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서평] 사회주의를 다시 새롭게 하기 : 민주주의, 전략, 상상력 본문

실천지 (2007년)/창간호

[서평] 사회주의를 다시 새롭게 하기 : 민주주의, 전략, 상상력

사회실천연구소 2014. 11. 7. 00:23


평자 : 조셉 E. 에티에르(Joseph E. Ethier) 조셉 E. 에티에르는 노스이스턴 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에 다니고 있다.

리오 패니치(Leo Panitch), 『사회주의를 다시 새롭게 하기 : 민주주의, 전략, 상상력(Renewing Socialism : Democracy, Strategy, and Imagination)』, Boulder : Westview Press, 2001. 리오 패니치는 토론토에 있는 요크 대학교의 정치학과의 탁월한 연구 교수이자 캐나다 왕립 사회의 성원이다. 그는 런던과 뉴욕에서 매년 발행되는 잡지 The Socialist Register의 공동 편집자이다. 그의 책은 『의회 민주주의의 종말(the End of Parliamentary Socialism)』, 『노동조합 자유에 관한 공격(the Assault on Trade Union Freedoms)』, 『위기에 처한 노동계급 정치(Working Class Politics in Crisis)』, 『사회민주주의와 공업의 호전성(Social Democracy and Industrial Militancy)』등이다. 무엇보다도 패니치는 사회주의적 학자이자 이론과 정치적 실천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는 훌륭한 저술가이다.

새 천년을 시작하는 무렵 우리는 자유주의적 개혁, 신우익(New Right)의 정치적 우세 그리고 지구적 자본주의의 극적인 전진이라는 여러 유령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사태 진전의 여파로 좌파가 지난 세기에 얻어낸 것들 가운데 많은 것이 사라지고 또 잊혀 져 버렸다. 게다가 곳곳에 두루 퍼진 이 “새로운 세계 질서”라는 수사 때문에 새로운 세기의 분위기는 의기양양한 승자들과 이에 대한 비굴한 순응으로 가득 차 있다. 갖가지 방식으로 우리는 자본이 승리했다는 것을 듣고 또 듣게 된다. 대안이란 없다는 말도 계속 듣게 된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새로운 정치적 경제적 분위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갱생시킬 것을 진지하게 논의하는 것은 모두 무의미하고 전망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혁명적 정신은 죽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리오 패니치는 그의 최근의 저서의 제목에서 암시하고 있듯이 새로운 사회주의, 새로운 민주주의, 새로운 전략,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새로운 상상력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우리 사회 속속들이 스며든 비관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패니치는 사회주의 정치의 재생과 사회주의 상상력의 개발을 요청한다. 문체로 보자면, 그는 마르크스와 그람시의 가장 좋은 구절들을 가져다 쓰고 있다. 이 두 저자로부터 패니치가 모아놓은 인용구들은 그 저작에 큰 호소력을 더해주는데 이는 그가 책 앞에 모아놓은 인용구(epigram)들 (레이몬드 윌리암스, 루이스 캐롤, 베르톨트 브레히트, 레오나르 코헨 등) 도 마찬가지이다. 방법론으로 보자면, 패니치는 다양한 접근방식들을 통합하여 쓰고 있다. 그는 공산주의의 몰락을 분석하는 데에는 역사적 방법을 쓰고 있다. 그는 또한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구조를 냉철히 평가하여 그 가운데 자유의 발전에 도움이 될 만한 건져내어 쓸 수 있는 부분을 갈라내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는 좌파를 분열시키고 현실적으로 무능하게 만드는 이분법들 가운데 몇 개에 의문을 표하고 있다. 그는 지구화와 맞서는 좌파의 전략들 몇 가지를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늘 자신의 중심 논제인 사람들의 역량과 상상력을 어떻게 배양시킬 것인가라는 중심을 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특히 개혁과 혁명의 문제를 다룬 장, 공산주의 몰락, 지구화, 그리고 “비관주의를 넘어서”의 장 등이 매력적이었다 (1장, 2장, 5장, 7장). 1장은 레이건과 대처 시기의 신우익의 득세에 대한 짧은 분석으로 시작한다. 패니치는 이러한 득세를 부르주아 혁명을 다시 확인하고 내거는 것의 일종이라고 본다. 그는 요즘 쓰이는 “개혁”과 “혁명”이라는 수사가 그 여파로서 나타난 것으로서 재평가한다. 이러한 용어들이 어떻게 해서 신우익이 자신들의 “위로부터의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담론에 갖다 써먹기 시작했는지를 확인하고 있다. 패니치는 “이러한 수사를 거짓 넌센스”라고 무시하는 것은 실수라고 강조한다. 그런 식으로 무시하게 되면 “그러한 말들이 담아왔던 본질적인 의미의 중요한 차원을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14쪽). 부분적으로 그들이 쓰는 “혁명”이라는 말은 사회주의적 열망과 사회주의 쇄신의 가능성 자체를 잠식하는 것이 본질적인 의미이다. 이 때문에 요즈음 좌파에게는 “깊은 비관주의”가 나타나고 말았다.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작업은 좌파의 정치 논쟁에서 주변으로 밀려나 버렸다. 패니치는, “현실적이 되어야 한다”는 압력 때문에 좌파가 “온건한 실용주의”에 정신을 팔아버리는 초라한 꼴로 전락할 것을 두려워한다. 이 “온건한 실용주의”란 “위로부터의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말에 끌려간 이들의 감수성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조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21쪽).

패니치는 주장한다. 사회주의의 쇄신에 필요한 것은 “사회 전체에 사회주의적 생각들과 창조적인 조직적 지적 역량이 파고들도록 하는 것”이다. 그람시를 원용하면서 패니치는 사회주의적 대항 헤게모니를 발전시키는 계획을 옹호한다. 사회주의적 여러 이상은 “사회의 최대한 넓은 범위의 제도들”에 파고들어야 한다. 단지 정당, 노동조합, 사회 운동 뿐만이 아니라 “공장, 사무실, 학교, 대학, 교회, 그리고 심지어 현대 노동 계급의 생활 중심인 상가 건물에까지” 파고들어야 하는 것이다 (43). 어떤 이들은 이런 생각을 유토피아적이라고 하겠지만, 바로 그게 중요한 점이다. 패니치에 따르면, “무엇보다도 꿈꾸는 것이 필수적이다.”(12) 우리의 자기만족과 순응성과 “온건한 실용주의”에 의해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는 능력조차 잃게 된다면 그런 세상을 실현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2장에서 패니치는 이전에 존재했던 사회주의적 제도의 형태들이 몰락한 것을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 그는 이 몰락 과정에 대한 여러 우익의 관점들, 이를테면 “역사의 종말”과 같은 주장을 반대한다. 공산주의의 몰락이란 사회주의가 본질적으로 작동 불가능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며,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작동 가능한 체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공산주의 몰락의 중요한 한 요인은 바깥에서 주어진 자본의 압력이었다. 이 압력은 전형적으로 억압적이고 강제에 의존하는 군사 경찰 기구로 귀결되었다. 다른 요인은 여러 공산주의 체제들이 민주주의의 경험이 결여되어 있었거나 아주 독특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패니치는 이 여러 나라들에서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혁명에 필수적이었던 특수한 조직 형태들이 일단 혁명이 완결된 뒤에 반드시 민주주의에 보탬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의 분석에는 이것보다 많은 내용이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은 새로운 사회주의를 만들어 나아감에 있어서 과거의 예와 함정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패니치는 강조한다.

지구화를 다루는 장은 문체로 보자면 이 책에서 가장 호소력 있는 부분이다. 패니치는 이 장 첫 인용문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한 대목을 쓰고 있다. 앨리스는 붉은 여왕(Red Queen)의 손을 잡고 정원을 뛰면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기를 쓴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앨리스는 똑같은 자리에 멈추어 있을 뿐이다. 붉은 여왕은 설명한다. “어딘가로 나아가려면 지금 그것보다는 적어도 두 배는 빨리 뛰어야 해!” 패니치는 현재의 지구적 자본주의의 단계를 보여주는 이미지로서 이 이야기를 사용한다.

붉은 여왕의 정원이 자본주의라고 생각해보라. 부르주아들이 이윤과 시장을 쫓아 인정사정없이 뛰어다니는 가운데에 생산, 공간, 산업, 상업, 직업, 장소 모두에 점점 더 빠른 변화가 일어나고, 계급과 국가의 여러 조직에도 근본적인 결과가 생겨난다. 이렇게 가열찬 팽창과 변화의 과정이야말로 자본주의가 보존되고 재생산되는 과정이다. 이제 붉은 여왕의 주변에서 헐떡거리며 뛰어가는 앨리스를 노동 운동, 사회 운동 또는 넓게 정의하여 “좌파”라고 생각해보라. 20세기 내내 죽도록 뛰었고 숱한 동원과 개혁을 이루어냈고 심지어 혁명과 민족 해방도 이루어냈건만 오늘의 세계는 여전히 대단히 자본주의적이며 사실 그 어느 때보다도 자본주의적으로 보인다 (139).

이러한 문장의 호소력을 넘어서서 이 장은 지구화에 대해 좌파 진영이 가지고 있는 몇 가지 태도들, 보기를 들어 지구화가 자본주의의 근본적으로 새로운 단계이며 여기에서 자본은 민족 국가를 넘어서게 되었다는 주장을 살펴보고 비판한다. 패니치는 이러한 태도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첫째, “이전 단계에서 민족 국가가 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의 정도를 높게 평가하여 마치 그 민족 국가를 놓고 좌파가 해왔던 실천 모습이 만족스러운 것이었던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 (142) 이러한 입장이 갖고 있는 위험은 이것이 지구적 수준에서도 비슷한 접근으로 이어진다는 데에 있다. 패니치에 따르면, 이러한 전략은 단지 붉은 여왕을 따라 잡으려고 더 빠르게 달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하지만 앨리스의 경우처럼 이렇게 해서는 아무 데로도 가지 못한다. 두 번째, 이러한 입장은 “오늘날의 지구화를 만들어낸 것이 국가이며 또 그 일차적인 목표는 국가를 재조직하는 것”을 간과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142). 이러한 측면을 무시하게 되면 우리는 일국적 투쟁과 국제적 투쟁이라는 그릇된 이분법을 키우는 결과를 얻게 된다. 패니치는 GATT와 WTO를 보기로 들고 있다. 분명히 이러한 기구들은 초국가 수준에서 작동하지만, 민족 국가의 역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캐나다와 멕시코 국가들은 각각 스스로의 부르주아의 이익을 대표한다. 이 그릇된 이분법은 “좌파가 국가를 변형시키기 위한 스스로의 전략을 개발해야 하며, 심지어 적절한 국제적 전략을 개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도 이것이 필수적이라는 사실로부터 주의를 분산시켜 버린다”(143).

마지막 장인 “비관주의를 넘어서서”에서 패니치는 아더 밀러의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멋진 심상을 가져오고 있다. 주인공은 “잘 알려져 있듯이 미국의 자본주의적 꿈의 핵심에 있는 인정사정없는 경쟁이라는 것의 비극적 차원을 상징한다”(197). 패니치는 이 연극이 보편적인 비극성을 갖게 되는 것은 “자본주의적 꿈이 무언가 잘못된 꿈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조차 자본주의를 넘어선 삶을 현실화할 방도를 찾을 길이 없다는 데에 있다”(198). 사실상 혁명과 개혁의 여러 이상들은 저쪽에서 채어갔으며 오늘날 신우익의 “혁명적” 담론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이 담론에서 과거의 사회주의적 기획의 실패가 자본의 승리의 증거로 제시된다. 이러한 담론은 사회주의의 쇄신을 옹호하는 이들을 주변으로 밀어버리고 “온건한 실용주의”를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넣는다. 질적인 사회 변화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주제들과 또 거기서 생겨나는 비관주의와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이 작업을 할 것인가?

사람들의 각종 역량과 상상력을 강화한다는 주제로 되돌아오면서 패니치는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저작을 끌어온다. 블로흐는 “유토피아적 의도”야말로 진정한 “역사의 원동력”이라고 본다. 이 원동력은 “건축, 미술, 문학, 음악, 윤리, 종교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198). 패니치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와 유토피아적 사상을 거부하는 다양한 조류들에 대해 비판적이다. 이러한 형태의 사유를 할 수 있는 역량은 비록 그 실제의 계획이라는 게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유용한 것이다. 우리가 오늘 살고 있는 세계와 다른 세계를 상상할 역량이 없다면, “민중은 심지어 지배 계급이 권력을 넘겨준다고 해도 사회를 운영할 수 없을 것이다”(222).

패치니는 우리 모두에게 자유와 평등이 실현될 계급 없는 사회를 상상해보라고 도전하고 있다. 그는 문제를 제시하고, 그 해법의 조건들을 전개하며 마지막 장에 가서는 그의 주장을 우리에게 가까이 와 닿도록 제시한다. 사회주의의 발전은 늘 생산력, 즉 패니치가 “여러 가지 역량들”이라고 부르는 것에 그 뿌리를 두어왔다. 오늘날 그렇게 발전되어야 할 생산력에는 무엇보다도 “일상생활, 경제, 시민 사회, 국가를 민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집단적 역량”(222)이 포함된다. 사회주의의 쇄신은 우리의 집단적인 해방의 역량을 기르고 축적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혁명의 정신을 발견”하고 “자유가 깃들어 살 수 있는 새로운 집을 지을” 수 있게 될 것이다(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