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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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2008년)/2008년 9월호

1930년대 초반 실업자를 조직하기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6. 09:15

1930년대 초반 실업자를 조직하기1

 

Gordon Black

 

정치적 신조라고 하는 것이 많은 사건들에 의해 입증되어야만 의미 있는 것이 된다고 한다면, 192910월 주식시장의 붕괴는 자본주의 체제를 뒤집으려는 미국 공산당 목표의 정당성을 더욱 강화해준 것임에 틀림없다. 주식시장붕괴는 자본주의를 그것이 지닌 가장 명확한 약점을 통해 구체화해준 것이다. 또 맑스주의의 대의, 즉 노동자를 토대로 삼은 경제와 정치 체제를 세울 수 있는 공산주의의 가장 커다란 기회를 구체화한 것이었다. 불만에 가득 차 있고 빈곤에 휩싸인 실업자들의 정치의식을 고양시킴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혁명적으로 전복해야 한다는 선동을 펼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꿈이나 꿀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과연 작은 인구를 가졌지만 고도의 산업화를 이룩하고 있던 워싱턴 주가 변혁을 선도하는 곳이 될 수 있었을까?

그때에는 자원 추출에 의존하고 있던 워싱턴은 내수와 해외 시장이 위축되자 경기후퇴를 겪고 있었다. 1930년까지 서부 워싱턴의 목재 생산은 25%나 감축되었으며 석탄 채굴은 거의 12%나 감소하였다. 농업에 의존하고 있던 동부 워싱턴의 경우, 밀 가격의 하락은 생산과 수출 감소와 궤를 같이 하고 있었다. 실업이 점차 증대하게 되었다. 정확한 통계는 존재하지 않지만, 분석가들에 따르면 1932년 봄에 시애틀에서만 약 4~55천명의 실업자가 있었으며, 최소한 전체 노동력의 25%에 달하는 이들이 일자리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워싱턴 주 안의 다른 도시들과 목재생산 지역에서도 실업의 양상은 거의 동일했다.

대공황 시기 워싱턴 내의 조직된 노동자들의 첫 번째 반응은 침묵이었다. 산업과 공장에서 일하던 미조직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는 첫 대상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칼날은 모든 산업부문으로 확대되게 되었다. 워싱턴 주 노동총동맹(Washington State Federation of Labor) 지도부는 처음에 늘어나는 실업이 이민 탓이라고 비난했다. 어쨌건 19306월에 열린 노동총동맹의 정기 총회에 이르면,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실직자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재정원조 등 실업의 문제가 자신들이 주의를 기울여야 할 중요한 의제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그때까지 이 의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에 대해 거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워싱턴의 미국 노동총동맹(AFL)은 오랫동안 실업자들에 대한 구제수단은 고용주들이 책임지고 내놓아야 한다고 여겨왔다. 당시 노동조합들은 노동자의 사회적 경제적 조건 같은 폭넓은 의제보다 현장에서의 고용안정, 임금, 노동조건 같은 (상대적으로) 좁은 의제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땅히 공산주의자들은 그때의 경제체제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갖고 있지 않았다. 몇 년 동안 AFL 안에서 조직화를 시도한 뒤(이른바 노조 내부에서의 조직화 전략(boring from within)”), 코민테른은 1928년 자신의 정책을 당이 직접 통제하는 노조 설립이라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된다. 공산주의자들이 직접 자신들이 주도하는 노동조합인 통일노동조합동맹(Trade Union Unity League)을 건설하여 AFL을 대체하는 전략이었다. 대공황이 닥쳐왔을 때, 공산당은 또한 실업자들을 직접 조직하는 전략을 채택하게 된다. 13개 항목의 요구를 내걸고 이 가운데에는 통상임금에 맞먹는 실업급여 지급, 7시간 노동제, 소비에트연방(소련)을 공식 인정할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공산당은 실업자 평의회(Unemployed Council)를 건설하자고 호소했다. 공산당은 통일노동조합동맹의 모든 지부와 지역사무소에 다음과 같은 지침을 내려 평의회를 건설할 것을 요구했다. , 

 

이들 평의회에는 혁명적 노동조합, 공장위원회, 개혁적 노동조합의 대표자들 뿐 아니라 미조직 노동자의 대표들도 파견되도록 한다. 또한 이렇게 조직된 평의회들은 각각의 통일노동조합동맹에 반드시 가맹되도록 한다.” 

 

뉴욕, 시카고, 디트로이트 같은 도시에서 실업자 평의회는 엄청난 관심을 끌며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또 그것은 1930년 겨울과 봄에 시위를 이끌며 그 뒤 몇 년 동안 지역에 기초한 평의회를 건설하여 공적 부조를 쟁취하기 위해 싸웠고, 지역민들을 조직하여 집세 지불거부운동을 주도하고 강제퇴거에 저항하는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서쪽 지방에서 실업자 평의회는 그리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경찰의 탄압이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시애틀 경찰청은 1930년대 초 이래 강압 정책으로 일관했고 공산주의자들이 거리 회합이나 시위를 가지려 할 때마다 그들을 체포했으며, 심지어 옥내에서 벌어지는 당 회합까지 거듭 해산시키고 파괴하기 일쑤였다. 보통 이들에게 적용된 혐의는 부랑죄였다. 검사들은 운동의 지도자들에게 과격단체 처벌법(Criminal Syndicalism)을 적용하기까지 했고, 해외 출신의 지도자들은 강제로 추방될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미국자유인권협회(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와 국제노동변호단(International Labor Defense, 공산당의 법률팀)은 안간힘을 쓰며 워싱턴 주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떨어진 강제추방 명령을 대부분 막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오레곤에서는 여전히 좌익에 대한 엄청난 박해가 가해져서 장기징역형을 살거나 수많은 사람들이 추방당하기에 이르렀다. 아스토리아의 핀란드 공동체에 가해진 핍박은 특히 심했다. 공산주의자와 연결되어 있던 핀란드어 신문 토베리(Toveri)의 편집진과 간부진들이 모두 체포되어 추방당했다.

 

1931년 여름에 이르면 실업자 평의회는 다른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실업자동맹(Unemployed Citizens’ League, UCL)이라는 경쟁조직이 출범하게 된 것이다. 웰스(Hulet Wells)와 브러닌(Carl Branin)은 실업자동맹을 세웠다. 그들은 그때 시애틀 노동대학을 이끌며 전위(The Vanguard)라는 주간 신문을 발행하던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웰스와 브러닌은 가난한 노동자와 그의 가족에게 실질적인 구제수단을 제공하는 상호부조(self-help) 조직 성격의 실업자동맹을 세웠다. 3개월이 채 안되어 전위에는 시애틀 인근에서 조직된 20개의 지역 실업자동맹 대표자들의 회합이 보도될 정도로 실업자동맹은 성장하게 된다. 이 조직은 음식과 땔감, 의류 등을 나눠주는 지역 배급소 중심으로 조직화를 진행했다. 상호부조를 위한 노력은 6개의 신발 수선점 설립과 450에이커에 달하는 경작지 확보로 나타나기도 했다.

 

실업자동맹은 몇 달 지나지 않아 실업자평의회 활동을 무색케 하며 주류적인 사회운동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회원들이 직접 제공하는 서비스들 외에도, 실업자동맹의 배급소들은 시애틀 시, 킹 카운티와 기업들의 원조를 받고 있었다. 193211일부터 712일까지, 실업자동맹의 상호부조 프로그램은 시애틀에서만 79,935명에게 원조물자를 제공하였고 63,886명에게 땔감을 제공하였다. 1932년 이 조직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아서 힐만(Arthur Hillman)에 따르면, 이러한 원조를 제공하고 배급소 운영에 필요한 사무원들이 투입한 누적 총노동시간은 2,306,415시간에 달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재빨리 경쟁조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실업자 평의회를 이끌던 공산당 전국 지도자였던 허버트 벤자민(Herbert Benjamin)은 실업자동맹을 결국에는 노동자를 배신할 수밖에 없는 사회 파시즘이라 비난하며 공산당 시애틀 간부들에게 실업자 평의회 건설을 호소하기도 했다.

 

 

경쟁 조직의 계획은 우리의 투쟁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드는데 목적이 있다기보다 반대로 우리의 투쟁과 자본가들의 빈곤 정책에 대한 저항을 약화시키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러한 경쟁조직의 활동을 돕는 사람들은 이 조직을 통해 개인적정치적 이득을 얻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런 조직들의 대다수는 이른바 상호부조프로그램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모든 부를 전유하고 있는 자본가들과 정부에 맞서 원조물자를 제공받고 실업보험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노동자가 빈곤을 서로 나눠가짐으로써 가난을 버텨내자는 생각을 갖고 있다.”

 

 

공산당이 후원하는 실업자 평의회는 계급 없는 사회라는 슬로건으로 일자리, 삶의 전망, 복지혜택이라는 희망적 미래를 설파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실업자동맹 배급소들이 무상으로 제공하는 당장의 생계수단이나 땔감들을 만들어줄 수는 없었다.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면, 대다수 시애틀 실업자들은 맑스주의라는 모호한 구원의 약속보다는 당장의 필요를 위해 땔감과 음식 같은 원조물자를 선호하고 있었다. 게다가 웰스와 브러닌은 둘 다 노동문제에 개입하고 있었는데, 이와 함께 실업보험, 일자리 제공과 현금 원조를 제공하는 법안을 주 의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한 정치적 활동도 벌이고 있었다.

 

벨링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곳 공산당에 속한 소그룹(유진 데넷에 따르면 7명 정도의 그룹)이 벌이던 노력은 그때 벨링햄의 런던(M. M. London)이라는 활동가가 세운 인민위원회’(People’s Council)라는 조직에 의해 압도당하게 되었다. 실업자동맹처럼 인민위원회는 대중회합과 시위를 벌이고 강제퇴거에 저항하는 강력한 운동으로 빠르게 상승해갔다. 이 주의 다른 곳에서도 다수의 실업자들은 실업자동맹의 지부 또는 워싱턴 생산자연합의 가맹조직에 합류했다.

 

193274, 올림피아 주 의회의사당으로 행진하는 다양한 그룹의 실업자 조직들이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공산주의자들과 이들 사회주의 조직들 사이의 긴장이 폭발하게 되었다. 그때 시위의 목표는 전형적인 친자본 공화당 출신 롤란드 하틀리(Roland Hartley) 주지사의 생각을 돌려놓는 것이었다. 당시 주지사는 주의 기금을 노동자 구제수단으로 사용하자는 제안을 고집스럽게 거부하고 있었다. 하틀리는 시위대와의 면담을 거부했지만, 이틀 뒤에 웰스를 포함한 소규모 대표단과 면담을 갖게 되었다. 이 시위는 분명히 주 정책을 바꾸는데 실패했지만, 공산주의자들의 목표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데에는 성공했다.

 

유진 데넷에 따르면, “동쪽에서 갓 넘어온” 3명의 공산당 지도자들(Lowell Wakefield, Alan Max, Hutchin R. Hutchins)이 올림피아 시내의 실베스터 공원에 집결한 대중 시위대의 주도권을 쥐려 하고 있었다. 한편, 런던은 실업자 동맹과 생산자연합, 인민위원회 성원들을 이끌고 주 의회의사당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나머지 군중은 실업자 평의회 깃발 아래 첫째 그룹과 꽤 거리를 둔 채뒤따라 행진하고 있었다. 두 개의 그룹이 의사당 앞에 도착했을 때 난투극이 시작되었다:

 

전면적인 주먹다짐이 시작되었고 10여명의 남자들은 난투극 중에 돌계단 밑으로 6피트나 떨어지기도 했다.…… 실업자들은 연단에서의 통제권은 아직 갖고 있었고, 뒤이어 시끌벅적한 집회가 시작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연사들에게 야유를 퍼부으며 전체적인 혼란을 이끌고 있었다.” 

 

데넷의 말에 따르면, 웨이크필드를 비롯한 공산당 지도자들이 자신으로 하여금 런던과 그의 동료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저들은 사회파시즘 지도자들이자 노동자를 배신한 지도자들이다.”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는 왜 시위대들이 우리의 모범을 따라 모여들지 않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의 강령이 너무 탁월하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시위대들이 우리에게 지지를 보내고 우리 편으로 조직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1932년 충돌이 있기 이전에, 당 활동가들은 실업자동맹 문제에 대한 다른 전략, 궁극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전략을 논의하고 있었다. 실업자동맹에 합류하는 길이었다! 비록 당의 공식입장이 실업자 평의회를 세우자는 것이었지만, 당원들은 몇몇 실업자 동맹 조직에 가입하여 매우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 조직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기나긴 싸움을 시작했다. 브러닌을 비롯한 실업자 동맹 지도부는 공산주의자들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발라드(Ballard) 시의 실업자동맹의 간부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쫓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힐만의 말처럼, “‘안전하고 온건한요소들이 승리하던 때는 곧 지나고 말았다.”

 

실업자운동이 깊은 분열에 빠진 상태에서, 당은 19333월에 전위와 경쟁 잡지 성격의 행동하는 목소리(Voice of Action)라는 주간지를 발간하며 실업자운동 내에서 목소리를 높이려 하였다. 1933년 한 해를 거치면서 당은 점점 더 영향력을 확대해 갔으며, 실업자동맹 또한 기존 상호부조 활동 전략을 수정하여 당이 옹호해왔던 선전과 교육활동으로 초점을 옮기려 하고 있었다. 확장된 당의 영향력은 당원들의 숫자에도 반영되었다. 유진 데넷의 회고에 따르면, 겨우 1년 만에 벨링햄에서 “7명의 당원만이 있었는데 당은 어느 새 150명이 넘는 열성 당원들을 지니게 되었다.”

 

전국적인 상황도 그러했지만 올림피아에서도 정치적 흐름은 물자지원과 원조와 일자리마련 프로그램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1932년 선거에서 실업자 구제 정책을 내세워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실업자동맹을 조롱했던 것과 똑같은 식으로 새 대통령과 그의 실업자 구제정책에 대해 비난을 쏟아냈다. 193387일자 행동하는 목소리에 실린 루즈벨트에 대한 비판적인 사설은 다음과 같이 불을 뿜어댔다.

 

 

취임선서를 하고나서 곧 노동계급에 대한 약속은 모조리 후퇴하고 있다. 반대로, 은행가들은 가장 먼저 구제받은 세력이었다. 은행 휴업(banking holiday) 선언이 바로 그러한 조치였다. 특혜처럼 철도와 대자본가들은 막대한 규모의 돈을 융자받을 수 있었다. 마치 전시체제의 강제노동 캠프 같은 것이 연방 실업 예비제도라는 이름 아래 미국 민간자원보존단(Civilian Conservation Corps)’의 형태로 제도화 되었다. 결국 전국산업부흥법(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이 제정됨으로써 사실상 루즈벨트는 독재자로서의 모든 권력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러나 뉴딜 정책이 시작되면서, 워싱턴의 공산주의자들은 실업자와 관련된 사업에서 주도적 역할을 잡으려고 다시 노조 내부에서 작업하는정책을 시도할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1930년대 중반에 실업자 동맹은 공공사업계획’(Works Progress Administration)에 고용된 노동자를 조직하고 대변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노동자 연맹(Workers Alliance)’으로 대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었다. 비슷한 방법으로 당은 워싱턴 주 연합과 워싱턴 연금노조를 비롯한 노동조합에서 자신들의 조직화를 발전시키려 했다.

 

실업자를 조직하려는 초기 시도는, 한 번도 폭넓은 대중적 토대를 갖지 못했던 워싱턴 공산당이 당원들의 숫자(정점에 이른 30년대 후반에 3천에서 6천정도)를 훨씬 초월하는 수준의 성공을 거두게 된 방식이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준다. 당은 상대적으로 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정력적이고 명민하며 정치적으로 활력을 가진 개인들로 이뤄진 매우 효율적인 조직이었으며, 이 개인들을 다른 좌파 성향 조직들의 지도자로 세워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당 혼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넓은 지지를 가진 조직들 안에서 작업함으로써 공산당이 얻으려 했던 성취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시애틀 실업자동맹 내에서 주도권과 지도력을 얻을 수 있었다면, 워싱턴 공산주의자들은 미국의 다른 지역 사례와 달리 매우 높은 수준의 영향력과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옮긴이: 오민규

  1. 이 글은 『워싱턴 주의 공산주의 역사』(A History of Communism in Washington State)라는 책의 한 부분을 옮긴 것이다. 이 글의 출처는 http://depts.washington.edu/labhist/cpproject/black.htm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