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추방당한 트로츠키: 제4인터내셔널의 창립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2월호

추방당한 트로츠키: 제4인터내셔널의 창립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4:56

추방당한 트로츠키: 4인터내셔널의 창립1

 

J. Arch Getty2

 

볼셰비키 당과 레온 트로츠키의 공식적인 정치적 단절은 1933년에 트로츠키가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에 충성을 그만두고 제4인터내셔널을 형성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루어졌다. 그에게 단절은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1927년에 그를 당에서 제명하고 1929년에는 소련에서 추방했지만, 트로츠키로서는 당이나 코민테른과 공식적으로 갈라서지 않았다. 추방 이후 1933년의 단절에 이르기까지, 트로츠키를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은 트로츠키주의 노선으로 코민테른이 공인한 당들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기 위하여 그 당들의 내부와 외부에서 활동하려고 했으며, 트로츠키는 코민테른의 틀 밖에서 새로운 볼셰비키-레닌주의 당들을 조직하거나 인가하는 것을 마음 내켜하지 않았다. 그는 일관되게 제3인터내셔널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으며 내외부의 계급적 적들에 맞서 소비에트 국가와 볼셰비키의 권력 독점을 방어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자신을 추방한 당에 트로츠키가 4년 동안 충성한 것은 부분적으로 소비에트 정부가 직면한 위험에 대한 그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트로츠키는 이 기간의 스탈린주의 체제를 우익이나 테르미도르반혁명이 아니라 좌와 우 사이를 갈지자로 왔다갔다하는 중도주의 정파로 정의했다. 그러나 그는 스탈린주의 지도부의 갈지자 행보와 무능력으로 인해, 진짜 정치적 우익(쿨락, 네프맨, 백군, 또는 군사 독재자)이 무질서를 이용하여 진짜 반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위기가 초래될 수 있다고 믿고 이를 두려워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국가를 넘어뜨릴 수 있는 우익의 공격으로부터 스탈린주의 중도주의자들조차도 지원하고 방어할 의무가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스탈린을 타도하라는 슬로건을 채택해야 한다거나 (위기의 시기에 볼셰비키를 분열시킬 수 있는) 새로운 정당을 조직해야 한다는 제안을 거부했다.

정치 관계자와 이론가들을 연구할 때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기는 언제나 어렵다. 정치가가 특정 정책이나 입장을 채택하는 것은 개인의 주관적인 동기인가 아니면 객관적 분석의 결과인가? 대부분의 볼셰비키 (그리고 특히 스탈린주의) 정치가들을 다룰 때는 정치적 또는 이론적 견해의 결정 요소로 개인의 야망을 기계적으로 강조해왔다. 그러나 트로츠키에 대한 성인전이나 학문적 저작들 가운데는 그의 지적 고결함을 의심하거나 그의 이론적 정치적 입장 뒤에 있는 개인의 동기에 대해서 비판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 거의 없다. 아이작 도이처의 선구적인 전기 이후로, 트로츠키는 추방당한 예언자”, 개인의 삶과 정치 인생이 자신의 객관적인 이론적 견해에 의해 (종종 재앙적으로) 형성된그 반대이기보다는(삶이 이론을 형성하는 것이기보다는: 옮긴이)비극적인 영웅이었다.

특히 제4인터내셔널을 결성하기로 한 트로츠키의 1933년 결정은 코민테른과 소련의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경제·사회·정치적 분석의 작용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개인적인 저작과 활동은 소련과 볼셰비키 당에 대한 그의 이론적 평가의 변화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의 전술적 입장과 당파적 바람의 변천에서 비롯했음을(그 반대가 아니라) 시사한다. 트로츠키는 정치 평론가였을 뿐 아니라 정치가였으며, 그래서 그의 개인적인 정치 활동이 망명 생활을 하면서도 계속되었다거나 대부분의 정치가들처럼 개인적인 정치 활동이 그의 공적인 이론적 견해에 영향을 미쳤음을 발견하는 일은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분리된 정치 조직의 형성과 코민테른에 대한 충성 폐기는 트로츠키와 그 추종자들을 분리된 반 볼셰비키 정당의 당원들로 만들고 그와 지지자들을 완전히 볼셰비키 정치의 범위 밖에 두게 될 것이었다. 그러한 입장은 트로츠키가 모스크바 당 지도부로 복귀할 기회를 앗아갈 것이었다. 지나고 나서 볼 때, 트로츠키가 그런 바람을 품었다는 것은 순진하고 공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1929~32년의 동적인 정치·사회적 위기의 불확실한 요인들은 많은 것을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정말로 트로츠키는 모스크바 지도부로 복귀할 가능성을 믿었고 또 바랐으며 그것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모스크바로 다시 불려가길 바란 그의 마지막 소망의 붕괴는 제4인터내셔널을 결성하기로 한 그의 결정과 동시에 일어났다.

1930년대의 트로츠키의 대중적인 저작들을 이용하여 대부분의 작가들은 독일 공산당(KPD)과 히틀러에 의한 19332~3월 노동자 운동의 분쇄가 트로츠키로 하여금 우선 독일 공산당에 대한 그의 헌신에 그리고 그 다음 코민테른과 거기에 속한 당들에 대한 그의 헌신에 결정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는 데에 동의했다. 트로츠키는 독일 공산당과 코민테른 지도자들이 히틀러의 승리를 막기 위해 독일 사회주의자들(사회민주당)아래위로부터 통일 전선을 형성하지 않는 것에 화가 났다. 3월에 그는 KPD의 소생보다는 완전히 새로운 독일 공산당의 결성을 요청하는 일련의 논설을 썼다.구로프(G. Gurov)’라는 필명을 이용하면서 트로츠키는 마지못해 결정을 내렸음을 넌지시 이야기했다. 

 

의사가 목숨이 붙어 있는 환자를 버리지 않듯이, 우리는 최소한의 희망이 있는 한 당을 개혁하는 일을 우리의 임무로 삼았다. 그러나 송장에 자신을 옭아매는 것은 죄악일 것이다.”

 

그때 트로츠키는 독일에서 새로운 비 코민테른 당의 결성을 재가하였지만, 3인터내셔널이나 소비에트 공산당에 충성을 버리지는 않았으며 독일을 제외한 어떤 곳에서도 새로운 공산당 창설을 승인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코민테른을 포기하는 것이냐 하는 의심 섞인 질문에 구로프는 이렇게 얼버무렸다. “내 생각에는 엄밀하게 답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그리고 그는 독일의 재앙은 다른 공산주의 정당들에 충격을 가해 코민테른의 정책을 개혁하게 만들 수 있는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소련에 대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그곳에서는 제2의 당 슬로건을 발표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을 것이다. …… 그것은 제4인터내셔널 창설의 문제가 아니라 제3인터내셔널을 구하는 문제이다.” 193349일에 트로츠키는 우리는 제3인터내셔널과 관계를 끊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독일에서(다른 곳에서는 아니고) 코민테른과 단절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답하면서, 트로츠키는 논점을 부기(簿記)”의 문제로 최소화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관료정치가 소련을 파괴한다면 …… 4인터내셔널을 건설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새로운 독일 공산당을 요구한 후 네 달 동안 트로츠키는 독일공산당에 대한 포기를 소련이나 다른 공산주의 정당들에 대한 포기로 확대하지 않았다. 그가 결정적으로 누구나 자신의 습관적인 방식에 사로잡히지않을 수 없으며 코민테른의 개혁 희망은 사라졌다고 선언한 것은 7월 중순에 이르러서였다. 공산당들과 인터내셔널을 새로이 건설할 필요가 있다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소비에트 공산당이 더 이상 당이 아니라 통제되지 않는 관료정치의 수중에 있는 지배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적었다. 그러므로 단절할 당 같은 것은 없었다. 5일 후에 그는 볼셰비키 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소련공산당(CPSU)의 개혁 슬로건을 포기할시간이라고 썼다.

자신이 이제 반 소비에트 반혁명분자로 널리 인식될 것을 염려하여, 트로츠키는 여전히 소련에서 혁명을 요구하기를 거부했다. 그가 보기에 소비에트 러시아는 아직 혁명 없이 …… 소생될 수 있는노동자 국가였다. 1933101일에서야 그는 다음과 같이 확신했다. “지배 도당을 제거할 정상적인 헌정적방법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관료는 무력에 의해서만 어쩔 수 없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아귀로 권력을 양도할 수 있다.”(강조는 트로츠키의 것) 이러한 입장이 지닌 함의에 대해 여전히 불편해 하면서, 그는 그러한 무력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맞선 무장 봉기가 아니라 그 위에 있는 종양의 제거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내전의 조치가 아니라 치안적 특징을 지니는 조치를 옹호하고 있었다.

소비에트 당 체제에 대해 무력을 사용하라는 트로츠키의 10월 요구는 질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볼셰비키 당을 포기하고 그 존재를 부정하는 자신의 7월 선언을 상세하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7월 입장에는 이미, 개혁이 불가능하다면 그리고 스탈린주의 도당이 권력을 넘겨주기를 거부한다면, 무력으로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코민테른과 볼셰비키 당에 대한 트로츠키의 7월 폐기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새로운 인터내셔널 요청은 그의 망명 생활의 정치 활동에서 주요한 분수령을 이룬다.

독일에 대한 3월 중순의 글들 이후에 왜 트로츠키가 자기 입장의 명백한 논리를 따라 코민테른과 단절하는 데 4개월이 걸렸는가? 그를 찬양하는 전기 작가 아이작 도이처는 이 지연이 비논리적임을 인지하지만 그의 새로운 모험이 지닌 필연성이 곧다음 몇 개월 동안에 트로츠키를 압도했다고 설명했다. 도이처는 그 문제에 대한 트로츠키 특유의 망설임을 코민테른에 대한 그의 오랜 충성과 러시아의 반혁명에 대한 그의 공포 탓으로 돌렸다. 이런 요인들이 1929~32년의 기간에는 적절한 것이지만, 그 요인들에 기초한 설명은 KPD와 단절한 것과 모스크바 코민테른 정책 입안자들과 관계를 끊은 것 사이 비논리적인 4개월의 중단을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우익의 위험이든 코민테른에 대한 트로츠키의 충성심이든 둘 중 하나가 3KPD의 재앙 이후에 극적으로 줄어들었는가?

트로츠키 자신은 지연에 대한 질문들을 예상했다. 4월에 그는 스탈린주의 도당이 소련을 파괴하지 않으면 제4인터내셔널은 필요 없을 것이라고 썼다. 3월에서 7월 사이에 스탈린 쪽의 어떤 행동도 소련을 이미 벌어진 사태보다 더욱 파괴로 몰고 갔다고 트로츠키는 결코 주장하지 않았으므로, 4인터내셔널의 지연과 제안 모두 설명이 필요했다. 실로 1933727일에 트로츠키는 논리적으로 코민테른과 단절은 4월에 있어야 했음을 인정했다. 첫째, 그는 자신과 독일 동지들사이에 새로운 당 문제에 관한 불일치가 좌익 반대파안에서 마찰을 낳았고 총체적 단절을 지연시켰다고 설명했다. 트로츠키는 그를 따르는 독일인들에게 단절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야만 했다. 둘째, 그는 3월과 7월 사이에 코민테른의 당들이나 지도부가 정신을 차리고갑자기 그들의 정책을 변경하지는 않을까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의 흔치 않은 우유부단함에 대해서 이 요소들 중 어느 하나의 중요성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비록 트로츠키가 사전에 그들과 충분히 상의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무시하는 소규모 유럽 좌파 집단들과 단절하기를 상당히 꺼린다는 것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트로츠키가 서신을 주고받은 독일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새로운 당이라는 관념을 거부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다른 설명, 즉 트로츠키는 코민테른이 재빨리 자기 노선의 잘못을 인정하기를 4개월 동안 기다렸다는 설명은 훨씬 설득력이 적다. 코민테른에 대해서 낙관적일 이유가 트로츠키보다 적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앞선 10년 동안 코민테른의 실패를 가차 없이 문서로 증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트로츠키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잘못을 인정하든지 멤버 당들로부터 독자적인 도전적인 정책이 나오기를 기대할 만큼 코민테른의 정치에 무지하거나 경험이 없지 않았다. 그러므로 코민테른의 개혁 부족으로는 제4인터내셔널을 요청한 시점을 설명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전형적으로 논쟁적이고 단정적이며 자기를 정당화하는 트로츠키의 저작들은 학자들로 하여금 제4인터내셔널 결정에 대한 그의 해석을 수용하고 그의 지연에 대해서 거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게 만든다. 출간된 문서와 기록보관소의 문서들 모두 1930년대 트로츠키의 삶에 저널리스트나 편집자로서 그의 활동과는 아주 무관한 또 다른 측면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논점은 단순히 고고학적이거나 심리학적인 관심거리를 넘어선다. 코민테른에 대한 그의 공개적 반성의 장면 뒤에서, 트로츠키는 소련에 있는 비합법적인 반대파 집단들을 조직하고 그의 합법적인 복귀를 위해 모스크바와 협상하려고 했다.

1933년 독일에서 재앙이 일어나기 오래 전에, 트로츠키는 소련에서 추종자들과 접촉을 유지하려고 시도했다. 1929년 이래로 그는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에서 국내 유형 상태에 있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따르는 사람들과 서신을 교환하고 있었다. 그는 소비에트 연합으로 자신의 ?반대파 회보?(Byulleten' oppozitsii)의 복사본을 몰래 들여보내려는 시도를 했으며, (베를린에 살고 있는) 그의 아들 레프 세도프(Lev Sedov)를 통해서 소련을 오가는 여행객이나 소련 관리들과 접촉을 하고 있었다. 소비에트 연합으로 보낸 그의 편지들을 비밀 결창이 차단하고 가로챈다는 사실이 명백해지면서, 그는 우편엽서로 전환했는데, 그는 우편엽서가 덜 세세하게 조사받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모스크바의 공개 재판 시기에 트로츠키는 1929년에 추방된 이후 피고인들과 일체의 교신 사실을 부정했다. 그러나 1932년에 그가 과거 반대파 지도자들인 칼 라데크(Karl Radek), 소콜니코프(G. Sokol'nikov), 프레오브라젠스키(E. Preobrazhensky) 들에게 개인적인 비밀 편지를 보냈음은 이제 분명하다. 이 편지들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거기에는 수취인들에게 반대파로 돌아오라고 설득하려는 시도가 포함되어 있다고 믿는 것이 논리적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1932년 말 트로츠키와 소련 내 지지자들 사이의 은밀한 서신 왕래에 대해서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10월 언젠가에 과거 트로츠키주의자였으나 당시는 소비에트 관리였던 골리츠만(E. S. Gol'tsman)은 베를린에서 세도프를 만나 그에게 노련한 트로츠키주의자 이반 스미르노프(Ivan Smirnov)와 소련에 있는 다른 좌익 반대파로부터 나온 통합 반대파 블록을 형성하자는 제안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제안된 블록은 트로츠키주의자, 지노비예프주의자, 로미나제(Lominadze) 그룹 등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세도프는 트로츠키에게 편지를 써서 제안을 전달했고 트로츠키는 승인했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썼다. “내가 보기에 블록 안은 아주 괜찮은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블록 문제이지 합병 문제가 아니다.” “블록이 어떻게 나타날까? 당장은, 주로 상호간의 정보를 통해서. 우리의 동맹은 우리를 소비에트 연방에 관련된 것에 대해 뒤처지지 않게 할 것이며, 우리는 코민테른에 관련된 것에 대해 동일한 것을 할 것이다.” 그가 보기에, 블록은 저항을 그만두고 자기주장을 철회한 사람들을 배제해야 했다. 저항 포기주의적 정서하고는 우리가 냉정하고 가차 없이 싸움을 벌여야 할 것이다.” 골리츠만은 우익 반대파의 블록 참여가 바람직하며 블록 형성은 그들의 참여가 확보될 수 있을 때까지 늦추어져야 한다는 소비에트 연방에 있는 사람들의 견해를 전달했다. 트로츠키는 이 제안에 반대했다. “우파가 쉽게 결합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동맹 세력의 견해를 나는 승인하지 못한다.” 트로츠키는 우익 반대파 측의 수동성이라고 자신이 생각한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익명과 공모로 억압에 맞서 투쟁하지 침묵으로 투쟁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도프는 블록이 조직되었다고 대답했다. “그것은 지노비예프주의자, 스텐-로미나제(Sten-Lominadze) 그룹, 그리고 트로츠키주의자들(’)을 포함한다.”사파로프-타르하노프(Safarov-Tarkhanov) 그룹은 아직 공식적으로 가입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주 극단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곧 가입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비에트 연합으로 돌아가 보면, 블록의 지도자들은 바로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반 스미르노프와 주변 인물들(경제학자 프레오브라젠스키를 포함)우연히체포되었다. 그들 가운데 경찰 앞잡이가 분리 문제로 그들을 고발했던 것 같다. 더욱이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반대파 류틴의 강령(Ryutin platform: 류틴이 스탈린의 집산화와 숙청 등을 비판한 문서옮긴이)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당국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유형에 처해졌다. 분명 이런 사건들이 블록을 붕괴시켰지만, 세도프는 낙담하지 않았다. 그는 경찰이 아무런 문서도 스미르노프에 관한 트로츠키주의 문헌도 발견하지 못했으며, “‘고대인들(ancients)’의 체포는 큰 타격이지만 하층 노동자들은 안전하다고 확신했다.”

이때쯤에 트로츠키는 하층 노동자들과 직접 접촉하려고 시도했다. 코펜하겐에 잠시 머무는 동안 트로츠키는 러시아에 있는 반대파에 편지를 전달할 해리 윅스(Harry Wicks)에게 편지를 건넸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여러분이 내 필적을 알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모르더라도, 당신은 어쩌면 내 필적을 아는 다른 누군가를 발견할 것이다.” 트로츠키는 계속해서 충성스런 반대파 사람들에게 활동을 요청했다. “좌익 반대파에 공감하는 동지들은, 물론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지만, 현재의 수동적인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없다.(강조는 트로츠키) 그는 계속해서 트로츠키를 위한 교신을 보낼 수 있는 베를린, 프라하, 이스탄불에 있는 안전한 연락처의 이름과 주소를 주었고 다음과 같이 끝맺었다. “나는 당이 처한 위협적인 상황이 혁명에 헌신한 모든 동지들로 하여금 좌익 반대파 주위에 활발하게 모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들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통합 좌익 반대파 블록이 1932년에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트로츠키의 견해로는 블록은 통신과 정보 교환의 목적으로만 존재했는데, 증거에 따르면 트로츠키가 블록에 (모스크바가 4년 후에 그렇게 비난했던 것 같은) 비밀 테러리스트의역할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또한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스미르노프 등을 제거함으로써) 블록의 목을 자른 후에, 조직화는 주로 하층의 덜 저명한 반대파(지노비예프의 추종자들, 그러나 지노비예프 자신은 아니다)를 포함했다. 마지막으로, 트로츠키는 동맹 세력들과 직접 접촉하려 했던 것 같다. 1932년 블록의 크기와 힘은 확정될 수 없고 그것이 체제에 얼마나 위협적이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어쨌든, 일련의 사건들은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스탈린주의자들 모두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했음을 보여줄 것이다.

블록은 제쳐두고, 트로츠키는 이 몇 개월 동안에 다른 전략을 추구하고 있었다. 1932년 가을 동안에 그는 아들 세도프에게 스탈린 기구 안에 있는 잠재적 지지자들을 소외시키지 않기 위해서 집권 체제와 협력하자고 제안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중요할 것이라고 편지를 썼다. 19333월에 트로츠키는 대범하게 모스크바 지도부로 복귀를 요청함으로써 모스크바와 협력하려는 마지막 시도를 했다.

‘G. 그로프라는 이름으로 KPD와 단절하는 논설을 쓴 지 3일 후에 트로츠키는 일정 조건 하에서 정치국 지도부로 복귀하는 것을 공식으로 요청했다. 그는 315일에 정치국으로 보낸 주목할 만한 비밀 편지에서 자신의 안을 제시했다. 트로츠키의 편지는 경제 재앙이 당 지도부를 압도하여 당황하게 만들고 있어 이제 당을 재건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당파의 지지와 참여가 필요하다는 인식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나는 현재 소비에트 국가를 이끌고 있는 사람들의 책임감에 다시 한 번 호소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여러분은 상황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나라의] 내적 발전이 현재의 방향으로 더 진행된다면, 대재앙은 피할 수 없다.” 

 

트로츠키는 정치국에 자신의 분석을 참조하려면 ?반대파 회보?에 실린 그의 최근 글을 보라고 했다. 그는 독일에서 최근에 일어난 히틀러의 승리를 코민테른 정책의 파산의 증거로 인용했고 그와 같은 재난들이 지도부에 대한 신뢰 상실을 낳았다고 주장했다. “무엇이 필요한가(Chto nado sdelat)?” 필요한 것은 신뢰를 다시 쌓기 위한 당 조직의 재생이었으며, 좌익 반대파는 기꺼이 협력할 것이었다. 트로츠키가 생각하길, 당신들 가운데 몇몇은 좌익 반대파는 단지 권력에 이르는 길을 원하며 오직 지도부로 돌아가기 위하여 협력을 제안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저런 당파의 권력이 아니라(!) 여러 해 동안 노동자 국가와 국제 혁명이 생존하는 것이라고 트로츠키는 대답했다. 

 

역사적으로 생산된 파편들 사이의 허심탄회하고 정직한 협력만이, 그것들을 당 내의 경향들로 완전히 변형시키고 결국 당으로 용해시킴으로써, 구체적인 조건에서 지도부에 대한 신뢰를 복구하고 당을 부활시킬 수 있다.” 

 

그리고 트로츠키는, 복귀한 좌익 반대파는 과거에 좌익 반대파에 반대한 어떤 당원도 박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반대파의 복귀를 필요로 하는 상황을 묘사한 후에 트로츠키는 주목할 만한 요구를 했다. 좌익 반대파의 강령을 슬쩍 언급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 강령의 폐기는 물론 논외다. …… 그러나 강령을 실행하는 방법은 말할 것도 없고, 중앙위원회와 당에 이 강령을 제출하고 옹호하는 방법에 관해서는, 충격과 분열을 막는다는 목표에 예비적인 협정이 이루어질 수 있고 또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렇게 트로츠키는 좌익 반대파가 당 내의 한 경향으로 지도부에 복귀하는 것이 허락되어야 한다고 제안했고, 그의 집단은 비판과 강령을 공개적으로 폐기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무한한 기간 동안 이 강령의 선동이 중지될 수 있는 조건을 협상하기 위해 문을 열어두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주장을 바꾸지 않고 지도부에 기꺼이 다시 들어갈 것이지만 당의 단결을 위하여 비판을 자제할 것이었다. 이것은 새로운 제안이었다. 이전에, 그는 당 내에서 반대파를 위한 무한한 비판의 자유를 요구했으나, 이제 그는 반대파의 비판을 성취될 협정에 달린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트로츠키의 이전의 조건과 요구 사항과 모순이 편지의 은밀성을 설명한다. 소비에트 지도부에 보낸 이전의 공개적인 그의 편지와는 달리, 이 서신은 트로츠키가 결코 공개하거나 출간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국이 문서의 유일한 판본을 받고 있음 알리면서 편지를 끝맺었다. 이것은 정치국에 논의를 시작할 수단을 선택할 자유를 주는 것이었다.

312일 글 KPD냐 새로운 당이냐?315일 비밀 편지는 상호 관련이 있었다. 첫째, 독일에서 새로운 당에 대한 트로츠키의 요청이 모스크바 지도부를 압박할 것이며, 그러면 상상하건대 지도부는 코민테른의 분열에 직면하기보다는 트로츠키를 다시 취하는 것을 선택할 것이라고 트로츠키는 생각했을지 모른다. 둘째, 또한 정치국에 보낸 비밀 편지는 그가 필명으로 312일 논설을 쓴 이유를 설명하는 데 이바지한다. 그의 315일 신청에 대한 답을 기다리는 동안 트로츠키는 아직 제4인터내셔널에 전념하지 않았으며 필명은 나중에 가 코민테른의 당들과 단절했음을 부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었다. 그러한 관련 사실 부인은 모스크바가 그의 복귀 신청에 호의적으로 응답한다면 그에게 중요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 모스크바 지도부에서 트로츠키의 복원된 지위는 KPD와 단절할 것을 요청한 입장과 모순될 것이며 ‘G. 구로프를 부인하는 일이 필요했을 것이다.

코민테른의 다른 정당들(볼셰비키를 포함)과 트로츠키의 단절 지연은 이렇게 부분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3월 이후에 그는 제4인터내셔널에 공개적으로 전념하기 전에 모스크바가 그의 비밀 편지에 답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코민테른이 오류를 인정하고 개혁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만큼은, 트로츠키는 자신의 개인적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기 위하여 모스크바와 단절을 지연했다.

한 달 반 후에 트로츠키는 정치국의 대답을 받고 절망했다. 1933510일에 그는 설명이라는 제목을 달아서 3월 편지에 덧붙인 성난 종결 부분을 정치국에 보냈다. 이 짧은 진술은 정치국이 그에게 침묵으로 답했을 뿐임을 언급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다시 볼셰비키 체제가 직면하고 있는 위험을 강조하고 그 체제가 스탈린 분파가 범한 잘못들 때문에 무너질 수 있음을 예리하게 경고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스탈린주의 관료의 하층부에서 마음대로 선동할 수 있다고 정치국에 불길하게 통지했다. “눈 먼 사람들, 출세주의자들, 그리고 겁쟁이들 사이에, 그들의 눈에서 실제 사태를 감출 수 없는 정직한 혁명가들이 있다는 믿음에서 우리는 이 문서(3월 편지와 5월 설명)를 책임 있는 노동자들에게 보낼 것이다. …… 우리는 이 정직한 혁명가들에게 우리와 접촉하자고 요구한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510일 설명은 모스크바 지도부로 합법적으로복귀하려는 트로츠키의 시도가 끝남을 나타냈다. 독일의 재앙, 기구의 서투른 경제 정책, 그리고 마지막으로 트로츠키와 협상하는 것에 대한 스탈린의 거부가 스탈린주의 도당과는 어떠한 협력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트로츠키에게 확신시켰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715일 논설 새로운 공산당들과 인터내셔널을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여전히 두 달 뒤였다. 그가 볼셰비키와 코민테른하고 총체적으로 단절하는 데 더 지연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

단순한 우유부단이 일정 부분 그 답이라는 점은 확실하지만, 1932년 블록이 여전히 코민테른과 총체적으로 단절하지 못하게 하는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트로츠키가 느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앞에서 보았듯이,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류틴 강령을 알고 있었다는 이유로 당에서 추방되어 유배되었다. 그들의 제명에 대한 19321019일자 논설에서, 트로츠키는 두 지도자에 대해 전반적으로 부드럽고, 동정적이며, 회유적인 태도를 취했다. (어쨌든 그들은 여전히 단명한 블록의 성원들이었다.) 트로츠키가 보기에, 당에서 그들의 제명 그리고 그들이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들을 여전히 트로츠키의 진영에 배치시켰다.

트로츠키가 블록의 생존 능력에 대해서 품었던 모든 희망은 19335월에 산산이 부셔졌다. 트로츠키가 5설명을 비밀 편지에 덧붙인 지 10일도 안 되어서, 그는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스탈린에게 항복하고, 그들의 주장을 철회하고, 스탈린 도당에 대한 충성을 다시 맹세했음을 알게 되었다. 반대파에서 그들의 이탈은 트로츠키를 격분시켰다. 523일 논설에서 그는 두 사람을 가엾고, 비극적이며, 비굴하다고 묘사했다. 76일에 그는 다시 한 번 그들을 꾸짖으며 그들의 투항을 강한 어조로 비난했다. 블록의 지도자들(하층 노동자들은 아닐지라도)은 사라졌다.

트로츠키의 비공개 전략 둘 다 이제 완전히 무너졌다. 정치국은 그의 복귀 제안을 무시했고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의 주장 철회는 1932년 블록을 무력화시켰다. 트로츠키가 열어두려고 했던 선택의 여지들은 이제 닫혀버렸고 그는 더 이상 가까운 장래에 모스크바로 귀환하는 것을 바랄 수 없었다. 지노비예프에 대한 신랄한 논설을 쓴 지 9일 후에, 그는 주류 공산당들과 코민테른하고 단절하는 운명적인 715일 논설을 썼다. “자신의 습관적인 방식에 사로잡혀있는 어떠한 지점도 더 이상 없었다. 트로츠키가 한 달 전에 재결합하려고 했던 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이제 개혁은 가능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당으로 자신의 복귀와 당의 개혁을 거의 동일시했던 것 같다.

트로츠키의 망명 생활에는 이론을 정립하고 출판하는 것 이상이 있었다. 4인터내셔널을 사례 연구로 하면, 그의 당파적 활동이 그의 이론적 주장의 본성과 시점에 영향을 미쳤음을 볼 수 있다. 실제로 트로츠키의 비밀 정치 전략의 실패는 코민테른과 단절하고 혼자 간다는 그의 결정에 주요한 구성 요소였다. 그의 음모적 책략이 그 결정에 유일한 요인이 아니었지만, 그런 책략이 중요했고 모스크바와 단절을 4개월 동안 지연한 이유를 그의 공개적 설명보다 어쩌면 더 잘 설명해준다.

더 나아가 트로츠키의 활동이 반대파의 억압을 지지한 강경파 모스크바 정치가들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상정하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그의 활동은 엄격한 조치를 요구하는 크렘린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치적 무기를 제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비에트 연합에 있는 추종자들에게 보낸 트로츠키의 비밀 편지들, 1932년 블록 조직, 4인터내셔널의 창설, 무력으로 당 지도부를 전복하라는 그의 요구, 그리고 코민테른의 정책(특히 인민전선)에 대한 계속된 반대는 나중에 강경파들이 트로츠키를 음모를 꾸미고 정치적·조직적으로 공산당들에 반대하면서 복귀를 계획하고 있는 비뚤어지고 원칙이 없는음모가로 그리기 쉽게 만들었다.

1933년부터의 소련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트로츠키의 활동과 저술들은 처음에는 논점이 없고 부적절해 보일지 모른다. 사실 그의 행동과 저술에는 상당한 비애감이 있다. 추방당한 후에, 그는 여전히 그가 지도부의 일원인 것처럼 글을 썼다. 첫 번째 5개년 계획을 비판하면서 그는 종종 1인칭을 사용했다. 


…… 우리는 사회주의로 접어들지 않았다. 우리는 계획적인 조절 방식의 통제력을 전혀 확보하지 못했다. 우리는 첫 번째 거친 가설들만을 이행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서툴게 이행하고 있으며, 아직 우리의 전조등을 켜지 못하고 있다.” 

 

지나고 나서 볼 때, 비밀 블록들을 조직하려는 그의 시도와 모스크바로 복귀하려는 그의 제안은 미친 짓처럼 보인다. 도이처 같은 사람들의 뒤를 이어서, 알렉 노브(Alec Nove)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적었는지, 때로는 독단적일지라도 그의 웅변적인 말들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효과가 없었으며 의미 없기조차 했는지를 관찰했다.

그러나 뒤늦게 얻는 지혜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볼셰비키 당 역사는 정치적 운명이 얼마나 빠르게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1916년 말에 레닌과 그의 추방자 서클은 분명 러시아 제국을 통치하려는 의심스런 후보자들처럼 보였을 것이지만, 전쟁, 사회적 대립, 그리고 정치적 마비가 상황을 빠르게 변화시켰다. 파시스트의 전쟁 위협과 결합된 1930년대의 사회·정치적 격변은 비슷하게 유동적이고 동적인 상황의 가능성을 제공했다. 스탈린의 제거와 트로츠키의 복귀는 그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그리 부자연스런 일처럼 보이지 않았다.

스탈린주의자들은 가능성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여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그들의 압박을 결코 늦추지 않았던 것 같다. 스탈린주의 보도기관들은 트로츠키주의를 반혁명의 전위라고 끊임없이 비방했다. 소련으로 보낸 트로츠키의 편지는 가로채기 당했고 그의 주변에는 스탈린주의 앞잡이들이 잠입했다. 비밀경찰 야코프 블륌킨(Yakov Blyumkin)은 해외에서 트로츠키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사살 당했다. 나중에, 1936년에, 1932년 블록은 모스크바 공개 재판들을 위한 그리고 그 재판들과 동반한 예조프(Ezhov) 테러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대량 학살하기 위한 증거의 기초가 되었다. 에스파냐 내전에서, 곤경에 처한 에스파냐와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은 거침없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을 검거하여 사살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트로츠키가 망명 중에 있는 성역이며 작전 기지임을 부정하기 위하여 노르웨이, 벨기에, 프랑스, 멕시코 정부에 계속해서 압력을 가했다.

결국 1940년에, 전쟁이 임박한 가운데, 트로츠키는 멕시코에서 암살당했다. 이렇게 해서 스탈린은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을 것임을 확실히 했다. 어떤 위기가 뒤따를지라도, 1917년에 레닌이 그랬던 것처럼 망명 중인 훌륭한 혁명가 개인이 봉인된 열차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옮긴이: 김종원

  1. 이 글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J. Arch Getty, “Trotsky in Exile: The Founding of the Fourth International,” Soviet Studies, Vol. 38, No. 1. (Jan., 1986), pp. 24-35. [본문으로]
  2. University of California, Riverside. 현재는 UCLA 교수. 게티는 스탈린 시대 소련사를 전공한 미국인 역사가이다. 1930년대 소련에서 일어난 대숙청에 스탈린이 책임이 없으며, 정치적 억압의 피해자 수가 과장되었다는 주장으로 유명하다. 게티의 주장은 우익의 소련 비판을 반박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지만 소련 역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와 스탈린을 그럴듯하게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 논문은 일관성 있는 이론가요 비타협적인 혁명가로서 트로츠키의 이미지를 부정하는 글이다.(옮긴이)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