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노동계급만이 본문

실천지 (2007년)/2007년 11월호

노동계급만이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4:33

노동계급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ICU

 

 

오래된 주장

 

계급투쟁과 노동 계급을 매장하기 위해 사용되는 주장은 보통 동일한 이념을 가지고 출발한다. , 사회는 변했고 노동 계급 또한 변했다는 것. 그런 이념에 따르면 더는 노동 계급은 예전처럼 변화를 낳는 요인일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주장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런 주장들은 이미 마르크스가 살던 시기에, 역사에서 첫 번째 노동자 대중 정당이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의 몇몇 지도적인 인물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보기를 들면, 이런 일은 비스마르크의 억압적인 법률들 때문에 독일 사회민주당이 1878년에 불법화되었을 때에 일어났다. 그보다 앞선 시기에 새로운 세대의 젊은 중간 계급 지식인들이 사회민주당에 가입했다. 갑자기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경력의 가능성을 박탈당했음을 발견했다. 그러자 그들 가운데 많은 수가 비스마르크의 독재 체제에 대항하는 것과 그에 굴복하는 것 사이의 3의 길을 옹호하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당이 더 융통성이 있어야 하며, 자유주의적 중간계급에 당의 문호를 개방하고, 노동 계급이 수행할 특수한 역할은 말 할 것도 없고 방어해야 할 그들만의 특수한 이해관계를 지닌다는 관념을 잊어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 시기에 마르크스는 사회민주당이 이런 견해에 찬성한다면 사회민주당과 모든 관계를 끊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실, 사회민주당이 노동 계급에게서뿐 아니라, 성장하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에 의해 점차 분쇄되어가고 있던 쁘띠부르주아지의 하층에게서도 그렇게 막대한 신뢰를 얻은 것은 이러한 탄력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똑같은 추세가 나중에 다시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1890년대 말이다. 선거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둔 후에, 몇몇 쁘띠부르주아 지도부는 사회 혁명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3의 길을 추구했는데, 혁명 문제는 선거에서 뽑힌 수많은 사회민주당 국회의원들과 지방의회의원들이 원하는 안락한 입장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 대신에 그들은 (그들에게) 더욱 편안한 개량주의 노선을 옹호했다. 사회민주당이 노동 계급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노동 계급 전통이 깊다는 것을 고려하여, 이런 흐름의 주요한 대변자였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이러한 전환을 반() 자본주의적 언어에 기초해서 정당화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가 변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더욱더 소수의 수중에 자본주의 독점체들의 집중이 증가하는 대신에, 새로운 사업을 벌이려는 정신이 발전하고 있으며 대규모 독점체들이 점증하는 수의 소주주들에게 점점 더 권력을 상실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베른슈타인이 이야기하기를, 그러므로 자본가 계급의 법적 권리를 점차 감소시킴으로써 자본주의를 개혁하기 위해 의회가 이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가 결국에는 사회주의로 진화할 것이었다. 블레어의 이해관계자들의 사회(stakeholders’ society)”의 전도사, 피터 만델슨(Peter Mandelson)이 자신의 책, ?블레어 혁명?(The Blair Revolution)에서 베른슈타인을 칭찬한 것은 당연하다. 물론 이것은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적 언어 때문이 아니라 그가 첫 번째 위대한 사회민주주의적 수정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 그리고 실로 국제 노동 계급에게 베른슈타인의 개량주의가 끼친 손실은 기억할 가치가 있다. 1914년에 이르면 개량주의자들이 완전히 당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자본가 계급의 편에 서서 유럽의 경쟁국들에 대항하도록 만든 것이 바로 그들의 3의 길논리였다. 사회민주당은 전쟁을 멈추고 그것을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혁명으로 전환시킬 만큼 강한, 유일한 노동자 정당이었다. 이미 밝혀졌듯이, “3의 길은 자본의 길이었다.

 

 

블레어와 멍크스의 선조들

 

세기 전환기에 영국은 자체 판본의 베른슈타인의 경향을 지니게 되었다. 1884년에 설립된 페이비언 협회는 엥겔스가 ?영국 노동 계급의 상태?를 쓴 1845년 이래로 영국 자본주의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보여주느라 분주한 중간 계급 지식인들의 집단이었다. 버나드 쇼(Bernard Shaw), 그레이엄 월러스(Graham Wallas)와 더불어 웹(Webb) 부부는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 자신들의 3의 길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이것은 사회주의의 점진주의적 판본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에서 노동 계급의 어떤 독립적인 역할도 부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견해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노동자들에 대해 (이미) 지니고 있던 깊은 의심과 장단이 맞았기 때문에, 이런 사상은 노동당이 창당되었을 때 당 지도부의 공식적인 이론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웹 부부 같은 그런 개량주의자들조차 블레어의 신 노동당에 의해 위험한 좌파들로 간주될지 모른다. 어찌 되었건, 1919년에 당 규약 4조를 제정한 사람은 시드니 웹(Sydney Webb)이었는데, 블레어는 약간의 노력 끝에 바로 그 4조를 삭제해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웹 부부가 블레어보다 더 사회주의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1919년은 지금과는 다른 시대였다. 그때는 당의 홍보요원들이 사회주의적인 것처럼 들리는 문구들을 가지고 노동당 지지자들의 에너지를 이용할 필요가 더욱 컸다. 비록 이런 문구들이 정말로 빈 문구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정도 성공리에 그것을 했다. 그래서 시드니 웹이 오늘날 살아 있다면, 블레어는 그런 홍보요원적 재능을 이용하려 했을 것이다!

이어서 또 다른 형태의 3의 길이 출연한 것은 1927년이었다. 이것은 몬디즘(Mondism)”당시 임피리얼 케미컬 인더스트리(ICI)의 회장이던 알프레드 몬드(Alfred Mond)의 이름을 딴 것이다으로 알려지게 되는데 영국 노동조합회의(TUC) 지도자 월터 시트린(Walter Citrine)은 이를 열렬히 지지했다. 또 다시, 그것은 변화하고 있는 상황(영국이 막 대공황에 빠져들려는 참이었기 때문에, 그리 오랫동안은 아니지만, 분명 경제 성장의 전망)이라는 말로 정당화되었다. 이른바 산업 조직의 코프라티즘적 비전으로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옮겨갔다. 회사는 산업 합리화에 노동조합의 협력(일자리와 노동 조건을 희생하면서 경쟁을 부채질함)에 대한 답례로 노동조합 가입을 독려할 것이었다. TUC 중앙위원회(General Council)사회적 폭발을 통해서가 아니라, 조합이 산업 변화의 방향을 통제하는 데 더 큰 몫을 차지하게 될 계획된 재구성에 의해 ··· 새로운 산업 질서에 접근하는 일에 헌신했다. 그러나 몬드주의자들이 통제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은 작업 현장에 대한 노동자들의 통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 관료들을 고용주가 강제한 클로즈드 샵(특정 노동조합원만 고용하는 제도-옮긴이)에 의해 규율이 잡힌 노동력의 관리자들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결국 몬디즘은 곧 신용을 상실했지만, 노동조합 관료 집단은 그 후 줄곧 이 사상을 고수했다. 휴대전화 회사 만네스만(Mannesman)이 최근 보다폰(Vodafone)에 인수된 후에 펼치는 방식을 (독일의 모든 주요 거대기업 이사회에 노동조합 관료들이 참석한다는 이유만으로) 칭찬하는 존 멍크스(John Monks)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오늘날 TUC “파트너십은 지난날 몬디즘으로 후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그것을 몽키즘(Monkeyism)”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2차 세계대전 이래로, 노동당 지도자들의 있었던 만큼이나 많은 판본의 3의 길이 거의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가장 정교한 판본은 50년대 말 게이츠켈(Gaitskell)(노동당 당수로) 있을 때 제안된 형태였다. 노동당이 두 번째로 총선에서 패배한 후(2차 대전 후, 1951년에 이어 1955년에-옮긴이), 만델슨보다 훨씬 더 박식한 선배인 앤소니 크로스랜드(Anthony Crosland)1956년에 출간한 ?사회주의의 미래?(The Future of Socialism)에서 새로운 접근의 개략적 기초를 그렸다. 크로스랜드는 더욱 부유해지고 있는 노동자들은 더 이상 스스로를 노동 계급으로 분류하지 않으며 낡은 노동당의 경제관에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라 노동당의 쇠퇴를 막기 위해서는 당의 노동 계급 이미지를 제거하고 국유화와 관련을 끊어야 했다. 과거 노동당 정부의 재무부 장관이었던 더글러스 제이(Douglas Jay)는 대중은 활기차고, 급진적이고, 개혁적이고, 열린 마음을 지닌 당을 필요로 한다고 덧붙이고 당의 이름을 노동과 급진이나 노동과 개혁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당 지도자인 게이츠켈은 당 이름 변경에서 한걸음 물러나서 ‘4를 삭제하여 당 규약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그의 주장은 이러했다. “잘 알다시피, 오래 전에 우리는, 장래를 대비하여 어떤 행태로든, 혼합 경제를 받아들였다.” 토리당(보수당-옮긴이)1959년에 잇따라 세 번째 선거에서 승리한 다음에, 게이츠켈은 중간 계급 유권자들의 눈에 비치는 노동당의 이미지를 새롭게 만들기 위한 홍보 작업에 찬성하는 주장을 폈다.

결국 이런 제안들 가운데 많은 것이 이루어지 않았다. 그리고 20년이 지나서 노동당은 다시 똑같은 과정을 겪었는데, 결국에는 신 노동당의 깃발 아래 게이츠켈의 제안을 거의 똑같이 복제한 블레어의 제안이 나왔다.

 

 

역사의 검증

 

3의 길의 지난날 모든 판본들은 계급투쟁을 단호하게 기각하기 위해 입안되었고, 적어도 노동 계급 조직들의 대오 안에서 정치적 참조사항이었는데, 이는 실재 세계에서는 실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근본 모순을 결정적으로 극복했으며 이제 합리적인 방식으로 사회를 운영할 (그래서 사회 변화의 필요성과 자본주의 전복을 폐물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할 어떤 근거도 없다. 자본주의적 착취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아무튼 자본가들과 피고용자들이 똑같은 이해관계를 지닌다는 생각을 입증해줄 신뢰할 만한 사례도 없다.

그와는 반대로 대부분의 경우에 이러한 생각들은 (유럽에서 20세기 전환기와 30년대 대공황으로 달려가던 광적인 투기의 시기에서처럼, 또는 50년대 동안에 영국이 진행되던 침체 시기에서처럼) 체제의 흠집들이 뚜렷했던 기간에 유행했다. 훨씬 더 중요한 점은, 이 기간들은 (노동 계급에서 호전성이 비교적 낮은 수준이거나 여하튼 계급투쟁에서 성공률이 낮으면서) 사회에서 힘의 균형이 자본가 계급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진 시기였다. 페이비언들의 견해가 성공한 것은 많은 부분 노동조합이 조직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영역에서 노동조합을 뿌리째 뽑으려는 영국 자본가들의 대립적 추동력에 기인했다. 몬디즘은 노동 계급이 1926년 총파업에서 패배하고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래로 널리 퍼진 높은 실업률에 의해 사기가 꺾인 시기에 형성되었다. 게이츠켈의 방향 전환은 냉전 정치에 의해 생겨난 반동적 추세가 10년 동안 지배한 이후에 일어났는데, 당시 노동 계급의 생계 기준은 이른바 완전 고용에도 불구하고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두 가지 기본적인 특징이 현재 시기에도 적용된다. “세계화”, 인터넷, 신기술에 기초를 둔 온갖 약속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체제는 모든 곳에서 균열을 드러내고 있다. 지구 전체는 (1970년대에 시작된 이래로) 그 어느 때보다 긴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그렇게 거대한 틈을 가진 세계는 지금껏 없었다. 성장하고 있던 열강들이 총을 들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새로운 식민지와 시장으로 나아가던 시절에도 그렇지 않았다. 일본에서 발생한 1990년 주식 시장의 파열에서 러시아와 남아프리카에서 발생한 1998년 위기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파괴적인 금융 발작 같은 것을 경험한 세계 경제는 지금까지 없었다. 훨씬 더 깊은 대공황의 특징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에도 그렇지 않았다. 부유한 나라의 노동 계급이 그 정도 수준의 착취, 실업, 가속화된 사회적 직무 유기를 경험한 적도 없었고 제3세계의 가난한 대중들이 그처럼 극단적인 빈곤을 겪은 적도 없었다.

그렇다, 자본주의 체제는 자체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했다. 반대로 자본주의 체제의 쇠퇴가 지구상의 인구의 광대한 다수에게 점점 더 치명적으로 되고 있다. 자본주의를 대체할 필요가 더욱 커졌다.

그러나 동시에, 자본가들이 진행하는 공격이 20년 넘게 계속된 후에 나타난, 오늘날 노동 계급 호전성의 쇠퇴 때문에 블레어와 노동당 지도부는 그들의 어이없는 3의 길무계급성을 드러내고도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이처럼 공공연하게 불공평한 사회에서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에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타협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니 말이 되는가!

그러나 3의 길의 지난날 모든 판본들에 일어난 일을 잊지 말자. 실제로 그것들 모두 역사의 쓰레기통에 들어가 버렸다. 1900년대 첫 번째 부분에서, 베른슈타인과 웹 부부의 판본은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평판을 잃었다. 나중에 몬디즘은 자본가들이 대공황 탓에 노동조합이 너무 약화되어 그들에게 쓸모가 크지 않다고 느꼈을 때 자본가들에 의해 일축되었다. 게이츠켈은, 60년대 노동 계급의 호전성이 재출현함으로써 그의 정책이 의문시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런데 블레어의 3의 길이라고 다를 이유가 무엇인가? 머지않아 그것도 역사의 쓰레기통에서 다른 판본들과 결합할 것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논점은 그것이 이전의 판본들처럼, 일시적으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자체도 쓰레기통에 처넣어지는 것을 확보하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인 우리 또한 꼭 계급투쟁의 종말을 보고 싶다. 그러나 계급 구분을 확고히 하고 대다수의 인간을 노예 노동 상태로 떨어뜨리는, 자본주의 옹호자들이 사용하는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계급 구분의 종말을 보길 원하며 그래서 착취의 끝을 보길 원한다.

 

 

출발점: 19세기 자본주의

 

이 시기는 마르크스에 의해 정식화되었으며 오늘날 대부분의 정치가들과 지식인들에 의해 부정되는 노동 계급의 역사적 역할의 문제가 작동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착취와 기생성에서 벗어난 새로운 사회 질서의 산파 역할을 할 노동 계급의 잠재력.

그러나 중요한 것부터 다루자. 그 역할을 노동 계급에게 배정하면서 마르크스의 논거는 무엇이었으며 왜 노동 계급인가?

그 세대의 많은 젊은 지식인들처럼 마르크스는, 어떠한 반대도 용인하지 않는 귀족 체제에 의해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여전히 지배되고 있는, 매우 불공평하고 놀라울 정도로 낭비하는 사회를 발견했다. 이 세대에게, 당시 영국에서만 출현하고 있던, 자본주의의 동학은 민주주의의 밝은 미래를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는 과학과 기술의 놀라운 전망으로 강화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곧 자본주의가 인구의 훨씬 더 큰 부분에게 훨씬 더 나쁜 착취 형태(임금 노동)를 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일생의 임무는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곤경으로부터 자기 자신과 사회를 해방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도구를 개발하는 것이 되었다.

마르크스의 출발점은 물론 그가 자신 앞에 있는 것을 본 것이었다. 바로, 1846년에서 1866년 사이 20년 조금 넘는 기간의 19세기 영국 자본주의.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점에서, 이 자본주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와 다른 것만은 아니다.

체제의 작동을 면밀하게 들여다봄으로써, 마르크스는 그것의 주요한 특징의 윤곽을 그렸는데, 그 특징들은 그 시기만큼이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분명하다. 자본주의적 경쟁의 무자비한 특징, (마르크스가 예언했듯이, 결국에는 전체 행성을 자본주의 시장으로 편입시켜버리고 말) 그것의 무질서한 팽창주의적 경향. 이 경쟁에 의해 야기되는 거대한 사회적 낭비. 끊임없이 최대 이윤을 추구하고 예측할 수 없는 시장을 위해 맹목적으로 생산함으로써 야기되는 생산 위기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물질적·인간적 재해. 금융의 역할 증가. 자본의 운영과 실재 욕구 만족 사이의 틈 확대. 마르크스의 문구를 사용하면, 실업자라는 영구 예비군을 유지해야 할 체제에 고유한 조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이러한 특징 묘사에 오늘날 더 첨가할 것이 무엇인가? 체제에 고유한 모순에 의해 야기된 무질서가, 마르크스가 그가 살던 시대에는 상상하지도 상상할 수도 없었던 규모에 도달했다는 것? 금융 영역의 예측 불가능성과 전체 생산 영역을 불구로 만드는 금융의 능력이 전례가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 제국주의 단계가 세계를, 때로는 비교적 작은 몇몇 산업 국가들보다도 더 부유한 거대 기업들 사이의 전장으로 변화시켰다는 것? 그렇다, 이 모두가 진실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변했다. 다시 말해 그 모순은 오늘날 훨씬 더 예리해졌다. 그리고 이것은 그 체제를 마르크스 시대보다 훨씬 더 존속 가능하지 않게 만든다.

오늘날 경제 정체의 시기와는 달리, 마르크스의 시기는 빠른 경제 팽창의 시대 가운데 하나였다. 이것은, 보기를 들면, 마르크스가 자본론 에서 인용한, 당시 자유당 재무장관이던 글래드스턴이 한 다음과 같은 논평으로 예증된다. “1842년부터 1852년까지 이 나라의 과세 대상 소득은 6퍼센트 증가하였다. …… 1853년부터 1861년까지 8년 동안에는 1853년의 계산 방법에 의하면 20퍼센트 증가하였다. 이 사실은 너무나 놀랄 만한 것이기 때문에 거의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 이 실신할 부와 권력의 증대는 …… 전적으로 유산 계급에 국한되어 있지만 …… 그것은 일반 소비품의 값을 싸게 하기 때문에 노동 인구에게도 간접적 이익을 가져옴에 틀림없다. 부자는 좀 더 부유하게 되었고 가난한 사람은 좀 덜 가난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극단의 빈곤이 감소되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감히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당시 글래드스턴 자신은 인생이란 십중팔구는 생존 투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오늘날의 정체기든 19세기의 팽창기든 자본주의 체제의 이익이 노동 대중에 스며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증거다.

자본주의 체제의 존속 불가능성과 본성상 공황에 빠지는 경향의 근본 원인에 관해서, 마르크스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서 찾았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합하다. 1970년대에 어떤 이들은 국가 소유의 산업 부문의 범위 때문에 마르크스의 분석이 폐물이 되었다고 (잘못) 주장했다. 그렇지만 오늘날 분명 어느 누구도 이것이 의미 있는 반대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베른슈타인 이후 훨씬 뒤에, 노동자들이 소유한 주식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자본가들만큼이나 생산수단을 관리하고 있다는, 대처와 만델슨이 사용한 다른 주장도 마찬가지로 의미 있는 주장이 아니다. 시티(런던의 상업과 무역 중심지로 재계를 뜻하기도 한다-옮긴이)에서 거래되는 주식의 50퍼센트 이상이 한 다스도 안 되는 거대 펀드 매니저들에 의해 관리되기 때문에, 한 다스의 영국 텔레콤사의 주식이 자신의 저축을 그 주식에 쏟아 부은 노동자에게 소유권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것을 부여할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 않다면 공장 폐쇄는 훨씬 적을 것이며 중역실에는 살찐 고양이들(fact cats: 원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지만 오타로 보인다-옮긴이)이 훨씬 적을 것이다!

 

 

역사의 산파

 

19세기에는 자본주의를 제거하길 원하는 갖가지 이유를 지닌 사람들이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대량 생산의 경쟁에 의해 점점 더 압박을 당하던 중간 계급 장인에서부터 그들의 삶이 빈민원(영국에서 1834년 빈민법으로 설립되었는데 노동자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옮긴이)에서 일하는 것이었던 최하층 사람들까지. 그러나 사회 계층의 이런 폭넓은 범위 가운데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희망을 오직 하나의 계층, 노동 계급에 걸었다.

이 새로운 계층은 자본주의에 의해 생산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노동(노동력이라고 해야 한다-옮긴이)을 자본가 계급에게 판매함으로써만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계급은 영원히 자본주의적 착취의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이 계급은 자본주의의 착취에 관해서 어떠한 환상도 가질 수 없으며, 자본주의의 존속에 이해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 더욱이, 이 계급은 바로 그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에 의해, (수백, 때로는 수천 명에 달하는 이 계급 구성원들이 매일매일의 노동에서 협력하는) 점차 거대해지는 작업장에 집중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일상 활동은 사회가, 경쟁보다는 오히려 협력에 의해 더욱 합리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방법의 청사진을 제공한다. 특히, 노동 계급은 사회 전체의 이름으로 자신에게 명령하여 이 체제를 사슬에 묶어두고 있는 것(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서 체제를 해방시킴으로써 자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회 전체의 이익을 방어할 책임이 노동자에게 넘어오는 이 투쟁에서, 노동 계급의 사회적 비중은 보통 자본주의의 (마음 내켜하지 않지만 대부분 체념한) 피해자들인 모든 사회 계층을 자기 계급의 뒤로 끌어올 만큼 컸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이것은, 자본가 계급 자신이 낡은 봉건제도의 잔재들을 뒤집어엎고 생산력의 거대한 발전의 길을 열었을 때 혁명적이었던 만큼, 그 낱말의 역사적 의미에서, 노동 계급을 혁명적 계급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의 속박으로부터 세계와 그 생산력을 해방시킴으로써, 노동 계급은 자본주의적 착취를 끝낼 뿐 아니라 경제와 다른 모든 영역에서 다시 한 번 환상적인 진보의 시대를 열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이것은 인류가 더 한층 진보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었다.

마르크스 시대의 이 노동 계급의 특징은 무엇이었나? 1871년의 지표를 사용하면, 크기 면에서 공장 노동자는 활동 인구의 35퍼센트, 상업 노동자는 5퍼센트, 농업 노동자는 11퍼센트를 구성했다. 혁명적 계급이지만, 이 노동 계급이 의식적인 계급인 것은 물론 아니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직업을 위협하는 기계를 부숴버린 러다이트 시기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직도 살아 있다. 남자, 여자, 아린아이가 방적기와 방직기에 그들의 노동을 넘겨주거나, 석탄을 채굴하고 운반하거나, 용광로 앞에서 육체를 달궜다. 비교적 정규적으로 고용된 노동 계급 다음에는(그리고 이들과 얽혀 있는) 거대한 도시 빈민층이 있는데, 이들은 일생을 통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기간을 실업 상태에 있었다. 보기를 들면, 1864년에 24백만이 조금 안 되는 인구 중에서 공식적인 극빈자는 활동 인구의 5퍼센트였다. 런던에서는 이 극빈자가 인구의 24퍼센트가 넘었다. 이 빈곤층 가운데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나왔다. 더욱이, 엥겔스가 1845년에 영국 노동 계급에 관한 연구에서 지적했듯이, 도시 인구의 급속한 팽창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부양할 도시의 능력보다 앞서서 일어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럽고 혼잡하고 날림으로 지은 돼지우리 같은 집에서 오염된 공기를 마시며 단테의 지옥에 나오는 장면과 아주 유사한 상황에서 살았다.

총체적으로 볼 때, 이 노동 계급은 과도한 노동을 했고, 지나치게 착취당했으며, 아주 어린 나이에 알코올 때문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손상을 입는 경우도 흔했으며, 질병과 만연한 문맹 때문에 무력화되었다. 실제로, 노동 계급은 인구 중에서 극히 후진적인 부분으로, 편견(특히 종교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고 출신 지역에 기초한 깊은 증오심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마르크스는 노동 계급 구성원들의 도덕적 자질이나 지적 능력 또는 그들의 개인적인 의식 때문에 자신의 희망을 노동 계급에게 건 것이 결코 아니었다. 유물론자로서 그는 각 개인은 환경의 산물이지만, 또한 행위를 통한 자신의 경험의 산물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집단행동은 생산과정 자체에 의해 노동자들에게 이미 부과되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적 착취에 집단적으로 저항할 필요성도 그렇게 형성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을 통해서 노동 계급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대한 집단의식을 발전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노동 계급 의식

 

마르크스의 접근은 역사의 검증을 통해서 정당성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접근은 추론만에 근거를 둔 것은 아니었다. 이미 1830년대와 1840년대의 차티스트 운동 기간 동안에, 노동 계급의 중요한 부분이 당시까지는 영국에서 가장 거대한 정치 운동에 활동적으로 참여했다. 노동 계급은 그 운동에서 가장 훌륭한 사상가들과 선동가들 가운데 일부를 제공했으며 1840년대에는 그 운동의 실질적인 중추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견해는 다음 몇 십 년 동안에 더욱 정당성이 입증되었다. 영국에서 1870년대와 1880년대에 새로운 노동조합주의가 출현했는데, 이때는 수십만의 비숙련 노동자들이 그들만의 거대한 일반노동조합을 형성한 시기로, 그들 가운데 항만 노동자들과 철도 노동자들이 전투적인 파업의 배후에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1871년의 파리 코뮌이, 생산력에 대한 집단 관리에 기초하여, 전적으로 새로운 국가 권력의 형태를 조직할 수 있는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능력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마르크스의 견해가 역사의 검증을 통과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러저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노동 계급의 본성에서 변화를 발견했다. 1850년대에 ?에든버러 리뷰?(Edinburgh Review)는 차티즘의 쇠퇴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 시간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캘리포니아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금광 발견, 크림 전쟁으로 야기된 합병, 그리고 최근 우리나라 무역의 엄청난 증가로 인해 …… 우리 노동 계급들의 전반적인 상황이 변화했다. 결핍이 풍요로, 빈둥거림이 고용으로 바뀌었으며, 또한 불만이 만족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1872년에, 한때 저명한 차티스트 운동 지도자였던 토머스 쿠퍼(Thomas Cooper)는 차티스트 운동 초기를 회상하면서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차티스트 운동 시기에, 랭커셔 노동자들은 수천 명이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다수는 먹을 것이 부족했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디를 가든지 그들의 지적 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정치적 정의에 관한 훌륭한 이론들을 토론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을 것인데, 그 이론은 제정신인 모든 성인 남성은 자신을 통치하게 될 법률을 입안할 사람들을 선출하는 데 선거권을 가져야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면 사회주의의 가르침에 관해서 열심히 논쟁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랭커셔에서 그런 집단을 전혀 보지 못할 것이다. 대신 잘 차려 입은 노동자들이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협동조합에 관해서 그리고 협동조합이나 주택 건설 조합에서 자신들의 몫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런데도 다음 10년 동안에 일반 노조(general unions)의 건설로 나아가게 만든 일련의 파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은 바로 위에서 말한 잘 차려 입은 노동자들이었다! 이 운동을 점화시킨 것은 70년 중반 이후의 경제 위기였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지적했던, 공황으로 향하는 경향을 지닌 자본주의 체제의 특성이 바로 잘 차려 입은 노동자들에 대한 주장을 부적한 것으로 만들었다. 노동자들이 더 나은 생활수준을 지니는 기간이 있을 것이지만 낮이 지나면 반듯이 밤이 찾아오듯이 호경기 다음에는 불경기가 올 것이고, 노동자들은 임금 삭감과 해고를 당할 것이며, 실업자의 대오는 다시 한 번 부풀어 올라, 이로 인해 온갖 참상이 시작되며 또한 반란도 나올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바로 이 모순이 되풀이해서 노동 계급의 의식을 자극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시험

 

191710월 러시아 혁명은 마르크스의 전망이 올바르다는 것을 가장 결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어나리라고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장소에서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시간에 일어났다. 러시아 노동 계급은 상대적은 소규모 계급으로 얼마 안 되는 산업 중심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러시아는 여전히 반() 봉건적으로, 오히려 오늘날의 제3세계 국가들과 비슷했다. 인구의 대다수는 농민으로 광대한 짜르 제국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실로 1897년에 프롤레타리아트는 부양가족을 포함하여 러시아 전체 인구의 27.6퍼센트를 구성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소수만이 대공장에서 일했다. 1917년에는 어쩌면 3분의 1이 대공장에서 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노동 계급은 수적으로 열세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노동 계급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억압적인 국가들 가운데 하나와 맞서고 있었다. 짜리즘을 단순한봉건제로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20세기 초에 이르면, “유럽의 기술과 유럽 자본의 도움을 받아, 전제정은 이미 가장 거대한 자본주의 기업가로, 가장 거대한 은행가로, 철도와 술 소매점의 독점적 소유자로 변모했다. 이 시기에 전제정은 중앙집중화된 관료 기구에 의해 지탱되었는데, 이것은 새로운 관계들을 조절하는 데는 결코 적합하지 않았지만 상당한 에너지를 가지고 체계적인 억압을 가하는 데는 아주 능숙했다. ··· 과거 프랑스 정부도 그렇고 1848년 이전 유럽의 어떤 정부도 1908-9년의 러시아 군대와 견줄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실로 평화 시의 군대가 100만의 병력이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지적했듯이, 모든 사회 발전을 거스르면서 전제정의 지속을 가능하게 한 이 힘도, 혁명에 의한 전제정의 몰락 가능성을 차단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혁명만이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길로 만들었다.

그렇지만, 러시아 노동 계급을 1917년 권력 장악으로 이끈 것은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1차 세계대전은 치명적 패배, 엄청난 손실, 철저한 빈곤을 초래했고 이로 인해 혁명을 위한 조건이 무르익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볼셰비키라는 혁명 정당이 존재했다는 사실인데, 혁명 정당은 노동 계급이 권력 장악으로 나아갈 때 개량주의의 함정을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서도록 인도할 수 있었고, 그래서 훨씬 더 강했던 독일 노동 계급이 다음 해에 경험한 패배를 피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최소한의 교양을 갖춘 가장 후진적인, 그리고 상대적인 측면에서 유럽에서 가장 작은 노동 계급이 그 시기에 가장 강력한 독재체제를 뒤집어엎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직후에 임시로 동맹한 모든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한 대규모 공격에 저항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훨씬 더 의미 있는 것은 동일한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사적 소유의 기생성을 제거하고 그 나라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들까지도 짜르 체제에서 그 지역들을 고사시켰던 중세의 정체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경제의 토대를 닦을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 혁명으로 출현한 사회는, 초기 형태에서는, 더욱 강력한 자원들을 엄청나게 사용함으로써만이 오늘날 세계적 규모로 건설될 수 있는 것에 대한 청사진을 제공했다. 스탈린 체제에서 타락하기 전에 그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1919년에 직물 공장 센트로텍스타일(Centro-Textile)을 방문한 영국 작가 아서 랜섬(Arthur Ransome)이 제시한 사례를 보자. “국유화로 인해, 한 장소에서 공정이 완전히 수행되어 결국 운송의 낭비를 없애도록 공장을 합리적으로 재편성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런 식의 완전한 그룹이 23개 있었으며 직물 공업에서는 모두 합쳐 약 50개의 그룹이 있었다. 관리 면에서도 비슷한 집중화가 있었다. 예전에는 일릐인카(Ilyinka), 바르바르카(Varvarka), 니콜라스카야(Nikolskaya)에 건물과 사무실을 가지고 있는 경쟁 회사들이 수백 개 있었다. 차이니스 타운은 작은 직물 회사 사무실들 천지였다. 투쟁하는 경쟁적 지휘 단위들 전체가 이제는, 내부에서 협상이 이루어지는 건물에 집중되었다. 노동자들의 관리는 기술 전문가가 영향력을 지니는 방식을 통해서 수행되었다. 모든 공장의 선출된 대표들의 정기적 모임이 있었다.”

옛 직물 생산업자의 운명에 대해 물었을 때, 랜섬은 많은 사람이 해외로 나갔지만 또 많은 사람들이 국유화된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초기에 혁명에 반대해서 대부분 파업에 들어갔던 기술직들은 이제 예외 없이 복귀했고, 특히 좀 더 어린 기술자들이 이 산업 앞에 열려 있는 새로운 가능성, 끊임없는 새로운 기술 개선의 필요, 그리고 어떤 종류의 것이든 창의적인 것이 즉각적으로 환영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2차 대전 후 경제 몰락의 맥락에서 새로운 자유를 법으로 정하는 것과 그것을 시행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러시아는 원한다면 여성의 자유로운 낙태를 허용하고, 인종이나 성별에 기초한 개인의 차별을 금지하고, 멀리 펼쳐 있는 공화국들을 동료로 맞아들이고, 그들에게 자치를 허용한 첫 번째 나라였다. 노동자 정부의 단체들로서 소비에트들은 사회를 통제하면서 보통 사람들의 완전한 참여를 위한 틀을 제공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사회였을 뿐 아니라, 참을 수 없는 저개발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계급 없는사회였다. 아니, 적어도 내전기와 그 이후에 겪은 고난이 노동 계급의 의식을 좀먹고 노동 계급 사이에 타락을 확산시키기 전까지는 그런 상태였다. 그 후에 그리고 오직 그 후에야 스탈린은 공산주의라는 미명하에관료 독재를 수립함으로써, 관료들을 소비에트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새로운 국가 관료들의 동력을 이끌 수 있었다.

소련의 타락이, 러시아와 전 세계적 규모에서, 노동 계급의 패배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10월 혁명으로 건설된 사회가 자본주의를 복구하려는 제국주의의 압력에 그렇게 오랫동안 저항했다는(그리고 오늘날에도 독특하게 타락한 방식으로 여전히 저항하고 있다는) 사실은 혁명 이후 몇 년 동안에 노동 계급이 수행한 변형의 깊이를 보여주는 증거다. 그리고 노동 계급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증명하기는커녕, 소련의 타락과 붕괴는 스탈린에 의해 나중에 묻혀버린 마르크스의 견해, 즉 공산주의는 국제적 수준에서 자본주가 제공하는 가장 높은 단계의 발전(고립된 후진적인 러시아는 그것 없이 버텨야 했다)에 기초해서만이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이 정당함을 입중해줄 뿐이다.

 

 

자본주의는 변했나?

 

이른바 경제 전문가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10월 혁명 시기 이후 극적으로 변했고 2차 세계대전 이래로는 훨씬 더 많이 변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로부터 그들이 끌어내는 결론은 두 개의 범주로 나뉜다.

어떤 이는 자본주의가 지금 새로운 발전과 풍요의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고, 그들이 시장의 힘이라고 부르는 것에 개입하지 말고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 경제학자들은 이 새로운 단계의 이름을 찾아내기도 했다. 그들은 블레어가 좋아하는 용어를 훔쳐와서는 그것에 신 경제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백만장자들의 재산이 증가하는 동안에 그들의 경제학자들의 상상력은 완전히 고갈되고 있다는 증거다.

한편 또 어떤 이들은 세계 시장이 지난 시기 동안에 난폭하게 통제를 벗어나, 세계 인구 중에 거대한 부분이 견딜 수 없게 될 정도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들은 체제의 가장 못마땅한 결과를 억제하기 위하여 체제가 더욱 엄격하고 더 잘 규제되어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 전문가들이 동의하는 것이 하나 있다. 변화된자본주의가 사회 변형의 필요를 폐기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했듯이, 지금까지는 자본주의가 그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능력의 징표를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보여준 것이 있다면, 오늘날 자본주의는 여느 때보다 더 불안정하고 지구상의 인구의 욕구를 채워줄 능력이 훨씬 더 적다는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 위기의 형태가 변했다. 우리는 이제 마르크스의 시대에 참혹한 피해를 낳곤 하던 주기적인 공황 대신에 영구적인 위기를 견디어내어야 할 수상한 특권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위기의 메커니즘과 결과는 여전히 동일하다. 주요한 차이는 이 결과가 과거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지난 세기 동안에 전혀 변화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지구상에 사는 전체 인구의 관점에서, 생계 수준은 올랐다. 비록 이러한 평균의 증가가, 이를테면, 아프리카 전역의 절대적 빈곤을 숨기고 있지만 말이다. 체제 자체의 변화에 관해서는, 그 변화는 상황적 이유 때문에 이전에는 포기되었던 과거 관행의 재등장 그리고 이미 존재했던 추세의 심화로 구성된다.

이와 같이, 오늘날 세계무역기구가 옹호하는 자유무역원리는 19세기 후반에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 그 원리는 가장 부유한 부르주아지들이 더욱 빈곤한 국가들을 약탈하기 위한 포장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세계적 규모의 거대 기업체들의 발전은, 경쟁의 증가에 맞서 자신들의 투자에 대한 수익(이른바 이윤율)을 보호하기 위한 자본가들의 시도의 결과로, 세기 전환기에 이미 시작되었다. 마찬가지로 이른바 경제의 지구화는 훨씬 더 일찍, 다시 말해 부유한 국가들의 산업 생산이 그들의 국내 시장의 필요보다 훨씬 더 커지고, 그들이 새로운 시장과 더 싼 원재료의 원천을 찾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금융 부문의 거대한 성장에 관해서는, 19세기 마지막 몇 십 년 이래로 그런 추세는 계속되었다. 오늘날의 차이는 1970년대 초에 다시 찾아온 위기 때문에, 자본가들이 더욱 단기적인 금융 투자로 이동하면서, 생산적 활동에 영구적으로 투자된 자본의 비율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최근 몇 년 동안에 주식시장에 대한 투기적 거품을 설명해주는 것이 이러한 금융 투자의 발전이다.

신 경제의 옹호자들이 이 진행 중인 투기를 장래의 풍족함의 징후로 보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결국, 동남아시아에서 일어난 1998년의 금융 위기나 심지어는 1990년 일본의 투기적 거품의 붕괴가 그들을 더욱 현명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에는 일정한 논리가 있다. 이들 전문가들은 그들의 눈을 이윤 차트에 맞추고 있으며, 이윤이 증가하는 것을 보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에게 정말로 가치 있는 전부이다. 사장을 위해 수익을 내는 경제가 정의(定義)건강한경제이다. 그것을 제외하면 오늘날, 이윤이 증가하고 있는 주요한 그리고 유일한 이유는 IT, 컴퓨터, 또는 인터넷 같은 환상적 발전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더 낮은 임금을 지불받는 노동자들로부터 더 많은 가치를 쥐어짜낸 결과이다. 새로운 기술의 연막 뒤에는 생산성이 낮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라는 착취 경제의 성장이 있다. 그런데 하이테크 기계들과는 달리 마음대로 스위치를 켜고 끌 수 없는 인간 노동으로부터는 쥐어짤 수 있는 양에 한계가 있다.

자본주의의 더 빡빡하고 더 많은 규제를 옹호하는 사람들, 그들은 정말 무엇을 기대하는가? 회사를 도와 이윤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무역, 금융, 노동법, 등등의 영역에서 모든 규제를 제거해온 그런 정부들이 이러한 규제를 복원할 것인가? 그러나 그들이 그 일에 언제 착수했든, 그들의 정치적 표 딱지가 무엇이든,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의 국내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를 두둔하려는 것인가? 그리고 그들은 규제를 도입했다면, 동시에 그들은 필연적으로 노동 계급의 희생시켜, 그들의 자본가들을 도와 잃어버린 이윤을 만회할 방법을 찾지 않을 것인가?

자본주의는 그 근본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지난 세기 동안 자본주의 전개는 실제로 이 모순을 훨씬 더 예리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는 과거에 그러지 못했듯이 오늘날에도 미래를 제시하지 못하며, 또한 더 이상 개혁 가능하지도 않다. 자본주의는 전복되고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다.

 

 

노동 계급은 약화되었는가?

 

영국처럼 부유한 나라에서는, 오늘날 노동 계급에 대한 여러 가지 신화가 존재하는데, 그 모두가 사회를 변화시킬 노동 계급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물론 이런 신화들 가운데 하나는 그런 노동 계급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부유한 나라들이 지난 20년 동안에 산업 불모지로 변형됨으로써 육체 노동 계급이 고립된 소수에 지나지 않는 서비스 지향적인 경제가 남았다.

누구나 예상하듯이, 그러한 주장은 이른바 신 경제의 보루인 미국에 대해서 사용되어 왔다. 그리고 19981월에 ?아메리칸 데모그래픽스?(American Demographics)라는 잡지에 실린 한 기사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해야 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주요 신문들은 노동 계급의 죽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 사망 기사는 지금 보면 때 이른 것이었던 것 같다. 노동 계급의 구조는 변하고 있지만, 노동 계급의 정신은 번창하고 있다. 변하고 있는 것은 헬멧을 쓴 블루칼라 백인이라는 노동 계급의 상투적 이미지다. 산업화 시대가 점점 희미한 기억이 되면서, 경제를 움직이는 집단의 이미지도 변하고 있다. 지표에 따르면, 미국인들 가운데 노동하는 핵심은 점점 젊어지고, 인종적으로 더욱 다양해지고, 여성의 수는 더 많아지고, 교육 수준은 높아지고, 고용주들로부터 더욱 소외되고 있다.” 그래서 산업 노동 계급이 무시할 만한 요소가 되고 있다고 믿는 이 기사를 작성한 사람에게도, 노동 계급 자체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이제 영국의 상황을 더욱 면밀하게 살펴보자. 이용 가능한 최근의 수치에 따르면, 자기 의사나 노령으로 인해 취업하지 않는 사람을 빼면, 3,150만 명의 취업 또는 잠재적 취업 노동자들 가운데, 2,410만 임금노동자, 340만 자영업자, 400만 실업자가 존재한다. 포함된 범주들 가운데 일부가 군대, 경찰, 성직, 정치가, 그리고 그 밖에 다른 여러 가지 것들처럼, 어떤 식으로든 사회적으로 생산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고려 대상에서 빼야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 수치에 따를 때 육체노동 계급은 어떤가? 제조업 일자리는 모든 일자리의 16.5퍼센트, 400만 노동자를 구성한다. 발전 노동자들, 수력·가스·전기 노동자들, 하수와 오물 처리 노동자들, 통신업과 우편업 노동자들, 건설 노동자들, 광산 노동자들을 합쳐서 추가로 270만 명에 이르는데, 그래서 육체노동자 전체 합계는 670백만 명 또는 전체 노동 인구의 28퍼센트에 이른다.

화이트칼라 직종이 오늘날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여겨지는데, 여기에는 1,000만 명 또는 임금 노동자의 41퍼센트가 포함된다. 그 다음에 분명하지 않는 다른 사업 활동10퍼센트, 건강 관련이 또 10퍼센트, 그리고 교육직이 8퍼센트를 구성한다.

이 수치로부터 아주 명확한 상을 그리기는 어렵다. 보기를 들면,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일하는 정비공은 세일즈맨과 동일한 범주에 들어간다. 슈퍼마켓이나 도매 창고에서 일하는 육체노동자는 소매업에 포함된다. 의사와 고도의 자격을 갖춘 간호사들은 국민건강보험 보조직원으로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앞에서 언급한 분명하지 않은 다른 모든 사업 활동은 수많은 일용직 임시 노동자들을 포함하며, 정부나 사장들은 모두 이들의 실질적인 업무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주길 원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어떤 산업에서는 고용주들이 세금이나 노동 규정을 피하기 위하여 자영 노동자들을 고용하기를 선호한다. 그런 식으로 340만이라는 의미 있는 숫자의 자영업자들이 실제로는 위장된 임금 노동자들이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통계의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으며, 그들이 실제로 어떤 부문에서 일하는지 아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얼마나 많은 육체노동자가 공식 통계에서 계산되지 않는지는 이야기하기가 불가능한데, 분명 많은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만으로도, 사실은 6,700만 육체노동자가 거대한 힘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 숫자가 한 세기 전보다 비율상 더 작을 지라도, 그 절대적 크기는 훨씬 더 크다. 더욱이 사회의 전개는 한 세기 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을 산출했다. 고도로 집중화된 저임금 화이트칼라 노동인구가 그것인데, 이들은 자신을 육체노동 계급보다 사회적으로 상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최근 TUC 통계는 사적 영역의 모든 임금 노동자들의 절반 이상이 250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장소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은 30년 전 롱브리지(Longbridge)에 있던 옛 브리티시 레일런드(British Leyland: 국영 자동차회사였다-옮긴이) 공장의 크기는 아닐지라도, 자본주의가 노동 계급을 집단적으로 조직하고 있다고 마르크스가 말했을 때 그가 언급한 집중의 규모다. 실로 인원이 250명에 달하는 일터는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을 쓴 1840년대에는 큰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육체노동 계급은, 여하튼 잠재적으로, 그 크기와 집중 때문에 사회의 주요한 요소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것은 지난 몇 십 년 동안 포드-대거넘( Ford-Dagenham) 같은 공장의 조립 라인 노동자의 아주 사소한 쟁의 행위가 있을 때마다, 신문에 대서특필될 정도로 사장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덧붙여서, 이 육체노동 계급은 이제 저임금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광범위한 분견대에 의해 강화된다. 이 노동자는 계급투쟁에서 그들만으로는 경제적 파괴력이 작아졌을지 모르지만(비록 은행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을 쉽게 실질적인 혼란 상태에 빠뜨릴 수 있을지라도), 그들은 숫자와 대규모 작업장에 집중이라는 무기를 지니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노동 계급을 한 세기 전보다 훨씬 더 강하고 덜 고립되게 만든다.

 

 

중간 계급 사회”?

 

물론 신 노동의 언어로 하면, 모든 사람은 체제에 이해관계를 지니는 것으로 여겨지므로 모두가 중간 계급이다. 그리고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정치인들은 소수의 주식을 소유하고, 집이나 개인연금을 소유한 많은 노동자를 지적한다. 물론 안락한 공립 주택과 적절한 국가 연금 규정 같은 다른 선택이 있었다면, 그들은 이런 것들 중 어떤 것도 획득하지 않았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이들 노동자를 중간 계급으로 만드는가?

주식 소유에 대한 주장은 아주 오래된 주장이며 사실상 진지하게 고려할 가치가 거의 없다. 결국 영국 가계의 16퍼센트만이 실제 조금이라도 주식을 소유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이것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지닌 얼마 안 되는 저축액을 인플레이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법(은행과 주택금융 공제조합의 계좌가 오늘날에는 더 이상 허락하지 않는 것)일 뿐이며,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주식 시장이 후끈 달아오르더라도 의미 있는 이윤을 얻을 만큼 충분한 주식을 보유하지 않는다.

주택 소유에 관해서는, 대처에 의한 공립 주택의 매각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모든 주택의 26퍼센트만이 완전하게 소유되는데, 공립 주택 매각은 임대인들에게 사는 것 이외에는 거의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고 새로운 집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융자를 받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게 만들었다. 오늘날 저당권자가 가구의 43퍼센트를 구성한다. 사실 이 비율은 1979년 이래로 증가했는데, 오늘날 20퍼센트인 것에 비해 그때는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공립 주택에서 살았다. 그러나 융자금을 얻은 사람들은 종종 그것이 감내하기 어려운 부담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집을 유지할 수 없으며 이사할 필요가 있을 때 꼼짝 못하게 된다. 저당은 대개 많은 노동 계급 가족이 자부심을 느끼기보다는 분개하는 올가미임이 증명되었다. 가끔 중간 계급 저널리스트들은 노동자들이 저당권자들로서 이제 반대쪽에있기 때문에 더 이상 파업을 계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중간 계급 저널리스트들은 채무 불이행에 따른 재산 회수가 노동 계급 가족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그것은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을 뜻한다)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노동자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 그들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그와 같은 영구적인 위협을 받으면서 그들이 어떻게 반대쪽에 있다고느낄 수 있을까?

개인연금 주장에 관해서는, 저임금 피고용인들에게 개인연금의 잘못된 판매에 대한 추문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그런 연금의 관리 비용은 너무 높아서 매달 그것을 지불할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만을 흡수했다. 사실상 이것이 블레어가 신탁 연금 제도(stakeholder pensions scheme)를 제안한 이유이다. 그것은 보험회사들이 노동자들의 저축을 조금 더 낮은 프리미엄을 붙여서 탈취할 수 있도록 보험회사의 비용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그때조차도 저임금 노동자에게는 신탁 연금이 너무나 비쌀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배제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노동 계급의 상당 부분이 여전히 기아 수준의 국가 연금으로, 그들이 아주 큰 회사에서 일했다면 과거에 누렸을지 모르는 직장 연금의 혜택 없이 생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안을 선택하거나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이른바 특권층은 그들의 연금이 이제 그들이 통제하지 못하는 미친 금융 시스템의 부침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부러워할 만한 상황도 아니며 그들이 안전하다고 느낄 상황도 분명 아니다!

그래서 이 모든 투자자의 허튼 짓은 거의 가치가 없다. 노동 계급은 언제나 그러했듯 여전히 빈곤하다. 사실상 오늘날 노동 계급은 훨씬 더 빈곤하다. 지난 몇 십 년의 영구적인 실업 상태와 임금 감소 때문에, 국민 소득에서 노동 계급의 몫은 계속해서 내려가고 있다. 오늘날 영국에서 가장 가난한 20퍼센트가 국민 소득의 7퍼센트를 얻는 반면 가장 부유한 20퍼센트가 41퍼센트를 가져간다. 전체 가계의 30퍼센트는 저축을 전혀 하지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노동 계급이 중간 계급인가!

노동자들이 ?파이낸셜 타임즈?에 실린 그들이 소유한 한줌의 주식 가격을 찾아보기 때문에 그들이 자본가다운 정신을 지니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중간 계급 유토피아라는 그들만의 꿈이 마침내 실현되었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 계급은 중간 계급의 지위로 점차 빨려 들어가는 대신에, 하층 중간 계급이야말로 실업과 몰락으로 인해 노동 계급의 지위로 빨려 들어가거나 더 이상 그들의 존엄성을 존중하려고 하지 않는 체제에 의해 소외당하고 있다. 이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수간호사, 교사, 그리고 다른 전문직들이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경제적 영향력을 상실했는가?

그러나 대부분의 가치, 아니면 조금이라도 무언가 직접적인 가치를 생산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국내 총생산(GDP)에서 백분율로 표현되는 생산량 면에서, 위에서 정의한 육체노동 계급은 노동인구 중 28퍼센트에 지나지 않지만, 40퍼센트가 넘는 양을 생산한다. 그리고 적어도 이것은 영국에서 육체노동자가 생산한 가치가 전체 인구를 위한 재화, 연료, 운송 등의 국내의 유일한 원천일 뿐 아니라 사장들이 얻는 수익의 주요한 원천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편 금융 서비스에 종사하는 100만 노동자가 같은 GDP22퍼센트를 생산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떻게? 부분적으로는 노동자들이 그들의 은행 계좌에 남긴 돈을 가지고 금융 시장에서 장난침으로써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세계 전역에서 자본가과 기업들이 소유한 자본을 이리저리로 옮김으로써 가능하다. 그러나 이 자본은, 애초에 생산 영역에서 나왔으며 재투자되지 않은 축적된 이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맨 처음에 어디서 생겨나는가?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영국에서건 해외에서건 노동 계급의 과거 노동의 산물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경제가 금융만으로 생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신화는 명백히 허튼소리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왜 블레어와 그의 내각은 영국의 제조업자들을 위한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외국 정부들에 정치적 영향력을 사용하려 그렇게 애를 쓰는가? 명백히 영국의 제조업 자본가들은, 자신들도 과잉이 아니며 육체노동 계급이 그들을 위해 만드는 막대한 이윤도 과잉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게다가 금융 자본가들은 발전 노동자들이 컴퓨터의 전원을 내리기로 결정한 날 무엇을 할 것인가? 물론 모든 대규모 회사는 이제 자체의 비상 전력 공급 장치와 빠른 전화 연결로 먼 곳에서 민감한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전기 관리와 텔레콤 노동자들이 발전 노동자들과 합류하기로 결정한다면 어쩔 것인가? 육체노동자가 그것을 하기로 결정한다면, 수십 억 파운드어치의 가치가 있는 금융 거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영원히 유실될 수 있으며 금융 시장의 모든 카지노 기계는 정지될 수 있다.

기술이 노동 패턴을 변화시킬 것이며 그래서 노동자들의 대규모 집중은 더 이상 없을 것이며 모든 사람이 자그마한 작업장이나 심지어는 집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대규모 집중 없이 자동차 생산 같은 대규모 제조업을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당분간 이것은 내버려두자.

원자화된 노동 계급이라는 사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19세기 말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집중이 증가하는 것이 너무나 불안해서 1880년에 첫 번째 전기 모터의 생산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신문들은 소규모 작업장 사회를 예언하는 기사들로 넘쳐났는데, 각각의 기사는 증기나 석유로 작동하는 기계보다 훨씬 더 작고 더 생산적일 수 있는 정교한 전기 기계들을 제시했다. 생산 과정은 각각 소규모 작업장에서 수행되는 일련의 소규모 공정으로 축소되어야 할 것이며 대규모 공장들 대부분은 문을 닫을 것이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빼놓고는 나무랄 데가 없는 생각이었다. 새로운 모터들을 생산한 회사들은 생산에 대한 독점을 취하면서 가능한 한 더 많은 이윤을 얻기로 결심했고 그 모터들은 소규모 작업장에는 너무나 비싼 것으로 판명되었다. 한편 대부분의 큰 공장들은 경쟁자들이 그들보다 먼저 그렇게 할까 두려워서 이 전기 모터를 사용하는 쪽으로 빠르게 옮겨갔다. 그와 더불어 산업의 근육을 상실한 해롭지 않은 노동 계급에 대한 꿈도 머리에서 지워야 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약간 다른 이야기가 제시되고 있다. 머지않아 대부분의 화이트칼라 업무들이 인터넷 상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전화선을 통한 소형 컴퓨터들 사이의 통신 발전과 더불어 10년 전에 유행했던 것과 아주 똑같은 동화 같은 이야기다. 재택근무가 화이트칼라 부문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그 시절에 나돌았다. 타자수, 회계사, 세일즈맨, 등등은 집에서 일하고 전화선을 통해 회사에 보고하게 될 것이라고. 즉각적인 결과는 생산성의 급속한 하락이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나무랄 데가 없는 이야기였다. 집에서 일할 때, 특히 그들을 재촉할 감독이 없기 때문에, 노동자는 고용주들을 위한 일 말고 다른 일을 찾는 경향이 있었다. 그 때문에, 풀타임 피고용인을 임시적인 프리랜스 협력자로 전환하는 것이 유리한, 더 나은 보수를 받는 특정 전문직 일자리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회사가 그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오늘날 인터넷의 꿈같은 이야기에 관해 듣게 된다면, 노동자의 행위를 감시하기 위해 감독관, 카메라, 컴퓨터를 이용한 감시를 결합한 감시망이 설치된 영국의 콜센터에서 고되게 일하고 있는 수십만 노동자들에 대해 생각해보기만 하라.

모든 대규모 공장의 폐쇄를 통한 노동 계급의 원자화에 관해서 이야기하자면, 이것은 몇 가지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소수의 관리 노동자들만이 필요하다면 고도의 원자화가 도입될 수 있었다. 자동차의 최종 조립처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러 가지 까다로운 부분들이 어떻게든 잘 어우러져야 하는, 어떤 종류의 생산(오늘날까지도 로봇이 할 수 없는 부문)에서는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대기업의 입장에서 막대한 투자를 요구할 것이라는 점인데, 이것이 바로 기업들이 지난 30년 동안 회피해온 것이다. 노동 계급을 파편화하는 또 다른 방법은 훨씬 더 대규모로 하도급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 낮은 임금을 지급하는 하도급업체가 만든 생산물은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포드 같은 대기업들은 결국 하도급업체를 주시할 수 있도록 자기 회사의 조립 공장 옆에 하도급업체를 위한 특별 공업 단지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운다. 다른 말로 하면, 노동자들은 포드 공장에서 하도급업체의 단지로 위치를 바꾸게 되는데, 그곳의 상황은 더 열악할 것이지만, 노동자들의 유사한 집중이 발생하는 것은 필연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체 생산을 해외로 이전함으로써 사장들은 모국에서 노동자의 필요성을 제거할 수 있다. (직물 산업 같은) 몇몇 산업은 대규모로 이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 이전한 공장들은 대부분 저임금 노동 인력을 고용하고 이미 완전히 자동화된 일자리를 지닌 소규모 공장들이었다. 대부분의 공학 분야에서는, 해외에서 숙련 노동 인력을 찾기가 어려워서, 또한 대공장을 폐쇄하는 데에 따른 정치적 위험 때문에, 생산을 이전하기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노동 인력의 반응이 어떨지 아무로 알지 못하는데, 이것이 사장들과 정치인들을 괴롭힌다. 어쨌든 1980년대 초 이래로 이들이 너무 잦은 갑작스런 폐쇄를 삼가기 시작했다는 사실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모든 대기업이 이윤 중 대부분은 아닐지라도 큰 부분을, 여전히 영국 시장과 국가의 보조금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들은 이 중에 어느 하나라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공업 분야에서도, 노동 계급은 가까운 장래에도 경제적 영향력을 계속 보유할 것이다. 노동 계급이 그것을 사용하기로 선택한다면 말이다.

 

 

가난한 나라의 노동 계급

 

마르크스의 시대나 러시아 혁명 시절에서와는 달리, 노동 계급은 더 이상 한줌의 공업국가나 준공업국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노동 계급은 제3세계를 포함해서 세계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진정 국제적인 계급이다. 실제로 이것은 지난 100년 동안 세계 시장의 발전에 따른 결과물 가운데 하나였다.

물론 세계 시장의 발전은 매우 불균등했다. 이 기간 동안 부유한 나라들이 이해관계를 다투는 가운데 세계 시장이 그들의 사이의 경쟁적인 영역들로 분할과 재분할을 거듭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는 제3세계 국가들 가운데 어느 정도 발전과 산업화를 겪은 나라들이 있는가 하면 산업화를 아주 조금 경험했거나 전혀 경험하지 못한 나라도 있음을 의미했다. 이것은 서구의 다국적 기업들이 이용하길 원하는, 석유와 광물 또는 농산물 같은, 자원의 이용 가능성에 상당히 의존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다국적 농업 관련 기업의 팽창 때문에, 대체로 농산물 공급자로 남아 있는 국가들조차도 과거에는 자급자족하던 농민들이 임금노동자로 변형되는 과정을 경험했다.

인도를 예로 들어보자. 인도는 지금 10억 인구를 지녔다. 노동력의 16퍼센트만이 제조업에서 일하지만, 16퍼센트에는 거의 6,900만 노동자가 포함된다! 전체 인구의 약 43퍼센트를 구성하는 전체 노동력의 나머지 중에서, 64퍼센트는 농업에서 일하고 20퍼센트는 서비스 산업에서 일한다. 다른 말로 하면, 오늘날 인도는 아주 대규모 노동 계급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러시아가 프롤레타리아 혁명 직전에 지녔던 것보다 훨씬 대규모다.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과거 노동자 국가의 명맥이 계속해서 분해되고 있지만, 소비에트 사회에서 다수였던 산업 노동 계급은 여전히 3,000만 노동자를 포함하며 또 서비스 부문에 고용된 3,200만 명이 있다. 물론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실제로 정기적인 임금을 받는지는 또 다른 문제인데, 이것은 그들을 아프리카와 그 밖의 빈곤한 제3세계 국가들의 수많은 공공 부문 노동자들과 동일한 부류에 들어가게 만든다.

각 나라가 속한 대륙에서 다른 나라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이 산업화된, 브라질과 남아프리카의 사례는 노동력의 상이한 분포를 보여준다. 남아프리카는 아직 노동자의 32퍼센트가 제조업에 집중되어 있으며 브라질에서 그 비율은 23퍼센트다. 중국은 또 다른 사례인데, 중국은 지난 몇 십 년 동안 세계 시장에서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직 노동자의 15퍼센트만이 제조업에서 근로자로 등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백분율은 18,500만 노동자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 수치는 촌락에 근거를 둔 공장에 고용되어 있어서 농업 경제의 일부로 분류된 다수를 제외한 것이다.

이 수치는 제3세계 노동 계급의 성장이 산업화된 국가들의 노동자들을 크게 보강했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제3세계 노동 계급을 넘어서면, 훨씬 더 많은 도시 빈민층이 있다. 지난 50년 동안에, 3세계 도시의 중심 지역은 10억 인구가 추가되면서 팽창했다. 가난한 나라의 도시들은 전체 인구수에서 이제 선진 공업 국가의 도시들을 넘어선다. 세계에서 가장 큰 27개 도시 가운데 23개가 제3세계에 있다(인구 1,000만 이상의 거대 도시들). 그해 비해 현재 런던에는 약 8백만 인구가 있다. 2015년에 이르면 이 거대한 가난한 도시들이 세계 도시 인구의 4분의 3을 차지할 것이다.

이들 도시 빈민들의 상태는 빅토리아 시기 영국의 도시 빈민과 맞먹는다. 이들 도시의 인구 가운데 30에서 70퍼센트가 수도관 시설이 전혀 없거나 기껏해야 임시 저수탑을 갖추고, 불법으로 설치할 수 없다면 전기도 없고 배수 시설도 전혀 없는 판자촌에서 살고 있다. 그 도시들은 이른바 비공식 경제’(노동자들을 보호할 노동 규제가 전혀 없으며 정글의 법칙 이외에는 어떤 법도 없는 영역)에 의해 사용되는 육체 노동의 저장소를 형성한다. 1995년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이 영역이 경제 활동 인구의 56퍼센트를 구성했다.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에서는 이 영역이 노동 인구의 75퍼센트(31,400만 노동자, 그들 중 10세에서 14세 사이의 어린이가 1,600만 명)를 구성했다.

이 비공식 영역은 실제로 공식 또는 규제된 영역이 의존하고 있는,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그것은 거대 다국적 기업이 노예에 가까운 노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접근하는 수단을 제공한다. 보기를 들면, 봄베이에 있는 비공식 하도급업체는 판자촌으로 들어가 변변찮은 성과급이나 심지어는 그들의 생활 공간을 보호할 권리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칫솔, 조립 완구를 만들고 포장 등을 할 노동자를 찾을 것이다. 그들의 생산물은 결국 유니레버(Unilever) 같은 회사의 수출을 위한 위탁 판매로 들어간다. 물론 이것은 판자촌 거주자들에게 정규직 노동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생활은 위태롭다는 특성을 지니는데 이는 그들이 종종 아사 직전에 처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것 때문에, 몇 년 사이에 이들 빈민굴 주민들 사이에서 자발적인 자기 방어 조직과 남아프리카의 흑인 거주 지구나 캘커타의 빈민촌에서처럼 특정 형태의 자치가 출현했는데, 주민들은 이를 통해 그들의 주거지가 파괴되는 것을 막고 물 공급과 배수를 조직하고 범죄 조직으로부터 보호하려 했다. 빈곤에 처한 이들 노동자는 인도 산업 노동 계급의 자연스런 동맹자이며 그들을 지원하는 주요한 기초가 될 수 있으며, 사실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투쟁의 전통

 

게다가, 3세계 노동 계급들은 양차 대전 사이 기간이나 더 나아가 20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오랜 투쟁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서구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거들먹거리는 태도에 반하는 것으로, 서구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제3세계 노동 계급 운동에 미친 유일한 기여는 그들의 관료적 방식을 수출하는 것이었다.

다음과 같은 투쟁들을 생각해보기만 하면 된다. 2만 명에 달하는 조합을 형성한 후, 1904년에 미국제 무기에 의해 2,500명의 노동자들이 죽은 대학살을 낳았던, 칠레 구리 공장 노동자들과 칠레 초석 노동자들의 거대한 파업. 아니면 시에라리온에서 수도 전체 인구의 지지를 받으며 6주 동안 지속되었던 철도 노동자들의 1926년 파업. 아니면 1947-48년에 다카르-니제르 간(Dakar-Niger) 철도에서 파업하여 승리한 세네갈과 니제르를 가로지르는 아프리카 노동자들. 아니면 서아프리카 청년 동맹을 만들고 1939년에 서아프리카 국경선들을 가로질러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첫 번째 노동조합들 가운데 몇 개를 창설했으며, 파업의 물결이 지나간 후 선동죄로 교도소에 수감된 시에라리온 출신 마르크스주의자, 월리스-존슨(I. T. A. Wallace-Johnson)의 행위.

남아프리카에서, 노동조합들은 20세기 첫 4반세기에 건설되기 시작하여 1921년에 공산당이 발진한 후에 추동력을 얻었다. 이 시점부터, 남아프리카 노동 계급은 되풀이해서 정치 현장의 선봉에 섰다. 때때로 그들은 194621명의 영국인과 미국인이 합동으로 소유한 광산에서 75,000명의 광부가 일으킨 파업처럼 쓰라린 패배를 겪기도 했는데, 이 파업은 1,000명의 광부가 체포되고, 1,250명이 부상당하고, 적어도 13명이 죽은 후에야 분쇄되었다. 1980년대에 이르면 흑인 노동 계급의 호전성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더 이상 존속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실제로는 그들의 것인 승리를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박탈당함으로써, 그들은 계속해서 이들 지도자들이 부과하는 긴축 정책과 민영화에 반대해서 싸우고 있다.

거의 모든 제3세계 국가들에서 노동조합은 식민지 권력에 맞선 투쟁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 그러나 독립 후에 이들 노동조합은 시작부터, 그들이 권력을 잡도록 도왔던 민족주의 정치가들과 싸워야 했다. 1962?센트럴 아프리칸 메일?(Central African Mail)에서 인용하면, “더 나은 임금과 조건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단결된 목소리 그리고 민족주의 정치가들의 구애, 이것들을 통해 노동조합 운동은 정치적 발전에 앞서서 권력을 얻었다. 말하자면 노동조합은 민족주의적 정치의 기선을 제압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상황이 급변함을 본다. 식민주의가 끝나면서, 민족주의 정치가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상승하기 위해 이용하고 구애를 보냈던 바로 그 노동조합이 이제 그들의 통제와 권위에 위협적이며 장애물임을 깨닫고 있다.”

오늘날 제3세계 국가들의 파업은 여러 해 동안 영국에서는 보지 못했던 규모로 일어난다. 그리고 부유한 나라에서 임금 문제로 파업을 강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 가운데 하나가 테이블 위에 더 이상 돈이 없다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보통 테이블 위에 거의 아무것도 없는 제3세계 국가에서 서구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어떻게 생존할까? 보기를 들자면, 전기 산업을 민영화하겠다는 위협에 대해, 거대한 파업이 인도에서 막 일어났다. 우타르프라데시(Uttar Pradesh)에서 숙련 기술자와 육체노동자가 앞장섰고 87,000명의 노동자들이 무기한 파업을 계속하고 있으며 노동자들을 지지하기 위해 다른 주에서 방문하고 있다. 7개의 다른 주 노동자들이 그들과 결합해 하루 동안 연대 파업을 진행했다. 연루된 두 개 노동조합의 파업 지도부를 포함하여 6,000명의 활동가들이 체포되었다. 400명의 노동자가 즉각 해고당했다. 11일 후에 정부는 민영화를 연기할 것에 동의했다. 이 파업이 일어나는 동안 100,000명의 부두 노동자들과 항만 노동자들도 임금 협상(지방 정부 노동자들처럼 임금 협상을 10년에 한번 대신에 5년에 한번 진행할 것을 요구했다)을 둘러싸고 5일간 파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런 사례는 제3세계 노동 계급이 활기차고 원기 왕성하다는 사실을 예증하기 위해서만 제시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인즉, 궁극적으로 제3세계 국가의 노동자들은 선진국 노동자들과 동일한 자본주의 체제 그리고 종종 동일한 회사들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공통의 사회적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는바, 이것은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는 세계 시장의 통합에 의해 더욱 명백해지고 있다. 더욱이 그들은 제국주의가 무의식중에 뿌려놓았으며, 때때로 무력을 이용하여 굳이 부유한 나라로 싼 노동을 수입한 사람들에게 언젠가는 역효과를 일으킬, 수백만 개인과 가족 연대로 연결되어 있다.

 

 

계급투쟁은 끝났는가?

 

물론 계급투쟁은 거대한 파업으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조업 정지의 형태나 노동자들에 대한 사소한 공격에 맞선 저항의 형태로 매일매일 계속된다. 게다가, 영국에서 파업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파업은 이목을 끄는 뉴스가 아니며 그것은 언론매체에 의해 보고조차 되지 않는 일이 허다하다. 보기를 들면, 작년 12월 노조 대표의 해고에 대해서 로디언 주(Lothian) 에든버러(Edinburgh)와 파이프(Fife) 분류 센터에서 2,500명의 우편 노동자가 참여한 성공적이고 비공식적인 파업에 대해서 들어본 사람이 있는가? 그러나 영국 전신전화회사 콜센터 노동자들의 파업 같은 것은 보도되었는바, 이것이 회사를 무척 당혹스럽게 만들었는데, 상황이 대중에게 알려졌을 때 대중은 조합의 요구안에 동의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콘엑스(Connex) 기관사들은 단 하루의 파업 행위 후에 경영진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양보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기관사들에 의한 초과 근무 금지 조치조차도 회사로 하여금 서비스의 절반을 중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은, 일손이 부족하며 그래서 안전하지 않을 정도로 한계 노동 시간까지 기관사들을 몰아붙였다는 사실을 숨길 방법이 없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오늘날의 타협적인 노조 지도부가 있다고 해도, 노동자들의 어떤 부분이 상황을 방어하고 약간의 진전을 이루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지난 몇 십 년 동안 선진국들에서 노동 계급의 권리가 일반적으로 약화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자들이 투쟁하기 꺼리거나 싸울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노동조합 지도부가 구성원의 가장 기본적인 물질적 이해관계조차도 방어하기 위하여 어떤 것도 조직화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실업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실패는 세력 균형을 노동자들에게 불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노동 계급이 이제 처리해야 할 상황이다.

오늘날 노동 계급은 에너지가 부족하지도 않고 호전성이 부족하지도 않다. 지금까지 투쟁해온 노동자들이 종종 그들의 조합 관리들에게 배반당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부족한 것은 행동이 무언가를 성취할 것이라는 확신이다. 재건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확신이다.

그러나 오늘날, 노동 계급은 정치적 전통이 부족하다. 물론, 대처와 블레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동 계급은 계급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동 계급이 상실한 습성은 정치 현장에서 자신의 계급 이해관계를 표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정치적 전통이다. 이 계급 이해관계는 노동당과 노동조합 운동의 좌파에 의해 제안된 협소한 분파적 전망이나 종종 민족주의적 전망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와는 반대로, 영국 노동 계급의 이해관계는 국제 노동 계급의 이해관계와 구별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노동 계급의 이해관계는 사회 전체의 이해관계와 구별할 수 없다. 그러한 전통 또한 재건되어야 한다.

 

 

사회에서 하나뿐인 혁명 세력

 

오늘날 꼭 필요한 것은 노동 계급이 상실한 기반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자신의 힘에 대한 확신을 다시 찾는 것뿐만이 아니다. 19세기에 노동 계급의 첫 번째 조직들의 발전을 주재한 정치사상(그리고 특히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가 정식화한 사회 변화의 필요성에 관한 사상)을 재발견하는 것도 필요하다.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중앙 계획 체제를 통해 합리적으로 조직된 경제라는 사상을 수행하는 것이, 통신수단도 거의 없고 운송 수단도 거의 없고 산업은 파괴된, 1917년 러시아의 후진성이라는 맥락에서 저항할 수 없는 임무였다. 그러나 보기를 들어, 매체에서 이야기하는 통신 혁명은 단지 투자자들을 위한 돈벌이 수단 말고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러시아 노동 계급에게 그 많은 노력과 희생을 수반하게 했던 것을 단추 하나를 눌러 즉시 수행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생산, 욕구, 자원에 관한 자료를 즉각적으로 수집하고, 관련된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들을 수 있고, 생산과 분배 절차에서 필요한 조절을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을 (그리고 세계적 규모에서 이 모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인간의 과학·기술 지식은 이제 지구 전체 인구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해결될 필요가 있는 여러 실천적 문제들이 이미 해결되었을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다. 유일한 장애물은 이 시대에 뒤떨어진 사회 조직이 잔존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노동 계급들 사이에 부족한 것은 이러한 실재에 대한 의식, 그리고 기존 사회 질서에 자신을 통합시키려고 하는 대신에 그 질서를 완전히 변화시킬 임무를 떠맡는 정당이다. 물론 노동 계급은 오늘날 혁명 세력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서, 노동 계급은 아주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결코 혁명적이지 않았다. 이는 노동 계급이 자본주의적 착취의 예봉을 견뎌내야 하고, 교육과 문화에서 대중 매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착취자들에 의해서 통제되는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압박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속박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노동 계급은 (한 세기에 몇 차례만 일어나는) 깊은 사회적 위기의 기간에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노동 계급은 영국과 전 세계적 규모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기초(, 노동 계급이 전혀 관계를 갖고 있지 못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전복하기 위하여 그런 사회적 위기라는 기회를 이용할 능력이 있는 유일한 세력이기 때문에 사회의 유일한 혁명 세력이다.

오늘날 어떤 정당도 그러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다. 영국이나 해외에서, 노동 계급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정당들은 자본가 계급의 이해관계의 충성스런 수탁자들로서 정부에 들어가는 것만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의 전망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자신의 정당이 있다면, 노동 계급은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장비를 갖추게 될 것이며, 그러면 어떠한 장애도 노동 계급을 방해할 만큼 크지 않을 것이다.

 

옮긴이: 김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