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왜 우리는 모든 일이 벌어진 뒤에도 여전히 사회주의자이고 맑스주의자인가? 본문

실천지 (2007년)/창간호

왜 우리는 모든 일이 벌어진 뒤에도 여전히 사회주의자이고 맑스주의자인가?

사회실천연구소 2014. 11. 7. 00:58

우리는 모든 일이 벌어진 뒤에도 여전히 사회주의자이고 맑스주의자인가?1

 

아서 맥이완(Arthur MacEwan)




1990년대를 시작하는 지금 미국의 맑스주의 사회주의자들은 몰리는 처지가 되었다. 소련과 동유럽에서의 혼란과 중국에서의 대량학살은 대체로 사회주의의 마지막 실패를 드러내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경기 후퇴에 대한 우리들의 되풀이된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미국에서 경제가 아주 오랫동안 확장되었다. 이 사실은 자본주의 체제의 자기모순적 본성에 대한 맑스주의자들의 분석을 맥빠지게 만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경제적 팽창에는 늘 보수 정책이나 또는 시장이 다시 활성화되는 것이 뒤따르기 때문에, 경제가 팽창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중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듯이, 누구든지 사회주의와 맑스주의는 죽었고 자본주의는 잇달아 승리할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러한 최근의 발전 과정에 대응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러한 객관적 요소들은 지적 영역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1980년대에 좌파 학자들 사이에는 맑스주의에 대한 뜻깊은 반대가 있었다. 한 때 이러한 반대가 맑스주의의 이름을 유지하긴 했지만, 맑스주의(심지어 가장 자유주의적으로 정의된 맑스주의 조차)의 기본 전제에 대한 거부는 맑스주의라는 말 자체(the rubric)를 뜻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릴 만큼 매우 철저했다. 때때로 이러한 학계의 발전은 ‘후기 맑스주의적 분석’ 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졌으며, 어떤 경우에 이들은 스스로를 ‘분석적 맑스주의자’라고 한다. 내 생각으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운동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좌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우파 공격이나 ‘실패한 신 (the god that failed)’2  운동의 부활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는 스스로를 여전히 사회주의자나 맑스주의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들 가운데는 단지 그들의 머리를 모래 속에 파묻고만 있는 사람 또는, 종교적 광신자처럼,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지 마음에 두지 않고 자신들의 신념을 굳게 지키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 가운데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결코 지지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사회 전체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도, 왜 우리는 이 모든 상황이 벌어진 뒤에도 여전히 사회주의자이거나 맑스주의자인지를 설명할 의무가 있다.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들


우리가 1980년대의 전개과정에 대해 그동안 내 놓았던 몇 가지 답변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참으로 만족스럽지 못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처지에 대해 만족할 만한 이론적 해석을 내놓고자 한다면, 나는 먼저 우리의 앞길을 막고 있는 이러한 약한 (또는 잘못된) 주장들을 없애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몇 가지 보기를 생각해보자.


1. 소련(또는 중국, 또는 폴란드)은 결코 사회주의적이지 않았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들 국가들에서 벌어지고 있던 일들이 맑스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의 목표와 반대되는 것들이었음을, 그리고 그러한 나라들의 위기가 우리에게 패배감이 아닌 승리감을 가져다 줄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은 미국의 – 그리고 실제로 전 세계의 - 대다수 사람들은 이러한 국가들을 사회주의나 맑스주의와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업신여긴 것이었다. 우리들이 아닌 그들에게, 소련의 위기, 폴란드에서 저항세력의 등장, 헝가리에서 점점 강해지는 시장의 중요성, 그리고 중국에서 탄압 등은 모두 사회주의의 실패를 뜻했다. 우리는 우리가 그들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밝혔는데도 똑 같은 부류로 인식되었다.


더 나아가 최소한 이들 국가들은 하나의 조화로운 기구로서 시장에 의지하지 않은 채 고도로 집중화된 방법으로 경제 생활을 조직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의 시도는 어려움에 처하여 끝내 좌절되었다. 이는 분명히 이들 국가들의 경험이었다. 민주적인 사회, 정치 환경에서는 계획에 대한 희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뜻을 같이했듯이, 경제 계획이 기술적으로 단순한 행위라는 생각은, 즉 말하자면 이미 철 지난 생각이다. 또한, 이러한 경험들은 수입 분배 기제로서 자본주의 시장을 없애버리고 수입을 좀 더 공평하게 분배하는 방법을 세운다고 해서, 건강하고 민주적인 정치 구조가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민주적 정치 구조 없이, 공정한 분배는 실현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정작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국가들의 사회 체제를 어떻게 정의하든지 상관없이 – 윌리암 힌튼(William Hinton)3 이 중국 지도자들을 파시스트라 한 것은 매우 그럴 듯하다 - , 맑스주의와 사회주의를 품었던 사람들이 그러한 국가들을 건설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행위는 전반적으로, 보기를 들면 관료들이 자신들은 민주적이며 인권 옹호에 앞장서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냉소적이거나 기회주의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레닌, 마오, 그리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우리들이 그러한 것처럼 맑스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신념에 투철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 내가 얘기할 것처럼 – 그들의 노력이 ‘사회주의적인’ 것이라 하는 무엇을 이끌어냈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우리에겐 단지 다음과 같은 어려운 질문만 남게 될 것이다. 왜 우리들의 노력은 좀 더 나은 것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2. 미국에서 장기 호황은 자본주의의 성공으로 설명될 수 없다. 레이건과 부시 시대의 성장은 느렸으며 소득 불균형이 아주 심해져서 대중들의 편안한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자본주의의 성공은 한 개별 국가의 사례를 통해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국가들은 세계 경제 체제의 한 부분으로서 서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 1980년대 자본주의의 위기는 정도에 있어서 동유럽의 경제 위기와 꼭 닮았다. 보기를 들면,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에서 생활 수준이 얼마나 낮아졌는지를 생각해보라. 마지막으로 미국의 호황은 빚더미 위에 세워진,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며, 응보의 시간은 분명 올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사실이며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으로 문제가 풀리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일부는 미국의 대중적 의식과 관련이 있다. 그 대중 의식은 우리가 마주쳐야 하는 현실의 한 부분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나중에 이 호황기의 길이를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호황기가 그렇게 오래 갈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만 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우리는 지난 다섯번의 불황 가운데 열 한 번을 예상했다.


경제적 팽창이 미국과 제3세계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친 파국적인 영향에 관해 말하자면, 이러한 상황은 맑스주의적 분석에 잘 들어맞는 것이긴 하지만, 미국에서의 경제 호황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왜 그에 대해 아무런 저항이 없는가? 궁극적으로 맑스주의는 단지 수 많은 대중들의 상황이 악화될 것이라고만 말하지 않는다. 맑스주의는 또한 바로 그 대중들이 그들이 처한 상황과 관련하여 무엇인가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미국에서, 맑스주의자들이 사태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에 어떤 지적인 만족을 느끼고 있지만 (제발 이러한 아이러니를 놓치지 말길!), 그 어떤 저항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 실제로, 미국에는 노동운동에 몸 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 의한 ‘어쩔 수 없는 동의’라 할만한 상황이 있다 - 우리들의 분석이나 우리들의 정치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나는 현재 위기를 겪고 있는 자본주의가 혼돈 속에 빠져있고, 우리 말을 들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이 점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3. 요즈음 좌파 지식인들 사이의 변화는 맑스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선 안된다. 이들은 학계의 보상에 대응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반맑스주의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승진할 수 있고, 그들의 부르주아적인 동료들에게 인정받거나 칭찬을 들을 수 있으며, 경제적 보상과 영예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은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는 사실이지만 (이 말을 하면서 어떤 특정인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문제들을 불러 올 뿐이다. 왜 우리들은 사람들에게 학문적 성공이라는 매력에 저항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할 맑스주의적 문화를 만들지 못했는가? 도대체 맑스주의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그토록 학계 안에 철저히 빠져들거나 또는 의존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 왜 좌파 지식인들이 맑스주의에 도전하고 있는가와는 상관없이, 그들의 도전은 맑스주의 패러다임의 면면들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들이 비판하는 몇가지 사항의 유효성을 부정하진 않지만, 동시에 그들의 비판을 미연에 방지할 만한 방법으로 맑스주의를 다시 구성하지 못했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비판을 받아들이고 그 비판들을 종합하며, 맑스주의에 부족한 것을 찾는 것은 왜 그런가?  게다가 우리들 가운데 다른 사람들은 맑스주의가 여러가지 문제를 갖고 있는데도 왜 맑스주의에 매달려 있는가? 


자기비판


오늘날 사회주의와 맑스주의의 위기에 대한 이러한 만족스럽지 못한 답변들을 거부하면서,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좀 더 나은 답변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가 맑스주의를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방법은 맑스주의의 긍정적인 요소들, 즉 왜 맑스주의가 우리에게 지금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이해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제공해주고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정치적 활동을 위한 토대를 제공해주는지에 대한 이유들에 놓여 있다. 맑스주의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는 또한 맑스주의가 지닌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는 데 달려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자기 비판적 태도로 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의 약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이러한 위기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할 입장에 서 있지 못할 것이다.


보기를 들면, 우리는 – 여기서는 사실상 미국내 범좌파를 뜻한다 – 공산주의의 전개과정에 합리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우리는 변명하는 사람들이었고, 미쳐 날뛰는 반공주의자들이었으며, 타조처럼 머리를 모래 속에 쳐박고만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았다.


또는 미국 경제의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이 나라가 자본주의를 잘 유지해가는 능력을 여러가지 면에서 폄하해왔다. 우리는 미국 도처에서 불황까지는 아닐지라도 경기 후퇴가 있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실패와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저하시키는 문제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하는 동안, 우리는 전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 확실히 자본가들만이 아니다 – 엄청난 부를 쌓는 것을 업신여기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왔다. 보수 세력들이 정치적으로 승리할 때마다 그리고 경제가 새롭게 좋아질 때마다, 우리는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었다. 


우리는 또한 맑스주의 이론이 지닌 많은 약점을 모른 채 했다. 특히 우리는 흔히 공산주의 국가들에 민주주의가 빠져 있다는 것이 맑스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려고만 했다.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폐해들로부터 맑스주의를 분리해내고자 하는 이러한 주장은 맑스의 저작에는 – 그리고 레닌의 저작에서도 마찬가지로 – 좀 더 민주적인 절차, 좀 더 나은 대의제, 그리고 직접 민주주의의 확장에 대한 되풀이되는 요구가 있다는 말로 시작한다.4  이 모든건 다 그렇다 치자. 하지만 우리는, 맑스주의 또는 다른 어떤 사상들을 가지고, 민주주의에 대해 분명히 말하는 것을 넘어야 하고 전체 이론과 전체 사상, 그리고 민주적 실천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것이 필요하다. 더군다나 맑스주의는 맑스보다 더 큰 무엇이며, 맑스와 레닌 그 이상이다. 성경을 말하는 것만으로 이단 재판을 면할 수 있을지언정 (맑스나 레닌의) 고전에 있는 훌륭한 사상을 말하는 것만으로 맑스주의 자체가 지닌 오류들을 면제해줄 수는 없다.


좀 더 본질적으로,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맑스주의에 대한 역사적인 방어는 맑스주의 운동이 경제적으로 후진적인 국가들에서 권력을 쟁취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경제적 낙후함은 정치적 후진성 –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결여, 의회제도의 부재, 그리고 정치적 반대활동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은 것 - 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권력 투쟁도 – 보기를 들면, 소련에서 – 투쟁 과정에서 민주적 경험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고도로 집중화된 방법으로 조직되었다. 그래서 맑스주의자들이 막상 국가 권력을 쟁취 했을 때, 경제적으로 낙후한 상태는 맑스주의자들로 하여금 첫째로 생산에 집중하도록 하였다. 풍부한 민주적 경험이 바탕이 된 정치 운동이 부재한 상태에서, 요구된 생산은 경제 조직을 하향식 체제로 이끌게 되며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한 가능성을 철저히 녹슬어 삭게 만든다 – 이것은 또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삭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주장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적대감을 살펴보면 좀 더 다듬어질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만약 ‘제국주의 위협’ 이라는 주장이 잘 개진된다면, 나는 이것이 맑스주의 운동을 지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침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사회주의 운동이 제국주의 위협에 부딪쳤을 때 사회주의와 상반되는 독재 행위에 의지하게 된다면, 그때 나는 사회주의 운동이 늘 사회주의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끝나게 될 것이라는 결론 이외에는 다른 대안을 찾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제국주의 위협이 늘 – 또는 적어도 사회주의가 하나의 세계체제가 되기 전까지는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역사적 주장은 충분한 타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역사적 조건은 만족할만한 설명을 할 수 없다. 만약 역사적 조건이 갖춰진다해도, 그것만으로는 의식적인 정치 활동에서 핵심이 될 수 없다. 역사적 조건들은 상황을 다소간 우호적으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의 정치적 실천활동은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느냐와 훨씬 더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리들의 맑스주의 – 우리들의 정치적 실천 활동의 토대를 형성하는 일련의 사상들 - 를 좀 더 철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어떻게 맑스주의가 우리의 목적을 이루려는 데 도움되거나 방해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가 말한 것의 보기로서, 나는 맑스주의의 두 가지 결함을 지적하고 싶다. 물론 그러한 결함은 치명적이지 않지만, 우리로 하여금 민주주의의 확장이라는 우리의 목적과 반대되는 활동을 하게 만들 수 있는 요소들이다. 맑스주의의 핵심적인 기여 가운데 하나는, 내가 뒤에 살펴볼 것처럼, ‘생산’에서 나오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생산에 기반을 둔 계급 관계에 대한 특정한 맑스주의 이해는 반자본주의 투쟁에 응집력과 힘을 실어주었다. 동시에 – 그리고 이것이 내가 말한 두 가지 결함 가운데 첫 번째이다 – 계급관계에 대한 맑스주의 이해에 따라, 맑스주의자들은 다른 모든 사회적 갈등 요소를 이론적으로는 부차적이고 실천적으로는 노동자- 자본가 투쟁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맑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든 혁명 후의 사회든지 간에, 국가 조직을 부차적인 문제로 바라보곤 했다. 어떤 경우에는, 자본가들이 생산을 통제하고 있다면, 정치적 절차들 – 특히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권리들 – 은 큰 뜻을 지닐 수 없을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다른 경우에는, 노동자가 통제하고 있다면, 그땐 정치적 절차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러한 경향성이 그렇게 직설적인 진술로 표현된다면, 어떤 맑스주의자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많은 이들은 손쉽게 그러한 믿음을 맑스주의에 대한 왜곡으로 간단히 처리할 것이다. 문제는 맑스주의가 일정하게 그러한 ‘왜곡’을 불러왔다는 점이다. 나는 우리가 ‘생산’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 맑스주의의 ‘왜곡’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생산을 둘러싼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갈등이라는 면에서 바라보는 것은 다층적인 토대를 지니고 있는 투쟁들에 기여할 수 있는 맑스주의자들의 능력을 또한 제한하고 있다. 맑스주의자들이 흔히 페미니즘이나 인종 문제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바라보았던 하나의 이유는 우리들 대부분이 백인 남성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이론 자체에 내재해 있다. 우리들의 이론은 사람들의 삶에서 중요한 문제들을 그들의 계급적 지위와 동일시 하였다. 계급적 지위란, 생산에서의 역할을 통해 정의된다 –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처럼,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최근까지도 ‘생산’이 가정에서의 생산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혁명 뒤의 사회에서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혁명 운동에서 여성과 소수 인종들은 빈번히 생산을 둘러싼 ‘주요 투쟁’이 모든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만 들어왔다. 


계급과 ‘생산’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인종이나 젠더 문제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 그 무엇보다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사람들 – 대부분 노동자들 – 이 생산에서 멀어진 투쟁에 참여하게 될 때, 맑스주의는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소비자로서 사람들의 필요는 우리들의 분석에서 아무런 구실도 하지 못한다. 단지 최근 들어서야 맑스주의자들이 환경 문제를 말하기 시작했다. 좌파들이 계급 투쟁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지 또는 새로운 사회 운동들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은 그들 사이에서 폭넓게 인식되고 있다. 불행히도 맑스주의는 한 면만을 강조하는 하나의 이론을 세움으로써 이러한 인식 또는 오해에 이바지했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맑스주의가 지닌 두 번째 결함 또는 약점은 맑스주의가 그것이 태어나게 된 19세기적 뿌리에 충실하게 생산의 증가를 인류 진보의 원천으로 바라봤다는 사실에서 나왔다. 맑스주의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오류가 무엇이든지간에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진보한 체제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생산력의 발전을 혁명적으로 풀어놓았고, 우리의 환경에 대한 우리의 통제 능력을 높여 주었으며, 인간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잠재성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다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우리가 자본주의 역사가 성취한 것에 대한 우리들의 환호를 정책적 처방으로 전환할 때, 우리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다른 여타의 투쟁들을 계급 투쟁에 종속시켜왔던 것처럼, 우리는 다른 모든 형태의 진보를 생산의 진보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있다.


선진 자본주의 사회내에서 우리는 종종 생산을 계속 확대시킬 것을 요구하는 정치를 다그치거나 또는 최소한 받아들인다. 보기를 들면, 선진국에서 우리는 완전 고용이라는 가치있는 요구를 주장하며 ‘인플레이션을 제한하려는’ 보수적인 노력보다는 케인즈적인 팽창 정책들을 지지한다. 가난한 국가들에서, 우리는 생산의 발전을 저해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공격하고 우리는 좀 더 빠른 경제 성장을 요구한다. 우리가 지지하는 프로그램은 직접적인 이점을 가지며, 또한 그 프로그램들은 자본과의 투쟁 속에서 하나의 계급으로서 노동자들을 강화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생산주의’ 정치를 채택할 때, 우리는 ‘보다 많은 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부르주아적인 슬로건에 맞서지 못하며, 우리는 분배 문제와 다른 목적들을 제쳐두게 된다. 


맑스주의 세력들이 혁명이 성공한 뒤 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생산의 확장에 집중해왔다. 물론 이러한 상황들은 늘 자본주의가 그것의 역사적 책무를 이루는데 실패했으며,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주의적 축적의 길을 따르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던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주의적 축적이 아무리 성공적이었을지라도, 그것은 평등과 여성 해방, 그리고 인간적인 작업 환경과 같은 다른 목적들을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참으로 어려운 점은 맑스주의자들이 경제적 복지는 더욱 더 많은 생산을 확보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대단히 불평등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한,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 확장을 통해 발전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은 어쩔 수 없이 꺽일 것이다. 맑스는 ‘우리의 필요와 기쁨은 사회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들을 필요와 기쁨을 만족하는 목적에 의해서가 아닌 사회에 의해서 평가한다. 필요와 기쁨은 사회적 본성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상대적이다.’5  지난 200년동안의 경험들은 – 혁명으로 탄생한 사회에서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 보다 많은 생산이 우리의 ‘필요와 기쁨’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명확히 하면서 맑스의 핵심을 강조한다. 그러나 맑스주의는 수 십년동안 ‘생산력주의’때문에 시달려 왔다. 


나는 맑스주의자들의 생산력주의와 우리들이 생산의 관점에서 계급 투쟁을 일방적으로 강조한 것이 혁명으로 탄생한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침해에 이바지해왔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혁명 운동의 진보를 제한해 왔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어떤 것도 반민주적이고 독재적인 활동을 자동적으로 끌어낸 것은 아니다. 스탈린주의 – 그것이 극심한 인권 탄압의 형태를 띨때나 또는 좀 더 일반적으로 권위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 형태를 띨때에도 – 는 맑스주의의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분석이 지닌 결점들을 분명히 드러내고 그것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하고자 한다면, 맑스주의는 우리가 스탈린주의를 피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우리는 스탈린주의가 거의 대부분의 좌파적 사상을 지배했을 때인 교조적 시대로부터 확실히 멀리 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 나는 우리들 모두에게 우리는 우리가 해왔던 것의 한계를 인식하고 아주 겸손한 태도로 사안에 다가선 후에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만을 주지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맑스주의의 강점


앞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가 뜻하는 맑스주의가 무엇이고 우리가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시간을 낼 필요가 있다. 맑스주의는 정치적 실천과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분석적 접근 둘 다를 뜻한다. 두 가지 모두를 구성하는 것을 함께 묶어, 약간 거창하게 말하자면, ‘세계관’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세계관’이라는 개념이 사안들에 대한 신성한 접근을 함의하기 때문에 내가 그 개념을 좋아하긴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맑스주의는 ‘총체적’이라는, 즉 맑스주의는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제공한다는 생각을 거부해야만 한다. 보기를 들면, 만약 우리가 맑스주의적 분석에서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해라고 하는 문제로 넘어가고자 할 때, 우리는 많은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확실히 맑스주의자들의 자기 비판의 어떤 면은 우리의 맑스주의를 통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의 한계를 서술하는 것이어야 한다.)


정치적 실천


나는 우리가 맑스주의의 정치적 실천 요소를 설정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과학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정치가 우리의 분석에서, 우리의 역사 이해에서 나온다고 주장하려고 한다. 사실상, 우리의 정치적 실천과 우리의 분석은 변증법적 관계에 놓여 있으며, 만약 우리가 솔직해진다면, 우리는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우리가 우리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거나 지지하려는 수단으로서 우리의 분석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것에는 어떠한 잘못도 없다. 다만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쓸모있다는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 역사에서 맑스주의에 대한 헌신은 철저한 저항에 헌신하는 것을 뜻한다. 대체로 급진적 저항의 다른 형태들은 (심지어 맑스주의 이상으로) 주변부로 밀려나거나 쉽게 포섭되거나 흡수되었다. 맑스주의자들로서 우리는 자본주의를 ‘송두리째’ 거부하는 것에 전념해왔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를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를 다른 무엇인가로 대체하려고 하였다.


맑스주의의 저항적 태도를 강조함으로써, 나는 흔해 빠진 ‘혁명이냐 개혁이냐’라는 논의를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러한 논의가 특별히 쓸모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상적인 정치적 선택을 해야하는 미국에서 대부분의 예에 있어서 혁명-개혁 선택은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혁명은 당면 의제가 아니다. 따라서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개혁을 위해 나아가야 하며 어떤 개혁을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지이다. 그 개혁이 자본주의에 도전할 것이며, 구조적 변화를 위한 토대를 닦을 것이고, 우리가 원하는 눈앞의 성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며, 또한 혁명 – 우리 사회 체제의 본질 면에서 근본적이고 간단없이 지속될 변화 - 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우리를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 있게 할 것이다.6 


그래서 실천이라는 면에서 맑스주의자들과 또한 변화를 원하는 다른 사람들 사이의 차이점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그 맑스주의자들이 ‘투철한 저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글쎄, 가끔 당신은 간단히 말할 수 없다. ‘개량주의적 개혁’과 ‘혁명적 개혁’ 사이에 분명한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그것은 우리가 사회의 제도적 구조와 관련하여 우리 자신을 어떻게 자리 매김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맑스주의적 반대는 단순히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이 개혁이 사안들을 더 좋게 만들 것인가? 개혁이 대중의 삶을 나아지게 할 것인가? 대신에, 대중의 삶을 좀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있는 여러가지 개혁에 관계하는, 맑스주의적 반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즉, 이러한 개혁들 가운데 무엇이 좀 더 나은 변화의 토대를 제공할 것인가? 어떤 개혁이, 어떤 면에서, 체제가 일반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에 도전할 것인가? 어떤 개혁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미래의 변화를 주도할 권력을 제공할 것인가? 보기를 들어, 환경 파괴 문제를 고려해보자. 강과 쓰레기 더미를 치우는 것, 그리고 기업들이 이 비용을 쓰게 하려는 계획은 확실히 대중들의 삶을 나아지게 할 수 있는 하나의 개혁이다. 그러나 맑스주의적 강령은 최소한 청소와 비용 지불만큼이나 그 예방에 집중하고자 하며, 투자와 생산과 관련된 기업들의 결정 과정을 통제하는 것이 예방의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기업의 결정 과정들에 대한 공적 통제가 자본의 특권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다.


더 나아가, 개혁의 내용에 덧붙여, 어떻게 개혁을 이뤄낼 것인가가 문제이다. 그러한 일을 하는 맑스주의적 방식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채널’을 통해 일을 하는 것 대신에 주로 대중 동원과 대중 조직에 의지하는 것이다. 보기를 들어, 시에라 클럽(the Sierra Club)7이  대기 오염과 수질 오염을 규제하는 법안을 의회가 통과시킬 수 있도록 아주 노련한 로비스트를 쓴다면, 그들은 어느정도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똑같은 결과가 효과적인 공동체 조직과 대중적 저항을 통해 나온다면, 그 결과들은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가질 것이다. 참가자들은 그러한 활동을 통해 그들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 것을 배울 것이고, 조직적 경험과 민주적 실천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강한 저항적 태도, 즉 이러한 맑스주의적 활동은 좀 더 진전된 변화를 원하는 대중들에게 권력을 줄 것이다.


맑스주의를 저항적 태도와 동일시하면서, 나는 이것이 미국과 나머지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하나의 있을법한 사례가 되긴 하지만, 맑스주의가 공식적 이데올로기로서 채택된 나라들에서 확실히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덧붙여야만 한다. 우리 스스로를 맑스주의자라 할 때, 우리는 우리들 자신과 많은 다른 지역에 있는 우리 동지들 사이에 장벽을 세우는 위험을 무릅쓰게 된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달게 받아야만 하는 위험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그것을 업신여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분석적 접근


맑스주의 세계관의 또 다른 부분은 우리들의 분석적 접근, 즉 우리의 정치를 위한 토대를 제공하는 세상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이다. 나는 맑스주의의 정수를 뽑아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러 다른 상황들에 처해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주된 관심사가 다른 많은 다른 사람들에겐 맑스주의의 정수도 다르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내 자신의 맑스주의 분석에서 중요하다고 판단된 몇 가지 사상을 설명하고자 한다. 경제학자인 나에게 있어서, 맑스주의는 세가지 중요한 개념들과 관련되어 있다. 즉 노동 가치 이론, 축적 이론, 그리고 위기 이론. 그러나 독자들은 각각의 개념에 내가 부여하는 뜻이 맑스주의자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노동 가치 이론은 자본주의 생산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설명이다. 내 관점에서 이 이론의 주된 유용성은 그것이 질적인 분석, 즉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갈등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생산 과정 – 가치 창출 과정 - 에 대한 설명이라는 점이다. 이 이론의 핵심(crux)은 노동자가 그들이 일할 수 있는 능력, 즉 그들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파는 행위를 통해 고용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자본가는 바로 이 노동력에서 최대한 많은 양의 일, 즉 노동이 이루어지게 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나아가 자본가가 노동력을 샀기 때문에, 그는 노동력을 통제하고 노동자를 적당하다고 판단되는 곳에 배치할 수 있는 형식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 자본가가 노동자가 생산하는 것을 소유하기 때문에, 그는 노동이 임금을 초과하는 가치를 창출할 수 있게 할 수 있는 한 이윤을 획득할 수 있다. 


자본주의 생산 과정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노동자와 자본가는 두 가지 문제, 즉 노동 과정에 대한 통제권과 수입의 분배라는 문제에 있어서 서로간에 필연적으로 갈등 관계에 있게 됨을 함의한다. 체제가 성장함에 따라 –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노동자가 그 이득을 나눠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의 근거 - 실질 임금이 상승할 수는 있지만, 한 쪽이 다른 쪽에 의해 임금을 받으며 고용되는 한 통제와 분배에 관한 갈등은 제거될 수 없다. 이러한 결론의 중요성은 어떤 사람의 노동에 대한 통제와 수입 분배의 형평성은 대중들의 경제적 복지에 영향을 끼치는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라는 핵심적 사항에 두고 있다. 나는 여기서 이 점을 다시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맑스주의 주장에서, 이것이 갖는 꼭 필요한 구실은 말할만한 가치가 있다.8 


어쨌든 노동 가치 이론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근본적 갈등이 자본주의에 고유한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 갈등은 덜해질 수는 있을지 몰라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결코 제거될 수 없다. 이 이론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이 바로 이 결론이라면, 나는 이것이 아주 중요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동 가치 이론은 우리에게 반자본주의 투쟁을 위한 아주 논리정연한 토대, 즉 우리의 저항 활동을 위한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노동 가치 이론에서 그 이상을 얻고 있다. 


노동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은 맑스주의가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 드러난 열악한 조건에만 적용되는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자주 무시되어 왔다. 비판에 따르면, 노동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은 노동에 대한 ‘갤리선을 끈 노예’적인 관점이며, 오늘날 세계의 수 많은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생활 수준의 변화를 보지 않는 것이다. 맑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적인 노동에 대해 우리의 수사학적 공격에서 드러나는 지나친 단순화와 과장된 진술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될 것이다. 그러나 노동 가치 이론은 우리를 그러한 오류에서 벗어나게 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노동 가치 이론은 노동자들 수입의 절대적 수준이나 그들에게 닥친 육체적 어려움의 정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에 대한 통제와 수입 분배의 문제에 강조점을 두는 노동 가치 이론은 우리의 정치를 위한 훨씬 더 확고한 토대를 제공해준다. (여전히 우리의 수사학적 화려함은 실질적으로 어떤 근거를 지니고 있다. 가장 부유한 나라들의 가장 부유한 지역에서뿐만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한 부분인 제3세계 전체에 걸쳐 절대적 빈곤과 육체적으로 험한 일은 널리 퍼져 있다.) 


노동 가치 이론은 또한 그것이 우리들에게 자본주의가 가장 뛰어난 생산력을 지닌 기술을 제공해준다는 생각을 거부할 수 있는 근거를 던져 주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향한 하나의 사례를 발전시키는 데 아주 쓸모있는 생산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이미 우리에게 최상의 – 말하자면 가장 생산성이 좋은 – 삶의 방식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이 주장하기를, 자본가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서 그것을 노동자에게 주는 것은 일이 작동되는 방식에서는 아무런 차이점이 없거나 또는 덜 생산적인 기술의 영역에서만 단지 차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테크놀로지 – 무엇인가가 생산되는 방식 – 의 선택은 단지 하나의 기술적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선택, 즉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사회적 투쟁의 산물인 것이다. 자본가는 가장 생산성이 높은 테크놀로지가 아닌 그들의 생산 과정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시켜줄 수 있는, 그럼으로써 그들의 이윤을 지켜줄 수 있는 테크놀로지를 선택한다. 여러 가지 보기를 생각해볼 수 있다. 팀 단위 생산이 보다 많은 산출을 가능하게 하는 조립 라인,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사용되는 게 아니라 노동자들의 활동을 감시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는 컴퓨터, 노동자들을 서로 분리시키기 위해 고안된 워크 스테이션 등등. 우리는 이러한 테크놀로지가 형편없다는 것을 알기 위해 노동 가치 이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노동 가치 이론은 우리에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우리의 주장을 위한 아주 튼실한 기반이다.9 


마지막으로 노동 가치 이론은 그것이 일반 대중들을 경제적 생활의 단순한 대상이 아닌, 주인공으로 다루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매우 쓸모 있다. 노동 가치 이론은 경제적 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조직된 또는 개별적인 노동자들과 함께 생산 과정을 투쟁의 장으로 알게 한다. 테크놀로지, 가격, 수입의 분배, 이윤, 그리고 전반적인 산출의 수준 – 이 모든 요소들은 노동자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뿐만 아니라, 이 요소들 또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 결정된다. 모든 형태의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가 자본주의의 ‘제물’이 되는 방식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맑스주의는 노동자가 그들 자신의 역사를 만드는데 ‘주인공’이다는 점을 강조하기 때문에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다르다. 사물을 바라보는 이러한 방식은 노동자 투쟁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 


축적 이론은 지금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게 하는 맑스주의 이론의 두 번째 기둥이다. 자본주의의 두드러진 모습 가운데 하나는 엄청난 역동성, 즉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능력이다. 축적 이론은 이러한 역동성을 시장 경쟁력의 산물이라고 설명한다. 사회가 점점 더 경쟁적인 상황에서 조직화 됨에 따라, 즉 전자본주의적인 법적 제약과 특정 집단에 대한 보호가 줄어듦에 따라, 개별 자본가들은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비용을 줄이는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자본가들은 새로운 기술을 찾아야 하며, 그리고 빈번히 새로운 기술은 회사가 성장할 때에만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경쟁 투쟁은 성장 동력이 된다. 즉, 규모의 경제가 주는 이점을 확보하고 따라서 비용을 줄이기 위해 기업들은 점점 더 커져야 한다.10 


성장 동력이 매우 실질적인 고려에서 나오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개별 기업과 전체 체제의 팽창을 이끄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힘이 된다. 맑스는 이것을 자신의 유명한 말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야말로 모세이고 예언자다!’ 성장은 자본주의의 ‘영혼’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개별 기업들이 예외적인 경우를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 어떤 자본주의 기업이나 자본주의 체제도 성장을 멈추는 쪽을 ‘선택’할 수는 없다. 


잇달은 팽창이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특징이라는 결론이 나올 때, 축적 이론은 강력한 정치적 함의를 갖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양한 현상들을 팽창의 산물로 인식할 때, 우리는 사실상 그러한 현상들을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본질적 현상으로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불변의 체제가 아니며 축적의 표현은 정치적 행동을 통해 희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그러한 현상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되는 한 끊임없이 다시 나타날 것이다. 몇 가지 보기를 살펴보자.


기업 확장을 위한 몇 가지 주요 경로 가운데 하나는 국제적 팽창, 즉 새로운 자원과 새로운 시장을 끊임없이 찾는 것이다. 국제적 팽창은 직접적으로 기업과 기업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의지하는 국가권력이 경제적, 정치적 통제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통제의 확대, 그리고 그것이 일으키는 갈등은 바로 우리가 제국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축적 이론은 제국주의와 제국주의 국가들의 다양한 군사적 공격 행동을 자본주의의 근본적 본성과 연결시킨다. 여기서 나오는 교훈은, 철저한 반제국주의 정치가 필연적으로 반자본주의 정치로 된다는 점이다.11 


자본주의의 국제적 작동을 축적 과정의 한 부분으로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또한 세계 경제에서 되풀이 되는 혼돈을 설명할 근거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혼돈은 이른바 제3세계의 부채 위기, 어마어마하게 커지고 있는 미국의 해외 부채, 그리고 극심한 미국의 무역 적자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 각각은 특정 사건들(보기를 들어, 1970년대의 석유 파동)이나 정책들(보기를 들어, 1979년부터 1982년까지 미국의 긴축 화폐 정책) 때문에 더욱 나빠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직접적인 요소들에 집중하고 자본주의 축적 구조에 도전하지 못하는 정치적 대응은 이러한 혼돈을 풀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이 혼돈이 수 백만의 대중들에게 지우는 엄청난 짐을 덜어주지도 못했다.12 


반제국주의 정치와 유사하게, 환경 보호의 정치는, 사실상 또한 반자본주의적이다. 자본주의의 성장 동력은 기업들로 하여금 그들 행동이 갖는 비시장적, 사회적 대가를 고려하지 않은 채 전세계의 자원을 마구잡이로 삼켜버리게 만든다. 나아가 기업들은 그들의 이윤을 확대하기 위해 늘 그들의 생산 비용만큼 사회에 짐을 지우려고 한다. 실제로 이것은 폐기물을 강에 버리고, 매연을 대기 중에 쏟아내고, 그리고 한 때 옥토였던 땅을 불모지로 만들어버리는 것들을 뜻한다. 이러한 행위들은 자본가들이 환경을 망치기 위해 쓰레기를 고르는, 특별히 사악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대체로 자본가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러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축적이라는 환경 속에서 그들은 선택권이 없다.13 


축적은 또한 지난 세기 동안 여성들의 경제 활동에서 벌어졌던 엄청난 변화를 추동해냈다. 자본주의의 성공적인 팽창이 가정에서 여성들의 노동을 통해 전통적으로 공급되어 오던 상품과 서비스가 이윤을 얻기 위해 생산되고 팔리는 그러한 ‘보편적인 시장’을 만들어 내자, 여성들은 거의 동시에 집 밖으로 내몰리게 되었고 임금 노동에 편입되었다. 그 결과 나타난 가정과 공적 사회 서비스에서 수 많은 변화들은 단순히 여성들이나 정책 입안자들의 개별적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축적의 보다 거대한 사회적 과정의 산물인 것이다. 축적 이론은 가정에서 일어난 변화와 정부가 제공하는 사회적 서비스와 같은 문제들을 다루는 정치 활동, 즉 여러가지 개혁의 한계와 영향, 그리고 그러한 개혁이 자본주의의 전반적 운용과 맺는 관계를 인식하는 정치 활동을 만드는 데 쓸모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가장 일반적으로, 축적 이론은 정치를 위한 토대를 제공해준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팽창의 토대를 정의할 때 우리가 축적이론의 도움으로 기존 체제 안에서 개혁이 갖는 한계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축적 이론은 반자본주의 정치로 이끈다. 왜냐하면 축적 이론이 대중적 저항을 일으키는 특정한 사회적 무질서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의 자연적 결과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정 상황에서 축적 이론은 우리의 요구가 어떻게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형성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게 해준다. 


위기 이론은 또한 우리의 정치를 위한 그 이론의 함의 때문에 가치가 있다. 위기 이론은 자본주의의 근본적으로 비합리적인 본질을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저항의 정치를 강화시키는, 주로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쓸모가 있다. 


위기 이론은 여러가지 형식을 취한다. 많은 다른 사람들은 왜 자본주의가 되풀이해서 스스로 혼란에 빠지는가를 설명할 때 서로 다른 메커니즘을 강조한다. 어떤 사람들은 특히 독점자본주의 시대에는 자본주의 체제의 생산 능력이 그 사회의 소비 능력을 능가하는, 따라서 생산품이 이윤을 남기고 팔릴 수 없는 강한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과잉 생산이 노동 시장의 축소로 이어지며 그 결과로 이윤에 대한 임금의 압박이 발생한다고 강조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변화, 즉 생산 현장에서 직접 노동력을 끊임없이 기계로 대치하는 것, 이윤율 저하의 경향을 만든다는 전통적인 주장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누가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와 상관없이, 이 모든 주장들의 힘은 바로 자본주의의 자기 모순적 본질에 주의를 돌리게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옹호자들은 자본주의가 주기적으로 불황과 인플레이션을 겪는다는 사실을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혼란들이 자본주의 그 자체에 내재하는 본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대신 그러한 혼란들은 ‘외부적 사건’이나 ‘불운’ 또는 ‘잘못된 정책’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주장이 가져온 효과는, 사람들이 처한 경제문제가 아무리 심각하다 할지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그 자체에는 오류가 없고 함부로 고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게 하는 체제에 우호적인 대중 이데올로기를 낳는다는 것이다. 맑스주의 위기 이론은 혼돈의 원인을 자본주의 체제 안에 위치지으면서, 자본주의를 위한 이러한 종류의 변명에 직접적인 도전을 제공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정확하게 바로 그 체제의 성공, 즉 생산을 성공적으로 확대시켰기 때문에 어려움에 처한다. 왜냐하면 생산의 확대가 이러 저러한 메커니즘을 통해 이루어지며 끝내 이윤의 흐름을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곤란한 상황들은 체제가 좀 더 잘 굴러가게 함으로써 제거될 수 없다. 오직 그러한 곤란은 체제 자체를 바꿈으로써 제거될 수 있다. 


맑스주의 위기 이론의 여러가지 유형들에서 나타나는 약점은 우리가 종종 이러한 정치적으로 쓸모있는 이데올로기적 주장을 능가하고 체제의 붕괴 또는 최소한 심각한 혼돈 상태를 예언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여전히 건재하며 심각한 혼돈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적게 일어난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흔히 이러한 사실을 업신여기곤 했다. 


그러나 위기 이론은 또 하나의 유용성을 지니고 있다. 위기 이론이 동일시 하는 모순과 사회적 갈등은 여전히 발생하고 있으며, 그것들이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위기에 몰아넣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자본주의의 변화와 적응을 강요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와 적응의 방향을 파악하고 그것이 사회에 부과하는 비용을 산출하는 것은 우리 정치 활동의 중요한 부분이다. 보기를 들면, 지난 20여년 동안 점점 더 국가의 구실이 늘어나자, 미국에서 국가의 구실을 둘러싸고 정치적 논쟁이 벌어졌다. 맑스주의자들은 이러한 논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좋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왜냐하면 위기 이론이 우리들에게 국가의 팽창에 대한 일관된 설명의 단초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국가의 구실이 늘어나는 것은 체제의 모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국가는 혼돈을 막으려고 경제 문제에 개입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는 국가 자체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문제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맑스주의 주장에 따르면, 그 문제들은 자본주의 경제가 작동하는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새로운 문제들은 비싼 값을 치루어야 풀릴 수 있다. 이를테면, 군비 지출이 주도했던 40여년에 걸친 대규모의 케인즈적 자극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에서 현재 진행중인 저축과 대출의 대참사나 내가 앞에서 언급했던 국제적인 부채와 무역 수지의 문제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의 맑스주의에 주의를 기울이기


맑스주의를 현재 처한 어려움에서 구해내고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한 발짝 나아가고자 시도할 때, 우리들은 우리들의 맑스주의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맑스주의 분석의 모든 요소의 근원에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역사적 분석, 즉 현재의 문제들을 장기간에 걸친 변화와 갈등의 산물로 이해하는 것이 있다. 맑스주의 이론은 그 자체의 생명을 따로 지닌 추상적 개념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전개 과정을 일반화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폴 스위지(Paul Sweezy)의 구절을 따온다면, 우리는 ‘현재를 역사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14


종종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역사 바깥에 설정하곤 한다. 혁명으로 탄생한 사회에서의 상황과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발전과 관련하여 볼 때, 우리는 종종 빠르게 발생하는 사안들을 찾는다. 그러나 맑스주의적 역사적 관점은 우리들에게, 혁명적 순간의 급박한 상황과 흥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사회적 변화, 즉 혁명적 변화들이 빨리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혁명은 군사적 권력 장악 – 그것이 어떤 면에서 일반적으로 권력 장악과 관련이 있다 해도 - 이 아니다. 대신에 혁명은 하나의 장기적이고 역사적인 변화의 과정이다. 우리의 맑스주의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은 매우 긴 여정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맑스주의가 우리를 다음과 같이 떠들어대는 빈정대는 사람으로 탈바꿈시키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 즉 “오, 글쎄, 무슨 일이 벌어지려면 시간이 오래 걸려, 그러니 살아 생전에 어떤 좋은 일을 기대하지는 말자, 건강한 사회가 오려면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이러한 태도가 침울하다는 사실을 제쳐두더라도, 그러한 냉소주의가 지닌 문제는,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와 관계없이, 우리가 사태를 바꾸려는 투쟁에 잇달아 참여해야 비로소 ‘건강한 사회’를 얻을 수 있을 것같다는 점이다. 게다가 어떤 궁극적인 ‘건강한 사회’와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사태를 변화시키고 지금의 삶을 가능한 한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밀고 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충분히 깨달음으로써, 그리고 꽤 긴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환멸을 피할 것이고 좀 더 성공적일 것이다. 


우리의 맑스주의에 주의를 기울이고 현재를 역사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또한 우리가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을 만드는 방식과 우리가 도달하기로 되어 있는 사회주의 사이의 연결에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우리의 ‘승리’가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주의의 왜곡된 형태로 되지 않을 것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 사회주의 운동의 건설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선, 맑스주의는 우리들의 목표를 다듬고, ‘사회주의’가 뜻하는 것을 명확히 하는데 노력을 바치도록 도와줄 것이다. 


당신이 가려고 하는 곳을 알지 못한다면, 어딘가에 이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내 자신의 사회주의에 대한 관점은, 내가 바라는 것이 내가 위에서 말했던 많은 것들에서 분명하듯이, 민주주의로부터 시작된다. 민주주의는 분명히 형식적 절차와 경쟁하는 선거, 반대의 권리, 시민의 자유 등을 포함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또한 대중들에게 효과적으로 권력을 부여할 수 있는 메커니즘, 즉 대중들은 그들의 참여가 무엇인가를 바꿀 것이라는 점을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의 참여를 보장하고 북돋우는 메커니즘을 포함해야 한다. 적어도 민주주의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이것은 국가 소유를 포함할 수도 있으나, 국가 소유만을 뜻하진 않는다.)를 뜻한다. 민주주의는 또한 평등과 대중들 스스로 그들 자신의 노동을 통제하는 것을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그 자체로 매우 희망적인 목표이기도 하지만, 대중들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반화는 쓸모있을 수도 있지만, 물론 상투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일반화를 통해 시장과 계획의 구실이 사회주의적 미래에서 어떻게 균형을 이룰 것인지와 같은, 정말로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토론이 비로소 시작된다. 민주주의의 원칙은 우리의 삶이 시장이나 또는 고도로 집중화된, 따라서 필연적으로 관료주의적인 계획의 지배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한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시장은 복잡한 경제에서 조정의 기제로서 거의 확실히 필요한 것들이다. 그리고 계획은, 우리들의 경제적 삶의 원칙을 통제하는 것으로서 의식적인 인간의 선택을 이용한다는 의미에서, 필수적이다. 어쨌든, 이러한 문제들에 관해 일어날 수 있는 많은 쓸모 있는 토론이 있다. 맑스주의자들은 종종 미래의 청사진을 만드는 것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없이보이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가 목적을 분명히 갖추지 않은 채 진술한다 해도, 그것은 우리가 바로 지금 우리 자신을 조직해야만 하는 몇 가지 방식을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만약 우리가 민주적 사회 체제, 즉 뜻있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 줄 운동을 만드는 것이 훨씬 좋다. 대부분의 좌파는 이 점을 알고 있고 내부적 민주주의나 다양한 투쟁의 적합성, 평등, 참여, 투쟁을 통한 교육 등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해왔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주장을 되풀이 하면서 종이를 낭비하고 있다고 의심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우리가 우리의 실천에서 그러한 핵심적 사항들을 강화시킬 수 있는 방법들도 있다. 나는 ‘맑스주의적 활동 방식’이 대중 운동의 전면적 투쟁을 통해 우리에게 닥친 목표를 이루는 것에 강조점을 두는 것임을 강조해왔다. 구조적 개혁(자본주의 지배에 도전하는 ‘혁명적 개혁’)을 이루어내는 우리에게 닥친 목표를 넘어, ‘맑스주의적 활동 방식’은 우리들로 하여금 올바른 운동을 세우도록 강요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대중 운동의 전면적 투쟁을 조직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운동 내부에 민주주의를 다져놓고 많은 집단의 이해관계를 서로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들의 생각에 몇 가지 점을 덧붙인다면, 그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맑스주의를 분명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 생산력주의와 ‘생산의 관점’에서 계급 투쟁에 대한 1차원적 강조를 극복하는 것은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또한 고칠 필요가 있는 맑스주의의 다른 면들도 분명히 있다. 우리들의 생각을 올바르게 고치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일이지만, 그러한 행위가 진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의 실천에 영향을 주는 방식에 있다. 우리의 생각을 올바르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운동을 세우도록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1. 이 에세이는 1989년 8월 27일에 메사츄세츠주의 샌드윜에서 열린 급진적 정치경제학을 위한 노조(the Union for Radical Political Economics, URPE)의 연례 회의에서 한 연설을 기반으로 작성된 것이다. 나의 생각은 하나의 전자 메일 모임인 진보적인 경제학자 모임(Progressive Economists Network)에서 이루어진 의견 교환에서 시사점을 얻어 구체화되었다. 특히 바이스코프(Tom Weisskopf), 레보비츠(Michael Lebowitz), 그리고 펄리만(Michael Perleman)이 좋은 충고를 해주었다. [본문으로]
  2. [역자 주] ‘실패한 신(The God That Failed)’은 1949년에 작가나 언론인 등으로 구성된 6명의 전 공산주의자들의 증언을 담은 6편의 에세이를 묶어낸 책 제목이다. 6편의 에세이를 아우르는 공통 주제는 저자들이 느낀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과 그들이 왜 공산주의를 버리게 되었는가 이다. 6편의 에세이 저자들은 피셔(Louis Fisher), 지드(Andre Gide), 쾨스틀러(Arthur Koestler), 실로네(Ignazio Silone), 스펜더(Stephen Spender), 그리고 라이트(Richard Wright) 등이다. [본문으로]
  3. 힌튼(W. Hinton)은 잘 알려진 책『판셴 : 한 중국 농촌 마을의 혁명에 대한 문서(Fanshen: A Documentary of Revolution in a Chinese Village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66), 여러가지 다른 중국관련 책을 썼다. 그는 천안문 사태 당시에 북경에 있었다. 그는 급진적 정치경제학을 위한 노조(URPE) 회의 연설에서 중국 체제가 파시스트적이라고 주장하였다. [본문으로]
  4. 밀리반트(Ralph Miliband, 「공산주의 정권의 위기에 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Crisis of the Communist Regimes)」,’ 『뉴레프프 리뷰(New Left Review)』 No. 177, Sept.-Oct. 1989)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동시에 그는 내가 아주 간단하게 언급하게 될, 생산의 관점에서 투쟁을 지나치게 강조한 맑스주의의 문제점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설득력 있게 요구하고 있다. [본문으로]
  5. 아도라츠키(V. Adoratsky)가 편집하고 모스크바의 맑스-엥겔스-레닌 연구소가 펴낸 두 권짜리 맑스(Karl Marx) 선집 가운데 하나인 『임노동과 자본(Wage Labour and Capital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n.d., circa 1936), vol. I, p. 269.에서 인용 [본문으로]
  6. 여기와 이 다음 단락에서의 정식은 고츠(Andre Gorz)의 책『노동의 전략 : 급진적 제안( Strategy of Labor: A Radical Proposal)』(Boston, Beacon Press, 1967)에 근거를 두고 있다. 특히 서문을 참조할 것. 고츠는 ‘개량주의적 개혁’과 ‘비개량주의적 개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개량주의적 개혁은 그것의 목적을 주어진 체제와 정책의 합리성과 실용성을 범주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에 부합하지 않는 그러한 목적과 요구 – 그 목적에 대한 필요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 를 거부한다. 비개량주의적 개혁 – 반자본주의적 개혁 – 을 위한 투쟁은 그것의 유효성과 그것이 존재할 권리를 자본주의적 요구, 범주 그리고 자본주의의 이론적 근거에 두지 않는다. 비개량주의적 개혁은 무엇이 될 수 있는지가 아닌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개량주의적 개혁은 그것의 목적을 획득할 수 있는 근본적인 정치적, 경제적 변화의 완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pp. 7-8) [본문으로]
  7. [역자 주] 시에라 클럽(Sierra Club)은 미국의 유명한 환경론자인 뮤어(John Muir)가 1892년 5월 28일에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설립한 미국의 환경 단체이다. 현재도 미국 전역에 걸쳐 수백만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는 단체이다. [본문으로]
  8. 노동 통제와 소득 분배에 관한 문제들은 종종 사회주의자들의 목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노동 가치 이론의 분석과 관련하여,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의 체질화된 갈등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관련하여 이러한 요소들의 중요성이다. 브레이브만(Harry Braverman)의 『노동과 독점자본(Labour and Monopoly Capital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74)와 노동 과정에 대한 다른 현대의 분석들은 통제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전반적인 분석에 통합시키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맑스주의적 분석에서 소득 분배 문제가 한 구실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맑스가 『임노동과 자본』에서 한 논의가 특히 쓸모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의 핵심은 물론 맑스의 궁핍화 이론이다. 일단 우리가 이러한 두 가지 요소들 – 사람들이 보다 높은 재화와 서비스의 절대적인 수준을 획듬함으로써 그들의 경제적 복지를 늘린다는 주류적인 개념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 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나면,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내의 갈등에 대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아마도 우리는 어떻게 사회주의 사회를 구성할 것인지에 대해 훨씬 더 건설적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9. 이러한 주장은 브레이브만의 책과 마글린(Stephen Marglin)의 글(「보스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자본주의 생산에서 위계제의 기원과 기능(What Do Bosses Do? The Origins and Functions of Hierarchy in Capitalist Production)」,『급진정치경제학 리뷰(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y)』(Summer 1974), 그리고 에드워즈(Richard Edwards)의 책(『경쟁하는 지형 : 20세기 작업장의 전환(Contested Terrain: The Transformation of the Workplace in the Twentieth Century )』(New York: Basic Books, 1979) 등에서 개진되고 있다. 물론 가장 이윤이 높은 테크놀로지는 가장 생산적인 것과 일치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둘이 늘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본문으로]
  10. 생산에 있어서 규모의 경제 – 보기를 들면, 엄청나게 많은 생산량이 고정된 기계 비용을 많은 수의 개별 기계 단위에 분포되는 상황 – 는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규모의 경제는 단지 이야기의 시작일 뿐이다. 규모의 경제는 또한 연구와 개발, 마케팅과 유통, 재정 그리고 정치적 영향력에서 매우 중요하다. [본문으로]
  11.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할 때, 나는 제국주의 – 강대국들이 약소국들을 국제적으로 지배한다는 의미에서 – 또한 다른 연원을 가질 수 있고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불행히도 말하도록 요구받았지만, 말하지 않고도 받아들여져야 된다. 여기서, 다른 많은 병폐들과 함께, 자본주의의 폐절은 아마도 치료 대책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본문으로]
  12. 맥이완(Arthur MacEwan)의 책(『부채와 무질서 : 국제 경제의 불안정과 미제국의 쇠퇴(Debt and Disorder: International Economic Instability and U.S. Imperial Decline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90)과 맥이완과 탭(Arthur MacEwan and William K. Tabb)이 편집한 책(『세계 경제의 불안정과 변화(Instability and Change in the World Economy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89)에 나오는 다른 글들을 참조할 것. [본문으로]
  13. 내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회주의의 깃발을 휘날리던 혁명 사회들은 ‘생산력주의’를 추진하였고 자본주의가 그들에게 보여주었던 성장 동력을 채택하였다. 그것이 환경에 미친 결과는 파국적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에서는 성장에 대해 선택할 수 있으며, 따라서 최소한 환경적인 재난을 피할 수도 있다. [본문으로]
  14. 스위지(Paul M. Sweezy)의 책(『역사로서 현재 :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관한 에세이와 리뷰(The Present as History: Essays and Reviews on Capitalism and Socialism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53) 참조. 그의 책 제목과 관련하여 스위지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제목은 주제를 정의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다양한 글들이 저술된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다. 모두가 현재는 언젠가는 역사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사회과학자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현재는 여전히 현재이며 우리는 여전히 현재의 모습과 결과에 영향을 끼칠 힘이 있긴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현재를 역사로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