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스페인의 교훈: 마지막 경고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1월호

스페인의 교훈: 마지막 경고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4:51

스페인의 교훈: 마지막 경고

1937. 레온 트로츠키

 

스페인에서 멘셰비즘과 볼셰비즘

모든 군대의 참모들은 앞으로 다가올 커다란 전쟁에 대비하여 에티오피아, 스페인, 극동에서 있었던 군사작전에 대해 면밀하게 연구하고 있다. 혁명진영 참모들도 다가오는 세계혁명의 불길을 지피는 스페인 노동자계급의 전투에 관해 그 이상으로 주의 깊게 연구해야만 한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다가오는 사건들에서 불시에 습격당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각각 규모가 다른 세 개의 이념, 즉 멘셰비즘, 볼셰비즘, 무정부주의가 이른바 공화주의진영 안에서 싸웠다. 부르주아 공화당에 관해서라면, 그들은 결코 독립적인 사상 또는 독립적인 정치적 중요성을 가지지 못했고, 그저 개량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의 뒤에 붙어서만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스페인 무정부적 조합주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교의를 거부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고, 사실상 자신들의 영향력을 무로 만들었다는 설명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이른바 공화주의 진영 안에서 실제로 싸운 이념은 멘셰비즘과 볼셰비즘이었다.

두 부류의 멘셰비키, 즉 사회당과 스탈린주의자들에 따르면 스페인 혁명은 그저 민주적임무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고, 그 임무를 위해서는 민주적부르주아들과의 통일전선이 꼭 필요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부르주아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고자하는 노동자계급의 어떤 시도도 모두 미성숙한 것일 뿐만 아니라 치명적이다. 결국 혁명이 아니라 반란자 프랑코에 맞서는 투쟁을 의제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파시즘은 봉건적 반동이 아니라 자본가계급의 반동이다. 자본가계급의 반동에 맞선 싸움의 승리는 노동자혁명의 힘과 수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자체가 부르주아사상의 일부인 멘셰비즘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럴 수도 없다.

4인터내셔널의 젊은 층만이 올바르게 계승한 볼셰비키의 관점은 영구혁명이론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것은 심지어 반()봉건적 토지소유제도의 해체와 같은 순수하게 민주적인 과제들조차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 없이는 해결할 수 없기에, 사회주의 혁명을 의제로 삼는 것이다. 게다가 혁명의 첫 국면에 실제로 스페인노동자계급 스스로가 그저 민주적 과제들뿐만 아니라 순수하게 사회주의적인 과제들을 임무로 지녔다. 부르주아민주주의의 경계를 넘으려하지 않는 요구는 사실상 민주주의 혁명의 방어가 아니라 그것의 거부를 뜻한다. 토지관계의 전복을 통해서만 소작농들과 커다란 대중은 파시즘에 맞서는 강력한 보루로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지주들은 자신들에게 의지하고 있는 상업자본가들, 산업자본가들, 은행자본가들, 그리고 부르주아 지식인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결국 노동자계급의 정당은 소작농 대중과 함께 갈 것인지, 아니면 자유주의 지식인들과 함께 갈 것인지 사이에서 선택에 맞닥뜨렸다. 소작농들과 자유부르주아계급을 동시에 하나의 동맹으로 끌어낼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은 소작농들을 속임으로서 노동자들을 고립시키도록 자본가계급을 돕는 것이다. 토지혁명은 자본가계급에 맞서는 것을 통해서만, 결국 노동자계급이 압도하는 독재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3의 중간적 형태의 체제란 있을 수 없다.

이론적 측면에서 스탈린의 스페인정책이 갖는 가장 놀라운 모습은 레닌주의의 기초를 철저히 무시했다는 것이다. 코민테른은 몇 십 년 동안 지체하고 나서(!), 멘셰비키의 교리를 완전히 복구시켰다. 게다가 코민테른은 이러한 교리를 좀 더 일관되게행하고자 궁리했고, 그 때문에 그것은 좀 더 우스꽝스런 것이 되었다. 어쨌든 1905년 초입에 차르러시아에서 순수민주주의혁명이라는 공식은 1937년의 스페인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멘셰비키의 자유노동정책이 최근 스페인에서 반동적인 스탈린주의 반노동정책으로 전환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와 함께 맑스주의를 우스꽝스럽게 만든 멘셰비키의 교리는 그 자체를 풍자하는 것이 되었다.

 

인민전선론

그렇지만 코민테른의 스페인정책이 이론적 오류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스탈린주의는 맑스주의 이론에서 배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이론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소비에트 관료들의 경험적 이해에서부터 나왔다. 이들 냉소주의자들의 사사로운 써클은 코민테른집행위원회 총서기 디미트로프의 인민전선 철학을 모방했다. 그러나 그들은, 대중을 속이기 위해 이 신성한 공식을 선전할 많은 선전 요원들로 진지한 분자들뿐만 아니라, 사기꾼들, 바보들, 허풍선이들과 같은 많은 이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혁명에 대한 편협한 합리주의자이자 타고난 귀머거리이며, 무지하고 잘난체하는 루이스 피셔는 이들 생기 없는 형제들의 가장 역겨운 대변자이다. “진보세력의 단결!” “인민전선사상의 승리!” “반파시스트 계급 단결에 대한 트로츠키의 공격!”…… 90년 전에 공산당선언이 나왔다 사실을 누가 믿겠는가?

본질적으로 인민전선 이론가들은 산술의 제1법칙-덧셈법칙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에 사회당원들, 무정부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을 더한 합이 각각의 개별적 숫자들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 지혜의 전부다. 그러나 여기서는 산술이 적합하지 않다. 적어도 역학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 정치에서는 세력들 사이의 평행사변형의 법칙이 적용된다. 더 많은 각각 분리된 세력들로 구성되어 있을수록, 그 평행사변형의 대각선은 짧아지게 된다. 정치적 동맹들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나아가려 할수록 그 합성은 영(0)에 가까워진다.

때로는 공통의 실제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동자계급내의 갈라진 정치그룹들이 단일한 블록을 형성하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피한 경우가 존재한다. 일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그러한 단일블록은 노동자계급의 그것과 가까운 이해관계를 가진 억압받는 소자본가들을 끌어당길 수 있다. 그러한 형태의 단일블록으로 연합된 세력은 각각의 구성세력들의 총합보다 훨씬 강력함을 보여줄 수 있다. 반대로 그 근본적 이해관계가 180도 다른 현시대에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정치적 동맹은 일반법칙으로 노동자계급내의 혁명세력을 무력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이다.

노골적인 강압의 힘이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내전은 그 참가자들에게 극도의 자기희생정신을 요구한다.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그들 자신들의 해방을 위해 투쟁을 시작할 때에만 승리를 책임질 수 있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의 지도에 종속되는 것은 이미 내전에서 패배가 보증되는 것을 뜻한다.

특히 이러한 단순한 진실은 순수하게 이론적인 분석의 결과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적어도 1848년 이후의 역사적 경험 전체에서 얻은 부정할 수 없는 결론이다. 부르주아사회의 현대사는 모든 종류의 인민전선들, 즉 고통 받는 이들을 기만하기 위한 수많은 형태의 정치적 연합들로 채워져 있다. 스페인의 경험은 계속되어 온 이러한 범죄와 배신들에서 또 하나의 비극적인 고리일 뿐이다.

 

자본가계급의 환영(幻影)과 동맹을 추구하다

정치적으로 가장 치명적인 것은 스페인인민전선이 실제로는 세력들의 평행사변형조차도 결핍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본가계급의 자리는 그들의 환영으로 채워져 있었다. 스페인 자본가계급은 인민전선에 참가하는 성가신 일을 하지 않고서도 스탈린주의자들, 사회당, 무정부주의자들을 통해서 노동자계급을 종속시켰다. 모든 정치적 색조의 착취자들 가운데 압도적 다수는 공개적으로 프랑코진영으로 넘어갔다. ‘영구혁명에 관한 어떤 이론 없이도 스페인자본가계급은 처음부터 혁명적 대중운동이,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건 간에, 토지와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에 반대하는 것으로 향할 것이고, 민주적 수단들로는 이 운동을 제어하는 것이 정말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본가계급 그 자신들은 아니지만 그들의 정치적 대리인이자, 기껏해야 보잘 것 없는 유산계급의 파편인 아사냐, 콤퍼니스 같은 자들이 공화주의진영에 남았던 이유는 이것이다. 유산계급은 모든 것을 군사독재에 거는 동시에, ‘공화주의진영 내의 사회주의 대중운동을 마비시키고 혼란에 빠뜨리며, 그 뒤 목을 조르기 위해 과거의 정치적 대변인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스페인자본가계급을 전혀 대표하지 못하는 좌익공화주의자들이 노동자들과 소작농들을 대표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그들은 바로 자신들만을 대표했다. 그러나 그들의 동맹자들인 사회당, 스탈린주의자들, 무정부주의자들 덕분에 이들 정치적 환영들은 혁명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어떻게? 매우 단순하다. 사유재산에 대한 불가침의 권리(?)민주적 혁명의 원칙으로 구체화시키는 것을 통해 그렇게 했다.

 

인민전선 안에 스탈린주의자들

스페인 인민전선과 그 내적 체계가 등장한 배경은 매우 분명하다. 은퇴한 부르주아좌파지도자들의 임무는 대중의 혁명을 억제하면서 착취자들로부터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는데 있었다. “우리 공화주의자들이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다면 왜 프랑코가 필요하겠는가?” 아사냐와 콤파니스의 이해는 이러한 점에서 스탈린의 이해와 완전히 일치했다. 스탈린은 무정부상태에 맞서서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서, 프랑스와 영국의 자본가계급에게 신뢰를 얻는 것이 필요했다. 스탈린은 노동자들 앞에 내세울 위장막으로 아사냐와 콤파니스가 필요했다. 물론 스탈린 자신은 사회주의를 위한 것이었지만, 공화주의 자본가계급을 쫓아버리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어야만 했다! 아사냐와 콤파니스는 감히 노동자들을 공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거만한 해외의 후원자로서가 아니라 혁명기의 권위를 가진 경험 많은 사형집행인으로서 스탈린을 필요로 했다.

계급투쟁의 길에서 오래전에 이탈한 제2인터내셔널의 정통 개량주의자들은 모스크바의 후원 덕분에 새로운 자신감을 얻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러한 후원은 모든 개량주의자들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가장 반동적인 부위에만 주어졌다. 카발레로는 노동귀족들을 향해 돌아선 사회당의 얼굴이었다. 네그린과 프리에토는 늘 자본가계급으로 기울었다. 모스크바의 도움으로 네그린은 카발레로를 압도했다. 인민전선의 포로가 된 사회당좌파와 무정부주의자들은 실제로 민주주의를 구할 수 있다면 무엇이건 하려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인민전선의 헌병들에 맞서 대중을 동원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시도는 결국 불평과 흐느낌으로 끝나고 말았다. 스탈린주의자들은 그런 식으로 동맹 내의 사회당 극우파인 공공연한 자본가 분파와 함께했다. 그들은 POUM, 무정부주의자들, 사회당좌파와 같은 좌익들, 가장 오른 쪽에 있는 그룹조차 혁명적 대중으로부터 압력을 받은 중도주의그룹들을 적대하여 억압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이러한 정치적 사건들은 동시에 지난 몇 년 동안 코민테른을 퇴보시킨 원인이 되었다. 나는 전에 스탈린주의를 관료적 중도주의로 정의했고, 사건들은 이 정의의 올바름을 계속해서 증명해왔다. 그러나 오늘날에 그것은 명백히 진부한 것이 되었다. 보나파르트 관료들의 이해와 중도주의적 동요와 망설임은 더 이상 융합될 수 없었다. 스탈린주의 파벌은 자본가계급과의 화해를 추구하면서 국제적 노동귀족들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그룹들과의 동맹에만 참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스탈린주의의 반혁명적 성격을 국제적 무대에서 분명하게 드러냈다.

스탈린주의의 반혁명적 탁월성

이것은 그처럼 별 볼일 없는 수의 당원과 그처럼 허약한 지도부를 가진 스페인 공산당이 비할 수 없이 강력한 사회당과 무정부주의자들의 조직들 앞에서 모든 권력의 고삐를 손에 잡을 수 있었던 방법과 이유에 관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스탈린주의자들이 단순하게 소비에트의 무기와 권력을 교환했다는 일반적인 설명은 너무 피상적인 것이다. 모스크바는 군수품에 대한 대가로 스페인의 금을 받았다. 자본주의 시장의 법칙에 따르면 이것은 모든 것을 덮어준다. 그렇다면 스탈린은 거래를 통해 어떻게 권력을 얻고자 궁리했는가?

일반적인 대답은 군사적 지원을 제공함으로서 대중으로부터 권위를 갖게 된 소비에트정부가 협력의 조건으로 혁명가들에 반하는 극단적인 조치들을 요구했고, 그렇게 해서 앞길을 막는 위험한 반대파들을 제거했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은 정말로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은 진실의 한 측면일 뿐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소비에트의 원조가 만들어낸 권위에도, 스페인공산당은 작은 소수로 남았고 노동자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증대하는 혐오와 마주쳐야 했다. 다른 한편 발렌시아정부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조건들을 설정하는 것만으로 모스크바는 만족할 수 없었다. 사모라, 콤파니스, 네그린 뿐만 아니라, 총리로 있던 동안의 카발레로까지도 모스크바의 요구를 어느 정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왜인가? 이들 신사들은 혁명을 자본주의적 한계 내로 제한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모든 혁명적 공세를 죽도록 두려워했다.

군수품과 반혁명적 최후통첩을 제공한 스탈린은 이들 그룹들 모두에게 구세주였다. 그는 이들이 원했던 프랑코에 대한 군사적 승리를 보증했으며, 혁명의 길을 향한 모든 의무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그들은 모스크바가 자신들을 위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재건해 준 뒤에 그것을 다시 사용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의 가면을 벽장에 서둘러 처박았다. 이제 이들 신사들은 스탈린과의 군사협정의 필요성을 이유로 노동자들에 대한 배신을 안전하게 정당화할 수 있었다. 스탈린 자신은 공화파 자본가계급과의 동맹을 유지할 필요성을 이유로 반혁명적 정책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포괄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아사냐, 네그린, 콤파니스, 카발레로, 가르시아 올리버와 같은 자유와 정의의 승리자들이 보여주었던 게페우의 범죄에 대한 성스런 관용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단언한 것은, 혁명가들의 머리와 노동자들의 권리 말고는 비행기와 탱크를 위한 비용을 지불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 전혀 아니라, 테러를 제외한 다른 수단들로는 그들이 가진 순수 민주주의적 강령’, 즉 반사회주의 강령을 실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스스로를 위한 혁명의 길에 들어섰을 때(공장과 토지를 장악하고, 오랜 소유주들을 몰아내며, 지방의 권력을 장악할 때), 민주주의자, 스탈린주의자, 또는 파시스트들과 같은 부르주아 반동들에게 거짓말과 속임수로 보완된 유혈의 압제 말고는 이 운동을 억누를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없었다. 이 길에서 스탈린주의 파벌의 우월성은 아사냐, 콤파니스, 네그린, 그리고 그들의 좌익 동료들이 가지지 못했던 일관된 수단들을 적용할 능력에 있었다.

 

자신의 방식으로 영구혁명이론의 올바름을 증명한 스탈린

두 가지 모순된 강령이 스페인 공화주의진영 내에서 대립했다. 한 편에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유재산을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보호하고 가능한 한 프랑코로부터 민주주의를 보호하려는 강령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노동자계급에 의한 권력 장악을 통해 사유재산을 폐지하려는 강령이 있었다. 첫 번째 강령은 노동귀족, 상층 소부르주아 그룹들, 그리고 특히 소비에트 관료들을 매개로 한 자본가들의 이해를 표현했다. 두 번째 강령은 완전히 의식적이지는 못했지만 강력한 혁명적 대중운동의 경향들을 맑스주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었다. 혁명을 위해서는 불행하게도 한줌의 볼셰비키들과 혁명적 노동자계급 사이에 인민전선의 반혁명 장벽이 세워졌다.

이제 인민전선의 정책을 결정하는 힘은 무기 공급자인 스탈린의 협박이 전혀 아니었다. 물론 협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협박이 성공할 수 있었던 고유한 이유가 혁명 그 자체의 조건 내부에 있었다. 6년 동안 스페인은 반()봉건세력과 자본가들이라는 유산계급정권에 대한 대중의 공세가 증가하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였다. 가장 극단적인 수단들을 통해서라도 재산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자본가계급은 프랑코의 군대로 기울었다. 공화주의정부는 민주적수단들을 통해 재산을 지켜주겠다고 자본가계급에게 약속해왔지만, 특히 19367월에 그것은 완전히 붕괴되었음이 드러났다. 재산을 둘러싼 전선의 상황이 군대전선의 상황보다 훨씬 더 심각해지자, 무정부주의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색조의 민주주의자들은 스탈린 앞에서 굴복했고, 그는 자신의 무기고에 있는 프랑코가 사용하는 수단 말고는 다른 수단을 찾을 수 없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과 관련되었다면서 POUM 당원들과 혁명적 무정부주의자들, 사회당 좌파에 대한 더러운 중상모략, 부정한 서류, 스탈린감옥의 고문, 매복 살인과 같은 것들 없이 자본가정부는 공화주의 깃발 아래에서 두 달도 버틸 수 없었다. 게페우는 다른 어떤 세력보다도 일관해서 가장 저열하고 잔인하게 노동자계급에 맞서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방어해 줄 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상황의 지배자가 되었음을 증명했다.

민주인사케렌스키는 사회주의 혁명에 맞선 투쟁에서 처음에는 코르닐로프 군사독재를 후원하려고 했고, 나중에는 군주주의자 크라스토프 장군의 화물열차로 페트로그라드에 진입하려고 했다. 다른 한편 볼셰비키들은 민주주의 혁명을 끝까지 수행하기 위해서 민주주의허풍쟁이들과 사기꾼들의 정부를 전복해야만 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볼셰비키는 군사(또는 파시스트)독재를 위한 모든 종류의 시도들을 끝장냈다.

스페인혁명은 파시스트반동의 수단들에 맞서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또다시 증명한다. 거꾸로 노동자혁명의 수단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파시즘에 맞선 진정한 투쟁이 불가능함을 증명한다. 스탈린은 게페우의 보나파르트적 수단들을 통해 민주주의를 파괴하면서 트로츠키주의’(노동자혁명)에 대항한 전쟁을 개시했다. 이것은 코민테른이 채택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향한 혁명은 두개의 독립적인 역사적 사건들로 구성되고 서로 다른 시기로 분리된다고 주장하는 낡은 멘셰비키이론을 또다시 단호하게 반박한다. 모스크바 사형집행인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통해 그들 고유의 방식으로 영구혁명이론의 올바름을 증명한다.

 

무정부주의자들의 역할

스페인혁명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은 어떤 종류의 독립적인 입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했던 일이란 볼셰비즘과 멘셰비즘 사이에서 동요가 전부였다. 더 정확하게는 무정부주의 노동자들은 본능적으로 볼셰비키의 길로 이끌렸던 반면에(1936719, 19375), 반대로 그들 지도자들은 인민전선진영, 즉 자본가정부진영으로 대중을 이끌고자 전력을 다하였다.

무정부주의자들은 평화적 시기의 판에 박힌 일들로 채워진 조직인 노동조합 내의 활동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제한하면서, 노동조합 조직 밖에 있는 대중 안에서, 그리고 정치정당들과 정부기구들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무시함으로써 혁명의 법칙들과 자신들의 임무를 이해하는 데서 완전히 실패했음을 드러냈다. 만일 자신들이 혁명가들이었다면, 무정부주의자들은 노동조합에 결합해본 적이 없었던 가장 억압받는 층을 포함하여 도시와 시골의 모든 고통 받는 이들의 대표자들을 포괄하는 소비에트의 건설을 최우선적으로 촉구했을 것이다. 혁명적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이들 소비에트들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장악했을 것이다. 스탈린주의자들은 별 볼일 없는 소수로 남았을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자신이 가진 무적의 힘을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자본가국가기구는 공중에 떠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단 한 번의 강력한 타격으로도 이 기구를 가루로 만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사회주의혁명은 강력한 추진력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프랑스 노동자계급은 피레네산맥 너머로 노동자혁명을 제한하려는 레옹 블룸의 봉쇄를 오랫동안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스크바 관료들도 그러한 호강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일어섰다면 가장 어려운 문제들은 해결되었을 것이다.

그 대신 무정부적노동조합주의자들은 노동조합들 안의 정책 뒤로 숨음으로써 결국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수레를 위한 다섯 번째 바퀴가 되었고, 그것은 전 세계는 물론 스스로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다섯 번째 바퀴는 불필요한 것이 되었다. 가르시아 올리버와 그의 무리가 노동자들에게서 권력을 빼앗을 수 있도록 스탈린과 그의 측근들을 돕고나서, 무정부주의자들은 인민전선정부에서 쫓겨났다. 심지어 그때조차도 그들은 우세한 편에 붙어서 자신들을 헌납하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대자본가에 대한 소자본가의 두려움과 대관료에 대한 소관료의 두려움으로,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사형집행인과 희생자 사이의) 통일전선의 신성함과 그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독재를 용인할 수 없음에 대해 말했다. “필시 우리는 19367월에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필시 우리는 19375월에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무정부주의자들은 혁명에 대한 배신을 인정하고 보상하라고 스탈린-네그린에게 간청했다. 역겨운 모습으로!

우리는 모든 종류의 독재에 맞서기 때문에,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원하지 않아서 권력을 잡지 않았다.”와 같은 자기정당화는 그 자체로 무정부주의가 완전히 반혁명적인 교리라는 최종판결일 뿐이다. 권력 장악을 거부하는 것은 그것을 휘두르는 자들, 착취자들에게 자발적으로 권력을 내맡기는 것이다. 모든 혁명의 본질적으로 새로운 계급이 권력을 장악해서 고유의 강령을 생활로 실현하는 것을 포함했고 그렇게 해 왔다. 승리를 거부하면서 전쟁을 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권력 장악을 위한 준비 없이 대중을 반란으로 이끄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무정부주의자들의 강령이 실현가능한 것이었다고 가정한다면, 그 누구도 무정부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뒤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정부를 세우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은 스스로 그러한 신념을 잃어버렸다. 실제로 그들은 투덜대고 징징대면서 스탈린-네그린의 독재를 지지해왔고 여전히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종류의 독재에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자신들의 원칙과 용기를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고립’, ‘분쟁’, ‘파시즘등 모든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프랑스와 영국을 두려워했다. 말만 번지르르한 이들이 무엇보다도 두려워했던 것은 혁명적 대중이었다.

권력 장악을 포기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모든 노동자조직을 개량주의의 늪으로 내던지고 자본가계급의 장난감으로 만든다. 사회 내 계급관계의 관점에서 그것은 피할 수 없다. 무정부주의자들은 권력 장악이라는 목표를 반대하면서, 결국 혁명이라는 수단을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67월에 CNTFAI 지도자들은 자본가계급이 권력의 그림자를 놓치지 않도록 도왔을 뿐만 아니라, 한 번의 타격으로 잃어버린 것들을 조금씩 복구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375월에 그들은 노동자들의 봉기를 거부함으로서 자본가계급의 독재를 구원했다. 그렇게 해서 그저 정치를 거부하고자 했던 무정부주의는 실제로는 혁명을 거부했고, 좀 더 중요한 순간에는 반혁명적임을 증명했다.

1931년부터 1937년 사이의 거대한 시험대를 거치고 나서, 크론슈타트에 대한 낡은 반혁명적 허튼소리와 스탈린주의는 맑스주의와 볼셰비키주의의 필연적인 결과다라는 주장을 지속해온 무정부주의 이론가 자신들이 혁명기에 영원히 죽어버렸음이 이러한 점에서 쉽게 증명된다.

당신들은 맑스주의가 그 자체로 타락했고 스탈린주의가 그것의 논리적 계승자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전 세계에 걸쳐서 스탈린주의에 대항하는 죽음의 전투를 개시했겠는가? 왜 스탈린주의 깡패집단은 주된 적을 트로츠키주의에서 찾는가? 왜 스탈린의 깡패들은 우리의 관점 또는 우리의 활동방식을 향해 다가오는 이들(두루티, 안드레스, , 란다우 등등)에 대해 피의 보복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가? 다른 한편, 모스크바와 마드리드 시대에 카발레로-네그린 각료체제 하에서, 왜 스페인 무정부주의지도자들은 자본가계급과 스탈린의 머슴으로서 게페우가 저지른 범죄들에 함께했는가? 심지어 아직까지도 왜 무정부주의자들은 파시즘에 맞서 싸운다면서, 파시즘과의 싸움에서 무능력을 증명한 혁명의 사형집행자들인 스탈린-네그린의 자발적 포로로 남아있는가?

무정부주의의 대변인들은 크론슈타트와 마흐노 뒤에 숨는 것으로는 아무도 속일 수 없을 것이다. 크론슈타트 사건과 마흐노와의 투쟁에서 우리는 농민반혁명에 맞서 노동자계급을 방어했다. 스페인무정부주의자들은 노동자혁명에 맞서 자본가반혁명을 방어했고, 계속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 어떤 궤변으로도 스페인혁명에서 노동자계급이 혁명적 맑스주의자들과 함께 바리게이트의 이편에 있는 동안, 무정부주의와 스탈린주의가 다른 편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의식 속에 영원히 남을 진실이다!

 

POUM의 역할

POUM에 관한 기록도 별로 좋지 못하다. 역사적 순간에 그들은 확실히 영구혁명의 공식에 기초하고자 했다(스탈린주의자들이 POUM을 트로츠키주의로 불렀던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은 이론적 천명으로는 충분치 않다. 무정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POUM은 개량주의 지도자들에 맞서 대중을 결집시키는 대신, 자본주의에 비한 사회주의의 우수성을 이들 신사들에게 확신시키고자 했다. POUM 지도자들의 모든 말과 글은 이러한 장단에 맞추어졌다. 그들은 무정부주의지도자들과의 분쟁을 피하기 위해 CNT 내에서 세포들을 조직하지 않았고 대개는 그곳에서 어떠한 활동도 수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날카로운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공화군 내에서 혁명적 활동을 개시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들만의조직을 방어하거나 자신들만의담당전선을 차지하기 위한 자신들만의노동조합과 자신들만의민병대를 만들었다.

POUM은 계급으로부터 혁명적 전위를 고립시킴으로서, 전위를 무력화시켰고 지도력이 필요했던 계급을 방치했다. POUM은 인민전선에 좌익적 외피를 제공하면서, 모든 정치적 측면에서 볼셰비즘보다는 인민전선에 훨씬 더 가까웠다. 그럼에도 POUM이 비열한 유혈탄압의 희생자가 된 것은, 인민전선이 자신의 왼쪽 부위를 조금씩 도려낸 것을 제외하고는 사회주의혁명을 억누르는 임무에서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POUM은 혁명정당을 창출하는데서 주요한 장애물임을 최종적으로 증명했다. 우유부단함과 모호함, 즉 중도주의적 태도에서 노골적으로 POUM을 지지했던 네덜란드의 혁명적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자 스니블릿과 같은 제4인터내셔널의 관념적이고 타협적인 당원들에게도 절반정도의 커다란 책임이 있다. 혁명은 중도주의를 경멸한다. 혁명은 중도주의를 폭로하고 근절한다. 혁명의 과정은 중도주의의 친구들과 대변자들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스페인혁명의 가장 중요한 교훈들 가운데 하나이다.

 

무장의 문제

사회당과 무정부주의자들이 스탈린에 대한 굴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모스크바의 무기를 위해 원칙과 양심을 내줄 필요성을 말하는 것은 너무도 서투른 거짓말이다. 물론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음모와 죽음을 피해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목적에는 그에 부합하는 수단이 필요하다. 모스크바가 군사적 개입을 시작하기 오래전인 19314월에 사회당과 무정부주의자들은 노동자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아 부었다. 스탈린은 그들에게 그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가르쳤다. 그들이 스탈린범죄의 공범이 된 것은 바로 같은 정치를 공유했기 때문이다.

무정부주의지도자들이 조금이라도 혁명가들과 공통점이 있었다면, 모스크바의 처음 협박에 대해 사회주의적 공세를 지속하는 것과 함께 스탈린의 반혁명적 요구조건을 세계노동자계급 앞에 폭로하는 것으로 답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사회주의혁명과 프랑코독재 사이에서 공개적인 선택을 하도록 모스크바 관료체제를 압박했을 것이다. 테르미도르 관료체제는 혁명을 두려워하고 혐오한다. 그러나 또한 파시스트의 목줄이 숨통을 조일 것도 두려워한다. 게다가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의존한다. 모든 증거들은 모스크바가 무기를 가능한 한 좀 더 합리적인 가격으로 제공하도록 압박받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세계는 스탈린의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1년 반의 내전동안 많은 민간 기업을 군수품 생산을 위한 것으로 전환시키면서, 스페인의 군수산업은 확대되고 발전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동안 이 작업은 그저 스탈린과 그의 스페인 동맹자들 모두 노동자조직들의 주도권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실행되지 않았다. 강력한 군수산업은 노동자들의 손에서 강력한 도구가 되었을 것이다. 인민전선 지도자들은 모스크바에 의존하는 것을 선호했다.

정확히 이 문제에서 인민전선의 배신적 역할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들은 자본가계급과 스탈린의 배신적 거래를 위해 노동자조직들에게 의무를 강요했다. 소수파로 남아있는 한, 당연하게도 무정부주의자들은 모스크바와 그곳의 주인이 영국과 프랑스를 만족시키기 위해 부과하는 어떤 의무도 받아들이려했던 인민전선을 직접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선에서 최고의 투사들이기를 중단하지 않고서도, 배신들과 배신자들로부터 자신들을 공개적으로 분리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들은 대중에게 실제 상황을 설명하고, 자본가정부에 맞서 결집시키면서, 결국 권력과 모스크바의 무기들을 장악하기 위해 날마다 자신의 힘을 강화할 수 있었고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만일 인민전선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모스크바가 무기제공을 완전히 거부할 것이 틀림없다면? 그리고 이에 대해 답하더라도, 만일 소련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혁명의 승리는 무기를 제공하는 힘 있는 외국의 후원자가 아니라, 현재에 달려있다. 대개 반혁명은 해외로부터의 후원을 누렸다. 소비에트에 대항했던 프랑스, 영국, 미국, 일본, 그리고 다른 나라의 군사적 개입의 경험을 상기시켜야만 하는가? 러시아노동자계급은 밖으로부터의 군사적 지원 없이 내부의 반동과 해외의 간섭을 이겨냈다. 무엇보다도 혁명은 대중이 그 지역의 무기를 움켜쥐고 적의 군대를 제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대담한 사회강령의 도움으로 성공한다. 적군(赤軍)은 프랑스, 영국, 미국의 군사지원물자를 압수했고 외국의 파견군을 바다로 몰아냈다. 이러한 사실을 정말로 잊어버렸는가?

만일 무장한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정부인 이른바 스페인공화국의 지도부에 비겁한 자본가계급의 대표들이 아니라 혁명가들이 있었다면 무장의 문제는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식민지 리프족과 무솔리니의 병사들을 포함한 프랑코의 군대는 혁명사상의 전염에 대해 전혀 면역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회주의 봉기의 불길에 둘러싸인 파시스트군대는 보잘 것 없는 세력임을 증명했을 것이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군대와 군사적 재능을 결여하고 있지 않았다. 없었던 것은 혁명정당이었다!

 

승리의 조건

착취자들의 군대에 맞선 내전에서 대중이 승리하기 위한 조건은 본질적으로 매우 단순하다.

1. 혁명군대의 투사들은 그들이 낡은 착취형태를 재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완전한 사회적 해방을 위해 싸운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아야만 한다.

2. 적의 후방에서 뿐만 아니라, 혁명군의 후방에서도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같은 것을 알고 이해해야만 한다.

3. 적의 전선에서뿐만 아니라, 노동자 농민들의 전선과 양쪽 후방이 모두 사회혁명의 정신을 담은 선전활동으로 충만해야만 한다. “승리 후에 개혁이라는 구호는 성경의 왕들로부터 스탈린으로 이어지는 모든 압제자들과 착취자들의 구호이다.

4. 정치는 투쟁에 참여하고 있는 계급과 계층이 결정한다. 혁명적 대중은 자신의 의지를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표현하는 국가기구를 가져야만 한다. 노동자와 병사, 그리고 농민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소비에트만이 그러한 기구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5. 혁명군은 사회혁명을 더욱 압박하는 수단들을 선전에서 뿐만 아니라, 그들이 확보한 지역들의 삶으로 즉각 현실화시키는 것에서 찾아야만 한다. 식량, 공산품,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물품들을 징발하여 그것을 빈궁한 이들에게 넘겨주는 것, 고통 받는 사람들, 특히 투사의 가족들에게 은신처와 주택을 재분배하는 것, 소농들을 위해 토지와 농산물재고를 징발하는 것, 과거 관료기구를 대체하는 노동자통제와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는 것이 그것이다.

6. ‘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그리고 무정부주의자의 가면을 쓰고 사회혁명을 적대하는 착취분자들과 그들의 대변자들을 군대에서 축출해야만 한다.

7. 각 단위부대의 지휘부에는 흠잡을 데 없는 권위를 가진 인민위원들이 배치되어야만 한다.

8. 모든 단위부대에는 노동자 조직이 추천하는 가장 헌신적인 투사들이 단단하게 결합한 세포가 존재해야만 한다. 이 세포의 회원들은 오직 한 가지 특권만을 가지는데, 그것은 전투에서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9. 전망이 밝은 부대들에는 처음에는 불가피하게 많은 외국인들과 신뢰할 수 없는 구성원들이 속해있다. 그들에 대한 시험, 재시험, 정밀검사는 전투의 경험, 인민위원의 의견, 평범한 투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제대로 수행되어야만 한다. 이와 함께 혁명적노동자들의 대열에서 등장한 지휘관들에 대한 강도 높은 훈련이 진행되어야만 한다.

10. 내전의 전략은 군사적 기술의 규칙들과 사회혁명의 과제들을 결합시켜야만 한다. 선전에서뿐만 아니라 군사작전에서도 다양한 적군 군사조직들의 사회적 구성(부르주아 지원병들, 동원된 소농들, 또는 프랑코의 경우에서처럼 식민지 노예들)을 계산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리고 작전을 위한 전선을 선택하는 데서, 그 지역의 사회구조(산업지역인가 농업지역가, 혁명적인가 또는 반혁명인가, 억압받는 민족들의 지역인가 등등)를 엄밀하게 고려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간단히 말해 혁명적 정치는 전략을 좌우한다.

11. 혁명정부와 노동자-소농의 집행위원회는 군대와 고통 받는 인민의 완전한 신뢰를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12. 대외정책은 노동자들, 착취 받는 농민들, 억압받는 민족들의 혁명적 의식을 일깨우는 것을 그 주된 목적으로 삼아야만 한다.

 

스탈린이 패배의 조건을 보증하다

우리가 보기에 승리의 조건들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그것들 전체는 사회주의혁명이라는 이름을 낳았다. 이러한 조건들 가운데 단 한 가지가 스페인에 존재하지 않았다. 근본적인 이유는 혁명정당의 부재 때문이다. 스탈린이 피상적일 지라도 정치국, 인민위원, 세포, 게페우 등과 같은 볼셰비키의 전통을 스페인의 토양에 이식하고자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형식들에서 그 사회적 내용을 제거했다. 그는 볼셰비키 강령을 거부했고, 그러면서 대중의 혁명적 주도권을 위해 필수적인 형식인 소비에트를 거부했다. 그는 자본주의적 소유를 위해 볼셰비키의 기법을 도입했다. 그는 관료적 편협성에 사로잡혀 인민위원들하나만으로 승리가 보장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적소유주의 인민위원들은 패배를 보장할 수 있을 뿐임을 증명했다.

스페인노동자계급은 최고의 군사적 자질을 보여주었다. 스페인노동자계급은 나라전체의 경제생활에서 확고한 중심에 위치하면서, 혁명이 개시된 순간에 정치-문화적으로 1917년 초의 러시아노동자계급보다 낮은 수준이 아니라 높은 수준에 있었다. 승리의 길에서 주된 장애물은 그들 자신의 조직들이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의 지배파벌은 그들의 반혁명적 역할과 일치하여, 고용된 자들, 출세주의자들, 신분이 추락한 분자들과 같은 대부분 모든 형태의 사회적 쓰레기들로 구성되었다. 구제불능의 개량주의자들, 무정부주의 약장수들, 좌충우돌하는 POUM의 중도주의자들과 같은 대표적인 노동자조직들은 투덜거리고, 신음하고, 동요하고, 책략을 꾀하면서 결국 스탈린주의자들을 따랐다. 그들의 공동행동의 결과로, 노동자와 농민의 사회혁명진영은 자본가계급에게, 더 정확하게는 그들의 환영에게 종속되었음이 판명되었다. 그들은 피를 헌납했고 혁명적 본성은 파괴되었다.

대중에게 영웅주의가 부족했거나 각각의 혁명가들에게 용기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혁명가들이 강령과 행동계획 없이 분열되어 있으면서, 대중은 의지할 곳 없이 방치되었다. ‘공화주의군 지휘관들은 군사적 승리를 기록하는 것보다는 사회혁명을 분쇄하는 것에 더욱 집중했다. 병사들은 그들 지휘관들에 대해, 대중은 정부에 대해 신뢰를 잃었다. 패배가 이어졌고, 빠르게 사기저하에 빠졌다. 이 모든 것은 내전초기부터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인민전선이 자본가정부를 구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면서, 결국 군사적 패배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머릿속으로만 볼셰비즘으로 전환하면서 혁명의 무덤을 파는 자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스페인의 경험을 통해 스탈린이 10월 혁명과 러시아 내전을 이해하는 데서 완전히 실패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증명한다는 사실을 추가해야만 한다. 1917~1921년에 그의 굼뜨고 편협한 정신은 일련의 격렬한 사건들에 뒤쳐져 속수무책으로 꾸물거렸다. 1917년의 말과 글에서 표현된 그 자신의 생각들은 이제 테르미도르 교리로 완전한 형태를 갖추었다. 이 점에서 1937년에 스페인에서 스탈린이 취한 입장은 19173월 볼셰비키총회에서 자신의 입장을 계승한 것이다. 그러나 1917년에 그는 혁명적 노동자들을 두려했을 뿐이지만, 1937년에 그는 혁명적 노동자들을 교살했다. 기회주의자는 사형집행인이 되었다.

 

후방에서 내전

그러나 결국, 카발레로-네그린 정부에 대한 승리는 필연적으로 공화군의 후방에서 내전을 수반했을 것이다!”라며 민주주의 속물들은 공포에 빠져 소리 지른다. 유산자들과 착취자들이 노동자들과 농민들에 맞서 가장 비열하고 가장 배신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마치 이와는 다르게 스페인 공화국에서 내전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끊임없는 전쟁은 혁명가들의 구속과 살해, 대중운동의 분쇄, 노동자들의 무장해제, 자본가경찰의 무장, 무기도 지원도 없는 전선에서 싸우는 노동자파견대들의 방치, 그리고 결국 군수산업발전의 인위적 제한으로 나타났다.

군사적 배신을 겨냥하는 전선에 대한 잔인한 타격을 의미하는 이러한 행동들은 자본가들의 계급적 이해를 위해 강요되었다. 그러면서도 스탈린주의자, 사회당원, 무정부주의자를 포함하여 민주주의의 속물들은 전선에 가장 근접해 있는 지역들에서조차 노동자계급에 맞선 자본가계급의 내전을 인민전선의 단결을 보증하기 위한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전쟁으로 여긴다. 다른 한편, 그들 속물들의 눈에 공화주의자들의 반혁명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내전은 반파시스트 세력들의 단결을 혼란에 빠뜨리는 범죄, 트로츠키주의 파시스트들의 전쟁이다. 수 십 명의 노먼 토머스, 메이저 애틀리, 오토 바우어, 지롬스키, 매록스, 그리고 그들 소부르주아 거짓말쟁이들은 뒤랑티와 루이스 피셔처럼 이러한 천박한 지혜를 지구 전체로 퍼뜨렸다. 그동안 인민전선정부는 마드리드에서 발렌시아로, 발렌시아에서 바르셀로나로 이전했다.

사건들이 증명하듯이, 사회주의 혁명만이 파시즘을 분쇄할 수 있다면, 또 한편으로 노동자계급 봉기의 성공은 지배계급들이 커다란 난관에 봉착할 때만 기대할 수 있다. 어쨌든 민주주의의 속물들은 정확하게 이러한 난관을 호소했고, 그것은 노동자계급봉기의 흡인력을 증명하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스스로의 해방의 시점을 민주적 속물들이 말해주기를 기다린다면, 그들은 영원히 노예로 남을 것이다. 이들이 쓰고 있는 모든 가면들과 관계없이 그 뒤에 숨어있는 반동적 속물들을 노동자들이 인식하도록 안내하는 것은 혁명가들의 최우선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결론

공화주의진영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의 독재는 그 본성상 오래갈 수 없는 것이다. 인민전선정책으로부터 비롯된 패배는 스페인노동자계급에게 혁명적 공세를 또 한 번 강요할 것이고, 이번에는 쇠 빗자루로 스탈린파벌들을 성공적으로 쓸어낼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스탈린이 혁명의 무덤을 파는 작업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그는 그 누구로부터도 사의를 얻지 못할 것이다. 스페인자본가계급은 사형집행인으로서 그를 필요로 했지만, 후원자로서 또는 교사로서 필요로 했던 것은 전혀 아니다. 그들이 보기에 한 편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다른 한편에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소련보다 훨씬 더 많은 상품을 보유한 상점들이다. 스탈린 스스로가 원하듯이 스페인이 최후의 파국을 맞이하기 전에 자신의 발자국을 지우는 것은 가능하다. 그는 그렇게 가장 가까운 동맹자들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떠넘기고 싶어 한다. 나중에 이 리트비노프는 외교적 관계를 재건할 것을 프랑코에게 간청할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이미 경험해왔다.

어쨌든, 이른바 공화군이 프랑코장군에 대해 완전한 군사적 승리를 거둔다 할지라도, 그것은 민주주의의 승리를 뜻하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19314월과 19362월에 두 번에 걸쳐 공화주의 자본가들와 그들의 좌익 대변인들을 권력에 앉혔다. 두 시기에 인민전선의 영웅들은 인민의 승리를 가장 반동적이고 가장 위험한 자본가계급의 대표자들에게 넘겨주었다. 인민전선의 장군들이 얻은 세 번째 승리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배후에서 필시 파시스트 자본가들과 맺게 될 협정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한 정부는 아마도 군주제도 가톨릭교회의 공공연한 지배도 아닌 군사독재의 다른 형태일 수밖에 없다.

결국, 전투적인 진영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해관계가 없는영국과 프랑스의 중재에 의한 공화주의자들의 불완전한 승리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일련의 사건들에서 민주주의의 마지막 잔재는 공산주의자 미아사와 파시스트 프랑코의 형제적 포옹 속에서 질식당할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승리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거나 파시즘으로 귀결될 뿐이다.

또한, 비극이 마지막 순간에 광대극으로 향하는 길을 놓을 수 있다는 점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인민전선의 영웅들이 그들의 마지막 수도에서 도망쳐야만 할 때, 그들은 인민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기위해 증기선과 비행기에 타기 전에 어쩌면 일련의 사회주의적개혁을 선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소용없을 것이다. 전 세계 노동자들은 영웅적 혁명을 망친 정당들을 증오하고 경멸하면서 기억할 것이다.

스페인의 비극적 경험은 거대한 사건들이 가라앉기 전에 전 세계 모든 선진노동자들을 향해 발하는 아마도 최후의 심각한 경고다.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라고 맑스는 말했다. 그것은 절반만 또는 반의반만 혁명적인 정당들의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인다. 누구라도 기관차바퀴 아래로 떨어져 뒤처질 수 있고, 더 큰 문제는 그 결과로 기관차 또한 종종 파괴된다는 점이다.

혁명의 문제는 결말까지, 즉 최종적이고 구체적인 결론까지 생각해내야만 한다. 혁명의 기본적인 법칙에 따라, 스스로를 인민전선또는 갖가지 전선으로 부르는 소수 소부르주아그룹들의 편견과 두려움이 아니라, 진용을 갖춘 계급의 운동에 부응하는 정책을 채택해야 한다. 혁명시기에 가장 편한 길은 가장 위험한 길이다. 자본가계급으로부터의 고립에 대한 두려움은 대중으로부터의 고립을 가져온다. 노동귀족의 보수적 편견에 순응하는 것은 노동자들과 혁명에 대한 배신이다. 과도한 조심성은 가장 해로운 부주의이다. 이것이 스페인의 가장 정직한 정치조직인 중도주의 POUM의 파멸에서 얻을 수 있는 주된 교훈이다. (4인터내셔널) 런던사무국의 정당들과 그룹들은 역사의 최후경고로부터 필요한 결론을 끌어내고 싶어 하지 않거나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있음을 말한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이제 새로운 세대의 혁명가들은 패배의 교훈에서부터 배우고 있다. 이들 세대는 행동을 통해 제2인터내셔널의 불명예스런 평판을 확인했다. 그들은 제3인터내셔널의 몰락이 가져온 최후를 보았다. 그들은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해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어떻게 판단해야하는지를 배웠다. 스페인혁명은 셀 수 없이 많은 투사들의 피를 대가로 지불한,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학교다! 혁명중핵들은 이제 바로 제4인터내셔널의 깃발 아래로 모이고 있다. 패배의 울부짖음 한 복판에서 태어난 제4인터내셔널은 고통 받는 이들을 승리로 이끌 것이다.

 

옮긴이: 정원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