중, 혁명 정당 간의 차이를 첨예하게 드러내주었다. 혁명의 첫 번째 시기에 대중 자체에 의해 창출되어진 소비에트는 대중의 자생성이라는 이유로 인해 개량주의자의 손에 장악되었다. 소비에트 내에서 개량주의자들은 소비에트로의 권력이동을 반대하였으며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내려던 어떤 시도들도 봉쇄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이유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도시 노동자들이 좌편향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그에 한참 뒤쳐지게 되었다. 당시 수 십 만명의 사람들은 소비에트의 형식에 갇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새로운 투쟁들에 참여했고 시급한 쟁점들에 대해 자신들의 의지를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들 -공장위원회, 군사위원회 등등- 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4월과 6월의 경험은 대중들이 중앙 소비에트뿐만 아니라, 나머지 지역 소비에트들에서까지 어떻게 좌편향시켰는지를 보여줬다. 대중들에 의한 거리봉기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레닌과 그 추종자들이 나아가기를 바랬던 수준보다 훨씬 더 나아가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은 이 도시(페트로그라드)가 고립됨에 따라 다가올 수 있는 우익으로부터의 공격과 이로 인한 패배라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려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비록 볼셰비키 혁명정당이 대중들과 소비에트 사이에 에워 싸여있었을지라도 그것은 독립적인 힘으로 존재했다. 볼셰비키는 노동 계급들 중 정치적으로 가장 의식화되었던 사람들을 통일시켜내고 있었고, 사태들에 대해서 맑스주의적인 분석을 제시했다. 오로지 이들만이 모든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했던 7월 봉기 이후에 닥쳐올 재앙들을 막아낼 수 있었다.

 

10월을 향해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그 성격이 변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노동자들과 병사들에게 있어, 소비에트의 일차적인 목적은 그들의 집합적 의지를 중앙 집중적으로 조직화하는 것이었다. 4월과 6월에 소비에트와 그것을 만들어냈던 대중운동은 서로 긴장관계에 놓여있었다. 7월의 날들(July Days)에 들어 결국 그 연결고리가 끊어져 버렸다. 왜냐 하면, 당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지도부가 페트로그라드 지역의 군 사령관으로서 혁명적 좌파를 분쇄시키려고 애쓰던 코닐로브(Kornilov) 장군 같은 반동적인 짜르관료 편에 섰기 때문이다. 이제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새로운 연립내각(coalition)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함으로써 임시정부를 운용할 수 있는 힘을 양도받게 되었다. 새 연립내각의 정상에는수상(Minister President)'으로서의 알렉산더 케렌스키(Alexander Kerensky)가 있었다. 그는 이제껏 수상의 역할이 부여되기에 앞서 2월 혁명 이후에 사회혁명당에 가입하였으며 그 후 법무장관 및 국방장관(Minister of War and Marine) 직책을 맡아 왔었다.

소비에트와 임시정부가 양대 권력을 이루고 있던 당시까지의 이중권력 상황은 앞에 설명한 새로운 세력관계(arrangement)로 인해 변화될 것이 분명했다. 트로츠키는 당시 발생된 사건의 전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중권력은 재구성되고 변형되었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공장에서는 예전처럼 노동자들의 의지에 반하여 무엇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농민들은 지주들의 재산권들을 향유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사령관들은 병사들 앞에서 어떠한 자신감도 가지지 못했다. …… 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영향력을 상실했다는 점은 결코 의심할 수 없는 바였다. 그렇다고 해서 타협적인 지도자들이 상실한 모든 것이 부르주아지들에게로 돌아갔다고 상상하는 것은 오류이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지도그룹들은 우파뿐만 아니라 좌파의 지지까지도 잃었다. 즉 군벌들의 이익뿐만 아니라 공장 및 연대(regimental) 위원회들의 이익도 대변할 수 없었다. 권력은 탈중심화되고 분산되었던 것이다. ……

 

소비에트는 노동 계급에게 지도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소비에트는 더 이상 소비에트 총회의를 개최시키지 못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Tsik) 같은 상위 기관들, 소비에트 회의에서 선출된 전 러시아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이 모두가 자신의 대중적 토대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채 움직였다. 이 시점에 레닌은 공장위원회가 대중의 집합적 조직화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함을 제기했으며, 핵심적인 문제는소비에트라는 이름이 아니라 혁명의 성과물(seizure), 아래로부터의 인민의 직접적 주도성에 기반하고 있는 권력이 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레닌의 새로운 입장은 집합적 대중조직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았다. 투쟁의 다음 국면을 바라보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소비에트는 새로운 혁명 속에서 나타날 것이며, 실제로도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때 발생할 소비에트는 지금의 소비에트는 아닐 것이다.’

판명되었다시피, 소비에트 체제는 내부로부터 다시 발생할 수 있었다. 일단 7월의 날들(July Days)의 충격이 사라지자, 많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지도자들은 노동자, 병사들에 의해 다시 소환되어졌다. 노동자, 병사들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지도자들을 선출하였고 이들의 환호 하에 짜르시대 장군들이 다시 수도로 돌아왔다. 소비에트의 갱신을 위한 강력한 추동력들은 827일부터 30일까지 발생된, 성공치 못한 코르닐로프(Kornilov) 중심의 우익 쿠데타로부터 발생되었다. 여러 상급장교들과 연합하여 페트로그라드를 점령하고 혁명을 분쇄하기 위해 코르닐로프가 행동을 취했다는 소식이 도시에 전달되자, 멘셰비키들과 사회혁명당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역량, 자신들이 질식시켜 버리고자 그토록 노력했던 그 대중역량에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볼셰비키들은 이러한 상황변화를 반겼다. 이러한 변화는 극우파에 일격을 가하고 케렌스키와 소비에트와 임시정부의 멘셰비키-사회혁명당 지도자들의 유약함을 폭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이제 자신들의 부패함과 대중들로부터의 괴리라는 현실을 깨달았으며 소비에트의 권위를반혁명에 맞선 소비에트 투쟁위원회에 넘겼는데, 여기에서 볼셰비키들은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이제 볼셰비키의 지도 하에 놓이게 된 지역 소비에트들은 그때까지 중앙 소비에트가 실행하던 수많은 기능들을 독자적으로 담당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된 공장위원회들 역시 무장된 군대들과 붉은 호위대(Red Guard)를 조직했다. 노동조합 역시 코르닐로프에 대해 사보타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노동계급의 권력이라는 볼셰비키의 변혁 프로그램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의 (변혁에 대한) 감정을 만들어내는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감정과 변혁 프로그램을 일치시키고자 했다. 부르주아 역사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과는 달리 이러한 대중조직에 대한 당의 지도력은 어떤 계략이나 소비에트 민주주의라는 폭력으로 획득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는 당시 상황논리로부터 도출된 자연스런 결과물이었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적 독재(레닌이 규정했듯이 착취를 받는 자들이 소수 착취자들을 지배한다는 의미에서의 독재)를 구축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혁명정당은 이제는 이러한 독재를 형성시킬 수 있는 기구들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과 병사들의 단결된 행동은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를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3일 만에 노동자들의 저항 또는 하극상에 의해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는 포위되었고 결국 붕괴되었다. 7월에 입었던 피해는 아물었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갱신시켰다는 자신감은 볼셰비키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서 승리했다는 사건으로 표현됬다. 91일에 볼셰비키 당은 수많은 멘셰비키-사회혁명당의 대의원들을 자신들 편으로 만듦으로써 279표 대 115표의 투표결과로 노동자, 농민의 정부를 세우자는 제안을 통과시켰다. 뒤이어 4일 후에는 모스크바 소비에트 역시 동일한 안건을 통과시켰다.

코르닐로프의 실패한 쿠데타 이후에 소비에트 조직은 전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선거들이 실시되었고, 총회의가 자주 개최되었으며, 잦은 소환과정에서 집행위원의 대표들은 대체되었다. 트로츠키가 수상으로 선출됨으로써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서는 새로운 분위기가 확립되었다.

볼셰비키들이 여러 지역의 뒤마들(dumas)지방정부(zemstvos)에 대한 통제력, 특히 직접적으로 노동계급 조직들에 대한 지도력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일련의 승리들에 있어 마무리 단계에 해당됬다.

 

이는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다. 영구적인 조직이든 임시적인 조직이든 노동조합들, 공장위원회들, 노동계급의 경제적, 문화적 결사체들은 전반적인 상황에 의해, 발생할만한 모든 사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하나의 동일한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되었다. 그 질문이란 누가 그 집의 주인인가?'이었다.

 

단지 볼셰비키들만이 그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제시했다. 볼셰비키 당은 상이한 노동계급 내의 집단들을 연대하게 만들었으며, 이러한 통일을 통해 대중조직들에서는 변화의 분위기를 띠게 된 것이다.

이러한 통일된 입장에 이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운동에 있어 상이한 계급 및 집단들이 서로 상호작용하여 결국에는 공통된 정치적 전략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과정은 푸틸로프(putilov) 공장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36천여 명의 노동자들 중 1만여 명은 시골지역에서 올라온 신규 산업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진흙탕에서 농민화를 신고 온)‘흑색 노동자들로 알려진 자들로 19174월에 들어서야 임금상승을 요구하기 위해 조직됬다. 당시까지만 해도 공장위원회는 그 대부분의 구성원들을 숙련 노동자 집단으로부터 끌어냈고 또한 공장의 전체 노동자들을 하나의 대오로 유지시키려 했기 때문에 공장위원회는흑색 노동자들만의 독자적인 임금 투쟁을 제한하고자 하였다. 6월에 공장위원회는 임금 인상을 위한 자생적인 현장파업을 자제하길 원하며 노동조합에 의한 협상을 통해 더 많은 임금을 확보하고자 했다. 볼셰비키들은 때 이른 봉기를 피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공장위원회의 전술을 지원했다. 621일에는 여러 공장위원회들, 금속노동조합, 사회주의 정당들이 모여 아래와 같은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우리는 …… 지금은 푸틸로프 노동자들이 갈등해결을 자일피일 미루어왔던 경영진들(ministers)에 대한, 정당한 불만표출을 자제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우리는 지금 신속하고 총체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역량을 쌓아두는 것이 필요하다. …… 비록 지금 임금 인상이 받아들여지더라도 상품 및 주거시설(accomodation) 가격의 끊임없는 상승은 이러한 성취를 무용지물로 만들 것이다. 때문에 노동자들이 생산, 분배에 대한 통제력을 구축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나아가 권력을 소비에트의 손에 이전시키기 위해서는 모종의 결정적인 투쟁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7월에는 이러한 대기 작전(holding operation)이 깨졌다. 푸틸로프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투쟁은 그 시기 대중 시위들을 야기하는데 일조했다. 일단 7월의 날들(July Days)이 긍정적인 성과 없이 지나가고, 뒤이어 페트로그라드에서 대규모 산업 위기가 닥치자 심지어 푸틸로프의 비숙련 노동자들까지도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볼셰비키의 전략을 수용하도록 만들었다.

 

가을에 수도의 노동자들은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다.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혼란(dislocation)으로 기초원료의 부족이 심화되었으며 자본가들은 공장을 폐쇄하거나 이전시킨다는 핑계로 회사 자원들을 주도면밀하게 빼돌리고 있었다. 9월에 이르러서 러시아의 공업 산출량은 그해 초에 비해 40%가 감소했다.

 

이에 대해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들로 하여금 생산을 조직하도록 함으로서 대응했다. 하지만 이는 단지 일시적인 해결책일 수밖에 없었다. 10월의 제 1차 러시아 공장위원회 전국회의(All-Russian Factory Committee Conference)에서 통과된 볼셰비키의 결의안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지역에서 개개의 공장위원회들을 통해 이루어졌던 노동자 통제는 전국적인 체계로 조직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노동자 통제는 그 실질적이고, 진정한 성과물들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산업위기, 농민들에 의한 토지 몰수 그리고 군 내부의 혼란함, 이 모든 것들은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 한 방향이란 바로 소비에트로의 권력이전의 필요성이었다. 심지어 이제는 파업 전술마저도 비효율적으로 보였으며, 투쟁의 일반적인 수단으로서는 그 의미가 쇠퇴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소비에트 권력은 자생적으로 발생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봉기를 통해 획득해야 하는 것이었다. 봉기는 볼셰비키들에 의해 조직되고 지도되어야 했고, 소비에트에 의해 그 정당성과 국가권위가 주어져야 했다. 10월 혁명의 반대자들은 당, 소비에트 그리고 대중들 간에는 분열이 있었다고 제기해왔다. 하지만 진실은 그 반대이다. 2월 이후 처음으로 당, 소비에트, 대중이라는 세 부문의 운동방향성(direction)이 서로를 보강시켜줬다. 이러한 당, 소비에트 그리고 대중들 간의 바람직한 연계(conjuncture)는 보호되어야 했고, 그것도 빨리 그래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반-혁명세력과 독일군이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함으로서 위협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시정부는 도시를 넘겨주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긴급한 행동이 요구되고 있었다.

그 첫 조치는 볼셰비키 당 중앙위원회에볼셰비키는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라는 제목의 레닌의 편지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두 수도에서 노동자, 병사평의회의 소비에트의 다수를 장악하고 있던 볼셰비키는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고 또한 장악해야 한다. …… 민중들의 다수는 우리 편이다. …… 우리에게는 -소비에트들과 민주적인 조직들 같은- 기구들이 있다.

 

비록 다소 저항은 있었지만 볼셰비키 당은 새로운 봉기가 조직해야 한다는 생각에 설득되었다.

이러한 입장(stand)은 레닌이 앞서 1905년에 말했던 것처럼, 소비에트는가장 협소한 의미에서(the narrowest sense)’봉기를 주도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었다. 주요 지역의 소비에트들에서 볼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소비에트는 여전히 불가피하게 무장봉기에 대한 비밀스러운 세부적인 작업들을 논의할 수는 없었던 공공포럼 정도의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수준에서(in general) 대중들은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에 설득됬지만, 레닌은 오로지 혁명적인 정당에 의해서만 이러한 슬로건을 구체적인 현실로 바꿀 수 있는 목적의 단일성과 과단성(audacity)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몇몇 볼셰비키 당원들은 형식적인 이유로 봉기는 10월 말에 소비에트 2차 회의가 개최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비에트 회의에서 대의원들 다수가 볼셰비키 당에 대한 지지를 보내주길 희망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레닌의 응답은 가차 없었다.

 

볼셰비키에 대한 다수의형식적인 지지를 확보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지금까지 어떠한 혁명도 그러한 형식적인 지지를 기다린 적이 없었다. 케렌스키와 그 일당들은 그런 것을 기다리지 않으면서도 지금 페트로그라드를 포위할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929일에 다음과 같은 주장을 반복했다.

 

소비에트 회의가 개최될 때까지기다리는것은 완전히 바보 같은 짓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몇 주 그리고 심지어는 며칠이 모든 것들을 결정해버릴 수 있는 상황에서 몇 주를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겁을 먹고 권력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 그것은 (정치적으로든 기술적으로든) 권력 장악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바보처럼지정된봉기가 일어나는 동안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기동대원들(cossacks)이 동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봉기의 성공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개의 관련된 조건들이 충족될 필요가 있다. 첫째, 봉기는 긴급한 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해줘야 하며 반-혁명의 끊임없는 위협을 일소시켜야 한다. 둘째, 승리하는데 필요한 기술적/군사적 과업들을 수중에 장악해야 한다. 셋째, 러시아 대중들의 최대한 참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대중의 참여가 있었어야 봉기는 편협한 음모 작업을 통해서가 아니라 불가피하게 한 계급이 다른 계급으로부터 권력을 몰수하는 것을 포함하는 정치적 도약을 통해서 이루어 진다. 이 세 가지 모두를 동시에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레닌이봉기의 예술(art of insurrection)’이라고 불렀던 기법들이 요구되었다.

10월 봉기를 향한 최초의 구체적인 첫걸음은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의 창설이었다.

 

아직 극복하지 못한 …… 한 가지 난점은 봉기의 기구들을 선거제 하에서 심지어 (봉기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대표들까지 참석하는 소비에트의 공개적 운영방식과 조화시키는 문제였다.

 

이 문제가 해결되었던 것은 멘셰비키들이 수도에서 수비대를 철수시키려는 임시정부의 계획에 대해 맞서 위원회를 제안했을 때였다. 이 위원회는 소비에트 기관의 일부이었지만 (자격조건을) 충분히 제한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볼셰비키들이 봉기의 조직화를 가능케 해줬던 정치적 구성물이었다. 군사혁명위원회를 설립하자는 제안을 소비에트 본회의에서 승인 받아 그것을 설립하기까지는 10일이 걸렸다. 하지만 트로츠키가 말했듯이소비에트는 당이 아니다. 소비에트 기구는 비대한 것이다.’

1025일 이 위원회가 조직했던 봉기와 그 후 제 2차 소비에트 회의로의 권력이전에 대한 세부사항들이 여기서 다 다루어질 수는 없다. 하지만 극소의 인명 손실만으로 임시정부를 전복시켰다. 2차 소비에트 회의에서의 투표 결과, 667 명의 소비에트 대표들 중에서 505 명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가 장악해야 하며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혁명의 정치적 메커니즘을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했다.

 

당은 소비에트를 움직이게 했고, 소비에트는 노동자들, 병사들 그리고 일정 정도의 농민들을 움직이게 했다. 대중 속에서 얻은 것은 급속하게 상실될 수도 잇었다. 만약 당신들이 이러한 행동하는 기구들을 하나의 톱니바퀴들(cog-wheels)의 체계로서 표현한다면 -…… 당신은 당이라는 톱니바퀴를 대중의 거대한 톱니바퀴- 그 중간 규모의 소비에트라는 톱니바퀴를 생략하면서- 에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려는 성급한 시도는 당 톱니바퀴의 이빨을 깨뜨릴 위험을 발생시키며 이로인해 거대한 대중들을 움직이지 못 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의 위험 -소비에트 수준에서만의 내적 논란 및 쟁투(friction)의 결과 정세의 우호적인 상황을 놓쳐버릴 위험- 역시 실제적으로 존재하였다.

 

10월 혁명은 소비에트의 중요성과 그 한계들을 완전히 투명하게 드러내줬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구례의 권력을 전복하고 그것을 대체시키는데 사용할 수 있는 조직은 소비에트이다. …… 하지만, 소비에트가 독자적으로 그 문제를 풀 수는 없다. 소비에트는 프로그램과 지도력이 어떻게 구성되는냐에 따라 상이한 목표들을 위해 복무할 것이다. 소비에트는 자신의 프로그램을 당으로부터 받아들인다. 반면 혁명의 상황들 속에서 소비에트는 철저한 후진부위(backward), 활동적이지 못하거나 우왕좌왕하고 있는(demoralised) 계층을 제외한 계급의 모든 부위를 포괄하며 혁명 정당이 그 계급의 두뇌로 기능했다. 권력 장악의 문제는 오로지 당과 소비에트 -또는 소비에트에 필적할만한 다른 대중조직들- 의 명확한 결합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은 성공한 노동자 봉기의 매우 값진 모델이다. 실제로 그것은 우리가 가진 유일한 모델이다. 하지만 1917년까지 러시아는 전 세계의 대부분 맑스주의자들에게 그러한 모델로 여겨지지 않았다. 실제로 그때까지 러시아는 예외적인 사례로 생각되었고 오로지 독일의 운동만이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917년 이후로 러시아는 가장 훌륭한 사례가 되어, 모든 혁명은 각각‘2월 혁명‘7월 봉기를 경유하여 10월 혁명으로 전진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경로 모델들(parallels)은 이해에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 결코 동일한 일련의 패턴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 활동에 의해 새롭게 재형성되기 마련인- 사건들의 실제적인 전개를 모호하게 만들 수도 있다. 지금도 그렇듯이 러시아와 영국, 독일 같은 나라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들이 존재했다. 1917년까지 러시아 노동계급은 서구 유럽의 노동자들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것들, 예를 들어 의회 체계, 강력한 합법적 개량주의 정당들, 정규직 관료들을 가진 노동조합 같은 것들을 결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에게는 서구에 앞서는 하나의 거대한 진전이 있었다. 그들은 대중의 지원을 받고 맑스주의적 지도부를 갖춘 혁명 정당을 가지고 있었다.

나라간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1915년부터 1920년까지의 기간 동안에는 유사성들도 분명했다. 예컨대 유럽의 모든 곳에서 대중운동들은 사회주의라는 공통된 목적을 이루기 위한 혁명적 수단들을 통해 크게 번창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서구 사이의 차이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가 러시아 혁명을 소극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넘어 그 이상을 배우려 한다면 우리는 러시아 혁명의 교훈을 개량주의 기구들이 정치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나라들에서도 유용하도록 재해석해야 한다. 즉 노동과 자본간의 관계를 중간에서 중재해주는 의회, 대중적 개량주의 사민당 및 노동당, 노동조합이 지배적인, 오늘날 세계의 광범위한 부분들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이러한 재해석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에 발생한 서유럽의 역사적 유산이다. 비록 궁극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노동자 평의회 -소비에트들에 상응하는 집합적 조직들- 는 대중적 개량주의에 맞서 성장했었다. 노동계급의 극소수로부터 시작되었던 혁명은 기회를 잡기 위해 도전하는 법을 배웠고,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드러냈다. 이 책의 중심부분은 이러한 경험에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2. 위기에 휩싸인 서구 제국주의

 

당시 서구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에 충격을 주었던 위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19148월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적대성의 폭발은 지배계급들이 자신들의 권력구조들을 철저하게 재구조화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엄청난 양의 군수품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의 문제에 달려있었다. 예를 들어 1918920일 하루 동안에만 영국군은 40,000톤에 이르는 943,837개의 탄을 발포했다. 이러한 규모의 전쟁은 국민경제로 하여금 효율적이고 통합된 생산체제로서 작동하기를 요구했다.

영국은 이러한 경제통합을 선도하며, 국가와 사적 자본의 이해가 결합되는 국가자본주의 체계를 구축했다. 전쟁이 발발했던 첫날부터 철도는 정부에 의하여접수되었다. 철도의 운영은 주요 사기업들의 경영자들과 무역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구성된 철도 집행위원회(A Railway Executive Committee)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연히 사적 소유자들은 이러한 정부의 충격적인 간섭에 대해 보상을 받았다. 즉 그들의 이익은 보장되었다. 국왕과 조국을 위해 생명은 버릴 수 있을지언정, 이윤을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 산업에 이어 다른 산업이 전쟁을 위한 국가기구로 편입되자 국가와 자본간의 상호침투 현상은 계속해서 되풀이되었다. 1918년 말 경에는 국가는 수입품의 90%와 대부분의 기초 원료들의 사용을 통제했고, 350여만 명의 사람들을 군수부(Ministry of Munitions)에 직접 고용하였다.

국가가 경제영역으로 개입하는 만큼 자본가들도 또한 국가로 이동해갔다. 로이드 조오지(Lloyd George)가 장관으로 있으면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군수부(Ministry of Munitions)는 이러한 과정을 전형적인 것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말대로 그것은처음부터 끝까지 사업가들의 조직이었다. 성공한 사업가들을 주요 직책에 임명했던 것은 이를 가장 잘 보여준다.’

당시 전쟁은 서로 대립하고 있지만 국가 정책들 간의 기묘한 동일성을 띄도록 했다. 독일 국가지도자들은 장기전을 준비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곧 자원을 철저히 재조직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정부는 원료청(the Raw Materials Section)이라는 특수 공급조직을 설립했다. 그것은 AEG 전기회사의 회장(head)인 발터 래테나우(Walther Rathenau)에 의해 운영되었다. 독일 사회의 가장 깊은 심층에까지 국가와 기업간의 융합이 관통해 들어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래테나우의 관리 하에, 정부 통제 하에 작동하는 거대기업체계가 대부분의 산업 생산과 분배에 적용되게 되었다. 국가의 조치(action)는 통상 수년이 걸리는 자본의 집중화 과정을 완성시켜줬다.

1915년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이어 이탈리아가 전쟁에 가담했다. 이탈리아에서도 마찬가지로 경제를 재편하는 일은 산업부문의 자본가들에게 일임했다. 19181,976개의 개별 회사들을 포괄하는, 정부의 통제 하의 생산체제를 재편하는 일은 튜린의 산업 사용자 협회(Industrial Employers League)에게로 돌아갔다.

전쟁수행의 무한정한 요구들은 모든 경제생활을 왜곡시켰다. 군수품에 대한 갈망(hunger)은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금속 산업으로 끌어들였던 반면 다른 산업들은 침체되었다. 전시 기간동안 영국에서의 금속 숙련공의 수는 34%가 증가하여 24십만 명에 육박했다. 독일에서는 44%가 증가하여 군수분야 노동자들이 3백만 명에 달했다. 이탈리아는 미미한(miniscule) 군사력을 가지고 전쟁을 시작했었으나 종국에 가서는 9십만 5천 여명의 사람들이 군수 산업에서 일했다.

국가 자본주의 체제의 급격한 재구성은 초기의 경우 과거로부터의 놀라운 괘도이탈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1914년 이전에 십 수년 동안 존재했던 경향들이 가속화된 것에 불과했다. 개별 기업들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점점 더 큰 생산단위로 합병되어 갔으며, 수많은 노동자들을 대량 생산 부문으로 집중시켰다. 기업합병과정의 논리적 완결은 전시에 이루어졌는데, 이때에는 전국이 국가 자본주의 관리체제 하의 거대한 통합된 공장들로 만들어졌다. 생산은 다수공장들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영세 기업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때부터 산업은 국가적 노력에 의해 대규모로 조직되었다. 개별 자본가들은 국가의 경제개입에 분개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의 계급으로서 그들은 이 기회를 통해 국가로 하여금 국내 노동자들을 단속하고 국외 경쟁기업들을 이기는데 이용하고자 하였다.

자본주의의 이러한 발전과정은 엥겔스가 수년 전에 예견했던, 뚜렷한 모순을 함축하고 있었다. 수백만 노동자의 집합적 협업에 의해 얻은 부의 생산과 한줌의 자본가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그 부의 사적 전유 사이에는 대립적 모순(conflict)이 존재했다. 이러한 대립적 모순은 스스로를개별 공장들에서 생산의 조직화와 사회 전체적 수준에서 생산의 무정부성 사이의 적대로 재생산되었다.

전시 경제는 한 나라를 거대한 개별 공장들인 것처럼 만들었고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은 전쟁을 통해 야만적으로 표현되었다. 사회적 생산과 전쟁이라는 두 개의 모순적인 힘들은 군수산업에서 마주쳤다. 위기가 특수한 힘으로 표현되었던 곳, 그래서 노동자 평의회 운동이 시작되었던 곳은 바로 여기였다.

지배계급은 국가와 자본의 강제적인 상호침투 즉 정치와 경제의 상호침투를 통해 자신의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했다. 노동운동은 그 동일한 장소에서 자본에 대한 대응세력으로서 싸워야 했고 자본의 무기에 대적해야 했다. 노동자 평의회는 그 자체가 정치와 경제의 상호침투의 결과로서, 경제투쟁이자 정치투쟁의 결합체로 탄생되었다.

 

탄압 공세 속에서의 노동운동

 

국가간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대체로 국내 노동 계급의 협조여부에 달려있었다. 처음에 지배계급들은 아무런 문제들을 겪지 않았다. 전쟁 초기 몇 주 동안 대중들의 열광적인(hysterical) 애국주의는 지배계급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줬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현대전의 잔인한 실상들에 직면하게 되자 언론의 과장된 (애국주의적) 호들갑은 명백히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래서 유럽 국가들은 불만을 잠재우고 전쟁반대 여론을 분쇄하기 위해서 설득과 강제를 결합시키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러한 공격의 첫 번째 조치는 전통적인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길들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쉽사리 진행될 수는 없었다. 유럽 노동운동세력들은 1907년 슈트가르트(Stutgart) 2 인터네셔널 회의에서 제국주의 전쟁에 저항할 것을 안건으로 상정했고, 그때 모든 주요 노동계급 정당들은전쟁 발발을 막기 위한 모든 가능한 행동을 다 할 것을 다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전쟁을 빨리 끝내기를 선언하고, 나아가 다양한 사회 계층들이 서둘러 봉기하여 전쟁에 의해 야기된 경제적 및 정치적 위기를 자본주의적 계급 지배를 전복하는데 이용하는 것이 바로 자신들의 의무라고맹세했다.

하지만 191484일에 이러한 모든 좋은 말들은 깡그리 잊혀졌다. 영국 노동당과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들은 제국주의 전쟁에 동참하고자 꼴사납게 서둘러댔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쇼비니즘에 더욱 저항적인 모습을 보여줬지만지원도 사보타지도 없다라는 슬로건은 국가의 전쟁 시도를 방지하는 어떠한 관여도 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파트너(사민주의 정당)들 만큼이나 열광적으로 제국주의의 전쟁의도를 받아들였다. 심지어 84일 이전에 독일의 자유노조는국가의 이익을 위해파업 및 임금 인상 운동을 중지하기로 약속했다. 몇 달 후 전쟁에 대한 영국 노동조합의 협조행위는 재정 협정(Treasury Agreement) 속에 정식화되었는데, 이 협정은 군수 생산을 방해하는 모든 파업들을 불법화하되, 노동권을 제한받는 댓가로 이익을 공유한다는 허구적 내용이었다. 이탈리아에서 금속산업 노조 지도자는 다음과 같은 선언을 통해 당시 일반화된 입장을 표현했다.‘우리는 전쟁을 막을 수 없다. 따라서 전쟁의 결과들에 저항하려는 생각는 어리석고 우스운 짓이다.’ 이러한 단순한 논리는 그로 하여금 전쟁을 공식적으로 비난하도록 함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전쟁 지지를 위해 공개적으로 노동자들을 동원시킬 수 있도록 해줬다.

유럽의 다양한 노동운동 및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전쟁 지속을 위해 무파업이라는 사회적 협약을 선언했다. 그들은 노동계급을 손과 발을 묶어서 전쟁광들에게 바쳤던 것이다. 노동계급의 조직들은 단순히 중립화되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 기구들에 편입되어버렸다. 영국 노동당 지도자인 아더 핸더슨(Arthur Henderson)은 토리당/자유당 연립정부의 산업관계 고문이 되었다.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노동조합 관료들은 군사징집 패널에서 군사관료들과 자본가들 다음에 앉았고 노동자들을 참호 속에서 죽도록 내몰았다.

자신들의 전통적인 지도자들에게 버림받자 노동자들은 기초적인 시민적 권리들에 대한 엄청난 공격에 대항할 방어막이 없음을 깨달았다. 영국의 왕국보호조치(Defence of the Realm Act)와 독일의 비상계엄법(Law of Seiege) 같은 비상 법령(Emergency legislation)은 경찰과 군대에 전례가 없던 권력을 부여해줬다. 각국의 의회들이 제 역할을 못하고 비틀거리고 있는 동안에는 그들의 영향력은 무시할 정도로 축소되었다. 검열과 탄압은 이제 유럽 국가 기구들의 총체적인 정치 프로그램이 되었다.

군수산업들은 그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해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영국에서 19157월의 군수 물자 법령은 군수산업에서의 파업들을 금지시켰다. 그것은 노동조합의 모든 활동들이 금지되는통제된공장들의 설립을 허용했다. 군수산업 노동자들이 더 좋은 보수와 근로조건을 위해 다른 직장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 법령은 사용자들의 허가 없이 직장을 바꾸는 사람들은 6주 동안 재고용될 수 없도록 강제하였다. 이후에 있을 징병은 노동자를 길들이기 위한 또 다른 위협으로 다가갔다.

독일은 영국사례로부터 한 수 배워 191612월에 더욱 가혹한 법률을 도입했다.‘보조서비스법(Auxiliary Service Law)’은 독일경제가 일체화된 전쟁 체제로 재편되는 과정을 완결시켰다. 군대의 규율 하에서 일하지 않았던 모든 사람들도(1917년까지 백 만 명에 이르는 군인들이 산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정부가 통제하는애국적 보조서비스(parriotic Auviliary Service)'에 강제적으로 참여해야 할 태세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업권이나 직장을 바꾸는 전직의 권리는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겉으로 나타난 노동계에 대한 양보조치는 노동자 위원회를 결성하도록 한 것인데. 이는 노동자들 사이의 그리고 노동자들과 고용주들 사이에 대한 상호협력의 이해를 북돋아주기 위해 기획됬다. 당시 정부는 작업현장의 노동자 대표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 속 사정을 보면 이전에 정부가 베를린 금속 노동자들과의 공격적인 투쟁성에 밀려 특별 중재기구 -- ‘대 베를린 금속 산업 전쟁위원회(the War Board of the Metal Industry of Greater Berlin)' --를 설립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기구에는 세 명의 대표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각각 경영계, 노동조합, 정부들을 대표했으며 국방부 관료가 그 의장을 맡았다.

이탈리아의산업 동원체제는 베를린전쟁위원회(Berlin War Board)와 유사한 일련의 위원회들로 이루어 졌었다. 다시 한번 애국적 의무에 대한 호소가 강제력의 뒷받침을 받아야만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군수 산업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의 1/3은 위반행위를 한 후 헌병들에 발각되어 징병되었다. 징병 위협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는데 이용되었으며, 지각하거나 십장에게 대드는 것 같은 반사회적인행위는 범죄 행위로 취급되었다.

비록 여러 나라들이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전쟁을 수행했지만, 노동자들의 삶에 가해졌던 충격의 정도는 나라마다 상당히 달랐다. 예를 들면 영국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의 시기 동안 4백만에서 5백만 명의 사람들을 소집시켰고, 그 보다 적은 인구를 가졌던 이탈리아는 575만 여명의 사람들을 동원시켰으며, 독일은 13백만 여명을 참여시켰다. 영국은 유럽 대륙 전체가 초토화되는 동안에도 자신들의 영토에서 삶과 재산이 파괴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전쟁으로 인한 경제사정의 악화는 인플레이션현상을 통해 나타났다. 1918년에 영국의 생계비는 전쟁 이전 수준보다 250%까지 올랐고, 독일에서는 300%, 경제가 취약했던 이탈리아는 400%까지 올랐다. 인플레이션에 임금수준을 맞추기 위한 노동자들의 분투가 모든 나라들에서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영국의 임금 수준은 그 가치를 유지했던 반면, 독일에서는 비록 더 좋은 보수를 주던 군수 산업에서 조차 노동자들의 소득은 전시동안 23%가 떨어졌고, 이에 비해 이탈리아는 34%가 급격하게 하락했다. 임금수준의 하락은 공중위생에도 영향을 주었다. 영국은 공중위생의 하락을 겪지 않았지만 독일과 이탈리아의 경우 빈약한 영양공급상태와 가혹한 생존조건들은 공중위생의 심각한 악화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1918년까지 튜린에서의 사망률은 전쟁 이전 수준보다 49%가 상승했고 출생률은 29%가 떨어졌다.

상대적으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주목했던 사실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영국의 노동조합은 전시 동안 성장했던 반면, 독일에서는 대규모 징병이 노동조합의 조직률(union membership)에 파괴적인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다가 노동운동 지도자의 제국주의로의 갑작스런 항복(capitulation)은 그 무엇보다도 노동대중들에게 정신적 충격과 큰 상처를 주었다. 전쟁 중반까지 사회적 일탈과 대중 징집은 삼백만 명의 강력한 조직수준이었던 자유노조(Free Trade Unions)의 조합원수를 반감시켰다. 이탈리아에서도 역시 사회주의자들과 동맹관계에 있던 범노동연맹(General Confederation of Labour)의 성원들의 수는 전쟁 이전의 335,000명의 수준에서 230,000명 수준으로 급감했다.

하지만 몇 년동안의 1차 세계대전은 왕과 조국에 대한 노동자들의 애국심을 누그러뜨렸다. 로자가 다음과 같이 썼다시피,

 

사라진 것은 무엇보다도 광기이다. 사라진 것들은 애국주의적인 거리 시위들, 의심스러워 보이는 자발적인 동원(automobiles)에 대한 추구였다. …… 엷은 대낮의 일광과 같은 탈환각적인 분위기 속에 다른 합창이 울려 펴졌다. 전쟁터에 있는 매들과 하이에나들의 탁한 울음소리가 그것이다.

 

전쟁은 모든 면에서 심각한 장애에 부딪혔고 사회생활의 모든 지평들에서 정의에 대한 그리움과 강렬한 갈증이 솟아올랐다. 이러한 자각된 소망은 아래와 같이 전후 파업활동들의 폭발을 통해 자신을 드러냈다.

 

연간 평균 파업 참가자수

 

영국

독일

이탈리아

1911 - 1914

881,000

311,000

239,000

1915 - 1918

678,000

523,000

146,000

1919 - 1921

2,108,000

1,085,000

987,000

금속노동자들이 앞장서다

 

실제적으로 예외 없이 각국 금속산업에서 노동자들은 전투성의 부활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일정정도 특권을 지닌 숙련공들이 노동자 평의회를 조직적 수단으로 하여, 현장 노동자들의 기초적인 불만을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전화시켰다는 점이다. 전쟁 이전에 금속산업 숙련공은 일반적으로 낮은 파업 경향성을 가지고 있었고 종종 사용자들에게 최고의 임금 대우를 받았으며 다른 부문들보다 좋은 근로조건들을 향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의 무정부성간의 모순들이 어떻게 군수산업에서 마주쳤는지를 살펴봤다. 그렇다면 현실적 수준에서 그것은 어떻게 작용했을까? 무기에 대한 그 억제할 수 없는 갈망으로 인해 전쟁은 군수산업을 팽창시키도록 만들었고, 금속 노동자들, 특히 숙련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중요성을 부여했다. 베를린의 선반공 지도자가 썼듯이 숙련 노동자들은생산과정에서 조직적으로 견고하고 중요한 집단으로 형성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은 거대기업의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기를 만드는 숙련공들은 자신들의 기술들이 대체 불가능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자본은 숙련공을 전쟁터로 내모는 것보다 군수산업에 배치하여 노동하겠금 하는 것이 더 가치있다고 판단했으며 이러한 당시 상황은 숙련공으로 하여금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줬다.

거대한 변화들은 공장에서의 생활을 뒤흔들었다. 군수물자 생산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는 노동시간을 강제받아야 했다. 튜린의 피아트(Fiat)사에서 노동자들은 주당 75시간을 일했다. 베를린의 선반공들의 노동시간은 하루 8시간 30분에서 11시간으로 상승했다. 당시 그들은 주당 6일의 노동에다가 5시간에서 12시간 정도의 강제적 일요노동도 하게 되었다. 북해 너머 글래스고우(Glasgow)의 숙련공들 역시 독일의 노동자들에 맞서 군수물자들을 생산하기 위해 유사하게 장시간 노예처럼 일했다.

오랫동안 유지되온 작업장관행(customs)는 비상 법령(emergency legislation) 하에서 금지되었다. 숙련 노동자들에게 주어졌던, 일정정도 작업과정을 통제할 수 있었던 관례는 쉴새없이 무기를 생산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순간에 사라져버리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여성노동자의 경우에 가장 명확하게 나타났다.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썼듯이 자본가들은 여성 노동자 같은 값싼 인력자원을 착취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전쟁이 분명하게 보여줬던 것은 여성은 너무 적은 임금을 받는다는 점이 아니라 남성들이 너무 많은 임금을 받아왔다는 점이었다.’ 전쟁 이전까지 금속 제조업에서 여성들을 배제했던 일반적 관례는 그것이 보여주는 편견이 무엇이던지간에, 금속노동자들이 자신의 직업 안정 및 임금에 대해 통제하고 있다는 표시였다. 1914년 이후의 여성 노동력의 유입은 숙련 노동자들의 전통적 방어기제가 파괴된 정도를 설명해준다. 영국에서 정부관리 하에 있던 군수 공장들의 경우, 여성 노동자들의 수는 단 2년 동안에 390%로 상승했다(그에 비해 남성 노동자 수의 증가율은 22%로 완만한 상승을 보여줬다). 한 조사에 따르면, 1917년에 여성들은 이탈리아의 군수산업 노동자들의 70%를 차지하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남성 노동자들의 수는 23%가 하락했던데 비해 전체 여성 산업노동자들의 수는 46%가 상승했다.

반숙련 및 탈숙련 노동자들을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신기계의 도입은 숙련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의 공격을 더욱 완성시켰다. 더욱 많은 노동자들을 끌어들이고 노동분업을 확대시킴으로써 전시 자본주의는 급속하게 생산을 사회화시겨 갔다. 이는 1914년 이전부터 시작된 두 가지 원천들로부터 발생했다. 하나의 원천으로서, 수천 명의 사람들을 고용하는 공장들은 대량 생산체계로 건설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공장들 안에서 업무들은, 오랜 시간 동안의 도제 기간이 필요없는 단순한 조작들로 쪼개졌었다. 또 다른 원천으로서, 자본가들은 과학적 관리와 같은 새로운 경영기법들을 도입했는데 그것은 미국에서 새로운 관리체제로의 전환을 위해 프레드릭 테일러(Frederick Taylor)에 의해 처음으로 개발된 것이었다. 과거 숙련노동자들은 업무를 처리하는 방법을 스스로 선택했던데 비해서, 이제는 십장들은 시간 및 동작분석 전문가(time and motion expert)의 도움을 얻어 탈숙련공들에게 업무수행방법을 지시하게 되었다.

새로운 기계들은 현장에서의 업무 처리 방식을 변화시켰고 자본가들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금속 노동과정들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줬다. 생산자들의 모든 기술과 주도권(initiative)은 제거되었다. 더 이상 어떤 숙련공들도 처음부터 끝까지, 즉 금속 원료부터 완성품까지의 노동과정을 19세기에 그래왔던 것처럼 주체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다. 노동과정에서의 노동자들의 자긍심은 사라졌고 그 빈 자리를 소외감이 가득 채우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현상이 수동적인 체념(resignation)으로까지 가지는 않았다. 개인들이 상실했던 것을 집단이 획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생산물은 거대 공장들에서의 수많은 노동자들간의 협업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이것이 오히려 새로운 자신감과 계급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금속산업은 고도의 사회적 생산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곳이었던 것만이 아니라 노동자 평의회 운동의 최초 지도자들을 배출했던 곳이기도 했다. 이 산업 부문만이 (전쟁 물자에 대한 요구로 표현되었던) 자본주의적 경쟁의 무정부성과 노동과정의 갑작스러운 사회화를 경험했었기 때문이었다.

군수물자들에 대한 필요는 숙련 노동자들이 일시적으로 협상권력을 가질 수 있게 했지만 그러한 사실 자체가 노동자 평의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자본주의 체계의 모순들 속에서 획득한 특수한 통찰이었다. 그 모순들은 이중의 관점을 제공해줬는데, 거시적인 (국가 간 전쟁) 관점과 미시적인 관점 (생산 부문에 대한 자본가들의 공격과 그에 따라 더욱 사회화된 노동과정) 이 그것이다. 노동자 평의회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줬던 것은 이 위기의 일반적 특징들에 대한 막연한 감지였다. 노동자 평의회를 통해 위기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같은 총체적 통찰은 병사에게까지 확산되지 않았다. 병사들은 목전에서 제국주의의 끔찍한 현실을 봤고, 시인들과 작가들은 전쟁의 유산(legacy)이 어떻게 극도의 소외를 야기시켰는지를 보여줬다. 하지만 이는 -계급적인 경험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산이 이루어지는 지점으로부터 단절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병들과 장교들의 계급적 출신은 상이했고 그들의 조건들도 상이했다. 하지만 집합의식을 형성시키는 노자간의 이해대립은 대체로 부재했다.

어째서 해병들(sailors)이 보병들(soldiers)보다 더욱 투쟁적이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독일 해군은 카이저 정권(Kaiser)의 몰락과정에서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으며, 러시아 발틱 함대는 10월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었다. 해병들은 (보병에 비해) 덜 파편화된 경험을 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체로 전함처럼 집합적으로 작업이 이루어지는 단위들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전의 금속노동자들로써, 갑판 아래에서 복잡한 기계류를 다루었다. 산업부문에서 일하는 다른 동료들처럼 해병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거대한 전쟁 기계의 톱니들로 이해할 수 있었다.

주목할만한 점은 전시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특수한 위치로 인해 금속산업 노동자들이 혁명적인 의식과 전망을 지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서유럽에서 어째서 반숙련, 탈숙련 노동자들보다도 숙련노동자들이 투쟁을 이끌었는지를 설명해준다. 숙련 노동자들은 수년간의 투쟁, 조직화 그리고 노동운동 참여 같은 복합적인 활동들을 통해 독특한 노동운동 경험을 겪었다. 이는 숙련공들에게 어떻게 그들이 생산과정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강렬한 정서를 제공했다. 이러한 정서는 처음으로 산업부문에 들어왔던 여성과 젊은이들에게는 공유되지 않았다. 사실상 여성과 젊은층인 신규노동자들의 경우, 전쟁은 분명히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켜 줄만한 것이었다.

흔히 금속 숙련공들이 투쟁적으로 변하고 노동자 평의회 조직에 주목하게 되었던 점은 그들이 자신의 특권을 보호하기 위한 보수적인 이유들 때문이라고, 예를 들어 자신들의 엘리트적 지위와 숙련공들의 전통적인 권리들을 보호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가장 강력한 노동자 평의회의 토대는 기술적으로 앞서있고 사회적으로 조직화된 공장들이었다. 영국의 경우에는 숙련공의 노동관행들(practices)이 가장 잘 보호되고 보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숙련 노동자들의 혁명적 추동력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반면 독일과 이탈리아의 경우 숙련공들의 작업장투쟁과 관행들이 결코 깊은 뿌리를 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이에 존재한 더욱 강력한 급진적 경향성이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독일과 이태리에서 가장 강력한 평의회 운동을 전개했던 곳은 가장 사회적으로 조직되었던 작업장이었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숙련 노동자들이 노동자평의회에 주목했던 것은 합리적 진보에 대한 러다이트식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국가간 경쟁의 무정부성과 국내의 사회화된 생산 사이의 갈등에서 발생한 자본주의의 모순들의 비합리성에 대해 대응했던 것이다.

따라서 평의회 운동은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단계에 적합한 것이었다. 평의회는 유럽의 산업들 중에서 기술적으로 가장 앞섰고 가장 역동적이었던 금속 산업 분야에서 성장했다. 36,000명의 노동자들이 있었던 페테로그라드의 푸틸로프, 10,000명의 노동자들이 있었던 베를린의 DWM, 15,000명의 노동자들이 있었던 피아트 센터 같은 공장들은 노동자 평의회의 발생지들이었다. 그들의 경험들 속에서 얻은 혁명의 교훈들은 오늘날의 조건들에서는 결국 이른바 (소규모 작업장들에 기반하고 있었던) 파리코뮌이나 (장인들을 그 기반으로 했던) 차티즘보다 더욱 적합한 것이었다.

1914 1918년의 전시 위기는 많은 힘들이 작동하도록 만들었다. 위기는 노동계급의 전통적인 방어수단을 제거해버렸고 노동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방식으로 자기-조직화하도록 만들었다. 전시 위기는 특정 산업에서 사회적 관계의 약한 고리가 만들어지도록 했는데 예컨대 군수산업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은 가장 첨예하게 드러났다. 심지어 그것은 투쟁 방법 또한 규정했다. 정치와 경제가 융합되어 있는 국가자본주의 체제는 두가지 전선들 -- 작업장에 대한 경제적 공세와 전쟁이라는 정치적 쟁점에 대항하고 있는 전선들 -- 에서 노동자 평의회 운동에 의해서만 대적될 수 있었다. 20세기의 자본주의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대량 생산 단위들로부터 자라난 혁명적 민주주의 속에서 적수를 만났던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단지 군수산업 노동자들에게만 영향을 주었던 것은 아니다. 위기는 수백만 노동자들의 의식들에 충격을 주었고좋든 싫든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라는 지배계급의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무기를 손상시켰다. 총동원 전쟁(total war)은 일상생활에 대대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허구적인국가의 이익이라는 명분 하에 자기를 희생시켰던 몇 년 동안, 과거 삶의 방식으로의 회귀란 있을 수 없으며 근본적으로 새로운 세계는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출현해야 한다는 정서가 자라났다.

물론 이러한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는 정서의 힘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다음의 대화, 적진으로 향하는 밤 기차라는 표제로 출간되었던 우익 잡지는 이러한 정서를 적절히 표현하고 있었다.

 

프랑스 병사 : 우리는 자본주의를 …… 이른바 사회주의, 공산주의 또는 소위 새로운 질서로 대체시킬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제주의, ‘민주주의또는 개인주의는 확실히 아닐 것입니다. ……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 전체가 전쟁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당신은 독일의 모든 사람들이 동원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이와 동일한 것을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봤습니다. …… 확실히 참호들 속에 있는 젊은 남자들과 군수공장들에 있는 젊은 여성들은 오늘날 공산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 그들은 일당 6수스(sous)를 받았습니다. …… 그들은 똑같은 음식을 먹습니다. 그들은 동일한 명령들에 복종하며 동일한 오두막집들(hovels)과 개천들(ditches)에서 살아갑니다.

하사관 : 우리가 최근 몇 년 동안 경험한 일들을 잊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가 피를 흘려 헌신했던 그 나라를 여러분 정치가들, 자본가들 그리고 자동차를 타고 대로를 달리는 민주주의의 귀족들에게 되돌려 줄 것 인가요?. …… 프랑스는 누구의 것입니까? 그것은 싸웠던 우리의 것이며 -- 군수공장들에서 노동했던 여성들의 것이며 -- 죽은 동지들의 고아들을 지원했던 농민들의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프랑스는 우리의 것입니다.

 

만약 노동자 평의회가 단지 군수산업들에서만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군수산업 노동자들이 대다수 민중과의 동맹을 쟁취해내고 국가권력을 장악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위기가 군수산업에서 처음으로 평의회를 발전할 수 있게 했을지라도, 더욱 광범위한 계급투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금속산업(engineering)은 계급투쟁 전체의 전위로서 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노동자 평의회는 그것이 전체 노동계급의 대중조직이 되고 결국에는 노동자 국가가 될 수 있을 때까지 확장될 수 있을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거대한 가능성들을 열어줬다. -- 하지만 그 가능성들은 단지 가능성들일 뿐이었다. 객관적인 환경들은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 조직화에 유리한 상황이었다. 참호속에서의 죽을 수 있다는 압력, 공장에서의 장시간 노동 그리고 식량 부족은 가장 덜 조직화되었던 노동계급 부위들에서 조차 여러 폭발적인 돌발사태들(upsurges)을 야기하였다. 자생적(spontaneous) 행동들의 가능성이 조직화되어 승리로 이어질지 여부는 이제는 혁명적 지도력에 달려 있었다. 노동자 평의회는 올바른 지도력이 제공해 줄 수 있고, 모든 인간성을 말소시켜버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야만주의를 막을 수 있는 힘이었다.

당시 가장 중요한 쟁점들은 전쟁과 작업장 투쟁이었다. 대개 개량이 가능한 상황에서는 그것들을 한데로 연계시키기 위한 의식적 노력이 이루어지곤 했다. 순전히 국가수준의 정치적 쟁점에만 기반하고 있는 어떠한 정치 운동도 노동자들의 물질적 관심사들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지 않는 이상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투쟁도 그것이 부분적인 경제적 목적들으로 제한된 채 남아있는 한 그것은 계급을 분할통치 상태로 남겨두게 될 것이고, 엄청나게 강력한 국가기구들의 손에 의해 패배하게 될 것이며, 그 국가기구들은 노동조합들의 공식적 지도부들을 포섭하게 될 것이었다.

정치와 경제의 분리는 개량주의의 기본적인 특성이다. 일정정도 정치와 경제의 분리현상은 많은 노동자들의 실제적인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 착취의 대상이 되고 이로인해 자본가들에 맞서 싸울 노동조합과 같은 집합적 경제 조직의 필요성을 쉽사리 취득하게 된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현장상황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더 넓은 정치적 쟁점들을 마주하게 되면 계급 조직 및 분명한 계급 정치의 필요성은 대체로 엷어지게 된다. 따라서 정치와 경제의 분리는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이 처한 조건들에 대한 단순한 반영이 아니다. 만약 단순한 의식적 반영이라면 정치와 경제의 분리현상은 자본주의 위기로 인해 노동자들의 문제의식이 개별 공장들을 넘어서 더욱 넓어지거나 또는 경제 투쟁에 대한 국가개입이 국가와 경제적 쟁점들간의 밀접한 연관을 보여주게 된다면 쉽사리 그리고 저절로 극복될 것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분파적 노동조합들과 의회 정당들 같은 조직들은 정치와 경제의 분리에 기반해서 건설되고 성장해왔다. 대의체와 더불어 정치가들은 자신들이 파업에 찬성했을 때 지역기반의 표를 잃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산업에 주요한 초점을 두고 있는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은 쟁의가 벌어지는 동안 국가에 정치적으로 도전하게 되면 국가의 공격을 받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비록 노동자들의 요구들을 거스르는 것이었을지라도, 서유럽의 많은 당 지도자들 및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유지하는데 노력해왔다. 이러한 분리를 유지하기 위한 엄청난 노력은 개량주의적 조직들을 보호하는 중요한 수단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결국 노동자 혁명으로부터 자본을 보호하는 효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만약 노동이 자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려면 가장 선진적인 집단인 노동계급이 생산에서의 착취경험을 더욱 더 일반화시켜 자본가와 국가를 전복할 수 있을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행동이 필요하다는 이해로까지 확장시켜야만 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융합만이 성공적인 혁명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 노동자평의회는 이러한 융합을 성취시킬 수 있는 조직형식이었다. 이를 건설하기 위해서, 그리고 부르주아 국가라는 외부의 적과 개량주의라는 내부의 적에 맞서 그 대의(cause)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도력이 개발되어야 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당은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서유럽에서는 -- 역주) 그에 상응할만한 힘은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는 적지만 놀라운 영향력을 지닌 정치적 혁명집단들과 작업현장의 전투적 노동자 집단들이 있었다. 서유럽에서 그들은 아직까지는 당을 구성하지 않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현장투쟁도 만들지 못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장 앞선 정치적 사상들(사회주의자 전위들)을 공장들에서의 현장 활동들(투사 전위들)에 결합시킴으로서 지도력의 전망을 보여줬다. 전시의 위기 속에서 이러한 두 가지 요소인 정치적 사상과 현장 활동은 가장 조직화된 노동자들, 즉 군수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군수산업 노동자들은 이제는 노동계급의 나머지 사람들을 이끌 수 있게 되었다. 볼셰비키당은 정치적 수준의 사회주의자들과 경제적 수준의 전투적 전위들간의 융합을 정확히 표현하는 것을 통해 노동자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었던 것이다.

서유럽의 혁명운동들 역시 효과적인 지도력 구축을 시도했었다. 하지만 전쟁의 와중에 그리고 강렬한 계급투쟁이 벌어지는 상황 속에서 상이한 전위들을 하나의 응집성을 가진 힘으로 통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지도력이 성취되는 정도에 따라 노동자 평의회 운동들의 힘이 결정되었다. 노동자평의회는 고정된 회원증을 가지고 움직이는 수동적인 제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응집된 힘으로 이끌수 있는 지도자들의 능력은 노동자평의회 운동의 성장에 결정적인 요소였던 것이다.

 

 

 

 

3. 글래스고우 : 기반 마련

 

영국 노동운동의 특징은 러시아의 노동운동과 비교할 때 서로 반대를 이룬다는 점에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러시아에는 제도화된 노동조합은 부재했지만 정치적으로는 가장 앞선 새로운 산업노동계급이 있었다. 반면 영국에는 가장 오래된 노동계급이 있어 높은 노동조합 조직률을 지니고 있었지만 정치적 태도는 가장 보수적이었다. 19세기 내내 영국은 시장경쟁에 거의 직면하지 않음으로 인해 자본가들은 조직된 노동자들의 저항을 돈으로 살 수 있었다. 1850년대 이래로 지속되었던 완전고용과 생활수준의 상승은 차티즘 같은 정치적 운동의 힘을 약화시켰다. 노동계급의 몇몇 집단들은 여러 차례 양보들을 얻어 낼 수 있는 강력한 경제적 투쟁조직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투쟁을 전면화하거나 체제전복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비록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는 새로운 노동조합 총연맹(General Union)'을 설립시켰던 1889년의 파업과 1910부터 1915년까지의노동 불안(Labor Unrest)’의 경우처럼 단기간 내의 광범위한 전투성을 보여주기도 했었지만, 독자적인 노동계급의 정치는 운동의 진보에 불필요하다는 주장이 전쟁 이전까지 공공연하게 제기되었다.

이러한 맥락을 볼 때, 영국은 소비에트의 본고장인 러시아와는 너무도 차이가 나며 따라서 혁명 투쟁의 방도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1915년부터 1920년 사이에 영국은 러시아나 독일보다는 덜 열광적이었다. 하지만 현재 전투적 노동자들이 열악한 수준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며 혁명전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개량주의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다는 점은 오늘날 어려운 조건들에 직면해 있는 사회주의자들에게 영국의 경험은 매우 값진 것으로 될 수 있다. 글래스고우는 특히 노동자 평의회 조직이 자리잡히는데 있어서 최초의 시험적인(tentative) 일보를 내딛었던 장소였다.

 

전쟁 이전의 글래스고우

 

서유럽 노동자 평의회의 핵심 거점인 세지역 -- 글래스고우, 베를린, 튜린 -- 모두가 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몇 년 동안 급속한 사회적, 산업적 변화를 경험했었다.

글래스고우의 인구는 1860년부터 1914년까지 두 배로 늘어났다. 급속한 팽창은 20,000명의 하이랜더라는 스코들랜드 출신집단들을 만들어냈고 많은 아일랜드 사람들이 도시의 복합적인 문화 속에 편입되도록 했다. 또한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빈민 거주 구역의 촘촘한일인용(single end)’널빤지(flat)에서 살아야만 하는 심각한 인구과잉을 유발했다. 그 결과 글래스고우는 영국의 도시들 중에서 가장 높은 사망률 및 유아 사망률을 보였다.

산업이 폭발적으로 확장됨에 따라 전력소비량은 1900년부터 1913년 사이에 15배가 증가했다. 공장들 및 조선소들은 즉시 글래스고우 도시의 한계를 넘어서 클라이드 만(Clyde basin)을 따라 서부의 댈뮈르(Dalmuir)로부터 동부의 쉐틀스톤(Shettlestone)에까지 영역을 확대했다. 금속산업이 핵심 산업이었다. 금속산업 분야에는 전체 노동자들의 1/3이 고용되어 있었는데, 이들의 주요 활동은 선박건조와 선박공학(marine engineering)이었고 이는 전시 군수물자 생산의 엄청난 확대로 인한 것이었다. 급격한 사회적 변화는 노동자들의 태도들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산업의 성장은 기억에 남을 만하고 획기적인(novel) 것이었다. 클라이드 사이드(Clydeside) 노동자들에게 산업주의는 신에 의한, 인류의 불가피한 환경이 아니라, 변화하고 있고, 변화가능하며, 사람들에 의해 구성되어 왔듯이 그들의 힘으로도 만들어 낼 수 있는 많은 현상들 중 하나로 보였다.

 

이러한 논평은 베를린과 튜린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전쟁 이전에도 글래스고우의 금속노동자들은 현대적인 기술과 새로운 노무관리를 통해 사회적 생산이 만들어지는 경험을 했었다. 이후 클라이드 노동자 평의회의 지도자들 중 한 사람이 되었던 아더 맥마너스(Arthur McManus)는 이에 대한 좋은 예였다. 전쟁 이전에 그는 10,000 여명의 노동자들을 고용한 싱거 제봉틀 공장(Singer sewing machine factory)에서 바늘가공을 했다.

 

매일 아침 테이블 위에는 수백만 개의 바늘들이 쌓여 있었다. 그가 그 바늘 산더미를 줄여나가는 만큼 새로운 바늘 더미들이 쌓였다. 하루 내내 그것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어느날 아침 그는 공장에 들어갔을 때 테이블 위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상황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신이 나서 모든 사람들에게 테이블 위에 바늘이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은 그에게 갑자기 자신의 삶을 이처럼 보내야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었다. 그는 자켓을 벗지도 않고 발길을 돌려 언덕을 넘어 벨로쉬(Balloch)로 산보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모든 사람들이 맥마너스만큼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은 아니지만 머리를 사용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생산하는 방법들과 이로인한 현대 자본주의의 소외현상은 확실히 노동자들을 투쟁적으로 만들었던 요인 중에 하나였다.

전쟁 동안 노동자 평의회 운동은 수많은 현대적인 기계화된 공장들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케쓰카트(Cathcart) 웨어(Weir) 공장은 정부가 평의회 조직의 맹아인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의 배후를 이루고 있는 5개 주요한 공장들이라고 지목되었던 공장들 중 하나였다. 웨어 공장에서는 미국에 있는 같은 계열사 공장으로부터 도입된 공세적 경영기법에 맞서 장기간의 투쟁을 벌였다. 시간 및 동작 연구(time and motion study)와 같은 경영기법은 훗날 반전 투쟁의 지도자가 되었던 존 맥클래인으로 하여금 1914년 여름에 다음의 글을 쓰겠금 하였다.‘어떠한 영국 회사들보다도 이 독점회사만큼이나 미국화된 회사는 없었는데 심지어 이 독점회사는 상선뿐만 아니라 함선까지도 생산하여 공급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이들은 재촉했고, 재촉했고, 재촉했다.’

회사의과학적 관리 기법에 대해 투쟁을 벌이기 위해서 노동자들은 강력한 현장조직을 만들었다. 웨어 공장의 현장조직 대표위원이었던 해리 맥쉐인(Harry McShane)은 사회화된 생산이 노동자의 집합의식을 형성하는데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를 다음과 같은 진술을 통해 보여줬다.

 

웨어 공장은 사람들이 자신들 분야의 자기 자리에서만 일하고 그 외의 분야와 자리에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현대화된 공장이었다. …… 작업들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단순해서 어느 누구도 그것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 그와 같이 공장을 조직한다는 것은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것이 더욱 수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파크해드 제련소(Parkhead Forge)는 평의회 운동의 또 다른 근거지였다. 이 거대한 공장은 새롭게 설립되어 전기용광로(electric furnaces), 크래인, 자동 컨베이어와 같은 최신기계들을 갖추고 있었다. 1914년까지 이 공장은 강력한 현장조직 대표위원회(shop stewards' committee)를 가지고 있어 소유주인 윌리엄 버드모어(William Beardmore)씨와 매일 성과급 관련사항을 협상하였다. 웨어 공장과 파크해드 제련소는 이 정도의 현장 조직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영국에서도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클라이드에서의 금속노동자들은 노동조합 조직 수준이 높았다. 5명 중 4명의 노동자들이 나름의 노조 조직에 속해 있었는데 그중 가장 강력했던 것은 기술자연합회(Amalgamated Society of Engineers)였다. 1892년 기술자연합회(ASE)에서는 현장위원(shop stwards)들을 임명해 주었고 곧 노조와 독자적인 지역 현장위원들간의 네트워크를 출현하겠금 했다. 1896년경부터 자본가들은 현장위원들의 감시위원회(Vigilance Commitee)'에 대해 혹독하게 불평해댔다.

이러한 현장 노동자간의 단결력은 글래스고우를 가장 전투적인 금속산업 지역으로 만들었던 일련의 대결을 통해 공고해졌다. 다양한 공장들에서 온 현장조직 대표자 위원회는 1897년부터 1898년까지의 공장 폐쇄에 대항해 싸웠다. 그리고 이 위원회는 5년 후에는 다시금 노동조합 지도부의 명령을 거부하면서 임금 삭감에 투쟁하였다. 1914년에 이르러 글래스고우에서는 강력하고 독자적인 현장조직 투사들간의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이들은 전쟁이 시작되기 , 임금과 노동조건의 기본적인 개선들을 위한 투쟁 속에서 현장조직 지도자로서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했다. 이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축적된 자신감과 기초적인 조직수준은 현장노동자들간의 네트워크가 쇼비니즘과 (전쟁수행을 위한)‘사회적 평화의 흐름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겠금 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정책기조(trend)를 직접적으로 거부하기 위하여 산업적 행동(파업 등)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적 정치의 전통은 현장조직 투사들의 네트워크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노동자 평의회의 성장을 위해서도 중요했다. 영국에서는 전반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이 매우 취약했다. 전쟁이 일어나던 전날 노동당(노동당의 정치적 성향은 자유주의보다 약간 왼쪽에 있었다)은 단지 16십만 명의 구성원들만을 가지고 있었고 의회 원내로 진출한 조직은 부재했다. 독립노동당(Independent Labour Party)(ILP)에서는 혼란스럽고 이상주의적인 사회주의를 지향했으며 단지 30,000명의 추종자들만을 가지고 있었다. 맑스주의는 더욱 지지를 받지 못했다.

혁명 운동은 위의 이유들로 인하여 성장하기 어려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치 투쟁에 의지하지 않고도 임금 수준의 향상 같은 경제적 개선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은 경제와 정치라는 두 개념들이 많은 노동자들의 마음 속에 분리된 실체들로서 남아있다는 것을 뜻했다. 가장 잘 조직된 노동자 집단이며 경제적 양보들을 얻어내기 위해 강력한 노동조합 운동을 수행했던 집단들은노동귀족의 성격을 띠게 되어 자신들의 투쟁을 전 노동계급으로 전면화해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20세기 들어 영국의 노동자들은 강력한 집단적 성격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어떠한 독립적인 정치적 사상과 세력을 가지지 못했다.

주요한 맑스주의적 흐름은 영국 사회당(BSP)이었는데, 이 당은 충격적이게도 경제와 정치의 분리라는 생각에 일정정도 종속되어 있었다. 영국사회당은 이러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계급투쟁을 통해 극복하지는 않았으며 스스로를 정치 분야에만 한정시키는 태도를 취했다. 영국사회당은 -- 전투적인 파업들의 홍수가 전국을 흡쓸었던 -- '노동불안(Labour Unrest)' 기간이던 1911년에 설립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새로운 당이 산업적인 대중투쟁 속에서 활동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영국사회당의 지배적인 의견은 선동(agitation)자신들과는 무관한 영역에 대한 무례한 간섭으로 될 것이라고 보았다.

영국사회당은 정치권력의 쟁취이 당연하지만 자신의 당 일상적 업무 이외의 것들에 참견해서 발을 더럽히려고 하지 않았다. 영국사회당은 어쩌면 궁극적인 성과를 이끌어낼 수도 있을 직접행동을 거부하면서 사회주의 정치를 산업적 투쟁으로부터 분리시켰다. 그 결과 영국사회당은 이후 전투적 행동에 의해 급진화된 수 천 명의 노동자들의 관심을 끌 수단이 부재하였다. 매주 일요일마다 실시되는 연단(soap boxes)으로 설명되는 영국사회당의 사회주의는 노동자들의 삶과 조응하지 못한 채 남게 되었다. 영국사회당은 10,000명의 당원을 가진 단연 가장 큰 맑스주의적조직이었다.

하지만 영국사회당만이 정치투쟁과 경제투쟁 사이의 넘을 수 없는 분리를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노동 불안(Labor Unrest) 시기에 투쟁의 선봉에 섰던 생디칼리스트들은 영국사회당과는 반대 측면에 강조점을 두었다. 영국사회당이 오로지 정치영역과 사회주의의 궁극적 목표에 대해 강조했던 반면 생디칼리스트들은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를 통한 직접행동을 호소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사회주의의 성취는 노동조합만의 투쟁을 통해 가능한 것이었다. 그들의 목표는모든 노동자들을 하나의 전국적 그리고 국제적 차원의 노동조합에 통합시키는 것, 노동자들 스스로에 의해 모든 산업들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생디칼리스트들에게 있어 이론은 이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론보다 실천이 더 중요했다. 결국 노동조합 투쟁이 한계를 지닌다는 점을 볼때 그들의 활동은 경제적 수준의 투쟁 한계를 넘어서지 않았고 또한 좀처럼 체제 전체에 대한 도전을 감행하지 않았다.

다른 무엇보다도 영국의 좌파세력은 혁명적 실천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주의 이론과 노동계급의 실천을 종합하기 위한 조직과 사상이 결여되어 있었다. 겨우 수백 명의 당원만을 가지고 있던 군소정당인 사회주의 노동당(Socialist Labour Party)만이 정치와 경제 간의 분리를 연결시키고자 노력했다. 사회주의 노동당은노동계급의 두 가지 행동들, 즉 정치행동과 산업행동은샴쌍둥이"를 이루며 그 각각은 서로에게 필수적인 것으로 봤다. 하지만 그들은 노동자 평의회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에까지는 이르지는 못했다. 미국의 사회주의자인 다이엘 드 레온(Daniel de Leon)으로부터 물려받은 그들의 사상은 노동자 정당과 생디칼리즘적 유형의 혁명적 노동조합의 병행적 성장이라는 생각이었다. 비록 드 레온의 접근법은 분파주의자의 막다른 길(dead-end)로 판명되었지만 사회주의 노동당이 보여준 정치투쟁과 경제투쟁간의 상호연관에 대한 생각은 그 성원들의 머릿 속에 영국 노동자 평의회 운동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해줬다.

영국 좌파들의 유약함에도 불구하고 글래스고우는 전쟁 이전시기에 있어 사회주의 운동(agitation)의 중심부였다. 이 지역의 급진주의는 다양한 흐름들 -- 스코틀랜드의 독립(highland clearance), 아일랜드의 해방 투쟁 그리고 항구의 혁명적인 러시아 수병들과의 접촉 -- 에 의해 만들어졌다. 1907년부터 1908년까지의 금속가공업종 및 조선업종에서의 갑작스러운 불경기는 이 지역의 실업률을 6%에서 28.5%로 급격하게 상승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무정부성(불황과 공황)에 직면해서 노동조합주의와 의회주의의 절차 중시 태도는 너무 부적합한 것으로 보였다. 더블린 운송 산업의 파업을 지지하는 과정에서 클라이드 사이드 지역 노동자들도 투쟁하기 시작했으며 전쟁이 발발하기 앞서 노동불안(Labor Unrest)시기가 발생했다.

이 지역에서는 독립노동당(ILP)3,000명의 당원을, 영국사회주의당이 약 500명의 당원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미약한 지지만을 가졌던 사회주의 노동당도 100명의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었다. 영국의 좌파는 일반적으로 생디칼리스트들(경제 투쟁을 노동해방의 길로 여기는 사람들)과 분파적 사회주의자들(무계급 사회라는 당의 선전만을 신뢰하고 있던 사람들)로 분리되어 있었던 반면 글래스고우에서의 노동운동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이라는 허구적 이분법을 어느 정도는 극복하고 있었다. 클라이드 사이드의 많은 혁명가들은 당 활동과 현장 투쟁(militancy) 모두에 참여하고 있었다. 정치 생활과 현장투쟁 생활은 공장 입구, 노상 논쟁 집단(canteen debating group)과 노동조합 회의(Trades Council)에서의 논쟁 속에서 서로 마주쳤다. 게다가 그곳에는 존 맥클래인(John Maclean)이 운영하는 교육기관이 있어 수 백명의 지도적인 현장투사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윌리 갤래셔(Willie Gallacher)라는 선진 현장활동가가 정치적으로 성숙해간 과정은 어떻게 정치적 활동과 현장투쟁 활동이 상호작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었다. 그는 로버트 블라쉬포드(Robert Blatchford)클라리언(Clarion) 신문을 읽음으로써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 신문은 노동조합을 충분히 사회주의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노동조합회의(Trades Council) 대의원을 만났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이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다는 모욕을 받고 바로 자신의 실수라 수긍한 후 놋쇠주조연합(Brassfounders' Association)이라는 노조에 가입하였다. 그 후 갤래셔는 앨빈 자동차 회사(Albion Motors)에서 핵심적인 현장위원이 되었으며정기적으로 점심시간에 토론하는 노동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혁명적 문헌들을 제공해주는 집단을 만들었다. 클라이드 벨리(Clyde Valley)에 있는 금속 공장들을 가로질러 유사한 투쟁(agitation)이 발생하자, 사회주의 이론과 공장 생활을 구분하고 있는 벽은 무너뜨려지기 시작했고 노동자 평의회의 발전에 비옥한 토양이 형성되어 갔다.

글래스고우는 다른 나머지 지역들에서 좌파들을 황폐화시켰던 분파주의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았었지만, 다양한 노동운동 집단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들을 누그러뜨리거나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같이 모여 연대했다. 해마다 열리는 노동절 행사들에는 이러한 연대 정신이 깊이 깃들여 있었다.

 

한꺼번에 14개 내지 15개의 회의들이 개최되었고 모든 종류의 사회주의자들의 깃발이 휘날렸다 -- 예를 들어 노동자들의 유일한 희망인 사회주의등등의 구호가 적힌 깃발들이. 사회민주주의연맹(Social Democratic Federation)[곧 영국사회주의당으로 개명했던]은 항상 맑스에게서 인용한 슬로건을 내걸었다. 사회주의노동당(SLP)도 거기에 있었고 독립노동당과 클라이언 스카우트(Clarion Scout)도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매우 잘 연대하여 일했던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의 주일학교(Sunday school)에 있는 어린이들은 조지 광장(George Square)으로부터 왔다. …… 심지어 아나키스트들까지도 나이든 윌리 맥길(Willie Mcgill)에 의해 지도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클라이드 노동자위원회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Clyde Worker's Committee)은 중요한 비공식 파업을 지도함으로서 시작되었다. 평상시에 파업 위원회는 그 활동범위가 제한적이었으며 일단 하나의 투쟁이 종결되면 사라져 버렸던데 반해 당시의 계속되는 전쟁 위기는 현장 노동자 대부분으로 하여금 불만하게 하였다. 그 과정 속에서 전투적 현장 활동가들간의 느슨한 네트워크는 수많은 공장들 간의 강고한 연계를 형성함으로써 상설적인 형태를 확보해야만 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처럼 노동자 평의회는 초기에 주로 이른바 상설적인 파업 위원회의 모습을 띠었다.

작업현장에서의 투쟁은 1915년에서 1919년까지 절정에 이르렀으며 이 투쟁은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군수산업 현장위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시기에 전쟁과 생산활동(industrial life)은 분리될 수 없었으며 노동자 위원회는 당시의 특수한 환경들에 대하여 현장 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던 결과이었다. 노동조합주의자들(trade unionists)의 경제적 요구들은 불가피하게 자본가들의 저항을 받았다. 자본가들은 전쟁에 전력투구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일정 정도 희생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구실을 내세웠던 것이다. 최소한의 요구들만을 제기했던 노동자들조차도 당면했던 이러한 문제들은 19152월 군수산업 노동자들과 자본가간의 최초대결(confrontation)에 의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간 3년간의 임금협약이 만료되었을 때 기술자연합협회(ASE) 글래스고우 지구 위원회는 시간당 2펜스의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는 평상시 어떠한 혁명적 함의를 갖지 못하는 것이지만 당시에는 무기 생산에 대한 어떠한 방해도 반역죄의 딱지가 붙여졌다.

128일에 금속노동자들은 시간 외 노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캐쓰캐트의 웨어 공장에서 미국 출신 노동자들을 영국 노동자들보다 더 많은 임금으로 고용했을 때 영국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일으켰다. 처음부터 전쟁과 이 지역 임금투쟁 간의 연관은 분명한 것이었다. 그 주도자였던 갤래셔는 다음과 같이 썼다.

 

……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노동조합 관료들의 '애국적인태도들로 인해 ……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투쟁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확신했다. …… 캐쓰카트의 금속노동자들은 이러한 상황에 직면해 파업을 선언하는 등 신속한 행동을 통해 모든 배신자들에 맞서서 …… 노동조합은 공장에서의 근로조건들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 금속노동자들은 정부와 자본가들에게 전쟁이 있건 없건 간에 노동조합이 건재하다는 점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파업기간 동안 현장위원간의 네트워크는중앙 노동거부 위원회(Central Labour withholding Commitee)'라는 이름으로 재출현했다. 그 조직은 26개 회사로부터 온 10,000여명의 비공식적 파업자들을 아우르고 있었다. 강고한 조직과 의사 결정에 대한 현장 노동자의 원활한 참여를 통해 2주간의 동맹파업을 이끌어 냈는데 이 파업은 클라이드에서 지금까지 보아왔던 파업들 중아마도 가장 잘 조직된 파업이었다. 비록 정부는 33일까지 작업장 복귀를 권고했지만 투쟁 지도자들 간의 비공식적인 접촉은 지속되었다. 이제는 조직을 위한 토대가 도시 전체를 관통하게 되었다.

또한 중요한 것은 모든 현장의 전투적 선진노동자들 사이에서는 현장조직을 설립하려는 분위기가 고무되었다는 점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현장조직들은 단지 한 두 개의 강력한 작업장들에서나 존재했었다. 단순한 경제적 요구를 넘어섰던 단 한번의 파업은 엄청나게 강력해진 현장조직을 -- 노동자평의회로의 첫 번째 단계이자 다음 단계로 가는 길을 닦아주는 -- 즉 수많은 공장들의 금속 노동자들과 긴밀히 밀착된 현장조직을 강고하게 해줬다.

반면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새로운 기구였다. 그것은 군수법령(Munitions Act)을 실행하려던 국가와 직접적인 충돌이 있은 이후에 형성되었다. 즉 노동자 위원회의 기원은 정치적 쟁점으로부터 였다.

19158월에 두 명의 조선업종 노동자들이 일을 못한다는 이유로 해고되었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동정적 행동을 했던 26명의 조선 노동자에게 군수법령(Munitions Act)에 근거하여 벌금형이 가해졌다. 투쟁노동자들의 일부가 벌금납부를 거부하자 감옥형에 처해졌다. 이에 대응해 현장의 전투적 선진노동자로 구성된 비공식적 네트워크는 즉각적인 파업 행동을 통해 위협을 가했고 이를 통해 감옥에 갇혔던 노동자들은 석방되었다. 며칠 후 군수법령을 근거로 웨어 공장의 현장위원들에게 가해졌던 탄압은 위와 유사하게 현장 노동자들의 대응에 의해 철수되었다. 2월의‘2펜스 파업(two pence strike)’을 이끌었던 투쟁조직이 상시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은 명백했고, 이런 이유로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Clyde Workers' Committee)가 탄생하게 되었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를 세웠던 현장의 선진노동자들은 두 가지 점을 공유했다. 그들모두가 19152월의 파업을 이끌었으며 1915년부터 1916년까지 노동자 위원회의 근간을 이루었던 회사들의 현장조직 위원이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사회주의자였다.' 앨비온 공장의 현장조직 위원이자 영국사회주의당의 당원이었던 윌리 갤래셔(Willie Gallacher)는 그 노동자 위원회의 의장이었다. 독립노동당의 제임스 메셔(James Messer)는 웨어 공장의 현장조직 위원이자 노동자 위원회의 서기관(secretary)이었다. 사무장(treasurer)은 사회주의노동당의 톰 클라크(Tom Clark)였는데 그는 파크해드(Parkhead) 공장 노동자였다. 사회주의노동당 또한 바와 스트라우드(Barr and Stroud)의 위원장이자 그 전에는 사회주의노동당 신문인 사회주의자들(The Socialist)의 편집자였던 조니 뮈르(Johnny Muir)와 그 후임 편집자였던 아더 맥매너스(Arthur McManus)에 의해 대표되었다.

좌파 정치가 현장노동자의 대중적 호응을 받지 못해 서로간에 결합할 수 없었다면 글래스고우의 맹아적인 노동자 평의회 조직은 결코 출범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전쟁을 수용했고 이를 위해 노동자들과 자본가들 사이에 사회적 휴전을 할 것도 받아들였다. 단지 제국주의 전쟁으로부터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믿었던 사회주의자들만이왕과 조국의 이름 속에서 노동자 운동이 질식되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싸우려 했다. 하지만 극소수의 노동자들만이 그들의 의견에 동조했다. 이러한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진 현장조직 위원들은 만약 혼자 자신의 생각을 선전만 했다면 어떠한 성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파업에서 수천 명을 이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먹고 사는 문제에 관한 경제투쟁에서 현장노동자들 사이에 좋은 평판을 얻어왔기 때문이다. 전쟁 이전부터 조직기반을 마련해왔었기 때문에 그들은 노동자들이 비록 전쟁에 찬성할지라도 자신들의 임금과 노동조건들을 방어해야 한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투적 선진 노동자들은 결국 임금투쟁이라는 경제적 쟁점에 있어서 노동자들을 이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그들은 곧 군수법령(Munitions Act)이라는 정치적 쟁점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공장 조직에서 현장투쟁으로 향해갔던 노동자 평의회 운동은 점차 경제적 투쟁을 통한 이익 보호로부터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공격에 대한 저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191511월에 작성되었던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의 첫 번째 리플렛은 처음으로현장 노동자 조직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표현했다.

 

우리는 노조관료들이 노동자들을 올바로 대변하는 한에서만 그들을 지지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노동자들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독립적으로 행동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작업장으로부터 온 대표들로 구성되어 진부한 규칙과 법의 구애를 받지 않고 노동자들의 참된 느낌들을 대변하고자 한다. 우리는 사안에 따라 그리고 현장노동자들의 욕망에 따라 즉각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전투적인 선진 활동가들은 결국 노동조합 운동 내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외부에서 자유롭게 행동했다. 이는 효과적인 지도력을 위한 출발점이었다. 만약 현장조직 위원들이 전체적으로 노동조합 기구에 통합된다면 그들은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 그들이 노동조합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다면 그들은 작업현장에 대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발견은 노동조합에 대해 분파적으로 거부하거나 그것을 무턱대고 받아들였던 과거의 실천에 비해서는 상당히 진보한 것이었다.

리플렛은 이미 광부들, 가스노동자, 기타 참여자 등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이 조직운동에모든 노동조합의 선진적 활동가들'이 참여할 것을 요청했다. 비록 지지의 광업위한 기반은 실제로 드러난 것보다는 군수산업 현장조직 위원들의 열망을 나타내 주었지만 이들은 금속산업만의 협소한 토대를 훨씬 넘어 계급 조직, 즉 노동자 평의회를 만들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전투적인 선진 활동가들은 노동계급에게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을 제공해야 했다. 분명히 이러한 조직화를 위한 호소는 금속산업 노동자들의 이익들을 방어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광범위한 것을 다루어야 했다. 모든 노동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다가온 위협은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다음에서 보게 되겠지만 이 위원회는 전쟁에 대한 쟁점을 극복하는데 상당한 어려움들을 겪었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매우 단순한 조직이었다. 노동자 위원회에서는 다양한 공장들로부터 약 250명에서 300명 가량 지도적인 현장조직 위원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만났다. 상근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는데 그 이유는 위원회의 힘이 현장과는 괴리되어 있는 몇몇 수뇌부(Head Office)가 아니라 현장 노동자들로부터 직접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조직의 성과는 출판물의 양에 의해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을 동원하는 능력에 의해 평가될 수 있었다. 이러한 동원능력은 현장조직 위원들이 해당 공장들에서 확보한 입지로부터 나왔다. 군수산업의 현장조직 위원들은 현장의 동료노동자들과 똑 같은 노동조건들 속에서 일하고 투쟁 속에서 지도력을 검증받았던 사람들이었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라는 틀에서 전투적 선진 활동가들이 함께 한다는 것은 결국 금속산업 현장 노동자를 아우르며 클라이드 벨리를 직접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중앙집중화된 조직을 만들 수 있도록 했다. 노동자 위원회는 행동을 위해 고안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투적 선진활동가들 사이에 가장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했으며 이를 통해 대의기구로서의 권위도 포함하고 있었다. 아래의 인터뷰에서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질문 : ‘당신은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의 성원입니까?’

답변 : ‘당신이 성원이라는 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느냐에 따라 대답은 달라질 수 있겠지요.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실제로 공식화된 기구(constitution)를 가지지 않은 다양한 성원들 간의 모임입니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분노한 노동조합주의자들(Trade unionists)의 모임으로서 클라이드에서 존재하고 있던 문제 때문에 출현한 것입니다. [그것은] 많은 작업장들의 다양한 활동가들이 우리의 모든 불만들을 논하기 위해 모이는 회합장입니다.’

질문 : ‘당신은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 노동조합 관료들에게 의지하는 것보다 좋다고 보십니까?’

답변 : '물론입니다. 우리 노동조합 관료들은 속수무책으로 …… 군수법령에 묶여있습니다.‘

질문 : ‘당신은 혼자만이라도 스스로를 대변할 수 있나요?’

답변 : ‘…… 당신의 작업장에서 당신을 대표로 보내야만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수의 의견이 대변될 수 있는 것처럼 당신은 작업장의 소수 의견을 대변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다수가 절대적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작업 현장에서의 투쟁을 통해 만들어 졌다. 하지만 당시에 전쟁과 관련된 폭넓은 문제들이 중심적인 사안이었고 글래스고우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법에 있어서도 근본적 기여를 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수가 미미했던 대부분의 영국 반전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적 히스테리와 심리적, 물리적 위협으로 인해 침묵하였었다. 클라이드는 예외였다. 전쟁 직후 첫 번째 일요일에 윌리 갤래셔는 존 맥클래인과 함께 연단을 마련했다. 둘 다 영국사회주의당의 당원으로서 그들은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를 강력하게 열변했다. 노동자 다수는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의 주장들을 곧 바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하지만 거기에는 사회주의 사상들에 대한 대중적인 관대함이 존재하고 있어 비록 그 규모는 작지만 강렬한 섬광을 내뿜으면서 노동자 국제주의를 확산시킬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물론 이를 성취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요구되었다!

 

끔찍한 소식들과 널리 유포되어 있던 공포 속에서 자생적 애국주의가 득세했을 때 …… 독립노동당은 길거리로부터 후퇴하였고 또한 메트로폴 극장에서 열리던 그들의 일요일 밤 회합을 중지하고 당 지역 공회당들로 피신했으며 거기에서 그들은 누구도 전향하지 않기로 합의했던 상황에서 존 맥클래인 혼자만은 자신의 작업을 대중들 속에서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즉시 맥클래인은 영국 사회주의당 지부들을 집결시키고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이는 속수무책으로 전쟁 속으로 미끌어져 들어가던 당 전체의 입장에 전면적으로 대립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노동당 역시 약간의 당원들을 제외하고는 반전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맥클래인은 비난 수준에 머물지 않았다. 그에게서 보인 독특한 주장은우리가 수고를 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전쟁은 단지 계급 전쟁뿐이다라는 점이었다. 선언적인 비난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이전 세계의 착취자들에 맞설 수 있게 해주는 모든 일들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가 공장 수준의 문제들에 대해 효과적으로 방어를 하는 동안, 맥클레인의 노동자 국제주의를 위한 입장은 공장 수준의 문제들을 만들어냈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공세적인 도전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출발점이었다. 그들 혼자서, 즉 맥클래인이든 현장조직 위원들이든간에 어느 누구도 이 위기에 대한 명쾌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에 대한 유일한 효과적 해법은 전쟁이라는 일반적인 위기에 대응하여 노동현장의 집합적인 힘을 이용하는 것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노동자 위원회가 한편으로는 조직적 힘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론적 명확성이 통합되는 전략을 전개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엄청난 난관들이 존재했다. 맥클래인의 생각들은 어떠한 공고한 조직에 의해서도 지지받지 못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현장 노동자들에게 미미한 영향력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월간으로 발간되는 선전선동 신문인 The Vanguard(전위)가 제기했던 세 가지 쟁점들 그리고 단지 한줌도 안되는 지역 지지자들을 제외하고는 맥클래인은 제국주의에 맞서 싸울 어떠한 조직(공장들에 뿌리를 두고 있는 당과 같은 조직들)도 가지지 못했다. 그는 결국 이러한 쟁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에 의존했다. 하지만 노동자 위원회는 혁명정당이 아니었다. 그 조직의 지도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었지만 그들은 현장노동자들의 대표들로서 모였기 때문에 이에 내재된 역할의 한계점들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들의 실천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서도 맥클래인은 그들에게 정치적인 요구를 했다. 그래서 두 측면들 사이에는 긴장들이 발생했다.

1915년 후반에 맥클래인은 전투적 현장조직 위원들이 반전을 투쟁의 중심적 강령(plank)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 그들은 반전투쟁의 전략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 오히려 현장노동자에서의 지지 기반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라고 응답했다. 갤리셔는 이러한 우려를 다음과 같은 간결한 말로 표현했다.‘클라이드 노동자위원회는 통일(unity)을 상징한다.’ 비록 혁명 사상들과 현장조직간의 공존은 글래스고우 노동운동에 막대한 잠재력을 제공했을지라도 그것들이 효과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장애물들을 넘어야 했다. 이는 다음의 노동물타기 정책(dilution)이라는 쟁점을 통해 드러났다.

 

노동자 물타기 정책(Dilution) -- 계급 전략에 대한 탐색

 

노동자 물타기(Dilution)란 숙련노동자들 대신에 비숙련 및 반숙련 노동자들을 우선적으로 고용하는 정부정책이었다. 단체교섭에서의 강력한 영향력을 토대로 하여 금속 노동자들은 노동자 물타기 정책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 싸울 수 있었다. 하나는 숙련공들의 엘리트적 특권을 위협하는 측면에서 투쟁했고 다른 하나는 어렵게 획득한 노동조합주의자들의 모든 권리들을 철회하려는 전쟁에 대해서 투쟁했다. 191511월부터 19163월까지 중요했던 몇 달 동안 글라스고우의 전투적 선진 활동가들은 숙련공 엘리트주의에 대해 투쟁하며 노동계급의 폭넓은 이해들을 대변하는 현장조직의 힘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정부의 노동자 물타기 정책이 처음으로 논의되었을 때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 의 최초 대응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생산량 증대라는 당신의 소망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하지만 우리는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지만 금속산업에 일군의 노동자들이 유입되어 우리의 노동을 실제로 하는 것보다 더욱 값싸게 만들게 될까 우려된다. 만약 사용자들이 우리들로부터 30실링을 주고 얻는 것과 동일한 만큼을 새로운 노동자들로부터 10실링을 주고 얻어낼 수 있게 된다면 아마도 오로지 우리의 힘만이 우리의 임금 축소를 막아낼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인식에 이르렀다.

 

군수품 생산량 증가에 대한공감을 보인 것은 커크우드(Kirkwood)와 뮈르(Muir)를 예외로 하고 전쟁에 반대했던 지도적인 현장조직 위원들의 기존입장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위의 진술은 그들의 공적 발언과 반전에 대한 개인적인 신념 사이의 첨예한 분열을 보여준다.

이러한 공적 입장과 사적 입장간의 차이는 전쟁 이전 투쟁방식들의 유산이었다. 심지어 가장 좌익적 전통들을 가지고 있던 글래스고우에서도 갤래셔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정치 연단에서는 전쟁반대를 연설할 수 있지만 산업적 쟁점들은 다른 차원이며 전쟁과는 분리시켜 다루어져야 한다고 느꼈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를 이끌던 성원들은 두가지 모양을 취하곤 했는데, 그 하나는 사회주의 정당 활동들을 위한 입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현장조직 위원으로서 전쟁에 찬성하는 수많은 현장노동자들을 대표해야할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의 위기라는 상황은 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사고간의 갈등에 직면하도록 만들었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노동조합 관료들이 전쟁의 열기에 압도되어 노동자들의 투쟁을 포기했었기 때문에 존재해나갈 수가 있었다. 싫든 좋든 클라이드 현장조직 위원들은 전시 국가자본주의에 의해 펼쳐진, 지도자 없는 노동계급 속에서 활동했다. 이러한 암중모색의 공간 속에서 전진해나가기 위해서는, 현장조직 위원들은 2펜스 파업을 거치며 이루어진 노동대중의 통일을 유지시키면서 자본주의적 전쟁이라는 주요한 쟁점에 대해 투쟁할 필요가 있었다.

1915년부터 1916년 겨울 동안 노동자 물타기 정책에 대해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가 보인 태도는 이러한 일을 수행하려는 시도이었다. 현장조직 위원들은 운동초기에 군수 공장들에서 운동의 효과적인 토대를 마련해야 했고 숙련공 엘리트주의를 제거하여 계급 전체의 입장으로 이끌려고 노력했다. 조니 뮈르(Johnny Muir)에게는 정책기조를 잡는 역할이 부여되었다. 그 정책 기조의 가장 중요한 구절에 의하면, 노동자 물타기 정책은 만약 정부가 일정한 요구들에 응하면 용인할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모든 산업들 그리고 국가 자원들은 정부가 접수해야 한다. 이는 정부가 단순히 그것들을 통제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들을 전적으로 접수해야 하고 조직된 노동자들이 직접적으로 그리고 동등하게 모든 산업의 관리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국유화(nationalization) 및 공동 통제의 요구는 역사가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제임스 힌턴(James Hinton)은 이는놀랄만한 일이며 -- 전반적인 방향성 상실의 증거라고 이야기한다. 심지어 전시 동안 영국 현장조직 위원들의 지도자였던 J T 머피(J T Murphy)마저도 그것을말뿐인 선전이거나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의 영향력에 대한 완전한 과대평가로 봤다. 하지만 이는 뮈르의 진술이 발표되기에 앞서 몇 주 전에 있었던 맥클래인의 제안들을 볼 때만이 이해될 수 있다.

정부의 노동자 물타기(dilution) 계획들에 대한 맥클래인의 대답은 그의 신문인 The Vanguard에 게재되었었다.

 

정부가로 하여금 모든 군수공장들을 접수하게 하자. 자본가들에게는 한푼도 나눠주지 말며 노동자들의 임금은 두 배로 올리게 하자.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줄일 것이며 생산설비(establishment)를 노동자들 스스로가 통제하도록 하자. 우리는 다음과 같이 보증한다. 노동자가 군수품 산출량을 세 배로 늘릴 것이며 이를 통해 전쟁 찬성자들이 제안한 것을 이룰 것이다. 이는 단지 시시한 즉각적인 제안들인데 우리는 기꺼이 다음 호에 더욱 향상된 제안들을 내놓을 것이다.

 

이러한 요구들은 다른 글이 보여주고 있듯이 전쟁 배후에 깔려있는 자본가들의 목표들을 폭로하려는 것이었다.

 

만약 주인들이 진정 승리하고 싶다면 우리는 그들의 땅과 자본을 민중들에게 넘기고 노동자들이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산업들까지를 포함하여 모든 산업들을 조직하고 생산물들을 통제할 수 있도록 제안한다. 그러면 우리는 전선에서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고 맹세할 수 있다. …… 우리는 자본가들은 사회주의를 채택하기보다는 차라리 전쟁에서 패배하는 길을 택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맥클래인은 정부에게 전쟁의 계급적 토대를 인정하라고 도전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노동자들이 애국주의에 집착하는 것을 바로 잡기를 바랬다.

이 글이 나온 몇 주 후에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의 지도자들은 그 내용을 조직의 주요 이념들로 채택했다. 191618일에 갤래셔는 위원회의 신문인, The Worker에서 자본가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산업노동자를 쮜어 짜는 것(stranglehold)을 포기하라. [로이드] 조지(Lloyd George)씨는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의 선언에 대한 대답으로그것은 혁명이며’,‘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왜 안되는가? 간단히 말해 고용자들이 노동자들에 대한 그들의 권력을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을 선택할 것이고 …… 그것은 우리 노동자들이 그들에게서 권력을 탈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주일 후 뮈르의 노동자 물타기(dilution)에 대한 대응 전략들이 위원회의 전폭적인 동의를 얻어 통과되었다. 공동 통제라는 조건으로 국영화를 요구했던 그의 기획은 맥클래인의 것보다는 덜 과감한 것이었다. 하지만 두 제안들 모두 노동자 물타기(dilution)라는 현장의 쟁점과 전쟁이라는 전체적인 쟁점간의 연계를 추구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제안했던 전략들은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연계를 추구하는 정책을 제공하려는 것이었다. 노동자 평의회의 조직적 토대는 구축되었다. 이제는 그것에 방향감각을 부여할 때였다.

국가가 국영화와 노동자 통제 요구를 진지하게 수용할 것이라거나 또는 국가의 이에 대한 거부가 수많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제국주의 전쟁의 본질을 간파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맥클래인은 단지 소수의 추종자들과 발행부수가 겨우 3,000부밖에 안되는 신문만을 가지고 있었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 대표자들은 여러 공장들에서 현장 기반으로 가지고 있었고 발행부수 15,000부의 신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 어느 쪽도 자신들의 요구사항들을 전국적으로 알릴 수 없었다는 것은 명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물타기 정책에 대한 맞대응 제안들은 70년 전 차티즘 이후 영국 사회주의 운동에서 분리되어 있던 정치와 경제 사이의 구분에서 탈피하여 산업수준에서의 대중운동을 혁명적 방향으로 이끌었던 최초의 시도였다.

맥클래인의 전략도,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의 전략도 압도적인 흐름에 맞서 노동자 물타기 정책에 대한 반대를 성공시킬 공산이 없었다. 게다가 머지 않아 이 둘 사이의 긴장이 표면화되었다. 논쟁이 전개되었는데 그 이유는 맥클래인의 경우 직접적인 전면적 반전운동의 길을 찾았던 반면 위원회의 경우 힘들여 단결을 이루어냈던 현장 노동자들의 통일성을 상실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맥클래인은 공동 통제를 조건으로 내세웠던 위원회의 요구가 위험스러운 것으로 봤다. 왜냐하면만약 클라이드의 노동자들이 군수공장의 부분적인 공동 통제에 참여하게 된다면 그들은 결국 전쟁에 대한 부분적인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 논쟁은 각 집단이 당시의 문제들에 상이하게 접근하였음을 드러내줬다. 위원회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일차적인 역할을 현장 여론의 대변자로 봤기에 뮈르의 진술을 넘어 공공연하게 정치적인 입장을 취할 수 없었다. 맥클래인은 즉각적인 전술들을 어떠한 하나의 작업장 단위로부터가 아니라 국제 사회주의의 입장으로부터 도출하고자 했기 때문에 현장 지도자의 견해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물었다.‘어떻게 이 시대 회의에 발언하러 와서 유럽을 휩쓸고 있는 전쟁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어떤 사람이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는가?’ 머지 않아 양측 사이의 균열이 드러났다.

1915년 말에 당시 군수장관이었던 로이드 조지(Lloyd Gerorge)는 클라이드에 가능한 한 빨리 노동자 물타기 정책(dilution)을 실시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는 비공식적으로 1915년 크리스마스에 3.000 여명의 현장위원이 모였던 회합에 참여하여 이들과 대면했다.‘적기(Red Flag)'의 커다란 노래 소리와 연단의 연사들 -- 연사인 로이드 조지와 아더 헨더슨은 노동당의 지도자이자 내각에 입각하여 자문을 함 -- 에 대한 야유로 인해 의사진행은 여러번 중단되었다.

로이드 조지의 연설은 교활했다. 국유화를 사회주의와 동일시함으로써 그는 적대적이었던 청중들로부터 공감을 얻어내고자 했다.‘우리는 국가가 공장들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위대한 국영 공장화를 시작했다. 공장들에 있는 모든 목재와 못들은 국가의 소유이다. 친구들이여 이것은 곧 위대한 사회주의적 공장화이다.’핸더슨이 노동자 물타기(dilution) 정책은 현재적 국면에서 가장 커다란 쟁점이라고 선언했을 때 일부의 사람들은! 이윤이지라고 외쳤다. 노동당 지도자들은 계속했다. -- ‘당신은 우리가 아마도 이 위대한 전쟁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 대답은집에나 있어라였다.

양자 대면 이후 로이드 조지와 그의 동료 장관들은 다루기 힘든 군수산업 노동자들과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정했다. 항상 정중한 말투이지만 불길한 무엇인가를 전조하는 정부 비망록(memoranda)언젠가는클라이드에서 제거되어야 할 어떤 신사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대상은 맥클래인 같은 혁명적 활동가들뿐만 아니라 갤래셔, 커크우드 그리고 맥마너스 같은 현장조직 지도자들이었다. 캐쓰카트(Cathcart)의 경영자이자 군수장관의 대변자였던 윌리엄 웨어(William Weir)에 의해 일련의 계획(general line)이 수립되고 최종적인 공격은 시작되었다. 그의 대책은 지배계급이 다수의 노동자들과는 달리 정치와 경제 사이의 연관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기본적인 사전준비 단계에서 해야할 일은 국가와 사회 전체를 우리사업의 토대로 두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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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동자 물타기(dilution)정책이 선포되어] 파업이 발생했을 때는 즉각 다음과 같은 정책이 수행되어야 한다.

 

a)[군수] 법령을 근거로 소환장(summonses)의 즉각적인 발행.

b)저항을 제안하는 …… 모든 직장대표위원들에 대한 즉각적인 체포.

c)기술자연합협회(ASE)나 그 영향을 받고 있는 노동조합 중앙 집행부에 의한, 어떤 조건들에서도 파업은 지지될 수 없다는 내용의 즉각적 선포.

d)탐정을 통해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와 다른 몇몇 단체들 성원의 행동에 대해 주의 깊게 감시.

 

2. 파업이 지속되고 파업이 공감을 얻으며 다른 작업장으로 확대될 때.

 

a)[노동당과 노동조합들이 참여하고 있는] 국가 자문 위원회(National Advisory Commitee)에 의해 성명을 발표하여 파업의 분열을 야기하고 …… 충실한 노동조합주의자들이 어떠한 방해나 위협 행위에도 맞서 정부의 지원에 대한 충분한 확신을 가지고 작업장으로 돌아가도록 할 것.

b)노동조합 쟁의 법령(Trades Disputes Act)의 철회.

c)파업 지도자 체포.

d)어떠한 작업장도 완전히 폐쇄되어서는 안됨. 사장들에게는 숙련노동자든, 비숙련노동자든, 여성노동자든 공장에 돌아와 일하도록 권유하라고 지시해야 함. 만약 작업장들이 폐쇄된다면 충실하여 착한 노동자들과 선동 노동자간의 분할을 만들어낼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임.

e)경찰이 모든 공장들에 배치되어야 함.

f)폭동이나 재산에 대해 피해를 입히려는 첫 번째 시도가 있을 때 군법이 선포되어야 함.

 

이 계획서에는 서로 연계된 많은 요소들이 있다. 예컨대 정부, 사법부, 군대, 경찰, 감옥,‘여론’, 선전, 노동계 정치가들, 노동조합 관료들과 사용자들 등이 그것들이다. 웨어(Weir)는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여 설득과 강제, 국가의 억압과 개량주의적 사보타지의 미묘한 결합을 이루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의 전술들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자본가들이 각각의 나라에서 노동자 평의회 운동에 직면했을 때 대대적으로 모방되었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노동자 물타기(dilution) 계획안에 대해 모든 지역 공장 노동자들이 단일한 입장을 취할 것을 요청했다. 정부가 노동자 위원회의 권위를 의식하도록 모든 작업장들은 노동자 물타기 정책 행정관들(Dilution Commissioners)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을 거부하고 위원회 지도자들과 논의하도록 했다. 노동자 위원회가 수립한 계획의 취약점(아킬레스건)은 파크해드 공장(Parkhead Forge) 의장(convenor)이었던 데이비드 커크우드(David Kirkwood)에게서 나타났다. 커크우드는 노동자 물타기 정책에 대한 반대투쟁에 유약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주도적인 현장조직 대표자들과는 달리 커크우드는 전쟁에 전념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노동당의 존 휘틀리(John Wheatley)와 함께 그는 자본가들의 임금지급총액(wages bill)이 하락되지 않는다면 노동자 물타기(dilution)정책을 용인할 수도 있다는 대안을 제출했다. 이 대안은 자본가들로 하여금 노동자 물타기를 통해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반면 그것의 정치적 함의를 탈각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커크우드는 노동자 물타기 정책(dilution)을 경제적인 쟁점으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에 그 제안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행정관들(commissioners)을 만났다. 클라이드 현장조직 대표자들은 현장노동자의 연대 없이는 노동자 물타기(dilution)에 대한 투쟁을전쟁 반대 투쟁으로 확산시킬 수 없었다. 현장 노동자들 사이에는 분열이 발생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공격받기 쉬운 상태로 되었다. 22일에 노동자 위원회의 신문인 The Worker는 출간이 금지되었다. 4일 후 맥클래인은 체포되었고 이어 갤래셔와 뮈르도 체포되었다. 주요 공장 노동자들은 이러한 공격(provocation)에 대해 현장조직 위원들의 석방을 요구하여 파업을 했다. 그러나 웨어(Weir)의 계획이 보여주듯이 이러한 투쟁은 종식되도록 유도되었다.

파크해드 공장에서의 투쟁사례는 정부의 함정이었다. 1916317일에 커크우드는 위원장으로서 공장현장을 돌아다닐 권리를 박탈받았고 이에 노동자들은 즉각적으로 공구들을 내려놓았다. 다른 공장들도 이에 동조하는 행동을 했다. 그러자 당국은 파크해드와 웨어의 수많은 주요 투사들을 체포하여 그들을 도시 밖으로 추방시켰다. 이는 명백히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를 분쇄하려는 시도였다. 불행히도 이에 대항한 동맹파업에는 19152월 파업 참가자들의 반 정도만이 참여했다. 확실히 노동자 물타기(dilution)에 대한 커크우드의 배신 행위가 단결의 부재를 가져온 한 원인이기는 했지만 패배의 중요한 원인은 위원회가 이러한 투쟁을 글래스고우의 군수산업들 외부의 노동자들로 확산시키는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는 현장노동자들 사이에 정부에 대한 저항은 희망이 없다는 느낌을 심어주는데 공헌했음에 틀림없었다.

뒤에 이어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붕괴되었는데, 그 이유는 노동자 물타기(dilution)에 대한 대응전략을 군수산업 노동자들이나 그 외의 산업의 노동자들 또는 정부에게 좀더 내용있는 제안(proposition)으로 만들지 못한 위원회의 무능에 기인하였다. 노동자 국제주의에 충실하지 않았으며 현장조직 위원들의 공적 신념과 개인적 신념 사이에 분리가 일어남으로 인해 이러한 결과는 불가피하였다. 위원회가 다시 설립되려면 수년이 걸리게 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래스고우의 전투적인 현장조직 위원들은 노동자 평의회 운동 형식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비참하게도 그들은 평의회의 맹아적 단계를 넘어서게 할 수 있을 수단이 부재했다.

정부는 노동자 위원회를 고립시키고 파괴시킬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에 대항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금속산업 수준에서의 투쟁을 전쟁에 맞서는 광범위한 운동으로 결합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J T 머피(J T Murphy)가 아래와 같이 쓴 말은 의심의 여지없이 맞는 말이다.

 

전쟁 기간 동안에 발생했던 어떠한 파업들도 반전 파업이 아니었다. 그 파업들은 종종 나처럼 전쟁을 멈추기를 원했던 사람들에 의해 지도되었지만 그것은 진짜 동기가 아니었다. 파업자들의 어떠한 회의에서도 전쟁을 멈추어야 한다는 문제제기가 나오면 그것은 압도적으로 폐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맥클래인과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의 결합은 독특한 공헌을 했다. 공헌한 바는 현장 수준의 이슈를 반전 행동으로 확대하며, 금속산업의 현장조직을 전 계급적인 노동자 평의회로 확장시키려는 전술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선진 노동자들의 투쟁을 전면화시킬 수 있는 전술 없이는 노동자 평의회의 성공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비록 1916년에 정부는 승기를 잡았지만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두 가지 중요한 것들을 성취했다. 첫째, 비록 (전쟁 찬성이라는) 사회적 헤게모니의 폭풍 속이었지만 노동운동을 부활시킴으로써 그들은 비공식적 파업 지도력(leadership)를 통해 그리고 여러 공장들의 현장조직을 확고한 토대 위에 올려 놓음으로서 노동자평의회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 공장의 현장조직으로부터 클라이드 지역 금속산업 전체 전체를 가로지르는 현장 노동자 운동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두 번째 성과는 비록 일시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사회주의와 대중 운동 사이의 새로운 관계였다. 이때 존 맥클래인의 중요성은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된다. 노동자 물타기 정책(dilution)에 대한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의 대응 전략은사소한 제안들로부터 시작되어 성장해갔다. 만약 그 제안들이 강력한 정치운동과 산업적 운동을 통해 지지받았다면 노동자 위원회는 한 산업부문의 방어적 현장조직으로부터 광범위한 토대를 가진 노동자 평의회로 변화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맥클래인을 포함한 소규모의 집단은 혁명적인 정당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광대한) 영향력을 지니지 못했고 반전 정서가 부재한 상황에서 현장조직 위원들은 애국적 정서를 지닌 현장노동자의 대표자라는 역할에 발목 잡혀 있었다.

클래스고우의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과 전투적인 현장노동자들 사이의 짧은 상호작용은 중요한 일보전진이었다. 현장 노동자 운동을 위한 전략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들이 보여준 공동 투쟁은 결국 공장수준에서의 투쟁과 국가에 대항한 투쟁 사이의 분리를 극복할 방법을 찾게 해줬다. 오로지 이러한 노력들로부터 국지적 투쟁들을 일반화시키고 노동 계급의 자주적 활동(self-activity)을 통한 사회주의 달성의 잠재력을 지닌 운동이 성장할 수 있었다.

 

 

 

 

 

 

 

 

 

 

 

 

 

 

 

 

 

 

 

 

 

 

 

 

 

 

 

 

 

 

 

 

 

 

 

4. 실패의 교훈

 

1916년 봄, 전투적 현장 활동가에 대한 체포 및 클라이드로부터의 추방은 한동안 스코틀랜드 노동운동을 억눌렀지만 그 운동이 영국의 나머지 지역으로 퍼져나가는데 일조했다. 191611월 초에는 현장조직 위원들(shop stwards)의 전국회의가 가능해졌다. 이는 클라이드에서 추방된 아더 맥마누스에 의해 지체없이 소집되었다. 멘체스터의 하인드맨 홀에서 열린 이 회의에는 바로우(Barrow), 멘체스터, 런던, 버켄해드(Hirkenhead)의 현장조직 위원들뿐만 아니라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의 잔류 대표들도 모였다. 이들은 현장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선전선동을 하는 전투적인 현장조직 위원들의 집단으로서 성격을 지녔다.

이렇게 시작하여 성장한 현장조직의 전국적 운동은 전쟁이라는 핵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주로 노동자(현장위원) 통제를 확대하는 문제에 일차적인 관심을 두었다. 맥클래인의 노동자 국제주의에 대한 생각은 클라이드 지역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75월 들어, 설립된지 6개월밖에 않 된 이 전국 조직은 총동원전쟁에 대응한 가장 큰 파업을 주도해야만 했다.

파업은 노동자 물타기 정책(dilution)정책이 군수산업 이외의 산업부문에서 확대실시되어 민간 공장들이 이를 도입하였을때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금속노동자들은 병영에 나가 있는 군인들을 돕기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권리를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개별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2십여만 명의 노동자들이 이를 쟁점으로 하여 파업에 나섰고, 19175월에 이 파업의 향방을 결정하기 위해 현장조직 전국회의가 런던에서 개최되었다. 정부는 공권력을 투입하여 현장조직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 투옥되지 않은 현장조직 위원들은 결국 압력을 이기지 못해 클라이드 출신 활동가의 참석 조차 없이 519일에는 파업을 종결시키게 되었다. 민간부문의 노동 계약에 있어서 노동자 물타기 정책(dilution)의 쟁점은 단지 금속산업 숙련공들에게만 관심이었는데 이는 그 엄청난 규모에도 불구하고 19175월의 동맹파업은 그 성격이 분파적이었음을 의미한다.

비록 파업은 실패했지만 현장조직 위원들간의 전국적 네트워크는 계속 확대되어 갔다. 또 다른 회의가 19178월 맨체스터에서 열렸는데 이때는 현장조직 전국회의를 대표하는 대의원들이 191611월의 회의에 참석했던 지역 뿐만 아니라 바로우(Barrow), 볼튼(Bolton), 브리스톨(Bristol), 컨벤트리(Conventry) 그리고 리드(Leeds)등 각지에서 참석했다. 그 후전국통제위원회(National Administrative Commitee)'가 출범되었다. 하지만 영국의 주도적인 현장조직 대표자였던 머피가 나중에 드러냈듯이 이 조직은 현장조직 대표자들의 대의 기능에 강조를 두었지, 저항행동의 촉진자들로서의 역할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전국통제위원회는운동에 필요한 지도력 구성을 저해하는 이론을 채택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조직 전국회의라는 운동이 보여준 폭넓은 잠재력은 머피의노동자 위원회라는 팜플렛 판매를 통해 나타났다. 팜플렛은 단숨에 150,000 부가 팔려나갔다. 그것은 현장조직 위원의 낮은 수준에서 높은 수준까지를 모두 조직한다는 세부적인 청사진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전쟁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글래스고우에서는 노동운동이 부활했다. 19172월 갤래셔와 뮈르에 뒤이은 맥클래인의 밀접한 동맹자인 맥두갤(Macdougall)이 석방되자 글래스고우의 노동운동은 활기를 되찾았다. 6월까지 다른 추방자들도 이 도시로 되돌아왔다. 1915년의 그 유명한 글래스고우에서의 집세 거부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힘을 보여줬던 여성노동자들은 여성평화운동단(Women's Peace Crusade)을 설립했고 그들의 반전 주장들은 여름에 맥클래인이 복귀함으로써 상당히 보강되었다.

국제적인 사건들 역시 고취되었다. 19172월 러시아 짜리즘의 몰락은 각지의 노동운동에 새로운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었다. 영국의 대부분 노동자들은 전쟁이 지속되는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전 세계 (노동) 지도자들에게 평화 정착의 타협점을 찾기 위하여 협상 테이블들을 설치하자는 요청에 의해 희망이 고무되었다. 그러나 극좌파에게 2월 혁명은 전쟁종식을 위한 도전 그 이상을 의미했는데 그것은 자본주의 체계를 완전히 전복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평화주의자나 급진주의자들 모두가 191763일 리드(Leeds)에서 평화 대회(Peace Convention)를 개최하였고 온갖 대표자들이 다 모였다. 독립노동당과 영국사회주의당에 의해 소집된 1,150명의 대표자들은 다음과 같은 모순적인 행동강령에 서명했다.

 

노동자 병사 평의회의 대의원들은 노동계급의 투쟁과 연대를 추구하며 …… 각 나라들의 사람들에 의해 평화를 이룰 것을 추구하며 그리고 전 세계 노동자들의 완벽한 정치적, 경제적 해방을 추구한다.

 

비록 제안자들에 의하면 이 강령은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의미한다고 했지만 사실상 이들은 자선사업을 위한 개량주의적 평의회를 설립하려고 했고 러시아의 노동자와 병사들의 평의회가 실제로 어떻게 활동했는지에 대한 어떠한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리드(Leeds)에서 선언된 평의회는 단지 아래와 같은 것들을 추구하는 노동관료들의 위원회에 불과했다.

최선을 다해 …… 산업적 그리고 시민적 자유에 대한 어떠한 침해에도 저항한다. 산업에 고용되어 있는 여성들의 위치에 각별히 신경을 쓰며 노동조합들을 전면적으로 지원할 것이다. 상이군인들에 대한 연금 마련, 기초생활 대상자에 대한 생계비, 불구가 된 군인들에 대한 식량 지급 그리고 적절한 시민생활을 위한 일자리 창출의 문제에 대한 조치를 적극적으로 강구한다.

 

리드에서의 회의는 서유럽에서의 제도권 내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위로부터 노동자 평의회를 만들려고 했던 여러 실패한 시도들의 출발점이었다. 진정한 노동자 평의회는 이렇듯 위로부터 통제되어 하향식으로 설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평의회는 현장 노동자들의 자주적 활동을 기반으로 하여 정치적 투쟁으로 지도하는 전투적 선진노동자들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 졌다. 오로지 클라이드 노동자 평의회가 리드대회로 파견한 갤래셔만이 러시아의 사례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소비에트를 지향하는 운동 속에서 활동했었기 때문이다. 그만이 유일하게 노동자 평의회를 부르주아 의회에 대한 대안적인 국가형태로 제시했다. 그에 의하면 리드에서의 전국회의는 죽은 의회를 부활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위원회의 도움을 통해 국민 생활의 모든 것들에 대한 통제와 지도를 장악함으로써 혁명을 성취해낼 것을 역설했다.

리드에서의 제도권 노동운동에 의해 제안되었던 노동관료적 형태의 평의회는 현장노동자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억압을 고취시키는 폭력의 한복판에서 그 이념은 곧 사라졌다.

하지만 그 대회는 전쟁개시 후 비참했던 3년이 지난 다음에 노동계급 속에서 새로운 희망이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줬다. 1917년 말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의 재설립은 노동운동의 활력이 다시 살아났다는 증표였다. 그것은 머지않아 노동자 물타기 정책(dilution)만큼이나 잠재적인 폭발력을 가진 징병문제에 직면했다.

비록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1916년 이후로 병력 소집령에 복종했었지만 이는 금속 숙련공들에게는 성공적으로 적용되지 못했다. 쉐필드(Sheffield)에서 이를 극복해보려는 진지한 시도가 있었지만 이는 빛나는 파업 행동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 파업의 성공은 영국의 현장조직들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쉐필드 노동자 위원회(Sheffield Workers' Committee)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1917년 말에 정부는 다시 한번 숙련노동자들을 소집할 것을 결정하여 소집의 범위를 고급 기술자들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시켰다. 총알받이를 위한 요청은 국제적으로 중요한 국면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독일 노동자들은 여러번 대중파업을 벌였고, 스위스의 짐머발드(Zimmerwald)에서 열린 사회주의자들의 회의는 수많은 평화 요구 조항들을 제출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러시아의 볼셰비키 정부가 전쟁 종식을 위한 독자적(unilateral) 제안을 했다는 점이었다. 이런 것들을 볼 때 영국에서 반전 파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영국에 특수한 현상만은 아니었다.

불행히도 수많은 금속 숙련공들은 숙련노조관료들의 엘리트주의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에도 나타났다.‘나를 데려가지 말라. 나는 기술자연합협회(ASE) 소속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금속 숙련공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노동자도 강제징집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항하여 클라이드 지역 노동운동 세력들은 다시금 반전운동의 희망을 제공하는 듯했다. 군수노동국 장관(Ministry of Munitions Labour Department)의 비밀 보고서에 따르면 글래스고우 지역은 강제 징집에 전투적으로 저항할 유일한 지역으로 판단되었다. 지역 신문들은 현장노동자들이 누구나 소집될 수 있다고 점을 거부하였다고 전했다. 더욱 결정적이었던 것은 심지어 지역 노동조합 관료들마저도 파업행동을 취할 수 밖에 없다고 느꼈다는 점이다.

예전처럼 이러한 전투성은 경제적 쟁점들을 벗어나지 못했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강제징집과 더불어 새로운 노동인력조치(Manpower Bill)까지 덧붙이는 것에 맞서면서 동시에 성과급 노동자들(pieceworkers)의 보수를 12.5% 높이기 위한 운동에, 그리고 주물노동자들(moulders)의 파업에 참여했고 비어드모어(Beardmore) 공장에서의 두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희생되었던 것에 맞서 싸웠다.

커져가는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 정부는 오클랜드 게디스(Auckland Geddes)씨를 글래스고우에 파견했다. 그와 2,500여명의 지역 현장조직 위원들 사이에 있었던 1918128일의 회의는 1915년 크리스마스에 있었던 사건의 재연이었다. 하지만 이때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수준은 더욱 높았다. 1915년 그 회의에서 주요한 관심사는 현장의 노동조건을 방어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전쟁이나 평화에 대한 문제가 두드러진 관심사였다. 당시 그 회의에서 논의되었던 모든 문제들은 국제 정치에 관한 것들이었다. 현장조직의 대표들은 게디스(Geddes)에게 영국이 적국의 영토에 대한 약탈을 하면서 어떻게 휴전 협상을 이끌어 낼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아더 맥마너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강력한 공격을 했다.‘무역과 영토를 위해 하는 범죄적 전쟁 때문에 희생될 사람은 더 이상 없다! 당장 전쟁을 끝내라. 우리는 이 점을 정부에게 촉구하는 바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싸우고 있으며 앞으로도 싸울 것이다'

한동안 클라이드 현장조직 위원들에 의해 광범위한 반전운동이 형성하는 듯했다. 게디스와의 회의가 있기 바로 전에 전국의 현장조직 위원들은 더 이상의 강제 징집에 대항해 파업하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그 운동은 치명적인 정치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곧 드러났다.

1918년의 첫째 주에 현장조직 운동에서 시작된 전국통제위원회(National Administrative Council)는 볼셰비키의 평화 제안들을 수용할 것과이러한 요구들을 받아들일 전국적 행동을 추진했다. Solidarity라는 영국 현장조직들의 신문은 이 최후통첩을 2월 호에 실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덧붙였다:

 

만약 독일 노동자들이 합의사항을 따를 것을 확신할 수 있다면 우리는기계를 멈추고 결단을 내릴정책을 즉각적으로 요구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독일에 있는 노동자들과 접촉하지 않았다. …… 독일 노동자들은 우리의 섬들에 대한 침략을 시도하면서 …… 자신들의 군사 지도자들의 명령에 기꺼이 따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독일 노동자들은 혹독한 맛을 보게 될 것이다.

 

위의 내용은 여러 가지 내용이 절충된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러한 내용은 노동자 국제주의의 정신이 전적으로 부재한 것으로서, 러시아 노동자의 경우를 보면 필요시 혼자서라도 전쟁에 맞서 최초의 봉기를 일으키곤 했었다. 레닌과 마찬가지로 맥클래인은 전쟁이 결코 노동자들에게 이익을 줄 수 없다는 생각을 확고히 가졌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너무 제한적이었다. 머지 않아 현장조직 위원들의 주저함으로 인한 비극적 결과들이 전국적 수준에서 나타났다. Solidarity의 기사가 쓰여졌던 바로 그 순간에 50여만 명의 독일 노동자들이 평화를 위해 파업에 나섰다. 반전 투쟁 속에서 양국 노동자들이 결합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현장조직의 전국적 운동이 취했던 모호한 입장은 클라이드의 노동운동세력을 고립된 상태로 만들었다. 게디스와의 회의에서 보였던 분노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윽고 글래스고우에서 노동운동의 세력이 약한 공장들을 대상으로 정부는 체계적인 선전을 펼쳤고 이로인해 반전 파업의 희망은 꺽여져 버렸다. 결국 Solidarity가 상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독일의 노동자들이 실패하도록 만든 것은 오히려 영국의 노동자들이었다.

이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클라이드 노동운동은 자신의 지역에서 애국주의(jingoism)가 발현되는 것을 잠재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력했다. 영국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반전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자들이 물리적인 위험에 직면했던 반면, 글래스고우에서는 전쟁에 찬성하는 집회들이 혼란에 빠졌다. 100,000여명의 노동자들이 1918년 근로시간에 열렸던 노동절 집회에 참여했다. 히스테리적인 애국주의자이자 선원 노동조합의 지도자였던 하브록 윌슨(Havelock Wilsom)끝까지 전쟁에서 싸우자는운동을 클라이드에서 했을 때 완전히 무시되었다. 5,000여명이 참여하여 몇 시간 동안 시가전이 있은 후 그는 도시에서 쫒겨났다. 이것은 그가 기대했던 종류의 전쟁이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은 독일 노동자 혁명이 제국(Kaiser)을 전복했던 19181111일에 급작스럽게 끝났다. 독일의 노동자 및 병사 평의회의 활동은 데모에 참여했던 30,000여명의 클라이드 주민들에 의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어 기민하게 로이드 조지는 전쟁 승리에 대한 댓가로서 보통선거를 요구했다. 전국적으로 노동자 유권자수(다른 부문보다 유권자 수가 월등했다)1910년에 비해 5배가 늘어났던데 비해 글래스고우에서는 15배가 늘어났다. 통계 수치로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는 얼마나 많은 클라이드 노동자들이 전시 동안의 자주적 활동을 통해 발전했는가를 보여준다. 한때 변덕스런 신념을 지닌 소수 집단으로 여겨지던 혁명세력들은 공고한 지지 기반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전쟁 찬성 입장의 노동자 후보에 대항해 선거에 나왔던 맥클래인이 그 상대가 14,247표를 얻었던데 비해 7,436표씩이나 얻음으로써 이를 보여줬다.

전쟁에 대한 자기 헌신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휩싸였다. 일단 위기가 지나가자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자본가들 같은 사람들에 의해 요란스럽게 치켜세워졌던 노동과 자본 사이의 협조는 갑작스럽게 해체되었다. 과거의 삶으로 회귀했다는 최초의 증거는 대중 실업이 다시 나타났던 점이었다. 군수산업이 침체되자 글래스고우에서 일하던 수많은 노동자들은 갑작스럽게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군수산업 노동자들은 해고와 동원되었던(demobbed) 병사들의 귀환으로 인해 19192월까지 실업률은 10%에 이르렀다. 금속숙련공의 실업률은 전시에는 평균 0.5%이던 것이 2월에는 11%로 상승했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이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법은 노동 시간 단축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선전의 결과 그 지역 현장조직 대표자 회의가 191915일에 Shop Assistants' Hall에서 개최되었다. 그때 자본가들은 평시 주당 47시간의 노동시간 수준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현장조직 위원들의 대답은 명쾌했다.

 

주당 47시간 노동제라는 것은 생산성의 증대를 의미하며, 생산성의 증대는 실업의 증대를 의미하며 실업의 증대는 더 낮은 임금 의미한다.

더 낮은 임금이란 노동자들에게는 궁핍을 그리고 사용자들에게는 이익의 증대를 의미한다 …… 또한 이는 거대한 산업예비군과 군대를 존속시킴으로 사용자들의 이익을 보호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산업 노조와 금속 숙련공 노조의 연합체를 비롯하여 지역의 제도권 노동운동세력(official sections)은 이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산업 운동의 공식, 비공식 부문을 대표하는공동위원회(Joint Committee)가 구성되었다. 독립노동당의 고문이자 글래스고우 협상 위원회(Glasgow Trade Council)의 지도자였던 에마뉴엘 쉰웰(Emmanuel Shinwell)은 공동위원회의 의장이 되었다. 또 다른 회의체를 통해 단기간 동안 800여명의 스코틀랜드 각지의 대표자들이 참여하여 118일에는 주당 40시간 노동제를 요구하였고 127일 월요일총파업을 예고하며전투준비명령(Call to Arms)' 160,000부가 배포되었다.

비록 이 운동은 그 성격상 지역적인 것으로 남았지만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의 신문은 다음과 같이 입장을 표명했다.

 

우리영국의 볼셰비키들은 우리에게 방향성을 주는 러시아의 선례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혁명이 이루어지고,‘모든 권력을 노동자위원회로라는 함성소리가 울려 퍼질 때가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때 갤래셔의 논조는 더욱 도전적이었다.

 

결단의 시간이 왔다. 앞으로 나아가자. 러시아의 노동자들이, 독일의 노동자들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 소비에트 공화국이여 영원하라!

 

하지만 40시간 노동제를 요구했던 총파업은 혁명의 결정적인 순간은 아니었다. 127일에는 클라이드 벨리 노동의 대부분인 40,000여명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현장조직 지도자 중 한 명은 훗날 다음과 같이 썼다.

 

여기에 적용되었던 피켓팅 방법은 새로운 것이었다. 5개의 피켓을 든만여 명의 노동자들은 특정 작업장으로 행진했고 길 양편에 길게 늘어섰다. …… 이는 무엇보다도 성공적인 방법이었다. …… 파업의 또 다른 모습은 피켓시위에 파업동참자의 부인들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파업 5일째인 21일에 이르러 그 파업은 정점에 이르렀다. 이제 클라이드 지역에서는 100,000여명이 그리고 에딘버러 주변에서는 14,000여명이 참여했었다. 이날은피의 금요일로 불리었는데 왜냐하면 경찰은 글래스고우의 조지 스퀘어(George Square)에서 데모한 수만 명의 참여자들에게 폭력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아래와 같은 목격자의 진술에서 묘사되고 있다.

 

금요일 밤 내내 기차 여러 대에 군대가 실려 도시로 왔다. 시민들이 아침에 곤한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온갖 전투 장비에 포위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든 주요 지점에는 총검을 무장하고 강철 헬멧과 완벽한 전쟁 장비를 한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기관총, 탱크, 비행기 등이 시내로 들어왔다. 마치 독일의 침략이 임박하기라도 한 것 같은 상황이 만들어졌다.

 

실업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응조치는 3년 전 갤래셔가 이야기 했던 내용 즉 정부는 전쟁에서 패하는 것보다 노동계급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는 것을 더욱 두려워한다는 점을 입증시켜줬다.

공동위원회는 영국 전체 노동자들이노동조합주의를 파괴하려는 이 비열한 시도에 대해 저항할 것을 촉구하는 새로운 선언을 발표했다. 한동안 전면적 행동이 가능할 듯했다. 벨파스트(Belfast) 지역은 공동위원회가 주도하는 노동시간 단축 투쟁의 영향력 안에 있었고 런던지역에서는 전기 노동조합이 공장을 돌릴 전력을 26일 이후로 끊어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이들이 북쪽으로 보낸 전보 내용은클라이드 노동자들에게 우리가 가고 있다고 전하라였다. 군대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글래스고우에서 파업은 공고하게 지속되었다.

가장 심각한 위협은 군대로부터가 아니라 전국노조(national unions)의 관료들로부터 왔다. 정부의 지원 하에 기술자연합협회(ASE)의 지도자들은 글래스고우, 벨파스트 그리고 런던의 지역 노동조합 위원회들에 침투해 들어갔다. 전기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26일로 계획되어 있는 집단행동이 불법임을 협박한 정부에 의해 족쇄가 채워져 있었고 그로 인해 예정되었던 파업은 연기되었다. 전국노조 관료들의 공개적 사보타지에 직면해 공동위원회는 파업의 종식을 권고했으며 이는 1919211일의 대중 회합에서 받아들여졌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현장 민주주의의 수준으로 높이 발전시켰다. 하지만 이는 투쟁의 정치적 분석이나 (혁명정당에 의해 제공되어야 할 것들 같은) 투쟁이 어떻게 지도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정치적 분석을 겨냥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러한 간극은 공동위원회로 하여금 전국적 전략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그 운동의 초기부터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주당 40시간 노동제 쟁취 운동에서 어떠한 독자적인 역할도 하지 못했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자신들의 힘을 공동위원회에 통합시켰고 그럼으로써 파업이 권력에 대한 도전보다는 산업적 쟁의들에 더욱 치중하여 수행되게 만들었다. 그러한 도전이 실행가능한지를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공동위원회가 외부로부터 지원을 받기 위해 전국노조의 관료들에 의존했던 경향은 심각한 실수로 판명되었다는 점이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파업의 패배로부터 회복될 수 없었고 곧 위원회를 만들었던 금속 숙련공 투사들은 자신들의 공장에서 내쫒겨 구호품을 타기 위한 행렬에 서야만 했다. 노동자 위원회의 신문인 The Worker에서 온갖 허장성세도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전국조직 부재를 보충해줄 수 없었는데, 이러한 전국조직은 클아이드 뿐만 아니라 각지에서 전후 영국의 대중적 전투성을 해체시키려던 노동조합관료들의 시도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필수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래가 없던 4년 간의 투쟁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 그 교훈은 주당 40시간 노동제 파업이 벌어지기 2주 전에 제출되었던 사회주의 노동당의 선언문에 요약되어 있다. 이는 그 선언서의 서명자들의 개인적 표현으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진술로서도 유의미하다. 4명의 제안자들 중 3-- 머피(Murphy), 맥마너스(McManus) 그리고 벨(Bell) -- 은 대중적 현장조직 운동에서 탄생한 걸출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또한 혁명집단인 사회주의노동당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혁명적 정치를 노동자 평의회 운동에 결합시켰다. 그 선언문에서 모든 항목들은 이러한 사회주의 이론과 현장투쟁간의 상호작용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그 첫 번째 부분은 새로운 종류의 혁명적 실천문제를 다루고 있다.

 

교육과 활동은 무엇보다도 현실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 만약 교육과 실천 프로그램이 전체조직의 하나라면 그 전체조직은 교육과 실천프로그램에 기반하여 실천해야 할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에 대한 과거의 복음주의적인 접근법으로부터의 단절이었다. 이것은 개입주의적인 접근을 주창했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자들은 자본가들과의 투쟁 속에서 수천명의 노동자들을 이끌었으며 이 대중 행동은 최고의 정치적 교육으로 판명되었다.

선언문의 두 번째 부분은 대중 행동의 본질을 다루고 있다.

 

전쟁에서의 경험은 어떠한 커다란 쟁점과 관련하여 정치적 수준의 선동과 산업적 수준의 선동이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줬다. …… 오늘날의 산업적 수준의 선동은 내일의 정치적 쟁점이 될 수 있으며 그 역도 가능하다. 따라서 빈틈없는 전술을 준비하는 관점에서 노동운동에 긴급히 요구되는 것은 경제적 기능들과 정치적 기능들을 결합할 수 있는 운동의 즉각적인 창조이다.

 

여기서 선언문은 교조적 맑스주의와 생디칼리스트에 의해 갇혀 있었던 태도들을 철저히 비판하고 있다.

세 번째 부분은 아래와 같이혁명 이후의 …… 사회 운용을 다루고 있으며 영국에서 처음으로 의회 정치에 대한 대안을 진지하게 제시하고 있다.

 

모든 공장들과 생산단위들은 다양한 하위부분들로부터 대표를 직접적으로 선출하고 이들로 구성된 위원회들을 구비하도록 조직화되어야 한다. …… 이 조직은 전국을 걸쳐 확대되어 전국 각 지역의 자원들과 생산을 규제하게 될 것이다.

 

이 성명서에 담긴 단상들은 다소 제한적이었다. 영국 사회주의당의 혁명가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노동당 당원들은 독자적으로 당을 건설하려는 사회주의자들로서가 아니라 현장 수준의 투사들로서 투쟁에 개입하되 부차적으로 정치조직에 몸담고 있었다. 결국 이들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교훈들은 혁명적 소수가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의 구축을 시도하는 방식들보다는 대중 투쟁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선언문은 목적의식적으로 정치적 활동을 만들어 내는 맑스주의 정당으로서의 역할과 노동자 평의회로 구체화되는 집합적 대중운동 사이에 어떠한 구별도 하지 않았다. 성공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대중 투쟁의 지도를 위하여 혁명정당이 요구된다는 점은 러시아의 사례로부터 배웠고 단지 1920년대의 공산주의 인터네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에 의해서만 선전되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전쟁에서의 경험은 혁명가들에게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을 성공할 수 있게 해줄 수단들에 대하여 몇몇 통찰을 제공해줬다. 오늘날 혁명은 비록 공허한 공식으로 머무르고 있지만 현장수준에서의 노동자 투쟁이 노동자평의회나 소비에트를 통하여 노동자 계급의 자주관리로 조직되고 널리 유포된다면 사살상 실행가능한 것이다. (‘정치적사회주의자들에 의한) 궁극적 목표나 (생디칼리스트들에 의한) 단기적인 노동조합 수준의 쟁점들에 대한 강조는 그 두가지가 결합되어 종합되어야 한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단순히 노동조합 수준의 운동을 개선했던 것이 아니라 더욱 큰 잠재력을 가진 어떤 것을 창조해왔었다. 전시 동안 노동조합 관료주의의 붕괴는 현장의 전투적 선진활동가들로 하여금 노동계급의 힘이 새롭게 머물 수 있는 보유지들(reserves)을 찾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런 탐색과정에서 그들은 현장노동자들의 집단적 힘을 발견했다. 이때 일어난 비공식적 노동운동들은 기존 노동조합의 가장 기본적인 수준 -- 예컨대 유일하게 현장의 감각과 밀접하게 접촉하고 있던 현장위원들 -- 을 활용했다. 만약 이 현장조직이 군수산업 노동자들로 하여금 작업장 수준의 일시적인 권력에만 만족하겠끔 했다면 노동자 평의회로는 발전할 수 없었으며, --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영국에서의 제조업분야에서 보였던 것과 같은 일종의 개별 작업장들에서의 순수한 경제적 선동인 -- ‘자생적(do-it-yourself)' 개량주의의 수준에 머물렀을 것이다.

모순의 충돌지역(edge)에 있었던 글래스고우가 제공해준 것은 자본주의의 위기가 드러낸 광범위한 본성에 대하며 부분적으로 인식했다는 점이었다. 존 맥클래인에 의해 제출된 생각들로부터 글래스고우의 전투적 노동자들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융합하려고 노력했고 그럼으로써 결국 공장과 자본주의 국가의 통치(managerial) 권력을 위협했다. 오직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만이 총체적 위기에 직면한 노동자 계급에게 유리한 고지를 선사하였던 것이었다. 경영 및 통치권력은 국가를 전복시키지 않고서는 분쇄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이 자신들의 집합적 힘을 공장 수준의 현장투쟁으로부터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국가권력은 파괴될 수 없다.

비록 글래스고우에서의 평의회 운동은 영국 사회주의의 유약함을 피할 수 없었지만 전시의 위기는 영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로 하여금 (사회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들을 재고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 전쟁 이전에 사회주의적 정치학과 현장 활동은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클라이드 지역에서의 맹아적인 노동자 평의회 운동은 그 둘이 결합되는 것을 본질로 하는 새로운 종류의 혁명적 실천방식을 알려주었다. 오로지 이런 방식만이 노동자 평의회와 노동계급의 자주적 활동이라는 수단을 기반으로 하여 궁극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운동을 재창조할 수 있겠금 하였다.

 

 

 

 

 

 

 

 

 

 

 

 

 

9. 이탈리아: 평의회와 그 너머

 

이탈리아에서 노동자 평의회 운동이 형성되었던 맥락은 앞서 살펴본 사례들과 구별되는 점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노동자 평의회 운동은 -- 다른 사례보다 늦은 -- 1919년 말에 이르러서야 성숙하게 되었다. 페트로그라드, 글래스고우 그리고 베를린에서의 사회주의자들은 전시의 어려운 조건들 속에서 활동했고 모든 순간마다 즉흥적으로 대응해야만 했었다. 반면 이탈리아 군수산업의 핵심적 지역인 튜린에서의 혁명가들은 이전부터의 활동경험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뒤늦은 출발은 오히려 이탈리아에게는 다른 서유럽 나라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노동자 평의회에 대한 이론적 지평을 제공해 주었다. 또한 전쟁이 이미 끝났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혁명가들의 정치 활동을 위한 명확한 쟁점(focus)이 존재하지 않았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지도 하에 튜린의 노동자들은 --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 같은 -- 모든 노동자 조직들을 아우르는 노동자 평의회 운동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다. 노동자 평의회에 기반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명백한(exclusive) 노력은 튜린지역을순수한평의회 사회주의에 대한 실험장소로 만들었으며 이로부터 몇몇 명백한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었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튜린에서의 실험은 가장 유능한 혁명가인 그람시로 하여금 노동자 평의회 운동을 경험케 하고 나아가 그것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해줬다. 이는 개량주의적 조건들 속에서 활동하는 서구의 사회주의자들과 특별히 관련된, 혁명적 변혁의 전체과정을 파악할 수 있음으로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피드몬트(Piedmont) 주의 중심지인 튜린은 글래스고우와 베를린에서 보여졌던 전형적 특성들을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보여 주었다. 튜린은 가장 현대화된 공업 도시였다. 19세기 후반에 이 도시의 인구는 200,000명에서 430,000명으로 증가헸지만 폭발적인 인구팽창은 20세기 초반에 이루어졌다. 처음 20여 년 동안 바리에라 디 밀라노(Barriera di Milano)와 상 파올로(San Paolo)의 공업 지역들에서 살던 사람들의 인구수는 4,400여명에서 90,200여명으로 급증했다!. 전시에만 도시의 공장 노동자 인구수는 2배로 증가하여 150,000여명에 이르렀다. 그에 따라 제한된 주거에 비한 인구과잉 상황은 끔직하여 튜린에 사는 가족들 중 거의 반이 한 두개 방뿐인 거주지들에서 빼곡이 들어차 살아갔다.

1920년에 그람시는 다음과 같이 썼다.‘오늘날 튜린은 가장 두드러진(par excellence) 공업도시, 즉 프롤레타리아의 도시이다. 튜린의 노동 계급은 공고하며, 규율이 잡혀있으며 세계의 몇몇 도시들에서 만큼이나 두드러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노동자들은 1차 세계대전 이전에 또는 그 와중에 중요한 투쟁들을 겪어야 했다.

19세기에는 피드몬트 주의 중심지인 튜린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튜린이 혁명적인 변화의 길목으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은 1899년의 피아트(Fiat) 같은 회사들이 자동차 제조를 시작했던 시점부터였다. 자동차 회사들은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그 지역 재래 주물공장과 영세 작업장들에는 숙련 노동자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용자들은 새로운 노동력 자원들을 찾는 수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튜린 사용자 단체의 초대 지도자가 썼듯이당시 대부분의 다양한 직종들로부터 온갖 종류의 노동자들을 맹렬히 흡수했었다.’ 목수, 석공, 기타 단순노동자들은 몇 달 동안 훈련을 받은 후 공장에 배치되어 기계와 같이 일했다. 이들은 영국과 같이 기술자연합협회(ASE)에서 최소한 5년 동안 훈련을 받아 충분한 기술을 습득하게 되는 노동자들과는 사뭇 다른 노동력이었다.

많은 노동자들이 사르디니아(sardinia)와 남부 후진 농업지역들로부터 튜린으로 몰려들었고, 그들을 준 봉건주의에서 초현대적 산업 자본주의 상황으로 밀어 넣고 있는 자동차 공장에서 일했다. 이탈리아에서 대규모 자본주의 기업은 특정 지역에 -- 튜린, 밀란 그리고 제노아로 이루어진산업 삼각지-- 한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앞서가는 자본주의 블록에서 노동자들은 극적인 충격을 경험했고 자생적이고 비조직화된 아나키스트들의 반응을 보였고 나아가 좀 더 규율잡힌 -- 비록 탄생부터 보수적이었지만 -- 사회주의 운동을 만들어냈다.

이탈리아 노동운동과 좀 더 오래된 영국, 독일의 노동운동간 차이점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예컨대 글래스고우 금속제조업 공장의 노동자들은 숙련공들이 명확한 지위들을 차지하고 있던 상황에서 발전했었다(비록 경영자 측에서는 이를 훼손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지만). 당시 클라이드 금속 노동자의 행동은 다음과 같았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감시당하는 것에 대해 계속적으로 분개했다. 경영자들이 고객들을 작업장에 데리고 왔을 때 그는 전력을 끊고는 -- ‘이 짓을 하는 것을 감시당하지 않아도 어쨌든 공장에서 일해야만 하는 것은 끔찍해라고 중얼거리면서 -- 자기의 기계가 있던 곳으로부터 걸어 나갔다.

 

튜린의 노동자들은 사용자로부터 방어해야할 어떤 특권 및 지위도 없었다. 그들은 종종 공장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스스로를 노동계급의 의식적인 성원들로서보다는 농민으로서의 견고한 정체성을 지녔다. 그들의 저항방식은 이러한 정체성에 의해 조건화되었다. 피아트의 한 노동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듯: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우리 노동자들은 천시되었고, 멸시받았고, 착취당했고, 경멸받았다. 즉 우리는 하찮은 존재로 간주되었다. 모두가 우리의 적이었다. 고용자도, 사무직 직원들도, 점원들도, 지역 정부 공무원들도. 그렇다. 모두가, 이 모두가 우리의 적이었다. 조직이 없었을 지라도 자발적인 파업(work-out)이 이루어졌던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 일이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명분을 가지고 거리로 나왔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우선 우리는 돌을 던져 가로등의 유리를 깨뜨렸고 그런 다음에는 전동차에 타서 의자나 부수어질 만한 어떤 물건들에 대해 화풀이를 했다. 왜였을까? 그것은 가로등이 우리의 적인 지역 정부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전동차는 지역 정부 소유였으며 고용자는 이러한 지역 정부의 권력과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들 모두가 우리를 경멸하고 멸시하는 설비들의 일부들이었기 때문에 그것들 중 어떤 것이든 깨뜨릴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충분했었기 때문이다.

 

튜린에서 노동자들과 자본가들 사이의 충돌은 임금 문제보다는 생산 과정의 통제 문제로 집중되어 있었다. 현대화된 공장에서의 높은 투자비용은 자본가들로 하여금 지속적인 생산을 유지하는데 혈안이 되도록 만들었고 고분고분하고 잘 규율잡힌 노동자들로 하여금 이에 따를 것을 요구했다. 결국 투쟁은 노동시장에서의 임금에 대한 이슈보다는 자본가들이 일단 임금이 지불되면 일군의 순종적인 임금 노예들을 확보해야 한다는 정서를 둘러싸고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생산과정에 대한 노동자 통제를 위한 싸움이 노동자 평의회 운동의 중심적 이슈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노동운동은 강력한 현장지향적인 경향(rank-and -file current)을 내포하고 있었다. 특히 튜린의 노동자들은 애초부터 철저한 노동 분업을 수반하는 대규모의 라인생산체제 속에 투입되었다. 19세기 중반에 영국의 주요 숙련공 노동조합들은 장인들이 기술에 대한 실질적인 독점권을 장악하고 있던 낙후된 생산 방식들의 토대 위에서 성장했다. 20세기 이탈리아에서는 이러한 토대가 존재하지 않았었고 이탈리아 금속노동자연맹(the Italian Federation of Metalworkers)은 보잘 것 없을 정도로 취약했다. 금속노동자연맹은 겨우 1901년에야 설립되어 1914년에는 단지 11,471명의 조합원만을 확보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나마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강력한 노동조합이었다.

기존의 노동조합들은 거대한 공장들에 기반한 독자적 현장조직과 심각한 경쟁에 직면했다. 대공장의 현장조직은 세기가 바뀔 무렵, 자생적으로 선출된 그리고 조합원 및 비조합원을 막론하고 이들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파업위원회나 내부위원회(internal commission)로부터 등장했다.

 

특정한 파업을 지도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용자와 협약을 하여 노동권들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상설적 조직체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매우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이러한 조직체를 통해 공장 전체를 포괄하는 노동자의 대의체가 창출되었다. 그것은 현대화된 공장들에서 노동이 조직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노동조합보다 우월한 것이었다.

 

공장 현장 노동자들의 혁명을 염원하는 깊은 저류(undercurrent)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현장 조직이 오랜 기간동안 지속되는 것은 쉽지 않았고 노동자 평의회의 이러한 싹들은 전쟁 이전의 호의적이지 않았던 조건들 속에서 시들어 버렸다. 그것들이 광범위한 전투성에 의해 북돋아지지 않았을 때에는 -- 통상 노동조합의 소수파들이었던 -- 몇몇 헌신적인 활동가들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경향이 있었다.

결국 1차 세계대전 이전에 맹아적이었던 현장조직들은 노동조합에 흡수되었고 노동조합 관료들에 의한 통제 수단으로 전락했다. 내부위원회들의 배후에 깔려있는 본래 정신은 지본가의 경영권에 대항한 대중 봉기였지만 노동조합 관료들은 내부위원회로 하여금 협상안의 동의를 이끌어내는데 일조하길 바랬다.

이러한 제약들에도 불구하고 현장조직의 전통은 전쟁 이후 노동조합 전임자들의 족쇄로부터 전투성을 해방시킬 때까지 왜곡되고 관료화된 형태 속에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1919년부터 1921년까지붉은 2으로 불리는 베니오 로소(Biennio Rosso) 시기 동안에 내부위원회들은 이탈리아 노동자 평의회 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내부위원회들만이 유일하게 노동계급의 잠재성을 활성화시킬 수 있었다.

다른 형태의 노동자 대중조직들이 직면했던 문제들은 전쟁 직전 발생된 두 개의 대조되는 파업들 속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두 파업이 일어났던 주된 배경은 피아트 공장에서 연간 생산량을 23% 정도로 상승시켰던 자동차의 수요증대였다. 자본가들은 생산의 중단없이 생산량을 증대시키기 위해 금속노조 즉 FIOM과의 새로운 협약을 맺길 원했다. 노조관료들은 이러한 경영상의 요구들에 대하여 현장 조합원들의 요구와 균형 맞추기를 원했는데 1912년의 협약은 이러한 압력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비록 단지 자동차 산업의 극소수 노동자들만이 가입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속노조는 유일한 협상자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8%의 임금 인상분을 받은데다가 노동시간도 단축되었다. 고임금이라는 당근은 노동자들이 관리 규율을 더욱 잘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채찍을 사용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새로운 협약 하에서 사용자들은 즉각적인 해고 및 회사규정을 엄격히 적용할 권리를 가지게 되었던데 비해 현장 대표체는 폐지되었고 비공인 파업들은 금지되었다.

이탈리아 금속노동자연맹(FIOM)이 맺은 단체협약은 튜린의 아나코생디칼리스트들에 의해 격렬하게 부정되었다. 1872년 이탈리아에 바쿠닌의 아나키스트적 사고들이 뿌리내린 이후로 이러한 운동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50여 년 동안 이탈리아 아나키즘의 지도자로 인정받았던 사람은 에리코 말라테스타(Errico Malatesta)였다. 그의 활동은권위 없는 사회, 노동운동 및 노동조합들 내의 아나키스트들에 의한 선동을 위한 선전에 집중되었다. 어떠한 엄밀한 이론보다도 행동이 아나키스트들의 보증수표였다. 세기가 바뀔 무렵 그들은 체계를 붕괴시키기 위한 총파업을 강조하면서 프랑스의 생디칼리즘 영향력 하에 있었다.

노동조합의 운영과 관련하여 아나코 생디칼리스트들은 중앙집권적인 조직구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종류의 권위든지 간에 그것은 대중들의 자유로운 창의력을 약화시킨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들의 노동조합 운영방식은 사용자들에게 요구만을 제시할 뿐 어떠한 양보도 거부하는 것이었다. 튜린에서 그들이 이끌었던 파업은 이러한 운영방식에 대한 일례였다. 이탈리아 금속노동자연맹(FIOM)의 협약에서 드러난, 더 높은 임금을 위해 노동권을 희생시켰던 경영 독재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gut reaction)은 아나코 생디칼리즈트들의 영향을 받은 파업들이 지속적이고 필사적으로 사용자들뿐만 아니라 금속노조에도 맞서도록 이끌었다. 실질적으로 어떠한 조직이나 자금도 없이 진행되었던, 두 달 동안의 투쟁 이후 노동자들은 패배와 애초의 협약에서 제공되었던 양보마저도 상실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탈리아 금속노동자연맹의 노조관료들은 자신들의 잡지에 파업자들을 무질서한 폭도들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해에 똑 같은 노동자들이 노조의 지도력 하에(잘 규율된 노조의 방식대로) 75일간의 공식적 전면파업을 수행하여 이전의 아나코 생디칼리스트적인 파업에서 상실했던 지반을 효과적으로 회복하자 이번에는 이탈리아 금속노동자연맹의 노조관료들은 그들에게 무한한 칭찬을 하였다.

이러한 두 개의 파업은 튜린지역 노동운동의 분리된 정신 -- 정형화되지 못한 봉기로부터 조직화되었으나 관료적으로 억제되었던 행동으로 변화 -- 을 상징했다.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나코 생디칼리스트적인 파업은 자본주의와 타협하는 것을 싫어했던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이 파업은 이들에게 혁명적 열정을 불어 넣어 주었다. 이탈리아 금속노동자연맹이 주도했던 총파업은, 아마도 체계에 더욱 익숙한 사람들일 테지만, 규율잡힌 현장노동자들 간의 연대를 통해 어떻게 싸워야 할지를 더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하지만 순수한 자발주의(spontaneism)도 관료주의적 노동조합주의도 하나의 운동흐름 안에서 봉기와 조직의 결정적인 요소들이 될 수 없었다.

튜린 노동자들 사이에서 주요한 정치적 세력이 되었던 것은 이탈리아 사회당(PSI)이었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전쟁 직전이던 1914년에는 당원이 겨우 58,000여명에 불과하였으며 전국적 규모였던 독일의 사회민주당(SPD)보다 훨씬 작았다. 지역적으로 튜린에 있는 당원들은 지난 10년 사이에 두 배로 증가하여 2,412명에 이르렀고 그들 중 4/5는 육체노동자였다. 전쟁 이전에 조차 튜린의 사회주의 운동을 지배하고 있었던 그룹은 급진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곧 지역의 청년 학생 운동 지도자였던 안토니오 그람시와 엥겔로 타스카(Angelo Tasca)의 팽창하는 지적 힘에 의해 지도되었다.

어디에서도 튜린만큼이나 1차 세계대전이 심원한 경제적, 사회적 영향을 끼쳤던 곳은 없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가는 길은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배신에 의해 순탄치만은 않았다. 이는 부분적으로 이탈리아가 단지 1915년에만 독일에 대항한 동맹에 가입했기 때문인데, 그때는 현대 전쟁의 참상이 드러나던 시기였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대한 이탈리아의 선전포고가 있기 며칠 전에 튜린 노동자들은 자생적인 전면적 파업을 감행하여 거리에서 전쟁선동자들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2 인터내셔널에 소속된 많은 나라의 노동자들이 제국주의의 강압에 의해 패배되었던 반면 , 튜린의 사회주의자들은 바리케이트를 쌓고 폭력적 억압에 저항하기 위해 싸웠다.

이러한 과정에서처음으로 사회당 튜린 지부는 계속해서 당내에서만의 활동이라는 한계들을 넘어 나아갔다.’ 이러한 활동의 확장은 정치적 선진부위가 전투적 현장 노동자들의 선진부위와 결합되어 전쟁이라는 공통의 문제를 해결해 나아가는 과정을 만들기 시작했다. 전쟁참여가 가시화됨에 따라 정치적 이념들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난해한 쟁점들로 인해 첨예화되었다.

 

노동조합들과 당 내부에서 개량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은 첨예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투쟁은 공장 외적인 이슈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든 좌파들의 힘들을 결집시키고 나아가 정치와 산업 간의 긴밀하고 직접적인 관계를 창출하려던 것이었다. 왜냐하면 작업현장의 일상적 문제들이 사회 전체 측면과 연관되면서 모든 노동자 조직들에게 그 해결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전시의 투쟁들

 

그들의 신념에 따라 이탈리아 사회당(PSI)의 지도자들은 전쟁 내내 제국주의를 거부했지만 튜린의 사회주의자들이 바리케이트를 쌓는 동안 당의 전국집행위원회(national directorate)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그들은 전쟁에 협조할 것을 촉구했던 사회당 출신 의회 대표자들을 비판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사회당(PSI)의 국제주의적 발언 배후에는 위험스러운 수동성(passivity)이 놓여 있었다. 전쟁에 대한 사회당의 태도는 일간지인 Avanti! 지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었다.

 

학습하라. 그렇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내일의 행동을 위해 필요한 자료들을 수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구체적이고 급박한 문제들을 둘러싼 행동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 당은 …… 언론과 집회들을 통해 대중적 압력을 불러일으키는 것 -- 이는 의회에서 할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러한 행동마저도 …… 검열로 인해 …… 봉쇄되어 …… 집회들이 금지되고 의회가 제한받고 있는 상태에 있다.

 

그러한 제한들에 대해 싸움을 벌이지도 않으면서 그리고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당 중앙은 의회 밖에서의 정치적 행동에 대해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않았다. 다음의 문장은 이를 잘 보여준다.

 

비록 행동이 가능하다고 가정할지라도 …… 무엇이 그것을 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는가? …… 국가예산을 지출하도록 하는 요구(사회적 입법)는 관철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전쟁으로 인해 가용한 예산이 없기 때문이다. 나라의 국방력을 누그러뜨리라는 요구(형벌의 입법)도 안된다. 왜냐하면 국가는 전쟁에 모든 힘을 쏟아 붙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의 이윤을 축소시키라는 요구(자본과 노동 사이의 관계)도 역시 안된다. 왜냐하면 자본은 투쟁 없이는 항복하지 않을 것이며 한동안 계급투쟁은 전쟁으로 인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사회당은 원칙적으로는 비타협적 입장을 고수했지만 실천에서는 수동적 태도를 견지했다. 하지만 사회당의 좌익적 발언은 많은 혁명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결국 1920년 이전에는 그람시 조차도 궁극적으로 사회당과 절연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혁명이 그 정점을 지나게 된 에야 그는 사회당과 조직적인 단절을 했다.

그 이유는 이탈리아 사회당이 영국사회당이나 독일사회민주당 같은 제2인터네셔널의 보수적인 당들과는 다소는 상이한 정치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전쟁의 발발은 영국사회당과 독일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의 다수가 뻔뻔스러운 개량주의자들임을 폭로해줬다. 하지만 이탈리아 사회당의 투라티(Turati)를 중심으로 한 개량주의적 부위는 당 지도력에서 소수파를 이루고 있었다. 비록 투라티(Turati)는 이탈리아 사회당 출신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당원의 다수를 대표하고 있는 당 중앙집행위원회는비타협주의입장을 견지했다. 지아코모 세라티(Giacomo Serrati) 같은 당의 저명한 인물들은 스스로를 혁명적 맑스주의자이며 결코 전쟁 반대 입장을 타협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러한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감옥에서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을 좋아했다.

하지만 계급투쟁의 실천적 지도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혁명적 원칙의 타협에 대한 단순한 거부는 만약 노동자들의 일상적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한 대답이 적절히 제공되지 않는 한 대단히 부적절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탈리아 사회당의 비타협적 부위는 생산현장을 속수무책으로 의회 집단과 노동조합 지도부들의 개량주의적 부위들에게 맡겨 놓았다.

그러나 튜린 사회주의자들의 전쟁 반대 입장은 당 중앙보다 열정적이었고, 사회당 내 사회주의자 부위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급진적인 집단이었다. 처음부터 이들 의 기관지인 Il Grido Del Popolo(민중의 외침)는 전쟁광과의 어떠한 타협에 대해서도 비난을 퍼부었다. 이 기관지는 의회 내의 우익 사회주의자들을 공격했고 동원위원회(Mobilisation Committees)에 참여하는 노동조합 성원들을전쟁 협조의 은폐된 형태라며 비판했다. 191611월에는 좌파의 영향력은 각 지역 당 지부의 집행위원 선출에 의해 확고히 되었다. 선출된 위원 명단에는 지오바니 보에로(Giovanni Boero) 같은 혁명적인 금속노동자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 선언문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었다.‘우리 비타협적 부위는 오로지 계급 투쟁만이 노동자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 한마디로 정부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 정부에 대한 어떠한 협조도 받아들일 수 없다.

러시아로부터 온 소식들은 급진적인 감정을 고취시켰다. 심지어 191710월 혁명 이전까지도 튜린 노동자들은 대부분의 유럽에서 겨우 이름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이던 볼셰비키에 대해 연대성을 보여줬다. 191785일 튜린에 방문했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대표들은 40,000여명의 사람들이레닌 만세!’를 외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2주 후에는 튜린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1915년 영국 글래스고우에서의 집세 파업(rent strike)19174월 독일 라이프치히(Leipzig)에서의 총파업에서처럼 이탈리아 여성노동자들이 폭동의 선두에 섰다.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참을 수 없는 압박에 직면했다. 거의 기아의 상태에 가까운 조건들 속에서 한줌의 배급을 받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줄을 서야했을 뿐만 아니라 공장에서 하루 12시간을 일해야 했다. 배고픔에서 시작되었던 소요는 여성들이 산업 속에 들어와 노동자로서의 능력을 지니게 되자 즉시 거의 반란에 가까운 것으로 발전했다. 이는 여성 근로자들이 지배적이던 병기공장(Projectile Arsenal)과 디아또-프레주스(Diatto-Frejus)에서는 파업의 형태를 취했다.

독일의 노동자들은 그들의 경제적 요구를 전쟁에 맞선 정치적 운동과 긴밀히 연결시키는데는 수년간의 투쟁이 필요했었다. 영국에서 이 두 가지 이슈는 결코 결합되지 못했다. 하지만 튜린에서는 개량주의적인 사고방식이 거의 이식되지 못했고 하나의 투쟁 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의 이행하는 데는 불과 몇 분이 걸리지 않았다. 이는 디아토-프레주스(Diatto-Frejes) 파업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작업을 멈추고 모여서 소리 높이 외치며 공장 문 밖으로 나섰다:‘우리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우리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 우리에게 빵을 달라!’

우리 회사의 고용자인 피에트로 디아토(Pietro Diatto)는 무척 겁을 집어먹고는 노동자에게 감언이설을 했다.

당신들의 말이 백 번 맞소. 어느 누가 먹지도 않고 일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당장 보급대(military supplies)에 전화를 걸어 당신들에게 산더미 같은 빵을 줄 수 있도록 하겠소. 하지만 당신을 위한 빵을 위해서 그리고 당신의 가족들을 위한 빵을 위해서 그 동안은 제발 작업장에 복귀하도록 하십시오.’

노동자들은 잠시 침묵했다. 잠시 동안 그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비록 침묵 속에서 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의 의견을 헤아렸고 일체가 되어 다음과 같이 외쳤다.

우리는 그 빌어먹을 빵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착취자들을 끌어내라! 전쟁을 당장 중지하라!’

 

824일에 그 운동은 정점에 이르렀고 성난 군중들이 튜린 중심지에 모여 오로지 기관총과 탱크가 아니라면 무마시킬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폭동이 진행되던 4일 동안 결국에는 50명의 시위자들이 죽고 800여명이 투옥되었다. 폭동의 강렬함에도 불구하고 19178월의 폭동은 조직화된 노동자들의 집합적 힘이 이제 막 시작되는 것에 불과했다. 봉기의 바람이 불어 튜린 거리들을 휩쓸었지만 봉기는 그것이 지나갔다는 증거로 시체들만을 남겨놓았다. 조직이 없이는 어마어마한 자기희생과 용기를 통해서도 중앙 집중화된 국가의 공권력을 넘어설 수 없었던 것이다.

물리적 대결은 실패했고 공장에서의 행동은 새로운 중요성을 획득했다. 이탈리아의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립서비스를 했지만 말과는 달리 전쟁에 노동계급을 징집하는데에 동참했다. 이탈리아 사회당처럼 그들의 태도는지원도 사보타지도 하지 않는다라는 것이었고 이는 실제로 노동자들이 혼자 힘으로 자신을 보호하도록 방치하는 것에 불과했다. 노동자들은 곧 현장 대표자들의 체계를 부활시켰고 이제 노조관료와의 연계성 없이 행동해야만 했다.

공장 현장의 조직화 흐름은 노자간의 적대가 드러난 이후, 튜린 지역의 다음과 같은 극적 변화에 의해 지속적으로 강화되었다. 운송수단의 생산량은 전쟁 이전에 연간 9,200대였던 수준에서 연간 20,000대 수준으로 증가했고 튜린은 오늘날 이탈리아 군대의 주요한 군수품 생산자가 되었다. 비록 새로운 노동자들이 튜린 공장으로 몰려들었지만 노동력의 부족현상은 튜린 노동자로 하여금 강력한 단체교섭의 위치를 차지하도록 만들었다. 비록 그럴지라도, 노동자들은 곧 엄청난 물가 상승에 대처해야만 했다. 1918년까지 실질 임금은 전쟁 이전 수준의 65%로 떨어졌다. 오로지 작업장 위원회(Shopfloor commissions)만이 생활수준의 완전한 붕괴를 막으려고 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전체 산업 속에서 경제 투쟁을 옹호했기 때문이었다.

전시 동안에 튜린 노동운동은 규율잡힌 동시에 봉기적이었던, 다시 말해 조직화와 자생주의라는 고유 특성들을 또 다시 드러냈다. 하지만 노동운동은 군수물자에 대한 수요라는 이슈에 의해 변화되었다. 내부위원회(internal commissions)는 전쟁터가 되었다. 노동조합 관료들은 내부위원회를 노동자들에게 타협안을 강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반면 전투적인 현장 활동가들은 공장의 현장 조직을 통해 연장된 노동시간, 낮아진 임금 수준, 열악해진 노동조건들에 맞서 싸움을 이끌고자 원했다. 1916년 초까지 공장의 현장 활동가들이 승리했고 게다가 내부위원회는 작업장 봉기와 현장 민주주의라는 그 본래적인 정신을 회복하는 듯 했다. 피아트(Fiat)의 젊은 기술자였던 바티스타 산티아(Battista Santhia)는 어떻게 현장 조직이 발전해갔는지를 다음과 같이 썼다.

 

선동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현장위원회를 조직하여 이를 통해 경영자 측에게 요구하도록 했다. 타협의 막바지에 현장위원회는 노동자들에게 돌아가 보고했고 노동자들은 각 대표자들이 활동했던 부분들을 철저히 보고받았다. …… 결국 그런 것들을 통해 각성된 현장 지도력은 창출되고 성장해갔다.

 

비록 소수의 금속 노동자들만이 노조에 가입하고 있었지만 공장 내 모든 사람들은 열악한 임금 및 노동조건들에 대해 공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현장 위원회가 선거일에 일을 하는 모든 노동자들에 의해 선출되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파리나(Farina) 위원회는 노조관료들과는 다르게 노동조합에 소속되어 있는 소수보다는 전체 노동자 대중을 대변하고자 했으며 이는우리는 노동조합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에 의해서 선출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 였다.

당연하게도 노조 전임관료들은 그러한 현장세력의 독자화 과정을 두려워했다. 노동조합들은 노조에 가입한 조합원들에 기반하고 있었고 만약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이익들이 직접적으로 선출된 대표들에 의해 더 잘 보장받는다고 느낀다면 노동자들은 지속적으로 노동조합에 가입할 필요성은 없는 것이었다. 노조관료들의 역공이 뒤따랐다. 비조합원이었던 다수 노동자들은 선거가 금지되었고 독자적이며 전투적인 현장활동가들은 위원회에서 추방되었다.

현장 활동가들과 노동조합 관료들 사이의 이러한 충돌들은 전쟁 기간 동안 내내 계속되었다. 1917년에는 노조관료들은 일시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1917년 봉기의 유혈 패배와 191710월 까뽀레또(Caporetto)에서의 이탈리아 군대의 궤멸 이후 일었던 애국주의의 물결은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오스트리아의 침략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던 오를란도(Orlando) 정부는 노동자들의 어떠한 종류의 선동들도 다 짓밟았다. 이러한 어려운 시절을 회상하면서 타스카(Tasca)는 내부위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 그 절반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원점에서부터 재건되어야 했다. …… 살아남은 내부위원회들은 성장하는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자본가가 명령한 임무들을 고분고분하게 수행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전쟁이 모든 것을 지배했다. 정부의 통제를 받는 공장들에서 군대는 비록 일반적으로 그럴 능력이 없기는 했지만 …… 거부하면 징집시켜 버리거나 전선에 파견하겠다는 고압적 자세를 취했다. 노동자들은 임금, 노동시간, 노동조건들 …… 에 대한 어떠한 영향력도 상실했다.

이러한 거대한 억압과 일상적인 굴욕을 고려하지 않고는 …… 어느 누구도 전후 이탈리아의 전투성을 이해할 수 없다.

 

여느 다른 형태의 현장 조직들처럼 내부위원회는 노동자들의 자신감에 기반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자신감이 높을 때 위원회는 현장의 요구들을 위로 개진하기 위한 전달벨트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위원회는 노조관료들의 이익에 복무하면서 그들의 명령을 아래로 전달했다.

19184월 내부위원회들은 이탈리아 금속노동자연맹(FIOM)과 튜린 자본가들 사이의 협약안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고 체제 내의 제도로 정착됬다. 상여금은 상승했고 실업보험이 도입되었다. 이는 대부분의 노동조합 지부에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아나코 생디칼리스트로서 이탈리아 금속노동자연맹에서 활동적이었던 마우리지오 까리노(Maurizio Garino)는 독일의 티르피츠(Tirpitz)와의 거래를 거부하는 연설을 통해 비참한 결과들을 예견했다.

 

까리노는 노동조합이 잘 협상했다고 인정했다. 그는 심지어 그 협약은 주목할만한 성취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원칙적 측면에서 그는 그 협약에 반대하는 연설을 해야 했다. 그 협약은 노동계급의 전투성을 약화시키겠금 하였는데 이러한 약화는 노동조합을 비대하게 만들고 관료적 타협과 지배로 흐르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까리노의 연설은 튜린의 새로운 흐름에 대한 최초의 의식적인 표현이었다. 우리는 이미 윌리 갤래셔(Willie Gallacher)와 리차드 뮐러(Richard Muller) 같은 투사들의 중요성 즉 이들이 현장의 전투성 및 좌익 정책들에 대해 개입함으로서, 정치적 전위와 현장의 전투적 전위들 사이의 융합을 가능케 했던 점들을 설명했었다. 튜린 공장들에서 이러한 역할은 이탈리아 금속노동자연맹의 활동가들로 이루어진 임시위원회(provisional committee)’에 의해 이루어졌다. 임시위원회는 보에로(Boero)와 빼로디(Parodi) 같은 비타협적인사회주의자들과 까리노(Garino)와 뻬레로(Ferrero) 같은 아나코생디칼리스트들로 이루어 졌었다.

임시위원회는 개량주의적 환상들에 빠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임시위원회의 지도자들은 혁명적 관점에서 전쟁에 대한 거부를 현장활동을 위한 프로그램과 결합시켰다. 까리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부르주아지와 기업가들을 끝장낼 때이다. 지금은 혁명의 방향성을 가지고 당장 행동해야 할 때이다. 정부와 지배자들은 전쟁 수행으로 정신이 없으며 봉기로 순식간에 장악될 수 있는 상황이다. 이 경우에 우리는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조합 안에서 임시위원회는 아래와 같은 네 가지 사항을 요점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1. 노동자들의 단결은 공장조직을 토대로 해서 구축되어야 한다.

2. 우리는 8시간 노동제를 즉각 도입시키기 위한 행동을 해야 한다.

3. 모든 노동자들(징집병들을 포함하여)은 자본가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파업 및 자유롭게 행동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4. 동원위원회(Mobilisation Committees)와의 어떠한 공조도 있을 수 없다.

 

이 프로그램은 이탈리아 금속노동자연맹의 튜린지부 조합원들이 참여하는 투표에서 기각되었다. 오로지 노동조합 내의 활동적인 소수들만이 그러한 급진적인 조치들에 동조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위원회는 전쟁 이후 거대한 노동자 평의회 운동을 활성화시킬 모든 핵심적인 투사들을 포괄했다.

맑시즘과 아나키즘처럼 골이 깊은 대립을 보여온 각각의 현장 활동가들이 같은 배를 탔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임시위원회 내에서 서로 결속함으로써 궁극의 목표가 무엇이든 간에-프롤레타리아 독재이던 자유주의이던 간에-노동계급의 실질적 진보를 이루려면 혁명가들이 현장의 일상적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자본주의에 맞선 정치적 투쟁과 결합시켜야 한다는 점을 공감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들의 생각이 지향하고자 했던 목표점은 이탈리아 금속노동자 연맹의 두 번째 선언에서 드러났다. 이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진전으로서 그것은 오로지 현존하는 노동조합 기구 및 운영들에 관한 요구사항들을 제출했다. 이 새로운 선언은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 있다.

 

지부 업무들의 개혁(Reform of branch affairs) - 지부의 운용에 대한 노동대중들의 참여 확대. 조합비 모금자들(dues collectors)과의 지속적인 상담. 내부위원회의 역할에 대한 심의. 노동조합과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 문제들을 연구하기 위한 교육 및 선전위원회의 설립.

 

조합비 모금자들과 내부위원회를 활성화함으로써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확대한다는 생각은 글래스고우의 비공식적 운동 및 DMV에서의 오블로테(Obleute)의 캠페인의 방식과 유사했다. 작업현장의 산업적 행동과 더욱 광범위한 총체적 운동 사이의 연관 가눙성을 탐구하기 위하여 연구위원회가 있어야 한다는 마지막 제안은 선언의 입안자들이 작업현장에만 집착하는 부문적 투쟁들보다는 오히려 더욱 광범위한 관점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1918년 말경 심지어 저명한 우익 사회주의자였던 모디글리아니(Modigliani)까지도 공장 현장조직의 잠재력을 인식하고 두려워했다.

 

오늘날 근시안적 견해를 가진 자들은 내부위원회들을 협조주의적인 기구로서, 현장의 임금을 방어하는데 유용한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내부위원회를 세우고 조직했던 사람들은 위원회를 우선은 노동자들에 의한 행정, 그 다음에는 노동자들에 의한 몰수를 다루게 될 핵심기관으로 바라본다.

 

그는 전투적인 현장 활동가들의 생각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정확하게 판단했다. 내부위원회는 금새 전후 이탈리아에서 가장 고도로 발전되었던 노동자 조직인 공장평의회로 변환되었다.

 

전쟁 말기 상황에서의 이탈리아의 사회주의

 

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국내에는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다. 1918년 전쟁이 끝났을 때 정복의 전리품들도 이탈리아의 허약한 경제 및 정치 구조의 해체를 막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한 정부 지지자는 놀라운 표정으로 어떻게 국내에서 선동가들이 봉기를 자극하고 있는 동안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이 혁명 가요들(그중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던 노래는러시아를 따르자였다)을 불렀는지를 --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승리한 이후에 발생했으며 만약 패배했다면 그 정도는 더욱 격렬했으리라 하고 예상하며 이야기했다.

위기는 이탈리아 사회를 이른바 비에니오 로소(biennio rosso) , 전쟁에 이은 붉은 2(two red years)'과 같은 상황으로 분열시켰다. 휴전이 있은 몇 달 동안에 달러에 대한 리라(lira)의 가치는 반으로 떨어졌다. 평화 시기의 급격한 산업 재조직화 과정을 거치면서 생산량은 같은 기간의 40% 수준으로 떨어졌다. 혼란은 많은 원천들에서 기인했다. 민족주의자들과 제국주의자들은 평화 회담들에서 보장받았던 전리품에 만족할 수 없었고불구의 승리(mutilated victory)'였다고 이야기했다. 중간계급은 인플레이션의 효과들에 대해서 불평을 했고 자신들 주변에서 커져가고 있다고 느꼈던 무질서에 대해 초조하게 지켜봤다. 하지만 여기에 이례가 없던 규모로 결집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이었다.

붉은 2(two red years)동안 -- 전시의 약 6배에 이르는 -- 백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섰다. 파업 과정에서 1919년 한 해 동안에만 18백만 노동일이 낭비되었는데 그중 11백만 노동일은 금속산업 노동자들에 의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하지만 투쟁성은 노동계급의 모든 부분들에서 강화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농업 노동자들은 단결하여 자신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대투쟁을 벌였다. 그들은 약 27,000 헥타르의 개간되지 않은 토지를 몰수했는데 그것은 종종 예편한 군인들에 의해 점유되었던 것이었다. 노동조합의 조합원 수는 19191년 동안 5배로 늘었다. 게다가 이러한 성장률은 이탈리아 사회당이 축소해서 산정한 것이다. 사회당은 전쟁이 끝날 때 24,000명의 당원밖에 없었지만 12개월 후에는 200,000명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구조는 더 많은 임금과 더 좋은 노동조건들, 더 적은 노동시간을 위해서 일지라도, 타협에 대한 공격성과 거부(unwillingness)를 보이면서 싸웠던 수많은 투쟁들을 조직화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어디에서나 노동운동의 공식조직들은 혼란 속에서 삐걱거렸다.

이탈리아 사회당에서는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관점을 둘러싸고 분열되어 있었다. 필리포 튜라티(Filippo Turati)에 의해 지도되던 우익은 과거의 관념들이 신뢰받지 못할 상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부한 것들을 추구했다.‘폭력 혁명 시도는 …… 단지 두 개의 가능한 결과만이 있을 뿐이다. 봉기가 유혈 진압되던가 아니면 잘해야 -- 정치구조의 순전히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변혁이 있던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 개혁만이 위대하고 확실한 길인 것이다.’

이탈리아 사회당 당원의 다수는 집행위원회에 의해 대표되고 있었다. 19181214일 집행위원회는 구습을 타파하며직접행동을 위한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이러한 대담한 자료는 심지어 다음과 같은 것들을 요구했다.

 

1. 노동자와 농민에 의한 직접적 관리 아래 생산수단을 집단화하기(collectivisation)…….

2. 협동조합들(cooperatives)과 코뮌들 같은 집합적 조직들을 통한 상품들의 분배.

 

만약 사회당 집행위원회가 이를 이행할 어떠한 의지만 가지고 있었다면 이는 매우 인상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집행위원회가 만들어 냈었던 여느 것들과 마찬가지로 단지 중도적인 혼합(confusion) -- 어떠한 실질적인 의미도 갖지 않는 요란스러운 공언 -- 의 또 하나의 예에 불과했다. 집행위원회가 이탈리아 사회에서의 저항에 대해 요란하게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사실 위원회는 개량주의적인 노동조합 지도자들 및 우익 사회주의 의원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선전 이외에는 그 어떠한 고유의 독립적인 활동도 하지 않았다. 그 중도적인 입장은 당 비서였던 지아코모 세라티(Giacomo Serrati)에 의해 요약되었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당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혁명적 집단과 개량주의적 집단 뒤에서 어느 한쪽이 다른 쪽보다 우위를 차지할 때마다 교대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방식으로 당의 통일성을 유지했다. 세라티는우리 맑스주의자들은 역사를 해석할 뿐 그것을 만들지는 못한다라는 불후의 말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이탈리아 혁명에서의 그의 역할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요약해준다.

세라티와 집행위원회는 1919년 여름 이탈리아에서 격렬한 식량 폭동들이 발생되는 동안 역사를 만들지 않겠다던 그들의 결정을 다시금 강조했다. 폭동의 규모는 19178월의 경우와는 달리, 국가가 봉기 지역을 다른 곳과 격리시켜 봉기를 진압하기가 불가능했을 정도였다. 식량 가격을 낮은 상태로 유지시키기 위해 군대들과 대중들이 연대했던 사례들도 많았다. 상점들은 강제로 개방되었고 그 상품들은 시장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소비에트에 의해 분배되었다. 한동안 국가는 무력했고 사회당 집행위원회의 혁명 레토릭은 시험대에 올랐다.

이탈리아 사회당의 지도자들은 완전히 실패했다. 비록 그들은 자본주의 국가와의 타협에 협조하는 것을 꺼려했지만 또한 봉기를 이끌기 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항상그래 왔듯이 그들은 당내의 우익적 흐름과 같이 했다. 봉기 발발 1주 후에 그 운동은 급속한 하강세를 보였고 노동조합 관료들과 지역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일시적인 물가 동결로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사회당 집행위원회의 혁명적 선언들이 피상적이었다는 본질은 혁명을 위한 국유화(national proportions)조치의 가능성이 소멸되었을 때 여실히 드러났다. 하지만 봉기가 뜨거운 여름 속으로 증발해버렸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탈리아 사회당이 국유화의 원칙들을 포기했다고 감히 말하지 않았다. 당의 일간지인 Avanti!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사건들이 그 귀결을 향해 갈수록 모든 당원 동지들은 만반의 출동 태세를 갖춰야 할 것이다

하지만 중도파의 어리석음은 이탈리아 사회당 내에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탈리아 사회주의의 극좌파는 나플레스(Naples)의 아매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에 의해 이끌어지고 있었다. 그는부르주아지에 맞서고, 정치권력의 혁명적인 장악과 사회주의 정부에 의한 생산수단의 집단화(collectivisation)을 위하여 당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만을 원했다. 그 당시 유럽의 사회주의자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보르디가만이 혁명정당의 중심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사회주의자들은부르주아지의 지배가 더욱 내구성을 갖추게 되고 그래서 더욱 오래 유지되도록 하는 어떠한 조치도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던 분파주의자(sectarian)였다. 보르디가는 비타협주의자들 중에서도 가장 비타협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즉각적인 개혁을 위한 어떠한 단기간의 투쟁도 거부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생경한 슬로건들만을 외치는 자들로 축소시켜버렸다.

보르디가의 주요한 활동은 이탈리아 사회당의 당원들이 선거에 기권하도록 하는 것이었다.‘선거 참여는 단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할 뿐 정력만 낭비하는 짓일 뿐이다. 혁명적인 권력 장악은 의회활동의 직접적인 반테제이다.’ 진실로 혁명은 의회주의적 절차들에 대한 직접적인 반테제들이다. 하지만 만약 구체적인 단계들이 대중들에게 호응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은 그냥 지나쳐서만은 안되는 것들이다. 순전히 수동적인 선거회피의 방법은 그러한 단계들 중 하나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중의 자기 활동을 통해 노동자들의 생각들을 바꾸는 문제를 표방하는 것을 시도조차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보르디가의 관점은 이탈리아 사회당 내부로 인입되었고 결코 당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들에 대해서는 결코 주목하지 않게 하였다. 하지만 그를 따르는 소수의 경직된 분파는 유일하게 전국적으로 조직화된 혁명적 흐름이었고 이들은 튜린에서 자신들의 지지들을 확보할 수 있었는데, 그 지지자들 중 한사람이 보에로(Boero)였다.

보르디가(Bordiga)의 분파주의는 곧 안토니오 그람시의 사뭇 상이한 종류의 혁명 전략에 의해 그 빛을 잃게 되었다. 그람시의 전략적 관점은 튜린의 금속노동자의 전투적 활동에 기초하고 있었는데 당시 튜린 금속노동자들은 막 노동자 평의회의 실험을 착수하려던 상황이었다.

독일이나 영국과는 달리 이탈리아의 정치적 선진 활동가들 간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골이 깊게 패어 있었다. 그 깊게 패인 골은 전국적이었지만 혁명정당에 대한 분파적인(sectarian)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보르디가 분파와 노동자평의회 국가의 설립을 추구하며 튜린에서 독자적 기반을 닦았던 그람시 분파들 간의 분화였다. 보르디가 분파의 입장은 맑스주의를 외부로부터의 도입이라는 교리로 봤고, 그람시 분파는 맑스주의를 계급투쟁으로부터 성장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현실은 이러한 운동의 양대 축이 각자 자신이 생각하던 것보다는 서로 간에 덜 적대적이라는 점을 증명해줬다.

 

내부위원회의 부활

 

전시 동안의 투쟁들은 이탈리아 금속노동자연맹의 임시 위원회를 통해 조직화되었던 많은 전투적 금속노동자를 만들어 냈다. 이 임시위원회는 현장 민주주의와 더불어 내부위원회를 통해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발전해 나가고자 했다. 그람시의 저작과 그의 잡지인 Ordine Nuovo(신질서)는 이 운동을 노동조합주의의 편협한 지평을 넘어서는 운동으로 상승시키려 했고 노동자 평의회 권력이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피에몬테(Piedmont) 지역과 그 중심지였던 튜린은 특히 붉은 2년이라는 사회적 혼란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다. 전쟁이 끝났을지라도 (특히 군사 장비들과는 반대로) 자동차에 대한 수요는 심각하게 하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튜린 노동자들의 자신감에 큰 힘이 되었다. 때문에 이탈리아의 많은 나머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 동안에도 튜린지역 경제는 탄력을 받고 있었다. 비록 여전히 이탈리아 금속노동자연맹 튜린지부는 그 지역 금속노동자들의 25%만을 대표하고 있을 뿐이기는 했지만, 1919년에 가입자 수는 13,000명에서 20,000명으로 늘어났다.

엄격한 전시 법(wartime law)이 기승을 부리던 때였지만, 튜린 금속노동자들은심상치 않은 봉기상태로 상승하고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의 지역 일간지였던 Avanti!는 이를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금속 산업의 핵심 세력들 -- 노동자들, 화이트 칼라 직원들과 기술자들 -- 이 일제히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다. 그 투쟁이 아직 일체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프로그램들과 요구들은 아직은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머지않아 아마도 그것들은 하나의 요구가 되어 합쳐지게 될 것이다. 생산하는 자를 위한 공장이라는 요구가 그것이다.

 

전투적 활동가들이 숙련공주의(craftism)와 전쟁의 문제를 둘러싸고 악전고투를 해야 했던 글래스고우와는 달리, 그리고 노동자들이 사회의 모든 면에서 권력을 잡기 위한 투쟁에 사로잡혀 있었던 베를린에서와는 대조적으로 튜린에서의 운동은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생산에 대한 통제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러한 경향의 뿌리는 작업현장들에서 노동규율들을 둘러싸고 반복적으로 벌어졌던 전투들에서 발견된다. Avanti!의 튜린 판은 반복해서 십장들의 행동들,‘경영자들의 독단적인 행동들또는 사소한 현장 규제들에 대한 일반적인 불만들에서 연유한 쟁의들을 보고했다.

이러한 현장통제에 대한 정서(feeling)의 분명한 표현은 8시간 노동제를 위한 운동 속에서 엿볼 수 있었다. 이러한 요구를 내세운 투쟁은 전후의 유럽을 휩쓸었지만 그 어디도 튜린보다 강렬하지는 못했다. 다시 한번 대규모 산업 자본주의의 색다른 경험(novelty)이 그 배후에 있었다. 고임금을 통해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력을 판 것에 대해 그 댓가를 받았지만 일단 팔린 후에 고용계약은 노동력이 어떻게 사용될지를 결정해 주지는 못했다. 대조적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투쟁은 노동력 가치가 얼마이던 간에, 인간으로서 자신들의 착취에 그 한계를 제한하려는, 노동자들의 권리들을 요구하는 주장이었다. 튜린은 항상 이탈리아의 나머지 지역들이 나아가야 할 길들을 주도해왔고 8시간 노동제 운동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19192월 중순, 튜린 공장에서 금속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쟁취했고 튜린의 사례는 모든 이탈리아 금속 노동자들이 이를 따라 유사한 합의를 확대시킬 수 있도록 하는데 사용되었다. 3월에는 신문, 인쇄, 화학분야의 노동자들이 이 선례를 따랐다. 이어 철도 및 운송 노동자들도 이에 따랐지만 그들은 약간의 성공만을 이루었다.

전투성의 확산 그리고 많은 노동자들이 튜린 금속노동자들을 가장 잘 조직화된, 가장 전투적인 계급 부위로 바라본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러 상이한 산업부문간 노동자들 사이에는 어떠한 직접적 연대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조직들은 부문적인 것(sectional)으로 남겨져 있었다. 정치 문제 일반에 대한 비타협적 언사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사회당은 확실히 각 산업부문 노동자간의 어떤 연대 틀을 만들어내려는 의도가 없었고, 노동조합이 담당할 사안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서 관여할 어떠한 의도도 없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 쪽에서는 자신들이 현장노동자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상실할까 두려워했고 어쨌든 단결된 계급적 기초 위에서보다는 노동조합을 통해 모든 투쟁들이 수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후 이탈리아에서의 모든 봉기에도 불구하고 투쟁들은 여전히, 지역적으로 그리고 산업 간에 서로 분리된 채 진행되었다.

결국 튜린의 급속산업부문은 양보를 쟁취할 수 있었을지라도 그 범위가 제한적이었다.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하는 것에는 엄청난 희생이 뒤따랐다. 새로운 협약에서는 주당 60시간에서 70시간 일하던 것을 임금 손실 없이 주당 48시간으로 단축한다는 조건이 받아들여졌고 개당 성과급(piece-rates)은 시간당 급료의 상승에 필적할 수준으로 상승했다. 하지만 협약서 내의 다른 항목들에서는 완벽한 관리감독을 명문화한 3교대제(three-shift system)를 도입했다. 예를 들면 협약서는 다음의 20개 항목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경영자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 노동자들에게 벌금을 물리거나 일시적으로 해고시킬 수 있다.

a)정당한 사유 없이 자신의 자리를 비우는 자

b)작업이 서투르거나 과도하게 느리게 작업하는 자

c)부주의로 인해 작업장의 기계들이나 장비들을 훼손한 자

d)허락 없이 작업장에서 흡연을 하거나 술을 반입하는 자

e)술에 취해 작업장에 들어오는 자

f)공장 내부에서 기부금을 걷는 자

g)작업완료를 늦추거나 작업을 멈추거나 중단을 재촉하는 자

그 외에 경영자는 아래와 같은 경우에는 급료지불 없이 즉각 해고할 수 있다.

a)감독관들의 지시에 불복할 경우

b)공장에 피해를 주는 경우

c)공장에서 싸우는 경우

 

새로운 협약안은 또한 제도적으로 인정되었지만 그 권한이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는 내부위원회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었다. 내부위원회는 근무시간 이외의 시간에 만나야 하고 (임명된 작업장대표위원들로서) 위원들은 그 구성원들을 만나기 위해 다닐 수 있는 어떠한 권리도 가지지 않았다. 경영자가 협상을 위해 언제 어디에서 내부위원회와 만나야할지를 결정하도록 했다. 협약서 상의 규정들을 지키지 않은 것은 곧 일주일 급료의 손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피아트의 노동자들은 분쟁조정과정에서 다시금 제한이 가해졌는데, 그 내용은 어떠한 불만이라도 전국적 수준의 고충처리절차를 거쳐야만 그 후에야 파업은 합법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튜린의 상품들을 원하는 지속적인 시장이 존재했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중단없는 제품생산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새로운 협약이 자동차 공장에서의 평화를 가져오리라는 소망들은 곧 좌절되었다. 비록 노동시간 단축이 광범위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을지라도 사용자들은 작업장에서의 절대권력을 고수하려는 반복적인 노력들을 통해서 현장 규율이라는 민감한 영역에 주의를 집중하고자 했다. Avanti!1919315일 발신인이평범한 노동자들라고 되어 있는 한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에는 노동조합 관료들이 노동자의 사회생활 자체를 파멸시키는 3교대제와 매우 질곡된 분쟁조정절차, 그리고 노동시간 단축을 무효로 만드는 의무적인 연장근로를 수용한 점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었다. 또한 이들 노동자들은 힘든 노동의 강제와 분할 통치적인 다양한 임금율이라는 오점을 지닌 개별성과급제(piece-rates)가 유지되는 점을 거부했다.

2일 후 노동조합 관료들의 답장은 황산을 끼얹은 듯 지독했다. 금속노동자연맹 중앙위원회는 반노동조합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인 편지 발신자가 평범한금속 노동자로 위장했다고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그들은 우리가 산업 발전, 나아가 기업가들의 발전을 원한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기업가들이 살이 찌든 말라비틀어지든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산업이 순조롭게 잘 발전하고 있는 튜린에서 노동자들은 산업이 전무한 로마의 사람들보다 더 잘 산다. 뉴욕의 노동계급은 튜린의 노동계급보다 더 잘 사는데 이는 뉴욕에서는 산업이 더욱 고도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튜린 금속노동자들은 로마의 노동자들보다는 약 34% 그리고 두 번째로 높은 보수를 받는 지역인 제노스(Genoese)보다는 18%를 더 많이 받는 등 실제로 이탈리아 내에서는 최고의 임금을 받았다. 만약 이것이 단순히 임금만의 문제라면 노조관료들의 주장은 납득할 만하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산업적 노예상태를 기꺼이 참아낼 노동자는 아무도 없다. 금속노동자연맹의 답장은 그 불평을 달래주기는커녕 노조 상근자들이 자본가들과의 투쟁보다는 자본주의적 산업의 발전에 더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는 점만을 폭로해줬다.

318일에 새로운 협약이 맺어졌다. 자본가들과 노조관료들의 바램에도 불구하고 내부위원회의 영향력은 쉽사리 포섭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오로지 그들만이 현장노동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개정된 작업장 규칙들과 성과급에 관련한 항목의 문제점을 분간할 수 있었는데 이는 그들만이 유일하게 현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해 여름, 불만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고 내부위원회는 점차 자신의 활동을 확대해 갔다. 그들이 자신감을 키워나갈수록 노조관료기구의 권력은 그 영향력이 축소되어 갔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비록 타협을 통해 임금이 개선될지라도 이것이 금속노동자 대중들에 대한 노조의 영향력 축소현상을 회복시키지는 못할 것이라며 이제야 걱정하기 시작했다.

19193월 튜린 금속 공장들에서 사무노동자들은 직급재조정(regrading)에 대하여 장기간의 파업을 벌였다. 비록 수많은 육체노동자들이 결과적으로 강제 해고를 당했을지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사무노동자의 파업과 연대하며 시위에 동참했다. 곧 육체노동자들과 사무노동자들의 영원한 동맹이라는 생각이 대중화되었다. 이러한 연대는 극좌파와 개량주의적인 노동조합 관료들에 의해 지지되었으나 그들이 이를 지지했던 이유들은 각각 상이했다. 좌파는 자본주의에 맞서 모든 노동자들이 단결하기를 원했고, 혁명기간에 생산을 장악하는데 있어, 전문기술자들의 협조가 매우 중요한 것으로 봤다. 그들은 초기의 소비에트 공화국의 산업을 부활시키는데 그러한전문가들이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입증되었던 러시아의 사례를 참조했다. 그러나 노동조합 관료들은 이러한 연대를 현 체제의 생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자본과 노동 간에 조화로운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일보라고 여겼다.

수많은 사람들이 두 접근법의 차이를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작업장을 통제하려고 노력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은 비록 그것이 혁명 이전에 성취되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산업에서의 기술적 협조라는 전망에 유혹되었다. SVA 전투기를 성공적으로 건조해냈던 공장인 Aeronautics Ansoldo의 노동자들이 그러한 흐름의 실례였다. 평화는 전투기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점을 의미했기 때문에 기업가들은 공장 문을 닫기로 계획했다.

 

그래서 평화 시기 우리의 일차적인 요구는 …… 지속적으로 회사가 여러 승객이 이용할 수 있는 민간 항공기를 기안함으로써 …… 노동자들의 직장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결국 Aeronautics Ansoldo는 민간인과 여행객을 위한 4인승 항공기를 최초로 개발하게 되었다.

 

이러한 유형의 선동은 애매한 것이었다. 노동자 통제에 대한 추진력은 노동자 권력으로도 또는 자본가들의 문제해결에 연루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생산과정을 그 계급적 맥락으로부터(달리 말해 그것을 누가 소유하고 또 그것을 통해 이윤을 얻는 자들이 누구인가의 문제와) 분리시켜 파악하려는 경향은 이 시기 튜린의 특수한 조건들로부터 나왔다. 수많은 금속노동자들은 원시적인 매뉴펙쳐와 농업에 둘러싸여 있는 상황에서 자신들이 근무하는 금속산업의 선진성에 대해 자긍심을 가졌다. 소수 자동차 업종 노동자들은 높은 보수를 받았고 실질적인 전문 기술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 노동이 위치하고 있는 사회적 특징은 그들로 하여금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들은 전체 노동계급의 전위로서 활동할 수도 있었고, 또는 노조관료들처럼자본가들이 살이 찌든 삐쩍 마르든 상관없이’,‘자신들의 산업발전에만 관심을 가지는, 차별화된 집단들로 자신을 볼 수도 있었다. 튜린에서는 숙련공 분파주의의 기반이 글래스고우보다는 미약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련 노동자들에게 주어졌던 선택지들 -- 특권적 노동귀족이 되느냐 아니면 폭넓은 계급 투쟁의 전위로서 활동하느냐 하는 선택지들 -- 은 두 도시 모두에서 존재했다.

다른 지역들처럼 튜린에서도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비록 그 수는 적었지만 이러한 선택의 문제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튜린의 전투적 경향성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독립적 현장조직을 향한 장구한 길을 추구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 전투성은 아직까지는 공장들 내에서 단지 임금 및 노동조건의 개선을 목표로 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Ordine Nouvo(신질서)라는 격주간 발행 잡지는 이러한 상황에 개입해 들어갔다. 이 잡지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더욱 보편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를 원했고 노동자들의 투쟁을 계급 해방으로 이끌고자 했다. Ordine Nouvo(신질서)는 안토니오 그람시, 안젤로 타스카, 움베르토 테라치니 그리고 팔메로 톨리아티 같은 튜린의 젊은 사회주의적 지식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호 간행물에서는 편집자들의 목적이 다음과 같았다. ‘해결되어야 할 주요한 문제는 혁명을 창출하고 시작하는 방법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는가이다.’ 2호 간행물에서는 산업 현장을 토대로 하여 새로운 유형의 노동자 국가를 구성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621노동자 민주주의라는 제목으로 발간되었던 논문에서 그람시와 톨리아티는 이 주제를 더욱 발전시켰다.

 

어떻게 전쟁에 의해 해방되었던 이 거대한 사회적 힘들이 조직화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그 힘들이 규율잡혀져서 점차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구체화될 사회주의 국가로 발전할 가능성을 가진 정치적 형태를 가질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현재를 미래와 결합시켜서, 현재의 긴급한 요구들을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미래를 효과적으로 창출해내고 예측할수 있겠는가?

 

위의 글에서는 일정한 문제점들이 있었다. 그 문제점은 혁명의 현실적 과정을 손쉬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단순한 기술적 문제로 처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의 경험은 이와 같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은 단순한점차 발전할 가능성을 가진 하나의 형태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줬다. 1917년의 이중권력의 위기상황은 좌파의 공격적 혁명을 통해서 긍극적으로 해결되어야 했었다. 소비에트의 권력은 자본주의적 지배와의 극적인 충돌들 속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었고 결국 소비에트의 독자적 지배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국가를 급격히 파괴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노동자 민주주의라는 글에서의 몇몇 오류들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현재를 미래에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제기하고 있다는 점을 볼때, 그람시는 보르디가의 근본주의적(ultimatist) 구호들보다는 더 멀리 나아가 있었다. 이는 해결책을 찾기 위한 중요한 일보전진이였다. 같은 글에서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는 이미 …… 착취당하는 노동계급의 사회적 삶의 제도들 속에, 즉 내부위원회를 가지고 있는 작업장들, 사교 클럽들, 농민 공동체들에 …… 잠재적으로 존재한다. …… 오늘날 내부위원회는 공장 내의 자본가들의 권력을 제한한다. …… 앞으로는 발전하고 풍부해지면서 그것들은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기관들이 되어야 한다. …….

노동자들은 즉시작업장의 모든 권력을 작업장위원회로’, 나아가 모든 국가권력을 노동자, 농민 평의회로라는 슬로건들 하에 그들의 가장 의식적인 동지들 중에서 대표자들을 선출하여 광범위한 대표자 집단들을 구성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글은 튜린 노동자평의회 운동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이 글의 단상들은 허공 속으로 사라져가지 않았다. 이글의 단상들은 (내전으로 인해 걸러진 제한된) 러시아 소비에트에 대한 정보, 헝가리와 독일, 영국의 사례(그람시는 당시 영국의 혁명가인 실비아 판크허스트와 접촉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타 지역 노동계급의 성취들에 대한 정보들을 종합한 것이었다. 오늘날의 유로코뮤니스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람시의 장점은 그가 보여준거대한지식량이나 학문적 해석들과 재해석들을 위한 풍부한 지반을 제공해주는 글들의 복잡함에 있지 않았다. 그의 장점은 노동계급의 투쟁으로부터 듣고 배우는 능력에 있다. 톨리아티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의 목표 및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 계급 형성을 향해 펼쳐진 방법을 찾기 위하여 노동자과 공동으로 협력하며, 정책, 지향 또는 슬로건의 정확성을 따져보기 위해서, 노동자에게 자만심이나 생색을 내지 않으며, 마치 동료나 친구처럼 대하면서 노동자들과 이야기하는 것, 우리들 중 극소수만이, 어쩌면 오로지 그람시만이 이러한 방법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이 방법에 대한 그람시 자신의 설명을 인용하는 것은 가치가 있을 것이다.

 

만약 지도성이 실제로 검증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노동자들의 의견이 여러 경로들을 통해 경청되지 않는다면 그 어떠한 지도성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도성들은 항상 대중에 의해 광범위하게 느껴지는 요구를 제대로 해석함으로만이 즉각적이면서도 폭넓은 성공을 이루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결코 지식을 도식적으로 현실에 적용하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이러한 접근법은 어떤 노동자들도 바꿀 수 없는, 필연적인 역사의 진보라는 예언을 중심으로 한 포프 카우츠키(Pope Kautsky)의 설교방식과는 사뭇 달랐다. 하지만 이 또한 양날의(double edged) 칼이라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람시는 튜린의 경험을 앞으로의 약진을 위한 도약판으로, 즉 이탈리아의 모든 노동자들에 대한 정치적 지도력을 위한 지침으로 이용했다. 동시에 그는 지역에 국한된 노동운동을 자기만족적인, 그래서 결국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는 문제도 인식했다. 후자의 경우는 노동자주의라고 하는데, 이는 투쟁의 일반적 성격 및 폭넚은 교훈을 희생시키며 대신 특정 노동자 집단의 투쟁을 미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오디누보주의자들(ordinovisti) -- Ordine Nuovo(신질서) 지지자들의 명칭 -- 의 역사는 1920년대 중반까지 튜린 노동자들을 쫓아가는 노동자주의와 튜린 노동자들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혁명적 지도력이라는 두 가지 대안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혼란을 보여 왔다. 처음에 이러한 선택지간의 갈등은 몇몇 현상적인 성공들에 의해 드러나지 못했었다.

 

공장평의회

 

19198월 들어 공장 평의회운동은노동자 민주주의라는 글에 의해 고무되어 그 생명력을 확대시켰다. 그람시에 의해 주장된, 사회주의의 궁극적인 목표를 노동현장조직과 동일시했던 발상은 폭발력이 있었다. 수년동안 튜린의 전투적 활동가들은 두 개의 분리된 수준에서 활동했다. 정치적 수준에서 그들은 -- 어떠한 부분 투쟁들에서도 정치적으로 협조할 것을 거부함으로써 -- 비타협주의나 아나키즘에 무장하여, 개량주의와의 타락한 타협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냈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현장 활동가였으며 주로 내부위원회를 통해 현장 민주주의의 이념을 발전시켜 왔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두 가지 역할(정치적 전위와 현장 활동가) 사이의 연계성을 분명하게 하지 못했다. Ordine Nuovo는 현장 통제를 위한 투쟁과 노동자 권력을 위한 투쟁을 결합시킴으로써 이론적으로 투쟁의 정치적 차원과 경제적 차원을 연계시켰다.

만약 내부위원회가 진정한 대중조직이 되고 동시에 미래 사회주의 국가의 기본적 토대로서 기능할 수 있다면 운동의 궁극적 목적은 결코 원칙을 희생시키지 않고서도 즉각적인 투쟁행동과 연계될 수 있었다. 오디누보주의자들(ordinovisti)은 공장평의회 운동의 자생적 경향에 이론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럼으로써 사회주의 전략의 위대한 전진에 그것들을 통합시켰다. 비록 자유주의자들이 조직의 중앙집중화에 대한 반감을 나타내고 보르디가주의자들의 경우는 계속해서 의회 선거 거부를 중요한 쟁점으로 강조햇을지라도, 전시에 임시위원회에 속해있던 전투적인 현장 활동가들은 열정적으로 이 새로운 노선에 매진했다.

한 가지 심각한 문제점은 해결되어야만 했다. 전쟁에서도 유지되었던 내부위원회는 소수에 의해 -- 즉 소수의 노동조합원들에 의해서만 선택되었다. 실질적인 현장노동자들의 기구가 되기 위해서, 내부위원회는 재구축되어야 했다. 8월을 거치면서 Ordine Nuovo의 지면들은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을 본격화하였다. 두 개의 혁신적인 의견이 제기되었을 때 돌파구는 마련되었다. 그 첫째 의견은 위원회의 위원들은 과거처럼 공장의 대중 회합들에서보다는 개별 작업장들에서 선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현장노동자들의 직접적인 통제를 엄청나게 확대시켜 줄 것이었다. 두 번째 의견은 (비록 노동조합원들만이 조직적 경험을 가지고 있어서 적합한 후보로 간주되었지만) 모든 노동자들이 투표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새로운 민주주의는 공장의 노동자 대중에 기반하게 될 것이었다. 이러한 제안들은 초기의 내부위원회 정신을 부활시켰다. 하지만 새로운 기구의 이름이 될 공장평의회는 더욱 야심적인 목표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Ordine Nuovo의 계획안이 내걸었던 첫 번째 시도(indication)가 피에트 센터에서 관철되었다. 그러나 이제 노동자들은 작업현장 선거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지만 노동조합원들에게만 투표권을 주었다. 하지만 2,000여명의 노동자들이 있던 피아트 브레베티(Fiat Brevetti)공장의 두 번째 시도에서는 다음과 같은 계획에 따라 831일에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1. 최근의 계급투쟁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숙련공조직들(노동조합들)과 다른, 그와 나란히 위치한 공장조직을 설립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2. 이러한 요구는 이탈리아에서 공장 내의 내부위원회 성장을 촉진했다. 현재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어떻게 하면 내부위원회가 더욱 유연하면서도 분명해 질수 있는가, 어떻게 내부위원회가 의사소통 통로를 제공하여 위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과업을 설명하고 나아가 위원회의 조직구조가 산업생산과정에 부응하도록 할 것인가?.

4.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위원들은 각각의 개별 작업장에서 선출되어야만 하며 다음 사항을 확실히 해야 한다. …… 위원들은 그 작업장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유능한 노동자이며 개인적으로도 유권자들에게 널리 알려져야 하며 요구들이 제기되었을 때 충분한 신뢰와 권위를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5. 각 작업현장의 위원들은 작업장에서의 분쟁(disputes)을 해결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해당 공장의 중앙집중적인 노동자기구가 될 집행위원회(Executive Committee)를 구성하기 위해 결집될 것이다.

 

위의 결의안은 Ordine Nuovo에 의해 마련된 공식적 기준에 상응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사회주의 국가의 토대가 될 공장평의회의 형성에는 아직도 요원한 것이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피아트 브레베티(Fiat Brevetti) 노동자들은 노동조합들보다도 노동자들의 의견을 더욱 반영하는 현장조직을 설립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그람시는 당시 운동의 장점과 동시에 한계를 인식하여 현장조직을 발판으로 하여 전 계급적인 노동자 평의회로 일보를 내딪어야 함을 주장할지, 아니면 현장조직 자체가 충분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를 선택해야 했다. 그는 후자의 길을 선택했다.

1919년 여름의 선구적인 글인노동자 민주주의에서 그와 톨리아티는 노동자 국가를 구성하는 차별적인 요소들을 파악했다. 그들은 공장에서 통제력을 쟁취하기 위한 작업장 조직과 더욱 높은 수준에서 국가권력으로서 작동할노동자들과 농민들의 평의회를 구분했다. 1919년 후반에 들어 그람시의 글들에서는 이러한 두 가지 형태들 사이의 중요한 구분이 흐려지고 있었다. 이전에 공장평의회를 더욱 광범위한 소비에트로 가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보았던 것과는 달리 이제 그는 공장평의회를 현존하는 사회주의 국가로 묘사했다. 이때부터 그람시에 의하면, 대안적 국가권력을 설립할 수 있는 힘은 노동계급의 무장된 힘, 즉 레닌이 이야기했던 강고한무장된 사람들의 기관들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 통제의계몽적 능력(illuminating light)'으로 보기 시작했다. 당시에 그는 혁명이 권력의 물리적 장악으로서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노력으로서, 그 자체로서 충분한 것으로 봤다. 이러한 생각의 변화에 따라, 대안적 국가권력의 설립은 노동계급의 무장된 힘보다는 작업장에서 발생되는 일을 통제할 수 있는 경험들에 기반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노동계급은 이제 일들을 스스로 처리하며 그 일들을 잘 처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다. 실제로 노동계급은 나날이 더욱 명확하게 자신들만이 전 세계를 파멸과 황폐화로부터 구해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획득해가고 있다. 따라서 [현장조직 위원들]이 수행하는 모든 행동들, [그들의] 지도력 하에서 수행되는 모든 투쟁들은 당신들 모두의 마음 속과 의지 속에 존재하는 궁극적인 목표에 의해 환하게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노동자 통제도 중요했지만 그것이 자본주의 국가의 물리적 해체에 의해 보충되어야만 할 필요가 있었다.‘노동자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에 있어 또 다른 고려사항은 혁명과정에 있어서 당에게 부여했던 역할이었다. 6월에 그람시는 공장평의회를 당으로 하여금 중점적으로 선전을 전개해야할 곳으로 보았다. 그는 이탈리아 사회당이신념의 용광로이며 교리의 보고이자 조직화되고 규율잡힌 노동계급과 농민들의 힘들을 조화시키고 그들을 궁극적 목표로 향하도록 지도하는 최고 권력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9월 들어 이와 같은 당의 중심적 역할에 대한 강조는 사라지고 대중민주주의 선진노동자에 대한 지도역할을 공장평의회에 부여하게 된다.

공장평의회는 실제로 엄청난 전진을 했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튜린 노동운동의 역동성을 조직체계로 담을 수 있는 틀을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전투적인 선진활동가와 그람시는 고립상태에서도 노동자 통제를 확보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경영자들의 권위에 대한 대중적 증오가 사회주의적 이념들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누가 공장들을 소유하고 있는지, 어떻게 그 소유권이 유지되고 있는지를 무시하고 현장조직 그 자체로만 충분한 것으로 보는 것은 자칫 위험스러운 속임수가 될 수 있었고 나아가 다음과 같은 그람시의 기묘한 주장으로 이끌게 되었다.

 

노동 대중들이 완전한 자주적 통치체계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수단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한 첫 단추는 작업장에서 스스로 규율을 잡는 것으로부터 이루어 진다. …… 새로운 체계와 더불어 정착된 자기규율은 필연적으로 생산과정의 개선과 진전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 그러므로 위의 방법이 우리의 적인, 공장 소유자들에게 협조하는 것이라며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반대로 위의 방법을 통해 공장소유자로 하여금 이제는 그들의 지배가 끝났음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응답할 것이다.

 

생산에서의 증가된 산출량이 어떻게 사용자들의 권력을 파괴시킬 수 있는지가 결코 분명치 않다.

전시 동안에 작업장 수준의 부분적 투쟁들은 강력하게 확대되었다. 예를 들어 파업을 통해 획득한 평화는 모든 이탈리아인들에게 명백한 타당성을 가지게 되었다. 생산과 정치는 서로 연결되었다. 하지만 전쟁 상황이 종결되자 이러한 요소들을 자동적으로 연결하고 있던 실이 끊어지게 되었다. 국가는 더 이상 산업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고 국가의 중요성은 소멸한 듯 보였다. 이탈리아 국가 장치의 역사적인 유약함은 정치권력이 오로지 경제적 힘을 위해 기능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확신을 더해줬다.

노동자 통제 문제를 둘러싼 불명료한 이데올로기는 위의 현실인식에 더욱 더 영향을 미쳤다. 노동자 자주관리는 다음과 같은 기초적인 사회적 사실들과 분리된 채 강조되었다: 우선 생산수단은 자본가들에 의해 소유하고 있다는 점, 두 번째로는 튜린의 고임금은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자본주의 체계에서 당시 시장상황에 의해 우연히 발생된 것이지, 기술발전만의 내재적인 효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 셋째로 자본주의 체제를 위한 생산과정은 궁극적으로 국가의 무장된 힘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는 점.

다른 시기에 존재했던 현장 조직들과는 반대로 혁명적 노동자 평의회는 정치와 경제를 융합시킨 것이 되어야 했다. 산업에서의 노동자 권력은 부르주아 국가를 전복하도록 지도되어야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록 튜린의 공장평의회들은 결코 러시아나 독일의 노동자평의회의 수준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이탈리아 공장평의회는 현장노동자들의 지지를 토대로 구성됬다는 점에서는 서로 유사했다. 조직화된 선진노동자와 비조직화된 채 단결하지 못하고 있는 노동대중들과 결합시키고 이를 자본주의 체제의 반대라는 이슈로 조직함으로서, 평의회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에너지를 연결시킬 수 있었다. 이탈리아 평의회 운동은 숙련노동자 조직보다는 노동대중들 속에서 탄생했다는 점에서 영국 클라이드 평의회 운동보다는 훨씬 나아간 것이었다. 단기간 내에 광범위하고 응집력 있는 운동이 창조되었다. 19199월과 12월 사이에 공장평의회는 들불처럼 튜린 전지역을 휩쓸었다. 예를 들면 1017일에는 세 개의 주요한 공장들 -- 스파(Spa), 듀보스치(Dubosc) 그리고 앤살도 지오르지오(Ansaldo S Giorgio) -- 마저도 이 새로운 체계를 도입했다.

하지만 내부에 존재했던 일종의 타협적 속성(negotiations)인해 평의회는 그 한계들을 보여줬다. 피아트의 자본가가 생산량을 미국의 수준에 필적할만큼 올려야 한다고 요구했을 때 노동조합 관료들은 조합원들에게사회주의자들은 노동강도 강화에는 반대할 수 없으며 오로지 이로 인한 근로조건의 좋지 않은 결과만을 거부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현장 노동자 대중들은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 분노하며 거부했기 때문에 이 사건은 공장평의회가 실천 속에서 검증될 기회로 나타났다. 일련의 대중 회합들에서 노동강도 강화 조치들이 비판되었는데, 이는 단지 공장평의회 운동의 두 명의 지도자들 -- 보에로(Boero)와 가리노(Garino)-- 의 개입에 의해서만 잠잠해질 수 있었다. 노동자 권력이 궁극적으로 노동 계급의 생산능력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생각을 이러한 노동강도 강화의 이슈와 혼합하여 쟁점을 모호하게 만들면서 이들은 자본가들과의 협상이 완료되기 전에 파업들이 폭발하는 것을 막았다. 에피소드와 같은 이 사건에서는 선진노동자에게 까지 널리 퍼진,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 통제와 관련된 혼동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람시는 때 이른 대결을 피하고자 하면서 공장평의회가 노동조합 기구들과 대립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노조의 관료적 구조와 평의회의 비관료적 구조들이 서로 상호보완하는 것으로 봤다. 그는 작업 현장 위원들의 주요한 임무들 중 하나가 노동조합에 의해 타협된 협약들을 노동자들이 따르도록 보장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서 19199월에도 이러한 주장을 반복했다. 그러나 노조 관료들은 평의회의 새로운 특징들로 인해 이를 혐오했다. 왜냐하면 평의회는 지도력 구축에 있어 노동조합 관료제보다는 노동현장에 더욱 주목했고 자신들의 집행력을 비조합원이었던 4분의 3의 근로자들로부터 취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노동자들은 평의회와 노동조합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그람시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1022일에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관료제의 거점을 쓸어버리기로 결의했다. 17개의 공장들에서 선출된 대의원들이노동조합에 새로운 코뮌주의적 정신을 주입한다는 목표를 내걸고 지역 금속노동자연맹 집행부를 장악할 작업 현장 위원들의 후보를 추천하였다. 그들의 지명된 후보들은 공장평의회 운동의 통제 하에 노동조합을 두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전진(breakthrough)이 모든 노자간의 투쟁전선으로 확산되었다. 튜린지역 이탈리아 사회당 지부는 6월에 평의회의 이념을 다시 내걸었지만 10월에는 그 운동은 사실상 포기되었다. 한달 동안에 Ordine Nuovo의 판매량은 3,500부에서 5,000부로 상승했다. 공장평의회는 튜린의 산업 즉 금속 산업에서부터 섬유 및 고무 산업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뿌리를 내렸고 심지어 밀란(Milan)의 사무실들과 로마(Rome)의 가스공장에서도 공장평의회 건설이 제기되었다. 여전히 계속해서 이 운동은 전진하고 있던 것이다.

튜린에서 공식적 노동조직의 마지막 보루는 직장평의회(trade council)의 등가물인 그 유명한 카메라 델 라보로(Camera del Lavoro)(노동회의소)였다. 10월 중순에 카메라 델 라보로는 무질서를 두려워하여 반민족주의적 시위들을 금지한다는 결정을 내렸는데, 이에 대해 현장 노동자들로부터 심상치 않은 저항의 기운(bloody nose)을 감지했다. 그 해 말에 카메라 델 라보로의 관료들은 평의회로부터의 도전대한 방어에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열을 올렸다. 이탈리아 사회당과 노동조합의 민족주의적 지도자들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카메라(Camora)에서 열린 노동조합 대표자 총회의(general meeting)는 평의회 운동에 대한 지원을 26,000에서 38,000으로 높이겠다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튜린에서는 어떤 것도 평의회와 평의회-이에는 오디누보주의자들(ordinovisti), 이탈리아 공산당의 비타협주의자들 그리고 아나코 생디칼리스트들이 동맹을 맺고 있다-의 지도력에 저항할 수 없었다. 이러한 열기는 1919118일의 작업장 위원들의 프로그램 속에 넘쳐흐르고 있다. 프로그램의 일반적 목적은 다음과 같이 명백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권력의 증대를 뒷받침해주는 개념들에 대한 표현이라고 의미지울 수 있다. …… 그 목적은 …… 이탈리아에 공산주의 사회를 성취하는 실제적 실험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이어서 원칙에 대한 선언(Declaration of Principles)은 다음과 같았다.

 

공장 대의원들은 보통 선거에 기반해 자신들의 작업장에 있는 모든 노동자들에 의해 선출되므로서,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유일한 사회적(경제적 및 정치적) 대변자들이다. 다양한 수준에서의 대표체계를 통해 선출된 대의원들은 모든 노동자들의 단결을 구체화한다. 이러한 단결은 다양한 각종 평의회들과 평의회간의 체계 속에 체화된 권위와 사회적 지도력을 가진 생산기관들(공장 근로자, 작업장, 공장, 해당 산업 내의 공장들간 연합체, 한 도시 내의 기업들의 연합체, 한 구역, 지방, 지역, 국가, 세계의 금속산업(mechanical) 및 농업 생산기관들의 연합체) 속에서 실현된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 속에 구체화되어 있는 실질적 효과들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것들은 (비록 해당 부문의 다수에 의한 즉각 소환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6개월에 한번씩 부분별로 위원들을 선출하기로 규정했다. 투표는 근무 시간에 비밀투표로 이루어져야 했고 선거가 있은 후 이틀간의 평의회 회합 등등이 이루어져야 했다. 위원들은 노동조합의 지역 집행 위원회를 선출해야 했다. 지역 노동조합들에 의해 협상된 타협안들은 관련 대의원 회의에 의해 승인을 받아야 했다. 각 공장들에서 위원들은 모든 현장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자주적 교육(self-education)을 위한노동자들의 학교들을 조직하게 되어 있다. 더불어 이러한 현장 대의원들은 (내부위원회와 같은 기존의 시스템을 대신하여) 집행부(Executive Commissariat)를 선출하게 된다. 이 프로그램에 따르면 집행부는공장의 상황을 평가하기 위해매일 저녁 회의를 가지며 게시물과 관련하여 경영자들과 동등한 권리들을 요구한다. 격주마다 공장 정기보고서를 만들어낼 것이고 작업장 위원들로 이루어진 전체 평의회의 회합들을 주마다 조직한다.

거윈 윌리엄스(Gwyn Williams)프로그램의 핵심적 모순(contradiction)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주의해서 보아야 할 첫 번째 점은 이러한 비범한 선언이 진지하고 단호하게 공산주의적인 어조와 언어를 가지고 있는 반면 그정신으로부터내용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면, 특히 그 프로그램의 세부적인 민주적 절차(constitutional)에 주목하게 되면, 매우 이상한 것(striking)은 이 프로그램의 내용이 선하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실천을 위한 단순히 권고사항이라는 것, 즉 이상적인 현장위원의 모범적인 전기와 같다는 점이다.

 

프로그램이 공언한 목표들과 그것을 실현시킬 방안들 사이에 간극이 벌어진 것은 그 저변에 깔린 현실적(real) 문제를 반영하고 있었다. 평의회 조직을 향한 거대한 열정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튜린에서 기존 정치적 세력의 저항과 노동조합의 반대는 돌파할 수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평의회 위원들이 현장노동자들을 위해 작업장 생활의 면면들을 통제할 수 있는 구체적인(tangible) 감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작업장에서 위원들의 정확한 활동들이 세세히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급속하게 변화하는 튜린 선진 공장의 조건 속에서 그들은 노동자의 불만을 자아내는 작업장 일상, 경영자들의 독단들에 대한 도전들, 타협안에 대한 해석 등등 속에 활동하였다.

하지만 이 정도의 활동으로는 아직 국가에 대한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국가의법과 질서라는 공권력이 공장평의회가 그 국가에 대해 물리적으로 공격할 수도 있으리라는 점을 인식하기까지는 수개월이 걸렸다. 이와 유사하게 공장 소유자들은 당시 공장평의회라는 새로운 제도에 대항해 어떠한 일치된 행동도 취하지 않았고 대립을 일으키기보다는 생산의 완전가동을 유지시키는 것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상황은 가까운 미래에 바뀌었지만 1919년 말 당시에 공장평의회 운동과 제도를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자들은 이탈리아 금속노동자연맹과 이탈리아 사회당의 관료들이었다. 1919년의 마지막 달에 그들의 언쟁을 통한 공격(verbal artillery)는 엄청난 효과를 가져왔다. 이탈리아 금속노동자연맹의 관료들은 튜린 외부의 노동자들로 하여금 공장평의회 위원에 의해 퍼지고 있는그럴듯한 환상을 주의하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물론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조합원 대중들과 밀접해야 한다 …… 우리는 조합원 대중들이 조직 생활 속에 포괄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사기꾼들[평의회 위원들을 선출한 다수의 비조합원들]로 하여금 어째서 노동조합의 정책에 대해 간섭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세라티(Serrati)는 사회당을 대표하여 당시의 논쟁에 개입했다. 그는 또한 심지어조직적인 노동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에게 발언권을 주는 것에 반대했다. 의도적인 분열작업이 작동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Ordine Nuovo에 대항하는 중도파들의 잡지인 Il Comunismo는 세라티의 편집권 하에 발행되었다. 그것은 소비에트 정치조직체의 모델들에 대한 논의로 가득 찼다. 주도적인 당원이었던 제나리(Gennari)공산주의 소비에트(Communal Soviet)'를 위한 계획을 주장했던 반면 이탈리아 사회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성원으로서, 좀더 급진적이었던 봄바치(Bombacci)국가 소비에트(National Soviet)’라는 더욱 야심적인 계획들을 제안했다. 심지어 노동조합들도 그들 자신의 공장 내 체계를 통해 동참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청사진들은 일견 매우 급진적인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그것들 모두는 한 가지 근본적인 오류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소비에트가 현장 노동자 조직들과는 별도로 위로부터 아래로 설립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결국 이들 논의에서 정치와 경제는 엄격하게 분리되었다. 이탈리아 사회당이 주장한소비에트는 권력 장악과 같은 민감한정치적인문제들에 대해 우려했던 반면 노동조합들은 경제적 문제들에 주요관심이 있는, 공장에 기반한 조직들을 받아들였다. 이는 베를린에서 사용되었던 개량적 전술들의 반복이었다.

191910월 이탈리아 사회당의 볼로냐 의회에서 당 지도부는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자신들의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현실로 만들고자 했던 튜린의 외로운 실험에 대하여, 사회당이 반대했다는 사실은 중도주의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놀라운 것으로 보였다. 볼로냐 의회의고성과 분노(sound and fury)'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사회당은 개량과 혁명이라는 양극들 중간에 자리 잡았다. 만약 그 효과들이 그렇게 비극적인 것이 아니었더라면 세라티의 입장은 쓴 웃음을 자아내는(hilarious) 것이었다. 다음은 이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인용문이다.

 

우리는 아나키스트적인[혁명적인] 전망이나 혹은 심지어 개량주의적 전망에도 존재하는 자발주의(voluntarism)를 거부한다. 첫째는 폭력을 수단으로 세상을 재창조하는 임무를 인간에게 부여한다는 점 …… 둘째는 개개인들에게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동등하게 부여한다는 점. …… 이러한 것들은 모두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 우리 맑스주의자들은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지, 우리가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의 실천적 의미는 191911월에 드러났다. 이때 사회당은 과거 여름 배고픔으로 인한 폭동(hunger riot)때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었던, 적극적 열의를 가지고 일반선거(general election)에 참여했다. 빨레모(Palermo) 신문인 Proletarian Dictatorship(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선거운동에 대한 중도주의자들의 환상에 매몰되어 있었다. 선거 이전의(preelection) 발행물에서 다음과 같은 이슈을 볼 수 있었다.‘보통 선거권 하에서의 선거들은 혁명적 의지 에 대한 실험이다.’ 비록 이탈리아 사회당이 156석을 확보하게 되어 의회 내에서 가장 거대한 단일 정당이 되었을 지라도 이는 지배자들의 연합을 패배시키고 당이 정부를 장악할 만큼은 충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신문은 선거 결과를 혁명의 승리!’라고 나팔을 불어댔다. 이 우스운 희극의 분위기는 1919년의 많은 공식적 노동운동 에 지배적이었을 지라도 이탈리아 사회당과 노동조합의 역공은 평의회 조직을 튜린이라는 핵심지역을 넘어 타지역으로 까지 확장시키는 것을 멈추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다고 할지라도 결코 튜린의 외부지역이 고요한 것만은 아니었다. 19202월에 리그리아(Liguria) 지역의 아나코 생디칼리스트 금속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작업장을 장악하고 공장을 노동자들의 관리 하에 둘 것을 선언했다. 4일 후 이들을 쫒아내기 위해 군대가 동원되었다. 곧 이러한 선례는 마조니(Mazzoni)지역의 면화 공장 노동자들로 이어졌다. 그들은 독자적으로 생산을 지속했으나 결국 섬유 노동조합 관료들에 의해 타협된 공장 점거 철회안을 받아들였다. 다음과 같은 Ordine Nuovo의 보고서는 그 저널이 지닌 노동자 통제에 대한 묘한 태도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사장 없이도 고도의 생산 수준을 성취했던 노동자 생산관리(work-in)는 우리로 하여금 능률적인 노동규율과 산출량의 극대화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자주관리 실험이었다고 결론짓도록 한다.

 

붉은 2월 동안 이탈리아에서 불타올랐던 전투성과 임금 및 노동조건 향상을 위한 일반적 투쟁들에도 불구하고 튜린에서의 평의회 운동은 곧 수세에 놓이게 되었다. 외부지역에서 혁명적 이념을 광범위하게 지지하려했던 증후들은 있었지만, 튜린 공장 평의회 운동의 고립상황은 1920년까지 지속되었다. 이후 노동자 통제에 대한 이슈는 독립적인 현장 조직 자체에 대한 위협이라는 그늘에 가려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이듬해 봄에 튜린의 공장 평의회는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싸우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10. 재평가와 대결

 

191912월 말 튜린의 작업장 위원들은 만약 평의회 운동이 혁명적 의식으로 무장되지 않는다면우리는 새로운 제도를, 실질적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제도를 창조하지 못하고 단지 프로그램, 개인들 그리고 절차에 대한 성과없는 변화만을 만들어낼 것이다라고 썼다. 이들이 지적한 위험은 사실이었다. 여름 이후 혁명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었던 오디누보주의자들(Ordinouisti)은 자신들의 역할을 포기했는데, 이들은 평의회가 제도개선 그 자체로도 노동자들을 위한 승리를 보장하기에 충분하다고 믿었다.

그람시는공장 평의회는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모델이라고 말했다. 그의 주장을 검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장 평의회의 실천이어야 했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조직할 수 있는 평의회의 능력 때문에 이에 대한 지지는 그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평의회의 지시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기꺼이 행동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상태를 유지했던 점을 볼 때, 이에 대한 지지는 분명했다. 오디누보주의자들(ordinouisti)은 그 광범위한 지지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5분 안에 피아트(FIAT) 42개의 부서들에 흩어져 있는 16,000명의 노동자들이 작업도구를 놓게 할 수 있다. 1919123일에 공장평의회는 대중운동을 광범위한 규모로 지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능력을 보여 주었다. …… 어떠한 준비 없이도 공장평의회는 공장마다에 지령을 내려 단지 1시간 만에 120,000명의 노동자들을 동원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된 파업은 하루 동안의 투쟁행동이었는데, 이는 로마에 사회주의적 성향의 국회의원에 대한 민족주의자들의 폭력들(assaults)에 대응하기 위해 발생하였다. 민족주의자들의 폭력들은 노동계급에 대한 반격이 시작됬다는 최초 신호였는데, 이후 4년 동안의 파시스트 지배 속에서 극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 정부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자인 프란세스코 니티(Francesco Nitti)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고 그에 의해 사회개혁적 정책(의무적인 실험/의료/노후보장보험, 보편적인 선거권, 8시간근로제의 촉진)이 실행되었으며 또한 통제의 일반적 방법으로 군대보다는 경찰을 사용했는데, 당시 이러한 방식이 지배계급에게는 안전한 정책으로 보였다.

러시아에서와는 달리 이탈리아 국가는 전쟁의 압박 하에서 붕괴되지 않았고 전후 사회적 갈등을 견뎌내는 듯했다.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는 이탈리아의 군대는 전승국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안정성은 보증받지 못했다. 극우파 장교들이 다눈치오(d'Annunzio)라는 시인에 대해 그리고 그의 견해인 유고슬라비아와의 분쟁 지역 피우메(Fiume)에 대한 소름끼치는 민족주의적 침략선동에 대해 암묵적 공감을 보였을 때, 군대의 상층부는 국가의 지지대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드러냈다. 반면 사병들(rank and file)은 러시아와 독일에서처럼 군사평의회를 선출할 정도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지배계급이 보기에) 1919년 여름의 식량 폭동들을 다루는데 다소 신뢰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 다른 잠재적 위험이 존재했다. 이 위험은 도시의 경우실업에 직면하여 생활자체가 해체되어 있는, 시골의 경우 열악한 농업상태에 있는 수십만의 사람들으로부터 나타났다. 만약 좌파가 이러한 사회집단의 문제에 대해 적절한 해법을 제공할 수 있었다면 이들 사회집단은 노동운동과의 연대 속에서 자신의 힘을 창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회당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반면 군대는 어떤 형태로도 (혁명세력으로서의) 검증과정이 없었기 때문에붉은 2기간동안 성과를 만들어내는데 있어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광범위하게 퍼진 노동계급의 전투성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노동계급이 권력 획득을 위한 결정적인 도전에 실패했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도전이 직면했던 주요한 장애물들은 이탈리아 사회당과 노동조합총연맹(CGL)의 지도력이었다. 비록 그들은 접근 방식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양자 모두 (대중에게) 실질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이탈리아의 혁명을 지도하기를 꺼려했다.

산업노동자들과 농업노동자들의 투쟁들은 조직화되지 못했고 명확한 방향성이 결여되어 아직은 이탈리아의 국가권력을 위협할 수준까지는 되지 못하였지만 여전히 이탈리아 자본주의체제의 안정성에 실질적 위협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강압적 통치 방법(이후에 무솔리니에 의해 사용됨)들은 1919년과 1920년 동안 만큼은 지배계급에게 효과적 대안이 아니었다. 우선 노동계급이 약화되었는데, 이는 개량주의적 지도력으로 인한 수많은 패배들로 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 연구의 범위를 뛰어 넘는다.

1919년에 새롭게 구성된 공장평의회 운동은 당시 전국적 정세에 있어 기회와 위험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자폐적일 정도로(blissfully) 이에 대해 알지 못한 것 같다. 튜린의 123일 파업은 의미있는 저항이었을지라도, 평의회가 공장바깥의 이슈(정치적 이슈)에 대해 수동적으로 대처했던 하나의 사례였다. 19204월 피드몬트(Piedmont) 총파업이 발생되기 이전과 그 이후 전개된 튜린의 군사 점령까지 매우 오랜 기간가 흐르는 동안 평의회 위원들은 단지 산업 자본가들과 함께 새로운 임금체계를 만드는데 전적으로 몰두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자본가와 평의회 위원간의 임금을 둘러싼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바깥에서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공공 서비스 부문의 파업들이 여러 번 발생했다. 19206월 중순 동안에 전신, 전화 그리고 철도가 마비되었지만 이러한 것들은 평의회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튜린에서 연대를 위한 행동은 공장평의회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전히 노조관료들이 장악했던 Camera del Lavoro에 의해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장수준의 쟁점들이 발생했을 경우 평의회의 입지는 더욱 활성화되는 듯했다. 피아트 공장 평의회 위원들은 1인당 하루 평균 3건을 처리하면서 191910월과 19203월 사이에 800여건의 개별 분쟁들을 해결했다. 이러한 사안들은 작업장 생활의 세부적 측면들과 관련된 것이었다. 단지 평의회만이 수많은 복잡한 문제들에 대하여 노동자들의 요구들을 조직할 수 있는 구조(structure)와 권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작업장 위원들의 프로그램에서는 공장평의회가 관여하고 있던 영역에 대해 밝히고 있을 지라도 이러한 소규모 분쟁들의 정확한 성격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다.

 

대의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공장 내부에 관한 것이었다. 자본가들 앞에서 그리고 평의회 안에서 그는 항상 동료들의 감정을 충실한 해석하는 자이어야 했다. …… 근무시간 동안 대의원의 역할은 통제라는 이름으로 요약될 수 있다. 대의원은 다음과 같은 통제를 실시해야 한다.

a) 노사협약안이 충실하게 이행되는 것을 보증하고, 작업장에서 노동자들과 관리자들 사이에서 발생되는 분쟁들을 해결함.

b) 우선 감독자가 고의로, 또는 무능력에 의해 잘못된 작업평가를 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남용하는 경우, 노동과정상 변화가 있는 경우, 시장상황으로 인한 생산의 위기가 발생하는 경우에 노동자들의 이익들과 감정들을 방어함.

c) 경영자 측의 도발이나 노동자 다수의 결정들에 반하는 자들이 좋지않은 행동을 할 경우, 작업장 내에서의 질서를 유지함.

d)()작업장에서 투자/운영되고 있는 자본의 가치, ()비용 대비 작업장에서의 산출량, ()성취 가능한 산출량의 증가 등 정확한 정보를 확보함.

e)자본가들이 공장에 투자된 시설을 제거하지 못하게 함

 

공장평의회 운동이 자본가들의 경영권에 대해 어느정도 도전해 들어갔는지를 양적으로 측정하거나 이로 인해 튜린 노동자의 근로조건이 얼마나 개선되었는지를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평의회가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는 사실은 노동조합 관료 외에도 그 운동의 심각한 위협을 인식했다는 점에서도 나타났다. 19203월 이탈리아 산업자본가들의 동맹체 콘핀투스트리아(confindustria : 노동정책 전국산업가연합)은 노동자 운동과의 임박한 투쟁을 대비하기 위해 재조직화를 단행했다. 그 첫 번째 목표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발생되는 노동자들의 전투적 거점 중에서 선택되었던 튜린의 공장평의회였다.

콘핀투스트리아는 자본가들이 개별적으로 자신의 작업장 노동자들을 패배시키려는 시도가 쓸모없음을 깨달았다. 그뿐만 아니라 자본가들은 기존의 노사관계 방식으로는 해결 불가능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물리력을 필요하다는 점이 공장평의회 위원들에게는 미쳐 인식되고 있지 못하다는 점 또한 알고 있었다. 전투적 노동자들에게 패배한 1년 후에 콘핀투스트리아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는 3월에 있었던 콘핀투스트리아의 회의에서 있었던 한 진술에서 드러난다.

 

활동적인 부르주아지는 (콘핀투스트리아라는 사용자 단체가) 유용한 기능을 할 수 있으며 이 조직을 통해 개별회원의 이탈 현상과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방도를 발견할 수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이때 즈음 공장평의회가 관심을 가겼던 제한된 사항들은 Ordine Nuovo의 페이지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음은활동 중인 공장평의회라는 제목의 13일자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글은 공장평의회의 활동과 더불어 특정사례를 조명하고자 했던 Ordine Nuovo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100명의 노동자가 있는 작업장은 낮은 사기와 생산량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을 받게 되었다. 그 자본가는 낮은 생산성에 대한 근로자들의 책임을 물으며 8시간 노동제와 새로운 임금체계를 비난하였다. 내부위원회는 문제의 근본 원인을 해명하기 위해 개입했다. 내부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몇 주 동안, 당신은 생산라인을 변경하기 위해 준비해왔다. 하지만 이 일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신은 실제로 작업하는 노동자들의 전문기술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 마지막으로 이 사례의 가장 좋지 않은 특징은 당신이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과 개인적인 모략들(intrigues)만을 생각하는 점이다. 이 모든 것들이 노동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린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기술적 진보의 길이 방해받길 원치 않는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일당 8시간 동안 무가치한 짓을 하거나 놀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 아니다. …… 그들은 생산하려고 여기에 왔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힘이 자신들의 생산능력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산출량이 낮았던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이러한 격론의 귀결은 생산과정을 즉각 개선하는 것이었다.

 

공장평의회는 현장 민주주의를 위한 최상의 수단들이었지만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 공장평의회는 무엇을 위해 활동해야 하는가? Ordine Nuovo의 대답은 어떤 측면에서는 완벽히 옳았다.‘계급투쟁은 국가권력 이외에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잡지는 노동계급의 권력으로 이행하는 것을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었다.

 

…… 전체 노동 대중들은 서로 공동 협조해야 한다. 즉 그들은 자신이 생산 및 교환과정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따라서 의식구조를 채택해야 한다. 따라서 평의회의 맥락 내에서 모든 노동자 및 농민들은 재건의 노력 속에서 협력하고 산업을 통제관리하고 독재의 기구들을 설립하기 위해 소집되어야 하다. 권력을 위한 계급투쟁의 현재 형태는 평의회 속에서 구체화된다.

 

혁명에 앞선 산업의 부활이라는 단상은 몇몇 심상치 않았던 반론들에 직면했었다. Ordine Nuovo을 다년간 지지했던 한 사람에게 왜 평의회가 의회보다 더 좋은가에 대하여 질문했을때, 그는 다음처럼 대답했다.

 

선거는 모든 작업장에서 이루어지는데, 이는 생산과정의 흐름에 따라 각 작업장에서 선거를 함으로서 생산을 멈출 필요가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는 부르주아 선거 체제에 대한 평의회의 우월성을 증명해주는데 왜냐하면 생산의 완전한 이익을 위해 에너지를 절약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들은 독자적인 제국들(empires)을 이루는 피아트와 같은 몇몇 거대 기업들이 존재하는 튜린의 특수한 조건들에 의해 고무되었다. 다음은 1920년 초반 이 도시에 대한 Ordine Nuovo의 전망이다.

 

42개의 부서들을 거느리고 있는 피아트 센트로 공장은 약 15,000명으로 이루어진 일단의 노동자들을 결집하고 있다. 피아트 센트로 공장의 15,000명 노동자들은 약 60,000명의 부양가족을 위한 일상적 생계 책임자이다. 거기에는 작은 자본주의 국가에 상응하는 거대 산업적 기구들이 존재한다.

 

한 달 후 그람시도 인정했듯이 작업장 내에서의 권력 장악이 국가 전복을 의미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순전히 착각일 뿐이다. 피아트는 군대의 물리력을 통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영리 기업일 뿐이었기 때문에 평의회는 공장의 통제력을 위한 싸움과정만으로는 이중 권력의 상황까지 가진 않았던 것이다.

튜린 평회의를 둘러싼 혼란은 다른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어떤 국가도 그것에 대한 궁극적 검증은 어느 정도 적대 계급들을 억누를 수 있는가이다. 이러한 억압은 권력의 집중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튜린에서의 평의회 운동은 결코 이를 성취하지 못한 채 공장평의회 수준에 머물렀다. 평의회의 영향력 하에 많은 집중화된 권위기관들이 존재했지만 그 어떤 것도 집합적인 노동자들을 장악하지 못했다. 우선 이탈리아 사회당이 존재했지만 그 힘은 미미했다. 둘째, 격 주간 저널인 Ordine Nuovo가 존재했는데 그 이론적 용맹성에도 불구하고 개입의 수단이 되질 못했다(이 잡지는 큰 규모의 투쟁이 발생될 때마다 발행이 중지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잡지의 편집진들은 투쟁시기에 다른 곳에서 활동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세번째로 공장평의회 연구위원회(Factory Council Study Committee)'는 그 명칭에서도 보이듯이 대부분의 시간을 세부적인 규칙제정에 허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동조합주의자들 사이에서만 그 권위를 가지고 있던 금속노동자연맹 노조가 있었다. 이는 전국을 포괄했을 뿐만 아니라 일정한 정도의 무장력을 갖추고 있었던 러시아나 독일의 노동자평의회와는 비교가 된다.

작업현장으로부터 노동자 권력이 중앙 집중화되는 과정은 오로지 작업장 수준에서의 현안 투쟁을 국가권력 수준에서의 정치적 행동과 융합함으로서만이 가능하다. 이러한 융합은 점차 왜소해지는 튜린 평의회를 향해 간곡히 권고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는 투쟁과정에서 명확한 전략적 요구를 함으로서 가능했다(당시 가능한 전략적 요구로는 식량과 시간이 있었다. 그 둘은 광범위한 계급적 쟁점들이었다). 이러한 요구들은 상이한 투쟁의 흐름을 하나로 단결시킬 수 있고 군대를 분열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군대의 응집된 물리력은 당시 도전받지 않은 채 현존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보증자로서 남아 있었다.

당시 튜린 평의회는 단지 부분적 투쟁만을 수행할 수 있었다. 50년 전에 맑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노동계급이 지배계급들에 맞서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되고 투쟁을 통해 지배계급을 강제하려는 모든 운동은 정치운동이다. 예를 들어 특정 공장에서 노동조합이 파업을 통해 개별 자본가들에게 노동시간 단축을 강제하는 것은 순전히 경제운동이다. 반면 8시간 노동법을 강제하는 운동은 정치운동이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공장평의회들은 결코 정치적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공장평의회들은 지리적으로, 산업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불가피한 사실은 계속해서 이탈리아 국가에 대한 목적의식적인 도전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무리 공장에서의 현장 민주주의를 강화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정치적 투쟁)는 극복되지는 못했다.

튜린 평의회는 조직화된 전투적 선진부위와 노동대중들의 쉼 없는 역동성을 결합시킴으로써 노동운동에 폭풍을 몰고 왔다. 이는 결코 하찮은 성과가 아니었다. 하지만 정치적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평의회가 노동계급 전체의 직접적인 이슈를 중심으로 조직화했어야 했다. 평의회 위원들이 이러한 발전을 두려워했던 것은 아니었다. 19197월과 19203월 사이에 평의회들은 다시 이탈리아 평의회 전국회의를 소집했다. 이러한 회합을 가진다는 것은 현장 조직과 계급의식이 서로 만나면서 전국에 걸친 사회주의적 생산 단위간의 연대운동으로 확산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튜린 외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왜 공장평의회들은 Ordine Nuovo에 의해 설정되었던 목표들에 다다르지 못했었을까? 그람시는 현장 조직은 노동자 권력의자연적형태라고 믿었다(이때 현장조직은 정치적 입장 및 노동조합 가입여부와는 관계없이 민주적으로 생산 단위들에 따라 모든 노동자들을 포함했다). 동시에 그는 혁명정당의 역할을 단지 하나의 혁신파(ginger group), 즉 활동을 고무시키지만 적극적 지도력으로부터는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것으로 봤다.

튜린의 경험에 의하면, 공장 평의회의자연적인형태는 실질적으로 생산영역에서의 관계들(부서, 작업장, 공장 등등)을 반영해주었다. 그러나 공장평의회가 지역적, 금속 산업적 토대를 넘어서 확산되지 못한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노동자들을 단결시키는 만큼이나 노동자들을 어떻게 서로 분리시키는지를 보여줬다. 그람시는 노동자들이그들이 생산과 교환 과정 속에서 점유하고 있는 위치에 따라 의식구조를 채택할 것을제안했다. 하지만 이는 단지 금속노동자와 광부들이 분리되어 있고, 금속 노동자는 섬유 노동자들과 분리되어 있는 등등의 계급 종속 조건들을 재생산했을 뿐이었다.

물론 자본주의에 의해 창출된 대규모 공장에 의해 노동자간의 결합이 극대화된 것은 (객관적인 측면에서) 전체 계급과 연관된 조직화를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대중적 개량주의 하에서 이 다음 단계는 의식적으로 준비되어야 했다. 그람시가 종종 주장했듯이 권력 획득을 위한 대중 투쟁에 있어, 그 어떤정상적이거나 자연적인모델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정상적 형태에 대한 부정이다. 혁명 전략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단지 공장 평의회들에만 의존할 수 없으며 스스로 상이한 산업들과 지역의 노동자들에 대하여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튜린 평의회 운동의 유약함은 191912월과 19201월에 대한 중앙파와 개량주의자들의 반격들에 의해 여실히 드러났다. 평의회는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튜린에서 조차도 혁명적 자부심을 유지시키지 못했다. 새로운 방향성이 필요하다는 점은 명백했다.

오디누보주의자들(ordinovisti) 사이의 격렬한 논쟁은 사회주의 이론에서의 중요한 진전을 이끌었다. 두 개의 중요한 문건이 과거의 혼동을 바로 잡기 위하여 새로운 방향전환의 필요성을 발표했다. 그 하나는첫째: 당을 갱신하라라는 제목 하에 그람시가 쓴 글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람시와 더불어 보르디가파 내의 튜린을 지지하는 소집단이 공동으로 쓴튜린 사회주의 부문의 행동 프로그램이라는 글이었다. 두 글 모두 1월 마지막 주에 발표되었다.

이 글들은 두 가지 차원에서 평의회 운동의 한계들을 인정했다. 첫 번째, 공장 수준의 평의회 운동이 고립된 한계는 그 공장에서 선출된 위원들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작업장 외부에서 활동하는공산주의세력은 전국적 수준의 노동자 조직 내에 존재하는 수많은 훌륭한 혁명가들을 확보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그 조직 안에서 행동을 취해야만 했다. 두 번째, 튜린 운동을 내부적으로 부활시킬 방도을 다루었다. 그람시와 튜린지역의 보르디가 분파인 보에로는 이제는 작업장 현장조직이 더욱 광범위한 노동자와 농민의 소비에트를 향한 하나의 단계일 뿐라고 시인하며 소비에트가 주되게 공격해야 할 대상은 국가임을 주장했다.‘행동 프로그램은 이전 성과를 다지며 더욱 발전해 갈 것을 추구했다.

 

튜린의 공장평의회들은 지금까지 노동 대중들 사이에서 프롤레타리아트 규율의 강력한 결속을 확립해왔다. 이제는 [사회주의 세력]이 이러한 강고한 토대를 기반으로 하여 튜린시 전체의 노동자 평의회 설립을 촉진하는데 사용해야 한다. …… 이행기에 평의회는 의회와 부르주아 국가를 지속적으로 비판하는 기관이자 시의 자치에 대한 직접적 통제기관으로 작동해야 한다.

 

일단 공장 내부 투쟁의 한계들이 인식되자 정치적 문제들이 혁명가들의 독자적인 행동에 의해 신중하게 제기되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해졌다.

 

혁명운동에 충분한 자율성과 전략실행(manoeuvre)의 자유재량을 높이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세력]…… 모든 연대조직(league)과 노동조합에 공산주의를 위한 활동공간의 영구적인 토대를 형성시켜야 한다. 이러한 활동공간과 그 공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조직 내에서 혁명적 선전선동을 수행할 것이고 지속적으로 어떠한 기회주의적 또는 개량주의적 후퇴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막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Avanti! 316일자에 보에로와 그람시에 의해 주장되었다.

 

계급 투쟁의 기관들(공장평의회들, 노동조합들, 협동조합들, 공제회들(mutual societies)) 안에 있는 모든 당원들은 ……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고 [사회주의 세력의] 집행위원회와 접촉할 대표들을 선출할 것이다. 공장 내 집단들은 노동조합 내에 당 세포들을 형성하기 위해서 산업 부문들로 결합될 것이다. 그들은 그 부문내 성원들의 일반적 활동들을감독할것이고 모든 공장 회합들 내에서 당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관점은 평의회 조직의 토대들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착취당하고 있는 이탈리아 대중들로 하여금 단결하여 행동을 통해 국가를 전복할 운동이 필요함을 다음과 같은 즉각적인 임무들을 통해 제시했다.

 

1. 프롤레타리아트 무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2. 산업적 노동운동과의 연대 속에서 지방을 관통함으로써 빈농들과 영세 자작농들의 강력한 계급운동을 불러일으키는 것.

 

그람시와 튜린의 보르디가주의자들은 각자의 관점을 고수했지만 공동저작의 글 속에서 드러난 결론은 두 입장들을 종합하는 것이었는데, 그 하나는 대중운동의 역동성을 축으로 삼았고, 다른 하나는 혁명정당의 지도 역할을 축으로 삼았다. 결론은 전위정당이 공장평의회의 방향성 결정에 개입하는 하나의 힘이며 주요한 수단이 되는 행동 모델의 선택이었다 -- 공장 평의회라는 케이크(cake)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냉각(icing)으로서가 아니라. 당은 자신의 활동을 위한 토대로서 평의회를 필요로 했지만 이와 동일하게 평의회는 앞으로 전진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당의 지도를 필요로 했다.

그람시는 평의회와 당의 상호관련성을 훌륭하게 포착했으며 그 관계는 반드시 둘 모두의 근본적 변화에 기반해야만 했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당은 자신만의 고유한 원칙과 전술들, 확고하고 타협의 여지가 없는 규율을 통해 헤게모니와 응집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노동자 국가를 경유하여 공산주의 사회로 가기 위한 투쟁 속에서 자신만의 정확하면서도 구분되는 특징을 필요로 한다. 당의 지도력은 각 부문들과의 끊임없는 접촉을 유지함으로써 당의 모든 행위(menifestations) 속에서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엔진이 되어야 한다. 모든 공장들, 노동조합들, 협동조합 및 막사들 …… 등등 내에서 당 세포들은 공산주의 세력의 형성을 촉진시켜야 하고 그래서 대중들로부터 신망받는 사람들이 되어 선출되고 정치적 소비에트를 형성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행해야 한다. 응집성 있고 고도로 규율잡힌 공산당의 존재는 …… 소비에트에 대한 모종의 실험을 하기 위한 근본적이고 불가피한 조건이다.

 

그람시의 새로운 방향은 그 효과를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 평의회와 사회당 현장지부들은 이론에서 만큼이나 그렇게 빨리 변화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람시가 선구자적인 글들을 쓰는 동안에도 자본가들은 체제안정에 실패한 노동조합에 분노하면서 스스로 전투 준비를 했다. 그들의 전투준비(preparations)는 국가와 자본이 밀접하게 통합되는 제국주의 단계의 모든 조치를 포함하고 있었다. 전투는 모든 차원들에서 -- 공장들, 거리들에서 -- 이루어졌으며 노동조합 관료들과 정치가들로부터의 압박뿐만 아니라 군대의 무력까지 사용하였다.

2월 중순에 피아트의 자본가는 갑자기 작업장 위원에 대한 승인을 철회했다. 이러한 조치는 다소 조급한 것이었고 노동자의 치열한 파업에 의해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자본가들에게 좀더 구체적인 전략이 요구되었다. 다양한 자본가의 조직들은 후원을 위한 로비를 펼쳤고 그래서 37일 전국 고용자 연합인 핀투스트리아는 끝까지 싸울 것을 맹세했다. 2주 후에 세부적인 최종공격이 튜린 시장(Prefect)의 동의를 받게 되었다.

독자적인 튜린 공장평의회가 생존하기 위한 싸움은 하나의 사소한 쟁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노동자들에게 있어, 321일 서머타임의 법적 도입은 전시 상태로의 복귀를 의미했다. 322일 피아트의 금속산업 평의회는 기존의 시간을 고수했고 그로인해 해고되었다.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대응은 공장점거였고 여기에 곧 악세사리 피아트 노동자들이 가담하게 되었다. 325일 군대는 공장점거 노동자들을 밖으로 끌어냈다.

평의회의 통제 하에 있던 튜린지역 금속노동자연맹 집행부의 발의로 전 튜린의 작업장 위원들이 전쟁평의회를 열었다. 여기서 노동자 조직의 가장 발전된 형태가 되고자 하는 요구는 실질적인 검증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모든 튜린 공장들을 점거하기로 결정했고 44명이 체포되었다. 비록 이러한 전술은 곧 취소되었지만 50,000명의 튜린 노동자들은 지속적으로 파업을 하면서 엄청난 단결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지속적으로 공격하며 자신들의 요구들을 높여갔고 작업장 조직의 쟁점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대립하면서 노동자들에게 도전했다. Ordine Nuovo는 후에 이 파업을 다음과 같이 봤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의 프롤레타리아의 역사 속에서 영광스러운 한 장이었다. …… 프롤레타리아트가 …… 몰려서 행동한 것이 아니라 궁핍(privations)와 희생을 각오하면서 자신들의 결의를 통해 투쟁을 수행하면서 …… 생산을 통제하기 위한 투쟁에 참여했던 것은 …… 처음이었다.

 

41일에 현장위원들은 선두에 서서 운동을 이끌며 노동자 대중으로부터 위원회를 선출했지만 그것의 영향력은 일시적이었다. 며칠 지나 위원회는 금속노동자연맹의 지도자이자 공장평의회에 공감하고 있던 유일한 사람인 부르노 부오치(Bruno Buozzi)를 불러들였다. 그는 드러난 이슈에 대한 협상역할을 요청받았다. 튜린의 금속노동자들은 자본가와 국가와 대치하고 있었다. 성공하려면 그들은 전국적 규모의 도움이 필요했다. 튜린 이외의 지역에 평의회 조직을 설립하는데 실패했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수개월 동안 얕보아 왔던 바로 그 노동조합들에게 의지해야만 했다.

48일 부오치는 이전에 규율을 어겼던 조합원들에 대해 노조가 응징을 내릴 것을 요구조건으로 제시했다. 부오치는 평의회를 분쇄하는데 있어 자본가들의 후원을 활용할 수 있는 강점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현장위원들이 다음날 대중 회합에 회부할 것을 동의하였지만 위원 8명중 5명의 반대로 이 제안을 거부했다. 대중회합은 튜린의 심장부에서 열렸는데 아나키스트 저널이었던 Umanità Nova의 특파원은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50,000명의 파업자들 중에 아마도 40,000여명정도가 참석했고 …… 단지 11,588명만이 투표에 참여했다. 나머지는 기권했다.

그들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인가?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들의 느낌에 이 투쟁은 대담하지 못하고 주저주저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거기에는 어떠한 열광도, 비타협의 몸짓도 없었다. 오로지 약하고 지지부진한 소소한 논전만이 있을 뿐이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지도자들이 운동에 대한 평가에서뿐만 아니라 그 방범들에 있어서도 오류를 범했다고 느꼈다. 그러한 지도력으로는 승리를 쟁취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많은 노동자들은 현장복귀라는 쪽으로 투표했다.

최종 결과는 794표 중에 다수가 현장복귀에 찬성한 것으로 나왔다. 투표 이후에 위원들은 소수가 참여한 투표를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확신할 수 없어서 카메라(Camera)에서 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는 17시간 동안이나 아주 길게 진행되었다. 부오치는 투표 결과를 무시하는 것을 위험한 일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장시간의 논쟁이 있었다. …… 결국 위원 전원의 사임안은 기각되었지만 위원 개개인들은 만약 자신들이 동료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면 사임하고 작업장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부오치가 논쟁에서 이긴 듯했다. 위원들은 전체가 혼동에 휩싸이고 이러한 상황이 현장 노동자들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노동진영에서 분열의 냄새를 맡자 자본가들은 오로지 노동자들의 총체적 굴욕만이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결의했다. 금속노동자연맹의 노조관료들이 이미 합의했던 협상안에 서명하기 위해 도착했을 때 자본가들은 공장평의회의 무력화를 목적으로 하여 일련의 요구들을 추가적으로 제시하였다.

이제 결투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413일에 금속노동자연맹, 노동회의소(Camera del Lavoro) 그리고 튜린의 이탈리아 사회당 지부는 다음날 총파업을 위한 공동 요구문을 내놓았다. 피에트몬트(Piedmont)에서의 반응은 굉장했다. 노배라(Novara), 알렉산드리아(Alessandria)와 파비아(Pavia) 지역 전역의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광범위한 힘을 보여주며 튜린의 금속산업 노동자들에 결합해왔다. 한 목격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11일간 이 도시와 지방의 생활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전차, 철도, 공공 서비스 그리고 많은 상점들이 일을 멈췄고, 게다가 전 산업들이 멈춰버렸다. 거기에는 어떠한 파업방해자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농업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요구들을 내놓자 곧 500,000여명이 파업에 동참했다. 파업을 이끌기 위해선동 위원회(Agitation Committee)'가 구성되었다. 그 활동가들 중 한명은 일간 파업 신문인 Lavoratori Avanti!(노동자여 앞으로!)를 발행했는데 여기에서 오디누보주의자들(ordinovisti)은 자신들의 편집기술 및 신문 잡지 특유의(journalistic) 기술들을 통해 기여했다.

이러한 운동 상황에서 오디누보주의자들(ordinovisti) 특유의 관점은 분명한 자기 역할을 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한 작가에 따르면 Ordine Nuovo는 이 파업운동에 미미한 영향만을 주었을 뿐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어떤 전술적 오류를 저질렀으며, 적이 다음에는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를 예측하고 이를 먼저 선점할 필요성 등에 대한 대중들 사이에서의 정치적 논쟁이 촉발되지 않았다. …… 비록 이러한 논의들이 이루어졌더라도 그것들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못하였고, 리플렛들이나 플랭카드들에서 그 표현을 발견할 수 없었으며, 선동위원회(Agitation Committee)의 발표(bulletin) 속에서도 그러한 것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파업운동의 실질적 참여자거나 이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상황을 좋게 묘사했지만 심지어 그람시와 가까이에서 일했던 젊은 피아트의 기술자인 산티아(Santhia)오디누보주의자들(ordinovisti) 의한 어떠한 대규모 활동도 정확히 발견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람시와 톨리아티는 튜린 사회주의적 세력의 지도자들에게 회의소집을 요청했다. 회의 초기에는 행동을 확산시킨다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 …… 한 동지가 밀란(Milan)에 파견되어 전국의 정치 지도자 및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입장을 바꾸고자 하였다. 다른 두 명은 노배라에 파견되었고, 나와 다른 한사람은 [파업중인 농업노동자들의 중심부인] 베르첼리(Vercelli)로 갔다.

 

다섯 명의 밀사들이 혁명 정당의 지도력을 대신할 수 없었다.‘행동 프로그램의 전략을 실행할 충분한 시간도 없었다. 비록 노동계급의 소수만을 포함하고 있을지라도 이러한 혁명 조직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오디누보주의자들(ordinovisti)은 무력한 관망자로서의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1917년 볼셰비키의 조직은 몇 년 동안의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와 강제추방으로 인해 20,000여명으로 축소되었지만 이들은 재빨리 운동의 계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위치로 이동할 수 있었다.

오로지 아나코 생디칼리스트들만이 독자적인 혁명조직을 지니고 있어서 노동조합과 단체교섭의 외부에서 활동하면서 국가에 맞서 투쟁을 제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까리노가 체포되어 있는 동안에 노동계급이 밀집해 있는 지역인 바리에라 디 밀라노(Barriera di Milano)에서 수많은 시위들을 이끌었다. 비아 트리폴리(Via Tripoli)에서는 코르소 노바라(Corso Novara)에서의 작은 접전들이 있은 후 개입했던 기병대에 맞서 바리케이트를 쌓아 올렸다. 뒤이어 일어난 싸움에서 한 노동자가 죽었다.

또한 전국에서 피에트몬트의 포위되었던 파업자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던 사람들도 역시 아나코 생디칼리스트들이었다. Umanita Nova421일자 첫 페이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노동자들이여,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이탈리아의 프롤레타리아들 즉 철도노동자들, 선원들, 농민들이여. 튜린의 동지들에 대한 당신들의 연대를 아끼지 마시기 바랍니다. 적이 튜린에 모이게 하지 맙시다. 학살의 공모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생디칼리스트들은 321 보병 연대가 철도를 이용하는 것을 봉쇄시켰다. 제노아로 항해하려던 군대들은 발이 묶였고 결국 모든 항구들과 마을이 일을 멈췄다. 생디칼리스트들의 호소들은 플로랑스(Florence), 피사(Pisa) 그리고 루까(Lucca)의 철도노동자들의 행동에 의해 지지받았다. 하지만 아나코생디칼리스트 소수만의 지원은 튜린을 군사적 점령으로부터 구해내는데 충분하지 않았다.

43, 그람시는 노동자 통제와 평의회 권력이 한 공장, 한 산업 또는 심지어 한 도시만으로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문(碑文)으로 될만한 글을 썼다.

 

현재 튜린은 완전한 군사적 주둔지로 바뀌었다. 그 도시에는 50,000명의 군인들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포병들은 언덕에 배치되어 있고, 지원군은 이 도시의 교외에서 주둔하고 있으며 도시 안에는 장갑차(armoured cars)가 있다. 만약 우리들 중에 여전히 환상을 간직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 만약 누군가가 공장에서의 권력이 국가권력에 이르는 유일한 요소로 보이는 지점에 이르는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딪는 과정에서 난관을 발견했다면, 만약 그러한 의심자들, 그러한 미몽에 빠진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현재의 상황에 대한 교훈은 그들을 위한 것이다.

 

현장조직의 원칙을 최종목표로 삼는순수한평의회 운동은 눈앞에 쫙 펼쳐진 정치적 현실을 직시해야만 했다.

오로지 이탈리아 사회당과 노동조합들만이 피에트몬트의 포위상태를 탈출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파업에 대하여 기층노동자들이 열정적으로 지지했었지만 노조관료들은 행동하기를 꺼려했다. 투쟁이 전개되던 24일째 되던 날, 금속노동자연맹은 조합원들에게규율잡힌 상태를 유지하며 집행위원회의 결정을 기다리는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다고 했다.

이탈리아 사회당 전국회의는 파업에 돌입한 노동자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원래는 튜린에서 회합을 갖기로 계획이 잡혀 있었지만 이탈리아 사회당 전국회의는 혼란(disruption)을 피하기 위해밀란으로 이동했다. 회합이 열리자 세라티(Serrati)는 튜린의 사건들이 순전히 지역적 노동조합의 쟁점이고 어떠한 정치적 중요성도 갖지 않는다고 말했다. 튜린 사회주의 세력의 대표였던 타스카(Tasca)와 테라치니(Terracini)이 상황은 개별적이거나 지역적인 문제로 야기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부르주아지가 직면한 전면적 위기의 표현이다라고 응수했다. 그들은 이러한 커다란 투쟁을 단순한 일개 노동조합의 문제로 바라보는 견해에 대해 경멸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들은 고립되었다. 심지어 보르디가 마저도 이 싸움이 전국적인 중요성을 가진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보르디가의 관심부족은 이탈리아 사회당 내부에서의 정쟁이 노동계급의 대중적 행동보다도 더욱 중요하다는 분파주의(sectarian)의 쓸데없는 신념을 드러내줬다. 그는미래의 소비에트는 공산주의 정당의 지역 부위들 -- 여전히 형성되어야 할 -- 로부터 성장해야 한다고믿었다. 군대가 튜린에 대한 목조르기를 확장시켜가자 보르디가의 충고는 다음과 같은 이론적 시비걸기(nit-picking)를 넘어서지 못했다.‘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하기 이전에 소비에트를 건립하는 것이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사태가 진실로 무르익기 전에 소비에트를 설립하는 것은 시기상조가 될 것이다.’

논쟁이 지속되는 동안 현실에 존재하는 소비에트를 위한 토대 -- 독립적인 공장 평의회들 -- 는 사라지고 있었다. 424일에 이탈리아 노동조합들의 지도자였던 다라고나(D'Aragona)는 타협적 해법을 만들고 있었다. 이 타협안은 자본가들의 모든 요구들에 대한 완전한(virtual) 항복을 의미했고 또한 공장 평의회의 권력은 심각하게 제한될 것임을 의미했다. 튜린의 금속노동자들은 패배를 인정하고 작업장으로 복귀했다.

19204월의 패배가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노동운동에 대한 최초의 진정한 공격이었는데, 당시 노동운동은 이탈리아의 많은 지역들에서 여전히 자신감에 차있었다. 결국 혁명 전략들을 추구했던 사람들이 직면했던 주요한 문제는 노동계급의 전투성이 아니라 정치적 지도력에 대한 것이었다. Ordine Nuovo가 튜린 선진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았을 때 그들은 맑스주의 이론을 공장들의 실질적 기반들과 결합시킬 수 있었고 투쟁을 위한 명쾌한 지침을 설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동자평의회의 이론과 실천은 완전한 혁명 프로그램 전체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또 다른 본질적인 구성요소는 조직화된 혁명정당이었다. 보르디가는 그러한 정당의 필요성을 가장 강력하게 주창했다. 하지만 이러한 당을 만드는 그의 접근방법은 철저히 분파주의적이었고 당시 노동자투쟁이 그 목표에 있어 한계를 보인다는 이유로 이를(그리고 출현한 평의회들)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당시 노동자투쟁이 그 목표에 있어 한계를 드러낸 것은 사실이었지만 노동자 대중들은 부분적인 투쟁들의 경험을 하지 않고서는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에 까지 다다를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당시에 전국적 혁명조직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오디누보주의자들(ordinovisti)이 그 조직의 한 단위였다면 그들은 단순히 지역적 파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 튜린 투쟁을 광범위한 규모의 전면적 전략과 통합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한 도시에 고립된 채 활동했고 튜린의 노동자들은 가장 선진적이기는 했지만 그들 스스로 이를 쟁취할 수는 없었다.

노동계급의 선진부위는 오로지 노동계급을 넘어서 폭 넚은 사회집단과 계층을 지도할 수 있을 때에만 효과적일 수 있다. 우리가 독일의 오블로테(Obleute)와 스파르타쿠스주의자들(Spartakists)에서 볼 수 있었듯이 혁명적 지도력은 전적으로 대중 운동 내부에서 또는 전적으로 그 외부에서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즉 순전히 경제적 요구에 대한 선동이나 혹은 순전히 정치적 이슈에 대한 선전을 통해서는 제공될 수 없는 것이다. 혁명적 정당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 당이 일상적 투쟁들에 대해 개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튜린의 정치적 전위들은 평의회 운동을 승리로 이끌 지도력 창출에 전적으로 실패했던 것이다.

 

후기 : 4월 파업에서 9월의 공장 점거까지

 

앞의 글에서 튜린 공장평의회가 19209월 시도했던 그 유명한공장 점거사건 보다는 그 이전의 시기로 설명을 집중했던 것이 독자들에게는 의아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전 이탈리아의 운동으로써, 9월의 공장점거운동에는 4월 파업보다 더 많은 인원들이 참여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 도시와 그 주변의 주민들만이 참여했던 4월 파업과는 대조적으로 19209월에는 전 이탈리아의 금속산업 공장과 그 외에 여러 다른 산업의 5만여 명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하지만 다수의 논자에 의하면 이탈리아 혁명 운동의 결정적인 국면은 이미 9월에는 지나갔다. 톨리아티에 따르면

 

운동의 최고 정점은 튜린에서 총파업이 있었던 1920년 봄에 도달했다. …… 공장점거운동이 시작되었을 때는 이미 피로의 기색이 보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들과 전투적인 현장노동자 집단들에게는 이미 전체 운동의 승리를 거머쥘 수 있게 해줄 지도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대중의 지지를 받는 독자적인 혁명적 지도력이 설립될 수 있느냐의 문제는 튜린의 경우 4월에 결판이 났다. 까리노에 따르면 공장평의회가 4월 파업에서 패배했을 때 튜린 노동자 운동이 퇴조하기 시작되었다. 이는 공장점거운동가 있기 전부터 발생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월의 공장점거운동들은 대대적인 규모로 진행되었다. 몇몇 지역들에서 공장평의회들은 공장간의 연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비록 9월의 공장점거운동에서는 4월 파업에서 볼 수 있었던 독자적인 성격이 결여되어 있었지만, 많은 공장들이 자본가들의 방해 없이도 노동자들 스스로에 의해 실제로 운용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개량주의자들의 다음과 같은 주장 즉 전문가들이 사회를 운용해야 하고 노동자들은 그럴 능력이 없다는 의견을 침묵케 했다. 공장점거 3일째 되던 날 피아트 센터는 실제로 여느 때보다 더욱 많은 자동차들을 생산해냈음을 증명해줬다.

하지만 그 모든 명백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9월의 운동은 기저에 깔려 있던 여러 약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현장 노동자들의 주도권이라는 쟁점으로 시작되었던 4월 파업과는 달리 9월 공장점거운동이 전개된 4개월 동안 상층에서만의 교섭이 진행되었고 새로운 임금 요구를 위한 태업이 진행했다. 공장점거의 전술은 830일 밀란(Milan)에 있는 로메오(Reomeo) 공장이 폐쇄된 이후에 벌어졌다. 처음에 공장점거는 기본적으로 협상을 위한 전술(bargaining counter)이였다. 비록 노동자 통제 하의 생산량 감소는경영자들의 경영권에 대한 도전이었지만 9월 공장점거는 4월 파업에서 보여준 현장노동자의 투쟁 주도와는 거리가 멀었다.‘안에서 일하기전술은 실제로 벌어진 것보다 그 외양이 급진적인 것처럼 보였다.

9월에는 현장노동자들이 지니고 있었던 지도력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는 이탈리아 사회당과 노동조합들의 관료들 사이에서 해괴한(bizarre) 논의를 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공장점거운동이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910일 사회당은 의례 해왔던 말로만의 전투적인 논쟁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교활하게도 다라고나(D'Aragona)는 노동조합을 위하여 당의 지도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당신은 지금이 혁명의 국면이라고 믿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책임을 져야 한다.’ 이탈리아 사회당 중앙파들은 혁명적인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말대로 실천할 의도가 전혀 없었고 단지 노동조합을 위해 자신의 모든 지도력을 포기했다. 그후 이탈리아 노동조합 관료들은 혁명에 대한 찬반투표를 벌였던 어이없는 집회 광경을 연출하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혁명은 591,245409,569로 기각되었다!

930일 공장점거가 결국 종료되었을 때 그 결과는 겉으로 보이기에 타협에 이른 듯했다. 하지만 계급 전쟁의 급변하는 전선에서 일분간 지체한다는 것은 패배를 의미했다. 공장점거들은 혁명이라는 위협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자극했지만 자본주의 체제를 끝장내지는 못했다. 이로인해 노동자 운동은 방향을 못잡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동안 지배계급은 무솔리니의 파시스트체제를 향한 추진력을 얻게 되었고 그후로마의 3이 도래한 것은 이로부터 불과 2년만이었다.

19209월 공장점거운동에서 나타난 수동성은 4월에 독립적이었던 공장 평의회의 분쇄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4월 파업 이후에 대규모로 일어났던 노동자들의 사기 저하는 19205월 말에 여실히 나타났다. 중요한 대치국면에서 안젤로 타스카(Angelo Tasca)는 공장평의회의 자치에 대한 Ordine Nuovo의 원래의 입장을 버리고 평의회는 이후에는 노동조합 기관으로 통합되야 한다는 생각 즉 노조의 엄격한 관료적 통제 하에 공장평의회를 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내걸었다. 그람시는 이 노선에 반대했지만 소수파였다. 이제는 민주주의에 대한 현장노동자들의 열망이 수그러 들었기 때문에 노조관료들에 맞서는 독자적인 혁명적 지도력의 기회는 상실되고 말았다.

 

 

 

 

 

 

 

 

 

 

 

 

 

 

 

 

 

 

 

 

 

 

 

 

 

 

 

 

11. 결론

 

노동자 평의회는 1905년 러시아 혁명과정에서 처음으로 탄생하였다. 당시 이 사건은 서구노동운동에 하나의 논쟁을 유발시켰다. 1906년 로자 룩셈부르크는사람들은 종종 러시아 혁명 사례부터의 교훈이 독일혁명을 위한 준거점이 될 수 없다고 습관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교훈은 곧 우리 독일의 교훈이기도 하다라고 썼다. 당시 논쟁구도에서 그녀가 견지한 비판적 태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혁명적 에너지가 넘지는 사람들이여!....러시아로 돌아가라

1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 혁명정당의 원칙을 따르기를 거부했던 핵심인물은 카우츠키이다. 그는 서구와 러시아 노동운동 간에는 아무런 공동점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카우츠키에 동의하여 10월 혁명과 소비에트간의 긴밀한 연관성을 부정하고 있다. 심지어 1917년 혁명의 결과로 창립됬던 서구 공산당에서 조차 그랬다. 예를 들면 영국 공산당의 최근 실천강령을 보자.

 

영국에서 사회주의로의은 소비에트의과는 다를 것이다. 소비에트의 봉기, 시민전쟁 그리고 권력의 새로운 조직(소비에트)의 창조는....... 짜르 독재체제라는 러시아 특수성에 기인했다.

 

레닌의 견해는 이와 완전히 다르다. 그는 러시아 혁명모델이 다른 지역에서도 발생될 것이라는 필연성에 대하여 많은 함의를 보여준다고 믿었다. 1919년에 발족되어 1920년대 수많은 혁명가의 중심센터였던 공산주의 인터내셔날은 모든 곳의 프롤레타리아에게 러시아 혁명사례를 따르고 모든 소비에트 공화국을 지지하도록 요청했다.

러시아의 고립과 스탈린주의 관료제로 인해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파괴되었지만 현재까지 본질적 문제는 변하지 않고 있다. 1차 세계대전 중의 혁명적 투쟁과 그 성공의 결과인 러시아 소비에트는 현재에도 사회주의자의 지침서로 기여할 수 있는가?. 러시아 소비에트와 독일, 이태리, 영국에서의 노동자 평의회간에 보여주는 높은 유사성은 앞의 질문에 대하여 긍정적 해답을 제공한다. 동시에 서구의 세 지역에서 권력을 장악하지 못한 사실 또한 우리에게 명맥한 차이점을 보여준다.

 

러시아: 예외인가, 정도인가

 

1917년 러시아 혁명이라는 사건은 트로츠키가 지칭한영구혁명의 일례였다. 혁명발발 이전, 트로츠키는 당시 정통 맑스주의자들의 일반적 견해였던노동자권력은 성숙된 자본주의 하에 노동계급이 인구의 대다수가 되는 지역에서 발생한다는 생각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는 수적으로 미약한 러시아 노동계급이 혁명과정의 마지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기 위한 초기 촉진자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 예견했다.

1917년 러시아는 근대성과 후진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었다. 농민이 전체인구의 80%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농민은 봉건주의 유제인 절대군주제로 인해 지배되고 있었다. 동시에 자본가 계급도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 수는 적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짜르체제에 의존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확장과정은 노동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의 출현을 야기했다. 집중적인 러시아 산업성장과정은 비록 3백만명이었지만 노동계급의 단결성을 강화시켰다. 이러한 단결성은 짜르체제의 위기라는 조건과 결합되면서 당시 어느 곳에서도 보기 드문 노동계급의 전투성으로 나타났다. 1905년 혁명 이전에도 연평균 493,000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당시 독일과 영국의 연평균 파업 참여자 수는 84,000명과 136,000명으로 집계되었는데 반면 두 나라의 전체 노동자수는 러시아의 3배 내지는 4배에 달했다.

당시 짜르체제는 부르조아 혁명에 의해 자리를 내줄 단계에 이르렀지만 러시아 부르조아 계급은 노동계급의 역량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재산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으로 인해 자신만의 국가권력 창출을 주저하고 있었다. 레닌이 말하기를, 이러한 계급 역관계의 상황으로 인해 러시아 부르조아 계급들은 불안정, 반신반의, 변절의 행위를 보이며 결국 봉건귀족체제에 저항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계급역관계의 특수한 결합형태는 트로츠키의 다음 말에서 잘 나타난다.

 

러시아 혁명은 그것이 완수해야 할 과업을 중심으로 보면,‘부르조아혁명이다. 왜냐하면 혁명은 절대군주제와 봉건적 소유라는 족쇄로부터 부르조아 사회를 해방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주요 동력은 노동계급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로 인해 그것이 수행되는 방식을 중심으로 보면 러시아 혁명은프롤레타리아혁명인 것이다.

 

당시 러시아에서 발생된 상황들은 노동계급의 투쟁이 지니는 성격을 변화시켰다. 어느 곳이던 간에 운동의 시발점은 본질적으로 생산의 사회화에 의해 시작되지만 그 운동이 보여주는 구체적인 모습은 그 사회의 특수성을 반영하게 된다. 이러한 러시아 혁명운동의 특수성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첫째, 러시아 노동계급은 부르조아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요구를 둘러싸고 스스로의 독자적인 행보를 취했다. 그래서 190529일에 발생한 겨울궁전 앞 대중시위는 그 전면에 평등한 보통선거에 의한 제헌의회 소집을 주장했다. 이에 대한 짜르정부의 반응은 시위군중에 대한 학살이었으며 혁명이 발발하게 되었다. 그 후 다시 한번 제헌의회 소집을 요구하는 대중파업으로부터 소비에트가 탄생되었다. 운동의 매순간마다 노동계급은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위한 슬로건을 중심으로 전진했으며 그들을 둘러싼 상황은 의회주의를 넘어서 노동계급의 자기 권력을 건설하기 위한 방도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제헌의회 소집이라는 요구는 직접적으로 소비에트 건설로 가도록 했다.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혁명운동과 관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발전에 있어 필요불가결한 단계였다--- 단 다음의 전제조건에서 말이다. 즉 어떤 측면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가 수년간 지속되면서 동시에 다른 측면에서는 혁명적 상황이 대중들로 하여금 부르조아 정치 민주주의 제도가 실질적으로 정착되기도 전에 그 허구성으로부터 해방되도록 한다는 전제조건에서 말이다.

 

둘째, 러시아 자본가 계급이 지닌 권력과 제도의 유약함은 노동계급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의 빈약함으로도 나타났다. 서구유럽의 노동계급은 수년간 임금상승 등을 통해 자본주의 성장의 부스러기를 취할 수 있었고 스스로 조직할 권리 또한 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하지 않는 한 인정되었다. 이러한 여건은 서구 노동계급으로 하여금개량주의적 방법을 통해 사회주의로 갈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갖게 했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은 경제적 발전과 더불어 노동계급의 정치적 권력이 확장될 수 있다는 정치-경제간의 상호연계성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경우 이런 상황은 존재하지 않았다. 1905년 소비에트 내 공장평의회 대표들은 최소한의 경제적 요구조차 투쟁에 의하지 않고는 실현될 수 없는 사실을 인식하며 그들의 최우선 과제로서 정치적인 총파업을 선택하였다.‘8시간 노동제와 총을!’이라는 슬로건이 이를 잘 나타내 주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혁명의식은 노동계급의 대다수에 의해 공유되었다. 반면 서구유럽에서는 혁명의식이 소수 선진 활동가에게만 나타났으며 오히려 대다수에게는 개량주의자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셋째, 러시아에서는 특정 노동자 집단에 제한된 투쟁과 전체를 위한 계급투쟁간의 분화정도가 서구 유럽에 비해 그리 크지 않았다. 그 이유는 러시아의 빠른 산업발전속도와 폭압적인 짜르체제에 있었다. 맑스는 영국을 자본주의 발전의 전형이라고 보았는데, 영국에서는 산업기술 및 작업조직방식이 점진적으로 발전하였고 이러한 맥락에서 1850년대 쯤 숙련공과 같은 직능집단이 숙련기술의 독점적 통제에 기반한표준적인 노조를 형성할 수 있었다. 직능별 숙련공 노조는 노동시장에 대한 진입장벽을 통해 자신의 기술에 기반한 추가적 이익을 취할 수 있었으며 자본가로부터 양보를 강제할 수 있었다. 직능별로 부문화된 노조조직은 앵겔스가 지칭했던 노동귀족으로 성장하여 눈앞의 이익만을 취했다. 이러한 노조의 조직패턴은 영국에서의 산업발전경로를 뒤쫓아간 나라에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그러므로 서구 유럽에서는 숙련기술에 근거한 노조의 협상권력이 노동자의 조직화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이런 방식은 일정시기에는 노동자들이 조직화를 위한 유일한 안정적인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었으나 그 결과는 분파적 태도, 다른 노동자의 투쟁에 대한 연대거부라는 보수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모습은 러시아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트로츠키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의 자본주의적 산업발전은 유럽자본의 직접적인 관계와 영향력 하에서 발생했다. 러시아에서는 숙련공의 작업장 문화에 기반한 투쟁이 없었기 때문에 계급투쟁의 토양 자체가 원점으로부터 시작됬다. 러시아의 산업발전은 산업프롤레타리아를 공장으로 집결시켰으며 이로인해 숙련공의 작업장 문화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 부르조아 혁명의 시기에 주된 동력으로서 나타난 투쟁집단은 도시에서의 극단적으로 잘 발달된 산업프롤레타리아였다.

 

산업발달과정과 더불어 러시아에서의 국가는 무차별적으로 모든 집단의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그들이 분파적인 조직화를 하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이러한 사정은 서구유럽에서는 보이질 않았다.

앞서 살펴본 러시아의 특성은 서구유럽과는 다른 다음의 네 번째 속성을 지니게 했다. 러시아에서 소비에트는 산업 노동계급이 처음으로 진지하게 시도한 정치적인 대중조직이었다. 1905년과 1917년에, 소비에트는 노동운동 내의 다른 부문적, 경제적 조직화에 선행하여 창조되었다 -노조와 작업장조직(공장위원회, 현장위원 등등). 후자의 조직들은 주로 경제적인 이슈를 중심으로 투쟁을 하였는데, 이러한 경제적 투쟁은 정치적 투쟁의 급격한 성장 이후에 전개되었으며 동시에 정치적 투쟁을 더욱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17년의 일정시기를 제외하고는, 소비에트로의 노동계급 충성도는 다른 어떤 조직에 의해서도 도전받지 않았다. 우익 개량주의자들 또한 당시 대중에게 영향을 미칠 다른 어떤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소비에트의 형성을 촉진시키기 조차 했다. 이러한 상황은 서구유럽에서는 나타났지 않았다. 서구유럽에서는 이미 개량주의자에 의해 통제되는 노동조합 조직이 있었으며 이들 개량주의자와 노조는 노동자 평의회 조직이 성장하여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게 되는 경향성을 방지하기 위하여 막강한 영향력과 기구들을 이용하였다.

따라서 서구유럽에서의 상황전개방식은 러시아와는 반대방향으로 나가게 되었다. 서구에서 노동자 평의회는 (러시아와 같이) 노동계급으로 하여금 각종 경제주의적 조직화에 길을 터준 정치권력의 핵심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서구의 노동자 평의회는 노조의 관료주의적 경향성에 대해 투쟁하면서 성장했으며,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에서 보여지듯이, 자신의 임무를 노조 관료주의에 대응하는 것으로 제한하면서 노조 내에서의 영향력 획득에 주력했다. 당시 자본주의 위기 시 서구 유럽의 노동계급은 정치적 투쟁의 측면에 있어 단지 소수 선진 활동가에게만 나타났다.

러시아에서의 노동운동은 개량주의적 지도자에 대한 투쟁이 주로 소비에트 내에서 전개되었다. 소비에트에는 즉각적 소환제도가 존재하고 있어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쉽게 대체되고 또한 대중적 개량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은 단지 수개월만에 영향력을 획득했다. 서구유럽의 경우 이러한 경향의 발전과정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고 게다가 개량주의적 지도자는 이러한 공격에 대하여 관료주의적으로 통제되는 노조 기계속에서 견고한 참호를 구축했다.

이는 단순한 차이가 아니다. 러시아에서의 가장 핵심적 요인은 서구에 부재했던, 잘 조율된 혁명정당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볼쉐비키가 러시아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만 나타난 독특한 특징을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러시아 혁명과정 동안 존재한 주변여건들이 당원의 능력소진과 희생을 피하면서도 당의 발전을 가능케 하였다는 점은 인정해야만 한다. 개량주의가 허약했다는 점은 정부의 탄압이 있었을 때 조차도 혁명적 의식의 대중적 기반이 넓게 유지되었다는 바에서도 나타났다(비록 그것이 조직되기 위해서는 어려움을 겪었을지라도). 그래서 볼셰비키는 혁명으로 인해 대중들의 의식이 변화되기 이전인 19159월 전쟁 산업 위원회의 선거에서 페트로그라드 노동자의 다수에게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19172월 혁명으로부터 도취감에 취해있는 동안, 볼셰비키는 3개월 이후에야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및 노조에 대한 지원 및 조직화를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연과정은 노동계급의 지원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병사 위원회의 상대적 보수성이 소비에트 내에서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혁명과정의 특수성이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이라는 전세계 노동자간의 연대성을 애매모호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 모든 곳의 노동자들은 공통된 이익을 가진다는 노동자 국제주의라는 신념은 이론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사실은 1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드러났는데, 당시 모든 곳의 노동자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었을 지라도 동일한 적대 계급(자본가 계급)에 직면하고 이에 대해 (평의회라는) 유사한 대응조직을 만들어 투쟁했다. 푸틸로프에서의 금속노동자들은 베를린의 DMV, 글레스고우의 파크해드 단조공장, 튜린의 피아트 공장 노동자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페트로그라드와 튜린 만큼이나 서로 떨어진 곳에서도 평의회 중앙조직은 서로 연계되었다. 1848년 맑스가 예측했듯이,

 

지속적인 시장확장의 필요성은 자본가로 하여금 지구 끝까지 진출하도록 한다. 자본은 모든 곳에 둥지를 틀어 정착하며 각 지역을 연계시키며 모든 것을 끌어당겨 심지어는 가장 원시적인 곳까지 시민화시키게 된다.

 

그러나 러시아와 서구유럽간의 차이는 투쟁이 발전되는 양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24년에 트로츠키는‘10월의 교훈에서 과거 패배들과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고려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나라에서 소비에트는 혁명의민주적단계에서 성장하고 합법화되어 그 이후 계승되며 활용되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서구유럽에서는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서구유럽에서 소비에트는 노동계급 봉기의 직접적 조직으로 창조될 것이다. 단 며칠 내로 대중 봉기의 직접적인 조직으로 소비에트를 창조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대중봉기가 중요한 임계점을 통과하면서 소비에트는 창출되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새로운 국가권력의 원천으로 자리매김할 분위기가 만들어질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성공적인 소비에트 창출과정은 트로츠키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1920년대 대중적인 공산주의 정당이 형성되기 이전에 창출된 소비에트 중에서는, 단지 독일의 노동자, 병사 평의회만이 짧은 기간동안 소비에트(부르조아 국가권력에 직접적인 도전을 시도하는 무장된 권위체)의 수준에 도달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60여년간 노동자 평의회는 여러 형태를 띄면서 재차 발생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러시아에서만이 노동자 평의회가 소비에트로 전화할 수 있다거나 또는 세계대전 중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는 오류를 기각시킨다.

1936년 바르셀로나 대중운동은 민주정부에 대한 우익군부 쿠데타에 대항하기 위해 발생하였다. 이 사례를 보면 무장된 노동운동이 실패한 주된 이유는 집중된 노동자 권력을 국가권력으로 전화시키려는 시도에 대하여 무정부주의자들이 반대하였다는 점이였다. 좌익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당시 그 영향력이 미약하여 이러한 과업을 실행할 수 없었고 권력의 공백상태에서 스탈린주의자와 부르조아와의 비열한 연대가 공모되어, 성장하고 있었던 노동자 평의회의 싹을 제거하였다. 세계대전과는 관련없는 노동자 평의회 운동의 사례는 1956년 헝가리에서 탄생했다. 그것은 국가자본주의 체제에서 통치계급 내의 분열에 기인하였다. 중앙집중화된 노동자 평의회가 창조되었으나 곧 러시아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최근의 또 다른 사례는 1974년 포르투갈에서 발생하였는데, 당시 포르투갈 정부가 식민지와의 전쟁에서 실패 이후 군대는 분열되고 노동자의 자기조직화의 길이 열렸다. 이 사례에서 혁명의 기운이 약했던 점은 스탈린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평의회의 기반을 형성하기도 전에 노동자의 자주적인 조직을 저지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폴란드에서의 자유노조운동은 일반적인 노동조합주의를 넘어섰지만 소비에트의 수준까지는 가질 못했다. 당시 계엄령이 내려지기 몇 달 전까지만해도 자유노조는 명확한 지도력만 있었더라면 이중권력의 상황까지 갔었을 것이다.

이 모든 사례들은 우리에게 노동자 평의회가 발전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과 그것이 취해야할 필수적인 조직형태에 대하여 엄밀한 이해를 필요로 함을 요구한다. 대부분의 자주적 대중조직은 그들이 보여준 놀라운 정도의 유연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서구에서 발생된 노동자 평의회는 개량주의의 조건에서 발전하였는데, 그 개량주의 조건에서 관료주의의 악폐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 내에서 노동자 중심의 현장조직 운동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현장조직은 여건이 주어진다면 소비에트로 진화하겠지만 그렇다고 현장조직과 소비에트를 동일시해서는 않된다. 소비에트는 단지 이중권력의 상황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현장조직운동은 부르조아의 무장된 국가권력에 도전하지 않는, 비혁명적 시기에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세계대전 당시에서 보여졌듯이, 서구유럽 노동자의 현장조직 운동은 소비에트로 가는 과정을 준비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현재 자본주의는 러시아 혁명이 발발했던 과거 만큼이나 국제적 수준에서 위기에 처해본 적이 없다. 당시에 자본주의가 위기에 봉착된 주된 원인은 대중조직이 부르조아 국가기구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내 개량주의 기구를 넘어서는 대안적인 권력을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전후 혁명의 물결이 실패한 것은 현장 노동자의 허약함, 비겁함이 아니며 노동자 평의회가 불충분한 조직형태를 띄었기 때문도 아니다. 역사상 전개된 노동자 평의회의 깃발 하에 벌어진 수많은 투쟁과 지구상 모든 노동자의 자기희생은 그 충분한 증거를 보여준다. 그 실패의 주된 원인은 혁명적 지도력의 부재, 그리고 개량주의의 득세에서 발견되었다.

 

개량주의의 문제점

 

지배계급의 영향력은 겉으로 드러난 폭력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내의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에 의해서도 유지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트로츠키가 논했듯이

 

지배계급은 자신의 목적을 사회전체에 강제할 수 있으며 또한 습관화시켜 그 목적과 배치되는 모든 것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치부하겠금 한다. 어떤 체제도 단지 무력만으로는 단 몇주도 지속될 수 없다.

 

개량주의는 지배계급의 영향력이 노동계급 내에서 드러난 형태이다. 개량주의적 조직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환경에서 노동계급이 제한된 투쟁을 수행할시 발생된다. 노동조합은 상대적인 임금수준, 표준적 노동조건 확립 등의 즉자적이며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며 반면 정치영역에서는 개량주의적 정당이 노동계급의 이익을 확보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둘 다 자본주의 체제의 틀 내에서 작동된다.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해있지 않을 때, 위의 두 조직은 단기적 이익을 획득할 수단이 되며 동시에 장기간 동안 점진적인 수단을 통해 사회주의가 가능하다는 환상을 유포하게 된다.

노동조합과 개량주의 정당은 그들을 탄생시킨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그 속성이 각인된다. 노동조합 조직은 주로 집단별로 조직되어 광산 노동자를 금속가공 노동자, 철도 노동자, 교육 노동자 등등으로부터 서로를 분리시킨다. 또한 노동조합 조직은 정치적 목적으로부터 경제적 기능을 분리하여 노조관료제에 의해 그 기능을 수행한다(노조관료제는 현장노동자가 노조지도자에게 상대적인 자율권력을 부여한 주체적 허약함의 반영물임). 개량주의적 정당은 자본가 계급의 영향력 획득방식과 동일한 모습으로 활동한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부르조아 국가를 자신의 활동영역으로 삼아 그 틀거리에 내재된 노동계급 투쟁의 제약조건 또한 받아들이게 된다. 그들은 부르조아 국가의 민족주의적 목적에 동의하며 또한 그들은 선출되지 않은 부르주아 판사의 의견에 동조하며 외국 경쟁자 및 국내 노동자로부터 자본주의 경제를 보호할 필요성을 받아들인다.

지배를 위한 자본가의 권리는 그 지배가 이미 합의되었다는 전제 하에 도전받지 않게 된다. 결국 그들은 노동계급의 투쟁을 안전하게 조절하고 동시에 비록 현장노동자의 실제 의도가 무엇이던 간에 부르조아의 목적을 자신의 것인양 받아들이게 함으로서 자본주의를 강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개량주의적 노동운동 조직은 노동계급에게 많은 긍정적 이득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종종 지배계급의 자유는 어느 정도 개량주의적 노동운동 조직이 주도한 투쟁에 의해 제한되기도 한다(비록 이러한 투쟁은 개량주의적 관료들에 의해 지도될지라도 빈번히 발생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안정기에 획득된 성과는 혁명시기에 심각한 장애물로 기능한다. 역사상 혁명상황에 도달해도 대중의 개량주의적 의식과 조직은 없어지지 않으면서 전면적인 계급전쟁에 적합한 새로운 조직과는 별개로 움직일 수 있는 지형을 존속시킨다. 비록 개량주의가 더 이상 진보를 이룰 수 없고 또한 불황기에 사회의 파괴적 과정으로부터 대중을 보호해줄 수 없을 지라도, 만약 신뢰할 만한 혁명적 대안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노동계급은 생활의 개선을 위해 또 다시 개량주의 노동운동세력에 의존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유럽에서 개량주의적 노동운동 조직들은 그들의 지도자를 통해 자본과 노동 간의 완충물로 작동하여 착취관계에 기인한 자본주의 위기의 본질을 은폐하게 되었다. 그래서 노동운동의 전진은 약화되어 결국 자본주의를 종식시킬 기회는 실종되고 말았다. 독일에서 개량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선진적 활동가들을 공격하고 학살하는 지경까지 나갔다.

이러한 개량주의자의 전술이 지니는 의미는 국제적인 자본주의에게 자신의 힘을 재충전, 재결합할 시간을 벌게 해준다는 점이다. 독일의 경우 이는 매우 혁명적인 상황에서 조차 자본주의가 생존할 수 있는 군사적 재조직화의 시간과 여지를 주었다. 자본가와 국가로 하여금 최소한의 양보를 하도록 함으로서, 그리고 노동과 자본간의 협력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유포함으로서, 개량주의는 노동과 자본간의 근본적 적대라는 사실을 은폐시켰다-이는 자본으로 하여금 일시적인 후퇴의 가능성을 부여했다. 대조적으로 러시아의 경우, 자본가 계급은 짜르의 억압적이면서도 정치적으로 미숙한 국가기구에 의존했다. 1917년 혁명의 최고조에서 노자간의 적대성은 서구유럽보다는 러시아의 노동계급에게서 더욱 명확히 나타났다. 서구유럽의 경우, 잘 만들어진 개량주의적 전통이 당시의 실질적 이슈를 은폐하고 이를 통해 노동자 평의회 및 노동자 권력으로 향하는 혁명의 운동성을 약화시키고 분열시켰다.

개량주의가 이중적인 본성이 있다는 점은 위의 논의에서도 일견 보여진다- 개량주의적 조직은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조직이나, 동시에 앞으로의 전진을 가로막는 조직이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착취의 야만성에 대한 수동적인 방어체제이나, 동시에 그것은 현장 노동자와는 다른 이익을 가진, 그래서 결국 계급협조에 봉사하는, 관료주의적 지도자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주게 되는 조직이다. 개량주의의 이중적 본성은 서구 유럽 노동자들이 노동자 평의회를 처음으로 건설할 때, 그리고 건설이후 평의회 내의 의사결정과정에서 항상 직면하게 되는 문제 중의 하나였다.

개량주의 문제의 극복과정은 지속적이며 고통스런 과정을 거쳤다. 전후 혁명주의자들이 개량주의가 확산된 조건에서 어떻게 활동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성공뿐만 아니라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고 나서야 그 극복방식을 알게 되었다. 한편으로 혁명주의자들은 개량주의의 견고함이 그러한 사고를 지닌 노동대중(이들은 위기기간동안 자신들을 위한 즉각적인 요구투쟁과정에서 혁명적 결론이 도달하게 됨)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므로 혁명주의자는 노동조합운동의 개량주의적 대중조직 내에서 활동해야만 했다. 다른 한편 혁명주의자는 노동자의 전투성에 재갈을 물리는 개량주의적 사고체계와 관료주의적 지도자에 대해 가차없는 투쟁을 해야 함을 깨달았다. 노동조합 내에서 활동을 할지라도, 혁명주의자들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투쟁에 있어 주된 무기는 혁명적 정당이요, 그 정당은 매시기 노동계급의 즉각적 이슈와 사회주의적 목적을 연계시킬 수 있는 사고체계를 만들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1920년대 초반에 획득된 이론적 교훈이었고 또한 전쟁기간동안 러시아와 서구유럽에서 벌어진 다년간의 실천적 투쟁과정의 결과물이었다. 이러한 투쟁과정에서 도출된 주된 결론 중의 하나는 노동자 평의회였다. 그러나 노동자 평의회 하나만이 아니었다. 평의회는 혁명과정에서의 수많은 형태를 띄었던 조직체 중의 하나로, 혁명운동을 선도하는 양날의 한 면이었다. 혁명의 열기는 정치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매우 불균등하였다. 비록 전 세계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근본적으로 동일한 적대계급에 직면하게 되나, 서구유럽을 보면 여러 사회적 층위는 노동 계급내에 숙련공, 비숙련공 등등 다양한 차이를 발생시킨다. 동시에 서구유럽국가의 다양한 역사적 궤적은 지역에 따라 또는 산업에 따라 개량주의가 성장하는 방식에 있어 다양성을 노정시켰다.

1915년부터 1920년 사이에 일부 노동자의 주요 활동은 노동자 평의회 운동 내에서 전개되었다. 다른 노동자들은 독일 및 오스트로-헝가리에서 절대군주제를 철폐하고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데 만족했다. 또 다른 노동자들은 비록 노동자들의 혁명독재를 추구하지만, 의회주의 선거에 투표권을 행사하거나 노조에 처음으로 가입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독일에서 노동자 평의회의 건설은 사회민주당이 주도하는 자유노조가 8배로 확장되는 과정과 동시적으로 일어났다. 전후 영국에서는 선거권이 여성에게 부여되고 이태리에서는 농민에게 부여됬다. 다양한 대중적 활동은 전후 몇 년간 전 유럽에 걸쳐 발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특정지역이 부각되었다. 우리는 편의상 특정지역에서 활발히 전개된 노동자 평의회 활동의 중심지를혁명적 보루라고 지칭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각 나라에서의혁명적 보루는 혁명으로의 길을 주도했기 때문이다(비록 글레스고우와 튜린에서는 끝까지 가질 못했지만). 비록 이러한 특정지역에서의 선도적 활동이 타 지역에서의 투쟁과 연계되어 진행된 것이지만, 그러기 때문에

 

민중의 의지를 집중함으로서 각 혁명적 보루가 혁명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각 보루가 새로운 사회로 가기 위한 본질적인 경향성을 철저히 표현해주었기 때문이다. 인접지역에서는 그 지역 민중 스스로의 의지가 구체화됨에 따라 혁명의 보루에서 취해진 행동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혁명 중심지가 선도적 투쟁을 수행한 과정은 민주주의를 가장한 강제성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것은 민주주의의 역동적 실현과정이었다.

 

트로츠키가 페트로그라드에 대해 표현한 글을 보면 튜린과 글레스고우 그리고 베를린에서의 잠재적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각 지역이 노동자 평의회 조직의 중심지로 등장한 배경에는 물론 제국주의의 위기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에 대해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대응한 주관적 요인이 있었다.

 

평의회 건설 - 객관적 요인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영향력을 미치는 모든 곳에 지배관계라는 족쇄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관계라는 족쇄의 연계 고리 중에서 일부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그 정도가 약했다. 평의회의 중심지가 바로 이러한 약한 연계 고리의 예들이었다. 이 지역들은 과도적인 봉건제 또는 부르조아 민주주의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지만, 동일하게 과거 전통이 파괴되는, 폭발적인 사회발전을 경험한 곳이었다. 신규 이주 노동자들은 비록 근대 산업 사회 내에 제대로 진입하지 못했지만 자본주의 하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꿈꾸었으며 당시 전통적인 이데올로기 및 규범에 오염되지 않은 가치관을 지니게 되었다.

짜르 체제가 모든 노동자들을 억압했던 러시아는 그 중요성이 덜 했지만, 서구의 경우 금속제조업의 성장은 노동자 평의회의 발전에 있어 중요한 요인으로 등장했다. 금속산업의 노동과정에서만 보면 노동자를 급진화시키는 내재적 요소는 없었다. 금속산업 노동자들이 혁명의 길로 가게 된 배경에는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에 있었다. 산업 집중화가 역동적인 기술혁신과 맞물리면서 금속산업 노동자로 하여금 그들의 당면한 처지를 알겠금 했고 나아가 투쟁으로 나아가겠금 했다. 오늘날에도 금속산업은 대량생산 방식 하에 수많은 국내적, 다국적 기업들이 존재하여 수많은 노동자들을 공장으로 집결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사무직에 있는 노동자들 조차 1914년 금속산업 노동자들과 같이 신기술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현재에는 육체 노동자나 정신노동자 모두 집합적 힘을 소유하게 됨에 따라, 경제 체제에서 주된 산업이 다른 곳으로 이동할지라도 이는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조금도 축소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증가시키고 있다.

그러나 1914년에는 금속산업에 집중된 주요요인이 있었다. 금속산업의 기술적 속성은 많은 숙련공을 필요로 하였으며 당시 이들은 높은 단체교섭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탈숙련공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높은 수준의 현장조직 건설을 가능케 하였다. 숙련공들이 신기술에 의해 위협받을 때, 그들은 반격을 시작했다. 전쟁기간동안 대대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숙련공들의 전투성은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공장 내에서의 일상적인 부문적 투쟁과 함께 전쟁기간동안에 활동을 확대시켜야할 필요성이 대두되자 자신에 찬 현장조직 지도자들간의 네트워크가 창출되었다.

기술에 기반한 영향력과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전개된 투쟁은 숙련공들을 고립된 소수집단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이러한 투쟁은 단지 노자간에 벌어지는 일반적인 투쟁 중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투쟁은 매우 중요했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생산기술을 지속적으로 변화시킨다. 이러한 변화가 개별자본가에게는 임시적인 이익을 보장해 줄지라도 전체 자본주의에는 이윤률의 하락을 강제하게 된다. 맑스가 논했듯이

 

부르조아는 생산의 도구, 생산관계 나아가 전체 사회적 관계를 지속적으로 혁신시키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사회적 생존조건의 혼란, 지속적인 불안정성과 분규라는 현상은 자본주의 체제를 이전에 존재한 어떤 다른 체제와도 구분시켜준다. 모든 고착된 사회적 관계, 이에 기반한 옛날의 존경받던 편견과 의식은 허공으로 날라가 버리고 모든 사람들은 맨 정신에서 현실의 생존조건 나아가 인류에 대한 각 개인과의 관계에 직면하도록 강제된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노동계급의 집합성을 증가시키며 이들로 하여금 투쟁하도록 한다. 자본주의의 파괴적 경향성은 이러한 투쟁성을 더욱 강화시킨다. 제국주의 위기 시에 전쟁을 수행하던 모든 국가는 억압적 정책을 적용했다. 통치계급의 이러한 전술은 오히려 그 의도와는 반하는 효과로 결과할 수도 있었다. 통합된 전시경제체제가 보여준 예는 위험스러웠다. 이러한 체제는 일국수준에서 일단 경쟁이 제거되면 놀라운 생산력을 보여준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경쟁을 추동하는 힘은 억압되지 않았다. 그것은 외부를 향한 군사적 경쟁으로 재차 표현되면서 의미없는 학살과정에 노동자들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투쟁에 있어 전환점이 나타나기 전에, 노동자들의 운동은 심각한 공격에 직면하게 됬다. 첫째 공격은 제 2 인터내셔날에 속한 각 국가의 정당과 관료주의적 노동조합이 전쟁에 협조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이러한 공격은 노동계급을 마비시키고 지도력을 상실시키게 하였다. 둘째 공격은 모든 작업장에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국가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나왔다. 파업은 불법화되고 처벌되어 결국 신속히 전쟁터로 끌려갔다. 그래서 앵겔스가 이야기한 공장생산의 사회적 속성과 그 생산물의 자본주의적 처분간의 모순이 군수산업 노동자들에게 심각히 다가오게 되었다.

자본가 계급의 공격에 투쟁하면서 노동계급은 새로운 지도력을 발전시키며 새로운 상황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했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이러한 대처방법의 놀라운 해결책이었다. 지도력을 작업현장으로부터 건설함으로서 새로운 지도력은 튼튼한 기반을 가지게 되었고 현장노동자들은 기존의 노조관료주의를 제거함으로 만족했다. 즉각적인 소환원칙은 대중과 지도력간의 관계를 강화하여 그 지도력이 대중의 진정한 의도를 표현하겠금 하였다.

통치계급의 날카로운 두 번째 공격(국가자본주의)은 노동계급의 투쟁을 촉진시켰다. 1870년부터 1914년까지 자본주의 체제의 지속적인 확장과정은 노동자들의 마음 속에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켜 이후 계급대립과정을 준비 않 된 채로 맞이하게 하였다. 반면 자본주의 위기의 심화과정은 국가로 하여금 경제에 직접적으로 개입, 통제하겠금 하여, 이로인해 노동 계급이 정치적 수준에서 투쟁하게 함으로서, 노동자의 마음 속에 있었던 정치-경제 분리라는 허상을 벗겨버렸다. 파업이 불법화되고 경찰과 판사, 감옥이 작업현장의 감독업무를 대행하고 군대가 안면몰수하고 이를 지원하게 됨에 따라 현장노동자들의 투쟁은 공장 내로만 또는 노동조합의 협상방식으로만 제한될 필요가 없음이 명확해 졌다. 노동계급이 새로운 발상을 획득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간 온건한 대응을 조직화하여 일정정도의 성공까지 경험한 기존의 투쟁방식을 벗어 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위기는 이 문제를 명확히 드러낸다.

노동자 평의회는 (이러한 객관적 상황의) 논리적 결론이며 많은 나라에서 창조된 것이었다. 나라마다 그 특징 및 발전단계가 달랐지만, 평의회는 그 투쟁방식과 구조에 있어 다음과 같은 공통점 즉 맑스가 파리코뮨에서 얼핏 보았던, 노동계급의 경제적 해방을 위한 정치적 형태로서 노동자 권력의 진일보한 표현체였다.

 

평의회 건설 - 주체적 요인

 

전쟁에 휩싸인 서구유럽의 다수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금속산업으로 유입되므로서 사실상 잠재적인혁명적 보루가 다수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의 객관적 조건이 지역적으로 확장되고 있었을지라도 그 혁명적 보루의 창출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친 요인은 그 지역 노동운동의 주체적 대응이었다. 비록 전쟁은 많은 사람들을 운동에 결합시켰지만 그 운동이 혁명적 형태를 지니게 되는 것은 종종 소수의 선진 활동가에 의한 목적의식적 활동에 기인했다. 이들이 존재하는 지역에서는 개량주의의 막대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평의회 건설의 단초가 마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량주의는 이러한 소수의 선진활동가들을 정치 수준의 선진 활동가와 현장수준의 선진 활동가로 분리시킴으로서 결정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소위 선진 활동가(vanguard)라는 단어는 여기에서 적합하다. 왜냐하면 선진 활동가란 말은 혁명정당이나 소비에트의 지도력을 나타내기에는 아직은 이른 수준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비록 이 조직수준은 혁명정당이나 소비에트의 수준으로 가기위한 하나의 단계일지라도 말이다.

전쟁 전에 클리드사이드의 전투적 현장 활동가들은 자본가 및 관료주의적 노조에 대해 공개, 비공개 투쟁을 교차하며 어렵사리 현장조직을 건설했다. 유사하게 독일의 ObleuteDMV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면서 공장 내에서의 지도력을 구축했다. 이러한 사전적인 조직화 작업은 1914년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투쟁은 자본주의 사회 전체에 대한 이슈라기 보다는 개별 자본가에 대한 일상적 이슈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사소하면서도 가시적인 준비작업이 없었더라면 노동자 평의회의 건설을 더욱 어려웠을 것이었다.

러시아에서는 경제적 투쟁조차 불법화되었던 상황으로 인해소비에트가 스스로 솟아오를 것이라는 신념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서구 유럽의 경우는 다른데, 그 이유는 견고한 개량주의의 영향력이 존재하고 있어 현장조직 건설과정(이는 특정조건에서는 노조와는 독립적으로 활동함)에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설초기에 현장조직은 관료적인 노동조합 조직의 보호 하에 만들어졌다. 현장조직 대표자들(shop stewards)은 비록 이후에는 독자적인 현장지도력으로 활동했지만 그 초기에는 작업장 내에 노조를 조직하기 위한 수단으로 설립되었던 것이다. 당시 현장의 전투적인 선진 활동가들이 비록 노조라는 공식적 운동 틀 내에 있었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전쟁 이전에 몇몇 사회주의자들은 노조의 주요 직책을 장악함으로서 위로부터 조직되는 노조의 투쟁방식을 변화시키고자 했다.또 다른 사람들은 혁명적인 노조를 대안으로 하여 조직했으나(이러한 예는 영국의 SLP, 독일의 ‘Lokalisten', 이태리의 무정부주의자들에서 나타남) 이러한 방식은 실패로귀결되었다. 노동대중을 지원한다는 명분만으로 건설된 어떤 조직도 진정으로 작업장에 기반한 노동자들의 조직을 대신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 기반한 투쟁조직의 조직화정도를 과장해서는 않된다. 단지 클리드 사이드에서 조직된 감시 위원회만이 독자적이고 조직화된 기반을 가졌다. 베를린과 튜린에서 각 현장조직 간의 연계성은 느슨했다. 그러나 세 지역에서 공동적으로 나타난 중요한 점은 현장 활동가간의 네트워크가 구성되어 있어 그 네트워크에 의해 일상적인 계급투쟁을 지원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네트워크가 존재했기 때문에 현장조직 지도자들은 전시의 열악한 상황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혁명적 보루의 두 번째 본질은 정치적 선진 활동가들이다. 1914년에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셰비키의 조직 및 능력에 필적할 만한 정치적 선진 활동가는 없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노동자 평의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노동자 국제주의적 신념을 공유했던 사회주의자였고 이들도 또한 정치-경제의 분리문제를 극복하고자 노력했었다. 정치적 선진 활동가는 작업현장의 전투적 선진 활동가가 직면하지 못한,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그람시의 말을 빌자면, 작업현장의 전투적 선진 활동가는 노동자의자생적조직에서 활동했다. 따라서 이들은 현장 노동자의 직접적 지지에 기반한 투쟁이라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으나 동시에 현장 노동자들이 보여주는 투쟁성의 파고에 의존하게 되는 단점이 있었다. 이들은 공장 내에 독자적인 조직에 기반하여 행동을 취할 수 있었지만 목적의식적으로 대중투쟁을 창조하지는 못했으며 단지 이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작업현장의 전투적 선진 활동가는 단지 외적 상황이 노동자들로 하여금 노조와 협상이라는 기존 실천방식을 넘어 새로운 방식으로 행동하겠금 할 경우에만, 노조에 대응하여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대조적으로 정치적 선진 활동가들은 애초부터 독자적으로 조직될 필요성이 있었다. 그 조직은 혁명적 이념을 공유하고 있는자발적조직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주의 신념을 명확하고 효과적으로 보여주어야만 했다. 간단히 말해 혁명주의자들은 대중운동이 일어나기 전에도 자신의 입장을 조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명확히 하여야만 했다. 자본주의 하에서 소수일지라도 효과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혁명주의자들은 개입주의적 힘 즉 정당으로 자신을 조직해야만 했다. 전쟁 발발 이후 혁명주의자들을 압박했던 계엄령 상황에서 그들은 당 건설을 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선진 활동가는 매우 중요하다. 개인적인 희생을 무릅쓰며 많은 혁명주의자들은혁명적 보루에서의 투쟁을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의 노력은 전쟁 이전에 전개된 사회주의 운동으로부터도 전혀 지원을 받지 못했다. 정치적 선진 활동가는 노동계급의 집단적 힘을 동원할 수 있었던 작업현장의 전투적 선진 활동가로부터도 떨어져 있었다.

정치적 혁명주의자와 작업현장의 전투적 선진 활동가간에는 엄격하게 구분되지는 않았다. 종종 동일한 인물이 정치적으로 혁명적 사회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능력있는 현장 활동가였다. 그러나 한 사람이 두 가지 일을 했다는 점이 당시 정치영역과 작업현장의 영역이 구조적으로 연계되었다는 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평의회의 건설과 그 운영 경험이 있기 전까지,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은 실천적으로 정치적 투쟁과 경제적 투쟁을 연계시킬 방법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주장과 논쟁은 노동자 평의회 운동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매우 중요했다. 전시상황에서 노동운동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현장 노동자들의 투쟁은 정치적 사고를 필요로 했다. 정치적 수준의 사고 없이는 우리가 어떻게 개량주의자의사회적 평화에 대한 주장을 반박하며 다른 공장과 산업에서 전개되는 파업들을 연계시킬 수 있겠는가?. 존 맥클레인이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의 필요성을 역설하지 않았더라면 노동자 물타기 전략(신규노동력 투입)에 대한 반대를 통해 자본주의 전쟁의 목적을 폭로하는데 까지 나가질 못했을 것이요, 19181월 징집반대를 위한 투쟁을 선도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독일의 경우 Liebknecht의 용기는 Obleute의 첫 번째 대중파업을 가능케 했으며 이로인해 스파르타쿠스의 정치적 활동은 대중적인 반전운동의 길로 나갈 수 있었다. 튜린의 ordinovisti는 당시 미약한 세력이었으나 노동운동의 세력들을 결집시키는 과정에서 그들은 공장평의회를 향한 힘찬 추동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두 수준의 선진 활동가들은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중요한 일을 촉진시켰다. 이 중요한 일이란 정치적 투쟁과 경제적 투쟁 간의 간극을 연계시키는 사회주의적 실천을 촉발시켰다는 점이다. 노동자 평의회의 근원지는 대개 사회주의자들이 그들의 신념을 작업장과 긴밀히 연계시켜 그 작업장이 노동자 정치조직 건설의 기반이 되었던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평의회 건설과 성장은 계획되거나 또는 자생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선진 활동가들은 평의회 건설을 결정할 수도 없었으며 동시에 목적의식적 개입없이 평의회가 자생적으로 발생하여 개량주의자의 대안에 도전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현장노동자의 지도력을 획득하기 위한 선진 활동가의 신념에 찬 도전으로부터 발생되었던 것이다.

당시 평의회는 혁명적 보루의 건설을 위한 한 요인이었다. 평의회는 다시금 동일한 형태로 재창조될 수 없으나 우리는 자본주의의 위기와 이에 대한 노동계급의 저항이 다시금 발생되리라는 점은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어떤 누구도 미래의 투쟁을 발생시킬 수 있는 객관적 위기를 선택할 수 없으나, 우리는 과거의 투쟁과정에서 발생한 노동계급의 주체적 대응과 이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교훈은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당시 혁명주의자들은 운동 내에 축적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혼란스럽고 당면과제 하나 하나를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그러나 조만간 혁명의 물결이 높아지자, 그들은 자본주의를 철폐할 실질적 가능성을 창조했다. 만약 느슨한 혁명조직과 현장 활동가의 네트워크가 과거 투쟁의 교훈에 무장된 견고한 조직으로 발전했다면, 그들은 얼마나 힘찬 투쟁을 할 수 있었을까!.

 

행동으로 보여주는 노동자 민주주의

 

노동자 평의회는 인위적으로 창조되지는 않았다. 사회적 몽상에 빠져있던 19세기 유토피아 사회주의자 조차도 현실에 근거한 구체적인 미래사회상을 제시할 수는 없었고 단지 그 가능성만을 모색했었다. 러시아 소비에트조차 사회주의에 대한 확실한 상을 제시할 수 없었다. 흔히 국제적인 투쟁 기간이 있고 자본주의 위기로 인한 황폐화를 복구하기 위한 기간이 있어 생산력이 다시금 발전되곤 한다. 단지 그때야만 인류는 물질적 부족과 사회적 착취를 제거할 수 있다. 반면 노동자 평의회는 어떻게 새로운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고 이를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창조적 힘을 분출케 하였다.

노동 계급은 자신의 국가를 창조하지 않고는 다른 어떤 수단으로도 사회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 이러한 노동 계급의 국가는 의회주의를 근간으로 한 국가형태와는 매우 다르다. 부르조아 민주주의는 가식적인 평등주의를 통해 노동계급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마지못한 동의를 얻어냄으로서, 대규모 독점자본의 지배를 매우 효과적으로 보증해 준다. 이는 다음의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경제적 불평등을 은폐시키는 정치적 평등:

모든 주권자는 그들이 한 표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가정된다. 그러나 자본의 흐름을 관리하고, 투자를 철수함으로서 나라 및 특정산업을 황폐화시킬 힘을 가진 소수 자본가와 단지 살기위해서는 자신의 노동력에만 의존해야 하는 다수의 노동계급간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지역에 기반한 투표방식:

의회주의 선거는 지역적 분할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노동자로 하여금 집단적인 계급이익에 기반하기보다는 개인적시민으로 스스로를 간주하겠금 한다. 가정을 가진 고립된 개인으로서, 노동계급은 쉽게 자본주의 매스미디어와민족국가이익이데올로기에 포섭된다. 대조적으로 작업장에서는 이익의 실질적인 갈등이 국가 간이라기 보다는 자본과 노동으로 나타난다.

대표에 대한 통제 불능:

의회주의의 지역에 기반한 선거구 구획방식은 자본주의 사회의 실질적인 이익구분을 은폐하는 가상물이다. 지역 기반 선거구는 집단적 의사결정의 결절점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국회의원은 주권자의 일상적인 통제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국회의원의 정치생활을 좌우하는 것은 이들이 대변해야할 주권자 대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왜냐하면 국회의원들은 몇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선거에 의해서만 심판받기 때문이다. 이는 의회에 대한 대중의 효과적인 영향력을 제거시킨다. 선거는 기껏해야 이미 결정된 사항에 대한 순간적 의례일 뿐이며 대중들은 자신의 미래를 진정으로 결정할 수 있는 수단으로부터 멀어진다.

일상생활로부터 정치적 활동의 제거:

앞서 논한 의회주의로 인한 근본적 결과는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간에 대중들이 의회를 통해서는 자신의 삶을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 갈 수 없으며 나아가 그 개선의지를 포기하겠금 하는 것이다. 정치는 지루하며 무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의회에서의 논쟁 배후에는 임명직 고급 행정 관료와 판사가 자리 잡고 있다. 억압이라는 국가의 주요기관-경찰,감옥,군대-에는 가장된 민주주의조차 없다. 경찰간부와 장군은 그들은 고용한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 자본주의 국가의 핵심적 힘은 노동대중 밖에서 이들의 이익에 반하여 조직된다.

따라서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역할은 노동대중에게 자신이 국가를 통제하고 있다는 환상을 주어 자본가 계급의 실질적인 통제력을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공장과 사무실의 일상생활에서 노동자의 생생한 경험은 노조와 같은 집단적 조직에 의해서만이 작업장과 관련된 이슈에 대해 조그만한 발언권이나마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알게 한다. 그러나 의회 민주주의의 효과는 이러한 작업장에서의 투쟁경험을 억압하고 다시금 대중을 위한, 대중에 의해 만들어진 법에 기반하여 통치된다는 자유주의 국가라는 환상을 유포시킨다. 이러한 환상 뒤에서 자본가 계급은 실질적 자유를 만끽하며 법제정 및 국가운영의 포괄적 틀거리를 통해 독재를 하게 된다.

소비에트에서 그 최상의 형태를 보여주는 노동자 평의회는 의회주의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다. 정치권력이 궁극적으로 사회적 부에 대한 통제에 기반하기 때문에, 소비에트는 직접적으로 공장의 현장조직에 기반하여 조직된다. 평의회의 장점은 기존의 국가권력을 마비시키고 뒤흔들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이 생산력에 대해 행사하는 통제력으로부터 도출된다. 서구의 평의회는 작업장 현장조직과 노동자 통제가 정치권력장악을 위한 운동에 있어 분리할 수 없는 요소였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노동계급은 그 수에 있어 자본가계급을 월등히 앞서기 때문에 자신의 통치를 관철하기 위한 기만적 방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평의회의 기반은 지역에 기반한 선거구와 같은 허구적 단위가 아니라 사회의 발전과정에서 자연스레 나타나는 생산단위이다. 집합적 의지는 공장과 사무실에서의 토론을 통해 표현된다. 노동자들은 매일매일 집단적으로 만나게 되는 곳에서야만 진지하며 지속적인 논쟁을 수행할 수 있으며 나아가 민주적 선거제도를 현실화될 수 있는 감시체계를 만들 수 있다. 노동자 평의회가 작업장에 기반한다는 점은 대중의 실질적 참여와 대표의 소환권을 가능케 한다. 지역에 기반한 투표박스와는 달리, 작업장은 모든 인간의 지속적인 생활지점이며 이러한 현실은 평의회 대의원으로 하여금 임무를 제대로 못하게 되면 즉시 교체될 수 있는 점을 의미한다. 소환권은 형식적인 법률에 쓰여진 것이 아니다. 이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있어 더 이상 5년 간격의 선거에 의존하지 않으려는 노동자의 삶과 투쟁으로부터 발생되는 것이다.

소환권과 관련하여 우리는 또 다른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즉각적인 소환권은 의사결정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부르조아지는 군대, 경찰, 감옥이라는 수단에 직접적으로 의존한다. 단지 러시아에서만이, 그리고 독일에서는 어느정도, 소비에트가 대중에게 적대적인 강제력을 대중을 위한 강제력으로 역전시킬 수 있었다. 그 방법은 간단하다. 대중에게 무기가 주어지는 것이다. 노동자 군대와 민주화된 병사위원회는 위로부터 통제받지 않고 오히려 확장되어 소비에트가 되며 현장노동자로부터 성장한다. 소비에트 국가에서 권력은 완전히 변화된다. 이전에 국가는 대중으로부터 소유권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했다. 노동자 평의회 국가는 소유라는 권력으로부터 대중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국가는 더 이상 대중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대중이다.

그러나 권력은 물리적 힘 그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결국 서구자본주의의 경우 노동계급의 공개적인 투쟁시기에는 주로 억압적 폭력에 의존하나, 통치의정상적방식은 좀 더 복잡하다. 현재 자본주의 체제에서 주요 의사결정은 이윤율 법칙이 강제되는 경제적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러한법칙은 의회에서 논의되어 본 적이 없다. 맹목적인 시장경쟁의 법칙은 모든 자본주의 국가를 자신의 법칙 하에 종속시킨다. 확실히 경제적 힘에 대한 통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없는 것이다.

노동자 평의회는 민주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어 경제에 대한 노동자 통제를 수행한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마치 정치적 상부구조가 경제적 토대와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듯하지만 소비에트에서는 정치와 경제 간의 실질적 관계를 중요시 한다. 공장에서 생산자의 힘이 정치적 수준인 국가에서 동원되고 조직된다.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은 일치된다.

정치와 경제의 결합은 우연한 산물이 아니다. 서구유럽에서 노동계급의 의식이 성장함에 따라 정치와 경제의 결합은 더불어 발전되었다. 노동자들이 노조 관료주의로부터 독자적인 힘을 지니게 됨에 따라, 그리고 생산의 영역에서 자본가의 권력에 도전할 힘을 지니게 됨에 따라, 그들은 국가권력을 장악할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부하린에 의하면 노동자 평의회는 소비에트 형태를 띄게 될 때, 자신의 힘을 구체화하게 된다:

 

만약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이 경제적 수준에서의 혁명을 위한 수단이 된다면 그때야말로 경제정치는 하나로 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국가자본주의라는 체제의 마지막 형태에서 금융자본의 독재 하에 정치와 경제가 통합되는 경향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과거 체제 내 모든 관계를 전복시키게 된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재는 필연적으로 경제적 독재를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지역적 구분에 기반한, 경제적 토대와 분리되어 있는 자본주의 국가는 노동자 권력을 실현시킬 수 없다. 개량주의자들이 자본주의 국가에 부여하는 또 다른 의미에도 불구하고 의회주의에 기반한 국가체제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보호하게 된다. 대조적으로 노동자 평의회는 노동계급의 의지가 조직화된 형태이다. 따라서 착취자의 이익이 착취받는 자의 이익과 화해할 수 없듯이 의회주의는 노동자 평의회와 화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단지 노동자 평의회는 레닌이 말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3가지 원칙을 충실해야 한다.

 

첫째, 투표권자는 노동하는, 그리고 착취받았던 자야 한다; 부르조아는 배제시킨다. 둘째, ...... 모든 관료적 형식주의 및 선거권의 제한은 철폐된다. 인민 스스로 선거의 절차와 시기를 결정하며 어떤 대표자라도 소환시킬 완전한 권리를 가진다. 셋째, ......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첫 발은 전체 인민이 행정기술을 학습하고 스스로 행정전문가가 됨으로써 시작된다.

 

통치방식에 있어 부르조아 계급과 노동계급간의 근본적 적대성은 소위 중앙파에 의해 애매모호해 지곤 하였다. 1917년 멘셰비키는 임시정부와 소비에트가 평화적으로 공존하길 희망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에 몸담았던 자들이 191710월 혁명에 의해 건설된 노동자 국가를 분쇄시키기 위해 가장 반동적인 장군이었던 코닐로브와 손잡았다는 사실은 소비에트로 권력을 집중시키던지 아니면 러시아 노동운동을 피로 물들이던지 간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의회를 넘어서는 조직과 의회간의 공존 필요성이라는 중앙파의 생각은 독일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독일 혁명 발발의 초기에 카우츠키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발표했다; ‘국민 의회(부르조아 의회)와 노동자, 병사 평의회는 둘 다 모두 필요하다. 이들 두가지 제도는 각각 자신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 이중권력의 불안정한 조건에서 의회와 노동자 평의회는 특정 기간동안 공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자본주의는 코닐로프나 우익 사민주의자인 노스케와 같은 인물을 통해 자신들만의 정치적 재편을 시도했다. 독일에서 이들은 러시아보다 노동계급의 혁명을 분쇄하는데 더욱 성공했다. 이들의 반동적 공격은 19193월에 극치를 이루었는데, 당시 2백만의 독일민중들은 카우츠키가 피력한 노동자 평의회와 의회와의 공존 논리를 따라 정부로 하여금 노동자, 병사 평의회를 제도화시키도록 하기 위해 파업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독일민중은 정부로부터 총알세례만 박고 수백명이 죽게 되었다. 사실상 이 사건이 발생되기 5개월 전에, 레닌은 카우츠키의 견해가 현실화될 결과를 이미 다음과 같이 예측했었다.

 

소비에트에 고함: 투쟁해라. 하지만 국가권력을 당신의 손에 장악하지 말라. 그리고 스스로 국가조직으로 전화되지 말아라 -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계급협조 및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조아간의 사회적 평화협정을 주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치열한 투쟁의 와중에서 이러한 입장이 투쟁을 지도하여 결국 굴욕적인 패배를 맞게 되리라는 점을 상상하는 것은 정말로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게 한다.

노동자 권력은 자본주의 계급의 정치적 권력이 기반하고 있는 군사적 강제력과 의회주의적 형태를 분쇄함으로서만 건설 가능하다. 노동자 권력을 형성하는데 있어 노동자 평의회와 의회간의 휴전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노동자 평의회, 정당 그리고 노동조합

 

노동자 평의회는 대중 투쟁의 직접적인 조직형태이다. 노동자 평의회는 당면문제에 대한 해결을 위해 각 작업장으로부터 선출된 대표에 의해 구성된다. 이들 대표들은 연대를 폭넓게 하고 각 지역 노동자들을 단일대오로 모이도록 하기위해 회합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작업현장에 기반한 조직은 또 다른 노동자의 전형적인 조직-정당과 노동조합-과는 다르다. 대중투쟁의 조직으로서 노동자 평의회는 단지 사회적 위기의 시기에 창궐한다. 이러한 시기의 주변 맥락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전통적 조직을 넘어 혁명적 행동을 취하도록 요구된다. 따라서 노동자 평의회는 자의적으로 또는 사전에 주어진 공식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새로운 운동방식으로 자신들의 당면문제를 해결하고자 할때 노동자 평의회는 조직되어지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당과 노동조합은 적어도 부르조아 민주주의 하에서 자본주의의 불안정기 또는 안정기 내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노동자 평의회는 정당과 혼동되어서는 않된다. 정당은 정치적 신념에 기반한 자발적인 결사체이다. 노동자 평의회의 구조는 생산단위의 구획에 기반하여 형성되는 것이지, 개인의 정치적 신념에 의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 평의회에 대한 개량주의자의 반대에 직면하여 서구에서의 평의회는 특수한 당면문제 및 이에 대한 투쟁이 정치적 이슈로 확장되면서 발생되었다. 의회가 자본주의의 당면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토론장 소이듯이, 노동자 평의회는 노동자의 요구를 해결하기 위한 공론장이 된다. 이때에 이르러 낡은 문제해결방식은 이미 효과를 상실하게 됨이 명확해 진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가 경제를 조직화하는 경로를 따라 조직되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에서자생적인조직형태이다. 노동조합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계적 속성을 드러낸다. 그들은 노동계급의 각각 다른 집단에 기반하고 있다. 어떤 노동자는 지역적이라기 보다는 작업장 수준에서 조직되기도 한다. 따라서 노동조합은 단지 특정부문 노동자의 개별집단적 요구 만에 부응하게 된다. 또한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경제적 투쟁에만 자신의 힘을 집중하여 그 이상(정치적 이슈에 대한 투쟁)을 넘지 못한다.

노동조합은 오랜 기간동안 발전과정을 거쳐 종종 혁명적 시기가 아닌 때에도 존재하는, 지속적 형태를 유지한다. 서구유럽에서 노동조합은 임금과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자본주의의 안정적인 틀거리 내에서 활동해 왔다. 노동조합은 전문가를 고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노동력의 가격에 대해 자본가와 협상하겠금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동조합이 임노동관계 자체를 철폐하지는 못한다(만약 임노동 철폐가 노동조합의 기능이라면 노조 내 전문적 관료들은 곧 사라지게 될 수밖에 없다)

한편 노동자 평의회는 자본주의 체제의 틀거리 내에서 협상이 불가능해져서 전체 노동자가 단결해야만 승리를 쟁취 할 수 있는 경우에만 발생가능하다. 따라서 노동자 평의회는 분파주의와 경제주의의 한계를 돌파하여야만 하며 이를 통해 전체 노동자의 투쟁을 올바로 지도할 수 있게 된다. 위기의 시기에 등장하는 계급 조직으로서, 노동자 평의회는 정치적, 사회적 권력의 문제를 제기하게 되며 이를 통해 소비에트의 권력기반을 형성하게 된다.

러시아에서 소비에트는 10월 혁명 이전에 조차 운송, 식량배급, 공공질서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독일에서도 노동자 평의회는 (자본가계급 및 국가의) 탈동원 시도에 대응해야할 뿐만 아니라 운송 및 식량배급, 공공질서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영국과 이태리에서도 초기적 형태의 노동자 평의회는 노동조합의 활동영역을 넘어 전쟁과 평화, 그리고 노동자 통제 등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당과 노동조합 그리고 노동자 평의회간에는 서로 중첩되는 부분이 있다. 노동자 평의회는 각각의 노동자 정당들로 하여금 서로간의 연대 및 전체에 대한 리더십 획득을 위해 경쟁하는 공간이다. 노동자 평의회는 그 출발점으로서 노조에 의해 구축된 노동자간의 기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게 된다. 그러므로 1차대전시 영국의 현장활동가(shop stewards)가 노동자 평의회 건설의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평의회, 정당, 노동조합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노동자 평의회의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는 자신의 힘으로만은 혁명에 성공할 수 없다. 노동자 평의회는 최종적인 계급투쟁의 단지 일부분으로서, 또 다른 주된 역할은 혁명정당에 의해 수행된다.

191710월 혁명은 노동자들이 절대적인 국가권력을 성취한 유일의 사건이었다. 그들의 성공은 볼쉐비키의 실천에 의해 가능할 수 있었다. 서구유럽에서는 한때 레닌주의적 정당의 이념이 거의 논의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당의 문제는 노동자 평의회의 연구에 있어 가장 본질적인 부문이다. 러시아의 성공과 서구유럽의 실패라는 경험적 사실은 혁명주의적 정당과 노동자 평의회가 노동자 국가를 건설하는데 있어 필수요소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베를린에서의 투쟁은 노동자 평의회를 포함하지 못한 채, 혁명을 시도했던 정당의 어리석음을 정확히 보여준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어떤 혁명적 정당도 노동자평의회를 통하여 중앙집중화된 권력장악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그 실패는 명약관화하다. 마찬가지로 어떤 노동자 평의회도 혁명적 대중정당의 지도를 받지 않는다면 이 또한 실패는 불을 보듯 뻔하다.

혁명기간에 조차 정당은 노동자 평의회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당의 문제는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다-가령 당원증을 발행하거나 당지부를 건설하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혁명은 단지 작업현장에 있는 혁명주의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독일에서 카이저 정권을 전복한 대다수의 민중들은 개량주의적인 사회민주당의 이념을 추종했다. 비록 혁명정당이 선진 노동자의 대부분을 조직하고 있을 정도로 그 규모가 클지라도,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이들은 소수이다. 봉기의 순간에 조차, 혁명정당은 모든 공장의 노동자 그리고 다양한 이념적 스팩트럼을 지닌 다양한 노동자들을 정당에 가입할 수 있는 정도로 유연하지는 못하다. 사실상 모든 사람을 가입시키는 것은 자신의 정치적 원칙을 포기하는 것이다. 단지 노동자 평의회만이 선진적인 혁명정당과 대중 간에 가교역할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노동자 평의회의 조직화 과정

 

노동자들의 혁명 조직은 위기의 시기에만이 가능하다. 이 조직은 혁명의 순간에 거대한 걸음을 시작하고 대중들의 의식을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는 역동적 힘이다. 글레스고우, 베를린, 튜린에서 집단적인 대중조직이 성장 발전한 경로는 러시아에서의 경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앞서 언급했듯이, 19712월 혁명은 소비에트와 더불어 공장 위원회라는 현장조직과 동시적으로 형성되어 정치권력을 창출하였다. 러시아 노동자 마음 속에는 이미 정치과 경제 간의 연계성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국가에 대한 전복이 이루어졌던 짧은 기간에 동시적으로 자본주의의 주요 보루(역주: 작업현장의 통제권)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서구유럽의 경우 노동자 평의회의 발전과정은 매우 더디게 진행됬고 경제적 투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정치적 투쟁(분파적 경제투쟁에서 국가수준의 계급권력에 대한 투쟁으로)으로 진전하고 있었다. 노동자 평의회는 가장 근본적 수준에서 대안적 조직 및 활동방식을 제출함으로서만이 개량주의자의 영향력을 제거할 수 있었다. 트로츠키가 제안했듯이, 이중권력상태는 갑자기 붕괴되고 소비에트는 마지막 봉기를 전후하여 단 몇 일만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기존의 강력한 개량주자들의 보루를 약화시키는 과업은 장기간의 시일을 필요로 했으며 이는 서구유럽에서의 평의회 건설과정이 러시아의 경우와 다른 핵심 지점이었다.

클라이드 사이드에서 이러한 과정은 현장 활동가(stewards)들이 각각의 군수공장을 연계시키고 전투적인 숙련공들이 직면한 당면 이슈를 위해 투쟁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나가지 못했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단지 금속산업 숙련공들만을 조직했으며 맥클레인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반전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지 못했다. 비록 그 의도에서는 야심찼지만, 튜린의 공장평의회 운동은 영국에 비해 약간만 전진했을 뿐이었다. 튜린의 경우는 기술수준과 상관없이 모든 노동자의 단일대오로 묶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심각한 한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공장 평의회는 튜린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넘지 못했으며 노동자 통제를 위한 투쟁은 국가권력 장악이라는 문제로 까지 상승되지 못했다. 비록 튜린의 노동자들이 분파주의로 인한 수동성을 보인 영국의 클라이드 사이드 노동자보다 한 발짝 앞서지만 말이다. 단지 베를린에서만이 운동의 규모가 러시아와 비교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또한 이중권력 상황이 전개됬던 경로는 러시아의 페트로그라드 보다는 글레스고우와 튜린의 경우와 더욱 유사했다. 베를린의 경우 전쟁 이전부터 노조에 대한 투쟁의 네트워크가 존재했으며 이를 통해 전쟁발발 이후 즉각적인 이슈에 대해 투쟁을 조직하고 연대하여 대중적인 정치적 행동으로 나아갔다. 독자적인 현장투쟁력이 없는 곳에서는 개량주의가 노동자, 병사 평의회의 건설을 성공적으로 방해하였다는 사실은 영국과 이태리와 마찬가지로 독일에서의 투쟁이 러시아보다는 더욱 어려웠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노동자 평의회를 건설하고 개량주의의 반대에 직면하여 정치적 행동으로 전진해나가야 하는 문제는 극복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아마도 서구 유럽에서 노동자 평의회의 건설과정은 좀 더 시간이 걸려야 하는 문제이지, 이것이 서구유럽에서의 실패가 필연적이었다는 주장으로 까지 확대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핵심적인 문제는 평의회 운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서구 유럽 평의회 운동이 러시아에 비해 뒤쳐졌을 지라도, 그들은 분명히 전진하여 자신들의 소비에트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서구유럽의 문제는 노동자의 선진 활동가 부위에 의해 수행되야만 하는 리더십이 없었다는 점이다. 러시아에서의‘7이후에 벌어진 사례에서 보이듯이, 혁명정당의 리더십 부재는 노동자 평의회를 정체시키고 결국 소멸하겠금 했다. 소비에트 조차도 그 내부의 관료주의 병폐로 인해 파괴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평의회는 독자적으로 민중들을 조직하여 규율잡힌 투쟁체를 만들었으며 이를 통해 산업 노동 계급의 집단적 힘을 구체화했던 것이다 - 그러나 그러한 노동계급의 투쟁체가 올바른 시기 그리고 올바른 전략을 가지고 투쟁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리더십이 핵심적인 요소인 것이다.

서구유럽 세 지역 사례에서는 이러한 리더십이 부재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191710, 혁명정당과 소비에트 그리고 민중들은 서로 긴밀히 연계되어 운동을 앞으로 전진시켰다. 트로츠키는 이것을 서로 맞물린 톱니바퀴에 비유했었다. 서구유럽에서는 이러한 연계성은 형성되지 못하였다. 매순간 노동자 평의회뿐만 아니라 전체 노동운동에서 취약점이 발생되었고 이러한 취약점은 혁명적 리더십의 부재 및 실패로 인해 발생하였다.

대개 노동자 평의회에 내재된 민주주의라는 속성은 그 자체에서 혁명적 리더십을 형성하기 어렵게 한다. 이러한 속성은 매순간 대중의 의식이 급변하여 노동자 평의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비록 치열한 계급투쟁이 혁명적 위기국면을 촉진시키더라도, 대중은 단일한 사회주의적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지 못하고 기존의 개량주의적 사고에 머무를 수 있다. 그들은 투쟁이라는 직접적 경험을 통해서만 혁명적인 사회주의 의식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혁명주의자가 노동자평의회를 촉발시키더라도 그 평의회는 확장되어 각종 노동대중의 분파들을 포괄하게 되고 이에 따라, 노동자 평의회의 민주주의적 운영구조는 매사 평의회의 입장에 반대하는 개량주의자들을 통제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물론 혁명주의자들이 위기의 시기에 그들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여 혁명적 사상이 노동계급 내 다수의 지지를 받게 된다면 개량주의자라는 내부의 적을 제어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당 조직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1915년부터 20년 사이에 서구유럽에는 이러한 당 조직이 없었다.

리더십의 부재로 인한 약점은 운동의 모든 수준에서 붕괴의 조짐을 유발시킨다. 이러한 문제는 세 곳의혁명적 보루에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났다. 클라이리 사이드에서 좌파가 직면한 주된 어려움은 19152월 비공식적인‘2펜스파업에서 나타난 전투성을 어떻게 하면 좀 더 조직화시킬 수 있는가였다. 금속산업에서 자신의 입지를 방어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노동자들은 전시 국가자본주의 체제에까지 대결구조를 형성하였다. 이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전시 국가자본주의체제를 정당화하는 국수주의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었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가 앞으로 전진하지 못한 궁극적 원인은 대부분의 현장 활동가들이 개별적으로는 이러한 정치전략에 대해 확신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 노동대중으로부터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맥클레인의 선전선동그룹은 그 수가 너무 작아서 이 과업을 성공할 수 없었으며 반면에 현장 할동가(shop stewards)들은 작업장에서 전투적인 노동조합 활동가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밖에서 이들은 혁명적 사회주의자였지만). 경제적 이슈에 대한 투쟁으로부터 정치적 이슈에 대한 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노동자 평의회 운동은 금속산업 숙련공의 선진활동가 이외에는 대중적 영향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활동을 멈추게 되었다.

독일에서 객관적 상황은 노동자 평의회 운동에 대해 확실한 출발을 가능케 하였다. 패배한 국가의 수도에는 금속산업의 전투적 노동자들과 정치적 수준에서 활동하는 혁명가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동자 평의회 조직을 급속히 발전시켰다. 그러나 노동자 평의회가 정치적 권위에 대한 대안으로 부상했다는 사실은 그 평의회를 사회주의 국가로 전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책임감으로 다가 가겠금 하였다.

1918119, 카이저 왕정이 붕괴되었을 때, 대중들의 의식수준은 그들의 혁명적 행동에 뒤쳐져 있었다. 이러한 징후는 며칠 후 사민당이 베를린 평의회 집행위원회에서 다수파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몇주 내 위기로 인한 상황은 대중들로 하여금 좌측으로 선회하겠금 하였고 혁명주의자들에게 평의회에 대한 지도력을 폭넓게 행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들어, 현장활동가와 스파르타쿠스주의자간의 연계성 부족은 문제를 크게 발생시키기 시작했다. Obleute는 투쟁 방향성을 상실한 상태로 남겨져 있었다. 뮬러와 그의 전투적 동지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는데, 한때는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경제적 투쟁을 보류하기도 하다가 어떤 때는 그 반대로 투쟁방향을 선회하기도 하였다. 대다수의 혁명주의자들은 노동자 평의회 내에서의 지도력 구축에 서툴렀기 때문에 평의회라는 수단을 포기하고 각자의 개별적 투쟁방식으로 분산되기도 하였다. 단지 에버트만이 혁명주의자의 혼란과 무능력으로부터 이익을 취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은 그에게 노동자 평의회 운동을 분열시키고 그 핵심부분을 제거할 기회를 주었다.

당시에 베를린 노동자 평의회는 사실상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근접거리에 있었다. 정치적 투쟁과 경제적 투쟁이 결합되면서(비록 상층에서는 혼선이 있었지만) 작업 현장 조직과 무장된 군대간의 연대는 심화되었다. 행동을 통한 혁명과정은 급속도로 진행되었으며 19192월에는 사민당이 베를린 평의회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 즈음하여 혁명세력에게 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월 봉기의 결정적 실수는 혁명세력에게 크나큰 비용을 떠 안겼다.

튜린에서의 모든 상황은 공장 평의회의 발전으로 길을 터주었다. 그러나 나타난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새로이 창출된 조직은 그람시가 1919년 초기에 바랬던 소비에트의 형태로 발전되지 못했다. 재구성된 내부의 위원회는 평의회로 가기 위한 첫 단계였으나, 더욱 높은 수준인 정치적 형태로의 발전은 의지만으로는 성취될 수 없었다. 오직 이는 튜린이라는 혁명적 보루를 고립상태에서 해방시킬 구체이며 총체적 전략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것이었다.

다음의 세가지 문제가 글레스고우와 베를린 그리고 튜린을 괴롭혔다- 경제적 투쟁과 반전 투쟁간의 괴리, 혁명을 위한 정확한 시기선택, 각 혁명적 보루의 독특한 특성. 물론 이러한 장애물은 극복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의 경우 효과적인 리더십의 존재로 인해 이러한 어려움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볼셰비키의 성공과 서구유럽 혁명주의자의 실패하는 현상의 원인을 알기 위해 각 나라 혁명주의자간의 상대적 장점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러시아: 볼쉐비키 정당은 14년간의 경험을 지니고 있음; 200,000명의 당원(191710월 당시); 19176월 당시 320,000부수로 이루어진 17일 간격의 당 회보 존재.

독일: 반혁명 일주일 전에 창립된 공산당 존재(비록 스파르타쿠스주의자는 2-3년간 경험이 존재했지만); 3,000명의 당원; 독자의 수가 명확하지 못한 일간지 존재.

이태리: 몇 달간에 조직된 일군의 사회주의자 집단인 ordinovisti라는 조직 존재; 5000부수로 이루어진 2주 간격의 회보가 존재.

영국: 몇 년간 모여진 몇몇의 열성적인 지원가로 이루어진 맥클레인 집단 존재; 월간회보가 약 3,000부수로 3번밖에 출간되지 못함.

볼셰비키는 대중정당에 의해 수많은 작업장에 유포된평화, 빵 그리고 토지라는 단순한 구호를 통해 경제적 투쟁을 반전투쟁으로 연결시킬 수 있었다. 이 슬로건은 각각 노동계급 분파 및 농민대중을 단일 대오로 묶을 수 있는 물질적 힘을 지니고 있었다.

혁명의 정확한 시기선택은 1917년 러시아의 경우 적절했다. 6개월이라는 주어진 시간 내에서 혁명주의자들은 정치적 역사라는 시간개념으로 볼때 수세기에 달할 수 있는 사건들을 경험하고 고민했다- 짜르의 봉건주의로부터 자본주의 그리고 노동자 권력으로의 이행. 따라서 러시아 노동자들은 서구 유럽에서 수세기 동안 발전된 자본주의적 방어벽과는 싸울 필요가 없었다. 레닌주의 정당에 의해 수행된 혁명의 절묘한 시기선택은 자신의 뜻대로 도전을 보류하거나 진전시킬 수 있는 당의 능력에 기인한다. ‘6월의 날들에는 봉기를 자제하다가 10월 들어서는 전면공격을 감행한 것은 노동 계급에 대한 대중정당의 강력한 영향력과 규율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페트로그라드라는 혁명적 보루는 러시아의 지리적 광대함과 농촌지역의 미발달로 인해 나머지 지역으로부터 고립될 가능성이 높았다. 다시금 볼셰비키의 사상은 페트로그라드라는 혁명적 보루에서 태어난 사회주의에 그 내용을 풍부히 해주었으며 나아가 그들의 토지개혁 프로그램과 국유화 정책을 통해 타 지역과의 연계를 강화시켜 주었다.

서구유럽 노동자 평의회가 노동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필요조건을 탐색했던 초기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보면, 그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해답은 다음과 같다: 혁명정당에 의한 효과적인 리더십

그러나 이는 단지 사회주의로 가기 위한 출발점일 뿐이다. 볼셰비키는 사회주의로의 이행과정이 일세기 이상에 걸친 성공적인 혁명과정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었다. 서구유럽에서 대중적 혁명정당의 부재와 노동자 평의회의 연이은 패배는 소비에트 러시아를 고립시켰다.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노동자 국가는 전쟁과 산업붕괴를 거치면서 그 계급적 기반이 사라지게 됨에 따라, 스탈린주의 국가자본주의에 의해 전복되고 말았다.

 

서구유럽 평의회에 대한 이론적 교훈

 

러시아 레닌주의 정당과 소비에트 국가가 보여준 혁명초기의 성공경험이 노동자 평의회 연구를 위한 유일한 준거점이 되며 반면 서구유럽의 경험은 결국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부차적인 중요성밖에 지니고 있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손쉽고 속 편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중대한 오류이다. 첫째, 서구의 노동자 평의회 운동은 러시아에서 보다 매우 강한 적인 대중적 개량주의에 대해 효과적으로 투쟁했었다. 둘째, 서구유럽 노동자 평의회는 러시아의 19172월과 10월 사이에 벌어진 사건전개과정에서는 보여지지 않았던 매우 중요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었다. 따라서 서구유럽 노동자 평의회 경험으로부터 도출되는 이론적 결론은 매우 중요하다.

1914년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제 2 인터내셔날의 낡은 유제를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에 다가가야 했다. 그들은 서구 유럽의 조건에 맞은 새로운 혁명적 실천방식을 필요로 했다. 투쟁의 한복판에서 그들은 자신이 발견한 것을 제대로 써 내려갈 시간이 없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당시 그들이 실천으로 보여준 것을 이론적으로 정리하여야 하는 것이다. 다음의 첫 번째 부분에서는 혁명의 변화과정에 대한 일반적 특징을 다루고 둘째 부분에서는 당을 위한 교훈으로 논의를 집중시키고자 한다.

첫째, 불균등과 통일, 선진 활동가와 계급대중

전시기간동안에 선진활동가들은 노동계급의 행동을 촉발시키고 방향을 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역으로 대중이 선진활동가에 미친 영향 또한 중요했다. 병사 없는 장군은 무의미하듯이, 다양한 개인, 남여, 정신노동자과 육체노동자, 혁명주의자와 개량주의자로 구성된 노동계급은 하나의 투쟁체로 만들어져만 했다.

노동자 평의회는 이러한 통일성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었다. 노동계급내의 통일성은 자본주의의 정상적 조건 내에서 태동한 노동계급의 기구로부터 탄생될 수는 없었다. 영국에서 보여진 숙련공 노조나 독일에서 보여진 다양한 노동자 정당의 결합으로는 현장 대중으로부터 창출된 권력을 담지할 수 없었다. 이것은 자생적으로 발생될 수 없었으며 오직 행동하는 현장 대중의 단일대오 요구로부터 발생한 리더십에 의해 가능했다.

그러나 노동자 평의회는 마치 노동운동 정치가가 선거를 위해 하듯, 대중들을 가장 낮은 수준의 공통요구로 묶은 것은 아니었다. 숙련공과 탈숙련공(영국에서), 혁명주의자와 개량주의자(독일의 정당에서), 노조주의자와 비노조주의자(이태리에서)간의 차이는 인정되었다. 선진 활동가들은 으례 조직화된 방식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러한 조직적 습관은 일정정도 보수주의를 유발시켰기 때문에 종종 그들은 대중의 투쟁수준에 뒤쳐지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성이 극복된다면, 전체운동을 위해 투쟁력이 강한 일부 노동자집단(숙련공의 강점, 좌익정치, 조직화된 노조주의)을 활용할 수도 있었다. 만약 선진 노동자 부분이 후진 노동자 부분을 이끌 수만 있다면 분화와 불균등성은 오히려 이점으로 작용했다.

 

둘째, 정치와 경제

노동자 평의회는 전쟁수행을 위해 자본가 계급이 만들어 놓은 정치권력와 경제권력간의 중앙집중화된 융합과정을 따라 자신의 영향력을 건설함으로서, 전시국가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을 감행할 수 있었다. 노동자 평의회로 발전한 작업장의 현장조직은 중앙집중적인 계급조직을 통해 공장 내에서 자본주의 권력의 연결고리를 파괴시킬 능력을 지니게 됨에 따라 자본주의 국가권력으로까지 투쟁을 확대하였다. 이는 전쟁 이전의 사고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2 인터내셔날의정치가들은 흔히 (역주: 인구의 대부분인) 노동자가 점차 계급으로 조직되어 정치권력을 장악할 때 자본주의의 경제적 기반이 파괴되며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므로 경제적 투쟁 또는 노동자의 특정집단으로부터 발생된 한계적 투쟁은 제한되어야 하며 점진적으로 국가를 장악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 종속되어야만 했다고 했다. 실천적으로 보면, 이러한 주장은 개량주의적 지도자가 선거에서의 지지를 잃지 않기 위해 파업활동을 억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생디칼리스트들은 이와 반대로 생각하고 활동했다. 생산이 자본주의 체제의 심장이며 다른 모든 것(국가의 본성, 이데올로기 등등)을 결정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작업현장으로부터 포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실천은 파업활동을 지원하되, 어떠한 정치 전략도 멀리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노동자 평의회는 위에서 나타난 수수께끼를 풀었다. 노동자 평의회는 그것이 임금이던, 근로조건이던, 식량공급이던 간에 가장 기초적인 수준의 경제적 요구를 위해 투쟁하며 동시에 국가권력 장악을 위한 요구를 상정했다. 이러한 사실은 공공연한 계급투쟁의 시기에 어떤 파업도 순수하게 경제적 성격만을 지닐 수는 없으며 계급적 자신감 향상 및 국가권력의 약화라는 정치적 함의를 지니게 된다. 동시에 노동자 평의회는 정치라는 것이 단순히 의회주의 내의 선거문제가 아니라 국가에 대한 노동자의 자주적 활동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셋째, 의식의 자발성이냐 아니면 주입이냐?

전쟁 이전에 노동운동의정치가들은 사회주의 교육과 그 이념의 확산만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생디칼리스트는 이론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대중이 산업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자생적으로 혁명주의자가 될 것이라 판단했다. 극단적인 형태로서, 선택의 여지는 노동운동의 외부로부터 사회주의적 지식인에 의해 주입된 의식이냐, 아니면 노동활동을 통한 혁명의식의 자생적 발생이냐로 좁혀졌다.

노동자 평의회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해답을 제공하였다. 이에는 두 가지 요소가 포함되었다. 첫째, 위기의 결과로서, 모든 자본가 배후에 민족국가기제가 존재하므로 노동자들의 단순한 경제적 투쟁은 하나의 기업과 하나의 산업 경계를 넘어 확장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므로 부문적인 투쟁은 일반화되며 경제적 투쟁은 계급투쟁으로 변화됬다. 노조를 통한 투쟁방식은 폭넓은 연대투쟁을 위해 기각되어야만 했다. 그 결과는대중들의 내부에서 일종의 변혁의식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노동자 평의회는 각각의 분산된 투쟁에 대하여 연결고리 역할을 함으로서 이러한 과정에 조직적 틀거리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는 자생적으로 발생된 것이 아니었다. 대중으로부터 자생적으로 발생되지 않는 의식은 해답의 두 번째 부분이다. 노동자들 스스로의 실천이 새로운 의식을 발생하게 할지라도 자생적으로 개량주의 사상과 단절하지는 않았다. 혁명적 사회주의라는 대안적 사고는 노동대중과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조직으로부터 도입되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당시 대중들은 개량주의적 사고에 포획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혁명 의식은대중 내부가 아닌 곳으로부터 온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일견 모순적일지라도 - 내부로부터 자생적으로 발생된 의식이냐 아니면 독립적인 혁명주의 선전에 의해 외부로부터 발생된 의식이냐 - 두 요소 간의 역동적 결합은 필수적이었다.

 

넷째, 조직이냐 아니면 정치이냐?

1915년부터 1920년까지 발생된 사건들은 혁명을 위한 수많은 실험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수많은 혁명 실험들은 견고한 조직화를 거부하며 단지 순진한 정치에 기반하며 이루어진 혁명주의 운동으로부터 시작하여 사회주의적 신념을 실제로 조직화, 구조화하고자 했던 시도까지 매우 다양하게 펼쳐졌다.

스파르타쿠스주의자들은 조직화보다는 주로 선전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첫 번째 범주에 속했다. 그러나 1018-19년의 검증기간에 직면하여, 독일 공산당의 정치적 활동은 극좌의 불개입주의와 반노조주의에 영향을 받은 대중들에 의해 압도되었다. 조직화에 대한 문제를 생략하고는 진정하게 정치를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정됬다.

그 반대의 현상도 또한 우리에게 의미가 있었다. 조직적 순수성이 혁명적 가능성을 보증하지는 못했다. 수많은 영국과 이태리의 시회주의자들은 민주주의적 노동자 평의회에 대한 물신적 사고를 지녔기 때문에 올바른 사고가 그 조직형식으로부터 저절로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클라이드 현장 활동가들은 조직 내 형식적인 통일단결을 노동자 국제주의보다 더 중시했다. 국가에 의해 그들이 패배했다는 사실은 노동자 조직이 당면한 상황에 대해 좀더 심사숙고했어야 함을 보여주었다. 튜린의 순수평의회 조직모델은 그 자체로 혁명주의적 의식을 보증할 수 없었다. 당시 공산당 위원회는 현장조직이 추후 사회변혁을 위한 권력구조의 토대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현장조직은 거의 정치적 문제를 다루지 못했으며 그람시로 하여금 단지 조직적 절차에만 의존하는 한계성을 여실히 깨달게끔 하였다. 이러한 현실은 그로 하여금 혁명정당의 독립적인 활동의 필요성을 절감케 하였다.

본서를 통하여 우리는 혁명과정에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양자택일의 논리-의식이냐 조직이냐, 즉각적 행동이냐 장기적 준비이냐, 당이냐 계급이냐-를 적용함으로서 발생되는 오류를 보아왔다. 양자택일의 논리에 있어 각 극단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하며 서회전체와 부분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가장 중요한 관계는 당과 노동자 평의회와의 관계이다. 우리는 노동자 평의회가 소비에트로 전화하고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 성공했던 요인이 주로 혁명적 대중조직에 의존했던 점이었음을 보아왔다. 이러한 진실은 현재까지 60년간의 계급투쟁 경험에 의해 증명되었다. 많은 노동자 평의회와 대중의 자주적 활동을 가능케 한 조직들이 나타났다. 1936년 스페인, 1956년 헝가리, 1974년 포르투갈, 1980년 폴란드에서 그 사례가 있었다. 1915-20년간 서구유럽에서의 경험들은 노동자 평의회를 건설하는데 있어 의식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주었고 특히 당 건설에 있어 목적의식적이며 주도면밀한 준비가 필요했음을 보여주었다. 러시아 소비에트는 24시간 이내에 건설 가능했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와 튜린의 공장평의회는 소집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 평의회 형태는 당면문제를 극복하기에 적합한 유연성을 지니고 있었다.

혁명정당은 트로츠키가 논했듯이 계급의 두뇌이며 따라서 과거 경험을 종합하여 노동계급에게 지침서를 제공함으로서 역사의 교훈, 맑스주의에 기반한 분석도구, 선진 활동가의 폭넓은 경험 등등을 생산해내야 한다. 이러한 종합과정은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볼셰비키 당은 그들의 승리 이전 14년 전부터 활동하였다. 유럽 공산주의정당은 치열한 계급투쟁의 와중에 건설되었으며 이러한 미성숙한 점으로 인해 당면과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정당이 당시 모든 곳에서 건설되었다는 사실은 노동자의 평의회 경험에 그 원인이 있었다. 당시 이러한 사건들은 혁명주의자가 대중에 대한 리더십을 확보할 첫 번째 기회를 제공했다. 개량주의가 확산된 조건에서 혁명정당을 건설할 수 있는 방도 및 이에 대한 교훈은 1915-20년간의 경험들에서 도출될 수 있었다.

첫째, 작업현장에 대한 강조가 중요했다. 개량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직접적인 투쟁으로부터 동떨어진 노조관료제에 의존했던 반면 혁명정당은 의회 및 노조간부가 아닌, 작업현장으로부터 시작된 노동자의 자기해방과정을 주목했었다. 현장 노동자의 자신감 회복과 현장조직 건설에 집중했다는 것은 노조 내 존재하는 노동계급이 그 노조기제에 포획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현장의 자신감을 회복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둘째, 부문적, 경제적 투쟁으로부터 정치적 계급투쟁으로 발전한다는 사실은 혁명의 시기에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개량주의자들은 항상 경제적 투쟁을 더 높은 수준의 정치투쟁으로 상승하는 것을 거부해 왔다. 분파주의자들은 항상 자신의 정치적 순수성이 의심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정치적 투쟁을 회피해 왔다. 혁명정당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모든 노동자들의 요구를 해결하는 과정이 그들의 자주적 활동을 신장시키며 나아가 각 부문의 투쟁이 확장되어 계급 전체의 투쟁이 되도록 하는 작업과 연결되어야만 한다.

당과 대중조직 그리고 대중간의 관계는 1917년에 최고정점에 도달하였다. 오늘날은 사실상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동떨어져 있지만 위의 전략을 현실에 적용해본다면, 모든 파업은 사회주의 혁명의 사전 훈련장으로서 그리고 모든 파업 위원회는 노동자 평의회의 맹아로 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셋째, 노동자 평의회는 학계의 논쟁거리로 전락하여 역사적 호기심으로 남겨져서는 않된다. 혁명정당은 자신의 최종적 임무에 대한 상이 굳건하고 명확하게 형성되고 유지될 때만이, 그래서 현재의 투쟁이 이러한 상을 지향할 때만이 건설될 수 있다. 내일의 노동자 국가를 위한 희망은 오늘의 구체적인 투쟁방식과 결합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

 

20세기 전시기에 광범위하게 발생되었던 노동자 혁명과 노동자의 자주조직 간에는 본질적인 유사성과 연계성이 존재한다. 그것은 다양한 형태로 여러 나라에서 발생하였지만 자본주의 본질 그 자체에 공통적 기원을 두고 있다. 자본축적의 필요성이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끊임없는 자본축적은 필연적으로 노동자 계급을 발전시키며 기존의 고정된 사회적 관계를 해체시키며 결국 위기로 귀결된다. 전쟁터의 참호와 공기압축 선반은 과거에 존재했던 특징으로 알기 쉽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방식으로 현재에도 재발할 수 있다.

현재 우리는 극소전자기술에 의해 추진되는2차 산업혁명의 와중에 있다. 자본주의는 극복불가능한 위기 속에 있다. 1914년 위기는 제국주의적 전쟁을 유발시켰다. 현재 대량살상무기를 위한 경쟁은 1차대전 당시 그 무서운 ‘Dreadnought형 전함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힘 또한 더욱 크게 성장하고 있다. 고르(Gorz)와 홉스바움(Hobsbawm)과 같은 학자의노동계급 소멸이라는 과장된 논의에도 불구하고 현재 노동자의 집합적 잠재력은 1915-20년 당시의 힘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이는 아주 쉽게 증명된다. 영국에서 사무노동자의 비율이 증가되고 있지만(이들의 대부분은 자신을 노동자로 보며 노조에 가입하고 있음) 아직 천만의 육체노동자가 노동계급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금속산업의 경우 현재 노동자의 수는 1921년의 수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우리는 현재 한 두개의 대량생산 산업이나 유럽 몇몇 지역만을 주목해서는 않된다. 오히려 상파울로, 그덴스크, 방콕 등을 포함하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보아야 한다.

현재 시기에 근본적인 선택문제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시대와 같이 사회주의이냐 야만이냐이다. 그러나 이제 그 대안은 좀 더 명확해 지고 있다. 이제야만은 핵전쟁으로 인한 인류의 공멸이다. 사회주의는 현대기술의 기적을 인민대중의 욕구에 맞게 활용하며 사회적 억압과 착취를 근절시키기 위한 기반으로 사용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현재의 사회주의운동은 이전 노동운동(1차대전 이후 발생한 소비에트와 평의회는 그 하나임)들에 비해 많은 잇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비참한 패배가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최고점에 다다른 이후에야 혁명정당의 필요성을 깨달은 유럽 혁명가의 과오를 다시 밟아서는 않된다. 러시아의 경험과 더불어 1915-20년 사이의 서구유럽 혁명의 성공과 실패 역사는 어떻게 현대자본주의가 도전되고 파괴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정보의 원천이다. 사회주의는 혁명적 정당이 건설되어야 실현될 수 있다. 그 당은 반드시 노동자 평의회(노동자의 집합적 힘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조직)에 기반하여 의회주의의 현혹을 대체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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