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노동자통제 본문

실천지 (2007년)/2007년 9월호

노동자통제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4:05

노동자 통제

 

폴 매틱(Paul Matt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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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발전은 소수 자본 소유자와 대규모 임금 노동자로 사회의 양극화를 내포하며, 그와 더불어 독립적인 장인, 농부, 소규모 상인 같은 유산 중간 계급은 차츰 소멸한다. 더욱 소수의 손아귀로 생산적 재산과 부 일반의 이러한 집중은 근대 산업 사회의 옷을 걸친 봉건제의 구현으로 나타난다. 소규모 지배 계급들이 생산적 자원 그리고 그와 더불어 정부를 소유하고 통제함으로써 사회 모든 것의 삶과 죽음을 결정한다. 그 다음에는 비인격적인 시장의 힘과 강박적인 자본 추구에 의해 지배 계급들의 결정이 통제된다는 점이, 통제할 수 없는 경제적 사건들에 대한 이러한 반응들도 그들의 배타적인 특권이라는 사실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오늘날 지배적인 사회를 특징짓는 자본-노동관계 안에서, 생산자들은 생산과 그것이 낳은 생산물에 대해 직접적인 통제를 전혀 하지 못한다. 때때로 생산자들은 임금 투쟁을 통해 일종의 간접적인 통제를 행사할 수도 있는데, 임금-이윤 비율을 변경하고 그리하여 자본 확장 과정의 경로나 속도를 변경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생산의 조건을 결정하는 것은 자본가이다. 노동자는 그들이 지닌 하나뿐인 생계 수단이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이기 때문에 살려면 동의해야만 한다. 노동자가 자본주의적 생산의 착취적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굶어죽을 자유가 있다는 뜻에서만 자유롭다. 이 사실은 사회주의 운동이 있기 오랜 전에 이미 인식되었다. 일찍이 1767년에 시몽 링게(Simon Linguet)는 임금 노동은 노예 노동의 한 형태일 뿐이라고 선언했다. 그가 보기에, 임금 노동은 노예제보다 훨씬 더 나쁜 것이었다. “우리 농장의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먹지 않을 과실을 위해 토지를 경작하도록 강요하며 우리의 석공들에게 그들이 살지 않을 건물을 짓도록 강요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다른 어떤 수단으로도 생계를 꾸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을 구매하는 친절함을 베풀 주인을 기다리는 시장으로 그들을 끌고 가는 것은 바로 결핍이다. 부자를 부자로 만들 허가를 부자에게 얻기 위해 부자에게 무릎을 꿇도록 그들을 강요하는 것은 결핍이다. ······ 노예제의 억압이 부자에게 얼마나 효과적인 소득을 가져다주었는가? ······ 당신은 말한다. 그는 자유롭다고. ! 그것이 그의 불행이다. 노예는 그 주인이 그에게 들인 돈 때문에 주인에게 소중한 존재였다. 그러나 수공업자는 그를 고용하는 방탕한 부자에게 아무런 비용도 치르게 하지 않는다. ······ 이 사람들은 주인이 없다고들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들은 주인들 가운데 가장 무섭고, 가장 거만한 주인을 지니고 있다. 바로 필요라는 주인. 그들을 가장 잔인한 의존 상태로 이끄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200년 뒤에도 여전히 이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노동자들을 자본의 지배에 그리고 자본가들의 책략에 복종하게 만드는 것은 더 이상 공공연한 비참함이 아니라,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 결핍, 즉 임금 노동자로서 그들의 지위가 여전히 그들을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는 피지배 계급으로 특징 지운다.

사회주의자들의 목표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임금 체계의 폐지인데, 이는 자본주의의 종식을 의미한다. 지난 세기(19세기 - 옮긴이) 후반부에 노동 계급 운동은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통해서 이러한 전환을 일으키려고 했다. 이윤에 의해 결정되는 생산은 연합한 생산자들의 실질적인 필요와 야망을 만족시키는 생산으로 대체될 것이었다. 시장 경제는 계획 경제에 자리를 내어줄 것이었다. 그래서 사회적 존재와 발전은 더 이상 자본의 통제할 수 없는 물신숭배적 팽창과 축소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계급 없는 사회에서 생산자들의 집단적인 의식적 결정에 의해 결정될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은 부르주아 사회의 산물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발전의 부침에 묶여 있다. 사회주의 운동은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하는 운명에 따라 달라지는 특성을 보일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계급 의식의 형성을 촉진시키지 않는 시기와 장소라면, 사회주의 운동은 성장하지 않거나, 아니면 사실상 사라질 것이다. 자본주가 번영하는 상황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혁명적 운동에서 개량적 운동으로 변신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적 위기의 시기에 사회주의 운동은 지배 계급들에 의해 전적으로 억압받을 것이다.

모든 노동 조직은 일반적인 사회 구조의 일부이며, 그래서 순수하게 이데올로기적 의미에서가 아니라면 일관되게 반() 자본주의적일 수 없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사회적 중요성을 차지하기 위해서, 노동 조직들은 기회주의적이어야 한다. , 그들의 자신의 목적이지만 아직까지는 제한된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주어진 사회적 과정을 이용해야 한다. 유리한 순간에 행동할 준비를 갖춘 강력한 조직으로 혁명 세력을 서서히 결집시키는 것은 가능해 보지지 않는다. 지배적인 기본 사회관계를 어지럽히지 않는 조직들만이 성장하여 조금이라도 중요성을 얻게 된다. 그 조직들이 혁명적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시작한다면, 조직의 성장은 그 이데올로기와 기능 사이에 불일치를 내포하게 된다. 현재 상태에 반대하지만 또한 그 안에서 조직된 이러한 조직들은 결국 그들 자신의 조직적 성공 때문에 자본주의의 힘에 굴복하게 될 것이다.

지난 세기 말에 전통적인 노동 조직들(사회주의 정당들과 노동조합들)은 더 이상 혁명적인 운동이 아니었다. 이러한 조직들 안에서 얼마 안 되는 좌익만이 그 혁명적 이데올로기를 보유했다. 원리 면에서, 레닌과 룩셈부르크는 기존 노동 조직들의 개량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 진화론과 싸울 필요성을 깨달았고 혁명적 정책으로 복귀할 것을 요구했다. 레닌이 중앙에서 통제하는 조직화된 활동과 지도부를 강조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혁명 정당을 창조함으로써 이것을 달성하려고 시도한 반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관료적 통제의 제거와 일반 조합원의 활동을 통해서 사회주의 조직 안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결정을 증가시키는 것을 선호했다.

마르크스주의가 주요 사회주의 정당들의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에, 이러한 조직들과 그들의 정책에 대한 반대는 마르크스 이론의 개량주의적이고 수정주의적인 해석들로, 마르크스의 이론에 반대하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조르주 소렐(Georges Sorel)과 생디칼리스트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인텔리겐치아의 지도 없이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정치 조직들을 통제하는 중간 계급적 요소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확신했다. 생디칼리슴은 혁명적 노동조합 활동에 찬성하면서 의회주의를 거부했다. 소렐이 보기에, 사회주의자들의 정부는 노동자들의 사회적 지위를 결코 변경할 수 없을 것이었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노동자들은 자신들만의 행동과 무기에 의존해야 할 것이었다.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 전체를 이미 자본주의적 산업 속에 조직했다. 남은 일은 국가와 소유를 억압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것을 완수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필요한 것은 필연적인 사회적 흐름에 대한 이른바 과학적 통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혁명과 사회주의가 그들 자신의 계속적인 투쟁의 불가피한 산물이라는 일종의 직관적인 확신이었다. 파업은 노동자들의 혁명적 도제 제도로 간주되었다. 파업 수의 증가, 파업의 확대, 지속 기간의 증가는 총파업의 가능성, 즉 임박한 사회 혁명을 가리키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길드 사회주의자(Guild Socialists)와 미국의 세계 산업 노동자 연맹(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같은 생디칼리슴이나 그와 유사한 국제적 후예는, 어느 정도는, 사회주의 운동의 관료화 증대와 계급 협조주의적 관행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노동조합 역시 중앙집중적 구조 때문에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욕구를 희생하고 특정 직종의 이해관계를 강조하는 것 때문에 공격받았다. 그러나 혁명적이든 개량주의적이든, 중앙집중적이든 연방주의적이든, 모든 조직은 그들 조직의 한결같은 성장과 일상의 활동 속에서 사회 변화를 위한 주요한 요인을 찾아내는 경향이 있었다. 사회 민주주의에 관해 말하자면, 증가하는 구성원, 확대되는 당 기구, 선거에서 득표수 증가, 현존 정치 기구에 더욱 대규모 참여를 사회주의 사회로 성장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다른 한편 세계 산업 노동자 연맹에 관해 말하면, 그 조직 자체가 거대 단일 노조(One Big Union: 모든 노동자가 하나의 노조로 조직되어야 한다는 개념 - 옮긴이)로 성장하는 것은, “낡은 껍데기 안에서 새로운 사회의 구조를 형성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0세기 첫 번째 혁명에서 혁명의 특징을 결정하고,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노동자들의 평의회들에서 자신의 새로운 조직 형태를 탄생시킨 것은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들이었다. 1905년 혁명의 러시아 평의회들, 또는 소비에트들은 수많은 파업으로부터 그리고 법률 당국뿐 아니라 관련 산업들과 상대할 대표와 행동 위원회의 필요로부터 성장했다. 파업은 정치 조직이나 노동조합에 의해 요구된 것이 아니라, 작업장을 그들의 조직적 노력의 도약판이며 중심으로 보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의미에서 자연발생적이었다. 그 시기 러시아에서 정치 조직은 아직 노동자 대다수와 미숙한 형태의 노동조합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소비에트들은 전통 없이 권위를 지니며 수십만 노동자들을 즉각 포용할 수 있는 조직에 대한 객관적 필요의 실현이었다. 더욱이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의 모든 혁명적 경향을 통합할 수 있고, 선도력과 자기 관리력을 지니며, 주요하게는 24시간 안에 생겨날 수 있는 조직이었다.” “당은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의 조직인 반면에, 소비에트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이었다.”

물론 본질적으로 1905년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으로 차르의 전제정을 깨뜨리고 제헌의회를 통해 더욱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들에 존재하는 조건으로 나아가기 위해 자유주의 중간 계급이 지원했다. 정치적 사고 면에서 파업 노동자들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강령을 대체로 공유했다. 그리고 더욱 발전된 상황에서 강력한 노동 운동의 형성과 장래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부르주아 혁명의 필요성을 받아들인 기존의 모든 사회주의 조직들로 그러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소비에트 시스템은 혁명이 분쇄되면서 사라졌고 19172월 혁명에야 더 큰 세력으로 복원되었다. 1918년 독일 혁명에서 비슷한 자연발생적 조직의 형성을 고무한 것, 그리고 조금은 정도가 덜하지만 잉글랜드, 프랑스, 이탈리아, 헝가리에서 사회 격변을 고무한 것은 이 소비에트들이었다. 평의회 시스템과 더불어 제한된 목적이든 혁명적 목표든 어느 쪽을 위해서도 아주 광범위한 대중의 자기 활동을 지도하고 조절할 수 있으며, 기존 노동 조직에 독립적이거나 반대하거나 협력하면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조직 형태가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평의회 시스템의 출현은, 자연발생적인 활동이 대중의 형체 없는 분투로 흩어져 없어지지 않아도 되고 일시적이지 않은 조직적 구조로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은 서구 사회주의 정당들에서 좌익 반대파들에 활력을 주었지만, 이러한 행위들이 아직까지는 조직적 형태보다는 대중 파업에서 자연발생성이라는 측면을 띠었다. 그러나 개량주의적 주술은 깨어졌다. 혁명이 다시 실질적으로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서구에서 그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아니라 순수한 노동 계급 혁명일 것이었다. 그렇지만 러시아의 경험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가 그때까지는 제2 인터내셔널의 개량주의 정당들의 의회주의적 노선에 대한 거부로 전화되지는 않았다.

 

 

II.

 

서구에서 혁명적 정책의 부활 가능성은 처음에는 헛된 것으로 증명되었다. 사회주의 운동 내부에서 수정주의의 첫 번째 대변자인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말로 하면 운동이 전부고 목표는 없는” ‘수정주의자들뿐 아니라,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사회 혁명의 바람직함이나 필요성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 그들이 예전의 목표(임금 체계의 폐지)에 여전히 매달리고 있지만, 이것은 이제 부르주아 사회의 민주적 제도에 의해 제공되는 합법적 수단을 통해 조금씩 유행하게 될 것이었다. 결국, 사회주의 정부를 지지하는 다수의 유권자들과 더불어 사회주의는 정부 법령에 의해 제도화될 수 있었다. 한편 노동조합 활동과 사회 입법은 노동자들이 감당할 몫을 줄이고 그들이 사회 전반의 발전에 참여할 수 있게 할 것이었다.

자유방임 자본주의의 재난은 사회주의 운동을 낳았을 뿐 아니라 비정치적 수단에 의해 그들의 조건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다양한 시도도 낳았다. 노동조합주의와는 별개로, 협동조합 운동은 임금 노동으로부터 탈출하는 매개로 그리고 지배적인 보편 경쟁 원리에 대한 헛된 반대로서 생성되었다. 이 운동의 선구들은 프랑스, 잉글랜드, 그리고 미국의 초기 공산주의 공동체들이었는데, 그들의 사상을 오웬이나 푸리에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끌어왔다.

생산자 협동조합은 자체 고용과 자신들의 활동에 관한 자주적 운영을 위한 자발적인 집단이었다. 이러한 협동조합들 중에는 어떤 것은 독립적으로 발전했고, 또 어떤 것은 노동 계급 운동과 연합하여 발전했다. 자원을 공유함으로써, 노동자들은 그들 스스로의 작업장을 설립하고 자본가들의 간섭 없이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회는 맨 처음부터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인 조건과 발전 경향에 제한을 받는바, 자본주의 사회는 그들에게 그저 주변적인 존재만을 허가할 뿐이었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자본의 경쟁적 집적과 집중을 내포한다. 더 큰 자본이 더 작은 자본을 파괴한다. 협동 작업장들은 자본이 거의 필요 없는 특정 소규모 산업에 제한되었다. 얼마 안 있어 자본주의의 확장이 모든 산업에 미치면서 그들의 경쟁력을 파괴하고 사업에서 몰아냈다.

소비자 협동조합은 그보다 더 성공적임이 증명되었으며 그것들 가운데 일부는 공급의 출처로서 생산자 협동조합을 흡수했다. 그러나 소비자 협동조합은, 그것이 노동 계급의 열망의 산물인 곳에서조차도, 노동 계급의 통제 시도로 보기 어렵다. 노동자들은 2배로(생산할 때와 시장에서) 약탈당할 수 있기 때문에, 소비자 협동조합은 기껏해야 임금 처리에서 통제 조치를 확보할지 모른다. 상품 유통 비용은 자본 생산의 피할 수 없는 가짜 비용(faux frais)으로, 자본가들을 상인과 기업가로 나눈다. 각각은 자신의 사업 영역에서 최대 이윤을 얻으려하기 때문에 그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는 동일하지 않다. 기업가는 소비자 협동조합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현재 그들은 단일한 회사에 생산과 마케팅 양쪽 기능을 결합함으로써 생산 자본과 상인 자본의 분할을 해소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협동조합 운동은 자본주의 체제로 쉽게 통합되었으며, 사실상 많은 부분 자본주의의 발전의 구성 요소였다. 부르주아 경제 이론에서조차 협동조합 운동은 사회 하층의 절약 성향을 촉진함으로써, 소비자 신용조합을 통하여 경제 활동을 증진함으로써, 협동 생산과 마케팅 조직을 통해 농업을 개선함으로써, 그리고 생산의 영역에서 소비 영역으로 노동 계급의 관심을 이동시킴으로써, 사회적 보수주의의 도구로 간주되었다. 자본주의적 지향성을 지닌 제도로 협동조합 운동은 번성하여 결국 자본주의 기업의 한 형태가 되고, 고용되어 있는 노동자들의 착취에 몰두하며, 노동자를 더 높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 조건을 위해 파업하는 적대자로 대한다. 공식적인 노동 운동에 의한 소비자 협동조합에 대한 (초기의 의심이나 노골적인 거부와는 명백하게 구별되는) 일반적인 지지는 개량주의적 노동 운동의 자본주의화증가를 나타내는 추가적인 징후일 뿐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소비자 협동조합의 광범위한 네트워크는 곧 국가의 대행자로 바뀌어 기성품 분배 시스템을 볼셰비키에게 마련해주었다.

생산자 협동조합과 소비자 협동조합으로 집산주의의 분할은 어떤 의미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생디칼리스트의 반대를 반영했다. 소비자 협동조합은 모든 계급의 구성원을 편입했으며 모든 시장에 접근을 모색했다. 협동조합들은 국가적 규모 심지어는 국제적 규모로 집중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생산자 협동조합의 시장은 조합의 생산만큼 제한적이었고 그들의 존재이유인 자기 관리를 상실하지 않고는 대규모 단위로 결합할 수 없었다.

생디칼리스트들을 사회주의 운동과 차별화시켜준 것은 생산과 생산물에 대한 노동자 통제의 문제였다. 사회주의 운동에 그 문제가 여전히 존재하는 한, 사회주의 운동은 국유화 개념으로 그 문제를 풀었는데, 이것이 사회주의 국가를 생산과 분배 모두에서 사회의 생산적 자원의 관리자요 경제생활의 조절자로 만들었다. 발전의 나중 단계에서야 이러한 배치가 사회화된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연합과 국가 사멸에 자리를 내어줄 것이었다. 그러나 생디칼리스트들은 중앙집권화된 통제력을 지닌 국가가 그것을 영속화하고 노동 인구의 자기 결정을 방해할 것을 두려워했다.

생디칼리스트들은 각각의 산업이 그 산업의 노동자들에 의해 관리되는 사회를 마음에 그렸다. 모든 신디케이트가 하나가 되어 정부의 특징을 지니지 않고 단지 진정한 집산주의적 생산과 분배 시스템을 실현하기 위한 통계적행정적 기능만 하는 전국 연맹을 형성할 것이었다. 생디칼리슴은 프랑스, 이탈리아, 에스파냐에서 우세했으나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나타났다. 어떤 나라에서는 이미 언급한 세계 산업 노동자 연맹과 길드 사회주의자에서처럼 수정된 형태로 나타났다. 최종 목표에서뿐 아니라 일상의 계급투쟁에서도, 생디칼리스트는 직접적인 행동을 강조하고 더욱 호전적이라는 점에서 의회 사회주의자나 보통 노동조합과는 달랐다.

최종 목표에 대한 관심은 시기상조였지만, 그것은 그 선전자들의 실제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 중앙집중화된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조합의 급속한 관료화는 노동자들로부터 그들의 자발성을 상당히 앗아갔으며 그들과 생활이나 노동 조건을 공유하지 않는 지도부의 통제에 그들을 종속시켰다. 노동조합은 사회주의 운동과 초기의 관련성을 상실하고 비즈니스 유니어니즘(business-unionism: 실리적 조합주의)로 타락하여 임금 협정과, 가능한 곳에서는 일자리 독점단체의 형성에만 관심을 가진다. 생디칼리스트 운동은 훨씬 덜 관료화되었는데, 이는 그 운동이 노동 운동의 두 주요 흐름의 소수파였을 뿐 아니라 산업 자기 통제의 원칙이 일상의 계급투쟁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틀 안에서 노동자 통제에 대해 말하는 것은 노동자가 속한 조직에 대한 통제만을 의미할 수 있는데, 자본주의는 노동자가 모든 효과적인 사회적 통제를 빼앗겼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조직의 자본주의화와 더불어, 노동자들이 관료제의 재산이 되고 관료제의 존재와 재생산의 수단이 될 때, 노동자 직접 통제의 유일하게 가능한 형태는 사라지게 된다. 그때도 노동자들은 더 높은 임금, 더 짧은 노동시간, 더 나은 노동 조건을 위해 싸운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은 자기 조직 내에서 그들의 권력 부족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활동을 노동자 통제의 형태라고 부르는 것은 어쨌든 잘못된 명칭인데, 이러한 투쟁은 노동 계급의 자기 결정과 관련이 없으며 자본주의의 한계 안에서 조건을 개선하는 데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그로 인해 노동자들의 생계 수준이 올라가는 비율보다 더 빨리 노동 생산성을 증가시키는 것이 가능한 한에서 가능하다.

 

노동 조건과 잉여 생산물에 대한 기본적인 통제는 언제나 자본가들의 수중에 남아 있다. 노동자들이 노동 시간을 단축하는 데 성공 했을 때에도, 그들은 자본가들에 의해 추출되는 잉여 노동의 양을 잘라내는 데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잉여 노동을 추출하는 두 가지 방법노동일을 연장하는 방법과 기술과 조직의 혁신을 통해 임금과 등가의 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을 단축하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자본은 일정 비율의 이윤을 산출해야 하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이윤율이 위협받을 때 생산하기를 중단할 것이다. 자본을 축적하려는 충동이 자본가를 지배하고 그로 하여금 축적 과정이 정점에 달하게 하는 데 필요한 잉여 노동의 양을 얻기 위해 노동자들을 통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자본가는 이윤을 최대화하기 노력할 것인데 그의 통제 밖에 있는 것 때문에 최소치를 얻을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그런 것 중에 하나가 이윤 최대치와 관계있는 착취의 조건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 계급의 노력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도달할 수 있는 한에서이다.

 

 

III.

 

노동자가 자기 조직에 대한 통제를 상실하는 것은 물론 자본주의 체제를 그들이 묵인한 결과였다. 조직 노동자나 비조직 노동자가 똑같이, 시장 경제가 그들의 조건을 개선할 수 있었고 발전 과정에서 더 한 층의 개선을 약속했기 때문에, 시장 경제에 순응했다. 그런 비 혁명적인 상황에서 효과적인 조직의 형태는 분명 개량주의적 사회주의 정당과 중앙에서 통제되는 비즈니스 유니언이었다. 계몽된 부르주아지 역시 후자를 집단적 동의에 의한 산업 평화의 도구로 보았다. 자본가들은 더 이상 노동자들과 대면하지 않고 그들의 대표들과 대면했는데, 노동자 대표들의 존재는 자본-노동 시장의 존재, 즉 자본주의의 계속적인 존재에 기반을 두었다. 그들의 조직에 대한 노동자들의 만족은 사회 변화에 대한 그들의 관심 상실을 반영했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진정한 노동 계급의 열망에 의해 지지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태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의 노동 계급을 휘어잡은 열광적 애국주의(chauvinism)에서 극적으로 빛났다.

좌익 급진주의는 그들의 개량주의적 적수들에 의해 대재앙의 정치로 지적된 것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혁명가들은 노동 계급의 생계 수준 악화뿐 아니라 결국에는 혁명으로 이끌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만큼 파괴적인 경제 위기도 예상했다. 그들은 혁명에 필요한 객관적 조건이 결여된 혁명을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상 어떤 사회 혁명도 사회경제적 재앙의 시기를 제외하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에 실현된 혁명들은 허약한 제국주의 세력들의 재앙적인 조건의 결과였고 그 혁명들은 처음으로 노동자 통제 문제와 사회주의의 실현을 현실적 가능성으로 제기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패배한 전쟁 과정의 점차 참을 수 없는 조건에 저항하는 자연 발생적인 운동의 결과였다. 파업과 시위는 일부 군대의 지지를 받는 전반적인 봉기로 확대되었고 짜르 정부의 붕괴를 낳았다. 혁명은 부르주아지의 폭넓은 계층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 집단으로부터 첫 번째 임시 정부가 구성되었다. 사회주의 정당들과 노동조합들이 혁명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1905년 혁명에서보다 더 큰 역할을 수행했다. 1905년 때처럼 1917년에도, 소비에트들은 처음에는 임시 정부를 대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혁명 과정에서 소비에트들은 점점 더 큰 책임을 떠안았다. 실질적으로, 권력은 소비에트와 정부에 의해 공유되었다. 악화되는 상황에서 운동은 더욱 급진화되고 부르주아지와 사회주의 정당들의 정책은 흔들렸는데 이러한 상황이 볼셰비키를 결정적인 소비에트들에서 다수파로 만들었고 혁명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국면을 끝내는 10월 쿠데타로 나아가게 했다.

혁명 운동 내에서 볼셰비키의 힘이 증가한 것은 반란을 일으킨 대중의 실질적인 목표, 즉 전쟁 종결과 농민에 의한 토지 징발과 분배에 볼셰비키가 무조건적으로 순응한 탓이었다. 19174월에 러시아에 도착하자마자 이미 레닌은 그에게는 소비에트의 존재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의 추구를 대신한다는 것을 명백히 했다. 그것은 노동자와 농민의 평의회들의 공화국으로 대체되어야 했다. 그렇지만 레닌이 쿠데타 준비를 요구했을 때, 그는 소비에트가 아니라 볼셰비키에 의한 국가 권력 행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소비에트 대표의 다수가 볼셰비키이거나 볼셰비키를 지지했으므로, 레닌은 소비에트에 의해 형성된 정부는 볼셰비키 정부일 것임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물론 일부 사회혁명당 좌파와 좌파 사회당원들이 새로운 정부에서 직책을 얻었지만, 이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볼셰비키의 정부 지배가 계속되기 위해서는, 노동자와 농민이 계속해서 볼셰비키를 그들의 소비에트 대표로 선출해야 할 것이었다. 한때 다수였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이 소수파가 된 것과 꼭 마찬가지로, 볼셰비키에게도 사정은 다시 그렇게 변할 수 있었다. 무기한으로 권력을 보유한다는 것은 볼셰비키 당을 위해 정부의 독점을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레닌이 소비에트 권력을 볼셰비키 당의 권력과 동일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볼셰비키의 권력 독점에서 소비에트 통치의 실현을 보았다. 결국 의회제 부르주아 국가와 자본주의냐 아니면 부르주아 지배의 복귀를 막을 노동자와 농민의 정부냐 하는 선택밖에 없었다. 자신들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로, 프롤레타리아트를 인민 혁명의 전위로 생각하면서, 볼셰비키는 스스로를 위해서는 못할 것을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하기를 원했다.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는, 소비에트들이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사회 개량주의적 동맹 세력들의 약속에 그들의 권력의 지위를 내어줄 수 있었다. 혁명의 사회주의적성격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소비에트가 볼셰비키의 소비에트로 남아 있을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소비에트 체제 내외부에서 모든 반 볼셰비키 세력에 대한 억압을 요구할지라도 말이다. 짧은 시간 안에 소비에트 체제는 볼셰비키의 독재가 되었다. 무력화된 소비에트가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형식적으로만 유지되었다.

볼셰비키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으로 승리를 얻었지만, 볼셰비키 정부는 그 내용을 노동자 통제로 축소했다. 처음에는 다소 조심스럽게 그 사회주의화 강령을 진행함으로써, 노동자들은 여전히 자본가들의 수중에 있는 산업체들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감독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노동자 통제에 관한 첫 번째 법령은 이 통제를 기업체의 재정뿐 아니라 원재료와 최종 생산물의 생산, 비축, 구매, 판매에 대한통제로 확대했다. “노동자들은 공장 위원회, 직장 위원회, 소비에트 고참자들 같은 선출된 조직을 통해 이러한 통제를 행사한다. 사무실 직원이나 기술 인력 또한 이러한 위원회들에 대표를 보낼 것이다. ······ 노동자 통제 기관들은 생산을 감독할 권리를 지닌다. ······ 상업 비밀들은 폐지된다. 소유자들은 노동자 통제 기관들에 올해와 과거의 모든 장부와 명세서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과 노동자 통제는 양립할 수 없으며, 이 임시변통의 일은 (이를 통해 볼셰비키는 자본주의적 생산 조직가들의 도움을 유지하고 농민들이 토지를 점유하듯이 산업을 점유하려는 노동자의 열망을 어느 정도 만족시키려 했지만) 그리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레닌은 노동자 통제에 관한 포고가 있은 지 1년 후에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산업 전반에 한꺼번에 사회주의를 포고하지 않았다. 사회주의는 노동 계급이 경제를 운영하는 법을 배우게 될 때만이 구체화되고 최종적으로 확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노동자 통제가 모순적이며 불완전한 조치임을 알면서도 우리가 노동자 통제를 도입한 이유가 그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가 그 일과 직접 맞부딪혀 왔다는 사실, 주요 산업에서 혼란스럽고, 미숙하고, 불완전할 것이 분명했던 노동자 통제로부터, 우리가 전국적 규모에서 노동자의 산업 관리로 넘어갔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며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통제에서 관리로 나아간 변화는 양쪽의 폐지를 수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소비에트의 무력화가 볼셰비키 국가 기구의 형성과 강화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그것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공장과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의 영향력은 소비에트에서 노동조합으로 통제권을 이전시키고 그 다음 노동자를 통제하는 국가의 대행자로 노동조합을 변형시키는 것과 같은 방법을 통해서 단지 점진적으로 제거되었다. 경제적 몰락, 내전, 농업의 사회화에 대한 농민의 반대, 산업 불안, 그리고 시장 경제로 부분적인 복귀로 인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볼셰비키 정부를 확보하기 위하여, 노동의 군사화에서부터 부활한 자유 기업에 노동의 종속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모순적인 정책이 나왔다. 정부의 독재적인 정책들은 자본주의적정치적 적들뿐 아니라 노동자들과도 대립했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더 대규모의 생산이었고, 단순한 권고만으로는 구체제에서 겪었던 것과 동일하거나 더 크게 자신들을 착취하도록 노동자들을 유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볼셰비키 국가는 산업을 재건하고 자본을 축적하기 위하여 새로운 지배 계급의 기능을 떠맡았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는 중단 없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그는 부르주아지가 철저한 민주주의 혁명을 감행하기보다는 짜리즘과 타협에 이를까봐 두려워했다. 트로츠키와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러시아에서 일어난 장면에 대한 또 다른 관찰자들이 공유한 견해는, 임박한 혁명을 노동자와 빈농에게까지 끌고 가는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의 맥락에서, 레닌은 국제적 관점에서 러시아 혁명에 접근하여 혁명이 서쪽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생각했는데 이것이 러시아 부르주아의 지배를 그 시작 시점에 파괴할 기회를 제공했을지 모른다. 그 다음에는 서방의 혁명이 러시아 혁명을 보완하고 사회주의를 위한 러시아의 객관적인 준비 부족이 덜 중대한 요소가 될 국제 협력의 형태를 준비할 때까지, 타협이든 원칙 침해든 관계없이, 권력을 붙들고 있는 것이 본질적이었다. 러시아 혁명의 고립은 이러한 전망을 제거해버렸다. 실제로 뒤이어 나타난 조건 속에서 권력에 남아 있는 것은, 상이한 사회 제도와 상이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역할을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권력 전복은 볼셰비키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볼셰비키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면 권력을 붙들고 있는 것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 이외에도, 레닌은 국가의 비호 하에서 러시아를 자본주의화하는 것이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에 러시아의 발전을 맡기는 것보다 더욱 진보적이고 더 바람직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당이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는 “15만 명의 지주에 의해 통치되는 데에 익숙해 있었다. 24만 명의 볼셰비키가 똑같은 임무를 인수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위계제적이고 권위주의적 국가를 건설하고 그것을 경제 영역으로 확장함으로써 볼셰비키도 그렇게 했는데, 국가에 의한 경제 통제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경제 통제를 의미한다고 내내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레닌은 이렇게 선언했다. 사회주의는 기초는 절대적이고 엄격한 의지의 통일을 요구하는데, 그것이 수백, 수천, 수만 인민의 공동 노동을 지휘한다. ······ 어떻게 엄격한 의지의 통일이 확보될 수 있을까? 수천이 그들의 의지를 하나의 의지에 종속시킴으로써. 공동 노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계급의식과 규율이 있다면 이 복종은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부드러운 지도와 아주 비슷할 것이다. 이상적인 규율과 계급의식이 부족하다면 그것은 분명하게 독재의 형태를 띨지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단일한 의지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은 대규모 기계 산업의 패턴으로 조직된 절차의 성공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진술을 진지하게 수용하면, 생산과 사회생활 전반에 대한 통제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경험한 그 어떤 것도 능가하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노동자 통제의 그 어떤 조치들도 배제하는 독재 형태를 취했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계급의식은 전적으로 부족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차리즘과 부르주아지 양쪽 모두를 전복한 것이 소비에트였다는 사실을 변경하지는 않는다. 상이한 내적국제적 조건이라면 소비에트가 권력을 유지하고 권위주의적 국가 자본주의의 등장을 막았을지 모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 아니다. 러시아에서뿐 아니라 독일에서도, 혁명의 실제 내용은 그것의 혁명적 형태와 동일하지 않았다. 그러나 평의회 운동이 실패한 주요한 원인이 러시아에서는 주로 사회주의적 전화를 위한 전반적인 객관적 준비 부족이었던 반면, 독일에서는 혁명적 수단으로 사회주의를 제도화하는 것에 대한 주관적 거리낌이었다.

독일에서 전쟁에 대한 반대는 산업 파업에서 표현되었는데, 파업은 사회 민주주의와 노동조합의 애국심 때문에 다양한 기업체를 조화시키는 행동 위원회를 통해 작업장에서 비밀스럽게 조직되어야 했다. 1918년에 노동자 병사 평의회가 독일 전역에서 생겨나 정부를 전복했다. 계급 협조주의적 노동 조직들은 이 운동을 인정하고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혁명적 열망을 약화시키려는 목적뿐이었다. 이것은 노동자 병사 평의회가 공산주의자들뿐 아니라 사회주의자, 노동조합주의자, 초당파, 그리고 심지어는 부르주아 정당 지지지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권력을 노동자 평의회로라는 슬로건은, 평의회의 특성과 구성이 변하지 않는다면, 혁명가들에 관한 한 자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대다수는 정치적인 것을 사회 혁명으로 오해했다. 사회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와 조직적 힘은 강한 자취를 남겼다. 생산의 사회화는 노동 계급의 임무가 아니라 정부의 관심사로 간주되었다. 반항적이긴 했지만 대부분의 노동자는 사회 민주주의적 개량주의적 의미에서만 그러했다. “모든 권력을 노동자 평의회로라는 말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뜻하는데, 이 슬로건에 따르면 사회의 비 노동 계층을 정치적 대표가 없는 상태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보편 선거권으로 이해되었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노동자 평의회와 의회 모두를 원했다. 그들은 양자 모두를 얻었다. 바이마르 헌법의 일부로 의미 없는 형태의 평의회를. 그러나 그와 더불어 또한 반혁명과 결국에는 나찌 독재를.

다른 나라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보기를 들면 이탈리아, 헝가리, 에스파냐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자 평의회의 형성을 통해 그들의 혁명적 성향을 표출했다. 그래서 노동자의 자주적 조직이 프롤레타리아 계급 이해에 반하는 정책이나 행위에 대한 보증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그런 경우에 노동자 평의회는 오래된 권력 기관이나 새롭게 설립된 권력기관에 의한 노동 계급 행동에 대한 전통적인 통제 형태나 새로운 통제 형태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조직적 형태의 자기 결정으로 분출하는 자연발생적 운동이 사회에 대한 통제권과 더불어 자신들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지 않는다면, 그 운동은 단순히 잠재된 익명성으로 다시 사라지고 말 것이다.

 

 

IV.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은 과거와 관련된 것으로 현재나 가까운 장래와 관련성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서구 세계와 관련된 한,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에 의해 풀려나온 연약한 세계 혁명의 물결조차도 2차 세계대전의 과정 동안에는 되풀이되지 않았다. 대신에, 얼마 동안 어려움을 겪은 뒤, 서구 부르주아지는 사회에 대한 완전한 통제력을 장악한다. 서구 부르주아지는 사회 변화의 충동과 성향 모두를 배제하는 높은 고용률, 경제 성장, 사회적 안정을 자랑한다. 틀림없이 이것이 전반적인 그림인데,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 빈곤한 사회 집단이 널리 퍼져 있는 것에 의해 입증되었듯이, 아직까지 미해결된 몇 가지 문제들 때문에 이 그림은 보기 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흠집은 머지않아 제거될 것으로 기대된다.

2차 세계대전 뒤 서구 자본주의의 명백한 안정과 계속된 팽창은 진정한 노동 계급 급진주의를 사망시켰을 뿐 아니라 개량주의적 사회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와 실천을 혼합 경제의 복지 국가 이데올로기와 실천으로 변형시켰다. 이 사건은 노동과 자본의 통합으로, 그리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부정적 측면들을 벗어버리고 긍정적인 측면들을 결합함으로써 공황에서 벗어난 새로운 사회경제 체제의 출현으로, 축하되기도 하고 한탄되기도 했다. 이것은 늘 자본과 노동의 적대가 지난날의 관련성을 잃은 포스트 자본주의의 체제로 불린다. 체제 안에서는 갖가지 변화의 여지가 여전히 있지만, 사회 혁명은 더는 가능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계급투쟁의 역사로서, 역사는 겉보기에는 끝난 것처럼 보인다.

놀라운 것은 사회주의의 이념을 이 새로운 사태에 여전히 적응하려고 하는 다양한 시도들이다. 전통적인 개념에서 사회주의는 그것의 출현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드는 조건이 널리 퍼졌지만 아직 다다랄 수 있는 것으로 기대된다.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가 착취적인 물질적 생산관계에서 그 기반을 잃었지만,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 노동의 특성과 관련한 도덕적철학적 영역에서 새로운 기반을 발견한다. 빈곤은 결코 혁명의 요소가 아니었으며 그럴 수도 없다고 이야기된다. 그리고 빈곤이 혁명의 요소였을지라도, 대체로 자본주의는 이제 노동 인구의 소비 욕구를 만족시킬 만한 위치에 있으므로 빈곤은 사소한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더는 진실이 아닐 것이다. 즉각적인 필요를 위해 싸우는 것이 필요할지라도, 그러한 투쟁은 더는 전체 질서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지 않는다. 사회주의를 위한 싸움에서 노동자의 양적인 욕구보다는 오히려 질적인 욕구가 더 많이 강조되어야 한다. 필요한 것은 개량주의적이지 않은 개혁을 통한 노동자에 의한 점진적인 권력 획득이다.

노동자의 생산 통제는 자본주의에서 확립될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 개량주의적이지 않는 개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렇다면, 노동자 통제를 위한 싸움은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과 같으며 남은 문제는 그렇게 하려는 절박한 욕구가 없을 때 이것을 어떻게 불러일으키느냐 하는 것이다. 기존 노동 조직을 자본주의의 구조 속으로 통합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노동 계급 다수에게 생활 조건을 개선시킬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며,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계급투쟁이 사회 발전의 결정 요소이기를 그치게 될 것이라고 가정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 경우에 (인간은 그가 처한 상황의 산물이므로) 노동 계급은 혁명적 의식을 발전시키지 않을 것이며, 불확실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해 현재의 상대적인 복지를 위험에 빠뜨리는 데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비록 궁핍이 노동 시장의 요동치는 임금 체계로만 측정되는 것이 아닐지라도, 마르크스의 혁명 이론이 노동 계급의 점증하는 궁핍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노동자의 생산 통제는 사회 혁명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노동 계급의 행동을 통해 점진적으로 달성될 수 없다. 노동자의 생산 통제가 개혁 조치로서 도입된 곳에서, 그것은 노동자의 조직을 통해 노동자를 통제하는 부가적인 수단임이 드러났다. 이를테면, 독일 혁명의 결과로 생긴 합법적인 노동 평의회는 노동조합의 단순한 부가물이었으며 제한된 활동 범위 안에서 운영되었다. 노동조합을 평의회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노동조합은 고용주와 국가의 도움으로 직장 위원회에 대한 통제를 행사할 수 있었다. 이 관계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평의회 체제의 재생과 더불어 변화하지 않았는데, 그때 평의회 체제는 (생산과 투자에 관한 결정에서 노동에 발언권을 주는) 이른바 공동 결정법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동 입법의 정신이 어떤 것인지는 1952년 독일 노동법 49조로부터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적용할 수 있는 집단적 동의의 틀 안에서, 고용주와 노동 평의회는 성실하게 협력하여, 기업과 그 피고용인을 위해 그리고 공통의 복리를 고려하여, 기업을 대표하는 노동조합과 고용주 협회와 함께 일한다. 고용주와 노동 평의회는 노동과 기업의 평화를 위태롭게 할지 모르는 어떤 행위도 해서는 안 된다. 특히 고용주와 노동 평의회는 서로에 대항하는 노동 투쟁의 조치를 수행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집단적 협정을 체결할 자격이 있는 당들의 노동 투쟁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공동 결정은 고용주의 재산, 즉 그의 기업과 생산에 대한 고용주의 단독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또 미치지 않는다. 그것이 함축하는 것은 경영(이론적으로는 이윤의 사용에 관해서도)에 대해 제안 할 수 있는 노동자 대표의 권리였다. 그러나 제안은 반드시 수용되는 것이 아니며 실제로 자본가의 이해관계와 충돌하는 제안이 경영에서 존중되었던 증거는 하나도 없다. 의미가 있으려면 공동 결정은 공동 소유여야 할 것이지만, 그것은 임금 체제의 종말일 것이다. 공동 결정 자체는 산업 평화가 유지되는 데 필요한 임금 협정, 설비 규제, 고충 절차 같은, 노동조합에 의해 수행되는 일상적 활동만을 인정한다.

독일의 노동자 통제에 관해서 이야기되었던 것은, 약간의 사소한 수정을 통해, 산업체 내에서 직장 대표, 노동 위원회, 그리고 비슷한 노동자 대표의 형태를 합법화한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에 대해서도 되풀이될 수 있다. 이러한 조치들은 산업 민주주의가 전개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기존 생산관계를 보호하고 거기에 내재하는 알력을 감소하기 위해 기획된다. 이러한 조치들은 사회적 변화를 향한 길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이다. 그러나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장악하지 못하고 사회 변형 과정의 단일한 조직자로 정부에 그들의 권력을 맡길 때는 사회 혁명들조차 노동자 통제로 이끌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러시아의 사례였고, 약간 수정하면 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출현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는 정부가 노동자 평의회에 사소한 기능과 생산에 대한 통제 조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예외처럼 보인다.

유고슬라비아에서 공산주의 정부가 모든 권력의 궁극적인 원천이지만, 러시아와 단절한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시장 관계로 복귀함으로써 그리고 노동자 평의회의 통제 하에 있는 개별 기업의 결과적 자율성에 의해 경제 분산 정책을 채택했다. 노동자 평의회는 국가가 결정하는 일반적인 발전 계획의 틀 안에서 경쟁적인 기업가 기능과 경영 기능을 떠맡았다. 정부에 의해 정해진 한정된 범위 안에서 평의회와 평의회에 의해 선출된 경영 위원회가 노동, 생산 계획, 임금 예정표, 판매와 구매, 예산, 신용, 투자 등등의 조절에 관하여 결정한다. 노동자 평의회와 지역 정부가 혼합된 위원회에 의해 임명된 관리자가 각 기업체를 주재하여, 노동자의 규율, 고용과 해고, 작업 할당 같은 업무와 관련한 일상의 활동을 관리한다. 그는 노동자 평의회의 결정이 국가의 규제와 출동할 경우 그 결정을 거부할 권리를 지닌다.

다소 복잡한 특성을 지닌 정부의 규제가 노동자 평의회의 자기 규제적 권력을 제한한다. 정부의 규제는 부분적으로는 정부 법령에 의해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노동자 평의회와 협력하는 지역 당국에 의해 도입된다. 조세 체계는 개별 기업의 소득의 일부가 처리될 부분과 투자와 임금에 관한 정책 결정의 범위를 결정한다. 이윤은 자체의 비용을 상쇄하고 정부 기업에 투자하기 위해 정부가 빨아올린다. 정부는 개인 소득의 일반적 증가율을 결정하지만, 최소 임금을 고수할 것을 요구하면서, 정부는 노동 생산성을 증가하기 위해 능률 임금과 보너스를 허용한다. 사회 보장 제도는 노동자의 총소득을 크게 감소시킨다. 투자나 투자 회수는 수익성 원칙에 의해 결정되며 가격, 이윤, 신용 정책에 의해 바람직한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 요컨대, 이러한 조건에서 가능한 한, 경제에 대한 전반적인 통제는 노동자 평의회 쪽의 제한된 자율적 통제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수중에 남아 있다. 노동자 평의회가 정부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지만, 정부는 평의회가 작동하는 조건을 설정한다.

그러나 평의회와 정부 사이의 관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시장 경제 안에서는 생산과 분배에 대한 진정한 노동자 통제의 확립이 객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협동조합과 달리 노동자 통제는 정부가 다르게 결정하면 사적 자본의 경쟁에 의해 파괴될 수가 없을지라도, 노동자 통제는 초기 협동조합 운동을 괴롭힌 것과 동일한 딜레마에 봉착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생산 영역에서 협동조합을 형성하는 노동자들은 극단적인 전제주의로 자신들을 통치야야 할 모순적인 필요성에 직면한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자본주의 기업가의 역할을 맡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생산 협동조합의 일상적 실패를 설명해주는 모순인데, 생산 협동조합은 순수한 자본주의적 기업이 되든지, 아니면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계속해서 지배한다면 해소되어 사라진다.” 경쟁적인 시장 경제에서 움직임으로써, 유고슬라비아 노동자들은 여전히 자본가들에 의해 착취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착취해야 한다. 이것이 더욱 입맛에 맞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그들의 통제 범위를 넘는 경제 과정에 그들의 종속 사실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이윤 생산과 자본 축적이 그들의 행동을 통제하고 궁핍과 불안을 영속화한다. 유고슬라비아의 임금은 유럽에서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임금은 그것보다 자본이 더 빨리 증가하는 한에서만 증가할 수 있다. 고용된 사람들의 소득을 올리기 위해서는 더 소수의 노동자가 더 많은 이윤을 산출해야 하기 때문에 노동자 평의회에 허용된 통제 조치는 반() 사회적 태도를 고무한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고용이 수익성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즉 자신들의 재생산 비용 이상의 잉여를 산출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실직 상태가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장 사회주의에서는 거절당한 일자리와 보수를 찾아 자본주의 유럽 전역을 배회한다. 자본주의 세계 시장으로 국가 시장의 통합은 노동 계급을 자기 착취와 새로운 지배 계급의 착취에 종속시킬 뿐 아니라, 무역 관계와 해외 자본 투자를 통한 세계 자본주의의 착취에도 종속시킨다. 이러한 조건에서 노동자 통제에 대해 말하는 것은 완전히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자 통제 없는 사회주의가 있을 수 없지만, 사회주의 없는 진정한 노동자 통제도 있을 수 없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 통제의 점진적인 증가가 실제로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동 경영, 참여, 또는 공동 결정 같은 말로 치장한 거짓 사회 개혁으로 자신들의 절대적인 계급 지배를 숨기려는 지배 계급의 악선전에 놀아나는 짓일 뿐이다. 노동자 통제는 계급 협조를 배제한다. 그것은 자본 생산 체계에 참여할 수 없고 대신에 그것을 폐지한다. 사회주의도 노동자 통제도 어딘가에 실재한 적이 없다. 국가 자본주의와 시장 사회주의, 또는 양자의 결합에서도 노동 계급은 생산과 분배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 없이 임금 노동자의 지위에 있다.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혼합 또는 순수한 자본주의 경제의 노동자의 지위와 다르지 않다. 어디에서든지, 노동 계급의 해방을 위한 투쟁은 여전히 시작되어야 하고 생산의 사회화 부족과 임금 노동의 제거를 통한 계급 폐지가 결여된 상태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현재 상태에 만족하는 노동 계급이 현재 지배적인 체제 안에서 더 높은 소득을 위해 투쟁하기보다는 권력 투쟁에 참여하는 일은 거의 기대할 수 없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생활 조건의 개선 문제가 크게 과장되었지만, 그럼에도 노동 계급 급진주의를 소멸시키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개선이 이루어졌다. 노동력의 가치가 노동력이 창조한 생산물의 가치보다 언제나 더 작을지라도, 노동력의 가치는 상이한 생활 조건을 함축할지 모른다. 그것은 하루 12시간 또는 6시간 노동으로, 좋은 주택 또는 열악한 주택으로, 다소의 소비재로 표현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특정 시기에, 주어진 임금과 그 임금의 구매력이 노동 인구의 불만과 갈망뿐 아니라 노동 인구의 조건을 결정한다. 개선된 조건은 통상적인 조건이 되고, 노동자의 계속된 묵인은 이러한 조건의 지속을 요구한다. 조건이 악화되면, 덜 풍부한 조건의 악화가 이전에 그러했던 것과 동일하게 노동 계급의 반대를 자극할 것이다. 사회적 합의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현재 지배적인 생활수준이 보장될 수 있으며 어쩌면 개선될 수 있다는 가정 하에서 뿐이다.

최근의 경험이 분명하게 말해주지만, 이 가정은 보증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론적 근거에서 그것의 타당성 결여를 주장하는 것이 그것의 영속성이라는 환상에 기반을 둔 사회적 관행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의 다양한 수정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위기 메커니즘이 재출현하는 징후들이 있다. 미국의 지속적인 경제 침체와 서유럽의 팽창 중지로 인하여, 새로운 각성이 이미 시작되었다. 정부가 유도하는 생산이 지닌 잠재력이 감소함에 따라, 자본가들은 그 다음에 사회적 불안이 증대되든 상관하지 않고 수익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경제 혁신이 자본주의에 고유한 위기 메커니즘을 연기할 수는 있지만 극복할 수는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숨겨진 위기가 격렬해질 때, 거짓 번영이 실질적인 불경기에 이를 때, 최근 역사의 사회적 합의는 부활하는 혁명 의식에 자리를 내어줄 것이라고(증대되는 체제의 불합리성이 그것의 존재에 의해 여전히 이득을 보는 사회 계층들에게도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에)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거의 모든 저개발 국가들에 존재하는 혁명 직전의 조건은 별개로 하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외관상 제한되어 보이지만 끊임없는 전쟁은 별개로 하고, 전반적인 불안이 서구 세계의 표면상의 사회적 평온함 밑에서 그 기초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프랑스에 일어난 최근의 대변동에서처럼 이따금 갑작스런 의지 표명이 나타난다. 이런 일이 비교적 안정적인 조건하에서 가능하다면, 전반적인 위기 상황에서는 확실하게 가능하다.

자본주의 체제로 전통적인 노동 조직의 통합은 계급 협조에 의해 약속받은 실제의 이득을 보증할 수 있는 한에서만 자본주의 체제의 자산이다. 이러한 조직들이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억압의 도구가 될 때, 그 조직들은 노동자의 신뢰를 상실하고 그와 더불어 부르주아지에게 가치가 없어진다. 비록 파괴되지는 않을지라도, 그 조직들은 독립적인 노동 계급의 행동에 의해 기각될 것이다. 러시아에서처럼 노동 계급 조직의 부족이 조직화된 혁명을 막지 못한 역사적 증거들이 있을 뿐 아니라, 1918년 독일 그리고 1차 세계대전 동안과 그 후에 잉글랜드의 직장 대표 운동에서처럼 아주 견고한 개량주의 노동 운동의 존재가 새로운 노동 계급 조직들에 의해 도전받을 수 있다는 증거도 있다. 1956년 폴란드와 헝가리에서처럼 전체주의 체제 하에서조차 자연발생적인 운동이 노동자 평의회의 형성으로 표출하려는 노동 계급의 행동에 이를 수도 있다.

개혁은 개혁 가능한 자본주의를 전제로 한다. 자본주의가 이러한 특성을 지니는 한, 노동 계급의 혁명적 본성은 잠재된 형태로만 존재한다. 심지어는 노동 계급이 자기 계급의 처지를 의식하지 못하게 될 것이며 자기 계급의 열망을 지배 계급들의 열망과 동일시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자체의 발전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계급의식의 형성을 낳는 조건을 재창조하게 될 때, 그것은 또한 사회주의에 대한 요구로서 노동자 통제에 대한 혁명적 요구를 소생시킬 것이다. 사실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간 과거의 모든 시도는 실패했으며, 새로운 시도도 다시 실패할지 모른다. 그래도 노동 계급이 자신의 해방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은, 처음에는 제한적일지라도, 자기 결정의 경험을 통해서뿐이다.

 

1967

 

 

옮긴이: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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