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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2007년)/2007년 9월호

평의회비교결론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4:06

소비에트와 노동자평의회:

러시아, 영국, 독일, 이탈리아의 경험 비교분석

 

도니 굴룩슈타인

 

노동자 평의회는 1905년 러시아 혁명과정에서 처음 태어났다. 그때 이 사건은 서구노동운동에 하나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06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람들은 이따금 러시아 혁명의 사례에서 얻은 교훈이 독일혁명을 위한 준거점이 될 수 없다고 습관적으로 이야기한다. …… [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교훈은 곧 우리 독일의 교훈이기도 하다라고 썼다. 그때 논쟁구도에서 그녀가 지닌 비판적 태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쓸모 있다: “혁명적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이여! …… 러시아로 돌아가라.”

1차 세계대전 뒤 러시아 혁명정당의 원칙을 따르기를 거부했던 핵심인물은 카우츠키이다. 그는 서구와 러시아 노동운동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은 카우츠키에 동의하여 10월 혁명과 소비에트 사이에 있는 긴밀한 연관성을 부정하고 있다. 심지어 1917년 혁명의 결과로 창립됐던 서구 공산당에서 조차 그랬다. 보기를 들면 영국 공산당의 최근 실천 강령을 보자.

 

 

영국에서 사회주의로 이르는 은 소비에트의 과는 다를 것이다. 소비에트의 봉기, 내전 그리고 권력의 새로운 조직(소비에트)의 창조는……차르 독재체제라는 러시아의 특수성에서 나왔다.

 

 

레닌의 견해는 이와 완전히 다르다. 그는 러시아 혁명모델이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날 것이라는 필연성에 대하여 많은 함의를 보여준다고 믿었다. 1919년에 발족되어 1920년대 수많은 혁명가의 중심센터였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모든 곳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러시아 혁명사례를 따르고 모든 소비에트 공화국을 지지하도록 요청했다.

러시아의 고립과 스탈린주의 관료제 때문에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파괴되었지만 지금까지 본질적 문제는 바뀌지 않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혁명적 투쟁과 그 성공의 결과인 러시아 소비에트는 지금도 사회주의자의 지침서로 이바지할 수 있는가? 러시아 소비에트와 독일, 이탈리아, 영국에서 노동자 평의회 사이에 있는 비슷한 점은 질문에 긍정적 답변을 준다. 아울러 서구의 세 지역에서 권력을 잡지 못한 사실도 우리에게 뚜렷한 차이를 드러내준다.

 

 

러시아: 예외인가, 정도인가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이라는 사건은 트로츠키가 말한 연속혁명의 하나의 보기였다. 혁명이 터지기 전에, 트로츠키는 그때 정통 맑스주의자들의 일반적 견해였던 노동자권력은 성숙된 자본주의 하에 노동계급이 인구의 대다수가 되는 지역에서 일어난다.”는 생각에 대해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수적으로 적은 러시아 노동계급이 혁명과정의 마지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뒤엎기 위한 첫 촉매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 미리 내다보았다.

1917년 러시아는 근대성과 후진성이 함께 있는 곳이었다. 농민이 전체인구의 80%를 차지하고 있었고 봉건제의 유산인 절대군주제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자본가 계급도 있었지만 아주 적은 수였으며 정치적으로 차르 체제에 의존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확장과정은 노동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트를 태어나게 했다. 러시아 공업 발전이 보여준 집중성은 비록 3백만 명이었지만 노동계급의 단결성을 강화시켰다. 이러한 단결성은 차르 체제의 위기라는 조건과 결합되면서 그때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보기 드문 노동계급의 전투성으로 이어졌다. 1905년 혁명 이전에도 연평균 493,000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그때 독일과 영국의 전체 노동자 수는 러시아보다 3배 또는 4배였지만, 두 나라의 연평균 파업 참여자 수는 겨우 84,000명과 136,000명이었다.

그때 차르 체제는 부르주아 혁명에 자리를 내줄 단계에 이르렀지만 노동계급의 힘을 두려워 한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의 재산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자신만의 국가권력 창출을 머뭇거리고 있었다. 레닌은 이러한 계급 역관계의 상황 때문에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은 불안정, 반신반의, 변절의 행위를 보이며 결국 봉건귀족체제에 저항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계급역관계의 특수한 결합 형태는 트로츠키의 다음 말에서 잘 나타난다.

 

러시아 혁명은 그것이 완수해야 할 과업을 중심으로 보면, ‘부르주아혁명이다. 왜냐하면 혁명은 절대군주제와 봉건적 소유라는 족쇄로부터 부르주아 사회를 해방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주요 동력은 노동계급이다. 따라서 이러한 까닭으로 혁명이 수행되는 방식을 중심으로 보면 러시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혁명인 것이다.

 

 

그때 러시아에서 일어난 상황은 노동계급의 투쟁이 지니는 성격을 바꾸어놓았다. 어느 곳이던 간에 운동의 시발점은 본질적으로 생산의 사회화에 의해 시작되지만 그 운동이 보여주는 구체적인 모습은 그 사회의 특수성을 담게 된다. 이러한 러시아 혁명운동이 지닌 특수성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첫째, 러시아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요구를 둘러싸고 스스로의 독자적인 걸음을 걸었다. 그래서 190529일에 일어난 겨울궁전 앞 대중시위는 평등한 보통선거를 통한 제헌의회 소집을 전면에 내걸었다. 그러나 차르 정부는 시위 군중에 학살을 명령하면서 이러한 요구에 대응했다. 그 결과 혁명이 일어났다. 그 뒤 다시 한 번 제헌의회 소집을 요구하는 대중파업에서 소비에트가 태어났다. 운동의 순간마다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위한 슬로건을 중심으로 나아갔으며 그들을 둘러싼 상황은 의회주의를 넘어서 노동계급의 자기 권력을 건설하려는 방도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제헌의회 소집이라는 요구는 직접적으로 소비에트 건설로 나아가도록 했다.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혁명운동과 관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발전에서 필요불가결한 단계였다. 오직 다음의 전제조건에서 말이다. 즉 어떤 측면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가 몇 년 동안 지속되고 아울러 다른 측면에서는 혁명적 상황이 대중으로 하여금 부르주아 정치 민주주의 제도가 실질적으로 정착되기도 전에 그 허구성에서 해방되도록 한다는 전제조건에서 말이다.

둘째, 러시아 자본가 계급이 지닌 권력과 제도의 유약함은 노동계급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의 빈약함으로도 나타났다. 서유럽 노동계급은 몇 년 동안 임금상승 등을 통해 자본주의 발전이 떨어트린 떡고물을 주을 수 있었고 스스로 조직할 권리 또한 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하지 않는 한 허용되었다. 이러한 여건은 서구 노동계급으로 하여금 개량주의적 방법을 통해 사회주의로 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경제적 발전과 더불어 노동계급의 정치권력이 늘어날 수 있다는 정치-경제 사이의 상호연계성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경우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1905년 소비에트 안에 있는 공장평의회 대표들은 최소한의 경제적 요구조차 투쟁을 통하지 않고는 실현할 수 없는 사실을 인식하며 그들의 최우선 과제로서 정치적인 총파업을 선택하였다. ‘8시간 노동제와 총을!’이라는 슬로건이 이를 잘 나타내 주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많은 노동계급은 혁명의식을 함께 지녔다. 반면 서유럽에서는 몇몇 선진 활동가만이 혁명의식을 지녔으며, 나머지 노동계급은 개량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셋째, 러시아에서는 특정 노동자 집단에 제한된 투쟁과 전체를 위한 계급투쟁 사이의 분화정도가 서유럽에 견주어 볼 때 그리 크지 않았다. 그 까닭은 러시아의 빠른 산업발전 속도와 폭압적인 차르 체제에 있었다. 맑스는 영국을 자본주의 발전의 전형이라고 보았다. 그런 영국에서는 공업기술과 작업조직방식이 서서히 발전하였고 이러한 맥락에서 1850년대 쯤 숙련공과 같은 직능집단이 숙련기술의 독점적 통제에 바탕을 둔 표준적인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었다. 직능별 숙련공 노동조합은 노동시장에 대한 진입장벽을 통해 자신의 기술에 바탕을 둔 추가 이익을 얻을 수 있었으며 자본가로부터 양보를 강제할 수 있었다. 직능별로 부문화된 노동조합 조직은 엥겔스가 이름을 붙인 노동귀족으로 자라나 눈앞의 이익만을 쫓았다. 이러한 노동조합의 조직패턴은 영국의 공업발전경로를 뒤쫓아 간 나라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서유럽에서는 숙련기술에 바탕을 둔 노동조합의 협상 권력이 노동자의 조직화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이런 방식은 어느 시기에는 노동자가 조직화를 위한 오직 하나의 안정적인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었으나 그 결과는 분파적 태도, 다른 노동자의 투쟁에 대한 연대거부라는 보수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모습은 러시아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자본주의 공업발전은 유럽 자본의 직접적인 관계와 영향력 하에서 일어났다. 러시아에서는 숙련공의 작업장 문화에 바탕을 둔 투쟁이 없었기 때문에 계급투쟁의 토양 자체가 원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러시아의 공업발전은 산업프롤레타리아트를 공장으로 집결시켰으며 이로 인해 숙련공의 작업장 문화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 부르주아 혁명의 시기에 주된 동력으로서 나타난 투쟁집단은 도시에서 아주 잘 발달된 공업프롤레타리아트였다.

 

 

공업발달과정과 함께 러시아에서 국가는 무차별적으로 모든 집단의 노동자를 억압하고 그들이 분파적인 조직화를 하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이러한 사정은 서유럽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앞서 살펴본 러시아의 특성은 서유럽과는 다른 다음의 네 번째 속성을 지니게 했다. 러시아에서 소비에트는 공업 노동계급이 처음으로 진지하게 시도한 정치적인 대중조직이었다. 1905년과 1917년에, 소비에트는 노동운동 안의 다른 부문적, 경제적 조직, 즉 노동조합과 작업장 조직(공장위원회, 현장위원 등)보다 먼저 만들어졌다. 노동조합과 작업장 조직은 주로 경제적인 쟁점을 중심으로 투쟁했다. 이러한 경제 투쟁은 정치 투쟁이 빠르게 늘어난 뒤에 일어났으며 아울러 정치 투쟁을 더욱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17년의 어느 시기를 빼고는, 노동계급이 소비에트를 향한 충성도는 다른 어떤 조직에 의해서도 도전받지 않았다. 우익 개량주의자들도 그때 대중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다른 어떤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소비에트의 형성을 촉진시키기조차 했다. 서유럽에서 이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유럽에서는 이미 개량주의자가 통제하는 노동조합 조직이 있었으며 이들 개량주의자와 노동조합은 노동자 평의회 조직이 자라나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게 되는 일을 막으려고 막강한 영향력과 기구를 이용하였다.

따라서 서유럽은 러시아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서유럽에서 노동계급은 노동자 평의회를 (러시아처럼) 갖가지 경제주의 조직화에 길을 터준 정치권력의 핵심에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서유럽 노동자 평의회는 노동조합의 관료주의적 경향성에 맞서 투쟁하면서 성장했다. 보기를 들면,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자신의 임무를 노동조합 관료주의에 대응하는 것으로 제한하면서 노동조합 안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때 자본주의 위기가 터졌을 때 서유럽 노동계급 가운데 몇몇 선진 활동가들만이 정치 투쟁을 벌였다.

러시아 노동운동에서 개량주의 지도자에 대한 투쟁은 주로 소비에트 안에서 벌어졌다. 소비에트에는 지도자를 소환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개량주의 지도자는 손쉽게 바뀌었다. 또한 대중적 개량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은 겨우 몇 개월 만에 영향력을 획득했다. 서유럽에서 이러한 개량주의에 맞선 투쟁은 아주 더디게 일어났고 게다가 개량주의적 지도자는 이러한 공격에 대비하여 관료주의적으로 통제되는 노동조합 기계속에서 튼튼한 참호를 쌓았다.

이는 단순한 차이가 아니다. 러시아에서 가장 핵심은 서구 노동운동에는 없었던 잘 조율된 혁명정당이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볼셰비키가 러시아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만 나타난 독특한 특징을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러시아 혁명과정 동안 일어난 주변여건들이 당원의 능력 소진과 희생을 피하면서도 당의 발전을 가능케 했다는 점은 인정해야만 한다. 개량주의가 약했다는 점은 정부가 탄압했을 때조차도 혁명적 의식의 대중적 바탕을 폭넓게 지탱했다는 점에서도 나타났다(비록 그것을 만드는데 어려움을 겪었을지라도). 그래서 볼셰비키는 혁명이 대중의 의식을 바꾸어 놓기 전인 19159월 전쟁 공업 위원회의 선거에서 페트로그라드 노동자의 다수에게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19172월 혁명 뒤 도취감에 취해있는 동안, 볼셰비키는 3개월 뒤에야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와 노동조합에 대한 지원과 조직화를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뒤늦게 조직화에 성공한 까닭은 노동계급의 지원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병사 위원회의 상대적 보수성이 소비에트 안에서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이 여러 가지 특수한 상태에서 일어났다고 해서 그런 특수성이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이라는 전 세계 노동자 사이의 연대성을 모호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 모든 곳의 노동자는 공통된 이익을 지닌다는 노동자 국제주의의 신념은 이론 이상의 뜻을 지닌다. 이 사실은 제1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나타났다. 그때 모든 곳에 있는 노동자는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똑같은 적대 계급(자본가 계급)에 부닥쳤고 이에 대해 (평의회라는) 비슷한 대응조직을 만들어 사웠다. 푸틸로프에서 금속노동자는 베를린의 DMV, 글레스고우의 파크해드 단조공장, 튜린의 피아트 공장 노동자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페트로그라드와 튜린 만큼이나 서로 떨어진 곳에서도 평의회 중앙조직은 서로 연계되었다. 1848년 맑스는 이렇게 내다보았다.

 

 

지속적인 시장 확장의 필요성은 자본가로 하여금 지구 끝까지 진출하도록 한다. 자본은 모든 곳에 둥지를 틀어 정착하며 각 지역을 연계시키며 모든 것을 끌어당겨 심지어는 가장 원시적인 곳까지 식민화한다.

 

 

그러나 러시아와 서유럽 사이의 차이는 투쟁이 일어나는 양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24년에 트로츠키는 10월의 교훈에서 지난날 패배와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고려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나라에서 소비에트는 혁명의 민주적단계에서 성장하고 합법화되어 그 뒤 계승되며 활용되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서유럽에서는 되풀이되지는 않을 것이다. 서유럽에서 소비에트는 노동계급 봉기의 직접적 조직으로 창조될 것이다. 오직 며칠 안에 대중 봉기의 직접적인 조직으로 소비에트를 창조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대중봉기가 중요한 임계점을 통과하면서 소비에트는 창출되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새로운 국가권력의 원천으로 자리매김할 분위기가 만들어질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성공적인 소비에트는 트로츠키가 살아있는 동안에 세워지지 않았다. 1920년대 대중적인 공산주의 정당이 만들어지기 전에 창출된 소비에트 가운데 독일의 노동자병사 평의회만이 짧은 기간 동안 소비에트(부르주아 국가권력에 직접적인 도전을 시도하는 무장된 권위체)의 수준에 이르렀을 뿐이다.

그렇지만 지난 60여 년 동안 노동자 평의회는 여러 형태를 띠면서 또다시 일어났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러시아에서만이 노동자 평의회가 소비에트로 전화할 수 있다거나 또는 노동자 평의회가 전쟁 한가운데서 태어날 수 있다는 오류를 기각시킨다.

1936년 바르셀로나 대중운동은 민주정부에 대한 우익군부 쿠데타에 대항하려고 일어났다. 이 사례를 보면 무장된 노동운동이 실패한 주된 까닭은 집중된 노동자 권력을 국가권력으로 전화시키려는 시도에 대해 아나키스트가 반대했다는 사실에 있다. 좌익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그때 세력이 약해서 이러한 과업을 실행할 수 없었고 권력의 공백상태에서 스탈린주의자와 부르주아와 비열한 연대가 이루어져 자라나고 있던 노동자 평의회의 싹을 뽑아버렸다. 세계대전과 관련 없는 노동자 평의회 운동은 1956년 헝가리에서 일어났다. 헝가리 평의회 운동은 국가자본주의 체제에서 통치계급 안에서 일어난 분열에서 비롯되었다. 중앙집중화된 노동자 평의회가 만들어졌지만 곧 러시아 군대가 쳐들어와 그 운동이 진압되었다.

또 다른 사례는 1974년 포르투갈에서 일어났다. 그때 포르투갈 정부가 식민지와 벌인 전쟁에서 실패하고 난 뒤 군대는 분열되고 노동자의 자기조직화의 길이 열렸다. 이 사례에서 혁명의 기운이 약했던 점은 스탈린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평의회의 기반을 쌓기도 전에 노동자의 자주적인 조직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폴란드에서 자유노조운동은 일반적인 노동조합주의를 넘어섰지만 소비에트의 수준까지는 가질 못했다. 그때 계엄령이 내려지기 몇 달 전까지만해도 자유노조는 명확한 지도력만 있었더라면 이중권력의 상황까지 갔었을 것이다.

이 모든 사례들은 우리에게 노동자 평의회가 발전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과 꼭 필요한 조직형태를 엄밀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해준다. 대부분의 자주적 대중조직은 그들이 보여준 놀라운 정도의 유연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서구에서 일어난 노동자 평의회는 개량주의의 조건에서 발전하였는데, 그 개량주의 조건에서 관료주의의 악폐를 차단하려면 노동조합 안에서 노동자 중심의 현장조직 운동이 꼭 필요하다. 이러한 현장조직은 여건이 주어진다면 소비에트로 진화하겠지만 그렇다고 현장조직과 소비에트를 똑같은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소비에트는 그저 이중권력의 상황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노동자의 현장조직운동은 부르주아지의 무장된 국가권력에 도전하지 않는 비혁명적 시기에도 있었다. 그럼에도 역사상 세계대전이 진행되고 있을 때 나타났듯이, 서유럽 노동자의 현장조직 운동은 소비에트로 나아가는 과정을 준비하는데서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지금 자본주의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던 때만큼이나 국제적 수준에서 위기에 처해본 적이 없다. 그때 자본주의가 위기에 부닥친 주된 원인은 대중조직이 부르주아 국가기구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안에 있는 개량주의 기구를 넘어서는 대안적인 권력을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전후 혁명의 물결이 실패한 것은 현장 노동자의 허약함, 비겁함이 아니며 노동자 평의회가 불충분한 조직형태를 띄었기 때문도 아니다. 역사상 전개된 노동자 평의회의 깃발 하에 벌어진 수많은 투쟁과 지구상 모든 노동자의 자기희생은 그 충분한 증거를 보여준다. 그 실패의 주된 원인은 혁명적 지도력이 없었고 개량주의가 득세했기 때문이다.

 

 

개량주의의 문제점

 

지배계급의 영향력은 겉으로 드러난 폭력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안의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에 의해서도 유지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트로츠키가 논했듯이

 

 

지배계급은 자신의 목적을 사회전체에 강제할 수 있으며 또한 습관화시켜 그 목적과 배치되는 모든 것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치부하게 한다. 어떤 체제도 그저 무력만으로는 단 몇 주도 지속될 수 없다.

 

개량주의는 지배계급의 영향력이 노동계급 안에서 드러난 형태이다. 개량주의적 조직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환경에서 노동계급이 제한된 투쟁을 수행할 때 일어난다. 노동조합은 상대적인 임금수준, 표준적 노동조건 확립 등의 즉자적이며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며, 반면 정치영역에서는 개량주의적 정당이 노동계급의 이익을 확보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둘 다 자본주의 체제의 틀 안에서 작동된다.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해있지 않을 때, 위의 두 조직은 단기적 이익을 획득할 수단이 되며 아울러 오랫동안 점진적인 수단을 통해 사회주의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환상을 퍼트리게 된다.

노동조합과 개량주의 정당은 그들을 태어나게 한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그 속성이 각인된다. 노동조합 조직은 주로 집단별로 조직되어 광산 노동자를 금속가공 노동자, 철도 노동자, 교육 노동자 등등에서부터 서로를 떼어 놓는다. 또한 노동조합 조직은 정치적 목적에서 경제적 기능을 떼어내어 노동조합 관료에게 그 기능을 맡도록 한다(노조관료제는 현장노동자가 노조지도자에게 상대적인 자율 권력을 부여한 주체적 허약함의 반영물에 지나지 않는다.). 개량주의 정당은 자본가 계급이 영향력을 얻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활동한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부르주아 국가를 자신의 활동영역으로 삼아 그 틀 거리에 내재된 노동계급 투쟁의 제약조건 또한 받아들이게 된다. 그들은 부르주아 국가의 민족주의 목적에 동의하며 또한 그들은 선출되지 않은 부르주아 판사의 의견에 동조하며 외국 경쟁자와 국내 노동자로부터 자본주의 경제를 보호할 필요성을 받아들인다.

지배를 위한 자본가의 권리는 그 지배가 이미 합의되었다는 전제 하에 도전받지 않게 된다. 결국 그들은 노동계급의 투쟁을 안전하게 조절하고 아울러 비록 현장노동자의 실제 의도가 무엇이던 간에 부르주아지의 목적을 자신의 것인 양 받아들이게 함으로서 자본주의를 강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뜻에서 개량주의 노동운동 조직은 노동계급에게 많은 긍정적 이득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가끔 지배계급의 자유는 어느 정도 개량주의적 노동운동 조직이 주도한 투쟁을 통해 제한받기도 한다(비록 개량주의 관료가 이러한 투쟁을 이끈다 할지라도 빈번히 일어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안정기에 획득된 성과는 혁명 시기에 심각한 장애물로 기능한다. 역사상 혁명 상황에 이르러도 대중의 개량주의 의식과 조직은 없어지지 않으면서 전면적인 계급전쟁에 적합한 새로운 조직과는 별개로 움직일 수 있는 지형을 존속시킨다. 비록 개량주의가 더는 진보를 이룰 수 없고 또한 불황기에 사회의 파괴적 과정에서부터 대중을 보호해줄 수 없을 지라도, 만약 믿을 만한 혁명적 대안세력이 없다면, 노동계급은 생활의 개선을 위해 또 다시 개량주의 노동운동세력에 의존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 서유럽에서 개량주의 노동운동 조직들은 그들의 지도자를 통해 자본과 노동 사이의 완충물로 작동하여 착취관계에서 나온 자본주의 위기의 본질을 숨긴다. 그래서 노동운동의 전진은 약화되어 결국 자본주의를 끝장낼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다. 독일에서 개량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선진적 활동가들을 공격하고 학살하는 지경까지 나갔다.

이러한 개량주의자의 전술이 지니는 뜻은 국제적인 자본주의가 자신의 힘을 다시 충전하고 다시 결합할 시간을 갖게 해준다는 점이다. 독일의 경우 이는 매우 혁명적인 상황에서조차 자본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는 군사적 재조직화의 시간과 여지를 주었다. 자본가와 국가가 최소한 양보하게 함으로써, 그리고 노동과 자본 사이의 협력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퍼트림으로서, 개량주의는 노동과 자본 사이의 근본적 적대라는 사실을 숨겼다. 이는 자본이 잠시 후퇴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와 달리 러시아의 경우, 자본가 계급은 차르의 억압적이면서도 정치적으로 미숙한 국가기구에 의존했다. 1917년 혁명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유럽보다는 러시아 노동계급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적대성을 또렷이 깨달았다. 서유럽의 경우, 잘 만들어진 개량주의 전통이 그때의 실질적 쟁점을 숨기고 이를 통해 노동자 평의회와 노동자 권력으로 나아가는 혁명의 운동성을 약화시키고 분열시켰다.

개량주의가 이중적인 본성이 있다는 점은 위의 논의에서도 나타난다. 즉 개량주의 조직은 노동자의 기본적인 조직이긴 하지만 노동자 조직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가로막는 조직이었다. 그것은 자본주의 착취의 야만성에 대한 수동적인 방어체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장 노동자와는 다른 이익을 가진, 그래서 결국 계급협조에 봉사하는 관료주의적 지도자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주게 되는 조직이다. 개량주의의 이중적 본성은 서유럽 노동자가 노동자 평의회를 처음으로 건설할 때, 그리고 노동자 평의회를 건설하고 난 뒤 평의회 안의 의사결정과정에서 늘 부닥치는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개량주의 문제의 극복과정은 지속적이며 고통스런 과정을 거쳤다. 전후 혁명주의자가 개량주의가 퍼지는 조건에서 어떻게 활동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성공뿐만 아니라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고 나서야 그 극복방식을 알게 되었다. 한편으로 혁명주의자는 개량주의의 견고함이 그러한 사고를 지닌 노동대중(이들은 위기기간동안 자신들을 위한 즉각적인 요구투쟁과정에서 혁명적 결론에 이르게 된다)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므로 혁명주의자는 노동조합운동의 개량주의적 대중조직 안에서 활동해야만 했다. 다른 한편 혁명주의자는 노동자의 전투성에 재갈을 물리는 개량주의적 사고체계와 관료주의적 지도자에 대해 가차 없이 투쟁해야 함을 깨달았다. 노동조합 안에서 활동할지라도, 혁명주의자는 이러한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주된 무기는 혁명적 정당이요, 그 정당은 시기마다 노동계급의 즉각적 쟁점과 사회주의적 목적을 연계시킬 수 있는 사고체계를 만들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1920년대 초반에 획득된 이론적 교훈이었고 또한 전쟁기간동안 러시아와 서유럽에서 벌어진 오랜 실천적 투쟁과정의 결과물이었다. 이러한 투쟁과정에서 나온 주된 결론 가운데 하나는 노동자 평의회였다. 그러나 노동자 평의회 하나만이 아니었다. 평의회는 혁명과정에서 많은 형태를 띠었던 조직체 가운데 하나로, 혁명운동을 이끄는 양날의 한 면이었다. 혁명의 열기는 정치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매우 불균등하였다. 비록 전 세계 노동자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근본적으로 똑같은 적대계급과 마주하고 있긴 하지만, 서유럽을 보면 여러 사회적 층위는 노동 계급 내에 숙련공, 비숙련공 등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아울러 서유럽 국가의 다른 역사적 궤적은 지역에 따라 또는 산업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형식의 개량주의를 만들어냈다.

1915년부터 1920년 사이에 일부 노동자의 주요 활동은 노동자 평의회 운동 안에서 전개되었다. 다른 노동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절대군주제를 철폐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데 만족했다. 또 다른 노동자는 비록 노동자의 혁명독재를 추구하지만, 의회주의 선거에 투표권을 행사하거나 노조에 처음으로 가입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독일에서 노동자 평의회는 사회민주당이 이끄는 자유노조가 8배로 늘어나는 과정과 함께 만들어졌다. 전후 영국에서는 여성이 선거권을 쟁취하고 이탈리아에서는 농민이 선거권을 얻었다. 여러 가지 대중적 활동은 전후 몇 년 동안 유럽 전역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노동자 투쟁 속에서 특정지역이 부각되었다. 우리는 편의상 특정지역에서 활발히 전개된 노동자 평의회 활동의 중심지를 혁명적 보루라고 일컬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각 나라에서 혁명적 보루는 혁명으로 나아갈 길을 이끌었기 때문이다(비록 글래스고우와 튜린에서는 끝까지 가질 못했지만). 비록 이러한 특정지역에서 선도적 활동이 다른 지역에서 투쟁과 연계되어 일어난 것이지만, 그 때문에 민중의 의지를 집중함으로서 각 혁명적 보루가 혁명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각 보루가 새로운 사회로 가기 위한 본질적인 경향성을 철저히 표현해주었기 때문이다. 인접지역에서는 그 지역 민중 스스로의 의지가 구체화됨에 따라 혁명의 보루에서 취해진 행동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혁명 중심지가 선도적 투쟁을 수행한 과정은 민주주의를 가장한 강제성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것은 민주주의의 역동적 실현과정이었다.

트로츠키가 페트로그라드에 대해 표현한 글을 보면, 튜린과 글레스고우 그리고 베를린에서 소비에트가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이러한 각 지역이 노동자 평의회 조직의 중심지로 나타난 배경에는 물론 제국주의의 위기가 객관적으로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에 대해 노동자가 주체적으로 맞선 주관적 요인이 있었다.

 

 

평의회 건설 - 객관적 요인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영향력을 미치는 모든 곳에 지배관계라는 족쇄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관계라는 족쇄의 연계 고리 가운데 일부 지역은 다른 지역에 견주어 볼 때 그 정도가 약했다. 평의회의 중심지가 바로 이러한 약한 연계 고리의 보기였다. 이들 지역은 과도적인 봉건제 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지난 전통이 파괴되는 폭발적인 사회발전을 경험한 곳이기도 했다. 새로운 이주 노동자는 비록 근대 산업 사회 안에 제대로 진입하지 못했지만 자본주의 하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꿈꾸었으며 당시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와 규범에 오염되지 않은 가치관을 지니게 되었다.

차르 체제가 모든 노동자를 억압했던 러시아는 그 중요성이 덜 했지만, 서구의 경우 금속제조업의 성장은 노동자 평의회의 발전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나타났다. 금속산업의 노동과정에서만 보면 노동자를 급진적으로 만드는 내재적 요소는 없었다. 금속산업 노동자가 혁명의 길로 가게 된 배경에는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에 있었다. 산업 집중화가 역동적인 기술혁신과 맞물리면서 금속산업 노동자로 하여금 그들의 부닥친 처지를 알게 했고 투쟁으로 나아가게 했다. 오늘날에도 토착기업이든 다국적 기업이든 금속공업은 대량 생산 방식 하에 수많은 노동자들을 공장으로 집결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사무직에서 일하는 노동자조차 1914년 금속공업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기술 때문에 위협받고 있다. 지금 육체노동자나 정신노동자 모두 집합적 힘을 지니게 되자, 경제 체제에서 주된 산업이 다른 곳으로 이동할지라도 이는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조금도 줄이지 않으며 오히려 늘리고 있다.

그러나 1914년에는 금속공업에 집중된 주요요인이 있었다. 금속공업의 기술적 속성은 많은 숙련공을 필요로 하였으며 그때 이들은 높은 단체교섭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탈숙련공이 접근하기 어려운 높은 수준의 현장조직을 세울 수 있게 했다. 숙련공들이 새로운 기술을 통해 위협을 받았을 때, 그들은 반격을 시작했다. 전쟁기간동안 대대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숙련공들의 전투성은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공장 안에서 일상적인 부문 투쟁과 함께 전쟁기간동안에 활동을 넓힐 필요성이 생기자 자신에 찬 현장조직 지도자들 사이의 네트워크가 창출되었다.

기술에 바탕을 둔 영향력과 이익을 보호하려고 전개된 투쟁은 숙련공들을 고립된 소수집단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이러한 투쟁은 그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벌어지는 일반적인 투쟁 가운데 하나였다. 그럼에도 이 투쟁은 매우 중요했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생산기술을 끊임없이 바꾼다. 이러한 변화가 개별자본가에게는 임시적인 이익을 보장해 줄지라도 전체 자본주의에는 이윤율 하락을 강제하게 된다. 맑스가 논했듯이

 

 

부르주아지는 생산의 도구, 생산관계, 나아가 전체 사회적 관계를 지속적으로 혁신시키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 사회적 생존조건의 혼란, 지속적인 불안정성과 분규라는 현상은 자본주의 체제를 이전에 존재한 어떤 다른 체제와도 구분시켜준다. 모든 고착된 사회적 관계, 이에 바탕을 둔 옛날의 존경받던 편견과 의식은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고 모든 사람들은 맨 정신에서 현실의 생존조건, 나아가 인류에 대한 각 개인과 관계에 부닥치도록 강제된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노동계급의 집합성을 늘리며 이들로 하여금 투쟁하도록 한다. 자본주의의 파괴적 경향성은 이러한 투쟁성을 더욱 강화시킨다. 제국주의 위기가 일어났을 때 전쟁을 하던 모든 국가는 억압적 정책을 적용했다. 통치계급의 이러한 전술은 오히려 그 의도에 반하는 효과로 귀결될 수도 있었다. 통합된 전시경제체제가 보여준 보기는 위험스러웠다. 이러한 체제는 한 나라 수준에서 경쟁이 제거되면 놀라운 생산력을 보여준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경쟁을 추동하는 힘은 억압되지 않았다. 그것은 외부를 향한 군사적 경쟁으로 또다시 표현되면서 의미 없는 학살과정에 노동자를 동원했다.

그러나 투쟁에서 전환점이 나타나기 전에, 노동자의 운동은 심각한 공격에 부닥쳤다. 첫째 공격은 제 2 인터내셔널에 속한 각 국가의 정당과 관료주의적 노동조합이 전쟁에 협조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이러한 공격은 노동계급을 마비시키고 지도력을 잃어버리게 했다. 둘째 공격은 모든 작업장에서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국가 자본주의 체제에서부터 나왔다. 파업은 불법화되고 처벌되어 결국 신속히 전쟁터로 끌려갔다. 그래서 엥겔스가 이야기한 공장생산의 사회적 속성과 그 생산물의 자본주의적 처분 사이의 모순이 군수산업 노동자에게 심각히 다가오게 되었다.

자본가 계급의 공격에 맞서 싸우면서 노동계급은 새로운 지도력을 발전시키며 새로운 상황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했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이러한 대처방법의 놀라운 해결책이었다. 지도력을 작업 현장에서부터 건설함으로서 새로운 지도력은 튼튼한 기반을 가지게 되었고 현장노동자는 기존의 노조관료주의를 없애버림으로써 만족했다. 즉각적인 소환원칙은 대중과 지도력 사이의 관계를 강화하여 그 지도력이 대중의 진정한 의도를 표현하게 했다.

통치계급의 날카로운 두 번째 공격(국가자본주의)은 노동계급의 투쟁을 촉진시켰다. 1870년부터 1914년까지 자본주의 체제의 지속적인 확장과정은 노동자의 마음속에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켜놓았고 앞으로 계급대립을 준비하지 않은 채로 맞이하게 하였다. 반면 자본주의 위기의 심화과정은 국가로 하여금 경제에 직접적으로 개입, 통제하게 했다. 이 때문에 노동 계급이 정치적 수준에서 투쟁하게 함으로서, 노동자의 마음속에 있었던 정치-경제 분리라는 허상을 벗겨버렸다. 파업이 불법화되고 경찰과 판사, 감옥이 작업현장의 감독업무를 대행하고 군대가 안면몰수하고 이를 지원하자 현장노동자의 투쟁은 공장 안에서만 또는 노동조합의 협상방식으로만 제한될 필요가 없음이 또렷해 졌다. 노동계급이 새로운 발상을 획득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동안 온건한 대응을 조직화하여 일정정도의 성공까지 경험한 기존의 투쟁방식을 벗어 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위기는 이 문제를 똑똑히 드러낸다.

노동자 평의회는 (이러한 객관적 상황의) 논리적 결론이며 많은 나라에서 창조된 것이었다. 나라마다 그 특징과 발전단계가 달랐지만, 평의회는 그 투쟁방식과 구조에서 다음과 같은 공통점, 즉 맑스가 파리코뮨에서 얼핏 보았던, 노동계급의 경제적 해방을 위한 정치적 형태로서 노동자 권력이 한 단계 나아간 표현체였다.

 

 

평의회 건설 - 주체적 요인

 

전쟁에 휩싸인 서유럽의 많은 지역에서는 대다수 사람이 금속공업으로 유입됨으로써 사실상 잠재적인 혁명적 보루가 다수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의 객관적 조건이 지역적으로 확장되고 있었을지라도 그 혁명적 보루의 창출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친 요인은 그 지역 노동운동의 주체적 대응이었다. 비록 전쟁은 많은 사람들을 운동에 결합시켰지만 그 운동이 혁명적 형태를 지니게 되는 것은 이따금 몇몇 선진 활동가에 의한 목적의식적 활동에서 나왔다. 이들이 있는 지역에서는 개량주의가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만 노동자 평의회가 세워질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되었다. 그렇지만 개량주의는 이러한 몇몇 선진 활동가를 정치 수준의 선진 활동가와 현장수준의 선진 활동가로 분리시킴으로서 결정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른바 선진 활동가(vanguard)라는 단어는 여기에서 적합하다. 왜냐하면 선진 활동가란 말은 혁명정당이나 소비에트의 지도력을 나타내기에는 아직은 이른 수준을 일컫기 때문이다. 비록 이 조직수준은 혁명정당이나 소비에트의 수준으로 가기위한 하나의 단계일지라도 말이다.

전쟁 전에 클라이드사이드의 전투적 현장 활동가는 자본가와 관료주의적 노조에 대해 공개, 비공개 투쟁을 바꿔 써 가며 힘들게 현장조직을 세웠다. 비슷하게 독일의 옵로이테(Obleute)DMV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면서 공장 안에서 지도력을 쌓았다. 이러한 사전적인 조직화 작업은 1914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때 투쟁은 자본주의 사회 전체에 대한 쟁점이라기보다는 개별 자본가에 대한 일상적 쟁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사소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준비 작업이 없었더라면 노동자 평의회의 건설은 더욱 어려웠을 것이었다.

러시아에서는 경제 투쟁조차 불법화되었기 때문에 소비에트가 스스로 솟아오를 것이라는 믿음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서유럽은 달랐다. 왜냐하면 개량주의가 크게 영향을 미친 노동조합 조직이 현장조직 건설과정(이는 특정조건에서는 노조와는 독립적으로 활동함)에 맞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설초기에 현장조직은 관료적인 노동조합 조직의 보호 하에 만들어졌다. 현장조직 대표자들(shop stewards)은 비록 그 뒤에는 독자적인 현장지도력으로 활동했지만 처음에는 작업장 안에서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수단으로 세워졌던 것이다. 그때 현장의 전투적인 선진 활동가가 비록 노동조합이라는 공식적 운동 틀 안에서 활동했지만 아울러 자신들의 독자성을 유지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전쟁 이전에 몇몇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의 주요 직책을 장악함으로서 위로부터 조직되는 노조의 투쟁방식을 바꾸어놓으려고 했다.또 다른 사람들은 혁명적인 노동조합을 대안으로 하여 조직했으나(이러한 보기는 영국의 SLP, 독일의 ‘Lokalisten', 이탈리아의 아나키스트들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방식은 실패했다. 노동대중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세워진 어떤 조직도 진정으로 작업장에 바탕을 둔 노동자 조직을 대신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현장에 바탕을 둔 투쟁조직의 조직화를 부풀려서는 안 된다. 그저 클라이드사이드에서 조직된 감시 위원회만이 독자적이고 조직화된 기반을 가졌다. 베를린과 튜린에서 각 현장조직 사이의 연계성은 느슨했다. 그러나 세 지역에서 공동적으로 나타난 중요한 점은 현장 활동가 사이의 네트워크가 만들어졌고 그 네트워크를 통해 일상적인 계급투쟁을 지원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네트워크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현장조직 지도자는 전시의 열악한 상황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혁명적 보루의 두 번째 본질은 정치적 선진 활동가이다. 1914년에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셰비키의 조직과 능력에 필적할 만한 정치적 선진 활동가는 없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노동자 평의회를 세우려고 했던 사람들은 노동자 국제주의적 신념을 공유했던 사회주의자였고 이들도 또한 정치-경제의 분리문제를 풀려고 애썼다. 정치적 선진 활동가는 작업현장의 전투적 선진 활동가가 부닥쳐 보지 못한 다른 문제에 맞닥뜨렸다. 그람시의 말을 빌리면, 작업현장의 전투적 선진 활동가는 노동자의 자생적조직에서 활동했다. 따라서 이들은 현장 노동자의 직접적 지지를 발판으로 삼아 투쟁한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으나 아울러 현장 노동자가 보여주는 투쟁성의 파고에 의존하게 되는 단점이 있었다. 이들은 공장 안에 독자적인 조직을 밑바탕으로 삼아 행동할 수 있었지만 목적의식적으로 대중투쟁을 창조하지는 못했으며 그저 대중투쟁이 일어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작업현장의 전투적 선진 활동가는 그저 외적 상황이 노동자로 하여금 노동조합과 협상이라는 기존 실천방식을 넘어 새로운 방식으로 행동하게 할 경우에만, 노동조합에 대응하여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와 달리 정치적 선진 활동가는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조직될 필요성이 있었다. 그 조직은 혁명적 이념을 함께 가지고 있는 자발적조직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주의 신념을 명확하고 효과적으로 보여주어야만 했다. 간단히 말해 혁명주의자들은 대중운동이 일어나기 전에도 자신의 태도를 조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똑똑히 밝혀야 했다. 자본주의 하에서 소수일지라도 효과적으로 활동하려면, 혁명주의자들은 개입주의적 힘, 즉 정당으로 자신을 조직해야만 했다. 전쟁이 터지고 난 뒤 혁명주의자들을 압박했던 계엄령 상황에서 그들은 당을 건설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부닥쳐야 했다.

그럼에도 정치적 선진 활동가는 매우 중요하다. 개인적인 희생을 무릅쓰며 많은 혁명주의자들은 혁명적 보루에서 투쟁을 자라나게 하려고 애썼다. 그들의 노력은 전쟁 이전에 전개된 사회주의 운동에서부터 전혀 지원을 받지 못했다. 정치적 선진 활동가는 노동계급의 집단적 힘을 동원할 수 있었던 작업현장의 전투적 선진 활동가로부터도 떨어져 있었다.

정치적 혁명주의자와 작업현장의 전투적 선진 활동가는 뚜렷이 나뉘지 않았다. 이따금 같은 인물이 정치적으로 혁명적 사회주의자이면서 능력 있는 현장 활동가였다. 그러나 한 사람이 두 가지 일을 했다는 점이 그때 정치영역과 작업현장의 영역이 구조적으로 연계되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평의회의 건설과 그 운영 경험이 있기 전까지,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는 실천적으로 정치적 투쟁과 경제적 투쟁을 연계시킬 방법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러한 문제에도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주장과 논쟁은 노동자 평의회 운동을 이끄는 데 매우 중요했다. 전시상황에서 노동운동이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려면 현장 노동자는 정치적 사고를 가지고 투쟁에 나서야 한다. 정치적 수준에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개량주의자의 사회적 평화에 대한 주장을 반박하며 다른 공장과 산업 부문에서 일어나는 파업을 연계시킬 수 있겠는가? 존 맥클레인이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의 필요성을 역설하지 않았더라면 노동자 물타기 전략(신규노동력 투입)에 대한 반대를 통해 자본주의 전쟁의 목적을 폭로하지 못했을 것이고, 19181월 징집반대를 위한 투쟁을 앞장서 이끌지도 못했을 것이다. 독일에서는 리프크네히트(K. Liebknecht)의 용기는 옵로이테(Obleute)가 첫 대중파업을 할 수 있게 만들었으며 바로 이 때문에 스파르타쿠스의 정치적 활동은 대중적인 반전운동의 길로 나갈 수 있었다. 튜린의 ordinovisti는 그때 힘없는 세력이었으나 노동운동 세력을 모으는 과정에서 공장평의회를 향한 힘찬 추동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두 수준의 선진 활동가들은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매우 중요한 일을 촉진시켰다. 이 중요한 일이란 정치적 투쟁과 경제적 투쟁 사이의 간극을 연계시키는 사회주의적 실천을 촉발시켰다는 점이다. 노동자 평의회의 근원지는 대개 사회주의자들이 그들의 신념을 빈틈없이 연결시켜 놓은 그 작업장이 노동자 정치조직 건설의 터전이 되었던 지역에서 일어났다.

평의회 건설과 성장은 계획되거나 또는 자생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선진 활동가들은 평의회 건설을 결정할 수도 없었으며 아울러 목적의식적 개입 없이 평의회가 자생적으로 일어나 개량주의자의 대안에 도전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현장노동자의 지도력을 얻으려는 선진 활동가의 신념에 찬 도전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때 평의회는 혁명적 보루를 세우는 데 하나의 요인이었다. 평의회는 똑같은 형태로 다시 만들어질 수 없으나 우리는 자본주의의 위기와 이에 대한 노동계급의 저항이 다시 일어나리라는 점은 똑똑히 알 수 있다. 어떤 누구도 앞으로 투쟁이 벌어지게 하는 객관적 위기를 선택할 수 없으나, 우리는 지난날 투쟁과정에서 일어난 노동계급의 주체적 대응과 이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교훈을 얻어낼 수 있다. 그때 혁명주의자들은 운동 안에 축적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으며 닥친 과제 하나하나를 스스로 풀어야만 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혁명의 물결이 높아지자, 그들은 자본주의를 철폐할 실질적 가능성을 창조했다. 만약 느슨한 혁명조직과 현장 활동가의 네트워크가 지난날 투쟁의 교훈으로 무장한 견고한 조직으로 발전했다면, 그들은 얼마나 힘찬 투쟁을 할 수 있었을까!

 

 

행동으로 보여주는 노동자 민주주의

 

노동자 평의회는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회적 몽상에 빠져있던 19세기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조차도 현실을 터전으로 삼은 구체적인 미래사회상을 제시할 수는 없었고 그저 그 가능성만을 모색했었다. 러시아 소비에트조차 사회주의에 대한 확실한 상을 제시할 수 없었다. 흔히 국제적인 투쟁 기간이 있고 자본주의 위기에서 비롯된 황폐화를 복구하는 기간이 있기 때문에 생산력은 또다시 발전한다. 그때야만 인류는 물질적 부족과 사회적 착취를 없앨 수 있다. 반면 노동자 평의회는 어떻게 새로운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고 이를 통해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닌 창조적 힘을 솟아오르게 하였다.

노동계급은 자신의 국가를 창조하지 않고는 다른 어떤 수단으로도 사회를 급진적으로 바꿀 수 없다. 이러한 노동 계급의 국가는 의회주의를 밑바탕으로 삼은 국가형태와는 매우 다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가식적인 평등주의를 통해 노동계급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마지못한 동의를 얻어냄으로서, 대규모 독점자본의 지배를 매우 효과적으로 보증해 준다. 이는 다음의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경제적 불평등을 숨기는 정치적 평등:

모든 주권자는 그들이 한 표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가정된다. 그러나 자본의 흐름을 관리하고, 투자를 철수함으로서 한 나라와 특정산업을 황폐화시킬 힘을 가진 소수 자본가와 그저 살기위해서는 자신의 노동력에만 의존해야 하는 다수의 노동계급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지역을 바탕으로 삼은 투표방식:

의회주의 선거는 지역적 분할에 바탕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노동자로 하여금 집단적인 계급이익을 바탕으로 하기보다는 개인적 시민으로 스스로를 여기게 한다. 가정을 가진 고립된 개인으로서, 노동계급은 쉽게 자본주의 매스미디어와 민족국가이익이데올로기에 포섭된다. 그와 달리 작업장에서는 이익의 실질적인 갈등이 국가 사이라기보다는 자본과 노동으로 나타난다.

 

대표에 대한 통제 불능:

의회주의의 지역에 따른 선거구 구획방식은 자본주의 사회의 실질적인 이익구분을 숨기는 가상물이다. 지역에 따른 선거구는 집단적 의사결정의 결절점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국회의원은 주권자의 일상적인 통제권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국회의원의 정치생활을 좌우하는 것은 이들이 대변해야할 주권자 대중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왜냐하면 국회의원들은 몇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선거에 의해서만 심판받기 때문이다. 이는 의회에 대한 대중의 효과적인 영향력을 없애버린다. 선거는 기껏해야 이미 결정된 사항에 대한 순간적 의례일 뿐이며 대중은 자신의 앞날을 진정으로 결정할 수 있는 수단에서 멀어진다.

 

일상생활에서 정치적 활동의 제거:

앞서 논한 의회주의 때문에 생긴 근본적 결과는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간에 대중이 의회를 통해서는 자신의 삶을 바라는 방향으로 만들어 갈 수 없으며 나아가 그 개선의지를 포기하게 하는 것이다. 정치는 지루하며 무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의회에서 논쟁 배후에는 임명직 고급 행정 관료와 판사가 자리 잡고 있다. 억압이라는 국가의 주요기관, 이를테면 경찰, 감옥, 군대에는 가장된 민주주의조차 없다. 경찰간부와 장군은 자신들을 고용한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 자본주의 국가의 핵심적 힘은 노동대중 밖에서 이들의 이익에 반하여 조직된다.

따라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역할은 노동대중에게 자신이 국가를 통제하고 있다는 환상을 주어 자본가 계급의 실질적인 통제력을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공장과 사무실의 일상생활에서 노동자의 생생한 경험은 노조와 같은 집단적 조직에 의해서만이 작업장과 관련된 쟁점에 대해 조그만 발언권이나마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알게 한다. 그러나 의회 민주주의의 효과는 이러한 작업장에서 얻은 투쟁경험을 억압하고 다시금 대중을 위한, 대중에 의해 만들어진 법에 따라 통치된다는 자유주의 국가라는 환상을 유포시킨다. 이러한 환상 뒤에서 자본가 계급은 실질적 자유를 만끽하며 법제정과 국가운영의 포괄적 틀을 통해 독재를 하게 된다.

소비에트에서 그 최상의 형태를 보여주는 노동자 평의회는 의회주의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다. 정치권력이 궁극적으로 사회적 부에 대한 통제에 따르기 때문에, 소비에트는 직접적으로 공장의 현장조직을 바탕으로 삼아 조직된다. 평의회가 지닌 장점은 기존의 국가권력을 마비시키고 뒤흔들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이 생산력에 대해 행사하는 통제력에서부터 나온다. 서구의 평의회는 작업장 현장조직과 노동자 통제가 정치권력장악을 위한 운동에서 분리할 수 없는 요소였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노동계급은 그 수에 있어서 자본가계급을 훨씬 앞서기 때문에 자신의 통치를 관철하기 위한 기만적 방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평의회의 터전은 지역에 따른 선거구와 같은 허구적 단위가 아니라 사회의 발전과정에서 자연스레 나타나는 생산단위이다. 집합적 의지는 공장과 사무실에서 토론을 통해 표현된다. 노동자는 날마다 집단적으로 만나는 곳에서 진지하며 지속적인 논쟁을 할 수 있으며 나아가 민주적 선거제도를 현실화할 수 있는 감시체계를 만들 수 있다. 노동자 평의회가 작업장에 바탕을 둔다는 점은 대중의 실질적 참여와 대표의 소환권을 가능케 한다. 지역에 따른 투표박스와는 달리, 작업장은 모든 인간의 지속적인 생활지점이며 이러한 현실은 평의회 대의원이 임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곧 바뀔 수 있다는 점을 뜻한다. 소환권은 형식적인 법률에 쓰여진 것이 아니다. 이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데서 5년 간격의 선거에 의존하지 않으려는 노동자의 삶과 투쟁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소환권과 관련하여 우리는 또 다른 위험에 맞닥뜨린다. 즉각적인 소환권은 의사결정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뜻이 없다. 부르주아지는 군대, 경찰, 감옥이라는 수단에 직접적으로 의존한다. 그저 러시아에서만이, 그리고 독일에서는 어느 정도, 소비에트가 대중에게 적대적인 강제력을 대중을 위한 강제력으로 역전시킬 수 있었다. 그 방법은 간단하다. 대중에게 무기가 주어지는 것이다. 노동자 군대와 민주화된 병사위원회는 위로부터 통제받지 않고 오히려 확장되어 소비에트가 되며 현장노동자로부터 성장한다. 소비에트 국가에서 권력은 완전히 변화된다. 이전에 국가는 대중에서부터 소유권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했다. 노동자 평의회 국가는 소유라는 권력에서부터 대중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국가는 더는 대중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대중이다.

그러나 권력은 물리적 힘 그 이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결국 서구자본주의의 경우 노동계급의 공개적인 투쟁시기에는 주로 억압적 폭력에 의존하나, 통치의 정상적방식은 좀 더 복잡하다. 지금 자본주의 체제에서 주요 의사결정은 이윤율 법칙이 강제되는 경제적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법칙은 의회에서 논의되어 본 적이 없다. 맹목적인 시장경쟁의 법칙은 모든 자본주의 국가를 자신의 법칙 하에 종속시킨다. 경제적 힘에 대한 통제가 없다면 민주주의는 없는 것이다.

노동자 평의회는 민주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경제에 대한 노동자 통제를 수행한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마치 정치적 상부구조가 경제적 토대와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비에트에서는 정치와 경제 사이의 실질적 관계를 중요시 한다. 공장에서 생산자의 힘이 정치적 수준인 국가에서 동원되고 조직된다.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은 일치된다.

정치와 경제의 결합은 우연한 산물이 아니다. 서구유럽에서 노동계급의 의식이 성장함에 따라 정치와 경제의 결합은 더불어 발전되었다. 노동자가 노조 관료주의로부터 독자적인 힘을 지니게 됨에 따라, 그리고 생산의 영역에서 자본가의 권력에 도전할 힘을 지니게 됨에 따라, 그들은 국가권력을 장악할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부하린에 의하면 노동자 평의회는 소비에트 형태를 띠게 될 때, 자신의 힘을 구체화하게 된다:

 

 

만약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이 경제적 수준에서 혁명을 위한 수단이 된다면 그때야말로 경제정치는 하나로 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국가자본주의라는 체제의 마지막 형태에서 금융자본의 독재 하에 정치와 경제가 통합되는 경향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과거 체제 내 모든 관계를 전복시키게 된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재는 필연적으로 경제적 독재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지역적 구분에 따르고 경제적 토대와 분리되어 있는 자본주의 국가는 노동자 권력을 실현시킬 수 없다. 개량주의자들이 자본주의 국가에 부여하는 또 다른 의미에도 의회주의를 바탕으로 삼은 국가체제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보호하게 된다. 그와 달리 노동자 평의회는 노동계급의 의지가 조직화된 형태이다. 따라서 착취자의 이익이 착취 받는 자의 이익과 화해할 수 없듯이 의회주의는 노동자 평의회와 화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저 노동자 평의회는 레닌이 말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3가지 원칙을 충실해야 한다.

 

 

첫째, 투표권자는 노동하는, 그리고 착취 받았던 자야 한다; 부르주아지는 배제시킨다. 둘째, …… 모든 관료적 형식주의 및 선거권의 제한은 철폐된다. 인민 스스로 선거의 절차와 시기를 결정하며 어떤 대표자라도 소환시킬 완전한 권리를 가진다. 셋째, ……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첫 발은 전체 인민이 행정기술을 학습하고 스스로 행정전문가가 됨으로써 시작된다.

 

통치방식에서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의 근본적 적대성은 이른바 중앙파를 통해 모호해졌다. 1917년 멘셰비키는 임시정부와 소비에트가 평화적으로 공존하길 바랐다. 그러나 임시정부에 몸담았던 자들이 191710월 혁명에 의해 건설된 노동자 국가를 분쇄시키려고 가장 반동적인 장군이었던 코르닐로프와 손잡았다는 사실은 소비에트로 권력을 집중시키던지 아니면 러시아 노동운동을 피로 물들이던지 간에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의회를 넘어서는 조직과 의회 사이의 공존 필요성이라는 중앙파의 생각은 독일에서도 같게 나타났다. 독일 혁명 발발의 초기에 카우츠키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발표했다; “국민 의회(부르주아 의회)와 노동자병사 평의회는 둘 다 모두 필요하다. 이들 두 가지 제도는 각각 자신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 이중권력의 불안정한 조건에서 의회와 노동자 평의회는 특정 기간 동안 공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자본주의는 코르닐로프나 우익 사민주의자인 노스케와 같은 인물을 통해 자신들만의 정치적 재편을 시도했다. 독일에서 이들은 러시아보다 노동계급의 혁명을 분쇄하는데 더욱 성공했다. 이들의 반동적 공격은 19193월에 극치를 이루었다. 그때 2백만의 독일민중은 카우츠키가 피력한 노동자 평의회와 의회와의 공존 논리를 따라 정부로 하여금 노동자병사 평의회를 제도화시키도록 하려고 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독일 민중은 정부로부터 총알세례만 받고 몇 백 명이 죽었다. 사실상 이 사건이 터지기 5개월 전에, 레닌은 카우츠키의 견해가 현실화될 결과를 이미 다음과 같이 예측했었다.

 

 

소비에트에 고함: 투쟁해라. 그러나 국가권력을 당신의 손에 장악하지 말라. 그리고 스스로 국가조직으로 전화되지 말아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계급협조와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사회적 평화협정을 주장하는 것을 뜻한다. 치열한 투쟁의 와중에서 이러한 태도가 투쟁을 이끌어 결국 굴욕적인 패배를 맞게 되리라는 점을 상상하는 것은 정말로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게 한다.

 

노동자 권력은 자본주의 계급의 정치적 권력이 바탕으로 삼고 있는 군사적 강제력과 의회주의적 형태를 분쇄함으로서만 건설할 수 있다. 노동자 권력을 만드는데서 노동자 평의회와 의회 사이의 휴전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노동자 평의회와 정당, 그리고 노동조합

 

노동자 평의회는 대중 투쟁의 직접적인 조직형태이다. 노동자 평의회는 당면문제에 대한 해결을 위해 각 작업장에서부터 선출된 대표로 이루어진다. 이들 대표는 연대를 폭넓게 하고 각 지역 노동자를 단일대오로 모이도록 하려고 회합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작업현장에 바탕을 둔 조직은 또 다른 노동자의 전형적인 조직, 즉 정당과 노동조합과는 다르다. 대중투쟁의 조직으로서 노동자 평의회는 그저 사회적 위기의 시기에 창궐한다. 이러한 시기의 주변 맥락은 노동자로 하여금 그들의 전통적 조직을 넘어 혁명적 행동을 취하도록 요구된다. 따라서 노동자 평의회는 자의적으로 또는 사전에 주어진 공식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대부분의 노동자가 새로운 운동방식으로 자신들의 당면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노동자 평의회는 조직되어지는 것이다. 그와 달리 당과 노동조합은 적어도 부르주아 민주주의 하에서 자본주의의 불안정기 또는 안정기 내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노동자 평의회는 정당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정당은 정치적 신념에 바탕을 둔 자발적인 결사체이다. 노동자 평의회의 구조는 생산단위의 구획에 바탕을 두어 형성되는 것이지, 개인의 정치적 신념에 의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 평의회에 대한 개량주의자의 반대에 부닥쳐 서구에서 평의회는 특수한 당면문제와 이에 대한 투쟁이 정치적 쟁점으로 확장되면서 일어났다. 의회가 자본주의의 당면문제를 풀려는 토론 장소이듯이, 노동자 평의회는 노동자의 요구를 풀기 위한 공론장이 된다. 이때에 이르러 낡은 문제해결방식은 이미 효과를 상실하게 됨이 명확해 진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가 경제를 조직화하는 경로를 따라 조직되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에서 자생적인조직형태이다. 노동조합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계적 속성을 드러낸다. 노동조합은 노동계급의 각각 다른 집단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어떤 노동자는 지역적이라기보다는 작업장 수준에서 조직되기도 한다. 따라서 노동조합은 그저 특정부문 노동자의 개별집단적 요구에만 따르게 된다. 또한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경제적 투쟁에만 자신의 힘을 집중하여 그것을(정치적 이슈에 대한 투쟁) 넘지 못한다.

노동조합은 오랜 기간 동안 발전과정을 거쳐 가끔 혁명적 시기가 아닌 때에도 존재하는 지속적 형태를 유지한다. 서유럽에서 노동조합은 임금과 근로조건을 나아지게 하려는 자본주의의 안정적인 틀거리 안에서 활동해 왔다. 노동조합은 전문가를 고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노동력의 가격에 대해 자본가와 협상하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동조합이 임노동관계 자체를 철폐하지는 못한다(만약 임노동 철폐가 노동조합의 기능이라면 노조 내 전문적 관료는 곧 사라지게 될 수밖에 없다)

한편 노동자 평의회는 자본주의 체제의 틀거리 안에서 협상할 수가 없기 때문에 전체 노동자가 단결해야만 승리할 수 있는 때 만들어질 수 있다. 따라서 노동자 평의회는 분파주의와 경제주의의 한계를 돌파하여야만 하며 이를 통해 전체 노동자의 투쟁을 올바로 이끌 수 있게 된다. 위기의 시기에 나타나는 계급 조직으로서, 노동자 평의회는 정치적, 사회적 권력의 문제를 제기하게 되며 이를 통해 소비에트의 권력기반을 형성하게 된다.

러시아에서 소비에트는 10월 혁명 이전에조차 운송과 식량배급, 공공질서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독일에서도 노동자 평의회는 (자본가계급과 국가의) 탈동원 시도에 대응해야할 뿐만 아니라 운송과 식량배급, 공공질서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영국과 이탈리아에서도 초기적 형태의 노동자 평의회는 노동조합의 활동영역을 넘어 전쟁과 평화, 그리고 노동자 통제 등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당과 노동조합 그리고 노동자 평의회 사이에는 서로 중첩되는 부분이 있다. 노동자 평의회는 각각의 노동자 정당들로 하여금 서로 사이의 연대와 전체에 대한 리더십 획득을 위해 경쟁하는 공간이다. 노동자 평의회는 그 출발점으로서 노동조합을 통해 만들어진 노동자 사이의 기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게 된다. 그러므로 1차대전 때 영국의 현장활동가(shop stewards)가 노동자 평의회 건설의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노동자 평의회, 정당, 노동조합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노동자 평의회가 많은 장점을 지녔지만 이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혁명에 성공할 수 없다. 노동자 평의회는 그저 최종적인 계급투쟁의 한 부분이다. 혁명정당이 또 다른 주된 역할은 해낸다.

191710월 혁명은 노동자가 절대적인 국가권력을 장악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때 노동자는 볼셰비키의 실천을 통해 성공할 수 있었다. 서유럽에서는 한때 레닌주의적 정당의 이념이 전혀 논의되지 못했지만 정당의 문제는 노동자 평의회를 연구하는 데서 가장 본질적인 부문이다. 러시아의 성공과 서유럽의 실패라는 경험적 사실은 혁명주의적 정당과 노동자 평의회가 노동자 국가를 건설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베를린에서 투쟁은 노동자 평의회를 포함하지 못한 채, 혁명을 시도했던 정당의 어리석음을 정확히 보여준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어떤 혁명 정당도 노동자평의회를 통하여 중앙집중화된 권력 장악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그 실패는 뻔하다. 마찬가지로 어떤 노동자 평의회도 혁명적 대중정당의 지도를 받지 않는다면 이 또한 실패는 불을 보듯 뻔하다.

혁명기간 동안에도 정당이 노동자 평의회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당의 문제는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다. 가령 당원증을 발행하거나 당 지부를 건설하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혁명은 그저 작업현장에 있는 혁명주의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보기를 들면 독일에서 카이저 정권을 전복한 대다수의 민중은 개량주의적인 사회민주당의 이념을 추종했다. 비록 혁명정당이 선진 노동자의 대부분을 조직하고 있을 정도로 그 규모가 클지라도,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이들은 소수이다. 봉기의 순간에 조차, 혁명정당은 모든 공장의 노동자 그리고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지닌 다양한 노동자를 정당에 가입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하지 않다. 사실상 모든 사람을 가입시키는 것은 자신의 정치적 원칙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저 노동자 평의회만이 선진적인 혁명정당과 대중 사이에 가교역할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노동자 평의회의 조직화 과정

 

노동자의 혁명 조직은 위기의 시기에만이 가능하다. 이 조직은 혁명의 순간에 거대한 걸음을 시작하고 대중의 의식을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는 역동적 힘이다. 글래스고우, 베를린, 튜린에서 집단적인 대중조직이 성장 발전한 경로는 러시아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앞서 언급했듯이, 19172월 혁명은 소비에트와 더불어 공장 위원회라는 현장조직과 함께 형성되어 정치권력을 창출하였다. 러시아 노동자 마음속에는 이미 정치과 경제 사이의 연계성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국가에 대한 전복이 이루어졌던 짧은 기간에 동시적으로 자본주의의 주요 보루(역주: 작업현장의 통제권)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서유럽의 경우 노동자 평의회의 발전과정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고 경제적 투쟁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차 정치적 투쟁(분파적 경제투쟁에서 국가수준의 계급권력에 대한 투쟁으로)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노동자 평의회는 가장 근본적 수준에서 대안적 조직과 활동방식을 제출함으로서만이 개량주의자의 영향력을 없앨 수 있었다. 트로츠키가 제안했듯이, 이중권력상태는 갑자기 무너지고 소비에트는 마지막 봉기를 전후하여 며칠 만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기존의 강력한 개량주자들의 보루를 약화시키는 과업은 오랜 시일을 필요로 했으며 이는 서유럽에서 평의회 건설과정이 러시아와 다른 핵심 지점이었다.

클라이드 사이드에서 이러한 과정은 현장 활동가(stewards)들이 각각의 군수공장을 연계시키고 전투적인 숙련공들이 부닥친 당면 쟁점을 위해 투쟁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는 나가지 못했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그저 금속산업 숙련공들만을 조직했으며 맥클레인의 호소에도 반전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지 못했다. 비록 그 의도에서는 야심찼지만, 튜린의 공장평의회 운동은 영국에 비해 약간만 전진했을 뿐이었다. 튜린의 경우는 기술수준과 상관없이 모든 노동자의 단일대오로 묶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심각한 한계가 있었다. 공장 평의회는 튜린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넘지 못했으며 노동자 통제를 위한 투쟁은 국가권력 장악이라는 문제로까지 상승되지 못했다. 비록 튜린의 노동자가 분파주의 때문에 수동성을 보인 영국의 클라이드 사이드 노동자보다 한 발짝 앞서지만 말이다. 베를린만이 운동의 규모를 러시아와 견주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또한 이중권력 상황이 펼쳐진 경로는 러시아의 페트로그라드보다는 글래스고우와 튜린의 경우와 더욱 비슷했다. 베를린에는 전쟁 이전부터 노동조합에 대한 투쟁의 네트워크가 있었으며 이를 통해 전쟁발발 뒤 즉각적인 쟁점에 대해 투쟁을 조직하고 연대하여 대중적인 정치적 행동으로 나아갔다. 독자적인 현장투쟁력이 없는 곳에서 개량주의가 노동자병사 평의회의 건설을 성공적으로 막았다는 사실은 영국과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독일에서 투쟁이 러시아보다는 더욱 어려웠다는 점을 보여준다.

노동자 평의회를 세우고 개량주의의 반대에 부딪힌 정치적 행동으로 전진해나가야 하는 문제는 이겨낼 수 없는 일이 아니다. 아마도 서유럽에서 노동자 평의회의 건설과정은 좀 더 시간이 걸려야 하는 문제이지, 이것이 서유럽에서 실패가 필연적이었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틀림없는 오류이다. 핵심적인 문제는 평의회 운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서유럽 평의회 운동이 러시아에 견주어 볼 때 뒤쳐졌을 지라도, 그들은 분명히 전진하여 자신들의 소비에트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서유럽의 문제는 노동자의 선진 활동가 부위가 해내는 리더십이 없었다는 점이다. 러시아에서 ‘7뒤에 벌어진 사례에서 보이듯이, 혁명정당의 리더십 부재는 노동자 평의회를 정체시키고 결국 소멸하게 했다. 소비에트조차도 그 내부의 관료주의 병폐 때문에 파괴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노동자 평의회는 독자적으로 민중을 조직하여 규율 잡힌 투쟁체로 만들었으며 이를 통해 산업 노동 계급의 집단적 힘을 구체화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동계급의 투쟁체가 올바른 시기 그리고 올바른 전략을 가지고 투쟁하려면 제대로 된 리더십이 핵심적인 요소인 것이다.

서유럽 세 지역의 사례에서는 이러한 리더십이 없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191710, 혁명정당과 소비에트 그리고 민중은 서로 긴밀히 연계되어 운동을 앞으로 이끌었다. 트로츠키는 이것을 서로 맞물린 톱니바퀴에 견주어보기도 했다. 서유럽에서는 이러한 연계성은 형성되지 못하였다. 순간마다 노동자 평의회뿐만 아니라 전체 노동운동에서 취약점이 나왔고 이러한 취약점은 혁명적 리더십의 부재와 실패 때문에 일어났다.

대개 노동자 평의회에 내재된 민주주의라는 속성은 그 자체에서 혁명적 리더십을 만들어내는 것을 어렵게 한다. 이러한 속성은 순간마다 대중의 의식이 급변하여 노동자 평의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비록 치열한 계급투쟁이 혁명적 위기국면을 촉진시키더라도, 대중은 단일한 사회주의적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지 못하고 기존의 개량주의적 사고에 머무를 수 있다. 그들은 투쟁이라는 직접적 경험을 통해서만 혁명적인 사회주의 의식에 다다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혁명주의자가 노동자평의회를 촉발시키더라도 그 평의회는 확장되어 각종 노동대중의 분파를 포괄하게 되고 이에 따라, 노동자 평의회의 민주주의적 운영구조는 평의회의 태도에 반대하는 개량주의자를 통제할 수 없게 한다. 물론 혁명주의자들이 위기의 시기에 그들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여 혁명적 사상이 노동계급 내 다수의 지지를 받게 된다면 개량주의자라는 내부의 적을 제어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하려면 당 조직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1915년부터 20년 사이에 서유럽에는 이러한 당 조직이 없었다.

리더십이 없기 때문에 생긴 약점은 운동의 모든 수준에서 붕괴의 조짐을 유발시킨다. 이러한 문제는 세 곳의 혁명적 보루에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났다. 클라이드 사이드에서 좌파가 맞닥뜨린 주된 어려움은 19152월 비공식적인 ‘2펜스파업에서 나타난 전투성을 어떻게 하면 좀 더 조직화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금속산업에서 자신의 입지를 방어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노동자는 전시 국가자본주의 체제에까지 대결구조를 만들었다. 이에 대한 하나의 해답은 전시 국가자본주의체제를 정당화하는 국수주의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었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궁극적 원인은 대부분의 현장 활동가들이 개별적으로는 이러한 정치 전략을 굳게 믿었지만 현장 노동대중에게서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점이다. 맥클레인의 선전선동그룹은 그 수가 너무 작아서 이 과업을 성공할 수 없었으며 반면에 현장 활동가(shop stewards)들은 작업장에서 전투적인 노동조합 활동가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밖에서 이들은 혁명적 사회주의자였지만). 경제적 쟁점에 대한 투쟁에서부터 정치적 쟁점에 대한 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노동자 평의회 운동은 금속산업 숙련공의 선진 활동가 말고는 대중적 영향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활동을 멈추게 되었다.

독일에서 객관적 상황은 노동자 평의회 운동에 대해 확실한 출발을 가능케 하였다. 패배한 국가의 수도에는 금속산업의 전투적 노동자와 정치적 수준에서 활동하는 혁명가가 있었다. 이들은 노동자 평의회 조직을 급속히 발전시켰다. 그러나 노동자 평의회가 정치적 권위에 대한 대안으로 떠올랐다는 사실은 그 평의회를 사회주의 국가로 전화시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책임감으로 다가 가게 하였다.

1918119, 카이저 왕정이 무너졌을 때, 대중의 의식수준은 그들의 혁명적 행동에 뒤쳐져 있었다. 이러한 징후는 며칠 뒤 사회민주당이 베를린 평의회 집행위원회에서 다수파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나타났다. 그렇지만 그 뒤 몇 주 안에 일어난 위기 때문에 생긴 상황은 대중으로 하여금 왼쪽으로 돌아서도록 하였고 혁명주의자들에게 평의회에 대한 지도력을 폭넓게 행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들어, 현장 활동가와 스파르타쿠스주의자 사이의 연계성 부족은 문제가 크게 터지는 데 이바지했다. 옵로이테(Obleute)는 투쟁 방향성을 잃어버린 채로 남겨져 있었다. 뮬러와 그의 전투적 동지는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는데, 한때는 국가권력을 장악하려고 경제적 투쟁을 보류하기도 하다가 어떤 때는 그 반대로 투쟁방향을 선회하기도 하였다. 대다수의 혁명주의자는 노동자 평의회 안에서 지도력 구축에 서툴렀기 때문에 평의회라는 수단을 포기하고 각자의 개별적 투쟁방식으로 분산되기도 하였다. 에버트만이 혁명주의자의 혼란과 무능력에서 이익을 얻었다. 이러한 상황은 그에게 노동자 평의회 운동을 분열시키고 그 핵심부분을 없앨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때 베를린 노동자 평의회는 사실상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정치적 투쟁과 경제적 투쟁이 결합되면서(비록 상층에서는 혼선이 있었지만) 작업 현장 조직과 무장된 군대 사이의 연대는 심화되었다. 행동을 통한 혁명과정은 급속도로 진행되었으며 19192월에는 사민당이 베를린 평의회에서 영향력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 즈음하여 혁명세력에게 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월 봉기의 결정적 실수는 혁명세력에게 크나큰 비용을 떠 안겼다.

튜린에서 모든 상황은 공장 평의회의 발전으로 길을 터주었다. 그러나 나타난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새로이 창출된 조직은 그람시가 1919년 초기에 바랐던 소비에트의 형태로 발전되지 못했다. 재구성된 내부의 위원회는 평의회로 가기 위한 첫 단계였으나, 더욱 높은 수준인 정치적 형태로 발전은 의지만으로는 성취될 수 없었다. 오직 이는 튜린이라는 혁명적 보루를 고립상태에서 해방시킬 구체이며 총체적 전략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것이었다.

다음의 세 가지 문제가 글래스고우와 베를린 그리고 튜린을 괴롭혔다. 즉 경제적 투쟁과 반전 투쟁 사이의 괴리, 혁명을 위한 정확한 시기선택, 각 혁명적 보루의 독특한 특성. 물론 이러한 장애물은 이겨낼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의 경우 효과적인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어려움을 풀 수 있었다. 볼셰비키가 성공했고 서유럽 혁명주의자가 실패한 까닭을 알려면 각 나라 혁명주의자가 지닌 장점을 견주어 보면 된다.

 

 

러시아: 볼셰비키 정당은 14년 동안의 경험을 지니고 있음; 200,000명의 당원(191710); 19176, 320,000 부수로 17일에 한 번 나오는 당 회보가 있었다.

독일: 반혁명이 일어나기 한 주 전에 공산당이 창립되었다.(비록 스파르타쿠스주의자는 2-3년 동안의 경험을 갖고 있었지만); 3,000명의 당원; 독자의 수가 얼마인지 알지 못하지만 일간지를 펴냈다.

이태리: 몇 달 동안에 조직된 사회주의자 집단인 ordinovisti라는 조직이 있었다. 5000부수의 회보가 2주에 한 번 나왔다.

영국: 몇 년 동안 모여진 몇몇의 열성적인 지원가로 이루어진 맥클레인 집단 존재; 월간회보가 약 3,000부수로 3번밖에 나오지 못했다.

 

볼셰비키는 대중정당이 수많은 작업장에 퍼트린 평화, 빵 그리고 토지라는 단순한 구호를 통해 경제적 투쟁을 반전투쟁으로 연결시킬 수 있었다. 이 슬로건은 각각 노동계급 분파와 농민대중을 단일 대오로 묶을 수 있는 물질적 힘을 지니고 있었다.

혁명의 정확한 시기선택은 1917년 러시아의 경우 적절했다. 6개월이라는 주어진 시간 내에서 혁명주의자들은 정치적 역사라는 시간개념으로 볼 때 수세기에 달할 수 있는 사건들을 경험하고 고민했다. 즉 차르의 봉건주의로부터 자본주의 그리고 노동자 권력으로 이행. 따라서 러시아 노동자는 서유럽에서 수세기 동안 발전된 자본주의적 방어벽과는 싸울 필요가 없었다. 레닌주의 정당이 해낸 혁명의 절묘한 시기선택은 자신의 뜻대로 도전을 보류하거나 진전시킬 수 있는 당의 능력에서 나왔다. ‘6월의 날들에는 봉기를 자제하다가 10월 들어서 전면공격을 감행한 것은 노동 계급에 대한 대중정당의 강력한 영향력과 규율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페트로그라드라는 혁명적 보루는 러시아의 지리적 광대함과 농촌지역의 미발달로 인해 나머지 지역에서부터 고립될 가능성이 높았다. 다시금 볼셰비키의 사상은 페트로그라드라는 혁명적 보루에서 태어난 사회주의에 그 내용을 풍부히 해주었으며 나아가 그들의 토지개혁 프로그램과 국유화 정책을 통해 타 지역과 연계를 강화시켜 주었다.

서구유럽 노동자 평의회가 노동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필요조건을 탐색했던 초기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 보면, 그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해답은 다음과 같다: 혁명정당에 의한 효과적인 리더십

그러나 이는 그저 사회주의로 가기 위한 출발점일 뿐이다. 볼셰비키는 사회주의로의 이행과정이 한 세기 이상에 걸친 성공적인 혁명과정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었다. 서유럽에서 대중적 혁명정당의 부재와 노동자 평의회의 연이은 패배는 소비에트 러시아를 고립시켰다.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노동자 국가는 전쟁과 산업붕괴를 거치면서 그 계급적 기반이 사라지게 됨에 따라, 스탈린주의 국가자본주의에 의해 전복되고 말았다.

 

 

서유럽 평의회에 대한 이론적 교훈

 

러시아 레닌주의 정당과 소비에트 국가가 보여준 혁명초기의 성공경험이 노동자 평의회 연구를 위한 하나의 준거점이 되며 반면 서유럽의 경험은 결국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부차적인 중요성밖에 지니고 있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손쉽고 속 편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중대한 오류이다. 첫째, 서구의 노동자 평의회 운동은 러시아보다 매우 강한 적인 대중적 개량주의에 대해 효과적으로 투쟁했었다. 둘째, 서구유럽 노동자 평의회는 러시아의 19172월과 10월 사이에 벌어진 사건전개과정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매우 중요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었다. 따라서 서유럽 노동자 평의회 경험에서 도출되는 이론적 결론은 매우 중요하다.

1914년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제 2 인터내셔널의 낡은 유제를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에 다가가야 했다. 그들은 서유럽의 조건에 맞는 새로운 혁명적 실천방식을 필요로 했다. 투쟁의 한복판에서 그들은 자신이 발견한 것을 제대로 써 내려갈 시간이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때 그들이 실천으로 보여준 것을 이론적으로 정리하여야 하는 것이다. 다음의 첫 번째 부분에서는 혁명의 변화과정에 대한 일반적 특징을 다루고 둘째 부분에서는 당을 위한 교훈에 논의를 집중시키고자 한다.

첫째, 불균등과 통일, 선진 활동가와 계급대중

 

전시기간동안에 선진 활동가는 노동계급의 행동을 촉발시키고 방향을 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거꾸로 대중이 선진 활동가에 미친 영향 또한 중요했다. 병사 없는 장군은 무의미하듯이, 다양한 개인, 남여, 정신노동자와 육체노동자, 혁명주의자와 개량주의자로 이루어진 노동계급은 하나의 투쟁체로 만들어져만 했다.

노동자 평의회는 이러한 통일성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었다. 노동계급 안의 통일성은 자본주의의 정상적 조건 안에서 태어난 노동계급의 기구에서부터 나올 수는 없었다. 영국의 숙련공 노조나 독일의 다양한 노동자 정당의 결합으로는 현장 대중에서부터 창출된 권력을 담지할 수 없었다. 이것은 자생적으로 일어날 수 없었으며 오직 행동하는 현장 대중의 단일대오 요구에서 나온 리더십에 의해 가능했다.

그러나 노동자 평의회는 마치 노동운동 정치가가 선거를 위해 하듯, 대중을 가장 낮은 수준의 공통요구로 묶은 것은 아니었다. 숙련공과 탈숙련공(영국에서), 혁명주의자와 개량주의자(독일의 정당에서), 노조주의자와 비노조주의자(이태리에서) 사이의 차이는 인정되었다. 선진 활동가는 으례 조직화된 방식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러한 조직적 습관은 일정정도 보수주의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이따금 그들은 대중의 투쟁수준에 뒤쳐지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성이 극복된다면, 전체운동을 위해 투쟁력이 강한 일부 노동자집단(숙련공의 강점, 좌익정치, 조직화된 노조주의)을 활용할 수도 있었다. 만약 선진 노동자 부분이 후진 노동자 부분을 이끌 수만 있다면 분화와 불균등성은 오히려 이점으로 작용했다.

 

둘째, 정치와 경제

노동자 평의회는 전쟁수행을 위해 자본가 계급이 만들어 놓은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사이의 중앙집중화된 융합과정을 따라 자신의 영향력을 건설함으로서, 전시국가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을 감행할 수 있었다. 노동자 평의회로 발전한 작업장의 현장조직은 중앙집중적인 계급조직을 통해 공장 안에서 자본주의 권력의 연결고리를 파괴시킬 능력을 지니게 됨에 따라 자본주의 국가권력으로까지 투쟁을 확대하였다. 이는 전쟁 이전의 사고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2 인터내셔널의 정치가들은 흔히 (역주: 인구의 대부분인) 노동자가 점차 계급으로 조직되어 정치권력을 장악할 때 자본주의의 경제적 기반이 파괴되며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므로 경제적 투쟁 또는 노동자의 특정집단에서부터 일어난 한계적 투쟁은 제한되어야 하며 점진적으로 국가를 장악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 종속되어야만 했다고 했다. 실천적으로 보면, 이러한 주장은 개량주의 지도자가 선거에서 지지를 잃지 않으려고 파업활동을 억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생디칼리스트들은 이와 반대로 생각하고 활동했다. 생산이 자본주의 체제의 심장이며 다른 모든 것(국가의 본성, 이데올로기 등등)을 결정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작업현장에서부터 포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실천은 파업활동을 지원하되, 어떠한 정치 전략도 멀리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노동자 평의회는 위에서 나타난 수수께끼를 풀었다. 노동자 평의회는 그것이 임금이던, 근로조건이던, 식량공급이던 간에 가장 기초적인 수준의 경제적 요구를 위해 투쟁하며 아울러 국가권력 장악을 위한 요구를 상정했다. 이러한 사실은 공공연한 계급투쟁의 시기에 어떤 파업도 순수하게 경제적 성격만을 지닐 수는 없으며 계급적 자신감 향상과 국가권력의 약화라는 정치적 함의를 지니게 된다. 또한 노동자 평의회는 정치라는 것이 단순히 의회주의 안의 선거문제가 아니라 국가에 대한 노동자의 자주적 활동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셋째, 의식의 자발성이냐 아니면 주입이냐?

 

전쟁 이전에 노동운동의 정치가들은 사회주의 교육과 그 이념의 확산만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생디칼리스트는 이론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대중이 산업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자생적으로 혁명주의자가 될 것이라 판단했다. 극단적인 형태로서, 선택의 여지는 노동운동의 외부에서 사회주의적 지식인에 의해 주입된 의식이냐, 아니면 노동활동을 통한 혁명의식의 자생적 발생이냐 하는 문제로 좁혀졌다.

노동자 평의회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해답을 제공하였다. 이에는 두 가지 요소가 포함되었다. 첫째, 위기의 결과로서, 모든 자본가 배후에 민족국가기제가 있기 때문에 노동자의 단순한 경제적 투쟁은 하나의 기업과 하나의 산업 경계를 넘어 확장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므로 부문적인 투쟁은 일반화되며 경제적 투쟁은 계급투쟁으로 변화되었다. 노조를 통한 투쟁방식은 폭넓은 연대투쟁을 위해 기각되어야만 했다. 그 결과는 대중 안에서일종의 변혁의식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노동자 평의회는 각각의 분산된 투쟁에 대하여 연결고리 역할을 함으로서 이러한 과정에 조직적 틀거리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는 자생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대중에게서 자생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의식은 해답의 두 번째 부분이다. 노동자 스스로의 실천이 새로운 의식을 생기게 할지라도 자생적으로 개량주의 사상과 단절하지는 않았다. 혁명적 사회주의라는 대안적 사고는 노동대중과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조직으로부터 도입되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때 대중은 개량주의적 사고에 포획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뜻에서 혁명 의식은 대중 내부가 아닌 곳에서부터 온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일견 모순적일지라도 - 내부로부터 자생적으로 발생된 의식이냐 아니면 독립적인 혁명주의 선전에 의해 외부로부터 발생된 의식이냐 - 두 요소 사이의 역동적 결합은 꼭 필요했다.

 

넷째, 조직이냐 아니면 정치이냐?

 

1915년부터 1920년까지 일어난 사건들은 혁명을 위한 수많은 실험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수많은 혁명 실험들은 견고한 조직화를 거부하며 그저 순진한 정치에 기반하며 이루어진 혁명주의 운동에서부터 시작하여 사회주의적 신념을 실제로 조직화, 구조화하고자 했던 시도까지 매우 다양하게 펼쳐졌다.

스파르타쿠스주의자들은 조직화보다는 주로 선전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첫 번째 범주에 속했다. 그러나 1918~19년의 검증기간에 부닺혀, 독일 공산당의 정치적 활동은 극좌의 불개입주의와 반노조주의에 영향을 받은 대중에 의해 압도되었다. 조직화에 대한 문제를 생략하고는 진정하게 정치를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정되었다.

그 반대의 현상도 우리에게 뜻있는 것이다. 조직적 순수성이 혁명적 가능성을 보증하지는 못했다. 수많은 영국과 이탈리아의 시회주의자들은 민주주의적 노동자 평의회에 대한 물신적 사고를 지녔기 때문에 올바른 사고가 그 조직형식에서부터 저절로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클라이드 현장 활동가들은 조직 내 형식적인 통일단결을 노동자 국제주의보다 더 중시했다. 국가에 의해 그들이 패배했다는 사실은 노동자 조직이 당면한 상황에 대해 좀 더 심사숙고했어야 함을 보여주었다. 튜린의 순수평의회 조직모델은 그 자체로 혁명주의적 의식을 보증할 수 없었다. 그때 공산당 위원회는 현장조직이 나중에 사회변혁을 위한 권력구조의 토대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현장조직은 거의 정치적 문제를 다루지 못했으며 그람시로 하여금 조직적 절차에만 의존하는 한계성을 여실히 깨닫게 하였다. 이러한 현실은 그로 하여금 혁명정당의 독립적인 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였다.

본서를 통하여 우리는 혁명과정에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양자택일의 논리, 이를 테면 의식이냐 조직이냐, 즉각적 행동이냐 장기적 준비이냐, 당이냐 계급이냐를 적용함으로서 일어나는 오류를 보아왔다. 양자택일의 논리에서 각 극단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하며 사회전체와 부분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가장 중요한 관계는 당과 노동자 평의회와의 관계이다. 우리는 노동자 평의회가 소비에트로 전화하고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 성공했던 요인이 주로 혁명적 대중조직에 의존했던 점이었음을 보아왔다. 이러한 진실은 지금까지 60년 동안 계급투쟁 경험에 의해 증명되었다. 많은 노동자 평의회와 대중의 자주적 활동을 가능케 한 조직들이 나타났다. 1936년 스페인, 1956년 헝가리, 1974년 포르투갈, 1980년 폴란드에서 그 사례가 있었다. 1915~20년 사이에 서유럽에서 경험은 노동자 평의회를 건설하는데 의식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주었고 특히 당 건설에서 목적의식적이며 주도면밀한 준비가 필요했음을 보여주었다. 러시아 소비에트는 24시간 안에 세워질 수 있었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와 튜린의 공장평의회가 소집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 평의회 형태는 당면문제를 이겨내는데 알맞은 유연성을 지니고 있었다.

혁명정당은 트로츠키가 논했듯이 계급의 두뇌이며 따라서 지난날 경험을 종합하여 노동계급에게 지침서를 제공함으로서 역사의 교훈, 맑스주의에 바탕을 둔 분석도구, 선진 활동가의 폭넓은 경험 등등을 생산해내야 한다. 이러한 종합과정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볼셰비키 당은 그들의 승리 이전 14년 전부터 활동하였다. 유럽 공산주의정당은 거센 계급투쟁 과정에서 세워졌고 이러한 미성숙한 점 때문에 당면과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공산주의 정당이 그때 모든 곳에서 세워졌다는 사실은 노동자 평의회 경험 때문이었다. 그때 이러한 사건들은 혁명주의자가 대중에 대한 리더십을 확보할 첫 번째 기회를 제공했다. 개량주의가 퍼진 조건에서 혁명정당을 세울 수 있는 방도와 이에 대한 교훈은 1915~20년 사이의 경험들에서 도출될 수 있었다.

첫째, 작업현장에 대한 강조가 중요했다. 개량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직접적인 투쟁에서 동떨어진 노동조합 관료제에 의존했던 반면 혁명정당은 의회와 노동조합 간부가 아닌, 작업현장에서부터 시작된 노동자의 자기해방과정을 주목했었다. 현장 노동자의 자신감 회복과 현장조직 건설에 집중했다는 것은 노조 안에 있는 노동계급이 그 노동조합 기제에 포획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현장의 자신감을 회복했었다는 것을 뜻했다.

둘째, 부문적, 경제적 투쟁에서부터 정치적 계급투쟁으로 발전한다는 사실은 혁명의 시기에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개량주의자들은 늘 경제적 투쟁을 더 높은 수준의 정치투쟁으로 이어가는 것을 거부해 왔다. 분파주의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정치적 순수성이 의심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정치적 투쟁을 회피해 왔다. 혁명정당을 세우려면 모든 노동자들의 요구를 해결하는 과정이 그들의 자주적 활동을 신장시키며 나아가 각 부문의 투쟁이 확장되어 계급 전체의 투쟁이 되도록 하는 작업과 연결되어야만 한다.

당과 대중조직 그리고 대중 사이의 관계는 1917년에 최고정점에 이르렀다. 오늘날은 사실상 이러한 상황에서 동떨어져 있지만 위의 전략을 현실에 적용해본다면, 모든 파업은 사회주의 혁명의 사전 훈련장으로서 그리고 모든 파업 위원회는 노동자 평의회의 맹아로 그 뜻을 지닐 수 있다.

셋째, 노동자 평의회는 학계의 논쟁거리로 전락하여 역사적 호기심으로 남겨져서는 안 된다. 혁명정당은 자신의 최종적 임무에 대한 상이 굳건하고 명확하게 형성되고 유지될 때만이, 그래서 지금의 투쟁이 이러한 상을 지향할 때만이 세워질 수 있다. 내일의 노동자 국가를 위한 희망은 오늘의 구체적인 투쟁방식과 결합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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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시기에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노동자 혁명과 노동자의 자주조직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비슷한 점이 있고 연계성도 있다. 그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여러 나라에서 일어났지만 자본주의 본질 그 자체에 공통적 기원을 두고 있다. 자본축적의 필요성이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끊임없는 자본축적은 필연적으로 노동자 계급을 발전시키며 기존의 고정된 사회적 관계를 해체시키며 결국 위기로 귀결된다. 전쟁터의 참호와 공기압축 선반은 지난날에 있었던 특징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방식으로 오늘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극소전자기술이 추진하는 2차 산업혁명의 와중에 있다. 자본주의는 이겨낼 수 없는 위기 속에 있다. 1914년 위기는 제국주의적 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오늘날 대량살상무기를 위한 경쟁은 1차 대전 때 그 무서운 드레드노트(Dreadnought)형 전함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힘 또한 더욱 크게 성장하고 있다. 고르츠(Gorz)와 홉스봄(Hobsbawm)과 같은 학자의 노동계급 소멸이라는 과장된 논의에도 지금 노동자의 집합적 잠재력은 1915~20년의 힘을 훨씬 뛰어넘고 있다. 이는 아주 쉽게 증명된다. 영국에서 사무노동자의 비율이 늘어나고 있지만(이들의 대부분은 자신을 노동자로 보며 노조에 가입하고 있음) 아직 천만의 육체노동자가 노동계급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금속산업의 경우 지금 노동자의 수는 1921년의 수를 훨씬 뛰어넘고 있다. 우리는 지금 한 두개의 대량생산 산업이나 유럽 몇몇 지역만을 주목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상파울로, 그단스크, 방콕 등을 포함하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보아야 한다.

지금 시기에 근본적인 선택문제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시대와 같이 사회주의이냐 야만이냐이다. 그러나 이제 그 대안은 좀 더 명확해 지고 있다. 이제 야만은 핵전쟁을 통한 인류의 공멸이다. 사회주의는 현대기술의 기적을 인민대중의 욕구에 맞게 활용하며 사회적 억압과 착취를 뿌리 뽑기 위한 밑바탕으로 쓰는 사회를 뜻한다. 지금 사회주의운동은 이전 노동운동(1차 대전 뒤 일어난 소비에트와 평의회는 그 하나임)에 견주어 볼 때 많은 이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비참한 패배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함을 뜻한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최고점에 다다른 뒤에야 혁명정당의 필요성을 깨달은 유럽 혁명가의 과오를 다시 밟아서는 안 된다. 러시아의 경험과 더불어 1915~20년 사이의 서유럽 혁명의 성공과 실패의 역사는 어떻게 현대자본주의가 도전받았고 무너졌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정보의 원천이다. 사회주의는 혁명적 정당이 건설되어야 실현될 수 있다. 그 당은 반드시 노동자 평의회(노동자의 집합적 힘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조직)에 바탕을 삼아 의회주의의 현혹을 대체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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