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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2007년)/창간호

사회주의를 새롭게 하기

사회실천연구소 2014. 11. 7. 01:43

사회주의를 새롭게 하기1


아직 울릴 수 있는 종이 있다면 울려라

너의 완벽한 제물 따위는 잊어버려라

만물에는 틈바구니가 있다

그래서 빛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 레오나르 코헨(Leonard Cohen), 「찬가(Anthem)」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다. 

물을 일단 포도주에 부었다면 

그걸 걸러낼 수는 없다, 

하지만 만물은 변한다. 

너는 할 수 있다

너의 마지막 호흡으로 새로운 시작을. 

―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d Brecht), 「만물은 변한다」


저 도적이 그의 장물을 토해내도록 하려면

자유를 그 감옥에서 구출해내려면

우리는 우리의 임무를 스스로 결정해야 하고 

그것을 결정한 뒤에는 제대로 해야 한다

― 유진 포티에(Eugne Pottier), 「인터내셔널(The Internationale)」



21세기가 된 마당에 사회주의의 쇄신이라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새 천년이 시작되는 마당에 전 세계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씨애틀에서 프라하, 퀘벡에 걸친 대규모 반자본주의 시위는 지난 몇 세기 동안 정치적 삶의 중심적 측면의 하나였던 혁명 정신이 결코 과거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만약 “지난 몇 세기 동안의 혁명적 정신, 즉 지난 모든 역사에서 한 번도 나타난 적도 견줄만한 것도 없는 자유가 깃드는 새로운 집을 짓고 해방을 맞고자 하는 열망”2이 18세기 후반의 부르주아 혁명에서 비로소 제대로 시작된 것이라 한다면, 그러한 근본적 사회 변형의 열망이 대부분 20세기의 세계에서는 자본주의 질서 자체를 넘어서고자 하는 사회주의의 혁명적 열정으로 넘어왔다는 점을 부인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부르주아 혁명의 모순적인 자유로부터, 즉 자본주의 사회관계의 기초가 되는 착취와 경쟁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지난 세기의 투쟁을 표출했던 것이 사회주의였으며, 완전히 민주적이고 협조적이며 계급이 사라진 사회를 세워 자유와 평등이 인류의 사회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하고자 했던 열망을 드러내었던 것도 사회주의였다. 


하지만 지난 세기의 끝 무렵 사회주의적 기획에 남은 것이 무엇이었다고 하겠는가? 1990년대에 들어 동구에서 공산주의 체제의 저 치욕스런 몰락에 직면하는 한편, 서구의 각국 사회민주당들은 근본적 목표를 완전히 상실하는 꼴을 본 많은 사람들에게 이 대답은 자명해보였다. 사회주의적 변혁이라는 것이 그 방법과 단기적ㆍ장기적 가능성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목적하는 바, 사회 세력, 행위자의 질문에 있어서조차 도대체 무얼 의미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은, 사람들로부터 완전한 경멸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불확실함, 혼동, 주저함, 비관주의 등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지구적 자본주의가 빚어낸 온갖 불평등과 비합리성의 맥락에서 근본적 사회 변혁을 지향하는 의미 있는 정치 조직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야말로 20세기 말의 현대 좌파의 비극을 규정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와 함께 오늘날 자본주의 질서에 충성하는 정당과 정권들에 대한 정치적 대안이 없다는 것에 대한 좌절감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 또 그래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커져가고 있다는 것도 분명한 경향이다. “대안은 없다”는 신 우익의 캠페인 구호로 시작된 말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갖가지 부조리와 약탈 행위가 벌어진 결과 이 말은 사람들이 좌파 쪽에 대해 끊임없이 퍼붓는 탄식 소리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맥락이라면 결국 사회주의에 대한 현대의 전망에 대해 계속 생각해보는 일도 꽤 의미가 있다는 것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해보는 일은 냉정하게 또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과거의 실패와 실망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또 심지어 과거를 되돌아 볼 때에도 늘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마르크스(K. Marx)가 언젠가 말했듯, 이러한 연습의 주요 목적은 “혁명의 정신을 다시 발견하는 것이며 다시 그 유령이 이리저리 배회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3 사실 사회주의적 이상을 달성할 새로운 정치적 제도들을 세울 방법을 찾는 사람들이 20세기의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실패로 낙담하고 또 그 전례가 고스란히 반복될 것이라는 공포로 손발이 얼어붙는 지금, 그 옛날의 정당 제도들이나 그 관행들은 시간과 공간의 산물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렇게 힘 빠지는 감성을 극복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사회주의를 이상이나 원칙, 이론이나 목표와 같은 관점에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회주의를 정치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역사적으로 즉 구체적인 시점에서 특정한 제도로서 모습을 드러냈던 정치적 기획으로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방식으로 생각한다면, 사회주의의 미래라는 문제는 명확하게 초점을 드러낼 수 있다. 


20세기 초 정치 무대에 뛰어들었던 각국의 사회주의 대중 정당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그 이전의 어느 때에도 피지배 계급들이 스스로를 위한 비교적 지속적인 대중 정치 조직을 가질 수가 없었다. 물론 이러한 자본주의 스스로가 일으킨 여러 변화들 - 새로운 형태의 착취와 불평등의 발명뿐만 아니라 옛날의 사회적 유대와 편협한 지역주의의 해체, 산업화와 도시화를 통한 새로운 생활 조건의 창출, 국가로부터 독자적인 새로운 형태의 모임의 발전 - 이 이 대단한 정치적 발전의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노동 계급 정당들은 사회주의적 기획을 대표하는 것이었지만 현실적으로 보자면 또한 그 조직 형태나 이념으로 보았을 때 그들 시대의 자본주의에 고유한 조건들을 상당 정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제 2차 인터내셔널이 국제적으로 공동의 우산을 제공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벌어진 분열의 결과 (이는 전략과 조직 형태를 놓고 이미 그 전에 벌어진 여러 대논쟁에서 예견된 사실이다.) 20세기의 사회주의 정치를 지배한 두 개의 제도적 날개가 나타났다. 이는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였고, 그 각각은 비록 아주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국가 권력에 크게 의존하는 것이었다. 20세기 나머지 기간 이 두 개의 좌파 정당이 주도권을 잡았다는 것은 정당 비교 연구에서 종종 말하는 “정당 대안의” 좀 더 일반적인 “동결”의 부분이었다. 


1990년대가 되기 훨씬 전부터, 20세기 초의 사회주의적 기획을 체현하는 특수한 모습으로 나타났던 제도들이 그 역사적 임무를 다했다는 것은 명백하고도 남았다. 역사 유물론의 입장에서 보자. 20세기의 역사에 걸쳐 일어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조건들의 엄청난 변화를 고려한다면, 그 세기 초기에 세워진 정당ㆍ정치 기구가 그 세기 끝에 가서도 살아있는 사회주의적 정치의 표출 방식이 될 것이라고 정말 기대할 수 있을까? 그 정당들이 주장하는 바 자신들이야말로 사회주의 원리의 보편적이고 영구적인 제도를 실현한 것이라는 주장은 결코 진지하게 믿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주장은 상당 부분 그들의 당면한 전술과 특정 전략에 대한 지지를 강화하려고 마구 부풀린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그들은 자신들을 사회주의의 특별한 실현 형태라고 내세웠지만, 이들은 역사적 조건들의 표현일 따름이지 시간의 순으로 보자면 영원히 고정된 어떤 것은 결코 아니었다. 


1960년대에 이미 “신좌파”에게는 공산주의나 사회민주주의나 모두 경화증(硬化症)에 걸려버린 제도가 되었으며, 각각의 방식으로 정치적ㆍ지적인 창의성을 질식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두루 퍼졌다. 나도 1960년대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그때 사회주의적 가치와 사상을 품게 된 사람들 가운데 소련 사회에 감명을 받아서 그렇게 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라고 본다. 그 반대로, 우리는 소련이라는 예가 있는데도 사회주의자가 된 것이며 사실상 소련 모델을 드러내놓고 거부하였다. 우리가 주장하는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이들은 끊임없이 우리 면전에다 그 소련의 예를 들이밀었지만, 우리는 권위주의적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식으로 대응하지 않았고, 민주주의적 사회주의를 여전히 상상하고 사회주의를 이루려는 투쟁을 위해 몸을 바칠 가치가 있다는 확신을 표명함으로서 대응하였다. 때때로 제 3세계의 공산주의자 운동과 지도자들이 이끄는 용감하고도 끈질긴 반제국주의 민족 해방 투쟁에 깊이 감명을 받았지만, 이런 것들이 소련 공산주의와 맺었던 관계는 결코 우리의 찬양 거리가 아니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우리가 분석의 방법으로 채택했던 맑스주의는 단호히 말하건대 결코 소련식 맑스주의가 아니었다. 우리의 맑스주의는 그 질식할 것 같은 정통주의를 넘어서고 터놓고 단절을 선언한 이들이 만들어낸 새롭게 쇄신된 맑스주의였다. 러시아에 세워진 권위주의적 공산주의 체제라는 독특한 종류만이 맑스의 사상에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결과물이라는 주장은 그다지 진지하게 여겨진 적이 없다. 사실 그런 주장이라는 것은 소련의 당 지도자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주장을 반대로 뒤집어 놓은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슘페터(J. Schumpeter)는 맑스주의자가 아니지만 그도 이를 다음과 같이 올바르게 바라본 적이 있다. “맑스의 메시지와 볼셰비키들이 이루어놓은 이데올로기와 실제 관행은 최소한 저 소박한 갈릴리 사람들의 종교와 중세 유럽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 또 군벌들의 이데올로기와 실제 관행만큼이나 큰 간격을 가지고 있다.”4 이 점은 지난 몇 십 년 전의 스탈린주의 옹호자들에게나 최근의 포스트모던 비판자들에게나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자가 된 60년대 세대의 일부는 더 순수한 맑스-레닌주의를 찾아 헤맸다. 이들은 트로츠키주의나 모택동주의 등 다양한 종류의 연결선과 신조를 가진 비교적 소규모의 혁명 정당들의 이름을 내걸고 모였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은 공산주의 정당들의 문제는 단지 스탈린주의나 스탈린주의 이후의 이탈보다 훨씬 깊은 것에 있으며, 레닌주의, 트로츠키주의, 모택동주의 등의 사상과 실천 모두의 요소들 자체가 대단히 큰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 그래서 맑스-레닌주의 담론 자체가 대단히 취약하며 지적으로는 협소하게 만들고 정치적으로는 주변 세력으로 만들어버리는 문제점을 갖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비록 우리가 맑스주의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들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을 알고 그것을 수용했지만, 우리는 또 맑스주의에서 저 권위주의적 공산주의 사회들 자체를 이해할 수 있는 도구는 상대적으로 많이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적어도 넌지시, 그리고 때때로 드러내놓고 인정하였다. 


우리 세대 사회주의자들 대부분의 소망 - 그리고 아마도 기대 - 는 이 권위주의적 공산주의 체제를 종국에는 모종의 민주적 사회주의가 대체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1968년 프라하는 우리들의 정치적 집단 형성에서 거의 1968년 파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사회주의가 소비에트 블록에서 민주적 사회주의가 필연적으로 올 것이라는 기대에 의존한 것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다. 그보다 우리를 사회주의로 몰고 간 것은 우리들 스스로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고 겪은 불평등, 비합리성, 불관용, 사회적 위계질서 - 이것들에는 국내적 차원도 있고 지구적 차원도 있는데 그 양쪽 모두였다 - 등이었다. 사회민주주의 정권들은 실질적인 변화를 실현시킬 수 없었다.(더 나쁘게 말하자면 이를 위해서 그다지 열심히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이러한 좌절은 우리의 주된 걱정거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960년대 세대 사이에 혁명적 전복이 임박했다는 낭만적 환상이 요즘 각종 회고에서 종종 그런 식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만큼 그렇게 만연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동유럽과 서유럽을 구별했던 그람시의 생각이 당시에 그토록 신속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을 보면, 좀 더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는 봉기의 여러 조건들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널리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60년대에 가장 일차적으로 도전에 부딪힌 것은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정당 정치에 뒤따르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적ㆍ제도적 형태들, 그리고 이것들로 대표되는 전통적ㆍ의회주의적 대의제와 관료주의적 행정이라는 양식이었다. 


서방에서는 사회민주주의가 대중적 동원 역량을 갖지 못한다는 취약성이 드러났다. 특히 이러한 취약성은 전후 복지 국가 시대에 이루어 놓은 개혁에 대한 우익으로부터의 일련의 공격으로 특징지워지는 신자유주의 지구화라는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기간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바로 이 동안에 사회민주주의와 옛것 새것의 갖가지 레닌주의의 한계를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었던 60년대 세대의 수많은 운동가들이 “신 사회 운동”을 건설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이것은 20세기의 마지막 몇 십 년 동안 커다란 사회적ㆍ정치적 충격을 주었다. 이 운동들은 대중 동원이 여전히 가능하고 개혁도 여전히 따낼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입증하였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옛날의 정치의 실패에서 배운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정당 정치의 좌파적 대안을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것은 모든 선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또 이제는 이 운동 진영의 연합을 쟁점 마다 사안 마다 계속 유지하는 위험한 노력도 차츰 실패하고 있다. 사회 운동가들은 점점 21세기에도 반(反 )자본주의의 정치적 기획을 계속할 새로운 정치 제도가 출현할 전망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다시 부딪히고 있다. 


여기에는 아직도 쉬운 대답은 없다. 심각한 착취, 시장의 비합리성, 간헐적인 공황 등의 조건이 모습만 새로워졌을 뿐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옛날의 사회주의 정치의 제도적 표현형태가 발전시켜놓은 노동 계급의 문화적ㆍ경제적ㆍ사회적 모습은 오늘날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노동 계급이 옛날처럼 동질적이지 않다든가 그래서 계급이라는 정치적 표현은 이제 불가능하다는 것은 핵심 문제가 아니다. 노동 계급은 한 번도 동질적이었던 적이 없다. 더 중요한 문제는 - 그리고 이는 항상 어려운 문제였다 - 노동 계급의 다양성과 또 그들이 격어 온 대단히 중대한 변화를 고려할 때에 새로운 정치적 연대를 다시 조직하고 부활시키는 것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지이다. 좌파 진영에서 이 다양성을 무시하고 변화에 저항하면서 연대를 강화하려는 이들과 그 다양성과 변화의 과정을 인정하면서 그 속에서 노동 계급을 변형시킬 필요를 강조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늘 긴장이 있었다. 다음의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신 사회 운동에서 얻은 경험은 이제 사회주의를 재생하려는 모른 시도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사회적 관계의 변혁은 결코 무차별적인 계급이라는 틀로 생각되어서는 안 되고, 생산, 재생산, 행정, 소통의 여러 체제에 각인되어 있는 갖가지 지배 관계를 모두 아우르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정치적ㆍ경제적 민주주의를 통해서 사회적 관계를 바꾼다는 목적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강조하는 사회주의적 사상에는 이미 뚜렷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공산주의 중앙계획 기구 그리고 케인즈적 자본주의를 관리하던 여러 기구에 박혀있던 기술 지배와 조합주의에 내재되어 있는 지배에 대한 거부를 반영하는 것이다. 물론 경제 계획이 더 이상 사회주의자들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경제적 의사 결정을 전략적으로 조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오늘날의 강화된 자본주의 경쟁이 일으키는 반복되는 과잉축적과 금융 투기의 공황들 속에서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중요한 것으로 느껴진다. 또 자연의 파괴를 막기 위해 그러한 조율이 갖는 미덕, 사실상 그 절실한 필요는 날마다 더욱 절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권위주의적 국가주의가 산업화 전략으로 밀어붙이는 명령 경제 계획이나 사적 자본 축적의 법칙에 스스로를 종속시키는 사회민주주의의 단선적인 계획 같은 것들로는 생태적 정신에 부합하는 계획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독일 녹색당의 실망스런 궤적을 볼 때, 게다가 새로운 종류의 사회주의가 들어설 여지가 점점 커지고 있다. 이때 사회주의는 노동 착취를 막는 성공적인 투쟁처럼 자연에 대한 착취를 제한하는 성공적인 투쟁 방법이 자본주의에서 경제 위기를 유발한 자본에 직접 또는 간접비용을 부과하는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분석에 근거하여 재화와 용역에 대한 인간의 욕구와 자연의 재생산을 화해시킬 민주주의적 경제 조율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논리를 제시할 수 있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현대의 사회주의자들은 새로운 종류의 정치ㆍ경제적 민주주의를 위한 절대 안전의 확실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상황이 이렇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끔 참을 수 없게 된다. 사실 지난 몇 십 년 동안 제시된 모델들은 숱하게 있었고 매력적인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델들은 그것을 실현시킬 정치적 수단을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 즉 사람들에게 경제적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국가 내부의 인습적인 대의제와 행정의 양식을 어떻게 변형시킬 것인가를 교육시킬 새로운 정치적 제도들을 창출할 것인가의 문제와 연결되지 않는 한 설득력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60년대의 신좌파가 외쳤던 참여라고 하는 주제이다. 사회민주당이나 공산당이나 이 주문제를 깔보고 무시하고 그들 내부의 정치적 민주화를 확장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한사코 저항하는 바람에 관료적 행정과 모조품 대의제로부터 대중들이 소외된 상태가 계속 곪아터지도록 방치하고 말았다. 이는 결국 서구와 동구 모두에서 시장 포퓰리즘으로 가는 길을 닦아놓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시장 자체도 온갖 차별과 권력으로 꽉 차 있다는 증거가 쌓이고 있을 때, 시장 포퓰리즘의 한계는 사회주의적 정치를 재건할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이러한 기회를 바라볼 때, 옛날의 자동 붕괴론 따위를 새로운 버전으로 재생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 자동 붕괴론의 함의는 사회주의를 위한 전략과 투쟁의 자리를 심각한 자본주의의 공황에 대한 기대로 채우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크고 작은 경제적 공황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전망은 좌파로 하여금 그 역량을 질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새로운 전략과 형식을 발전시킬 계기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1873년에서 1896년에 이르는 장기 불황에서 유럽의 대중적 노동 계급 정당과 노동조합이 나타났으며, 1930년대의 대공황 기간에 북미의 산별 노조운동과 스칸디나비아식의 사회민주주의적 통치 형태가 만들어졌으며,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새롭게 나타난 경제 공황의 한가운데에서 신사회 운동이 발전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그 스스로의 역동성을 회복하는 계기가 바로 이 경제 공황이었다는 사실도 명심해야만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도 역동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회주의적 대안 또는 최소한 민주주의를 방어할 수단조차 없을 때에는 그 결과가 항상 소름끼치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모든 토론은 만약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의 좌파의 특정한 상황으로 시각이 고정된 채 이루어지는 한 편파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른 이유만큼이나 바로 이러한 경험의 한계 때문에 국제주의를 새롭게 해야 할 필요가 강해진다. 이 국제주의의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하는 적지 않은 이유는 신자유주의의 기획에 저항하기 위한 전략적 일관성을 확립하고 자본을 통제하기 위한 국제적인 수단을 개발하기 위한 것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좌파의 국제주의의 초점은 때때로 국민 국가 그리고 정말이지 국가 아래의 지역 수준에서의 필수적인 투쟁들을 포기하거나 심지어 조롱하면서 제출되는 불행한 경우가 있다. 일국적 수준에서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어떻게 새롭게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접어둔 채로 지구적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지구적 자본주의에 맞선다는 생각은 낭만에 지나지 않는다. 


새로운 국제주의에 특별히 요청되는 것은 급진적 정부가 들어서는 경우라 해도 국민 국가 수준 또는 국지적 수준에서 변혁이 겪는 어려움에 관한 다양한 경험들을 공유하는 것이다. 주변부에서나 중심부에서나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들이 나타나 마침내 행정 기구를 변혁하여 인민의 의지를 제대로 대표하고 책임성을 가지며, 공동의 사회적 문제들을 위한 민주주의적 계획에 맞도록 가능한 한 탈중심화되면서도 민중적인 방식으로 의사 결정과 자원 배분이 벌어지도록 하려면 이것이 너무나도 필수적인 것이다. 새롭게 태어나는 사회주의적 기획은 결코 더 많은 국가냐 더 적은 국가냐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다른 종류의 국가를 만들어낼 것이냐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 20세기 사회주의 기획의 두 가지 주요한 제도적 형태들은 모두 배분, 규제, 강제의 도구로서 관료적 국가에 너무나 의지한 나머지 사회주의의 주된 목표, 즉 집단적인 자기 결정을 할 수 있는 민중의 역량을 발전시킨다는 목표를 이룩하기보다는 갉아먹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하지만 이 문제는 결코 국민 투표 따위의 직접 민주주의의 각종 기술들로 쉽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오늘날 많은 좌파들이 가끔 암시하듯이 비례 대표제만으로 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좌파 포퓰리즘은 마치 민중이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스스로 이미 알고 있다는 식의 허위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민중이 수 세대에 걸친 배제와 원자화 때문에 수동성과 복종에 젖어있다는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사람들 마음 속 깊은 곳에 능동적이고도 현명한 시민들의 공동체가 기다리고 있으니 그저 끌어내기만 하면 된다고 가정하지 말고, 국가를 다시 만드는 작업에서나 운동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나 민주적 사회주의의 첫 번째 과제는 그들의 민주적 역량의 창출을 적극적으로 촉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 시작은 고립되어 있는 개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신들의 삶의 다양한 측면에서 함께 공동의 욕구와 이익을 발견해 낼 역량을 올려주는 일이며, 그 다음엔 집단적 정체성과 연합의 형성을 장려하고 그들의 욕구와 이익이 어떻게 충족될 수 있을지를 집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제도적 수단과 자원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약속은 다른 것이 아니다. 맥퍼슨(C. B. Macpherson)이 적절하게 이름 붙였듯이, 자본과 국가가 질식시켜버린 바 있는 “계발의 민주주의(developmental democracy)”를 통해 인간의 창조적 역량을 맘껏 펼치도록 풀어내는 것에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민중의 역량을 계발할 수 있는 공공의 대의제와 행정의 형태들을 발견한다는 엄청난 작업을 전면으로 중심으로 제기할 수 있는 적절한 사회주의 정치의 제도적 형태가 출현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진정 의미 있는 진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속도에 대해 아무런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진보의 패턴은 나라마다 크게 다르다. 그리고 승리가 있는 만큼 후퇴도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토록 많은 좌파들이 빠져버린 우울함은 대단히 근시안적인 것이다.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사회적 갈등이 들끓고 있고 각종 불만이 표출되며, 다양한 요구가 제기되고 다양한 권리의 요구가 터져 나오고 있다. 그 가운데 일부는 근본적으로 불건전한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그 중 상당한 부분은 진보적이고 갈수록 사회주의 열망과 잘 어울리는 반자본주의 언어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새로운 사회주의 제도들과 관행들을 발전시키는 작업의 어려움은 과소평가 할 것이 아니다.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에 걸쳐 전성기를 지나버린 새 세대의 사회주의자들은 그 다음 4반세기 동안 그들이 그토록 날카롭게 오류를 집어내고 그토록 냉혹하게 비판했던 옛날의 경화증 걸린 공산당과 사민당에 견줄 만큼 폭넓고 두각을 나타낸 새로운 정치적 도구를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4반세기란 역사적으로 보자면 짧은 시간이다. 이것을 차티스트 운동(Chartism)과 1848년 혁명의 패배와 19세기 말엽의 사회주의 정당들과 새로운 대중적 노동조합이 발생하던 시점 사이의 기간과 비교해보라. 게다가 현재 전 지구를 최고 속도로 휩쓸고 있는 자본의 흐름은 그 사회적 비용은 말할 것도 없고 심한 불안정성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그렇게 엄청난 권력을 민주적 가능성을 가진 공공 영역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비민주적인 사적 영역에다 부여하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도 중심적인 정치적 문제로 부각시키고 있다. 민주적 사회주의란 결코 필연적으로 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분명코 역사적인 현실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우리는 적어도 우리들 스스로의 수명의 길이와 사회주의의 실현이라는 문제를 뒤섞는 일이 없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오랜 수명을 과소평가했던 맑스의 실수는 이 실수 때문에 빚어진 그의 수많은 다른 실수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러한 실수는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실로 불행한 오류이다. 오늘날 좌파 가운데 절망감을 느끼고 사회주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많은 이들은 그저 자본주의가 죽기 전에 자신들부터 죽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살아 생전에 사회주의가 도래하여 우리가 사회주의자로서 정치적 현실에 나서게 되리라는 필연성은 없다. 사회주의 정치의 핵심이란 일반 민중이 정치적 생활에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 스스로를 계발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라면 물어야 할 첫 번째 질문은 과연 현존하는 정치적 제도들이 그렇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틀을 제공하는가 아니면 오히려 그것을 억압하는가이다. 우리들이 전략적 창의성과 상상력을 끌어 모아 실제로 계발적 차원을 보장할 대안적인 정치 제도들을 발전시킬 수만 있다면, 우리는 사회주의를 가능하게 만드는 데에 이바지하는 셈이다. 다른 사회주의 지식인들도 20세기 말에 이르러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은 사회주의가 새롭게 태어나는 시대가 저 멀리 다가오고 있다는 작지만 아주 고무적인 신호이다.5


오늘날 좌파 앞에 닥쳐 있는 도전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야심찬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작업이다. 힘을 빠지게 만드는 정치적 비관주의를 넘어서서 “패배한 자로 하여금 다시 세계와 맞붙게” 만드는 것 - 파시즘의 가장 어두웠던 시절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가 말한 바 있듯이 - 을 가능케 하려면, 유토피아적 사유를 재생시킴으로서 사회주의적 상상력을 다시 밝히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는 맑스주의를 버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블로흐가 정치경제학의 “차가운 흐름”과 나란히 흘러야 할 새로운 세계를 그려내는 “뜨거운 흐름”이라고 불렀던 것을 재생시켜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6 또 이는 아마도 맑스주의 이론에 새로운 층위를 더하여 사회주의자들로 하여금 자본 축적의 분석 말고도 민중 역량의 축적을 촉진시킬 방법을 그려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뜻할 것이다. 


우리는 앞 세대의 사회주의자들이 세우려고 했던 대건축물의 틈바구니를 통해 볼 수 있다 - “그래서 빛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한 호흡 한 호흡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사회주의를 새롭게 함으로서 “혁명 정신”이 새롭게 피어나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더 두고 봐야 할 문제는, 우리가 결국 이 과업을 “제대로 할 수 있는가” 이다. 

  1. 이 글의 출처는 아래와 같다. 리오 패니치(Leo Panitch), “사회주의를 새롭게 하기(Renewing Socialism),” Monthly Review, Feb. 2002, Vol. 53, pp. 37-47. [본문으로]
  2.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혁명론』(On Revolution), New York: Viking, 1965, [본문으로]
  3. 칼 맑스(Karl Marx),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The Eighteenth Brumaire of Louis Bonaparte)』, New York : International Publishers, 1963, p. 17. [본문으로]
  4. 조셉 슘페터(Joseph A. Schumpeter),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 5th ed., London: Allen & Unwin, 1976, p. 3. 본래 출판년도는 1943년. [본문으로]
  5. 안소니 기든스(Anthony Giddens)가 그의 『제3의 길(The Third Way)』,Cambridge, UK : Polity, 1998에서 그려낸 “사회민주주의의 쇄신”은 지적으로도 나태하고 아무런 영감도 들어 있지 않고,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자세히 논의되는 세 개의 “현실적 유토피아”는 실망스럽다. 이와 대조적으로 특히 보리스 카갈리츠키(Boris Kagalitsky)의『급진주의의 귀환 : 좌파 제도를 다시 만들기(Return of Radicalism: Reshaping the Left Institutions)』, London: Pluto, 2000;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의『희망의 공간(Spaces of Hop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0을 중요한 예로 생각한다. 또 고인이 된 다니엘 싱어(Daniel Singer)의 『누구의 밀레니엄인가? 그들의 것 또는 우리들의 것?(Whose Millennium? Theirs or Ours?)』,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99도 중요하다. 싱어는 좌파에게는 암담했던 20세기의 마지막 십년 동안 혁명 정신의 생명력을 지키기 위해 큰 노력을 했다. [본문으로]
  6.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희망의 원리(The Principle of Hope)』, Cambridge, Mass. : MIT Press, 1986, p. 148.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