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폴란드 역사 개관_그단스크에 이르는 길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7월호

폴란드 역사 개관_그단스크에 이르는 길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5:08

그단스크에 이르는 길1

 

 

1. 동구의 자유화 운동과 스탈린주의

 

 

동구란 개념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쯤 미국과 소련 양대국의 세계분할, 특히 유럽을 동서의 양대 세력권으로 분할했던 이른바 얄타 체제의 소산이었다. 그것은 대전의 종결과 함께 막을 올린 동서대결(냉전)의 진전과 함께 미국 주도 하에 자본주의 체제로 재편성된 서부 유럽, 즉 서구에 대응하는 소련을 종주국으로 하는 사회주의 체제 속에 편입되어 있는 동부 유럽의 정치경제사회이데올로기의 동질성을 규정하는 개념으로 정착되었다.

냉전이 절정을 이룬 50년대에 접어들면서 동서 양진영은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와 바르샤바 조약기구(WTO)를 결성, 나토군과 바르샤바 조약군의 군사적 대결로 긴장을 고조시켜 갔지만 얄궂게도 얄타 체제는 차츰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미국은 트루먼 행정부에서 아이젠하워 행정부로 정권이 넘어가면서 트루먼 독트린의 대소봉쇄전략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덜레스 국무장관이 추진한 동구권 해방 전략으로 전환하여 대소 강경자세를 표명했다. 그러나 미국은 1956년의 헝가리 동란과 폴란드의 포즈난 항거 등, 동구권 국민들의 자유화 운동을 소련이 무력으로 진압할 때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다. 이것은 미국이 전면전을 감수하면서까지 동구의 자유화 운동을 지원할 수는 없다는 힘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얄타 협정에서 인정했던 소련의 동구권에 대한 지배권을 침해하지 않겠다는 묵시적인 의사 표명이기도 했다. 헝가리 사태를 계기로 얄타 체제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되었다.

그 뒤 미소 양국은 60년대의 베를린 사태, 쿠바 위기, 베트남 전쟁 등 첨예한 대결을 거듭하면서도 워싱턴과 모스크바 사이의 핫라인을 개설, 양국 정상회담 등 관계개선을 통한 긴장완화에 주력했으며, 70년대의 이른바 동서 데탕트를 통하여 얄타 체제를 세련화시켜 나갔다. 그리고 1975년 헬싱키 협정에서 전후 30년에 걸친 얄타 체제를 공식적으로 합법화했다.

그러나 얄타 체제가 확고부동하게 정착되고 동구 국가들이 바르샤바 조약기구 하에서 사회주의 체제를 이루고 있음에도 폴란드 사태에서 보듯이 동구권 내의 자유화 운동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가운데 중요한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1) 19533월 스탈린 사후에 체코에서 일어난 빌산 투쟁과 동독의 베를린 항쟁

2)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당 대회에서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이 가해진 뒤 일어난 폴란드의 포즈난 항거와 그에서 비롯된 ‘10월의 봄

3) 195610월 헝가리혁명

4) 1968년 체코의 프라하의 봄

5)19683월 폴란드 바르샤바의 학생 데모

6) 197012월 폴란드의 ‘12월 사건

7) 19766월 폴란드의 ‘6월 사건

8) 1979년 폴란드 노동자 파업




이런 사건들은 동구권 내부에 산적해 있는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보기를 들어 1953년의 베를린 항쟁은 동독 전역으로 확대되어 동독 정부는 시방사태를 선포했고 소련군이 출동해서야 겨우 진압될 정도로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1956년 폴란드의 포즈난 항거 때에는 공산당 본부가 불에 타기도 했다. 1968년 체코의 프라하의 봄때에는 공산당 내부에서 개혁을 주도하는 등 일련의 자유화 운동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근원적인 것임을 뚜렷이 드러내주었다.

이렇게 동구권 내부의 모순을 불러일으키고 심화시킨 요인은 어디에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소련의 스탈린주의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동구의 사회주의화 과정이 동구 자체의 내면적필연적 요청에 따른 주체적(밑으로부터) 운동의 결과라기보다는 얄타협정을 근거로 동구를 점령했던 소련, 특히 붉은 군대와 소비에트 관료들이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전개과정을 밟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구의 사회주의화 과정은 동구의 역사적사회적 특수성을 감안하여 탄력성 있게 대처하지 못하고 소비에트 식을 직수입하는 경직성을 띠게 되었다. 소련식 정치경제체제, 이데올로기 등 소련식 사회주의 교의가 신성불가침의 성전으로 되었고, 소련식 사회주의 교의의 골격을 이루고 있던 스탈린주의가 강압적으로 도입되었던 것이다. 중앙집권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사회주의화 과정이 전개되어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보다는 소수 정예의 공산당이 주도하는 개혁이 급격히 추진되었다. 권력과 민중의 간격이 넓어지는 가운데 물리적인 강제력과 비밀경찰이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다. 사회주의화 과정의 출발점에서부터 모순이 배태되어 있었던 것이다. 동구의 자유화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련의 스탈린주의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레닌 사후, 소련의 지도층은 트로츠키 일파의 영구혁명론과 스탈린 일파의 일국사회주의론으로 나뉘어 심각한 이념투쟁을 벌였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은 서구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하여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혁명을 유럽으로 수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는 생산력이 기존의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모순될 정도의 일정수준으로 발전되어야만 사회주의 혁명이 등장한다는 맑시즘의 기본 원리에 일치되는 주장으로 그때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의 보편적 사고방식이었다.

그러나 1919~1923년에 이르는 혼란기에 독일 등의 선진공업국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자본주의 열강의 반소 포위망 속에 갇힌 소련 공산당은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이런 위기 속에서 192412월 스탈린은 10월 혁명과 러시아 공산주의자의 전술을 발표했다. 이른바 일국사회주의론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는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국내면과 국제면으로 분리하여, 먼저 소련 국내에서 국가권력에 의한 급속하고 대규모적인 공업화와 농업의 집단화로 소련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소련은 자본주의 열강의 반소 포위망과 반소 침략 위협에 처하고 있기 때문에 선진공업국에서 혁명의 성공이 소련의 사회주의를 안전하게 보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국내의 사회주의가 완결되기 전에는 국외의 혁명운동에 깊숙이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명확히 했다.

레닌 사후,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의 도움을 받아 트로츠키를 물리치고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부하린과 결탁하여 일국사회주의론을 추진시켰다. 공업화 정책, 농민에 대한 양보 정책, 당내투쟁과 소수파의 권리를 무시하는 당 규율의 강화, 당 기구의 강화에 의한 일당독재화, 중국의 제1차 국공합작 등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1927년에는 트로츠키가 추방당했고, 1929년에는 급격한 공업화와 농업부문의 집단화를 내세우면서 농민에 대한 양보를 주장한 부하린이 축출되었다. 이와 같은 당내 권력 투쟁에서 10월혁명 당시의 지도부는 전부 축출되어 스탈린의 독재적 지위는 더욱 강화되었고 코민테른도 그의 손아귀에 장악되었다.

1934년 당정치국원이었던 키로프의 암살 사건을 계기로 1938년까지 대숙청이 일어나 많은 당원과 비당원이 체포, 투옥, 고문, 유형, 사형 등의 조치로 탄압받았으며 스탈린 1인 체제가 완성되었다. 심한 도그마에 빠진 그는 소련이 사회주의 개혁으로 착취 계급이 소멸되고 인간의 해방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소비에트 정부는 전인민국가를 대표하기 때문에 정부에 반대하는 자는 자본주의의 스파이, 적의 무리, 인민의 적이라고 규정했다. 나아가 그는 국가권력을 자기 자신의 1인 속에 의인화하여 자신을 반대하는 자도 인민의 적으로 규정했는데 최대의 정적이었던 트로츠키는 외국의 스파이로 취급되었다. 그 뒤 밑으로부터 비판과 이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가 압살되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일당독재로, 일당독재는 당 중앙의 독재로, 당 중앙의 독재는 스탈린 1인 독재로 변질되었다. 1인 독재의 정점에 서서 그는 죽을 때까지 오류 없는 위대한 지도자로 신격화되었던 것이다. 개인숭배가 극에 달하는 한편 그의 이론은 교조적 성전으로 됐으며 모든 과학적 인식이 그의 도그마에 종속되었다. 사회를 구체적총제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기계적독단적 원칙으로 파악한 그는 실천에 있어서 물질적인 재화의 생산 활동만을 중시하는 실천의 비속화라는 오류에 빠졌다. 이 때문에 그는 경제 제일주의’ ‘생산력 지상주의를 제1의 원칙으로 내걸고 이를 추진하려고 당 기구와 관료조직을 확대하는 관료주의에 빠져 버렸다.

스탈린 사후, 권력을 잡은 흐루시초프는 1956년 제20차 소련공산당 대회에서 잘 알려진 스탈린 비판을 했다.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보다는 당 기구와 관료조직에 의존하여 당이 민중으로부터 유리되는 한편 극심한 관료주의에 빠졌다. 둘째, 개인숭배를 조장하여 당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소련의 법을 침해했다. 셋째, 비밀경찰제도를 이용한 지나친 숙청으로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처형되었고 공포정치가 실시되었다. 넷째,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대국주의적 태도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을 소련의 민족이기주의에 종속시켰다. 다섯째, 과학적 인식을 스탈린 자신의 도그마에 종속시켜 사회과학과 예술의 분야에서 비창조성과 비생산성을 불러왔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문제는 단순히 스탈린 개인의 과오를 지적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스탈린 치하에서 당의 관료화, 계층화 정책에 따라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었던 비민주성과 관료성이 이미 권력의 소수에로 집중과 관료주의로 제도화되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동구의 사회주의화 과정이 동국의 국가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붉은 군대의 점령 하에 스탈린식의 도그마와 방대한 소련의 관료조직의 주도 하에 실시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많은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었다. 독자적으로 나치 독일과 싸웠던 유고가 소련에 반발하여 독자적인 비동맹의 길로 나선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뒤 동구의 자유화 운동은 예외 없이 소련의 맹렬한 비난과 탄압을 받았다. 비록 스탈린은 죽고 비판받았지만, 스탈린 치하에 구축되었던 방대한 관료체제는 그대로 온존되어 스탈린주의의 편협한 소련중심주의와 동구권에 대한 소련의 대국주의 지배력을 계속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주의의 소련이 동구에서 처음으로 민중의 저항을 받은 것이 19536월의 베를린 항거였다. 동독의 지식인들은 경제의 중앙집권적 관리 계획을 개선하여 자치적 관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소련은 동독 정부로 하여금 계엄을 선포하게 한 뒤에 소련군을 대량으로 투입하여 무력으로 진압해 버렸다.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흐루시초프에 의한 스탈린 비판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동구에 대한 소련의 지배력은 여전했고 관료지배체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으며 개혁의 움직임도 없었다. 이에 맞서 또 다른 민중의 움직임이 폴란드에서 일어난 포즈난 항거였다. 처음에는 노동자의 임금인상 요구에서 출발한 이 운동은 경찰, 군대와 충돌하여 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되어 마침내는 새로운 노동자의 권력기관으로 노동자 평의회를 결성, 이른바 ‘10월의 봄을 불러 일으켰다. 소련의 군사개입의 위험성이 고조되었지만 민족주의적인 고물카의 복귀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2년 뒤 민중에 등을 돌리고 친소강경론자로 전향한 고물카 체제에 의하여 개혁파들은 추방되고 개혁조치들은 무산되어 버렸다.

폴란드의 ‘10월의 봄사태에 고무되어 19561023일 부다페스트 시의 학생 데모를 시발점으로 하여 헝가리 전역으로 확대되었던 자유화 운동은 소련군이 개입하여 무참하게 유린당하고 말았다.

1968년 체코의 이른바 프라하의 봄도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명분으로 개입한 소련군에 의하여 진압당했다.

소련은 동구권 내부의 기본적 모순과 동구 민중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인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여 합리적이면서도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군과 경찰을 동원하여 물리적으로 진압하는 구태의연한 관료주의적, 대국주의적 타성에 젖은 경직성만을 드러냈을 뿐이었다.

동구권 내의 자유화 운동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가운데 가장 치열하고 지속적이었던 나라는 폴란드였다. 그것은 폴란드 역사의 특수성(폴란드는 서구 열강의 많은 침략을 받았다.)과 폴란드 국민들의 뿌리 깊은 반소감정(소련은 제정 러시아 시대에 폴란드를 세 번이나 침략 점령했다.), 전통적으로 강한 종교적 전통(폴란드는 동구권 내의 가톨릭 국가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1956년 포즈난 항거, 197012월사건, 19766월사건, 그리고 1980년 그단스크 정치파업에 이르기까지 폴란드 국민의 개혁의지는 폴란드 사회체제와 소련의 동구권 지배체제의 모순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면서, 극심한 탄압과 희생을 무릅쓰고 지속되어 왔던 것이다.

폴란드 위기는 그저 폴란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동구권 전체의 문제이며, 소련식 사회주의 교의와 헬싱키 협정으로 합법화된 얄타체제에 대한 중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그 구조적 틀을 탈피하려는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 운동의 양상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2. 폴란드의 사회주의화

 

일반적으로 동구의 사회주의화 과정의 중요한 계기를 이루는 사회주의 정권의 수립은 4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 공산당이 지도하는 인민해방전선이 대독항전의 주도권을 잡고 세력을 키워 패배한 독일군이 물러나고 난 뒤 곧바로 사회주의 건설에 들어선 유형이다(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둘째, 독일군이 물러나고 난 뒤 소련군의 진주에 호응하여 이른바 해방지구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나중에 망명정부와 합류하여 정권을 잡거나(폴란드), 또는 해방지구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점진적으로 중앙정부로 발전한 사례다(헝가리).

셋째, 소련군의 진주를 기회로 삼아 쿠데타로 정권을 잡거나(불가리아), 또는 중간적인 정부를 조직하고 나서 몇 번에 걸친 개각을 거쳐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유형이다(루마니아).

넷째, 망명정권이 조국해방과 함께 귀국한 사례(체코슬로바키아) 등이다. 

 

이렇게 동유럽 국가에서는 공산당이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소련과는 달리 의회 제도를 도입하고 국민전선또는 인민민주주의전선이라는 각 정당의 연합 및 복수정당제도를 받아들이는 조치를 취했다. 이것이 동구의 특징이었다. 이른바 인민민주주의의 특수성인 것이다. 어쨌든 처음에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소련군의 점령과 소비에트 관료기구의 역할이 컸던 것만은 틀림없다.

 

폴란드에서도 폴란드 공산당의 주체적 역량보다는 소련군의 진주와 배후지원의 역할이 컸다.

19457월에 폴란드 공산당이 이끄는 임시정부와 런던으로 망명하고 있었던 망명정부가 연합하여 민족통일임시정부를 세웠을 때, 이미 공산당은 소련의 지원 하에 토지개혁 등의 개혁 조치를 실시하고 있었고 경찰, , 행정조직도 장악하고 있었다.

각 정당들도 반동적 정당과 진보적 정당으로 나뉘어 세력 사이의 연합을 추진했다. 1947년 선거에서는 반동파가 국가기관에 1938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해산되었던 폴란드 공산당의 명예회복 조치를, 스탈린 추종자인 비에르트 당 제1서기가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는 내용을 알렸다.

이를 계기로 지금까지 억눌렸던 자유에 대한 열망이 터져 나왔다. 통일노동자당 기관지 ?트리브나 루두? 지는 327일 편집장 서명으로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의 교훈이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논문의 주요 내용은 1949년의 숙청과 당정부의 독재적 경향을 비판한 것이었다. 그 뒤에도 이 신문은 계속 당과 정부를 비판했다. 그 때문에 반당적이라는 비난과 함께 편집장이 파면되었다. 그러나 폴란드 국민들의 민주화 의지는 더욱 거세졌고 표면화되었다.

비에르트 당 제1서기가 죽고 난 뒤, 관료층과 당 간부층 안에서도 친소 스탈린주의 세력과 자유주의 세력 사이의 파벌이 형성되어 두 세력 사이의 권력쟁탈전이 시작되고 있을 때 포즈난 사건이 터졌다.

 

 

3. 포즈난 항거와 고물카 정권

 

1956628, 국제 견본시장이 폴란드의 포즈난 시에서 열리고 있었다. 이 때 그 시의 지스보 공장 노동자가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정부와 교섭을 위하여 대표를 바르샤바에 파견했다. 그 교섭은 거부되었으며 대표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16천 여 명의 노동자가 시 중심부를 향하여 데모를 시작했다. 그 가운데는 통일노동자당의 당원도 합류하고 있었다. 데모대가 시위를 하는 동안 공장, 사무실로부터 노동자, 시민들이 계속 합류하여 시내 중심가에 도착할 무렵에는 수많은 군중의 물결이 되었다. 이때 바르샤바로 갔던 대표단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노한 군중은 형무소, 비밀경찰서 등을 습격했고 경찰과 군대와 충돌하여 많은 희생자를 냈다.

폴란드 정부는 이 사건을 국제 견본시 개최를 틈탄 외국 제국주의 분자들의 도발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러나 누적되었던 폴란드 국민들의 불만과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했다는 사실을 폴란드 당국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6720일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오하브 제1서기는 정부당국의 정책의 오류와 노동자의 요구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지스보 공장에서는 1953년의 노르마의 변경, 1954년의 노르마 개정, 1955년의 노동조직의 개정으로 노동생산성이 약 24.6% 향상되었다. 그러나 생산성 향상이 임금 상승에 정확히 반영되지 않았다. 1955년 후반에는 작업성과제도인 임금누진제를 철폐했기 때문에 소득이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노동자는 약 75%의 손실을 입었다. …… 이와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처하는 정부 각 부처의 관료주의적 태도 때문에 해결이 지연되었던 것이다.” 

 

개혁의 물결은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내부에도 거세게 밀려 들어왔다. 1954년에 감옥에서 풀려난 고물카가 민중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폴란드 국민은 고물카를 스탈린주의와 관료주의와 투쟁하다가 고난을 받은 투사로 생각했다. 당내에서도 고물카를 당 제1서기로 복귀시키려는 자유파와 이에 맞서는 보수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폴란드 국민의 개혁의지는 더욱 열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폴란드에는 위기감이 감돌았다.

이때 흐루시초프가 미코얀, 몰로토프 등 고위간부를 대동하고 갑자기 바르샤바를 방문했다. 아울러 폴란드 주둔 소련군과 폴란드 군은 군사연습이라는 명목으로 바르샤바로 이동했다. 그러나 폴란드 전역에 걸친 학생노동자의 집회와 데모를 지지 기반으로 삼아 고물카는 제1서기로 뽑혔다. 소련 수뇌와 고물카가 타협을 보고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고물카가 당 제1서기로 복귀한 뒤 폴란드 사태는 어떻게 진전되었는가. 야제크 쿠론은 이른바 ‘10월의 봄의 전개과정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노동자, 학생, 청년, 지식인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10월 좌파가 관료층의 자유주의파와 차이를 드러내지 못했다. 그들은 포즈난 항거로 말미암아 구성된 노동자 평의회를 중심으로 생산관계와 정치체제를 수립할 기초를 만들어야 했는데도 자유주의파 관료들의 부분적 개혁에 동참하여 보조역할을 담당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독자적인 정치 강령과 이에 대한 대중적 선전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유주의파 관료들은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관료제도의 내부 개혁과 국민에 대한 경제적 양보를 함으로써, 국민들의 개혁의지를 체제내로 수렴하는 동시에, 대중운동의 지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들을 체제 안으로 끌어들여 사회적 위기를 완화하고 체제를 안정시킬 것을 제안하고 실천에 옮겼다. 결국 ‘10월 좌파는 명확한 정치 강령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관료들에 의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해체당한 끝에 혁명의 패배를 가져왔던 것이다.” 

 

폴란드 국민의 열망에 힘입어 권력을 잡은 고물카 체제는 처음에는 꽤 자유주의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사상문학의 자유가 허용되었고 가톨릭 성직자들과 화해했다. 그와 함께 아주 제한되긴 했지만 폴란드 국민의 민족감정을 만족시키는 대소불균등이 시정되었다. 보기를 들면 석탄은 지금까지 값싸게 수출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제값을 받고 수출했다.

경제정책도 크게 바꾸었다. 농업의 강제적인 집단화 정책을 포기하고 농민을 위한 농업정책이 실시되었다. 생활수준의 향상, 농업부문에 대한 개혁, 주택건성의 중시 등을 주안점으로 방향 전환을 하여 5개년 경제계획(1956~1960)의 원안을 수정했으며, 195612월에는 잘 알려진 경제학자인 오스카 랑게(Oscar Lange)를 의장으로 하는 경제회의를 각료회의의 자문기관으로 발족했다. 1957년에는 경제모델 변경의 방향에 관한 경제회의의 테제가 발표되어 계획의 명령적 지시에 대신하여 경제적 자극에 의한 생산성의 향상, 기업의 자주성 증대와 가격의 탄력화, 노동자 평의회 조직과 그의 경영참가 등이 제안되었다.

그러나 개혁의 물결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일단 위기를 수습하고 권력을 장악한 관료들은 1957년 봄의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제9차 대회에서 당의 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노동자에 대한 탄압을 개시하는 양면전을 폈다. 이들은 노동자 평의회를 확대하는 조치에 반대하면서 노동자 평의회 전국대회무정부주의적 공상이라고 몰아붙였다.

1957년 가을에는 급진주의 학생신문 ?포 프로스투? 지를 비관주의에 젖어 있고 정부의 업적을 게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발행 금지시켰다. 5774일부터 10일까지 바르샤바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시민데모는 경찰이 잔혹하게 탄압했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통제되었고 당내의 개혁파가 추방되었다. 마침내 58년 봄이 되자 관료들은 노동자 평의회를 직접적으로는 공장위원회, 간접적으로는 노동조합기관을 통하여 당의 통제 아래 놓음으로써 폴란드 10월의 봄은 완전히 끝나고 말았다.

경제회의도 59년이 되자 사실상 기능이 정지되었고 경제도 정체상태에 빠져 들었다. 1950년대의 GNP 성장률이 연평균 8%인데 비하여 1962년의 성장률은 2%에 머물렀다.

마침내 경제개혁문제를 둘러싸고 브루스 등의 경제학자, 아담 샤프 등의 철학자를 포함한 개혁파와 당 관료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주로 중앙집권적인 계획과 분권제적인 자치운영의 문제, 통제된 시장 메커니즘의 활용 문제, 수요공급 관계와 결합된 가격체제의 도입문제 등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경제개혁논쟁이 가열됨에 따라 고물카 제1 서기까지 개입했으며 결국 보수적 당 관료파는 개혁파를 밀어냈다.

그러나 관료독점에 의한 경제계획제도는 지속적인 경기침체를 낳아 이미 심각한 모순점을 노출시켰기 때문에 관료들도 사태 해결을 위한 개선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657,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는 관리제도의 개선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기본방침을 채택했다. 

 

1) 중앙계획에 과학적 기반을 확립한다.

2) 계획을 실행하는 데서 기업연합의 역할을 늘린다.

3) 중앙에서부터 원료기술의 공급제도를 개선하여 거래기업간의 자유로운 상업관계로 이행한다.

4) 성적 지표의 시스템을 개선한다.

5) 투자에 대한 기업의 참여를 증대시키는 동시에 투자지출에 대한 은행의 통제를 강화한다.

6) 계획작성방법의 개선, 전체적인 계획의 지속성과 탄력성을 강화한다. 

 

이와 같은 조치에 따라 기업연합은 자체자금으로 운영하게 되었고, 물적 장려제도에도 수정을 가하여 종래 생산의 수량 증가를 대상으로 하던 것을 고쳐서 생산비 총액에 대한 이윤 총액의 비율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또 은행의 융자에도 이자가 붙게 되었다. 가격 제도도 바뀌었는데 특히 소매가격에 탄력성을 주기 위하여 복수가격제도가 도입되었다.

경제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관료들은 분권화, 시장 메커니즘의 도입 등, 테크노크라트적인 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중앙은 계획을 세우고 가격을 결정하는 데 여전히 절대적 권한을 지녔고 노동자는 거의 발언권을 갖지 못했다.

한편 사상통제와 언론탄압이 심해졌다. 19644월 저명한 지식인 32명이 언론탄압과 사상통제에 항의하는 편지를 정부에 제출했다. 그 때문에 주요 서명자들은 집필을 금지 당했다. 이에 격분한 바르샤바 대학생들이 항의집회를 열자 폴란드 당국은 대학생의 배후 조정자란 혐의를 씌워 카롤 모제레프스키와 야제크 쿠론 등의 집을 수색했다. 이 가택수상에서 폴란드 체제를 비판한 문서가 발견되었다. 그 내용은 폴란드를 관료집단이 생산수단의 소유권까지 독점한 관료국가라고 통렬히 비판한 것이었다. 모제레프스키와 쿠론은 당과 사회주의청년동맹에서 제명되었고, 뒤이어 구속되어 각각 3년 반,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아 투옥되었다.

다음 해인 19651월에는 바르샤바 대학의 원로교수였던 루드빅 허스, 로마르트 슈메프, 카지메슈 파도프스키가 체포되어 각각 3년형을 선고받아 투옥되었다.

19661022일에는 국제적 명성을 지니고 있던 철학교수 콜라코프스키가 당에서 제명되었다. 그는 폴란드 10당시 지식인의 중심적인 지도자로 활약했고 ?포 프로스투? 지의 편집인이기도 했다. 그는 19661021일 사회주의 청년동맹이 바르샤바 대학에서 개최한 폴란드의 ‘10월의 봄10주년 기념집회에 참석하여 반체제적인 강연을 했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폴란드 정세를 요약 분석한 뒤에 고물카 체제의 검열 정책과 국민의 민주적 권리들을 제한하는 조치들에 대하여 맹렬한 비판을 가했던 것이다. 청중들의 열광적인 박수와 환호성을 받은 그는 집회가 끝날 무렵 쿠론과 모제레프스키의 석방을 요구하는 결의를 할 것을 제안했다. 당은 다음날 전격적으로 그를 제명하는 보복조치를 취했다.

6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국민들에 대한 탄압이 차츰 가중되는 것과 더불어 폴란드의 경제사정은 더욱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공업부문의 생산성 증가는 계획 목표에 미치지 못했고, 무역부문에서도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수출이 목표량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농업과 경공업 부문의 생산부진이 현저해짐에 따라 국민의 구매력 증가에 비하여 상품의 공급은 크게 모자랐다. 이와 함께 정부와 가톨릭교회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196712월 비신스킨 추기경은 이데올로기의 통제를 비난했다.

1968130일 폴란드 정부는 폴란드 고전극 자아디의 공연을 금지시켰다. 이 연극은 19세기의 낭만파 시인이며 민족혁명가였던 아담 미키에비치의 창작극으로 폴란드의 독립을 염원하는 반 러시아적인 내용의 작품이었다. ‘자아디란 폴란드어로 조상의 제사라는 뜻을 나타내는데 폴란드에서는 제삿날에 영매를 통해 조상의 혼이 나타난다는 전설이 전해온다고 한다. 이 연극은 폴란드의 독립을 위하여 차르 암살계획을 가슴에 품고 있는 주인공이 조상들의 제사를 지내자 조상 대신에 1831년의 반러시아 민중봉기의 지도자가 나타나서 당시의 정치정세를 토론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연극의 내용 중에는 오늘날에도 정치적 의미를 깨닫게 하는 구절들이 많이 있어서 폴란드 국민들의 반소감정을 되살리게 하는 폴란드 국민들로서는 감동깊은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공연금지가 도화선이 되어 학생들의 데모와 농성이 전국 각지로 번졌다.

처음에는 바르샤바 대학에서 평화적으로 데모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비밀경찰장관이었던 모차르가 대학 구내에 경찰의 특수부대를 파견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하자, 이에 자극을 받아 데모는 바르샤바 전역으로 확대되어 수만 명의 학생들이 바르샤바 시내를 휩쓰는 사태로 발전했다. 그 뒤 바르샤바의 학생데모를 지지하는 다른 지역 학생들의 연대데모가 폴란드 전역으로 퍼졌다. 폴란드 학생들의 데모는 국제적 반응을 불러 일으켜 서베를린 학생들이 폴란드 영사관까지 지지 행진을 벌였으며 체코의 프라하에서도 청년 그룹이 바르샤바 학생운동에 대한 연대를 밝혔다.

폴란드 정부는 관료지배 하에 놓여 있는 노조와 노동자의 수동적인 자세를 이용해 학생운동을 규탄하는 반학생데모를 벌이도록 했다. 특히 기에레크의 지휘 하에 있던 실레지아 지방에서는 10만 명의 노동자가 동원되었으며, 바르샤바 작가동맹의 긴급회의에 대하여 노동자는 당의 노선을 따르도록 종용하고 나서는 형편이었다.

폴란드 정부는 노동자의 반학생데모를 격화시켜 학생들의 전의를 상실시켜 가도록 획책하는 동시에 반유태주의 선전을 벌였다. 반유태주의 선전은 1967년의 중동전쟁을 계기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사상통제를 위한 비장의 무기로 68년의 학생데모 이후는 더욱 심해졌다. 연일 당 기관지에는 유대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논설이 게재되었고 사회의 각 부문에서 개혁파들의 추방이 실시되었다. 처음에는 유태인과 데모 참가자와 데모 관계자에 집중되었던 추방이 반항적인 지식인뿐만 아니라 차츰 정부 내 상층부의 온건파와 각 기관의 개혁파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확대되었다.

콜라코프스키를 비롯한 6명의 교수가 바르샤바 대학에서 쫓겨났으며 폴란드 백과사전 편집부, 웃지 영화연극 아카데미의 책임자들이 추방되었고, 심지어는 스포츠 단체의 지도자들마저도 이데올로기적 범죄자로 규탄 받았다. 국가계획위원회의 의장도 규탄의 대상이 되었고 대통령도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고 말았다. 추방의 바람이 폴란드 전역을 휩쓸었다.

그때 런던에서 나온 ?이코노미스트? 지는 반유태주의 선전이 노리는 바를 이렇게 분석했다. 폴란드 정부의 유태인 추방의 진정한 목적은 보수 강경파(친소파)들이 당과 국가기관의 권력기구를 장악하고 반시오니즘을 이용하여 당과 국가기관의 반대파를 추방시키고 노쇠한 고물카의 퇴진 뒤에 권력을 모차르가 장악할 수 있도록 기반을 조성하는 데 있었다. 모차르는 빨치산 그룹의 일종인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사동맹을 배후세력으로 가진 강경 스탈린주의자로 친소강경파의 기수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들 친소 강경파는 모차르가 정권을 잡을 수 있도록 반대파를 철저히 추방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민족주의를 대내적으로는 정치경제 면에 대한 중앙집권제의 강화와 치안확립을 강조하는 정책 방향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모차르를 중심으로 한 친소 강격 보수파에 맞서 고물카 퇴진 뒤에 권력투쟁에 나선 것은 당내 개혁파를 대변한 당시 실레지아 지구당 제1서기였던 기에레크였다. 폴란드 국민들의 불만이 크게 쌓이고 통일노동자당 안에서도 친소 강경파와 온건 개혁파의 권력투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197012월의 노동자 봉기가 터져 나왔다.

 

 

4. 197012월 봉기

 

19701212일 폴란드 정부는 소비재에 대한 가격인상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둔 폴란드 국민들은 기습적인 가격인상 조치에 격분했다. 60년대 동안 폴란드 경제는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 생활도 궁핍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일방적인 가격인상 발표는 대다수 국민의 누적된 불만이라는 화약더미에 불을 붙인 격이었다.

25개년 경제계획(1966~1970)은 커다란 결함을 드러냈다. 특히 농업문제는 사회주의의 아킬레스건이었다. 폴란드의 농업 생산성은 눈에 띄게 떨어졌다. 1968년까지 농업부문의 연평균 성장률은 약 1.8%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 뒤 2년 동안 이어진 겨울의 기상이변은 특히 사료작물과 곡물생산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이에 따라 70년대에는 가축의 대폭적인 감소(돼지 100만 마리, 25만 마리 감소)를 초래했고 곡물생산도 예상목표에 400만 톤이나 미달되는 감소현상을 초래했다. 식육가공품은 폴란드 수출상품의 대종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무역부문의 타격은 심각했고 감소된 400만 톤의 곡물수입(26천만 달러)도 폴란드의 외화수지를 볼 때 불가능에 가까웠다. 식료품의 공급부족이 심각한 국면에 이르자 주부들은 날마다 식료품 상점 앞에 줄을 서야만 하는 진풍경을 보이게 되었다.

폴란드 정부의 관료층은 식료품을 비롯한 생활필수품의 가격을 인상하여 농민과 생산자들의 생산의욕을 증대시키는 한편, 재고가 쌓여 있던 내구소비재(품질과 가격이 열악한)의 가격인하를 병행시켜 내구소비재의 판로개척과 인플레이션 방지를 기대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 구체적인 내역을 보면 식육과 식료품은 11~33%, 구두융단의류가정용품은 10~22% 가량, 석탄은 10~20% 가량 올랐다. 내구소비재 품목 가운데 테이프 레코드는 21% 인하되었고, 세탁기 17%, 냉장고 15%, TV 13%, 그리고 재봉틀은 10% 인하되었다. 이와 같은 정책은 비용과 수용공급 관계에 합치되도록 가격체제의 합리화, 제조공업제품의 시장확대와 국제경쟁력의 강화, 농업부문의 생산가격 상승과 보조금 증액에 의한 소농생산의 확대 등을 노리고 있는 관료층의 이른바 경제적 합리주의를 기반으로 한 테크노크라트적인 개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고정수입의 52%를 식비로 지출하는 폴란드 국민의 입장에서는 내구소비재의 가격인하에서 오는 이득보다는 식료품과 생활필수품의 인상에서 오는 생활의 궁핍화가 문제로 대두되었다. 국민들의 생활에 심각한 피해를 가져오는 경제정책이 소수 관료들의 수중에서 임으로 결정되고 일방적으로 강요될 때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정부투쟁은 북부 발트해 연안지역의 그단스크, 그디니아 등지의 조선노동자로부터 시작되었다.

1214일 월요일 아침,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의 노동자는 집회를 열고 요구사항을 결정하여 대표 한사람을 통일노동자당 그단스크 지부로 파견했다. 파견된 대표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자 오전 11시경 몇 천 명의 노동자가 당 지방위원회 앞으로 행진했다. 노동자가 인터내셔널 가와 레지스탕스의 노래를 부르며 당 지방위원회 사무실 앞에 이르렀을 때 이미 노동자 대표는 사무실에 감금되어 있었다. 통일노동자당 그단스크 지구당 제1서기는 노동자를 무뢰한으로 몰아붙이면서 대화를 거부했다. 갑자기 평화 시위를 하고 있는 노동자에게 경찰이 습격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싸움은 차츰 격화되어 오후 3시경에는 경찰 기동대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은 노동자들이 화염병을 만들어 역공세를 취했다. 노동자는 무기와 차량을 탈취했다. 오후 6시경에는 당 지방위원회 사무실이 불타기 시작했고 밤이 되자 도시 게릴라전의 양상을 드러냈다.

1215일에는 새벽부터 그단스크 전 시내에 총파업(제네스트)이 선언되었고 탱크를 앞세우고 군대가 출동하여 노동자와 유혈투쟁이 벌어졌다. 오후에는 긴급사태가 선언되었고 저녁 6시 이후에는 등화관제가 실시되었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고 3천 여 명이 군과 경찰에 체포되었다.

한편 그디니아의 파리코뮌 조선소의 노동자들도 15일부터 파업에 돌입하고 즉각 파업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정부 당국의 그단스크에 대한 유혈탄압에 엄중 항의하고 유혈탄압이 계속될 경우에는 공장을 불태워 버리겠다고 경고했다.

16일 그단스크의 레닌 조선소에는 파업위원회가 결성되어 임금인상, 물가인상철회, 세금인하, 투옥된 동지들의 석방, 군대가 조선소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조건으로 내걸었다. 만일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에는 몇 군데의 작업장을 파괴하겠다고 경고했다. 정부는 노동자의 요구를 묵살했다. 레닌 조선소 정문 앞에서 노동자 자위단과 경찰이 정면충돌하여 몇 명의 노동자가 살해되었다.

그디니아에도 군대가 들어왔다가 노동자의 저항을 받고 퇴각했다. 부수상이 라디오 방송으로 파업 노동자를 무뢰한과 소요의 선동자라고 비난하는 한편 일반 노동자는 직장으로 복귀하라고 협박했다.

1217일 그디니아 지역 주둔군에게 진격명령이 내려졌다. 군인들은 장갑차와 중포로 무장하고 경찰과 함께 조선소를 포위했다. 당국은 군인들에게 제국주의자들이 연안에 상륙했는데 적들은 조선소 노동자로 위장하고 있다.”고 상황설명을 하고 출동시켰던 것이다.

조선노동자가 정문 앞에 모여 있다가 직장으로 들어가려고 바리게이트를 치우는 순간에 학살이 시작되었다. 군인과 경찰이 기관총과 자동소총을 난사하자 노동자는 거꾸로 피신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물건이나 무기로 집어 들고 필사적인 저항을 했다. 역 건물은 화염에 휩싸였고 무력충돌은 전 시내로 퍼져 저녁때까지 계속되었다.

시체친에서도 1217일 조선소 노동자가 집회를 개최하고 그단스크그디니아 노동자들과 연대를 표명하는 한편, 지역 파업위원회를 결성하고 요구사항을 결정하여 대표를 당 지방위원회에 파견했다. 이곳에서도 노동자 대표는 경찰에게 폭행을 당하고 쫓겨 왔다. 분노한 노동자는 시위하기 시작했다. 시위행진이 시내로 들어오는 도중에 많은 학생, 노동자, 시민들이 가세하여 당 지방위원회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는 거대한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경찰을 내쫓고 사무실이 있는 건물 내부의 집기를 소개한 후 불을 질렀다. 이때 경찰을 대동한 군대가 탱크를 앞세우고 도착하여 싸움이 시작되었다. 노동자는 화염병과 체인으로 무장하고 싸웠다. 이곳에서도 아돌프 바르츠키 조선소에 중앙파업위원회를 결성하고 다른 직장의 파업위원회들을 통합하여 시체친 지역의 지도기관이 되었다. 중앙파업위원회는 시체친 전 시가를 일종의 노동자 관리하에 두고 전기가스통신시설을 관리했다.

군경과 노동자의 유혈충돌은 코차린, 스루브스크, 크라코프 지역에서도 일어났다. 에르브라크, 바르샤바 지역에서도 파업이 일어났으며, 심지어는 기에레크의 지휘하에 급성장했다고 당 기관지에 실리기도 했던 실레지아 지방까지 파업이 퍼졌다. 폴란드 전역이 내란의 위기에 빠져 있었다.

노동자의 파업은 조직적 운동은 아니었지만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국가권력과 무력충돌도 서슴치 않는 양상을 보여 주었다. 그들의 요구사항 가운데는 근본적 모순에 이의를 제기하는 내용도 있었다. 그것은 일련의 파업이 단순한 경제정책의 시정요구나 관료들에 대한 저항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시체친의 보르모 자동자공장의 노동자는 21개 항목의 요구조건을 제시했는데, 첫 번째 항목이 우리들은 노동자 대중을 방위하자 못하는 노조간부의 퇴진을 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19항목은 경제와 정치정세에 관한 규칙적이고 정확한 정보를 매스 미디어의 전국적 조직을 통하여 보도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또한 아돌프 바르츠키 조선소 노동자가 농성파업 중에 내건 요구 사항 중 중요한 항목들은 다음과 같았다. 

 

1) 노동조합을 당기구로부터 독립시킬 것, 당과 국가행정기구의 분리, 정부의 고급관료의 봉급과 노동자의 봉급을 동일하게 할 것.

2) 노동조합평의회 의장이 공장을 찾아 와서 조합의 무기력, 특히 가격인상에 즈음하여 무능력하게 아무 활동도 하지 못한 이유를 노동자에게 설명할 것, 동시에 시체친 지방의원도 노동자 집회에 참석하고 토의할 것.

3) 고물카는 사임할 것, 또 노동자를 폭도로 취급하여 대화를 거부한 당 지방위원회 제1서기를 해임할 것.

4) 임금을 인상할 것.

5) 5일제 근무를 실시하고 식료품 가격인상을 철회할 것.

6) 공장을 포위하고 있는 군대와 경찰을 즉시 철수하고, 체포자들을 석방할 것, 이상의 선언을 라디오TV신문에서 보도하고, 파업에 관한 거짓되고 유해한 캠페인을 정정할 것. 

 

이와 같은 노동자의 요구조건을 분석해 보면, 197012월 봉기는 관료독점 지배체제에 대한 노동자의 저항정신과 노동자 민주주의를 관철시키려는 의지의 산물이며 민중의 자기 권리를 회복하려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헌법상으로만 노동자가 주권자인 국가, 착취가 소멸되고 생산과 분배가 사회화되었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소수의 특권관료의 권력독점으로 지배되는 사회, 그리고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국가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반대의 정신이 197012월 봉기의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폴란드 정부는 처음에 강압적 힘으로 사태를 수습하겠다고 했다. 공개적으로 노동자를 폭도’ ‘무뢰한으로 취급했고 군대와 경찰의 물리적 진압이 대대적인 학살을 불러왔다. 그러나 군경의 폭력적인 진압방식에도 파업과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일로의 이르게 되자 정부당국도 물리적 힘만으로는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타협에 의한 수습이라는 방식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1218일 저녁의 라디오 방송은 사태의 책임을 모두 아나키스트와 무뢰한에게 전가하는 식의 해결방법은 매우 안이한 태도이다.” “최저임금만을 지급받는 노동자가……모호한 설명으로 초점이 흐려진 정책들에 부닥쳤을 때에 느꼈을 고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정부의 사태수습을 위한 방향전환의 서곡이었다. 1219일에는 파업이 전 폴란드에 미쳤다.

1220일 고물카 당 제1서기가 사임했다. 1956년 국민적 영웅으로 열광적인 국민의 지지를 받아 권력에 복귀했던 고물카가 국민을 배반하고 강압적인 탄압과 경제 실책을 거듭하던 끝에 국민의 대대적인 저항을 받고 사임하고 만 것이다. 고물카의 퇴진과 함께 고물카 일파를 이루었던 친소 강경파들도 정치국에서 추방되었다.

기에레크가 당 제1서기로 선출되어 권력을 잡았다. 기에레크는 권력을 잡자마자 우리의 경제정책을 비롯한 모든 정책을 결정할 때에 지켜져야 할, 결코 파괴할 수 없는 원칙은 현실을 직시하고 노동자계급과 지식인들과 광범위하게 상의하며 당 생활과 최고지도부의 활동에서 집단지도의 원칙을 존중하는 것이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지금 경제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신경제정책을 2년 동안 동결하고 국가예산의 40%(70억 즐로티)를 저임금 노동자에 대한 원조와 가족수당, 노인연금, 신체장애자연금의 증액에 투입할 것을 발표했다. 또 폴란드 정부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의 최선의 경험을 도입하여 경제관리체제를 개선할 것을 약속했고 개정된 5개년계획에는 새로운 요소가 가미될 것임을 약속했다.

이와 같은 기에레크의 타협적인 양보자세를 보고 노동자는 일단 작업장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지도부의 교체, 경제정책실시의 2년 연기, 부분적인 사회복지비의 지출증대로는 노동자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체제의 근원적인 모순에 대하여 대수술을 가하지 않는 한 결코 노동자가 요구한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경제상태는 계속 악화되고 있었고 민주주의의 실현은 요원했다.

1971118일 그단스크 시의 레닌 조선소 노동자는 또다시 집회를 열었다. 그들은 최고 수준의 임금을 동결하고 낮은 수준의 임금을 차츰 인상할 것, 투자 배분을 개선하여 소비재 공급체제를 개선할 것, 노동자평의회의 역할을 증대시킬 것, 그리고 노동조합의 민주화를 보장할 것 등의 요구사항을 결의했다. 그들은 코시오레크 경제상과 모차르 내무위원을 정치국에서 추방시킬 것, 그리고 기에레크 당 제1서기가 노동자와 직접 교섭에 응할 것을 요구하고 6시간의 시한부 파업에 들어갔다.

기에레크는 조용하고 질서 있게 노동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는 한 노동자의 요구는 검토할 수 없다고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122일 시체친의 노동자가 임금인상, 당과 노동조합의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파업에 돌입하자 노동자와 대화를 거부하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그래서 124일은 시체친에서, 125일은 그단스크에서 수상, 국방상, 내무위원 대리를 대동하고 노동자 대표와 직접 교섭에 나섰다. 기에레크는 새로운 경제정책을 수정할 것, 임금을 현 수준 이하로 인하하지 않을 것, 발포사건에 대하여 조사할 것, 파업위원회를 노동자의 대표기관으로 승인할 것(이후 노동자위원회로 개칭) 당을 비롯하여 정부기관, 공장 등의 모든 지방기관의 임원을 자유비밀선거를 통하여 선출할 수 있도록 선거제도를 개선할 것 등을 약속하였다고 ?뉴욕 타임즈??이코노미스트? 지가 보도했다.

그러나 파업은 계속 확대되었다. 71211일에는 웃지 지역의 섬유노동자가 임금을 15% 인상할 것을 요구하고 파업에 돌입했다. 이 섬유노동자가 대부분은 결혼한 여성 노동자였다. 당국은 이들의 요구가 비현실적이라고 비난하는 한편 214일에는 수상을 비롯한 정치국원 4명이 장장 18시간에 걸친 마라톤 설득을 벌렸지만 노동자는 이를 거부했다. 파업은 바르샤바까지 파급되었다. 당황한 정부는 215일 지난해 12월에 발표했던 식료품과 생활필수품의 가격인상안을 전면 철회하겠다고 약속했다. 정부로서도 폴란드 전체 노동인구의 40%를 차지하고 있는 기혼여성노동자와 정면충돌한다는 것은 국가를 내란상태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에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육아와 가사노동에 시달리면서 노동조건이 열악한 경공업부문에 종사하는 까닭에 이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폴란드의 기혼여성노동자가 정부에 대하여 전면항전에 나설 때, 사태는 최악의 파국에 직면할 것이 분명했다.

노동자의 투쟁에 부닥쳐 기에레크 일파는 대화와 설득으로 노동자를 무마하려고 했다. 7112월의 당 대회까지 기에레크와 노동자와의 대화는 무려 189번이나 되었을 정도였다. 기에레크 체제는 노동자를 자극하지 않고 점진적인 개혁을 통하여 국민의 개혁에 대한 열망을 체제내로 수렴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점진적인 개혁을 위하여 임금인상, 연금 증액, 가족수당 증액 등의 조치가 필요했다. 이에 대한 재원은 소련에서부터 긴급원조로 충당했다. 소련으로서도 체코의 프라하의 봄이 폴란드에서 재현될 것을 바라지 않고 있었다. 비록 소련의 마음에는 탐탁치않은 온건 개혁파이기는 했지만 기에레크 체제를 지원하지 않을 때, 노동자의 투쟁으로 폴란드 정부가 무너질 수 있었던 것이다. 7112월의 당대회에서 친소 보수파의 우두머리였던 모차르는 정치국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기에레크 체제가 출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5. 기에레크 정권의 경제개발 정책

 

1956년의 포즈난 항거로 말미암아 민중의 영웅이 되어 권력을 잡은 고물카는 1970년의 ‘12월 봉기로 몰락하고 기에레크가 권력의 정상에 올랐다. 기에레크 체제는 출범하자마자 ‘12월 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던 테크노크라트적 발상에 의한 경제정책(7012월의 생필품과 식료품 가격인상)을 동결시켜 노동자와 정면대결을 피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관료들의 작은 양보, 즉 사회복지비의 지출 증대와 관료층 지도부 교체 등의 조치는 근본적 개혁을 요구하는 노동자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노동자의 증대하는 압력 속에 관료들은 더욱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양보에도 한계가 있었다. 폴란드 관료들과 그들의 배후에 있는 소련으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한계점이 있었다. 그것은 폴란드가 소련의 지배권을 이탈하는 경우와 폴란드 국민들이 권력기구를 무시하고 체제의 변혁을 시도하는 경우였다. 폴란드 국민들의 민주화운동이 이 한계점을 넘어설 경우에 소련은 어떠한 희생도 감수하고 폴란드에 대한 군사개입을 감행할 것이다. 그렇지만 폴란드 국민의 개혁의지는 그 한계점 너머를 지향하고 있었다.

기에레크 체제는 7012월의 경제정책은 포기했지만 새로운 형태의 테크노크라트적인 개혁을 추진해야만 했다. 이미 민중은 자신의 힘을 자각하기 시작했고 관료들의 독점지배하의 경제정책의 모순은 심각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임금의 인하도, 그렇다고 소비재 가격의 인상도 기대할 수 없었다. 경제 상태는 이미 파탄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권력은 유지되어야만 했다.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예상할 수 없지만 다시 한 번 테크노크라트적인 개혁을 추진하여 국가기구를 관료들이 계속 장악해야만 했다. 노동자의 압력에 밀려 더는 개혁을 받아들이는 것은 필연적으로 국가정책에 대한 관료들의 결정권을 무력화시키고 차츰 관료들의 권력을 잠식하여 관료제의 파멸로 발전할 것이 명확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노동자는 운동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당과 국가의 분리’ ‘당으로부터의 노동조합의 독립을 주장하여 관료독점 지배체제에 대한 도전을 표명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에레크는 국민들의 불만을 어느 정도 해소하면서도 관료지배체제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경제정책을 구상했다.

기에레크 체제하의 관료집단들은 파탄에 직면한 경제위기와 고조되는 노동자의 대정부 투쟁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대규모의 경제개발에서 구했다. 농업부문에서 공업부문으로의 노동력 유입이 둔화되고 소비재 생산부문의 희생위에 추진한 중공업화로 말미암아 생활필수품의 심각한 부족을 불러와 국민의 불만을 누적시키고 있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집약된 개발패턴이라는 종래의 개발정책을 전환시켜 대규모적인 노동과 자본의 생산성 증가에 의한 전면적인 경제개발로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개발 정책을 추진하는 것만이 낙후된 폴란드 경제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대규모적인 경제개발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부실한 경제의 기초구조를 재정비하고 기존의 생산시설을 근대화하며, 국제 경쟁력을 가진 수출부문을 개발하기 위하여 고수준의 투자가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만 했다. 아울러 노동자의 생산 의욕을 고취시켜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물질적인 유인책도 필요했다. 또한 생산 촉진을 위하여 개인소득의 대폭적인 증가도 계획되었고, 이러한 제반 정책의 효율적 집행을 위하여 경영계획 제도의 대폭적 개혁이 요청되었다.

기에레크 정권이 채택한 공업 근대화, 경제재건, 노동력의 생산성 향상이란 정책 목표를 추진하는 데는 많은 투자와 선진기술의 도입이 꼭 필요했다. 기에레크 정권은 많은 자본과 기술을 헬싱키 협정을 정점으로 한 당시의 도서 데탕트의 분위기를 타고 서방진영에서 구했다. 기에레크 정권은 대규모의 서방차관을 도입하더라도 새로 건설하는 공장에서 생산하는 수출품의 증대로 외채를 상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대규모의 경제개발로 국민의 불만을 해소하고 체제의 유지를 해 나가겠다는 발상법으로 엄청난 액수의 차관과 기술이 서방진영으로부터 도입되었다.

기에레크 정권의 개발전략은 처음에는 꽤 효과가 있는 듯이 보였다. 70년대 전반기의 성장률은 연평균 10%까지 이르렀고 계획목표는 초과 달성되었다.

그러나 급속한 경제성장에 비례하여 외채도 기하급수적으로 누적되기 시작했다. 폴란드의 외채는 197111억 달러에서 75년에는 총액이 80억 달러로 크게 늘었다. 겨우 4년 동안에 71년도의 7.3배로 급증하는 상황이었다. 또 수입의 급속한 증가에 비하여 수출의 증대는 보잘 것이 없었다. 71년에서 7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수입의 연평균 증가율은 15.4%인데 비하여 수출의 연평균 증가율은 1.3%로 수입역조 현상이 두드러졌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기까지 폴란드는 무역흑자국이었지만, 개발전략의 추진 때문에 무역적자국으로 바뀌었다. 수입 총액은 서방측으로부터 공업용 원자재를 대량으로 수입하게 됨에 따라 75년에는 50억 달러 수준으로 팽창했다. 이는 71년도의 6배가 넘는 수준이었다. 공업용 원자재의 수입은 71년의 26천만 달러에서 75년에는 25억 달러를 돌파했다. 경제개발의 규모가 확대되고 성장률이 증가하면 할수록 공업용 원자재를 비롯한 공업제품의 수입이 급속히 늘었던 것이다.

폴란드 정부는 수출증대로 수입역조현상을 시정하고자 시도했다. 폴란드 정부는 폴란드의 전통적 수출산업(석탄, , 식육, 식육제품, 의류, 섬유제품 등)을 계속 확대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수출부문을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서방측의 수출시장의 현재와 장래의 수요를 예측하고 새로운 수출부문(대형기계, PVC와 비료와 약품과 합성섬유 등과 같은 화학제품, 항공기와 그 부품, 불도저와 토사처리 덤프카와 파이프부설 트랙터와 같은 건설기계를 개발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투자를 결정했다. 대단히 야심적이기는 했지만 무모한 수출정책이었다.

대대적인 투자에 비하여 수출의 증가는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에 머물렀다. 새로운 개발부문의 수출은 ‘1976~80 계획의 초기까지는 그 성과를 전반적으로 기대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일부 품목은 훨씬 뒤에나 성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되었다. 보기를 들어 1972년 체결된 오스트리아와의 통상협정은 적어도 80년까지는 트랙터를 수출할 수 없도록 제한조치를 규정하고 있었다. 애초에 기대했던 성과는 요원한 채 과도한 차관도입에 따른 외채의 누적만이 가중되었던 것이다.

폴란드의 서방진영에 대한 수출은 72~75년 기간에 석탄, 화학제품, 사료, 경공업제품의 수출증가에 힘입어 연평균 26.7%로 대폭 증가했다. 그러나 수출액 증가의 40% 이상은 국제시장의 가격인상에 따른 수출가격의 상승에 의한 것이었다.

수출액이 72년의 14억 달러에서 75년에는 28억 달러로 약 2배로 늘어났지만 이에 비례하여 무역수지의 악화도 심화되었다. 72년에는 2억 달러 정도였던 무역수지의 적자가 75년에 이르자 22억 달러로 증가하여 무려 11배로 벌어졌다.

수출품목의 다변화도 이루지 못했다. 5개 주요품목의 수출액이 75년도 전 수출액의 44%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72년도의 비율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4년 동안 수출품목의 다변화 정책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식육과 가축의 수출약과 그것이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72~75년 사이에 심각한 흉작과 국내의 가격정책의 실패로 급속히 감소했고 석탄부문이 75년까지 폴란드 최대의 수출원으로 총수출(서구 선진공업국에 대한)31%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석탄부문의 수출이 중요하게 된 것은 석탄의 수출물량이 증가하고 석탄의 국제가격이 상승하여 외화가득율이 높아진 요인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총수출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하던 식육가축의 수출이 감소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현재 폴란드는 세계 제4위의 석탄 수출국으로 석탄의 수출은 세계 제2위를 차지하고 있다.

서구 선진공업국에 대한 수출 가운데 1차 산품이 차지하는 비율은 71년의 64.3%에서 75년의 61.2%로 거의 변동이 없이 1차 산품이 수출의 대종을 이루고 있었다. 대규모적인 경제개발을 추진했지만 공업품 수출의 증가율은 71년의 14.1%에서 75년의 20.8%로 거의 진전이 없었고 여전히 1차 산품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서구 선진공업국에서부터 수입 가운데 공업품은 71년의 32.6%에서 75년에는 70.8%2배 이상 늘어난 데 비하여 1차 산품과 중간재는 71년도의 각각 29.7%38.2%에서 75년에는 18.1%11.1%로 격감했다. 이는 폴란드가 서구 측에서부터 막대한 양의 자본재를 수입하기 때문이었다. 일반기계, 수송기계의 수입량은 대개 30~40% 전후였으며 기초공업품은 처음에는 주로 중간재를 수입하다가 나중에는 완제품을 수입하게 되었다. 공업화를 성급하게 추진한 결과 폴란드를 서방측의 공업제품의 상품시장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 것이다.

대외무역수지의 적자는 생산국민소득과 분배국민소득과의 격차를 유발했고 국가의 부가 무역을 통하여 해외로 유출되었다. 생산국민소득과 분배국민소득의 격차는 73년부터 76년까지의 3년 동안 3421억 즐로티에 이르렀는데 무역적자에 의한 부의 해외유출이 주요 원인이었다. 이렇게 생산국민소득과 분배국민소득의 격차가 확대됨에 따라 기에레크 정권이 주장하는 국민경제의 발전이 일반국민에게는 거의 현실성이 없는 허구로 비쳐졌다.

경제개발의 전략이 중공업부문에 치중됨에 따라 투자도 중공업부문에 집중되었고 주택건설과 소비재 생산은 등한시되었다. 70년대 전반기의 투자신장률은 년평균 18.4%라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75년도의 순투자율은 GNP41.3%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외국의 자본도입으로 상당액을 충당했다고 하더라도 막대한 양의 국내자본의 조달이 필요했기 때문에 국민소비의 위축은 심각했다.

그런데 막대한 자본을 투입한 투자정책의 결과는 비참했다. 투자의 효과는 장기간의 시일을 필요로 했다. 게다가 다양한 프로젝트들은 폴란드의 취약한 경제기반을 감안하지 않고 무리하게 추진되었으며, 계획의 입안자들은 많으면 많을수록좋다는 생각으로 프로젝트를 확대시켰고 각 지역단위에서도 충분한 사전 검토 없이 무모하게 외자를 도입했다. 이리하여 다수의 새로운 수출산업이 창출되었지만 국제시장조사와 장래의 수요예측 등 주도면밀한 사전조사의 결여와 국제경쟁을 위한 적정규모를 무시하고 난립한 프로젝트의 추진으로 국제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부실화되어 갔다.

이와 동시에 수출산업의 다양화를 노린 개발정책은 서방측에 대한 수출 증대라는 애초의 목표와는 반대로 대량의 서방측의 원자재를 필요로 하는 왜곡된 산업구조를 만들었다. 보기를 들어 자동차 산업의 경우를 보면, 폴란드의 자동차 산업은 현재 서방측의 설비와 기술특허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폴란드의 자동차 산업은 70년대 초기에 본격적인 개발을 착수했는데도 아직도 서구 선진공업국과의 사이에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생산은 연간 30%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지만 승용차 수출은 약 21천대의 수준에서 맴돌고 있고 현재 자동차 부품의 수입은 수출의 5배에 달하고 있는 형편이다.

또한 경제의 물량적인 급격한 성장을 추진하면서도 낙후된 국내의 수송망과 발전시설 등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한 결과 남부 탄광지대로부터 북부 항구지대로 석탄을 수송하는 데 심각한 곤란을 겪는가 하면, 발전시설의 노후화에 따른 전압저하현상은 공업지역과 주택가에 대한 전력배급제를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공업생산이 떨어졌고 생산시스템 전체에 많은 어려움이 생겼다.

폴란드가 대규모적인 개발정책의 재원을 서구 선진공업국의 차관으로 충당하게 되자, 폴란드는 서구 선진공업국의 경기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73년 말 이른바 오일쇼크로 불린 OPEC의 석유가격 인상조치의 충격으로 서구의 선진공업국들이 심각한 경제 불황에 빠지게 되자, 폴란드 경제도 타격을 받았다. 기에레크 정권은 전통적인 1차산품의 수출을 촉진하는 동시에 새로운 수출부문을 건설하여 대서구 수출을 대대적으로 확대한다는 전제하에 대대적인 차관도입과 공업화를 위한 원자재 수입정책을 추진했다. 수출초과로 외채상환을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일 쇼크 때문에 마이너스 성장 등 서구의 불황이 이어졌고 경기회복은 더디었다. 이는 서구의 대외 구매력을 크게 떨어트려 폴란드의 수출정책에 큰 타격을 입혔다. 공업제품 위주의 새로운 개발부문의 수출은 말할 것도 없이 전통적인 1차 산품의 수출조차도 유지하기 어려웠다. 엄청난 액수의 차관의 도입에 따른 원리금 상환과 이자지불의 부담이 가중되었고 수입초과에 따른 무역적자까지 덧붙여 대외채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이와 동시에 서구의 차관도입과 공업품 수입은 서구의 인플레를 폴란드에 도입하는 결과를 낳았다. 폴란드 경제는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에레크 정권은 경제위기의 근원적 해결은 도외시하고, 국내의 정치적 안정은 생활수준의 향상에 있고 생활수준의 향상은 공업화에 달려있다는 고식적인 신념에 의거하여 대규모적인 개발계획의 추진을 무모하게 강행했다. 그때 대부분의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은 세계적 경기불황을 감안하여 서구의 선진공업국에서부터 수입을 크게 줄이고 경제성장계획도 축소 수정하고 있었는데, 폴란드는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탓에 서구로부터 기계를 비롯한 공업품의 수입이 늘었고 마침내는 곡물수축국이었던 폴란드가 곡물수입국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물론 74~75년 회계연도에 공업부문에 대한 투자도 늘었지만, 대부분은 국영농장과 몇몇 협동조합농장에 편중되었다. 폴란드 농지의 3/4를 영세한 개인농이 경작하고 있는 폴란드 농업의 현실을 고려할 때, 농업부문에 대한 투자정책은 균형감각과 현실감각을 잃었다. 대부분의 자작 농민은 생산의욕을 잃었고 농업의 생산성도 정체되었다. 농업부문에 대한 폴란드 정부의 태도는 정치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농촌의 사회주의화를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소농을 말살하고 이들을 국영농장과 협동조합농장으로 집단화시키겠다는 의도였지만 몇 백 년 동안 봉건적 대토지 소유제 밑에서 신음하다가 처음으로 자기의 토지를 가지게 된 농민은 소유지를 자발적으로 국가에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농업의 생산성 문제를 고려할 때 국영농장은 개인농에 견주어 꽤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국영농장은 기업체와 비슷하게 관료기구를 이루고 있었다. 관료, 농업경제학자, 경영자, 회계, 그리고 이들의 가족 등 직접 생산자인 농민들 외에 다수의 인원이 하나의 관료기구를 이루고 있었고, 제한된 업무에 종사하는 이들을 부양해야 하는 막대한 부담이 국영농장에 부과되고 있었다. 농장에서 생산하는 생산물은 관료기구 내의 비생산자들과 그 가족을 포함하여 농장 내의 거주인원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거의 대부분을 썼기 때문에 시장에 내놓을 잉여생산물은 거의 없었다.

이에 견주어 개인농은 비록 소규모이고 기계화되지는 않았지만 생산적이었다. 폴란드 수출품목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고급의 돼지고기와 햄, 송아지 고기 등을 공급하는 것이 개인농이었다. 생산성이 높은 개인농을 묵살하고 비생산적인 국영농장과 협동조합농장에만 투자를 집중한 결과, 농업의 생산성이 저하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에레크 정권은 노동자에 대한 생산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실질임금을 상승시켰다(1971~75년까지 약 40% 인상). 그러나 인상된 임금을 흡수해야만 할 주택건설과 소비재 생산이 만성적인 부족현상을 일으켰기 때문에 남아도는 노동자의 구매력은 육류 소비로 몰리게 되었다. 당 지도부의 비공식적인 논평에 따르면, 국민 1인당 평균 육류소비량은 70년의 약 5에서 74년에는 70~80에 이를 만큼 급격히 늘었다. 1974~75년에 이르자 폴란드에는 육류가 모자라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더욱 나쁘게 한 것은 정부의 대처방법이었다. 폴란드 정부는 가축수매가격을 올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74년의 곡물흉작에도 모자라는 물량을 수입으로 보충하지도 않았다. 농민은 가축사료용 곡물을 비싸게 사들여야 했지만, 가축수매가격은 오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농민들은 74년 말에서 75년 초에 걸친 겨울 동안에 돼지를 죽여 버렸다. 육류부족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결국 폴란드 정부는 물가인상이란 안이한 방법으로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다. 그런데 설사 물가인상이 불가피했다고 하더라도 인상방법이 문제였다. 국민들은 물가인상이 있더라도 76년 말쯤에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기에레크가 7512월에 열린 제7차 당대회에서 가격인상은 어쩔 수 없지만 전국적 규모에 걸친 철저한 토론을 거치고 나서 실시할 것이라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76623일 폴란드 정부는 각료들이 하루 동안 지방의 당책임자와 지방의 행정 책임자들의 일부에게만 인상내용을 통보한 뒤, 624일 전격적으로 가격인상안을 발표했다. 인상의 내용을 보면 인상폭이 엄청나서 설탕이 100%, 육류가 69%에 이르는 등, 기본 식료품 가격이 평균 40% 인상되었다. 국민들의 누적된 불만이 비등점에 다다랐다. 기에레크 정권이 약속한 대규모적인 경제개발이 대대적인 물가인상의 형태로 국민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이런 갑작스런 가격인상의 이유에 대해 미국의 상하양원 합동경제위원회의 보고서는 767월초에 동베를린에서 열릴 예정인 제30차 코메콘 회의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 회의에서는 1976년부터 1980년까지 경제 5개년계획을 조정하는 것이 주요의제였다. 다른 정부들은 이 회의를 앞두고 회의에 제출한 5개년계획에 관한 여러 자료를 발표했다. 그런데 폴란드 정부는 아무것도 발표하지 않고 있었다. 미국상하양원의 합동경제위원회의 보고서는 폴란드 정부가 코메콘 회의를 위하여 가격이 인상된 수치를 바탕으로 삼은 자료를 작성했기 때문에 실제로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국민들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전격적으로 가격인상을 감행한 폴란드 정부의 의중에는 당장 눈앞에 닥쳐온 코메콘 회의에서 자신의 공업화정책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먼저 해야할 일이었던 것이다.

가격인상은 국민과 정부와의 대결을 불러 일으켰다. 기에레크 정권의 처지에서 보면, 1970~71년 폭동 개발전략도입 = 경제발전과 임금상승으로 국민의 불안 해소 서구의 자본도입 = 공업화 + 수출지향의 경제구조 서구의존경제구조 = 엄청난 대외채무 누적 + 무역적자 오일쇼크로 인한 서구경제의 불황 = 수출부진 + 소비재의 만성적 부족 물가인상의 과정을 겪었다.

그러나 국민의 처지에서 보면, 1970~71년 항거 민주적 개혁에 대한 기대 민주화의 배반관료억압 기구의 존속 차관경제의 모순 심화 + 국민생활의 침체 관료의 기만적 물가인상 새로운 민주화 운동의 시작이라는 과정을 밟았다.

1956년 포즈난 항거, 197012월 항거로 이어져 내려온 폴란드 국민들의 민주화 운동 반관료주의 운동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766월 봉기의 배경에는 70년대 전반기를 이끌어 온 기에레크 정권의 경제정책의 실패가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다.

 

 

6. 19766월 사건과 반체제파의 대두

 

1956년 포즈난 항거와 197012월 봉기의 계기도 그러했지만 관료들의 기만적 처사는 노동자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76624일 당국의 가격인상에 대한 발표가 나오자마자 노동자를 비롯한 폴란드 국민들의 격렬한 항의운동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바르샤바 근교의 우르수스 시의 트랙터 공장(유럽 최대 규모)의 노동자는 자발적으로 공장에서 피켓부대를 조직하는 한편 철도의 레일을 뽑아 버려 바르샤바파리간 급행열차를 정지시켰다. 바르샤바 남쪽 약 100지점에 있는 라돔에서는 노동자가 지구당 본부까지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는데, 지구당위원회 제1서기는 도망 가렸다. 격분한 노동자는 당 건물에 불을 지르고 무력시위를 벌였다. 약탈행위가 시내 곳곳에서 일어났다. 차츰 시위는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확대되었다.

625일 밤 정부는 가격인상안을 철회했고 노동자의 시위도 일단 수그러들었다. 수상은 가격인상안의 철회를 발표하는 성명을 통해 노동자의 자제를 요구했다. 626일 통일노동자당 기관지 ?트리브나 루두? 지는 양심적인 노동만이 생활수준의 향상을 가져오는 유일한 수단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시위 노동자들을 간접적으로 비난하는 한편, “정부가 제출한 가격인상안은 폴란드 경제를 회복하는 데 필요불가결한 것이다.”고 정부의 처지를 두둔하는 논평을 실었다.

626일 중국의 신화사 통신은 이례적으로 폴란드 사태에 대한 논평을 보도했다. 논평을 요약하면, 첫째 폴란드 노동자계급의 이번 파업투쟁은 폴란드 민중과 지배집단 사이의 모순이 끊임없이 첨예화되어 온 과정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20여년 동안 폴란드 지배집단은 소련의 수정주의 집단에 대하여 맹종했고 국내에서는 자본주의를 부활시키는가 하면 농업생산을 곤경에 빠트렸다. 둘째로 이번 파업은 신 차르(소련)가 최근 폴란드에 대한 착취와 수탈의 지배를 끊임없이 강화하여 왔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논평은 중소이념분쟁의 격화와 함께 중국이 동구를 보는 시각의 변화를 잘 대변해 주는 내용이었다.

노동자의 파업과 항의행동은 정부의 가격인상안 철회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정부측은 늘 그렇듯이 일시적 후퇴에 이은 탄압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당국은 매스컴을 총동원하여 정부의 가격인상조치가 폴란드 경제의 회복을 위하여 어쩔 수 없는 행위였다는 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동시에 노동자의 파업과 항의 행동을 맹렬히 비난했다. 매스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는 당국의 일방적인 선전전이었다. 우르수스와 라돔에서는 몇 천 명의 노동자가 체포당하고 해고처분되었다. 파업과 항의행동이 일단락되어 열기가 식은 뒤에다 대중의 의사와 이익을 대변할 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노동자는 일방적으로 관료체제의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우르수스와 라돔은 탄압과 테러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고 재판이 행해지는 법정에서는 법을 짓밟는 행위가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이런 탄압 속에서 구속당한 인사들과 그들의 가족을 돕기 위한 조직이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결성되었다. 이것이 노동자옹호위원회였다. 그들은 구속된 인사들의 법률상담을 해주고 변호인단을 조직하는 한편, 음식물 등을 넣어 주고 구속당한 사람들이 가족들의 생계도 돌보아 주었다. ‘노동자옹호위원회의 활동으로 체포되었던 노동자의 대다수가 풀려났고 다시 직장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렇게 노동자옹호위원회를 매개로 하여 서로 다른 처지에서 출발했던 노동자와 지식인이 차츰 서로간의 연대를 굳혀가면서 관료지배체제에 대항하게 되었다. 1968년에 학생지식인의 민주화운동이 당국의 폭력적 탄압을 받았을 때 노동자는 냉담했다. 197012월 노동자 봉기가 유혈사태로 치닫고 있을 때 지식인들은 현장 밖에 있었다. 그러나 766월 사건을 계기로 하여 서로 간에는 연대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것은 폴란드 민주화 투쟁사에서 역사적 전환점을 이루는 한 순간이었다.

노동자옹호위원회는 좀 더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투쟁을 위하여 사회자위위원회(KOR)로 개편했다. 이리하여 사회자위위원회는 몇 천 명의 활동가를 회원으로 가진 폴란드 최대의 반체제조직이 되었다.

그 뒤 KOR는 대정부투쟁을 다양하게 전개하는 동시에 노동자의 의식화 작업도 병행하여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의 전략전술을 가르쳐 주었다. KOR는 폴란드의 현존체제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전제조건으로 모든 사회집단들이 자기들 자신의 대의기관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며 당국은 사회경제부문의 실상을 국민들에게 공개적으로 공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정부의 주도가 아니라 시민의 이니시아티브 하에 광범위한 국민의 조직적 개혁운동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KOR의 기본노선은 그 뒤 노동자의 대정부투쟁에 중요한 전술전략으로 활용되었다.

KOR의 기관지인 ?로보트닉?(Robotnik: 노동자)3만부의 발행부수를 기록하여 구독자와 그 주위의 사람들에게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또한 사전검열제도가 엄격한 폴란드에서 사전검열을 받지 않고 KOR 임의로 발행하는 실질적인 투쟁으로 언론검열의 무효화를 선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당국의 맹렬한 단속과 위협에도 ?로보트닉?의 발행부수는 차츰 늘었다. KOR의 독립출판국인 NOWA(호에치카가 주관했는데 자주출판소의 머리 네 글자를 연결한 약칭으로 폴란드어로 새로운이란 뜻도 있다.)의 간행물도 차츰 널리 보급되었다.

KOR 행동위원회는 정부당국의 법률위반행위를 폭로하고 당국의 탈법적인 행위로 희생된 사람들을 구조하는 일에 전심전력했다.

1978년에는 학술강좌협회’(TKN)가 결성되는데, 결성을 알리는 선언문에는 폴란드 국내의 유수한 학자, 문인, 평론가들이 서명했다. 이런 형태의 조직을 형성하는 운동은 이전부터 이어져 왔었다. 그들은 학습 그룹을 조직하여 주로 폴란드 역사, 경제학, 사회학 등 광범위한 분야의 인문사회과학을 강의했다. 이러한 학습 그룹은 학생들의 요청에 의하여 조직되는데 일종의 지하대학(흔히 Flying University라고 한다.)이었다. 학생 측에서 요구한 과목에 따라 학술강좌협회 내의 해당 강사를 파견하여 세미나를 지도하고 강의를 하는 체제로 되어 있었다. 특히 세미나는 폴란드 현대사와 직결된 주제들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는데 학생과 시민, 그리고 노동자의 의식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독립적인 학생연대위원회가 각 대학에 세워져 당국의 엄격한 통제 아래 놓여 있는 기존의 폴란드 사회주의 학생동맹이 독점하고 있던 학생운동 영역을 타파하고 독자적인 학생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도 민주화 운동에 중요한 계기의 하나를 이루게 되었다.

검열을 받지 않고 발간하는 출판물도 다양했다. ?로보트닉?뿐만 아니라 ?고스보다르치?(농민이란 뜻으로 KOR가 농민을 상대로 발간하는 격주간지), ?회보?, ?구오스?(‘소리’), ?비판?, ?저비스?(기록), ?플스?(고동, 맥박) 등 다양한 정기간행물을 발간했다. NOWA의 출판도 198010월에는 100권의 간행물을 발간할 정도였다. 언론통제가 단순히 사전검열과 집필금지조치에 그치지 않고 개인의 인쇄시설 소유를 금지시키고 불법언론을 합법적으로 탄압하는 폴란드의 현실을 고려할 때 이들의 출판을 통한 투쟁은 지난한 고통의 연속이었다.

농민을 위한 격주간지 ?고스보다르치?의 발간에 힘입어 여러 곳에서 농민자위위원회가 결성되어 농민의 권익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79년에 접어들어 ?로보트닉? 지의 편집부는 ?로보트닉? 지의 협력자들과 함께 노동자의 권리선언을 작성했다. 이 선언문의 작성에는 ?로보트닉? 지의 그단스크 지역 협력자들, ?연안지방 노동자? 지의 제작진, 그단스크 지역에서 독립자치노조설립위원회를 결성하고 그 뒤 808월의 그단스크 파업이 일어났을 때에 공장간 파업위원회를 조직했던 사람들이 참가했다. 나중에 그단스크 파업의 도화선이 되었던 안바 바웬티노비치와 연대의 위원장으로 파업을 주도한 레흐 바웬사도 이때의 선언문 작성에 협력했던 사람이었다.

노동자의 권리선언은 폴란드의 노동자가 기본권과 파업권을 박탈당하고 있으며 노동자를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가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노동운동의 목표를 기존의 노조가 아닌 노동자를 위한 자주적인 독립자치노조의 결성에 두었다. 이 선언문은 노동자의 현안의 문제로 임금문제, 노동시간문제, 직장의 안전성문제, 특권의 폐지문제,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강제시키는 문제, 노동기본법문제 등을 들고 그 해결책으로는 파업권의 보장, 정보의 공개, 공식노조를 통한 해결, 핵심적인 노동자 그룹의 형성, 독립자치노동조합위원회의 결성 등을 열거하고 있었다. 선언문을 작성하는데 1년이 걸렸을 정도로 많은 사람의 비판과 토론의 결과인 이 선언은 폴란드 노동운동의 목표를 독립자치노조의 결성으로 집약시키는 동시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효과적인 전술전략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폴란드 각지에서는 독립자치노조의 결성을 위한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7. 기에레크 정권의 부패와 19807월의 가격인상

 

민주적인 반대파임을 자처하는 KOR의 투쟁이 민중의 지지를 차츰 넓혀가고 있었다. 그 동안 기에레크 정권의 부패와 무능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소수의 관료들은 각종의 특권을 누렸다. 주택, 부동산, 건축자재, 승용차, 특별의료 서비스, 호화별장, 특별연금권 등, 당과 정부기관의 고위층이 향유할 수 있는 특권은 다양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바르샤바에는 고위층만이 쓸 수 있는 커텐을 친 백화점이 있는가 하면, 지방에서는 현주민들도 소유주를 모르는 호화주택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고위층의 소유였다. 기에레크는 특히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는데 몇 개의 호화별장과 심지어는 호화 요트까지 개인소유로 가지고 있었다. 경제 불황으로 일반 국민들이 심한 생활고를 겪고 있는 가운데 몇몇 관료층은 사치스러운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사태수습에는 아주 무능했던 기에레크 정권은 1976년 이후에는 노동자의 불만이 심한 지역에는 서구로부터 수입한 식료품과 소비재를 이동식 슈퍼마켓을 통하여 공급하는 식의 임시변통을 쓰는 무능을 드러내었다.

경제성장률은 차츰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했고 경기침체도 더욱 깊어갔다. 폴란드의 국민소득은 1976년 뒤에 점점 떨어져 1979년에 국민소득의 성장률이 2%에 이르렀다.

그와 달리 서구 선진공업국에 대한 채무는 1979년 말에는 무려 187억 달러에 이르렀다. 이는 (소련을 포함한) 동구 국가 전체의 대서방 채무 총액의 약 3%에 해당했다. 80년도에는 상환액이 원금과 이자를 합쳐 76억 달러에 이르렀다. 이것은 79년도의 대서방 수출액 46억 달러를 훨씬 넘어선 액수였다. 차관의 상환부담과 무역적자 속에서 폴란드 경제는 서방진영의 빚더미 위에 자리 잡고 있는 꼴이었다.

수출부문을 다양화하겠다는 계획에 따른 과대투자는 엄청난 비효율성을 가져왔다. 외국의 자금설비기술의 도입이 적절히 제어되지 못하고 무절제하게 남발되었다. 그 결과 1980년 현재 미완성된 부문의 투자규모가 15천억 즐로티로 79년도 폴란드 GNP의 약 80%에 해당하는 천문학적 액수였다. 중앙정부의 계획과 조절 기능이 얼마나 졸렬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실례였다.

농업의 경우, 투자를 국영농장과 협동농장 쪽에 집중시킨 정책상의 실책에 기상이변까지 겹쳐 75년부터 80년까지 5년 동안 농산물 수확은 형편없이 낮았다. 71년부터 75년까지 연평균 곡물 생산량은 1980만 톤으로 줄었고 특히 79년에는 78년과 견주어 약 2%가 줄어들었다.

농산물 흉작은 가축사료용 곡물의 부족현상을 불러왔다. 축산업계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801월 소, 돼지의 수는 75년의 수준을 밑돌고 있었다. 78년에는 버터를 91백 톤, 79년에는 버터 16천 톤, 치즈 53백 톤을 수입했다. 농산물 수출국이었던 폴란드가 70년대 후반기에는 농산물 수입국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정부의 재정은 만성적인 적자로 파탄할 지경에 이르렀다. 식료품의 가격인상은 국민의 거센 반발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거꾸로 식료품 품귀와 농민의 압력으로 생산자 가격은 오르게 되었다. 따라서 그 격차는 정부보조금으로 충당되었다. 이는 재정적자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79년을 보면, 식료품 부문 전제에 대한 정부보조금은 16백억 즐로티로 국가예산의 16.1%를 차지했으며, 석탄교통사료 등에 대한 정부보조금과 합치면 국가예산의 약 40%에 달하는 큰 돈이었다. 비효율적인 투자에 따른 자금압박, 차관 상환의 부담증가, 무역적자폭의 확대 등 걷잡을 수 없는 경제적 위기에다 막대한 정부보조금의 증가에 따른 재정 위기까지 겹쳐 폴란드 경제는 수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766월 사태를 임시방편으로 넘기고 70년대 후반기를 KOR를 중심으로 한 반체제파를 강압적으로 억눌러 온 기에레크 정권에게는 현 위기를 타개할 의욕도 비전도 없었다. 자신들이 10년 동안이나 추진했던 경제개발정책이 국가경제를 파탄시키고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게 했는데도 기에레크 정권은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198071일 폴란드 정부는 육류와 육류가공제품을 자유가격상점(Commercial Shop)에서만 판매하겠다고 발표했다. 자유가격상점은 77년에 만들어졌는데, 판매가격이 국영상점의 50~100% 비싼 상점이다. 결국 육류와 육류가공제품을 국가의 발표대로 자유가격상점에서만 팔 때, 일반 소비자에게는 평균 60% 가격인상효과를 준다고 추정되었다. 노동자의 육류에 대한 구매력이 차츰 늘어나는 사정에 비추어 육류와 육류가공제품의 가격인상은 커다란 반응을 일으켰다. 노동자는 격분했다. 폴란드 경제가 처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더라도 가격인상 조치를 수긍한다 할지라도 정부의 기만적인 행동을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치체제의 모순, 즉 소수의 관료들이 국가정책에 대한 의사결정권을 독점하는 데서 생긴 관료독점 지배체제의 모순에서 발생한 무모한 경제정책의 실패를 소수의 관료들의 일방적인 의사결정으로 국민에게 부담시켰을 때, 노동자는 1956, 1970, 1976년에 이어 또 다시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가격인상이 발표되고 난 뒤 가장 먼저 투쟁에 나선 것은 766월 사태 때 라돔과 함께 선두에 나섰던 바르샤바 근교의 우르수스 노동자였다. 노동자는 파업을 시작했다. 이 파업은 차츰 전국으로 퍼졌다. 포즈난의 선박엔진 공장에도 파업이 일어났다. 포즈난 선박엔진 공장 노동자는 기존 노조와는 별도의 노동위원회를 조직하고 정부 측과 직접 교섭에 들어갔다. 당황한 정부 측은 파업이 일어난 공장과 개별 교섭을 벌여 각 개별 공장 단위로 임금인상을 실시하여 사태를 풀려고 했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그런 미봉책으로 수습될 차원이 아니었다.

1956, 1970, 1976년의 투쟁에서 좌절과 탄압을 받으면서 성장한 노동자는 KOR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 작가, 학생, 일반시민, 농민들과 광범위한 연대를 가지고 독립자치노조의 결성이란 목표 달성을 위하여 단결하고 있었다. 그들은 거듭된 좌절 속에서 단련되었고 KOR가 주도한 의식화과정 속에서 전술전략을 몸에 익히고 있었다. 그들은 임금인상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폴란드 전역을 한 달 반 동안이나 휩쓸던 파업의 물결은 마침내 7012월 봉기의 주역이었던 발트 해 연안의 그단스크 시의 레닌 조선소에 밀어닥쳤다. “노동자계급이 이름뿐인 지배계급에 지나지 않는 국가에 대한 투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옮긴이: 형성자 편집부(1981)

  1. 이 글은 ?폴란드: 독립자치노조와 민주화투쟁?(형성사, 1981, 19~68쪽)에 있다. 폴란드 연대노조에 대한 글은 국내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암울했던 시기에 형성사 편집부의 노력으로 폴란드 자유화투쟁사와 연대노조운동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글이 1981년에 나왔다. 연대노조운동을 포괄적으로 분석한 외국 논문도 드물었지만(물론 영어논문을 제외한 다른 언어로 쓴 논문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래 전에 국내에서 나온 글을 발굴하는 것도 뜻 깊은 일이어서 실어보았다. 동구에서 일어난 여러 혁명에 대해서는 크리스하먼, 『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 1945~1983』, 갈무리, 1994를 참조할 것.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