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레닌의 『국가와 혁명』과 소비에트 국가의 폭력: 텍스트 분석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12월호

레닌의 『국가와 혁명』과 소비에트 국가의 폭력: 텍스트 분석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6. 09:26

레닌의 국가와 혁명과 소비에트 국가의 폭력: 텍스트 분석

 

제임스 라이언  

 

 

191710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기 직전에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1918년에 국가와 혁명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팸플릿을 쓰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 저작은 레닌의 정치사상을 연구하는 역사가나 그의 전기 작가들에게 미스터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의 전집을 메운 수많은 글들이 주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기관지에 당장 싣기 위한 짧은 기사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영역본으로 100쪽에 달하는 국가와 혁명은 그 필자가 이 책에 특별한 의미를 준 것 같다. 실제로 레닌은 이 책이 현재의 요구를 넘어 노동자혁명에서 국가의 성격과 역할에 대해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그와 함께 좀 더 확실히 말하면, 전 세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지침을 제공하는 마르크스주의 문헌에 이론적으로 이바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은 러시아에서 다가오는 노동자혁명의 실제적 타당성과 관련이 있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레닌은 팸플릿을 쓰고 있을 때 이미 이러한 혁명이 곧 닥쳐올 것임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이 글의 목적은 레닌이 통치한 시기의 소비에트 러시아를 특징짓는 폭력과 테러에 대해 국가와 혁명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치적 폭력의 사용과 관련해서 혁명의 실제가 국가와 혁명의 내용을 거스른 것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에 답변하는 것이다. 역사가들은 전통적으로 이 저작을 유토피아적비현실적현실과 조화되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 좀 더 냉소적인 경향의 역사가들은 원문의 주장과 그 이후 소비에트 권력의 이력 사이의 격차 속에서 이 저작을 레닌의 부정직함을 드러내주는 증거로 본다. 그러나 원문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테러에 대한 명시적 공언이나 부정을 찾는 정도의 피상적 독해로는 충분하지 않다. 원문의 함의와 가정은 표면으로 끄집어내야 한다. 더욱이 국가와 혁명은 소비에트 권력의 실제와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레닌이 집권한 시기의 이력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태도의 이론적 근거는 아래에서 제시될 것이다. 레닌이 쓴 전체 글 가운데서 국가와 혁명은 노동자혁명의 경로를 상술하려는 가장 구체적인 시도였으며, 레닌주의라고 평가되고 이해되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책이기도 하다. 로드니 바필드(Rodney Barfield)가 설명했듯이, 이 책은 인간에 대한 근본적 철학, 인간성에 대한 그의 내적 확신, 더 인간적인 세상을 위한 그의 이상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다른 어떤 책보다도 레닌에게 이론과 실천이 뗄레야 뗄 수 없게 결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지적 능력이 상당하긴 했지만, 레닌의 세계관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 따라 확고히 결정되었다는 점도 보여준다. 명료한 문체로 쓴 이 책은 그 주장도 분명하다. 따라서 마땅히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가장 영향을 끼친 책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나는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주장한 것처럼, ‘노동자계급의 독재개념이 대개 생각한 것처럼 소비에트 러시아 초기에 나타난 폭력적억압적 독재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 점에서 이 글은 레닌을 노동자국가의 폭력이라는 개념이 어느 정도 모호하긴 했지만 그래도 폭력은 혁명뿐만 아니라 완전한 공산주의의 창출을 도울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복잡한 이론가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와 혁명이 제시하는 미래 사회주의 사회의 조직화에 대한 비현실적 비전은 완전히 거부되지 않는다. 책에서는 유토피아적 사고의 요소가 매우 많이 눈에 띈다. 그러나 레닌은 집권하면 분명히 맞닥뜨릴 임무의 어려움을 한 번도 부정한 적이 없었다. 원문의 마지막 서문이 기록된 19181217에서 3개월 뒤, 정부의 두 포고령은 레닌 생전에 시도된 적색 테러의 개막을 알렸다. 기근과 살인이 농촌을 휩쓸고, 산업 중심지에서는 철의 규율이 촉구되던 시기에 이 팸플릿이 작성되었다. 러시아가 반()이상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으며, 레닌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는 레닌이 1918년에 책을 독일어로 번역한 목적은 1918년 초에 제헌의회를 해산시키기로 한 볼셰비키의 결정에 동조한 외국의 지도자를 위해서였다고 주장한다. , 원문을 읽었다면 볼셰비키 민주주의가 부르주아민주주의보다 더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임을 이해할 것이라는 가정 하에 말이다. 그러나 국가와 혁명이 실제로 1918년에 레닌이 처방한 문제에 대한 치유책인지에 대해서도 문제가 제기되어야 한다. 왜 레닌은 혁명 이후에도 원문에 조그만 수정(그러나 중요한 삽입구를 보게 될 것이다)도 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레닌의 사상 속에 존재하는 근본적 이중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이중성은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 특히 레닌이 고수한 변증법적 세계관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마르셀 리브만(Marcel Liebman)은 레닌이 변증법이라는 무기를 어떤 부관들보다도 더 능숙하게썼다고 주장한다. 이 이중성은 이상적인 인간사회, 즉 공산주의를 이루기 위해 인류는 매우 잔혹한 시기를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 폭력을 통해 평화를 만들어내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국가와 혁명의 취지는 여전히 전 세계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남긴 레닌의 유산으로 남아있다. 즉 그것은 설사 그 길에 예기치 않은 장애물이 놓였을지라도, 노동자계급의 지배 아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또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미래상이다. 이것은 국가와 혁명1917년과 전혀 다른 시기를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한 순간에 지침으로 사용될 예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책이 완성되기 전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태가 일어났던 것이다. 레닌은 초판 후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191710월 혁명 전야의 정치적 위기 때문에 방해를 받았다.’ 이러한 방해는 환영을 받을 수밖에 없다. …… 혁명을 경험하는 것이 그에 대해 쓰는 것보다 더 즐겁고 유익하다.” 이 점에서 주된 관심사는 원문에서 폭력을 옹호하는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인 것 모두를 검토하는 것이다. 이 글은 국가와 혁명에 대한 기존 해석을 논평하는 것에서 시작할 것이다. 그 다음에 레닌이 같은 시기에 쓴 다른 글과 함께, 원문 자체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제시할 것이다. 이 글의 기본적 주장은 특별히 독창적이지 않으며 최근의, 그리고 그렇게 최근은 아니더라도 레닌과 그의 사상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삼아 이끌어낸 것이다. 그러나 폭력에 대한 저작의 함의에 특별히 주목한 것과 저작에 대한 면밀한 원문 분석은 이제까지 본 적이 없다.

 

 

역사문헌과 그에 대한 논평

 

레닌이 쓴 모든 글 가운데서 국가와 혁명보다 역사가와 정치학자들의 주목을 받은 글도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1902)를 예외로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레닌의 정치사상을 연구한 예컨대, 닐 하딩(Neil Harding) 같은 역사가는 국가와 혁명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하딩의 경우, 그의 기념비적 저서인 두 권짜리 레닌의 정치사상(Lenin’s Political Thought, 1977, 1981)에서 많은 장()에 걸쳐 국가와 혁명을 다루고 있다. 박사학위 논문인 레닌과 정치의 목적(Lenin and the End of Politics, 1984)을 출판한 폴란(A. J. Polan)은 레닌의 인간 지상주의가 국가와 혁명의 감독에 입각해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하딩과 폴란 모두 정확히 말하면, 역사가라기보다는 정치학자로 간주된다. 이와 비슷한 정도로 국가와 혁명에 중점을 두는 역사가는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즉 역사가들이 볼셰비키 체제의 이론적 토대에 주목하는 것은 확실하지만, 이들은 보통 정치 철학자나 정치학자들에 비해 실천에 대해 저작이 함의하는 바의 전모를 검토하기를 꺼린다. 이들은 경험적 역사의 더욱 굳건한 토대에 머물기를 더 좋아한다. 이에 반해서, 정치학자나 철학자들은 실제로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 이상을 원문에서 살펴보려는경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그러나 역사가들은 레닌의 혁명 이전 글들을 범죄시하기도 한다). 따라서 폭력적, 억압적 소비에트 국가체제는 지적, 이데올로기적 진공상태에서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을 근본적인 가정으로 받아들이면서, 소비에트 국가의 폭력에 대한 혁명 이전의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신중하고 체계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레닌과 그의 지지자들은 어떻게 하면 실제로 혁명을 발전시킬 수 있는지 완전히 파악할 수도 없었다는 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폴란은 국가와 혁명에 대해 가장 강력한 비판을 가한다. 레닌과 정치의 목적에서 그는 자신이 레닌의 정치사상의 반()민주적, ()인도적, 권위주의적 본질로 간주한 것을 밝혔다. 실제로 폴란의 책은 노동자계급의 독재 같은 원문의 더 부정적인 측면을 검토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놀랍다. 다만, 장점은 대개 원문의 자유의지론적 특징을 소개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책 제목의 정치의 목적을 레닌과 볼셰비키가 일반적으로 고수한 (권력)장악으로 해석하여 폴란의 명제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볼셰비키당의 보편적 의지가 소비에트 사회를 세울 수 있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고, 혁명의 결과 구 부르주아 국가기구가 분쇄되었다면, 소비에트연방의 근로인민은 당연히 당의 비전을 따를 것이다. 이 틀 내에서 당 노선에 대한 어떤 반대도 반()혁명 음모로 간주될 것이다. 따라서 범죄자는 인민의 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정치는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없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독자적인 생각이나 당 노선으로부터 조그만 일탈도 보편적 의지의 지시대로 허용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폴란은 레닌의 인간 철학이 진짜 인본주의라기보다는 실제로는 삭막하고 모욕적인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정말로 폴란에 따르면, (나름의 방식으로) 단번에 인본주의자가 된 레닌의 능력과 그를 진짜 독특한정치인으로 만든 것은 무자비한 혁명이었다.

폴란의 책은 국가와 혁명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몇 가지 결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저작에 대한 실제적 언급이 국가와 혁명연구에서 중심을 이루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저작에서 실제적으로 인용한 것이 의외로 아주 적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레닌과 정치의 목적은 그 대상에 대한 진짜 원문 분석이 아니다. 둘째로, 폴란은 원문을 소비에트 권력과 이어주는 것은 근본적으로 볼셰비키 문화, 즉 다른 용어를 쓰자면, 볼셰비키 담론이라고 내비치면서 볼셰비키 문화의 중요성에 상당히 중점을 둔다. 이런 개념은 타당하고 여전히 유용하지만, 국가와 혁명에서 표현된 레닌의 견해가 노골적으로 궁리한 것이거나 신념 또는 원칙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 글은 레닌이 대개 국가와 혁명을 쓰면서 주장한 바와 폭력 문제에 관한 볼셰비키 담론이 주로(결코 배타적이지는 않더라도) 의식적으로 고수한 신념이 차지했으며, 또 이를 통해 수행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문화적 전제에 대해서 주창자는 거의 의식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혁명에서 당의 지도적 역할 같은 어느 정도 문화적인 전제는 원문에 가시화되어 있는 것이 확실하다. 설사 원문에서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주장의 논리 때문에 중요한 위치를 부여받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글은 레닌의 저작(그리고 사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과 그 이후 소비에트 국가의 폭력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는 데서 중요한 볼셰비키와 마르크스주의자 일반이 공유한 중요한 전제를 언급할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가 윤리적으로 토대하고 있는 중요한 전제이다. 셋째로, 폴란은 소비에트연방의 이후 역사를 통해서만 국가와 혁명이 성구(聖句)로서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주장과 함께 흥미로운 방법론적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접근에 따르는 위험은 필자가 의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어떤 의미를 원문의 뜻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원문의 함의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특히 국가와 혁명같은 원문을 검토하려면, 글을 쓴 당시의 필자의 마음 상태와 더 넓은 그 역사적 의미의 문맥 모두를 짚어내야 한다. 폴란의 방법론이 암시하는 위험은 10월 혁명 직전에 레닌의 실제 의도가 원문의 발표 이후 전개된 사태에 의해 빛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 글은 라스 리의 방법론적 전제를 따를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최근의 책에서 리는 필자를 모순되거나 솔직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특히 필자가 아주 다른 시기에 쓴 글이라면, 해석은 처음이 아니라 마지막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리는 명시적으로 레닌은 자신의 신념을 확신하고, 자기 견해의 근본적 일관성을 유지했다고 밝힌다.

닐 하딩의 선구적인 책 레닌의 정치사상은 레닌 사상에 대해 균형 잡히고 학구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또한 레닌이 마르크스주의 창시자, 특히 초기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운동에서 흡수한 지적 유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최근 저서인 레닌주의(Leninism, 1996)에서 그는 자신의 초기 명제를 발전시켜, 레닌주의는 실제로 마르크스와 엥겔스 저작의 합법적 후계자가 되었다고 더욱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는 그 적지 않은 장점과 약점은 모두 거의 전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신화적 레닌에 대하여 현실적이라고 상정된, 부적당한 부분이 제거된 마르크스를 대립시키는 것을 비판한다. 국가와 혁명에 관하여 그는 러시아의 당면한 정세를 위해 작성된 것이라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 속에 존재한 사회를 조직하는 국가적 방식과 꼬뮌적 방식에 대해 다른 설명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1871년 빠리꼬뮌에 깊은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는 초기에 노동자혁명의 통치형태라는데 동의한 노동자계급의 독재개념을 분명히 포기했다. 노동자계급의 독재 개념은 용어의 엄밀한 의미에서 국가는 아닌 꼬뮌에 비해 국가적방식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엥겔스는 이 둘을 동등하게 생각했으며, 하딩은 레닌이 두 개념을 융화시키는 임무를 방치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의 중요성은 어떤 점에서 테러로 빠져든것인지에 대한 하딩의 논평인 레닌주의에 더 명확히 설명되어 있다. 혁명이 시작될 때 국가에 대한 레닌의 견해는 꼬뮌형이었다. 이곳에서는 강압이 필요 없을 것이고, 사회적 조화가 위계질서의 불협화음과 부르주아 국가의 분열을 대체할 것이었다. 그러나 1918년 이후 객관적 상황이 바뀌자, 레닌과 볼셰비키는 마르크스주의의 다른 유산, 노동자계급의 독재에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의지했다. 노동자계급의 독재는 노동자계급과 빈농이 통제하는 강압적 국가기구를 전제로 했다.

역사가들은 대체로 국가와 혁명의 중요성에 대한 자극적인 해석을 그다지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1970년대 초부터 국가와 혁명에 관한 수정주의적사고방식이 나타났다. 로드니 바필드는 원문이 레닌의 사상에서 이상주의가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주는 증거지만, 소비에트 권력의 실제와 분리되면, 레닌주의의 진정한 저작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레닌의 이데올로기 체계 전체에 있어서 이상주의가 필수적임을 드러낸 저작이라는 것이다. 비록 바필드가 국가와 혁명이 유토피아적 저서라는 (당시의) 정통파 명제에 도전하진 않지만, 그는 국가와 혁명을 일탈이라고 기각하기보다는 레닌의 견해에 있어서 필수적 부분으로 배치하기 때문에 어쩌면 수정주의자로 분류될지도 모른다. 바필드의 분석이 아주 제한적이긴 하지만, 국가와 혁명에 대한 진짜 수정주의적해석은 1987슬라빅 리뷰(Slavic Review)에 실린 글에서 알프레드 에반스(Alfred Evans)가 제시했다. 에반스는 소비에트 연구자들이 국가와 혁명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레닌은 책 속에서지만 규율과 위계질서를 거부하지 않은 채, 마르크스가 수행한 것처럼, 이전 부르주아 국가의 많은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공산주의의 낮은단계와 높은단계를 구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 역사가들은 원문의 역사적 중요성에 대한 더 많은 이해를 제공했다. 이는 원문에 대한 역사가들의 해석에 대한 폴란의 비판을 상쇄하는 데 일부 도움이 되었다. 1984년에 나온 폴란의 비판은 그 이후 소비에트연방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에서 국가와 혁명의 내력을 파악할 수 있는 경우에만, 책은 어떤 의미를 포함한 역사를 가질 것이다라는 자신의 신념에 집중했다. 2000년에 출판된 한 권짜리 레닌 전기에서 로버트 서비스(Robert Service)국가와 혁명을 레닌의 대표작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그는 레닌이 책에서 테러에 대한 검토를 피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서비스는 레닌에게 솔직하지 않다는 죄를 씌우는 데 일조한다. 그러나 서비스는 레닌이 노동자계급의 독재가 폭력적 성향의 독재일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서비스는 원문이 시민의 자유에 반대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레닌과 볼셰비키는 대체로 계급투쟁의 최종적 결과로 내전을 준비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책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끝맺는다. 가장 최근인 2005년에 레닌 전기를 쓴 크리스토퍼 리드(Christopher Read)국가와 혁명은 아마 당 노선으로부터 조그만 일탈도 사람들이 부르주아 사고의 굴레에서 아직까지 자유롭지 않다는 증거로 레닌에 의해 해석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담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는 레닌이 잠재의식적일지라도 러시아정교회로부터 흡수한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리드는 국가와 혁명과 이후 소비에트 국가권력 사이에 격차가 있음을 받아들인다. 베릴 윌리엄스(Beryl Williams)는 최근 서구의 다른 어느 전기 작가보다 레닌과 폭력 사이의 관계에 중점을 둔다. 그녀는 국가와 혁명이 유토피아적 문서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녀는 레닌의 사상 속에 존재한 이중성과 당과 계급 사이의 이해와 견해의 일치에 관한 중요한 유토피아적 이상주의 요소를 받아들인다. 레닌은 급진적 자유의지론과 권위주의 모두를 주창했다. 따라서 권력에 대한 항의에 직면하자마자, 권위주의에 중점을 둔 것은 당연했다. 2001년에 쓴 글에서 제임스 화이트는 저작의 경제적 내용에 초점을 맞추면서, 국가와 혁명의 내용과 그 이후 소비에트 독재의 폭력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고 이해한다. 실제로 그는 국가와 혁명1918년까지 출판되지 않았다. 국가와 혁명은 볼셰비키혁명의 성격을 결정하는 데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지만, 혁명이 어떻게 인식되어야 하는지에 영향을 미치는 데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이 글은 소비에트연방의 이후 역사의 맥락에서 원문의 역사적의미를 강조하는 이런 해석에 근거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의 의도는 폴란이 관심을 가진 점 외에도 저작의 , 독재와 더 명시적으로 관련된 단점에 대한 더 구체적인 분석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바로 이런 점은 저작을 다룬 문헌에서 훨씬 더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와 관련하여, 폭력과 테러에 대한 명시적 공언이나 부정을 찾는 정도의 피상적 독해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는커녕, 원문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함의와 가정이 검토되어야 한다. 국가와 혁명의 레닌과 적색 테러와 전시공산주의의 레닌이 융화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 글의 주장이다. 이 경우, 본질적으로 전통적인 선한레닌과 나쁜레닌 사이의 상반된 이중성을 다시 부과하지 않기 때문에 설명에 도움이 되는 틀이 만들어진다. 이 틀은 아마도 이 이중성이 레닌의 사상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임을 더 정확히 이해하도록 할 것이다. 이렇게 국가와 혁명은 레닌주의의 결정적 선언이며, 1917년 말부터 내전기간 내내 소비에트 대중에게 가해진 인간적 삶의 파괴의 근원을 포함하고 있다.

 

 

국가와 혁명분석

 

이 부분에서는 저작의 폭력에 대한 함의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임은 물론 1917년 볼셰비키가 권력 장악에 이르는 시기에 쓴 레닌의 다른 글과 함께 국가와 혁명의 내용을 더 면밀하게 살펴볼 것이다. 앞부분에서 언급한 책들 가운데 원문에 담겨있는 폭력에 대한 언급을 깊이 있게 다룬 책은 하나도 없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로버트 서비스는 레닌이 다가오는 테러통치의 징후를 보이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이를 옹호하기 위해 레닌이 쓴 프라우다기사를 인용한다. “20세기의 자코뱅은 자본가를 단두대에 세우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적절한 본보기를 따르는 것은 그것을 똑같이 흉내 내는 것이 아니다.” 이 시기에 노동자혁명에서 폭력과 특히 테러의 사용을 배제하는 듯한 레닌은 이와 다른 주장도 한다. 또 한편으로는, 혁명을 촉진할 수단으로 테러에 일관되게 반대했으며, 대신에 사회주의를 성취하는 데서 그 역사적 역할을 위해 대중을 조직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러나 이것은 레닌이 정치적 폭력 자체에 반대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레닌이 이런 말에 솔직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레닌이 피에 굶주렸으며, 자신의 적과 혁명의 적들을 전멸시키고 억압할 기회를 고대했다고 생각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게다가 레닌이 평화로운 혁명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이 글의 주장은 당시의 더 이론적인 글에서 레닌이 실제로 혁명의 적들에 대한 폭력과 심지어 테러를 주창했다는 것이다. 정말로 레닌이 혁명 직전에 테러통치를 예상했든 아니든, 그와 볼셰비키는 적어도 이러한 만일의 사태에 대한 이론적 정당화를 준비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점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은 레닌은 사실상, 비폭력적인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진실로 예상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레닌의 활력은 1917년 늦여름과 가을에 최고조였다. 볼셰비키는 주요한 도시의 소비에트에서 대다수의 지지를 얻었으며, 인민의 혁명적 열정에 직면한 레닌은 틀림없이 혁명을 이루는 임무가 과거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쉽고, 어찌되었건, 자본가계급에 대한 혁명인 프랑스대혁명보다 훨씬 더 쉽고, 피는 덜 흘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20세기 초의 러시아혁명은 과거 인류역사에서 이룬 그 어떤 것도 못 넘어설 사태가 되었다. 국가와 혁명과 같은 시기에 작성된 볼셰비키는 국가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가?(Can the Bolsheviks Retain State Power?)에서 레닌은 볼셰비키가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필요한 근본적 전제조건을 밝혔으며, 이런 조건이 현재 러시아에 존재함을 보여주었다. 첫 번째 전제조건은 볼셰비키가 소비에트에서 다수파가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것은 레닌이 볼셰비키혁명은 합법적일 것이며, 성공적인 노동자혁명은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실행에 옮길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믿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러나 국가와 혁명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원문이 이제까지 유토피아적이라거나 레닌의 다른 저작과 격을 달리한다고 생각되었던 것이 이상한 것 같다. 원문의 취지는 당시에 쓴 레닌의 다른 글에도 들어있는 것이다. 기존의 국가권력을 분쇄하고, 이를 새로운 국가로 대체할 필요성, ‘자유로운 인민의 국가라는 변조된 부르주아 개념에 대립되는 진정한 인민의 국가, 이런 말은 레닌에 따르면, 단지 만인의 평등한 권리에 대한 입에 발린 소리일 뿐, 실제로는 사회의 최약자층을 지속적으로 억압하기 위한 도구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국가에서는 이래라저래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그렇기는커녕 모든 사람이 사회의 이익을 위해 일할 것이다. ‘인민 의용군은 반()혁명가와 파괴 공작원을 억압하기 위해 전체 인민의 기구로 구성될 것이다. 선출된 모든 공무원은 노동자가 받는 임금을 넘지 않을 것이며, 언제라도 소환될 수 있다. 미래사회의 이런 양상은 아마도 이후 소비에트 역사와 비교해 볼 때,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에 대한 책임을 레닌에게로 향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원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구절들에 지나지 않으며, 원문 전체의 맥락 속에서 읽어야만 한다. 저작은 모호한 표현과 분명한 모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레닌주의의 가장 결정적 진술인 저작은 다른 어떤 것보다 레닌의 사상 속에 존재한 이중성’, 즉 선과 악의 변증법적 융화를 폭로한 책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알프레드 에반스가 지적한 것처럼) 공산주의의 낮은단계와 높은단계 사이의 구분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레닌이 비록 노동자혁명 직후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일이 없어질 것이라는 견해를 보이고는 있지만, 사회와 경제의 전 부문에 대한 지속적인 통제의 중요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레닌의 주장은 구 국가기구를 제거하고,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이끌기 위해서는 폭력혁명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억압받는 계급의 해방은 폭력혁명 없이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이 만들었으며, 이런 (노동자계급의) ‘소외를 구체화하고 있는 국가권력 기구의 파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는 레닌의 독재주의에 대한 분명한 진술이다. 즉 폭력적 노동자혁명과 자본가계급의 지배에 대한 조용한 묵인 사이에 중도노선은 있을 수 없다. 레닌에 따르면, 역사는 마지막 투쟁이 막 일어난 단계에 이르렀다. 이 투쟁은 자본가계급을 대신해 사회의 최하층, 가장 억압 받은 사람들, 가장 소외된사람들을 처음으로 권력에 올려놓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선언에서 규정한 정통적 신념의 범위를 완전히 넘어서지 않는다. 빈농과 동맹한 (농민과의 동맹은 레닌이 마르크스주의를 러시아 상황에 맞게 적용한 본보기였다)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고통과 억압을 뚫고 억압자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 것이며, 자신의 투쟁으로 인류를 구출할 것이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 사이에는 특이한 유사점이 있다. 존 플라메나츠도 이렇게 지적했다: ‘(마르크스)는 독단가일 뿐이다. 그는 주로 성서를 모방하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설득력 있는 어형(語形)에 의존한다.’ 실제로 마르크스주의의 종교적 뉘앙스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아르노 마이어(Arno Mayer)는 정치테러는 대개 일종의 종교적 열정과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 ‘정치가 가짜 종교가 된다면, 또는 유토피아가 실현된 것으로 신호하거나 강요한다면, 테러는 문득 정치를 떠올리게 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동기에서 레닌이 직접적으로 테러를 지시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에 무관심한 것이지만,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의 거의 구세주 같은 열정은 확실히 인과적 요인인 것 같다. 개별적인 인간은 억압, 갈등, 소외의 최종적 파괴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넘겨버린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궁극적 목표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가 실현될 때까지 사회가 타락시킨 인간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역사발전 과정의 도구로 간주되기 일쑤다. 게다가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에 따르면, 개별적 인간의 본질은 각각의 개체 속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그 현실 속에서 인간은 사회관계의 총체(總體)이다.’ 바꿔 말하면, 인간은 그/그녀의 삶 속에서 사회보다 크지 않으며, 이 사회를 통해 스스로를 규정한다. 마르크스가 비록 혁명의 발전에서 개인들의 중요성을 믿기는 했지만, 사회의 집단성은 개인들의 안녕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진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 사회를 필연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자에게는 진실한 도덕성의 궁극적 명령이다. 이런 견해에 대한 레닌의 처방도 국가와 혁명에서 보게 될 것이다.

닐 하딩이 지적한 것처럼,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의 태도를 명확히 하려고 한 사람은 엥겔스였다. 1980년에 발표한 글에서, 하딩은 국가와 혁명에 나타난 레닌의 견해가 니콜라이 부하린(Nikolai Bukharin)의 견해에 끼친 영향을 다뤘다. 부하린은 볼셰비키당내에서 레닌의 가까운 동료였으며, 재능 있는 이론가였다. 레닌은 나중에 부하린의 글 제국주의 국가론에 대하여’(Towards a Theory of the Imperialist State)의 취지를 받아들였다. 이 글은 노동자혁명을 위해 기존 제국주의 국가기구를 간편하게 활용하기보다는 기존 국가를 분쇄하고, 이를 노동자 자치의 직접민주주의로 대체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레닌이 성향에서 (무정부주의자에 비해) 진짜 마르크스주의자인 부하린의 간곡한 권고를 처음에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더라도, 부하린의 견해는 레닌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그는 곧 젊은 지지자에 동의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레닌에 호소한 부하린의 견해는 극좌적이었으며, 하딩은 부하린이 지금의 무시무시한 전망은 올바른 인간존재의 서임자(敍任者)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임무의 자멸, 그 영웅적, 전투적 역할의 절멸에서 [제국주의 국가의 영향을 받아] 나왔다고 생각했다고 지적한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은 현존하는 제국주의 체제에 흡수 동화되고, 그 혁명주의는 무뎌졌다.’ 결국 레닌은 남은 생애를 걸고 싸웠으며, 이러한 우려야말로 1903년 제2차 당 대회에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나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분열을 대부분 설명해준다.

그렇다면, 레닌은 노동자국가를 어떻게 규정했는가?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엥겔스를 광범하게 인용했다. 엥겔스는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한 뒤 존재할 국가형태에 대해 언급하면서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다. 국가는 사멸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가는 더 이상 종속되어 있어야 하는 사회계급이 없을때까지 계속 존재할 것이며, 따라서 노동자국가일 때에도 이전의 모든 국가들처럼, ‘특수한 억압권력일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국가는 노동자혁명의 제1차적 행위로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레닌은 대신할 것의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았다. 그는 국가 또는 준()국가를 언급했다. 닐 하딩이 꼬뮌적 조직방식과 노동자계급의 독재 사이의 차이점에 중점을 둔 것은 국가와 혁명, 그리고 이후의 소비에트의 실제에 대한 검토와 매우 관련이 있는 듯하다. 국가와 혁명전체에 걸쳐 레닌은 노동자계급의 독재개념으로 되돌아갔으며, 아주 단언적으로 계급투쟁에 대한 인정을 노동자계급의 독재에 대한 인정으로 확장하는 사람만이 마르크스주의자다라고 밝혔다. 저작에서 이 부분(23)191812월에 추가된 - 혁명 이후 원문의 유일한 수정 부분 - 것이며, 본격적인 내전이 진행 중이었고, 볼셰비키에게 강력한 국가기구가 필요한 것처럼 보였을 때 작성되었다. 또한 이 부분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갈라지는 역사적 시기 전체 , 노동자계급의 독재라는 역사적 시기 전체일 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1871년 빠리꼬뮌 경험을 다룬 장에서도 레닌은 단지 마르크스가 꼬뮌을 노동자혁명이 마침내 발견한노동자의 경제적 해방이 이루어질 수 있는 형태로 제기했다고 주장할 뿐이다. 레닌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1871년 경험은 구 국가를 대체해야 하는 것에 대한 근본적 재평가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노동자의 꼬뮌적 사회 조직방식은 단지 마르크스가 1871년 이전에 알 수 없었던 것을 명확히 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레닌은 꼬뮌과 노동자계급의 독재에 대한 엥겔스의 융화를 받아들였다. 이 속에 레닌의 주장에서 모호한 부분이 대부분 존재한다. 더구나 10월 혁명 이후, 레닌은 용어의 진정한 의미에서 국가를 통솔하고 있었다. 그것도 단지 시민 울랴노프가 아니라 이 국가의 지도자로서 말이다. 191811월에 쓴 노동자혁명과 배반자 카우츠키(The Proletarian Revolution and the Renegade Kautsky)에서 레닌은 노동자계급만이 소비에트 국가를 창출한다. 이 국가는 빠리꼬뮌 이후 사회주의 국가를 향한 제2()라고 밝혔다. 이런 노선의 의의는 의미론 또는 마르크스주의 이론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이론은 항상 실천과 떼려야 뗄 수 없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는 특히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흐에 대한 테제에서 가장 뚜렷하게 강조한 것이기도 했다. 레닌도 이론은 잿빛이지만 살아있는 것은 푸른빛이다라는 뜻의 괴테의 말을 인용하면서, 실천의 절대적 중요성을 신봉했다. 국가와 혁명에서 분명한 것은 국가라는 말이 어떤 다른 함의를 수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와 혁명에 따르면, 국가는 특수한 권력조직이며, 어떤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폭력조직이다.’ 게다가 레닌은 1847년에 마르크스가 노동자국가와 이를 지배계급으로 조직된(글쓴이의 강조) 노동자계급으로 규정했다고 언급했다.조직된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의 중앙집중주의와 규율을 시사한다.

따라서 국가는 노동자계급이 행사하는 강압 또는 억압의 도구여야 했다.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즉 첫째, 누구에 대한 강압인가? 둘째, 레닌이 무슨 뜻으로 강압억압을 말했는가? 첫 번째 의문에 레닌은 단정적인 대답을 제시한다. “당연히 착취하는 계급, 즉 자본가계급일 뿐이다.” 두 번째 의문에 대해 레닌은 약간 모호했다. 그는 억압을 단지 착취하는 계급이 시민사회에 참여할 권리나 투표할 권리를 부정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노동자국가가 을 쓰는 것이 반드시 폭력을 의미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폭력을 옹호하기도 했다. 우선, 그는 계급투쟁의 평화로운 해결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이러한 만일의 사태를 예상한 사람들 모두, 특히 카우츠키를 비판했다. 이들은 혁명이론의 내용을 강탈하고, 그 혁명적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며, 속류화시킨다고 비난을 받았다. 게다가 국가 일반에 대해 말하면서, ‘국가의 존재는 계급 대립이 화해할 수 없는 것임을 입증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의미한 것은 노동자계급의 독재 아래에서도 여전히 필요할 (그러나 즉시 사멸하기 시작할) 국가는 비()노동자계급의 파멸, 하나의 계급으로서 자본가계급을 전멸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의 존재야말로 사회주의 사회와 양립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중요한 의문은 이들 계급이 어떻게 파멸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19189월에 한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의 말은 이 의문에 대한 극단적 대답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1억 명의 소비에트 인구 중에서 9천만 명은 우리와 함께 갈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 할 말이 없다. 이들은 전멸되어야 한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하나의 계급으로서 자본가계급을 전멸시킬 방법 문제에 대한 1917년 레닌의 해결책이다. 국가와 혁명에서 노동자국가의 이행 형태는 새로운 방식의 민주적 [노동자계급과 무산자 일반을 위한] 국가이자, 새로운 방식의 독재적 [자본가계급에 대한] 국가였다.

실제로 레닌은 민주주의 자체를 노동자계급의 독재와 마찬가지인 것으로, 따라서 민주주의는 국가의 사멸과 함께 대체될 것으로 생각했음을 국가와 혁명에서 분명히 했다.

 

 

민주주의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을 인정하는 국가, 즉 한 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해, 주민의 일부가 다른 일부에 대해 체계적으로 폭력을 사용하기 위한 조직이다. 우리는 국가를 지양하는 것, 즉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모든 폭력, 인민 일반에 대한 모든 폭력 사용을 지양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다. 우리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 원칙을 지키지 않아도 될 사회체제가 등장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글쓴이의 강조) 그러나 사회주의를 위해 노력하는 속에서 우리는 공산주의로 발전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인민 일반에 대한 폭력의 필요성,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복종할 필요성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이 구절에서 레닌은 국가에 기대고 있는 민주주의는 계급독재의 표현일 뿐이며, 체계적인 폭력의 지배와 소수에 대한 강압조직으로 규정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레닌이 말하고자 한 것은 노동자계급의 민주적 지배는 민주적 독재(그가 민주주의는 특수한 계급이 국가를 지배할 권리의 표현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레닌에게 이는 용어상의 모순이 아니었다) 형태로 행사될 것이라는 점이다. 위 문장에서 강조 처리한 것은 표면상의 모호함 때문이다. 이는 레닌이 노동자국가에 반항하려는 소수(착취하는 계급)에게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원문의 다른 말은 물론이고, 실제로 저작의 보편적 정신과도 상반될 것이다. 첫째, 레닌은 불가피하고 필사적인 자본가계급의 저항을 언급했다. 이러한 필사적 저항이 가까웠다면, 레닌이 실제로 자신이 권력을 잡을 때 한 것처럼, 이러한 계급분자들에 대해 가장 심각한 테러를 주창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한 가지 사례를 들자면, 백군이 내전 중에 코사크가 점령한 우랄지역의 구리예프(Guriev, 현 아티라우Atyrau)라는 시의 석유 비축시설을 위협하자, 레닌은 지역의 적군 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구리예프의 석유를 장악할 방법을 별도로 대단히 신중하게 검토하라. 이것은 명령이다. 만약 이들이 구리예프의 석유에 불을 지른다면, 모든 코사크를 마지막 한 사람까지 모조리 없애버릴 것이라는 협박과 매수 두 가지 방법을 다 사용하라.(글쓴이의 강조)” 둘째, 레닌은 마르크스가 노동자들이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조직적인 폭력(글쓴이의 강조), 자본가계급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한 국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제안에 반대했다고 주장했다. 셋째, 1871년의 빠리꼬뮌에 대해 논하면서 레닌은 빠리꼬뮌 지지자들의 패배의 한 원인이 된 요인은 이들이 자본가계급의 저항을 충분히 단호하게 분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라며 엥겔스에 동의했다. 실제로 엥겔스는 권위에 대하여(1872)에서 테러를 노동자계급의 자기보존을 위해 필요한 수단으로 옹호했다. 다시 말하면, 권위주의적 국가를 옹호했다. 이 인용문은 국가와 혁명에서 찬성을 표하고 있기 때문에, 상세히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신사양반들은 혁명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인가? 혁명은 확실히 존재하는 가장 권위적인 것이다. , 혁명은 인구의 일부가 모두 대단히 권위주의적 수단인 소총, 총검, 대포로 다른 일부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승리한 쪽은 자신의 무기가 반동들에게 불러일으키는 공포를 통해 그 지배를 유지해야 한다.(글쓴이의 강조) 빠리꼬뮌이 무장한 인민의 권위를 이용하여 자본가계급에 맞서지 않았다면, 단 하루라도 견딜 수 있었겠는가? 반대로 꼬뮌이 그 권위를 너무 적게 이용했다고 꾸짖어야 하지 않을까?

 

 

위에서 눈에 띄는 것은 레닌이 노동자계급의 독재와 꼬뮌적 국가 형태 경험을 융화시키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와 무관하게 착취하는 계급의 투표권을 박탈하는 것만이 아니라 폭력과 테러로 이 계급을 억압할 필요성을 믿은 그는 노동자국가형태를 예상했다. 또한 위 인용문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엥겔스가 반동의 테러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이러한 반항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서 테러를 옹호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레닌이 위에서 강조된 문장을 통해 의도했을 가능성이 큰 것은 동료 사회주의자들에게 소수는 다수에 종속될 것이고, 노동자계급과 대등한, ‘민주적인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키려고 작정했다는 점이다. 이 말은 또한 노동자 민주주의는 노동자 독재 개념과 동떨어진 것이었다고 생각한 카를 카우츠키를 겨냥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의 중요한 주제인 레닌 사상의 이중성은 여기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 그는 모든 폭력, 모든 억압을 종식시키고, 인간생활의 불가침성을 실행에 옮길 사회를 위해 노력하지만, 이 사회는 폭력적 노동자계급 독재를 통해 확보될 것이며, 이런 식으로 획득될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독재와 꼬뮌적 통치 형태를 융화시키려는 레닌의 시도를 더 면밀히 살펴볼 차례다. 그리고 레닌이 피착취 계급 자신에 대한 폭력 캠페인의 이론적 토대를 놓은 놀랍도록 권위주의적인 주장을 내놓았음을 발견할 것이다.

 

* * *

 

레닌이 비록 착취하는 계급만 억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을지라도, 노동자계급 자신은 국가의 최종적 지양까지 자유롭게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모든 계급과 불평등의 제거를 필요로 한다. 부르주아 국가의 기능은 사회주의 아래에서 주민 대다수, 나중에는 개개인 모두의 식견과 능력 내에서간단한 통제와 회계절차로 바뀔 것이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첫 단계에는 어느 정도의 불평등이 남아있을 것이고, 심지어 자본가계급 없이!, 부르주아 법률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도 한동안남아있을 것이다. 레닌은 여기서 부르주아 국가와 부르주아 법률이 사실상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공산주의의 낮은단계와 높은단계 사이의 차이를 강조했으며, 완전한 공산주의는 아직은 현재와 굉장히 동떨어져 있었다. ‘국가의 불가피한 사멸장기간에 걸친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생산수단이 개별 자본가들의 수중에 집중되는 것과 달리 사회화됨에 따라 착취가 종식될 것이었다. 그러나 레닌은 아주 단언적으로 국가가 존재하는 한, 자유는 없다. 자유가 있다면 국가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것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다.

 

 

공산주의의 높은단계에 이를 때까지,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의 수입과 소비 정도에 대한 사회와 국가의 엄격한 통제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 통제는 지본가에 대한 노동자 통제의 수립과 함께 자본가에 대한 수탈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따라서 관료들의 국가가 아니라 무장한 노동자들의 국가에 의해서 수행되어야 한다.

 

여기서 의도한 것은 국가와 혁명의 다른 곳에서 더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레닌은 무장한 노동자들의 국가권력이 지지하는 엄격하고, 강철 같은 규율에 대해 말했으며, 이 규율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 대해 행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어쨌든 우리는 공상적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우리는 당장이라도 일체의 행정이나 복종 없이 지낼 수 있다고 꿈에도 생각지않는다.’ 때문에 지금처럼, 복종, 통제, “십장과 회계원없이 지낼 수 없는 사람들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바라기때문이다. 여기서 레닌이 의도한 것은 이 강철 같은 규율이 노동자계급 자신에게로 확대되어야 하며, 모든 사람이 노동자국가의 통제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본가를 패배시키고, 착취자를 타도한 뒤(글쓴이의 강조), 노동자계급이 사회 전체로 확대시킬 이 공장규율은 결코 우리의 궁극적 이상이나 목표가 아니다.“

따라서 노동자 대중은 당의 지도를 받아야 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기 거의 219171014일에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의 기관지 이즈베스치야는 군사혁명위원회(MRC)의 창설을 보도했다. 이 기구는 소비에트 비밀경찰인 체카(Cheka)의 전조로 간주될 수 있다. 명부에 올라있는 군사혁명위원회의 당면한 임무가운데에는 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 대중과 병사들 사이에서 혁명적 규율을 유지하는 것이 들어 있었다. 노동자들은 거의 군대의 보병으로 간주되었다. 궁극적 목표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강압이나 이래라 저래라 하는 일 없이 보편적 이익을 위해 일하는 법을 배울 - 배우는 데 거의 익숙해진 - 때 이루어질 것이다.

한편, 모든 사람은 통제를 받아야 했으며,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필연적으로 이에 따라야 했다. ‘사회 전체에 걸친 노동자계급의 통제 확대는 상당한 중앙집중주의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권력을 노동자국가 기구에 맡긴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노동자계급 자신에게 맡겨졌다. 실제로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은 중앙집중주의가 자발적일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을 공격하면서 자발적인 중앙집중주의, 즉 다양한 지역적 꼬뮌들이 스스로 국가 전체로 모든 자원을 이전시킬 것이고, 따라서 중앙집중주의 원칙에 대한 어떠한 타협도 사회주의와 양립할 수 없을 것이라는 믿음을 밝히면서 반()연방주의를 명백히 했다. 이 점에서 소비에트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레닌의 견해는 완전히 비현실적이고, 실제로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이러한 비현실적 견해는 임시정부의 부르주아 정당들에 더 많은 국가권력이 분배될수록, 피억압 계급의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그 화해할 수 없는 적개심이 더 민감해진다는 그의 신념에서도 나타났다. 이런 문장에 포함된 것은 다시 한 번 국가와 혁명에 대한 정통명제에 동의하는 사람들에게 레닌의 유토피아적 이상주의를 증명한다. 그러나 이 글의 주장은 이러한 진술이 실제로 레닌의 사상에서 유토피아적 이상주의가 중요한 요소임을 증명하는 것일지라도, 정반대의 함의를 동시에 가진 진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낮은단계 중에 노동자계급에 대한 국가와 혁명의 진정한 정서는 사회 전체로 통제를 확대시키는 것에 대한 레닌의 말 직후의 문장에 들어 있다. 이것[규율의 확대]은 자본주의적 착취의 모든 파렴치하고 혐오스러운 행위를 사회로부터 완전 일소하고, 한층 더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단계일 뿐이다.’ 여기서 기독교와의 유사성이 다시 한 번 뚜렷이 드러난다. 즉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는 연옥(煉獄)에 상당하는 것이었다. 이 연옥(煉獄)에서는 하느님을 영접할 수 있기 때문에 불결한 자는 그 죄가 사해질 것이었다.

레닌에 따르면, 이것의 중요성은 노동자계급이 여전히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사회의 잔재에 물들어 있으며, 그 본래의 사회주의적 열망도 아직 잠재되어있기 때문이다. 레닌 주장의 논리를 발전시키면, 노동자계급은 자신이 세운 소비에트 국가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슬에서 빠진 고리는 노동자계급의 전위인 공산당이었다. 공산당은 노동자계급 스스로를 감독하고, 그 목표인 완전한 공산주의 사회의 달성을 보장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가와 혁명전체에 걸쳐 아주 순진하게 추정되고 있는 것은 노동자계급이 그 이해가 당에 의해 제공되며, 따라서 자진해서사회주의를 실현하고 마침내 당의 지도 아래 공산주의를 이룰 것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의 함의는 노동자계급의 구성원이거나 그룹이라면, 실제로 피착취 인민 전체는 볼셰비키가 이해한역사 발전에 어떠한 저항을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권력을 장악하자, 볼셰비키는 노동자의 저항을 분쇄하는 데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 경우의 가장 극적인 사례는 1921년에 일어난 크론슈타트 반란이다. 혁명의 발전은 노동자계급의 어떠한 반항에도 중단되어서는 안 되었다. 레닌은 노동자혁명을 공고히 하기 위해 내전을 벌였지만, 이때 일어난 노동자의 저항을 대개 반()혁명의 일부로 간주하고, 따라서 억압을 필요로 한다고 인식했다. 레닌이 국가와 혁명을 쓸 당시에 이러한 만일의 사태를 예상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와 혁명의 정신은 오랜 부르주아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기구의 억압으로부터 인류의 해방을 최고의 도덕적 기준으로 삼았다. 레닌은 노동자계급이 인류의 해방을 위해 피억압 인민을 지도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지만, 궁극적으로 노동자계급과 특히 빈농은 이런 필연적인 역사발전에 저항할 권리가 없다는 신념을 마르크스와 공유했다. 실제로 소비에트 체제 첫 해에 레닌이 인민의 대중적, 자발적 주도권을 사실상 당의 지도, 통제, 규율로 대체시켰다면, 피착취 계급의 역사적 목표가 불필요하게 되었다는 주장은 논쟁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레닌은 전체 주민이 사회주의를 창출하는 데서 해야 할 필수적인 역할을 계속해서 믿었다. 정말로 그는 계속 계급투쟁에 관계함으로써 볼셰비키 정책을 정당화했다. 따라서 그의 계속된 신념은 국가와 혁명과 관련이 있다. 레닌이 노동자를 역사발전의 소모적 도구로 보았다는 주장은 유데니치 장군의 백군에 대한 적군의 공격에 관해 리브니(Livny)의 볼셰비키와 나눈 통신문의 충격적인 말 때문인지도 모른다 :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를 대략 2만 명 정도밖에 동원할 수 없다. 여기에 더해 1만 명 정도의 부르주아를 동원할 수 있을 것이다. 공격이 개시되면, 이들 뒤에 기관총을 배치하고, 몇 백 명을 사살하라. 그러면 유데니치에 대한 정말 커다란 압박이 될 것이다.’

국가를 지도하는 데서 당이 할 역할이 국가와 혁명에서 생략된 것이 분명했다. 즉 엄격한 당-국가가 없다면 레닌의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구 부르주아 사회의 잔재가 여전히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 의식의 순수성을 더럽히고, 이렇게 탄압 받은 인민이 아직까지 혁명에서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면, 국가를 통제할 당과 인민을 지도할 국가는 당연히 요구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비록 국가와 혁명이 이후 소비에트의 실제에 비해 다소 유토피아적으로 보일지라도, 저작에서 명시적으로 주장하지 않은 포괄적인 당-국가를 고려하면, 이러한 기구의 존재는 레닌이 이를 의식했든 아니든 간에, 원문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일 것 같다. 결국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당-국가의 지배를 위한 토대를 놓은 것이다.

 

 

같은 시기의 레닌의 사상

 

이 시기의 레닌의 다른 글과 비교하여 국가와 혁명은 국가의 폭력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레닌이 1905년에도 거대한 역사적 문제는 무력으로만 해결될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투쟁에서 무력조직은 군사조직을 의미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191610월에 쓴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의 분열(Imperialism and the Split in Socialism)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일부가 따르고 있으며, 사회애국주의자와 기회주의자가 추종할 것이 무엇인지 -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 예측할 수 없다. 이는 투쟁으로만 밝혀질 것이다. 이는 분명히 사회주의 혁명에 의해서만 결정될 것이다.’ 이런 말의 배경을 이룬 것은 부르주아 정당과 사회주의의 변절자’(, 1차 세계대전 중에 자국의 전쟁수행 노력을 지지한 사회애국주의자)들이 노동자계급 전체에 행사하는 영향력에 대한 검토였다. 비록 레닌이 소수의 노동자가 이런 식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했지만, 그는 이런 사람들이 진짜 대중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레닌은 노동자계급 대오 내에서 일어날 배신의 - 사실은 필연성 - 가능성에 대해 볼셰비키를 대비시켰다. 그러나 그 근거는 언제나 레닌의 사상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계급의식이 높은 노동자층에 초점을 맞췄으며, 이들이 차례로 근로인민의 다른 부위로 사회민주주의 의식을 퍼 날랐다.

그러나 1916년 가을에 레닌은 노동자혁명의 전쟁 강령(The War Programme of the Proletarian Revolution)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노동자국가의 폭력을 더욱 명시적으로 옹호했다. 국가와 혁명1년 전에 작성된 이 글의 목적은 전쟁이라는 생각 자체에 대한 반대와 무장해제를 촉구하는 일부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의 최근 경향이 올바르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레닌은 전쟁이 사회주의의 성취를 위해 필요한 것임을 분명히 한 다음에 이렇게 밝혔다.

 

 

내전 또한 전쟁이다. 계급투쟁을 인정하는 사람은 누구든 내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계급사회에서 내전은 계급투쟁의 자연스러운, 따라서 일정한 조건에서는 불가피한 연속이자 발전이며 격화이다. 내전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극단적 기회주의로 빠지거나 사회주의 혁명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가장 의미심장하고, 레닌의 혁명적 철학 - 특히 소비에트연방의 이후 역사와 관련하여 - 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말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구절일 것이다.

 

사회적인목사와 기회주의자들은 언제나 미래의 평화로운 사회주의를 꿈꿀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이 이 아름다운 미래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격렬한 계급투쟁과 계급전쟁을 생각하고 불러일으키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야말로 이들과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구별하는 것이다.

 

 

이것은 레닌 사상의 변증법적 이중성에 대한 결정적인 진술이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만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목적은 수단을 통해서, 폭력적 내전을 통해서만 달성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레닌의 글, 특히 국가와 혁명선과 악의 융합, 아직 명백하지 않은 미래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비전을 포함하고 있으며, 거꾸로 국가와 혁명에서 표현된 것처럼, ‘전례 없이 예리한 형태의 전례 없이 격렬한 계급투쟁을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국가와 혁명은 변증법을 따르는 레닌의 인본주의적 비전에 대해 말하는 것일 수 있다 : , 이 경우에 격렬하고 치열한 내전은 그 부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레닌은 1917929일자 라보치이 뿌찌(Rabochii put’, 노동자의 길)에 실린 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 ‘모든 권력이 소비에트로 이전된다면’, 혁명의 평화로운 발전이 일어날 수 있고, 있음직하다.’ 게다가 잠시 동안비협조적인 자본가들을 체포함으로써 피를 흘리지 않고도 자본가계급의 모든 저항을 분쇄하기에 충분할 것이라고 예상했다(글쓴이의 강조). 이런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런 것은 레닌 사상의 보편적 맥락과 반대되는 입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레닌이 자신이 말한 대로 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아마도 레닌의 대표적인 희망사항이었을 것이다. 아니, 아마도 내전을 피할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의도이기 쉬울 것이다. 자기 당을 제외한 레닌의 비판은 주로 19179월의 확신에 근거를 두었다. , 역사는 볼셰비키와 피억압 계급 편이며, 이 물결에 모든 저항은 씻겨나갈 것이다. 반면에, 당시에 레닌은 진정으로 이러한 평화로운 혁명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시점에도 국가와 혁명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이 글에서 제시한 분석이 옳다면, 실제로 레닌의 사상은 10월 혁명 직전 몇 주나 몇 달 사이에 상당한 모순과 혼란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이는 레닌이 때때로 혁명의 가능성을 자신의 열정으로 대신한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특히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주요한 저작을 쓰면서 좀 더 차분하고 사려 깊어지자, 그는 내전의 필요성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신봉했다. 실제로 그는 평화로운 혁명은 세계사회주의 혁명으로만 가능할 것이라는 위협으로 위의 라보치이 뿌찌에 실린 진술을 희석시켰다. ‘우리가 혼자였다면, 이 임무를 평화적으로 완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10월혁명 바로 몇 주 전에 쓴 볼셰비키는 국가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서 레닌은 완전히 다른 만일의 사태를 고려했다. 여기서 자세히 인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복잡하지 않은] 혁명은 결코 일어난 적이 없다(글쓴이의 강조). 따라서 이러한 혁명을 동경하는 것은 부르주아 지식인의 반동적 투덜거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설사 혁명이 그리 복잡하지 않은 것 같은 상황에서 시작되었을지라도, 혁명 자체의 발전은 언제나 예외적으로 복잡한 상황을 만든다. 혁명은 가장 격렬하고, 맹렬하며, 필사적인 계급투쟁이자 내전이다. 따라서 베일을 두른 사람만이 내전이 예외적으로 복잡한 상황 없이도 있음직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그가 끝맺는 말은 시사적이다: ‘늑대가 두려우면, 숲에 가지 마라.’ 이것은 앞서 국가와 혁명분석을 통해 입증한 것처럼, 혁명 직전 레닌의 태도에 대한 더욱 믿을 만한 진술이다. 실제로 볼셰비키는 국가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는 대단치 않지만 노동자 군대의 존재에 관한 국가와 혁명의 중요한 수정이 담겨있다. 이전에 레닌은 일종의 자발적 긴급 기동부대로 전체 노동자계급을 포괄할 무장한 노동자 의용군의 존재에 대해 말한 바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레닌이 전체 인민을 포괄’(피억압 계급의 비()노동자 분자 - 농민과 소부르주아 계급 - 를 의미)하는 것으로 노동자 의용군의 점진적확대를 말했지만 나머지 노동자계급과 피착취 인민에게 행정 임무를 맡긴 채, 가장 계급의식적이고 선진적인 노동자들이 의용군을 이끌 것이다. 결국 레닌은 이 의용군 역할을 할 것에 대한 구상을 권력 장악 이전에도 하고 있었다. 체카는 이해 말 전에 생겼다.

 

* * *

 

이 글을 끝맺기 전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뒤인 1918년에 레닌과 카우츠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카우츠키의 비판은 그의 노동자계급의 독재’(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에 나와 있었다. 여기에서 그는 마르크스가 의도한 노동자계급의 독재는 통치 형태로서가 아니라 노동자가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수단(, 노동자 헤게모니’)을 통해 사회 전체에 걸쳐 통제를 행사할 정치적 조건으로서 였다고 주장했다. 카우츠키가 보기에, 민주주의는 만약 노동자 체제가 합법성을 유지하게 된다면, 제대로 발휘될 수 없다. 왜냐하면 노동자계급의 해방 수단인 사회주의는 민주주의 없이는 감히 생각도 할 수 없기때문이다. 카우츠키는 또한 자신이 볼셰비키의 의지주의라고 간주한 것을 비판했다. 이는 경제적, 사회적 발전의 객관적 조건에 대립되는 것이었다. 그가 비록 소비에트 체제의 폭력을 비난했지만, 아마 폭력을 필요로 할 당면한 정치혁명(평화로운 사회혁명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중요성, 심지어 필요성을 인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노동자혁명과 배반자 카우츠키식으로 나온 레닌의 반응은 극도로 신랄했다. 레닌은 노동자계급의 독재는 착취자 계급을 겨냥한 폭력적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노동자혁명의 본질 자체라고 단언적으로 말했다. 민주주의에 관해 레닌은 카우츠키가 이해한 민주주의(,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는 사회혁명을 배신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여러 계급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순수 민주주의에 대해 말할 수 없다. , 계급적 민주주의에 대해서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비록 내전 시기에 쓴 것이지만, 이 팸플릿에서 레닌이 주장하는 것은 국가와 혁명의 취지와 분리될 수 없다. 카우츠키에 대한 논쟁을 통해 그는 계급전쟁에 찬사를 보냈다. 이전 저작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지만, 두 저작 사이에는 독특한 연속성이 존재한다. 더 중요하게는, 카우츠키에 반대하는 논쟁의 세계관은 극좌적이고 비타협적인 마르크스주의다. 이는 적어도 20세기가 시작되면서부터 레닌이 가진 이데올로기적 지향이었다는 점이다.

 

 

결론

 

이 글은 특히 레닌의 주요한 이론적 저작인 국가와 혁명을 자세히 검토한 것이다. 이 글은 이 저작이 레닌주의의 결정적 진술이며, 미래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위한 레닌의 이론적 유산이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1970년대와 80년대에 러시아혁명을 연구한 역사가들과는 달리 주로 레닌의 정치사상을 연구한 정치학자나 역사가들에 의해 국가와 혁명에 대한 뛰어난 저서가 출판되었다. 닐 하딩과 폴란의 저서가 그 한 예이며, 여기에 더해 알프레드 에반스와 로드니 바필드의 중요한 기사를 들 수 있다. 이것은 국가와 혁명의 중요성에 대한 수정주의적사고방식에 대해 말할 수 있게 해주었다. 최근에 저작에 대한 주류 역사학계의 설명은 미래의 권위주의적, 폭력적 국가를 암시할지도 모르는 원문에 가득한 가정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 글의 주장은 이러한 연구에 근거하고 있지만 노동자국가의 폭력에 관한 레닌 사상의 이중성을 강조한다. 또한 이 이중성과 국가와 혁명의 내용 사이의 관련성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를 제시한다. 뿐만 아니라 이 글은 원문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소비에트 권력의 실제에 대한 연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기에 역사가들은 역사와 정치철학을 융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글의 주장은 국가와 혁명에서 제시한 것처럼, 레닌의 국가론과 소비에트 권력의 실제 사이에는 실제로 뚜렷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레닌의 사상에 중요한 유토피아적 요소가 있다고 밝혀지지만, 부르주아의 저항에 대한 폭력적 억압을 아주 명시적으로 촉구했음을 보여준다. 이 저항은 노동자혁명의 제1차적 임무인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파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존 구딩(John Gooding)은 폭력에 대한 레닌의 태도와 그것이 스탈린의 태도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매우 통찰력 있는 분석을 제공한다. 구딩에 따르면, 레닌은 사회주의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최후의 수단으로 폭력을 생각했다. 이와 관련하여 폭력은 필요할 때에만 사용해야 할 도구였다. 그러나 사용된다면, 잠시 동안 지속되더라도 반()혁명이 다시 나타나지 못하게 할 정도로 황폐화시키는 진정한 테러통치여야 했다. 이러한 견해는 국가와 혁명, 특히 혁명적 대담성을 결여한 1871년 빠리꼬뮌 지지자들에 대한 레닌의 비판으로 뒷받침된다. 또한 레닌이 소비에트 대중을 위협하여 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의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도록 하는데 열심이었던 소비에트의 잔인한 실제로도 뒷받침된다. 반면에, 인생의 목표를 위해 레닌은 나타나고 있는 폭력을 하나의 문화로 보았다. 혁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폭력 그 자체로의 사용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레닌이 사회주의를 이루기 위해 폭력이나 테러의 사용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이 글의 주장은 폭력의 사용이 혁명에 대한 레닌의 변증법적 철학에 내재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실제로 원문과 소비에트 권력 사이에 격차가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자유의지론적 정신이 실제로 원문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 자유의지론적 정신은 그 반대인 권위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이 관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권위주의는 더 만연해 있었다. 게다가 결국 권력이 극심한 어려움에 직면하자, 닐 하딩과 베릴 윌리엄스가 주장한 것처럼, 레닌과 볼셰비키는 권위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데서 이론적으로 골치를 썩지 않았다. 더군다나 국가와 혁명에 대한 면밀한 검토는 레닌이 노동자계급과 빈농을 위한 혁명이 아니라 인류사회 일반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을 일소할 혁명을 신봉했음을 보여준다. 이 혁명은 노동자계급과 빈농이, 아니면 적어도 이들을 대신하여 이룩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피착취 계급 자신은 착취하는 계급과 같은 식으로 대우 받거나 억압 받기 쉬웠다. 따라서 국가와 혁명의 내용은 소비에트 체제를 특징짓는 억압적, 권위주의적, 폭력적 국가의 근원을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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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서상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