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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창립문서가 발견된 것인가: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발간 100년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12월호

정말 창립문서가 발견된 것인가: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발간 100년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6. 09:25

정말 창립문서가 발견된 것인가: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발간 100

 

라스 리*

 

예전에 나는 작은 진보적 예술대학의 정치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1학년 학생들의 입문 과정 담당 선생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나는 학기 중의 독서교재를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부터 1923년의 마지막 글(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중에 이런 마지막 글들이 레닌의 가장 손꼽히는 글이 되었다)까지 모아 놓은 레닌의 선집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중국의 정치문제 전문가인 동료는 내 제안을 묵살했다. ‘외부로부터의 의식에 대한 무엇을 할 것인가?의 유명한 문장을 예로 든 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의식은 결정적인 것이다. 레닌에 따르면, 의식은 노동자계급과 관계가 없다. 레닌은 마르크스를 전도시켰으며, 우리는 이 기본적 사실을 학생들에게 이해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작은 에피소드는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지금부터는 무엇을 할 것인가로 표기한다)에 대한 이른바 교과서적 해석이 사람들의 생각을 확실히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누구에게든 소련과 20세기 공산주의 창건자의 견해에 대해 딱 하나만 말하라면, /그녀는 레닌의 1902년 저작에서 이 문장이나 이와 비슷한 문장을 들고 나올 것이다. 교과서들에서 흔히 있는 일이지만, 레닌에 대한 이런 해석은 학생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제시된다. 실제로 나는 학과의 소련 전문가였지만, 내 동료는 러시아/소련사 전공 역사학계의 합의된 의견을 표명한 것이다.

교과서적 해석은 서로를 강화시키는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레닌의 핵심적 견해가 노동자에 대한 그의 신뢰 부재와 이들의 자생성’(스티히노스치, stikhiinost’)에 대한 그의 우려라는 것이다. 혁명에 대한 자신의 열광적 의지와 결합된 노동자의 무능력에 대한 레닌의 비타협적 현실주의는 지식인 출신의 직업적 혁명가에 토대한 당 사상을 낳았다는 것이다. 둘째는 레닌의 견해가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심각하게 수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레닌은 지지자에게 원칙에 대해 편지를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상 언제든 마르크스를 재해석할 수 있었다.” 셋째는 따라서 이런 중대한 혁신을 제시하고 있는 책 ― 『무엇을 할 것인가?』 ― 은 볼셰비키주의의 창립문서이자 공산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교재라는 것이다.

레닌이 노동자를 불신한다는 것에 대한 전문가의 지속적인 합의는 인상적이다. 1956년에 알프레드 메이어(Alfred Meyer)는 레닌의 일반적인 견해는 대체로 노동자계급이 의식적이지도 않았고, 의식적일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40년도 더 지난 뒤에 제임스 화이트(James D. White)는 레닌과 카우츠키의 대비를 통해 같은 점을 발견한다. 카우츠키에 따르면, “일단 사회주의 의식이 노동자에게 전해졌다면, 노동자는 의식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레닌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그가 볼 때, 사회주의 의식은 늘 노동자계급 외부에 있었다. 왜냐하면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협소한 물질적 계급이해 말고는 전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와 그 맥락에 대한 나의 독자적 연구는 교과서적 해석의 세 가지 요소 모두가 대단히 올바르지 않다는 확신을 주었다(이 글 마지막에 나는 내 자신의 해석에 대해 간략한 의견을 제시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자문(특히 다른 사람들이 물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이 같은 전문 학자들의 인상적인 합의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가? 이 질문이 나로 하여금 19023월 출판된 이래 100년 사이에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를 연구하게 했다.

이 연구, 즉 논쟁의 여지가 없는 교과서적 사실의 탄생과정에 대한 사례 연구는 예기치 않게도 그동안 정당성을 가진 것으로 인정된 사실이 거짓임을 밝혀주었다. 1904년에 멘셰비키는 지식인에 대한 신뢰 부재를 이유로 레닌을 맹렬하게 질타했다. 볼셰비키 혁명을 이룬 지도자 세대의 사람들은 볼셰비키의 창립문서로 되어 있는 것을 대부분 잊어버렸다. 오늘날, 서구의 교과서적 해석의 개요는 스탈린주의 러시아에서 처음 만들어냈다. 교과서적 해석에 대한 눈에 띄지 않지만 끊이지 않는 도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줄곧 학구적인 전문가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발견은 모두 합쳐도 한 세기 동안에 이루어진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 전체를 살펴볼 때, 정말로 소수 견해일 뿐이다. 이는 그만큼 많은 입문 과정에서 교과서적 해석을 가르쳤다는 것을 말해준다.

 

 

1: 이스크라의 유산을 둘러싼 싸움, 1902~1905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한 세기를 네시기로 나눈다. 가장 짧은 제1기는 무엇을 할 것인가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운동 안의 당면 쟁점이 되어, 실제로 널리 읽히고 논쟁을 일으켰을 때였다. 이 시기는 그저 1902년에서 1905년까지 이어졌을 뿐이다. 일련의 새로운 쟁점이 대신했기 때문이다. 1906년에 무엇을 할 것인가는 이미 당의 역사에서 폐기된 에피소드 문서로 (심지어 그 필자조차도) 여겨지고 있었다.

레닌은 1901년 말과 1902년 초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급히 썼다. 이 책은 두 가지 목표가 있었다. 전향적인 목표는 그때 널리 공유된 목표, 즉 러시아에서 활동 중인 많은 지역적 사회민주주의 위원회의 활동을 통합시킬 수 있는 전국정당의 창출을 이루려는 이스크라(Iskra, 불꽃)의 계획을 설명하고 옹호하는 것이었다. (본 대회 이전에 일치감을 조성하기 위해 비밀 전국신문을 활용한) 이 계획의 변별적 특징은 레닌의 독창적 생각이자, 이미 이스크라의 지면을 통해 제시되었다.

두 번째 목표는 논쟁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보통 경제주의를 겨냥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가 작성될 때, 순종의 경제주의는 이미 이스크라조직(특히 게오르기 발렌티노비치 플레하노프(Georgii Valentinovich Plekhanov)로부터)의 가차 없는 공격에 더해 러시아의 정치활동 고양으로 한층 더 불신 받고 있는 상태였다. 레닌의 논쟁적 목표는 이 불신 받는 경제주의이스크라의 목덜미에 들러붙으려는 골칫거리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경제주의는 러시아 전역에 걸친 지도를 바라는 이스크라의 주요 경쟁 상대로서, 라보체예 델로(Rabochee delo, 노동자의 대의)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결집한 망명그룹이었다. 1902년 말 이전에 이스크라는 이 그룹을 절충주의라고 단정했으며, ‘경제주의에 관대하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제 레닌은 비난의 수위를 올려 라보체예 델로의 견해를 경제주의의 한 형태로 부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의 전체적 목적은 라보체예 델로의 견해를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여기도록 하는 것이었다. 레닌이 의도적으로 어떤 새로운 견해나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견해를 제출했다면, 그의 계획 전체가 좌절되었을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가 겨냥한 대상과 1차적인 독자, 즉 해외와 특히 러시아 국내의 사회민주주의 활동가는 그의 이론적 주장보다는 논쟁적인 레닌의 계획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응한 첫 출판물은 ― 『이스크라자랴(Zaria, 여명) 외부에서는 거의 처음으로 레닌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19026월 다비트 보리소비치 랴자노프(David Borisovich Riazanov)가 발행한 책이 틀림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가 나온 지 한 달이나 두 달이 지난 뒤였다. 랴자노프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매우 적대적이었지만, 이론적 오류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레닌이 (오늘날, 악평이 자자한 것으로 보이는) 책의 첫 장에서 노동자 대중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의 변함없는, 중단 없는 영향을 미칠 필요성을 강조한 것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는 그저 레닌의 실제 계획이 이 칭찬할 만한 목표를 전혀 추진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랴자노프의 관심을 끈 것은 레닌이 지식인에 의해 주도되는 당을 바랐다는 점이 아니었다. 실제로 랴자노프는 당이 혁명적 지식인을 끌어당길 수 없기 때문에 레닌의 계획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예견하는 부적절한 결론을 내렸다. 랴자노프가 나중에 동시대의 사람들 가운데 으뜸가는 마르크스 연구 전문학자라는 평판을 얻은 것을 고려하면, 이런 초기의 인식 부족은 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비정통 마르크스주의로 추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가 출판된 뒤 2년 동안 얻은 평판은 결국 19038월의 제2차 당 대회에 이르게 된 일련의 사건들과 맞닿아 있었다. 우리는 부득이 이 시기를 건너뛰고, 2차 당 대회가 끝난 뒤에 일어난 논쟁에서부터 우리의 분석을 시작해야 한다. 1903~04년 레닌에 가한 수많은 공격은 교과서적 해석의 가장 강력한 지주 가운데 하나를 이룬다. 외국의 권위 있는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나 카를 카우츠키(Karl Kautsky)뿐만 아니라 파벨 보리소비치 악셀로드(Pavel Borisovich Akselrod), 유리 오시포비치 마르토프(Iulii Osipovich Martov),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Lev Davidovich Trotskii) 같은 지도자도 모두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밝히고 있는 생각에 분노에 찬 대응을 했다. 여느 사람들이 표현한 것과 같은 정도로 말이다. 이 초기에 제시된 레닌에 대한 비난을 세심히 살펴볼수록, 실제로 표준적 해석의 문제점이 매우 심각하게 드러난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논평을 본래의 맥락에서 알아보기 위해서 당 논쟁의 핵심에 가까운 쟁점에 기초한 틀을 사용할 것이다. 바로 망명신문 이스크라의 유산을 둘러싼 싸움이 그것이다. 1900년 말에 발행되기 시작한 이스크라19038월의 사회민주당 제2차 대회를 위한 이데올로기적·조직적 준비 모두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따라서 제2차 대회에서 충실한 이스크라주의자 대부분은 이스크라를 당의 공식 기관지라고 불렀다. 그러나 본래 6명인 편집부 내의 분열은 과감한 인적 변화로 이어졌다. 레닌과 플레하노프는 대회가 끝나고 나서 한 달 가량 신문을 냈지만, 이해 말이 되면 레닌이 사임한 반면에, 나머지 본래 편집부가 복귀했다. 그 결과, 편집부 구성이 어찌됐든 간에, 당 대회가 끝나고 난 뒤 이스크라는 몇몇 영향력 있는 당 지도자들의 적의에 부딪혔다.

그러면서도 이스크라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창설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 즉 지도부의 정당한 모든 주장은 제2차 대회 이전에 이스크라지면을 통해 제시된 강령적·전술적·조직적 견해에 대한 상당히 분명한 태도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 했다. (다음 대회에서는 1900~1903년의 분열 전 이스크라이스크라 시기이스크라의 기본 방침같은 용어를 써서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당안에 세 그룹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 그룹은 노골적으로 이스크라에 반대했다. 이 반()이스크라주의자들은 제2차 대회에서 얼마 안 되는 소수파로 보잘 것 없는 존재였다. 두 번째 그룹은 1903년 말부터 1905년 말에 발행을 중단했을 때까지 신문을 낸 한 사람이 빠진 이스크라편집부로 대표되었다. 이 그룹은 초기 이스크라의 유산 상속을 거부하지 않았다. 당 대변자인 자신의 적법성이 이스크라의 성공에 토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최초의 멘셰비키 편집부는 이스크라의 과거에 대해 자기-비판적태도를 취함으로써 처음부터 지녀온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했다. 레닌이 이끈 세 번째 그룹은 예전부터 이스크라의 원칙에 충실해온 것에 자부심을 가졌다.

 

 

() 이스크라주의자들(아키모프와 마르티노프)

 

무엇을 할 것인가가 모든 정당들에게 이스크라주의의 열정적 선언으로 이해되고 난 뒤, 이들 세 그룹은 각각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변별적 태도를 가졌다. 레닌의 책에 대한 첫 번째 그룹의 해석은 1903년 제2차 대회의 반()이스크라주의 대의원인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 아키모프(Vladimir Petrovich Akimov)와 알렉산드르 사모일로비치 마르티노프(Aleksandr Samoilovich Martynov)가 제시했다. 두 사람 모두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이 주요한 표적으로 삼은 것 가운데 하나인 망명 잡지 라보체예 델로와 연계되어 있었다. 아키모프와 마르티노프는 당 대회 연설에서, 그리고 대회 이후에는 기사나 팸플릿을 통해 당대의 글 가운데에서 다른 어느 것보다도 오늘날의 교과서적 해석에 더 가까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비판을 제시했다. 이들은 자생적인노동운동을 전환시킬 필요성에 대한 레닌의 정식에 공격의 초점을 맞췄다. 그때 아키모프는 내가 아는 한, 이제까지 이런 역설에 이른 사회민주주의자는 하나도 없다!”고 소리쳤다.

아키모프의 비판은 두 가지 점에서 좀 더 철저했다. 그는 대회가 채택한 당의 전체 계획이 레닌의 이설(異說)에 감염되었다고 생각했다. 아키모프에 따르면, 이 이설(異說)은 카를 카우츠키가 제시한 비슷한 이론을 좀 더 조잡하게 각색한 것이었다. 아키모프는 카우츠키-레닌 이론에 충족론(Erfüllungstheorie)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이 딱지는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레닌도 당혹스러웠다. 그는 아키모프의 연설에 이렇게 적힌 메모를 휘갈겨 썼다. “우리의 논쟁뿐만 아니라 유럽의 논쟁도 충족론이라고???” 레닌은 분명히 그 의미에 대해 잘못된 추측을 했다. 레닌 저작의 소련 편집자도 다르게 추측했다. 아키모프의 대회가 끝난 뒤 팸플릿을 번역하고 편집한 조나단 프랑켈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이제, 처음으로 충족론이 지닌 뜻이 밝혀질 것이다. 아키모프의 신조어(新造語)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이 자세히 인용한 카를 카우츠키의 글 가운데 다음 구절에 근거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회주의 의식(Bewusstsein)은 외부로부터 노동자 계급투쟁에 가져온 것이지 자연적으로(urwüchsig) 생기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사회민주당의] 이전 하인펠트 강령도 노동자계급을 자신의 위치와 임무에 대한 의식으로 충족(erfüllen)시키는 것이 사회민주주의의 임무 가운데 하나라고 정확하게 명시했다.”

아키모프가 보기에, 사회민주주의는 마치 빈 수레인 것 같은 노동자계급을 충족시킬사명을 결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키모프는 1901년 말에 오스트리아당의 강령 변경 제안에 대한 비판인 카우츠키의 글을 그 본래의 맥락에서 살펴보았기 때문에 독일 원어를 썼다. 이런 변경을 주창한 오스트리아당의 지도자 빅토르 아들러(Viktor Adler)는 카우츠키의 비판을 반박했다. 이에 따라 아키모프는 정통 사회민주주의의 대변인인 아들러와 충족론의 주창자인 카우츠키 레닌을 대비시킨다.

유일하게 주의를 끈 것은 이설(異說)로 추정되는 충족론이 실제로 오스트리아당의 신구 강령 모두에 명시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그 창시자는 다름 아닌 빅토르 아들러 자신이었다(아들러는 1890~1891년의 하인펠트 당 대회에서 채택된 본래 강령을 기초했다). 아키모프가 정통에서 일탈한 약간 새로운 이설(異說)의 명칭으로 제2차 대회에서 사용한 독일어를 레닌이 기억하지 못할 만했다!

그 결과, 우리는 충족론에 대한 두 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교과서적 해석을 지지하는 요즘 학자들뿐만 아니라 아키모프에 따르면, 충족론은 마르크스주의 사회민주주의의 정신을 저버린 이설(異說)을 대표한다. 아들러, 카우츠키, 레닌, 그리고 오스트리아당 전체에 따르면, 충족(erfüllen)은 노동자계급에게 사회주의에 대한 희소식을 가져오는 사회민주주의의 임무를 표현하는 데 전적으로 부합하는 말이다.

()이스크라주의자인 다른 비판가 마르티노프는 제2차 대회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길고 학구적인 비판 연설을 했다. 비판 가운데에는 마르티노프는 자신의 견해에 대한 여러 오해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해야 했다. 이런 방어적인 비판은 마르티노프처럼 단호한 비판가도 무엇을 할 것인가에 문제가 있다고 보지 않은 것이 많음을 전해준다.

 

 

사회주의를 성공적으로 건설하려면, 다양한 [사회주의] 분자들을 철저한 결속에 이르게 하고, 전체 운동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할 필요가 있었다. 이 중대한 임무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인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수행되었다. ……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의 창시는 직업적 지식인, 즉 유산계급 출신의 망명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광범한 과학적 준비를 당연시했다. …… [이 중대한 임무가 끝날 때까지]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없다. 즉 자신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대담한 조치를 취할 수 없다. …… 이런저런 계층의 노동자계급이나 지식인의 일시적 정서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에서 운동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민주주의의 수단은 오직 하나뿐이다. 즉 전체 노동자계급 투쟁의 일반적 경향과 자신의 활동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 한 계급의 이론가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 때문에 다른 계급에 속할 수 있다. …… 사회주의가 필연적 경향임을 노동자계급이 깨닫는 것은 이 경향이 노동자 대중에 대한 지식인의 영향력을 통해 실현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 증대되는 동시에 발전하고 있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에서 아직 해방되지 않은 경우에 노동자운동은 부르주아적 흔적을 가진다.

 

 

눈을 가리고 이 인용문을 학자들에게 읽어준다면, 비록 레닌 자신의 것은 아닐지라도, 이런 생각이 볼셰비키의 것이라고 밝히기를 꺼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두 명의 반()이스크라 비판가들의 당 대회 이후 행로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마르티노프가 재빨리 자기-비판적 이스크라주의자 대오에 합류하고, 심지어 1921년에 볼셰비키가 된 반면에, 아키모프는 결국 사회민주주의 운동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그런데도 아키모프는 사후에 출판된 역사문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그것도 혼자만이 이 시기에 쓴 자신의 글을 학구적 번역과 논평에 사용되도록 해두었다. 레오폴드 헤임슨(Leopold Haimson)과 알란 와일드먼(Allan Wildman) 같은 전문가는 자신들의 설명이 아키모프의 좀 더 균형 잡힌해석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이설(異說)적 충족론이라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아키모프의 공격은 오늘날의 교과서적 해석에 명시되어 있다.

거짓말의 교훈: 이제 이들의 예를 본받은 학자들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비판에서 사회민주주의의 의미를 실증적으로 이해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동시대의 사회민주주의에 더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비판은 오늘날의 학자들이 악평이 자자한 것으로 묘사하는 바로 이런 점을 승인했다.

 

 

자기비판적 이스크라주의자들(멘셰비키)

 

이제는 자기비판적 이스크라주의자들에게로 주의를 돌려보자. 이 사람들은 1900~1903년 사이의 이스크라가 극히 중대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새로운 임무로 옮아가야 할 때이므로, 당이 자기비판’(사모크리티카, samokritika)의 시기를 거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들은 자기를 소수파라고 부르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정말로 이들이 이것을 강조했다면, 이들에게 이 말은 진보적이고 선견지명이 있는 전위를 함축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1904년의 자기비판적 이스크라주의자들을 멘셰비키라는 용어로 묘사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인 것 같지는 않다.

멘셰비키는 당의 새로운 임무를 설명하며 레닌에 대해 그의 인품, 그의 행실, 그의 조직적 제안 등 끊임없이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 같은 팸플릿 전쟁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한 역할은 무엇인가? 1939년에 그때를 되돌아보면서 트로츠키는 플레하노프가 무엇을 할 것인가의 잘못을 들추었다고 인정했다.무엇을 할 것인가에 반대하는 플레하노프의 글은 19047월 말/8월 초에 이스크라지에 실렸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격렬한 반()레닌 팸플릿인 우리의 정치적 임무Our Political Tasks를 포함하여 2차 문헌에서 빠짐없이 반() ‘무엇을 할 것인가저작물로 인용되는 글이나 팸플릿들은 모두 플레하노프의 글 이전에 작성된 것이다. 트로츠키가 오래전에 벌어진 팸플릿 전쟁의 정확한 연대를 잘못 기억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트로츠키는 맞지만, 공인된 거짓말은 틀렸다. 실제로 제2차 대회 다음해에 나온 멘셰비키의 반()레닌 팸플릿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겨냥하지 않았다.

이런 결론은 부분적으로 악셀로드, 마르토프, 카우츠키, 룩셈부르크, 트로츠키가 쓴 글들(유명한 2차 문헌에는 빠진 적이 없는)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어떤 명시적인 비판이 없다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전형적으로 표현된 이스크라의 다양한 주제가 이런 글들에서 여전히 지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주의에 대한 적의, 당 조직에서 과거의 고립된 지역 활동(쿠스타르니체스트보, kustarnichestvo)을 벗어나려는 욕구, 지하활동의 보안 규칙(콘스피라치야, konspiratsiia)과 직업적 혁명가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가 그것이다.

190312/19041이스크라에 실린 악셀로드의 글을 살펴보자. 이 글은 새로운 원칙적 태도에서 레닌과의 싸움에 돌입한 당시에 널리 인정받았다. 악셀로드의 전기 작가도 이렇게 동의한다. “()논쟁적인 문체이긴 하지만, 이 소론(小論)은 분명히 무엇을 할 것인가와 이전 3년 동안 레닌이 세운 당 기구에 대한 대응으로 고안되었다.” 애셔가 ()논쟁적이라고 한 것의 의미는 악셀로드가 실제로 레닌이나 무엇을 할 것인가를 거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레닌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문체상의 신중한 선택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거론하지 않는 것도 같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악셀로드의 공세가 실제로 다른 곳을 겨냥한 것인가?

악셀로드는 우리 운동의 역사적 임무와 양립할 수 없는 요소인 경제주의, 이데올로기적 동요, 조직적 혼란에 대한 이스크라의 오랜 전쟁을 명시적으로 지지한다. ‘경제주의하나의 체계로 구축된 …… 노동조합주의적 전술로 규정된다. 악셀로드의 소론(小論)은 콘스피라치야(지하활동의 비밀성을 확보하기 위해 발달된 절차)에 대한 비난이나 당 조직의 실제 원칙인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를 담고 있지 않다. 그가 사용한 용어는 아니지만, 악셀로드는 현 상황에서 고무적인 징조 가운데 하나로 무엇을 할 것인가스타일의 직업적 혁명가의 존재를 지적한다. 약간 큰 단체는 자신의 합법적 지위나 정식 직업과 관계를 끊은 사회민주주의 혁명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의 러시아 상황에서 이 단체는 정당을 결성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악셀로드는 새로운 당의 임무를 노동자계급에게로 의식을 가져오는 것으로 규정하는 데서 거부감이 없었다. 실제로 그의 중심점은 이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이루어진 것이 너무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을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의식(soznanie)으로 가져오는(vnesti) ’, 이것은 대부분의 우리 동지들을 고취시키는 열망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운동의 실천에서 이 열망은 매우 불충분하게 반영되고 있다.”

이런 특정 논점을 넘어서면, 당의 상황에 대한 악셀로드의 전체적 규정은 레닌의 계획을 지지하는 정통적 신념에 대한 지지를 내포하고 있다(기억할 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제2차 대회의 조직 규약을 둘러싼 논쟁이 아니라, 계획을 둘러싼 논쟁 중에 공격 받았다는 점이다). 악셀로드가 강조한 당의 원칙, 즉 그 열망, 공감, 사상은 나무랄 데 없는 마르크스주의이다. 유일한 문제는 당의 이데올로기적, 이론적 기치와 그 실천 사이의 모순이다. 이데올로기적 외양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지만, 원칙에 관한 한, [실천의] 실제 내용은 부르주아 혁명주의의 한계를 거의 넘어설 것 같지 않다.” (악셀로드에 따르면, ‘부르주아 혁명주의는 사회주의나 계급투쟁에 견주어 정치적 자유에 지나친 중점을 두는 것을 뜻한다.) 악셀로드는 결국 고전적인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복장을 걸치고, “사회민주주의자 뿐만 아니라 (태생은) 가장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가 이끄는 당이 그저 부르주아적인()전제주의 혁명을 수행하는 시나리오를 꺼내든다. 이 이중적인 지도자의 서술은 레닌의 이데올로기적인 정통성에 대한 지지와 레닌 자신을 노골적으로 비꼰 것이다.

악셀로드의 12~1월 글에 대한 이런 해석은 19046월에 썼으며, 나중에 이스크라에 실린 카우츠키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로 지지된다. 이 편지에서 악셀로드는 서유럽의 정당들에서 생긴 갈등과 달리 러시아 당 안의 논쟁은 원칙적 문제를 둘러싼 것이 아니라 오직 당내 문제에서 레닌 일당이 사용한 방식을 둘러싼 것이라고 주장한다. 악셀로드는 레닌이 자신만의 어떤 상세한 계획이 있었다는 점을 노골적으로 부정했다. 레닌은 대다수 당 실무자(praktiki)의 결점을 기꺼이 활용하려는 파렴치한 의사를 가진 전무후무한 사람이었다. (악셀로드는 왜 레닌이 그의 말에 따르면 많은 실무자의 우상이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레닌이 이들에 대해 공공연히 얕보는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자신만이 눈여겨본 것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명성 있는 외국의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밝혔으며, 그 뒤에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당의 공식 기관지를 통해 발표한 이런 태도는 어쩌면 레닌의 평판에 이바지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교과서적 해석이 멘셰비키가 제2차 대회 다음해에 전개된 논쟁, 즉 그 핵심 슬로건 대부분에 대한 이들의 지지 덕택에 전체를 표적으로 삼지 않은 사실과 레닌이 공인된 계획에 따랐다는 이들의 주장에 의해 도전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교과서적 해석에 가장 심각한 손상을 입히는 사실은 멘셰비키가 실제로 이 시기에 레닌에게 퍼부은 비난에서 나온다. 1904년의 논쟁을 검토해보면, 특정한 핵심 쟁점을 중심으로 일어난 양측 사이의 분열은 교과서적 해석이 믿게 하려는 것과는 정반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장 두드러지는 두 가지 사례는 당 조직과 지식인의 역할이다.

교과서적 해석의 중심적 신조는 레닌이 인민주의 테러 그룹인 나로드나야 볼랴(Narodnaia volia, 인민의 의지) 같은 러시아의 음모적 모델을 지지하고,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 모델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논쟁에 개입한 독일 사민당의 당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전혀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보기를 들면, 카를 카우츠키는 19045이스크라지에 글을 게재하며 러시아의 논쟁에 개입했다. 그는 자신과 이야기를 나눈 양 분파의 구성원에 대해서만 논평했다. 카우츠키 글의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어느 쪽도 무엇을 할 것인가를 언급하지 않았다. 카우츠키가 보기에, 쟁점은 제2차 대회의 규약 논쟁과 그 뒤에는 중앙집중주의/지방자치 논쟁이었다. 카우츠키는 당원 규정에 대한 멘셰비키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저 전제주의 러시아에서 당이 처한 억압적인 지하활동 상황 때문이었다. 카우츠키는 영국, 스위스, 프랑스 같은 개방된 사회에서는 레닌의 정식이 개선될 것이라고 말했다.

카우츠키는 중앙집중주의 대 자치 쟁점에 대해서도 비슷한 대조를 보였다. 독일 당만큼이나 이들(그가 이야기를 나눈 러시아의 지도자들)은 노동자적 규율을 좋아하지 않는 지리멸렬한 지식인들의 피난처일 뿐인 지방자치를 제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지하활동 상황에서 광범한 지방자치는 피할 수 없지만, 그저 형식뿐인 중앙집중화는 해로울 것이다.

카우츠키는 레닌을 최고 지도부 안에서 논쟁을 개시하고 공격한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에 레닌을 빗대 사정없이 비난했다. 여기서도 다시 카우츠키는 불법적인 지하당이 직시할 의무에 기초하여 비판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도부가 얻은 신뢰와 명성은 형식적인 규약보다 더 큰 통합력이 있으며, 최고 지도자(vozhdi)들은 언제나 공동전선을 제시해야 한다.

발전된 서구의 정당들이 할 수 있는 것과 러시아의 미발달한 지하당이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비슷한 대조는 카우츠키의 노이에 자이트(Neue Zeit, 새로운 시대)지와 멘셰비키의 이스크라지에 함께 실린 글에서 로자 룩셈부르크가 레닌에 가한 공격의 토대를 이룬다. 룩셈부르크의 출발점은 레닌이 1904년 봄에 쓴 팸플릿 일보전진, 이보후퇴One Step Forward, Two Steps Back(이후 일보전진으로 줄여 표기한다). 룩셈부르크는 일보전진무자비한 중앙집중주의의 찬가라고 묘사하고, 레닌을 당의 모든 지적인 활동을 독점하고, 지역위원회의 아주 사소한 세부 활동에도 간섭하는 중앙위원회에 대한 맹목적인, 경솔한, 좀비(zombie) 같은 복종(Kadavergehorsam)의 주창자라고 묘사한다. 그녀는 이것이 아주 나쁜 생각임을 증명하는 데서 애를 먹지 않는다. 룩셈부르크는 이런 생각을 무엇을 할 것인가나 레닌의 다른 이전 저작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 짓지 않는다. 실제로 그의 이전 활동에 대한 유일한 언급은 그를 “[2] 대회 준비를 위한 캠페인에서 이스크라의 걸출한 지도자이자 투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묘사한 것이다.

룩셈부르크는 진짜 사회민주주의적인 중앙집중주의는 경험이 많고, 전투적이며, 의식적인 노동자 전위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정치적 자유가 존재한다고 추정되는 발전된 서구의 정당들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서유럽에 존재하는 이런 조건이 러시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룩셈부르크는 기회주의의 위험을 막기 위해 조직적 규율을 좀 더 엄격한 방향으로 독일당의 규약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레닌이 분명히 크고 고도로 중앙집중화된 노동자당의 창설을 위한 예비적 조건이 이미 러시아에 존재한다.”고 생각했으며, 지식인의 규율 없음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낙관적으로생각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룩셈부르크는 레닌이 서유럽의 진부한 생각을 버리는 대신, 러시아의 조건에 기초하여 자신의 조직적 처방을 내릴 것이라고 당 지도자들에게 알려준다.

이런 다소 생색내는 듯한 분석을 내놓은 사람은 외국의 동지만이 아니었다. 악셀로드도 다수파의 이상적 목표, 권위 있는 정치지도자와 중앙 지도기구가 이끌고, 진정으로 사회민주주의적인 강령에 입각하여 활동하는 철저하게 중앙집중화된 조직이 발달하지 않은 러시아당에게는 지나치게 야심적이라고 경고했다. “정치적 맹아[, 우리 당]에게 제복, 행군모자보다 더 잘 어울리는 것은 없지만, 늠름한 참모부는 아직 갓난아이 옷을 걸치고 있다.”

볼셰비키주의에 대한 어떤 교과서를 펼쳐들더라도 레닌이 새로운 유형의 자기 당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지하활동을 해야 하는 러시아의 상황을 지적했다고 씌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1904년에 새로운 이스크라가 레닌과 그의 지지자들을 꾸짖는 것을 보는 것은 약간 충격적이다. “정신 차려! 여기는 러시아지 유럽이 아니다, 기억하는가?”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1904년의 결론 없는 논쟁을 조사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와 비슷한 이럴 리가 없는데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정말로 교과서적 해석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당 대회 이전의 이스크라더더구나, 볼셰비키주의가 전형적인 지식인 헤게모니의 원칙을 지지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레닌은 일보전진1904년의 다른 글에서 스스로를 지식인에 대한 채찍이라고 표현했으며, 집요하게 혼란스러운 지식인의 규율 없음 대 노동자의 규율이 쟁점이라고 규정했다. 명쾌한 반격이 있어야 했다. “당신은 2년 전에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지식인을 찬양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1904년 여름 중반에 플레하노프의 글이 나오기 전에 어느 누구도 이런 명쾌한 반격을 가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모든 사람이 레닌의 반()지식인 입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본 레닌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무엇이었는가? 그녀의 대답은 노동자운동이 부르주아 지식인의 권력욕의 도구로 바뀌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그녀는 노동자운동에 지식인이 파멸적 영향을 끼치지나 않을까 하는 레닌식의 걱정에 대해 말한다. 실제로 그녀는 레닌에게 훈계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민주주의 조직을 지지하는 노동자의 선천적 성향에 대한 격정적인 강조나 사회민주주의 운동 내의 지식인분자에 대한 의심은 그 자체로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표현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녀는 프랑스의 생디칼리스트, 영국의 노동조합주의자, 레닌 심지어 과거 순수 경제주의태도에서 노동조합주의적 편협성을 전제주의 러시아로 퍼 나른 페테르부르크의 신문 라보차야 믜이슬(Rabochaia mysl’, 노동자의 사상)”을 노동자 숭배 유파의 보기로 꼽았다. 결과적으로 놀랍게도 룩셈부르크는 레닌의 견해가 몇 년 동안 그의 특정한 혐오 대상이었던 신문인 라보차야 믜이슬과 닮은 데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룩셈부르크는 레닌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지적한다. 즉 그는 아직 러시아에는 진짜 사회민주주의적인 중앙집중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노동자 전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실제로 당의 의무는 의식적인 노동자 전위의 창출 그 자체여야 한다. 어쨌든 레닌이 지식인이나 어떤 외부적 원인에 기회주의라는 죄악의 책임을 씌우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기회주의는 노동자운동 자체의 산물이자, 그 역사적 발전의 피할 수 없는 특징이기 때문이다. (잠깐만, 기회주의가 노동자운동에서 생긴다고 주장한 사람은 레닌이 아니잖은가? 게다가 이러한 견해에 진저리를 친 것으로 여겨지는 룩셈부르크 같은 훌륭한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아니잖은가?)

국외자인 룩셈부르크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지 않은지도 모른다. 따라서 레닌의 반()지식인 입장에 대한 트로츠키의 논쟁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트로츠키가 보기에, 레닌의 반()지식인 사고방식은 구 이스크라의 유감스러운 유산이다. 그는 이스크라가 노동자를 너그러이 봐주는 반면에, 지식인을 꾸짖었다는 이유에서 신문을 조롱한다. 그는 신랄한 야유로 레닌에 도전한다.

 

 

나는 내 부르주아 지식인 심리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 [노동자 생활의] 객관적 조건과 정치적 행동을 위한 의식적인 훈련 사이에는 투쟁, 실수, 정치생활의 경험 [속에서] 교육이라는 머나먼 길이 있다고 …… 단언한다. 러시아의 노동자계급은 사회민주주의 지식인의 좋든 싫든 지도 아래서만 이런 경험에 돌입한다. 나는 [원문 그대로] 가까스로 정치적인 자주적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러시아의 노동자계급이 아직까지 러시아의 지식인에게 규율을 …… 가르칠 수 없다고 단언한다. ……

 

 

잠시 숨을 돌리고, 룩셈부르크와 트로츠키가 계속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교과서적 해석을 지지하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음을 상기하자.

지식인의 역할을 둘러싼 싸움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에 대한 대조적인 견해를 반영했다. 보기를 들면, 1904년의 팸플릿 전쟁에서 나온 이런 인용구를 잘 들어보라.

 

 

[사태에 대한 우리 반대편의 견해에 따르면,] 지식인은 전술을 생각하고, 전술을 비판하고 바꾸며, 노동자를 운동으로 끌어당긴다. 한 마디로, 세상의 중심점이다. [실제로] 지하의 노동자운동이 [1890년대 후반부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면, 지식인이 가야 할 길을 밝히고, 전제적 억압으로부터 해방에 대한 그 열망을 일깨우는 찬란한 불꽃으로 빛을 발했을 것이다. 지식인이라는 해바라기는 노동자라는 태양을 꼭 껴안았다. ……

[당 안에서 노동자는] ‘전위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의식적인 대중이라고 생각하는가? 노동자가 지식인을 노예같이 추종한다고 생각하는가? …… 소수파가 펴낸 파닌(Panin)의 팸플릿에서 여러분은 노동자 전위가 어떻게 노동자운동의 필요에 따라 지식인과 그 전술에 [적극적으로] 순응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상을 발견할 것이다.

 

 

1904년 레닌의 지지자인 미하일 스테파노비치 올민스키(Mikhail Stepanovich Olminskii)와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보그다노프(Aleksandr Aleksandrovich Bogdanov)가 최근 당 역사에 대한 악셀로드의 견해를 공격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소련사 강좌의 선생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져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약 강좌 내내 당신의 강의를 열심히 노트한 뒤, 기말시험에서 이런 문장을 접한 학생들에게 두 당파 가운데 어느 쪽이 이와 어울리는지를 묻는다면, 과연 누가 정답을 제시할 것이라고 예상되는가? 성적이 우수한 학생인가, 아니면 제일 못한 학생인가?

1904년 여름 중순에 플레하노프가 무엇을 할 것인가의 정식 일부를 부인하고 나서야, 멘셰비키는 반()레닌 서술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중요한 것으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멘셰비키의 해석은 1905년 중반에 이스크라의 편집자인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포트레소프(Aleksandr Nikolaevich Potresov)가 제시했다. 실제로 이것은 편안치 않은 논쟁이 일어나고, 책의 정신과 그 역사적 의미에 대적하려고 애쓰는 이 시기에 내가 본 것 가운데 가장 적대적인 분석이다. 이는 부분적으로 포트레소프가 자신의 과거를 정말 후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2년을 돌이켜보면, 포트레소프는 교정쇄로 책을 읽자마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자생성에 대한 일부 정식이 꺼림직 했지만, 많은 구절이 진짜 한 편의 시와 같다고 레닌에게 알려주었다. 그런데 1905년에 그는 바로 이 무엇을 할 것인가의 시정(詩情)에 싫증이 났다.

포트레소프는 무엇을 할 것인가크루시코프스카야 인텔리겐챠’(kruzhkovskaia intelligentsia), 즉 불법 서클을 조직한 급진적 지식인(intelligenty)의 지나치게 야심적인 꿈의 전형적인 표현이라고 묘사한다. 포트레소프는 러시아의 지하당 실무자를 임명하겠다는 논쟁적인 이유를 위해 이런 용어를 선택했다. 그는 혁명의 위대함에 대한 무엇을 할 것인가의 비현실적인 꿈은 러시아당 안에서 지식인의 우위를 반영했으며, 이를 영구화하도록 도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레닌이 이 우위에 책임이 있다거나, 이를 옹호하거나 바람직한 결과로 여겼다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포트레소프도 노동자에 대한 지식인의 지배를 레닌의 전망에 숨어 있는 위험으로 보지 않았다. 거꾸로 아주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비현실적인 우위를 꿈꾼 노동자에 대한 지식인의 영향력은 없었다.

포트레소프가 보기에,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구절은 기적을 이루기 위해 지하활동 실무자를 열렬히 지원한 것으로 알려진 자생적으로 깨닫는 노동자계급을 불러내는 구절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비관주의가 아니라, 그 과장된 비현실적 낙관주의, 즉 레닌의 실용주의가 아니라, ‘회의론과는 전혀 무관한그의 낭만적인꿈이 바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포트레소프 주장의 핵심이다.

 

 

이스크라 충성파(볼셰비키)

 

1904년 여름 중순에 플레하노프의 분기점을 이루는 비판이 나온 뒤에야 볼셰비키, 즉 자신을 이스크라의 전통고수자로 규정한 분파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이 변호의 본질은 무엇이었는가?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레닌 충성파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멘셰비키 평가의 기본적 정확성을 받아들이고, 실질적인 이유에 입각해서 레닌을 옹호했다는 것이다. 즉 그가 노동자는 자생적으로 부르주아적이라고 주장하고, 지식인 출신 혁명가의 영구적인 지도를 필요로 한다는 이런 불쾌한 현실로부터 과감하게 추론하는 것이라면, 레닌은 옳다. 다른 가능성은 볼셰비키가 멘셰비키 정식의 정확성을 부정하고, 원문에 근거해서 레닌을 옹호했다는 것이다. 즉 레닌은 여러분이 멘셰비키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을 어리석은 일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그저 당신 자신이 진정으로 부정하지 않는 사회민주주의의 일부 명구(名句)를 알아듣도록 했을 뿐이다.

만약 무엇을 할 것인가가 창립문서였다면, 당연히 무엇을 할 것인가의 새롭고 논쟁적인 입장은 레닌 충성파를 고무시켰을 것이다. 이 경우만이 첫 번째 가능성을 진지한 것으로 보게 한다. 그러나 실제로 볼셰비키는 멘셰비키 해석의 정확성을 정력적으로 부정했다. 볼셰비키에게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즉 레닌이 노동자를 신뢰하는 마음을 잃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차라리 레닌이 정말로 반()이스크라주의자나 멘셰비키가 주장한대로 노동자를 모욕했는가? 라고 물어라. 볼셰비키는 레닌이 노동자에 대한 신뢰 부재를 드러내거나, 노동자가 사회주의 의식에 이르는 것의 불가피성에 의문을 표했다는 것을 단호히 부정했다.

레닌 충성파와 레닌 자신은 두 가지 변호 방침을 세웠다. 첫째, 독자들은 부정확하거나 불충분하게 정식화되었을지도 모르는 문구를 분리시켜서 이해하기보다는 책 전체의 정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둘째, 레닌의 책은 특정한 논쟁 상대를 겨냥한 것이지, 포괄적인 논문을 쓰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역설적으로, 이 두 가지 방어 요령을 맨 먼저 마련한 사람은 바로 1903년 제2차 당 대회의 마르토프와 플레하노프였다.) 미하일 올민스키는 다음과 같은 말로 상황을 설명한다.

 

 

당면한 역사적 상황은 이스크라자랴라는 저작물의 일반적 내용을 결정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팸플릿도 분명히 이 범주에 들어간다. 따라서 이 팸플릿을 사회민주주의자를 위한 완벽한 문답식 교과서나 그 필자의 견해가 전부 표현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보기를 들면, 대중이 바로 그 지식인 지도자들을 정치에 참여시키고 있던 시기에 대중의 정치운동 참여[vovlechenie]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했을 것이다. 자생성의 역할을 정당화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결국 충분히 인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직자와 의식적인 전술적 지도자의 부재가 운동의 급소인 이런 시기에 핵심에 집중하는 것은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볼셰비키는 무엇을 할 것인가가 교과서적 해석대로, 바로 레닌주의의 본질이었다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단순한 가능성에도 불쾌감을 느꼈다. 볼셰비키는 계속해서 바르게 이해된 무엇을 할 것인가의 진정한 논점은 사회민주주의자에게는 의심의 여지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독일에 있는 외국의 동지들도 이에 동의하리라고 자신 있게 예상했다.

특히, 2차 당 대회에서 한 레닌의 유명한 말, 막대를 다른 쪽으로 구부렸다는 것은 그가 명시적으로 거부한 해석처럼, ‘너무 심했다는 것을 사과하거나 시인하는 것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그는 나중에 자신이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는 노동자 의식의 성장 같은 근본적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으로서가 아니라 특정한 일탈을 겨냥한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가장 적극적인 옹호자 가운데 하나는 그의 나중 경력에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 요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Iosif Vissarionovich Dzhugashvili)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주가시빌리의 1905년 글은 아마 이 책에 대한 볼셰비키의 가장 포괄적인 논평일 것이다. 그 중요성은 레닌이 “‘의식을 외부에서 가져오는 것이라는 악명 높은 문제에 대한 자신의 그루지야인 제자의 설명을 명시적으로 지지했다는 사실로 증가된다. 그러나 이 글은 전문가의 문헌에서도 거의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 주가시빌리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알기 쉽게 바꿔 말할 수 있다. 즉 노동자는 수동적이거나 타성적이기는커녕 본래부터 사회주의를 향해 전진해나간다. 외부의 도움 없이도, 이들은 결국 사회주의만이 자신의 기본적 이해관계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랜 방황과 고생을 겪고 나서야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사회주의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다면 비극일 것이다. 다행히도 과학적 사회주의가 몇몇 용기 있고 학구적인 지식인에 의해 강구되었으며, 그 뒤 사회민주주의가 이를 노동자에게로 가져왔다. 과학적 사회주의를 발전시키는 임무는 오직 부르주아 지식인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반면에, 이를 노동자에게로 가져오는 임무는 사회민주주의에게 주어진다. 사회민주주의를 지식인과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자든 지식인이든, 노동자의 대의에 찬성하는 자각한 모든 투사들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회민주주의로 개종한 진정한 지식인은 언제나 아주 드문 흰 까마귀일 것이다.

스탈린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끌리는 것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없는 경우에, 사회주의의 취지가 사회민주주의에 의해 활발히 제시되지 않는 경우에만 그렇다. 이는 다음과 같은 추론으로 이어진다. 모든 사람이 자생적(stikhiinyi) 운동사회주의 원칙을 채택하기 전의 노동자운동의미한다고 알고 있다. ‘사회주의가 아니라면필연적으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가진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이데올로기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노동자가 혼자 힘으로 과학적 사회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면, 사회민주주의를 가져야 할 어떤 필요도 없을 것이며,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불필요할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가 사회주의에 끌리는 자신의 천성 때문에 과학적 사회주의를 쉽게 흡수하지 못했다면, 즉 노동자가 사회주의의 취지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면 사회민주주의는 성과를 낳지 못할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그 대척적 평가에도, 볼셰비키 주가시빌리와 멘셰비키 포트레소프 모두 같은 책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곧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이들은 모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실무자의 은밀한 꿈을 표현한 것으로 여긴다. 또한 사회주의 의식을 노동자에게로 가져오는 것은 노동자에 대한 모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무적인 지도력을 발휘할 것을 실무자에게 제안하는 것으로 여긴다. 두 사람 다 레닌은 노동자가 실무자들의 호소에 응답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고 본다. 차이점은 주가시빌리가 레닌의 확신에 진정으로 고무되었지만, 포트레소프는 이를 기괴한 자기기만으로 보고 부정한다는 점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역사에서 제1기는 이상한 역사문헌 유산을 남긴다. 가장 유명한 문서, 즉 교과서적 해석의 견고한 버팀목은 룩셈부르크와 트로츠키의 공격이다. 그러나 이들의 글은 거의 배타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일보전진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반()레닌 비판의 내용은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늘 교과서적 해석을 훼손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동시대의 가장 자세하고 식견 있는 두 논문은 포트레소프와 주가시빌리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그 1차적 독자들에게 어떻게 이해되었는지에 대한 우리 인식의 토대여야 한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것을 거의 무시해왔다. 아마도 두 논문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묘사가 공통된 의견을 크게 해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 역사적 문서, 1906~1930

 

1905년 혁명은 두 당파에게 레닌이 잘못 말했는지 여부보다 훨씬 더 긴급하고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논쟁의 내용을 제시했다. 따라서 모든 쟁점이 신속하게 수면 아래로 미끄러졌다. 심지어 1905년에 포트레소프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고고학적인 연구로 여겼다. 내가 나눈 제2(1906~30) 후반부에 무엇을 할 것인가는 적어도 관심을 끄는 역사적 문서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대개는 묵살되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 나는 명시적인 언급보다는 그 중요성이 없어진 것에 더 집중할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가 창립문서로 불릴 수 있으려면 그 전에 증거로 다음과 같은 항목이 고려되어야 한다.

첫 번째 항목은 레닌의 글이 권위 있고 신성불가침한 레닌주의로 변모된 1920년대의 인용문 전쟁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시기를 조사하면서 나는 레닌의 저작을 인용하는 것이 어떤 효과가 있는지를 주시했다.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가 거의 다 빠져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셜록 홈즈는 일찍이 개가 짖지 않은 호기심을 끄는 사건에 관해 납득할 만한 근거를 댔다. 이 점에서 창립문서가 한 번도 인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의 호기심을 끄는 사건이다.

두 번째 항목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볼셰비키주의 지도자들의 태도이다. 레닌 자신은 1907년 재발행된 뒤에 이 책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스탈린, 트로츠키,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부하린(Nikolai Ivanovich Bukharin)이라는 상징적인 세 사람을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도록 하자. 이 세 명의 지도자는 레닌 이후 발전한 볼셰비키주의의 세 가지 면모를 대표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세 사람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어떻게 평가했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는 분명히 주가시빌리(스탈린)의 개인적, 정치적 생활에서 고무적인 이정표였다. 그는 1920년에 쓴 러시아공산당의 조직자, 레닌(Lenin as Organizer of the Russian Communist Party)이라는 제목의 글과 레닌주의의 기초(Foundations of Leninism, 1924)에서도 일부 독특한 표현을 쓰며 이를 언급한다. 그러나 무엇을 할 것인가’-스탈린 관계는 무엇을 할 것인가가 창립문서로서 역할을 한 것이라는 교과서적 해석을 결코 강화시켜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청년 주가시빌리는 노동자가 사회주의 의식을 획득할 수 없다거나, 지식인이 운동을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을 읽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이러한 해석을 단호히 부정했다.

다음은 트로츠키다. 1930년대 말에 쓴 스탈린 전기에서 트로츠키는 여전히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플레하노프의 공격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레닌이 책에 포함된 주장을 부인했다고도 주장한다. 트로츠키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는 분명히 창립문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부하린이다. 부하린은 1905년 혁명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스캔들이 지나간 뒤에 입당했기 때문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조사 중에 나는 부하린의 주요 저작 거의 다와 다수의 단편들을 읽었다. 이 모든 글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는 단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부하린이 1919년에 공동집필한 공산주의의 기초ABC of Communism에서 진취적인 볼셰비키에게 제시한 광범한 도서목록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가 빠져있다. 부하린은 특히 독창적인 이론가로서의 레닌의 위상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그의 기여를 두 차례 설명했다. 어느 경우에도 무엇을 할 것인가는 언급되지 않는다. 실제로 당 조직의 모든 주제를 다루지도 않는다.

세 번째 항목은 레닌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즉 나데즈다 콘스탄티노브나 크룹스카야(Nadezhda Konstantinovna Krupskaia), 그리고리 예브세예비치 지노비예프(Grigorii Evseevich Zinov’ev), 레프 보리소비치 카메네프(Lev Borisovich Kamenev), 그리고 레닌의 누나인 안나 일리니치나 울랴노바(Anna Il’inichna Ul’ianova)가 만든 레닌의 이미지다. 나는 이 이미지를 전우(소라트니크[soratnik], 戰友)의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스탈린, 트로츠키, 부하린과 달리 이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를 지키기 위해 장수한 정치세력으로부터 처참한 꼴을 당한 적이 없다. 결과적으로 레닌과 가장 밀접하게 일한 사람들의 견해는 없었다. 심지어 전문적인 역사가의 경우에도 그랬다. 이를 간과하는 것은 도대체 볼셰비키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크게 침해한다.

이들의 전기적인 서술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는 눈에는 띄지만 굉장한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레닌주의의 근간이 훨씬 더 이른, 특히 1894년에 쓴 지하출판물 인민의 벗은 어떤 사람인가What the “Friends of the People” Are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스크라 운동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수행한 역할을 높이 샀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레닌에 대한 자신의 책에서 크룹스카야가 한 논평이 전형적이다. “인민의 벗은 혁명운동이 따라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녔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는 광범한 혁명 활동 계획을 밝히고, 명확한 임무를 지적했다.”

이 책들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교과서적 해석의 단서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전우는 레닌이 노동자에 대해 비관적이었다고 청년 동지들에게 알리지 않는다. 이들이 이렇게 하지 않은 것은 다른 이유보다도 그런 발상 자체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레닌주의의 핵심에 대한 크룹스카야의 해석이 그 한 보기이다.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사이에서 그의 활동은 이 노동자와 이야기하고,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전한 마르크스의 원대한 사상을 알고 있는 이들의 연설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이 사상은 모든 노동자와 모든 근로대중, 모든 피억압 계층의 선진부대인 노동자계급이 따를 것이다. 이는 노동자계급의 힘이며, 그 승리를 보증한다. 모든 노동자를 고무하는 지도자[보즈디, vozhd’]인 노동자계급만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이것이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사이에서 활동했을 때 이해한 것이다. 따라서 이 사상, 이 사고는 그의 향후 활동과 매 단계에서 그가 수행한 모든 것을 비췄다.

 

이 사람들이 제시한 전기적 서술은 레닌 자신도 기억되기를 바랐을 것이라는 식의 주장이 강하다. 물론 레닌의 전우 이미지를 거부하는 것은 자유지만, 이를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교과서적 해석의 우세 때문에 레닌을 흉내 내는 크룹스카야는 거의 이해할 수 없고,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도 없다.

네 번째 항목은 1920년대와 1930년대 초에 쓴 정통하고 자주적인 목격자들의 책이다. 이 점에서 내가 염두에 두는 저술가는 게오르그 루카치(Georg Lukács), 파벨 니콜라예비치 밀류코프(Pavel Nikolaevich Miliukov), 체임벌린(W. H. Chamberlin), 게오르게 베르나츠키(George Vernadsky), 드미트리 스비야토폴크-미르스키(Dmitrii Sviatopolk-Mirskii)처럼 다양하다. 이들 가운데 누구도 무엇을 할 것인가를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해석을 포함하는 창립문서나 획기적인 문서로 보지 않았다. 또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교과서적 해석을 조금이라도 닮은 것을 레닌주의의 본질로 규정하지 않았다.

한쪽 구석에 전통을 중시하는 역사가이자 정치적 경쟁자인 밀류코프가 있다. 1927년 글에서 그는 레닌이 언제나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측면보다는 정치적·혁명적 탈취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평하고 있다. 때문에 제2차 대회에서 레닌은 동요하는 지식인의 제거와 기꺼이 규율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노동자의 격상(비드비제니예, vydvizhenie)”을 지지했다. 따라서 밀류코프는 이런 묘사가 자신에게 대단히 부정적인 반향을 미치더라도, 레닌을 반()지식인, ()노동자로 여긴다. 그는 1903년의 레닌이 자신이 정적으로 알고 있던 레닌과 가장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레닌은 언제나 자신에게 충실했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이 레닌이 지식인의 헤게모니를 주장했다는 것을 안다면, 밀류코프는 꽤 놀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럼 일보전진은 어떻소?” 대답은 아마 이럴 것이다. “‘일보전진은 잊어라, 핵심 교과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그러나 실제로 근본적 교과서로 일보전진대신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은 결코 확실한 선택도 아니거니와 그 자체로 별도의 설명을 필요로 한다.

다른 구석에 좌익 지식인이며, 레닌의 열광적 추종자인 루카치가 있다. 1924년에 나온 그의 레닌에 대한 긴 소론(小論)은 레닌의 전망 속에서 조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노동자계급의 전위정당에 대한 장이 있다. 여기서도 무엇을 할 것인가나 제2차 대회 이전의 이스크라시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노동자 대 지식인문제는 루카치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노동자계급에게서 직업적 혁명가가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루카치는 혁명적 낙관주의가 레닌의 전망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레닌의 당 조직 개념은 혁명의 사실, 즉 현실성을 전제로 한다. …… 레닌은 정치적 문제는 조직적 문제와 기계적으로 분리될 수 없으며, 우리가 노동자혁명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완전히 곡해하든 안하든 지와 무관하게 볼셰비키 당 조직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3의 구석에 독립 저널리스트이자 미국인 관찰자 체임벌린이 있다. 자신의 책 소비에트 러시아Soviet Russia(1930)러시아혁명The Russian Revolution(1934)에서 특히 레닌을 역사적 인물로 다룬 절에서도 체임벌린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언급조차 않는다.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체임벌린은 다음과 같은 말로 레닌을 요약한다. “자본주의 체제와 그 지지자들에 대한 무한한 증오, 새로운 사회질서를 지배할 노동자계급의 권리와 능력에 대한 신뢰 이것이 레닌의 강고하고 솔직한 성격의 지배적인 두 가지 열정이었음에 틀림없다.” 오늘날 누가 이런 말을 쓰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러나 체임벌린은 정권을 장악한 레닌주의의 매우 정통한 관찰자였다.

이 시기를 살펴보면서 얻게 되는 주요한 결론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볼셰비키주의의 창립문서라거나, 레닌주의의 본질은 노동자에 대한 비관주의라는 생각이다. 이는 그저 레닌의 생애나 전망에 대해 가장 정통한 사람들에게서만 떠오르는 생각이 아니었다.

 

 

3: ‘새로운 유형의 당’, 1931~1977

 

무엇을 할 것인가가 창립문서라는 생각은 제3기 중에 고안되었으며, 4기까지 계속되고 있는 가장 수명이 긴 생각이다. 3기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일생에서 새로운 장이 열린 시기이다. 1920년대 말에 외국어 번역서가 출판된 것이다. 이 시기에 레닌의 주요 저작 모두를 번역하려는 대규모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러시아가 외국의 동지들에게 자신의 창립문서를 제공하기 위해 특별히 서두르지는 않은 것 같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는 실제로 새로운 공산당의 창립에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런 발전의 초기 단계가 팜 덧(R. Palme Dutt)레닌의 생애와 가르침The Life and Teachings of V. I. Lenin이라는 제목이 붙은 얇은 책자에 기록되어 있다. 1934년에 출판된 이 책은 영어권 독자들에게 노동자계급 운동에 볼셰비키주의의 독특한 이바지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통해] 처음으로 나타난 뒤, 운동은 철저히 무장되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오늘날의 국제 노동자계급 운동에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남아 있다고 알려준다. 그럼에도 책 말미의 독자들에게 전하는 조언이라는 제목의 절에서, 덧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포함되지도 않은 레닌주의의 필독서를 제시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소련 당국은 세계가 두 진영으로 나뉠 수밖에 없으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제3의 길이 있을 수 없음을 납득시키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의 현실성(악투알노스치, aktualnost’)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인민민주주의국가나 자본주의 국가들의 공산당들에게 일독을 권했다. 물론 무엇을 할 것인가는 현지 언어로 이용할 수 있게 되자마자, 자국어 성경이 종교개혁기에 이용된 것과 똑같은 식으로, 즉 예전의 권위 있는 설명에 도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 한 보기로, 미국의 모택동주의자는 소련과 미국공산당을 비판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용했다. 공산주의 분파의 이런 식의 책 이용은 모두, 전후 영미 학자들의 가정, 무엇을 할 것인가는 정말로 창립문서였다는 가정을 강화시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한편, 소련 학자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새로운 유형의 당창립에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193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가 이 말의 내력을 꼬치꼬치 캐내 밝혀보면, 대략 이 시기에 제3기가 시작되었음을 나타내는 다른 이유를 얻게 된다. 이 말도 새로운 유형의 당개념도 레닌의 글 자체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공교롭게도,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가장 가까운 말은 부정적으로 비꼬는 말의 한 예이다. 즉 레닌은 일부 적수들이 사회민주주의 조직의 새로운 모델’(노비 오브라제츠, novyi obrazets)을 찾으려 헛되이 애쓰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레닌이 대개 전위정당이라는 생각을 고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전위라는 말이 거의 언제나 빈정거리는 인용부호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나타나 있다는 것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레닌이 이 말을 쓴 적수를 비웃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용 가능한 증거에 따르면, ‘새로운 유형의 당이라는 말을 가장 먼저 사용한 듯한 것은 볼셰비키 당 30에 즈음하여 1933년 출판된 공식 사료들에서였다. 적어도 스탈린의 생각으로는 새로운 유형의 당의 핵심은 기회주의 분자들로부터 당의 정화’(오치셰니예, ochishchenie)였다. 1938년의 속성과정Short Course에 따르면,

 

 

[1912년의] 프라하 협의회는 새로운 유형의 당, 레닌주의 당, 볼셰비키주의자 당을 출범시켰다. 볼셰비키의 임무는 멘셰비키와 결별하고 공식적으로 스스로를 독자정당으로 수립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멘셰비키와 결별했기 때문에 서구의 통상적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다른 새로운 , 새로운 유형의 당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이 당은 기회주의 분자가 없고, 권력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을 지도할 수 있는 당이었다.

 

 

새로운 유형의 당이라는 말은 속성과정에서 1912년의 프라하 협의회에 대해서만 사용된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해당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속성과정은 소련 초의 취급에 비하면 분명히 높아진 무엇을 할 것인가의 위상을 나타낸다. 이제야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상세히 설명된 이론적 명제가 그 뒤 볼셰비키 당의 이데올로기의 초석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속성과정외부로부터의 의식’, 지식인 지도부의 필요성, 심지어 중앙집중화된 조직의 필요성조차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자를 경멸하는 것으로 묘사한 레닌의 적수, 경제주의자같다. 자생성에 굴복하고, 의식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왜 해로운 것인가? 대답은 이렇다. 이렇게 하는 것은 정신적 광명인 의식을 얻으려고 애쓰는 노동자들을 모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레닌이 차르 체제에 대항하는 일반적 정치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을 떼어놓으려는 모습을 보인 것은 노동자들이 더 나은 조건뿐만 아니라 ……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폐지를 위해서도 싸우고 싶어 했기때문에 죄악이었다.

아마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이런 해석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소련 시민들에게는 이런 해석이 레닌 책이 지닌 뜻이었다. 우리는 아마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봐야 할 것이다. 숲에서 벌목을 하는데, 이 소리를 들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소리가 나기는 한 것인가? 창립문서가 전한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무언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어떤 뜻에서인가?

스탈린이 개인적으로 덧붙인 것이라고 생각되는 구절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마르크스주의 당은 사회주의와 노동자운동의 통합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근본 명제를 훌륭히 입증했다고 씌어 있다. 스탈린은 카를 카우츠키가 마르크스주의의 이 근본 명제를 정식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카우츠키의 정식을 자신의 1904년 글 제목으로 인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정식이 국제 사회민주주의에서 권위 있는 명구(名句)였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방어하는 자신의 1904년 예봉은 이 사실에 의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정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새로운 유형의 당의 출처로 여기지 않았다.

스탈린의 태도를 고려하면, ‘새로운 유형의 당이라는 말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집착하게 된 것은 그의 죽음 이후부터였다. 이를 되돌아보면서 소련 역사가 리디아 이바노브나 코미사로바는 속성과정무엇을 할 것인가일방적으로 다뤘다고 비판했다. “속성과정은 레닌 책의 주요한 측면, 즉 새로운 유형의 당에 관한 원칙을 모색하고 있는 측면에 대해 심도 있게 조명하지도 않았다. 이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1959년판 공식 당사는 레닌은 노동자운동이 새로운 유형의 당을 필요로 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파악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새로운 유형의 당에 대한 레닌의 견해, 그 성격, 노동자운동에서의 그 역할, 그 활동의 기본적 원칙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제시되었다.” (개인적 경험 때문에, 스탈린은 이런 특수한 경우에 스탈린 이후 시대 역사가들보다도 역사적 맥락에 대해 더 나은 의견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오늘날의 증거에 따르면, ‘새로운 유형의 당이라는 말은 새로운 소련 교과서가 발행된 직후, 버트람 울프가 서구 학자들에게 소개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1904년 글에 대한 1961년판 서문에서 울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두 팸플릿과 1902년에서 1904년 사이에 발표한 다수의 글에서 레닌은 새로운 유형의 당’, 즉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생존했을 동안에 설립되었든, 그 이후에 설립되었든 간에 이전의 모든 마르크스주의 정당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당을 위한 자신의 새로운 조직 계획을 세우느라 몹시 애쓰고 있었다.”

여기서 울프가 말하는 소련 저자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즉 레닌 자신이 이전의 모든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에 대한 의도적인 거부 의사를 표명하기 위해 이 말을 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1961년 이래로, ‘새로운 유형의 당이라는 말은 권위를 갖게 되었다. 닐 하딩이나 제임스 화이트 같은 레닌 전문가의 최근 책에 있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절은 새로운 유형의 당이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다. 최근에 마틴 말리아가 설명한 바에 따르면, 레닌은 사명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사명은 새로운 유형의 당으로 러시아 전체를 뒤엎는 것이었다. 이런 목표는 1902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선포되었다. …… 스탈린 시대의 슬로건을 어떻게 하면 간단명료하게 번안할 것인가라는 이런 식의 이상한 이야기는 서구 교과서의 주요한 테마가 되었다.

새로운 유형의 당이라는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딱지 역할을 하는 동안의 해석이다. 영미 학자들에 관한 한, 버트람 울프가 쓴 혁명을 만든 세 사람Three Who Made A Revolution창립문서가운데 창립문서라고 해석한다. 1948년 발표된 이래로 서구에서 서술된 레닌과 특히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단연코 가장 영향력 있는 이 책은 무엇을 할 것인가의 교과서적 해석이 되는 것의 틀을 제시했다. 이 틀은 내용에서 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권위를 갖게 되었다. 혁명을 만든 세 사람은 최고 지도자들의 개성에 중점을 둔 집단적 전기, 서술적 설명이다. 이 책은 1903년 제2차 당 대회에서 멘셰비키와 볼셰비키가 분열한 것을 합리적이고 예의 바른 좌익과 전체주의적인 좌익 사이에 벌어진 20세기의 중요한 충돌의 전설적 예고편이라고 묘사한다.

울프의 틀은 전쟁 이전의 몇몇 전신(前身)이 있었다. 특히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베르쟈예프(Nikolai Aleksandrovich Berdiaev)가 쓴 러시아 공산주의의 기원The Origin of Russian Communism(1937)과 에드먼드 윌슨(Edmund Wilson)이 쓴 핀란드 역까지To the Finland Station(1940)가 그것이다. 혁명을 만든 세 사람은 그 시기적절함 때문만이 아니라 다수의 상세한 설명, 서술적 경향, 시간, 공간, 인물에 대한 충실한 판단 때문에도 소련학(Sovietology)의 발생기 분야에 대단히 큰 충격을 주었다. 개인적으로 말하면, 나는 과장되거나 인색한 견해에 대해 울프에 절대 동의하지 않지만, 혁명을 만든 세 사람은 여전히 총론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울프가 제시하는 틀의 핵심은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분열에 내포된 참가자들 스스로가 막연하게 감지했을 뿐인 커다란 이해관계이다. 피할 수 없는 두 길 사이의 선택은 다음과 같다.

 

[그것이] 서구화주의자와 친()슬라브주의자가 벌이는 변화무쌍한 싸움의 변형태인 경제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 다음에는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그 다음에는 노동자반대파와 레닌, 톰스키와 스탈린 사이의 진정한 문제였다. 하나의 길은 서구의 정당이나 노동조합들에 더 가까이 이르는 길이었다. 민주적으로 조직된 서구의 이런 조직들은 허용되는 꽤 많은 합법성에 편안하게 적응했으며, 즐거운 때에 깃발을 내거는 것 말고는 오랫동안 반항정신을 결여했다. 다른 길은 독단적인 지도자 밑에서 자기 선택적이고, 엄격하게 중앙집중화되어 있으며, 은밀하고 음모적인 혁명적 지식인 무리의 지도 아래 음모와 봉기에 전념하는 길이었다. 이는 일찍이 나로드나야 볼랴라는 직업적 혁명가모형에 따라 조직되었다.

 

 

레닌이 두 길 가운데 두 번째 길에 헌신할 것을 선언한 저작인 무엇을 할 것인가는 이런 틀을 그럴 듯하게 만드는 데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거꾸로 말하면, 신화적 틀의 힘과 매혹적인 양자택일의 이분법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해석을 강제했다.

1950년대 초에 이스크라시기를 다룬 일련의 주목할 만한 연구논문들이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볼셰비키주의의 기원이라는 문제를 다양한 관점에서 다룬 책들이 1970년대 초까지 출간되었다. 소련학계의 과거를 전체주의 유파수정주의사이의 투쟁이라는 견지에서 살펴볼 때, 이 인상적인 성과는 학계의 집단적 기억 속에서 홀대받은 것이다. 특히 역사가들은 소련 연구가 본래 1970년대에 나타난 세련된 사회사가들 이전에는 투박한 사회학자들이 맡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를 좋아한다. 이스크라시기를 전문적으로 말하는 것이 소련사는 아니지만, 소련의 발전을 설명하기 위한 주제로 선택되었다. 결과적으로 연구논문 전체는 소비에트 시대 전체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이해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런 연구논문 필자들의 이름을 대는 것은 소련에 관한 영미 학계의 직업적 전문가 1세대의 우등생 명부를 제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레오폴드 헤임슨, 알프레드 메이어, 아담 울람, 로버트 다니엘스(Robert V. Daniels), 멀 페인소드, 레너드 샤피로(Leonard Schapiro), 존 킾(John Keep), 사뮤엘 바론(Samuel Baron), 알란 와일드먼, 이스라엘 게츨러(Israel Getzler), 아브라함 애셔, 리처드 파이프스(Richard Pipes), 조나단 프랑켈이 그들이다. 전업 소련 전문가는 아니지만, 배링턴 무어(Barrington Moore)와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도 이 목록에 들어간다.

나는 이스크라시기를 다룬 연구논문 전체를 울프 떼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이 이름은 두 가지 주요한 특징을 나타낸다. 즉 첫째는 울프의 틀에 대한 기본적 충성, 둘째는 공통된 의문, 공통된 가정과 함께 강한 공동기획 의식이 그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는, 레오폴드 헤임슨이 1955년에 쓴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와 볼셰비키주의의 기원The Russian Marxists and the Origins of Bolshevism의 첫 번째 각주가 혁명을 만든 세 사람에 대해서였다는 것이 적절하다. 이런 연구논문의 필자들은 모두 서로를 잘 알고 있으며, 주로 하버드대학의 러시아연구센터, 콜롬비아대학, 런던정경대학에서 공통된 경험을 가졌다. 이들은 많은 것에 대해 자기들끼리 토론을 벌였지만, 이런 토론은 그저 자기들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 가정의 설득력을 강화시켰을 뿐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교과서적 해석은 이런 공통된 가정 가운데 하나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자체는 이들의 책들에서 얼마간 기괴한 역할을 한다. 한편으로, 원문인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상세하게 검토하지 않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를 해석하는 문제에 일관되게 신경 쓰지 않는다. 울프의 해석 틀, 즉 노동자에 대한 (어느 말을 좋아하든) 레닌의 신뢰 부족, 경멸, 적개심, 불신이라는 기본적 구상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는 으레 이들 책의 서술적 돌쩌귀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을 제공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통해서 레닌은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거의 조물주처럼 볼셰비키주의를 만들어낸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서술적 구심성(求心性)은 이들 연구논문의 대부분에 나오는 필수적인 두 구절로 강화된다. 하나는 제2차 대회의 신화적 지위를 거듭 단언하는 것이다. 즉 당 규약 등의 애매한 조항을 둘러싸고 논쟁의 완전한 의미에 대해 아무 개념이 없는 소수의 망명자 무리가 브뤼셀에서 말다툼을 벌였다. 필수적인 다른 구절은 이스크라편집부 한두 사람의 눈에서 막() 같은 것이 벗어지자, 이들이 이스크라그룹에 공격받은 사람들보다도 레닌이 훨씬 더 이단자임을 깨닫는 예언적 순간이 있다.

연구논문 전체는 지식인과 노동자 사이의 긴장을 중심적인 관심사로 삼는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교과서적 해석에서 생기는 이 문제는 다시 교과서적 해석을 강화한다(누구나 지식인-노동자 관계가 실제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상당히 주변적인 관심사라고 주장할 수 있다). 전체 러시아 지식인이 상당히 적대적으로 묘사된다. 즉 언제나 그 이중인격, 유토피아적 이상주의, 감춰진 권력의지에 역점을 둔다. 이런 도덕적인 심리 분석은 개별 지도자들에게도 적용된다(최고위 아래 급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기조는 볼셰비키주의의 기원에 관한 책에서 도덕 성적을 매기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 레오폴드 헤임슨이 설정한 것이다(악셀로트는 A, 플레하노프와 마르토프는 B, 레닌은 낙제점을 받는다). 사람들은 때때로 이들 책에서 당내의 분열이 정말로 예의 바르고 매력적인 개인으로 이루어진 분파와 비도덕적이고 광신적인 갱들로 이루어진 분파 사이의 분열이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 한 보기로, 알란 와일드먼은 무엇을 할 것인가의 의도를 이렇게 요약한다. “정말로 무엇을 할 것인가의 정신을 충분히 흡수한 많은 제자들은 대의에 대한 열의, 적수에 대한 경멸, 조작에 대한 애정에서 그 지배자를 능가했다.”

연구논문 전체는 멘셰비키 지도자들의 인간적 매력을 강조하지만, 이들의 정책을 진심으로 칭찬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볼셰비키주의의 재앙적 본질을 알아차리는 데서 멘셰비키가 너무 둔감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연구논문 전체는 이상한 식으로 멘셰비키에 대한 볼셰비키의 견해를 차용한다. 볼셰비키처럼, 멘셰비키가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거부와 부르주아 개량주의의 수용 쪽으로 첫 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여긴다. 물론 울프 떼는 멘셰비키에게 성원을 보내고, 이들이 더 빨리 나아가기를 바라지만 말이다. 이들 책의 진정한 영웅은 멘셰비키가 아니라 경제주의자다. 이 말은 이스크라의 모든 적수들을 아우르는데 사용되었다(이에 따라 이스크라경제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 되기 쉬었다). 경제주의자는 진정한 민주주의자다. 즉 노동자의 삶을 진정으로 향상시키고 싶어 하고, 지식인의 보호에서 이들을 해방시키고 싶어 한 사람이 바로 경제주의자다. 이들은 멘셰비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노동자의 주도권이나 자주적 활동(samodeiatelnost’)을 억압할 당 독재의 발전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준비가 아직 심리적으로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강령과 전술의 엄격한 굴레를 노동자계급의 당에 씌우려 했다고 생각했다.

이스크라와 경제주의자의 투쟁 정말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 사이에서 많은 논쟁이 있었다 은 대부분이 사회민주주의에 따라(po-sotsial-demokraticheski) 활동한 사람이냐 그렇지 않으냐에 대한 논쟁이었다. 연구논문 전체는 이런 논쟁을 비판하고, 이런저런 분파의 정통성에 관해 판결을 내린다. 그러나 필자들은 당시 국제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가 거의 없다. 울프의 러시아와 유럽 사이의 강렬한 대조는 독일사민당을 그저 노동자의 바람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 철저히 수정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당으로 바꾸고 있다. 확실히 혁명적 사명감을 가지고 노동자를 충족(erfüllen)시키려고 노력한 당은 아니었다. 정통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화신인 카를 카우츠키는 레닌뿐만 아니라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일반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지만, 아키모프식으로 가끔 자신이 이단자임을 쉬쉬한 때를 빼면, 카우츠키는 관련 구절에서 눈에 띄지도 않는다.

연구논문 전체에서 사회민주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의 객관적 법칙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것과 같게 된다(다시 말하면, 대안 정식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숙명주의와 의지주의 사이의 긴장 때문에 분열한다). 활동가 당을 건설하고, 사회민주주의의 취지를 노동자들에게 정력적으로 설명하려는 레닌의 욕구(사회민주주의의 모든 것을 공유하겠다는 욕구)는 마르크스주의의 정신을 저해하는 행위이자,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의 낙관적 예측을 포기한 증거이다.

울프는 레닌이 노동자에 대한 지식인의 뿌리 깊은 경멸을 보여준다고 해석하지만, 이 젊은 필자들은 레닌이 노동자의 물질적인 개량주의를 대단히 우려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이들이 자기 시대의 좌익을 똑같은 방식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담 울람이 혁명의 가능성에 대한 레닌의 우려를 묘사한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러시아의 산업화가 느리지만 지속적으로 진전될 것이라고 본 레닌은 이것이 혁명적 열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 커다란 위험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따라서 불가피한 노동자의 혁명적 추진력 쇠퇴, 노동자의 노동조합적 사고방식, 예금통장, 지위 개선에 대한 기대감 습득은 처음부터 긴급히 요구되지 않은, 그래서 결국 비현실적이고 불필요한 혁명적 대응에 기를 쓰게 한다.

 

 

심비르스크 출신의 독단적인 시골뜨기가 세기의 전환점에서 국제 사회민주주의가 맞닥트린 주요한 위협이 대규모 호황을 낳는 자본주의의 능력이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런데 울람은 폴란드나 미국에 있는 이런 사람들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더 추론해보면, ‘자생성’(스티히노스치[stikhiinost’]의 적절한 번역으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진)에 대한 레닌의 태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자생성 대 통제에 대한 미국의 문화적 관심을 투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전후 미국의 문화는 무뚝뚝한 개인주의자와 조직 순응자, 비트족(Beats, 1950년대 물질문명에 반항한 미국의 젊은 세대 - 옮긴이), 체제 순응자 사이의 충돌에 매료되었다. 자생성과 통제 사이의 상호 작용은 즉흥 재즈, 행위 미술, 무작위 음악 같은 다양한 문화적 기획의 핵심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레닌이 자생성을 공격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대단히 당황스러운 것이다.

물론 연구논문 전체가 냉전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지만, 그 결론을 그저 정치적 보수주의의 표현으로 여기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연구논문 전체의 합의적 분위기는 부분적으로 필자들의 넓은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나온다(넓다는 것은 북미(北美)의 기준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실제로 틀을 세우는데 더 도움이 된 스펙트럼상의 왼편에 위치한 학자들은 좀 더 암시적인 것 같다. 울프 자신도 나중에 된 것처럼 1948년에는 결코 보수적이지 않았다. 연구논문 전체에서 베링턴 무어, 레오폴드 헤임슨, 헤르베르트 마르쿠제가 쓴 초기의 주요 저서들은 모두에게 좌익의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좌익은 레닌과 관계를 끊고, 그를 이단화하는 것으로 입장을 바꾸는 커다란 도박을 했다.

학계의 어떤 전문가가 울프의 틀을 중심으로 세워진 합의에 도전했는가? 내 조사에서 놀랄 만한 것 가운데 하나는 때때로 내가 조금도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등장한 시끄럽지 않지만 끈기 있는 반대경향의 발견이었다. 내가 이 반대경향에 주목하려고 애쓰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견해의 계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혁명을 만든 세 사람이 나오기 전인 1947년에 공산주의란 무엇인가?What is Communism?라는 제목이 붙은 존 플라메나츠(John Plamenatz)의 얇은 책이 출간되었다. 2기의 견해에 따라, 그는 레닌에 대한 설명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언급하지 않는다. 레닌의 견해에 대한 그의 묘사는 풍부한 인용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많은 독자들이 결코 레닌의 열렬한 지지자가 아닌 정통한 학자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레닌은 본래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의미에서 민주주의자였다. 그는 당내 민주주의를 믿었다. 또 러시아가 정치적으로 조직되고, 사회주의로 개종한 다수의 도시 노동자계급을 가진 산업국가가 될 때까지 당은 성공적인 혁명을 결코 수행할 수 없다고도 생각했다. 그는 고도로 훈련된, 투사들로 제한된 혁명정당을 건설하고 싶었지만, 이러한 당이 민주적으로 조직된 다수 노동자계급의 도움 없이도 사회주의를 수립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때문에 당이 대중에게 순수한 원칙을 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오점을 남겨서는 안 된다. , 대중이 영락없는 사회주의혁명을 주입받을 때까지만 말이다. 이것이 10월혁명 직전까지 그의 진정한 신념이었다. 그러나 기회가 주어지자 그는 이를 붙잡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몇 년 뒤, 플라메나츠는 (1953년에 끝낸) 독일의 마르크스주의와 러시아의 공산주의German Marxism and Russian Communism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상당히 자세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그는 직접 울프의 틀에 도전했다. “레닌은 노동자의 정치적 능력을 부정하거나,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을 추켜세우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이들이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임을 보여주고자 했을 따름이다.”

울프 떼의 해석에서 나타나는 한 가지 기이함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비관, 불안, ()노동자적 주장과 많은 평민 실무자에게 준 것으로 보이는 자극적인 효과 사이의 현저한 차이다. 1985년에 첫 출판된 상상력이 풍부한 해석에서 로버트 터커(Robert C. Tucker)무엇을 할 것인가의 고무적인 특성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을 제공했다.

 

레닌의 정치관을 그 총체성에서 이해하려면, 그가 마음의 눈으로 본 것은 자신이 말한 직업적 혁명가의 군사적 조직만이 아니라, 당이 지도한 전체 인민의대중운동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은 운동을 뒤따르는 훨씬 더 많은 대중의 교사이자 조직자 역할을 하는 의식적인 혁명가 전위인 당으로 집중되지만 단지 당의 꿈만은 결코 아니었다. 꿈은 짜르가 이끈 공식 러시아에 대항한 다수의 투사들처럼, 선전과 선동으로 떨쳐 일어선 반()국가적 대중의 러시아라는 비전이었다. ……

 

 

울프 떼와 같은 세대 사람들의 이런 도전에 젊은 학자들의 몇몇 의미심장한 논평을 더할 수 있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와 카우츠키의 몇 십 년에 걸친 상호 작용에 대한 독창적인 연구에서, 모이라 도널드는 무엇을 할 것인가노동자계급에 대한 신뢰의 위기, 혁명적 잠재력에 대한 의심의 산물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1996년의 중요한 글에서 헨리 라이히만은 세멘 이바노비치 카나치코프 같은 노동자 실무자는 반()지식인 기질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었을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주장한다. 더 최근에는 스탈린 전기를 쓴 로버트 힘머(Robert Himmer)가 젊은 주가시빌리의 눈을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살펴보고, 주가시빌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필자가 지식인에 대한 책의 적의라는 점에서 자신과 같은 하층계급 출신이라고 결론지은 것은 당연했다고 결론 내린다. 힘머의 논평은 그가 이 논평을 놀랍거나,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여긴 것 같지 않기 때문에 더욱 더 눈길을 끈다.

이처럼 중요한 문서에 대해 서로 아주 다른 두 견해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일종의 논쟁이나 상대방을 납득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그때에도 그 뒤에도 무엇을 할 것인가의 의도에 대한 학계의 논쟁이 확장되거나 하지 않았다. 교과서적 해석을 언뜻 그럴 듯하게 보이게 하는 인상적인 구절(자생성과의 싸움, 외부로부터의 의식, ‘내게 조직을 달라등과 같은)을 명백히 하는 일을 떠맡은 도전자도 없었다. 반대편의 울프 떼는 자신의 해석에 대한 존중할 만한 도전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날 견실한 반대경향의 존재는 뜻밖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스크라시기를 다룬 연구논문 전체나 통상적인 역사문헌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분석을 주장한 글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다.

물론 연구논문 전체의 필자들은 때때로 교과서적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는 원문 자료의 존재를 암묵적으로 인정하지만, 레닌의 무의식적인 이설(異說)과 이런 종류의 다른 생각들을 자주 언급하는 것으로 밑자리를 깔고 이런 자료를 그럭저럭 지나쳐버린다. 이런 스타일의 인상적인 주장을 알프레드 메이어의 레닌주의에서 볼 수 있다. 이 책의 주요한 메시지는 울프의 명제를 기준으로 삼는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현실의 영향 속에서 노동자계급 의식의 자생적 성장을 믿었다. 그런데 레닌은 노동자는 자신의 처지가 아무리 비참하더라도 영원히 미흡한 수준의 의식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메이어는 약간 불확실하다는 (무의식적인?) 생각을 했음에 틀림없다. 같은 쪽 각주에 인용된 글에는 이렇게 써 있다. “‘정통마르크스주의자로서, 레닌은 노동자가 자신의 계급의식을 상실했다(또는 애당초 계급의식을 가진 적이 없었다)는 수정주의의 명제를 부정했다. 그러나 레닌주의자로서, 그는 적어도 단기적인 제안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조금 더 뒤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가 대체로 노동자의 합리성을 부정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태도를 확고하게 견지하지는 않았다. 거꾸로 그는 여러 번 평소와 달리 노동자 의식에 대한 낙관적 평가로 탈선[!]하기도 했다.” 책의 끝쯤에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구절이 있다.

 

 

그런데도 가끔 레닌주의에는 내적인 불안, 뿌리 깊은 비관주의, 앞으로 노동자혁명의 기회가 있을지에 대한 무의식적인 또는 반()의식적인 의심을 드러내는 절망의 징조가 있다. 거의 의식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 비관주의는 결코 명백해진 적이 없다. 따라서 그 존재를 증명하는 데서 어려움을 겪는다. 한 가지 징후는 레닌주의자는 자신의 최종 목표의 필연적인 성공을 단언한다는 신념에 열광한 것이다. 심리적으로 이런 열광적 확신은 내적인 불안을 보상하고, 남모르는 의심을 가라앉히는 수단이다. 이렇게 혁명의 필연성에 대한 신념을 큰소리로 선포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이에 대립되는 십자군 같은 행동주의와 일치하게 된다.

 

 

이 점에서 메이어는 증거에 근거하여 접근한다. 만약 레닌이 혁명의 필연성에 대한 신념을 밝힌 것이라면, 레닌이 정말로 혁명의 필연성을 믿지 않았다는 것도 입증될 것이다. 그의 십자군 같은 행동주의는 한층 더한 그의 선천적인 비관주의의 논리적 표명이다.

동료 역사가의 더 매끈매끈한 설명과는 현저히 다른 메이어의 왜곡은 그의 평판을 높여 준다. 이들은 메이어가 원문의 문제를 충분히 파악하고 있으며, 불만족스럽더라도 이를 공개적으로 다룰 만큼 양심적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은 절대 일어나지 않은 논쟁의 필요성, 즉 이처럼 상충되는 해석을 낳은 원문의 증거를 평가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논쟁은 단지 울프의 틀이 지금 만끽하고 있는 의심의 여지없는 권위를 합법적으로 부여할 뿐이었다.

현재 울프의 해석이 누리고 있는 권위의 기본적 근거는 내가 이 글 구석구석에서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는 한 마디에 있다. 그것은 바로 교과서이다. 울프의 해석은 진정한 도전에도 거의 면역이 된 갖가지 종류의 교과서에 재빨리 숨었다. 이 과정의 이정표는 하버드 필자들의 공동저서인 정부의 모형Patterns of Government이라는 선구적인 정치학 교과서였다. 아담 울람은 소비에트 권력 모형의 기원이라는 장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소련식 행동의 단서가 된다는 교과서적 해석을 펼치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주장과 정취는 계속 소련체제의 가치와 신념에 고착했다. 이것들은 스탈린과 레닌의 선언에서처럼 흐루시초프(Khrushchev)의 선언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30~40년 동안에 정치학 입문과정을 거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울프의 해석을 자명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서너 구절을 틀림없이 읽어 보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조직적 무기에 의지하고 있는 조작에 능한 엘리트주의의 상은 확실히 현존하는 공산주의 세계의 실상에 어울리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존 플라메나츠나 로버트 터커는 레닌이나 볼셰비키주의의 생각과 전혀 다른 생각을 낳을 무엇을 할 것인가의 서너 구절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교과서가 집필되었을 때 협의하지 않았다. 그 결과, 교양 있는 대중은 레닌이 엘리트 비관주의자인 줄 알고 있으며’, 실제로 이런 레닌이 비관주의자라는 상은 마르크스주의의 의미, 전체주의의 뿌리 등과 같은 온갖 종류의 대규모 지식인 논쟁에서 그 역할을 수행했다. 지식인의 상당한 기득권은 약화되기 어려울, 아마 불가능할 레닌이 비관주의자라는 상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내가 제3기와 제4기의 구분선으로 1977년을 택한 것은 버트람 울프가 죽은 해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1977년에 전후 학계의 가장 광범위한 레닌 연구의 첫째 권이 출간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닐 하딩의 레닌의 정치사상Lenin’s Political Thought이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약간 어려운 문제에 직면한다 :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하딩의 견해는 그를 울프 떼에 위치 지우는가, 그렇지 않은가?

잘 알려진 것처럼, 하딩의 중심명제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전개된 레닌의 주장이 정통적이었다는 것이다. 요점은 이것이다 : 하딩의 명제는 레닌이나 정통파의 표준적 견해를 겨냥했는가? , 하딩은 레닌이 노동자의 무능력에 입각한 지식인 헤게모니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아니면 러시아의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또는 모든 마르크스주의자 일반)가 노동자의 무능력에 입각한 지식인 헤게모니에 찬성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하딩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장은 교과서적 해석에 어려움을 안기고, 이런 대안을 처음으로 강화시키는 통찰력 있는 의견이 많이 담겨있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하딩을 이해하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제2의 대안에 찬성론을 펴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이 결론의 기본적 근거는 하딩이 단순하게 사회민주주의자지식인과 동일시하고,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지식인의 혁명적 세균이 지도하는 강력한 당과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1904년의 팸플릿 전쟁을 다루면서 살펴본 것처럼, 이 동일시는 정확하게는 의문시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딩이 기본적으로 1904년의 논쟁을 도외시하고, ‘일보전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이후의 책에서 하딩은 자신의 주장을 이렇게 요약한다. “노동자계급의 불만을 조직하고, 분명하게 표현하며, 정치투쟁을 지도하는 데서 사회주의 지식인에게 배정된 특권적 역할은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레닌주의의 일탈이기는커녕 마르크스주의 전체의 오만에서 중심을 이룬다.”

울프의 틀은 양자택일적 대안을 강제한다. 즉 노동자는 지식인의 영구적인 후견을 필요로 했다는 오만한 가정이냐, 노동자의 현재 욕구를 반영하는 선에서 그친 민주적수동성이냐. 연구논문 전체는 이런 양자택일을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대 서구 마르크스주의, 이스크라대 경제주의자, 볼셰비키 대 멘셰비키처럼 다양한 수준에서 구체화했다. 명예롭게도, 하딩은 이런 대조의 타당성을 공격했지만, 근본적인 울프의 틀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이를 더 높은 수준에서 제기했을 뿐이다. 이제 완전히 새로운 양자택일적 대안이 우리에게 제기된다. 즉 그 범죄적사상과 함께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모든 표현을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으로 일체화시키는 것 대 정치적 예의.

 

4: 정체상태, 1977~2002

 

1977년이 지나고 나서 이스크라시기라는 주제의 시세는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상대적 무시의 이 시기는 내 다음이자 마지막 시기이다. 동업자들은 당연히 중심문제에 싫증이 났으며, 다른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무시의 근거는 낯익은 것인데, 나는 다음과 같은 지적을 제외하면,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 이데올로기와 이론에 대한 신중한 학술적 연구는 부분적으로 엘리트적이고, 포괄적이며, 사회적 사실(史實)과 정반대되는 점 등 때문에 거부되었다. 그러나 중심주제에 진절머리가 났기(난 것 같은) 때문에도 거부된 것이다. 젊은 학자들은 새로운 주제가 필요했다. 물론 역사학계에서 레닌의 전집을 읽기 위해 무시된 기록 문서를 접한 사람들은 승진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학계가 주제에 진절머리를 냈을 뿐만 아니라, 철저히, 그리고 충분히 다뤄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시기에 나온 가장 빼어난 저서, 보기를 들면, 로버트 서비스(Robert Service)의 전기는 그저 울프 떼의 변종 노릇을 했을 뿐이다. 1991년의 문서고 개방은 역설적으로 역사적 레닌 탐구에 별로 유리하지 않았다. 레닌이 비참하게 실패한 정치를 기획한 무시무시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이미 싹텄기 때문에 그의 정치적 견해를 검토하는 것 이를 기각하는 것과 대립되는 것으로서 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사실에 입각한 신중함이라는 무너지고 있는 기준과 결합된다(내가 레닌에 관한 신간 서적의 여러 평론에서 보여주려고 한 것처럼).

4기이자 마지막 시기를 덜 의기소침하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은 드미트리 안토노비치 볼코고노프(Dmitrii Antonovich Volkogonov), 파이프스, 서비스의 최근 저서를 살펴보면 분명해지는데, 그렇다고 두드러지게 진전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런 최근 저서의 대부분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교과서적 해석에 직접 도전하지 않는다(내가 반대경향을 검토하면서 일찍이 주목한 예외를 포함하여). 그럼에도 그 토대는 그 역사적 맥락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재고를 준비하는 것이다.

로버트 마이어가 쓴 일련의 최근 글은 이전보다 더 역사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의 이데올로기적 맥락을 고찰하고 있다. 마이어의 저서는 특히 그가 학구적으로 유포시킨 새로운 원자료를 담고 있어 귀중한 것이다.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교과서적 해석 자체는 건드리지 않지만, 표준적 설명의 다른 많은 관점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이후의 글에서 레닌은 많은 사람들이 그의 견해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즉 노동자는 자생적으로부르주아적이라는 주장을 다시 꺼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표준적 해석과 이 관찰을 일치시키기 위해 마이어는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직전에 노동자의 혁명적 잠재력에 대해 마음속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었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직후에 정반대 방향으로 다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중의 급변 가설은 많은 지지자를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진정한 어려움에 대처하려는 진지한 시도를 의미한다.

러시아의 노동자 역사에 관심이 있는 학자들은 이스크라시기에 대한 관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와 함께 읽을 영어책 한 권을 소개해야 한다면, 제정러시아의 급진적 노동자 : 세멘 이바노비치 카나치코프의 자서전A Radical Worker in Tsarist Russia: The Autobiography of Semen Ivanovich Kanatchikov일 것이다. 이 책의 편집자이자 번역자인 레지날드 젤닉의 서문은 사회민주주의 행동계획에서 중심이 되는 의식적인 노동자에 대한 본질적 분석을 제공한다. 젤닉 자신은 여전히 교과서적 해석에 충실하여, 이스크라와 볼셰비키주의를 지식인 헤게모니의 공공연한 옹호자로 묘사한다. 이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한다. 즉 카나치코프 같은 훌륭한 노동자가 볼셰비키 같은 분파에서 무엇을 한 것인가? 카나치코프는 회고록에서 볼셰비키가 구 이스크라의 전통에 가장 충실했기 때문에 주저 없이 볼셰비키를 택했다고 설명한다. 젤닉은 이 주장을 솔직하지 않은것이라고 기각한다.

지식인-노동자 관계의 문제는 1995년에 이를 주제로 개최된 러시아-서구의 학술회의를 포함하여 계속 학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페테르부르크의 한 경제주의자그룹을 상세하게 조사한 제럴드 서(Gerald Surh)의 논문은 오히려 무엇을 할 것인가연구가 중요하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를테면, 서는 경제주의자들을 노동자 민주주의자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갈 핼핀은 지식인 문제를 글자 그대로 보편적인 지점으로까지 끌어올린다. 이 모든 연구와 같은 정도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연구가 레닌의 견해나 소련사를 이해하는 데서 지식인 문제의 중요성에 대한 과대평가를 강화시킨다는 점이다. 나는 이 점이 걱정스럽다.

4기 중에 멘셰비키나 볼셰비키의 전전(戰前) 당사를 다룬 논문은 거의 추가되지 않았지만, 사회혁명당이나 자유주의자들을 이해하는 데서 실질적인 진전이 있었다. 이 정당들에 대한 보다 충분한 이해는 멘셰비키-볼셰비키 분열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준다. 실제로 멘셰비키-볼셰비키 분열 자체는 자생성에 대한 레닌의 태도에 집중하기보다 이스크라가 혁명운동 전체에서 사회민주주의의 헤게모니를 주장한 것, 즉 다른 정당들과 이스크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면, 더 잘 이해될 것이다. 정당의 역사는 그 이후 시기에 초점을 맞출 때조차도 무엇을 할 것인가연구를 위해 가치가 있다. 나는 특히 19172월 혁명의 자생성이라고들 말하는 것에 대한 마이클 멜란콘(Michael Melancon)의 최근 소론을 주목한다. 멜란콘은 지도부의 지하활동 방식에 대한 정치적 분석을 위하여 사회적 사실(史實)인 노동자의 견해, 즉 새로운 전망이 절실하게 필요했다는 문제를 청산한다.

레닌과 그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 동료들은 주로 토대와 상부구조, 역사의 필연성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오히려 강력하고 권위 있는 정치운동에 더욱 고무되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러시아 역사의 전문가가 수행한 연구로 이해하는 것이 유용한 것과 꼭 같이, 마르크스주의, 사민당, 사회민주주의 일반에 대한 영어권의 연구는 이제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유용하다. 이런 연구의 필자들은 대개 레닌과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해하기 위한 독자적인 연구의 급진적 함의를 알지 못한다. 이런 연구의 크나큰 공헌은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울프 틀의 이분법이 친 개념적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소련학계로 되돌아가 지금까지의 개관을 마무리해보자. 소련의 맥락에서 제3기와 4기의 더 나은 경계 시기는 아마도 레닌 탄생 100주년이자 레닌학의 동요 조짐이 나타난 1970년일 것이다. 역사가들은 스탈린 다음다음 시기에나 새로운 원자료, 특히 <이스크라> 편집부와 러시아의 대리인들이 주고받은 세 권짜리 서신문의 광범위한 이용을 허락받을지도 모른다. <이스크라> 시기의 중요하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측면에 대한 많은 구체적인 사례 연구는 소련의 마지막 20년 사이에 제출되었다. 잘 알려진 제약 - 특히 역사적 서술에서 불편한 개인들을 과묵한 사람(figura molchaniia)이라고 수정한 - 속에서 연구되었더라도 이 시기의 가장 뛰어난 연구는 확실히 같은 주제에 대한 서구의 연구논문과의 비교에 시달리지 않은 전문가의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소련 역사가들의 (두 가지 의미에서) 최종적인 의견은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타르놉스키(Konstantin Nikolaevich Tarnovskii)의 연구논문인 혁명가의 사상, 혁명가의 대의Revoliutsionnaia mysl, revoliutsionnoe delo(1983)이다. 이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의 역사적 맥락에 대해 가장 잘 알 수 있는 책이다. 바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서술의 돌쩌귀로 이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르놉스키의 주제는 1902년 초에 무엇을 할 것인가가 출간되었다는 것 하나를 제외하고는 그 다양한 측면 모두에서 <이스크라> 시기 전체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절에서 타르놉스키는 새로운 유형의 당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가 볼셰비키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놓았다는 오랜 주장을 되풀이하지만, 이 토대는 사회주의와 노동자운동의 통합인 것으로 판명되었다(카우츠키는 다시 한번 신용을 얻지 못하고 만다). 타르놉스키 분석의 진짜 요지는 무엇을 할 것인가가 당시의 실천적 요구에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운동을 창시한 것이 아니라, 그 풍조를 구체화한 것이다. 레닌은 새로운 철학을 발표한 것이 아니라, 일련의 실천적 - 따라서 시간에 매인 - 제안을 제시한 것이다. 레닌의 견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의역이 출간된 시기를 고려하면, 특별한 관심을 끈다 : ‘완전한 개방, 모든 당료들의 선출, 보편적 통제 - 이러한 것은 [당내에서] 민주주의 원칙의 실현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전제주의 국가에서 이를 충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마지막 시기에 소련 연구는 서구 학계에 약간의 충격도 주지 못했다. 여전히 스탈린주의적 왜곡을 부인하는 기존의 태도를 고수했으며, ‘새로운 유형의 당이라는 사고틀에 대한 충성도 동요되지 않았다. 소련의 몰락 이후, 러시아 역사가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재고하는 것보다 더 긴급한 임무를 지니고 <이스크라> 시기에 관심을 가졌다. 왜냐하면 갖가지 다른 백색반점(斑點)을 메워야 했기 때문이다. 마르토프와 플레하노프의 새로운 전기가 출판되었으며, 다수의 귀중한 비()볼셰비키 분파와 정당들의 1차적 원자료집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경우에 따라서, 교과서는 결국 울프의 틀을 용인하게 될 뿐인 당의 기존 노선을 벗어나기도 했다. 고르바초프(Gorbachev)와 소련 이후 시대에 레닌을 둘러싼 정론(政論, Publitsistika) 논쟁은 그의 집권기간이나 개인적인 도덕적 자질에 초점이 맞춰진 반면에, 창립문서로 추정되는 그의 저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이런 상대적 배제는 미국의 지식인들이 레닌이 지식인에게 권력을 맡기고 싶어 했기 때문에 그를 몹시 싫어하는 반면에, 러시아의 지식인들이 그가 지식인을 권력에서 배제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그를 몹시 싫어한다는 역설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전망

이스크라를 다룬 연구논문 전체 중 가장 뛰어난 저작물들(내가 보기에는 로버트 다니엘스와 사뮤엘 바론의 기여이다)은 정말로 인상적인 업적이다. 그럼에도 정통한 해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꼭 필요한 사전준비를 다 끝내지도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상황은 기본적으로 선구적인 연구논문 전체 필자들의 잘못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이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과서적 해석의 권위를 고려하면, 이스크라를 다룬 연구논문 전체는 세 가지 중대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 결함은 원자료의 한정된 범위이다. 아키모프의 영역본이 가진 고독한 화려함은 레닌의 동료나 적 모두를 포함하여 다른 의견의 부재를 두드러지게 할 뿐이다. 한 가지 실례만 들어보자 : ‘무엇을 할 것인가의 논쟁 대부분은 19019월에 발간된 라보체예 델로지 기사를 겨냥하고 있다. 어느 문헌에도 논쟁 중인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설명조차 찾아볼 수 없다. 둘째 결함은 2차 문헌에는 도대체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즉 이는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의 핵심이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였다는 사람들을 연구할 때 드러나는 결정적 약점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은 1910년의 삭제 정정된 요약본으로만 카우츠키의 에르푸르트 강령』 ― 사회민주주의가 정의되어 있는 러시아 활동가들에게 적합한 책 을 영어로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이자 정말로 치명적인 결함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해석이 논쟁의 소지가 있다거나, 의문의 여지가 있다는 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속적인 학구적 토론이나 논쟁이 없다. 이런 지배적인 태도를 이갈 핼핀은 최근에 이렇게 표현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1902)에 대한 피상적인 검토조차 보편적인 의식의 매개물은 노동자계급이 아니라 부르주아 지식인이라는 것이 레닌의 견해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조차으로 대체해야 하지 않을까?

성실한 학구적 토론이 전무한 이런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간단하다고 답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학계는 친()레닌으로 여길 수 없다. 따라서 교정할 만한 왜곡이 있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막대는 한쪽 방향으로만 구부릴 수 있다. 이는 할 드레이퍼(Hal Draper)가 제시한 답이다. 드레이퍼는 당연히 자신이 레닌연구자들’(Leninologists)이라고 부른 사람들은 그저 레닌의 쉽게 접할 수 있는 저작들에 광범위한 원문 증거가 존재함을 거부할 뿐이라며 노여워한다. 덜 심란한 설명은 간단하게 대단히 복잡한 소련 역사에 견주어 학계의 자원이 한정되어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실제적 파산은 이처럼 도전적인 문제가 충분한 조사나 성실한 논쟁도 없이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 결과, 1920년대 말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번역한 영국의 공산주의자 조 파인버그(Joe Fineberg)가 제시한 것은 교과서적 해석에 결정적 선택권을 부여했다. 파인버그는 학자들이 자생성(스티히노스치와는 약간 스칠 정도의 관계가 있을 뿐인 말)에 대한 레닌의 태도를 논점으로 삼도록, 스치히노스치(stikhiinost’)자생성으로 옮겼다. 우리는 1950년대와 60년대의 영리한 졸업생 가운데 활동적인 그룹이 볼셰비키주의가 지닌 의미에 대해 최종 발언을 제시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또한 스탈린주의 슬로건, 새로운 유형의 당을 기꺼이 교과서의 지위로 격상시켰다. 정말로 처벌 받아 마땅한 일이다.

실제로 학문적 발전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판단은 약간 갑작스런 충격을 받았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특정 쟁점에 대해 나는 속성과정이 스탈린 이후의 공식 역사문헌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소련의 가장 우수한 연구논문이 영미의 가장 우수한 연구논문보다 월등히 뛰어나며, 사악한 냉전 시절의 학계가 세련되고 기록에 입각한 1990년대의 학계보다 월등히 뛰어나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이런 고집불통의 체계가 격리되기를 바라고 기원한다.

몇몇 필요한 논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며, 나의 (아직 나오지 않은 충분한 답변을 조건부로) 독자적 연구에서 드러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상을 간략히 제시하겠다. 내 해석이 굉장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런저런 쟁점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긴 하지만, 나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주가시빌리와 포트레소프, 1920년대의 안내서(소라트니키, soratniki), 플라메나츠와 터커에 견주어 보면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실무자에 대한 격려로 보는 것이 가장 제격이다. 중간 휴식시간이 지난 뒤, 팀은 코치가 탈의실에서 충고한 대로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즉 자, 얘들아, 정말 엉망진창이구나! 난 너희들이 그것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걸 알아 난 너희들이 기적을 이룰 수 있다는 걸 안다! 자세를 약간 바로 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크게 생각해, 이길 수 있어! 우린 이 경기를 패하면 안 돼, 좋아 이제 나가서 너희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

결국 무엇을 할 것인가의 핵심 문장은 이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현실성을 자랑한다. 그런데 당신은 혁명적 대의의 기적이 서클뿐만 아니라 한 개인에 의해서도 달성될 수 있다는 것(러시아의 실무자 모두에게 알려져 있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레닌의 실제적인 제안들(광범위한 정치선동의 수행, 지하활동 역량의 제고, 모두가 바라는 진정한 전국조직 건설의 도구로서 이스크라의 활용)은 실무자에게 이런 기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과 수단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적인 제안 밑에는 변함없는 명령이 있다. 크게 생각하라!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질책의 핵심적 표현은 편협성이다.

이런 격려는 노동자와 그 혁명 추진력에 대한 가정에 어떤 활력을 불어넣는가? 레닌은 지지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잘못은 노동자, 소중한 실무자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 노동자를 가리키는 것을 통해 당신의 비적극성을 변명하지 마라. 최근, 노동자는 혼자 힘으로 파업에 나섰으며, 학생을 옹호했다 반면에, 당신들은 둘러앉아 에구구, 노동자가 정치적 슬로건을 이해하겠느냐?”며 공연한 근심을 하고 있었다. 메시지를 전하고, 유효한 조직적 틀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 할 일이다. 그런 뒤라야 아마도 노동자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레닌은 만약 실무자가 아무 일도 안하고, 참담한 상황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단지 자신의 목적은 노동자의 행동을 책임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노동자운동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비참한 묘사를 한다. 또한 혁명적 지식인이 노동자의 혁명적 잠재력과 전제정권 하에서 진정한 대중운동의 가능성을 신뢰하지 않으면, 테러리즘에 대한 무엇을 할 것인가의 논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비참한 묘사를 한다.

실제로 교과서적 해석은 무엇을 할 것인가의 취지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이는 1차적 독자들에게 보내는 것이었지만, 레닌이 연단을 두드리다가 즉석에서 만든 약간 일반적인 제안도 포함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일반적 제안도 미움을 산 것이다. 노동자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레닌은 노동자를 깊이 신뢰 노동자에 대해서라기보다는 레닌이 노동자는 잘못되거나 호도될 수 없다고 생각했음을 의미할지도 모르는 한다. 다만, 노동자가 (정확히 제시되었다면) 메시지에 응답할 것이고, 자신의 위대한 역사적 사명을 완수할 것이라는 신념이었다. “혁명적 계급을 식별해내는 것은 물론이고, 이들의 피할 수 없고 무효화할 수 없는 기본적인(stikhiinyi) 자각을 입증한 것뿐만 아니라, 노동자 서클에 숭고하고 당당한 정치적 임무를 제시한 것에서도 플레하노프는 천배나 옳다.”

이런 태도는 단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와 맞지 않을 뿐이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이론과 실천은 노동자가 열정적으로 응답할 것이라는 자신만만한 기대 속에서 노동자의 위대한 사명에 대한 희소식을 선전하는데 집중되었다. 노동자의 계급이해에 관해 확고한 견해를 가진 것이 오만이라면, 사회민주주의는 정말로 오만했다. 그러나 당시의 거의 다른 경쟁적인 사회주의 경향에 비해 마르크스가 불어넣은 사회민주주의의 눈에 띄는 특징은 노동자는 그 실현 이전에 자신의 계급이해를 이해할 수 있고, 또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것으로부터 정치적 자유의 쟁취라는 긴급한 과제가 제기되었다. 이 과제는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에게 결정적인 것이었으며, 이스크라에게는 한층 더 결정적인 것이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고무적인 목적에 도움이 된 러시아의 혁명적 전통을 아주 적게 일반적으로 언급하는 것과는 현저히 다르게,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레닌의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보여준다. 그에 따라 레닌의 전반적인 혁명전술은 서구 모델에 기초를 두고 있다. 전제주의의 상황에서 가능한 한 사민당을 꼭 닮은 당을 건설하자. 짜르를 타도하고, 정치적 자유를 획득할 수 있도록 우리는 더욱 사민당 같은 당을 만들어야 한다! 인민주의자 페트르 니키티치 트카체프(Petr Nikitich Tkachev, 울프 떼의 사랑을 받은 인물)에게서 영감을 받기는커녕, ‘무엇을 할 것인가는 트카체프의 중심점 가운데 하나를 논파하는 쪽의 책이다. 트카체프는 혁명가는 짜르의 억압을 받는 대중에게 결코 선전할 수 없고, 이러한 시도는 진정한 혁명가의 행동을 피하기 위한 비겁한 핑계일 것이라고 되풀이하여 주장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당의 역사에서 꽤 중요한 문서이다. 말하자면, 1896년의 선동에 대하여On Agitation와 비슷하다. 이 두 팸플릿은 변화가 필요하고, 따라서 변화를 촉진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일반적인 인식을 구체화했다. 그러나 무엇을 할 것인가는 결코 창립문서로 불릴 수 없다. 그 지배적인 가정은 폭넓게 공유된 것이었다. 레닌도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쓰기 훨씬 전에 받아들인 가정이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레닌의 이스크라시기의 견해를 전부 다루지도 않는다. 정치전술의 골치 아픈 문제들 농민이나 자유주의자들과의 관계 에 대한 그의 답변은 틀림없이 다른 글들에서 발견될 것이다. 조직문제(통상 추정되는 것보다 그에게 훨씬 덜 중심적인 주제)에 대한 레닌의 견해도 다른 곳에서 더 잘 다루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이미 설립된 당을 체계화하는 방법에 관한 제안이 아니라, 러시아당을 설립하는 방법에 관한 제안이다.

교과서적 해석은 그 뒤 레닌이 나머지 생애에서 내린 중대한 결정을 이해하기 힘들게 만드는 레닌 상()을 빚어낸다(‘두 명의 레닌에 대한 광범위한 주문은 이런 모순된 생각에 대한 반응이다). 연구논문 전체는 소련의 역사와 문화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볼셰비키주의의 기원을 조사했다. 노동자에 대한 신뢰 부족과 지식인의 헤게모니를 볼셰비키주의의 핵심으로 단정함으로써, 지식인에 대한 적대와 노동자의 타고난 행동 경향에 도취된 소련 문화를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 뿐이다.

나는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결말에서 외친 말을 인용함으로써 이 소론을 끝맺고자 한다. 즉 제3기를 청산하자! 3기 중에 소비에트 러시아와 서구 모두에서 새로운 유형의 당이라는 교과서적 해석을 청산하려는 움직임이 생겼다. 1기와 2기의 관계자 증언으로 돌아가자. 4기의 새로운 연구를 활용하자. 3기의 반대경향을 더 진지하게 다루자. 그리고 울프에 고무된 연구논문 전체에서도 발견되는 의심과 망설임에 더 신중히 귀 기울이자.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의 역설은 책이 받고 있는 엄청난 주목이 가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책에 엄청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의 성과가 부정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맥락에 집중하는 것으로 얻는 커다란 부가적 이득은 그 맥락을 알게 되는 것이다. 역사적 레닌의 탐구는 이제 시작된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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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김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