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체코 스탈린주의의 뿌리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7월호

체코 스탈린주의의 뿌리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5:09

체코 스탈린주의의 뿌리1


Jacques Rupnick2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동유럽과 중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소련의 영향권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그런 나라들 가운데서 특히 체코슬로바키아는 사회주의 제도와 민주주의 정치를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1945년~1948년과 1968년의 두 번에 걸쳐 가장 극단까지 밀고 간 나라였다. 또한 ‘역사가의 시야’에서 벗어난 주제이긴 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는 1950년대와 1970년대에 동유럽과 중유럽에서 가장 견고하고 지속적인 형태의 스탈린주의를 만들어낸 나라이기도 했다. 얄궂게도 전후 체코슬로바키아 역사가 지닌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특징은 이 나라의 끈질긴 민주적 전통에 바탕을 두고 설명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말할 것도 없이 1968년의 ‘프라하의 봄’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것은 전쟁 전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적 삶을 형성했었고 또 공산당을 포함한 노동운동에도 그 흔적을 남긴 이 나라 정치문화의 뿌리 깊은 민주적 성격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 거꾸로 다음과 같은 의견도 가끔 제시되어 왔다. 스탈린주의 현상이 가졌던 범위는 어느 면에서 그것이 “극복”하려고 했던, 아니 그것이 뿌리 뽑으려고 했던 “부르주아” 또는 “사회” 민주주의의 유산이 가진 활력과 비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이루어진 공산통치의 근원과 그 발전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후자의 주장은 어느 정도 오해를 일으킬 만한 지나친 단순화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두 번의 대전 사이에 동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민주체제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강한 민주적 전통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민주주의적이었으며 처음에는 공산주의적이었던) 노동운동까지 가지고 있던 선진 공업국이, 제2차 세계대전 뒤에 일종의 스탈린주의적인 성격을 띤 공산주의로 옮아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1948년 2월의 정권 인수 때에 그 나라에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그 정치적 민족에 어떤 심각한 저항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체코 공산주의의 이러한 “이중성”은 1968년의 ‘프라하의 봄’과 그에 뒤이은 “정상화”를 얼마만큼 새롭게 밝혀 줄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들은 더 일반적인 쟁점, 이를 테면 “토착적” 스탈린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의 형성을 가리키고 있다. 물론 외부적 또는 지정학적 요인들이 늘 궁극적으로는 체코슬로바키아 정치의 내적 세력들을 “중층적으로 결정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1918년에 국가가 형성되었을 때에나, 그것이 1938년에 뮌헨에서 무너졌을 때에나, 1945년과 1948년 사이에 냉전이 시작되었을 때에나, 1968년에 소련이 침공해 왔을 때에나 그랬다. 그러나 우리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이러한 외부 요인들이 동유럽의 다른 곳에서와 같이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은 주장이 나올 수도 있다. 첫째로 1948년 뒤에 이루어진 스탈린주의화는 그 근원과 메커니즘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성격을 크게 바꾸어놓았던 1920년대 말기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볼셰비키화”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둘째로 제2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영향 속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사회가 그와 같은 과정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1948년 자체보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전통에서 가장 깊은 상처라고 할 수 있는 1938년~1945년의 외상적 체험들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1. 민주적 사회주의와 “우회” 이론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를 다루는 역사가들은 “특수한 상황들”을 강조하는 것을 거의 의례적인 하나의 예비책으로 삼아 왔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 속에서, 요즘 “현실사회주의”라고 알려져 있는 것을 도입한 여러 나라들 가운데에서 오직 체코슬로바키아만이 선진 산업국가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 나라에서는 반세기 동안 대규모 노동계급이 의회민주주의에 정치적으로 참여한 경험을 지녔다. 또 이 나라는 주변 나라들 가운데서 공산당이 강력한 토착적 기반을 가진 유일한 나라였다. 150만의 공산당원을 가지고 있고 1946년의 민주선거를 통해 유권자의 약 40%가 공산당을 지지한 나라였다. 그런데 1948년에 공산주의의 정권 인수가 이루어지면서 소련 모델을 그대로 모방함으로써 동유럽의 사회-경제 체계와 정치체제들이 동질화되어 간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소련 모델은 1968년에 이르러서야 거센 반발을 받았다.

의회 운영의 면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적 전통이 가진 민주적 다원적 성격의 근원을 추적해보면, 적어도 체코의 의원들이 비엔나 연방의회에 찾아갔던 187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907년의 선거들에 직접 보통선거제가 도입되었을 때에 체코지방에서 체코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얻은 득표율은 40% 정도였다. 그것은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얻은 것보다 더 높은 득표율이었다. 이미 1914년 전의 체코의 정치상황을 특징짓고 있던 것은 여러 이데올로기와 정당이 서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 경쟁을 통해 다른 세력들과 함께 민주적 권리와 민권의 신장뿐만 아니라 (완전한 독립은 아니더라도) 꽤 수준 높은 자치 확립을 위한 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전망을 통해서, 모든 사회주의 운동의 지지를 받았던 1918년의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가 형성은 민족 독립과 민주체제를 위한 19세기적 투쟁의 정점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투쟁은 양차 대전 중간기에 “완성된 다원체제”를 산출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패턴이 반드시 슬로바키아에도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슬로바키아에서는 더 고대적인 사회경제적 구조와 마자르화(Magyarisation)라는 강력한 정책의 유산 때문에 근대적 의미의 정치적 삶은 세기의 전환기에야 겨우 발전했다. 그러나 적어도 금세기의 첫 3분의 1에 해당하는 기간에는 슬로바키아인들이 미약한 형태로나마 체코인들과 함께 체코 정치문화의 민주적 요소를 일부분 공유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제1공화국(1918~1938년)에서 이루어진 민주적 체험은 토마스 마사리크(Tomáš Garrigue Masaryk)라는 이름과 관련되어 있다. 그가 대통령으로서 이 나라의 정치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그 때문에 이 나라 사회주의에 끼친 그의 결정적 역할은 이따금 가려져 왔다. 1918년 이전의 체코 사회주의에는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카우츠키/베른슈타인 분열과 관련된 두 가지 주류가 있었다. 보후미르 시메랄(Bohumír Šmeral)로 대표되는 첫 주류는 마르크스주의적, 국제주의적, “국가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고 오스트리아와 손잡고 있었다. 프란티섹 모드라체크(František Modráček)로 가장 잘 대표되는 두 번째 주류는 “수정주의적”이었으며, 분권화와 자치를 지지했고 민족 문제 만큼은 강력한 자치론자의 태도를 지녔다. 1918년에 시메랄의 친오스트리아 정책은 무너졌다. 그리고 이제 모든 사회주의 운동은 신생국과 그 대통령 마사리크와 손잡게 되었다. 그러나 겨우 2년이 못 되어 1918년의 민족주의의 행복감은 사라지고 새로운 사회불안의 물결이 사회민주주의 안에 마르크스주의 좌파를 부활시켰고, 마르크스주의 좌파는 시메랄의 주도로 1921년에 공산당으로 결성되었다. 그리하여 분권적 “자치” 경향은 1918년이 지나고 나서 하나의 “국가” 정당을 이루었다. 중앙집권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코민테른에 가입하여 이 신생국이 사회적․민족적 억압 장치라고 비판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체코의 사회주의 운동에서 “국가주의”가 공산주의적이든 사회민주주의적이든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적어도 얼마 동안 좌파가 이 1945년 뒤로 공산당의 국가사회주의를 대처할 만한 사회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마사리크의 마르크스주의 비판은 개방적인 것이었지만, 그의 볼셰비즘 거부는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한 것이었다. 마사리크의 주장에 따르면, 그의 거부는 볼셰비즘을 낳은 러시아의 정치문화(비잔티움, 황제교황주의 cezaro-papism, 관료정치)와 유럽의 정치문화와의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 간극의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마사리크의 생각에 따르면, 러시아의 사회-경제적 및 문화적 후진성 때문에, 볼셰비키는 그들이 막 폐지했던 바로 그 체제가 지닌 권위주의적 특징들의 일부를 부활시킬 것이 틀림없었다. 유럽의 사회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부정이 아니고 그것의 자연스런 확장이 되어야 했다. 요컨대 마사리크라는 사람은 민족 독립의 한 상징이었을 뿐만 아니라 체코판 사회민주주의의 “이론가”였다. 마사리크적 명제들의 몇 가지가 1960년대의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스탈린주의 비판과 가지는 관계를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다. 그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는 바로 1968년의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실험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배경을 마련했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 관해서는, 여기에서 그것이 그 전통과 갖는 관계에 대해 적어도 두 가지를 말해야 할 것이다. 이 공산당은 노동운동의 대부분이 사회민주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 유기적 변이를 거쳐 형성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당은 스스로 과거와의 근본적 결별로 이루어진 조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느 정도 공산당은 당 지도자인 보후미르 시메랄을 가장 혁혁한 대표로 삼았던 전쟁 전의 체코 사회주의 운동의 연속으로 생각했다. 금세기 첫 3분의 1의 기간 동안에 체코 노동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던 시메랄 자신은 다분히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산물이었고, 그가 레닌주의로 전향한 것은 어느 점으로 보더라도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둘째로, 공산당은 적어도 코민테른의 이른바 “제3기”까지는 (그리고 다시 1935년 뒤에) 그것을 잠자코 받아들였던 참여민주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합법적인 활동을 했다. 오토 바우어(Otto Bauer)의 다음과 같은 빈정거림이 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두 개의 두드러진 사회민주주의 정당들뿐이다. 그 하나는 물론 오스트리아 당이고 다른 하나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다.” 체코슬로바키아 당 안에서 이른바 사회민주주의의 “잔재”를 제거하려는 1920년대 말에 시작된 코민테른의 볼셰비키화 운동의 1차적 목표물이 시메랄주의였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체코슬로바키아 역사의 표준적인 시대적 분기점들을 제공해 주고 있는 ‘8’자 돌림 해들(1918년, 1938년, 1948년, 1968년) 가운데서 한 해만은 흔히 무시되었다. 우리의 주제에는 그 해가 아주 중요하다. 그 해는 1928년이다. 이 해에 바로 체코공산당의 볼셰비키화가 이루어졌다. 1929년 2월의 5대 국회에서 이루어진 공산당의 두 가지 중요한 목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첫째로 체코공산당을 코민테른에 완전히 종속시킨 것(코민테른은 192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무엇보다 소련의 대외정책의 장치로 변모해 있었다), 둘째로 당의 “사회민주주의적” (곧 토착적) 특징들 (그 두 가지는 이제 구별이 불가능했다)을 뿌리 뽑기 위해, 당을 볼셰비키 노선에 따라 이데올로기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재구성한 것. 그런데 이것은 현실적, 추상적으로 체코 노동운동사의 주류와 연계를 가진 모든 사람들을 철저하게 제거하고, 당 기구 바깥에 아무런 기반도 가지지 않았던 클레멘트 고트발트(Klement Gottwald)가 이끄는 새로운 무리의 젊은 당 간부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이루어졌다. (지나치게 실용적이었을지는 모르지만) 노련한 지도부를 제거하고 그 대신에 시베르마, 구트만과 같은 드문 예외가 있긴 했지만, 뛰어나지 못한 머리로 모스크바에 모든 충성을 바치고 있던 한 무리의 정예당원들이 들어선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1948년에 당이 집권할 때까지 이 그룹이 계속 당을 책임 맡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고트발트가 당 안에서 “권력을 장악”한 것이 갖는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1948년에 그의 당이 나라를 떠맡게 된 것을 해석하는 우리의 일에 중요하다. “볼셰비키화”의 1차적 목표는 주변 환경에서부터 당을 “보호”할 줄 수 있는 관료체제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당의 주변 환경이란, 특히 의회민주정치에서는 본질적으로 늘 끊임없는 “위협”으로 작용하는 개혁주의의 유혹을 뜻했다. 이 점에서 체코 공산당은 서구에 “쌍둥이”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프랑스공산당이었다. 그들이 모두 대규모 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 당이 모두 개방적이거나 다원적인 환경 속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환경이 또한 그들로 하여금 관료체제라는 방패막이를 세우도록 만들었다. 이는 또한 그들을 결국 가장 낡아빠진 스탈린주의적 정당들로 변모시켜 버렸다. 그에 견주어, 이탈리아의 당이나 유고슬라비아의 당은 그들이 양차 대전 사이에 처했던 아주 불리한 활동 상황들 때문에 오히려 그러한 형태의 스탈린주의화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그것은 역설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1920년대 말에 이루어진 “볼셰비키화”가 더없이 철저했음에도 당이 끝장났다고 생각했던 여러 문제들이 위기의 시기마다 주기적으로 다시 늘 당 내부에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그 긴장은 당이 민족공동체와 국제공산주의 운동에 개입함으로써 일어나는 긴장이었다. 국제공산주의운동이란 1948년이 지나고 나서는 사실 소련 모델을 강제로 채택하는 것을 뜻했다.

그 체제는 결국 1968년에 경제적․정치적 위기의 결과들이 한데 얽히자 무너지고 말았다. ‘프라하의 봄’에 이루어진 개혁은 비록 위로부터 주도된 것이었지만, 곧 체코 사회의 여러 힘들을 가동시키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당 기구에 대한 침식이 가속화되었으며, 체코 사회주의의 강한 민주적 요소들이 빠른 속도로 떠올랐다. 다음과 같은 떠올려보자. ‘프라하의 봄’이 진행되자 경제개혁에 대한 토론과 더불어 독립노조를 가지려는 노동자의 압력이 생겼고 자치에 대한 첫 조치들이 나오게 되었으며, 검열 철폐로 여러 사회집단들이 주의주장들을 뚜렷이 내세우게 되었으며, 공산당이 아닌 정치적 결사들이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공산당이 아닌 정치적 결사들로서는 현실적으로 장 밖으로 이탈할 수 없었던 민주사회당의 맹아를 비롯하여 KAN(비정당 참가자들의 클럽), K231(옛 정치범들의 클럽) 따위가 있었다. 제한된 형태로나마 다시 나타난 이러한 정치적 다원주의는 국가가 슬로바키아에 자율을 부여하고 연방화안을 채택함으로써 민족 영역에서는 공화국 때보다 훨씬 진전된 것이었다. 

외부의 군사적 개입으로 중단되기는 했지만, 그때 체코슬로바키아에 나타나고 있던 것은 사회주의적 민주체제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다원주의 개념이었다. 20년 동안 계속된 스탈린주의의 권위주의적인 지배가 끝난 뒤에 체코슬로바키아에는 넓게 사회민주주의적(또는 민주사회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여러 가치들이 심지어는 공산당 안에까지 다시 나타났다.

이러한 발전과정 때문에 1968년에 체코와 슬로바키아 역사가들 일부는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공산당이 1928년에 이탈해 나왔던 ‘자연스러운 진로’로 다시 들어서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탁월한 노동사가인 얀 믈리나리크(Ján Mlynárik)의 말은 이렇다. “우리 역사학계의 의견에 따르면, 「1929년 체코공산당의 제5대 국회」는 40년 동안 계속된 긴 우회의 시작이었고, 시메랄 지도체제로부터 시작된 자연적 발전과정으로부터의 하나의 이탈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1968년 1월 뒤에야 겨우 본디 궤도로 다시 들어섰다.” 또 한 사람의 역사가 즈데넥 카르니크(Zdeněk Kárník)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안에서 이루어진 그와 같은 민주적 요소의 회귀를 다음과 같은 전망에서 이야기했다.



시메랄주의, 곧 민주적 공산주의는 출발할 때에 이미 소멸할 운명이었다. 그것을 이루고 있던 요소들과 전통은 소멸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근대사회의 발전을 이루는 중심 기축들 가운데 하나를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우리 사회가 탈-스탈린주의화와 사회주의의 부활이라는 짧지만 강렬했던 시기를 거쳤던 바로 그때에 시메랄주의가 새로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을 설명해 주는 유일한 근거이다.


믈리나리크는 노보트니(Novotný)를 고트발트의 진정한 제자로 보았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모두 스탈린주의의 대권이 강제로 행사됨에 따른 주요 위기/숙청의 영향 속에서 권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와 비슷하게 카르니크는 두브체크(Dubček)가 시메랄의 뒤를 이은 사람이라고 보았다. 시메랄은 1920년에 이미 오늘날에 “사회주의를 향한 특수한 또는 민족적 도정”의 이론이라고 알려진 것의 기본 윤곽을 형성한 최초의 공산주의 지도자였다. 그리하여 유럽 공산주의자들이 1968년의 ‘프라하의 봄’으로부터 영감을 얻어냈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처럼 “우회” 이론은, 40년 뒤에 당 내부에서 부활된 체코 사회주의의 전통이 가진 민주적 요소의 지속성이라는 복잡한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 민주적 요소의 부활이 가능했던 것은 오직 “우회” 이론에서 말하는 “빠진 고리”, 곧 1945년과 1948년 사이의 민주적 막간극, 다시 말해 “사회주의로 전환” 덕분이었다. 그러니까 소련형 체제들이 발칸 제국에 신속하게 도입되고 있을 때에, 또한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더욱 점진적인 “살라미 전술”(salami tactic)이 동원되고 있을 때에, 체코슬로바키아는 자유선거와 다당제도, 자유언론을 즐기고 있었다. 사회주의적 본질을 가진 경제계획이 선택된 것도 1945년 무렵의 모든 정치 세력들의 광범위한 합의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약화를 몰고 오는 정치적 다원주의로서 인식되지 않고 오히려 정치적 민주주의가 꼭 갖추어야 하는 하나의 사회적 환경요인으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40%의 투표율을 얻었던 공산당은 마사리크의 유산과 민주적 과정을 통한 점진적 변동 이념에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한편 다른 정당들은 소련식 개념의 “인민 민주주의”를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적합한 형식으로 받아들였다. 1946년에 공산당을 지지한 40%의 유권자들 가운데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전쟁 전의 정책들을 거부했다. 그들은 속으로는 전쟁 전의 정치문화와 관련된 일부 기본적 가치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제1공화국을 통해 사회주의화된 그들은 레지스탕스 시기와 당이 이른바 “사회주의를 향한 민족의 도정” 정책을 옹호했던 전쟁 직후에 공산주의 운동과 제휴했다. 그들은 그들이 도왔던 “위로부터” 혁명의 결과에 깊이 실망했고, 1960년대에 스탈린주의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그들의 공동책임을 보상하기로 작정했다. 그 방법은 당의 힘을 회복시키는 데에 온 힘을 쏟고, 또 애초에 그들을 정치로 들어서게 했던 민주사회주의의 이상을 내걸고 사회를 “밑으로부터” 회복시키는 데에 온 힘을 쏟는 것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사회주의 역사를 만일 세대적 관점에서 써야 한다면, 우리는 “1945년 세대”가 이 나라 사회주의의 민주적 요소를 지속시켜 나간 하나의 중대한 이음쇠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지속성이란, 어쩌면 이 나라 정치문화 안에서 일어난 심층의 아주 모호한 구조적 변화들을 얼마쯤 인위적으로 재구성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지속성의 이론은, 공산주의의 구조와 맞닥뜨렸을 때에 민주적 정치문화는 그에 대한 반발력을 갖게 마련이라는 “낙관론”의 근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론은 한편으로 현대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적 전통이 가진 심층의 불연속성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적 전통은 그것이 가진 사회주의적 요소로 보자면 그 근원을 1928년의 볼셰비키화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이 나라가 가진 민주적 에토스의 지배적 성향으로 보자면 그 전통이 뮌헨 단절 뒤로부터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문화 안에서 일어난 두 가지 변화는 우리가 체코슬로바키아 스탈린주의의 토착적인 뿌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 꼭 필요한 사항들이다.



2. 체코슬로바키아 스탈린주의의 토착적 뿌리


“지속성의 이론”, 다시 말해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에 전쟁 전의 민주적, 다원적 정치문화가 두드러지게 지속되고 있다고 보는 이론은, 이미 말했듯이 1945년~1948년과 1968년에 체험한 민주적 사회주의의 이면에 흐르고 있던 심층적 저류를 평가하는 데에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그 이론은 1948년 뒤에, 그리고 다시 1968년 뒤에 체코슬로바키아에 가장 잔혹하고 완고하며 끈질긴 스탈린주의가 형성되었던 이유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 체코의 역사학자 카렐 카플란(Karel Kaplan)에 따르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스탈린주의 시대에 이루어진 정치재판은 그 시대의 동유럽 모든 나라들의 정치재판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죽음을 낳았다. 전시재판의 그 무서운 기구들을 일찍부터 자체 가동하고 있었던 1952년의 당 지도부의 재판, 슬란스키(Slánský) 재판도 심지어는 폴란드의 고물카(Gomulka)에 대한 재판을 비롯하여 헝가리의 라이크(Rajk), 불가리아의 코스토프(Kostov)의 재판에서 볼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훨씬 더 반유대주의적이었다. 스탈린주의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문화에 완전히 낯선 것이었다는 주장은 가끔 제기되어왔다. 1950년대의 스탈린주의가 보여 준 잔혹성은, 바로 러시아적 체험이 낳은 체제를 밖으로부터 강제로 채택시키려는 데에 따른 어려움 때문이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에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의 “전송벨트”(transmission belt) 노릇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한 논거는 스탈린의 내외정책 노선(티토가 통치하던 유고슬라비아와 결별과 전반적인 냉전 상황이 국내의 억압을 정당화하는 데에 이용되었다)의 직접적인 부산물로서 프라하의 상황이 전개되어 갔던 1940년대 말과 1950년대 초에는 물론 중요한 논거로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불충분해 보인다. 첫째로 그것은 흐루시초프의 “탈스탈린주의화” 시대 동안에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스탈린주의가 어째서 겨우 조금만 수정된 채 그대로 존속되었는가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 특히 “평화적 공존”의 대외 정책을 향해 한걸음 나아갔던 20대와 22대 국회 사이에 말이다. 둘째로, 1956년에서부터 5년이 지나 헝가리에서 카다르(Kadar)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이다.”고 선언할 수 있었을 때에, 그리고 그가 사면을 선포하고 사회와 당/국가 사이에 새롭게 화해를 추구할 수 있었을 때에, 체코슬로바키아는 그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낌새를 전혀 보이지 않았고, 1968년 뒤로 그 전의 100년 동안 한 번도 겪은 적이 없었던 가장 길고 끈질긴 억압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것을 하나의 지속적인 문화적 침공으로 볼 때에, 이 시기는 1950년대보다 훨씬 더 불행한 시기였다.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에 따르면, 그것은 암흑시대 뒤로, 다시 말해 1620년의 흰 산의 전투(the Battle of the White Mountain)가 끝나고 가톨릭화와 게르만화가 강요되었던 시대 뒤로 이 나라 역사에서 보기 드문 억압의 시기였다.

다시 말하면 이렇다. 스탈린주의는 애초에 “외국수입품”이었다. 그것은 당에서 사회로 강제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그렇지만 그 외부요인이 결정적이지 못했을 때조차도 그것이 엄청난 범위에 이르고 오래 계속된 것을 보면, 내부요인들이 거기에서 얼마나 필수적인 역할을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시사했듯이, 1920년대 말의 공산당의 볼셰비키화와 1938년~1945년의 단절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볼셰비키화는 두 가지 점에서 체코공산당의 성격을 바꿔놓았다. 이는 당내 민주주의의 종식과 모스크바에 대한 의존이다. 어느 공산당이든 그것은 일종의 “대응사회”(counter-society),  “대응문명”(counter-culture)의 기능을 하는 데, 그런 만큼 그것은 또 그것이 이룩하고자 하는 사회의 축도를 보여 준다. 독일민주공화국이 과연 바이마르 시대의 KPD가 이룩하고자 했던 사회를 구현하느냐 하는 것은 물론 논의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1920년대 말에 이루어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볼셰비키화가 그로부터 약 20년 뒤에 모든 사회를 스탈린주의화하는 토대를 구축했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중요한 요인의 구실을 하는 것은, 이들 두 시기를 통해 체코공산당이 노동자계급과 가진 관계였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독일 KPD와 함께 코민테른의 가장 큰 당파를 이루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KPD와는 반대였다. KPD는 1919년의 진정한 혁명의 여파 속에서 형성되었는데, 그 당원의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던 청년 실업자들은 1933년에 패배를 당하기까지 그 체제를 전면 거부하고 계속 “혁명의 유혹”에 사로잡힌 “수인”으로 남아 있었다. 그에 반해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정책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나 그 무렵에 “자본주의의 일시적 안정화”로 불리던 것에 훨씬 잘 적응하고 있었다. 볼셰비키화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뿌리를 이루고 있던 이들 노동자계급과 결별을 강요했다. 그것은 당원들, 심지어는 간부요원들의 대거숙청을 통해 이루어졌다. 당원은 1928년 봄에 15만 명이었던 것이 꼭 2년 만에 2만 5천 명으로 줄어 버렸다. 동시에 당 통제를 받은 “붉은” 노조 안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대다수 공산당 하부당원들과 노조원들은 결국 사회민주당으로 “돌아갔다.” 요컨대 당의 볼셰비키식 모델과 노조에 대한 “전송벨트” 식 접근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나 그 대가로 체코슬로바키아 노동계급의 주류로부터 당의 뿌리를 잘라 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이른바 “제3기”를 통해 그것의 사회적 기반을 노동계급의 “중심부”에서 “주변”으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1930년대 중반에는 불만을 품고 있던 룸펜프롤레타리아의 초급진적인 대변자가 되어 있었다. 당은 시메랄이 지도하던 10년 전에는 정치적으로 조직된 대부분의 노동자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1930년대의 대공황 전야에는 급속한 쇠퇴과정에 있는 한 정치적 분파로 보였다. 그러나 주변화된 노동계급의 “주변”은 경제위기를 통해, 실업자들과 더불어 이내 만만찮은 사회세력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실업자들은 1932년~1933년에 노동자 인구의 3분의 1내지 절반에 해당하고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이들의 가장 강력한 대변자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스탈린주의가 체코슬로바키아 노동계급에 토착적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1930년대의 경제위기 덕분이었다고 주장될 수도 있을 것이다.

1948년에 이루어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권력 장악은 하나의 “위로부터의 혁명”이었지만 노동계급이 그 혁명의 자발적인 “공범”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사실 1948년 2월에 당이 그처럼 쉽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요건의 하나는, 1945년에 당이 노동계급의 과격주의에 자연스러운 폭발의 통로를 만들어 줄 수 있었던 데에 있었다. 아마 가장 좋은 보기로서 우리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전쟁이 끝난 지 6개월이 못 되어 공장협의회 운동을 “흡수”할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처음에는 노동자가 공장관리와 전체 사회에서 갖는 역할에 대해서 두 가지 상반되는 생각들이 있었다. 해방 직후에 두드러졌던 “생디칼리슴”의 풍조는 공장협의회운동을 하나의 자율기관으로 보았으며, 또 새로운 유형의 노조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토대로 보았다. 공장협의회는 정당들과는 관계없이 다양한 형태로 노동계급을 대표하고 사회변동에 대한 노동계급의 열망을 대표한다는 것이었다. 1945년 5월 16일에 중앙노조협의회는 “공장협의회가 전체 경제구조가 의지할 힘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 반면에 공산주의자들은 공장협의회의 세력을 제한하자고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대안적인 (경쟁) 노동조직들을 결성시켰다. 그러나 국가개혁과 함께 발생한 전후의 다른 혁명적 위기들 때에도 그랬지만, 해방 뒤의 첫 몇 주일과 몇 달 동안에 이루어진 노동자의 정치적 동원의 강도는 새로운 국가제도가 구축되어 감에 따라 차츰 줄어들었다. 공장협의회의 혁명적 기세가 수그러짐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곧 통합노조운동(자포토키 Zápotocký)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민주적 중앙집권제”를 노조들의 운용방식으로 도입함으로써, 통합이 가졌던 애초의 생디칼리스트적 의미를 바꾸어 버렸다. 그러자 몇 달이 못 되어 무력하게 된 협의회들은 이제 공산당의 통제를 받는 거대조직의 하나로 변모해 버렸다. 이것은 체코 사회주의 운동의 어떤 분파도 협의회 운동에 구현된 노동계급의 자율을 위해 정치적인 대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거나 될 수 없었기 때문이고, 또 민족전선(national Front) 연합 안에 좌-우 양극화가 이루어짐으로써 그것이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사회-경제적 강령을 지지하면서 꽤 많은 노동계급을 규합시켰기 때문이다.

“급진적-민주” 운동은 이미 패배당한 상태였고 1968년~1969년의 공장협의회 운동이 일어나기까지 되살아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운동은 1948년 2월의 정치적 위기 때에 유명한 공장협의회 의회가 소집되었을 때까지 정치체제를 상대로 한 제도화된 노동계급 압력단체에 지나지 않았다. 고트발트는 베네시 대통령이 “부르주아” 장관들을 사임시키라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요구에 응하자 곧 몇 천 명의 노동자가 모인 한 규합대회에서 당의 승리를 선언하고는 노동자 동원이 가져야 할 새로운 의미를 분명하게 천명했다. “우리는 다시 우리의 일로 돌아간다. 2개년 계획완수를 위한 건설작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블룸필드(J. Bloomfield)가 일컬은 대로 그 “수동적 혁명”은 끝나고 말았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스탈린주의 체제의 형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1945년~1953년의 이러한 정치적 과정을 바탕으로 가장 급진적인 사회-경제적 변혁들(산업과 은행업 등의 국유화)과 급속한 사회적 이동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당의 볼셰비키화 때부터 1968년의 ‘프라하의 봄’에 이르는 전 기간 동안에, 특히 숙련 노동자와 반숙련 노동자 사이에 이루어진, 수공업으로부터 비수공업으로의 직업 이동을 비교한 수치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사용한 삼중 정책은 스탈린주의 체제의 바탕을 이루는 새로운 사회적 토대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첫째로 당원의 사회적 구성이 변혁되었다. 1946년 3월의 8대 국회 때에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실질적인 노동계급의 정당으로 등장했는데, 58%가 노동자, 13%가 농민, 4%가 장인들과 상인, 9%가 인텔리겐챠, 16%가 기타였다. 8대 국회 뒤의 잇단 숙청이 겨냥하고 있던 사실상의 대상은 때로 수상쩍은 전시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했으며, 당에 기울어져 있던 이른바 소부르주아 분자들이 아니었다. 국회가 소집되고 1년이 지난 뒤에는 노동계급의 구성비가 45%로 떨어져 있었고, 농민은 13%에서 8%로 떨어져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당 통계에 다름과 같은 새로운 분류가 이루어졌다. 피고용자 6%, 공무원 10%, “기타”는 16%에서 크게 증가한 20%, 그리하여 공장협의회의 흡수와 함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노동계급 기반은 퇴조했고, 그와 함께 어쩔 수 없이 국가기구의 신관료체제가 구부르주아 대신에 등장했다. 당원의 사회적 구성에 일어난 변화는 사실 1945년에 시작되어 1948년 뒤에까지도 끝나지 않은 당과 국가 사이의 삼투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둘째로, 관료체제의 등장을 노동계급과 노골적인 갈등 관계 속에서 보려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물론 앞에서 시사한 바와 같이, 관료체제는 어떠한 자율적 사회운동도 반대했지만 한편으로는 노동계급의 조용한 지지에 의지하고 있었고, 정권을 독점한 뒤에 노동계급으로부터 여러 방면의 많은 인원을 자기 체제의 여러 부서에 기용했다. 1948년과 1953년 사이에 상점 일을 보다가 대번에 국가행정관리로 기용된 노동자들의 수는 자그마치 2만 명에서 4만 명으로 추산된다. 경제 분야에 주로 기용되었지만, 군대와 경찰에 기용된 수가 특히 더 많았다.

마지막으로 많은 인텔리겐챠가 한편에서는 노동계급으로 ‘강등’되었다. 사실 인텔리겐챠의 하향이동은 1948년 뒤로 동유럽과 중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훨씬 심했다. 이를테면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51년만 해도 당국은 지식인 7만 7천 명을 해고했고, 그들을 산업부분으로 ‘재순환’시켰다. 새로운 간부요원을 양성하기 위한 가속적인 전문 교육체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커다란 경제 파국이 일어났던 1962년에 50만 명에 가까운 무자격자들이 정책 결정의 자리에 있었던 것은 스탈린주의 시대의 사회정책이 오랜 유산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주의 시대의 사회정책을 보면, 적어도 얼마쯤은 그 시대의 노동계급이 가졌던 수동성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또한 결국 그 체제를 붕괴시키고 1960년대 말에 일어난 변화들의 토대를 마련했던, 그 경제적 재앙의 범위가 얼마만한 것이었는지도 알 수 있다.

여러 면에서 그와 비슷한 하나의 과정이 1970년대의 전환기에도 되풀이 되었다. 두브체크 시대의 개혁에 관련된 약 50만 명의 당원들이 숙청을 통해 당에서부터 쫓겨났다. 이는 중국에서 일어난 문화혁명을 제외하면 전후 공산주의에서 보기드문 사건이었다. 뒤이어 당원의 재 “프롤레타리아화”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당원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1968년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게 되었다. 1960년대의 많은 지식인들이 건설노동자, 야경원, 택시운전사들로 탈바꿈되었고 출신성분으로만 “노동계급”인 사람들이 새 간부요원으로 기용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대 말의 볼셰비키화, 1940년대 말과 1950년대 초에 이루어진 사회의 스탈린주의화, 소련 모델에 엄격한 종속, 그와 더불어 당 지도부와 당원 모두의 숙청을 통해 당과 사회 전체로부터 국내의 민주-사회주의 세력들을 완전히 뿌리 뽑음으로써 이루어진 1970년대의 “정상화”의 사이에는 뚜렷한 평행관계가 있다. 당의 볼셰비키화와 사회의 스탈린주의화가 갖는 중요한 차이는 전자가 당에만 관련되어 있고 후자는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는 데에 있다.

1948년 뒤의 것이든 1968년 뒤의 것이든 스탈린주의가 문화적 획일화를 뜻했고, 적어도 이 나라의 일부 창조적 지식인들과 갈등을 뜻했던 것은 아주 또렷하다. 그러나 그것이 노동계급과 가졌던 관계는 한층 더 복잡하다. 체코슬로바키아에는 노동계급이 스탈린주의에 적응했던 하나의 유형이 존재한다. 그것은 1940년대와 1950년대의 급속한 사회적 이동이든 1970년대의 소비주의든 어느 정도 상대적인 경제적 특권들의 획득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는 유형이다. 그러나 한편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노동계급이 스탈린주의에 저항하지 않았던 것은 어떤 심층적인 심리-사회적 요인들 때문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배제할 수 없다.

이것이 프롬(Erich Fromm)과 그의 동료들이 1920년대 말에 호르크하이머 사회조사연구소에서 좌익 노동자의 심성을 연구하면서 제기했던 중요한 물음이다. 연구결과는 무척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발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프롬은 좌익의 대부분, 특히 공산주의 노동자가 “권위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그러한 성격 때문에 그들이 나치즘의 호소에 무력했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KPD의 정치적 급진주의가 이러한 권위주의와 양립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우리는 수많은 공산주의 노동자가 KPD로부터 나치즘으로 돌아선 이유, 또는 적어도 비교적 저항적이 아니었던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의 의도는 그저 손쉽게 전체주의적 체제들 사이의 어떤 평행관계를 발견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저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가사회주의에 대하여 노동계급이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물어보려는 것이다. 그들의 태도는 폴란드 노동자의 태도와 대조된다. 곧 폴란드 노동자는 노동계급의 제1세대이며, 공산주의의 토착적 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 등에서.



3. 유화세력들


뮌헨 조약과 나치 점령은 근대 체코 정치사에서 가장 깊은 상처라고 할 수 있다. “1938년~1945년의 시기는 일종의 시험이다. 그리고 이 나라는 그 시험에 낙방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묻는다. “독립과 민주정치체제를 쟁취하려고 몇 십 년을 싸워 온 한 나라와 그 정치지도자들이, 어찌하여 한바탕 싸워 보지도 않고 그것들을 포기해 버릴 수 있었을까?” 물론 항복의 이유에 대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합리적인 설명들이 마련되어 있다. 다시 말해 체코슬로바키아는 처음부터 그 존립을 의존해 왔던 서유럽 동맹국들의 버림을 받고 나서 군사적 저항을 포기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이나 또 그 책임을 정치지도자들의 취약성에 국한시키려는 것이나, 그 어느 것도 항복에 대한 설명으로서는 불충분하고, 항복에 뒤따른 협력의 정도를 설명하는 데에도 불충분해 보인다. 전시 항쟁은 무엇보다 인텔리겐챠에 의해서만 이루어졌고 항쟁의 범위도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이나 유고슬라비아의 공산주의자들의 그것과 비교가 안 된다. 프리브람(Príbram)은 이렇게 말한다. “이 나라는 자기 보전을 위해 저항 없이 나치 점령을 허용했고 그것은 이 나라로부터 온전한 제 모습을 박탈해 버렸다.” 슬로바키아의 경우는 달랐지만, 친나치의 티소(Tiso) 체제에 대한 지지는 1944년 8월의 봉기로 겨우 얼마쯤 상쇄되었다. 그리하여 1938년~1945년의 기간은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정치문화에 모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덧붙여 말할 것이 있다. 그 무렵에 “슬픔과 연민”이라는 영화가 프랑스를 위해 했던 것과 같은 일을 체코 역사가들은 1968년의 점령 뒤에야 자기 나라를 위해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알고 싶어 했던 것의 본질은, 그들 가운데서 가장 용기 있던 사람의 하나인 얀 테사르(Jan Tesář) 박사의 말로 요약될 수 있다. ‘프라하의 봄’에 활약했던 그는 또 하나의 점령 체제에 협력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1970년대에 7년 동안 복역했던 사람이다. “그 시대의 정신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은 압제자들에 굴종할 것인지, 새로이 미래의 해방자들에게 굴종할 것인지 하는 것 사이의 갈등이었다.”

사실 1945년의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비시가 몰락한 뒤의 프랑스와는 달리, 뮌헨 뒤의 항복/협력의 콤플렉스를 모두 다 보상해 준 하나의 급진주의가 나타나 있었다. 그것은 유사외국인 혐오증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에 스탈린 체제의 러시아에서 구현된 사회주의를 결합시킨 것이었다. 부활된 마사리크 유산의 연속성을 부각시키고 한편으로는 모두가 내건 “뮌헨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슬로건 아래에, 1945년에 적어도 다음의 네 가지 면에서 전쟁 전의 정치전통과의 근본적인 결별이 이루어졌다.

첫째로, 베네시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동서의 가교라고 거듭 강조했지만, 우리는 오늘날 다름 아닌 베네시 자신이 온갖 중요 정치세력들의 지지를 받아 1943년과 1945년 사이에 체코슬로바키아를 소련의 영향권 안에 완전히 통합시키는 것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조장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둘째로, 뮌헨으로 실추된 정치세력들을 제거하고 전쟁 전의 양대 정당들의 후계세력들을 제거한다는 명분 아래 체코의 농민당과 슬로바키아의 인민당의 활동이 금지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이끌었던 민족전선이 민주선거로 이루어진 정당들의 연합으로 인식되었고 또 그러한 성격의 연합체로서 운영되었지만, 비판적 입장을 내세울 권리를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베네시와 공산주의자들은 정치적 스펙트럼의 범위를 축소시키고 그 운영방식을 간략화함으로써, 동시에 정치적 민주주의의 범위도 축소시켜 버렸다. 

셋째로 다원주의도 아울러 사회주의 노동운동 안에서 축소되었다. 공장협의회 운동은 무력해졌고, “민주적 중앙집권주의” 원칙으로 운영되는 단일노조가 형성되었다. 또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사회민주당, 체코 사회당(베네시)의 세 사회주의 정당들을 한데 합하려는 계획도 있었다.

넷째로 3백만 명쯤 되는 주데텐 지방 독일인들이 체코슬로바키아 밖으로 “옮겨나간 일”은 1945년의 베네시-고트발트-스탈린 동맹을 튼튼히 해주었다.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보헤미아 안에서 체코-독일의 대립적 공존에서부터 이와 같이 역사적인 결별이 이루어진 것은, 몇 세기에 걸친 독일의 억압, 즉 주데텐 지방 독일 소수 민족의 적극적 도움을 받아 결국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국가를 붕괴시키고 말았던 억압에 대한 당시의 당연한 논리적 반응이라고 인식되었는데, 그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오늘날 반대 의견을 가진 역사가들은 그와 같은 역사적 결별이 갖는 내적의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20세기에 이루어진 인구이동은 히틀러의 독일과 스탈린의 러시아가 나타난 것과 관계있다는 것이다. 1945년에 이루어진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 회복은, 사실 더 깊은 차원에서는 그 인접 두 나라들이 동원한 무서운 논리에 굴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베네시와 공산당은 “모두가 잘못이다”라는 이론을 내세워, 체코슬로바키아의 모든 비슬라브계 시민들(독일인, 헝가리인 등)로부터 (투표권을 포함한) 기본 시민권을 박탈함으로써 위험한 선례를 세우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같은 배타의 원리가 1948년 뒤에 경제적, 종교적, 정치적인 이유를 근거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에게도 적용되고 행사되었고, 그것은 1950년대에 스탈린주의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길을 닦아 주었다.

1948년 2월에 당이 정권을 독점하고 장악했으나 그것은 승리자들이 주장하듯 혁명도 아니었고 패배한 정치가들이 망명지에서 주장하듯이 사실상의 쿠데타로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민주적 요소와 권위주의적 요소 로 갈라져 있던 체제위기에 대한 하나의 혁명적인 해결을 낳았다. 베네시가 1948년 2월에 고트발트의 최후통첩에 굴복했던 것을, 그의 1938년의 항복에 대한 속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넓은 의미에서이다. 그와 같이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 의한 정권의 독점 장악은 소련 군대를 영토 안에 두지 않고, 상당한 대중적 지지를 받으면서, 그리고 심각한 저항을 전혀 받지 않은 채 이루어졌다. 그들은 순한 혁명가들이었으며 반발을 모르는 반동주의자들이었다. 일종의 체코슬로바키아 “모델”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스탈린주의를 민족적으로 평화적으로 받아들인 모델이었음이 틀림없다.

1945년~1948년과 마찬가지로 1968년도 민주적 과정의 한계였다는 관점으로 본다면 우리는 앞서 개관했던 것에 제한을 두어, 두브체크 아래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강령이 당의 “지도적 역할”의 유지를 고집했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당의 강령은 “잠들어 있는” 민족전선의 요소가 소생되는 것을 부추겼으나 그것이 넘쳐흐르는 정도가 되는 것은 반대했다. 또 노조의 민주화는 찬성했으나 공장협의회를 인정하기를 주저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1945년~1948년의 “반대 없는 민주체제”와 연속성을 이루고 있는 점이 분명히 있었다. 모든 “수정주의적” 전략은 계속 공산당을 통한 정치적 변화에 토대를 두고 있었고, 공산당 이데올로기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튼튼한 토착적 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과정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더 많이 진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당이 주도한 “위로부터의” 개혁에 따라 차츰 가동되기 시작한 민중운동의 현실이었으며, 그것은 결국 당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금기의 질문에 맞닥뜨리게 했다. 즉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냐 아니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주의의 민주화”일 뿐이냐?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결국 모스크바에서 왔다. 그 문제를 검토하다 보면 우리는 소련이 민주사회주의의 출현을 억제했다는 두 번째 문제에 이르게 된다. 요컨대 두브체크가 소비에트 공산주의와 가졌던 유대는 물론 고트발트와 노보트니 시대의 굴종으로부터는 벗어난 것이었지만, 체코슬로바키아의 실험이 소련식 공산주의와 일으킬 수 있는 근본적인 갈등을 상상해 보지 않았던 그의 태도를 이해하는 데에는 여전히 중요하다. 바르샤바 협정체제의 침공이 있던 날 밤에도 두브체크와 그의 동료들은 무력저항을 않기로 결정하고 거의 상징적인 행동으로 당 본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러시아인들에게 체포되어 포로로 모스크바에 압송되었으며, 거기에서 그들이 나라와 “사람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의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당의 “무의식적인” 성향은 모스크바로 연결된 “탯줄”을 끊고서 민주주의냐 아니면 체제의 “민주화”냐 하는 것을 분명히 선택하려고 하지 않고 그 결정을 모스크바에 의존하려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개혁주의적이었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지도부의 이러한 상징적 “자살”은 당 관료층을 특권계급으로 남겨 두려는 일종의 자기 보존 행위이기도 했다. 그것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진 과정을 통해서라고 할지라도, 공산당 국가에서는 시민사회의 정치문화가 가진 민주적 요소가 조화될 수 있도록 체제가 바뀔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4. 최후의 단절


60년이라는 긴 역사를 가진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를 특징짓는 이 이원성에 관해 마지막으로 다음 세 가지 사항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먼저 가장 뚜렷한 것은 민주적 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의 갈등이 외부요인들의 궁극적 차원의 중층적 결정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것은, 이 나라의 지배적인 정치문화가 가진 민주적 요소와 권위주의적 요소는 서로 관련되어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실제로 중첩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때의 정치문화란 1938년~1945년의 단절 및 그에 뒤이은 극심한 사회-경제적 변동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을 말하며, 그 변동의 중심부에는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사회세력인 노동계급과 그때 출현하고 있던 당-국가 관료층의 관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체코 민족이 가지고 있던 정치문화의 그와 같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 특히 노동운동들이 가지고 있던 특징들은 사회주의를 민주주의와 결합시켜 볼 수 있는 유리한 조건들을 형성해 주었는데, 그 점이 또한 스탈린주의에 대한 그들의 저항이 허약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는 사실이다. 스탈린주의화에 대한 저항이 비교적 없었던 이유를 얼마쯤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전후 공산당이 토착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폴란드에서는 지배적인 민족주의적 성향이 카톨리시즘과 손잡고 있었고, 또 전쟁 전의 주된 사회주의 전통은 반러시아적 성격이 강해서 스탈린주의에 대항하는 완강한 저항적 정치문화를 형성했었다. 그에 반하여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는 전통적으로 친소련적이었던 성향과 사회민주주의가 합해져서 그것이 스탈린주의에 대해 매우 “취약한” 정치문화를 이루는 데에 이바지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1968년의 소련 침공과 그에 뒤따른 “정상화”는 또 하나의 휴지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의 스탈린주의 시대 뒤에도 그나마 남아 있던 친소적 감정, 그리고 ‘프라하의 봄’이 세웠던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힘은 1968년 8월 21일 밤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1970년대의 그 부단한 억압은 완전히 새로운 정치적 환경을 창출해 냈는데, 그 특징은 국가와 사회 사이에, 그리고 더 나아가 두브체크 시대의 공산당과 구스타프 후사크(Gustáv Husák)의 공산당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극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었다.

침공의 영향 속에서 50만 명의 당원을 숙청한 것은, 실제로 미래의 “유로코뮤니스트”의 비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 놓은 셈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가능성은 구체화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1968년의 패배 뒤로 아무런 전략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주로 신스탈린주의의 부활을 통해 ‘프라하의 봄’을 지지한 사람들이 영향력 있는 자리에서 제거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활동이 실질적으로 금지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상황에서 “정상화”를 통해 이루어진 전반적인 “무감각” 상태에 중요한 도전을 했던 것은 지금까지 ‘77헌장’ 인권운동뿐이었다. 비록 1968년에 뿌리를 두고는 있지만, 이 운동은 공산당 국가를 개혁하려는 시도라고는 할 수 없고, 오히려 민주적 권리와 문화적 자유를 다 수호하기 위해 시민사회에 독자적 활동을 자극하려고 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은 모든 종류의 사회주의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및 기독교의 민주적 견해까지도 포괄하는 아주 다양한 정치적 전망을 보여 주고 있다. ‘77헌장’에 서명한 천백 명의 서명자들 속에는 모든 종류의 사회집단들의 대표들이 들어 있으며, 여기에는 흔히 서유럽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노동자의 41%가 훨씬 넘는 수가 포함되어 있다. 이 운동은 그처럼 아주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이 나라의 민주적 전통을 이루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보여 주고 있다. 이제 체제 안에서는 더 나서려 들지 않고, 엄밀하게 말해 체제를 반대하지도 않으며, 다만 밖으로부터 오는 저항인 것처럼 하는 그 전통을 말이다. 이를 통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스탈린주의와 민주적 사회주의가 어떻게 끝내 결렬되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1. 이 글은 레이페이얼 새무얼・개러스 스테드먼 조운즈가 엮고 송무가 옮긴 ?문화와 이데올로기와 정치?(272~290쪽)에 실려 있다. 이 책은 국내에서 1987년 청계연구소에서 나왔다. 오래 전에 나와 잊혀 진 글이 되어버렸고 독자들이 쉽게 구할 수 없는 책이어서 다시 실어보았다. [본문으로]
  2. 쟈크 루프니크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자랐다. 1965년에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난 뒤에 주로 파리에서 연구해 왔으며 지금은 고등연구원에서 연구하고 있다.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역사?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