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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2008년)/2008년 6월호

위기에 빠진 영국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5:05

위기에 빠진 영국

 

Ted Grant

 

영국 자본주의가 마주친 특수한 위기는 세계 자본주의의 총체적 위기 망 안에 놓여 있다. 실제로 20세기 내내 영국자본주의가 지닌 동력과 지위는 추락하고 있었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토리 정부와 노동당 정부의 시기에 노동계급의 대중조직의 지도자, 즉 노동당과 노동조합의 정치가 영국 자본주의에 부여한 상대적인 사회적 안정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 영국의 힘은 예상치 못할 정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나마 이러한 쇠퇴가 가져올 끔찍한 사회적 결과를 조금이라도 완화시키게 해 준 것은 세계 경제가 상승하는 동안 세계무역과 세계시장의 성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국 자본주의는 영국의 주요 경쟁국보다 훨씬 더 뒤쳐졌다. 1960년에 영국이 제조업 부문의 세계 무역에서 차지하는 몫은 16.5%였다. 1973년에 그 수치는 9.5%로 떨어졌다.

영국의 경쟁국이 기록적인 속도로 공업생산을 늘리고 있었지만, 세계경제가 상승할 때 영국 자본주의는 훨씬 더 느리게 발전했다. 그 탓에 경쟁국에 견주어 볼 때 영국의 지위는 떨어졌다.

197511월자 내셔널 웨스트민스터 뱅크 리뷰?(The National Westminster Bank Review)1969년에서 1974년까지 영국 총생산은 11.4%가량 증가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공업생산은 6.7%가량 늘어났다. “따라서 공업생산은 국민총생산과 견주어 볼 때 약 5% 떨어졌다.”

1955년 첫 사분기에서 1965년 첫 사분기까지 10년 사이에 공업생산은 35% 증가했다. 그러나 다음 10년 사이에 공업생산은 15%만 증가했다. “따라서 연간 공업생산 성장은 실제로 1965년 이래 절반정도 떨어졌다.”

생산능력은 1955년과 1965년 사이에 35% 또는 해마다 3%씩 증가했고, 1965년과 1973년 사이에 약 22% 또는 해마다 2.5%가량 늘어났다. 1973년 이래 성장률은 단 1.5%였다.

부가가치 대비 순투자 비율은 1965년에 8.6%였다. 그 비율은 1971~1973년에 3~5%였다. 석유와 가스의 투자를 포함하여 그것은 1974년에 6.3% 증가했다. 그러나 석유부문을 제외한 나머지 공업에서 순 투자의 비율은 4.9%였다. 공업에서 총투자 비율은 1965년에 17%에서 1972년과 1973년에 14%로 떨어졌다.

그러나 내셔널 웨스트민스터 뱅크 리뷰?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정부의 통계학자들은 공업 생산의 10%에 맞먹는 자본이 공업 자본 주식을 유지하고 마모되고 노후된 기계를 손보기 위해 해마다 공업에 투자되어야만 한다고 믿고 있다.” 그들이 인용한 평가에 따르면, 공업 자본 주식은 1965년에 공업 생산의 8.6%, 1972년에 3.4%1973년에 4.1%가량 증가했다. 이것은 경기침체와 그에 따른 금융압박 때문에 나빠졌다. 이제 생산의 잠재적 성장률은 해마다 2%일 뿐이다.

순투자율은 1965~74년 동안 반으로 떨어졌고 고용은 같은 시기 제조업에서 12.5%가량 줄어들었다. 토니 벤(Tony Benn)이 말했던 영국의 -산업화는 공업 이익이 다시 그 산업에 투자된 것이 아니라 공업 이외에 훨씬 더 수익성이 큰 분야에 투자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업 생산의 19.1%1965년에 공업 이외의 부문에 투자되었다. 이것은 1973년에 26.5%로 올라갔다.

OECD 보고에 따르면, 영국은 생산성뿐만 아니라, 제품의 질, 디자인, 출하의 정확성, 그리고 애프터서비스에서 인기를 잃었다.”

19775월자 미들랜드 뱅크 리뷰(The Midland Bank Review)에 따르면, “경제 기적이 끝난 듯 보이고 앞으로 오랜 경기침체가 진행되면서 가끔 눈에 띄지 않을 만큼 경기상승이 있을 것이다.”

영국에서 제조업은 1961년에 고용의 37%를 책임졌고 1976년에는 고용의 30%였다. 이는 공업 투자율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보기를 들어, 조선업에서 영국의 세계생산 몫은 1955년에 26.6%였고 1976년에 그것은 4%였다.

1960년에 전 세계 상품 수출에서 영국이 차지한 비율은 15.3%였다(OECD 통계). 1975년에 이 수치는 8.9%로 떨어졌다. 프랑스와 독일의 비율은 거의 같았다. 전 세계 수출에서 프랑스가 차지하는 비율은 9%로 약 0.1% 떨어졌다. 그러나 이제 프랑스는 영국의 몫을 약간 넘어섰다. 독일의 공업 수출은 전 세계 상품수출의 18.2%1960년에 약 20%였는데, 지금은 영국의 수출을 두 배로 뛰어 넘었다. 유럽의 또 다른 병자인 이탈리아는 전 세계 상품 수출에서 차지하는 몫을 4.5%에서 6.7%로 늘려놓았다. 이것은 영국보다 약 2%정도 작은 것이다.

세계 자본주의에서 지난 20년 동안 실제로 발전했던 나라는 일본뿐이었다. 자본주의가 곤경에 처한 시기에 일본 경제는 장차 이변을 가져올 것이다. 일본은 수출의 발전에서 경쟁국을 뛰어넘었다. 1960년에 약 6.5%로 영국의 수출액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던 일본은 15%로 거의 2.5배 증가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공업 수출국이었다. 비록 세계 무역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몫이 약간 줄어들긴 했지만. 그것은 1960년에 22.8%에서 1975년에 19.0%로 떨어졌다. 그러나 서독과 일본은 영국의 발끝을 밟고 있다.

영국 자본주의의 놀라운 붕괴와 약화는 이러한 수치로 알아낼 수 있다. 지난날, 영국 지배계급은 “lesser breeds”를 깔보았다. 사실상 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를 통해, 그들은 노동계급의 상층과 심지어 노동계급 전체에게 훨씬 높은 생활수준을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데니스 힐리 수상은 모든 공업국가 가운데 가장 값싼 노동을 가지고 있다고 공업가들에게 큰소리치고 있다. 이것은 이미 <사회협약>과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이 가파르게 떨어지기 전인 1975년에 사실이었다.

1975년에 미국 노동통계국은 주도적인 공업 국가에서 이전의 평가기준에 따라 공업에서 시간당 평균 임금을 제시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그것은 3.37달러였다. 일본은 1970년에 3.32 달러에 다다른 이래 임금률이 3배가량 올랐다. 이제 일본은 이 부문에서 영국을 능가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공업 부문 시간당 임금은 5.47 달러였다. 서독은 6.21 달러였고 1975년 이래 불균형은 더욱 커졌다. 심지어 이전에 뒤쳐진 이탈리아에서 노동자의 임금은 1975년에 시간당 5.51 달러에 이른 영국노동자의 임금을 꽤 능가했다. 미국의 임금률은 7.26 달러였다. 이러한 임금률은 영국에서보다 모든 이들 나라에서 훨씬 더 높은 가격 수준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가장 높은 임금을 받았던 영국 노동자가 이젠 서유럽의 쿨리의 지위로 떨어지게 된 개략적인 지표이다.

영국 자본주의가 지닌 특수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런던과 금융 자본에 대한 지배이다. 1975년과 1976년 사이에 해외 투자와 여행과 구분되는 선박, 보험, 은행 등 무역외 수출은 총 수출 가치의 절반이 넘는 13,000,000,000 달러로 25%가량 늘었다. 전 세계의 수출 외 소득의 9.9%, 영국 자본주의는 월 스트리트 다음으로 두 번째를 차지했다.

영국에서 금융도시와 공업 도시 사이의 이해관계 분할은 영국 자본주의가 지닌 공업력을 감소시킨 원인 가운데 하나다. 기계류와 소비재 공장의 형태로 실질적 부의 생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금융 수익에만 관심을 가진 런던은 나라의 경제를 약화시켰고 가치를 떨어트렸다. 전 세계 규모에서 영국 자본주의의 역할을 완전히 손상시키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모순이다.

지난날 프랑스의 상태와 비슷하게 영국을 기생적인 불로소득 국가로 부분적으로 전환시킨 것은 은행과 보험과 같은 자본과 서비스의 수출 결과였다. 19776월자 트리저리 리포트(A Treasury Report)는 다음을 확증한 것이다. “무역 외 총수령액은 일 년에 13,700,000,000 달러였고 총 무역 외 소득은 이제 완성품 수출의 가치를 넘어섰고 지난해에는 모든 상품 수출에서 얻은 이득의 절반과 같았다.”

19776월자 트리저리 리포트에 실린 경제 발전 보고에 따르면, “1971, 1972, 1975년의 경기침체에서, 100만개의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1970년대 말 제조업에 8,200,000명의 노동자가 고용되어 있었지만, 1977년에 전체 고용 인원은 겨우 7,200,000명이었다. 1977년에 국민 1인당 평균 생산은 1973년의 수준을 겨우 유지했다. 그러나 1973년에 고용자 일인당 제조업 생산은 1970년보다 낮은 15%였다. 이것은 결정적인 하락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대기업이 노동계급의 노동에서 뽑아낸 잉여가치를 투자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19777월호에서 매니지먼트 투데이(Management Today)는 다음의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영국제조업에 대한 투자는 낮다. 1965년 이래 노동자 한 사람 당 총 자본화는 영국의 EEC 파트너와 다른 공업국의 수치보다 훨씬 더 떨어졌다. 말하자면, 노동자 한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자본이 자동차 제조업과 같은 공업 부문에서 영국 수준보다 2~3배나 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은 서독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1972년에 국내총생산 대비 일본의 투자율은 34.4%였다. 프랑스는 26.34%였고, 스웨덴은 22%였으며, 영국은 18.2%였다.

따라서 영국은 전후 시기의 붐과 경기침체에서 훨씬 더 뒤떨어졌다. 1965년에 제조업 부문 고용자 한 사람당 자본 지출은 142달러였다. 1970년에 이것은 191달러였고 그 뒤 계속 떨어지다가 1975년에는 158달러였다.

경제를 통제하기 위해전후시기에 정부가 취한 모든 조치는 상황을 더 나빠지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대체로 영국 자본주의에 영향을 미친 질병은 영국의 경쟁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이윤율저하경향의 사례이다. 서독과 다른 나라에서 하락은 아주 가파랐다. 그러나 영국에서 잉여가치는 제조업으로 다시 투자되지 않고 부동산 투기, 서비스 산업, 해외 투자 등등으로 흘러들어갔다.

19763월 자 잉글랜드 쿼틸리 리포트(England Quarterly Report) 지에 따르면, 공업 기업이 쓴 자본에서 나온 실질적이윤이 1960년대 초에 약 11%에서 10년 안에 4%로 떨어졌고 1974년에는 약 2%로 떨어졌다.

OECD는 공업 기업이 사용했던 자본의 상환률이 60년대 초반에 12%에서 4%로 떨어졌다고 지적함으로써 이것을 확증했다. 이는 OECD 지역에서 가장 낮은 것 가운데 하나였다.

수익을 얻기 위한 무계획적인 탐욕으로, 각 독점체, 기업합동, 은행 트러스트 또는 개별 자본가는 경제 전반에 미칠 영향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자신의 이윤을 최대화하는 데만 관심을 쏟았다. 따라서 최근에 거품이 폭발할 때까지 엄청난 부동산 투기가 있었다. 예전에 건물에 투기했던 것만큼 지금은 농지 투기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농업에 쏟아 부은 돈은 건물에 쏟아 부은 것과 맞먹는다.

막대한 이자가 해외에 투자되었지만, 그것은 1976년에 1,500,000,000달러에 달하는 아주 높은 수준이다. 초과 이득이 해마다 2,000,000,000 달러를 거둬들인 보난자는 노동당 정부의 <사회협약>에 의해 임금 상승 제한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런데도 투자는 1977년에 매우 낮았다.

이것은 영국을 더 뒤떨어지게 하고 있음을 뜻한다. 영국 수출의 80%를 통제하고 있는 100개의 독점기업은 세계 시장에서 영국의 몫을 증가시키는 것보다 오히려 그들의 수익을 늘리기 위해 통화 변동을 이용하고 있다. 그에 따라 영국 자본주의의 상황은 실제로 더 나빠졌다.

수입상품의 가격은 올랐지만 영국자본주의는 새로운 투자를 위한 숨 쉴 공간의 이점을 전혀 누리지 못했다. 독점기업은 생산능력을 늘리기 위해 투자를 증대시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해외 시장이 늘어나지 않았고 인플레이션은 그들의 국내 시장을 한층 더 제한했다.

19776월자 디렉터(The Director) 지가 관찰했듯이, “복잡한 상품의 세계에서, 다국적 유한주식회사, 독과점 경쟁, 가격 주도제와 가격 차별화 …… 단기 환율 변화는 수익 외에 굴러들어온 복으로 여겨질 것 같다.”

전후 시기의 과정 동안, ‘복지 국가는 우익과 좌익 개량주의의 연설과 논문의 단골 주제였다. 영국과 다른 나라 사이의 차이는 존 스트레치(John Strachey), 더글라스 제이(Douglas Jay), 앤소니 크로스랜드(Anthony Crosland), 로이 젠킨스(Roy Jenkins) 등과 같은 우익 이론가에 의해 강조되었다. 이에 대해, 그들은 그저 거대 기업의 대변인의 선전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을 뿐이다.

복지국가는 껍질밖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 대부분의 주요 자본주의 국가와 견주어 볼 때, 영국 노동자의 복지비용은 더욱 줄어들었다. 이들 나라의 국민총생산의 대부분은 영국에서보다 교통, 건강, 교육, 사회서비스, 실업기금에 쓰이고 있다. 이것은 1976년과 1977년에 복지기금이 급격히 줄어들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국가의 지출과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몫은 미디어에서 선전하고 있는 것과 달리 다른 주요 유럽국가의 비율에 견주어 볼 때 영국에서 훨씬 달랐다. 지난 3년 동안 대대적인 삭감은 국민총생산에 대한 국가지출의 몫을 다른 경쟁국보다 훨씬 밑돌게 만들었다.

이러한 삭감은 주로 공공 부문 투자에서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지방과 주 당국이 17%의 인플레이션 비율로 실질적인 지출을 줄이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978~79년의 공공부문투자는 1965년의 수준으로 떨어졌고 1966년 이래 평균을 밑도는 13%였다. 이것은 다가올 해에 사회임금의 급격한 하락을 뜻할 것이다.

우익개량주의의 정책을 위한 변명으로서 현대 자본주의를 썼던 존 스트레치는 그의 무덤 속에서 탄식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만일 동시대 우익선수들이 몸부림치며 괴로워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각과 정부에 있는 사람들이 잘못된 개량주의의 표어를 포기하고 그 대신 자본주의를 구하려고 노력하는 극단주의적인토리당의 강령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이것이 노동계급의 노동에 의해 생산되었던 국민 생산의 분할을 위한 계급 사이의 투쟁에서 발생한 모순을 꿰뚫게 될 것이다.

건강 비용에 관한 한, 이전의 국민건강보험의 명성에도, 영국은 국민총생산에서 건강에 지출되는 비율에서 뒤쳐지고 있다. 의학과 건강 분야에서, 영국은 국민총생산의 4%를 지출했다. 영국의 중요한 경쟁국은 훨씬 더 많이 지출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5%이고, 서독과 프랑스는 6%이며, 스웨덴은 7%이며 미국은 6.5%이다.

사실 사회보장의 모든 분야에서 영국은 그의 경쟁국보다 훨씬 뒤쳐져 있다. 이것은 경쟁의 분야에서 영국에게 이점을 주어야 한다. 영국의 공업가들은 가장 높은 보조금을 지급하고 가장 낮은 임금을 준다. 그러나 그들은 훨씬 더 뒤떨어지고 있다.

낮은 생산이 이어진 것은 부분적으로 인플레이션에 맞선 싸움에서 정부의 조치 때문이다. 실제로 이것은 국민생산에서 자본가의 몫을 늘리기 위해 노동계급의 몫을 줄이려는 조치였다.

자본주의의 대변지들은 때때로 잔인할 만큼 솔직하다. 19777월자 매니지먼트 투데이지에는 이른바 <사회협약>에 대해 이렇게 나와 있다. “노동조합은 …… 실정을 받아들였고, 사실 그 이름, 즉 임금의 강제적인 억제력을 구했다.”

우익 토리당의 잡지인 이코노미스트(Economist) 지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2단계 협정은 …… 실질 소득을 7%로 줄였다. 이것은 단일한 성과이다. 전후 그 어떤 조세정책도 법령에 의해서 또는 임의로 임금과 가격 사이의 갭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세계 경제 상승의 실질적인 비밀은 서로 서로 상호작용하는 모든 일련의 요소들의 상호연계였다. 그것 가운데 하나는 전체 역사 시기동안 세계교역의 가장 커다란 증가와 함께 노동의 분화를 증대시켰다. 이것은 무역에 대한 관세장벽과 많은 다른 장애물의 제거였다. 또 다른 요소는 세계 시장의 팽창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공업의 발전이었다.

이는 선진 공업국가에서 생활수준을 증가시키게 되었다. 증대된 초과 이득은 식민지 국가에서부터 공업국으로 이전되었고 일련의 다른 요소들은 시장의 팽창으로 이어졌다. 노동자의 노동에서 빼낸 잉여가치의 커다란 부분의 투자는 경제의 발전에 꼭 필요하다. OECD 국가 대부분은 해마다 전체 생산량의 25%를 재투자하고 있었다. 전간기에 평균은 12%였다. 그것은 늘 19세기에 해마다 10%씩 투자된 것에도 못 미쳤다. 전쟁 이래 영국의 투자는 경쟁국의 투자보다 작았다.

20세기 내내 영국 자본주의는 적극적으로 투자하지 못했다. 예전에 영국은 축적된 부와 공업력에 의존했었다. 이제 모든 이러한 이점은 사라졌다. 은행에서조차 프랑스와 독일 은행은 영국은행보다 더 커졌다. 19776월자 뱅커(Banker) 지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세계에서 상위 300권 안에 있는 은행 리스트를 보면, …… 중요한 영국 은행이 급격히 하락했음을 드러내주고 있다. 10개의 가장 커다란 은행 가운데 영국 은행은 하나도 없다. 버클레이 은행은 12위로 밀려났고, 국립 웨스트민스터 은행은 20위였다. 미들랜드 은행은 40, 르로이드 은행은 52위를 차지했다. 몇몇 상업 은행은 전부 리스트에서 빠졌다. 일본, 프랑스, 독일 은행은 계속 상승하고 있다.”

따라서 심지어 런던도 영국 자본주의의 총체적 쇠퇴에서 빗겨나지 못했다.

세계 경제 상황에서 변화와 함께 상황은 영국 자본주의에 더 나쁘게 달라지고 있다. 영국은 오만한 분배자에서 이제 탄원자가 된다. 석탄과 석유 자원의 유리한 요소에도, 총체적 위기에 시달리고 있는 자본가는 노동자가 생산한 부에서 노동계급의 몫을 규제했던 노동당 정부의 조치에서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했다. 새로운 불경기를 두려워한 자본가는 임금억제와 국가지출 삭감을 통해 시장에 대한 규제 때문에 생산능력의 80%가 사용될 수 있었을 때 제조업에 투자할 준비를 하지 못했다.

개혁가들은 노동자의 임금을 깎아 자본가의 수익을 증대시키고 예산 적자를 줄여 인플레이션을 치료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개혁가들은 자본주의의 딜레마의 다른 뿔, 즉 커다란 이익 없이 자본가가 투자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했다. 그 결과는 1976년에 생산이 실질적으로 답보상태에도 석유를 포함한 수입량은 8%정도 늘었다.

1976년에 제조업 생산은 1974년의 위기의 해 수준보다 떨어진 6%였다. 이것은 일주일에 3일 노동과 생산의 엄청난 손실로 이끈 히스 정부의 적대정치의 해였다. 지난해에 건설업의 생산은 1973년과 견주어 볼 때 17%가량 떨어졌다.

공식 수치에 따르면, 개인소득은 0.5% 가량 줄어들었다. 1977년의 소비자 지출19774월에서 6월까지 1.5% 넘게 줄어들었다. 이러한 폭락은 시장 경기를 나쁘게 만들었다.

모든 희생과 생활수준 하락, 사회임금에 대한 모든 국가기금의 삭감은 뻔뻔스럽고 인색한 자본가를 움직이게 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의 목표를 이루는 데 실패했다. 반개혁 강령은 영국 자본주의를 이전보다 훨씬 더 악화시켰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정치가들과 경제 시녀 사이에 여러 분파를 만들어놓았다. 몇몇은 시장을 늘리기 위해 국가지출을 증가시킴으로써 한바탕 인플레이션을 상승시킬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려고 했다. 다수파인 다른 분파는 국가지출을 더욱 크게 삭감하는 것을 좋아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노동자의 임금을 낮게 유지하는 것에 찬성하는 것이다.

북해산 석유가격이 폭락하자, 영국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는 더욱 풀기 힘들게 될 것이다. 세계 시장에서 석유 가격이 다음의 불경기로 이어진다면, 영국이 누린 석유 생산의 이득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영국이 추출하는 석유는 아랍 국가들의 석유 추출비용보다 15배나 더 든다.

그러나 석유 가격이 안정되거나 천천히 오른다면, 여기서 나온 이득으로 영국 경제가 안고 있는 불안정의 한 요소가 제거될 것이다. 그것은 국제무역에서 유리한 국제수지와 아주 적지만 국가의 세입을 늘려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영국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지 못할 것이다.

부르주아지 같은 개량주의자들은 높은 성장률을 바라지만, 적자재정이 생기게 되는 인플레이션의 불가피한 증가로 어려움에 부닥쳤다. 그것은 그들이 정책을 실제로 결정하는 재무부 전문가와 거대 기업의 압력에 굴복하게 되는 지에 대한 이유이다.

따라서 자본의 대변인은 정통통화주의자와 신 케인즈주의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두 가지 치료법은 질병을 더 악화시키고 있다.

   


불만의 뜨거운겨울



사회적 기억 상실증 이 사회의 사회·경제적 동력에 의해 정신에서 빠져나온 기억. …… 잉여가치와 이윤 추구의 동력이 강화되면, 새로운 상품에 길을 내주기 위해 과거의 상품이 청산되는 비율은 가속화된다. 소비재에서 생각과 성(sexuality)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 계획적인 노후화가 존재한다. 본디 지니고 있는 노후화는 사상도 인간도 빗겨나게 하지 않는다. 사물이건 사상이건 사람이건 젊다거나 새로운 것이라고 고지된 것은 불변하는 것이 사회을 감춘다. …… 과거는 망각된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 그것은 도전받지 않고 지배한다. …… 사회적 기억 상실증은 기억(사회 그 자체의 과거)에 대한 사회의 억압이다.”

러셀 야코비(Russell Jacoby), ?사회적 기억 상실증?(Social Amnesia). 

 

자신들을 혁명적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지식인들, 사실들을 정교하게 다듬는 일을 전문으로 하며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노동자 운동의 중대 시점들이나 심지어는 60년대를 분석하는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자본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는 듯이 주장한다. 그들에게는, 다른 시기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이곳(영국: 옮긴이) 노동계급의 투쟁과 궁극적인 패배가 사소해 보이는 것 같다. 사회적 기억상실증은 그 한계가 없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기억은 모든 사람(‘혁명적지식인조차) 가까이에 있는 알라딘의 동굴(보물이 가득한 곳: 옮긴이)인데, 그것은 자신들이 했던 역할로부터 어느 정도 비판적인 거리를 둘 것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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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의 겨울, 그것은 잊혀 지고 억압당했지만, 여전히 이 사회의 기억 속에 출몰하고 있다. 정치인들과 대중매체가 그것에 관해 언급하는 유일한 시기는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공포의 시나리오로서이다. 그것이 들먹여질 때, 그 사건은 보통 레스터(Leicester) 광장에 산더미같이 쌓여 쥐들이 우글거리는 쓰레기 더미 이미지를 동반한다. 이렇게 그것은 모든 위협적인 파업이나 봉쇄 같은 행위들의 파괴적인 결과와 무용성을 경고해주는 것으로 사용된다. 어쨌든 지배 계급은 승리했다불만의 겨울 자체로는 승리가 아니지만(부분적으로 패배했다), 몇 년 뒤에 이 프롤레타리아의 공세를 변화시켜 그것을 패배시켰는데, 우리가 기억했으면 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이게 전부이다.

우리는 네 가지 서로 연관된 이유에서 불만의 겨울에 특별히 집중했다.

1.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지만, 이 나라 노동 계급의 고용된 부분에게 그것은 계급투쟁의 마지막 거대한 승리였다(비록 79년에 파업에 참여했던 사람들 대다수가 손해를 보거나 아주 적은, 특히 가장 낮은 임금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지만).

2. 그것은 지금까지의 계급투쟁 가운데 노동당 정부에게 가장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준 것이었으며, 새로운 시대대처의 반혁명, 즉 영국 자본의 결정적인 전략의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3. 그것은 노동조합주의가 영국 노동계급의 반역적인 영역 가운데 남은 부분에 아주 깊숙이 박혀 있는 역사적 이유들 가운데 많은 것을 드러낸다. 사실 파업 물결의 성공, 그리고 그 이전 불만의 10, 즉 노동조합주의 이데올로기를 결코 버리지 않았던 성공(비록 그것이 종종 착취 구조에 노동자를 통합시키는 도구로서 노동조합의 자본주의적 기능을 파괴했지만)은 대처시대에 고용 노동 계급의 투쟁이 실패한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그때에 노동자가 신속하게 자율적으로 자신들을 표현하기에 충분한비록 제한적이지만틀이었던 것이 이제 자율에 장애가 되었다.

4. 그것은 왜 새로운 노동당이 전혀 새로운탈선이 아닌지를 보여준다.

영국에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 계급투쟁의 물결이 최절정에 다다랐던, 불만의 겨울은 그 투쟁의 힘과 한계 그리고 영국을 자본 축적을 위해 다시 한 번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해결될 필요가 있는 모든 문제들을 표현해주었다.

60년대와 70년대의 대부분의 파업은 노동조합들이 그것을 공인하기를 주저하는 가운데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이 노동조합 형태와 결정적으로 단절하게 만드는 듯한 상황에 대한 통제를 다시 획득하는 방식으로, 즉 살쾡이파업(비공인파업)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이따금 공장을 맡아 운영할 태세를 갖춘 노동자의 전투성과 그들을 통제하려는 노동조합 위원장들의 결합된 시도에도, 이 결정적인 단계는 결코 취해지지 못했다. (Hull) 같은 도시가 노조 간부들의 통제 아래 있었던 불만의 겨울에도 그렇지 못했다. 노동자는 사회에서 그들에게 할당한 역할에 기꺼이 도전했지만 계급 사회의 존재 그 자체에 도전하는 지점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파업과 소요 모두 계급투쟁에서 오래된 집단 협상의 방식들, 이를 테면 사회적 부와 힘의 분배 그리고 계급 세력의 균형을 둘러싼 투쟁에서 요구를 취하는 형태들이었다. 80년대를 거치면서 파업이 쇠퇴하기 시작함과 동시에(결국 최저 수준에 도달해 지금까지 거의 회복되지 않았다), 투쟁 형태로 대중 소요는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둘 사이의 결정적인 연관이 무엇이었는지는 결코 밝혀지지 않았다. 60/70년대의 작업장에서 반() 노동(anti-work) 투쟁, 이를테면 살쾡이 파업, 계획적인 결근, 생산성 낮추기, 사보타주, 소요 등은 반 노동이나 그 밖의 다른 투쟁들, 즉 흑인, 게이, 여성, 소작인, 공유지 불법 거주, 실업수당 청구 운동, ‘체제 이탈적(drop out)’ 문화, 자발적 실업, 프리 페스티발 등과 연결된 경우가 드물었다. 비슷하게, 80년의 더욱 수세적 파업들과 도시 소요들은, 그 각각은 다른 쪽이 결여하고 있는 특징을 지녔지만, 결코 동시에 일어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소요는 자체의 모순을 결코 이겨내지 못했다.

프롤레타리아의 쇼핑’(약탈)은 쇼핑의 형태로 남아 있었지만, 그것은 어떤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상품의 완전한 전복이 되지는 못했다(작업장의 노동자와 연결되지 않고는 완전한 전복이 될 수 없었다). 자신과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명확한 의식을 가진 사회 운동은 소요로부터 결코 출현하지 않았다. 어쨌든 소요의 질은 점점 퇴보했다. 경제적 압박과 불안이 개인의 삶을 더욱 더 옥죔으로써, 생존을 위한 더욱 더 고립된 경쟁을 조장했고, 이것은 소요의 내용에 반영되었다. 강도와 강간과 다른 정신이상적인 기회주의들이 초기 소요들에서 나타난 축제 분위기와 연대를 격감시켰다. CCTV와 다른 도시 환경의 변형물 그리고 경찰 배치도 효과가 있었다. 먼저 폭동을 일삼는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소요는 투쟁의 형태로 흔적도 남기지 않고 가라앉은 듯하다(스스로 만들고 거리를 점유하는(Do It Yourself/Reclaim The Streets) 형태의 시위에 기반을 둔 최근의 소요는 아주 다른 현상으로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 나타났으며 비교해보면 어쩌면 저항과 투쟁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일지 모른다).

그 기간의 투쟁이 지니는 모순과 모호함은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었는데, 모두 지배 계급의 반격으로 잘못된 길로 갔다. 이것은 그 기간에 대한 거의 모든 급진적인 이론적 분석들을 읽을 때 보게 되는(뒤늦은 지혜로 알게 되는) 맹점이다. 패배할 것이라는 생각은 어디에도 없었다.

노동 조직의 변화들은 지금까지보다 더 노동자를 고립시키고 개인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80년대 초에 일어나 제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 회수(아시아의 신생 호랑이 경제체들같은 싼 노동 시장으로 재배치와 더불어 진행되었다)와 그에 따른 서비스 경제의 성장, 임시직화와 고용 안정성 종식은, 신뢰와 믿음과 효율적인 연대가 발전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특정한 작업장이나 장기적인 노동관계와 연결된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노동인력이 점차 유동적이고 단편적으로 되어감을 뜻했다.

실업자들은 강제로 노동에 투입되었고(뉴딜, 근로복지제도 등) 계속 이익을 내면서 그 자체로 풀타임 직업이 되었으며, 가계약직이나 임시직이나 저임금 노동에서 일하기 싫어하는 나머지 사람들은 서비스 경제(또는 범죄)가 쓸어버린다. 영국은 60~70년대에 생산성이 낮은 유럽의 자본에서 장시간 저임금 자본이 되었다. 몇 년 전 남한의 한 회사가 남한보다 인건비가 싸다는 이유로 공장을 웨일즈로 이전하는 계획을 세웠다! (생산성은 프랑스 같은 나라보다 여전히 어느 정도 더 낮지만 오늘날에는 이것이 고정 자본, 기술 등에 대한 상대적으로 빈약한 투자와 더 관계가 많음이 분명하다.)

60년대와 70년대를 지나면서 젊은 시절 정치의 길로 들어선 토리당원들은 그들 주변에서 발발하는 사회적 투쟁을 경멸하고 두려워하며 그로부터 고립되었는데, 이들은 결국 대처 시대 동안에 보복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70년대 동안 이따금 들리던 지배 계급의 한 도당이 군사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는 루머는 진짜였을지 모르지만, 사장들은 결국 날마다 더욱 통제할 수 없게 되는 계급투쟁에 대한 더욱 효과적인 장기적 해결책을 발견했는데, 쿠데타는 민주주의와 동의라는 전체 쇼에 일격을 가할 것이기 때문에 더욱 효과적이었다. 좌파(그리고 톰 로빈슨[Tom Robinson: 영국 가수옮긴이] 같은 클린컷 펑크 좌파들)는 파시즘의 위협에 대해 비현실적으로 우는 소리를 냈는데, 대처주의는 산업 쟁의와 낮은 생산성이라는 영국의 질병에 대한 훨씬 더 효율적인 치유책이었다. 다시 말해 인민주의적 민주주의 틀을 사용하는 것이 지금까지처럼 독재의 무딘 날을 사용하는 것보다 노동 계급 투쟁과 연대를 극복하는 데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공공 비용의 대규모 삭감과 대량 실업을 통한 통화주의 경제 긴축은 국내나 작업장에 있는 공동체를 모두 파괴했지만, 과감한 새로운 주식소유 재산소유 민주주의 안에서 진보의 약속에 의해 완화되었다.

 

 

이 겨울을 따뜻하게 소동을 일으켜라!” 70년대 슬로건

 

 

불을 준비함: 불만의 겨울에 이르기까지

 

잉글랜드 부르주아지의 특성과 잉글랜드가 지닌 모든 사회적 관계의 자유 때문에, 충돌의 실용적인 순간적 해결책(근본적인 결정이기보다는)이 찾아질 것 같다. 그러한 발전 과정에서, 부분적인 양보가 마침내 중대한 권력 상실에 이르게 되었을 때, 결정적인 계급 전쟁을 통해 지배권을 되찾으려는 자본가 계급의 시도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튼 잉글랜드에서 생산에 대한 노동자들의 지배는 분할된 통치의 중간 형태들을 따라가는 연속적인 단계에 의해 쟁취되는 것이 가능해보인다. 즉 각 단계는 불만족스럽지만 완전한 자유에 이를 때까지 앞 단계로 밀고 나가는 것.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노동자 평의회? (1947-9)

 

판네쿡이 완전한 자유에 이른다.”라는 말을 빼고 이 문구를 자유 세력과 경제 세력 사이의 결정적인 전투에 이른다.”로 대체했다면, 그는 적어도 자신의 옵션을 열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최종 산물에 대한 낙관적 불가피성이 종종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과거 혁명가들의 전통적 경향이 갖고 있는 이론적 전망의 한계이다. 다른 것들과는 달리, 그런 결정론은 이 투쟁의 약점을 언제나 과소평가했는데, 이는 결정론자들이 자신들의 투쟁의 약점을 과소평가하고 그들의 비판의 한계를 모른 체 했기 때문이다. 1949년에 글을 쓰면서 판네쿡은 낙관적일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천문학자에게서나 기대할 만한 장기적인 통찰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과학적 결정론은 피할 수 없는 결정적인 계급 전쟁에서 패배의 가능성을 미리 보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가 이야기했던 부분적인 양보는 의심할 것도 없이 불만의 겨울에 절정에 달했으며, 지배 계급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즉 이러한 부분적인 양보가 최소화되어야 하든지, 아니면 완전한 자유전 지구적 위기를 유발할 좋은 기회인 공공연한 혁명적 충돌에 이르게 되든지. 노동 계급, 특히 광부들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가해 이 나라에서 전례가 없는 반혁명의 시대를 여는 것은 대처가 이끄는 영국 부르주아지에게 남겨졌다. 이제는 대체로 반란자들을 위한 자유의 여지는 기껏해야 순전히 이론적이다. 대다수에게 그것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결국, 둘 다 실질적인 결과를 지니지 않을지라도 상상과 이론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분명 지적인 역할의 무기력을 정당화하려는 욕구가 없는 이념과 계속해서 결과가 없는 논의의 자기만족에 빠지는 이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불만의 겨울, 노동 계급은 낙관적일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오늘날의 반동적인 분위기의 기준에서 실패 가능성은 사람들의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 시기에, ‘불만의 겨울은 천천히 뚜렷해졌고, 사라짐/재출현의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진행되었는데, 공개적인 투쟁에서 자율적인 계급 운동의 고통스럽지만 즐거운 탄생은 늘 그러했다.

1971/74년의 기간에는 영국에서 몇몇 파업이 패배를 경험했지만(이를테면 71년 우편 노동자 파업) 일정한 범위 안에서는 거의 완전히 성공한 계급 활동의 폭발이 있었다. 이 활동은 같은 기간 유럽의 계급투쟁의 일반적 수준을 능가하는 것으로, 영국 프롤레타리아트의 자발적 창의성에서 그것의 숨겨진 존재를 느낄 수 있게 한 요소였는데,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앞선 기간보다 덜 대담한 형태로 그들을 밀어붙였다. 그 시기에는 토리의 산업관계법 이면의 고풍스런 개념처럼 보였던 것(교묘한 억압보다는 공공연한 억압) 때문에, 노동계급의 독자적인 창의성은 토리에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노동조합 관료와 노동당 전문가들에 의해 계속해서 억제 당했다.

1978년에 좌파이며 클린컷 펑크 음악가인 톰 로빈슨은 그의 LP 트랙 79년 겨울에서 게이, 흑인 등에 대한 파시스트적 폭력 증가에 대해 비관적인 궤적을 그렸다. 좌파가 일어날 일 때문에 당황하고 우울함을 느낄지라도, 음악가요 비관적 전망을 회복하는 사람에는 이처럼 되지 않았다. 그러나 갑자기 프롤레타리아의 봉기가 시작되면서 ‘79년의 겨울이 갑자기 기대와 희망의 겨울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의 운명이었지만 그 주인공들의 운명은 아니었다.

히스(Heath)의 토리 정부에 반대하는 70년대 초의 거대 파업들 이후에 노동자들을 돈으로 매수하기 위하여, 1974년에 후임 노동당 정부는 30퍼센트의 (사실상 일괄) 임금 인상을 위하여 돈을 찍어냈다. 이러한 임금 인상은 생산성 분배에 의해 지원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찍어내는 행위를 동반하는 것으로, 이후 높은 인플레이션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것은 72/73년의 불길한 바버 붐(Barber boom: 재무부장관 앤서니 바버의 성장 정책에 따른 인플레이션옮긴이)OPEC 오일 가격 상승 이후 경기 후퇴라는 배경에 반하는 것이다. 임금을 규제한 사회계약(일반적으로 사회적 신용 사기로 알려진 것)의 가혹한 측면에 더해진 노동당 정부의 삭감(병원, 학교 등)은 손실을 만회하고 영국 경제를 구하기위한 IMF 차관을 노동자에게 지불하도록 하기 위한 정부의 시도였다.

74년에도 36퍼센트 임금 인상이 노동당 정부에 의해 공공 부문 육체노동자에게 수여되었다. 기본적으로 전반적인 임금 인상 이면의 실재는 72년과 74년 두 개의 주요 파업에서 미증유의 성공을 거둔 덕분에 광부들에게 30퍼센트의 임금 인상이 일어난 결과였다.

불만의 겨울은 어떻게 해서든 이런 임금 보상을 되찾으려는 시도였으며 여러 측면에서 그렇게 하는 데 성공했다. 게릴라 파업에는 평균 임금율을 웃도는 개별 기업의 임금 상승이 있었다. 포드 노동자 17.5퍼센트, 유조차 운전자 15퍼센트, BBC 직원은 일괄적으로 12.5퍼센트이지만 사실상 21.5퍼센트로 밝혀졌다. 이러한 평균 임금율을 웃도는 개별 기업의 임금 상승은 영국에서 자본 축적에 매우 큰 손상을 입혔는데, 이것은 또한 이곳 시민 사회의 자기 분수를 아는, 층층이 이루어진 위계제 속에 고착되어 있는 사회적 관행에 의해 촉진되었다. 보기를 들어 노팅엄 대학에는, 900명의 육체노동자 사이에 50개의 등급이 있었다. 한 등급이 임금 인상을 얻으면, 다른 등급들은 등급 사이의 임금 격차를 유지해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사실상 임금 타결안은 이 겨울 이전에 이미 새고 있었으며 의식 있는 노동자는 그 사실에 주목했다. 어떤 점에서, 영국 노동계급의 힘은 77년 가을 소방대원 파업의 결과를 통해 미묘하지만 충분히 증명되었다. 파업이 약간 폭력적으로 끝나고, 노동조합 관료들만이 사회 계약의 제4장 규범에서 허락된 10퍼센트의 임금 증가를 얻었기 때문에 소수의 소방대원들이 노조 관료들을 공격하면서, 소방대원은 패배했지만, 1년 안에 소방대원들은 더 나은 봉급을 받는 노동자들 축에 들게 된다. 노동당 정부는 파업이 끝난 후 소방대원들 사이에 이 피켓 라인의 분노, 신랄함, 환멸감을 두려워했으며, 엄청난 결과를 지닐지 모르는 잠재된 더욱 위험한 상황을 돈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조용히 개입했다. 소방대원들에게 동등한 임금(comparability payment)이 지불되었는데, 그로써 그들의 임금은 실제로 추가 20퍼센트 상승했고, 사적 영역의 숙련 노동자들과 동등한 임금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소방대원들의 봉급은 인플레이션에 따라 연동되었는데(두 배의 수치로), 과거에 이것은 표면상 파업이 허락되지 않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군 장교, 경찰, 법관 같은 주요 반동 세력에게만 허용되는 특권이었다. 그러나 이제 소방대원들은 여전히 파업권을 보유함으로써 이런 반동적 패거리보다 한 발 앞서 있다! 그렇다, 정말로 영국 전역의 노동자들은 그러한 성공적인 패배에 주목했고, 격렬한 직접 행동에 의해 도전받을 때 국가가 얼마나 약해지는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이 모두개별 기업의 임금 상승, 사회 계약 등가 단일한 배경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74~79년 기간 동안에 더욱 더 많이, 노동조합들은 국가 기구의 일부가 되었다. 국가의 목적은 영국공업협회, 의회의 지배정당, 그리고 노동조합 사이에 협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는 말처럼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76~79년까지 3년 동안, CBI는 힘의 균형이 노동조합에 유리하게 되었다는 이유로 다우닝 스트리트에서 열린 3자 협상에 참여하지 않았다. CBI의 고심은 옳았다. 노동조합과 정부의 지배정당은 이 시기 동안 사장들, 특히 사적 부문의 사장들보다 훨씬 더 힘 있었다.


 

노동조합이 70년대 초에 토리당의 산업관계법에 반대했을 때, 노동조합은 하나의 동질적인 조직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대규모 합병이 수평선 위로 떠오르기 시작하고 있었고, 우파 이데올로기 또는 좌파 이데올로기 블록으로 쪼개졌다. 한쪽 날개에는 A. E. U. W.우파와 운수일반노동조합(TGWU)의 좌파 사이의 이데올로기 균열을 강화시킴으로써 합동기계공노동조합(A. E. U. W.), 전기배관공노동조합(Electrical, Electronic, Telecommunications, and Plumbing Union: 이하 E. E. T. P. U.), 그리고 보일러공의 합병이 있을 법했다. 스캔론과 존스는 한때 무서운 쌍둥이였다. 70년대 초 토리당이 얼마나 진저리를 쳤는가! 74~79년 노동당 정부 하에서, 그런 일은 더는 일어나지 않았다. 휴 스캔론의 좌파 지도부 하에서, A. E. U. W.는 바라라 캐슬(Barbara Castle)<파업의 장소에서(In Place of Strife)>(64/70년 노동당 정부)와 히스의 산업관계법을 무력화 하는데 이바지했다. 그러나 실제로 파업이 터졌을 때, 그 모든 것은 얼마나 많은 차이를 만들어내는가? 77년에 브리티시 레이랜드(Britisch Leyland)에서 공구제작공이 파업했을 때, 그들은 정부와 언론과 더불어 맏형격인 A. E. U. W.의 비난을 받았다. 이들 파업자에게는 반동적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러나 그들은 정부의 계획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도대체 그런 그들이 반동적인가. 더 정확히 말해, 엔지니어 산업에서 숙련노동자와 노동조합 보스들 사이의 보수적인 동질성은 대체로 문화적인 것이었다. 이를테면 파업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합심해서 파업을 깨트렸다. 문화적 공생관계는 준 종교적이고, 출세에만 관심을 가진 준 프리메이슨적 의식인 옛 직공 노동조합주의의 사라진 전통에서 나온 것이었다.

 

 

겨울의 불을 붙인 불꽃: 포드 파업(1978년 가을)

 

포드 파업은 불만의 겨울에 대한 모든 이야기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설사 다루었다고 해도 그것은 고전적인 도식에 따라 요약되었다. 노동조합은 그들의 요구를 했고, 노동자는 파업에 들어갔으며, 노동조합은 사장들과 토론했고 일터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찬반투표를 했다. 노동조합이 제기했던 주장(25% 임금상승과 주당 35시간 노동)에서 민중선동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말하는 것은 어렵다. 정부는 19787월에 임금상승을 5%로 고정했다. 문제가 된 것은, 노조 지도자가 부추겼든 아니면 자발적으로든 일반 노동자가 78921일에 리버풀 근처에 있는 헤일우드과 사우스햄튼에서 그들의 요구를 입증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26일 월요일에, 노조 지도자가 소집한 집회는 파업으로 이어졌다. 23개 영국 포드 공장에 있는 57,000명의 노동자가 작업을 중단했다. 실제로, 그것은 놀라운 속도로 퍼진 살쾡이파업 운동이었다. 다겐햄(Dagenham) 공장은 25분 만에 텅 비어 버렸다. 그러나 토대에 훨씬 더 긴밀하게 연결되었던 노조지도자 위원회에 맡겨져 있는 운동을 바라보는 순간 깜짝 놀란 노동조합(AEUWTGWU)은 한 주 뒤에서야 비로소 파업을 인정하게 되었다. 노동조합의 이런 행위는 파업의 이행을 내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협상자로 그들이 간섭하겠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다. 두 가지 경우에서 그들은 협상에서 나온 제안으로 노동자와 맞서야만 했다. 두 번째 제안에서, 임금 17% 인상안을 가지고 그들은 파업을 중지할 것을 권했다. 여기에 고전적인 사례가 있었다. 노동조합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이 어떤 요구를 사장들에게 강요할 수 있게 한 자신의 노동자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주당 35시간 노동이 같은 해에 일어났던 독일 철강 노동자 파업과 같은 방식으로 완전히 폐기되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이런 견해에 동조하지 않은 사람들은 정부를 무너트리는 데 아무런 관심도 없고 여전히 파업 물결을 일으키는 데 소극적인 노동조합이 이러한 결정적인 순간에 사회적 댐의 수문을 열어놓았다는 것을 거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사태의 진실은 다른 데, 즉 우리가 이 시기 동안 영국에서 계급대결에 대해 제공했던 간단한 지수에 있다. 포드 파업은 고전적 도식은 차치하고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공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 한 사람의 파업파괴자도, 실제로 피켓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영국 노동자의 적극적인 연대가 고속도로와 항만 모두에서 모든 요소의 움직임을 차단했기 때문에, “이동파업사수대(flying pickets)”도 없었다. 이러한 효용성의 정도는 어떤 지도자, 노동조합의 거물이든 노조 지도자들이든 전혀 만들어낼 수 없다. 그것은 몇 달 뒤 무대에서 사라졌던 훨씬 더 전투적인 “flying pickets”이나 “secondary pickets”과 달리 어떤 논쟁적인 평가를 불러일으키지도 않는다. 포드 파업의 성공은 사회적·정치적 결과에 의해 평가될 수 있다.

 

1. 포드 파업은 노동당 정부의 몰락을 부추겼던 파업이었다. 노동당의 형식적인 정치적 패배는 곧 포드에서 파업의 종결 뒤에 찾아왔다. 노동은 임금 17% 상승이 용인되었을 때인 12월 초에 재개되었다. 거기에는 또한 일반 노동자의 살쾡이파업을 탄압하기 위해 계획된 벌금조항도 있었다. 즉 파업 주일 동안 임금 5% 삭감. 캘러핸 정부는 그 자신이 소수파임을 알려는 위험을 무릅쓰기보다는 오히려 경제제재의 틀을 무시하는 쪽을 택했다. 자본은 히스 정부가 5년 전에 하려고 했던 정면 충돌을 무릅쓰기보다는 오히려 정부에 일시적인 유예를 허용했다. 그것은 자본이 임금을 하락시킬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찾고 영국병을 치료하려고 애써야 했기 때문에 휴식 기간일 뿐이었다. 대처가 이끈 보수당 정부는 노동당이 그것을 하려고 했던 방법이 완전히 실패했기 때문에 그렇게 노력해야만 했다.

 

2.

이러한 정치적 실패는 사회적 실패, 즉 임금 상승을 생산성과 연결시키려는 경영의 시도를 가린 것이었다. 노동자는 포드 경영진이 제출하고 노동조합이 받아들였던 첫 제안을 거부했다. 그 제안에는 무단결근과 살쾡이파업에 대한 벌금조항이 들어있었다. 포드 노동자가 받아들였던 마지막 협정에는 살쾡이파업에 대한 벌금조항만이 포함되었다. 이는 포드가 제시한 기본 조건에서 후퇴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3.

또 다른 결과는 국제 수준에서 뚜렷해졌다. 즉 유럽 전역에 있는 다국적기업의 노동자의 동맹파업이다. 헨리 포드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겪어 본 파업 가운데 최악의 파업이었다.” 파업을 깨트리고 불가능하게 고립시키려고 한 모든 시도가 파업을 성공하게 만들었다. 다른 영국 노동자의 적극적인 연대는 포드의 유럽 공장에 있는 다른 노동자를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파업파괴자가 되게 하는 것을 막았다.

세력을 이용할 수 없는 노동당 정부는 노동조합 기구를 이용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그 당시 노동조합 기구는 정부가 바라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하나의 그리고 유일한 바람이었다. 더 나쁜 결과가 두려워 경찰과 군대를 개입시킬 수도 없었던 캘러핸은 TV에 나와 용감하게 선언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나는 피켓라인을 무너트리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는 것이 도덕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노동조합 지도자는 그들의 도덕성을 19792월에 TUC 지도자와 정부가 함께 작성했고 TUC 대회에서 인준 받았던 노동조합 행동수칙으로 전환시키려고 노력했다. 이 문서에는 피켓을 위한 적절한 행동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길고 상세한 설명이 들어 있다. 노동조합의 이 행동수칙은 로리 운수노동자 파업(the lorry drivers strike)이 일어났을 때 노동조합 관료들의 행동을 아주 분명히 설명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파이낸셜타임즈?에 실린 한 기사는 강력한 TGWU의 핵심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알렉스 키츤(Alex Kitson)의 활동을 자세히 밝혔다. “그는 여러 곳에서 지역 살쾡이파업 위원회를 파괴시키려고 시도했다. 전반적인 의도는 파업을 지역 노동조합 기구의 통제 하에 놓고 파업자의 행동을 공장과 항만과 창고와 운송 회사에 속한 하나의 자동차 회사에 제한시키려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의 행동수칙은 경제에 대한 노동조합의 간섭과 관련한 다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주로 노동력의 가격을 고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1979년 늦은 봄 총선거의 시기에 논쟁이 중요한 정치문제로 발전했던 것은 피켓의 문제였다. 그때 노동당과 보수당은 노동자의 자율적 행동을 끝낼 필요에 합의했지만, 방법과 수단을 두고 갈렸다. 이 영역에서 보수당이 제안했던 적극적인 정치적 조치가 빛을 보게 되었다. 이른바 -노동조합법과 대량실업의 채찍을 인기 있는 재산과 주식(property-cum-shareholding)이라는 당근과 섞은 조치는 이 나라에서 소외된 자들이 권리를 되찾게 해주는 노동계급 연대에 예상하지 못했던 패배를 안겼다. 그러나 그 일은 좀 더 뒤에 일어나게 된다.

포드 파업은 1978년 말에 자본과 노동 사이의 적대가 최고에 다다랐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것은 끝이자 이행이었다. 생산성 대비 임금률을 둘러싸고 몇 년 동안 이루어진 직접적인 대결의 최종 결과, 그리고 개인행동의 끝없는 마찰과 훨씬 더 전면적인 적대의 형식 사이의 이행. 이 과정은 그때 이데올로기 붕괴의 전망 안에 위치지어야만 한다.

이 마지막 주장은 특히 포드 파업에서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연대와 결속이 자본주의의 가치에 대한 폭넓은 무시에서만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포드 파업을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파업이 일어났을 때, 이 사실은 자주 목격되었지만 일상의 태도와 노동에서 결코 강조되지 않았다. 한편으로, 영국 전역에 있는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 동시에 일어났던 살쾡이파업 투쟁의 갑작스러운 해방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파업을 특히 효과적으로 만들었던 적극적인 연대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결코 영국에만 특수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의 다른 조짐과 지난 몇 년에 걸쳐 그것의 변증법적 발전을 가장 잘 목격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영국이었다. 아마 이 상황은 특수한 역사적 상황의 표현이었다. 영국은 아주 처음부터 프롤레타리아화되고 도시화된 사회였다. 그 때 짧은 시기 동안 특히 영국 제국주의가 자국노동자에게 광범위하고 강도 높은 식민 착취 덕분에 자유와 정치적 자유의 수준을 보장했던 곳에서 우리는 노동자의 태도가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은 산업자본주의 사회가 해체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의 위기가 끝없이 이어지자, 모험적인 기업은 모든 일을 추측하게 되었다. 즉 비록 우리가 불만의 겨울 뒤에 자본을 어떻게 재구축할 것인지를 알고 있지만, 영국 이외의 지역에서 앞으로 재구축이 자본을 위해 그리 단순한 과업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영국이 자신의 세계 우위를 유지하고 있는 한 그 어떤 것도 마지막 수단까지도 다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몇몇 사람이 영국의 회복(무엇보다 북해 석유)을 외쳤던 것으로는 국가적이고 국제적인 수준에서 자본주의의 상황에 대한 가장 심각한 현실을 설명하진 못했다. 즉 국가적 수준에서, 자본은 70년대 말에 상대적인 취약성으로 특징지워졌다. 왜냐하면 수익 생산의 관점에서 자본이 좀 더 건강한상황으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는 세력관계를 다시 세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자본은 좀 더 높은 생산성을 끌어낼 수 있는 곳을 찾고 있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국가의 생존을 허용한 것이겠지만 그 어떤 국가의 부활도 방해했고 계급투쟁을 풀 수 있는 모든 출구를 막은 상황의 영구적인 본질을 확인한 것이었다. 영국에서 정치권력의 취약성은 한편에는 계급투쟁 움직임과 다른 한편에는 다국적 기업, 특히 미국의 다국적 기업 때문에 국가자본주의의 이익의 대변자로서 스스로를 강제할 수 없는 국가의 능력을 통해 드러났다.

이러한 모순을 폐지할 수 있는 것은 자본에 국적을 없애는 일이었다. 실제로 영국 자본은 좀 더 높은 착취를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곳에 투자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얻었던 수익은 본디 국가의 이익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리고 언제나 국제적 이익이었던 수익의 대표자임을 확실히 해 줄 수 있는 국가를 유지할 필요성 때문에 본국으로 다시 보내졌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는 외적 힘을 보장해주었던 국내의 평형의 유지를 전제로 하고 있다. 유럽의 지평에서 이러한 이중의 모순을 해결하는 어려움에 우리는 세계적 규모에 존재했던 모순을 덧붙일 수 있다. 이러한 어려움은 저발전 국가의 공업 성장이 가져온, 즉 좀 더 커다란 이익을 쫓는 자본의 결과인 계급투쟁에 의해 증대되었다.

포드 파업은 어떻게 계급투쟁이 국제자본의 추동력과 단단한 구조와 특수한 세력관계를 지닌(2차 세계대전 뒤 영국에서 역할을 했던 포드는 몇 번이나 국내구조의 엄격성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국내 정치 사이의 모순을 반영한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노동당 정부와 노동조합이 수행했던 임금 동결 정책은 영국 자본가의 이익을 보장하려고 애쓴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임금 동결 정책이 사회적 평화를 보장하는 한 포드에게만 이익이 되는 것이었다. 유럽 수준에서 손실의 실용적 전략의 일부로서 포드는 서로서로 대신 메웠다. 왜냐하면 생산과 생산성의 지속이 어느 한 나라에 국한되었던 임금 상승률보다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같은 때와 곳에서 노동조합이 요구를 통제할 수 없고 정부가 정치적 의지를 부과할 수 없을 때, 포드는 하나의 생각만, 자신의 세계 정치 전략에 관심을 쏟는 것을 할 뿐이다.

파업이 일어났을 때, 노동조합의 무기력은 BL에서 32명의 공구제작 노동자의 파업이 지속되었을 때 드러났다. 노동조합 지도부는 그들을 노동조합에서 내쫓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레이랜드 공구제작 노동자 모두가 총체적인 살쾡이 파업으로 위협했기 때문이다. 일반 노동자의 압력 때문에, 체면을 차리기 위해 노동조합은 임금동결에서 거리를 두었고 이전 해의 사회협약을 갱신하는 것을 거부했다. 심지어 사장과의 관계에서, 정부는 그 전해의 파업에 의해 심각히 훼손되었고 포드 파업이 완전히 파기했던 규정을 어기고 임금을 올리면 회사에 대한 경제제재라는 시늉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산업 분노하다?1

 

Chris Bambery, Peter Morgan, 

 

소방대원의 행동은 1970년대 불만의 겨울을 떠오르게 했다. 밤베리(Chris Bambery)와 모르간(Peter Morgan)불만의 겨울을 분석해보았다.

 

모든 사람은 그들 나름의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나는 소방대원노동조합(Fire Brigades Union: FBU)이 그러한 한계점에 다다랐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는 버지(Jim Burge)가 한 말이다. 그는 런던 북부에서 15년 동안 소방대원으로 일했고 해마다 21,500 달러를 집으로 가져간다. 그가 이런 말을 하고 난 뒤 정부가 협상테이블에서 4%보다 좀 더 많은 것을 제의할지도 모른다고 암시한 뒤 FUB 지도부가 임금을 둘러싼 두 번의 파업을 보류할 것이라고 알렸다.

 

?사회주의 평론?(Socialist Review)을 인쇄하고 있을 때, 소방대원 파업이 풀릴 것인지 아닌지 또는 어떻게 풀릴 것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아주 분명한 것은 토니 블레어와 새로운 노동당(New Labour)이 낮은 임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자로부터 늘어나는 압력에 부닥쳤다는 것이다. 생계비용의 증가, 높은 주택과 운송비와 결합된 이 쟁의는 노동자가 기꺼이 행동에 들어갔다는 것을 뜻한다. 일련의 폭넓은 성공적인 파업으로 일반화된 산업 소요가 크게 늘어날 것인지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미 다음 주에 교사, 공공부문 노동자, 철도 노동자, 대학 강사들이 행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임금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블레어 정부가 마주한 가장 커다란 문제 가운데 하나로 커지고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1970년대 이래 볼 수 없는 규모로 총체적인 공격으로 이끌 수도 있는 화약통이었다.

40% 임금 요구를 둘러싸고 소방대원과 노동당 정부가 대립하자, 저널리스트들은 불만의 겨울이라는 상상의 공포를 불러일으켰던 1970년대로 돌아가게 했다. 새로운 노동당 하원의원과 그들의 지지자들은 소방대원을 공격했다. 왜냐하면 블레어가 사회에서 꽤 잘 살고 있는 3분의 2라고 말했던 계층의 일부였던 그들의 임금 요구가 다른 3분의 1을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어쨌든 소방대원이 그들이 임금 상승을 보류한다면, 블레어는 병원의 보조 노동자에게 나눠주기 위해 꽤 많은 돈을 거두어들이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노동당 지지자들은 노동조합 전투성이 1979년에 마가렛 대처의 당선을 쉽게 해주었다고 재빨리 주장할 것이다.

오늘날 당신은 왜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 사이의 간격이 블레어 정부 아래서 더 커졌는지, 왜 상층 사람들의 소득이 계속 치솟고 있는지 또는 런던의 소방관이 도시에 살 수 없는지 물어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동당 정부가 집권한 지 2년 뒤인 1976년에 사태는 오늘날보다 훨씬 더 나빴다. 실업은 1930년대 이래 최고 수준에 다다랐다. 임금은 한 세기에 가장 크게 하락했다. 예산 적자를 구제하기 위한 대부금의 답례로 IMF는 노동당 정부에 복지기금의 대대적인 삭감을 요구했다. 인종주의가 늘어나고 있었고 노동당 정부가 노동조합 지도부와 맺은 <사회협약>은 임금 상승을 제한했다. 그와 달리 기업가의 수익은 27%로 올랐다.


 

임금 상승 규제



 

헤럴드 윌슨과 그 뒤 제임스 캘러핸이 이끈 노동당 정부는 1974년 초에 토리 정부의 임금 억제에 맞선 전국 광산 노동자 파업을 배경으로 해서 선거에 당선되었다. 보수당 수상인 테드 히스는 국가에 그 또는 광산노동자 가운데 누가 통치할 것인지를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확실히 당신은 아니야였다. 앞선 2년은 제1차 세계대전에 뒤따른 폭풍의 시기 이래 전투성이 급증한 때로 여겨졌다. 대대적인 피켓 시위와 연대 행동은 노동조합 반대법과 소득정책을 도입하려는 히스의 시도를 좌절시켰다. 그러한 투쟁은 작업장에 뿌리를 두고 발전하기 시작했던 맑스주의 조직을 건설하게 한 급진화를 창조했다.

그러나 노동계급 활동가 사이에 지배적인 세력은 공산당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토리당을 패배시켰던 운동의 중추를 형성했지만, 그들의 전략은 좌파 노동조합지도자와 노동당의 좌파에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노동당 정부를 좌향좌하도록 압력을 넣기 위해 모든 이들 세력의 동맹을 이루어내는 데 집중했다. 공산당의 중요 동맹자는 휴 스캔런과 잭 존스였다. 그들은 엔지니어링과 운송 노동조합의 좌파 지도자였다. 그러나 노동당이 다우닝 스트리트 10번가에 둥지를 틀자, 스캔런과 존스는 그들의 조합원의 이익 앞에서 노동당에 충성을 맹세했다. 그들은 사회협약의 필요성을 받아들였고 정부를 위해 일할 것에 동의했다. 그들만이 노동당 정부의 임금 통제와 긴축정책을 판매할 수 있는 신용을 지녔다.

공산당과 노동조합 기구 안에 그들의 폭넓은 좌파 동맹의 전략은 스캔런과 존스와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었고 또한 노동당 정부와 전면적인 대결을 피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로비했고 밑으로부터 나온 압력을 흩뜨리기 위해 대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압력이 차단되기에는 너무나 컸다.



1977년 동안에 임금 협상은 흔들렸고 가격은 꾸준히 올랐다. 파업은 처음부터 꽤 많았다. 1977년 초에 BLC(British Leyland Combine)는 그때 영국의 가장 커다란 자동차 회사 출신의 노조 지도부를 형성했다. BLC는 사회협약에 맞서 하루 파업을 하는데 동의하기 위해 만났다. 파업호소는 두 달 뒤 의회의 로비로 꺾였다.

19772월에 6,000명의 자동차 노동자는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서 버밍햄의 롱브리지 자동차 공장에서 일을 박차고 나왔다. 노조 지도부는 그들을 일터로 돌려보냈다. 봄에 공장의 공구실 노동자는 노동당 정부의 사회협약을 반대하는 파업을 하기 위해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서 일하는 엔지니어와 결합했다. 그들이 이겼다면, 임금을 둘러싼 전국적인 반란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그뤈윅 

 

레이랜드 콤바인은 그들이 공구제작실 노동자 파업을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려고 만났다. 왜냐하면 브리티시 레이랜드 노동자가 노동당 정부의 유지에 기득권을 지녔기 때문이다.” BL 노동자는 공구제작실 노동자에 대한 피켓 라인을 세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롱브릿지 공산당 의장은 공구제작실 노동자를 해고로 위협하는 경영자의 편지에 서명했다. 휴 스캔런은 공구제작실 노동자의 대중 집회에서 작업장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공산당의 기관지인 모닝 스타(Morning Star)는 파업을 반대하고 파업이 불화를 일으킬것이라고 환기시키면서 논쟁에 끼어들었다. 홀로 싸우게 된 공구제작실 노동자는 패배해 일터로 돌아갔다.

똑같은 전술은 히드로에서 파업하고 있는 엔지니어에게도 쓰였다. 옵저버(Observer)트로츠키주의자들이 항공기 파업에 책임 있다.”고 선언하면서 그곳에 있던 SWP 당원을 공격했다. 공산당원을 포함하여 좌파 노동조합 관료들은 피켓라인을 막기 위해 다른 항공노동자를 얻으려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엔지니어는 싸웠고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깨트려 임금 상승을 얻어냈지만, 노동조합 관료들은 그들을 고립시키고 그들의 사례를 본받아 같은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는데 성공했다.

또 다른 기회는 1977년 여름과 가을에 잃어버렸다. 그때 런던 북서지역에 있는 그뤈윅 포토 프로세싱 플랜트(the Grunwick photo processing plant)의 소유주는 노동조합을 파괴하려고 애썼다. 주로 아시아 출신 노동자가 파업했다. 언론과 온갖 우파와 고용주의 조직, 수도의 경찰은 그들을 공격했다. 지역 우편 노동자는 필름배달을 보이콧했다. 노동자는 플랜트로 들어가는 파업파괴자를 나르는 버스를 막기 위해 피켓라인에 가담했다.

711일 아침에 아서 스카길이 이끈 요크셔 광산노동자 수 백 명을 포함한 피켓은 경찰의 공격에도 공장 진입을 시도하는 버스를 중단시켰다. 그러나 그런 뒤 TUC 지도자는 지역 공원의 집회로 사람들을 끌고 나갈 것을 호소했다. 피켓 라인을 파기하는 것에 대한 통렬한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스카길은 파업파괴자를 실은 버스가 공장에 진입할 수 있게 노동자를 끌고 나가도록 재촉했다. 파업노동자들은 토리당이 그들에 대한 법적 공격을 했을 때처럼 싸웠다. 그뤈윅은 처참히 패배했다.

그 해 여름에 반-파시스트 수 천 명이 국민전선(National Front)의 성장을 결정적으로 제한했다. 지역 젊은이와 노동조합주의자, 그리고 영국 사회당원은 다인종이 거주한 루이스햄(Lewisham) 지역을 통한 행진을 둘로 나누었다. 나치는 굴욕적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양극화가 영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나치는 그들의 중간계급 핵심을 넘어서서 심각한 지지를 끌어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지는 노동당 정부와 노동조합에 의해 배반당했다고 느꼈던 노동자에게서 나왔다. 토리당은 공세적인 자유 시장 지도자인 마가렛 대처의 지도로 재건하고 있었다. 노동자의 소수는 노동당 정부와 관계를 끊고 혁명적 좌파로 나아갔다. 훨씬 더 큰 수는 나치에 대항하여 동원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노동자의 다수를 동원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은 단결된 반격이 없는 상태에서 최선의 것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돌보는 것임을 믿은 대중이 점점 무관심에 빠졌을 때 줄어들었다. 그리고 1977년은 노동당이 집권한 뒤 3년 사이에 12.5% 떨어진 실질임금으로 끝났다.

낮은 임금 때문에 반란에 부닥친 노동당 정부 수상인 제임스 캘러핸은 나는 운명과 맞서 싸울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총 선거가 다가오자 캘러핸은 그의 적수인 대처와 경쟁하려고 애썼다. 오늘날 블레어처럼, 캘러핸은 노동자의 힘 있는 그룹을 장악하길 바랐다. 그때 FBU는 결코 전국적인 파업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그들의 지도자는 우파였고 임금문제로 파업하는 것에 반대했다. 따라서 일반 조합원이 파업행위에 압도적으로 찬성했을 때, 캘러핸은 그것과 대결하기로 결정했다. 경영인들은 런던 중심의 구시가지(금융중심지: the City of London)에서 시장의 연회에서 수상의 연설을 들으려고 모였고 수상이 소방대원을 비판하자 그에게 갈채를 보냈다.

고용주는 FUB를 창피를 주길 바란 이유가 있었다. 1973년 말에 히스 정부의 공식적인 임금 규제에 항의하려고 마차와 말을 타고 돌진하면서 글라스고우에서 일어났던 비공인 파업은 이겼다. 군대가 파업을 분쇄하려는 시도로 이용되었다. 파업자는 우파 노동조합 지도부, 노동당 하원의원에 의해 미디어 공세와 공격에 맞섰다. 의회에 소속된 전기기사와 도시의 다른 노동자 집단은 피켓 라인을 무너트리는 것을 거부했고 파업 행위를 클라이드뱅크와 인근 도시로 확산시키겠다고 위협했다. 많은 점에서 이것은 광산노동자 파업의 서곡이었다. 그 파업은 몇 주 뒤에 히스 정부를 무너트렸다.

1977년에 소방대원은 여러 가지 난관에 부닥쳤다. TUC 총회에서 좌파와 우파 관료들은 그 파업이 정부의 임금 규제를 무너트리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지지하는 것을 거부했다. 관료들의 지지 없이 파업을 지원하는 것은 일반 대중의 몫이었다. 나라 전체에서 주기적인 모금활동의 물결이 있었다. ?사회주의 노동자?소방대원 지원표제지는 포스터로 다시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군대가 파업을 분쇄하려고 동원되자, 대중매체는 또 다른 마녀사냥에 들어섰고 노동당 하원의원은 파업자를 비난했다. 더 중요한 것이 필요했다. 그것은 연대 행동이다.

 

 

좌파의 능력

 

그러나 2년 전에 토리당을 내쫓았던 연대는 깨졌다. 좌파 노동조합 관료들이 피켓 라인을 돌파하고 파업에 반대하라는 호소는 제대로 이루어졌다. 소방대원을 지원했던 좌파는 공산당이 효율적인 행동을 하게 할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

19781월에 TUCFBU의 우파는 작업장으로 귀환을 보증했다. 소방대원의 패배는 피켓라인에서 폭로된 임금삭감에 대한 압력을 막을 수 없었다. 그것은 1978~79년에 이른바 불만의 겨울에 일어났던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임금 상승 제한이 실시되면 이득을 볼 것이라고 노동당이 주장했던 저임금 노동자가 앞장섰던 반란을 뜻했다. 거기에는 소방대원 파업이 제공할 수 있는 단결된 행동을 위한 구심점도, 운동도 없었다.

노동당 정부에 대한 신랄함은 노동자가 일치단결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절망, 그리고 캘러핸과 대처 정부 모두가 지지했던 자유 시장 아젠더에 대한 대안이 있다는 믿음의 결여가 뒤따랐다. 몇 달 뒤 대처는 총선거에서 이겼다. 왜냐하면 대처가 많은 노동자의 표를 끌어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토리 당 지지자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고 노동당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 실망했던 노동당 유권자들이 투표를 하지 않았다.

오늘날 새로운 노동당 정부가 탐욕스러운 임금 요구와 노동조합의 전투성이 대처의 당선을 확실하게 했다고 주장했을 때, 그들은 역사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부를 잘 사는 사람에게서 가난한 사람에게 분배하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된 노동당 정부는 대처가 결코 흉내 내지 못했던 임금과 복지 기금 삭감을 관장했다. 노동당 정부는 대처가 노동계급 조직을 손상시키기 위해 효율적으로 써먹었던 대량 실업의 귀환을 주재하기도 했다. 노동당은 자유 시장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메시지를 써먹는 데 성공했다. 이주자를 목표로 삼음으로써 인종주의에 편승하려는 시도는 나치 세력의 득세와 나라에 있는 모든 우파 단체들을 신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좌파는 설자리를 잃었다.

 

 

다른 오늘

 

그러나 오늘날, 역사가 스스로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시하는 것이 전혀 없다. 지금과 그때 사이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 지구적으로 그리고 국내적으로 좌파에게 전면적 전환이 일고 있다. 자유 시장 정책과 전쟁에 대한 신자유주의 아젠다에 대한 거부가 있다. 모든 기존 정당, 대중매체와 학계를 완전히 뒤덮었던 신자유주의 합의를 거절하는 반란이 터지고 있다. 우파가 궁지에 몰렸다.

 

* 사유화, 열악한 임금, 형편없는 사회서비스는 국민 대다수를 병들게 하고 있다. 그것은 부시와 블레어의 전쟁 계획에 대한 총체적인 반대와 점점 더 서로 연계되고 있다.

 

* 연대는 되살아나고 있다. 소방대원은 1977년에 이루었던 것을 넘어서는 규모로 연대 행동을 얻어낼 수 있다. 사회협약에 매수되고 파업자를 고립시켰던 노동조합 지도자의 세대는 오래 전에 사라졌다. 그 대신 우리는 연대 행동을 드러내놓고 호소했던 좌파 지도자의 당선을 볼 수 있었다. 일반 노동자의 조직화가 다시 시작되고 있고 성공적인 반격이 그러한 조직화에 커다란 자극을 줄 것이다.

 

* 좌파가 되살아나고 있다! 1970년대 말에 좌파는 노동당의 토리식 정책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선거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는 아주 작았다. 폴 푸트는 총선거에 나섰지만, 그의 공탁금을 잃었고 조롱당했다. 최근에 그는 헤크니(Hackney) 시장 선거에 3번째 도전했고 자유주의자와 녹색당을 누르면서 거의 13%의 득표를 했다. 처음 나타난 주장, 즉 노동당에 대한 충성이냐 당신의 계급에 대한 충성이냐 하는 것은 결코 손쉽지 않았다.

 

* 무엇보다도 저항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지를 얻게 될 것이다. 1970년대 말은 대처와 블레어의 당선을 가능하게 한 거듭 패배를 맛보았다. 우리는 이제 회복의 과정을 보고 있다. 우리가 이제 승리들을 보장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임금은 새로운 노동당 정부 아래서 똑딱거리고 있는 시한폭탄이다. 영국은 유럽에서 물가가 가장 비싼 나라 가운데 하나다. 우리는 가장 나쁜 조건에서 가장 오랫동안 노동을 한다. 그런데도 이 정부는 노동 유연성을 찬미하고 있고 살찐 고양이 보스가 그것을 약탈하고 있다.

 

물론 언제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랭커셔와 스토크에서 망명자에 대한 공격과 나치를 위한 커다란 표밭은 기존 정당에 대한 불만이 어떻게 우향우로 바뀔 수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좌파가 전반적이고 압도적인 경향을 이루고 있다.

9월에 우리는 400,000만 명이 전쟁 반대를 외치며 행진했을 때 영국 근대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시위를 보았다. 이는 유럽의 그 어떤 나라에서도 그런 규모로 있지 않았던 인종적으로 뒤섞인 노동계급을 가로지르는 연대의 경탄할만한 사례였다. 유럽 언론은 그것을 영국의 제노바”(Britain's Genoa)라고 불렀다. 이탈리아에서 G8 정상회담에 반대하는 지난 7월의 대규모 시위는 이탈리아 전체에 저항의 불꽃을 지폈다. 영국에도 그와 똑같은 위험한 조건은 있다. 불꽃은 타올랐다. 혁명의 불꽃을 퍼트리자.



1978~1979: 불만의 겨울2

 

Alex Aspden



1978~1979년 겨울에 몇 천 명의 영국노동자가 동맹파업을 했다. 이는 제임스 캘러핸(James Callaghan) 노동당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임금상승률을 제한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은 1975년 8월에 거의 26.9%에 다다랐다. 같은 해 높은 실업률을 피하길 바란 헤럴드 윌슨의 노동당 정부는 TUC와 임의의 소득 정책에 합의했다. TUC는 노동자의 임금 상승률을 정부가 정한 한계에 따라 정하기로 했다.

 

정부는 7월 11일에 연봉 8,500파운드를 받는 모든 노동자의 임금상승을 주당 6파운드로 제한한다고 발표했다. TUC 총회는 곧 그 제안에 찬성했다. 게다가 1976년 내내 정부는 임금상승 상한선을 제안했고 1977년 7월에 고용주와 노동조합 사이에 자유로운 단체교섭이 천천히 단계적으로 실행될 것이라고 알렸다.

 

노동조합이 “저마다 자유롭게”(free-for-all) 임금상승요구를 제출하는 것을 피하길 바란 정부는 단체교섭의 회귀를 허용했다. 그러나 정부는 조건을 달았다. 그 조건이란 노동조합이 1976년에 합의했던 임금상승 상한선을 계속 유지하는 데 동의하고 그 정책에 따라 임금상승 협상을 다시 시작하지 않는다고 약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1978년에 인플레이션은 훨씬 줄었지만, 정부는 자신의 정책을 계속 펼쳤다. 1978년 7월에 정부는 임금 상승 상한선을 새로이 5%로 정했다. 임금상한선이 철폐될 것으로 바랐던 TUC를 놀라게 한 5% 정책은 총회에서 압도적으로 거부되었고 자유로운 단체교섭으로 직접적인 회귀가 줄을 이었다. 9월에 제임스 캘러핸이 총선거를 공고했지만, 예상과 달리 총선거가 열리지 않았다. 그 대신 정부는 다음 해에 경제를 안정화 시킬 수 있도록 그 정책을 유지하는 것을 택했다.

 

포드 자동차 공장 노동자는 파업을 벌였다. 이는 다음 몇 달 동안 영국을 강타하게 될 일련의 산업행동의 첫 불꽃이었다. 9월에 각 기업은 임금상승률을 정부가 정해놓은 5% 안에서 내놓았고 노동자는 이를 거부했다. 9월 22일에 15,000명의 포드 자동차 노동자가 작업을 거부했을 때, 파업은 시작되었고 9월 26일에 23개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 작업을 중단한 57,000명의 노동자들이 그 파업에 가담했다.

 

10월 초에 파업은 아직은 ‘비공식’이었다. 10월 5일에, the Transport and General Workers Union (TGWU)은 그 파업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노동자는 25%의 임금상승과 주당 35시간 노동을 공식적으로 요구했고 포드와 협상을 시작했다. 몇 주 뒤에 TGWU는 17% 임금상승에 동의했고 노동시간 단축을 완전히 거부했으며, 파업자들에게 11월 22일까지 작업장으로 돌아갈 것을 강요했다.

 

11월 중순에 포드사가 5% 상한선을 넘어 임금 협상을 할 생각이었음이 뚜렷해졌을 때, 파업을 더 확대시키지 않으려고 임금정책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기 위해 정부와 TUC 협상은 시작되었다. 취약한 정책이 잘 처리되었지만, TUC 총회에서 투표는 교착상태에 빠졌고 끝내 부결되었다. 정부는 노동조합과 협상이 깨지고 난 뒤 곧바로 임금정책의 불이행 때문에 포드에 경제제재를 가하려고 시도했다. 캘러핸은 의회에서 경제제재 안건이 어렵게 수정되고 난 뒤 마지못해 납득했고 경제제재를 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는 정부가 임금상승 상한선 5%를 효과적으로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자 사기업에서 파업이 더 기승을 부릴 여지가 있었고 그 뒤 그 파업은 공공부문으로 확대될 소지가 있었다.

 

곧바로 화물자동차 운수 노동자가 행동에 들어갔다. 그 뒤를 이어 BP와 Esso 유조차 운수 노동자가 40% 임금상승을 얻어내기 위해 초과 노동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모든 TGWU 소속 운수 노동자는 1월 3일에 파업을 벌였다. 파업을 통해 석유공급에 어려움이 일어나자, 몇 천개의 주유소가 문을 닫았다. 운수 노동자들은 아직 파업에 가담하지 않은 회사와 나라 곳곳에 있는 항만에서 피켓 시위를 벌였다. 정제소에는 피켓라인이 세워졌다. 파업에 가담하지 않은 유조차 운수노동자는 정제소를 이끌었던 파업자에게 감시조가 처음 배치되고 유조차 운수노동자가 되돌아갈 수 있다고 통고했다. 사실상 막혀 있던 도로를 통해 석유공급이 이루어지고 한 달 못되게 파업을 하고 난 뒤, 운수노동자는 노동조합이 요구했던 것보다 조금 적은 주당 1파운드로 임금을 올리는 것을 받아들였다.

 

트럭운수노동자가 파업을 일으켰던 한 주에는 공공부문 노동자가 파업행동에 들어섰고 사기업 노동자들은 그들의 기업주와 임금을 올리기로 합의했다. 많은 중요한 파업이 시작되었고 그 가운데 많은 파업은 여전히 1978~79년의 겨울동안 투쟁의 상징적 이미지가 되었다.



많은 철도 노동자의 파업이 이미 시작되고 난 뒤, 1월 22일은 공공부문 노동조합이 개최했던 “행동의 날”이었다. 150만 노동자가 파업을 일으켰던 그 날은 1926년에 일어났던 총파업 이래 영국에서 가장 커다란 전면적인 작업 중단을 나타냈다. 대규모 시위는 런던, 카디프, 에딘버러와 벨파스트를 포함한 많은 도시에서 일어났다. 약 140,000 명은 런던에서 일어난 시위에 참가했다. 노동자의 부족 때문에 학교와 공항이 폐쇄되었다. 비록 많은 지역에서 999가 유지되긴 했지만, 구급차 운수 노동자도 파업했다. 1월 22일 뒤에, 많은 노동자는 무기한 파업에 들어섰다. 나라에서 가장 전투적인 노동조합 가운데 하나인 왕립 간호대학 회원들이 25% 임금 상승을 요구하면서 파업에 들어갔다. 1월 중순에 구급차 운수 노동자 파업 동안 국가보건서비스(NHS)에 소속된 병원의 직원들이 위급상황을 빼고는 어떤 일도 하지 않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GMWU(지금은 GMB)의 조합원이었던 무덤파는 사람들의 파업은 1월 말에 리버풀과 템사이드(Tameside)에서 일어났다. 그 시대 사람들의 기억에 또렷이 각인되었던 사건인 파업은 파업이 계속된다면 지방 당국이 시체를 바다에 매장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지역 보건 공무원이 어느 저널리스트에게 털어놓도록 부추겼다. 2주 동안의 파업 행위 뒤에, 무덤 파는 사람들은 14% 임금상승을 받아들였고 일터로 돌아갔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에 일어난 또 다른 기억할만한 파업은 환경미화노동자의 파업이었다. 많은 쓰레기 하치장 노동자가 1월 22일 이래 파업하고 있었지만, 지역 의회는 쌓여있는 쓰레기를 처리할 공간 계약 기간을 연장하지 않았다. 영국의회가 쓰레기를 쌓아두도록 런던 중심부에 있는 라이체스터 광장을 배정한 뒤 쓰레기는 그 광장에 산더미처럼 쌓였다. 쓰레기는 쥐가 번식할 수 있는 좋은 공간이 되었고 보수매체는 파업자의 신뢰를 떨어트리기 위해 광장의 사진을 이용했다. 미디어는 겨울 내내 “실종된 공공 편의”라는 캠페인을 이어갔다. 더 나아가 미디어는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더미 사진을 내보내면서 노동자를 또 다시 공격했다. 쓰레기 하치장 노동자들의 파업은 2월 21일에 끝났다. 그때 노동자는 11% 임금 상승을 받아들였고 앞으로 한 주에 1파운드를 추가로 상승하기로 했다.

TUC와 정부는 파업이 협상 주간 뒤인 2월 14일에 끝났다고 보았다. TUC 총회에 제안서가 제출되었고 며칠 뒤 겨울의 오랜 일련의 분쟁을 끝내면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때 많은 노동조합이 그들의 조합원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많은 파업자들은 합의가 이루어지고 난 뒤에도 곧바로 파업을 끝내지 않았다. 그 시기 내내 파업은 노동조합의 통제를 받지 않고 기꺼이 파업을 주도하고 이끌 수 있는 많은 일반 노동자에 의해 실행되었다. 파업행동으로 모두 29,474,000의 노동일이 낭비되고 난 뒤 대부분은 2월 말에 작업장으로 되돌아갔다. 직접적인 행동은 노동자의 임금 가치를 뛰어넘는 인플레이션에 의한 효과적인 임금 삭감의 경향을 막는데 도움을 주었고 몇 십만 명의 노동자들에게 의미 있는 개선을 이루어내었다.

 


1978~79년 불만의 겨울: 

‘우리는 노동당이 우리를 배반했기 때문에 파업을 일으켰다.’3

 

SocialistWorkers 

 

많은 언론 매체는 그때 파업의 위협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1978~79년의 불만의 겨울로 회귀를 뜻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물론 모든 사람이 불만의 겨울이 노동조합주의가 너무 강했던 재앙의 시기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새로운 노동당 정부의 인물은 파업에서 이득을 보았던 오직 한 사람이 1979년 선거에서 이겼던 토리당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교훈이 파업하고 정부를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불만의 겨울의 거친 현실은 노동자가 그들 자신의 노동당 정부의 공격에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노동자는 노동당 정부에 더는 ‘충성’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노동당이 노동자에게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동당이 1974년에서 선거에서 당선되었을 때, 그들은 “우리의 목적이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을 위하여 권력과 부의 균형에서 근본적이고 뒤집을 수 없는 전환을 가져오는 것이다.”라고 약속했다. 사실 1974~79년에 정부는 1930년대의 기아의 해 이래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에 대해 가장 크게 공격했다.

 

주택 ― 1978년경에 주택은 제2차 세계대전이래 그 어떤 해보다 적게 공급되었다.

건강 ― 노동당 정부 첫 2년 사이에 병실 25,000개가 사라졌다.

교육 ― 선생님은 처음으로 가장 커다란 규모의 실업으로 고통 받았다.

가격 ― 1974년 1월과 1978년 12월 사이에 두 배로 뛰었다.

일자리 ― 노동당 정부 첫 3년 동안 하루에 일자리가 1,000개씩 줄었다.

실업은 1974년에 500,000명이었다. 그 수치는 1976년에 1,600,000명에 이르렀다.

임금 ― 4인 가족 평균 소득은 1974년보다 1979년에 훨씬 나빠졌다.

 

 

냉정한 통계수치 이면에는 수백만 노동자의 산산 조각난 삶이 놓여있다.

 

불만의 겨울 때문에 사람들이 정부에 반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노동당의 지지는 모든 사람이 파업하기 이전에 무너졌다. 1976년 11월 4일에 노동당은 Walsall North와 Workington에서 두 개의 “철밥통” 의석을 잃었고 뉴캐슬 중부에서도 좋은 시절을 끝냈다. 1977년 3월에 노동당은 버밍햄 스테치포드의 의석을 잃었다.

 

한 달 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노동당은 애시필드(Ashfield)를 토리당에 넘겨주었다. 이곳은 노동당이 23,000표를 가지고 있던 광산 선거구였다. 선거구의 상실은 제임스 캘러핸이 이제 이끌었던 노동당이 자유주의자들과 협정과 웨일즈와 스코트랜드의 민족주의당, 심지어 얼스터의 통일당(the Ulster Unionists)과 거래를 통해서만 공직을 유지했다는 것을 뜻했다. 노동당의 동요와 더불어, 사장들은 그들 나름의 압력을 넣었다. 수상 데니스 힐리(Denis Healey)는 1974년 11월에 대기업에 세금을 감면해주었다. 그 때문에 대기업은 해마다 8억 파운드 초과 이익을 챙겼다.

 

그러나 그들은 더 많은 것을 바랐고 1975년과 1976년 여름에 자본을 해외로 빼돌리면서 파운드의 가치를 무너트리는데 한몫했다. 정부는 그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누리게 했다. 사장들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했고 협박수위를 단계적으로 높였다. CBI 총감독자 켐벨 아담슨(Campbell Adamson)은 나중에 이렇게 되돌아보았다. “우리는 또렷이 투자 파업을 토론했다. 우리는 또한 여러 가지 세금을 내지 않는 다양한 방법과 자체적으로 합법적이지 않을 수 있는 것의 목록에 대해 토론했다.”

 

영국 은행 총수는 정부에 1975년 1월 30일에 파운드가 폭락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동당 정부는 곧바로 가혹한 임금 억제책을 이행했다. 임금은 인플레이션 비율을 따라잡을 수 없었고 그래서 생활수준이 더 떨어졌다. 처음에 노동당 정부는 임금상승 상한선을 6 파운드로 정했다. 6 파운드는 평균 임금의 약 10%였다. 인플레이션은 24.2%에서 오락가락했다. 1976년 8월에 두 번째 소득정책은 임금상승 상한선을 4.5%로 정했다. 인플레이션은 16.5%였다.

 

여전히 영국 기업은 1976년 9월까지 금융공황을 일으켰다. 그때 데니스 힐리는 파운드의 가치를 더는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국제구제금융에 대부를 신청했다. IMF는 그 대가로 더 많은 임금삭감을 요구했다.

그러나 은행가와 고용주가 공격하는 동안 노동조합지도자는 분출한 노동자 투쟁을 중지시키는데 최선의 노력을 했다. TUC 지도자는 1974년에 노동당 정부와 이른바 사회협약(the Social Contract)이라고 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노동조합 지도자, 특히 엔지니어 AEU의 휴 스캔런(Hugh Scanlon)과 TGWU의 잭 존스(Jack Jones)와 같은 좌파 지도자는 노동자의 생활수준에 대한 정부의 공격에 대해 자주 불평했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당 정부가 제시한 입장에 대한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존스는 그가 속한 노동조합의 1975년 대회에서 “우리는 단순히 이 노동당 정부가 계속 집권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 이러한 무시무시한 경제 위기 동안 노동당 정부를 편들어야만 한다.”

 

1976년에 선원 노동조합은 오랜 채무 때문에 파업 행위로 위협했다. TUC의 총서기인 렌 머레이(Len Murray)는 그들에게 말했다. “맹세코, 우리는 당신을 지지하는 노동조합이 없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우리는 당신을 절름발이로 만들 것이다.”

 

첫 번째 전국적인 포격전 파업은 다음 해에 일어났다. TUC는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데 가까스로 찬성했고 정부는 군대를 보냈다. 1977년에 숙련노동자의 집단이 일으킨 3개의 중요한 파업은 노동조합 지도자가 다른 노동자를 통해 파업 노동자가 세운 피켓 라인을 무너트리도록 지시한 뒤에 무너져 버렸다. 불만의 겨울은 지난 5년 넘게 배반과 실망의 감정의 폭발, 즉 댐의 폭발이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그 누구도 파업, 임금삭감, 낮은 임금이 일어난 원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구급차 노동자가 1,500,00만 공공부문 노동자가 파업했을 때인 1979년에 ?Socialist Worker?에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에게 똥물을 퍼부어도 괜찮지만, 우리는 정부가 그렇게 하는 것을 참고 견딜 수 없다.” 한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당 정부가 우리를 배반했기 때문에 우리는 파업해야만 했다.” 1978년 내내 임금문제를 넘어선 투쟁을 요구하는 정서가 늘어났다.

 

노동조합 지도자는 더는 빗발치는 쇄도를 제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유조차 운수 노동자와 다른 노동자는 노동당 정부의 5% 임금상한선에 맞서 그 해 겨울에 파업했다. 보기를 들면, 유조차 운수 노동자는 주당 40시간 65파운드를 요구했다. 그들은 장시간 노동과 낮은 임금으로 물려있었다. 그들은 더러운 합숙소에서 3시간가량 새우잠을 잘 수밖에 없는 밤샘 노동의 대가로 작은 배당금을 받았다.

 

그런 사람들은 노동당 정부의 당연한 지지자가 되어야 했을 텐데. 그러나 노동당 정부는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그들을 무시했다. 건강보험 노동자는 친절한 NHS와 그들에 알맞은 생활을 바랐다. 노동당 정부는 그 어느 것도 제공하지 않았다. 많은 파업은 성공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노동당의 경험, 노동운동에서 저항의 결여는 그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했다. 좌파 노동당이나 노동조합지도자의 그 누구도 노동계급의 혹독한 비참함을 노동당에 대한 좌파의 도전으로 돌려놓았다. 노동당 좌파에 대한 가장 커다란 세력은 공산당이었다. 공산당은 정부의 <사회협약>을 혹평했다.

 

극좌파는 노동자 대중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우파인 토리당과 나치는 불만에서 세워졌다. 5년 전에 토리당을 몰락시킨 믿음직스러운 노동계급활동가는 거의 사기를 잃었다.

 

새로운 노동당 정부는 친경영정책을 통한 엄청난 비참과 분노를 다시 창조하고 있다. 새로운 노동당 정부가 부닥친 위기는 당의 토대인 구성원과 활동가를 폭발시켰다. 우리는 다시 파업의 물결을 필요로 하지만, 우리는 또한 좌파에 대한 정치적 일반화(political generalisation)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일어나서는 안 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 1979년보다 훨씬 더 폭넓은 사유화와 시장의 실패에 대한 의식이 있다. 반자본주의 운동의 경험이 있고 반전운동을 지지했던 사람들도 있다.

 

도전은 새로운 노동당 정부에 대한 총체적 분노를 사회주의 사상으로 통일된 정치세력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1. Socialistreview, November 2002. [본문으로]
  2. 이 글의 출처는 이와 같다. (http://libcom.org/history/1978-1979-winter-of-discontent) [본문으로]
  3. http://www.socialistworker.co.uk/art.php?id=11511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