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 건설에서 미국공산당의 이중 역할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6월호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 건설에서 미국공산당의 이중 역할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5:07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 건설에서 미국공산당의 이중 역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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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미국에서 노동조합 가입률은 아주 낮다. 몇 십 년 동안 계속 떨어지고 난 뒤 1999년 전체 조합원은 노동 인구의 14%에도 못 미쳤다. 한때 노동조합의 근거지였던 제조업에서 노동조합 가입률은 지난해에도 계속 떨어졌다. 지금 전체 민간(private) 공업에서 노동조합 가입률은 겨우 전체 노동 인구의 9.4%에 머물러 있다. 이는 CIO(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 산업별노동조합회의)를 세우고 AFL(American Federation of Labor: 미국노동총연맹)을 부활시킨 1930년대의 커다란 운동이 있기 전보다 더 낮은 것이다.

어쨌든 지금의 상황은 1930년대 조직화가 일어나기 전 시기를 생각나게 한다. 1920년대와 30년대 초에 AFL에 가입한 노동조합의 조합원 수는 계속 줄어들었고, 1929년 뒤에는 더욱 더 가파르게 떨어졌다. 그러나 이미 1929년 이전조차도 AFL 소속 노동조합은 그들 자신의 조합원의 직접적 이해관계를 방어하는 투쟁조차 이끌지 못하면서 점점 더 노동계급에서 조합원을 확보할 수 없었고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1920년에 AFL의 조합원 수는 400만이 넘었지만, 계속 줄어들어 1929년쯤에는 300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30년대가 되자 이러한 하락 추세는 멈추었다. 1930년대의 어려운 시절이 노동계급을 폭발적인 투쟁으로 몰아넣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물론 1930년대에 그랬던 것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은 비록 방향이 뚜렷하지 않았지만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또한 거기에는 주체의 문제가 있다. 즉 누가 노동조합 건설 투쟁을 이끌었고 그들은 어떻게 그것을 이끌었는가? 이 투쟁은 근거 없이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 투쟁은 존 루이스(John L. Lewis), 시드니 힐먼(Sidney Hillman), 데이비드 듀빈스키(David Dubinsky), 찰스 하워드(Charles Howard)1935년에 자신들의 동료인 AFL 관료들과 관계를 끊었을 때 일어났다.

공산당의 투사들은 대부분의 노동자가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게 한 1936년과 1937년의 투쟁에서만이 아니라 1936~37년 대규모로 솟구친 투쟁의 문을 연 초기 투쟁에서도 중요한 조직가였다. 이는 과장이 아니다.

루이스, 힐먼, 듀빈스키가 가장 힘들었을 때에도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미숙련 노동자 대중을 조직할 목표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오래 전에, 이미 공산당은 이러한 미숙련 노동자과 함께 파업을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 투사들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 있었다. 그들은 살인죄로 날조되어 모함을 받았고 대리인과 살인청부업자들에 의해 살해당했거나 또는 도시 밖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그들은 나날의 경험을 통해 나중에 그들을 커다란 투쟁을 지도하게 한 노동자의 믿음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1928년에 공산당은 7,300명이 당비를 낼 만큼 작은 규모였다. 그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이 중요한 산업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당비를 내는 당원들은 겨우 193319,000, 193527,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그때 1,000만 노동자와 견주어 보면 아주 작았다. 그러나 공산당은 투사들을 자신들의 계급에 바쳐지는 계급투쟁의 용광로에서 단련시켰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작은 공산당이 그 규모에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는 역할을 하도록 이끌었다.

다른 한편으로, 공산당은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투사와 노동자를 방해해서 끝내 그들의 투쟁을 루이스 같은 관료들이 상상했던 것처럼 CIO를 궁지로 몰아넣게 한 정책을 펼쳤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산당은 그러한 상황에서 노동계급이 모든 가능성을 실현하게 하지 못하면서 1930년대 대규모 동원에 종말”(The End)을 고하게 했다.

 

 

미국 자본주의의 첫 번째 규칙: 노동조합 금지

 

CIO를 위한 투쟁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한 것은 미국 부르주아 계급이 끈질기게 노동조합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것이었다.

미국에서 노동계급이 처음 형성되었을 때부터, 부르주아 계급은 (노동조합을) 조직하려는 노동자에 맞서 국가 기구뿐만 아니라 그들이 고용한 무장 살인청부업자들과 폭도들을 이용해서 폭력을 행사했다. 법과 법원 판결은 노동자의 조합을 효과적으로 불법화했다.

노동자의 잇따른 시도는 부르주아지의 비타협적인 태도에 부닥쳐 계속해서 패배했다. 1880년대 중반 하루 8시간 노동을 위한 대규모 파업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계급의 단단한 벽에 작은 균열도 낼 수 없었다. 기업들은 AFL 소속 몇몇 노동조합과 타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한 노동조합은 주로 숙련 노동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그러한 노동조합에 속한 노동자는 그들 자신의 협소한 이해관계만을 보호하는 일종의 직업 트러스트로 효율적으로 행동했을 뿐이다.

같은 시기에 국가 기구는 AFL을 특징짓는 좁은 조합주의의 틀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노동조합들을 새로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산업별로 노동자를 조직하거나 노동기사단과 같이 직종을 넘나들며 노동자를 조직하려는 노동조합들, 미국철도노조(the American Railway Union) 또는 세계산업노동자연맹(the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IWW)은 악의에 찬 공격을 받았다.

그렇지만 노동자는 계속해서 이러한 장벽을 부수려고 애썼다. 이것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거세게 일어났던 커다란 파업 물결에서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19년은 IWW 투사들과 AFL 조합활동가들이 이끈 시애틀 총파업으로 시작되었다. 1919년은 윌리엄 포스터(William Z. Foster)가 대표했던 AFL 내부의 위원회가 이끌었던 대대적 조직화 운동과 철강 산업을 조직하는 파업으로 끝났다. 철강 산업에서 패배와 함께 많은 AFL 관료가 전시노동위원회(the War Labor Board)에 청구하도록 노동자를 설득해 파업을 철회하도록 함으로써 전쟁이 끝나고 나서 일어난 거대한 파업 물결은 막을 내렸다. 1919년 파업이 패배하고 나서 AFL 관료들은 그들의 조직을 확대하려는 모든 시도를 그만두었다. 많은 미숙련 노동자는 조직되지 않은 상태로 남았을 뿐만 아니라 AFL 노동조합은 물러서기 시작했고 자신들의 조합원들의 당면한 이익을 방어할 수조차 없었다. 그 탓에 AFL의 규모는 꾸준히 줄어들었다.

노동계급은 거센 공격을 받았다. 파업을 지도했던 투사들, 또는 그저 활발하게 활동했던 투사들도 해고당했고 영원히 블랙리스트에 올라갔다. 나중에 미국 법무장관으로 지명된 팔머 레이즈(Palmer Raids)는 이것을 지휘했고 수천 명의 외국 출신 노동자를 미국에서 추방하려고 그들을 체포했다. 몇 천 명이 넘는 미국 출신 노동자도 여러 가지 죄목으로 고발당해 체포되었고 투옥되었다. IWW는 시애틀 지역에서 생각지도 못한 공격을 받았다. 사무실들이 파괴되었다. 투사들 몇 명은 살해되었고 일부는 미국 재향군인회 소속 사람들의 폭력에 시달렸으며, 많은 다른 사람들은 쫓겨났다. IWW의 빌 헤이우드(Big Bill Haywood)는 살해 위협을 받으면서 어쩔 수 없이 미국을 떠났다. 매사추세츠에서 직물과 제화 노동자로 알려진 아나키스트 투사들, 니콜로 사코(Nicolo Sacco)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Bartolomeo Vanzetti)는 위조범으로 완전히 날조되어 재판에 회부되어 결국 1927년 사형 당했다.

미국공산당이 처음 무대에 오를 때, 상황은 이처럼 어려웠다.

 

 

미국 공산당의 전진

 

1920년대 중반에 곧 다가올 공황의 첫 조짐이 노동자를 덮쳤다. 실업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줄어들다가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1929년에 실업률이 붕괴되기 시작해서 끝내 역사상 보기 드문 수준에 다다랐다. 1932년까지는 탄전에서 작업시간이 1928년의 절반을 약간 넘는 수준으로 줄어들었고, 시간 당 임금은 1/4 정도 깎였다. 자동차와 철강과 같은 산업은 특히 심한 타격을 받았다. 보기를 들면, 포드는 신규 노동자를 1929128,000명에서 193137,000명으로 줄였다.





대공황 초기에 공산당의 주요 활동가들은 실업자였다. 1930년 초까지는 5백만 노동자가 공식적으로 실업자였다. 이 수치는 1년 전보다 10배가 높았다. 193036일 미국 공산당은 미국을 가로지르는 하루 시위를 촉구했다. 디트로이트에서 최대 시위가 일어났고, 뉴욕과 시카고가 뒤를 따랐다. 밀워키, 보스톤,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D. C., 플린트, 클리블랜드에서도 꽤 많은 사람이 시위에 참여했다. 15,000명이 참여한 플린트는 최대 규모는 아니었지만 한 가지 의미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 다른 도시들보다 아주 작은 플린트는 말 그대로 GM이 경찰과 시 정부를 직접 통제하는 기업 도시(company town)에 지나지 않았다. 모두 합해 대략 50만 명이 36일 시위에 참여했다. 이때에 대부분의 실업자 시위가 그러했듯이 그들도 피 흘리며 경찰과 싸웠다.


가장 중요한 실업자 시위는 1932년에 일어났다. 이 시위에는 미국 공산당과 지역 실업자 위원회가 스스로 불렀듯이 포드의 굶주린 행진”(Hunger March)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략 4,000명의 시위대가 디트로이트에서 디어본으로 들어갔을 때, 시위대가 자신들에게로 몰려오자 디어본 경찰은 최루가스로 공격했다. 루지(Rouge)에서 시위대는 포드 공장 안에서 발사된 기관총 사격을 받았다. 4명의 시위 참여자들이 바로 그 자리에서 죽었고, 한 명이 5번째로 얼마 뒤에 죽었다. 22명이 부상당했다. 병원으로 실려 간 부상자 대부분은 병원침대에 묶였다. 경찰은 여러 죄명으로 공산당 지도자 윌리엄 포스터(William Z. Foster)를 포함하여 수십 장의 기소장을 작성했다. 미국 공산당과 연계된 다양한 조직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공산당 사무실도 습격당했다. 이틀 안에 공산당은 처음 네 명의 희생자를 위한 장례 행렬을 조직했다. 25,000에서 40,000명의 사람들은 디트로이트 중심가에서 행진하고 나서 4명이 묻혀 있는 공동묘지로 나아갔다. 기소장은 그냥 종이조각이 되어버렸다.

 

미국공산당은 지역에서 구제 보상금 계속 지급, 퇴거 저지 등의 문제를 가지고 실업자 운동에 참여했다. 이는 때때로 성공했다. 보기를 들면, 1932년 말 시카고실업자위원회(the Chicago Unemployed Councils)는 도시 전체 규모의 시위를 조직했다. 그 시위는 시 정부가 가족들에게 지급하는 구제 보상금 삭감을 철회하도록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퇴거가 저지된 사람들의 수는 많았다. 공산당이 실업자들 사이에 어떤 영구 조직을 세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공산당이 이러한 사업에서 만났던 실업 노동자 가운데 일부는 그들이 직장으로 되돌아갔을 때 나중에 공산당을 계속 찾아왔다.

 

 

AFL 관료들이 손을 놓는 동안, 공산당 투사들이 파업을 이끌다.

 

 AFL 지도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주의(Do-Nothing-ism)를 조언하는 동안 공산당 투사들은 AFL 관료들이 파업의 한가운데서 무시되었거나 때때로 버려졌던 노동자가 이끈 파업의 지도자로 되었다.

미국공산당은 뉴저지 주 퍼세이크(Passaic)에서 1925~26년에 일어난 섬유노동자 파업을 통해 첫 경험을 쌓았다. 이 파업은 의심의 여지없이 1920년대에 가장 중요한 파업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어렵고 사실상 절망적인 조건 아래에서 커다란 파업을 지도할 수 있다는 것, 대규모 피켓라인, 무료 급식소(soup kitchens), 정당방어, 전국 광고, 파업 회의, 그리고 재정 모금과 같은 복잡한 기구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괴로운 상태가 지배하는 가운데, 공산주의자들은 영광뿐만 아니라 책임과 위험도 떠맡기 위해서 투쟁의 최전선으로 기꺼이 나아가려 하였으며 나아갈 수 있었다.” 

 

버트 코크란(Bert Cochran)이 쓴 글이다. 그는 공산주의자의 친구라고 할 수 없다.

퍼세이크 파업은 일 년 넘게 이어졌다. 파업자들은 법정을 통해 그리고 거리에서 악의에 찬 공격을 받았다. 자유주의 서클에서 파업자에 대한 폭넓은 지지와 라폴리트(LaFollette) 상원의원이 이끈 의회 청문회에 회부될 만큼 공격은 공공연하고 폭력적이었다.

퍼세이크에서 끝내 손실을 입었지만, 그 파업은 공산당 투사들을 미국의 많은 지역에서 섬유노동자와 연결해주었다. 투사들은 다음 해에 그러한 연결을 활용했다. 드디어 공산당 투사들은 역사적으로 노동조합 조직가들에게는 가장 힘들었던 지역인 남부를 포함하여 많은 섬유노동자 파업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28년에 뉴베드퍼드, 매사추세츠; 1929년에 개스토니아, 노스캐롤라이나, 그리고 개스토니아에 연결된 다른 작은 남부 도시들의 공장들; 1931년에는 로렌스, 매사추세츠, 알렌타운, 펜실베이니아, 그리고 패터슨, 뉴저지.

미국공산당은 석탄 광부 사이에서 일련의 작전을 펼쳤다. 여기서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파업 지도부의 지위에 있음을 알았다. 1929년에 일리노이 남부에서 광부가 일으킨 파업을 신호로 1931년 펜실베이니아 서부, 오하이오 동부, 웨스트버지니아 북부탄전 지대를 뒤덮은 파업에서 정점에 달했다. 그와 같은 해 공산당 투사들은 켄터키 할란 카운티로 들어갔다. 전미광산노련(UMWA)이 광부들의 행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파업을 이끌게 되었지만 파업이 한창일 때 끝내 도망쳐버린 뒤였다.

공산당은 또한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소설과 단편에 기록되었던 1930, 31, 32년에 야외작업 노동자와 통조림 공장 노동자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농업 파업을 이끌었다. 공산당은 남부에서 소작인 조합을 세웠다. 공산당은 남부 지방에서 KKK단 지부(the Klan)의 지배에 맞섰다. 자동차 산업을 보면, 미국 공산당은 1931년 플린트에서 공구와 형판(型板) 숙련공 파업에서 작은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1933년 브리그스(Briggs)의 공장 가운데 4개를 닫아버리는 파업을 이끌었다. 이것은 자동차 공장을 지배했던 거의 군사체제를 뚫고 일어난 처음으로 중요한 행동이었다.

이러한 파업들 대부분에서 찾아진 하나의 공통 실마리는 투사들이 관련 산업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몇 가지 경우에서 그들은 이미 일찍이 일시적으로 또는 완전히 해고된 상태였다. 다른 경우에서 그들은 실업자들 사이에서 조직화 경험에 성공한 전직(前職) 학생들로서 이제 막 고용되어 노동계급이 되었다. 또 다른 경우들에서 그들은 운동을 시작했을 때 노동자로 전환된 것으로 알려진 투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배경이 어떻든지 간에 그들은 대부분 전투가 시작되고 나서 무대에 나타났다. 달리 말하면 이러한 파업들은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노동자가 자신들의 조직을 미리 세우지 못한 상태였다. 작업장 안에서 투쟁 정신을 나타내는 어떠한 표현도 간단한 추방을 가져오는 그 당시의 조건에서 이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AFL 관료들은 이 기간 동안 공산당 투사들이 도저히 승리할 수 없는 모험주의적 행동을 이끌고 있다고 미국공산당을 비판했다. 확실히 이러한 파업들은 거의 완전히 패배했다. 노동자는 결과적으로 자금 압박과 폭력적 공격에 부닥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파업이 별로 전망이 없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AFL 관료들이 노동자의 파업을 막아내려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무언가를 했다면, 그것은 파업 노동자가 다른 노동자로부터 도움을 얻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광산노련(UMWA) 관료들이 노동자의 파업을 막을 수 없었던 할란 지역과 같은 몇몇 경우들에서 그들은 문자 그대로 전투의 한 가운데서 말 타고 도시를 떠나듯이 도망쳤다. 다른 경우들에서는, 파업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던 AFL 지도자들이 어떤 합의도 이루어지기 전에 노동자에게 돌아가도록 설득하는 브로커 역할을 기꺼이 맡았다.

 

 

미조직 노동자와 함께 하기 위해 AFL을 떠나다

 

이때 미국공산당이 지닌 문제는 공산당 투사들을 아주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곳으로 보냈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다른 누구도 가려고 하지 않은 곳에 갔던 것도 아니다. 공산당 투사들은 싸울 각오가 되어 있는 노동자와 같은 태도를 보였다. 그들이 이끌었던 파업들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지만 그래도 기꺼이 벌어졌고 1930년대 후반에 일어날 파업 물결의 튼튼한 바탕이 되었다.

이때 미국공산당이 지닌 문제는 이미 세워진 노동조합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AFL을 무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1927년에 중국공산당이 패배하고 나서 1928년에 코민테른이 노선을 바꾼 뒤에, 1920년대 후반과 30년대 초반 미국 공산당은 그들 자신의 노동조합을 세우려고 애썼다.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이러한 선회에 포함된 것이 무엇이든 간에, 미국 공산주의자들은 “AFL에 소속된 노동조합의 주위를 맴돌지 않고그 대신에 노동자가 그때 준비가 되어 있는 지에 상관없이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라는 지시를 들었다. 미국공산당이 한때 AFL 안에서 활동할 때 중심으로 삼았던 노동조합교육연맹(the Trade Union Education League: TUEL)은 더는 활동의 중심이 되지 못했다. 미국 공산당 투사가 이제 새롭게 활동의 근거지로 삼은 것은 노동조합통일연맹(the Trade Union Unity League: TUUL)이었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공산당 투사들이 AFL과 경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AFL 소속 노동조합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던 공산당 투사들은 강제로 새로운 적색 노동조합을 세워야 했다.

자본주의의 3를 둘러싼 장황한 혁명적 소리가 나온 뒤, 이러한 정책 선회가 뒤따랐다. 다른 나라들, 특히 독일에서 이 정책은 재앙적인 결과를 낳았다. 미국에서 공산당은 심지어 시간당 몇 센트의 임금 인상을 위한 단순한 투쟁에서도 초혁명적 수사학을 남발했다. 그리고 전형적인 스탈린주의 방식으로 미국공산당은 매번 모든 투쟁을 결과에 관계없이 승리라고 선전하기 시작했다. 보기를 들면, 1934년에 나온 팸플릿에서 미국공산당은 쓰라린 패배를 당한 뉴멕시코 광부들의 파업을 빛나는 승리라고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뉴멕시코 광부들은 혁명적 투쟁의 학교를 통과했다. 그들의 파업으로 배운 많은 수업과 경험들이 전투에 나설 수 있도록 그들을 무장시켰다.” 사실 이와 같은 태도는 노동자를 무장시키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1928년부터 1934년까지 미국공산당이 펼친 정책 때문에 입은 가장 커다란 피해는 노동자가 관료들에게 폭넓게 열려 있는 AFL 노동조합을 떠나 새로운 노동조합에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을 때 공산당 투사들을 대부분의 노동자로부터 떼어놓은 것이다.

몇 년 안에 미국공산당은 몇몇의 적색노동조합을 세웠다. 1928년에 전미광부노조(the National Miners Union), 전미섬유노조(the National Textile Workers Union), 식품노조(the Food Workers Industrial Union); 1929년에 바늘산업노조(the Needle Trades Workers Industrial Union), 선원노조(the Marine Workers Industrial Union), 담배산업노조(the Tobacco Workers Industrial Union), 통조림농업노조(the Cannery and Agricultural Workers Industrial Union), 정육산업노조(the Packinghouse Workers Industrial Union), 신발가죽산업노조(the Shoe and Leather Workers Industrial Union). 공산당 투사들은 1927년에 미국사회당에서 지도부를 넘겨받아 이름을 바꾸었던 자동차산업노조(the Auto Workers Industrial Union)의 지도부였다. 철강금속산업노조(the Steel and Metal Workers Industrial Union)1932년까지 세워지지 못했다. 미국공산당은 철강 산업에 뒤늦게 뛰어들었다.

이러한 노동조합은 대부분 문서로만 있는 조직이었다. 1934년 해운 파업을 일으킨 서부해안 공산당 지도자인 샘 다르시(Sam Darcy)는 미국공산당의 정치신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선원노조에는 네 명 그리고 때때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여섯 명이나 되는 상근직원(full-time functionaries)이 있었지만, 도크에서 일하는 한 명의 노동자를 확보하지 못했다.”

미국공산당이 자신의 당원들과 지지자들을 AFL 소속 노동조합에서부터 끌어냈기 때문에, 새로운 노동조합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부들이 가장 큰 손실을 입었다. 1924년 이전에 미국공산당은 광부들 사이에 제법 기반을 갖고 있었다. 그때 미국공산당은 존 루이스(John L. Lewis)에 맞서 전미광산노련(UMWA)위원장으로 공산당 투사들 가운데 한 명인 조지 보체이(George Vozey)를 출마시켰다. 루이스의 관료기구는 보체이가 얻은 득표수를 66,000표로 계산했다. 루이스는 136,000표를 얻었다. 실제 득표수가 얼마든지 간에 이 선거는 공산당 투사들이 전미광산노련에서 실제 기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공산당투사들이 전미광산노련을 떠나면서 몇몇 노동자를 함께 데리고 나왔지만, 그들은 더욱 많은 노동자를 남겨둔 채 떠나 버렸다. 미국공산당의 전미광부노조 총무(secretary-treasurer)였던 패트릭 투헤이(Patrick Toohey)는 이러한 태도가 어리석었음을 ?데일리 워커?(1929. 5. 24일자)에 무심코 표현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AFL에 여전히 남아 있는 수천 명의 정직한 노동자는 그들이 배신당하고 있다는 것을 재빨리 배울 것이고 미국 전체에 있는 미조직 노동자와 함께 하기 위해서 AFL을 떠날 것이다.”

노동자는 스스로 노동조합을 떠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산당 투사들이 자신들의 노동조합을 세우기 위해 전미광산노련을 떠났을 때, 그들은 루이스가 자신에 대해 언제나 반대 입장에 섰던 전미광산노련의 분파들에 대한 통제를 확고히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931년 펜실베이니아와 오하이오 주에서 일어난 파업은 이렇게 만들어진 재앙의 좋은 사례였다. 이 파업들은 미국공산당이 이끈 새로운 전미광부노조(NMU)가 이끌었다. 극단적인 폭력과 법적인 책략을 통해서도 노동자를 되돌릴 수 없게 되었을 때 광산주들의 단단한 전선은 무너졌다. 그들 가운데 대다수가 노동자에게 그들이 요구한 대부분을 들어주는 협약에 서명했지만,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던 루이스가 이끈 전미광산노련과 협약이 맺어졌다. 노동자가 이러한 계약에 따라 작업장에 돌아갔을 때, 전미광부노조(NMU)는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고, 노동자는 전미광부노조를 떠나서 협약을 관리하는 전미광산노련에 들어갔다.

물론 AFL이 관심을 쏟지 않은 노동자가 많았기 때문에, 공산당 투사들이 AFL에서 활동해야했던 유일한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공산주의자들이 AFL 소속 노동조합에서 모두 활동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AFL을 떠난 공산주의자들은 AFL 소속 노동조합에서 그때까지 미국공산당을 따르고 있던 노동자에게 아무런 전망도 내놓지 못했다. 또한 그것은 시간이 곧 말해주듯이, AFL 소속 노동조합에 떼를 지어 들어가려 했던 미조직 노동자에게 공산당 투사들이 접근할 수 있는 어떠한 방법도 제시하지 못했다.

 

 

1934: 방관자로 앉아 있다

 

1933년까지, 노동계급은 자신의 힘을 시험해보기 시작했다. 1933년에 거의 100만에 이르는 노동자가 파업에 가담했다. AFL이 투쟁을 계속할 의지가 없었고, AFL이 미숙련 노동자 대중이 몰려 들어오는 것을 막았지만 AFL의 구조 내부에 자신들의 노동조합을 세우려는 미조직 노동자 사이에 진정한 운동이 발전하고 있었다. 19338월에, AFL 집행위원회는 마침내 이러한 동원을 인정하고 노동자 대부분이 될 수 있는 한 조직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었다. 그것은 이른바 연방 지부이다. 사실상 연방지부에 대한 승인은 성장하고 있는 동원에 의해 압력 받기를 바라지 않았던 관료들과, 트럭운수노조(Teamsters)위원장 다니엘 토빈(Daniel Tobin)AFL 위원회 내부 논쟁에서 그렇게 불렀던 것처럼 미숙련 노동자를 쓸모없는 밥벌레어중이떠중이라고 부른 미숙련 노동자의 운동을 꺼리고 움츠러들었던 자들 사이의 타협이었다.

AFL이 노동조합에 가입하려는 노동자를 조직하는 것을 거부한 까닭은 흔히 숙련 노동자의 노동조합이 미숙련 노동자가 들어올 수 있도록 숙련 장벽을 제거하기를 꺼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틀림없이 하나의 요인이었다. 그러나 좀 더 근본적으로 AFL 관료들은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얻으려 할 때 필요한 투쟁에 노동자를 적극적으로 참가시킬 준비를 하지 않았다. AFL 위원회 안에서 벌어진 논쟁에서 토빈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노동자가 내일 파업을 하려 한다면 우리는 오늘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1920년대에 AFL 소속 노동조합이 급격히 줄어든 것은 자신들의 노동조합 조합원들의 파업조차 이끌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노동자는 파업을 계속하고 있었고 기존 AFL 소속 노동조합을 밀어 넣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1933년과 1935년 사이에 50만이 넘는 새로운 노동자가 AFL 소속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미국공산당의 정책은 이러한 늘어나고 있는 운동 외부에 방관자로 머무는 것이었다.

진정한 전환점은 1934년이었다. 남부와 북동부에서 거의 40만 명의 섬유 노동자가 전국적인 파업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미네아폴리스, 톨레도,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네 차례씩 주요한 파업이 일어났다. 섬유산업 파업을 제외하고, 1934년에 일어난 큰 파업들은 지난날에는 언제나 노동조합 승인을 거부했던 기업들로부터 어떤 형태로든, 사실상 또는 뚜렷이 노동조합의 몇몇 형식을 승인하게 했다. 이러한 네 개의 파업들은 모두 AFL 노동조합의 틀 안에서 일어났다. 단 하나, 샌프란시스코 해운 파업에서는 미국공산당이 어쨌든 역할을 했다. 해운 파업에서 미국공산당은 샌프란시스코 지구의 지도부를 인수하기 위해 해리 브리지(Harry Bridges)의 캠페인을 지원하면서 이미 AFL 항만노조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미국공산당이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동안,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세 개의 미네아폴리스 파업을 이끄는데서 역할을 수행했다. 미네아폴리스 파업은 중서부 전역에서 미숙련 노동자에게 운수노조의 문을 열어주었다. 톨레도에서 실업자들의 운동에 의해 지원을 받은 오토라이트(Auto-Lite) 파업은 머스테(A. J. Muste)의 미국노동자당(American Workers Party)이 이끌었다. 미국노동당은 매우 재빨리 그 두 개의 파업들의 결과 트로츠키주의자들과 통합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힘이 작았지만 공업 노동자가 중요한 승리를 획득한 바로 첫 번째 파업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자신들의 가치를 입증한다.

1934년의 가장 큰 파업은 섬유 노동자의 총파업이었다. AFL의 섬유노련(United Textile Workers union: UTW)이 파업을 이끌었다. 미국공산주의동맹(the Communist League of America[Trotskyist])의 지도자인 제임스 캐넌(James Cannon)은 섬유산업 파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규모에서 볼 때 미국 노동사에서 가장 거대한 파업이었다. 그리고 투쟁정신에서도 마찬가지로 ……. 가장 노쇠하고 반동적인 노동조합들 가운데 포함되는 노조 내부에서, 수십만 섬유 노동자가 기억할만한 전투를 수행했다. 오랫동안 후진성과 미신에 젖어있던 남부의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 깨닫게 되었고 파업에 들어가 파업파괴자들, 총잡이들, 의용군에 맞서 싸웠다. 북부에서 남부까지 전선은 확장되었다. 공장들이 문을 닫았다. 파업이 중단되기 며칠 전, 공장을 다시 열려는 고용주들의 거대한 운동은 파업 노동자가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 수포로 돌아갔다. 그들의 대열은 깨지지 않았고, 미국 전역에 걸쳐 노동자의 보편적인 지지를 얻었으며, 그들의 손에 승리를 쥔 상태에서, 섬유 노동자는 고용주들로부터 단 하나의 양보도 없이,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자신들의 관리들에 의해 파업이 중단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오늘날 노동조합운동의 치명적 약점을 해결할 열쇠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직화된 저항의 표현이 없다면 이러한 괴물 같은 배반이 저질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섬유 노동자의 대열에서는 그러한 저항을 조직하려는 세력이 없었다.”

 

 

공산당 투사들이 1933년에 일어난 일련의 좀 더 작은 파업에서뿐만 아니라 그 이전 8년 동안에 일어난 중요한 섬유 노동자 파업에서 역할을 했지만, 미국공산당은 1934년 조직화 사업에서도 파업에서도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노동자가 섬유산업 전체를 책임질 각오가 되어 있을 때 그들은 미국공산당의 전미섬유노조(NTWU)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들이 의지한 것은 AFL의 섬유노련(UTW)이었다. 이 노동조합은 공산당의 섬유노조보다 훨씬 더 실질적인 존재가 아니지만, 그 노동조합의 배후에는 AFL의 승인이 있었다. 섬유노련은 섬유 노동자 파업을 이끌면서 1934년에 6배로 증가했다. 미국공산당이 이러한 파업이 진행되는 한가운데서 자신들의 전미섬유노조 조합원들에게 섬유노련에 가입하라고 요구하면서 전미섬유노조를 해체했다는 사실은 섬유노련이 확장하는 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미국공산당은 섬유노련이 몸집을 불리고 있을 때 이미 방관 상태에 있었다.

브리지가 대표로 있던 국제항만노조(International Longshoremen's Association: ILA)에서 미국공산당이 역할을 수행했던 샌프란시스코에서, 공산당 투사들은 다른 노동조합에서부터 차단당했던 미국공산당이 영향을 미칠 수 없었던 샌프란시스코 노동자의 총파업을 호소하기 위해서 다른 노동조합에 대한 캠페인을 벌였다. 물론 총파업에 반대했던 샌프란시스코 AFL 지도부는 공산당 투사들의 작전이 먹혀드는 것을 막으려고 ……끝내 총파업 명령을 내렸다. …… 그리고 그러한 명령에 따라 해운 파업도 일어났다.

총파업이 끝나고 나서 다르시(Darcy)공산주의자(The Communist)에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713일 저녁에 중앙노동위원회(the Central Labor Council) 회의에서, 총파업 운동이 더는 저지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위원회는 그들이 총파업의 지도부가 되어 총파업을 패배시키기로 결정했다.”

여기서 AFL 협잡꾼들에 대한 투쟁에서 우리의 허약함이 다시 명백해졌다. 우리는 파업의 결과적 손실을 부담하게 만든 파업 지도권을 협잡꾼들이 접수하지 못하게 막는데 실패했다. …… 그리하여 우리는 토요일 아침에 약 800 명으로 구성된 총파업위원회와 마주했다. 그 다수는 유급 관리들과 다른 유급 관리들에 의해 지명된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중앙노동위원회 협잡꾼들의 이러한 책략을 막아내는데 성공했다면, 총파업의 결과는 매우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전 10년 동안 AFL 활동에 대한 우리의 태만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고 있었다.……

일요일 밤까지, 전체 상황을 평가했을 때, 우리는 동정이 가는 한 평조합원들 사이에서 우리가 수적으로 압도당한 것이 아니라 파업에 전투적인 수단을 사용하기 위한 조직화된 접촉이 절망적으로 약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는 당 전체에 눈에 띄는 교훈들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생생하게 깨달았다. 우리가 파업이 있었던 마지막 몇 주에…… AFL에 대한 우리 활동이 몇 년 동안 나태했던 것을 극복할 수 없었다.” 

 

미국공산당은 잃어버린 기회로 대가를 치렀다. 노동자는 그들의 커다란 노력으로, 그들이 겪은 공격으로, 노동자가 일반화된 투쟁을 만들 수 없다는 잘못된 인상으로 대가를 치렀다. 샌프란시스코만 보더라도, 노동자가 패배했다면, 어떻게 그들은 자신들의 투쟁을 일반화할 수 있는가?

다르시(Darcy)는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부 해안 노동자에 맞서 폭력을 쓴 연출극 때문에 미국 전역의 노동자는 파업이 폭력 때문에 깨진다는 의견을 갖고 있다. 이것은 진실과 거리가 매우 멀다. 이미 AFL 협잡꾼들이 파업을 분쇄하고 난 뒤에 폭력은 보조적인 파업 파괴 수단으로서 효과를 냈다. 총파업위원회의 지도하에 나온 행동은 모두 파업을 청산하고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전에 미국공산당이 AFL 소속 노동조합을 무시하면서 일어난 영향에 관하여 다르시(Darcy)가 제기한 나머지 다른 점으로 돌아간다. 또는 제임스 캐넌이 그 시기에 다음과 같이 썼듯이, “무엇이 일어날지 보기 위해서 총파업을 부주의하게 연출하거나 허공 속에서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필요하다.…… 총파업을 위한 진지한 선동은 반동적 지도를 제거하거나 적어도 잘 조직화된 좌익을 수단으로 반동적 지도로부터 자유로운 손을 박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해야 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이것이 없었다. 샌프란시스코 총파업은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행동에 대한 노동자의 각오와 좌익의 조직적 준비 사이의 폭넓은 불균형을 명백하게 드러냈다.”

미국공산당은 샌프란시스코 파업의 결과 서부 해안 지역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파업이 끝날 때까지, 미국공산당은 샌프란시스코에서 25명의 항만 노동자와 50명의 선원들을 모집했다고 보고했다. 산페드로에서는 40명의 항만 노동자와 40명의 선원들을 모집했다. 그리고 북서태평양 항구들에서는 수십 명을 더 모집했다. 그러나 AFL 관료들에 대한 미국공산당의 반대를 통해 획득된 이러한 투사들은 공산당 정책의 그 다음 뒤틀린 전환과 함께 똑같은 관료들에게 곧 되돌려졌다.

 

 

더욱 더 심각한 문제

 

1933~34년 동안 동원이 늘어나자, 루이스, 힐먼, 듀빈스키, 하워드를 포함한 몇몇의 AFL 관료들은 AFL 내부에서 중공업의 미숙련 노동자를 조직하는 수단을 마련하게 되었다. 하워드가 AFL 위원회의 한 회의에서 제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이 나라의 노동자가 단결하려고 하고 있다고 말하자. 그들이 AFL의 깃발 아래에서 단결하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몇몇 다른 지도력 아래에서 단결하려고 할 것이다.……실례지만 나는 당신에게 이것이 우리의 정부, 국민, AFL 그 자신에게도 더욱 더 심각한 문제라고 말한다. 우리가 노동자를 조직하여 이러한 조직의 지도 아래 그들을 조직하고 데려올 수 있도록 우리의 조직화 정책은 바뀌어야 한다.” 

 

법원이 죽여 버린 전국산업부흥법(the National Recovery Act) 7A을 부활시키고 노동조합을 인정할 수 있는 수단을 규정하는 새로운 입법(이것은 현재 와그너법으로 알려져 있다)을 통과시키기 위한 루스벨트의 청원에 대해 긴급함이 요구된 1934년의 파업 운동도 이와 같았다. 부르주아 계급의 다수가 노동조합에 대한 모든 인정을 계속해서 철석 같이 반대했지만, 반면에 그들의 더욱 계급의식적인 부분은 미숙련 노동자의 노동조합 조직이 어떤 형태로든 불가피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문제는 노동조합을 허용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형태로 노동조합이 성립할 것인가, 그리고 누가 그들을 지도할 것인가 문제였다. 하워드가 간접적으로 위협하고 있던 것처럼 1930년대 중반 상황에서 AFL이 전진하지 않는다면, 혁명가들이 그것을 맡게 될 것이다.

193510월 산업별 조직의 옹호자들은 AFL 내부에서 패배했고, 이러한 패배 때문에 그들은 산업별조직위원회(Committee for Industrial Organization)AFL 내부에 만들기로 결정했다[이것은 여기에 참여한 노조들이 AFL에서 추방되어 결국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가 되었다].

새로운 CIO는 루스벨트행정부로부터 적어도 표면적으로 중립을 누렸다. CIO는 자신을 설립하는데 자극을 주었던 노동조합들의 재정으로부터 일정한 금액을 확보했다. 광산노련(UMWA)으로부터 자금을 빌린 상근직원(staff men)들을 확보했다: 그들은 루이스에게 만족감을 주는데 주로 길들여진 아첨꾼들과 예스맨들이었다. 그것이 갖지 못한 것은 많은 헌신적 조직가들이었다. 미국공산당은 탄광지대에서 투쟁을 차례로 파괴해왔던 루이스에게 그가 필요로 하는 군대를 곧 제공하려 하고 있었다.

 

 

존 루이스 : “누가 새를 갖게 되는가?”

 

CIO 관료들이 막 활동을 시작했을 때 미국공산당 자체는 또 다시 바뀌었다. 즉 공산당은 싹트는 운동의 지도부를 차지하려는 관료들의 무기로 급격히 전환했다. 다르시의 표현에 따르면, 1934년까지 미국공산당은 이미 AFL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공산당의 정책은 1935년 초에 확 바뀌었다. 1935년에 미국공산당 총서기 얼 브라우더(Earl Browder)는 모스크바 회의에서 돌아와서 모든 노동조합통일연맹(TUUL) 노동조합을 청산해야 하고 이를 위해 가능한 곳에서 AFL 노조와 합병하든가 또는 스스로 해체하고 그 투사들에게 AFL 노조들에 개인적으로 들어가도록 요구해야 한다고 미국공산당에 보고했다. 사실상, 몇몇의 공산당 투사들은 이미 AFL 노조들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두 개의 파업이 진행되는 샌프란시스코와 섬유산업이 포함된다. 그러나 파시즘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을 때 독일에서 붕괴에 의해 유발된, 가장 최근의 급격한 코민테른 정책 전환(twist)은 미국공산당이 제기한 문제의 전체 방식을 바꾸었다. 코민테른에 따르면, 혁명은 더 이상 의제(the agenda)가 아니었다. 중요한 문제는 이제 있을지도 모르는 더욱 진보적인 부르주아들을 포함하여 파시즘에 반대할 준비가 되어 있는 어떤 세력과도 연합할 필요성이었다.

미국 내부에서, 이것은 루스벨트에 대한 어떤 공격도 부드럽게 페달을 밟는 형식을 취했다. 이것은 매우 세련된 180도 전환을 요구했다. 보기를 들면 1934년 뉴멕시코 광부들의 파업에 관한 팸플릿에서 미국공산당은 루스벨트와 뉴딜정책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파업은 루스벨트행정부가 자부하는 자유주의 가면을 벗겨버렸다. 자본가들의 이해가 위협을 당할 때 그것은 민주주의국민에 의한 통치라는 허상을 모두 벗어던진 폭력과 무장한 공권력에 불과함을 폭로하였다. 파업은 뉴딜정책이 군대와 군사법정, 무고한 파업 참여자들에 대한 대규모 투옥, 몇 주 동안 비참한 푸대접(bread and water)에 의한 지배임을 입증했다. 사기와 협잡의 뉴딜정책은 노동자의 생활수준과 조직에 대한 거대한 공격 프로그램임이 명백해지게 되었다.” 

 

1936년 선거에서 미국공산당은 똑같은 루스벨트와 똑같은 뉴딜정책을 효과적으로 지원했다. 미국공산당은 민주당에 의한 루스벨트의 후보 지명을 민주당에서 노동과 진보적 구성 요소를 위한 승리라고 불렀다. 1936년 선거에서 미국공산당의 공식적인 후보였던 브라우더는 그해 6월 미국공산당 전국대회에서 노동자는 다음과 같은 절대적인 이해를 갖는다고 말했다. 

 

두 개의 부르주아 정당들 가운데 어떤 당이 권력을 쥐어야 하는가, 두 정당들 가운데 하나는 반동적이고, 민주적 권리들과 사회입법을 일소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다른 정당은 어느 정도 자본주의 아래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진보적 방책을 방어한다.” 

 

이와 같은 성명을 계속 내면서 미국공산당은 루스벨트와 민주당에 대한 환상을 뿌렸고 노동자가 그들의 사활적 운명이 걸린 정적(政敵)에 구속되는 것을 도와주었다.

노동조합들의 수준에서 미국공산당은 자신의 투사들을 한 때 무시했던 노동조합들로 돌려보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공산당이 이제 바로 그 관료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미국공산당이 매우 잘 알듯이 그 관료들은 노동자의 투쟁을 배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철강 분야 공산당 조직가들이 사용하도록 작성된 소책자 현명해져라, 조직하라에서 1936년까지 미국공산당은 루이스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었다. 

 

미조직된 노동자를 조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존 루이스는 광산노련(UMWA) 50만 광부들을 대표하고 있다; 듀빈스키는 25만 여성복 노동자를 대표하고, 힐먼은 10만 의류 노동자를 대표하고 있다. 노동운동이 거대한 일을 성취할 때마다 그린(Green)AFL 집행위원회는 조용히 사라졌다. 1934년 열린 AFL 전국대회는 철강 노동자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존 루이스와 CIO가 치고 나갈 때까지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 당신은 철강 산업에서 그 사업을 겪고 있다.” 

 

달리 말하면, 몇 년 동안 조직화와 노동자의 투쟁에 대해 등지고 반대했으며, 1934년의 거대한 투쟁에서 노동계급이 운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후에야 겨우 시류에 편승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이제는 미국공산당에 의해 미조직 노동자에 대한 조직화를 강력히 추구하는 사람들로 떠받쳐지고 있었다.

미국공산당은 이제 루이스의 힘을 강화해주기 위해서 가장 전투적인 노동자 사이에서 얻어냈던 가능한 모든 신뢰를 사용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공산당 투사들은 루이스가 탄광지대에서 사용했던 다음과 같은 슬로건까지도 사용하려 하였다. 대통령[루스벨트]이 당신들이 단결하기를 바란다.”

여성복노조 지도부였던 데이비드 듀빈스키가 공산당 투사들이 CIO 상근직에 급속히 유입되는 것에 대해 질문했을 때 루이스가 다음과 같이 대담하게 답변했던 것은 놀랍지 않다. 루이스의 언급은 현재 유명해져 있다. 누가 새를 갖게 되는가? 사냥꾼인가, 아니면 개인가?”

 

 

연좌농성파업으로 전투에서 승리하고 단체 교섭으로 승리를 되돌려주다.

 

1937년에는 4,700번이 넘는 파업이 있었다. 이것은 1919년 이래 어떤 해보다 많은 것이었으며, 그 가운데 거의 1,000번은 연좌농성 형태를 취했다. 5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그 결정적인 해에 그들의 공장과 다른 사업장을 점거했다.

거대 철강 회사들이 석탄산업 대부분을 소유했기 때문에 루이스는 철강산업에 주목했다. 200명 가운데 60명이 공산당 출신인 뛰어난 조직가들 대부분이 철강산업 지대로 파견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파업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게 노동조합을 승인하는 선거 약속을 지키라고 청원하도록 노동자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루이스가 철강산업에 주의를 집중하는 동안, CIO의 지지를 얻은 파업들이 고무산업과 자동차산업에서 갑자기 일어났다. 이것은 결국 1936~37년 플린트 연좌농성파업을 이끌었다. 플린트파업에서는 GM 공장들에 대한 점거, 중서부 전역으로부터 플린트로 몰려든 노동자 대중, 대표자와 싸우기 위한 플린트 여성들의 동원이 두드러지게 드러났으며, 플린트파업은 GM이 무릎을 꿇도록 했다. 그리고 노동조합을 받아들이기로 한 GM의 동의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노동조합들에 적응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던 거대 부르주아들에 의한 진지한 결정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었다.

이 기간에 가장 중요한 파업들 가운데 많은 수는 공산주의 투사들에 의해 준비되고 지도되었다. 1935~36년 고무산업 노동자의 연좌농성파업, 1936년 애크런 고무 노동자 파업, 1936년과 37GM과 크라이슬러 파업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 균형을 기울게 한 것은 다른 노동자 사이에서 폭넓은 추종뿐만 아니라 그러한 파업들의 대담성이었다. 공산당 투사들이 없었다면, 파업들은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투사들은 파업들의 오른쪽 후방에 대한 신뢰를 노동조합 관료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CIO 관료들이 밀어붙이고 있던 생각, 노동조합을 획득하는 노동자의 능력은 자본과 노동 사이에 계속된 투쟁에서 루스벨트의 중립을 유지하는데 달려 있다는 생각을 강화해주었다.

1936, 굿이어 노동자가 5주 동안의 전투적인 파업을 벌여 노동조합에 대한 승인을 힘으로 획득한지 겨우 몇 주 뒤에, CIO는 파업과 그 성과물, 그리고 노동자가 부닥칠 당면 문제를 묘사한 소책자를 펴냈다. 

 

일련의 연좌농성파업들은 굿이어와 다른 고무 공장들에서 모두 일어났다. 노동자는 새로 발견된 자신들의 힘에 자극받았고 처음에는 새로 설립된 고충처리기구를 완전히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조합원이 아닌 사람이 자신들의 부서에서 승진하거나 십장이 자신들에게 심각한 부당대우를 했다고 느꼈을 때 스스로 행동에 나섰다.”

이러한 연좌농성파업들은 회사의 자극적인 행동들에 직면하여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것을 대중에게 설명할 때 동시에 노조 관료들(officials)은 비공인파업들이 단체교섭 규정들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라고 조합원들에게 지적했다. 또한 노조 관습에 따라 고충 처리를 위한 효과적인 기구를 설립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소책자가 너무나도 명확히 설명한 것처럼, 초기부터 CIO 관료들의 정책은 노동자의 독립된 행동을 단체교섭 규정들고충처리 기구로 대신하는 것이었다.

그 시기에 애크런 노조의 지도부를 차지하고 있던 미국공산당은 노동자의 동원에 제동을 걸려는 이러한 시도들에 반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 소책자를 노동조합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썼다.

플린트에서 파업은 공장을 탈환하려는 GM의 시도가 또 다른 공장에 대한 노동자의 점거로 실패했을 때 결정적 지점에 다다랐다. 그것은 파업에서 효과적으로 승리하고, 미국공산당이 루이스에게 최종 협정에 대해서 협상하도록 요구한 다음이었다. 노동자는 그들의 운명이 GM에 압력을 가하도록 납득할 수 있는 루스벨트 대통령과 민주당의 미시간주지사 머피와 루이스의 토론에 맡겨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플린트 연좌농성파업이 끝난 지 한 달 뒤에 자동차산업에서 공산당의 지도적인 투사인 와인덤 모티머(Wyndham Mortimer)GM과 새로운 협약을 협상했다. 이 협약은 매우 뒤틀리고 지연되었다가 보충된 고충처리절차를 성문화했는데, 어떤 형태로든 파업에 들어가기 전에 고충처리절차를 완전히 다 써야만 하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CIO가 애크런에서 말했듯이, “비공인 파업은 단체교섭 규정들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플린트 파업이 해결되자마자 거의 곧 바로, 재앙의 전조를 읽은 US스틸은 어떤 싸움도 없이 철강노조(the Steel Workers Union)를 설립하는 협정에 루이스와 함께 서명했다. 루이스는 물론 신뢰를 받았고 루이스가 철강노조 지도부로 임명한 머피와 나머지 다른 광산노련(UMWA) 관료들은 평화롭고 질서 있는 노동관계의 새로운 시대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미국공산당은 이러한 생각의 노동자를 깨우치기 위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루이스와의 관계를 깨버렸을 것이다. “작은 철강회사”(Little Steel)들이 따라오지 않았을 때, 철강노조 관료들은 노동자에게 전몰장병기념일에 시카고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라고 요구했다. 길거리에서 많은 시위 참가자는 그들의 어린 자식들과 함께 시카고 경찰의 총격을 받았다. “평화롭고 질서 있는 노동관계의 새로운 시대는 어디로도 퍼지지 않았다.

 

 

헨리 포드: “우리가 그들을 필요로 하는 만큼 나쁘게 그들도 우리를 필요로 할 것이다

 

미국공산당이 아마도 CIO 정책과 그 정책을 지지한 가장 뚜렷한 표시는 포드에서 나타났다. 포드는 미국공산당이 가장 많이 침투한 자동차회사이자 최후의 저항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1941년까지 포드는 변함없이 비타협적이었고 공산당 투사들은 공장들과 노동자 주거지역에서 진정한 조직 건설을 지도하고 있었다. 포드가 노동조합 투사들 가운데 많은 사람을 해고했을 때, 그것은 처음으로 루지 공업단지 전체를 폐쇄하는 파업을 일으켰다. 전미자동차노조(UAW) 관료들은 파업을 명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파업에 대한 어떤 생각에도 강력히 반대했다. 그들은 노동자에게 노동조합을 가질 권리를 확립하는 전국노동관계위원회(NLRB) 선거를 위해 힘써서 일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포드에게 그가 그 이전 기간 동안 포기하지 않은 것을 허용하도록 만든 것은 이러한 파업이었다. 그러나 포드가 고집하고 UAW 관료들도 인정한 것처럼, 포드가 노조를 인정하기 전에 노동자는 작업장으로 돌아가 전국노동관계위원회 선거라는 광대극을 겪어야 했다.

노동자는 그들 자신의 행동을 통해 노동조합을 얻어냈다. 그러나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정부의 승인 도장을 통해 그들의 승리에 대한 법적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그저 형식적인, 법률적 필요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노동조합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그 법률조차 노동조합 승인을 위해 그러한 선거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포드에서 나타난 사건은 대통령직에 있는 사람을 통해 정부가 중립적 중재자로서 봉사한다는 생각을 세웠다. 물론 이것은 정부가 동의하지 않으면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가질 수 없다는 선례를 남겼다.

이것은 관료 기구와 미국에서 초창기부터 결합되어 있던 기관들을 노동자에게 강제하는데 거대한 진전이었다. 그 다음에 포드는 하급사원에게 그것을 강제하려 함으로써 이러한 기구를 강화했다. 그는 이른바 유니온 샾”(union shop)으로 불리는 그의 기업에서 모든 노동자가 의무적으로 가입하는 노조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그는 노동자의 봉급수표들에서 회비를 모아서 노동조합 기구에 넘길 것을 제안했다. 노동조합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노동조합을 가능한 긴밀히 자신에게 묶어두고 노동조합 기구가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들기 위해 움직였다. 오래 동안 포드의 부사장이었던 해리 버넷(Harry Bennett)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은행을 만들어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들은 우리 없이 잘 해낼 수 없다. 우리가 그들을 필요로 하는 만큼 그들도 우리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이것은 새로 태어나서 자신이 전투에 착수했던 회사들에 이미 묶여버린, 전투적인 CIO를 위한 묘비명이 될 수 있다.

미국공산당이 이러한 제안들 가운데 아무것도 만들지 못한 동안, 그것들은 받아들여졌고 대부분 공산당 투사들의 성과물로 보였다. 그것은 CIO에 모여든 노동자의 대규모 동원을 취했다. 그러나 새로운 노조들의 지도부를 형성한 바로 그 관료들은 전투성을 잃어버리는 방향으로 운동을 밀어 넣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공산당이 하거나 말한 것들은 노동자에게 다른 전망을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그 다음에 그들은 좌파를 제거했다

 

미국공산당이 없이 CIO는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공산당의 정책이 무엇이었든 간에 공산당 투사들의 궁극적 목표는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그들은 기존 체제의 방어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것이 노동계급 투쟁에 의해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그러한 투쟁에 던져 넣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1935년에 남부 일리노이 탄광지대에서 활동했던 공산당 투사인 캐서린 하인드먼(Katherine Hyndman)은 꽤 지나고 나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들은 사리사욕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허세를 부리는 무리도 아니었다.…… 그들은 퍼져 나가서 조직화를 하고 그들의 임무를 수행했다. 루이스는 그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루이스가 CIO 초기에 그토록 많은 공산주의자들을 가졌던 이유이다.…… 그러나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조직화와 다른 모든 것을 위해 사용하고 나서, 그 다음에 당연하게도 좌파를 제거해버렸다. 한 가지 점에서 루이스는 자신을 입증했다. 그러나 실제로 대량생산 산업을 조직하려 했던 초기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활용했다.” 

 

그것은 이러한 방식으로 활용된 공산당 투사들을 위한 묘비명일 뿐만 아니라 미국공산당이 루이스, 그 다음에 머레이, 그리고 다른 모든 관료들과 손잡도록 한 노동자의 운동을 위한 묘비명이기도 하다.

미국의 노동계급은 여전히 조직화 문제 자체에 부닥쳐 있다. 이것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개인적 사리사욕을 추구하지 않고 사회주의 혁명을 바라고 퍼져 나가서 조직화를 하고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했다고 일컬어질 또 다른 세대의 투사들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올바른 정책으로 무장된 공산주의 투사들의 새로운 세대도 요구할 것이다. 그 정책은 노동자의 투쟁을 종결시키려는 바로 그 관료들에 노동자를 얽어매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것은 노동계급이 자신의 깃발 아래에서 전투에 나서도록 허용하는 것을 목표로 가진 정당을 요구할 것이다.

 

 

옮긴이: 김정호

  1. 2000년 4월, ?계급투쟁?(Class Struggle) 제27호.(http://www.the-spark.net/o_cpdouble.html)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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