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그단스크에서부터 나오는 길 : 솔리다르노스치(폴란드 연대노조)가 어떻게 시장에 둥지를 틀었을까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7월호

그단스크에서부터 나오는 길 : 솔리다르노스치(폴란드 연대노조)가 어떻게 시장에 둥지를 틀었을까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5:09

그단스크에서부터 나오는 길 : 솔리다르노스치(폴란드 연대노조)가 어떻게 시장에 둥지를 틀었을까1

 

Gary Fields2



역사학의 목적이 과거와 현재를 연관 짓는 것이라고 한다면, 폴란드에서 최근에 마무리된 대통령 선거 대하극은 이러한 역사학의 상상력에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폴란드에서 45년 만에 처음으로 경선으로 치러진 선거라는 화제의 보도 뒤에는, 현재 상황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밝혀내려는 이들이 지금부터 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 이야기의 큰 윤곽은 잘 알려져 있다. 최근 역사에서 중요한 두 가지 사건들 1980년과 1990은 한 인물 속에 통합되어 있다. 즉 그는 레닌 조선소에서 선체의 내벽을 오르는 전기공으로서 드라마틱한 노동자 봉기를 이끌었던 노동자이자, 이제 막 즉위식을 치르고 대통령직을 맡게 된 정치인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건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적 공간은 여전히 신비에 싸여 있다. 1980년에 노동자 투사였던 이가, 어떻게 1990년에 대통령의 자리에, 그것도 마치 보안관처럼폴란드를 지배할 열정으로 가득 차 있고, 하루아침에 폴란드를 지배하는 최고법이 되어버린 시장 원리를 집행하는 대통령이 되었단 말인가?

 

19819, 솔리다르노스치의 1차 전국위원회가 열렸을 때, 노동자 방어위원회(KOR) 소속의 리핀스키(Edward Lipinski)가 폴란드에서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세력은 솔리다르노스치가 아니라 폴란드 정부라고 주장했다. 그의 발언은 대의원들과 참관인들을 전율시켰다. 우레와도 같은 박수를 받으며 리핀스키는 자신은 평생 사회주의자로 남을 것이라며 확신에 찬 말투로 이렇게 얘기했다. 폴란드에 있는 의미 있는 세력 가운데 생산수단을 다시 사유화하는 것을 꿈꾸는 세력은 없다.” 리핀스키의 말에 담긴 감성은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폴란드 경제위기에 대처하려고 자유기업체제로 돌아가는 길과는 정반대로, 솔리다르노스치의 경제 개혁 강령은 노동자가 스스로를 조직하여 경제를 직접 운영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 것이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15명의 공산당 정치국이 아니다. 우리는 자주관리위원회 활동으로 단련된 경제 권력을 바란다.” 이 말은 솔리다르노스치 강령을 설계한 이 가운데 한 사람인 밀레프스키(Jerzy Milewski)가 설명한 노동조합의 견해였다. 밀레프스키는 강령이 갖고 있는 정치적 내용을 정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노동조합이 달성하려고 하는 것은 뼛속까지 사회주의적인 것이다.”

이러한 진술은, 1980년 솔리다르노스치가 태어난 이래 점진적으로 발전해온 소유와 경제개혁 문제에 대한 광범한 합의를 담아낸 것이다. 솔리다르노스치 지도자들인 미치니크(Adam Michnik), 게레멕(Bronislaw Geremek), 그리고 심지어 바웬사(Lech Walesa)까지도, 국가의 부를 사적 소유로 되돌려놓는 길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었다. 바웬사는 나는 노동자이며, 노동자는 자본주의 편에 서본 적이 없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만약 우리가 노동자를 자신의 노동에 대한 주인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면 …… 사회주의는 모든 측면에서 자본주의보다 나은 체제가 될 것이다.” 바웬사의 주요 조언자 가운데 한명인 게레멕은 더 거리낌 없이 말한다. 노동조합이 소유의 문제를 놓고 노동자와 함께 얼마나 폭넓게 의논했는지를 강조하면서, 게레멕은 공적 소유에 대한 논쟁이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단언했다. 서구 체제로 되돌아가는 것은 문명의 후퇴가 될 것이며 …… (폴란드) 현 체제는 사회주의적이어서가 아니라 충분히 사회주의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솔리다르노스치의) 도전받고 있다.

19899, 솔리다르노스치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처지에 있음을 알았다. 대중의 지지를 받는 반대파에서부터 비합법 지하조직으로, 그리고 정치권력의 계승자로 역사적 전환을 한 탓에, 솔리다르노스치는 1차 전국위원회에서 채택된 강령을 실현시킬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권력을 잡고 난 뒤, 솔리다르노스치는 폴란드의 파괴된 경제를 구조조정하려고 완전히 다른 접근방식을 선택하게 된다. 198112월 계엄령이 선포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솔리다르노스치가 선택하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할 방식으로 말이다.

솔리다르노스치가 이끈 마조비에츠키(Tadeusz Mazowiecki) 정부는 곧바로 경제 구조조정 정책을 채택했다. 이 정책은 뼛속까지 사회주의적인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노동자의 자기 조직화 내용도 없고, 경제계획의 민주적 형태라든지 노동자 자주관리의 실험도 없었다. 노동자는 억지로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었고, 능률이 떨어지는 기관들은 폐쇄되기 시작했다. 오직 바웬사만이 다음해까지 이어진 이 정책을 구조조정의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마조비에츠키 정부의 기반을 침식하기에 충분할 만큼 솔리다르노스치 성원들에게 지지를 받았고, 바웬사의 최종적인 승리를 확실히 다져주었다. “그단스크로 가는 길이라는 말이 1980~1981년에 스스로 조직화된 노동운동이 노동자 자주관리와 민주적 계획, 자유롭게 연합한 생산자들의 경제를 갈망하며 채택한 노선을 상징한다면, 1989~1990년의 폴란드 노동자운동은 정확히 그단스크로부터 나오는 길, 이를테면 200년 전에 창조된 자유시장의 이상에 대한 문구로 가득 찬 이정표가 있는 길을 여행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180도 선회가 일어났을까? 그리고 앞으로 노동자운동은 어떤 길을 걷게 될 것인가?

 

 

1980년의 조직화 양식

 

1980년 여름 노동자는 공장을 점거했고 나중에 솔리다르노스치의 조직적 구성세포가 될 파업위원회를 만들었다. 이는 20세기 (전세계) 노동자운동의 전형적인 전통 가운데 하나였다. 노동자가 자신들의 노조까지 포함해 기존의 모든 권위에 도전하며 자신들만의 현장 기구를 만들 때, 솔리다르노스치는 선배들이 만들었던 역사적 투쟁의 혈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2차 대전과 1980년 사이에, 폴란드 노동계급 조직의 구조는 AFL-CIO와 꼭 닮았다. 여러 산업에 속한 노동자가 각자 (산업별로) 독립된 노조를 만들었고 모두 바르샤바에 본부를 두고 전국 단위로 조직되었다. 다른 동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폴란드 체제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는, 노동조합이 국가의 통제 하에, 그리고 국가를 쥐고 흔드는 당, 즉 폴란드통일노동당(PUWP)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노동자의 권리를 방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노동조합은 세 가지 역할을 맡았다. 즉 노동조합은 급료 문제를 놓고 국가/당 고용주와 협상을 벌이고, 노동자의 휴가와 복지 체계를 운영하며,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국가와 당(PUWP)의 명령을 전달하는 통로였다. 폴란드 중앙계획경제의 맥락에서 살펴볼 때, 노동조합은 중앙계획부서가 하달한 산출목표를 확실히 달성하게 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노동조합은 중앙계획경제 체제에서 주요한 관리 기능과 규율을 잡는 기능을 해왔다. 그리고 노동조합은 이러한 체제에서 제도적으로 이익을 누리는 세력이었다. 폴란드 노동조합이 1990년 여름에 벌어진 노동자의 파업에 반대했다는 점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이 몇 달에 그들의 작업장을 점거하면서, 노동자는 산업별 노동조합주의 체제를 강하게 뒤흔들 새로운 방법을 도입했다. 이는 바로 지역에 뿌리를 둔 조직화 양식이었다. 파업이 폴란드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되자, 여러 작업장에서 파업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 파업위원회는 공장간 파업위원회라는 형태로 자치구와 지역 수준에서 서로를 연결하는 연계망을 구축했다. 이러한 운동은 모든 지역위원회를 하나의 조직으로 연결시킨 전국 협력위원회를 구성하여 전국적 수준으로 발전했다. 파업이 벌어지고 있을 때 뿐 아니라 파업이 끝나고 나서도 지속된 이러한 방식은 도시 또는 지역의 노동자를 가입시키는 방식, 즉 지역에 뿌리를 둔 조직화 양식이었다. 이는 그때까지 지배적이던 노동조합이 산업에 바탕을 둔 방식과 매우 다른 것이었다. 새롭게 조성된 이중권력 구조는 노동자에게 자신의 열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었다. 지역에 뿌리를 두고 노동자 스스로 조직화를 시도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이해를 추구하기 위해 산업(부문)별 노조를 개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솔리다르노스치의 지역 조직 구조가 창조해낸 노동자 사이의 수평적 연대는, 따라서 형성 단계에서부터 혁명이나 다름없었다.

 

 

솔리다르노스치의 뿌리

 

수평적 연대 체계를 발전시키면서, 솔리다르노스치는 1905년 러시아 혁명 때 나타났던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와 함께 시작된 노동자 스스로의 조직화 전통을 재현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러시아에서 1917년에 다시 나타났으며, 1918~1919년 독일과 이탈리아헝가리에서, 그리고 1930년대 스페인에서, 1956년 다시 헝가리에서, 1968년 프랑스에서 재현되었다. 다른 형태의 노동계급 투쟁조직과 달리, 이러한 노동자 조직은 이중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솔리다르노스치도 노동자 스스로 공장 위원회를 구성했던 전통들, 이를테면 1956년 포즈난 봉기, 1970년 그단스크 봉기, 그리고 어느 정도는 1976년 라돔과 바르샤바 봉기 등 다양한 경험의 계승자인 것이다.

폴란드는 이러한 혁명적 노동자운동의 가장 심오한 이론가 가운데 한 사람인 로자 룩셈부르크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이는 대중파업, 노동조합주의, 그리고 노동자 스스로의 조직화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노동자 권력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이의 이론은 세기가 바뀔 무렵에 나온 일련의 논쟁적인 글들 속에서 구체화되었다. 그러한 글은 그때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사회주의 운동조직이었던 독일 사회민주당 내의 보수적인 조류를 비판하는 것들이었다. 그이는 당 지도부를 향해, “진화론적 사회주의(Evolutionary Socialism)”를 주장하는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같은 이론가들이 강변하는 사회개혁론은 노동자에게 아무런 해결책도 주지 못한다는 점을 설득하려 노력했다.

룩셈부르크 이론의 출발점은 그이의 초기저작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Social Reform or Revolution)(1899)에서 전개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 관계에 대한 그이의 해석이었다. 그이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 하에서 계급지배구조가 임금의 수준을 결정하게 되며, 노동조합이 임금을 올리기 위해 이윤을 줄일 수 있다는 생각은 과거를 쫓는 이상주의자들에게나 어울린다고 주장했다. 그이가 노동조합 지도자로부터 미움을 얻게 된 문구에서 그이는 이렇게 주장했다. “노동조합의 투쟁은, 자본주의 사회의 객관적 구조 때문에, (산 위로 돌을 올리려다 정상에 다다르면 다시 밑으로 굴러 떨어져 끊임없이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시지프스의 노동과도 같다.”

7년 뒤 러시아에서 일어난 1905년 혁명을 분석한 대중파업과 당, 그리고 노동조합이란 글에서, 룩셈부르크는 대중파업의 시기에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노동자 스스로의 조직화야말로 자본주의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혁하는 데에서 핵심 요소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룩셈부르크가 보기에 1905년 러시아 혁명이 주는 가장 강력한 교훈은, 임금인상 요구만이 유일한 대중파업의 동기가 되거나, 또는 대중파업으로 얻어지는 유일한 결과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파업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서로 강화시켜주는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1905년 혁명의 사건들은, 파업이 실제로 혁명을 촉진시킬 수 있으며, 다음에는 파업노동자로 하여금 투쟁의 새로운 조직형태, 즉 소비에트를 건설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러한 분석은 그이의 가장 창조적이고 논쟁적인 이론에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 조직은 행동(투쟁)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조직은) 투쟁의 과정 속에서 솟아나오게 되는 것이다.

룩셈부르크의 이론은 노동조합 지도자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1905~1906년에 룩셈부르크를 거세게 비난했다. 그들은 지금 노동운동에 필요한 것은 더 많고 좋은 조직, 그리고 그것을 건설하기 위한 평화와 고요라고 주장했다. 이는 룩셈부르크의 혁명적 견해에 대한 저주나 다름없었다. 1906년 말이 되면서 그이는 공격적 태도를 띠게 된다. 그이는 처음으로 노동조합 지도부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그 자체에 대해서까지 현재 상태를 유지하려는 제도적 수호자라고 부르며 비판하기 시작했다. 1919년에 독일 노동계급이 혁명적 상황에 놓였지만 노동조합 지도자 때문에 혼란에 빠져 있을 때, 그이는 더욱 드러내놓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새로운 기초를 가진 다른 조직체계로 노동조합을 대체해야 한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1919~1920년에 쓴 일련의 글을 통해, 룩셈부르크 사상체계의 기초를 뒷받침할 깊은 이론적 설명을 시도했다. 그는 노동조합주의의 출현이 노동자의 거대한 역사적 승리를 표현하는 것임을 인정했다. 단체협약에 서명함으로써 노동조합은 공장주로 하여금 자신들이 노동계급과 맺고 있는 관계의 합법성, 즉 그람시가 산업적 합법성이라 부른 상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도록 강제한다. 이러한 합법성은 노동조합의 유지존속을 통해 계약상의 의무를 노동자가 존중하도록 노동조합이 보증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고용주의 믿음을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노동조합이 노동자뿐만 아니라 사용자에게도 책임을 떠맡도록 강제한다. 노동조합은 반드시 노동자에게 질 좋은 생활기준을 보장해야 한다. 그러나 사용자들에게는 노동의 지속을 보증해야만 한다. 산업적 합법성은 평상시에는 노동조합의 협상기능을 더 효과적으로 이행하도록 도와준다. 결과적으로, 산업적 합법성은 노동조합의 목표 달성을 돕고 노동조합의 유지존속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노동조합은 산업적 합법성 체계 안에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발전시키려 한다. 노동조합은 산업적 합법성을 영구적인 상태로 여기고 경영자와 똑같은 전망을 갖고 이 체계를 수호하려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노동조합은 산업적 합법성의 기초가 되는 경제적 관계와 함께 이러한 제도들을 일반화하고 영원히 존속시키려 한다.

그러나 1919년 튜린에서 일어난 노동자 봉기 동안 산업적 합법성이 위태로워지자, 그람시는 노동운동이 자신의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 자신을 새로운 조직형태, 즉 공장평의회 속에서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람시에게 공장평의회는 산업적 합법성을 대체하고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변혁하는 조직적 매개체였다. 따라서 공장평의회는 노동자 국가의 조직적 모델을 뜻했다. 노동자 권력은 오직 임금노동자가 아닌 생산자로서의 역할에 적합한 조직체를 통해서만 구체적으로 표현될 것이다. 산업적 합법성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노동조합운동이 산업적 합법성 안에 자신의 이해관계를 가둔 탓에 현 상태의 수호자가 되어 체제를 변혁하는데 저항하게 된다는 점을 그람시는 목격하게 된다. 따라서 그람시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노동자가 생산자로서 자신의 활동에 적합한 새로운 조직형태를 건설하기 시작하면, 노동조합주의와 새로운 기구들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하다고.

맑스주의 역사에서 가장 두각을 보인 두 사람이 발전시킨 노동자 권력, 노동자 스스로의 조직화라는 강령은, 마치 예언처럼 솔리다르노스치의 형성을 촉진한 사건들에서 놀랄 정도로 똑같이 드러났다. 1980년 여름에 일어난 파업은, 처음부터 경제적 불만을 넘어서 빠른 속도로 전국 규모의 대중파업으로 상승했고, 혁명적 상황이라 불러도 좋을만한 양상으로 발전해갔다. 공장간 파업위원회라는 형태를 통해, 대중파업은 완전히 새로운 노동자의 기구, 솔리다르노스치를 형성시켰다. 이 기구는 생겨나자마자 현존하는 모든 권력들, 특히 산업(부문)별 노동조합의 지도부로부터 공격받기 시작했다. 노동조합 지도부는 갓 태어난 이 운동을 파괴하려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벌였다.

지난날 소비에트와 노동자평의회를 낳았던 똑같은 모태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솔리다르노스치는 당장 강령적 의미에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고전적 맑스주의보다 교회의 가르침에 훨씬 많은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이 노동자는, 본능적으로 이 나라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부패를 끝장내는 길을 더듬어 찾기 시작했다. 가톨릭 이념은 넓은 도덕적 시각을 열어주긴 했지만, 노동자 스스로의 조직화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해주지 않았고, 폴란드를 어떻게 다시 세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 어떤 지침도 제공해주지 못했다.

유감스럽게도, 이 운동을 이끌어온 조직 이론은 오웰주의적인 전도를 겪고 말았다. 35년 동안 당(PUWP)은 폴란드 노동자를 억압하면서, 그람시와 룩셈부르크의 말들을 읊어왔던 것이다. 당연히 많은 노동자는 이러한 전통의 언어로 표현된 다른 정책을 얘기하는 것을 싫어했다. 이러한 정치 환경 속에서, 솔리다르노스치가 스스로를 사회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놀랄만한 일이었다. 비록 솔리다르노스치가 사회주의적 전통에서부터 뚜렷이 구분되는 특징을 갖고 있었지만 말이다. 폴란드 노동자는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즉 그 해답은 폴란드 노동자에게 친근한 것에서 나왔다.

 

 

노동자 평의회와 공개편지

 

19657, 바르샤바는 매우 특별한 정치재판의 현장이 되었다. 피고는 두 명의 대학생이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그들이 폴란드에서 사회주의를 실행하는 데 생길 수 있는 전반적인 문제를 개관한 문건을 작성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이 밝혀지고 난 뒤 그들은 당(PUWP)에서 쫓겨났다. 당을 비판했지만, 그 문서를 통해 피고에 대해 새롭게 밝혀진 것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 이미 수많은 당 회합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태도를 밝혔기 때문이다. 그들이 당에서 쫓겨난 뒤, 학생들은 이 문건의 내용을 폴란드통일노동당 바르샤바지부 대학 당원들과 청년사회주의동맹 회원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라는 이름으로 펴냈다. 두 사람은 체포되고 나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들의 이름은 야첵 쿠론(Jacek Kuron)과 카롤 모젤레프스키(Karol Modzelewski)로서, 나중에 솔리다르노스치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 편지는 이른바 사회주의 체제라고 하는 폴란드에 대한 맑스주의 관점에 따른 가장 원칙적인 비판서로 남아 있다. 저자들은 폴란드 체제가 공식 이데올로기와 달리, 왜 노동자에 의해 또는 노동자의 이해를 위해 운영되지 못하는가, 그리고 진정한 노동자 국가로 탈바꿈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점을 분석한다. 쿠론과 모젤레프스키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근본적 이해, 즉 스스로의 노동, 그리고 그 노동의 결과를 통제하는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어떻게 스스로를 국가권력으로 조직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86~87) 이 문서를 작성했다고 밝혔다.

생산의 관계들이야말로 사회의 진정한 실체를 말해준다. 저자들은 폴란드에서의 생산관계는, 지배자의 선전과는 달리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관계를 닮았다고 주장한다. 당의 관료체제,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중앙집중화된 유일한 자본, 마치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가계급처럼, 국가 소유의 생산수단을 통제하며 잉여물을 전유한다. 저자들은 잉여물들이 어떻게 생산되며 전유되는지, 그리고 체제의 모순이 어떻게 끊임없는 위기를 낳고 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공개편지는 고전적인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을 자신의 방법론적 출발점으로 하여 혁명은 불가피하다”(69)는 예언으로 끝맺고 있다.

쿠론과 모젤레프스키는 1956년 포즈난 노동자 봉기로부터 근본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그 사건을 동유럽 지배체제에 맞선 첫 번째 반관료주의 혁명이라고 설명했다. 19567, 쎄기엘스키 금속/엔진 복합공장(Cegielski Metal and Engineering Combine : 포즈난의 선박엔진제조공장)의 투사들이 이끌던 포즈난 노동자는 공식 이데올로기와 나날의 삶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는 목적으로 봉기를 시작했다. 이들 노동자는 스스로를 공장위원회와 노동자 평의회로 조직했으며, 이 조직은 도시 전체로 퍼져나갔다. 쿠론과 모젤레프스키에 따르면, 가장 계급의식이 높은 노동자는 노동자 평의회를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측면에서 다른 조류들과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그들은 노동자 평의회에서 새로운 생산관계의 토대와 새로운 정치권력의 골격”(59)을 발견했다.

포즈난 봉기를 통해 권력을 잡은 브와디스와프 고물카(Wladyslaw Gomulka)의 새 지도부는, 처음에는 노동자 평의회를 묵인했으나 나중에는 그들의 발전을 반대했다. 1957년 봄에 이르면, 당 지도부는 노동자 평의회를 확장하자는 견해를 공개적으로 비난했으며, 노동자 평의회 전국위원회를 건설하자는 견해를 무정부주의적 이상주의라고 비난했다. 다음해에 이르면, 끊임없이 당 지도부로부터 괴롭힘을 받은 탓에 겁에 질리게 된 평의회는, 끝내 당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패배에도, 쿠론과 모젤레프스키는 폴란드 사회를 진정한 노동자 국가로 변혁하기 위한 강령의 기초가 노동자 평의회에 있다고 변함없이 믿었다. 그들의 강령은 룩셈부르크와 그람시의 이론에 기초해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의 선배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한 반면, “공개편지는 노동자의 이해에 따라 운영된다고 주장하는 사회를 겨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쿠론과 모젤레프스키는 2차 대전 뒤 폴란드 체제는, 국가 소유에 기반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적 소유에 기반해 존재하는 권력 관계에서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스스로의 조직화, 자주관리, 그리고 솔리다르노스치의 강령

 

19813월에, 폴란드 몇몇 대기업에 속한 솔리다르노스치 노동자는 이제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때가 왔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솔리다르노스치는 계속되는 정부의 탄압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데 몰두해 있었다. 솔리다르노스치 지도부는 초기에 갓 태어난 조직임을 고려하여 극도로 제한된 목표들을 정해놓았다. 그러나 당이 점점 악화되는 국가 경제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무능한데다가, 비드고슈치의 솔리다르노스치 활동가들에 대한 포악한 공권력 사용이 겹쳐지자, 전투적인 노동자의 대다수가 직접 행동으로 나서도록 발전하게 되었다. 노동자 자주관리 위원회가 거대기업들에서 나타나게 되어, 국가의 생산적인 부에 대한 통제구조를 변혁시키려 했다. 암암리에 이 운동은 정부와 노동계급 사이의 권력관계를 뒤바꾸는 데까지 나아가려 했다.

4월에 이들 위원회는, 솔리다르노스치 탄생 시점에 공장간 파업위원회가 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공식 회합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표는 경제개혁을 위한 전국적 운동과 노동자 자주관리 운동이 협력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4월 회합의 결론으로, 크라쿠프(Krakow)에 있는 레닌 철강소 활동가들, 그리고 제슈프(Rzeszow)에 위치한 WSKA 항공 장비사 활동가들의 요청에 따라, 기초위원회가 솔리다르노스치 안에 공식 위원회로 발족하게 되었다. 이 내부 위원회는 네트워크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17개의 대기업 자주관리위원회의 대표자로 구성되었다.

이 네트워크 운동은 생산현장의 실체를 노동계급이 생산수단을 소유한다는 공식 교리에 입각해 변화시킴으로써 생산관계를 변혁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네트워크 활동가들은 국가 소유가 사회적 소유로 귀결되지는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당이 통제하는 국가 소유를 노동자 자주관리위원회가 통제하는 사회적 소유로 변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운동들은 네트워크, 그리고 향후 폴란드 의회의 일부가 될 자주관리 의회를 통해 통합될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노동계급의 공장의 주인이라고 어려서부터 배워온 노동자들에게 곧바로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1981년 봄과 여름 동안, 경제위기가 더욱 심화될수록 네트워크의 계획은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솔리다르노스치의 전국위원회가 열릴 때쯤에 이르면, 노동자 자주관리는 솔리다르노스치 강령 초안의 중추적 구성요소가 되었으며 전국위원회가 채택해야 할 가장 절박한 사업계획이 되어 있었다.

쿠론과 모젤레프스키가 공개편지에서 펼친 주장은 16년 뒤에 솔리다르노스치의 강령에서 명확하게 다시 떠오르게 되었다. 그들이 행동을 호소한 내용을 들여다보면, 쿠론과 모젤레프스키는 노동자가 생산을 통제하기만 하면 공장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공장을 운영할평의회를 구성함으로써, 그리고 개별 위원회들이 대표자를 파견하여 구성될 협의체를 통해 서로를 연결시킴으로써, 노동자가 스스로를 조직할 필요성을 힘주어 설명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노동계급은 사회적 생산의 목표를 세우고, 필요한 의사결정을 하고, 모든 단계에서 계획이 제대로 수행되고 있는지를 감독할 수 있을 것이다.”(76)

솔리다르노스치는 이러한 견해를 자신의 강령에 통합시켰다. 전국위원회에서, 강령은 다음의 문구처럼 정리되었다. (강령) 초안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맥은 폴란드 민중 스스로 조직화하는 것이다. 공장의 수준에서는 노동자 자주관리, 지역의 수준에서는 지역 자치체, 그리고 마침내 국가의 수준에서는 폴란드 의회 내의 자주관리 의회다.

이 강령은 폴란드에서의 소비에트형 통치의 주요 토대들 노동자 조직을 국가에 종속시키는 것, 경제적 의사결정 권한을 당 관료들에게 맡기는 것 을 거부하는 것이며, 사실상 노동자를 당과 국가에 맞서 싸우도록 하는 노선을 뜻했다.

19819월 전국위원회가 열릴 때, 당은 이미 어떻게 노동자 운동을 절멸시킬 것인가를 심사숙고하고 있었다. 솔리다르노스치도 투쟁이 곧 닥쳐올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전국위원회 기간 동안, 솔리다르노스치 대변인 야누쉬 오니쉬키에비취(Janusz onyszkiewicz)는 가상 시나리오를 이렇게 묘사하기도 했다. 지난 몇 주간 계속 증가해온 (솔리다르노스치와 정부 사이) 갈등의 진짜 목표는 점점 황폐화되어가는 경제상황 앞에서 솔리다르노스치에 의해 수행된 행동들에 맞춰져 있다. 정부가 실제로 문제 삼는 것은 생산에 대한 사회적 통제 요구, 그리고 자주관리에 기초한 사회개혁 요구이다.”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보이치에크 야루젤스키(Wojciech Jaruzelski) 참모총장은 폴란드 노동자에 대한 국가의 전쟁을 선포했다. 사실상 솔리다르노스치의 모든 지도자가 강제 구금되었다. 군대 병력이 전국으로 산개하여 생산현장, 운송, 통신시설을 장악했다. 많은 노동자가 저항했다. 몇몇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노동자가 살해당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정부와 당은 다른 부문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달성되지 못했던 높은 효율성을, 진압작전에서만큼은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솔리다르노스치는 사실상 무력화되었으며, 합법적 지위 또한 정지되었다.

 

 

계엄령과 솔리다르노스치의 변화 

 

계엄령 발효 후 체포를 피해 숨을 수 있었던 솔리다르노스치 바르샤바 의장인 즈비그니에프 부야크(Zbigniew Bujak)는 군부 통치의 눈을 피한 지도자들 중 가장 높은 지위의 인물이었는데, 은신처에서 이러한 갈등의 원인을 반추해보며 1981년의 마지막 기간 동안 노동조합에게 주어진 기회들이 무엇이었는지 숙고하게 된다. “솔리다르노스치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고 부야크는 말했다. 솔리다르노스치는 자기 자신의 생존만을 추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노동자들의 이해를 팔아먹는 것을 뜻했다. …… 아니면 전국위원회에서 채택된 강령을 실현시키기 위해 국가를 민주화하고 위기에서부터 구원하기 위해 개혁조치들을 실시하도록 요구하며 나설 수도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두 가지 길이 열려있었지만 첫 번째 길은 채택할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부야크에게 생존, 제휴, 노동자 팔아먹기는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연결된 개념이었다. 이러한 것들을 거부한다는 것은 노동조합에게 극단적인 결론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계엄령은 물밑에 있던 생존의 문제가 전면에 나서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생존의 공식을 찾고 있던 솔리다르노스치의 지하 지도부는 노동조합을 거의 파괴 일보직전으로 몰고 갔던 골치 아픈 문제에 부닥쳤다. 전국위원회 강령이 솔리다르노스치가 마주한 냉엄한 현실에 대한 아주 매력적인 희생양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급진적 집산주의와 패배는 거의 동의어처럼 되어버렸다. 이러한 연관은 냉혹하게도 솔리다르노스치 내부에서 지배적 전망으로 자리 잡기에 이른다.

솔리다르노스치가 198112월에 짓밟히던 때, 누가 노동조합을 패배로 몰고 갔는가 하는 점은 명백했다. 그러나 도대체 1천만 명을 거느린 조직이, 그것도 사회의 압도적 다수의 이해를 체현하고 있기에 수적으로만 봐서는 무적으로 보이던 조직이, 이토록 쉽게 파괴당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면 솔리다르노스치의 조직 구조 내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 운동이 사회 변혁이라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노동조합의 강령 가운데 반드시 바뀌어야만 하는 요소가 있었던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은 계엄령 시기에 이 운동과 (구금되었건 은신했건 간에) 지도자들 모두에게 늘 따라다니는 것들이기도 하다. 왜 이 운동이 패퇴했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이러한 패배를 당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을 물어야 한다.

부야크는 계엄령이라는 조건 하에서 노동조합이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어떻게 찾으려 했는가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1981122, 폴란드 정부는 소규모의, 그러나 매우 위험천만한 계엄령의 예행연습을 시도했는데, 바르샤바의 소방학교 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공권력을 사용한 것이었다. 의심할 나위 없이 정부는 노동조합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을 보고 싶었고, 또한 자신의 억압기구가 수행하는 역할을 시험해보려는 것이었다. 다음날 라돔에서 열린 전국위원회에서 부야크는 솔리다르노스치가 경제 관련 사회위원회를 구성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공장과 통신시설을 장악하기 위해 노동자 수비대를 동원할 것을 주장했다. 정부와 이보다 더 갈등하는 상황을 상상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때 부야크의 견해는 독특하지 않았다. 솔리다르노스치의 다른 이들, 일반적으로 급진파라고 하지만 훨씬 넓은 활동가 층을 대표하는 이들은 그와 비슷한 태도였다. 이를테면 세베린 야보르스키(Seweryn Jaworski)의 경우, 경찰과 군대가 노동조합에 맞서 싸울 것을 거부할 것이기 때문에, 솔리다르노스치는 정부와 정면대결을 두려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레흐 바웬사 같은 온건 중용파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당시에는 이른바 급진파들이 노동조합의 지도력을 획득하고 있었으며, 겉보기에는 정부와의 일대 격전으로 솔리다르노스치를 이끌고 갈 준비가 되어있어 보였다. 마침내 결전이 벌어지고 솔리다르노스치 지도자들이 격리되거나 은신하게 되었을 때, 급진적이건 아니건 활동가들은 부야크와 같은 지도자들이 취했던 태도의 신중함에 대해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체포를 피한 가장 높은 지위의 지도자라는 덕에 부야크가 솔리다르노스치 지하 지도부를 맡게 된 뒤, 그의 사고방식은 급격하게 변해갔다. 19821?뉴욕타임스?와 인터뷰를 할 때쯤이 되면, 그는 이미 생존과 제휴가 지하의 솔리다르노스치 사업을 이끌어야 한다는 논리에 골몰하고 있었다. 계엄령 전만 해도 생존주의 전략은 노동자 팔아먹기를 의미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오직 하나의 실행가능한 전략이 되고 만 것이다. 부야크는 대장정을 참조하며 생존의 길은 빠르고 화려한 성공으로 이끄는 길은 아니며, 길고도 부단한 노력을 요하는 길이라고 썼다.

부야크를 비롯해 솔리다르노스치의 많은 이에게 계엄령은, 노동자가 정면대결을 통해서는 이길 수 없다는 점을 입증해 준 것으로 보였다. 조건으로 보았을 때 정부와의 전투에서 노동자가 승리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이 마련되었지만, 그들은 완전히 패배했다. 패배하고 난 뒤 정면대결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뜻을 지니게 되었으며, 전투적 조류는 대부분 퇴조하게 되었다. 일찍이 노동자에게 공장을 장악하고 솔리다르노스치에게 임시정부를 구성하라고 호소했던 부야크는, 이제 노조에 남아 있는 비대결적 전략을 밀어붙이는 솔리다르노스치 지하 지도부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이러한 전략의 목표는 야루젤스키 정부와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부와의 협정은, 솔리다르노스치가 노동자 권력을 추구하는 강령적 기초를 갖고 있는 한,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것이었다. 제휴를 의미하는 협정개념이, 실패한 대결 전략을 대체하게 된 것이다.

1982년에 벌써 부야크의 비대결적 생존 전략은 지하 솔리다르노스치 안에서 확실히 승기를 잡게 되었다. 당국은 아마도 친협정조류가 지배적으로 되게 하려고 (그의 은신처를 알고 있었지만) 부야크를 체포하지 않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정부와의 최종적인 협정은, 노동조합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1983년에 이르면, 니에포드레그로스치(Niepodleglosc, 독립)폴리티카 폴스카(폴란드 정치)와 같은 지하 솔리다르노스치의 간행물들이 솔리다르노스치가 너무 사회주의적이며 대중의 권력이라는 사상에 너무 얽매여있다고 비판하기 시작한다. 특히 두 명의 저자들이 솔리다르노스치에 대한 비판을 자극했다. 안제이 발리키(Andrzej Walicki)와 표트르 비에르비키(Pitor Wierzbicki)가 그들이다. 발리키는 1984년에 폴란드의 정치적, 윤리-심리적 상황에 대한 고찰이라는 기사에서 솔리다르노스치의 약점이 대중운동으로서의 성격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솔리다르노스치가 실력 있는 야당세력이 되기에는 너무 강하게 사회주의적 전통에 얽매여 있다고 단언했다. 그는 폴란드에서 야당이 되려면 이 모델을 벗어던져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비에르비키의 비판은 어떤 면에서 더 강력한 것이었다. 지하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저서 구식 폴란드인에 대한 고찰(1985)에서, 비에르비키는 전후 폴란드 야당의 실패가 좌파 이데올로기, 1956년의 노동자 평의회 운동으로부터 시작해 솔리다르노스치와 자주관리 운동 등으로 이어진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결론은 명확하다. 솔리다르노스치야말로 노동자가 거부해야 할 조직형태라는 것이다.

계엄령이라는 조건 속에서, 겉으로 보기에 솔리다르노스치와 노동자 운동에 심대한 타격을 가져온 좌파의 태도를 방어한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것이었다. 지난날에 솔리다르노스치에서 좌파 경향으로 분류되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전환했다는 선언이 점점 빈번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1981년에 솔리다르노스치에서 자주관리에 대한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당에서부터 아나코-생디칼리즘 좌파라고 비난받았던 예지 스체레키(Jerzy Strzelecki), 1984년에 사적 소유권에 대한 대표적인 옹호자가 되어 있었다. 또한 1981년 네트워크 계획 설계자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작업이 뼛속까지 사회주의적이라고 말했던 예지 밀레브스키(Jerzy Milewski), 1980년대 후반에는 중앙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찬양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전향이 극에 달한 것은 19874월에 솔리다르노스치 지하 지도부로 구성된 임시 조정위원회가 경제의 광범한 사유화를 요구하는 문서를 채택한 사건이었다. 이 문서가 얼마나 시장 지향적이었는지, 솔리다르노스치 안에서 중도 좌파로 분류되는 경제학자 리샤드 부가이(Ryszard Bugaj)조차 솔리다르노스치의 새로운 강령은, 만약 맨 꼭대기에 노동조합 발행이라는 문구가 없었다면 노동조합의 강령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없을 정도라고 평하기도 했다.

솔리다르노스치는 분명히 1981년 이래로 엄청난 이데올로기적 영역을 가로질러 갔다. 솔리다르노스치의 정치적 변화는 정부와 협정을 체결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협정은 적어도 하나 이상의 상대를 필요로 한다. 이번에는 당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새로운 솔리다르노스치의 이해관계로 수렴될 수 있도록 국가 소유 생산 체제의 속박에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야만 했다. 두 개의 연결된 요인들이 이러한 수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나는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경제적 퇴화에 대응하기 위해 실시된 일련의 시장 지향적 긴축정책이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주기적 위기에 앞서서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그들 자체만으로는 스스로 당이 시장 체제를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만들 수는 없었다. 여기에 다른 요인, 훨씬 강력한 자극이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권력을 잡은 소련에서 나온다.

 

 

페레스트로이카와 시장 체제의 승리

 

1970년대에 폴란드와 소련 둘 다 경제위기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각각의 위기는 양상이 조금씩 달랐고 따라서 다른 결과들로 나타났다. 소련은 70년대 내내 침체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70년대 중반까지는 화려한 성장을 기록했다. 그러나 폴란드의 외형적 성장은 서구 은행에서부터 막대한 차관을 들여온 것에 힘입은 바 크고, 서구로 상품을 수출하는 것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서구 경제가 끊임없이 성장한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70년대 후반이 되면 폴란드 계획경제는 소련과 거의 비슷한 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소련이 자신의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은 결국 폴란드에서 경제위기를 해결하는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70년대는 소련 경제사에서 일대 전환점이 되는 시기이다. 소련 명령경제는 1971~19755개년 계획에서 처음으로 성장에 실패하게 된다. 70년대 말에 이르면 투자 대비 산출과 노동력 공급이 줄어들고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게 되어, 소련 지도부가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구조개혁을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밀어붙였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문제는, 그러한 개혁이 어떤 성격을 갖고 진행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당시 시장 메커니즘이 개혁의 핵심요소가 되었던 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하나는, 1970년대 말 미국 경제의 시장 주도 구조조정, 즉 이른바 자본 재구성의 제4의 물결”, 그리고 이로부터 나온 것으로 보이는 미국의 기술적·군사적 진보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소련이 서구에서 입지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침체된 경제를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되게 했다. 두 번째, 혁명의 초기 시절부터 소련 계획경제 입안자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전통처럼 되어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미국의 경영기법을 매우 경이롭게 보아왔으며 미국 주식회사를 사회주의적 효율성의 모델처럼 생각해왔다는 점이다. 소련 경제가 완전히 혼돈에 빠지게 되자, 이러한 사고방식이 다시 떠오르게 되었다.

당시 미국 사용자들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구조조정을 밀어붙인 첫 출발점은 인원감축과 미국 노동력을 더욱 값싸게 만드는 것 1930년대 이후 최악의 경기침체 때문에 이는 매우 쉬운 작업이었다 그리고 (대다수가 제조업인) 생산성이 떨어지는 부문들을 폐쇄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제철소, 고무타이어공장, 조선소, 생산기계 공장, 그리고 대다수 소비재 전자제품 산업들이 주요 대상이었다. 경쟁력 회복을 위한 두 번째 전략은 훨씬 복잡하고 심오하다. 여전히 꽤 경쟁력을 갖추고 있던 미국 기업들이 이른바 포스트포디즘적 축적전략이라고 하는 변화를 추구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덜 노동집약적이고 높은 수준의 자동화, 그리고 기술혁신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새로운 축적전략은 많은 측면에서 유연생산체제, 작업장 팀 제도, 그리고 상대적으로 온건한 노동운동 속에서 일궈진 이른바 일본의 경제 기적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경기침체 때문에 수백만 노동자를 언제든지 정리해고할 수 있게 하고, 일본의 선례에서 영감을 받은 새로운 축적전략을 결합시켜 미국은 자신만의 기적을 창출해냈다. 1984~1985년 미국 경제는 침체에서 벗어나 훨씬 더 경쟁적이고 기술진보적인 수준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소련으로서는 물론 여전히 정치적으로는 악의 제국이라고 부르던 미국 경제가 이토록 활기차게 되살아나자 차츰 그들과 맞서겠다는 오기를 잃어갔다. 소련의 정치엘리트 가운데 좀 더 긴 안목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소련의 경제가 혼란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도 별들의 전쟁이 부추긴 군비경쟁을 쫓아가는데 급급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경쟁력을 강화시키려고 했다.

소련은 끝내 중앙계획경제 체제가 현재의 경쟁 상황을 헤쳐 나가기에 부적절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소련 경제 운영자들이 실제로 1979년 이래 미국의 경제 구조조정을 이끌어온 미국 경영진의 성취를 부러워하고 있었다는 점은 비밀이 아니다. 미국 노동자와 미국의 몇몇 지역이 이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받아야 했다는 사실은 제쳐놓은 채 말이다. 참으로 얄궂게도, 미국 구조조정의 모델이 된 일본이 정부 주도 하에 산업정책을 펼쳤다면, 미국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시장을 자유화하자는 기치 아래 수행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불신받기 시작한 중앙계획경제, 미국 경제와 경쟁하는 전통, 고도로 구조조정을 밀어붙인 미국 사례에 대한 부러움, 미국이 시장을 자유화하자면서 성취하고자 했던 것이나 소련 지도부가 추구한 것이나 모두 같은 것이었다는 점을 안다면, 소련 지도부 안의 개혁 성향 기술관료들의 가슴에 시장이 아주 매력적인 대안으로 다가오게 되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잡은 뒤부터 시작된 시장과 계획을 결합시키는 실험은 새로운 원동력을 얻게 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전략에서 시장이 차지하는 역할은 점점 더 비중이 높아졌으며 계획의 역할은 지속적으로 불신의 나락으로 떨어져갔다. 시장 사회주의라는 애초의 페레스트로이카 전략이 시작된 지 5년 뒤인 1990년에 이르면, 개혁은 거의 완전히 시장 지향적인 방향으로 이뤄지게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레닌과 신경제정책(NEP)의 후계자라기보다 차르 시대 서구와의 경쟁을 통해 러시아를 근대화시키려고 마지막 시도를 하던 표트르 스톨리핀의 후계자 역할을 했던 것이다.

 

 

페레스트로이카, 폴란드 경제, 그리고 폴란드노동자당의 전환

 

1985년 이후 소련에서 벌어진 사태전개는 당의 변화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어, 비합법 상태이나 여전히 지하에 생존해있는 솔리다르노스치와의 협정을 추구하게 된다. 1970년 그단스크 노동자 봉기 탓에 고물카가 물러나고 에드바르트 기에레크(Edward Gierek)가 정권을 잡고 나서, 당은 야심찬 경제 개혁정책을 착수했다. 그 초점은 소비를 증진하고 생활수준을 높이며 자본 형성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 정책은 주기적인 경제 침체와 후퇴를 낳는 체제의 모순을 더욱 악화시켰다.

기에레크 정권은 서구에서 돈을 끌어와 자본과 소비재 수입을 위한 여려 정책에 착수했다. 그는 폴란드 중공업 분야를 세계 선도자로 만들고, 산업화된 세계를 만들어 매우 난폭한 노동자를 달랜다는 목표를 세웠다. 따라서 이 기획은 매우 실용적인 것이었다. 폴란드 경제성장전략이 어떻게 서구 경제정책과 구별되는 것인지를 이데올로기에 따라 분석한 글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폴란드는 새로운 산업시설을 짓고 소비재를 들여오기 위해 돈을 빌릴 것이다. 새로운 공장은 서구로 생산품을 수출함으로써 부채를 갚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은행가들은 부채상환을 확신하게 될 것이고 폴란드는 성장 목표를 달성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이 전략은 처음에는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다. 산업은 확장되었고 소비 또한 실제로 늘어났다. 1970~1975년까지 1인당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평균 9%에 가깝게 나타났다. 그러나 70년대 후반으로 가면 폴란드 경제는 이미 소련 경제를 괴롭혔던 것과 같은 경기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게다가 서구에도 경기후퇴가 오게 되어 폴란드 수출생산품 시장을 침식했고 따라서 산업개발과 소비재를 위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수입과 서방은행 차입에 의존하는 정책으로 한때는 산업 성장과 생활 수준이 오르는 것을 조화시킬 수 있었지만, 이제는 시기마다 부채가 늘어가는 악순환의 덫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성장이 중단되자 채무이자를 갚기 위해 정권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서방의 채권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이는 결국 생활필수품에 대한 보조금 삭감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물가가 오르고 생활수준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이야말로 폴란드 지배자들이 피해보려 안간힘을 썼던 것인데 말이다.

정부 경제정책의 딜레마는, 정부가 그때까지 국제적인 화해(데탕트) 무드가 지속되고 석유가격이 낮게 유지되어온 덕을 보고 있었다는 점 때문에 더욱 복잡하게 꼬이게 된다. 1979~1980년 사이 2차 석유 파동이 일어나고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함으로써, 낮은 석유가격과 화해 무드 모두가 지난 일로 되어버린 것이다. 1980년 여름, 식료품값 폭등으로 또다시 물가가 크게 오르자, 당이 실시한 경제 정책은 또다시 실패했다. 그리고 이런 경제상황은 끝내 솔리다르노스치 건설을 낳게 될 파업 물결의 촉매가 되었다.

(파업물결 때문에) 19809월에 그단스크 협약을 체결하게 되었을 때, 정부는 노동자운동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새로운 경제정책을 세우게 된다. 당의 처지에서는 이런 전략이 일리 있는 것이었다. 1980~1981년에, 당은 경제위기에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경제 상황은 더 악화되었고 나날의 삶도 비참해져갔다. 솔리다르노스치는 정부쪽에 받아들일 수 있는 구체적인 개혁을 실시하라고 외쳐댔지만, 어떤 진지한 제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권력의 공백상태가 오게 되어 솔리다르노스치 네트워크는 스스로의 힘으로 경제 개혁을 실현하기 위한 첫 시도를 밀어붙이게 된다. 이는 정부와 솔리다르노스치 사이의 대결 국면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계엄령은 경제의 황폐화를 더욱 가속시켰다. 야루젤스키 참모총장이 이끄는 국가비상 군사위원회가 권력을 잡았지만, 그들은 망가진 경제를 개혁할 처지에 있지 않았다. 대신 정부는 노동자 운동을 파괴하고 경제의 주요 부문을 군사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서방 국가가 야루젤스키 정정권에 제재 조치를 하자, 폴란드는 경제 안정화를 위해 그때까지 알고 있던 유일한 전략, - 서방에서부터 차입하는 것을 당분간 쓸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국가는 사회적 안정과 경제 번영을 위해 쓸 수 있는 방법을 모두 써 버렸다. 산업을 군사화하자, 경제 회복에 꼭 필요한 노동생산성 증가는 기대할 수 없었다. 야루젤스키 정부가 경제 발전전략으로 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능한 최대로 군사적 위협을 통해 노동대중에서부터 잉여가치를 쥐어짜내는 것뿐이었다. 쥐어짜기는 어마어마한 물가인상과 군사적 위협으로 노동시간을 늘리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1982년 정부는 생활필수품 가격을 무려 500% 올렸으며 노동시간을 (주당) 48시간으로 늘렸다. 다음해 물가는 25% 더 인상되었다. 그러나 물가인상 정책은 적절하지 않은 것이었다. 야루젤스키가 극적인 정책 전환을 하기 전까지, 이 나라는 아무런 구원의 수단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절름발이처럼 운영되었다.

1983년 중반, 정부는 계엄령을 해제함으로써 서방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얻을 수 있는 권리를 회복하게 되었다. 계엄령 철회는 또한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에 가입할 수 있는 자격을 다시 획득하도록 해주었다. 폴란드 정부는 1981년부터 가입노력을 벌여왔으나 쿠데타가 발어지자 미국에 의해 1982년 그 가입자격을 박탈당했다.

얼마나 서방원조를 간절히 갈망했는지, 폴란드 정부는 뒤떨어진 성장 동력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곧바로 정부보조금을 막대한 규모로 삭감하기 시작했다. 주택건설, 의료, 난방유, 운송의 요금 인상을 허가했는데, 이는 경제회복에 드는 부담을 전체 민중에게 전가하겠다는 얘기였다. 결과적으로, 경제회복에 드는 비용을 민중에게 책임 지우려는 정부의 노력은 점점 시장지향적, 긴축정책 중심의 경제개혁 논리로 수렴해갔다. 이러한 조치들로 인해 생활수준 하락은 더욱 가속되었다. 폴란드가 세계은행과 IMF 공식 가입이 승인된 1986년쯤에 이르면, 정부는 그나마 남아있던 정부 보조금 다수를 삭감하는 정책으로 나아가게 된다.

경제 혼란에 직면했을 때, 폴란드는 1985년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권력을 장악하고 실시한 페레스트로이카 정책과 연결된 시장지향적 개혁 정책을 실시하기에 매우 좋은 토양을 갖고 있었다. 고르바초프가 자신의 뜻을 폴란드 정권에 강요했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야루젤스키가 실시한 경제긴축정책은 많은 측면에서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대규모로 폴란드 경제에 접목시킬 수 있는 좋은 조건을 창출해 주었다. 폴란드의 변화는 이제 소련에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결과로 벌어진 극적인 전환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보다 더 앞서나가기도 했다. 19874, 폴란드 정부는 점진적인 긴축정책을 뛰어넘어 야심찬 구조조정 정책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폴란드 정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폴란드 경제의 모든 지도적 인물들과 경영진들은 교체되어야 한다. 이는 두말할 것 없이 중앙정부의 보조금 정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접근은 매우 중요한 것을 함축한다. 폴란드 계획 대학원의 한 경제학자는 적절하게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경제체제를 건설하자는 꿈은 죽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솔리다르노스치 스스로 시장 개혁 정책을 채택한 것과 맞물려, 이제 당의 새로운 경제정책은 지난날 자신의 적들과 협정을 맺을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하나로 수렴되었다는 것은 이제 거의 역사적 사실이 되어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때를 잘 맞춘 계기점일 뿐이었다.

1988년 봄에 벌어진 파업 물결은, 솔리다르노스치와 정부 사이에 노조의 재합법화, (솔리다르노스치에게 권력을 부여해줄) 자유선거 실시, “자본주의 건설의 시작을 합의한 역사적인 원탁회의 협상이 벌어지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 새롭게 터져 나온 공장의 쟁의사태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이 파업 물결의 진원지 역할을 한 젊은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지지한다고 목소리를 내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오래된 솔리다르노스치 조직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들은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을 지속적으로 갉아먹어온 시장지향적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평조합원 투사들과 거의 연계를 맺고 있지 않았다.

노동자의 파업은 솔리다르노스치와 정부 모두를 위협했다. 노조 지도자들은 물 밑에서 정부와 협정을 체결하려는 자신들의 계획을 망치게 될지도 모를 이 투쟁을 통제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파업노동자는 솔리다르노스치에게 난제를 부과한 셈이다. “나는 여러분의 편입니다.” 레흐 바웬사는 레닌 조선소의 파업 노동자 앞에서 연설할 때 이렇게 선언했다. “하지만 지금은 파업을 벌일 때가 아니다.” 정부는 지난날 정권의 역사를 되풀이하게 만들지도 모를 (실제 그렇게 진행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노동자 봉기로 발전할까봐 그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1980년대 내내 폴란드 전체를 짓밟느라 파산하고 지쳐 나가떨어지기 일보직전의 상태, 소련의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에 압박받는 상태에서 과거의 적이었던 세력과 단결할 수 있는 공통의 지반이 있다는 점을 발견한 야루젤스키 정부는 솔리다르노스치에게 이 나라의 정치·사회·경제 개혁정책의 내용을 협상하자고 제안하기에 이른다. 노조 지도부는 머뭇거리지 않고 협상자리에 앉았다. 폴란드 정부와 솔리다르노스치는 하나의 정치적 힘으로 합체되어갔다.

정부는 솔리다르노스치를 붕괴시키지 않았으며, 그저 노조의 이상을 변화시켜갔다. 노동자운동을 파괴하려는 기나긴 노력을 통해, 당은 자유롭게 연합한 생산자들의 사회로 나아갈 길 모두를 일그러뜨려 놓았다. 1990년 시장을 자유화하자는 강령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레흐 바웬사의 모습은 1980~1981년의 원대한 꿈이 얼마나 멀리 후퇴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바웬사는 10년 전 레닌 조선소에서 선체의 내벽을 오르던 때처럼 다시 한 번 국민의 마음을 읽는데 성공했다. 사회주의적 해법은 이제 과거의 파편이 되었을 뿐이다.

 

 

모래 위에 세워진 질서?

 

레흐 바웬사가 1981년에 노동자는 자본주의 편에 서본 적이 없다고 선언했을 때만 해도, 10년 뒤에 역사가 자신으로 하여금 기적을 수행할 역할을 부여하리라고는 전혀 알 수가 없었으리라. 전후 폴란드 노동운동 역사에 기반해 보았을 때, 바웬사의 신념이 그를 떠나 과거의 것으로 치부되는 사태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거의 어려운 일이었다.

권좌에 앉은 지 단 2개월 만에, 바웬사와 그의 총리 얀 크쥐스토프 비엘레키(Jan Krzystof Bielecki), 지난 20년간 노동자를 소외시킴으로써 이전 정권을 몰락으로 이끌었던 정책처방을 내놓게 되었다. 19912월 말, 바웬사 정부는 폴란드의 망가진 경제를 재건할 명목으로 IMF로부터 20억 달러의 원조를 받는 임시 협약을 체결하게 된다. 협약이 체결되던 시점과 거의 동시에 열린 솔리다르노스치의 최근 회의에서, 비엘레키 총리는 그단스크에 모인 노조 대의원들에게 무뚝뚝하게 얘기했다. 시장 체제로의 전환은 IMF의 원조 없이는 설 땅이 없노라고. 총리는 청중들에게 이러한 원조는 경제의 국가 부문에만 부과될 긴축정책 형태로 일시적인 조치, 즉 적어도 IMF가 보는 견지에서, 이 나라가 원조를 해줄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도록 하는 정책임을 다짐했다.

비엘레키는 긴축정책의 결과로 다시 일어서게 될 나라를 위해 사회적 안정을 이루는데 노조의 협조를 요청했다. 당연히 그는 정부의 국영기업 임금억제정책을 철회하라는 노동조합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 정책은 많은 노동자의 조건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정부가 엄청난 사유화 노력을 벌였음에도 전체적으로 8천개에 달하는 기업들의 일부만을 사유화시켰을 뿐이기 때문이다. 비엘레키의 연설은 마조비에츠키와 야루젤스키를 포함해 그의 실패한 전임자들의 수사학과 정책을 꼭 빼다 박은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솔리다르노스치 내부를 분열로 이끌고 있으며, 집권세력으로서 노동조합과 노동자의 대표체로서 노동조합 사이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바웬사 정부가 채택한 정책의 논리는 냉혹하게 지난날 노동자가 거부했던 상황, 생활수준 하락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과거를 돌아볼 때, 정부와 노동자 사이의 파국은 이제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새 대통령이 부닥친 상황은 자주 인용되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유에 꼭 들어맞는다. 로자는 1919년 중앙유럽에서 혁명의 물결이 패배하고 난 뒤에 바르샤바에 군림한 질서를 모래 위에 세워진질서라고 묘사했다. 바웬사, 즉 왕이 될지도 모를 노동자가 대통령궁으로 이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억눌러지지 않는 폴란드 노동운동의 역사적 파도가 몰아쳐 씻겨갈 모래성에 다름 아니다. 다가올 새로운 10년 동안, 레흐 바웬사가 아직 미완의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하려 노력하면 할수록, 폴란드 노동자는 오직 자신 스스로의 권력을 소유하기 위해 나아갈 것이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쟁취해야 할 세계가 있으며 억압과 착취의 사슬 외에는 잃을 것이 없다.”

 

 

옮긴이: 오민규.

 

  1. 이 글은 Monthly Review, Vol. 43, July-August 1991에 있다. [본문으로]
  2. 개리 필즈는 도시계획 전문가이자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 도시계획학부 방문 교수로, 1981년 그단스크에서 열린 솔리다르노스치의 첫 번째 전국위원회에 참석한 바 있으며, 1989년 9월 솔리다르노스치가 권력을 잡았을 때에도 폴란드에 체류하고 있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