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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의 반란 : 1995-2005 본문

실천지 (2007년)/창간호

프랑스에서의 반란 : 1995-2005

사회실천연구소 2014. 11. 7. 01:55

프랑스에서의 반란 : 1995-2005

Jim Wolfreys



2005년 11월, 사회학자 엠마누엘 토드는 이렇게 말했다 : ‘최근의 프랑스 정세는 격변의 연속 그 자체였다. 그리고 매번 지배계급의 정당성 결여는 더욱 명백해지고 있다.’ 1) 그는 3주 내내 많은 프랑스의 황폐한 교외지역들을 불타오르게 했던 폭동의 여파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폭동은 오랫동안 빈곤, 차별과 억압에 처해 있었던 도시 청년들의 분노, 따라서 자신들과 자신의 거주지역들을 도외시했던 정치체제에 대한 이들의 욕구 불만을 매일 밤 더욱 확고부동하게 상기시켜 주었다. 폭동 중에 방화된 8천대의 자동차가 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더 효율적인 정치적 도구가 없었음을 증명했다면, 정부는 과거 식민지 시대의 비상통치권을 부활시키는 것으로 응답했다. 이것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10년간의 저항의 결과, 위기에 처한 체제의 선택권이 협소해지고 있음을 웅변하는 증거였다. 


자크 시라크의 1995년 대선 승리는 토드가 사회적 배제에 관한 자신의 보고서에서 썼던 표현을 빌리면, 프랑스의 ‘사회적 분열’(fracture sociale)을 치유하겠다는 약속에 바탕하고 있었다. 그러나 드골주의자의 ‘모두를 위한 프랑스’라는 비전은 결과적으로 1980년대 초 이래로 좌우익 정부가 변명해왔던 모두를 위한 신자유주의적 자유와 같은 것이었다는 사실이 이내 명백해졌다. 시라크가 승리한지 6개월도 채 안되었을 때, 그의 총리인 알랭 쥐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실시된 사회보장 및 연금제도 정비 계획을 제출했다. 


쥐뻬의 공세에 대한 노동운동의 반응은 아주 놀라운 것이었다. 11월 24일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으며, 이들 중 몇몇 그룹은 우편물 분류작업에 종사하고 있던 체신노동자들에게 같이 파업할 것을 촉구했다. 파업에 탄력이 붙음에 따라 이들은 이번에는 통신노동자들에게 파업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그 뒤 곧 병원직원들과 함께 전기 및 가스산업의 노동자들이 합류했다. 주로 아래로부터 추동되고, 파업 참가자들이 ‘전부’ 참여한 대중집회를 통해 조직된 운동과 함께 지방이나 소속 노동조합에 관계없이 파업을 지지하는 시위가 12월 중순까지 거의 매일 개최되었으며, 전국적으로 최대 200만 명이 동원되었다. 12월 15일 정부는 연금제도 개혁안을 철회했다. 정부는 여전히 사회보장 삭감안을 밀어붙일 수 있었지만 쥐뻬는 결코 파업으로부터 회복되지 못했다. 쥐뻬 내각은 이후 18개월 동안 계속 휘청거렸다. 그 결과, 사람들은 대체로 시라크에 이어서 우익 주류파의 지도부가 정말로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1995년 11월-12월은 프랑스에서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이는 노동운동의 장기간에 걸친 패배의 종식 및 1999년 11월 시애틀에서 시작된 일련의 반(反)자본주의 항의시위에서 나타났던 신자유주의에 대한 현재진행형 저항기의 시작을 특징지었다. 또한 전통적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더 이상 제공할 수 없었던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 발전상도 보여주었다.


이 논문은 1995년 이후 10년 동안 프랑스에서 어떤 운동이 일어났는지를 다룬 글이다. 이 글은 체제에 저항할 수 있음을 입증해보였지만 아직까지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는 운동의 잠재력 및 그 한계에 주의를 기울이기에 앞서, 더 이상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는 다수 대중을 동원할 수 없는 정당과 조직들의 지배 엘리트들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부터 먼저 파악해볼 것이다.


가장 쓴 약 


1980년대 내내 프랑스의 양대 정당인 사회당과 드골주의 공화국연합(RPR, 현 집권당인 프랑스대중운동연합(UMP)의 전신)은 영국과 미국에서 제창된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저항을 극복하기에는 벅찬 것으로 판명되었다. 1980년대 말에는 대학생, 간호사 및 철도와 은행노동자들이 과거 학생들이 했던 것처럼 반격했으며, 1990년대 초에는 에어 프랑스(Air France)와 프랑스텔레콤(France Telecom) 노동자들이 저항했다. 이런 탄력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복지국가 수립 및 공고화에 바탕한 소위 ‘공화제적 사회모델’의 특정 측면에 대한 더 광범위한 정치적 일체감과 결합되었다. 그 결과, 어떤 정당도 ‘대중 자본주의’에 대한 광범한 지지를 모으거나 고용주들에 의해 요구된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포괄적 강요를 관철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프랑스 정치생활을 지배할 수 없었다. 실제로 거의 30년 동안 프랑스에서는 어떤 정부도 재임에 성공할 수 없었다.


구속받지 않는 시장경제에 대한 대안이 없는 정당 간의 합의는 모든 주류정당들을 그 활동 기반과 유권자로부터 서서히 멀어지게 했다. 23년간의 우익 지배에 종지부를 찍은 1981년 사회당의 역사적인 선거 승리는 ‘양자택일’로 이어졌는데, 이에 따라 좌우익 정당들이 교대로 정권을 잡고 있다. 이는 제5 공화국 정치제도들의 ‘성숙도’를 나타내는 표시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 제도들은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양자택일제는 정당들을 서로 싸우게 한다. 다만 주요 정당들 간의 경쟁 격화는 더 이상 본질적으로 다른 형태를 취하는 이데올로기적 차이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 이들 정당의 정당성을 더욱 더 손상시키는 경향이 있다. 타락의 네트워크화는 쇠퇴하는 조직들의 기능을 보강하기 위해 점점 더 필요해졌다. 전후 상당 기간 동안 정부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내는데 여념이 없었던 주요 정당들 간의 결탁은 ‘조직 내의’ 타락을 계속 부추겼다. 그러나 내부 분열의 심화 및 공산주의의 ‘위협’ 쇠퇴로 초래된 고발은 점점 더 반대파와 경쟁자들을 약화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를테면, 여러 지도적인 사회주의자들이 두 주류 우익 정당들의 거물들과 함께 다수의 이목을 끈 재판과 스캔들에 뒤이어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반면에, 공화국연합(RPR) 내부의 폭로는 1977년에 시라크가 시장으로 선출된 후 20년이 넘도록 파리시청이 당(RPR)의 교묘한 비자금 창구였었다는 사실을 공공연한 비밀로 만들었다.


1995년에 공화국연합(RPR)의 내부 경쟁은 당의 확고한 간판으로서의 시라크의 지위가 그의 총리인 에두아르 발라뒤르에 의해 의문시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었다. 발라뒤르는 자신의 캠페인을 중심으로 알랭 마들랭이나 니콜라 사르코지 같은 우익 주류파의 가장 헌신적인 신자유주의 분자들을 어떻게든 불러 모으려 했다. 시라크는 자신이 1980년대에 우익 주류파들에게 채택할 것을 설득했었던 바로 그 신자유주의적 모델을 은연중에 거부했던 ‘사회적’ 강령을 주장하는 신세가 되었다. 2년 뒤, 1980년대의 포괄적 사회개혁안을 포기하도록 사회당 활동가들을 설득하는데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리오넬 조스팽은 총리가 되기 위해 비슷한 속임수를 썼다. 그는 공산당-녹색당과의 연합인 ‘복수좌파’의 수장으로 자처했으며, 이른바 ‘사회운동’의 요구들을 정책화하겠다고 약속했다. 프랑스경제인연합회(CNPF)의 반응은 공격적이었다. 분노로 창백해진 프랑스경제인연합회(CNPF)의 전(前) 의장 장 강드와는 조스팽이 주 35시간 노동제 공약을 지키려는 정부의 의도를 분명히 했던 한 모임에 나타났다. 그는 ‘우리는 속아왔다’고 주장했으며, 자신의 후임자에게 ‘킬러’가 될 것을 촉구했다. 프랑스경제인연합회(CNPF)는 정식으로 연합에서 ‘운동’(프랑스기업가운동, MEDEF)으로 그 이름을 바꿨으며2), 주 35시간 노동제를 뒤엎으려는 장기적이고 대부분 성공적이었던 캠페인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1998년 신자유주의적 개혁 반대운동의 속도가 급격히 떨어지자 지배계급의 몇몇 지도적 인사들은 우익 주류파와 극우 파시스트인 국민전선(Front National, FN)의 선거연합을 공개적으로 주창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프랑스의 정치적 양극화 현상은 4년 뒤 장-마리 르펜이 자력으로 대선에서 조스팽을 3위로 밀어내고 시라크를 상대로 호각세의 결선 투표를 치를 수 있었을 정도였다. 실업자 대중에 대한 보상과 전에 없는 규모로 이뤄진 공공서비스의 민영화에 대해 단지 상징적 개혁으로 대응한 사회당은 1972년에 조직을 고무시켰었던 목표를 처음으로 이루지 못했다. 즉, 대통령직을 놓고 우익과 겨룰 수 없었다. 양자택일제는 혼란에 빠졌으며, 시라크는 1차 투표에서 선거인 명부에 등록된 유권자의 14% 미만의 지지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에 직면한 공화국’의 투사인 체했다. 르펜 반대시위에 모인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파시스트보다는 차라리 사기꾼이 낫다’는 구호로 자신들이 마주한 변변찮은 선택을 요약했다.


조스팽과 쥐뻬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 간에는 기본적인 연속성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의제를 설정하는 지배엘리트들의 능력 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이 차이는 비록 주 35시간 노동제가 대다수 노동자들의 삶에 중요한 변화를 거의 가져오지 못했을지라도(한 연구는 주 35시간 노동제가 총 노동시간을 약 3% 정도 줄였다고 추정하고 있다)3) 이를 도입했다는 사실과 교육시스템을 공격하는 것에 대한 저항의 규모 및 사회운동의 다양한 네트워크와 단체들을 포함한 항의시위의 고조를 통해 확인되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엘리트들의 우려를 국제적으로 표현했다.


미국과 영국은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낡은 질서를 깨뜨리고 새로운 성장의 기반을 다졌다. 그 다음 세대는 빌 클린턴과 토니 블레어의 등장을 보았다. 좌익을 가장한 이들은 기본적으로 이전과 똑같은 경제적 사회적 처방을 썼다. 프랑스에서는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프랑스의 핸디캡은 프랑스로 하여금 이런 카타르시스의 발산을 경험하게 해줄 인물이나 정당을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4)


이러한 인물을 기를 쓰고 찾고 있던 시라크는 장-피에르 라파랭이라는 성공할 가망이 없는 인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라파랭은 개성이나 매력의 외향적 징후를 찾아볼 수 없는 프랑스 서부 출신의 뚱뚱한 명망가였지만 반대로 상상력이 부족한 조언자들은 그를 ‘아래로부터 프랑스’를 체현한 인물로 소개했다. 그보다 앞선 시라크와 조스팽처럼 라파랭은 이제야말로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는 대단한 인물인 체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그는 2003년 여름, 주지하는 바와 같이 ‘국가를 통치하는 것은 거리가 아니다’라고 선언하면서 연금지급 자격에 대한 그의 공격을 물리치려는 공공부문 노동자들과의 격렬한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등장했다. 그러나 2년 뒤,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중적 저항은 그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그는 2005년 5월 실시된 신자유주의적인 유럽연합(EU) 헌법 국민투표에서 통과에 필요한 최소득표를 설득하는데 실패한 정치체제의 희생양이 되었다. 


체제의 허약함이 분명하게 폭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3년 대중들로 들끓었던 거리를 평정한 시라크는 이제 무기명투표나 사퇴 압력을 정면으로 무시했다. 어느 누구도 강제로 그를 사퇴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평생 선출직과 인연이 없었던 동맹자 도미니크 드 빌팽을 신임 총리로, 그리고 시라크주의에 대한 자신의 경멸을 숨기지 않았던 라이벌 니콜라 사르코지를 신임 내무장관으로 발탁했다. 1995년에 사르코지는 이렇게 선언했었다 : ‘파리시청은 더 이상 파리시청이 아니다. 그 곳은 시체안치소의 대기실이다. 시라크는 죽었으며, 그에게 필요한 것은 시체를 땅 속에 묻을 마지막 삽질뿐이다.’5) 드 빌팽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사르코지, 입각하려고 하지 않는 중도우파연합인 프랑스민주동맹(UDF)과의 내각 구성은 신자유주의적 공세를 밀어붙이는 것이 얼마나 냉철하고 빨라야 하는지를 둘러싼 지배계급 내부의 다년간의 분열을 생생하게 반영하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적 의제를 옹호하면서 내각들이 연이어 겪었던 어려움들은 강경노선의 보수 우익에 따르면, 공화제적 사회모델에 책임이 있었다.


국가와 정치 분야의 봉쇄는 제5 공화국 지배계급의 중핵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제5 공화국은 정치 지도자, 최고위 공무원 및 노동조합 지도자들 간의 삼투현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여기에서 정치적 분열을 뛰어넘어 사회-국가적 모델의 유지에 찬성하는 합의가 나온다.6)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자 사르코지는 이 모델을 헐뜯는 것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국민투표 캠페인이 한창일 때에 ‘가장 좋은 사회모델은 모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다!’7)라고 선언하며 드골주의 당 노선에서 이탈했다. 그리고 조지 부시가 로자 팍스1와 민권운동을 극찬하는 한편으로 뉴 올리언즈를 그들의 운명에 맡긴 것과 꼭 마찬가지로 사르코지도 프랑스의 도시 청년들을 초강력 분무기로 쓸어버려야 할 지역의 ‘쓰레기들’이라고 비난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이민자들에 대한 인종 모니터링, 차별철폐 조치 및 투표권에 찬성하는 인종통합정책인 이른바 ‘인종에 대한 편견이 없는’ 공화제적 모델을 포기할 것을 제안할 수 있었다. 사르코지는 신자유주의의 주창자인 후쿠야마가 프랑스의 정치에서 잃어버린 고리인 프랑스 우익 계층을 대표한다. 그의 측근들은 ‘고정관념이 없는 우익’에 대한 자신들의 열망을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줄곧 보수적이었다. 나는 질서를 좋아한다. 나는 개인의 독창성과 노력, 그리고 경제에 관해서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신뢰한다. 예를 들면, 나는 국가 교육시스템의 완전한 민영화를 지지한다.8)


사르코지가 프랑스기업가운동(MEDEF)에서 연설을 한다면 기립박수를 받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정치적 기반인 우익은 쥐뻬가 10년 전에 누렸던 것에 비해 그 폭이 훨씬 더 좁아졌으며, 전국적 지지도 역시 당시보다 훨씬 더 낮다. 그러나 유럽연합 헌법 국민투표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뒤에도 정부는 여전히 고속도로 민영화와 이익이 나지 않는 철도노선의 폐지를 발표할 수 있었으며, 법령에 따라 새로운 ‘고용계약’을 강제할 수 있었다. 이 법은 처음으로 고용계약을 맺은 첫 2년 동안에는 어떤 정당한 사유도 없이 노동자들을 해고시킬 수 있는 권리를 고용주들에게 부여했다.


프랑스 우익의 장기간에 걸친 약세와 1995년 이후 ‘사회운동’의 뚜렷한 강세를 고려한다면, 어떻게 다른 유사한 공격들과 함께, 특히 연금과 사회보장제도를 공격할 권한을 준 이러한 조치들이 실행될 수 있었는가?


세계의 저울추


프랑스는 지난 10년 동안 거대한 대중동원능력이 있음을 입증했다 ― 1995년의 파업과 시위들, 이에 필적하는 2003년의 연금제도 개혁 반대운동, 2002년 대선 1, 2차 투표 사이에 국민전선(FN)에 반대하는 항의시위의 고조, 유럽연합 헌법 국민투표에 반대하는 정치캠페인, 그리고 2000년 6월 조제 보베를 지지하는 미요 집회2와 2003년 라르작에서의 WTO 반대시위9) 등과 같은 노동조합과 반(反)세계화(altermondialiste) 네트워크들이 연합한 다양한 대중동원 등. 그러나 투쟁 수준이 매우 낮은 시기도 있었다. 이를테면, 1997년 공공부문의 파업투쟁은 사상 가장 낮은 참여율을 기록했으며, 다음해 민간부문에서의 파업일수는 이제까지의 최저기록을 갈아 치웠다.10) 게다가 사회문제가 계속 재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급과 노동자들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면서 운동을 진보와 현대화에 대한 목적이 없는 반항으로 치부해 버리려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신좌익주의는 더 이상 사회적 기준점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 대신에 통일적인 원칙도 없이, 그리고 아무도 행동에 일반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 온갖 종류의 희생자들을 동일시한다.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노력을 통해 공동체적 삶을 위한 보편적 임무를 수행했으며, 적극적인 기여를 했다. 오늘날, 중도적 주장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11)


게라시모스 모스코나스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연구에서 주장한 것처럼, 20세기에 노동자계급은 ‘이전의 그 어떤 피지배 계급보다도’ 더 두드러지고, 더 깊숙하게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12) 그에 반해서


오늘날의 노동자들(내부적으로 분할되고, 사회적으로 약화된), 나이 어린 고용인들, 불안정한 노동자들, 실업자들, 자신의 첫 직장을 찾고 있는 젊은이들, 정년 전에 퇴직한 사람들, 편친(片親) 가정들, 빈곤지역 주민들, 모든 종류의 소수자들(주로 이민노동자들), 통상의 ‘무산자들’ ― 이 사람들은 대체로 ‘탄탄한’ 자신감을 가진 사회세력이 아니라 일련의 이질적인 상황들을 대표한다.13)


모스코나스의 이러한 주장은 앞으로 논의하겠지만 상반된 목적을 가진 애처로운 노동자들을 표현하는데서 문제를 일으킨다. 한편으로 그는 노동운동이 20세기 전반기의 ‘사회학적, 상징적 중요성’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노동자계급의 문화를 정치화하려는 시도를 포기한 사회민주주의를 정당화시켜주는 구실을 한다. 또한 쇠퇴일로에 있는 사회세력이라는 관념을 뒷받침해주는 것 같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대표성의 위기를 가속화시키는 역량의 소진을 정당화시켜주는 구실을 한다.14) 감소하고 있는 노동조합 가입률, 노동유연화 책략과 경제의 세계화는 흔히 ‘노동계에 대한 자본의 지배와 착취에 입각한 분석들’이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쨌든 이런 방법으로 프랑스기업가운동(MEDEF)은 2000년 1월에 발표했던 자신의 ‘사회 재건’ 계획을 정당화시켰다. 이 계획은 결국 연금, 직업훈련, 건강 및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공격과 더 많은 규제철폐에도 불구하고 정부에게 노사관계로부터 아예 손을 뗄 것을 촉구하는 것이었다.15)


25세 미만의 4분의 1이 실업자이고, 젊은 노동자들의 거의 절반이 단기 계약직인 까닭에 새로운 세대를 노동조합 활동으로 견인하는 것은 분명히 수월한 일이 아니다. 실업과 고용불안은 시간이 지나면서 필연적으로 이들의 자신감과 조직에 큰 피해를 준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들이 노동자계급이 쇠퇴일로에 있다거나 그 삶이 이제는 공동의 관심사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변화들이 정치적 결과와 더불어 계급의 사회적 구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1천3백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노동자’(ouvriersa)나 ‘고용인’으로 분류된다. 지난 20여 년에 걸쳐 변한 것은 ‘고용인’으로 분류된 숫자가 지금은 ‘노동자’의 숫자보다 15%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직업이 명칭, 근로조건, 임금이 다를지라도 수입이 많지 않은 고용인들이 실업에 노출될 가능성은 육체노동자들의 경험과 거의 다르지 않다. 1990년대 중반에 프랑스의 빈곤가정들은 1980년대에 비해서 변함이 없어 보였지만 부유한 가정들이 그렇게 될 가능성은 더 낮아졌다.16)


프랑스 경제활동인구의 28%인 약 7백만 명의 사람들이 ‘노동자’로 공식 분류된다. 이 범주 안에서 산업노동자의 비율은 운전사, 또는 창고업, 청소나 포장 등에 종사하는 제3 부문 노동자들을 포함시켜도 감소하고 있다. 이것은 집단적 해결책을 진부한 것으로 만드는 비굴한 개인주의의 증거와는 거리가 멀다. 그 반대가 사실에 더욱 걸맞을 것이다 : ‘다른 사람들(고용주와 다른 노동자들 모두)에 대한 이들의 관계는 더 직접적이고, 더 분명하며, 범주의 프리즘에 훨씬 덜 매개된다. 따라서 각각의 사람들에게 훨씬 더 다급하고 중요하다.’17) 이와 유사하게, 봉급생활자의 구성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저임금 근로자들 중에서 노동자에서 고용인 범주로 이동한 사적 개인들에게 고용된 사람들(유모나 보모들과 같은)의 수 ― 이제는 대략 행정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동수를 이루는 ― 가 상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가 더욱 중간계급화 되고 있다는 증거나 개인주의가 만연해 있다는 증거도 아니다 : ‘대개 일시적 노동에 계속 관계하면서 고립된 고용인들은 새로운 노동자들만큼이나 사회적 우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18)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근로조건에 따라야 하는 사람들이 느낀 정신적 혼란을 경시해서는 안된다. 지난 15년간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발전들 중 하나는 국민전선(FN)이 젊은 노동자들에게서 의미심장한 득표수를 획득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아마 불확실한 노동조건을 견디며, 부모 세대의 정치나 노동조합 문화에 가장 적게 통합되었을 것이다.19) 오늘날 노동조합은 언제나 노동운동의 한 특징이었던 문제 즉, 노동자계급이 다양하며, 그 내부 구성에서 변화와 대변동을 겪고 있다는 사실에 직면해있다 : ‘더욱 복잡해질수록 계급의 다차원적 모델들은 계급들이 소멸되고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20) 노동계의 구조적 대변동은 조직의 실제적 장애로 나타나지만 조직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특히 젊은 노동자들이 불안과 실업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이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단기간에 걸쳐 고용된 사람들 중 70%가 결국은 무기한 계약을 제안받을 것이다. 그리고 가정부, 호텔 노동자, 보모 등으로 고용된 사람들은 노동조합 조직의 전통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는 직업에 종사하게 될 것이다. 20세기 초반에 프랑스노동총동맹(CGT) 대열에 합류했던 이발사, 학교 교사, 식자공들도 처음에는 그랬다.21)


실제로 지난 10년간에 걸친 투쟁의 특징들 중 하나는 대체로 조직하기 힘든 것으로 알려진 노동자들의 동원이었다. ― 90년대 중반에 파리 중심부의 빈 집들을 점유했던 무주택자 단체들, 1997-98년 겨울에 조스팽 정부를 뒷걸음질치게 했던 실업자 단체들, 90년대 중반에 전례가 없는 공적 지원을 회수하는 항의시위를 이끌어낸 불법체류(sans papiers) 노동자들의 거주권 요구, 그리고 최근에 노동조합 조직의 전통이 거의 없는 전형적으로 불안정한 고용부문 ― 맥도날드, 버진그룹, 그리고 아코르그룹의 호텔 ― 에서 젊은 노동자들이 일으킨 성공적인 파업들. 그리고 2005년 봄, 노동자들은 노동조건이 열악하기로 악명이 높고 노동조합 가입률도 매우 낮았던 까르푸 슈퍼마켓 체인점에서 5주 동안 파업투쟁을 지속했다.


노동조합들은 현장 내에 확립된 규범과 연대의 네트워크를 파괴하려는 고용주들의 노력뿐만 아니라 정치노선들에 따른 자체의 조직적 분열 문제에 직면해있다.22) 이러한 분열은 프랑스민주노조연맹(CFDT)으로부터 좌익 활동가들이 제명된 이후 지난 20년에 걸쳐 증대되어왔다. 이들은 우편과 통신산업에서 독자적인 쉬드(SUD)3 노동조합을 설립했으며, 이러한 과정은 사실상 공공부문 전체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1995년 파업을 규정하는 특징들 중 하나는 모든 주요 노동조합연맹의 대표단 및 다른 부문 노동자들과의 공동 대중집회를 처음으로 묶어세웠던 아래로부터의 단결에 대한 충동이었다. 이것이 파업운동을 추진하는 원동력의 기반이었다. 즉, 평조합원의 활동을 통해 확산되고, 일상적이고 의미 있는 시위들에서 표현된 더 광범한 지지를 끌어들이며, 파업대오에 더 큰 자극과 자신감을 주어 쥐뻬가 퇴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파업투쟁이 바로 1995년 파업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운동을 파업위원회에 의해 조직된 일자리와 노동조건에 대한 방어나 더 폭넓은 배경 속에서 경제의 세계화를 조정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23) <르 몽드>지는 1995년 12월에 이렇게 잘라 말했다 : ‘부유한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우리는 현재, 정말로 “세계화”에 대항하는 파업이 어떤 것인지를 목격하고 있다. 이 파업은 금융의 세계화와 그 결과에 대항하는 강력하고 집단적인 반발이다.’24) 1995년 12월의 파업투쟁은 프랑스는 물론이고 다른 나라 반(反)자본주의 그룹과 단체들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다. 이들의 항의는 노동운동의 투쟁과 때로는 평행했던, 또 가끔은 겹쳐지기도 했던 궤적을 그렸다. 이를테면, 이탈리아노동총동맹(CGIL)은 2002년 5월 23일 베를루스코니 정부에 대항하는 총파업을 촉구했다. 1천3백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했다. 이어서 이탈리아노동총동맹(CGIL)은 제노바 G8 정상회담에 항의하는 시위 뒤에 이탈리아에서 전개되었었던 사회포럼운동과 손을 잡았다. 사회포럼운동은 특히 2002년 피렌체 유럽사회포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와 유사하게 스페인에서도 2002년 6월, 1천만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계획했던 노동조합들은 세비야에서 이틀 후에 열릴 유럽연합 정상회담에 항의하는 시위를 조직했다. 이들은 이미 봄에 바르셀로나에서 50만 명이 참여했던 시위를 조직한 적이 있었다. 일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결론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정부의 신자유주의 계획에 대한 반대와 세계적 규모의 “관리방식”에 대한 공공연한 비난 사이에 노골적인 상관관계가 수립된 것은 전적으로 노동조합 활동에서 유래한다.’25)


‘두 달간의 동원’26)이라는 수렴현상을 불러일으킨 1995년의 동력은 왜 2003년의 프랑스에서는 같은 식으로 기능하지 못했는가? 1995년에 비해 총 파업일수가 5-6배나 더 많았고, 쥐뻬의 계획에 대항하여 철도노동자들이 계획했던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교육시스템을 통해 행동이 확산되었으며, 네 차례에 걸쳐 전국적으로 2백만 명이 동원되는 등 1995년에 비해 훨씬 더 큰 규모로 시위를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2003년의 운동은 라파랭을 패배시키기에 충분한 힘을 결집시키지 못했다. 프랑스 노동조합의 문제에 대해 경험이 풍부한 시사문제 해설가인 르네 무리오는 이를 정치적 허약함 즉, 전 기간을 통하여 운동을 단결시킬 수 있는 일련의 직접적인 목표의 부재, 정부에 제안할 근본적 대안 개발에 실패한 노동조합 지도부, 대안 개발에 평조합원들을 끌어들일 수 없는 이들의 무능력 때문이라고 말한다. 더 일반적으로는 정치적 목표를 통일시키는 포괄적인 비전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연금제도에 대한 우익의 승리가 대중동원을 격파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2003년의 경험은 십중팔구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대안적 반응의 더욱 풍부한 정식화로 이어질 성찰을 낳을 것이다.27)


그는 옳았다. 2년 후 운동은 신자유주의적 유럽연합 헌법에 반대하는 투표에서 모든 주류 정당들을 상대로 하여 노동자들의 압도적 지지를 동원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 놀랄만한 운동의 특징은 여론조사에 의해 확인되었다시피, 헌법에 반대하는 더 광범위한 정치캠페인을 촉진시켰던 ― 공공서비스와 주 35시간 노동제에 대한 공격 및 성신강림절 휴일(Whitsun bank holiday)을 폐지하려는 정부의 계획에 대항하여 ― 파업과 시위를 조직했다는 것이다. 결과는 지금까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여 거둔 가장 의미 있는 정치적 승리였다.


정치적 대안들


따라서 지난 10년은 비교적 평온한 시기에 변화를 준 강렬한 투쟁의 순간들로 점철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어떤 사람들은 낮은 수준의 파업투쟁과 선거운동이 동시에 발생했음을 지적했다. ― 경기가 회복될 때 투쟁이 더 격렬해지기 때문에 좀더 그럴듯한 동기는 경제적인 요인들에 있다.28) 장기적인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일으킨 반란은 정치적 불안정과 정부에 대한 불만의 맥락 안에서 예측할 수 없는 형태를 취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 실업률은 20년 동안 실질적인 변화없이 10% 선을 유지했다.


450만 명의 인구가 뒤섞여있는 700개가 넘는 프랑스의 교외지역들은 ‘경제적으로 곤란한’ 지역으로 공식 간주된다. 2005년 가을에 폭동이 일어났던 클리시 수 부아(clichy-sous-bois)4 지역에서는 4분의 1이 실업 상태다. 이 지역 전체 가구의 30%가 공영주택 임대료를 낼 수 없는 형편인 것으로 추정된다. 파리 북쪽의 교외지역인 세느 생 드니(Seine-Saint-Denis)의 청년실업률은 25%~40%에 이른다. 


청년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공화국’ 사회로부터 배제시키고 있는 빈곤과 차별의 상징이 되었던 학교와 직업센터에 불을 지르게 했던 분노와 좌절은 빈곤에 허덕이는 프랑스 교외지역들에 국한된 반응이 아니다. 예를 들면, 2000년 지베(Givet)지역의 셀라텍스 공장에서 해고 위협에 시달리던 섬유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비축해두었던 황산 5만6천 리터와 황화탄소 46톤을 방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다가 결국 황산 수천 리터를 거리로 방류했다.29) 다른 사람들은 이를 더 광범한 문제와 연계시킴으로써 투쟁을 확대시키려고 했다. 2003년에는 프랑스 가스 및 전기산업을 민영화하려는 계획에 반대하는 파업으로 인해 전력이 끊겨 있는 동안에도 전기노동자들은 계급의 일원으로 행동했으며, 가장 싼 요금으로 전력을 재공급했다. 이를 실행에 옮긴 소위 ‘로빈 후드들’은 ‘우리의 에너지는 팔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이렇게 행동했다.30)


노동조합 조직의 수준이 어떠하건 간에 언제나 프랑스 노동운동을 특징지었던 것은 대중파업과 항의운동이다. 1936년 6월과 1968년 5월의 파업 물결은 1986년과 1995년 겨울의 경우처럼, 평조합원들의 행동을 통해 확산되고 발전했으며, 노동조합의 관료들보다는 파업 위원회에 의해 지도되었다. 이러한 운동들은 개량주의 조직의 지도부가 자기 존재를 인식시켰을 때에만 끝날 수 있었다.


1995년과 2003년 파업의 특이성은 개량주의 조직들, 특히 프랑스공산당(PCF)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허약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운동이 자발적으로 독자적인 정치전략을 개발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 않았다. 실제로 1995년 12월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파업운동이 사실상 1997년에 사회당을 권좌로 복귀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조합 지도부에 의해 억눌렸던 2003년의 운동은 다음 해 지방선거와 유럽의회선거에서 사회당에 대한 지지 증대로 이어졌을 뿐이다. 그러나 1995년 파업이 열어젖힌 시기는 1986년의 철도파업 이후 확연해진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조합 지도부의 타협과 비관주의에 대한 혐오가 대안적인 조직 형태로 전환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현장 내에서의 공동행동의 확산과 대중적인 단체들의 발전, 노동조합 조직과 사회당, 공산당 조직의 쇠퇴 등은 결국 이들의 지도력에 도전하고 싶어 하는 활동가들의 마음을 표현한다. 활동가들은 독자적으로 일하고 싶어 한다. 사회민주주의 조직들과 불화를 빚었던 경우는 언제나 이런 방식이 반복되었다.


가장 명백한 사례는 트로츠키주의 좌파조직의 성장이다. 노동자투쟁(Lutte Ouvriere, LO)과 혁명적공산주의동맹(Lige Communiste Revolutionnaire, LCR)은 지난 대선에서 서로 공산당보다도 더 많은 표를 획득하고, 합쳐서 10%를 득표한데 힘입어 메이저급 전국조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노동자투쟁(LO)의 대표자 아를렛 라기예와 혁명적공산주의동맹(LCR)의 대표자 올리비에 브장스노는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이름이다. 그러나 그 방식은 다른 형태를 취하기도 했다. 지식인들은 프랑스 역사의 다양한 순간들에서 정치지도자들의 대리인 역할을 해왔다. 20세기로의 전환기에 발생한 드레퓌스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주류 공화파 좌익에게 독자적 지도력을 제공하지 못한 사회주의자들의 무능력은 자신들의 많은 의무 중 하나인 반론제기가 소설가 에밀 졸라에 의해 가로막히는 결과를 낳았다. 알제리 전쟁 중에는 좌익이 침묵을 지키자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가 용기를 내어 말했으며, 1995년 파업의 여파 속에서는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수세적으로 신자유주의적 합의와 타협에 이른 사람들을 이끌었다. 또한 부르디외는 활동가들이 논쟁해야 할 필요성을 이해했으며, 이를 위해 다른 대중적인 단체들과 함께 출판사를 설립했다. 유럽연합 헌법이 의거하고 있는 주요 논거들에 대한 반박을 통해 국제금융거래과세연합(ATTAC)5과 코페르니쿠스 재단6이 수행한 역할은 최소한 국민투표 캠페인동안 공산당이 수행한 노력에 필적했다. 국제금융거래과세연합(ATTAC)은 금융투기에 대한 과세 요구를 제기한 단체로부터 각양각색의 정치적 쟁점들을 전부 다루는 4만 명에 이르는 활동가 네트워크로 발전했다. 이는 정치적 대안과 이를 이루려는 수단에 대한 갈망이 어떻게 20세기 내내 좌익적 전망을 취했던 개량주의 정당 조직들의 쇠퇴를 중화시키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인상적인 사례들 중 하나이다.


이런 활동가들의 네트워크들은 수백만 명을 행동으로 견인하는 주요한 동원의 핵심에 있었다. 그러나 매번의 동원이 다른 면에서 사회민주주의의 쇠퇴를 입증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사회운동의 능력 부족을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조스팽은 파업의 여파 속에서 자신의 복수좌파 프로젝트를 지지하는 반(反)신자유주의 좌익의 상당한 부위들을 억제하기 위해 1995년의 우익의 혼란을 이용했다. 이 프로젝트는 선거당일 밤에 조스팽을 극적인 정계 은퇴로 내몰았던 2002년에 결딴나버렸다. 그러나 소위 ‘좌익 중의 좌익’도 르펜이 조스팽을 패배시키자 당황했으며, 르펜 반대시위에 참여했던 수백만 명에게 시라크에게 투표할 것을 호소한 사회당의 항변을 단지 앵무새처럼 되풀이했을 따름이었다. 그 후 2003년에 연금제도 개혁에 반대하는 대대적이고 지속적인 운동에도 불구하고 라파랭과 주요 노동조합연맹들의 지도부에 의해 의표를 찔렸던 많은 활동가들은 2004년에는 극좌세력이 아니라 사회당에 투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와 유사하게 2005년 유럽연합 헌법 국민투표에서 좌익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라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사임을 피할 수 없게 그를 강제하는 공동캠페인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항의운동들에 뒤이어 사회당의 선거운세가 되살아난 것은 모스코나스가 강조했던 점을 더욱 강화시켜준다. 즉, 사회민주주의와 그 일반 유권자 간의 유대는 나빠지고 있지만 단절되지는 않는다. 한편으로 노동자들은 지난 100년 동안 처음으로 사실상 정치적 대표를 빼앗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회민주주의의 조직적이고 제도적인 하부구조는 ‘그 중심이 크게 갈라지고, 그 외형이 변했을지라도’ 남아있으며,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더 이상 중산층의 이해관계를 지킨다는 ‘의미의 생산자’로 역할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에 걸쳐 수립되는 정치적 전통은 무너뜨리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사회민주주의의 쇠퇴는 일직선적인 과정이 아니다. 다만 살아남아 있는 구조와 함께 잔존하는 사회민주주의적 감수성과 이것들을 약화시키고 있는 시장의 사회자유주의적 포위 사이의 긴장에 기반을 둔 ‘실현 불가능한’ 동일성을 맴맴 돈다. 이러한 ‘연대의 이치를 깨뜨리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하는 이중의 실현 불가능성’은 사회민주주의가 평범한 노동자계급 유권자를 계속 견인하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노동자들을 공공생활에서 소외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31)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더 이상 사회변혁 강령을 중심으로 결집할 수는 없지만 기본 정도의 선거 지지는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살펴본 것처럼, 노동현장을 변화시키고 공동체와 연대의 네트워크를 분쇄하려는 고용주들(및 국민전선(FN)과 같은 정치세력들)의 공조체제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타협을 ‘현실적인’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현장의 자신감과 투쟁성에 일정한 영향을 준다. 이는 특히 최근에 패배를 겪었던(다농, 막스앤스펜서, 미슐랭)7 민간 부문에서는 사실이다. 동시에 노동조합의 가입률 감소와 사회민주주의의 쇠퇴는 노동자계급의 ‘소멸’에 의거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사회학적 현상으로 인식되어서는 안된다. 지난 10년에 걸친 공산당과 사회당의 지지도 쇠퇴는 정권 차원에서 이루어졌던 타협들에 대한 불만을 반영하는 정치적 근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는 영국은 물론이고 프랑스에서도 응집력 있는 정치세력이었던 적이 없으며, 역사적으로도 사회당과 공산당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런 현상은 프랑스의 주요 노동조합연맹들의 위기에도 꼭 들어맞는다. 파편화된 노동조합운동이 노동자들의 10분의 1만을 조직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지도력이 영향력이 있지만, 다른 곳에서처럼 획일적이거나 심하게 관료화되지는 않았음을 의미한다. 2003년 연금제도 개혁에 반대하는 파업의 노동조합 지도부는 매일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별개로 아홉 차례에 걸쳐 투쟁을 분산시킴에 따라 운동을 무산시켰다. 이들에 대한 실망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2003년 6월 마르세유에서 열린 대중집회에서 프랑스노동총동맹(CGT) 지도자 베르나르 티보를 ‘총파업!’ 함성과 함께 야유와 휘파람으로 맞게 했다. 그리고 2003년 운동에 뒤이어 어림잡아 10만 명 정도가 프랑스민주노조연맹(CFDT)을 탈퇴했던 것도 어떤 근본적인 사회학적 요인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와 똑같은 분노 때문이었다.32) 


1995년 이후의 파업노동자, 실업자, 불법 체류자, 무주택자 운동들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희생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독자적 권리를 위해 싸우는 행동가로서의 지위를 거듭 주장했던 것이다. ‘다함께!’, ‘우리의 세상은 팔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등과 같은 운동의 구호들은 매우 일반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공세에 저항하는 이들의 힘과 연대에 대한 확신을 표현한다. 게다가 트로츠키주의 좌파의 선거운동은 노동자계급의 자주적 행동을 위한 잠재력을 강조함으로써 사회민주주의의 비관주의를 반대하는 강령에 의거하여 선거를 치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운동과 그 정치적 표현은 분명히 2005년 5월 국민투표 때까지 유사하거나 연속적인 리듬에 따라 전개되었다. 국민투표 캠페인기간 동안 이뤄진 혁명적공산주의동맹(LCR)과 프랑스공산당(PCF) 및 일부 사회당 좌파가 포함된 급진 좌파 연대네트워크의 연합은 장기적인 반(反)신자유주의 동맹을 실체적인 가능성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운동에 여전히 무관심한 경향은 아직도 일부 극좌분자들의 골칫거리다. 노동자투쟁(LO)은 교외지역의 청년들과 노동자계급이 어쨌든 서로 연관이 없는 존재인 것처럼 이들을 대치시킴으로써 2005년 11월 폭동에 대응했다. 더 심하게 이 조직은 폭동이 ‘깡패들’과 잡범들이 벌인 일이라는 인종주의자들의 상투적인 표현을 그대로 흉내내기도 했다. 이 조직은 이들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의식이 갖추지 못했다고 공격했을 뿐만 아니라 반전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이들의 연대의식 결여를 맹렬히 비난했다.33) 노동자투쟁(LO)이 정치캠페인들(반(反)인종주의, 반(反)파시즘, 사회포럼운동, 유럽연합 헌법 국민투표)에 착수하거나 참여하기를 시종일관 거부하고 있는 것은 그 개입이 대체로 정해진 선거 일정에 따르거나 파업과 항의시위가 돌발하는 경우에 따라 대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운동의 발전에서 역동적 역할을 수행하려는 이 조직의 역량은 매우 제한적이다.


노동조합이 청년들을 조직화하는 데서 겪었던 어려움들은 서로 다른 노동자 그룹들을 묶어세우는 데서 정치적 쟁점이 훨씬 더 큰 중요성을 가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반전 활동가들이 공동 반전운동을 구축하기 위해 무슬림과 함께 일하려고 애썼다면, 좌익 정치세력과 대체로 프랑스에서의 반(反)인종주의운동을 기피해온 이민가정 청년들 간의 진정한 협력을 이룰 실재적 가능성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 대신에 반전운동은 테러리즘에 관해 미 제국주의와 같은 행보를 보이고, 흑인과 아랍계 주민이 많은 지역으로는 행진하지 않기로 결정함에 따라 이러한 협력의 가능성을 제한했다. 게다가 좌익의 일 부위들이 무슬림 소녀들에게 학교에서의 히잡 착용을 금지시킨 ‘공화국의’ 복장 규정 강요를 지지하고,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싸움 이전에 학교에서의 정교 분리를 옹호하기로 결정했을 때 이러한 오류들은 더한층 심해졌다. 이는 급진 좌파가 해야 할 기본적 역할들 중 하나 즉, 오명을 뒤집어쓴 채 심한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는 소수자들에 대한 실제적 방어에 착수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 사건은 광범한 영향을 끼쳤다. 만약 히잡 사태 중에 이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난 실제적인 연대를 보여주거나 이들을 반전운동에 끌어들이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했었다면, 좌익이 지난해 폭동으로 나타난 교외지역의 젊은이들에게 대안적 장을 제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좌익은 최소한 폭동 후 교외지역에서 일어났던 다음에 할 일은 무엇인가를 둘러싼 정치적 토론을 더 나은 위치에서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 평론가는 2003년 파업의 결과를 이렇게 말했다 : ‘흔히 분노와 반항이라는 반응들을 매개하는 이런 분열된 반발적인 충돌 속에는 자생적 집단과 공공연한 사회위기의 발생 가능성이 상존한다.’34) 이런 분노의 표출은 장기간에 걸친 정치적 불안정과 위에서 약술한 계급 재구성이라는 더 폭넓은 맥락 속에서 특징 지워진 상황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는 모든 종류의 투쟁에 일관되게 결합하고, 변화를 어떻게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좌익에게 커다란 책임을 부여한다. 대체로 혁명적 좌익은 유럽의 다른 곳에서처럼 두 가지 임무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신자유주의와 싸우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결합하고, 정치와 선거에서 주류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일관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2005년 봄에 급진 좌파에 의해 조직된 유럽연합 헌법에 반대하는 거대한 캠페인은 이러한 동맹의 가능성이 이미 영국과 독일에서 형성된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프랑스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둘째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지속적이고 실행 가능하며 실제적인 저항은 사회민주주의가 자신을 어떻게 가장하든 결코 인도할 수 없었던 평등과 해방을 약속하는 사회질서로 자본주의를 대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실제로 입증하기 위해 더 광범위한 운동 속에서 독자적인 혁명적 경향을 유지하고 건설하는 것이다.




1. 2005년 11월 13일자 <Le Monde>지.


2. Mouvement des entreprises de France.


3. 캐나다는 주 35시간 노동하지 않고도 비슷한 하락을 겪고 있다. P. Askenazy, Les Desordres du travail(2004, Paris)를 참조하시오.


4. F. Fukuyama, Quelle ambition pour la France?(2002, Paris) 중에서, P. Aries, Misere du sarkozysme: Cette droite qui n’aime pas la France(2005, Paris), 251쪽에서 인용.


5. P. Aries, 앞의 책, 47쪽에서 인용.


6. N. Baverez, La France qui tombe(2003, Paris), P. Aries, 앞의 책, 35쪽에서 인용.


7. 2005년 5월 14일자 <Le Monde>지.


8. E. Mignon, 2004년 9월 3일자 <Le Monde>지, P. Aries, 앞의 책, 118-119쪽에서 인용.


9. 이런 운동들에 대한 더욱 자세한 서술은 <International Socialism>에 게재된 다음의 기사들을 참조하시오: J. Wolfreys, ‘Class Struggles in France’(1999, Autumn); ‘The Centre Cannot Hold : Fascism, the Left and the Crisis of French Politics’(2002, Summer); and ‘How France’s Referendum Caught Fire’(2005, Summer).


10. J-M. Pernot, ‘Pleins et delies de la contestation. Du repli de la greve au mouvement sur les retraites’, in S Beroud and R Mouriaux, L’annee sociale 2003-4 (2004, Paris), 122쪽.


11. M. Wieviorka, ‘L’air du temps est favourable au movement surfant sur les peurs et les inquietudes’, 2005년 10월 14일자 <Liberation>지.


12. 계몽 자본가계급의 배제 가능성에 대한 모스코나스의 주(註)와 G. Moschonas, In the Name of Social Democracy : The Great Transformation : 1945 to the Present(2002, London), 305쪽.


13. 앞의 책, 307-308쪽.


14. 앞의 책, 308-309쪽.


15. E-A. de Selliere, 2000년 1월 27일자 <Le Monde>지.


16. E. Maurin, L’Egalite des possibles : La nouvelle societe francaise(2002, Paris), 10-11쪽.


17. 앞의 책, 36쪽.


18. 앞의 책, 46쪽.


19. N. Mayer, Ces Francais qui votent FN(1999, Paris), 75-97쪽을 참조하시오.


20. M. Hout, C. Brooks and J. Manza, ‘The Persistence of Classes in Post-Industrial Societies’, International Sociology, vol 8, no 3, 1993. G. Moschonas, 앞의 책, 308쪽에서 인용.


21. J-M. Pernot, Syndicats : lendemains de crise?(2005, Paris), 313-314쪽.


22. M. Pialoux and S. Beaud, Retour sur la condition ouvriere(1999, Paris).


23. N. Parsons, French Industrial Relations in the New World Economy(2005, Oxford), 167쪽.


24. 1995년 12월 7일자 <Le Monde>지.


25. E. Agrikolianski, O. Filleule, N. Mayer(eds), L’altermondialisme en France : La longue histoire d’une nouvelle cause(2005, Paris), 311쪽.


26. 앞의 책.


27. S. Beroud and R. Mouriaux, 앞의 책, 22-23쪽.


28. J-M. Pernot in S. Beroud and R. Mouriaux, 앞의 책, 122쪽.


29. C. Larose, S. Beroud, R. Mouriaux and M. Rabhi, Cellatex : Quand l’acide a coule (2001, Paris).


30. S. Beroud, Les Robins des Bois de l’energie(2005, Paris).


31. G. Moschonas, 앞의 책, 300-301쪽.


32. G. Filoche, ‘Les braises durables du mouvement social’, www.legrandsoir.


33. 2005년 11월 4일, 11일자 <Lutte Ouvriere>지.


34. J-M. Pernot in S. Beroud and R. Mouriaux, 앞의 책, 134쪽. 


  1. 1955년 12월 1일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남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의 한 버스에서 흑인 여성인 로자 팍스(Rosa Parks)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남부에는 버스 등 공공장소에서 흑백인종이 함께 있지 못한다는 '짐 크로'(Jim Crow) 법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팍스는 14달러의 벌금과 함께 구금형에 처해졌다. 이 부당한 판결은 흑인들의 381일간 버스승차 거부운동으로 발전했다. 1년이 넘는 이들의 무폭력행진 '승차 거부시위'는 결국 "흑백인종 분리는 '명백한 불평등'”이라는 대법원의 판결을 이끌어냈고,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Civil Rights Act) 제정으로 이어졌다. 승차 거부사건 이전부터 '유색인종향상위원회'(NAACP)에서 흑인 민권을 위해 일해왔던 그녀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디트로이트로 옮긴 이후에도 흑인 청소년 인권운동을 위해 살았다. 이런 로자 팍스가 2005년 10월 25일 숨을 거뒀다. 조지 부시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여성을 기억하며" 경의를 표했다. [본문으로]
  2. 조제 보베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반(反)세계화 운동가이자 농민 운동가이다. 그는 1999년에 프랑스 남부 도시인 미요에 거의 완공 중이던 미국 주도의 세계화의 상징인 맥도날드 가게를 트랙터로 밀어버렸다. [본문으로]
  3. 1998년 '연대, 단결, 민주'를 모토로 공식 출범한 이 노동조합 연합체는 총 42개의 독립적인 노동조합 및 노동조합연맹들을 아우르고 있으며, 조합원수는 약 8만여 명이다. [본문으로]
  4. 파리 교외 북쪽에 위치한 지역. 2005년 10월 27일 이 곳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을 피해 달아나던 아랍과 아프리카계 소년 중 2명이 감전사하고 1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이민자 소요가 시작되었다. [본문으로]
  5. Association for a Taxation of financial Transactions in Assistance to the Citizens. 1998년 6월 프랑스의 <르몽드 디쁠로마띠끄>의 제안에 의해 출발한 단체로 국제적인 반(反)세계화 및 반(反)신자유주의 운동단체이다. 정식 명칭은 시민 지원을 위한 국제금융거래과세연합. [본문으로]
  6. Foundation Copernic. 사회운동단체, 노동조합, 좌익정당들의 공동 연구단체. [본문으로]
  7. 다농(Danone)사 : 프랑스의 식품회사로 세계 최대의 요구르트 업체. 막스앤스펜서(Marks and Spence)사 : 영국의 대형 의류 유통업체. 미슐랭(Michelin) : 프랑스의 세계적인 타이어회사.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