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한국: 불만의 여름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12월호

한국: 불만의 여름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6. 09:26

한국: 불만의 여름

 

Workers’ Fight

 

[아래 기사는 영국의 혁명적 트로츠키주의 조직인 노동자투쟁(Workers' Fight)의 기관지인 『계급투쟁』(Class struggle), 80호(2008년 9/10월호)에 처음 실렸다. 그리고 같은 계열의 프랑스 조직인 LO의 『계급투쟁』, 115호(2008년 10월호)와 미국 스파크(Spark) 그룹의 『계급투쟁』, 11-12월호에 다시 실렸다. 세부적인 사실에서는 몇 군데 오류가 있었다. 그러나 2008년에 벌어진 한국의 촛불시위와 노동자투쟁의 흐름을 면밀히 추적하면서 계급적으로 분석하고 교훈을 도출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참고로 아래 번역글은 원문을 거의 그대로 발췌해 번역한 것이다.-옮긴이]

  

지난 5월 중순부터, 전투적 시위의 물결이 한국을 휩쓸었다. 두 달 넘게 몇 만 명의(때로는 몇 십만 명의) 시위대가 서울과 다른 도시의 도심에서 날마다 열린 대중 집회에 참가했다. 이런 저항의 물결에는 많은 노동자는 물론이고 고등학생과 대학생들 같은 젊은이들도 꽤 많이 참가했다. 비록 영국에서는 비교적 작은 쟁점으로 보일 수 있는 것(미국산 쇠고기를 다시 수입하겠다는 정부의 결정) 때문에 촉발됐지만, 그 시위는 곧 여당인 한나라당의 정책에 대한 전반적인 항의로 발전했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 거리 시위의 물결이 몇 개 산업에 걸쳐 파업 물결이 일어남에 따라 두 배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거리 시위 덕분에 힘을 얻은 노동자는 자신들의 계급적 무기(계급투쟁의 무기)를 이용해 자신들의 요구를 제기했다.

의미심장하게도, 서방이 자주 특히 북한과 견주어 민주주의국가라고 추켜세우는 한국 정부는 집회와 파업을 진압하려고 물리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그런 잔인한 억압이 시위대와 파업노동자의 투지를 더욱 불타게 만들었다. 어쨌든 정부는 그런 잔인성으로 (자신들을 뒤흔드는) 사태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모호한 신뢰

현재의 여당인 한나라당은 1963년에 군사 독재자 박정희가 독재를 위한 정치적 도구로 만들었던 ‘(민주)공화당의 최신판일 뿐이다. 이 당은 언론이 떠들어대듯이 중도 우파정당이라기보다는, 주한미군 사령관들, 한국의 재벌, 장군들과 끈끈하게 연결돼 있는 반동 정당이다.

한나라당 후보였던 이명박이 200712월 대선에서 이겼다. 그런데 그것은 주로 그와 맞설 상대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몇몇 측면에서, 그는 이길 가능성이 없는 승자였다. 전 현대건설 사장으로서, 그는 재벌 대표로 자신을 드러낼 위험을 떠맡아야 하는 첫 번째 대선 후보였다.(재벌은 가문이 소유한 거대한 기업복합체다. 재벌은 2차 대전 뒤 군사 독재 40년 동안 정부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졌는데, 여전히 경제를 좌우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서울 시장 시절의) 부정부패로 조사를 받다가 출마한 최초의 대선 후보였다.

그러나 이명박의 유일한 실제 경쟁자는 전 여당(통합민주당으로 간판을 바꿔단)의 후보뿐이었다. 그러나 이 당은 이미 집권 기간의 실정 때문에 믿음을 잃었다. 이전 정부는 민중에게 허리띠를 졸라맬 것을 강요하기 위해 수많은 반미미사여구를 퍼뜨렸다. 이전 정부는 별로 잘한 게 없다. 그 결과 민주당에 표를 던졌을 만한 많은 잠재적 지지자가 소규모정당 후보한테 표를 주거나 선거에 기권했다. 이 때문에 이명박은 민주당 후보를 22%차로 따돌리며, 48.7%의 득표로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유권자의 63%만 투표해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성공한 주요한 요인으로는 아마도 한나라당과 이 나라 최대 노총인 한국노총(군사독재정권이 후원했던 노총을 계승했다) 사이의 연합도 있었던 것 같다. 한국노총은 이명박의 선거공약 몇 가지에 신뢰를 보냈다. 특히 해마다 60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고, 비정규직 노동자 차별을 없애며, 교육 부문에서 최저 빈곤층을 위해 적극적 차별시정 조치를 도입하며, 저소득 가구를 위해 세금을 감면하겠다는 등등의 공약이 그런 사례였다. 한국노총이 노골적으로 지지한 그런 공약 문구들은 환상을 부추겼을 것이고, 일부 노동자 투표자들이 이명박한테 표를 찍게 했을 것이다. 특히 그의 주요 경쟁자가 사회적 쟁점에 대해 확실한 약속을 하지 않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이 당선되자마자 한나라당의 나쁜 습성이 표면에 드러났다. 한나라당 주도세력을 포함하는 일련의 긴 부패 스캔들이 터져 나왔다. 거기에는 이명박의 측근도 포함돼 있었다. 비록 이명박 자신은 그를 상대로 시작된 조사에서 최종적으로 무혐의 처리되긴 했지만 말이다.

한나라당의 친기업 정책은 거대 국영기업과 공공부문의 대대적인 사유화 선언을 통해 곧바로 부각됐다. 한 술 더 떠, 새로 뽑힌 대통령은 산업자본이 금융기관의 지배적 지분을 갖지 못하게 한 규제 조치[금산 분리 조치]를 완화하겠다는, 1997년 금융위기 뒤에 나온 응급조치를 뒤바꾸겠다는 의도를 드러냈다. 최근 몇 년 동안 재벌 회장들이(다른 재벌들 가운데에서도 삼성과 현대 회장들이) 횡령과 다른 금융 부정행위로 기소를 당하는 커다란 스캔들이 있었는데도 그랬던 것이다.

한편, 새 노동부장관으로 이영희가 임명됐다. 이영희 장관은 임금인상 협상을 해마다 보장할 필요가 없다고 언론에 대고 선언했고, 노동법이 노동자를 과잉보호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불법파업을 단속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지겹도록 되풀이했다. 그러면서 만약 노동자가 정부의 이런 개혁 조치에 저항한다면, “대량 해고하겠다고 협박하며 조롱했다. 실업률은 그 어느 때보다 가파르게 올랐다. 반면 솟구치는 물가는 노동자의 삶의 질을 떨어뜨렸다.

그 결과, 이명박과 그의 약속에 대해 노동자이 가졌을 수 있는 모든 환상이 눈 녹듯이 녹아버렸다. 4월 총선 때, 이명박의 지지율은 여론조사에서 30% 밑으로 떨어져 있었다. 한나라당은 46% 투표라는 역대 최저 투표에, 2석 더 많은 과반수로 겨우 이길 수 있었다. 이렇게 낮은 투표율은 정부에 대한 유권자들의 점증하는 불만을 보여준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 문제에서 광범위한 시위로

저항의 물결을 촉발한 것(한나라당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를 다시 수입하기로 결정한 것)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큰 맥락 속에서 검토해야 한다. 2003년에 이전 [노무현] 정부는 미국 광우병사례가 발생함에 따라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일시 중단했다. 이 조치로 미국 축산업자들과 소 사육업자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한국이 미국산 쇠고기의 최대 수입국 가운데 하나이고, 미국한테 큰 고객이었기 때문이다.

2003년부터 한국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는 워싱턴과 서울 사이의 경제적 거래에서 주요한 분쟁의 원인이었다. 418, 협정이 체결됐다. 한국은 합의된 기준에 따라 미국산 쇠고기를 다시 수입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이 사안은 한나라당 안의 경쟁파벌을 포함해 정치적으로 뜨거운 감자가 돼 버렸다. 국민들이 갖는 정당한 의혹, 미국 경쟁자들한테 패배할 처지에 놓인 한국의 소 사육업자들의 공포감, 한국에 널리 퍼져 있는 반미 감정을 믿고, 정치인들이 국민 건강권 문제와 함께 국가 주권 문제를 제기했다. 그런 만큼, 52일 시작된 최초의 미국산 쇠고기 반대 집회들은 (쇠고기 수입 금지 조치가 실제로 풀리기 전까지는) 아주 두드러지게 민족주의적 편향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한나라당보다 더 오른쪽에 있는 경쟁자인 [이회창의] 자유선진당이 스스로 시위대의 맨 앞에 서려고 할 만큼 이 시위에 편안함을 느꼈다. 비록 자유선진당의 시도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농민들이 자신들의 독자적 시위를 전개하는 동안, 서울에서는 초반에 대규모 집회의 참가자 대부분이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한 손에는 피켓을, 다른 한 손에는 촛불을 들었다. 촛불은 독재 시절부터 내려오는 상징인데, 목사들한테 영향을 받은 민주화 운동 세력이 그걸 비폭력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5월 말에 미국산 쇠고기 금지 조치를 풀겠다는 정부의 공식 결정으로 시위 대열이 급증한 뒤, 집회의 성격이 크게 바뀌었다.

이 결정은 온갖 계층의 몇 만 명의 시위자를 갑자기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했다. 그때까지 1,700여 조직이 이른바 광우병 대책 국민회의라는 이름 아래 모여 시위 지지 의사를 표현해왔다. “미친 소는 이명박 너나 먹어!”, “쇠고기 협상 철회하라라는 널리 퍼진 피켓과 함께 이명박 탄핵을 요구하거나 사유화 계획을 비난하는 피켓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집회가 대도시에서 날마다 열리고, 새로운 시위대가 집회에 참여함에 따라 더욱 더 다양한 요구를 담은 피켓이 등장하게 됐다. 이를테면 그것은 생존권 쟁취, 연금개악 반대, 모두를 위한 복지 대책 수립 등이다.

시위의 범위가 쇠고기 문제를 훨씬 넘어서도록 하는 데에서 중요한 요인은 시위에 참여하기로 한 민주노총의 결정이었다.(민주노총은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노총인데, 1980년대 말 군사독재를 무너뜨린 노동자계급의 대투쟁을 토대로 등장했다.) 그런데 민주노총 지도부는 촛불시위에 다른 방향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았다. 즉 사장들과 한나라당 정권의 대대적인 공격에 맞서서 노동자계급과 젊은이들에게 전투적 관점을 불어넣을 수 있는 요구나 목적을 제출한다든지 하지 않았다.

사실은 정반대였다. 민주노총은 쇠고기 문제에만 시위를 제한하길 원했던 조직들과 철저히 보조를 맞췄다. 그래서 민주노총이 특별히 취한 첫 번째 행동은 미국산 수입 쇠고기가 보관된 냉동 창고를 봉쇄하려고 몇 백 명의 활동가들을 파견하고, 운수, 항만 노조 조합원들한테는 쇠고기 반입을 보이콧하라고 지침을 내린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노동자가 민족주의 조직과 소부르주아 환경운동 조직의 잡탕에 끌려 다니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자들의 지침과 관계없이, 그들이 노동자에게 시위에 참가하라고 요구한 사실만으로도(비록 그 요구가 광우병 쇠고기의 위험에 맞서 자신들의 건강을 지킨다는 명분만 내걸고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시위 물결의 성격에 사회적 영향을 미쳤다.

시위에 참여한 노동자는 민주노총 지도부가 내린 방침의 전술적 정확성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시위 참여를 사장들의 공격과 한나라당 정권의 친기업 정책에 맞서 자신들의 분노를 보여줄 기회로 여겼다. 그리고 그들은 이 기회를 미국산 쇠고기에 반대한다는 일반적 외침 한가운데에서 자신들의 불만을 표출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제기할 기회로 이용했다.

 

 

시위가 발전하다

531일부터 시작된 주말부터 서울 집회는 새로운 형태를 띠었다. 집회는 다음 달까지 계속됐다. 날마다 저녁 집회가 열렸다. 시위자들은 시청 광장을 72시간 연속 점거했다. 그 긴 주말에 서울에서만 시위 참가자 수가 주최 측 추산으로는 10만에 이르렀고, 경찰 추산으로도 4만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정부는 힘을 과시하기로 결정했다. 몇 천 명의 폭력 경찰이 물대포를 갖추고, 완전 전투 무장을 한 채 동원됐다. 토요일 밤 늦게 수천 명의 시위대가 청와대(대통령 관저)로 행진했을 때,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다. 폭력경찰들이 고립된 시위자들을 두들겨 패는 장면을 담은 비디오와 사진들이 나중에 인터넷에 올라왔다.

그 주말에 시위대 가운데 228명이 연행됐고, 70명이 부상당했다고 경찰이 보고했다. 부상자 수는 틀림없이 과소평가됐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많은 부상당한 시위자들이 연행될까 두려워 병원에 가기를 꺼리고, 자원 의료 봉사자들한테 치료를 받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경찰의 잔인성을 폭로한 소식이 들불처럼 퍼졌다. 그 때문에 더 많은 시위자들이 집회에 참여했고, 이번에는 이것이 경찰 폭력에도 항의하게 만들었다.

집회는 610일 화요일까지 날마다 열렸다. 610일은 1987년에 경찰이 시위자를 죽인 것에 맞서 열린 거대한 시위의 기념일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어느 정도 특별한 날이다. 1987년의 이 시위는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전환점 역할을 한 것으로 대체로 평가받고 있다. 비록 이 시위가 실제로 군대를 막사에 주저앉게 만들 정도로 위력적이었던 노동자계급의 대투쟁을 낳았지만 말이다. 따라서 최근에 벌어진 한나라당 정권의 탄압을 고려하면, 이 기념일은 많은 사람에게 독재를 회상시키는 탄압에 맞서 저항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다.

시위대에 지나치게 동정적인 거 아니냐고 의심할 필요가 없는 친기업적 신문 코리아 타임스는 그날 저녁의 시위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수십만 시위대가 서울 도심의 세종로 16차선을 꽉 채웠다. 시민 단체 연합체는 서울 50만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100만 명이 참가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경찰은 총 20만 명이 참가했다고 추산했다. 수만 명의 시민이 전국적으로 부산, 광주 그리고 10여 개의 다른 도시에서도 각각 독자적인 집회를 열었다. 4만 명의 전경이 주요 집회 장소에 배치됐다.” 이런 수치는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만일 4만 명의 경찰이 동원됐다면, 시위자 수는 경찰이 주장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이렇게 힘을 거대하게 보여주자, 정권은 어쩔 줄을 몰랐다. ‘불법시위에는 절대 항복하지 않겠다고 아주 자주 떠벌였지만, 정권은 타협적 제스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통상부 장관이 워싱턴으로 달려갔다. 서울의 이명박 정권한테 숨 쉴 틈을 약간이라도 주려면 미국 무역 대표부와 새로운 합의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부시 정부는 한국의 동맹자가 처한 곤경에 대해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어떤 양보도 하지 않았다. 서울은 워싱턴에 어떤 걸 강요할 처지가 못 됐다. 한미 FTA의 결과로 재벌이 미국 시장에서 벌어들이고 싶어 하는 막대한 이익을 침해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나라당 정부한테는 폭풍우가 조만간 사라지기를 기대하면서 폭풍우를 견뎌내는 방법 말고는 달리 선택할 게 없었다. 시위자들의 기를 꺾고, 집회 조직자들의 힘을 빼려고 압박하고 연행하는 방법을 섞어 쓰면서 말이다.

숫자로 본다면, 610일이 시위의 절정이었다. 비록 6월 말까지 수만 명의 시위대가 날마다 계속 거리로 쏟아져 나왔지만 말이다. 그 뒤로도 시위는 7월 말까지 거의 날마다 이어졌다. 그러나 시위대 수는 차츰 줄어들었고, 집회는 덜 규칙적으로 열렸다.

그러나 거리 시위가 끝나기 훨씬 전에, 정부는 잠재적으로는 훨씬 더 심각한 골칫거리에 맞닥뜨렸다. 저항의 초점이 노동자계급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화의 고통

비정규직 노동자를 사용하고, 남용한 것은(, 노동자를 초과 착취한 것은) 과거 군사독재 정권이 수출 주도형 제조업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을 때부터 한국 산업이 엄청나게 성장하는 데에서 국가 원조와 함께 핵심적 역할을 해왔다.

오늘날, 모든 기록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는 전체 임금 노동자의 절반(1590만 노동자들 가운데 870만 노동자)에 이른다. 여기에다 개인사업자로 위장돼 있지만 실제로는 비정규직인 노동자들을 포함해 2백만 명 이상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전체 고용된 노동자계급의 60%나 된다. 이 비율은 1997년 금융위기 이후 계속 증가해왔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상황은 아주 다양한데, 크게 두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적은 일부만이 어떤 형태로든 복지 혜택을 받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임금은 정규직 동료 노동자의 임금에 비해 적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는 쥐꼬리 만한 최저임금을 버는 220만 노동자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비정규직은 또한 정규직 노동자에 견주어 권리가 적다. 많은 회사들이 노조도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노조가 있는 경우에도, 조합원임을 비밀에 붙이지 않는 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노조에 참가하는 것 자체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

 

 

쓰라린 장기투쟁

2007년에 새 법이 만들어져 71일부터 먼저 300인 이상 사업장에서부터 시행됐다. 이 법은 2년 동안 고용된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 지위로 전환해야 할 의무를 덧붙였다. 비록 그것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조건도 같이 상승시킬 것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말이다.(이건 실수가 아니다!)

이전과 비교해, 새로운 법은 약간 진보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고용한 지 2년이 되기 전에 간단히 해고해 버린다. 그리고 다른 자본가들은 직접 고용된 비정규직 노동자의 숫자를 줄인다[직접고용을 간접고용으로 전환한다]. 그러면 비정규직 노동자를 주기적으로 바꾸는 유령 하청업체들을 원청 자본가들이 마음대로 돌려가며 이용해먹기 쉽다.

계약직 노동자가 처한 조건, 최소한의 노동권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본가들의 시도 때문에 과거에 수많은 장기투쟁이 벌어졌다. 2007년 법은 그런 투쟁의 새로운 순환을 촉발시켰다. 보기를 들어 이런 투쟁으로는 뉴코아 백화점과 (전에 프랑스 까르푸 자본이 소유했던) 홈에버의 투쟁이 있었다. 거기에서는 모두 비정규직의 비율이 높았다. 11,000명의 홈에버 노동자 가운데 72%가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의 절반은 홈에버가 직접 고용하고 있고, 나머지 반은 간접 고용 노동자이다. 8000명의 뉴코아 노동자 가운데 84%가 비정규직이며, 그들 대부분은 간접 고용 노동자이다.

작년에 2007년 법의 시행을 앞두고, 두 회사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할 의무를 회피하려고 했다. 이미 4월에 400명의 외주화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해고했던 홈에버는 6월에 일자리를 외주화하기 위해 350명의 직접 고용된 노동자들을 해고한다고 발표했다. 동시에 뉴코아는 300명의 직접 고용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사내하청업체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뉴코아는 심지어 표적으로 찍힌 비정규직 노동자를 협박해서 자발적으로퇴직시키려고 깡패들을 동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건 반발에 부딪혔다. 파업이 벌어졌고 깡패들은 수백 명의 분노한 노조원들과 마주쳐야 했다. 민주노총 소속 노조가 하루 파업을 호소했던 작년 610일에 시작해서, 해고에 맞선 그 투쟁은 매장을 봉쇄하고, 점거하는 장기 투쟁으로 나아갔다. 이 투쟁 과정에서 파업노동자는 많은 폭력경찰들과 자주 부딪쳐야 했고, 노조 지도자들은 재판정에 서야 했으며, 몇몇 경우에는 투옥되기까지 했다.

뉴코아 투쟁은 14개월 후인 올해 8월에 결국 끝났다. 그때, 원래 [외주화] 위협을 받았던 350명의 비정규직 노동자 가운데 36명만이 복직했다. 이 작은 걸 얻는 대가로 노조는 [외주화 금지 등] 예전의 요구 대부분을 철회해야 했고, 2010년까지는 어떤 파업행동도 삼가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홈에버 투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여성 파업노동자의 투지 때문에 한국 언론의 주목을 끈 다른 파업이 있다. 그건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참한 처지를 훨씬 더 놀랄 만하게 보여준다. 그건 서울의 구로 지역에 위치한 공장인 기륭전자 얘기다. 구로는 1980년대에 노동자계급의 투쟁물결이 성장해 나왔던 지역이다. 이 회사는 불법 파견업체를 통해 여성 노동자들을 유난히 많이 고용한 것으로 알려졌다.[3백 명의 생산직 노동자 가운데 불법파견 노동자가 무려 83퍼센트다.]

2005년에 노조는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의 직접 고용을 위해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 노동자가 정규직화를 요구했던 것이 아니므로 그[직접 고용] 요구는 아주 온건한 요구였다. 하지만 사측은 양보하지 않았다.

사측은 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책에 나오는 모든 술수를 다 부렸다. 법원이 벌금을 물리기까지 했다. 파업이 1000일을 넘었지만 전망이 보이지 않자 노조는 올해 611일 더 필사적인 투쟁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10명의 노조 활동가들이 공장 정문 앞에서 설치된 텐트에서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70일간의 단식 투쟁을 하고 난 820일에, 그들은 병원에 실려 갔다. 하지만 사측은 아주 작은 양보도 하지 않았다.

뉴코아, 홈에버, 기륭전자 파업, 아니 비정규직 노동자와 관련된 모든 파업의 공통적 특징은 그들의 고립이었다. 민주노총이 약간 지지를 보냈다 할지라도, 활동가들을 약간 동원하고, 기금을 모금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반면 파업노동자는 정부나 다른 사장들의 지지를 받아 더욱 거만하게 버티는 사장들과 맞닥뜨려야 했다.

 

 

화물운송 노동자 파업 등

화물운송 노동자의 파업은 자발적으로 시작됐으나 민주노총의 노력 덕분에 전국적 파업이 됐다. 이 파업은 특히 기름 값 상승이 기폭제였기 때문에 여러 측면에서 [다른 비정규직 파업에 비해] 약간 다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파업과 공통적인 것은 이 파업에 참여한 화물노동자가 특수고용 형태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것이다. 특수고용직이라는 지위 때문에 기름 값 인상은 그들에게 특히 부담이 됐다.

여러 범주로 조직된 운수노동자가 610일부터 이 파업에 참여했다. 거기에는 전국을 가로질러 화물을 나르는 이른바 화물운송노동자도 있고, 덤프, 레미콘, 불도저, 굴삭기 등 여러 가지 종류의 무거운 건설 장비를 운전하는 건설기계 노동자도 있었다.

이 화물운송 노동자는 개인사업자로 돼 있다. 그래서 정규직이 누리는 복지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다. 그리고 정규적인 수입도 없고, 그들의 노동조건이나 수입, 사회적 지위는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와 매우 비슷하다. 아주 소수를 제외하면, 이 파업에 참여했던 화물운송 노동자는 자기 차를 갖고 있지 않고, 특수 회사로부터 그걸 빌려야 한다.

그들 대부분은 특정한 사용자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과 그들의 서비스가 필요한 회사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하는 운송 대행업체에 좌우 당한다. 화물운송 노동자는 화주[화물 주인]들로부터 운송료를 받고, 그 운송료에서 운송 대행업체에 화물차를 운전하고 유지하는 비용(보험료, 기름 값, 통행료 등), 그리고 대체로 차량 렌트비까지 지불한다. [이런 상황에서] 기름 값 폭등은 운송료 인상 요구를 촉발시켰다.

610일 파업에 참여한 첫 번째 그룹은 민주노총 소속 화물연대로 조직된 13,000여 화물운송 노동자였다. 비록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전국 트럭의 4% 이하만을 운전했지만, 전체 컨테이너 교통의 1/4 정도를 다뤘다. 그 결과, 며칠 만에 부산, 인천 같은 한국의 가장 큰 컨테이너 터미널이 막혀버리고 정체됐다. 그래서 수입과 수출 모두가 상당히 가로막혔다. 617, 공장이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부품이 부족하거나 재고가 쌓여갔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광주에 있는 큰 가전제품 공장을 폐쇄했다. 대우전자는 여러 개의 공장에서 생산을 축소했다. 철강 생산업체인 포스코, 현대 제철, 동국 철강도 그랬다.

그러는 동안 616일에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에 소속된 건설운송 노동자와 덤프트럭 노동자가 화물운송 노동자의 파업에 합류했다. 그리고 전국의 대규모 건설현장의 대부분을 빠르게 마비시켰다.(경제신문에 따르면 그 가운데 70%가 마비됐다.)

정부는 화물운송 노동자의 파업이 폭넓게 지지받지는 않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파업이 벌어지자, 여론은 기름 값 폭등이라는, 모든 사람들이 부닥치고 있는 문제로 한나라당에 도전하는 파업을 지지하고 있다는 게 드러났다. 정부는 거리에서 펼쳐지는 반한나라당 시위와 화물운송 노동자의 파업이 미치는 경제적 타격, 그리고 파업노동자에 대한 여론의 지지와 공감 사이에 끼어 있었다. 처음에 화물운송 노동자들의 협박에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고 큰 소리 뻥뻥 쳤지만, 결국 정부 장관들은 일종의 협상을 하러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화물운송 노조가 협상을 타결했다. 화물운송료를 16% 올리기로 한 것이 타결의 골자였다. 30% 인상하라는 요구에는 못 미쳤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수치였다. 623, 대부분의 화물운송 노동자는 비록 명백한 승리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중요한 성과를 가지고 작업에 복귀했다. 덤프 트럭과 건설운송 노동자의 파업은 좀 더 오래 갔다. 운송료에서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국가가 관장하는 프로젝트에서 일하는 화물운송 노동자에게는 기름 값을 정부가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화물운송 파업이 끝나기 훨씬 전에, 보건의료, 언론, 더 중요하게는 한국의 최대 수출업체인 자동차산업 등 노동자계급의 여러 다른 부문이 행동에 들어가고 있었거나 행동에 들어가겠다고 위협하고 있었다.

금속 산업에서는 전국적 차원의 중앙교섭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현대차, 기아차, 대우, 쌍용, 르노삼성 등 거대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이 교섭에 참가하기를 거부했다. 민주노총의 최대 산하기관으로서 14만 조합원이 있는 금속노조는 7224시간 파업을 시작으로 자동차산업에서 투쟁에 들어갔다. 그날 파업에 들어간 17만 명 가운데, 8만 명이 한국의 최대 자동차 공장들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그 뒤, 7월 초부터 8월 말까지 자동차공장에서는 8회에 걸쳐 부분파업이 열렸다. 이 회사들에 고용된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운명이 그 쟁점들에 걸려 있었다. 10시간 또는 12시간까지의 고된 야간 교대 노동을 끝내자는 요구(노동 강도 강화와 임금 삭감을 내포하고 있었다)를 포함해 노동패턴을 바꾸는 것, 공식 수치로도 물가 인상이 6%를 넘어서는 상황에서 사장들이 제시한 낮은 임금인상률 등이 쟁점이었다. 하지만 금속노조는 모든 자동차공장 운동이 단일하게 나아가도록 계속 길을 제시하고, 노동자가 사장들의 거만함에 맞서 자신들의 힘을 시험해볼 수 있도록 하는 대신 산하 노조들이 서로서로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것은 정부에 반대하는 촛불시위들이 계속되고 있으며, 그때 막 끝난 전국 화물운송 노동자의 파업으로 정세가 특징지어지던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이 가진 잠재력을 축소시켜 버렸다. 그 결과 파업은 8월 말과 9월 말 사이에 서로 다른 회사들 각각과 독자적인 합의를 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런 합의에 이르는 과정은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많은 사업장에서 노동자가 노조 지도부가 제안한 합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한국의 최대 자동차 제조업체인 현대차에서 발생했다. 그곳에서는 노조 지도부가 권고한 잠정합의안이 92954%로 간신히 가결되기 전까지 두 번이나 부결됐다.

노동자가 획득한 요구를 보자. 예를 들어, 현대차에서 최종 합의는 5.6% 임금인상, 성과급 300%와 일시금 300만원을 포함했다. 성과급이나 일시금은 파업 기간에 잃은 임금과 보너스를 어느 정도 보상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 합의는 노동자가 지난 10년 넘게 합의해왔던 것보다는 훨씬 많은 것이었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것은 어떤 거대 회사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관한 쟁점에서는 사소한 양보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정규직 노동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금속노조의 조직들은 다시 한 번 자신들의 조합주의적 성격을 드러냈다. 그 조직들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지 문제를 자본가들과의 어떤 합의에서도 핵심 문제로 제기하지 않았다.

 

 

민주노총의 정책이 낳는 결과

민주노총 소속 노조들과 그 활동가들은 이번 여름 파업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추동력이었다. 비록 이런 파업들의 일부가(화물운송 노동자의 파업이나 현대자동차 투쟁과 같은) 처음에 민주노총의 허가 없이 시작됐다 할지라도 말이다. 민주노총과 그 산하 노조인 금속노조의 지도부는 촛불 집회를 조직한 사람들과 함께 곧바로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이른바 민주적인한국에서 국가가 불법 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활동가들을 체포하고, 잡아가두며, 벌금을 때리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여기서 불법집회의 적법성 여부는 검사들이 제멋대로 결정한다. 노조 활동가들이 회사의 업무를 방해했다는 이유로(한국 법은 이걸 범죄로 간주한다) 같은 처분을 받는 일도 자주 일어난다. 일자리를 잃고, 감옥에 갇히는 것뿐만 아니라 파업 때문에 회사가 입은 손해를 노조 활동가들이 보상하라는 민사 재판의 결과로, 노조 활동가들이 파산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이런 일들이 대부분의 중요한 투쟁에서 벌어진다. 그러므로 국가는 잘 대처할 수 있다고 느끼자마자, 촛불시위와 민주노총의 지도자들을 보복할 가능성이 많았다.

하지만 의미심장하게도 촛불시위가 7월 중순까지 지속되는 동안에는, 그리고 화물운송 노동자가 파업을 하는 동안에는 정부는 특별한 탄압 조치를 취하길 꺼렸다. 많은 시위자들이 체포됐지만, 소수만이 기소됐다. 대체로 경찰은 집회 조직자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확실히 시위대의 분노를 훨씬 더 키울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화물운송 노동자가 파업하는 동안, 당국은 저자세를 유지했다. 화물운송 노동자와 정면충돌하거나 그들의 결의를 높여주지 않기 위해 [노조 간부들을] 체포하지 않았다.

하지만 화물운송 노동자의 파업이 끝나고, 촛불집회의 기세가 꺾이는 것처럼 보이자, 정부는 공세로 돌아섰다. 630, 정부는 촛불집회의 선두에 서 있던 두 개의 주요 상부 단체의 사무실을 급습하고, 그 조직 지도자 8인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하면서 시위 조직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 72일에 쇠고기 수입과 사유화 계획에 반대해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벌였다. 이때 정부는 자동차산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켜보기 위해 한발 물러서는 척했다. 하지만 거대 공장들에서 따로따로 네 차례 작업 중단을 한 3주가 지나자, 정부는 이제는 공격을 시작해도 괜찮겠다고 결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724,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의 주요 지도자들 가운데 9명에 대해 체포 영장이 발부됐다. 그들이 “72일의 불법파업불법 촛불집회부추겼다는 게 그 이유였다. 8월 중순,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지도자 21명이 감옥에 갇혔거나 재판을 앞두고 있었다. 70명의 노조 간부들한테 체포영장이 떨어졌다.

8월 말에는 과거의 억압수단을 부활시키려는 맹렬한 시도로 서울 경찰들이 과거 독재정권이 북한에 동조한다는 죄목으로 활동가들을 감옥에 쳐 넣거나 사형까지 선고하게 해준 국가보안법이라는 낡은 무기를 꺼내드는 데까지 나아갔다. 독재정권은 국가보안법으로 좌파 조직인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의 지도부 7인을 잡아넣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판사가 경찰들이 지나쳤다고 판단해서 이 동지들을 석방시켰다. 물론 이 동지들은 나중에 다른 죄목으로 재판을 받게 될 수 있지만 말이다.

민주노총이 이 탄압의 첫 번째 희생자였지만, 민주노총의 정책은 여전히 정부의 공격을 돕고 있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정부의 정책에 맞서 싸우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단결 투쟁의 전망을 제시하지 않고, 파업들을 계속 고립시키면서 전체 운동을 약화시켰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민주노총 지도부는 촛불시위 조직자들이 미국산 쇠고기 문제로 투쟁목표를 협소하게 제한하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 자기가 가야 할 길에서 벗어났다. 그래서 촛불시위 참여자들 스스로가 표현한 정부 정책들에 대한 전반적 분노에 응답하는 데 실패했다. 이것은 610일까지의 첫 번째 촛불시위 상승국면 동안에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민주노총 소속의 3만 화물운송 파업노동자의 집단적 힘이 촛불시위의 두 번째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지렛대가 되고,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시위를 다른 방향으로 이동시키며,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는 실질적 기회를 갖고 있다는 걸 서로 다른 부문의 노동자에게 알려줄 수 있던 때를 포함해 그 후에도 계속 사실이었다.

의미심장하게도, 민주노총 지도자들이 72일 총파업을 호소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은 대체로 총파업을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사유화 반대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사실 현대차 조합원들이 지도부의 호소에 반하는 투표를 하고, 대신 자기 자신의 요구를 내건 파업에 들어가기로 결정한 것은 정확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만약 민주노총이 이 총파업을 자본가들의 공격에 맞서 노동자에게 전망을 제공하는 목표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면, 이 총파업은 모든 부문의 노동자를 정부에 맞서 하나로 단결시킬 수 있고 (민주노총과 금속노조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걸 전제로)자동차산업에서, 가능하다면 더 확장된 범위에서 반격의 길을 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는 대신, 72일 총파업은 후속 행동에 대한 아무 계획이 없는 상징적 파업에 그쳤다. 그래서 자동차 자본가들은 공장들이 있는 도시를 넘어서 정세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는 부분 파업들을 차례차례 맞게 된다. 이 부분파업은 전면파업에 비해 훨씬 덜 효과적이었다. 자동차 노동자는 자신들의 힘을 재볼 수 있는 수단을 박탈당해 버렸다. 한편 다른 산업에서 일어난 수많은 파업은 민주노총의 정책 때문에 처음에는 화물운송 노동자, 그 다음에는 자동차 노동자라는 더 큰 부대와 힘을 합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지 못한 채 고립돼 있었다.

언론을 보면, 정부에 맞선 파업투쟁이 적어도 이 시점에는 약화되는 듯했다. 비록 비정규직 노동자의 시위투쟁이 이번에는 민주노총 밖에서 시작되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규모를 측정하고, 그게 실제로 얼마나 깊을지를 곧바로 알아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런 정부의 탄압이 노동자를 위협해 굴복시키는 데로 나아갈지는 두고 봐야 한다. 정부도 여기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정부도 노동자계급 속에서 분노가 폭발하지 않도록 매우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기를 들어 정부는 처음의 사유화 프로그램을 거의 무로 돌리고 있다. 이것이 실제 경제위기 때문에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많은 사유화가 돈을 정부에 지불하지 않은 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간 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유동 자산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노동자계급이 저항할까 두려워서 정부가 [사유화] 정책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한국 노동자계급한테는 아주 억압적인 상황에서도 오래 싸우고 조직해온 전통이 있다. 단지 20년 전에 이 노동자계급은 독재 정권 및 즉석에서 총살하라고 훈련받고 지시받은 군대와 맞섰다. 그 당시에 활약했던 많은 활동가들이 여전히 현장에 있다. 미래의 투쟁에서 결정적 요소는 이 투사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젊은 세대의 노동자에게 전달하려는 의지가 얼마가 강한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20년 전에 무엇이 결정적이었던가를(그것은 착취자와 그들의 폭력깡패들에 맞서 노동자계급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능력이었다. 그것이 독재에 맞선 승리를 보장했다) 기억하는가에 있다.

 

(2008912일에 작성하고, 2008104일에 보완했다.)

 

 

옮긴이: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