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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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2007년)/2007년 11월호

[한글만]광풍처럼상승하는중국의계급투쟁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4:33

중국에서 거세게 솟구쳐 오르는 계급투쟁

 

 

Bruce Boon

 

 

 

200635일 일요일, 계급투쟁이 늘어나자 국가기관이 깜작 놀란 그 순간에 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연례적인 전체회의를 열었다. 늘어나는 소득 격차와 그 탓에 터진 사회적 폭발은 지배 관료와 자본가의 이익을 위협하고 있으며,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의제 가운데서도 일차적인 항목이었다. 소요를 진정시킬 목적으로, 115개년 경제계획은 명목상 보다 균등한 부의 분배와 새로운 사회주의 농촌 건설에 초점을 맞추었다.

물론 중국은 더는 실질적인 계획경제를 갖고 있지 않으며, 예전처럼 계획을 하는 척 하는 관료들의 흉내조차 없다. 지난 10여 년 동안 계획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지배집단이 한 유일한 일은 얼마나 많이 사유화할 것인가를 계획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꽤 경제성장을 가져 왔다 해도, 그것은 마오(모택동) 시대 동안 노동자 농민이 사회적 승리로 얻은 것들을 희생한 것이었다. 때때로 이른바 전문가들은 중국의 경제성장이 마오의 죽음 뒤에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뻔뻔스러운 거짓말이다. 실제로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연평균성장이 더 높았다. 대약진운동의 혼란, 문화대혁명의 혼란, 나아가 그때 중국이 스스로 세계 시장에서부터 고립되어 있었음에도 그랬다.

시장 개혁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에서 마틴 하트-란즈버그와 폴 버켓은 다음과 같이 썼다.

 

 

사실 1970년대 말 중국 경제는 특히 공업에서는 재앙과 거리가 멀었다. 이를테면 1952년부터 마오 시대가 끝날 때까지 공업생산은 해마다 평균 11.2% 비율로 늘어났다.

 

 

비록 소득이 늘었지만, 자본주의가 중국에 다시 도입되자, 많은 평범한 민중의 삶에는 부정적인 결과가 생겼다. 2006320일자 중국청년일보에 따르면, 85.3%의 사람들이 10년 전과 비교하여 지금 더 삶의 짐이 무겁다고 느끼고 있다. <중국매일신문> 조사센터와 <시나닷컴> 뉴스센터의 연구에 따르면, 78.8%의 사람들이 소득이 증가하였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85.3%가 현대생활의 스트레스와 긴장을 더 무겁게 겪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 10년을 지나면서, 교육·의료·주택에 대한 개인 지출이 가파르게 상승하여 왔다. 그 조사에 따르면, 민중들에게 최상위 3대 지출은 주택·교육·보건이었다.

<세계은행>과 중국정부를 포함한 다양한 소식통으로부터의 판단을 종합하면, 소득 불평등이 1970년대 후반 이래로 최소한 50% 증가되어 왔으며, 중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불평등한 사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공영 <신화통신>이 인용한 정부 연구에 따르면, 중국 인구의 가장 부유한 20%가 전체 소득의 50%를 벌고 있는데, 최하위 20%는 단지 4.7%만을 벌고 있다.

 

 

합리적인 한계를 넘어선 소득불평등은 더욱 확대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러한 방식이 장기간 지속되면, 다양한 종류의 사회 불안정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위 연구)

 

 

농민은 최악의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정부통계에 따르면, 2005년 도시주민의 1인당 순소득이 1,292달러인 것에 반해, 농민의 1인당 순소득은 402달러 80센트였다. “게다가 격차는 확대되고 있다고 농업재정 담당 공산당 고급 관료인 첸지웬은 말한다. 하지만 1인당 소득으로는, 도시 신흥 부르주아와 중간계급과 구분해서 도시 노동자의 소득이 얼마인가를 알 수 없다. 베이징의 호화로운 술집에서 마시는 식전 반주의 가격은 농장 노동자의 한 달 치 임금에 해당한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의 도시 빈곤은 [수십 명의 경제학자들을 인용한 <중국청년일보>에 따르면] 국가 경제의 부흥에도 불구하고 더욱 악화되어 왔다. 그 문서에서 경제학자들은 도시 주민들의 빈곤 비율이 6~8%로 이제 농촌 주민들의 경우보다 높다고 말했다. 도시로 이동한 농민들, 국유기업에서 해고된 노동자들, 자원이 소진된 도시의 주민들, 오로지 연금에 의존하는 나이 든 시민들은 도시 빈민층의 가장 큰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마오 통치 시절에 중국은 [소련이나 쿠바 같은 다른 변형된 노동자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나머지 이전에 식민지였던 국가들보다 훨씬 우수한 사회보장 체제를 구축했었다. 오늘날 평범한 중국인들을 위한 기본 서비스는 갈수록 퇴보하는 중이다. 중국은 핵심적인 사회보장, 특히 교육과 공공보건에 대한 투자를 축소하고 있다.

1990년대에 교육에 대한 총지출 가운데 정부지출 몫이 거의 20%로 줄어들었다. 농촌 지역에서는, 베이징 중앙정부가 농촌 교육을 위한 재정에 단지 1%만을 제공한 데 반해, 교육 예산의 78%가 지방세와 수업료를 통해 농민들로부터 조달되었다. 연구들에 따르면, 초등학교를 나온 시골 어린이가 중등교육에 탈락하는 비율은 평균 30~40%에 이른다. “1990년대 농촌 청년 교육에서 국가의 중대한 실책이야말로 중국에서 보고되지 않은 가장 중대한 이야기다.” MIT 슬로안 경영대학의 야솅후앙은 말한다.

공중보건에서, 잘못된 지출의 결과는 더욱 심각하다. 1980년대에 전체 보건지출 가운데 36%를 차지했던 정부지출은 2000년에 15% 이하로 추락했다. 중국은 많은 병원과 설비들을 갖고 있으며, 1인당 보건지출이 비슷한 개발도상국들보다 높다. 그러나 이러한 자원들이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중국 의료 시스템의 공정성이 브라질과 버마를 제외하면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등급에 있다고 평가했다. 중국 보건부에 따르면, 주민의 2/3가 어떤 형태의 의료보험에서도 제외되어 있으며, 환자의 절반가량이 전문적인 의료 시술을 전혀 접하지 못하고 있다. 농촌에서는 보건비용의 거의 90%를 개인들이 부담하고 있다.

농촌에서의 참기 어려운 조건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나오고 있다. 지금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2015년까지 추가로 3억 명 정도가 도시를 향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가히 세계 역사상 가장 거대한 이주가 될 것이다. 국유기업 사유화 과정에서 해고된 엄청나게 많은 노동자들과 함께 이들 도시로 이주한 농민들은 오늘날 살아가려면 그들의 노동력을 팔지 않을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대규모로 형성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에서의 자본 형성, 즉 맑스가 원시적 축적이라고 불렀던 것을 이루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민족 자본가 계급의 형성

 

마치 19세기 유럽에서처럼, 중국의 자본가 계급은 공정한 경쟁이나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위를 이용한 부정이득, 부패, 노골적인 도둑질을 통하여 탄생하고 있다. <아시아 타임즈> 2006216일자 기사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기업가들의] 과거는 탈세, 뇌물수수 또는 더 나쁜 사례들을 감추고 있다. 이러한 죄악은 계획경제로부터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과정이 진행 중인 데 따른 것이다.

 

 

자본주의는 국유기업의 대규모 사유화라는 계획경제의 잔해로부터 건설되어져 왔고, 건설되는 중이다. 이 과정은 중국공산당의 고참 당원이 쓴 편지에 묘사되어 있다. (향후 우리는 답장을 보낼 것이다.)

 

 

중국의 근로대중이 아무 것도 없이 시작하여 수십 년 동안 피와 땀으로 고통스럽게 쌓아올린 부를 관료들과 자본가들이 서로 짜고 약탈하여 그들의 사금고 속으로 집어넣고 있다. 국유기업들은 사기업들의 거대한 보따리를 살찌워 왔다. 국유기업들의 피를 빨아먹으면서 다수의 사기업들이 하룻밤 사이에 엄청나게 부유해지는 동안 이 국유기업들은 너무 많은 피를 잃어서 하루 사이에 홀쭉이가 되어가고 있다. ‘국유기업 소유권 개혁이라는 그럴싸한 껍데기 아래, 인민의 부를 약탈하고 분배하는 향연이 벌어지고 있다.

그 결과 부패관료, 기회주의자, 기업 경영진의 모든 계층이 살찌워지고 있고, 억만장자 떼거리가 만들어지고 있으며, 국유기업은 일격을 맞고 심각하게 약화되고 있다. 덧붙여 공적 소유가 우위에 있다는 반복된 선언은 현실과 부합하는 데 철저히 실패하였으며, 국가 전체와 민중은 황폐해지고, 노동자와 농민은 다시 한 번 자본의 노예 상태로 빠져 들었다.

 

 

이러한 원시적 축적의 과정은 이제 더 거대한 규모로 확산되고 있다. 중국의 도시와 농촌을 공히 망라하여 많은 지역에서, 지방정부 관료들과 땅을 찾는 건설회사가 결탁하면서 접수된 토지, 파괴된 집, 이전된 삶의 터전에 대해 있다 해도 아주 조금의 보상만이 이루어지고 있다. <UN 개발 프로그램>에 따르면, 이러한 무자비한 축출로 농민 5천만 명이 그들의 땅으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못 받거나 조금의 보상만 받은 채 내쫓겼다. 비슷한 과정으로, 정부 재산을 조작해서 판매하는 담합 거래가 널리 확산되고 있으며, 이는 많은 경우에 해고나 시설폐쇄를 수반하고 있다.

중국의 평가에 따르면, 2003년 이후 농업용지를 공업용지와 주거용지로 판매한 금액이 대략 5조 위안(6천억 달러 이상)에 달했다. 하지만 그 돈의 단지 10%, 600억 달러만이 농민에게 갔다. 이와 관련해서 <아시아 타임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판매이익의 90%가 어디로 갔는지를 고찰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5천억 달러 이상이 지방 금고로 들어가 지방 행정관들과 그들의 수요에 충당되었으며, 또한 지방 관료들의 호주머니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냉소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뇌물은 관료들에게 시장 개혁에 찬동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필수적이다. 이처럼 가시적이고 매우 구체적인 인센티브 때문에, 관료들은 경제개발을 방해하지 않고 밀어 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관료들과 그들의 친구들은 이전에 가난으로 찌들었던 농지에 새로운 중간계급과 부유한 계급을 탄생시킨다. 그러나 판매금액의 아주 적은 부분만이 농민들에게 돌아간 까닭에, 농민들은 그 과정 바깥에 아마도 이전보다 더 가난한 채로 남겨져 있다. 보다 많은 금액이 그들에게 지불되었다면, 그들은 다른 일을 시작할 약간의 자본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에 새겨야 할 두 가지 고려사항이 있다. 중국의 성장은 값싼 노동자들에 의해 성취되어 왔다. 만일 농민들이 갑자기 보다 부유해진다면, 이것은 값싼 노동자들의 부족을 만들어 낼 것이고, 도시 물가를 상승시키며, 아마도 인플레이션을 촉발할 것이다. 게다가 농촌에는 그 지방 특유의,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부패가 있다.

 

 

<스트랫포>의 조지 프리드만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것은 중국 산업화의 정점에서 중대한 과정이다. 강제거래를 포함한 토지 구매는 중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중국의 경제발전은 토지보다는 부패에 의해서 더 추진되어 왔다. 쫓겨나는 농민들이 내버려지는 것을 베이징 중앙정부가 특별히 바라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농민들에게 지불하도록 기금이 조성된다. 그러나 기금 유용이 그 과정 속에 깊이 들어 있다. 그것은 중국에서 자본형성을 위한 주된 수단 가운데 하나다. () 표면 아래서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중국 경제는 굉장한 보폭으로 성장해 왔다. 이것은 중국 경제가 매우 건강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일어난 결과가 아니며, 그렇다고 많은 산업 프로젝트들이 경제적으로 적합하기 때문도 아니다. 사실 베이징 정부는 새로운 프로젝트들이 때때로 경제적으로 상당히 적합하지 않다는 입장을 매우 분명히 밝혀 왔으며, 그것들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렇다고 모든 경우에 광역지방정부 또는 지방정부가 반드시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중국은 넘어지지 않으려면 매우 열심히 달려야 하는 상황이다. 자본은 거의 없이 주로 차입에 의존하는 프로젝트들을 계속해서 추가로 만들어 내는 이른바 기업가 관료주의 속에서, 과거의 실패한 프로젝트들을 안정화시키는 데 소요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새로운 투자 프로젝트들이 요구되고 있다. 지불기일이 다가오는 은행부채들로 시달릴 때, 그리고 시스템 속에서 누군가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돈이 널리 퍼져 나가야 할 때, 속도를 줄여 튼튼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 그것은 공격적인 경제성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토지 갈취를 포함한 대규모의 사회적 탈선이 중국 체제 안에 내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발화점은 급속히 확산되는 공장과 땅을 가진 농민 사이의 경계면이다. 관료적인 기업가들은 땅을 원할 뿐만 아니라, 합법적으로라면 농민들에게 주어져야 할 돈까지 원한다.

 

 

 

자본가들로 전환한 공산주의자들

 

새로운 자본가 계급의 핵심은 공산당과 국가기구의 전직 또는 심지어 현직 구성원으로 형성되어 있다. 트로츠키가 소련을 놓고 예견했던 그대로다.

기업가 3,635명에 대한 2002년 조사에 따르면, 30%는 공산당원이고, 35%는 정부의 고급 자문단인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로 충원된 자들이었다. 대만, 동남아시아 등에 있는 중화구역 출신의 자본가들을 제외하면, 새로운 자본가들의 대다수는 전직 관료이거나 국유기업 경영자였다. 대규모·중규모 국유기업에서, 공산당 비서와 이사회 의장은 거의 언제나 같은 사람이었다.

 

 

2001년 현재 공사화된것으로 분류된 대규모·중규모 국유기업 6,275개의 70%에서, 당 위원회 구성원은 곧 이사회 구성원이었다. 2003년에 당 관료 530만 명이 국유기업에서 간부 지위를 갖고 있었는데, 이는 전체 당원의 8%이며 도시 당원의 16%였다. ()

부패는 이제 체제 전반의 쇠퇴와 통상적으로 결합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많은 수의 관료들이 연루된 부패는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지방정부 데이터에 따르면, 당국이 밝혀낸 전체 부정이득의 30~60%가 거대한 부패 고리에 의한 것이다. 몇몇 가장 나쁜 경우에는 광역지방정부, 중급지역정부, 기초지역정부가 모두 썩어빠진 것으로 드러났다. 헤이롱장 지방에서는 부패 스캔들에 400명 이상의 지방 관료들이 연루되었는데, 여기에는 전직 성장, 전직 공산당 지방위원회 조직부장, 부성장, 수석 검찰관, 지방고등법원장, 그 지방의 당 주임 13명 가운데 8명이 포함되었다. ()

중국의 지배 엘리트는 명백히 표류하고 있으며 불안정하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두려워하며, 일부 관료들은 그들의 권력을 재산으로 전환하는 데 불과 몇 년조차 기다리려고 하지 않는다. 2002년에 뇌물수수로 기소된 관료들의 약 20%, 권력남용으로 처벌받은 관료들의 약 30%35세 미만이었다. ()

한 세대 전에 지배 엘리트의 자식들은 정부나 군부에 자리를 얻었지만, 오늘날에는 사업을 하러 간다. 그들의 사적 거래가 낳은 사회적 결과는 특히 현실의 재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농부는 그들의 땅이 가진 가치의 5% 미만을 받지만, 개발자들의 호주머니로 60%가 들어가고, 나머지는 지방정부 금고로 들어간다. 또한 사유화는 국가재산을 값싸게 먹어치우는 것을 통해 횡재할 기회를 내부자들에게 제공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사유화된 국유기업의 60%가 그 경영자들에게 팔렸다. 그 결과, 이제 모든 사기업 소유주의 30%가 당원들이다.

 

 

마오(모택동) 시대 동안에도 국가는 관료들의 이해관계를 방어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창카이쉑(장개석)의 부르주아 민족주의가 생산력을 발전시킬 능력이 없었던 상황에서, 창카이쉑의 썩어빠진 자본주의에 일격을 가함으로써 대중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시장 개혁을 도입하면서 한 시대에 걸쳐 거대한 관료층과 그 일가들이 자본가들로 전환되었다. 국가기구는 노동자들에 맞서 이 초기 부르주아들의 이해관계를 방어하고 있다. 자본주의 복고의 발걸음, 그리고 노동자 농민의 저항에 대한 가혹한 탄압은 이것을 입증한다.

좌파와 우파 양쪽에서, 어떤 사람들은 중국이 여전히 사회주의에 입각한 국가라고 주장하는데, 여전히 존재하는 거대한 국가산업과 이러한 기업들에서의 공산당 지도자들의 역할을 논거로 제시한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중국의 국가산업은 GDP30% 가량을 차지하며, 국유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을 놓고 보자면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다.

그러나 국가산업이 곧 사회주의와 같은 것은 아니다. 많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상당수의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국유기업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결코 사회주의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기업들은 비록 사적인 수중에 있지는 않지만, 자본주의적 기반 위에 조직되어 있다. 이를테면 그 노동자들은 계약관계라는 기반 위에 있다.

노동자 국가에서 국가산업은 전적으로 다른 성격을 갖는다. 건강한 노동자 국가에서 그러한 산업은 이를테면 노동자 통제와 노동자 경영 아래서 운영될 것이다. 마오 시대의 중국과 같은 변형된 노동자 국가에서도 국가산업은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갖는다. 과거에 국유기업들은 주택, 연금, 의료 등을 노동자들에게 제공했다. 노동자들은 고용안정을 누렸다. 1980년대가 되어서야 계약관계에 입각한 노동자가 다시 도입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아래서 국가산업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방어하는 국가에 의해 국가 전체의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버팀목으로 사용된다. 이것은 우리가 융커 통치 아래 독일에서, 에너지 분야를 국유화한 대다수 유럽 국가들에서, 석유를 국유화한 베네수엘라 제4공화국에서, 은행을 국유화하고 5개년 계획까지 도입했던 박정희 군사통치 아래 한국에서, 그리고 기타 등등에서 보았던 것이다.

30년간의 시장개혁 이후 오늘날 중국에서 자본주의는 생산의 지배적인 형태가 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사적 소유는 노동자들에 적대적인 강력한 국가에 의해 방어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초기 부르주아는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해서도 강력한 국가를 필요로 한다. 그들은 국가가 제국주의의 이해관계에 굴복하였을 때 러시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또는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았다. 오늘날 한국 자본의 가장 큰 덩어리들이 외국계 다국적 자본에게 팔려나갔다. GM은 대우자동차를 인수했고, 르노는 삼성자동차를 인수했으며, 필립스는 엘지전자의 자회사인 엘지LCD 지분의 50%를 인수했다.

공산당 지도자들은 중국 자본가들이 거대 제국주의에 맞서 경쟁하기에는 아직 충분히 강하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다. 국가통계국의 수장이며 자본주의 노정의 방어자인 리데쉬는 공영 <신화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외국 기업들이 장애물 없이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중국의 경제 안전과 민족 주권을 위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만일 다국적 기업이 자유롭게 적대적 인수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중국 민족 산업의 자주적인 브랜드와 혁신 역량은 점차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당장에는 국가 수중에 전략산업을 유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계속해서 민족 자본가들을 육성하고 있다. 그러나 주된 논리는 자본주의를 방어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중국을 사회주의 국가라고 거의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중국의 지도력에 모순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자본주의 옹호자들과 진정한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모순이라기보다는, 얼마나 빠른 속도로 나아갈 것인지를 둘러싼 모순이며, 자본주의 노정에 맞선 점증하는 저항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둘러싼 모순이다.

농민과 노동자의 저항이 성장하는 것에 압박을 받으면서, 2006<전국인민대표대회>가 분열되었다. <국무원발전연구중심>의 수석 경제학자이며 정부의 고급 두뇌인 우징랸은 차이가 무엇인가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진정한 시장경제를 원하는가 아니면 관료적 자본주의를 원하는가가 논점이 되면서, 또한 상황이 복잡해지면서, 개혁을 전진시키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인용을 놓고 볼 때, 그가 어떤 방향을 선호하는지는 명백하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개혁에 여유를 주고 상황을 안정시키기를 바라고 있다. 사적 소유권을 강화하는 법률 같은 몇몇 친자본주의 조치들이 이미 연기되었다.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200510월 회의에서 물권법 초안을 꼼꼼히 검토했다. 중국은 이미 지적 소유권에 대한 발효된 법률을 갖고 있으며, 물권법을 통해 사적 소유에 대한 합법적 보호가 보다 강화될 예정이었다. 물권법 초안은 <전국인민대표대회> 2006년 연례회의에서 통과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하지만 20058월 북경대학 법학교수이며 공산당 당원인 공시엔티엔이 물권법 초안은 사회주의 원칙을 위반하고 있으며, 중국 사회주의 경제의 기초를 허물게 될 것이라는 공개서한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 보냈다. 그는 물권법 초안이 모든 사람의 권리가 보호될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극히 부유한 소수의 물권을 보호하는 데 본질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부자의 리무진과 거지의 막대기를 평등하게 보호한다.” 그는 풍자적으로 덧붙였다.

공시엔티엔의 탄원은 고위 당국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비록 <전국인민대표대회> 법률위원회 위원장인 양징유가 그 탄원 때문에 물권법 초안 처리를 보류하는 것은 아니라고 부인하였지만, 그 법안이 전국적인 운동을 야기하는 초점이 될까 두려웠기 때문에 지도부가 법안을 처박아 두게 되었다는 것은 명확하다. 전국적인 규모의 조직화야말로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회적 불안의 조짐이 아직 전국적인 위기를 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지역적 사건의 참여자들은 아직 대중적 호소력을 가진 일반화된 운동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건들은 임금 미지급, 높은 세금, 토지강탈 등 특정한 불만에 의해 촉발되고 있다. 반란 성향의 전국적 운동을 피하기 위하여, 정권은 고용과 소득을 제공할 수 있도록 경제가 8~10%로 고속 성장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의 근원이다.

시장을 향한 전환이 높은 성장을 가져다주었지만,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에 전형적인 깊은 경제적 모순을 가지고 왔다. 중국은 고전적인 과잉생산의 위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중국의 경제계획자들은 2006년 초반에, 11개의 주요 자본집약 제조업이 과잉생산에 빠졌다고 밝혔다. 이를테면 중국의 철강 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데, 30%에 달하는 11,600만 톤의 과잉 용량을 갖고 있다. 또 다른 지표는 오늘날 자본주의 경제를 위한 주요 동력인 외국인 투자다. 마이클 로버츠는 <성공의 완전한 원형>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만일 외국인 투자가 감소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G7 국가들이 쓸 돈이 적어졌거나 아니면 중국 노동자들로부터 충분한 이윤을 취할 수 없을까봐 그들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005년에 외국계 자본은 중국에 580억 달러를 투자했다. 그것은 매우 높은 수치지만, 그러나 2004년보다는 약간 감소한 것이다. 바로 첫 번째 신호다.

 

 

이제 중국이 세계 시장에 강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투자 감소와 수출 감소는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사실 지금 중국은 이미 부동산과 재정에서 거대한 거품에 기초하고 있다. 새로운 공장, 호화로운 쇼핑몰, 휴양시설, 불필요한 사회간접자본 같은 이미지 기획들은 서방의 방문자들을 감동시키는 경향이 있고, 방문자들은 그것들을 중국의 경제적 용맹무쌍함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해마다 GDP의 약 30%를 베이징 정부에 긴급 융자로 제공하는 중국의 은행 시스템은 지금 같은 경제호황에도 부실채권에 시달리고 있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허약하다. 유사한 상황이 1997~98 아시아 위기로 붕괴하기 전에 동남아시아와 남한에서 지속되었다. 중국 최고의 통계학자인 리데쉬는 1월에, 2005년 중국의 9.8% 성장 가운데 고정자산 투자에 기인한 부분이 그것을 억제하려는 1년에 걸친 노력 후에도 여전히 48.8%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과잉용량은 여전히 두드러지고 심각한문제이며, “거대한 낭비와 악성 은행부채”, 실업의 증가, 부수적인 사회적 긴장들이 예견된다고 그는 단언했다.

 

 

군체사건(群体事件)”

 

지금까지 경제가 굉장한 속도로 성장해 왔지만, 이것이 사회적 긴장을 감소시키지는 못했다. 이를테면 2005년 반일 폭동을 지속하는 게 허용된 것은 중국 노동자 농민들이 일정하게 울분을 표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중국 <공안부>200587,000건의 군체사건(群体事件)”이 일어났다고 밝혔는데, 이는 노동자들 또는 농민들이 벌인 거대한 저항을 보여준다.

이러한 수치는 2004년보다 6.6% 증가한 것인데, 이미 2004년에는 2003년보다 28%가 증가했었다. 그리고 이 공식 수치는 늘 축소된 것이다. 한편 참가자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항의와 시위의 평균 참가자 수는 19938명으로부터 (사태가 진정으로 폭발하기 전인) 2003년에 52명으로 늘었다.

 

 

중재에 회부된 [노동] 사건은 1993년에 12,368건에서 1999년에 120,191건으로 1990년대 동안 10배로 증가했다. 2002년에는 184,116건이었다. 중재에 회부된 집단적인 노동쟁의의 맹렬한 증가 또한 의미심장하다. 공식적인 기록은 사건 당 참여한 평균 노동자 수가 높아져 가는 경향을 보여주는데, 이는 노동자 투쟁의 집단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

<중국 노동·사회보장 연보>는 노동쟁의의 원인 가운데 50% 이상이 임금, 복지, 사회보험지불에 관한 것이고, 30% 이상이 노동계약의 종료와 해고에 관한 것임을 보여준다. 외국투자 사기업에서 임금 체불은 특히 심각하다.

비록 숫자가 늘긴 했지만, 중재에 회부된 노동쟁의에 관한 국가 데이터는 아마도 실제 쟁의 숫자보다 축소된 것임에 틀림없다. 예를 들어 다수의 떠돌이 노동자들과 국유기업 종업원들은 갈등 해결에 있어 제도화된 채널을 활용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그밖에 어떤 분쟁 해결 신청들은 각하당하고 그래서 실제로는 쟁의임에도 공식 데이터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1999년에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하고자 했던 노동자 항의에 대한 최후 연례수치는 100,000이었다. 그러나 1997년부터 그 숫자가 광풍처럼 상승하기 시작했음<공안부>2001년 내부 보고서에 털어놓았는데, 1997년은 효율성이라는 명분으로 공장에서의 해고를 밀어붙인 중국공산당 15차 대회가 열렸던 해였다. ()

나날이 보다 부유하게 성장하는 것으로 늘 묘사되는 나라 안에서, ‘안정에 그렇게 높은 중요성을 두는 곳에서, 무엇이 그처럼 많은 소요를 불러일으켰는가? 그것은 임금과 연금의 미지급, 갑작스러운 대규모 실업, 일부 기업들의 파산을 야기한 부패한 관료들, 끝으로 1950년대 공산주의 정권 초창기부터 보장받았던 대다수 사회주의자들의 특권과 이익이다. ()

마오 이후 지도자들이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과잉이자 낭비라고 보게 된 것을 해소하기 위하여, 1990년대 초반부터 약 6천만 명의 국유기업 종업원들이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갑작스럽게 해고되었다.

 

 

열악한 임금과 근로조건, 예전에는 공짜거나 저렴했으나 비싸진 회사상점과 기숙사, 그 밖의 높은 비용들에 항의하기 위하여, 노동자들은 자주 시위에 나선다. 몇몇 경우에, 노동자들은 해고와 임금 미지급에 항의하기 위하여 법을 어기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보기를 들어 200411월에 중국 남부에 있는 어떤 공장의 노동자들은 지나간 임금을 지급하지 않은 것을 놓고 사장을 인질로 잡았으며, 같은 달 같은 마을에 있는 다른 공장 노동자들은 해고에 항의하면서 보안요원들과 맞붙어 싸웠다.

그동안 사회의 표면 아래서 분노가 매우 강하게 축적되어 왔기 때문에, 어떤 작은 사건도 폭발을 야기할 수 있다. 보기를 들어 200411월에 교량 통행료에 대한 한 여성의 분노가 3만 명을 폭동으로 이끌었는데, 경찰과 준군사부대 수백 명과 대치한 끝에 한 명이 사망했다.

최근에는 성장하는 도시의 가장자리에 산업 개발을 위해 지방정부가 토지를 몰수하면서 불안이 매우 자주 고조되고 있다. 어느 때보다 넓은 땅이 공업용지와 주거용지로 충당되면서 4천만 명의 농민들이 땅을 잃었으며, 그 대부분은 불충분한 보상으로 몹시 화가 나 있다.

 

 

나이든 농민들이 많은데, 그들이 어떻게 다른 일거리를 찾겠는가? 그들은 땅을 잃었고, 돈도 없으며, 아무런 사회보장도 없고, 직장을 구할 수도 없다. 심각하고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2004년부터 농민투쟁이 거대한 규모로 벌어졌다. 보기를 들어 200410월에는 스촨 지방에서 9만 명의 농민들이 수력발전 댐을 건설한다는 이유로 아주 적은 보상만 받고 집을 잃게 되자 경찰들에 맞붙어 싸웠는데, 계엄령을 통해서야 겨우 질서가 회복되었다.

 

 

수천 명의 마을 주민들이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거나 또는 수백 명의 항의자들이 경찰에게 연행되면서 최루가스를 마시고 곤봉으로 맞았다는 유혈진압 등의 사건 소식들이 매주 적어도 한두 건씩 전해진다. 정부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통틀어 매주 수백 개의 이러한 사건들이 잘 알려지지도 않고 있다. 불안과 표면상의 혼란이 뒤섞인 중국 당국의 반응은,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권력 수뇌부가 매우 심각하게 여기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광동지방 샨웨이읍 근처에 있는 동쪼우 마을에서 최근에 전개된 사건은 전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샨웨이에서의 항의는 200512월 극도로 악화될 때까지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풍력 프로젝트를 위하여 몇 년 전에 토지가 몰수되었다. 하지만 그 땅에서 일했던 농부들은 이주와 관련해서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 대중적 시위가 20058월에 시작되어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 보상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자, 항의는 12월에 한 단계 강화되었다.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그들은 칼, 쇠창, 각목, 다이너마이트, 화염병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세 사람이 이끌었다. 준군사 경찰인 그 지방 <인민무장경찰부대>는 군중을 향해 최루 가스를 발사했으나 그 세 지도자는 군중들을 계속해서 다시 결집시켰다. 중국 정부의 사건 묘사에 따르면, 시위대들은 밤이 되자 폭발물을 경찰들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경찰은 발포했다. 정부에 따르면, 3명이 죽고 8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인권운동가들의 현지조사에 따르면, 적어도 30명의 마을주민들이 여전히 실종 상태에 있으며, 그 가족들은 실종자들의 시신이 화장당한 것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국제 미디어에 따르면, 그 사건은 1989년 천안문 광장 이후 중국에서 처음으로 시위대를 향해 공권력이 대규모로 발포한 것으로 알려진 사건이었다.

그러나 상황을 진정시키는 대신에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역효과를 가져온다. 2006118<뉴욕타임스>는 역시 광동 지방에 있는 판롱 마을에서의 충돌에 대해 보도했다.

 

 

저항이 점점 더 평범한 일이 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그들을 주춤하게 하려는 압도적인 폭력의 사용 또한 그랬다. 중요한 사건이 지난달 초 여기서 차로 두 시간 가량 떨어진 동쪼우 마을에서 벌어졌는데, 그곳 주민들은 준군사 공권력이 시위 군중에게 발포하면서 30명 정도가 죽었다고 여기고 있다. ()

화요일 일련의 인터뷰에서, 여기 사람들은 동쪼우 사건과 중국의 대다수 농촌이 불만으로 끓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음을 분명히 했다. ()

첸이라고 이름을 밝힌 한 주민은 여기 있는 사람들은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문제를 해결하려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봤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마을위원회, 읍사무소, 중급지역정부에 호소했지요. 한 사람은 베이징에까지 갔어요. 하지만 아무 것도 이루어진 게 없어요, 마을 관료들은 아주 간단하게 사람들을 무시해요.’

첸은 사람들이 죽은 것으로 알려진 토요일 저녁, 시위의 정점을 묘사했다. ‘마치 전쟁 같았어요. 너무 생생하고 너무 잔인했어요. 나는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경찰들이 마을 주민들을 때리고, 마을 주민들이 돌과 폭죽으로 맞서 싸우는 것은 봤지요.’

 

 

 

국가 폭력이 거의 그러지 못하는 것처럼, 당국의 제스처 또한 상황을 정리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를 해결하고 안정을 얻으려는 시도들이 사태를 더 부채질하고 있다. 다음 기사는 그런 사례를 보여준다.

 

 

1990년대 초반부터 토지 문제를 둘러싸고 작은 항의들이 있었지만, 지난주 초에 광동 지방 공산당 비서 창데지앙이 널리 공표된 연설을 한 이후에 분쟁이 본격적으로 발생했다고 마을 사람들은 말했다. 그는 토지 문제가 공정하게 해결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당 비서가 한 말들을 앞세우며, 마을 주민들은 그들이 넘겨주었던 토지의 보상 문제를 다시 논의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연좌시위를 시작했고 나중에는 교통을 가로막았다. 그 항의는 특히 민센 의류공장을 초점으로 하는 것인데,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그 공장 부지가 수용되는 과정에 지방 정치인들이 연루된 부패가 있었다는 것이다.

 

 

불안은 심지어 군부에까지 스며들어 있다. <해방군보>가 보도한 20058월 군 당국의 공고문은 그것을 입증한다. 공고문은 병사들에게 탄원이나 시위에 참여한다면 심하게 처벌받을 것이라고 강조해서 경고했다. 공고문이 나온 것은 퇴역군인들이 연금 문제 때문에 베이징의 인민해방군 청사 앞에서 벌인 일련의 항의 때문으로 보였다. 사회적 저항이 군대 막사 안으로 들어갈 때, 정권은 빨간 색 경고등이 켜졌음을 느낀다. 1949년에 장개석의 민족주의 정부는 그들의 군대가 더 이상 싸울 태세를 갖추지 못하게 되면서 붕괴했다.

 

 

억압과 양보

 

경찰에 따르면, 중국에서의 항의들은 어느 때보다 크고 잘 조직되어 있다. 베이징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농민들과 노동자들이 청원서나 벽보를 갖고 벌이는 덜 시끄럽고 소규모이며 상대적으로 파괴적이지 않은 행진과 연좌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관용적이다. 만일 시위대가 자연발생적이고 무질서하며 국지적이고 지도자가 없어 보이면 보다 관대하게 대한다. 하지만 반체제 인사가 이끌거나, 폭력적 수단이 두드러지거나, 일정한 조직화 수준을 보여주거나, 확산될 우려가 있거나, 중요 운송망에 대한 방해를 수반하는 소란에 대해서는 덜 관대하게 대한다.

<가디언>지의 2006225일자 보도에 따르면, 최소한 8명의 널리 알려진 인권 활동가들이 1989년 시위 이후 처음으로 전국적인 저항을 통합하려는 공개적인 시도들 가운데 하나에 결합한 이후 사라져 버렸다. 그 활동가들은 16개 지방에서 수십 명이 참가한 것으로 알려진 릴레이 단식투쟁에 결합한 직후 사라졌는데, 정치 보안경찰이 그들을 감금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당국은 지금까지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중국의 <선전부>는 중국 국내 언론이 그 운동과 관련해서 어떤 것도 보도하지 못하게 했는데, 그 운동은 경찰의 만행을 항의하면서 24일 베이징의 변호사 가오치솅이 시작한 것이었다. 변호사, 교수, 지역 활동가들이 점점 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시위들을 통합하고 농민들에게 그들의 합법적 권리를 가르쳐주고 있다.

천안문 광장에서의 비극 이래로, 공산당은 소요 진압에 투입되는 <인민무장경찰부대>를 증강시키기 위해 막대한 금액을 투자해 왔다. 20058월 정부는 폭동을 억제하고 그들 말로 테러리즘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36개 도시에 특수 경찰부대를 배치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멀리 떨어진 서부 <신장>지역의 <위구르> 분리주의자들이 연루된 드문 사건들을 제외한다면, 테러리즘은 중국에서 거의 들어본 바가 없다. 정권이 더 걱정하고 있는 것은 명확히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계급투쟁이다. 7월에는 <인민무장경찰부대>의 두 최고위 장군들이 불안을 억제하기 위하여 1백만 명에 달하는 국가 준군사경찰의 전투 효율을 향상시키겠다고 천명했다.

이른바 선전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겠다는 다짐을 실행하면서, 정부는 출판사를 폐쇄하고 편집자를 해고하며 기자들을 수감하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미디어 권리 그룹들은 중국 지도자들이 인터넷과 전통 언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언론인 보호 위원회>는 중국이 언론인 수감자 수에서 세계 1위이며, 2005년 말에 32명의 기자가 수감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국경 없는 기자들>은 중국의 언론자유 지수를 167개 나라 가운데 159위로 매겼다. 보도에 따르면 중국 <공안부><인터넷 안전감시국>에는 3만 명 이상이 일하고 있다. 2005<야후>는 한 인터넷 저널리스트의 신분을 노출한 것 때문에 비난받았는데, 그는 그 후 수감되었다. 또한 <구글>은 검열당국의 블랙리스트를 적용하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인터넷 검열을 강화하고 거리낌 없는 출판물들을 억제하면서 소식의 전달을 막고 있지만, 지도부는 그것들을 완전히 봉쇄하지는 못하고 있다.

 

 

비록 많은 사이트들이 폐쇄되었지만, 웹 서핑을 하는 어떤 중국인도 다른 온라인 논평자들이 준 점수를 갖고 누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지를 골라낼 수 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항상 온라인에 접속하고 있다. 중국에서 <마이크로소프트> 혼자서만 약 330만 개의 블로그들을 갖고 있고, 다른 인터넷 서비스 업체들에 약 1천만 개의 블로그들이 있으니, 중국은 검열자들에겐 명백히 악몽 같은 곳이 되었다. 3년 전만 해도 중국에는 블로그가 단 하나도 없었는데 이제 날마다 수천 개가 새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 중 일부는 이전의 블로그가 금지된 후 단지 이름만 바꾸거나 인터넷 공급자만을 바꾼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

신문사들이 문을 닫고, 기자와 편집자들이 투옥되고 심지어 죽었다. 지난주에는 신문 편집자 우썅후가 경찰들에게 두들겨 맞고 죽었다. 보도에 따르면 경찰들은 그의 기사가 그들의 지위를 이용한 권력 남용을 폭로한 것 때문에 몹시 화가 났었다고 한다. 여전히 추세는 뒤집어지지 않고 있다.

 

 

정권이 억압만 가지고 상황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일정한 양보 또한 불가피하다. 마치 2005년 최저임금을 (적어도 문서상으로는) 올린 것처럼 말이다. 지난 3년 동안 지배집단은 핍박받는 민중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민중주의 어법을 빌려 쓰고, 권력을 남용한 관료 몇 명을 처벌했다. 하지만 그러한 어법은 민중에게 용기를 불어넣었을 뿐이며, 심지어 새로운 항의의 물결을 촉발시켰다.

공식적 제스처들은 매우 선전적이다. 정부는 때때로 지방 관료들을 처벌함으로써 항의자들을 달래기도 한다. 관영 미디어에는 그러한 공판들이 많이 보도된다. 그 공판들은, 중앙 정부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으며 나쁜 관료들을 처벌하는 중재자인 것처럼, 그리고 공산당 지도부 자체는 약탈에 깊이 말려들지 않은 것처럼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다. 소련에서 스탈린 또한 정기적으로 개별 관료들을 처벌했지만, 이것이 그가 일반적으로 관료들의 방어자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공판들을 통해 공산당 지도자들은 사건들이 지역적이고 고립된 것으로 묘사되기를 원한다. 이것은 혐의를 벗은 더 높은 권위를 남긴다.

항의들을 제어하기 위한 또 다른 시도로서, 후진타오 주석은 농민들의 생활수준을 신속하게 향상시키는 것은 우리 당이 떠맡은 주요한 역사적 과제라고 새로운 사회주의 농촌 건설이라는 진로를 설정하면서 선언했다. 엄격한 통제 아래 있는 중국의 신문과 TV방송은 최근 몇 주 동안 새로 만든 길들, 준설된 관개 수로들, 농민들을 방문하여 그들의 요구를 놓고 대화하는 관료들에 대한 보도들로 넘쳐났다. 미디어에 대한 통제를 통해, 정권은 항의 운동이 서로에 대해서 배우고 서로 연결됨을 통해 하나로 모아지는 것을 막으려고 시도하고 있다.

비록 원자바오 수상이 <전국인민대표대회> 연례회의를 폐회하면서 뒤로 돌아가는 일은 없다고 선언했지만, 그들은 물권법 처리를 연기한 것처럼 시장 개혁의 속도를 조절함으로써 안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와 관련 <파이낸셜 타임스>2006313일자에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중국은 갈림길에 다가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저돌적인 개혁 드라이브는 확대되는 저항에 부딪쳤다. 속도를 늦추라는 심지어 되돌아가라는 이단적 요구가 나타나더니, 이제 공공연하게 표현되고 있다. ()

<전국인민대표대회> 정책 문서들에 끝없이 반복되었던, 시장의 자유를 부르짖는 베이징의 나팔은 반대하는 목소리들의 커져가는 합창보다 더 크게 들리게 하려고 싸우고 있다. 그 합창의 후렴구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 과거의 나쁜 맑스주의 명령 경제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는 것이다. 반대하는 자들은 지금까지 명확한 지도력 없이 이질적인 그룹으로 남아 있다. 그들은 아직 행동 강령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개혁을 좌절시킬 힘을 점점 더 드러내고 있다. 바로 지난 주, 그들은 사적 소유권을 강화하려는 안을 격퇴했다. ()

그들의 주장은 세 가지 이유 때문에 공감을 얻고 있다. 첫째, 자유화로 인해 잃어버린 역할을 다시 움켜쥐려는 열망을 가진 정부 관료들로부터의 암묵적인 지원. 둘째, 국영 은행의 지분을 외국인들에게 싸게 판 것에 대한 비난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처럼 외국 자본에 대한 적대감의 고조. 셋째,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농촌에서 점증하는 항의들을 촉발하였으며 불안에 빠진 지도부가 [비록 과장된 상징적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갑자기 농촌 지출을 증가시키도록 만든 소득 불평등의 놀라운 증가로 솟구친 대중적 분노.

 

 

 

더 나은 조건 아래서 새로운 천안문 운동

 

상황이 1980년대 후반과 비슷하다는 것은 명확하다. 당시 좌파10년간의 자유주의 개혁과 그것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미친 결과로 인해 마찬가지로 영향력을 획득했다. 시장 개혁의 처음 몇 해에는 이를테면 (그 전에는 공산당이 가격을 고정시켰던 것에 반해) 인플레이션 때문에 실업 증가와 생활수준 저하가 나타났다. 1985년에 급진화의 첫 표현이 반일 행동주의로 물꼬를 틀어 나타났다. 그 후 1986~87년과 1989년에 운동은 보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모습을 취했다.

이른바 부르주아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좌파의 운동 때문에, 정권은 줏대 없이 태도가 늘 바뀌었다. 공산당 총서기 후야오방은 양보의 길을 취했고, 더 많은 관대함과 제한된 민주화를 외쳤다. 학생들은 이 민주적 빈틈으로 뛰어들었으며, 1986년에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 정권이 180도 방향을 틀었다. 1987년 덩샤오핑은 후야오방을 물러나게 하고, 대학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그러나 19891월 후야오방이 사망하자 학생들은 새로운 시위를 시작했다. 이 때 학생들의 뒤를 이어 (4% 성장에 머문) 불황 때문에 노동자들이 따라왔다. 운동이 성장할수록, 노동자들은 점점 선두에 서게 되었다. 독립적인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왕후이는 이 시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많은 연구들이 학생들과 국가 내부 개혁파들의 역할에 대해 강조해 왔다. 그러나 천안문으로 이끌렸던 사회 운동은 마찬가지로 다른 부분들도 결집시켰다. 학생들은 일정한 역할을 했다. (1980년대의 계몽은 과거의 이데올로기를 조금씩 허물어뜨렸다.) 그러나 1989년 운동의 자발성과 시야는 훨씬 넓은 기원을 갖고 있다. 지식인들은 현실적인 사회적 목표들을 제안할 수 없었으며, 운동을 깊이 있게 움켜잡지 못했다. ()

그 시기의 비판은 국가를 주적으로 삼았지만. 그러나 중국의 새로운 사회적 모순을 이해하지 못했다. 즉 마오주의 국가가 평등을 가장한 불평등을 압제와 계획으로 보호했다면, 새로운 개혁 국가는 불평등을 계급들 간의 소득차이로 전환시켜 심각한 사회 양극화를 야기했다. 1980년대 운동 안에 깊은 사회주의적 열망이 있었다는 점을 평론가들은 파악하지 못했다. 국가독점에 입각한 낡은 국가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독점과 급속한 시장 확산이라는 정황 속에서 사회보장, 평등, 정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새로운 사회주의 말이다. ()

운동의 모순과 이익집단들의 서로 다른 행동 강령에도 불구하고, 운동은 독점과 특권에 대항하여 이끌렸으며, 민주주의와 사회보장을 옹호했다. 직접 결합하지 않았던 농민들을 제외하고, 대도시·중도시의 모든 사회 계급 출신 민중들이 확대된 사회 운동에 끌려 들어와 국가 내부에서 성장하는 모순들을 폭로했다. ()

학생들은 헌법적 권리, 작동하는 민주주의 정치, 연설과 집회의 자유, 법에 의한 통치, 언론의 자유, 그리고 운동의 합법성에 대한 인정을 요구했다. 다른 집단들은 이러한 요구들을 지지했지만, 그러나 부패에 대한 반대, (특수한 특권계급인) 태자당에 대한 반대, 안정된 물가, (외국 자본에 임대된 지역인) 양푸와 하이난 섬에 대한 제한, 사회보장과 사회정의 등 사회적 변화들을 더욱 원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사회 이익의 공정한 재분배에 대한 요구와 손을 맞잡고 갔다.

 

 

항의가 노동자 계급 속으로 확산되어 나가자, 정권은 운동을 유혈 진압했다. 천안문에서의 6월 대학살은 특히 노동자 활동가들을 겨냥한 마녀사냥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1989년 천안문 진압의 결과로 진정한 좌파의 부활이 있었다. 관료들은 처음에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시장 개혁을 연기했지만,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1992년까지 2년의 시간을 더 필요로 했다.

오늘날 비슷한 사태가 전개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두 시기는 계급투쟁의 급증에 의해 본질적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두 시기는 또한 자본주의 부활의 깊이와 국제적 맥락이라는 중요한 점들에서 서로 다르다.

천안문의 패배는 1992년 이후 자본주의 부활을 가속시키는 주요한 정치적 조건이었다. 그것은 국제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심각한 패배들, 가장 중요하게는 사회주의의 불가능함을 입증한 것으로 알려졌던 소련의 붕괴와 동시에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이 뒤죽박죽으로 되어 버렸고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지 기다리고 지켜보자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엄청나게 많은 중국의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경험했고, 자본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느껴왔다. 중국의 조건에서 자본주의는 노동의 가장 야만적인 형태와 같은 것이다. 지금 노동자들의 투쟁이 급증하는 기반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15년 이상이 지난 천안문의 패배로부터 회복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투쟁은 국제적인 노동자 투쟁의 하강이 아니라 거대한 상승과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마오주의로 회귀

 

지난 몇 년에 걸쳐, 자칭 <신좌파>가 중국에 출현했다. 비록 아직 작고 주변부에 있지만, 그것은 특히 최근 몇 달 동안 주로 노동자들과 농민들 스스로가 투쟁을 확대하면서 만들어 낸 전국적 무대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어 가고 있다. 중국의 비즈니스 신문인 <더 스탠더드> 227일자 기사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계속해서 스스로를 선언한다고 보도했다. 잘 알려진 자유주의 경제전문가는 우리는 모두 지금 당장은 아주 많이 수세적이라고 불평했다. 그가 최근에 베이징에 있는 대학의 경제학부에서 연설하였을 때, 학부의 성원들이 우리는 우리의 적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아직 사회주의 국가다!’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생각을 규탄했다.

토론의 대부분은 이제 이른바 <신좌파>가 주도한다. 그 가운데 위에서 인용했던 왕후이는 탁월한 사상가다. 시장 개혁의 과잉에 대한 그들의 비판들 때문에, 그들은 항의운동의 초점이 되었다. 후진타오 주석도 그들에 대해서는 보다 너그럽다는 얘기가 있다. 물론 만일 후진타오의 정책이 이제 보다 온화하다면, 그리고 만일 그가 전임자 쟝쩌민의 무자비한 자본주의 추진을 비판한다면, 이것은 확실히 후진타오가 보다 좌익이라서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계급투쟁을 누그러뜨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후진타오는 늘 관료들의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에 대한 충실한 방어자였다.

실제로 <신좌파>의 비판이 확실히 보다 좌익적이지만, 그들은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왕후이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일반적으로 시장개혁을 향해 국가의 방향을 잡는 것에 찬성한다. 그러나 중국의 발전은 보다 평등해야 하고, 보다 균형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노동자들의 권리와 환경을 배제한 채 GDP 성장에 모든 우선권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본주의에 머리 숙인 사회민주주의자들이며, 다만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가 채식주의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 스스로의 비판이 아니라 그들이 불러일으키는 반응이다. 한때 영향력 있었으나 퇴역한 경제전문가인 류궈광은 최근에 중국정부에게 시장개혁을 억제하고 확대되는 빈부 격차에 대처해야 한다는 경고를 통해 강력한 충격을 몰고 왔다. 류궈광은 시장지향 개혁에 대한 공로로 2005년 유명한 상을 받았는데, 그는 항상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지만 자본주의 재도입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시장에 맞선 류궈광의 통렬한 비판은 그렇게 흥미로운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그 반응은 흥미로운 것이다.

 

 

그러한 비판이 제기된 것은 처음이 아니지만 그렇게 많이 주목받은 비판은 없었다. 과거 공산당의 혁명적 출발지였던 연안을 포함하여 중국 곳곳에서 거의 밤을 새며 그의 경제적 사고를 배우기 위한 심포지엄들이 열렸다. ‘정부는 이미 많은 영역들 그리고 외국인이나 누군가에게 팔릴 예정으로 있는 국유기업들에 대한 통제를 상실했다고 오랫동안 계획담당 고위 관리로 일해 온 류릭신이 말한다. () 상하이에서 대중적인 TV쇼에 출연하는 랑샨핑 같은 저명한 경제전문가는 사유화를 국가 자산에 대한 느리게 움직이는 러시아식 도둑질이라고 비판했다.

 

 

랑샨핑이 2월말에 방송출연을 중지당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부는 그가 국영TV에 적용되는 정부의 언어 기준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그의 프로그램을 폐지했다.

<신좌파>의 출현은 하나의 징후이며, 정권은 그것을 알고 있다. 초기 국면에 있는 계급투쟁이 일종의 개혁주의 사고에 의해 표현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전체로서 과정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바로, 이제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커진 중국 노동자 계급이 재각성하는 과정의 첫 번째 파장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도부의 친자본주의 노정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일반대중의 수준에서 이것은 마오로의 회귀로 표현된다. 보통 사람들은 그들의 지금 조건을 그들이 (또는 부모들이) 몇 십 년 전에 갖고 있던 사회적 승리의 결과물들과 비교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좋았던 옛날을 동경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이것은 모든 종류의 방법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쳉초우의 노동자 계급 거주 지역에 있는 한 공원에는 매일 저녁 몇 백 명이 그리고 주말에는 천여 명이 옛날 혁명가요들을 부르고 마오 시대의 유산을 지지하기 위하여 모여든다. 비슷하지만 덜 발전된 기질을 가진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중국이 자본주의 노정을 걷기 이전인 마오 통치 시기에는 삶이 달랐고 더 나았으며 마오가 자본주의 노정에 맞서 경고했었다는 같은 종류의 관점들을 자주 드러낸다.

 

 

파오유칭은 단순한 관찰을 했다.

 

 

최근 정부의 하급 관리들을 포함하여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마오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마오 버튼을 착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정형화된 외모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마오 시대의 유산과 그 전통은 오늘날의 계급투쟁 속으로 이전되고 있다. 사람들은 문화대혁명 같은 그들의 이전 투쟁 경험들로 돌아가고 있다.

 

 

한 항의에서, 중년의 주민들이 문화대혁명 시기인 그들의 청년 시절로부터 반항적인 구호들을 불러내어 외쳤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들은 고층건물 개발업자들을 위한 일괄퇴거를 비난하고 공정한 보상을 요구하면서 조반유리 같은 것들을 외쳤다고 한다.

 

 

영감의 원천으로 마오 시대를 뒤돌아보는 것은 단지 노동자들만이 아니다. 학생 그룹들 또한 현재의 조건을 이해하기 위하여 마오주의에 덧붙여 맑스주의 고전 저작들을 학습하고 있다.

 

 

5년여 전에 시작된 작은 맑스주의 학습 그룹들이 몇 개의 엘리트 대학 캠퍼스들에도 출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상당히 고립된 가운데 맑스, 엥겔스, 레닌 그리고 특히 마오의 고전적인 저작들을 읽는 데 헌신하였던 이러한 초기 노력들은 오늘날 좌파 학생 조직들의 훨씬 더 폭넓은 네트워크로 발전하였다.

대학들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학생들은 이제 노동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조건에 대하여 연구·보고하며, 그들의 투쟁에 합법적이고 실물적인 지원을 제공하기 위하여 쳉초우와 같은 도시들로 이동해 가는 중이다. 유사한 학생 조직 <농민의 자식들>은 학생 대표자들을 농촌 지역으로 보내는 중이다.

비록 아직은 작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오로지 공부와 경력에 몰두하고 있는 전반적인 대학 무대에서 겨우 한 무리에 불과하지만, 이들 좌파 학생 그룹들은 중국에서 극적으로 새로운 발전이다. 이 운동을 통하여 수백 명의 좌파 학생들과 범 진보 정치를 추구하는 이들이 노동자 계급의 조건과 투쟁에 대한 실천적인 경험을 얻기 시작하고 있으며, 나아가 그것을 정부와 공산당의 당면 정책에 반대하는 것과 결합시키고 있다. 그러한 결합은 문화대혁명 이래 발생하지 않았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쳉초우 시는 몇몇 가장 전투적인 노동자 항의들을 경험했고, 마오 기념일에는 경찰과 충돌을 반복했다. 그 도시는 급진 마오주의의 소굴로서 명성을 얻었다. <중국연구그룹>은 리플렛을 출판하여, 쳉초우에서 열린 마오 주석 서거 28주기 기념행사 때 배포하였다. 나중에 네 사람이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리플렛을 읽어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이 사회에서 돈은 권력과 사회적 지위를 의미한다. 부의 양극화는 근로민중을 비참한 빈곤으로 내몰았다. 그 결과, 그들은 이전에 그들이 누렸던 사회적 지위와 모든 권리들을 잃었다. 그들은 더 이상 사회주의 노동자로서 위엄을 갖고 있지 못하다. 대신 그들은 생존을 위하여 그들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할 것을 강요당한다. 그들은 자본가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

20여 년이라는 상대적으로 짧은 시기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자. 당내 크고 작은 자본주의 노정을 걸은 자들과 그 가족들은 모두 백만장자 또는 심지어 억만장자가 되었다. 사회주의에 대한 그들의 모든 말들과 삼개대표가 철저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는가!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본주의다. 왜냐하면 오로지 자본주의만이 그들에게 가장 거대한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주의와 민중의 적이다.

그러나 어쨌든 중국 공산당은 마오의 지도 아래 설립된 당이며, 오랜 혁명 전통을 가진 당이라는 점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흐루시초프의 수정주의에 맞서 단호한 투쟁을 수행하였고, 문화대혁명으로 단련되었던 당이다. 그 결과, 당 내에 자본주의 추종자들이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당 내에 사회주의 추종자들이 특히 대중적 수준에서는 확실히 존재한다.

평당원들과 하급간부들 중 압도적인 다수는 당내 수정주의 지도자들에 대해 분개하고 있다. 그들은 당이 현재의 노선을 바꿔 사회주의 노정으로 복귀하는 것을 보고자 희망한다. 그들 중 몇몇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한다. 그들은 공공연한 도전으로 현 지도부에 반항했다. 그러나 보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의 마음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 자신 또는 가족들의 안전을 구하려 한다.

사유화에 대한 수정주의 도당의 압력이 깊어지는 것과 함께 중국에서의 계급모순이 보다 첨예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대중들이 보다 폭넓은 규모로 투쟁을 강화시킬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모순과 전국적인 대중투쟁의 발전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당과 정부 그리고 군 안에 있으면서 수정주의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에 맞선 단호한 투쟁을 수행할 것이며, 마오의 기치를 높이 치켜들고 중국에서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을 다시 시작한 프롤레타리아 계급 대중과 다시 결합할 것이다.

 

 

이러한 인용으로부터 우리는 공산당 평당원들이 확장되는 계급투쟁에 의해 흔들리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아마도 그들 중 대부분은 일정 기간 동안, 시장 개혁은 생산력을 강화하고 사회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임시적인 우회로일 뿐이라는 지도부의 주장을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반세기에 걸친 시장 개혁 후에, 그리고 특히 최근 10년을 겪은 후에, 눈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공산당 관료들이 그 자신을 급속히 성숙한 자본가들로 전환시키는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공산당 평당원들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의 진정한 본질은 [중국 특색의 무자비한 자본주의]임을 보아 왔다.

그러나 중국은 그냥 보통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다. 그것은 변형된 노동자 국가로부터 만들어졌으며, 여전히 그 유산을 가장 중요하게는 공산당의 지배라는 유산을 갖고 있다. 어떠한 종류의 전형적인 자본주의 국가가 공산당에 의해 통치되는가? 자본가들은 전형적인 부르주아 정당을 더 좋아하며, 오로지 마지막으로 공산당을 향한다.

중국공산당에 맞선 제국주의자들의 반복되는 경고들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그들은 통제하고 있는 당을 좋아한다. 다국적 자본이 그로부터 이익을 거둬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1980년대 동유럽처럼 중국공산당이 더 이상 상황을 통제할 수 없을 때, 그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촉진하는 것에 의지할 것이다. 그러나 당분간 제국주의자들은 중국의 민주화를 그리 좋게 보지 않는다. 호주 신문 <현대>의 한 기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민주적인 중국은 현대 시기의 대부분 동안 남미를 질식시킨 것과 같은 종류의 경제적 혼란으로 파멸하며 끝날 수 있다고 한 보고서가 경고한다. <호주전략정책연구소>가 발표한 그 연구는, 미국이 중국에서 민주주의를 촉진시키려고 오래도록 애썼지만 민주적인 중국 정권이 미국의 이해관계에 바람직한 것일지는 그리 명확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경제학자이며 중국 전문가로서 보고서를 쓴 데이비드 헤일은 현 정권이 시간이 지나면 거대한 중간 계급을 출현시킬 경제 현대화와 시장 개방에 확고하게 헌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권위주의 중국이 매우 예측 가능했던 반면에 보다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중국은 국내정치와 국제관계 양 측면에서 공히 새로운 불확실성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만일 중국이 민주적인 정권을 갖게 된다면 확대되는 소득 불평등 때문에 민중주의 정권이 탄생할 큰 위험이 있으며, 그 정권은 경제개혁을 보류하고 현대 시기의 대부분 동안 남미를 특징지었던 인플레이션 유형의 위기로 나라를 빠뜨릴 것이다.’ 헤일이 그 보고서에서 말했다.

 

 

남미에서처럼 중국에서도 유사한 혁명적 운동이 일어날까 봐 제국주의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노동자들과 농민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중국 공산당에 의지하는 것을 지속해야만 한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 공산당의 평당원들이다.

 

중국 공산당 관료체계의 하층은 대중들과 보다 밀접한 관계에 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배신적으로 자본주의를 방어해 왔지만, 6천만여 공산당원 가운데 대부분은 자본주의 복고를 전혀 좋아하지 않으며 대중의 요구를 받아들일 감수성이 있다.

그 보기로 200410월에 중국 공산당의 고참 당원들, 고참 중핵들, 고참 군 요원들과 지식인들로 구성된 익명의 집단이 쓴 편지가 하나 있다. 우리는 조만간 이 편지를 독자들이 볼 수 있도록 할 예정인데, 여기서는 일부 중요한 부분만 발췌하여 인용한다.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맑스주의의 주도적인 지위를 회복하는 것은 사상 전선에서 중대한 과제다. 서방의 민주주의와 사유화에 대한 지지를 공공연하게 유발하는 다양한 기사, 잡지, 서적들은 거리에 넘쳐나지만, 맑스주의를 알리는 출판물들은 고의적으로 억제당하고 있다. () 그것은 또한 이 나라에서 명목상으로는 주도적 지위를 가진 맑스주의 영역이 실제로는 무시되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유로, 이 나라에서 맑스주의의 주도적 지위를 회복하는 것이 중대한 과제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그것이 부패에 맞선 투쟁이든, 사유화에 맞서 국가소유를 방어하는 시도이든, 관료적 강제에 반대하여 농민들에게 부과되는 부담을 줄이려는 노력이든, 농민과 노동자 등 혜택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합법적 권리를 보호하는 운동이든, 그러한 모든 노력들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확장을 긴급하게 요구한다. 민중은 역사의 주인이다. 조직된 민중은 하늘을 휘몰아치고 땅을 뒤엎을 원대한 능력을 갖고 있다.

 

 

옮긴이: 양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