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특집 홀러웨이의 맑스주의 본문

실천지 (2007년)/2007년 5월호

특집 홀러웨이의 맑스주의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4. 21:00

홀러웨이의 마르크스주의

 

리 빈포드(Leigh Binford)

 

 

홀러웨이의 마르크스주의는 홀러웨이의 책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Change the World without Taking Power)에 대한 리 빈포드(Leigh Binford)의 비판이다. 홀로웨이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물신화로 인해 자본이 탈 중심화되고 모세혈관같이 미세한 권력으로 전환된다. 그러므로 권력은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신화는 그 자체의 부정, 곧 탈 물신화의 씨앗을 포함하고 있다. 물신화는 사회적 관계들에 정체성을 부여하지만 탈 물신화는 정체성을 부정한다. 계급은 분류(classification)에서 비롯하므로, 이 정체성(분류)에 대한 투쟁들은 모두 계급투쟁이 된다. 그런데 물신화 과정이 일어나는 자본주의 재생산 과정은 실제 일어날 때까지는 보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물신화를 넘어설 가능성(혁명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이런 홀로웨이의 이론에 대해 빈포드의 비판은 우선 홀로웨이의 마르크스주의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각별히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표현이라는 지적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해체주의적 접근 방법에 대한 비판으로, 모든 것이 물신화되고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다면 홀로웨이의 비판 이론도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조를 거부하고 극단적으로 과정을 강조하는 홀로웨이의 해체주의적 방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빈포드는 역사적인 인간의 창조물인 구조화된 사회적 관계들이 계급투쟁의 형태와 결과를 결정짓는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투쟁을 조건지우는 구조화된 사회적 관계들을 분석할 때 유용한 개념으로 빈포드가 제시하는 것은 헤게모니이다. 물신화와 정체성은 사회적 분석에도 정치 행동에도 적절하지 않다.

그 다음 빈포드는 계급과 계급투쟁의 정의 문제를 다룬다. 홀로웨이가 계급에서 분류로 나아간 것에 대해서 빈포드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밀려났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그것의 실천적 의미에 대해서, “포스트모더니즘 속에서는 계급이 아니라 정체성이 중앙 무대를 차지하고, 조직된 정치 운동은 회의적으로 평가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빈포드는 홀로웨이가 제시하는 희망의 메시지, 혁명 가능성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홀로웨이가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정체성으로 환원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빈포드에 따르면, “환원주의적 분석은, 이론이 실천적 혁명 활동과 유기적인 연관을 확립하려 한다면, 사적 유물론이 다루어야 할 문제들을 우회하거나 건너뛰거나 도외시한다.” 홀로웨이의 언어적 수완에 대해 빈포드가 가하는 마지막 비판은 이렇다. “혁명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혁명을 일어나게 만들지는 않는다.”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Change the World without Taking Power: 아래에서는 ?세상 바꾸기?로 줄임)([]?) 권력, 상상력, 심지어는 낙관주의적인 저작이다. 제국주의 전쟁들, 인종주의의 재출연, 과거에는 찾아볼 수 없는 인종 분쟁으로 특징져지는 이 어둠의 시대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우리는 힘이 있고, ‘우리는 자격이 있으며, 나쁜 일이 벌어지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단언하는 것은, 잠재적으로 행동을 고취할 수 있는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를 제공한다. 그러나 나는 이 짧은 글에서, 이 메시지와 ?세상 바꾸기?에서 전개된 겉보기에 엄밀한 것 같은 방법에도 불구하고, 그 책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그 이전의 정식화들을 개선하고 마르크스주의에 접근하는 더 나은 방법의 윤곽을 그린다고 하는 주요한 임무에 실패했다고 주장하려 한다. 비판에 앞서 텍스트에 대해 짤막하게 해설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홀러웨이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물신화의 존재론적 시발점은 생산수단에서 노동자가 분리되는 것과 시장에서 판매하기 위해 재화를 생산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집단적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되는바, 노동자는 시장에서 생산물의 교환을 통해서 물신화된 형태로 그것과 다시 마주친다. 작업장에서 노동자는 차별화되고 구체적인 사용가치로서 노동을 경험한다. 시장에서 노동자는, 사용가치가 무엇이든, 서로 교환할 수 있는 생산물들과 마주친다.

 

 

행위자들 사이의 관계는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굴절된다. ······ 이러한 사물들은 생산자들 사이의 관계의 물신화된 형태이며, 그렇게 됨으로써 이 사물들은 사회적 관계인 자신들의 특성을 부정한다.

 

 

이 생산 체계가 지배적인 것이 되자마자 그것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시각의 모든 측면을 사전에 형상화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지속되는 한 우리는 여전히 물신화된 창조물들이다(적어도 물신화를 둘러싼 투쟁 과정에 몰두하고 있다). 물신화는 주체인 인간 존재의 구성 요소이기 때문에, 변화를 위한 모든 개인의 저항과 진보적 운동은 과정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부에서 전개된다. 그래서 홀러웨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래서 (어떤 이데올로기이론 또는 헤게모니이론보다 오히려) 물신 숭배 개념은, ‘왜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비참함과 폭력과 착취를 받아들이는가?’ 하는 역사가 오래된 질문에 대한 대답에 기초를 제공한다. 물신 숭배는 모든 혁명 이론이 직면한 이론적 문제의 중심을 이룬다.

 

 

물신화는 자본을, 사회와 문화에 배어드는 탈 중심화되고 모세혈관같이 미세한 권력으로 전환시키지만, 또한 물신화는 그 자체의 부정의 씨앗을 포함하는 내적으로 모순된 과정이다. 홀러웨이는 그 부정을 탈 물신화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비명이나 저항의 산물이다. 저항 또는 비명은 적극적인 힘은 아니지만 사물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물신화가 홀러웨이가 행위의 사회적 흐름”(사회적 과정)이라고 부른 것을 중단시키는 바위처럼 단단한 이미지들과 고정된 개념들을 돋보이게 한다면, 탈 물신화는 그 흐름을 복원하기 위하여 이러한 이미지들과 개념들을 부정한다. 물신화가 사회적 관계들에 정체성을 부여하고 이름 붙이고 정의하여 자본주의를 역사 외부로 가져가고 자본주의가 영구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면, 탈 물신화는 정체성을 부정하고 이름을 거부하고 정의(定義)를 훼손한다.

서술한 개념 장치는 무수히 많은 함의를 지닌다. 첫째, 모세혈관 같은 권력 형태와 권력의 탈 중심화된 본성, 게다가 사회적 존재인 생물학적 인간들의 구성 요소로서 권력의 역할은, 권력이 쟁취될 수 없다는 것을 함의한다. (국가 권력 같은) 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그 공격이 자본주의 하에서 주체인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내재화된 권력을 겨냥하지 않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둘째, 모든 권력의 존재론적 원천은 창조적인 노동 과정(여기서는 대체로 행위로 인식된다)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경험하는 종속은, 자신들의 권력이 자신들에게 등을 돌리는 데(살아 있는 노동에 대한 죽은 노동, 즉 생산수단의 지배)에 노동자들이 협력할 때 그 결과로 발생한다. ‘노동 계급’(아래를 볼 것)은 유일하게 강력한 계급이지만, 물신화 과정은 이 잠재력이 완전하게 자각되는 것을 방해한다. 이렇게 볼 때, 비록 고의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종속을 생산한다. 순결한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 계급들은 항상 구성 과정에 있기 때문에 계급들은 정의하기 어렵지만, 계급투쟁은 도처에 편재한다. 네 번째 (논쟁의 여지가 있는) 논점은 모든 투쟁은 계급투쟁이라는 점이다. 홀러웨이의 이론적 근거는, 계급을 좌우하는 것은 분류(물신화)이며 성차별주의인종주의 따위에 대한 투쟁은 강요된 (고정되고 그래서 물신화된) 정체성에 대한 투쟁이라는 것이다. 다음 인용문이 그의 입장을 명확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계급투쟁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구성된 형태들 안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형태들의 구성이 그 자체로 계급투쟁이다. 모든 사회적 실천은 자본주의의 물신화되고 비뚤어진 규정적인 형태들에 실천의 종속과 그러한 형태들에 대항하며 넘어서서 살아가려는 시도 사이의 끊임없는 적대이다. 투쟁의 비 계급적 형태의 존재에 관해서는 의문이 있을 수 없다.

 

 

다섯 번째 논점은 물신화된 형태에 대항하며 넘어서서 살기가 혁명을 촉진하는데 그 시간이 지금이라는 것이다. 계급투쟁은 자본주의 재생산에 내재하며(자본으로부터 노동 그리고 노동으로부터 자본의 상호 도피), 다소 계급 의식적인 노동 계급에 의해 그것에 투사된 외적 요소가 아니기 때문에, 계급 의식적인 당이나 조직(여기서는 상상할 수 없는) 또는 그것에 유리한 경제 위기나 정치적 사태의 전개를 기다리면서 혁명을 연기할 정치적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자본의 재생산은 그것이 실제 일어날 때까지는 결코 보증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적 재생산은 언제나 의문시되기 때문에, 혁명은 늘 존재하는 가능성이다. 자본이 오랜 기간 동안 확대된 형태로 재생산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지나지 않는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그런 식으로 나타남으로써, 그 과정에서 하나하나 극복해야 했던 저항의 항구성을 숨기는, 안정성이라는 물신화된 겉모습을 제공한다. 홀러웨이의 메시지는 예언적이거나 메시아적이지(“우리는 세계를 변화시킬 것이다”) 않고도, 적극적이다(“우리는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구조 없는 과정?

 

먼저 홀러웨이의 마르크스주의가, 이론을 일상생활과 연결시키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강력한 환원주의적 경향을 지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각별히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표현이라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그는 삶의 특성(differentia and specie)을 세 가지 근본적인 개념으로 환원한다. 자본주의, 물신화, 투쟁(저항이나 비명”)이 그것이다. 우리가 일단 모든 투쟁이 계급투쟁이며 물신화는 이 투쟁이 그것을 통해 펼쳐지는 단일한 과정이라는 점을 인식하면,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혁명이 상정되어 있다면, 즉 현재 가능성이 있다면, 투쟁 상태를 (잠시 동안이라도) 기록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가능한지 또는 바람직하기라도 한지?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가정하면, 그것이 실현 가능한지? 그리고 실현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 분석은 물신화와 탈 물신화 사이의 비율이나 균형이외의 어떤 것을 포함할까? 다시 말해서, 하나의 과정에 있는 두 계기를 구별할 특권화된 (물신화되지 않은) 수단을 가정하는 의심스러운 임무 이외에 어떤 것을 포함할 것인가?

물신화의 총체는 구체적인 사회관계에 대한 모든 분석에 문제를 제기하는데, 체계적으로 수행된다면, 그것은 또한 홀러웨이의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접근의 결과에도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이는 얼어붙은 사회관계에 변증법적 비판을 통하여 과정을 복원시키기 위하여 의도된 비판 운동, (물신화를 피하려는 우리의 최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물신화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할 어떠한 독립적인 수단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를 피하는 유일한 수단은 중립적인 평가 수단을 제공할 비판적 (물신화되지 않은) 접근법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일 테지만, 그런 주장은 물신화에 젖어 있는 사회에서 사고의 한 영역이 과정에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외부에 존재한다는 것을 함축할 것이다. 이 딜레마는 모든 해체주의적 접근 방법이 지니는 문제를 예증해주는바, 홀러웨이의 마르크스주의는 (그는 유물론이라고 공언하지만) 이 딜레마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단 아무것도 인식될 수 없다는 주장이 이루어지면, 비판은 역사나 사회관계와 필연적인 연관을 지니지 못하는 논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인식론의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물들은 인식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자본과 자본주의에 대한 단순히 소극적이지 않은 적극적인 개념이 없다면 홀러웨이의 전체 담론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언제 거부하거나 저항할(거부의 비명’) 것인지를 분명하게 알며’, 관계가 (부분적으로) 탈 물신화되었을 때를 안다. , 우리는 진정한 우정, 집단 노동의 가치 같은 것, 사랑 등등을 알거나 인식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논평은 홀러웨이가 과정에 과도하게 관심을 가지고 구조에 대한 고려에서는 도피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물론 레비-스트로스가 제기한 것과 같은 것이나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알뛰세르가 제기한 것과 같은 극단적인 구조주의는 인간으로부터 행위(agency)를 박탈한다. 그래서 역사는 주체 없는 과정이 되고,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영향을 미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관계들의 무의식적인 전달자들이다. 다른 한편, 과정에 대한 극단적인 강조(홀러웨이)는 의미의 역사를 텅 비게 만들어버리는데, 순수한 과정은 이미지의 흐름과 존재의 운동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사회인식언어의 구조들을 박탈당함으로써, 변화하는 의미지들의 끝없는 흐름과 존재의 해석 불가능한 운동을 포함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우리는 존재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통제 하에 두기 위하여 그것을 사회화한다. 분류, 정의(定義), 정체성, 관례, 의식(儀式)은 이러한 목적을 위한 수단들이다. 그것들은 자본주의에 선행하며 포스트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느 정도 수준의 물신화는 (홀러웨이의 의미를 고도로 일반화하면) 어떤 사회에서도 삶의 수단이 될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내가 일찍이 지적했듯이, 홀러웨이는 구조 또한 피할 수 없는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교환관계는 그가 비판한 관계들을 조건지우는, 모든 것에 우선하는 체계를 제공하며 자본주의 시대를 정의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본주의 시대는 자본주의가 어떠한 변형을 겪더라도 이러저러한 형태로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기간이다. 논리적 극단에서, 그의 접근법은 그것의 내적 모순의 중압 속에서 그 자체를 해체한다.

적절한 변증법은 구조적 분석에 내재하는 모순들의 반() 인간주의적 전개를 수반하지도, 머릿속에 머물고 있는 모순들의 초 인간주의적(supra-humanist) 타결(내가 물신화와 탈 물신화 사이의 변화하는 비율이라고 부르는 것)을 포함하지도 않을 것이다. 적절한 변증법은 그들의 결정이 특유한 사회정치경제적 관계에 속박을 받는 인간 행위자들에 의해 착수된 행위에서 나오는 모순적 활동을 수반할 것이다. 이러한 관계들은 초월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역사적이다. 이 관계들은 어떤 순간에도 상대적으로 구조화된다. 다시 말해서 관계들의 그런 조합은 복잡한 방법으로 짜인다. 그리고 이 관계들은 실질적이고 객관적인 사회적 사실들로, 개인들과 집단들의 행위를 속박하고 또한 가능하게 한다.

나의 논점은 구조화된 사회적 관계들이 역사적인 인간의 창조물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관계들은 불평등억압투쟁의 정황 속에서 형성되며, 가단성이 있고(인간이 가공할 수 있다는 의미옮긴이) 투과성이 있으며 해석할 수 있고 일시적이다. 자본주의는 구조화된 관계들의 그러한 조합이며, 자본주의의 모든 문화(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르다)와 자본주의 시대는 서로 포개지고 뒤섞인 다른 관계들을 산출하여,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그것과 관계하는 특정한 사회와 문화를 형성한다. 어떤 시점에도, 이러한 관계들은 사회적 행위자들(개인들과 집단들)이 그 안에서 그것에 따라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는 변수를 구성한다. 그것들은 또한 행위들을 단순한 방식으로 결정하지 않고 그 행위들을 형성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몇몇 사회적 관계들은 지속되고 새로운 조건들에 적응된다. 또 어떤 관계들은 사라지고 다른 관계들이 출현한다. 또한 그러한 관계들은 역사들을 지니는데, 그것을 통해서 그 관계들은 적응변형변질을 겪게 되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계급투쟁은 이러한 구조화된 관계들 속에서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서 일어나는데, 이 관계들이 투쟁의 형태와 결과를 (전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조건지운다.

헤게모니는 이 점에서 유용한 중재 개념이다. 헤게모니는 그람시가 이데올로기적 지배에 붙인 이름이라는 폭넓게 퍼졌지만 잘못된 믿음과는 반대로, 윌리엄 로즈버리(William Roseberry)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동의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투쟁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개념[헤게모니]을 사용한다. 다시 말해 종속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배에 관해서 말하거나, 이해하거나, 맞서거나, 순응하거나, 또는 저항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단어들, 이미지들, 상징들, 형태들, 조직들, 제도들, 운동들이 지배 과정 자체에 의해 형성되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하여 사용한다. 그래서 헤게모니가 구성해내는 것은 공유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지배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사회 질서를 통해서 살아가고, 그것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기 위한 실질적이고 의미 있는 공통의 틀이다. ······ 지배적인 질서가 합법적인 절차의 틀을 수립하는 한에서, 지배적인 질서가 동의를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과 불만 모두를 표현하는 소정의 형태들을 수립하는 한에서, 지배적인 질서는 공통의 추론적 틀을 수립해 왔다.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는 헤게모니를 다음과 같이 특징지었다.

 

 

살아 있는 헤게모니는 언제나 과정이다. 그것은, 분석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체계나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특수하고 변화하는 압력과 한계 안에서 경험들관계들활동들이 현실화된 복합물이다. ······ 더욱이(그리고 이것은 그 개념의 필수적 요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킴으로써 결정적이다), 그것은 단순히 우위의 형태로 소극적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계속해서 새로워지고, 재창조되고, 방어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그것은 또한 계속해서 압력들(모든 압력이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에 의해 저항받고, 제한되고, 변경되고, 도전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헤게모니 개념에 대항 헤게모니 개념과 대안 헤게모니 개념을 더해야 하는데, 이것들이 실질적이고 지속성 있는 실천의 요소들이다.

 

 

헤게모니는 과정으로서 물신화의 많은 장점들을 보유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동의가 아니라) 투쟁에 기반을 두며, 결코 완전하지 않으며, 결과는 사전에 확정할 수 없다. 그러나 헤게모니는 우리가 구체적인 투쟁이 전개되는 조건을 정의하는(홀러웨이가 증오하는 것)을 돕는다는 이점을 지니고 있다.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은 조직되고 지도된 정치적 실천과 결합될 때(그람시의 경우에서처럼) 가장 잘 작동한다. 홀러웨이는 지식인의 역할을 이론적 비판(이론적 실천)에 한정하여, 전략을 짜는 작업은 다른 집단에게 넘겼는데, 이는 적어도 그람시가 결코 승인하지 않았을 노동 분업이다.

마지막으로 더욱 진전된 연구는 물신화헤게모니 개념이 상이한 분석 수준에서 기능하고 있으며, ‘헤게모니가 지배자와 피지배자 양자 모두의 투쟁을 조건지우는 몇 가지 물신화된 형태들(담론들, 이미지들, 상징들, 실천들, 등등)의 정확한 특징과 내적 구성과 의미를 명확하게 하는데 이바지 한다는 점을 드러낼 수도 있다. 그러나, 본래, 물신화 또는 정체성’(물신화의 가장 치명적인 형태)은 사회적 분석이든 아니면, 더욱 중요하게는, 정치 행동이든 어느 쪽의 임무에도 적절하지 않다.

 

 

계급 없는 계급투쟁

 

이 절의 제목은 E. P. 톰슨의 유명한 논문에서 가져왔다. 톰슨은 18세기 잉글랜드에서 평민과 젠트리(지주 계층옮긴이) 사이의 계급투쟁이 전적으로 자본주의적인 계급들의 형성에 앞서며, 계급투쟁 자체가 형성 중에 있는 계급들의 구성 요소라고 주장했다. 홀러웨이는 동의할지 모르지만, 홀러웨이는 계속해서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이 서로에게 가하는 반박/흡인, 그리고 노동자들이 그들의 분류를 채택하고/투쟁할 때 사용하는 모순적인 정체성/탈정체성(dis-identity) 때문에, 자본주의 하에서 계급들은 결코 궁극적으로 구성되지 않는다고 지적할 것이다. “계급투쟁은, 구별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지만, 구성된 계급들 사이의 투쟁임과 동시에 분류하기 위한 투쟁이며 분류되는 것에 반대하는 투쟁이다.” 모든(인종, 젠더 등등) 투쟁은 부분적으로 분류에 반대하기 때문에, 모든 투쟁은 계급투쟁이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거의 모든 사람이 분류에 반대해 투쟁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노동계급이다/아니다. 이 도식은 그 단순함과 간결함 때문에 매우 매력적이다. 자신의 철학적 마술 지팡이를 흔들며, 홀러웨이가 수백 명의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이 인종, 페미니스트, 녹색, 그리고 수많은 다른 정체성을 연구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면서 직면했던 모든 끈적끈적한 사회역사 문제들을 간단하게 무시했다는 점은 논점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과정 중에 있는 계급들에 대한 홀러웨이의 전망은 지배 집단들에 대한 분석 때문에 문제를 낳는데, 그의 담론 논리에 따르면, 지배 집단도 지배받는 집단들처럼 과정 중에 있는 계급들이며 그래서 정의할 수 없다(이름을 붙일 수 없다). 모든 사람이 물신화의 과정에 빠져 있다면(어느 누가 어떻게 어떤 수준에서 분류를 피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형성 중에 있는 동일한 계급의 구성원이며, 자본가도 노동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계급 없는 자본주의. 이것을 피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 어떤 사람들은 분류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분류한다(정체성을 배정한다)고 규정하는 것. 그러나 그것은 물신화에 한계를 설정하게 될 터인데, 이는 그 이론에서 고려되지 않은 것이다. (2) 자본가들이나 지배 계급들은 다른 사람들의 노동력을 경제적으로 착취한다고 규정하는 것. 책의 몇 부분에서 홀러웨이는 우리는 계급의 원수들을 증오한다고 말하지만, 홀러웨이가 그들이 누구인지 가장 근접하게 설명한다고 할 만한 것은 147쪽에 나온다. 거기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들(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노동의 전유와 착취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그리고/또는 그것으로부터 직접 이익을 얻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노동의 전유와 착취에 직접적으로참여하는 것은, 구조화된 경제적 관계들에 기초를 둔 지명(指名), 바로 홀러웨이가 종속된 집단들에 대한 자신의 연구에서 피하려고 했던 것에 위험스럽게 근접한다. 후자에 관해서 홀러웨이는 경제적 사항의 중요성을 축소시킨다. 이것은 그가 착취를 다음과 같은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정의할 때 그러하다.

 

 

노동의 착취일 뿐 아니라 동시에 행위가 노동으로 변화하는 것이며, 주체가 탈 주체화하는 것이며, 인간성이 탈 인간화하는 것. ······ 착취는 비종속적인 창조성의 억압(그리고 재생산)이다.

 

 

그러면 그들의 삶이 뒤집혀진 사람들(치아빠스의 원주민, 대학교 교원들, 석탄 광부들, 거의 모든 사람들)”을 종속된 사람들 사이에 포함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마지막 장에서, 홀러웨이는 이런 사고를 더욱 진전시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비록 매우 모순적이고, 물신화되고, 억압된 방식에서이긴 하지만, 우리 모두가 혁명가들이다.” 이것은 우리를 위에서 말한 첫 번째 논점으로 돌아가게 만드는데, “우리 모두가 혁명가들이라면, 착취자도, 자본가도, 체계의 혜택을 입는 자도 없기 (그리고 우리 모두를 관통해 흐르는 모세 혈관 같은 권력 체계 외에 그것에 저항하는 혁명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푸코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우리가 경제적 경로를 따르고 종속된 집단들은 노동의 전유와 착취에 직접적으로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든지, 아니면 우리는 폭넓고 비경제적인 경로를 따라 착취를 개념화한다. 후자의 경우에 우리는 다수의, 고용되어 급료를 받는 관리자들, 중재자들, 관료들, 그리고 보안부대의 구성원들을 포함하도록 적들의 집단을 크게 확장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기본적인 사회적 역할은 비종속적인 창조성의 억압을 수반한다. 첫 번째 경로는 홀러웨이를 구조화된 경제적 관계로 나아가게 하고 그래서 그가 피하려고 했던 계급 접근법에 이르게 한다. 두 번째 경로는 착취적인 계급 개념에 문제를 제기하여 그 개념의 경험적인 지시대상을 그가 제한하려 하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을 넘어서 크게 확장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착취 받으면서 어떤 사람들을 착취하는, 모순적인 사회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아주 크고 차별화된 계층들을 분석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체제로부터 고통을 당하면서도 체제로부터 이익을 본다. 여성 공장주, 소수 인종 사업가, 소비자들에게 전가하려고 하는 원가 압박을 받는 모든 부류의 중개인, 개인적 특성의 창조적인 프로젝트를 추구할 기회를 부여받은 대규모 전문직 계층 등등이 여기에 속한다. 환원주의적 계급(또는 계급투쟁) 개념은 차별화되고 종종 모순적인 위치를 수반하는 복잡한 계급 관계의 물질적비물질적 비용과 이익을 검토할 이유조차 우리에게서 빼앗는다. 추상적인 철학 논의가 구체적인 사회학 분석(그 자체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방법론과는 상반되는 물신화된 사고의 표명으로 여겨질 수 있다)을 대체한다. 실제로, 그것은 그러한 분석을 필요 없게 만든다. 그런데 이것은, 내 생각에 홀러웨이가 그것에 대항에 싸우길 원할, 물신화된 사회과학적 추론의 발현이다.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은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유물론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세상 바꾸기?의 서두에서, 홀러웨이는 자신의 개념 장치가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고무받은 것임을 독자들에게 확인시키기 위해 애를 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뒤로 읽어 가다보면, 그는 ?자본론?정신으로 논의한다. 한 가지 중요한 이탈은 계급에서 분류로 나아가는 것과 더불어 나온다. 홀러웨이는 물신화를 낳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교환의 본래의 물질적 상태를 언급함으로써 이 이동에 근거를 마련하려고 시도하는데, 그것은 주관성을 가득 채우고 있으면서 객관적 사회 관계 속에서 표출되는 사회 체제를 통해서 확대된다. 일단 자본주의가 확립되면(이것으로 내가 의미하는 바는 자본주의가 전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제거하거나 종속시켰다는 것이다), 새로운 주체들이 그러한 물신화된 관계들 속에서 그리고 그 관계들을 통해서 형성된다. 마르크스주의 유물론(분석은 이것으로 시작된다)은 좌파 포스트모더니즘에 밀려나는데, 포스트모더니즘 속에서는 계급이 아니라 정체성이 중앙 무대를 차지하고, 조직된 정치 운동은 회의적으로 평가되고, 물신화는 주체에게 해체되고 파편화된 실재를 제공한다. ‘계급투쟁의 도처에 존재하는 성격과 내재성에도 불구하고, 거의 언제나 혁명의 시간이라는 홀러웨이의 확신에 찬 주장을 받아들이는 일은 엄청난 신념의 도약을 요구한다.

 

 

 

혁명

1976년에 뉴 레프트 북스(New Left Books)는 저자가 서구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른 것에 대한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의 짧은 평가서를 출판했다. 앤더슨은 어떻게 선진 산업 세계에서 의회 민주주의의 안정, 전후 자본주의의 장기적인 유례없는 호황”, 그리고 소비예뜨 블록의 생존이, “사적 유물론 내부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지적 배치를 전개시킨 변경된 우주를 구성했는지에 주목했다. 앤더슨은 그러한 배치에 서구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것은 경제학과 정치학에 대한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관심에서 떨어져 나와 철학(특히 인식론), 예술, 문화로 전환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마르크스주의는 1924년에서 1968년까지 중단되지 않았지만, “모든 혁명적 정치적 실천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면서 나아갔는데, 앤더슨은 그것을 패배의 산물이라고 분석한다. “사회주의 혁명이 러시아 밖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러시아 안에서 혁명이 타락한 원인과 결과는 이 시기의 전체 이론적 전통에 공통된 배경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그것을 생산한 사회적 상황(앞에서 언급한 구조화된 사회역사적 관계의 복합적인 결과의 한 사례)을 극복할 수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적 대중의 실천 활동과 밀접한 연결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유럽과 아시아에서 있었던 파업 활동의 물결과 파리(그리고 세계의 다른 여러 곳)에서 일어난 19685월 사건은 앤더슨에게 사적 유물론의 창시자들을 낳았던 상황을 재창출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변형시킬 이론과 실천의 재통합에 대한 희망을 품게 했다. 그러한 조건은 무르익지 못했다. 다음 20년의 과정을 거치면서, 노동 계급이 얻은 것은 원래 수준으로 되돌려졌고, 노동자들의 조직은 약화되었으며, 소비예뜨 블록은 붕괴했고, 3세계 혁명은 패배했다. 공산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주의로 이행할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희박해 보였고,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것을 인정하면서 예언된 역사의 종말”(역사 발전을 폐기하고 자본주의 문명이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점이라는 선언옮긴이)에 항복하고 자본주의의 시류에 편승했다.

명예롭게도 홀러웨이는 유행에 굴복하지도 않았고, 일상의 투쟁들과는 동떨어진 미학이나 인식론에 대한 난해하고 비밀스런 연구에 빠지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제시하는 혁명 이론이 현대 자본주를 이론화하고 자본주의의 거대 전차를 저지할 수 있는 대중 운동의 유형을 세우고 혁명적 변화를 위한 객관적 조건을 창출하는 데 수반된 어려운 작업의 포기를 나타낸다고 주장할 것이다. 언어적 수완에 의해, 계급은 분류로 환원되고, 차별화된 사회적 위치의 문제(단순히 외관상의 것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객관적인)정체성이라는 단일한 문제로 환원되었는데, 정체성은 홀러웨이에게 존재의 가장 치명적인 형태이며 생성이나 사회적 과정의 복원에 주요한 방해 요소이다. 추론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일련의 분석적실천적 난점들을 제거함으로써, 저항은 투쟁이며 모든 투쟁은 계급투쟁이다. 그리고 혁명은, 최소한의 조직을 가지고 모세 혈관 같은 체제가 붕괴할 때까지 권력의 가장자리에 구멍을 내는 수백만의 억압된 영혼들의 선의가 운 좋게 계속되는 것처럼 보인다. 대안을 구성할 물질적 자원이 재산 몰수 자체에서 나오는 않는다면 어디서 나올지 분명하지 않지만, 자본가의 재산(생산수단)의 몰수는 자본[() 권력]의 범위를 넘어서는 대안의 창조에 부차적이다. 그리고 국가가 내부의 경제 업무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점차 외부의 정치적 압력에 민감하게 됨과 동시에, 국가는 계속해서 내적 규율을 행사하며 종종 그 과정에서 국경 안에 거주하는 인구들에 대해서 폭력을 휘두른다는 관찰이 빈번함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목표로서뿐 아니라 혁명의 장벽으로서, 국가는 크게 축소된다.

요컨대, 노동 계급의 패배라는 현 상황전후 낮은 수준에 있는 공식적으로 조직된 노동 계급, (사회 운동들로 확산된) 정체성 파편화, 개인주의, 미국 군대의 지배에서 혁명을 의제에 올리는 유일하게 상상할 수 있는 방법은, 대규모(Grand Canyon proportions) 신념의 도약을 통해서 그리고 자전거로 30도 경사진 곳을 추진하여 올라가 허공을 가름으로써 넓게 갈라진 틈을 메우려 한 이벨 니벨(Evel Knievel: 오토바이 점프로 유명한 스턴트 맨옮긴이)에 상응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저자는 희망을 제시하는데, 희망은 확실히 변화를 위해서 중요하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환원주의적 분석 때문인데, 이 환원주의적 분석은, 이론이 실천적 혁명 활동과 유기적인 연관을 확립하려 한다면, 사적 유물론이 다루어야 할 문제들을 우회하거나 건너뛰거나 도외시한다. 가까운 과거와 현재의 세계 정세에서, 환원주의(부정적인 징표를 무시하거나 더욱 좋게는 부정적 징표들을 긍정적인 징표들로 전환시키는 것)를 강하게 사용하는 것이 혁명을 곧 있을 의사일정에 올리는 유일한 방법 가운데 하나라고 제안하는 것은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홀러웨이가 틀림없이 동의할 것처럼, 혁명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혁명을 일어나게 만들지는 않는다.

 

 

참고문헌

Anderson, Perry 1976, Considerations on Western Marxism, London: New Left Book.

Binford, Leigh 1999, 'Hegemony in the Interior of the Salvadoran Revolution: The ERP in Northern Morazán', Journal of Latin American Anthropology, 4, 1: 2-45.

Crehan, Kate 2002, Gramsci, Culture and Anthropolog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Holloway, John 2002, Change the World without Taking Power: The Meaning of Revolution Today, London: Pluto.

Roseberry, William 1994, 'Hegemony and the Language of Contention', in Everyday Forms of State Formation, edited by Gil Joseph and Daniel Nugent,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Thompson, Edward P. 1979, 'La Sociedad inglesa del siglo XVIII: Lucha de clases sin clases?', in Tradición, revuelta y consciencia de clase: estudios sobre la crisis de la sociedad preindustrial, Barcelona: Editorial Crítica.

Williams, Raymond 1977, Marxism and Literatur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옮긴이 : 김종원

'실천지 (2007년) > 2007년 5월호' 카테고리의 다른 글

(pdf) 기획3  (0) 2014.12.15
(pdf) 기획 1  (0) 2014.12.15
특집 사회주의 페미니스트가 맑스에게 보내는 편지  (0) 2014.12.14
(그림) 정세분석 2006의 교훈  (0) 2014.12.14
소비에트 다시보기  (0) 2014.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