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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가 코민테른과 관계를 끊다: 아치 게티에 대한 논평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2월호

트로츠키가 코민테른과 관계를 끊다: 아치 게티에 대한 논평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4:56

트로츠키가 코민테른과 관계를 끊다: 아치 게티에 대한 논평1

 

Thomas Twiss

 

 

아치 게티는 이 잡지에 실은 논문에서 트로츠키가 코민테른과 관계를 끊기로 한 결정을 설명했다. 그는 트로츠키가 코민테른과 관계를 끊기로 한 결정과 시기에 대해 설명한 것을 자기변호라고 기각했고 그러한 결정과 시기 모두 다 트로츠키가 소련공산당 지도부로 복귀하려는 은밀한 전략의 실패를 통해 더 잘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게티는 트로츠키를 맑스주의 이론으로 무장한 비타협적인 혁명적 투사로 그리는 것을 거부하고 그 대신 트로츠키를 기회주의적 음모가로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사료를 주의 깊게 분석하면, 게티의 테제는 거꾸로 기각 당한다. 그와 반대로, 트로츠키에게는 정치적 행동에 대한 지침이자 구속으로서 이론의 중요성이 다시 확증된다.

게티는 트로츠키가 독일공산당과 관계를 끊고 나서 비로소 4개월 뒤에 코민테른과 관계를 끊었던 것에 대한 트로츠키 자신의 설명에 도전하면서 설명을 시작하고 있다. 1933312일에 트로츠키는 처음으로 독일공산당을 개혁하려고 애쓰지 말 것을 그의 지지자들에게 요청했다. 그는 독일에서 파시즘이 승리에 대한 독일공산당의 책임을 바탕으로 삼아 이러한 제안을 하게 되었다. 비록 그가 코민테른 지도부에게도 똑같이 책임을 부과했지만, 트로츠키는 7월 중순까지도 독일공산당에 한 것처럼 코민테른과 관계를 끊을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나중에 트로츠키는 이러한 지체를 그가 그의 지지자들, 특히 독일 트로츠키주의자들 사이에서 분열로 이끌지 않고 결정적인 선회를 하길바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독일에서 일어난 재앙이 코민테른의 다른 부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좀 지켜볼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게티는 이러한 두 가지 설명 모두를 고려하지 않았다.

독일 트로츠키주의자에 관해서, 게티는 트로츠키가 미리 그들과 상담할 만큼 그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에게 공공연히 맞섰던 작은 유럽 좌파 그룹에 결코 마음을 터놓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게티는 트로츠키가 그의 지시를 좌절시켰던그룹과 가볍게 관계를 끊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질적인 사례를 인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그의 지지자들에게 독일공산당과 관계를 끊어야함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 매우 걱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주 많은 증거가 있다. 312일자 한 편지에서 트로츠키는 우리 동지 모두가 한꺼번에그런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다음 달에 트로츠키는 그가 독일에서 새로운 방향을 주장했던 국제 좌익 반대파의 내부 토론에서 여러 번 기고문을 제출했다.

트로츠키의 두 번째 설명에 대해서 게티는 트로츠키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잘못이나 당 구성원으로부터 독자적이고 도전적인 정책을 기대할 만큼 코민테른 정책에 대해 순진하거나 무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반대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코민테른 중앙이나 또는 각국 공산당 지도부가 자발적으로 코민테른의 개혁을 주도할 것이라고 분명히 믿지 않았다. 지난날처럼, 트로츠키는 일반 당원이 각 분과 안에서 행사할 수도 있는 압력에 희망을 걸었다. 이제 그는 코민테른의 극좌 노선이 독일에서 끼친 결과를 둘러싼 격분이 그러한 압력을 유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기는커녕, 트로츠키는 아주 비관했다. 여전히 그는 이러한 이론적 가능성이 소진될 때까지 코민테른과 관계를 끊는 것에 주저했다.

트로츠키의 설명을 요약해서 처리하면서 게티는 이른바 트로츠키가 권력을 다시 잡으려고 꾸민 두 개의 은밀한 전략의 견지에서 지체한 이유를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첫 번째 전략은 트로츠키가 소련공산당 정치국에 보낸 1933315일자 편지에 들어 있다. 게티의 견해에서 볼 때 이것은 이상한 제의를 담고 있는 놀랄만한 비밀 편지였다. 게티는 트로츠키가 실제로 모스크바 지도부에 좌익 반대파가 비판을 모두 자제한다는 그의 약속의 대가로 그에게 권력을 다시 줄 것인지를 물어보고 있다고 주장한다. 게티가 볼 때 트로츠키의 편지가 지닌 비밀성은 그의 제안과 트로츠키의 이전의 요구 사이에 있는 모순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게티는 트로츠키가 312일 독일공산당과 관계를 끊으라고 한 요구를 코민테른에서 분열을 직시하기보다는 그를 다시 되돌아오게 하라고 모스크바에 압력을 넣은 책략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게티는 트로츠키가 독일 공산당과의 단절에 대한 그의 요청을 권력에 되돌아갈 수 있을 때 이러한 행동을 부인할 수 있는 선택을 남겨 놓으려고 구로프(Gurov)’라고 서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게티가 놀랄만한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고 해석한 편지조차도 트로츠키의 편지가 아니다. 첫째, 그 편지를 모스크바 지도부로 복귀하려는 이기적인 시도로 묘사할 근거가 없다. 만일 트로츠키가 편지를 쓰면서 생각한 오직 하나의 목적이 지도부에게 그를 권력에 다시 부르도록 하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정치국에 보낸 비밀 편지에서 이러한 문제를 명확히 제기할 것을 그에게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편지 그 어디에서도 트로츠키는 이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 편지는 좌익 반대파가 당 안에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요구했을 뿐이었다. 트로츠키가 나중에 공개적으로 설명했듯이, 그가 정치국에 보낸 편지는 좌익 반대파가 오랫동안 지닌 태도를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우리는 소비에트 공화국을 위해 봉사했고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이해관계에서 어떤 활동도 수행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 편지는 당 토론에 관한 중요한 새로운 양보를 포함하고 있지도 않다. ‘사전 동의를 위한 트로츠키의 제안은 오직 소련 내부의 폭발적인 상황의 맥락에서 당 토론의 기제를 협상할 것에 대한 제안이었다. 트로츠키가 기꺼이 토론의 시기를 협상하려고 했을 수는 있지만, 그가 그것을 무한정 지체하려 하거나 모든 비판을 기꺼이 억제하려고 했다는 그 어떤 암시도 없다. 실제로, 편지를 보내기 전과 후에 그의 공개적인 진술은 그 반대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점에서 트로츠키는 소련을 붕괴에서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 공개적인 비판을 통한 진지한 토론, 강령, 분파 집단, 그리고 비상 당 대회를 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그가 비밀리에 모든 토론을 포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면, 트로츠키가 공개적 토론을 그렇게 힘차게 주장할 수 있었을까?

트로츠키가 그의 지지자들에게서 사전 동의제안을 지키려고 시도했다고 한 게티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330일에 트로츠키는 “[소련공산당 안에서] 상호비판이 …… 양측이 의식적으로 준비했던 규모와 비판이 어떠한 조직적 틀에서 일어날 것인가에 달려있는 다른 특성을 지닐 수도 있다.”고 지적했던 논문을 썼다. 두 가지 방법을 지니려고 시도하면서, 게티는 이를 트로츠키 추종자들에게 트로츠키의 제의에 대한 모스크바의 수용을 준비시키기 위해 계획된 은밀한 언급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그가 숨김없이 좌익반대파와 당 지도부 사이에 합의를 요구한 다음 문장에서 이러한 은밀한 언급을 넘어서고 있다. 그리고 다시 결론 문단에서 그는 당 내 합의당과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눈앞에서 명예로운 합의를 위한 그의 제안을 무심코 입 밖에 내고 있다. 그 논문의 제목은 <우리는 정직한 당 내 합의를 필요로 한다>였다.

트로츠키가 그의 315일자 편지를 결코 공개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왜 그랬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그가 앞서 한 제안과 모순되는 것을 찾을 필요는 없다. 그 편지에서 트로츠키는 만일 아무런 공표 없이 사전 회담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쓴 편지를 일반에 공개하지 않은 것은 방법의 선택에서 필요한 자유를 허용하기 위해 계획되었다.”고 설명했다. 그가 510일에 정치국이 답변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지었을 때, 비밀을 더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3일 뒤에 트로츠키는 공개를 위해 그 편지 내용을 간단하지만 정확히 요약해서 썼다. 트로츠키는 결코 편지 자체를 공개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론에 호소하는 것이(편지 공개) 소련공산당을 위한 개혁 전망에 대한 자신의 단념을 통해 모든 정치적 중요성을 잃어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독일공산당과 관계를 끊는 것이 코민테른에서 분열에 맞닥뜨리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권력에 다시 돌아가도록 모스크바 지도부에 압력을 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트로츠키가 상상했다 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일이다. 많은 트로츠키 지지자들은 앞선 해에 그들 각자의 당에서 쫓겨나면서 이미 코민테른 밖에 있었다. 트로츠키가 완전히 이해했듯이, 모스크바 지도부의 처지에서 볼 때 분열은 이미 오래 전에 극에 달했다. 또한 트로츠키는 코민테른과의 구로프의 단절을 부인한 선택을 유지하길 바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구로프가 독일공산당과의 단절을 요청했던 같은 시기 동안 트로츠키는 되풀이해서 그 자신의 이름으로 같은 입장을 널리 알렸다.

게티가 트로츠키 탓으로 돌린 비밀 전략의 두 번째는 트로츠키의 지지를 받아 1932년에 소련에서 세워졌던 여러 반대파 집단의 동맹을 포함하고 있다. 게티는 정치국 앞으로 보낸 그의 편지가 반응을 이끌어내는 데 실패하고 나서 이러한 동맹이 코민테른과 단절에 대한 트로츠키의 계속된 거리낌에 열쇠를 제공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스탈린에게 투항했다는 것을 그가 알았을 때, 게티의 트로츠키는 모스크바로의 신속한 복귀에 대한 그의 희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뒤 곧 트로츠키는 코민테른과 관계를 끊었다.

동맹에 대한 트로츠키의 지지가 소련공산당을 개혁하려는 목적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개인적 야심에 의해 자극받았다는 게티의 암시를 뒷받침할 증거가 없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지적되어야 한다. 트로츠키는 그러한 동맹이 결국에는 당 안에서 하나의 정치적 세력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바란 듯이 보인다. 만일 동맹이 좌익 반대파의 강령 모두를 또는 일부만이라도 채택하게 설득할 수 있다면, 그러한 강령은 당을 개혁하도록 지도부에 압력을 넣을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요구 가운데서, 동맹은 트로츠키를 포함하여 모든 쫓겨난 반대파 의 당으로 복귀를 위해 압력을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좌익 반대파는 그들의 재입당을 개혁 과정에 필요한 부분이라고 언제나 생각했다. 이것은 마치 트로츠키가 당의 개혁을 그의 당 복귀와 같은 것처럼 보았다.”는 게티의 관찰에서 정확한 핵심이다. (다른 한편으로 게티는 트로츠키가 진심으로 당을 개혁하려고 애썼다 할지라도 그 자신이 당으로 복귀하는 것을 배제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서 요점은 트로츠키에게 개인적 야심이 없다는 게 아니라, 트로츠키가 그가 진술했던 이상과 모순되게 그러한 야심을 추구하고 있었거나 또는 그의 개인적 이해관계를 해결하려고 그러한 이상을 냉소적으로 다시 규정했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스탈린에게 투항하자, 트로츠키가 동맹을 포기했다는 게티의 주장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의 가능성이다(비록 게티가 제시했던 이유가 아니라면).그러나 동맹의 전망이 1932~33년 가을과 겨울 동안에 많은 좌익반대파가 체포되기 바로 전 달에 파괴되었다는 것은 가능하다.”

게티에게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투항했던 때와 트로츠키가 코민테른과 관계를 끊었던 시기 사이에는 일련의 시간 공백이 있다는 것이다. 게티가 동맹을 토론하는 목적은 트로츠키가 510일에 정치국과 소통한 사실과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형성하기로 한 그의 결정 사이에 지체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설사 트로츠키가 투항 소식을 들었을 때 동맹을 포기하기로 했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정확히 13일에 대한 설명이 된다. 그래서 7주 넘는 시간에 대한 설명이 남아있는 것이다.

게티가 4개월 지체의 이유를 설명하려고 시도한 것과 트로츠키 자신의 설명을 반대한 것은 조사 중에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트로츠키의 설명을 보충하는 다른 설명이 없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게티의 주장 가운데 몇몇 타당한 것을 포함한 하나의 설명은 우리에게 처음부터 게티가 포기했던 이론의 토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몇 년 동안 트로츠키는 코민테른과 관계를 끊는 것을 거부한 것을 혁명적 노동자 대중이 코민테른의 모든 당에 충성을 유지했다는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한편으로 트로츠키는 혁명적 노동자 대중이 코민테른을 개혁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어떤 새로운 인터내셔널도 고립되고 분파적인 존재로 될 것임을 미리 운명 지은 것이었다. 오직 커다란 역사적 사건은 코민테른에서 혁명적 노동자의 확신을 뒤흔들 수 있고 제4인터내셔널을 위한 전망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공산당을 개혁할 수 있다는 전망에 대한 트로츠키의 주장은 추가적인 요소를 내포한 것이었다. 그는 소련공산당이 노동자 국가의 지배정당으로 남아 있는 한 소련공산당과의 단절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잠정적인 딜레마를 드러내었던 것이다. 즉 자본주의 국가가 소련에서 권력을 잡지 못했지만 만일 커다란 역사적 사건이 코민테른의 정치적 파산을 입증한다면 트로츠키는 어떠한 입장을 취할 것인가? 트로츠키가 어떻게 소련공산당과 관계를 끊지 않고서 코민테른과 관계를 끊을 수 있었을까?

19333월 이전에 그 문제는 날카롭게 제기되지 않았다. 이전 해에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의 붕괴나 독일에서 파시즘의 승리가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형성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파악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파시스트의 승리가 소련에서 자본주의의 복원 가능성이나 심지어 개연성을 크게 늘여 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파시즘이 독일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했다고 트로츠키가 결론을 내렸을 때, 비로소 트로츠키는 딜레마에 맞닥뜨렸다. 그는 곧 독일공산당과 관계를 끊을 것을 요구했지만, 코민테른을 포기하는 전망에 난색을 표했다. 나중에 트로츠키의 비서 가운데 한 사람은 이 순간에 코민테른과의 절연에 대한 트로츠키의 마음에 가장 커다란 장애가 소련이 노동자 국가였다고 본 그의 견해였다고 되돌아보았다. 이것은 또한 트로츠키가 이때 쓴 책을 통해서도 확증되었다. 독일공산당과의 절연에 대한 그의 첫 호소에서 트로츠키는 코민테른과의 절연을 거절했다. 왜냐하면 트로츠키가 제2당의 슬로건을 소련을 위해 잘못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이어 발표한 논문에서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자들이 소련을 파멸로 이끌 때에만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창립될 수 있을 것이라고 넌지시 비쳤다.

트로츠키는 처음에 현실을 통해 풀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딜레마를 회피하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그는 독일의 재앙이 서구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코민테른을 개혁할 수 있게 박차를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기다렸다. 그리고 그는 소련공산당과 소비에트 국가가 개혁될 수 있을 것임을 계속해서 바랐다. 트로츠키는 소련에서 경제, 정치 위기와 독일에서 히틀러의 승리가 지도부에게 당을 소생시키도록 압력을 넣을 지도 모른다고 은근히 기대하면서 마지막으로 정치국에 호소했다. 또한 트로츠키는 반대파 동맹에 영향을 미쳤던 불만이 당 개혁을 위한 운동으로 발전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여전히 믿었을 수도 있다. 좀 더 비관적으로, 트로츠키는 소련에서 경제 위기가 자본주의의 복원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을 두려워했다.

1933년 여름쯤에 트로츠키의 가장 낙관적인 희망이나 그의 가장 나쁜 두려움이나 모두 가까운 미래에 막 현실화되려고 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트로츠키는 이제 그의 지지자들과 사적인 토론에서 소련공산당을 뺀 코민테른의 모든 정당과 관계를 끊을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런 입장은 코민테른이 소련공산당의 지도부에 의해 통제당하고 있는 사실을 고려하면 명확히 이치에 닿지 않았다. 곧바로 트로츠키는 그의 지지자들에게 전체 코민테른을 포기할 것을 요청했다.

게티가 주장하고 있듯이, “트로츠키는 정치 분석가일 뿐만 아니라 정치가였다.” 그러나 어떤 다른 정치가보다 훨씬 더, 트로츠키는 그의 정치적 활동에서 이론적 고려를 통해 좌우되고 강제 당했다. 이른바 개인적 힘을 다시 찾으려 시도한 것이 아니라, 트로츠키가 쓴 이론적 작업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트로츠키가 1933년 봄에 코민테른과 관계를 끊는 것을 머뭇거린 이유를 가장 잘 알 수 있다.

 

 

  1. Thomas Twiss, “TROTSKY'S BREAK WITH THE COMINTERN: A COMMENT on J. ARCH GETTY,” Soviet Studies, Vol. 39, No. 1. (Jan., 1987), pp. 131-137.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