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레온 트로츠키 : 식민지 인민의 혁명 교사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2월호

레온 트로츠키 : 식민지 인민의 혁명 교사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4:55

Li Fu-jen (프랭크 글라스, 1901-1988)

세실 프랭크 글라스는 영국에서 태어나, 1908년 말 또는 1909년 초에 그의 가족이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그곳에서 자랐다그는 케이프타운에서 흑인 노동자들을 조직한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회원이 되었고남아프리카공산당이 만들어지는 전후에 그곳에 가입했다그는 1925년에 기존의 정치적 입장을 버렸고, 1928년에 좌익반대파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그는 1927년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중국의 혁명적 사건들에 열광했고, 1930년에 중국 상해로 가서 1937년 4월부터 1938년 10월까지의 미국방문을 제외한 10여 년간 그곳에서 코민테른을 비판하면서 프리랜서 기고가로 활동했다그때에 그는 Li Fu-jen 이라는 이름으로 뉴 인터내셔널에 기고한 많은 기사들 때문에트로츠키주의운동 내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그는 중국에서 공산주의동맹 설립을 도왔고국제적인 트로츠키주의 운동과의 중요한 접촉선이었다그는 1937년 8월 11일에 코요아칸에 있는 트로츠키를 만나서 중국문제 전반과 왕범서의 정세분석에 대해 토론했다.

그는 중국으로 돌아왔지만 증대된 난관들특히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1941년 12월의 진주만공격 직전에 마지막 배로 상해를 떠나야했다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사회주의노동자당에 가입했고랄프 그라함과 존 리앙이라는 필명으로 중국에 대한 광범위한 기사를 신문에 기고했다. 1988년에 LA에서 죽었다.


레온 트로츠키 : 식민지 인민의 혁명 교사1


Li Fu-jen

 

식민지혁명을 위한 맑스주의적 강령과 전략의 발전은 전적으로 자본주의사회 전복과 사회주의사회 건설로 향하고 있는 현시대, 즉 전쟁과 혁명의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최초로 이 강령과 전략의 윤곽을 그려낸 이는 레닌이었다. 그러나 좀 더 상세한 설명과 최초의 구체적 적용은 레닌의 위대한 협력자인 레온 트로츠키의 임무였다. 여전히 많은 부분이 출간을 기다리고 있는 식민지혁명에 관한 트로츠키의 저술들은 여러 권에 달하는 분량이다. 그것들은 세계사회주의혁명을 위한 강령과 전략에서 없어서는 안 될 완전한 일부이며, 맑스주의 이론과 혁명적사회주의의 실천을 발전시키는데서 크게 기여한 트로츠키의 위대성에 부합하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공산당선언아프리카판 서문에서 이 국제사회주의운동의 기본 문서가 식민지-반식민지 국가들에서 민족독립을 위한 투쟁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가 지적했듯이 무엇보다도 그것은 이들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립자들이 유럽에서 사회주의혁명이 몇 년 안에 일어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유럽에서 자본주의의 붕괴는 자동적으로억압받는 인민들의 해방을 가져올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이러한 낙관적 시간표와는 다르게 흘러갔다. 유럽 노동자계급은 자신들의 계급적 요새에서 자본주의를 파괴하는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는 후진적인 식민지국가들로 전례 없이 깊숙하게 침투해 들어갔고, 동시에 강력한 민족해방운동들을 창출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새롭고 거대한 혁명적 요소가 나타났다. 강력한 민족해방운동의 등장은 식민지혁명의 강령과 전략을 제시해야 할 객관적 필요성을 낳았다.

 

자본주의가 계속해서 상승하는 시기에 식민지를 장악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맑스가 어쨌든 주되게는 세계시장과 그것을 기초로 한 생산을 창출하는 것(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 1858108)”으로 묘사한 자본가계급의 특별한 역사적 임무로서, 자본주의를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경제가 쇠퇴하고 부패하는 시기에 식민지들을 보유하여, 그곳의 자연적 부를 약탈하고 식민지 민중들을 착취하는 것은 바로 세계적 규모에서 자본주의의 생존을 위한 사활적 조건이 되었다.
 

 

혁명적 국제주의

 

이러한 분명한 진실은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운동과 식민지-반식민지 국가들에서의 민족해방운동 사이에 상호 내적관계의 기초가 되었다. 이들 후자 국가들은 전 세계 인민의 절반이상을 포괄하고 있다. 그곳 인민들의 지속적인 노예상태가 제국주의 자본가들에게 중요한 만큼이나 그들의 해방은 노동자계급에게 중요하다. 이점은 트로츠키가 식민지혁명전략을 만들어내는 작업의 출발점이었다. 그것은 국제주의자들이 언제나 변함없이 움켜쥐어야할 중심축이다. “공산주의자들은 기존 정치-사회질서에 맞선 모든 혁명운동을 지지한다.”1848년의 선언은 공표했다.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제국주의 억압자들에 맞선 유색인들의 운동은 기존질서에 맞서는 가장 중요하고도 강력한 운동들 가운데 하나이기에, 백인 노동자계급은 그 운동에 대해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인 지지를 보내야만 한다.”(공산당선언 90주년 - 새로운 인터내셔널, 1938) 

 

식민지-반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은 1차 제국주의세계대전 이후에 등장했고, 전쟁이 창출한 조건이 낳은 즉각적인 결과였다.

 

 

노동자계급의 성장

 

19세기 말에 제국주의의 착취는 거의 배타적이고 노골적인 강탈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식민지의 경제발전은 천연자원의 채취에 필요한 지원과 서구 자본주의나라들에서 생산된 완성상품의 시장 수준으로 제한되었다. 예를 들어, 인도에 최초로 건너간 자본은 영국 상업자본이었다. 그곳에서 이루어진 산업발전은 상업적 착취라는 주요 목표에 수반된 것이었다. 특히 많은 완성품이 인도와 주변 국가들에서 팔리게 된 이후, 영국 자본가들은 인도의 면화를 현지의 값싼 인도인 노동자를 활용하여 가공하는 것이 그것을 랭카셔까지 배로 이동하여 방적과 직조를 수행하는 것보다 싸게 먹힌다는 것을 발견한 후에야 봄베이에 방적공장을 세웠다. 영국 자본가들은 그와 같은 정책의 연속선상에서 인도의 수확물뿐만 아니라 중국의 면화 수확물을 독점하기 위해 상해에 방적공장들을 세웠다.

이러한 우연한 산업발전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결과는 제국주의 착취자들에 맞서는 산업노동자계급이 이들 광대한 후진적인 지역들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외국 상업자본이 단지 초기단계의 현지 민족자본가들을 제국주의의 대행인(매판자본)으로 육성한 데 반해, 뒤이은 외국 산업자본은 제국주의자들과의 관계에서 독립적이고 공공연한 이해관계를 가진 산업노동자계급을 창출했고, 그들은 제국주의자들에 맞서 비타협적인 투쟁을 시작한다!

1차 세계대전동안, 제국주의자들이 유럽에서의 군사적 투쟁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로 인해 경제적 억압이 완화된 거대한 식민지역들에서는 경제발전이 가속화되었다. 현지 매판자본가들과 현지 대지주들은 산업의 영역으로 뛰어들어 제국주의 기업들과 경쟁하는 현지기업들을 세웠다. 그렇게 해서 민족자본가들이 꽃을 피우게 되었다. 산업노동자계급도 함께 성장했다. 그렇게 해서 전쟁 이후 십년간 식민지 나라들에서의 거대한 혁명적 격변에서, 무엇보다도 무산된 1925-27년의 중국혁명에서 계급적 각인이 찍힐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된 것이다.

계급관계는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이 혁명운동의 성격과 전망,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 전략을 결정하는데서 결정적인 것이다. 계급적 기준은 자본주의 중심국들에서 만큼이나 식민지 나라들에서도 필수적이며, 맑스와 레닌의 제자인 트로츠키는 스탈린과 다른 모든 수정주의자들, 사회주의의 배신자들에 맞서서 이 기준을 고수했다. 그것은 식민지혁명 문제에 관한 그의 수많은 연설들과 저술들 속에 이어지는 붉은 실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연설들과 저술들 대부분은 중국혁명에 관한 것이었다. 중국의 계급관계는 식민지 일반의 계급관계를 보여주는 프리즘이다. 그러므로 중국에 관한 트로츠키의 중심적 사고는 전체 식민지 문제들에 관한 혁명적 맑스주의의 열쇠가 된다.
 

 

중국혁명의 성격

 

즉각적인 목표로서 중국의 부르주아혁명은 불완전한 혁명이다.”라고 트로츠키는 1938년에 썼다. 하지만 이 문장은 과거 부르주아혁명의 단순한 반향을 표현한 것으로서, 실제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역사적 유사성이 우리의 정신을 협소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구체적 사회분석에 비추어 그것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국에서는 어떤 계급들이 싸우고 있는가? 이들 계급들의 상호관계는 어떠한가? 이들 관계는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가? 중국혁명의 객관적 과제, 즉 역사의 발전이 지시하는 과제는 무엇인가? 이러한 과제의 해결과업은 어떤 계급의 어깨위에 있는가? 

 

인류의 훨씬 많은 부분을 포괄하는 식민지-반식민지 국가들(즉 후진국들)은 역사의 사다리에서 유목문화, 심지어 식인문화에서부터 가장 현대적인 산업문화에 이르기까지 그 후진성의 정도차이가 엄청나다. 어느 정도 극단적인 것들의 결합이 모든 후진국들을 특징짓는다. 이러한 표현이 가능하다면, 어쨌든 후진식민국의 계급제도는 각국의 생활이 가지고 있는 야만적 요소들과 문화적 요소들의 구체적 비중에 의해 결정된다. 적도아프리카는 알제리에 훨씬 뒤쳐져 있으며, 파라과이는 멕시코에, 에티오피아는 인도나 중국에 뒤쳐져 있다. 일반적으로 이들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종속되어 있으며, 정치적으로 일부(인도, 적도 아프리카)는 공공연한 식민지노예국의 성격을, 다른 일부(중국, 라틴아메리카)는 허구적인 독립국가로서, 감추어진 노예국의 형태를 띠고 있다.” 

 

가장 유기적이고 잔인한 후진성의 표현은 농업관계에서 발견된다. 이들 국가들 가운데 어떤 국가도 어떤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혁명도 완수하지 못했다. 농업개혁은 중단되어 반농노관계로 빠져들었고, 그 관계는 궁핍과 억압의 토양에서 피할 수 없이 재생산된다. 도로의 부재, 지역들의 고립, ‘중세적배타성, 민족의식의 부재와 함께 농민들 사이에서 야만주의가 병행했다. 과거의 잔재이자 현대적으로 장식된 봉건주의적 사회관계를 일소하는 것이 이들 나라들 모두의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민족자본가 계급

   

그러므로 한손으로는 자본주의적 관계를 이식하면서도 다른 한손으로는 다양한 형태의 노예제와 농노제를 지지하고 재생산하는 제국주의 국가에 대한 의존을 유지하면서, 농업혁명의 성공을 생각할 수는 없다. 결국 사회관계의 민주화와 민족국가의 건설을 위한 투쟁은 필연적으로 외국의 지배에 맞선 공공연한 반란으로 나아간다.” 

 

역사적인 후진성은 단순히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선진국으로의 발전이 한 두세기 혹은 3세기동안 지연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후진국들을 종속시키고, 특수한 계급관계를 만들어 내면서, 최신자본주의가 획득한 기술과 구조를 봉건시대 혹은 노예시대의 야만주의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완전히 새롭게 결합된 사회구성을 낳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 후진 국가들은 민족자본가들의 지도하에서는 부르주아혁명의 과업들 가운데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없으며, 그것은 외국의 후원과 함께 등장한 이들 민족자본가들이 인민에게 이질적이거나 적대적인 계급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장의 모든 국면에서 본질적으로 자신들이 대행하고 있는 외국 금융자본과 더욱더 긴밀해질 수밖에 없다. 수공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식민지의 소부르주아들은 외국자본과의 불공정경쟁으로 인한 첫 번째 희생자이며, 경제적으로 무의미한 존재로 추락하여 더 낮은 계급의 빈민으로 전락한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역할을 상상할 수조차 없게 된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가장 원자화되어 있으며, 후진적이고 억압받는 계급인 농민들은 지방봉기와 게릴라전투를 수행할 수 있지만, 이 투쟁이 전국적 수준으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보다 선진적이고 집중된 계급의 지도를 필요로 한다. 그러한 지도의 임무는 필연적으로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부터 외국 자본가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민족자본가들과도 맞서게 되는 식민지 노동자계급에게 부과된다.” (중국혁명의 비극, 레온트로츠키. 1938) 

 

역사적으로 후진적인 국가들에서의 계급관계의 특수성, 그로인한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의 독특한 성격에 관한 이러한 관점은 트로츠키가 지적했던 것처럼 이론적인 분석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러시아의 1905년과 1917년의 2, 10월 혁명에서 거대한 역사적 시험대를 거쳤다. 이 세 차례의 혁명은 민주주의혁명의 과제를 해결하는데서 후진국의 민족자본가계급의 무능력을 의문의 여지없이 증명했다. 이 때문에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레닌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청산주의 진영의 쓸모없는 정치인들은 우리의 혁명을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을 지지해야만 하는 부르주아혁명이라고 말한다. 우리 맑스주의자들도 우리의 혁명을 부르주아혁명이라고 말한다. 노동자들은 인민이 부르주아정치인들의 속임수에 대해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의 약속에 신뢰를 보내는 대신에, 스스로의 힘, 스스로의 조직, 스스로의 단결, 스스로의 독립적 무기들에 의지하도록 이끌어야만 한다.”  

 

 

중국의 재앙

 

차르 러시아의 경우, 혁명에서의 노동자계급의 주도권에 관한 볼셰비키의 이론은 승리한 10월 봉기에서 명백한 정당성이 입증되었다. 볼셰비키 정당의 지도하에 하층 농민들과 동맹을 맺은 러시아 노동자들은 차르와 자본주의 모두를 전복했다. 민주주의혁명의 과제들은 사회주의과제들로 전진해간 노동자계급독재를 통해서 해결되었다.

반대로 중국의 경우, 바로 볼셰비키 정책의 핵심인 노동자계급의 주도권 이론은 소름끼치는 혁명의 파국에서 부정적으로 증명되었다. 그 당시 코민테른의 이론가들이었던 스탈린과 부하린은 상황과 동떨어진 활력 없는 계획에 따라, 역사적 과정을 독립적이고 분리된 단계들로 쪼개버렸다. 그 계획은 민주주의혁명만이 필요한 것이고, 결론적으로 혁명의 주도권은 자본가들에게 있으며 그럴 수밖에 없다고 선포하는 것이었다. 레닌이 노동자계급독재를 위해서 1917년에 버렸던 노동자-농민의 민주적 독재라는 공식이 몇 년 후에, 이후 소위 인민전선의 원형으로 일컬어지는, 악명 높은 ‘4계급연합’(노동자, 농민, 소부르주아, 민족자본가)으로 부활하여 확대되었다.

실제로는 당 최상층의 연합일 뿐인 이 연합 내에서, 농민들의 대표권은 민족자본가들의 정당인 국민당에게 주어졌다. 노동자계급의 정당인 공산당은 자신의 정치적 독립성을 포기하고 국민당에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노동자들은 민족자본가들의 정치적 지배에 종속되었다. 그리고 노동자계급 정치와의 범죄적 단절, 러시아 혁명역사로부터 배운 명확한 교훈에 대한 경시,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는 레닌의 가르침에 대한 거부를 마치 볼셰비즘인 것처럼 젊고 경험이 없는 중국공산당을 속였다.

스탈린과 부하린은 이러한 배신적인 계급연합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치 제국주의의 억압이 국가의 모든 진보적인 세력들을 제국주의에 맞서 동맹을 맺도록 강제하고 있는 것처럼 제시했다. 그렇게 해서 민족자본가계급은 민족해방을 위해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진보적 역할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이것은 트로츠키가 지적했듯이 차르가 제국주의로 대체되었을 뿐, 러시아 멘셰비키가 주장했던 것과 똑같은 것이다.
 

 

자본가계급의 반혁명

 

이미 보았던 것처럼 민족자본가들은 식민지국가들에서 무엇보다도 제국주의의 지배를 중단시키는 민주주의혁명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진보적 싸움을 행하는데서 무능력하다. 이러한 무능력은 두 가지 기초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자본가들이 제국주의와는 물론이고 농촌의 반동적 요소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들이 투쟁의 최고조에서 대중을 동원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자본가들의 소유를 분쇄하기 위한 싸움으로 나갈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1925~27년에 중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본가들은 대중이 제국주의에 맞서서 봉기했을 때, 운동의 주도권을 잡아 제국주의로부터 양보를 이끌어내기 위해 이용하고자 했다. 실제로 그것은 자본가들의 지도하에서 민주주의 혁명이 갖는 특성이다.

그럼에도 고집스런 스탈린과 부하린은 중국 민족자본가들의 지도자 장개석이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을 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크렘린의 피상적인 생각으로는 정말 그렇게 보였다. 실제로 장개석은 제국주의의 전면적인 지배로부터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영국 제국주의 권력의 대변자들이었던 일부 군국주의자들에 맞서는 제한적인 투쟁에 개입했다. 이것은 전체 제국주의의 지배체제를 끝장내기 위한 원칙적인 전면전과는 다른 것이었다. 현재 장개석은 영-미 제국주의에 고용되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면서, 결국 중국을 위해 새로운 노예제도를 준비하고 있다. 트로츠키는 혁명전위의 의식 속에 깊이 새겨 넣고자 했던 표현들에서 민족자본가들이 반제국주의적 역할은 수행한다는 가정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른바 민족자본가들은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를 유지할 희망을 갖고 있는 한, 어떠한 종류의 민족적 추락도 용인한다. 그러나 외국 자본이 나라전체의 부를 홀로 온전히 지배하려고 하는 순간에 식민지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민족적책무를 상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대중의 압력 하에서 그들은 전쟁에 빠져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최소한 협상이 가능한 보다 관대한 권력에 고용되기 위한 희망으로 제국주의권력들 가운데 하나와 맞서는 전쟁이 될 것이다. 장개석은 영국 혹은 미국 후원자들이 지시하는 한계 내에서만 일본 침입자들에 맞서 투쟁한다. 오직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뿐인 계급만이 제국주의에 맞서 민족의 해방을 위한 전쟁을 끝까지 수행할 수 있다.”(중국혁명의 비극, 레온트로츠키)  

 

 

중국의 교훈

 

스탈린과 부하린의 말대로라면 4계급 연합정책이 중국의 민주주의혁명을 완수하도록 이끌면서,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독재로 가는 길을 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역사 속에서 벌어진 일은 무엇인가? 장개석은 민주주의혁명을 이끄는 대신에 반혁명의 개선장군이 되었고, 제국주의자들 모두는 자신의 흔들리던 지위를 회복했다. 토지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미래의 혁명적 정책을 위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트로츠키가 새로운 혁명중핵들에게 가르친 교훈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장개석 부르주아군사독재와 노동자계급독재 사이에는 중간적 형태의 민주적권력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거센 파도로 다가오는 식민지 혁명들에서 노동자계급 전위정당을 통해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노동자계급독재를 수립하도록 준비시키는 대신, 존재할 수 없는 정권수립을 추구하여 결국 또 다른 혁명적 비극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중국혁명에 대한 스탈린주의자들의 그릇되고 위험한 배신적 정책, 특히 어리석은 멘셰비키의 단계론에 대한 비판인 것처럼, 1917년의 유명한 4월 테제에서 레닌은 볼셰비키 당을 재무장시키고 혁명승리를 준비시키기 위해, 노동자계급독재를 위한 투쟁이 농업혁명을 끝까지 수행하고 억압받는 인민에게 자유를 가져다 줄 유일한 수단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독재는 바로 그 본성 때문에 그 임무를 부르주아소유관계내의 부르주아민주주의적 임무들로 제한할 수 없었다. 노동자계급의 지배는 시대적 소명에 따라 자동적으로 부르주아 소유관계를 분쇄하고 계급지배를 타파하는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간다.
 

 

연속혁명론

 

트로츠키가 이해했듯이, “(중단되지 않는) 연속혁명의 핵심적 구상은 그것이었다. 정확히 그것이 10월에 노동자계급의 승리를 보증했다.” 중국에서 그것은 무시되었고, 더 정확하게는 명백하게 거부되어 장개석과 부르주아반혁명의 승리를 보증했다.

연속혁명이론은 맑스로부터 유래했다. 레닌은 그것을 혁명승리를 위한 강력한 지렛대로 만들었다. 맑스와 레닌의 진정한 계승자인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 사기꾼들과 배신자들에 맞선 거의 20년에 걸친 투쟁의 과정에서 그 이론을 다양한 측면에서 방어하고 발전시켰으며, 그렇게 해서 혁명전위들이 미래의 거대한 투쟁을 준비하도록 재무장시켰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에서건 후진 식민지국가들에서건, 연속혁명에 관한 트로츠키의 저술들은 노동자혁명전략의 이론적인 추동력이고, 노동자계급을 투쟁속에서 사회주의로 이끌기를 열망하는 모든 이들이 의무적으로 연구해야하는 것이다. 연속혁명이론은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소련의 공식적인 국가교리가 된 반혁명적인 일국사회주의이론에 대한 맑스주의적 대립이다. 그것은 또한 중국혁명을 재앙으로 이끈 스탈린의 멘셰비키정책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맑스가 도입한 구상의 관점에서, 연속혁명은 어떤 형태의 계급지배와도 타협하지 않고, 민주적 단계에서 멈추지 않으며, 사회주의적 조치들과 반동에 맞선 전쟁으로 나아가, 모든 다음 단계가 이전 단계에 발이 묶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계급사회의 완전한 폐지 속에서만 끝날 수 있는 혁명을 의미한다.” (연속혁명론에 대한 소개, 레온트로츠키) 

 

연속혁명론에 대한 트로츠키의 설명

 

이것이 이른바 후진국인 식민지-반식민지 국가들에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트로츠키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특히, 식민지-반식민지 국가들처럼 발전이 지연된 국가들에서 연속혁명이론은 민주주의와 민족해방이라는 과제의 완전하고 진정한 해결은 예속된 민족, 무엇보다도 농민대중의 지도세력으로서 노동자계급독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농업문제뿐만 아니라, 민족문제 또한 후진국 인민의 압도적 다수인 농민들에게 민주주의 혁명에서 중요한 지위를 부여한다.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 없이 민주주의 혁명의 과제는 해결될 수 없으며, 중요한 위치를 점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이들 두 계급의 동맹은 민족적 자유주의 자본가들의 영향력에 맞선 비타협적인 투쟁을 통하지 않고서는 다른 방법으로 현실화될 수 없다.” 

 

민주주의혁명의 지도세력으로서 권력을 수립한 노동자계급독재는 불가피하고 매우 빠르게 부르주아소유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와 관련된 과제들에 직면하게 된다. 민주주의혁명은 즉각적으로 사회주의로 나아가고, 결국 연속혁명이 된다.”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은 혁명의 종결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사회주의사회의 건설은 국가적이고 세계적인 규모에서의 계급투쟁을 기초로 해서만 가능하다. 세계적 차원에서 자본주의적 관계들이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조건에서 투쟁은 필연적으로 내적으로는 내전이고, 외적으로는 혁명전쟁인 폭발로 이끌리게 될 것이다. 단지 어제 민주주의혁명이 성취된 후진국에서건, 아니면 이미 오랜 기간 동안 민주주의와 의회주의를 경험해온 오래된 자본주의 국가에서건 관계없이 사회주의혁명의 연속적 성격이 그 속에 내재한다. 

 

일국적 한계 내에서 사회주의혁명의 성공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부르주아사회가 처하게 되는 위기의 근본 원인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만들어낸 생산력이 국민국가의 틀과 충돌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으로부터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전쟁이, 다른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유럽연방의 환상이 탄생한다. 사회주의 혁명은 국가적 범위에서 등장하여 국경을 넘어 마침내 세계적 범위로 발전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사회주의 혁명은 보다 새롭고 폭넓은 의미에서 연속혁명이 되며, 그것은 전 지구 차원에서 새로운 사회가 마침내 승리할 때에만 완수된다.” (연속혁명, 레온 트로츠키) 

 

실제정치의 영역에서 이러한 독특한 관점과 혁명의 계급적 역동성은 식민지의 혁명전위정당에게 제국주의와 그 현지 동맹자인 민족자본가들에 맞선 비타협적인 투쟁 정책을 부과한다. 장개석이 그랬던 것처럼, 민족자본가들이 그 자신의 계급적 동기 때문에 대중 앞에서 좌익적 외피를 입었을 때, 이 당이 그들과 계급적 화해와 협력 정책으로 나아가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당은 다른 모든 당들과 완전히 독립적인 것이어야만 하며, 하나의 연합 혹은 동맹에 참여하지 말아야만 한다. 이 당은 자신의 계급적 깃발을 다른 계급, 다른 정당의 깃발과 섞지 말아야만 하며, 더구나 다른 깃발들 앞에서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 이 당은 노동자계급이 농민대중들과 함께 동맹을 맺고 권력장악을 향하도록 이끌어야 할 유일한 목표를 확고하게 지킨다.

중국에서의 혁명적 위기동안에 트로츠키는 이러한 혁명적 사상을 코민테른에 불어넣어, 코민테른을 통해 모스크바가 붙잡고 있는 치명적인 기회주의적 노선에서 중국공산당을 벗어나게 하려고 분투했다. 헛되게도 10월 혁명의 레닌주의에 맞선 반동이 강화되었다. 중국혁명은 재앙적인 패배로 빠져들었다.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가 된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은 러시아당에서 쫓겨났다. 트로츠키는 추방되었다.

이것은 부르주아 논평가들이 생각하듯이 단지 트로츠키 개인의 패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볼셰비즘의 패배, 맑스-레닌주의의 패배였다. 이 패배는 소련 안팎 모두에서 반동의 성장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것이 일어난 일에 대한 트로츠키의 평가이다. 하지만 트로츠키는 단지 혁명적 맑스주의 이론가가 아니었다. 그는 또한 활동적인 혁명가였다. 중국혁명의 패배와 소련과 코멘테른에서 스탈린주의의 승리로부터 미래의 재앙을 피하고 미래 혁명의 승리를 위한 확실한 길을 제시하기 위해, 그가 요구받은 것은 맑스주의적 분석이었다. 혁명전위를 결집하여 무장시키기 위한 기초를 닦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어떤 일이 왜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선진부위를 재무장시키기

 

1925-27년의 거대하고 비극적인 사건들 속에서 중국공산당을 올바른 혁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트로츠키의 노력은 다음과 같은 작업을 예비하는 커다란 가치를 가졌다. 수천 명의 젊은 중국공산당원들이 극동공산주의대학에서 훈련받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그들 가운데 다수가 중국혁명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트로츠키의 지칠 줄 모르는 투쟁에 영향을 받고 좌익반대파의 대열에 합류했다. 나머지 대부분도 트로츠키의 볼셰비키강령을 묵묵히 고수했다. 스탈린이 소련으로부터 트로츠키의 추방을 준비하고 있던 시기에, 1927117일의 10월 혁명 10주년 기념식에서 젊은 중국 혁명가들은 다른 외국 공산당 대표자들과 함께 모스크바 붉은광장을 행진했다. 그들이 준비한 플랭카드에는 스탈린 지배파벌이 도용했다고 여긴 구호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스탈린 앞을 통과하는 순간에 플랭카드를 뒤집어 트로츠키여 영원하라!”라는 구호를 펼쳐 읽었다. 이것은 단순히 레닌의 전우에게 개인적인 경의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상에 연대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플랭카드를 들었던 이들은 구속되었고, 나중에 스탈린 반혁명정권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 시간에 모스크바에 있던 중국 혁명가들 가운데 소수만이, 아주 극소수만이 피의 정화를 탈출하여 이후에 제4인터내셔널 중국지부가 되는 좌익반대파 핵심을 구성하기 위해 중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트로츠키는 첫 번째 추방지였던 알마아타에서 중국에서의 혁명적 재앙을 분석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모스크바의 스탈린주의 파벌은 중국공산당원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면서, 실제사건에 대한 어떤 진지한 토론도 막고자 했다. 그렇지만 트로츠키는 패배의 주요 원인을 드러내고 미래의 승리를 준비하기 위하여 비극적인 이야기들 전체를 밝은 광장으로 이끌어내, 그것으로부터 필요한 모든 교훈을 끄집어낼 것을 요구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드러나지 않아 비판되지 못한 잘못은 항상 또 다른 잘못을 낳거나, 그것을 위한 토대를 놓는다.” 그는 이러한 절대로 필요한 작업 속에서 비록 얼마동안 지연되었을 지라도 중국에서의 새로운 혁명적 상황의 도래와, 전체 식민지 혁명운동의 미래에 대해 준비했다. 그는 알마아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두 번째 중국혁명의 학교는 전체 코민테른을 위한 학교이지만, 주로 동양 국가들을 위한 것이다. 깊이 생각해보면, 중국혁명에서 멘셰비키 노선을 지키기 위해 제시된 모든 주장들이 인도에서는 삼중으로 제시될 것이 분명하다. 전형적인 식민지인 인도에 부과된 제국주의의 멍에는 중국에서와 비교하여 너무도 직접적이고 분명한 형태이다. 인도에서 봉건잔재와 노예관계는 너무도 뿌리 깊고 거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정확하게는 이러한 근거에서, 중국에 도입되어 혁명을 위태롭게 만든 수단들은 인도에서 더욱 심각한 결과를 낳을 것이 틀림없다. 힌두 봉건제도와 영국-힌두 관료체제, 영국 군국주의의 전복은 정확히 그 강력한 국제적인 관계를 일소하기 위해서는, 도중에 멈추거나 일부지도자들의 기회주의적 수단들과 타협할 수 없는 인민대중의 거대하고 굴복하지 않는 운동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레닌이후의 제3인터내셔널, 트로츠키) 

 

트로츠키는 추방당한 후 처음에는 알마아타에서, 이후에는 터키, 프랑스, 노르웨이, 멕시코에서 볼셰비키-레닌주의 강령을 기초로 하여, 식민지 혁명 전위들을 처음에는 좌익반대파 중핵으로, 이후에는 4인터내셔널 지부로 재편하는데 계속해서 열정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세 개의 서로 다른 중국 좌익반대파그룹들이 1931년에 통일하여 중국공산주의동맹을 구성하고, 이제 제4인터내셔널 중국지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멀리서 그들 사이의 토론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트로츠키가 쏟아 부은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후 인도, 실론, 인도차이나, 라틴아메리카의 반식민지 국가들에서 성장한 제4인터내셔널 지부들은 식민지혁명에 대한 트로츠키의 가르침, 무엇보다도 실패한 중국혁명에서 이끌어낸 교훈을 기반으로 삼았다.

 

 

옮긴이: 정원섭

  1. 이 글의 출처는 Li Fu-jen, Revolutionary Teacher Of the Colonial Peoples, Fourth International, August 1944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