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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연대노조 혁명, 1980-1981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7월호

폴란드의 연대노조 혁명, 1980-1981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5:08

폴란드의 연대노조 혁명, 1980-19811

 

M. 블룸(Jack M. Bloom) 

 

알리시아 마투스제프스카(Alicia Matuszewska): 공산주의가 권력을 쥔 이래 처음으로, 민중농민들, 노동자들, 사무원들, 인텔리겐치아들이 단결했다. “기사님또는 박사님이란 존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삽을 든 노동자가 이들 모두와 이야기를 할 때 평어체를 사용했다.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에게 가장 심대한 위협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사회를 분할 할 수 없었다.

스타니슬라프 한트즐닉(Stanislaw Handzlik): 이런 민주주의, 이런 개방성이 날마다 터져 나왔다. 재능들이 발휘되었다, 조직하고, 연설하는, 심지어 예술적 재능들이. 그리고 그런 모든 것 때문에, 엄청난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의 눈으로도 더 가치 있는 존재로 성장했다. 

 

19808, 대중 파업들이 폴란드 노동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연대노조라 부른, 그리고 파업할 권리를 갖는 독립적인 노조들 얻어내도록 했다.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위로부터의 통치에 도전하는 하나의 수단을 창출해 냄으로써 소비에트권 국가들의 틀을 깨부수었다. 그들의 성취는 소비에트 제국과 궁극적으로는 소비에트 연방 그 자체의 종말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역사의 진로를 바꾸었다. 이런 엄청난 정치적 성취는 그들로 하여금 기존의 사회적 관계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그리고 그들 스스로 개인으로서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했다.

나는 우연찮게도 폴란드에 와서 이런 변화들을 지켜보게 되었고 개입하고 있는 활동가들과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그리고 그들이 보는 대로 그들의 역사를 배움으로써 그때 일어나고 있었던 일들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동유럽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었고 거기서 어떤 연구를 하게 되리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의 관심 영역이 사회 운동이다. 그래서 내가 1986년 여름 약 5주 동안 가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인디애나 대학과 바르샤바 대학 간의 교환 프로그램에 참여하려 지원한 것이 받아들여졌을 때, 나는 연대노조와 공산주의 폴란드를 특징짓는 중대한 사회운동에 대해 배울 수 있는지 보기로 결정했다. 내가 폴란드계 미국인 여성으로 연대노조에 의해 폴란드로 가서 그것에 대한 책을 집필하기로 한 제인 도비야(Jane Dobija)와 접촉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제인은 친절하게도 그녀의 지인들을 나와 공유하였고 바르샤바와 크라코프의 두 독립적인 언론인들에게 소개장을 써 주었다. 그들 각각이 저항의 세계로 열리는 접촉들을 내게 제공해 주었다. 크라코프에서, 크르지스토프 카스프르쥑(Krzysztof Kasprzyk)은 저항의 중심이던 한 교회에 나를 데려다 주었다. 나는 우리가 이야기를 나눈 후, 그가 운영하는 지하 기독교 노동자들의 대학에서 (내가 그때 막 거기에 관해 책 한권을 완성한) 미국에서의 인권 운동에 관해 강연해 달라고 부탁했던 신부를 만났다. 나의 강연에서, 1980-1981년 사이에 공산당을 개혁하려는 운동에서 한 지도자였던 마치에크 스주모프스키(Maciek Szumowski)를 만났다. 스주모프스키는 나를 좋아하게 되었고, 한차례 인터뷰를 허락하고, 더 많은 접촉들을 만드는데 도움을 제공했다. 그 후, 폴란드에서 가장 저명한 저항적 신부들 중 하나인 그 신부가 그와 함께 그단스크로 가서 레흐 바웬사(Lech Walęsa)를 만나는데 나를 초대했다. 나는 그렇게 했고, 그리고 또한, 바르샤바의 보으키에크 아다미에키(Wojciech Adamiecki) 덕분에, 그단스크의 다른 저항자들과 접촉을 했다. 내가 떠날 무렵, 나는 폴란드 저항세력 내에서 원하는 누구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만치 좋은 인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그저 내버려두고 떠날 무엇이 아니었다.

1987년 여름, 나는 강도 높은 폴란드어 강의를 듣고 그 해 동안 공부를 계속했다. 나는 그 교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위원회로 하여금 저항세력들을 인터뷰하려는 내 프로젝트 신청안에 근거하여유례없는 무엇인데두 번째로 나를 선발하도록 납득시켰다. (폴란드에 대한 학자가 아니라는 나의 위치가 여기서는 나를 도왔는데 내 작업에 대해 정부가 부정적으로 반응하더라도 나는 잃을 것이 없었던 반면, 기성의 폴란드 학자들은 그 나라로 다시 오는 허락을 얻지 못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내가 제안했던 것을 그들로서는 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1988년 여름, 나는 되돌아와서 연대노조 지도자들, 지식인 저항세력의 지도자들, 공산당을 개혁하려는 운동의 지도자들, 그리고 교회와 연계되어 있던 일부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는데 3개월 반을 보냈다. 이런 목적으로, 나는 네 개의 도시들을 방문했는데, 그 각각이 저항세력의 주요 중심으로, 바르샤바, 크라코프, 브로클라프, 그리고 그단스크였다. 대부분 이들 인터뷰들은 폴란드어로 진행되었고 현장에서 나에게 통역되었다. 그것은 영어를 하는 소수에게도 중요했는데 나는 그들이 언어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그들 자신을 가장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1989년 가을, 새 정부가 권력을 잡았을 때 나는 연구년을 맞았고, 그래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이번 여행은 내 스스로 비용을 댔다. 나는 또 다른 3개월 반을 거기서 보냈고, 내가 이미 방문했던 도시들에 다시 들리는 것 외에, 수주를 북부 실레지아에서 보냈고, 그곳의 주요도시인 카토비체와 자스트르제비에의 석탄 탄광지역에 시간을 배분했는데, 후자는 연대노조를 설립시킨 8월 파업과 정부의 계엄령 선포에 맞서는 과정 모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북부 실레지아는 연이어진 파업들 전체에 걸쳐 심각하고 실질적인 저항을 제기한 유일한 지역이었다.

정권의 변화 때문에, 이때 나는 인디아나 대학 교환교수 직에 지원해도 된다고 느꼈고, 이는 나를 바르샤바 대학에 일 년 기한의 교환체류에 보내 줄 터였다.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는, 내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어느 한쪽 대학이든 위해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었다. 그래서 1990-1991년 학사년을 폴란드, 주로는 바르샤바에서 가르치고 연구를 하는 것으로 보냈다. 1997년 한 번 더 되돌아 갈 필요가 있다고 결정했고, 그 목적으로 인디아나 대학의 러시아 및 동유럽 연구소로부터 약소한 연구비를 따냈다. 그해 여름 거기서, 대체로 서부 도시 포즈난에서 6주를 보냈고, 그곳은 1956년 전후 최초의 봉기에서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곳으로, 주요 참여자들을 인터뷰했다. 이 마지막 여행에서, 나는 내 응답자들의 사회적 구성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진전을 이루었다. 나는 다소 시간이 지나고서 내게로 문을 열고 그의 관점에서 많은 것들을 이야기 해 준 비밀경찰의 전직 대령 한 사람과 장시간의 인터뷰를 어렵사리 해냈다. 그는 내무부의 대령 한 사람에게 나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런 다음 나는 공산당과 폴란드 정부의 마지막 지도자였던 미에치슬라프 라코프스키(Mieczysław Rakowski)에게 접근했고, 그는 나에게 수 시간의 인터뷰를 해 주었다. 그 결과로, 나는 그들의 관점 또한 반영되게 만들 수 있었다.

내가 방문한 도시마다, 나는 내가 이미 구축해놓은 인맥 덕분에 저항세력의 지도부를 만나는 것이 가능했고, 그들이 핵심 인물들에게로 나를 인도했다. 내가 자세한 검증을 거친 탓에, 그들은 아주 기꺼이 나와 이야기하려했다. 그런 다른 사람들이 나와 맞는 사람들을 골랐는데 그들이 내가 누구와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지를 나보다 훨씬 더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무작위 또는 대표적인 표본을 찾아다니지 않았는데, 그보다는 주로 지도자들과 이야기 했고, 이는 대표직이나 직위를 가졌던 사람들에만 국한되지 않고, 지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인정되는 사람들이었다. 내 의도는, 거기에 대해 응답자들에게 알려준 바대로, 늘 그들의 이름들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1998년과 1999년에 걸쳐, 나는 이들 인터뷰들을 연대노조 지도부에 있었고 미국과 캐나다에 망명 중이었던 사람들과 접촉함으로써 보완했다. 나는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뉴욕시, 시카고 그리고 토론토에 있던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여기에는 알렉산더 크리스토지악(Aleksandrer Krystosiak), 알리시야 마투제프스카(Alicja Matuszewska), 리자드 사비키(Ryszard Sawicki) 그리고 안드르제이 로즈플로코프스키(Andrzej Rozpłochowski)가 포함되었는데, 모두들 연대노조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고 폴란드 공산주의 정권이 그들을 처벌하려 들었기 때문에 망명 중이었다. 크리스토지악은 이후 폴란드로 돌아갔다.

내게 인터뷰를 허용해 주도록 설득해야만 했던 아주 소수의 경우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로, 석탄 탄광 지역인 자스트르제비에에서, 그 무렵 새롭게 힘을 획득한 연대노조에 의해 부당하게 취급당했다고 느낀 중요한 활동가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가 나와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한 참을 소비했다. 마침내 그가 누그러졌고 우리는 여섯 시간이 넘게 이야기를 했다. 또 다른 경우에는, 내가 토론토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던 사람 중 하나가 내게 퇴짜를 놓고 있었다. 시간이 거의 없다고 말하면서 내가 배울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는 그의 경험을 아주 빈약한 디테일로 단숨에 훑고 지나갔다. 나는 이십 여분이 지난 다음 그를 중지시키고 그렇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저 흥미 있는 인용거리를 찾다가 곧장 가버리는 저널리스트들이 그 전에 그를 인터뷰했음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에게 많은 디테일들과 후속 질문들이 필요하며 그가 그럴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계속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나를 쳐다보더니, 놀라면서 그리곤 다시 시작했다. 원래는 그가 단지 두 시간밖에 없다고 말했었지만, 우리는 함께 여덟 시간을 보냈다.

나는 가능할 때마다 삶의 내력을 듣는 것으로 인터뷰에 접근하기로 했고, 그것은 대개 몇 시간,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며칠이 걸렸다. 나는 내 연구의 핵심이 위대한 역사적 사건들은 사람들의 삶 속에 특정한 방식들로 반영되어 있다는 C. 라이트 밀즈(C. Wright Mills)의 통찰이라고 느꼈다. 그 특이성들은 남다른 것이지만, 역사의 큰 흐름을 개별적으로 그것들이 반영하고그리고 집합적으로 그것들이 구성한다. 밀즈는 그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동시대 역사의 사실들은 개별 남녀들의 성공과 실패에 관한 사실들이기도 하다. 한 사회가 산업화되면, 농민은 노동자가 된다. 봉건적 영주는 소멸하거나 사업가가 된다. 투자의 비율이 오르고 내림에 따라, 한 사람이 고용되거나 실업에 처한다. 전쟁이 나면, 보험 외판원이 로켓 발사대원이 된다. 상점점원은 레이더 병이 되고, 아내는 혼자 살아가며, 아이는 아버지 없이 자라난다. 한 개인의 삶과 한 사회의 역사는 양자 모두를 이해하지 않고는 어느 것도 이해될 수 없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들을 이해하는 더 나은 길은 어떻게 그것들이 사람들의 삶과 그 삶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통해 발현되는지, 그리고 거꾸로, 그 삶과 그 이해들이 사건들에 영향을 주고 형성하는지를 탐색하는 것 이상 나은 무엇이 있을까? 나의 희망은 저항자들을 알게 되고, 연대노조 운동에서 그들이 중요한 집단적 저항세력이 되면서, 그들이 쫓았던 개인적 경로들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나는 하나의 질문이 갖는 가장 폭넓은 정식화로부터 시작함으로써 이 인터뷰들에 접근했는데, 이는 그다음 어떤 의미에서는 로르샤흐 검사의 역할을 했다. 내 주체들은 그 질문에 원하는 대로 무슨 해석이든 부여 할 수 있었고 내가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 거기에 답했다. 점차로 나는 내가 찾는 바를 쫓아 내 질문들을 정련하고 특정 시켜 나갔다. 나는 그들이 역사적 사건들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배우기 위해 내 주체들의 삶을 세부에서 천착했다. 하나의 대답이 또 다른 질문을 시사했다. 발트 해 연안에서 주요한 시위들과 극심한 진압이 있었던, 그러니까, 197012월에 군대에 있었던 어떤 이는 이들 사건들에 관련하여 그가 들었던 공식 라인에 대해, 그의 동료 병사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장교들과 징집된 사람들이 그 반응에서 어떻게 달랐는지, 정부가 어떻게 그들 사이에 걸쳐 라인을 가졌는지, 어떤 방식으로 공식적 라인 외의 정보를 얻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이런 일들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를 이야기 해 줄 수 있었다. 그런 사건들에 주변적인 관계들이라도, 예를 들어 연대노조 활동가인 비니크주츠 구레키(Winicjusz Gurecki)의 진술이 보여주듯이, 뜻 깊은 정보를낳기도 했다. 

 

나는 스비노우스키의 한 레스토랑에서 일했다. 그곳은 작은 도시라, 내 고객 중에는 경찰들도 있었고, 그들 중 일부를 알았다. 1970년 그 해안에서 복무했던 한 사람에게 내가 물었다. “1970년에 어디에 있었어요?” 그러자 그가 나는 삼각 도시지역[학살들이 발생한 곳이다-필자]에 있었지라고 답했다. 그래서 내가 진실을 말해 보세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살해당했죠?”라고 말했다. 그는 술이 취했지만, 그런데도, 내가 그렇게 물었을 때, 마치 깨어나는 것처럼 나를 더 의식적으로 쳐다보았고, 그는 두 시간 동안 군중에게 기관총을 쏘아댄 다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할 수 있는지 자네가 말해보지 그래라고 말했다. 

 

나는 한 개인의 삶에서 어떤 전환들이 나에게 독특한 관점에서의 통찰 또는 정보를 줄지 전혀 몰랐다. 나는 넓은 역사의 진전과 그들 자신의 경험들 및 의식 사이에 교차점들을 더듬어 나가면서, 그들의 삶을 연대기 순으로 훑어갔다. 나는 각각의 인터뷰를 그들의 활동에 대한 오 분 여의 개괄을 주문하는 것으로 대개 시작했고, 그런 다음 그것이 나에게 질문들을 할 수 있는 넓은 틀을 제공했다.

이런 궤적을 따르면서, 나는 역사적 일반성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사람들의 삶들의 많은 디테일들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하는 유일한 길은 개별적인 삶과 경험들의 구체적인 바에 토대를 두는 것이라고 느꼈다. 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그것들을 재구성할 정도로까지 나를 회의장들, 교섭들 그리고 시위들에로 데려가 달라고 요구하는 데서 가능한 한 디테일을 얻었다. 이런 접근법의 한 유익한 결과는 사람들이 하나의 가공된, 미리 소화된 관점에 의지하는 것이 덜하고 그 대신 그들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말한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또 내 피조사자들을 무장해제 시키는 하나의 좋은 방법임이 드러났다. 예를 들어, 내가 전직 비밀경찰의 대령과 인터뷰를 시작했을 때, 우리가 어려운 질문들에 바로 접근하는 대신,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대답하는데 그가 처음 느낀 불신이 상당히 사라졌다. 그 결과, 그는 아주 개방적이 되었고 나에게 저항세력들에 반응하여 정부 측이 벌인 노력들에 대한 하나의 창을 제공해 주었다.

나는 사람들이 내 질문들에 대답하는 데 아주 조심스럽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수년 전, 어떤 경우에는 수십 년에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해 질문하는 탓에응답자가 내가 알려는 바가 그 사건이 일어나던 때의 생각인지 아니면 인터뷰의 시점에서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물어서 무슨 질문을 내가 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알맞게 거기 답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려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때때로 내가 연대노조를 좋아한다는 것을 무심코 입 밖에 내었을 때, 내가 깨달은 것은 응답자가 내가 사실을 말하고 있는지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었다.

인터뷰들을 시작했을 때 내가 예기치 못했던 한 가지는 정보제공자들이 얼마나 분명하고 심지어 유려하기까지 한지였다. 그 결과, 그것들을 거듭 읽어가면서, 그들의 말들이 빛을 보아야만 한다는 것, 그들의 말이 무엇이 일어났고 그리고 어떻게 또 왜 그것이 일어났는지를 훨씬 분명히 해주고, 나보다는 그들이 독자들을 실제 사건들에 훨씬 가까이 가게 만들어 준다는 이유에서 가능한 한 나는 그들이 말하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나는 내 인터뷰들에서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들은 어떻게 사건들이 발전했는지, 무엇이 운동에서의 핵심적 전환점들이었는지, 전략과 전술들을 둘러싼 논쟁들, 어떻게 그들이 그들의 교훈을 배웠는지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승리하도록 만들어 준 바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런 정보를 이들 인터뷰들이 없이 얻을 수도 있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 운동을 이해하는데 관건이 되었다. 내가 이들 인터뷰들을 가지고 아직 작업 중이라, 내가 아직도 그것들을 가지고 있다. 내가 일을 마치면, 그것들은 튼실한 동유럽 섹션을 가진 한 도서관에 비치될 것이다.

 

 

연대노조 봉기

 

1980814일 그단스크의 레닌 조선소에서 하나의 파업이 시작되었다. 다음 날이 되자, 그 파업은 인접한 도시 그디니아의 조선소들로 주말을 넘기면서 서부의 항구 도시 스체친으로 퍼져나갔다. 곧 십여 개, 그리고 스무 개의 다른 작업장이 그 도시들에서 파업에 합류했다. 두 주가 지난 뒤, 그때까지의 정부와의 협상들이 아무것도 내놓고 있지 못하던 때, 광부들, 철강노동자들, 그리고 다른 노동자들이 파업에 가담했고, 그들의 개입은 정부로 하여금 성의를 가지고 협상하도록 강제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바르샤바 철강 공장에서 파업을 주도했던 스베린 자포르스키(Seweryn Jaworski)1970년의 유사한 파업들 동안 경찰과 군대가 파업자들에게 발포하여, 논란되는 숫자의 노동자들을 죽였던 것을 회상했다. 

 

우리는 유혈사태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파업하기로 결정했다. (파업 이후에,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실레지아에서, 그들은 같은 감정을 느꼈다.) 군대와 경찰은 일부 공장들을 무력화하기에는 충분했지만, 나라 전체는 아니었다. 

 

1980831, 파업은 정부가 파업할 권리를 가진 자유롭고, 독립적인 노조들의 법적 존립을 수용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어진 수개월에 걸쳐, 노동자들이 작업장에서와 더 넓은 사회에서 진전을 획득하기 위하여 노조를 이용하고, “연대노조의 이름하에 함께 모여들면서 많은 파업들이 발생했다. 이런 용인은 폴란드가 이전에 그 어떤 소비에트권 국가도 쫓지 못했던 길로 들어서게 했다. 그런 힘으로, 노조는 정부의 정책들에 도전하고 국가의 문제들에 대해 그 자체의 해결책을 강제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그것은 소비에트 체제에 치명적인 도전이었다.

1980년의 나머지와 1981년의 거의 대부분 동안, 그 위력이 광대한 국가적 사회 운동의 여지를 만들어낸 노조는 다양한 쟁점들, 그 대부분은 작업장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들에 걸쳐 정부와의 지속적인 갈등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들은 교회의 특권, 교과과정에 대한 학생들의 영향력, 지배 정당에 대한 충성도 보다는 자질들에 근거한 보직에 대한 권리, 투자들에 대한 재조정, 언론 자유와 조직할 권리 등과 같은 정치적 쟁점들에 대해 발언했다. 연대노조는 빈번히 이런 갈등들에서 승리했고 사안들이 수행되는 방식에서 주요한 변화들을 강제했다. 갈등은 표면상 198112월 중순까지 계속되었고, 한밤중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당국자들은 약 만여 명의 저항세력 지도자들을 구금하였고 연대노조를 불법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연대노조 지지자들은 지하로 들어갔고, 그 연대의 말에, 연대노조 지도세력과의 새로운 협상들이 폴란드에서 공산주의 지배를 끝장내기까지 수년 동안 그들의 노력을 계속했다.

연대노조의 형성은 이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소비에트 연방이 동유럽을 지배하던 체제를 궁극적으로 위협하는 하나의 사회 혁명을 시작했다. 그 파업들을 거쳐 나온 국가는 그 이전까지 존재하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초기의 해석들은 연대노조가 지식인들의 산물이었다고 또는 가톨릭교회, 특히 폴란드 출신 교황, 존 바오로 2세의 창안이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일부 중요한 분석들이, 이와 반대로 노동자들 자신들이 이 운동을 창안하고 발전시키는데 한 핵심적 역할을 강조했다. 지식인들과 교회가 각각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나는 공산주의 정부를 이긴 것은 노동자들이며이전에는 성취하지 못한 무엇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들이 성취한 바를 자각하고 있었고, 그 지식이 그들의 자기 이미지에 영향을 미쳤다.

노동자들은 다른 많은 폴란드인들이 그들의 편에 서는 것을 보았다. 동료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농민들, 지식인들, 학생들, 그들의 가족들 그리고 공동체의 다른 많은 사람들이었다. 더욱이, 8월 파업들 이후, 그 결과에 고무된 많은 노동자들이 그들 나름의 요구를 내세웠고 또한 파업에 돌입했다. 처음부터 사람들이 독립 노조를 광범위한 영역의 쟁점들에 영향을 미치도록 이용하려 의도했다는 것이 명확했다. 노조의 영향력과 그것이 만들어내고 수호한 사회 운동은 급속히 성장했다. 사회의 다른 단위들학생들, 농민들또한 조직되기 시작했다. 이런 모든 독자적인 행위와 더불어 사회적 관계들이 폭넓은 변형을 겪게 되리라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연대노조라는 혁명은 거기 참여한 개인들과 폴란드에서의 사회적 관계들의 성격과 질을 변모시켰다. 폴란드 사회학자 이레네우츠 비알레키(Ireneusz Białecki)는 그 변화를 이렇게 요약했다. 

 

노동자의 새로운 상이 그렇게 떠올랐다, 사회적으로 헌신하고, 그 자신의 힘, 연대를 자각하며, 이타성과 희생의 능력이 있는 그런 사람의 상이다. 그런 사람들이 새로운 노동조합이 조직되는 모든 곳에서 발견될 수 있었다. 

 

19808월부터 198112월까지 노조의 합법적 존재 기간 동안, 공산당과 그 의존자들은 연대노조 측과 그것이 탄생을 도운 이차적 운동으로 권력이 새어나가는 것을 보았다. 이런 경향은 연대노조와 당 양자 내부에서의 갈등들뿐만 아니라 연대노조와 폴란드 공산당 간의 엄청난 정치적 투쟁을 수반했다. 궁극적으로 그 운동의 운명을 결정지운 이 정치적 투쟁들은 이 논문의 주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에 여전히 영향을 준, 정치적 영역을 넘어서는 다른 요소들이 있고,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혁명에서, 권력은 그것을 휘두르는 이들로부터 제도적 방식들에서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 대한 통제를 획득했을 때 빠져나간다. 아래로부터, 사람들이 이전에는 그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던 권력의 수단들을 거머쥐면서, 그것은 마치 공포의 무게에 종언을 고하는 것으로, 그리고 자유와 책임의 거대한 확장으로 느껴진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존재에 떨게 만드는데 익숙했던 그들의 이전 지배자들은 이제 같은 사람들이 그들에 대항하고 도전하는 것을 보게 된다.

기실, 연대노조 운동이 빚어낸 변화들은 개인들과, 사회적 관계들, 그리고 폴란드 국가 그 자체의 변형을 수반했다. 칼 맑스의 통찰들 가운데 하나는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의 노력의 과정에서, 사람들이 스스로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는 그들의 투쟁을 통해 사람들이 성장하고, 재능을 발전시키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의식과 자기 관념들을 변화시킨다고 보았다. 그것을 그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했다. 

 

사람들의 거대한 규모로의 변화가 필연적인데, 하나의 실천적 운동, 하나의 혁명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변화이다. 이런 혁명이 필연적인 것은, 그러므로, 그것을 전복하는 계급이 오직 혁명에서만 수세기 동안의 쓰레기를 스스로에게서 제거하고 사회를 새롭게 정초하는데 나서게 되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어떻게 이런 정치외적인 발전들이 근본적으로 개인들과 사회적, 제도적 관계들을 바꾸어 놓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의 파시스트 세력에 대항한 전투에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 가담했을 때, 오웰은 사회적 봉기의 결과로 사회적 관계들에서 심대한 변화를 발견했다. 

 

웨이터들과 상점원들이 당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동등한 사람으로 대했다. 존칭하고 심지어 의례적인 언사의 형식들이 당분간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 팁을 주는 일은 법으로 금지되었다. ……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에서 그것은 부유한 계급들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도시였다. …… 실업도 없었고, 생활 물가는 여전히 아주 낮았다. 드러나게 곤궁한 사람들을 거의 볼 수 없었고, 거지도 집시 외에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혁명과 미래에 대한 믿음, 평등과 자유의 시대에 갑자기 뛰어든 그런 느낌이 있었다. 인간 존재는 자본주의 기계의 톱니가 아니라 인간 존재로서 행동하려 노력했다. 이발소에는 …… 엄숙하게 이발사들이 더 이상 노예가 아님을 설명하는 무정부주의적 고시가 있었다. 거리에는 매춘부들에게 매춘부이기를 그만두라고 호소하는 색채 포스터들이 있었다. …… 초기의 전투들에서 [여성들]은 당연하게도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다. 혁명의 시기에는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사태이다. 

 

비슷한 변화들이 인권운동의 과정에서 미국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사이에 일어났다.

사회적 운동들은 항용 개인들을 변화시킨다. 새로운 위계가 진전되거나, 또는 낡은 위계가 다시 내세워지더라도, 사람들은 변화한 채로 남는다. 1980년 폴란드에서의 파업 승리,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연대는 사람들을 미래의 갈등들에 맞서 무장시켰던 희망의 의식과 개인적 자신감을 낳는데 일조했다. 서부 브로클라프 지역에서 연대노조 지도자였던 블라디슬라프 프라지니우크(Władysław Frasyniuk)는 이렇게 회상했다. “노동자들이 자기 공장들의 통제자가 될 수도 있으며우리를 수호해 줄 조직들에 대한 권리를 가질 수 있으리라는 원대한 의식이 있었다.” 광부 연대노조 지도자 그르제고르츠 스타프스키(Grzegorz Stawski)파업들의 사실 그 자체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가치를 느끼게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태를 바꿀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그들이 그저 조작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라고 했다. 크라코프 철강 공장의 활동가였던 미로슬라바 스트젤렉(Mirosława Strzelec)모든 노동자가 자신이 대단한 사람임을 의식했다라고 했다.



사람들은 용기를 얻었고 새로운 요구를 제기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새롭게 나서게 된 것을 공포의 장벽을 가로지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단스크의 연대노조 지도자, 보그단 보루세비츠(Bogdan Borusewicz)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이 요구하는 모든 것에 동의해야만 한다고 생각할 때 정치적 절망을 갖게 된다. 이제, 이 운동과 더불어 희망과 자기 확신이 자라났다. 사람들은 그들의 공포를 많이 버리게 되었다.” 광부 지도자 즈비그니에프 보가츠(Zbigniew Bogacz)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정부가 두려워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청년 활동가 안드르제이 자르마코프스키(Andrzej Jarmakowski)는 이렇게 회상했다. “정부나 경찰을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주요한 점이었다.”

새로운 힘에 대한 자각은 한때 공포를 불러일으키던 관료들에 맞서는 노동자들을 대담하게 만들었다. 연대노조가 법적으로 인정되는 것을 막기 위한 서툰 기도였던, 지사에 의한 긴급사태 선포로 촉발된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한 정부 대표단이 체스토코바시로 갔다. 연대노조 지도자들은 책임이 있는 관리들이 해임되지 않는다면 지역 파업을 벌일 것이라 위협했다. 조지 쌘포드(George Sanford)에 따르면, 

 

지역 버스 정류소에서의 한 회의에서, 바깥의 5천여 군중들에게 중계되는 가운데, 그 시의 관리들은 그들이 [파업할 권리를 지닌 독립노조에 대한 권리를 보장했던필자] 그단스크 합의를 진정으로 수용한 적이 없다는 공적 규탄에 직면했다. 시장은 한 돼지 농장에서의 백만 즐로티의 적자에 대해 그리고 2억 즐로티를 들인 호화로운 새 공산당 본부를 지었으면서도 수녀들이 운영하는 장애인들을 위한 센터를 개수하기를 거부했다고 비난 받았다. 부시장들은 지역 유지들을 위한 빌라들을 짓고 관리들에게 급식하는 상점들에 특혜 공급을 보장했다고 고발되었다. 25만여 인구를 가진 체스토코바는, 그들의 무관심으로, 겨우 두 개의 극장과 전적으로 부적절한 도서관 체계, 빈약한 난방의 학교들 그리고 비위생적인 병원 체계를 갖고 있었다. 

 

이들 관리들은 사임해야만 했고그들이 처음이었지만, 마지막이 아니었다.

거듭해서, 힘이 이전되어 버린 국가기구에 자신들을 각인시킬 수밖에 없었던 방식들에서 그것은 분명해졌고, 그 결과로 노동자들의 삶은 향상되었다. 체스토코바에서의 사건들 직후, 1980년 가을에, 연대노조 조합원들이 남부 폴란드의 비엘스코-비알라시에서 모든 고위 지역 관리들이 해임되어야한다고 요구하면서 지방정부 본부를 점거했다. 그들의 권력과 특권들 어느 것도 포기하기를 거부했던 바르샤바와 로츠의 강경 공산당 일등 서기들이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광부 활동가 긴터 쿠프카(Ginter Kupka)가 설명하듯이, 노동자와 관리자들 사이의 관계가 변했다. “누구도 우리를 통제하지 않았다. 석탄 광산에서 관리자들, 사장들, 감독들이 이제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우리를 두려워했다.” 역시 광부인 리자드 브르주지(Ryszard Brzuzy)는 이런 새로운 태도가 작업 조건들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설명했다. “관리자들이 사람들에게 안전과 건강 수칙들을 위반하도록 강제할 수 없었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노예처럼 대우받지 않았다. 노동계급의 힘이 이제는 관리자들보다 훨씬 컸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증대된 힘을 많은 방식으로 드러냈다. 크라코프에서 철강노동자 지도자였던 스타스젝 한트즐릭(Staszek Handzlik)은 노동자들이 중대한 변화들을 요구했다고 회고했다. 

 

연대노조는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맞서는 용기를 주었다. 그들은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 엄청난 2백억 달러의 채무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우리들은 사람들이 그들의 직책에 선출되는 방식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공산당이 모든 결정들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 근본적인 개혁들을 요구했다. 우리는 물론 우리는 일할 수 있다, 그것도 아주 효율적으로, 하지만 우리의 노동이 무능력한 관리체제에 의해 낭비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연대노조 위원회의 지도부가 철강 공장의 관리자에게 가서 이런 저런 사람의 교체를 요구하는 것으로 충분했고 거기에 대해 무언가가 행해졌다. 

 

파업들이 시작되었던 그단스크 조선소의 지도자였던 알로이지 자블레프스키(Alojzy Szablewski)와 그르제고르츠 스타프스키는 그들의 새로운 힘의 결과로 어떻게 노동자들의 삶이 개선되었는지 말했다. 

 

자블레프스키: 나는 조선소에서의 작업을 보러 가도록 요구받았다. 나는 환기시설이 없고 노동자들이 연기를 들이마시고 있는 한 방으로 갔다. 나는 감독에게 그 상황이 다음날까지 바뀌지 않으면, 그 배에 대한 작업을 중지시키겠다고 말했다. 다음날 그 배에는 많은 플라스틱 관들이 설치되었고 훌륭한 배기관들이 연기를 밖으로 뽑아내고 있었다. 거대한 작업장 들 중 하나에는, 난방이 고장 나, 기온이 아주 낮았다. 우리는 감독에게 가서 그것이 수리되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감독이 연대노조가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스타브스키: 사람들은 더 이상 나쁘게 취급당하지 않았다. 작업조건, 안전, 건강모든 것이 실질적인 노조가 일단 존재하게 되면서 개선되었다. 우리는 휴업인 토요일과 일요일을 쟁취했다. 우리는 작업을 더 잘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법을 배웠다. 

 



그 결과, 그전에는 오로지 당국자들의 소관이었던 문제들에 맞설 때 노동자들이 훨씬 대담해졌다. 사람들은 그들의 요구들을 확대했다. 그들은 특권층들을 위해 예약되는 대신 공공건물들이 공적 사용을 위해 되돌려지도록, 그리고 공적 기금들이 병원, 학교, 도서관, 여가 센터 등에 돌려지도록 요구했다. 이런 일들에 후속조치가 없으면, 파업의 물결이 뒤따랐다. 학생들은 로츠 대학교를 점거하고, “학문, 교육, 그리고 조직의 내부 생활에 관련된 쟁점들에서 대학 수준의 학교들에게 독립성을 요구했다. 한 달 후, 그들은 학교 대의기구들에 학생 참여, 독립적인 교과과정, 증대된 인문학과목 개설, 러시아어 외의 외국어를 배울 권리 등을 포함하는 합의안에 서명했다. 그들은 또한 더 많은 표현의 자유와 경찰의 학대를 줄일 것에 대한 일련의 사회적 요구들을 제기했다. 구리 광부들의 지도자였던 리자드 사비키(Ryszard Sawicki)는 연대노조 때문에 사람들이 제기하게 될 수 있다고 느꼈던 넓은 범위의 쟁점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연대노조는 사회적 병폐들에 대한 치료책이 되었다. 모두들 우리들에게 그들의 문제를 가지고 왔다. 그래서 줄을 서야만 하는 경우라면, 그들은 줄 위원회들을 만들어 낼 정도였다. 그들이 한 가게의 관리자가 무언가 잘못된 일을 한다고 느꼈을 경우, 그들은 우리에게 와서 우리가 그것을 처리하도록 기대했다. 



연대노조는 광범위한 사회적 지지를 누렸고, 그 지지자들을 보호하게 됨에 따라 그것이 연대노조에 힘을 더했다. 그것은 거의 모든 사회계층을 포괄하는 하나의 거대한 사회운동이었다. 스체친의 연대노조 지도자였던 알렉산더 크리스토지악은 이렇게 회고했다. “파업 동안 결혼식들이 있었는데, 신부들은 정문들에 그들의 결혼식 부케를 걸기위해 교회로부터 바로 오기도 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방식이었다. ‘우리가 당신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었다.” 각 계층의 사람들가정주부들과 심지어 어린이들을 포함한수백만이 연루되었고 조직되었다. 브로클라프 지역에서 연대노조를 이끌었던 자누츠 팔루비키(Janusz Pałubicki)는 심지어 자영 사업자들까지 우리들에게 와서 회원이 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라고 회고했다. 8월 파업 이후 몇 개월 만에 약 천만가량의 사람들이 노조의 회원이 되었다. 많은 다른 이들이 독립 학생 노조 같은 연계 조직들에 속했다. 후에는, 농민들이 그들 자신의 노조, 농촌 연대노조를 조직했다. 그들의 가족들까지 함께하면, 그들은 거의 국민 전체였다. 거듭해서, 그들의 새 노조가 그들을 지원했고, 이런 지원이 그들에게 새로운 위력에 대한 의식을 부여했다. 미로슬라바 스트르젤렉(Mirosława Strzelec)은 어떻게 이런 힘이 새로운 주제들을 토론으로 이끌었는지를 회고했다. “사람들은 그들이 전에는 이야기 하지 못했던 사안들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 관리자는 동부 폴란드에서 왔고, 우리에게 1939년의 소비에트 침략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사람들은 이런 주제들을 친구들, 가족들과 함께 토론했다. 그들은 카틴에서 살해된 사람들의 가족들에게 연락을 하려 시도했고, 젊은 사람들이 폴란드 역사에서의 공백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알렉산더 크리스토지악이 예시하듯이, 권력 관계가 변했다. 

 

파업 약 한달 뒤, 겁에 질린 부지방검사가 내 사무실로 왔다. 거기서 나는 원래 그의 것이었던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그는 내가 원래 앉곤 했던 책상 옆으로 탄원하는 자세로 앉았다. 그는 그들이 무언가를 훔친 노동자 하나를 붙잡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이 노동자가 구속되는 데 내가 반대할 것인지를 물었다. 무슨 이유인지, 나는 일어섰다. 그가 즉시 벌떡 일어서더니 차렷 자세를 취했다. 이것은 한 관료의 심리적 시험대였다. 며칠 전만하더라도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을 것인데, 그가 그토록 자신이 중요했고 자만에 차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그는 한 노동자인 내 앞에 서있었고그는 마치 병든 쥐 같이 보여서밟아서 그 척추를 으스러뜨릴 수 있는, 그래도 이를 드러내거나 도망조차 못가는 그런 생쥐처럼 보였다. 

 

여기서 잠시 권위를 부리는데 그토록 익숙했고 이제는 명백히 위협적인 새로운 권위에 직면한 이 관료의 사고에 대해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이것은 공포이 일화에선 사람들에게서 이전의 권력들로 옮아간 것이었나? 공포로 말미암은 원한? 분노? 무질서를 끝장내고 싶은 심층의 욕망? 이 모든 것? 분명히, 당국자들은 신뢰를 잃었다. 물론,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국가 전체에 걸쳐 많은 그런 관료들이 그들을 심각하게 불안하게 만드는 새로운 권위에 맞닥뜨리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들이 간절히 끝내기를 바라는 무섭고 두려운 경험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의 느낌이 분명히 연대노조를 향한 정부와 공산당의 정책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19812월 부총리가 되었던 미에치슬라프 라코프스키(Mieczysław Rakowski)는 이런 경향을 인정했다. 

 

당 전체에게, 1980년에 일어난 바는 예상 못한 것이었고, 그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이기에는정치적으로는 말할 것 없고심리적으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이 사람들 누구도 그런 사태 전개를 예상하지 못했다. 이것은 비극이었다. 어느 쪽도 이 새로운 상황을수용은 고사하고이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가족들의 반응이 그들의 수모를 더했다. 크리스토지악은 이렇게 회고했다. “심지어 그들의 아이들마저 그 부모들을 부끄러워했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의견들을 개진했다. 관료들의 아이들이 그 부모들의 행위들에 대한 질문과 비판들을 견뎌야만 하고, 다시 이런 쟁점들을 집으로 가져와 부모들을 비난하게 되면서, 가족 불화에 대한 많은 보고가 있다.



 이런 사례들에서, 공산당은 한층 통제력을 잃었다. 군부를 위해 일했던 민간인들의 지도자였던 알리시아 마투제프스카는 이렇게 설명했다. 

 

거의 즉각적으로, 나는 조선소들과 다른 곳으로부터 신문들을 받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언제나 쌓아놓고 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곤 했다. 누군가 내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다고, 나는 들어와요라고 말했다. 한 젊은 장교가 들어왔는데공군과 전함들로부터 온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그들이 어떻게 나에 대해 알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아주 조용하게 나에게, “마투제프스카 부인, 신문을 좀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물론이요라고 말했다. 

 

알렉산더 크리스토지악은 권력 관계들에서의 이런 변화의 충격을 지적했다. 

 

저들 가운데서, 죄의식과 공포가 생겨났다. 그들은 사람들이 거짓 고발들에 서명하고 무고한 사람들에게 나쁜 짓을 했다고 그들을 비난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가 힘을 갖게 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목에 올가미를 씌울 이유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형량을 정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서류에 서명을 했고 그들이이를 테면 총 같은증거를 심의했고 그들이 그것을 보자마자 그것이 비밀경찰에 의해 거기 놓인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서명했다. 그들은 그들이 하도록 명령받은 바를 했고 거기에 대해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들에 진저리를 쳤다. 

 

어떤 경우들에는, 연대노조 지도자들이 그들의 새로운 힘을 관료주의를 거세게 밀어붙이는데 사용했다. 광부 연대노조 지도자였던 안드르제이 로즈플로코프스키(Andrzej Rozpłochowski)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연대노조의 바로 처음부터 지역 및 중앙 관료들의 눈에 위험한 적이었는데 내가 어떤 타협에도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강도들과는 협상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그들과 이야기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어떻게 그들이 항복할 것인가 였다. 19809, 우리는 어떤 공산당 관료들과도 협상하지 않으며, 다만 정부 관료들만 상대하겠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내 이름은 악령을 쫒는 성수처럼 사용되었다. 보통 사람들이 그들의 문제를 가지고 나에게 왔다. 하지만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거래를 원하지만 나는 거기 반대였기 때문에 나와 상대하기를 원치 않았다. 

 

이런 공포들은 (폴란드의 마지막 공산주의자 총리이자 공산당의 총서기였던 미에치슬라프 라코프스키Mieczysław Rakowski나 내가 인터뷰했던 이들이 스스로에 대해 말한 것처럼 따옴표를 친) 폴란드의 친구들도 느꼈다. 스타니슬라프 카니아에 파견된 내각 대표이자, 연대노조에 대한 반응으로 들어선 개혁주의적 공산당의 서기였던 즈비그니에프 레구치(Zbigniew Regucki)는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들 주변국들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그 외 모두들에 의해 우리에게 가해진 압력은 그들이 언제든 개입할 태세가 되었다는 점에 대해 내 마음 속에 아무런 의심이 없었을 정도로 강했다.”

그래서 새로운 현 상태가사람들이 그들의 직위에서 자질이 아니라 정치적 충성심에 따라 승진되는노멘클라투라 체제와 깊고도 지속적인 갈등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그 체제나 노조 어느 하나가 승리하기까지는 해결되지 않을 터였다. 크라코프 인근의 노와 후타 철강 공장의 노조 지부가 그들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방기한 가치들을 내세우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 가장 최상의 가치들을 회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 믿는다. 진리, 정의, 정직한 노동에 대한 인정과 인간에 대한 존중 등이다.” 연대노조의 국가적 강령이 후에 그것을 반영했다. 

 

우리가 마음속에 두는 것은 빵, 버터 그리고 소시지뿐만 아니라 정의, 민주주의, 진리, 적법성, 인간적 위엄, 신념의 자유 그리고 공화국의 수복 등이기도 하다. 모든 기본적인 가치들이 너무 잘못 다루어져서 그것들의 재생 없이는 어느 것도 개선되지 않으리라 믿게 되었다. 

 

공산주의 국가에 의한 파업권을 가진 독립노조의 인정을 결과한 승리는, 전례 없는 진전으로,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고, 노동자들은 그들의 삶에서 그것이 선도하는 변화들에 환호했다. 갑자기 이전까지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사태들이 발생했다. 환희의 감정과 지금까지 변화시킬 수 없던 현실들을 다루는 광대한 새로운 가능성들에 대한 자각이 있었다. 알렉산더 크리스토지악은 어떻게 노조가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방향들을 제시하도록 고무했는지를 예시해 보였다. 

 

지역 위원회의 부의장으로서, 나는 주택 건축을 살펴보라는 의무를 지게 되었다. 주택들을 짓는 사람들건축가들, 엔지니어들, 노동자들, 십장들이 나에게로 와서 우리의 강한 노조가 관심을 가졌다는 기쁨으로 거의 소리쳐댔다. 이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 치하에서는 결코 빛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들 온갖 종류의 멋진 계획들을 나에게 쏟아놓기 시작했다. 

 

크리스토지악은 위대한 가능성들의 느낌이 발현된 하나의 중요한 사례를 회고했다. 

 

45년 동안 노조들이 있었다. 일단 고용되면, 그들이 처음 하는 일은 당신을 노조에 가입시키고 월급에서 회비를 가져가는 것이었다. 그 돈의 50퍼센트는 사라져 버렸다. 그것이 어디로 가는지 누구도 몰랐다. 그런데, 짧은 시간 동안, 내 지역 위원회에만, 우리의 계좌에 85백만 즐로티가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위한 주택들을 짓기 시작할 참이었다. 내가 이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넘어온 문제들의 깊이와 폭을 알게 하려는 이유에서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의 어깨에 짊어지고, 가지고갈 준비가 되어있었으며, 우리는 아주 잘 다룰 능력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의 공동체로, 일반의 복지를 위해 함께 일한다는 벅찬 의식을 발전시켰다. 그단스크의 연대노조 활동가였던 슬라포미르 마제프스키(Sławomir Majewski)는 하나의 예를 제시했다. 

 

연대노조가 모든 곳에서 만든 변화들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가족이었다. 나는 국가 위원회의 한 회합에 갔었다. 스체친으로가는 열차에서, 우리는 아침에 아주 일찍 도착할게요. 내 집으로 오시오라고 말하는 한 여성을 만났다. 그리고는 그녀는 일하러 떠났고 우리들은 그녀의 아파트에 머물면서 스스로 차를 만들어먹고 집처럼 편안하게 느꼈다. 물론 우리가 떠날 때 그 아파트는 완전히 깨끗했다. 누군가가 연대노조에 속하는 것을 알게 되면 즉각적인 공감을 느꼈다. 8월 연대노조의 메아리는 198112[계엄령이 선포되던 때필자]에도 도움이 되었다. 나는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집들에 다섯 달 동안 숨어있었다. 

 

8월 파업 이전에는,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대중교통에서, 상점에서, 직장에서 자주 다른 사람을 불편해 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서로를 알게 되고 공유된 관심사로 함께 일하게 된 자연스러운 결과는 공동체 의식이었다. 연대노조의 결과로, 낯선 사람들이었던 사람들이 함께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브로클라프는 황량한 서부로 불렸었다. 2차 대전 이후, 중부 유럽에서 국경들이 변하면서, 소비에트 연방이 전쟁의 초기에 점령했던 폴란드 동부를 삼켜버렸고, 폴란드의 국경은 서쪽으로 옮아가게 되었다. 폴란드로 돌아온 많은 동부 사람들이 강제로 새로운,” 그때까지 정착되지 않았던 서부로 (독일계 거주자들 또한 독일로 돌아가도록 그들의 집들을 강제로 떠나게 되면서) 옮겨가게 되었다. 폴란드는 브로클라프가 된 브레슬라우라는 독일계 도시를 차지하게 되었고, 동부에서 온 폴란드의 거주자들이 이제 서부로 이주했다. 하지만 연대노조 이전까지는 그들이 하나의 공동체인적이 없었다. 비슷한 과정이 (이전에 단치히였던) 그단스크, (시테틴이었던) 스체친 그리고 실레지아에서 발견되었으며, 모두들 대규모의 이주의 수용지였다. 그르제고르츠 스타프스키는 이렇게 설명했다. “[북부 실레지아의] 자스트르제비에 지역은 폴란드 전역에서 온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들 간에 자연적인 알력이 있었다. 하지만 파업들을 거치면서, 그들은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그런 태도가 퍼져나가 실레지아 나머지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미로슬라바 스트르젤렉은 회상하기를, 크라코프에서, “연대노조의 활동들과 회합들을 통해서, 사람들이 서로를 알게 되었고 서로를 더 잘 대하게 되었다.”

이런 경향은 파업 동안 시작되었고,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마렉 무스진스키(Marek Muszynski)는 이렇게 말했다. “자동차들이 버스나 전차 정류장에서 멈춰 서고는 운전자들이 여기 또는 저기를 간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태워다 주겠다고 제의했다. 물론, 그들은 아무런 돈도 받지 않았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했다. 그것은 아주 보기 좋은 것이었다.” 블라디슬라프 프라지니우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친절해졌고 덜 공격적이 되었다. 예를 들어, 버스가 제때 오지 않아도, 버스 운전자가 험한 말을 듣지 않았다.” 알리시아 마투스제프스카의 이야기는 이런 변화를 감동적으로 예시한다. 

 

나는 연대노조를 위해서 저녁에 일을 했는데 낮에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합들이 내 아파트에서 자정 또는 새벽 한시까지 열리곤 했었다. 내가 배급 식품을 사기 위해 줄을 설 시간이 없어서 냉장고가 텅 비었을 때를 기억한다. 내 집에 열여덟 명이 있었고 우리는 모두 정말 배가 고팠다. 내게는 빵 한 덩이와 약간의 기름이 있었는데, 검고 더러운 정말 형편없는 것이었다. 노동자들 중 한 사람이 부엌으로 가더니, 빵을 잘라서 그 더러운 기름에 튀겼다. 우리는 모두 거기 소금을 뿌려 먹었다. 누구든 연대노조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해 어떤 의문이라도 든다면, 그것은 바로 이 빵 한 덩이를 함께 먹는 것이었다!

나는 내일 내 딸이 바르샤바에서 집으로 와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거기 학생이었다.) “집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아무런 음식도. 빵 마저그들 중 하나가 내가 일을 하러가는 동안 계속 작업을 한다고 했다. 나는 직장에서 오후 330분쯤 돌아왔고 그들은 그들이 써놓은 것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아직도 손을 보아야 했고, 그래서 우리는 쓰기 시작했다. 갑자기 830분이 되었다. 나는 미안합니다. 빵을 사러 뛰어가야만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이 이 시간에는 빵이 없을 거요. 내일 아침에 가시오.”라고 말했다. 그들이 떠났다.

나는 냉장고가 비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웃에게 가서 빵 반 덩이와 계란 둘을 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응했다. 집으로 와서 냉장고를 열었는데마치 롯의 아내처럼, 나는 소금 기둥으로 변해 버렸다.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폴란드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까지. , 살라미, 정어리, 버터 등등. 노동자들의 부인들 둘이, 나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 모든 것을 나를 위해 가져온 것이었다. 그들은 자 딸이 오면, 그녀가 딸을 보살필 수 있겠지라고 말했다. 내 딸은 아침 6시경에 왔다. 그녀는 냉장고를 열어 보더니, “배고파 죽겠는데, 여기 다 있네요.”라고 말했다. 

 

알렉산더 크리스토지악도 어떻게 연대노조가 사람들이 서로에게 행동하는지를 변화시켰는지 말했다. 

 

그전에, 사람들은 그저 서로에게 으르렁거리고 짖어댔다. 전차에서 누군가의 발을 밟을라치면 거의 그 사람에게 잡아먹힐 지경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로를 인간 존재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줄에서 또 전차에서 실례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내 견해로는, 이것이 사회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변화였다.

 

 

광부 연대노조 활동가였던 피요트르 폴만스키(Piotr Polmański)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 기간 동안, 이번에는 우리 광산에서 단 한건도 치명적인 사고가 없었다. 모두들 더 책임 있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의 가족, 한 팀이라는 느낌을 가졌다. 우리가 정말 모든 것을 보살폈다.” “모든 것을 보살핀다는 것은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이다. 그 충동이 강력하고 의미시심장한 울림을 가진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알로이지 스자블레프스키(Alojzy Szablewski)는 노조가 어떻게 공급이 모자라는 물건들이 공평하게 분배되도록 살폈는지를 회고했다.

 

조선소에서 책, 담배, 음식 등을 팔던 사람들이 연대노조에게 이런 물건들이 공정하게 분배되어, 한 사람이 여러 갑의 담배를 갖고 다른 누구는 아무 것도 갖지 못하게 되지 않도록 감독하라고 요청을 해왔다. 연대노조는 모두에게 카드 하나를 주었고, 그 카드를 상점에 가지고 가 동일한 양을 얻도록 해서, 모두들 식품을 가지도록 했고, 사람들은 그것이 정당하다고 알았다. 생선 공장은 그들이 생선 통조림들을 갖고 있다고 알려오기도 했다. 조선소 노동자들이 그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다. 

 

그들이 이제 상당한 통제력을 가졌다고 느끼면서, 노동자들은 더욱 책임 있게 행동했다. 브라디슬라프 프라지니우크는 이렇게 전했다. 

 

처음으로,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작업장에서 주인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내 작업장에서는 관리자들이 그렇게 많은 자기 통제가 있었던 때를 기억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작업장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완전히 금지되어, 사라졌다. 위로부터의 통제가 증대해서가 아니었다. 동료 노동자들의 압력이었다. 

 

실제로, 직장 안팎에서 자주 중대한 문젯거리였던 알코올 섭취가 이제는 노동자들 자신들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고, 작업장에서는 사실상 사라졌다. 한 익명의 노동자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디니아의 파리 코뮌 조선소]에서 파업 동안 조선소에서의 알코올 섭취가 금지되었다. 파업 시작 무렵에, 한 십장이 만취 때문에 축출되었다. 축출되기 이전에 그는 카트에 태워져 조선소를 한 바퀴 퍼레이드를 벌였다. 그것은 일종의 상징적인 조리돌림이었다. 알렉산더 크리스토지악은 유사한 경향을 목도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사회는 그 자체를 도덕적으로 다시 건설했다. 내 공장에서는, 그것이 하등의 예외가 아닌데, 알코올을 파는 곳이 네 군데 있었다. 감독, 관리자들, 십장들이 그것들을 없애버리기 위해 정말 무엇이든 했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 사람들이 그들을 숨기는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노조에서는, 누구도 이런 곳들을 찾으려들지 않았다. 왜 아니었는가? 노동자가 보드카를 얻으려 할 때, 십장이나 관리자를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노동자들이 그를 보지 않도록 확실히 하려 했고 이는 그렇게 하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판매소들을 그저 사라졌다, 공룡처럼. 정말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의 마음의 질에 일어난 변화였다. 

 

얀 쿠빅(Jan Kubik)은 파업들을 훨씬 넘기면서까지 지속된 이런 새로운 태도의 증거를 발견했다고 전했다. 그가 회고하기를 198012월이었다. 

 

카토비체에서 그단스크로 [시위들 도중 군대와 경찰에 의해 살해된 노동자들에게 바쳐진] 197012월 기념비 제막을 위해 가는 길에, 나는 열차의 식당 칸에서 술 취한 사람들이 없다는 점에 놀랐다. 폴란드에서 장거리 열차들의 식당 칸은 대개 술 마시는 사람들이 찾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 한사람의 술 취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엄숙하고 진지했다. …… 연대노조가 축하 기간 동안 그단스크 인근에서 알코올 판매를 금지했었지만 사람들이 그것이 가능한 곳에서도 술 마시기를 자제했다. 

 

이런 도덕적 재건의 움직임은 사람들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협력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태도를 발양시켰다. 점진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들의 사회에 영향을 미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아래의 사례들이 예시하는 것처럼, 그들이 전에는 결코 제기하지 못했던 분야에 파고들고 결코 상상하지 못했던 기술들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미로슬라바 스트르젤렉은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들이 극장들, 카바레들을 조직했다. 그들은 논문들, 시들을 썼고대중 앞에서 그것들을 낭독했다.” 노동자들은 연설하는 법을 배워 나갔다. 

 

알렉산더 크리스토지악: 이전에는 두 문장도 정확하게 만드는 법을 몰랐던 사람들이 이제는 수천의 사람들 앞에서 조리 있게 그리고 창의적으로 말했다. 나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여러 차례, 우리 조선소와 바르스키 조선소에서 온 사람들이 스체친의 대학들에서 연설했을 때, 그들은 우리가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그르제고르츠 스타프스키: 전체 운동에 있어서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은 공중에게 행한 첫 번째 연설이었다. 그것은 공포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 나는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알았다. 문제는 바로 그 순간에 내가 말하려 원하는 바를 말할 수 있는지, 내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지 여부였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했을 때, 나는 좀 더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헬레나 루치포(Helena Łuczywo)는 사람들이 이전에는 무시해왔던 쟁점들에 어떻게 관심하게 되었는지 회고했다. 

 

갑자기,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상황을 진정으로 바꿀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느꼈고, 많은 사람들이 행동비단 정치적인 또는 노조의 행위뿐만 아니라, 교육체계, 문화적 체계, 경제적 체계에 대한 행동을 조직했다. 연대노조 이전에는 전적으로 무관심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교육과 의료 서비스 등을 어떻게 개선시킬 것인가에 대해 매우 활동적이 되었다. 우리 경제, 우리 산업, 영화제작, 문학 등을 개선하려는 거대한 운동이 일었다. 일부는 초등과 중등학교들에서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을 조직했다. 많은 활동가들이 어떻게 수감자들의 상황을 개선시키는지 보러 갔다. 

 

슬라포미르 마제프스키는 새롭게 개입하게 된 사람들 중 하나였다. 

 

연대노조 이전에는, 사람들이 자기 공장의 수입, 그 조직적 구조, 경제적 문제들을 알지 못했다. 정부 관료들만이 이들 공장들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제는 보통사람들이 관여하게 되었다. 나는 그 수입 원천, 어떻게 예산을 조직하는지, 개별적 임금 등 내 대학의 경제적 문제들을 연구했다. 나는 그 대학을 위한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특별 그룹의 멤버였다. 우리는 중등학교에서 어떻게 교과과정을 변화시킬지, 어떻게 생태에 관해 교육할지를 검토했다. 

 

폴란드인들은 이제 모든 영역, 특히 연대노조 내부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대단히 옹호적이게 되었다. 거기서 민주주의적 형식들을 견지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더 넓은 사회에서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반체제 지식인 마렉 무스진스키(Marek Muszynski)는 이렇게 설명했다. 

 

일종의 민주주의에 대한 유아적 병폐가 있었다. 모든 회합, 모든 모임, 모든 시위는 사람들이 엄격하게 민주적 규율에 맞게 하려고 원했기 때문에 수 시간씩 계속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주적인 사회에서 살아본 기회가 없었다. 이제는, 활동가들이 그들의 관념들에 생명을 부여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공통된 요소는 우리가, 함께, 우리들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다는 그런 신념이었다. 


사람들은 회합에서만이 아니라 일생 생활에서 민주주의를 실행했다. 그들이 이제는 그들 나라의 삶에 발언권을 갖게 되었고 그들의 상황과 대안들에 대해 토론했다. 이제 그들의 의견들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과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프라지니우크: 몇 가지 논란되는 쟁점들이 있었다. 연대노조가 대중매체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요구해야만 하는가, 또는 우선 경제를 먼저 개혁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어디에서건 토론했다. 줄들에서, 상점들에서, 파티에서, 버스에서. 연대노조의 지역 위원회는 아침 7시에 일을 시작해서, 10시 또는 11시에 끝을 냈는데, 대개는 사람들이 그들의 문제 또는 관점을 제시하고 그것을 토론하러 우리에게 왔기 때문이며,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우리는 들었다. 

 

사람들의 관심사의 범위가 넓어졌다. 그들은 교육을 원했다. 새롭게 힘을 얻은 사람들은 그들의 무관심을 벗어버렸다. 지평들이 떠오르면서, 그들은 그전에는 그저 학문적인 관심사처럼 보였던 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제는 지식이 그들로 하여금 효과적으로 행동하도록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사회 운동들이 빈번하게역사, 정치, 그리고 경제 등과거에는 멀고 건조하게만 보였던 문제들을 배우고자 하는 대중적 요구를 불러일으켰다. 요구에 대한 반응이자 스스로를 교육하려는 노동자 측에서의 욕구를 자극하려는 희망에서, 연대노조는 그 회원들을 위한 도서관들을 조직하였고 사람들이 강의를 하고 기술을 가르치는 노동자 대학들을 설립했다. 브로클라프에서 그곳 정보국의 장을 맡았던 얀 바츠키에비츠(Jan Waszkiewicz)는 이렇게 회상했다. 

 

연대노조는 그저 하나의 노동조합이 아니었다. 그냥 보통 노조문제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들은 정치적, 역사적, 제헌적 쟁점들모든 것에 관심을 가졌다. 일주일에 두 번 또는 세 번 강연들이 있었다. 누구든 올 수 있었고, 사람들이 왔다. 브로클라프에서 강연들은 교육 센터와 공장 모두에서 열렸다. 대개는, 저녁에 긴 토론이 함께하는 하나의 강의가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느냐는 누가 강연자인가에 달렸다. 잘 알려진 이름을 가진 유명인이면, 수백 명의 사람들이 왔다. 브로클라프에서는, 이것을 위한 아주 좋은 강당이 있었고, 우리는 모든 공공 라운지를 연대노조를 위해 개방했다. 공장과 많은 장소들에서 강연들, 토론 클럽들, 그리고 연대노조 그룹들이 있었다. 

 

역시 브로클라프 출신인 블라디슬라프 프라지니우크는 이렇게 설명했다. 

 

지식에의 요구는 하도 자발적이어서 연대노조 지역위원회가 뒤에 따라갈 지경이었다. 예를 들어, 도르멜사의 노동자들은 우리가 노조의 시 전역 노동자들의 대학의 회합들을 열던 붉은 광장의 건물이 너무 붐볐기 때문에 공장부지 내에 그들만의 노조 대학 지부를 만들 것을 주장했다. 학자들, 특히 역사가들은 언제나 강연을 해달라고 요청받았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위한 자유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지역 모든 곳에 갔고 이웃 지역들에까지 갔다. 그들은 주로 역사에 대해 강연했다, 다음이 경제학과 법학이었다. 노조에 대한 지식에의 요구가 하도 대단해서 우리 잡지의 고정난이 세계 노동조합들의 역사와 기능에 대해 할애되었다. 

 

브로클라프의 사례는 다른 센터들에로 퍼져 나갔다. 출판물들이, 보그단 보루세비츠가 표현하듯이, 지하에서 넘쳐났고, “진짜로 더 이상 지하가 아니었다. 그단스크에는 노동자 대학이 없었다, 하지만 공장들에서, 국가 위원회에서, 교회에서 흥미로운 사람들과 강연들이 있었다.” 크라코프에서는, 스타니슬라프 한트즐릭이 이렇게 회고했다. “교육에 대한 갈망은 그저 엄청났다. 정규 신문들 외에, 우리는 또한 여러 주제들에 대한 브로슈어를 출판했다. 우리는 반체제측 사람들의 전망을 알아보기 위해 지식인들과의 모임들을 조직했다.” 안드르제이 로즈플로코프스키는 북부 실레지아에서의 유사한 운동에 대해 말했다. 

 

북부 실레지아는 개명한 지식인들이 아주 적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독립적인 출판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우리는 지역에 아주 풍부한 장서 컬렉션을 가진 도서관을 만들었고, 지역 전체에 걸쳐 백여 개가 넘는 공장들에 작은 도서관들을 조직해 내었다. 그런 도서관들의 장서들은 순회로 옮겨갔고 다른 공장들에서도 손에서 손으로 대출되었다. 1981년 중반이 되자, 우리는 공장들과 문화 회관들에서 정기 강연들을 갖게 되었고, 강연과 학습반들의 독립적 네트워크가 교회를 통해 전개되었다. 오는 사람들의 숫자는 엄청났다.

    

구리 광산들에서, 리자드 사비키가 지적했듯이, 그들은 같은 관심사들을 가졌다. 

 

우리는 독립적인 언론들과 서적 출판사들을 찾았고 노동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한 광산으로 많이 가져왔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읽느냐는 문제가 안 된다고 보았다. 조금이라도 그들이 이해한다면, 그리고 어떤 지점에서 정부가 그들을 겁먹게 만들지라도, 이후에 그들이 읽고 배운바가 어떻게든 관심에로 이끄는 하나의 투자 같은 것이 될 터이다.

    

사비키는 옳았다. 많은 이런 변화들이 계엄령 기간으로 이월되어 간 영구적인 효과들을 지녔다. 그 결과로, 수천의 활동가들의 체포와 노조의 모든 조직적 잔여들에 대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연대노조 봉기 이전에 가졌던 개별 행동과 사상의 표현에 대한 통제를 결코 다시 강제하지 못했다. 연대노조 운동의 교육과 경험들이 저항의 정신을 창출했다. 일부는 대량 구금을 가까스로 피해서 신문들, 그리고 이후에는 잡지와 책들, 라디오 심지어는 텔레비전 방송들까지 만들어낸 지하 반체제세력을 구축했다. 그들은 연대노조 조직들을 그들의 작업장들에서 다시 만들어냈고, 버스나 전차 삯을 내기를 거부했으며, 시위와 파업들을 연출했다. 궁극적으로, 이런 저항은 당국자들에게 정부가 반체제측과 타협을 하지 않으면 평화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고, 공산당의 지배를 종식시킨 협상이 시작되었다.

말고르자타 고르체프스카(Małgorzata Gorczewska), 일례로, 1980년에 열다섯이었다. 그녀는 교육에서의 노력들에 아주 많이 영향을 받았다. “나는 약 일 년 동안 폴란드 역사에서의 공백들에 대한 대학에서의 강의들에 참석했고, 이전에 내가 몰랐던 사안들에 대해 배웠다. 이런 모임들에서 일단의 젊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로부터 나는 신문들과 책들을 얻었다.” 나중에, 계엄령 선포 이후, 고르체프스카는 활동가가 되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신문을 출판했다. 아마, 만약 19808월과 이후 사안들이 공개적으로 토론되던 시기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여기 없었을 것이다.”

혁명은 그저 정치적인 사건만이 아니라, 여러 경로로 사회적 관계들의 성격을 바꾸는, 그리고 거기 참여한 사람들의 변모시키는 중요한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변화들을 창출한다. 노동자들은 힘을 갖게 되었고 자신들이 한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느꼈으며 그리고 그에 따라 더 자유로워지고 그들의 삶과 국가에 영향을 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변화들이 배면에 자리 잡게 되고 계속되는 정치적 발전들을 가능하게 만들지만, 그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을 이전에는 몰랐던 대양으로 이끌어가게 만들면서 그 자체로 중요하다.

 

 

총괄: 구전 역사와 사회 운동

 

나는 미국에서의 인권운동과 폴란드의 연대노조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회 운동 가운데 둘을 살펴보고 개입하게 된 행운을 누렸다. 그들 각각은 그들이 일부인 정치적, 사회적 체제에 심대한 변화를 불가피하게 했다. 각각은 그 활동가들과 지도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능력을 신장시키고 성장하도록 요구하고 허용했다. 때로 이것들은 개입된 개인들의 내부와 그들의 공동체 내부에서 깊은 혼란을 일으키는 고된 과제들이었다. 나는 인권운동에 관한 내 연구로부터 그리고 육십 년대의 사회 운동들에 참여했던 내 자신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이런 변화들의 중요성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런 변화들에 다가가는 데는 하나 이상의 길이 있다. 인권운동에 관한 내 연구에서 나는 인터뷰들, 회고록들, 자서전들, 그리고 전기들 같은 글로 쓰인 자료들을 자주 이용할 수 있었다. 연대노조와 관련해서는 그것이 사실상 선택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는데, 폴란드에서 그런 출판된 자료가 아주 많지 않았으며 접근 가능한 것이라도 내 폴란드어로는 조사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폴란드에서의 내 연구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를 숙고하면서, 나는 그런 인터뷰들을 모으는 것이 나에게 기회를 열어 주기도 할 것이며 또한 다른 연구자들에게 쓸모가 있는 일단의 연구 자료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결정했다.

이들 운동 각각에 대한 나의 작업이 다른 것을 이해하는데 도왔다. 예를 들어, 폴란드로의 첫 여행 동안, 나는 크라코프에서 지하 기독교 노동자대학을 운영하고 있는 신부에게 소개되었는데, 아주 정치적이고 지역 활동가들에 의한 반체제 논급들과 진술들로 가득 찬 지역사회의 미사에 참석하고 난 뒤, 그 경험이 인권운동에서 일어났던 바를 상기시키며 그것 때문에 감동받았다고 그에게 이야기 했다. 그 언급이 그로 하여금 나를 인권운동에 관해 그의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도록 초청하는 것으로 이끌었다.

비슷하게, 폴란드를 여행하고 사람들의 집들에서 수백여 시간을 보냈으며, 그들과 반체제 운동에서의 경험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난 뒤, 나는 내가 학습 곡선이 아주 높은 어느 강도 높은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졌다. 내가 이런 경험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는 그것을 내 학생들에게 가지고 갈 방법이 있지 않을까 궁리했다. 물론 나는 그들을 폴란드에 데려 올 수도 없고, 그들이 번역되는 인터뷰의 때로는 지루한 수많은 시간들 내내 앉아 있으리라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인권운동 시기의 활동가들을 내 수업에 데려와 그들의 삶에 대해 인터뷰하는 과목을 고안했다. 그들은 내 학생들에게 운동 이전에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왜 그들이 연루되었는지, 어떤 선택들을 그들이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런 선택들이 어떻게 역사에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 보여줄 수 있었다. 이 과목을 가르칠 때마다, 학생들은 열성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인터뷰한 사람들

 

(괄호 안에는 언제 어디서 인터뷰가 수행되었는지를 기록한다.)

 

즈비그니에프 보가츠 (쌔크라멘토, 캘리포니아, 1993)

연대노조 전국 광부 위원회 회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2주간 계속된 지하 석탄광부 파업의 지도자

 

보그단 보루세비츠 (그단스크, 1988)

오랜 반체체 운동가; 1980년 그단스크에서 파업을 조직한 사람들 중 하나; 연대노조 지도자 중 한 사람;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지하 연대노조 지도자 중 한 사람

 

리자드 브르주지 (바르샤바, 1989)

갈탄 광산의 광부; 1989년 의회의 연대노조 대표자가 됨

 

블라디스라프 프라지니우크 (브로클라프, 1988)

브로클라프의 지역 연대노조 지도자이며 연대노조 전국 위원회의 일원

 

비니크주츠 구레키 (토론토, 1994)

전국 관광 노동자 위원회에서 일함

 

스타니슬라프 한트즐릭 (크라코프, 1988)

나와 후타의 크라코프 인근 및 크라코프 지역의 레닌 철강 공장 연대노조 지도자

 

안드르제이 자르마코프스키 (시카고, 1991)

청년 폴란드 운동의 활동가로 연대노조와 밀접하게 일함

 

세베린 자포르스키 (바르사뱌, 1988)

1980년 바르샤바 철강 공장 파업의 지도자이자 바르샤바 지역 연대노조 부의장

 

크르지스토프 카스프르직 (불더, 콜로라도, 1988)

1980-1981년 크라코프의 폴란드 언론인 노조의 지도자이자 공산당 개혁 운동의 활동가

 

알렉산더 크리스토지악 (뉴욕, 1994)

1970년 스체친 지역 파업들의 하부 지도자; 1980년 스체친 지역 조선소 파업들의 조직자들 중 하나이자 스체친 연대노조의 부의장

 

긴터 구프카 (글리비체, 폴란드, 1989)

연대노조 석탄 광부 지도자

 

헬레나 루크지포 (바르샤바, 1991)

오랜 반체제 운동가; 연대노조 이전에 지하 반체제 신문을 편집함; 합법 연대노조 기간 동안 주요 연대노조 신문들 하나의 편집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주요 연대노조 신문의 편집자; 계엄령 동안 바르샤바 지역에서 수많은 연대노조 지도자들을 위한 안전가옥을 조직함

 

마렉 무스진스키 (그단스크, 1988)

1968년 학생 봉기의 크라코프 활동가; 반체제 지식인 그룹 KOR과 함께 일함; 연대노조에서 활동

 

야누츠 팔루비키 (브로클라프, 1997)

브로클라프 지역 연대노조 대표

 

피요트르 폴만스키 (피에카리, 북부 실레지아, 1989)

지역 광부 연대노조 지도자

 

미에치슬라프 라코프스키 (바르샤바, 1997)

공산당의 오랜 지도자; 1981년과 이후 부총리; 나중에 총리가 됨; 공산당의 마지막 총서기

 

즈비그니에프 레구치 (크라코프, 1988, 1989)

연대노조를 성립시킨 파업들의 결과로 공산당의 개혁주의적 총서기, 스타니슬라프 카니아의 최고 보좌역으로 일함

 

안드르제이 로즈플로코프스키 (쌔크라멘토, 캘리포니아, 1998)

카토비체 철강공장과 카토비체 지역의 연대노조 지도자; 연대노조 전국 위원회의 일원

 

리자드 사비키 (토론토, 캐나다, 1998)

연대노조의 동 광부 지도자; 연대노조 전국 위원회의 일원

 

그레고르츠 스타프스키 (조리, 실레지아, 1989)

야스트르제비에 석탄광 지역의 석탄 광부들 가운데의 연대노조 지도자

 

미로슬라바 스트르젤렉 (카토비체, 1989)

카토비체 철강 공장의 연대노조 지도자; 계엄령 선포에 맞선 파업의 지도자들 중 하나; 수년간 연대노조 지하활동에 참여함

 

알로이지 스자블레프스키 (그단스크, 1988)

그단스크 조선소의 연대노조 지도자

 

얀 바스즈키에비츠 (브로클라프, 1988)

오랜 반체제 인사; 브로클라프 연대노조 지도자; 연대노조의 공식 대변인으로 일함

 

 

 

 

옮긴이: 손지태

  1. 이 글의 출처는 The Oral History Review, Vol. 33, Issue 1(2006), pp. 33–64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