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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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2007년)/2007년 9월호

꼬뮨의교훈-트로[번역]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4:04

파리코뮌의 교훈

트로츠키

이 글은 19212월에 트로츠키가 쓴 [Lessons of the Paris Commune]을 옮긴 것이다. 트로츠키는 1871년 파리코뮌을 그 뒤에 일어난 혁명들과 견주어 보면서 혁명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이자 교훈을 중앙집중화된 노동자정당이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또한 그는 노동자 정당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1921년이 혁명적 시기이기 때문에 그러한 정당이 더욱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오늘날에도 트로츠키가 지적한 점은 아주 쓸모 있다. 파리코뮌의 교훈은 역사적 경험을 줄 뿐만 아니라, 구체적 현실 속에서 노동자정당의 원리를 풍부하게 제시해준다. 짧은 글이지만 파리코뮌의 교훈은 혁명정당의 상을 가다듬을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파리코뮌의 역사에 대해 연구할 때마다, 무엇보다도 최근의 러시아혁명, 독일혁명, 헝가리혁명과 같은 뒤에 일어난 혁명투쟁을 통해 얻은 경험들 덕분에 새로운 측면에서 그것을 바라보게 된다. 보불전쟁은 세계적 대량학살을 예고하는 피의 분출이었고, 파리코뮌은 세계노동자혁명을 예고하는 불꽃이었다.

 

코뮌은 일치된 세력으로 뭉칠 수 있는 능력, 앞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용기와 같은 노동대중의 영웅주의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와 함께 파리코뮌은 노동대중이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선택하지 못하는 무능력, 운동지도부에 대한 노동대중의 우유부단한 태도, 첫 승리를 거둔 뒤 멈춰서는 치명적인 경향, 그리고 이 때문에 적들이 숨을 돌리고 원래의 지위로 복귀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코뮌은 너무 늦게 나타났다. 94일에 코뮌은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파리노동자는 한 번의 타격으로 티에르는 물론 비스마르크를 포함하여 모든 과거 세력에 맞선 투쟁에서 프랑스 전체노동자의 선봉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권력은 민주주의의 아버지들인 파리시의원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파리노동자계급은 당은 물론이고 앞선 투쟁들에 긴밀하게 결합했던 지도자들조차 지니지 못했다.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했고 노동자에게 지지를 얻고자 했던 프티부르주아 애국주의자들은 스스로에게조차 어떤 진정한 믿음을 갖고 있지 못했다. 이름 있는 변호사, 언론인, 시의원 자리를 계속해서 추구하면서, 운동의 지도부를 차지하기 위한 모호한 수만 가지 혁명적 문구들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그들은 그 자체로 노동자계급의 신념을 뒤흔들었다.

 

94일에 프랑스에서 쥘 파브르, 삐까르, 가미어 파게스 등이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폴 봉꾸르, 바렌, 르노델과 같은 이들이 한동안 노동자계급정당의 주인으로 인정받은 것과 같은 까닭에서였다. 르노델파와 봉꾸르파, 심지어 롱게파와 프레세만파는 심리적으로나 지식인적 습성과 행동에서나 혁명적 노동자계급보다는 쥘 파브르파와 쥘 페리파에 훨씬 더 가깝다. 그들의 사회주의적 언사는 대중 속으로 파고드는데 필요한 역사적 가면극 이상은 아니었다. 그것은 파브르, 시몬, 삐까르와 같은 이들이 그들 후손이 사회주의적 표현으로 분류하는 민주적 자유주의문구를 쓰고 남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도 선조들 못지않은 모습을 보였고 선조들의 역할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정부에서 파벌을 구성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계급이 프랑스에서 권력을 잡아야만 하는가와 같은 훨씬 더 중요한 문제를 결정해야만 하는 상황이 올 때, 르노델, 바렌, 롱게와 같은 이들은 코뮌을 도살한 갈리페의 협력자인 밀랑의 편에 설 것이었다. …… 사교장과 의회에 있는 혁명의 수다쟁이들은 진짜 혁명과 마주쳤음을 알게 되자, 그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진정한 노동자정당은 의회에서 술책을 위한 기구가 아니라, 축적되고 조직된 노동자계급의 투쟁경험이다. 지난 역사 전체를 기초로 모든 단계의 발전전망을 이론적으로 미리 내다보고, 그것에서부터 필요한 행동을 정식화할 수 있는 정당의 후원 하에서만, 노동자계급은 역사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되풀이해 왔던 주저함, 불충분한 결정, 오류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파리노동자계급은 그러한 정당을 가지지 못했다. 코뮌으로 몰려든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기적과 예언의 목소리를 기다리면서 머뭇거렸고, 그러는 동안 대중은 환상과 단호함이 없었기 때문에 판단력을 잃고 좌충우돌했다. 그러한 상황의 결과, 혁명은 너무 늦게 일어났고 파리는 포위되었다. 노동자계급은 기억 속에서 지난날 일어난 혁명의 교훈, 앞선 전투의 교훈, 거듭되는 민주주의자들의 배신의 교훈을 재현해 내기까지 6개월의 시간을 허비했고, 그제야 권력을 차지했다.

 

6개월은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만일 18709월에 프랑스 노동자계급의 선두에서 행동하는 중앙집중화된 혁명정당이 건설되었다면, 프랑스의 역사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318일에 권력이 파리노동자계급의 손으로 넘어 온 것은 계획적인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적들이 파리를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적들은 계속해서 기반을 잃었고, 노동자는 그들에게 경멸과 증오를 보냈다. 프티부르주아는 더는 적들을 믿지 못했으며, 대부르주아는 더는 적들에 의지할 수 없게 된 것을 두려워했다. 병사들은 장교들을 적대시했다. 정부는 다른 곳에서 세력을 규합하려고 파리에서 도망쳤다. 그리고 그때 노동자계급은 상황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곧이어 일어난 사실을 설명해준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혁명이 갑자기 덮쳤던 것이다.

 

이 첫 번째 성공은 수동성의 새로운 원인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적들은 베르사유로 도망쳤다. 그것은 승리가 아니었던가? 그 순간 정부의 지배력은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서도 분쇄될 수 있었다. 파리에서 두목 티에르와 함께 모든 장관들을 감옥으로 보낼 수 있었다. 이들을 방어하려고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건을 좀 더 거시적 측면에서 바라 볼 수 있는 견해와 함께 결정을 집행하는데 필요한 특별조직을 갖춘 중앙집중화된 당 조직이 없었다.

 

보병 잔류병들은 베르사유로 철수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장교들과 병사들을 묶어주었던 끈은 아주 느슨해졌다. 그러자 이들은 파리에서 한 무리를 이루어 수십 수백 명이 노동자 편에 가담했다. 퇴각의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이들을 퇴각군에 합류시키고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릴 수도 있었다. 병사들 사이에서 장교들에 대한 불만을 강화하고, 이로 인해 병사들이 장교들로부터 자유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심리변화의 순간을 이용하여 그들을 인민과 단결하도록 파리로 이끌고 오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티에르의 지지자들 자신들도 인정하고 있다시피 쉽게 현실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거대한 사건들의 한 가운데에서 그러한 결정은 오직 혁명을 추구하고 그것을 준비하며, 이성을 잃지 않는 혁명정당, 원숙한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에 익숙해있고 행동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당만이 할 수 있다.

 

그리고 프랑스 노동자계급에게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행동하는 정당이다.

 

국민방위군 중앙위원회는 사실상 무장한 노동자와 프티부르주아의 대표자회의였다. 혁명의 길에 나선 대중이 직접 뽑은 이 대표자회의는 최상의 행동기관을 대표했다. 그러나 아울러 국민방위군 중앙위원회는 초보적이고 즉자적으로 대중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나고 있을 때 대중이 지니고 있던 모든 강점뿐만 아니라, 여전히 더 많았던 약점도 지녔다. 그러한 약점은 우유부단함과 기다림, 처음 성공하고 나서 성공에 만족하려는 경향에서 입증된다.

 

국민방위군 중앙위원회는 지도가 필요했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경험을 체화하고 있으며, 중앙위원회뿐만 아니라, 프랑스노동자계급의 모든 군대, 부대, 최하층과 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조직은 혁명에서 꼭 필요했다. 그때 상황에서 그러한 정당이 있었다면, 국민방위군 기구를 대표했던 대표자회의를 통해서 대중과 접촉을 유지하면서 그들의 상태를 알 수 있었고, 그 지도중앙은 당의 투사를 매개로 대중에게 파고들어 그들의 생각과 의지를 모아낼 수 있는 구호를 날마다 제시할 수 있었다.

 

국민방위군은, 정부가 베르사유로 철수하면서 모든 책임을 자신들이 감수해야만 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의 책임을 면제해주기 위해 서둘렀다. 중앙위원회는 코뮌을 위한 합법적 선거를 염두에 두었다. 그들은 우익의 눈에 코뮌이 합법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파리의 행정단체장들과 협상했다.

 

베르사유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는 것과 함께 행정단체장들과 협상하는 것은 군사적 관점에서 아주 올바른 책략이며 목표와도 부합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 협상은 어떤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나 그저 투쟁이 중단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진행되고 있을 뿐이었다. ‘합법성을 바라는 프티부르주아 급진주의자들과 사회주의적 이상주의자들, 그리고 합법정부의 일부였던 의원들, 행정단체장들과 같은 인물들은 혁명파리가 앞으로 스스로를 합법적코뮌으로 감싸는 순간이 오기 전에 티에르가 그것을 정중하게 중단시킬 수 있기를 그들 영혼의 밑바닥에서부터 바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성한 연방주의와 자율주의의 원리는 수동성과 우유부단을 부추겼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파리는 많은 다른 코뮌과는 전혀 다른 하나뿐인 코뮌입니다. 파리는 그 누구에게도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파리는 독재의 사례가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에 독재를 위한 투쟁을 하지 않습니다.”

 

요약하자면,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던 노동자혁명을 프티부르주아적 개량인 자치공동체로 대체하려는 시도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진정한 혁명을 위한 과제는 전국에 걸친 모든 권력을 노동자계급의 손으로 장악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파리는 기반, 버팀목, 거점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에 이르려면 꾸물거리지 말고 베르사유를 정복하는 것, 프랑스 전역으로 선동가과 조직가들, 무장군대를 보내는 것이 필요했다. 동조자들과 접촉하고 망설이는 이들을 북돋우며, 적대적인 반대파를 무너트리는 일이 필요했다. 이는 그때 상황을 구원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방책이었다. 그러나 파리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공격적이고 공세적인 정책을 펼치는 대신에, 스스로를 자치공동체 안에 가두어 두려했다. 다른 이들이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는 이상 그들 지도자들은 공격하지 않을 것이고, 각각의 도시는 신성한 자치권을 가질 것이었다. 일종의 세속적 무정부주의인 공상적 잡담은 실제로는 혁명적 행동에 부닥쳐 비겁을 숨기는 역할을 했다. 혁명적 행동은 끝까지 끊임없이 해야만 하며, 그렇지 않을 것이라면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

 

프티부르주아적인 지역주의와 자치주의의 유산인 자본가조직에 대한 적개심은 프랑스노동자계급이 가진 약점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지역별, 지구별, 부대별, 구역별 자치주의는 몇몇 혁명가의 실제적 행동과 개별적 독립성을 위한 가장 좋은 보장책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프랑스 노동자계급의 많은 희생을 대가로 한 커다란 오류였다.

 

전제적 중앙집중주의숨 막히는 통제에 맞선 투쟁이라는 공식에 따라 프티부르주아들이 뒷받침하는 지도자들과 지역 사제들과 함께, 여러 노동자 집단의 자기보존과 프티부르주아의 이해를 위해 싸움을 일으켰다. 전체노동자계급은 자신의 지도부, 지구, 지역, 집단들이 철의 규율로 결집하여 단결한 기구가 존재하는 조건하에 그들의 문화적 독립성과 정치적 함의들을 보존하는 동안에는, 사건들에 끌려가는 대신, 적들의 약한 부위들에 대해 시간마다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면서 질서정연하고 확고하게 행동할 수 있다. 배타적 자치주의의 경향은 그것이 어떻게 설명되건 간에 결국 죽은 지난날의 유산일 뿐이다. 뒤이어 공산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생디칼리스트들의 공산주의가 스스로를 자치주의에서부터 해방시킨 것은 노동자혁명을 위해서 좋은 일이었다.

 

* * *

 

당은 인위적으로 혁명을 만들어내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권력을 잡을 순간을 마음대로 선택하지 않지만, 사건들에 능동적으로 개입하고, 모든 순간에 혁명적 대중의 심리상태에 파고들며, 적들의 저항의 강도를 평가하면서 결정적인 행동을 위한 가장 적절한 순간을 선택한다. 이것은 당의 역할 가운데 가장 어려운 측면이다. 당의 결정이 언제나 올바른 것은 아니다. 필요한 것은 올바른 이론, 대중과 긴밀한 접촉, 상황에 대한 또렷한 이해, 혁명적 직관, 흔들리지 않는 단호함이다. 노동자투쟁의 모든 영역에 더 깊숙이 파고들수록, 목표와 규율의 일치를 통해 더욱 더 단결할수록, 혁명정당은 더 빨리 그리고 더 확실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된다.

 

밀물 때나 썰물 때나 대중운동에 밀접하게 뿌리내리고, 내적으로 철의 규율로 용접되어 있는 이와 같은 중앙집중화된 정당조직을 갖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고된 노동을 하는 대중의 강력한 혁명적 압력이라는 조건 없이는 권력을 장악할 수는 없다. 당이 위기의 시기와 순간을 더 잘 이해할수록, 저항의 기반들이 더 잘 준비될수록, 무장력과 역할이 더 많이 분담될수록, 더 확실한 성공이 보장될 것이고, 혁명이 지불해야할 희생은 더 적어질 것이다. 권력을 장악하는데서 주의 깊게 준비된 행동과 대중운동의 상관관계는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과제이다.

 

1871318일과 1917117일을 견주어 보는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 매우 교훈적이다. 파리의 지도적 혁명 서클들은 행동의 주도력이 절대적으로 모자랐다. 부르주아정부를 통해 무장한 노동자계급은 파리의 실제 주인이 되었고, 대포나 소총과 같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모든 물리적 권력수단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부르주아계급은 거인의 무기를 되찾으려고 시도하면서 대포를 빼앗고자 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실패했다. 정부는 파리에서 공포감을 느끼고 베르사유로 달아났다. 상황은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그러나 아침이 밝아서야 노동자계급은 자신들이 파리의 주인임을 깨달았다. 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에 모습을 드러낸 지도자들은 이미 성취된 사건을 기록하고 혁명의 칼날을 무디게 만들려고 자신들의 권력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한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사건들이 다르게 진행되었다. 모든 곳에 조직원을 갖고 있던 당은 각각의 진지를 강화하고, 노동자와 수비대가 함께 정부에 맞서도록 균열을 강화하면서, 권력을 장악하려고 확고하고 단호하게 행동했다.

 

7월의 무장시위는 적들의 저항 권력과 대중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긴밀한지를 평가하려는 당이 실시한 광범위한 정찰활동이었다. 정찰활동은 전초부대들의 투쟁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패배했지만, 아울러 그러한 활동은 당을 밑바닥 대중과 연결시켜주었다. 8월과 9, 10월에는 강력한 혁명적 분출을 겪게 된다. 당은 그것을 통해 이득을 보았고 노동계급과 수비대 안에서 꽤 많은 지지자를 얻었다. 나중에 음모적 준비와 대중행동 사이의 조화는 거의 자동적으로 이루어졌다. 소비에트 2차대회는 11월로 정해졌다. 우리의 모든 사전선동은 대회가 권력을 잡도록 이끄는 것에 맞추어졌다. 그렇게 해서 봉기를 117일에 맞추기로 사전에 결정했다. 적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케렌스키와 그의 의원들은 페트로그라드에서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아무리 작은 규모라 할지라도 뭉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수비대 가운데 가장 혁명적인 부대를 수도에서 내보내는 것이 필요했다. 우리의 처지에서 보자면 케렌스키의 이러한 시도는 거꾸로 그것을 결정적으로 중요한 새로운 충돌의 계기로 삼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1/3의 이동이 군사적 고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반혁명세력의 연합을 목적으로 계획된 것이라며 케렌스키정부를 드러내놓고 비난했다. 우리는 뒤이어 공식기록에서 확증을 찾아냈다. 이러한 충돌은 우리를 수비대와 훨씬 더 긴밀하게 묶어주었고, 117일에 예정된 소비에트대회를 지원하라는 적절한 임무를 그들에게 부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정부 자체가 너무나 힘이 없었지만 수비대를 내보내야 한다고 고집했을 때, 우리는 정부계획의 군사적 근거를 확인해야겠다는 핑계로 이미 우리가 장악하고 있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안에 혁명전쟁위원회를 세웠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의 지지를 받는, 사실상 합법적 무장봉기조직인 순수군사조직을 갖게 되었다. 이와 함께 우리는 모든 군부대, 군수창고 같은 곳에서 인민위원들을 지명했다. 비밀군사조직은 구체적인 특수임무들을 완수했고 중요한 군사적 임무에 필요한 아주 믿을 수 있는 투사들을 혁명군사위원회에 제공했다. 무장봉기의 준비와 달성에 꼭 필요한 작업들이 공개적이면서도 너무도 질서정연하고 자연스럽게 실행되었기 때문에, 케렌스키가 이끄는 부르주아계급은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똑똑히 알지는 못했다. (파리의 노동자계급은 확실히 승리한 뒤에야, 그것도 의도하지도 않았던 승리 뒤에야 자신들이 상황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페트로그라드에서 그것은 정반대였다. 노동자와 수비대에 바탕을 삼고 있던 우리 당은 이미 권력을 장악했고, 자본가계급은 정말로 조용한 밤을 보내고 아침이 되어서야 나라의 조타키가 자신들의 무덤을 파는 이들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당 안에서는 전략을 둘러싸고 많은 다른 생각이 있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중앙위원회의 몇몇 위원은 페트로그라드가 나라의 다른 지역에서 떨어져 있고 노동자계급이 농민에게서 분리되어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대며 아직 상황이 무르익지 않았다고 권력 장악을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또 다른 동지는 우리가 군사적 공모라는 본질적 요소의 중요성에 대해 충분히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10월에 중앙위원회의 한 위원은 민주협의회가 열리고 있던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을 에워싸고 당중앙위원회의 독재를 선언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소비에트 2차대회가 열리는 순간을 위한 군사적 준비작업 뿐만 아니라 집중적인 선동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계획을 적들에게 보여주었고, 그들에게 준비할 기회는 물론 사전에 우리를 타격할 기회까지도 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의 포위와 군사적 공모의 시도는 틀림없이 대중을 당황하게 만들면서 상황의 발전에 너무도 부적합한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 볼셰비키파가 장악하고 있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서조차도, 투쟁이 필연적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예견하는 그러한 계획은, 기병연대들처럼 여전히 망설이고 있는 아주 믿을 수 없는 연대가 수비대 안에 있는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수비대 안에서 크나큰 혼란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 있을 소비에트 대회를 방어한다는 신성불가침한 주장으로 더욱 강하게 단결하고 있는 수비대를 굴복시키는 것보다 쉽게 대중이 바라지 않았던 공모를 분쇄할 수 있도록 케렌스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그러한 까닭에서 중앙위원회 다수는 민주협의회를 포위하는 계획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것은 옳았다. 그러한 행동은 아주 중요한 상황에서 매우 적절한 판단이었다. 무장봉기는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2차 소비에트대회 소집일이라는 미리 계획된 공개적인 날짜에 정확히 승리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이 보편적인 법칙이 될 수는 없다. 그 전략은 특정한 조건에서 요구되었던 것이다. 누구도 더는 독일인과 전쟁을 계속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적어도 혁명적 병사들은 페트로그라드에서부터 전선으로 이동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수비대 전체가 이 한 가지 까닭으로 노동자의 편에 섰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케렌스키가 꾸민 음모를 폭로한 정도를 반영했다. 그러나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의 이러한 분위기는 여전히 농민계급의 상황과 제국주의 전쟁의 진전에 좀 더 깊은 원인을 두고 있었다. 수비대 안에서 분열이 일어나 케렌스키가 몇몇 연대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면, 우리의 계획은 실패했을 것이다. 순수한 군사적 공모의 요소들(음모들과 대단히 신속한 행동들)이 활개를 치게 되었을 것이다. 다른 봉기의 순간에는 그러한 선택이 필요할 수도 있다.

 

코뮌(Commune)은 권력과 지휘권에 대한 믿음과 존중을 완전히 잃어버린 농민연대들까지도 충분히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이 현실화를 보증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잘못은 농민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 전략에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1921] 유럽의 나라들에서는 어떠한 상황이 벌어질까? 이 점에 대해서 무언가를 예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사건의 진전이 더디고 자본가 정부가 지난날의 경험을 활용하려고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은 병사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주어진 순간에 잘 조직된 거대한 저항을 극복해야만 할 것이라는 점을 예견할 수는 있다. 그때에는 적절한 순간에 능숙한 공격이 혁명세력에게 필요할 것이다. 당의 임무는 그것을 위해 스스로를 준비시키는 일이다. 드러내놓고 대중의 혁명운동을 안내하는 기구이자, 아울러 무장봉기를 위한 비밀기구인 중앙집중화된 조직이 그 본성을 유지하고 발전시켜야만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 * *

 

지휘부의 선출문제는 국민방위군과 티에르 일파 사이에서 일어난 충돌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파리는 티에르 일파가 지명한 지휘부를 거부했다. 나중에 바랭은 방위군 지휘부를 위에서 아래까지 방위대원들 스스로 선출해야만 한다는 요구를 정식화했다. 그것이 국민방위군 중앙위원회가 방위대원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이 문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구별해야만 하는 정치와 군사라는 두 측면에서 검토해야 한다. 정치적 과제는 국민방위군에서 반혁명지휘부를 일소하는데 있었다. 노동자와 혁명적 프티부르주아가 국민방위군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완전한 선출제도는 반혁명 지휘부를 일소하는 하나뿐인 수단이었다. 게다가 지휘부의 선출이라는 표어가 보병연대 사이에서도 퍼지면서, 정부의 핵심 무기인 반혁명 간부들에 대한 일격을 통해 티에르 일파의 지위를 박탈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계획을 실현하려면 모든 단위 부대마다 조직원을 지닌 정당조직이 필요했다. 한마디로 쉽게 말해 선출제도의 직접적인 목적은 각 부대에 좋은 지휘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 계급에 이바지하는 지휘부에게서 병사들을 해방시키려는 것이었다. 선출제도는 계급노선을 따르는 두 부위로 군대를 분화시키는 쐐기로 역할을 할 것이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사건들은 케렌스키 시대, 특히 10월 전야와 같은 방식으로 발전할 것이었다.

 

그러나 옛 지휘 조직에서부터 군대를 해방시키는 일은 어쩔 수 없이 조직적 결속력과 전투력의 약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 결과 선출된 지휘부는 지휘체계와 규율을 지탱하는 문제 때문에 군사 기술적 관점에서 확실히 허약하다. 따라서 군대가 자신들을 억압했던 오랜 반혁명 지휘부에게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혁명적 지휘부가 자신의 임무를 실행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단순한 선거로는 결코 풀릴 수 없다. 폭넓은 병사 대중이 지휘부를 올바르게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경험을 얻기 전에는, 혁명은 지휘부의 선택문제에서 몇 세기에 걸친 경험을 따르는 적들에게 질 것이다. 단순한 선거와 같은 형식적인 민주주의의 수단은 앞에서 고려한 수단을 통해 보완되고 어느 정도는 교체되어야만 한다. 혁명은 경험 있고 믿을만한 조직가들로 이루어진 조직을 만들어야하며, 그 속에서 조직원들은 아주 믿을 수 있는 지휘부를 선택하고 조직하며 육성하는데 필요한 전권을 제공할 수 있다. 보통 배타주의와 민주적 자치주의는 노동자혁명에서 아주 위험하다. 특히 군대 안에서는 열배 넘게 더 위험하다. 우리는 그것을 코뮌의 비극적 사례에서 보았다.

 

국민방위군 중앙위원회의 권위는 민주적 선출제도에서 나왔다. 공격의 주도권을 극대화할 필요가 있던 순간에, 중앙위원회는 정신을 잃고 노동자계급 정당의 지도력을 세우는 대신 그것을 가로막고, 좀 더 폭넓은 민주적 기반이 필요했던 코뮌의 대표자에게 자신의 권력을 서둘러 넘겼다. 그리고 그것은 선거가 진행되어야 할 상황에서 크나큰 오류였다. 선거가 완료되어 코뮌으로 모두가 집결한 상황이었다면, 단번에 모든 것을 코뮌으로 집중시켜 국민방위군을 다시 조직하는데 필요한 실질적인 권력을 지닌 조직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선출된 코뮌과 함께 지탱된 중앙위원회는 그 선출된 성격 때문에 정치적 권위를 가질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코뮌과 경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울러 중앙위원회는 코뮌이 조직되고 나서는 자신의 존재근거인 순수하게 군사적인 문제들에서 필요한 기세와 단호함을 빼앗겼다. 선출제도는 노동자계급과 그 정당의 손에 있는 민주적 수단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선출제도는 결코 만병통치약일 수는 없다. 선출제도의 수단은 임명과 같은 것들과 결합되어야만 한다. 코뮌의 권력은 선출된 국민방위군에서부터 나왔다. 국민방위군은 이미 코뮌이 세워지고 난 뒤라 하더라도 강력한 손으로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믿을만한 지도자를 제공하고 매우 엄격한 규율의 정권을 세우면서 코뮌을 다시 조직해야만했다. 코뮌은 그렇게 되지 못했고, 혁명을 이끄는 강력한 중심으로서 역할을 박탈당했다. 게다가 코뮌은 분쇄되었다.

 

코뮌의 역사를 한 페이지씩 훑어보면서 우리는 한 가지 교훈을 찾아내게 된다. “강력한 정당의 지도력이 필요하다!” 프랑스 노동자계급은 다른 어떤 나라의 노동자계급보다도 혁명을 위해 더 많은 희생을 치렀다. 그러나 또한 다른 어떤 노동자계급보다도 더 많이 속아왔다. 자본가계급은 늘 자본주의의 족쇄를 강화하려고 모든 색깔의 공화주의, 급진주의, 사회주의를 이용하여 노동자계급을 여러 번에 걸쳐 현혹해왔다. 자본가계급은 그들의 대리인, 그들의 법률가, 그들의 언론인을 통해 운동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으면서, 노동자계급의 발목을 붙잡을 뿐인 민주주의, 의회주의, 자치주의 공식을 전체대중 앞에 내놓았다.

 

프랑스 노동자계급의 기질은 혁명적 용암과 같다. 그러나 이 용암은 이제 수많은 기만과 환멸 때문에 회의주의의 잿더미로 뒤덮였다. 결국 프랑스의 혁명적 노동자는 자신들의 정당에 대해 좀 더 진지해져야만 하며, 말과 행동 사이의 어떤 불일치에 대해서도 가차 없이 폭로해야만 한다. 프랑스 노동자에게는 혁명운동의 모든 새로운 국면에서 대중이 통제하는 지도자와 함께 강철같이 강력한 조직이 필요하다.

 

역사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준비시킬 수 있는 시간을 얼마만큼이나 줄 것인가? 그것은 알 수 없다. 프랑스 자본가계급은 코뮌 전사들의 무덤위에 제3공화국을 세우고 난 뒤 50년이란 세월동안 자신들의 손에 권력을 장악해왔다. 1871년의 투사들에게 모자랐던 것은 영웅주의가 아니다. 그들에게 적었던 것은 뚜렷한 전략과 중앙집중화된 지도 조직이다. 그들이 정복된 까닭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반세기가 흘러 프랑스 노동자계급은 코뮌전사들의 죽음에 복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훨씬 더 단호하고 훨씬 더 조직적으로 행동할 것이다. 티에르의 상속자들은 역사의 빚을 완전히 갚아야만 할 것이다.

 

 

옮긴이: 정원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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