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중국과 세계 자본주의: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11월호

중국과 세계 자본주의: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6. 09:22

중국과 세계 자본주의:

중국의 세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Aufheben> 14(2006)

 

 

중국의 변화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가 얼마나 광대하고 엄청난 것인가를 말로 다하기는 아마 어려울 것이다. 불과 몇 년 사이에 현대적인 대도시들이 속속 등장하고 거대 산업들이 출현했다. 과거에 중국은 핵무기와 대규모 군대를 갖고 있다는 지정학적 중요성이 있을 뿐 기묘하고 전제적인 농업 후진국으로 널리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제 중국은 세계무대에서 주요한 경제 강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몰락으로 치닫고 있다는 예견이 지금까지 되풀이되었지만, 중국은 지난 20년 이상 연 평균 10%에 이르는 엄청난 보폭으로 경제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25년 동안 중국 경제의 규모는 4배로 늘었다. 게다가 중국 경제는 단지 성장만 한 것이 아니라 세계 경제에 점점 더 많은 충격을 안겼다. 20년 전에 세계 무역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무시할 만한 정도였지만, 이제는 13%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빠른 경제 발전이 계속되자, 많은 이들은 중국이 계속해서 전진하는 게 필연적인 일로 여기게 되었다. 지난 세기가 미국의 세기였다면, 중국은 빠르게 성장하는 이웃 인도를 바로 뒤에 달고서 아시아의 세기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고 예견된다. 확실히 우리가 과거로부터 단순하게 추론해 본다면, 이것은 사실처럼 보인다. 이미 중국은 세계 4대 경제국이 되면서 영국을 따라잡았다. 만일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세계 주요 경제대국에 비해 높은 수준으로 유지된다면, 중국은 독일과 일본을 다음 10년의 초반부에 따라잡고 세계 2대 경제국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번 세기의 두 번째 사반세기 안에 어느 시점에선가 중국은 미국을 따라잡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경고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것 같다. 최근 몇 년 동안 부르주아 언론에 넘쳐나는 중국에 관한 정신없는 통계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투자 세일즈맨들이 최근 쏟아내는 말들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중국은 돈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닷컴 벼락경기가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었듯이, 큰 돈이 만들어지는 곳에는 과장된 선전이 있기 마련이다.

그동안 중국이 보여준 변화와 세계 자본축적으로의 통합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미래의 발전경로를 이해하는 데서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한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중국의 변화는 1970~80년대 세계 자본주의 구조조정을 통해 초래되었던 제조업의 거점이동(재배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 왔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경제 성장은 자본주의 발전과, 그 안에서 그리고 그에 맞서 등장했던 계급투쟁에 중요한 충격을 안겼다. 만일 중국이 세계의 새로운 패권 국가로서 미국을 대체할 것이라면, 이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전례 없는 정치적 경제적 지각변동을 수반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중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한 것은 중요한 문제들을 던진다. 그동안 중국에서 벌어진 변화는 무엇인가? 중국은 지금의 빠른 경제성장을 지속할 것인가? 중국은 실제로 미국 패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자가 될 수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이것이 세계 자본주의와, 그 안에서 그리고 그에 맞서 벌어질 계급투쟁에 갖는 함의는 무엇인가?

이것들은 확실히 폭넓고 만만치 않은 문제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글에서 다소 불확실한 답변들만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중국의 경제 변화와 세계 자본축적으로의 통합에 담긴 현재의 역사적 동학에 관하여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객관적 경향들을 끌어내려고 시도하는 것에 한정할 것이다. 우리가 직접 마주하는 지정학과 세계 정치경제학의 구체화된 용어들로 우리의 분석을 전개하듯이, 계급투쟁은 오로지 자신의 결과 안에서 벌어질 것이다. 물론 이것이 일면적일 것임을 우리는 인정한다. 우리는 단지 자본의 논리 자체만을 고려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글을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문제에 대응하는 첫걸음으로 여긴다. 다음 호에서 우리는 이 글에 이어 중국의 변화가 계급의 재구성과 새로운 계급투쟁을 어떻게 초래하고 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 글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 우리는 최근 몇 십 년 중국의 경제 변화를 간략하게 고찰할 것이다. 2부에서 우리는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중국이 세계 자본축적으로 통합되도록 이끌었는지, 그리고 이것이 중국과 세계에 갖는 함의는 무엇인지를 보게 될 것이다.

 

 

 

1부 마오 시대에서 지금까지의 중국

 

 

들어가며

 

중국의 변화에 관한 지배적인 관점, 그리고 부르주아 언론에서 이루어지는 대다수 분석들이 그 밑에 깔고 있는 관점은 이른바 점진적인 신자유주의(fabian neo-liberalism). 이 관점에 따르면, 중국은 1978년 자유주의 경제개혁이 시작된 이래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향해 전환하는 과정 속에 있다.

마오 시대에 중국은 압도적인 농민 경제로서 빈곤과 경제 불황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고 우리는 듣는다. 당시의 소련처럼, 중국은 본질적으로 관료적이고 비효율적인 국가경영 명령경제로 인해 수십 년 동안 정체해 있었다. 그러나 마오의 죽음과 함께 덩샤오핑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의 계몽된 분파는 그들의 방법이 갖는 잘못을 인식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옳을지 몰라도 빈곤으로 점철된 마오주의를 버리고, 자유로운 경제개혁을 가져오기 위해 기득권층의 특권을 극복하는 길고 어려운 과정을 시작했다. 마르크스보다는 아담 스미스에 의지하면서, 덩은 중국 사람들에게 스스로 부자가 됨으로써 중국을 부유하게 하라고 호소했고, 국가를 대신해서 시장의 역할을 확장했다.

이어서 마오 시대에는 오래도록 작동하지 않고 있었던, 중국 사람들 고유의 기업가적 성향과 결합된 시장의 본질적인 경제적 우월성이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빠른 경제성장과 번영을 이끌어 냈다고 결론 내려진다. 점진적인 신자유주의자들이 볼 때, 중국은 성공적인 신흥 시장경제의 모델이며, 명령경제로부터 자유로운 시장경제로 전환하려고 추구하는 모든 나라들에게 교훈을 제공한다.

그러나 1970년대 마오 치하의 중국은 현대화와 공업화를 추구하며 경제를 발전시키려는 3세계를 위한 모델로 받아들여졌다. 꼭 좌파가 아닌 사람들도 다수를 포함하여 서구의 성장 경제학자와 이론가들이 볼 때, 중국식 사회주의 모델은 높은 성장률로 공업화를 달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압도적 다수 주민의 기본적 요구를 해결함과 동시에 부와 소득의 높은 수준의 평등과 결합시킨다는 점에서도 성공한 것이었다.

실제로 사회주의 시각에서 점진적인 신자유주의자들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볼 때, 마오의 죽음 이후 도입된 자유주의 경제개혁은 몇 천만의 중국인을 부유하게 만들면서 부유한 서구식 중간계급을 창출해 내긴 했지만, 이는 몇 억 명을 경제적 불안정과 착취 속에 빠뜨리며 이루어진 것일 뿐이었다. 또한 이들이 볼 때 자유로운 시장경제로의 전환이란 단지 자본주의 복구를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그들이 정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지난 20년 동안의 경제 개혁은 매우 무자비한 디킨스식 자본주의로 귀결되었다. 몇 억의 중국인들은 마오 시대에 주어졌던 초보적인 의료혜택조차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몇 천만이 실업 상태에 있고, 거지들과 노숙자들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공장에 다니는 이들도 하루 16시간을 일하면서 한 달에 하루밖에 쉬지 못하도록 강제당하고 있으며, 안전보건을 위한 기준들도 어김없이 무시되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이 이른바 자유로운 시장경제로의 전환아래 숨은 현실을 잘 폭로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도덕적인 비판에 머물러 있다. 마오 시대 노동계급과 농민들에 대한 착취를 생산력을 발전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받아들이는 이상, 그들은 덩의 자본주의 복구또한 생산력의 빠른 발전을 낳았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최근의 변화를 초래한 중국의 경제발전을 개괄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세 개의 뚜렷이 구분되는 국면을 정의할 것인데, 우리는 그것이 성숙한 자본주의로 중국이 이행하면서 겪은 국면들이라고 본다. 첫 번째 국면은 마오 시대 국가자본주의 발전의 시기이다. 두 번째 국면은 1980년대 덩 시대에 도입된 자유주의 경제개혁의 시기인데,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 시기는 막다른 골목으로 치달아 가다가 1989년 천안문 사건을 계기로 막을 내렸다. 이 두 국면은 세 번째 국면, 즉 세계 자본축적으로 중국이 통합된 시기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전제조건으로 작용했는데, 뒤에서 논증하겠지만 이 점은 지금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서 매우 중요하다.

 

 

마오 시대의 중국

 

194910월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은 중국공산당이 이룬 비범한 성취에 대한 보답이었다. 28년 전에 러시아 혁명에 영감을 받은 몇 십 명의 지식인들이 만들었던 중국공산당은,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인식했듯이 중국의 민족 부르주아 혁명을 완성했다. 30년에 걸친 군벌통치·내전·일제점령 뒤에 중국은 사실상 다시 통일되었다. 오랫동안 중국의 자본주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던 매판자본과 지주, 그리고 그 동맹자들에 대한 몰수를 단행하면서 민족적 자본축적의 길이 열린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이 혼합경제와 중국 자본주의의 점진적인 발전을 이끌어 나갈 수 있으리라는 모든 희망은, 그들이 서 있는 후진적인 경제적 조건에서 중국공산당이 가장 원했던 바였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선전포고한 첫 해에는 미군이 중국 국경 근처 유효공격범위에 있었다. 인민해방군은 종종 압도적인 적의 화력에 마주쳤지만 미군을 격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백만이 넘는 사상자가 났다.

한국전쟁은 영웅적인 승리로 여겨졌지만, 다만 시간을 벌었을 뿐이라고 해야 할 승리였다. 조만간 미군이 민족주의자들의 피난처인 대만에서부터 다시 침략해 오리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에게는, 만일 미 제국주의에 맞선 민족혁명에서 힘들게 얻어낸 성과들을 지켜내려 한다면 반드시 현대적으로 잘 무장한 군대를 육성해야 한다는 점이 곧 명확해졌다. 그러나 현대적인 군대는 탱크, 대포, 전함, 고성능 폭탄들이 필요했다. 공격을 물리치는 데 필요한 규모로 이것들을 마련하려면 중국은 중공업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이 볼 때, 중국이 공업화해야 한다는 점, 그것도 빠르게 해야 한다는 점은 자명한 일이었다.

1952년 중국은 명령경제와 국가자본주의를 향해 단호하게 이동했다. 국유화 프로그램이 실행되기 시작해 4년 안에 거의 모든 무역·상업·공업이 공공소유로 전환되었다. 빠른 공업화라는 원대한 계획을 위해, 여전히 압도적인 농민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으려고 제15개년 경제계획이 고안되어 도입되었다.

이제 유일한 고용주로서 중국 국가는 자신의 다양한 고용 부서를 통해 누가 어디서 언제 일할 것인지를 결정하면서 노동에 대한 관리를 떠맡았다. 중국 국가는 또한 전국적으로 8단계 임금등급을 실시했다. 정부는 농민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을 올렸는데, 이것은 종종 현물로 징수되었다. 주요한 농업 생산에 대해 낮은 가격을 지불함으로써 유일한 구매자로서 농민을 착취했다. 그 결과 노동자들과 농민들 그리고 당-국가 하급 계층들의 소득은 최저 수준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비록 임금과 소득이 최저 수준으로 억눌리긴 했지만, 국가는 단웨이 체제와 철밥통정책을 통해 안정성을 보장했고 근로주민 대중에게 기본적인 복지체계를 제공했는데, 이것은 전쟁과 불안정의 나날들만을 겪어 온 당시의 대다수 중국인들에게는 큰 혜택이었다.

그 결과, 국가는 노동자들과 농민들에게서 전유하는 잉여생산을 극대화하면서도 사회적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잉여생산은 경제계획을 통해 중공업 건설과 군수 생산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마오 시대 대부분 동안 국가생산의 30% 이상이 투자로 돌려졌는데, 그 정점인 1957년에는 거의 50%에 이르렀다.

러시아의 원조와 기술지원으로 제15개년 계획은 뛰어난 성공을 거두었다. 매우 야심차게 설정된 목표치들 대부분이 애초 일정보다 빨리 달성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에 이르자 빠른 공업화를 이루려는 계획이 전통적인 중국 농업의 낮은 생산성이 부과하는 한계 속으로 곧 갇히게 될 거라는 점이 명확해져 갔다. 지주들에 대한 몰수에 이어 단행된 토지개혁의 결과 토지는 개별 농민가구들의 수중에 있었다. 농민대중 대다수는 점점 늘어나는 공업 노동자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들 자신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양 이상을 넉넉하게 생산해 낼 능력조차 거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제출된 것이 농업 집단화였다. 개별 농민가구들이 가진 작은 땅을 보다 큰 단위로 통합하는 것은, 논쟁이 벌어지긴 했지만, 현대적인 농업기술의 도입, 노동력의 보다 합리적인 사용, 그리고 무엇보다 농업의 기계화를 촉진시킬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부유한 쿨락농민, 즉 중국공산당의 농민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어렵게 하고 농민에게 생산증대를 호소하는 정치캠페인에 나설 능력을 침해할 수 있는 독자적인 계급의 출현을 앞질러 막는 수단으로도 여겨졌다.

처음에 국가계획 담당자들은 점진적인 집단화 프로그램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완수되기까지 아마 거의 한 세대가 걸릴 예정이었다. 그들에게 최우선 지상과제는 중공업 건설이었으며, 트랙터공장 건설처럼 농업에 투입될 것들을 생산하는 공업에 할애할 자원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마오는 기계화 이전에 집단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집단화 프로그램을 아주 빠르게 진행하도록 압박했는데, 이는 대약진운동이라는 재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비록 농업과 공업을 거대한 인민공사(人民公社)로 묶으려는 더 웅대한 계획이 포기되긴 했지만, 이른바 마오주의 발전모델의 본질적인 특징은 그대로 남았다. 인민공사의 권위 아래, 농사 일정이 바쁘지 않은 시간 동안 다소 한가한 농업 노동력은 토지개간, 관개작업, 도로건설 등 야심찬 계획들에, 그리고 화학비료공장이나 트랙터수리소처럼 농업에 소요되는 물품들을 생산하는 농촌공업들을 세우고 운영하는 데 동원되었다.

대규모 건설이나 개간사업에 매우 노동집약적인 기술을 사용한 까닭에, 농업 발전은 공업 부문에서의 생산투입물이나 생산도구를 최소 수준에서만 필요로 하였다. 농업경제 발전은 빠른 공업화와 나란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마오가 말한 것처럼, 중국은 두 다리로 걸을 수있었다.

그 결과 1976년 마오가 사망했을 때, 중국은 경제 불황의 진창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치·경제적으로 혼란스러웠던 대약진운동(1958~61)과 문화혁명(1966~69) 시기를 뺀다면, 마오시대에 공업생산은 연평균 10% 이상 성장했고, 중국을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큰 공업생산국으로 바꿔 놓았다. 농업생산 또한 비록 공업 부문보다는 훨씬 천천히 확대되었지만 인구증가는 앞지를 수 있었다.

그러므로 마오의 전제적인 명령경제는, 제국주의 간섭을 차단하며 국가 통합력을 유지함으로써, 그리고 노동자들과 농민들에 대한 높은 착취율을 통하여, 자본주의를 향한 중국의 이행에서 다음 국면을 위한 기초를 제공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개혁 물결

 

마오가 죽었을 때 중국은 소련처럼 불황에 빠져든 것도 아니었고 심한 경제위기에 빠진 것도 아니었지만, 검은 구름이 짙게 드리울 조짐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첫째, 1950년대 이래 보건복지 수준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근로주민 대중의 개인소득은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 중국공산당 지도부 다수는 이런 상황이 얼마나 오래 계속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둘째, ‘농민들에게 배우도록청년들을 농촌으로 보내는 인기 없는 정책이 포기되면서 도시 실업이 점점 문제가 되고 있었는데, 특히 당 관료들의 교육받은 아들딸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명령경제 안에서도 국가는 전국적인 임금등급을 상향조정함으로써 노동자들과 국가 관료들의 소득을 간단히 올려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농민들에게도 농업세금을 삭감하고 농업생산물 가격을 올려줄 수 있었다. 동시에 국가는 실업자들에게도 일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근로주민을 재생산하는 데 소요되는 필요노동을 증대시킬 것이었고, 그러므로 국가가 축적을 위해 전유하는 잉여노동의 양을 줄이게 될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늘어난 개인소득은 일단 소비되기 시작하면 소비재 수요를 상승시키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었다. 이것은 줄어든 잉여노동의 많은 부분이 중공업과 군수생산 대신에 소비지향 산업 확장에 투자되어야 할 것임을 뜻했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 당시 1950년대에 건설된 중공업의 대부분이 유효기간의 끝에 도달하고 있어서, 다가오는 10년을 전후해서 대체되거나 현대화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반대쪽에는 중공업 투자에 사용될 잉여생산의 양을 늘려야 할 경제적 과제가 놓여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확실한 해결책은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것이었으나, 마오시대에 성장한 전제적인 명령경제는 이러한 해법에 만만치 않은 장애물이 되었다. 첫째, 중국의 고립이었다. 특히 1960년 소련과 관계를 단절하면서 중국 공업의 대부분은 기술적인 후진성을 면하지 못했다. 자본축적은 상당히 확대되었지만, 이는 1950년대와 거의 다름없는 기술을 가진 공장들을 그저 더 많이 건설하는 것일 뿐이었다. 결국 노동생산성은 거의 상승하지 않았다.

중국이 소련에서 노동생산성 하락으로 귀결되었던 고질적인 낭비 현상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단웨이 체제를 매개로 해서 공업 노동계급의 다수를 정치적 집단적으로 당-국가로 통합해 낸 덕분이었다. 그러나 단웨이 체제는 새로운 노동규율을 도입하여 노동 강도를 높이고 착취율을 올리려는 시도들을 막는 역할을 했다. 게다가 단웨이 체제는 노동자들에게 공장운영을 둘러싸고 거부권을 행사할 집단적인 힘을 부여했다. 공장 경영자들과 작업장 당 비서들은 당-국가의 상층에서 부과하는 생산증대 과제를 수행하려면 그만큼 그들의단웨이로부터 충성을 끌어내야만 했다. 비록 공장 경영자들이 휘하의 노동자들을 평생고용보장과 전국적으로 설정된 임금등급을 갖고 휘어잡는 경향이 있었다고 해도, 노동 강도 강화에 대해서는 그 저항을 극복할 당근도 채찍도 갖고 있지 못했다.

공업과 도시 지역에 관해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이 부딪친 문제들, 즉 저임금과 도시 실업으로 인한 잠재적인 불안, 그리고 뒤떨어진 산업설비를 대체하고 낮은 공업 노동생산성 향상을 해결하는 게 필요하다는 문제들은 장기간의 본질적인 문제이긴 했지만, 그래도 덜 심각한 문제였다. 훨씬 더 절박한 문제는 농업에서 제기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1980년대에 자유주의 경제개혁의 눈사태를 촉발시킨 것은 바로 농업문제에 대처하려는 시도였다.

농촌에서 지주와 일제점령군의 약탈에 맞선 보호자이자 빈민과 피억압자들의 옹호자였던 중국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의 역할은 1950년대까지는 여전히 중국 농민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었다. 당시 집단화 캠페인은 점점 더 도시에 중심을 두게 된 중국공산당에 대한 지지를 농촌 지역에서 소생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 그런 기억들은 희미해졌다. 농민들에게 중국공산당은 지역 건설계획을 위해 고된 노동을 요구하는 당 감독자의 모습으로, 또는 세금을 거두거나 곡식을 조달해 가는 관료들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농민들과 당-국가 사이에 나타난 이러한 분할 속에서 농촌 공동체는 단지 농민들의 협상 지위를 강화하는 데 복무할 뿐이었다. 1970년대 중반에 국가는 농민들에게서 잉여생산을 전유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실제로 농민들에게서 조달해 온 곡식의 양은 늘지 않았고 심지어 줄어들기 시작했다.

중국 전역의 여러 지역에서 실험을 거친 후에, 1980년 농업에 관한 근본적인 경제개혁이 전국적인 수준에서 펼쳐질 것이라고 공포되었다. 첫째, 농업 공동체들은 해체될 것이며, 국가는 개별 농민가구들과 주요 작물의 구매에 관한 계약을 체결할 것이다. 둘째, 농민가구는 계약에서 합의된 생산량을 초과하여 생산한 모든 것을 지역 시장에 자유롭게 팔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부역에 동원할 권한을 포함하여 인민공사의 기능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며, () 또는 진() 인민정부로 이름이 바뀔 것이다. 덧붙여, 생산증대 동기를 유발하기 위해 농업생산물 조달 가격을 20% 상승시킬 것이다.

과거 공동체들이 동원했던 부역노동으로 이루어진 토지개간, 효율화된 관개시설, 개선된 도로와 통신의 기초 위에서, 농민들은 이제 부역노동에서 자유로워지고 조달가격 상승으로 동기를 부여받으면서 농업생산을 늘리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농업생산이 상당히 빠르게 성장했다. 농업 개혁의 즉각적인 성공은 1980년대 초반에 훨씬 더 광범위한 개혁이 도입될 수 있도록 정치적인 추진력을 만드는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벌어진, 우리가 자유주의 경제개혁의 첫 번째 물결로 부르는 것에는 세 가지 주요 항목이 있었다. 첫째, 중국 남부해안의 여러 성()과 도시들이 경제특구’(SEZ)로 지정되었다. 이들 지역 안에서는 중소규모 사기업에 대한 금지령이 해제되었고, 해외무역과 상업에 관한 규제가 제거되었다. 둘째, 중앙계획이 축소되었다. 생산량과 가격이 중앙계획에 따라야 하는 생산물의 수가 줄어들었다. 동시에 여전히 생산량과 가격이 중앙계획에 따라야 하는 대규모 기업들도 목표 생산량을 초과하는 모든 것을 시장가격으로 판매하는 게 허용되었다. 셋째, 매우 중요한 것으로 국가재정과 계획의 근본적인 재조직화가 있었다.

중공업의 빠른 발전을 지상과제로 내건 결과 성장한 산업-관료 구조 아래서, 핵심 산업으로 여겨진 산업은 중앙 국가기구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 놓였다. 중앙계획기관은 핵심 산업 내 개별 기업에게 목표 생산량과 판매 가격을 정해 주었다. 개별 기업에 대한 경영자 임명과 전반적인 방향 설정은 관련 부처나 산업 전체를 관장하는 국가위원회가 감독했다.

그러나 경제의 핵심 부문으로 간주되지 않은, 중간재와 소비재를 생산하는 중소규모 기업들에 대한 관장은 당-국가 구조의 하층으로 위임되었다. 이 기업들 각각은 규모와 경제적 정치적 중요성에 따라 순위가 매겨져 있었으며, 계획과 방향 설정이 그에 상응하는 수준의 지방 행정기구로 배정되었다. 도시 지역에서 이들 기업은 도시 공동체 또는 협동체로, 농촌 지역에서는 향진기업(鄕鎭企業)으로 알려졌다.

한 항아리에서 나눠먹기로 알려진 과거의 국가 재정 시스템에서, 돈은 단순히 계획을 뒤따라 다녔다. 돈은 중앙에 있는 하나의 항아리에서 퍼내어져핵심 산업을 관장하는 여러 국가위원회나 국가 부처로 그리고 지방 정부로 갔다. 국가위원회와 국가 부처는 자신들의 행정지출에 필요한 만큼을 충분히 챙겨둔 다음 그들이 관장하는 중앙 국가산업체로 돈을 넘겨 계획된 생산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생산비용과 투자를 충당하게 했다. 마찬가지로 지방정부는 자신들의 지방 계획에 따라 그들이 관장하는 기업들로 돈을 보냈다. 또한 지역 경제계획 등에 따라 하위 행정기관을 향해 아래로 돈을 보냈다. 이처럼 돈이 아래로 흐르는 것은, 개별 기업이나 국가기구의 자금 수령증이 하나의 중앙 항아리를 향해 위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처럼, 세입이 위로 흐르는 것에 의해 평형을 이루었다.

이런 방식에서 돈은 가치척도이자 유통수단 이상이 아니었다. 재정 흐름은 생산자본의 확장에 목표를 둔 상대적으로 분권화된 계획 시스템에서 보조적인 통제수단 이상이 아니었다. 국가은행들은 주로 기업들과 여러 국가행정기관이 서로 다른 시기에 적절히 지출과 수령을 하도록 신용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했다.

개혁된 시스템에서는 한 항아리에서 나눠먹기원칙이 서로 다른 부엌에서 먹기원칙으로 대체되었다. 지역 행정기관과 관련 기업들은 이제 그들의 세입을 그들의 비용을 지불하려고 갖고 있게 되었다. 만일 비용을 지불하고도 남는 돈이 있다면, 약정 금액을 중앙 국가금고에 지불한 다음 남는 이윤에 대해 지방 국가 관료와 공장 경영자들의 재량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중앙 국가금고에 지불할 약정 금액은 새로운 약정을 거듭하면서 점차 상향 조정될 예정이었다. 그래서 지방 국가 관료와 공장 경영자들이 지역 기업들의 이윤과 생산을 증대시키려는 동기와 압력을 갖게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개혁된 시스템이 소비지향 산업의 효율적인 확장을 고무하여 보다 많은 소비재를 공급하고 고용을 늘릴 것으로 기대했다. 동시에 당 관료들이 얼마간의 돈을 적당히 챙길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소득을 늘려달라는 압력이 해소될 것으로 기대했다. 중앙계획 담당자들이 볼 때, 새로운 시스템은 하급 국가기구들과 사이에 보다 느슨하고 대체할 수 있는 금융관계가 도입되는 것을 뜻했다. 그들은 지역의 세부적인 계획을 감독하는 번거로운 과제로부터 해방되었고, 대신 정규적인 이윤배분 협상만 수행하면 되었다. 이제 그들은 경제의 핵심 부문에 대한 계획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윤배분 약정은 너무나 관대해서 지방 국가 관료와 공장 경영자들의 열광적인 이윤추구를 낳게 되었다. 이는 특히 경제특구(SEZ) 지역에서 그랬다. 경제특구에서 무역·상업 금지를 해제한 것은 대만, 홍콩, 기타 동아시아 각국에 흩어져 있던 중국자본들 가운데 일부가 귀환하는 것을 자극했고, 이는 무역과 공업에서 소규모 사기업이 빠르게 성장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사적 영역의 성장에서 비롯된 수요는, 중앙 국가부문으로부터 생산자원이 그리고 농업개혁에서 손해를 본 농민들로부터 노동력 공급이 준비된 것과 결합하여, 지방 국가 관료와 공장경영자들에게 그들이 보유한 이윤을 생산을 확장하는 데 사용할 수단과 기회를 주었다. 그 결과 도시공동체와 향진기업의 생산이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경기급등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빠르게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윤배분과 세입에 관한 관대한 협정 때문에 중앙 국가예산에는 큰 구멍이 났다. 국가예산의 적자가 커지고, 이것이 아직 개혁되지 않은 은행 부문에서 공급되는 안이한 신용과 결합되면서, 물가인상을 가속시키고 해외무역 적자가 작지만 점점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인플레이션 위기가 점점 커지자 국가는 즉각 중앙 국가부문에 대한 투자를 삭감하여 예산의 균형을 맞추려고 시도했다. 이것은 국가 자금을 절약하고 예산 적자를 줄이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중앙 국가산업의 계획생산 목표를 줄임으로써 그들이 생산품을 시장에 더 많이 팔도록 허용하게 되어 비중앙 국가부문에 팔리는 중공업 상품의 시장가격을 낮추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상 긴축으로는 그저 시간을 벌 뿐이었다. 중국공산당 지도부 가운데 개혁파들은 경제 불균형을 시정하려면 개혁을 되돌리기보다 자유주의 개혁을 더 밀어야 한다고 압력을 가하고 역설하는 데 위기를 이용할 수 있었다.

첫째, 중앙 국가기업들을 보다 이윤지향적인 사업체로 만들려고 체계를 개혁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기업운영을 둘러싸고 공장 경영자들과 관리자들의 권한이 늘어났다. 기업운영에서 당 비서들의 정치적 간섭이 줄어들었으며, 생산과 투자를 둘러싼 재량권이 이윤배분협정의 도입으로 강화되었다. 몇몇 중앙 국가기업 경영자들은 전국적인 임금체계를 벗어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성과급을 도입할 수 있었다. 종신고용보장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한시적인 고용계약으로 대체되었다.

둘째, 개별 지방정부와 세입·이윤 배분을 둘러싸고 벌이는 협상과정을 (고정된 총액이 아니라 이윤율에 따라 부과되는) 표준화되고 일반적인 세금 체계로 대체함으로써 국가기금에 대한 통제력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은행 시스템을 보다 중앙집중적인 기초 위에서 재조직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러한 개혁들은 대부분 실패하거나 궤도를 이탈했다. 중앙 국가기업 경영자들 대부분은 회사 자금과 임금체계에 관해 그들이 새로 갖게 된 재량권을 노동자들을 달래는 데 사용했다. 그들은 보유 이윤을 물가 인상을 보상하려고 노동자들에게 전반적인 임금 인상을 해 주는 데에 사용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들은 노동자들의 저항 물결에 부딪쳐야 했다. 일반적인 세금 체계 도입은 새로운 체계로 손해를 보게 될 지방 정부들에게 보조금을 제공하기로 한 양보로 인해 사실상 무효화되었다. 은행 개혁은 안이한 신용의 확장을 억제하는 데 효과가 없었다.

그런데 농업 분야에서 점점 커져 온 문제들이 심각한 정치적 경제적 위기를 위협적으로 조성했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자 경제개혁 도입으로 이루어졌던 농업생산 급증이 완만해지기 시작했다. 개혁은 조달가격을 올리고 국가와 계약한 양을 넘어서서 생산한 모든 것을 더 높은 시장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농민들에게 생산증대 동기를 주었다. 그러나 농민들이 시장을 염두에 두고 생산을 늘리는 동안 시장가격이 폭락했다.

게다가 개혁은 농민들에게 생산증대 동기를 주었지만, 농민들은 중국 농업의 생산 총량을 늘리는 데에는 거의 한 일이 없었다. 사실 한 일이 있다면 더 악화시켰다. () 또는 진() 당국은 농촌의 산업 확장은 추진했지만, 개혁 이전에 건설되었던 도로·관개의 유지보수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으며, 이는 많은 곳에서 농업생산성을 유지하는 데 치명적이었다. 또한 공동체의 해체는 대규모 집단영농에 기초한 기계화되고 현대화된 농사법의 이점을 잃는다는 걸 뜻했다.

보다 많은 농업생산을 자극하려고 조달가격을 올렸지만, 이는 도시 지역에서 물가상승으로 촉발된 문제들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빚을 뿐이었다. 만일 국가가 식량에 보조금을 지급하게 된다면 국가의 재정적자가 더 깊은 늪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식량가격을 인상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생활필수품 가격 상승으로 이미 쥐어 짜인 도시 노동계급 사이에서 점점 늘어나는 불온한 기운에 기름을 붓게 될 것이었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솟구치던 경제적 정치적 문제들은 자유주의 개혁의 추진을 주춤거리게 했다. 실제로 몇몇 상황에서는 더 직접적인 경제통제 방식으로 복귀하는 것이 필요했다. 19896월 천안문 사건에 뒤이어, 개혁파의 수장이던 자오즈양이 실각되고 개혁 프로세스가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

 

 

천안문을 되돌아보며

 

1990년대 초반에는 1980년대의 자유주의 개혁이 빠져나올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중국공산당 지도부 가운데 고참 지도자들 다수는 아마도 개혁이 비참하게 실패한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개혁이 특히 초기 국면에서는 몇 백만 농민들과 많은 노동자들의 소득을 증대시켰다는 것, 그동안 꽤 많은 국가 관료들이 재산을 형성했다는 것은 확실히 사실이었다. 도시 공동체들과 협동체들 그리고 향진기업들의 성장은 중공업과 경공업 사이의 불균형을 시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10년 동안 투자가 부족하면서, 이제 국가부문 내부의 중공업은 훨씬 더 낡아빠진 조건 속에 있게 되었다. 게다가 개혁은 사회적 정치적 분쟁을 만들어 냈다. 개혁을 통해 미리 차단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말이다.

10년 전에, 많은 서구 관찰자들은 중국식 개혁의 조기 성공에 박수를 보냈었다. 그리고 명령 경제를 자유로운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게 얼마나 쉬운가를 중국의 개혁이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제 1990년대 초반에 이르자, 많은 서구 관찰자들에게 중국의 경험은, 동유럽의 비슷한 개혁들이 부딪친 운명에 뒤이어서, ‘시장 사회주의라는 국면을 거쳐 자유로운 시장경제로 점진적인 전환을 시도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관점을 확증해 줄 뿐인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러시아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시장으로 개방하라고 옐친을 설득하고 있던 사람들은 중국의 실패한 개혁은 자유로운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접근에는 빅뱅만이 있을 뿐 다른 선택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초반에는 매우 성공하는 듯하던 1980년대의 개혁은 왜 이런 파국으로 귀결되었을까?

여러 연구논문들이 주장했듯이, 개혁이 초반에 성공을 거둔 핵심적인 요인 가운데 하나는 중국의 당-국가 구조가 다른 국가자본주의 체계와 비교할 때 탈집중화된 구조라는 점이었다. 그들이 주장하듯이, 이것은 지방 국가 관료들이 이른바 기업가적 관료들또는 붉은 자본가들로 전환하는 것을 촉진했다. 실제로 많은 도시 공동체들과 협동체들 그리고 향진기업들은 이윤을 추구하는 국가 경영자들이 사실상 사적으로 소유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사기업이 되었다. 동시에 새로 등장한 사적 자본가들 다수는, ‘붉은 모자 쓰기로 알려진 관행 속에서, 당국의 특권을 얻으려고 자기 사업체들에 맞는 공적 지위를 획득했다. 실제로 공적 소유와 사적 소유 사이의 구별은 점점 더 흐릿해져 갔다.

경제특구에서 등장한 새로운 사적 자본가들의 일부는 과거 자본가 집안의 후손들이었지만, 그 대다수는 당-국가 관료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공적 기금에 접근할 수 있고 당-국가 관료들과 연계를 가진 덕분에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실제로 어떤 기업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를 결정적으로 가르는 것은 그 사업가가 해당 지방에서 적당한 고위급 당-국가 관료들, 즉 그의 사업 규모와 유형을 감독하고 규제하는 담당자들과 연계를 세울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러한 연계를 통해 사업가들은 적대적인 정책 전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국가가 지배하는 경제에서 중요한 사업적 기회와 이점에 접근할 수 있었다.

잘 정비된 상법과 계약 이행을 보증하는 공정한법적 체계가 부재한 상황에서, 그리고 기업규제가 대부분 지방 당-국가 관료들의 재량에 달려 있는 상황에서, 사업 거래에 필요한 상호 신뢰 관계는 개인 간의 관계에 기초한 전통적인 체계, 즉 꽌시를 중심으로 구축되었다. 꽌시는 관례화된 예절의 엄격한 준수를 통해 확인되는 상호 존경·의무·신망에 기초한 사회적 네트워크 속으로 개인들을 함께 묶어 주었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사업가들은 사업 거래를 그들만의 꽌시 네트워크 구성원들로 한정함을 통해 계약이 존중될 것이며 어떤 불법행위도 경찰이나 다른 당국에 보고되지 않을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980년대 경제개혁과 더불어 등장한 자본가 계급은 당-국가의 매트릭스 내부에 갇혔으며, 밀접한 사업연계와 꽌시를 통해 국가 관료들에 묶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새로 등장한 이 계급은 자신의 기득권이 걸려 있기에 일당독재 국가가 정치적으로 현상유지 되도록 지켜내는 데 강력한 이해관계를 갖게 되었다.

이로부터 자유주의 학계 관찰자들은 1980년대의 경제개혁이 서구식 자유 시장사회와 멀리 동떨어진 잡종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귀결되었고, 결국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고 결론 내렸다.

그들이 볼 때, 자유주의 경제개혁이란 반드시 조만간 정치개혁을 동반해야만 했다. ‘자유로운 시장경제법의 지배’, 제멋대로인 정부로부터의 보호, 사적 소유에 대한 명확한 권리, 부르주아 개인들과 기업들에게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칠 (물론 오로지 그들 지갑을 꼭꼭 채워주도록) 동등한 접근권을 부여하는 다원주의 정치체제를 전제로 했다. 그러나 1980년대 개혁으로 중국에 새로 등장한 붉은 부르주아지는 자유민주주의 수립에 필요한 정치개혁으로 나아가려는 어떤 움직임도 가로막았다.

이들 자유주의 학자들은 정치개혁 없이는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향한 더 이상의 어떤 움직임도 불가능하며 자유로운 시장경제없이는 더 이상의 경제적 진보란 거의 또는 전혀 불가능하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일당 국가의 계속된 지배 그리고 중국 붉은 부르주아지의 응집력과 배타성이라는 두 요소는 1990년대 이래 벌어진 경제 변화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두 번째 개혁 물결

 

동구권 해체의 한복판에 터졌던 천안문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뒤늦게 깨닫고 첫 번째 개혁 물결을 거치며 느슨해져 있던 당-국가 구조에 대한 중앙 통제를 다시 주장하고 나섰다. -국가가 동유럽과 소련에서 겪은 것과 같은 길을 가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하급 관료들에게 자신들의 특수한 이해관계를 체제 전체의 이해관계에 종속시키도록 설득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국가예산 분배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움켜쥘 수 있었고 금융적 경제적 안정성을 다시 세울 수 있었다.

1992년 여름 남부지역 경제특구들을 순방한 이후 덩샤오핑은 새로운 개혁 추진을 발표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새로운 개혁물결의 주된 요소가 단순히 경제특구를 더 많은 도시와 지방으로 확장한다는 것뿐이었으며, 새로운 개혁물결이 뚜렷하게 새로운 방향을 갖게 된 것은 중국 밖에서 벌어진 사건들 덕분이었다.

1985년 플라자 합의에 따라 달러화 대비 엔화 가치가 급상승한 결과, 일본의 수출산업은 상대적으로 노동집약적인 생산과정을 동아시아 경제권의 이웃 나라들로 옮기기 시작했다. 값싸고 고분고분한 노동력을 충분하게 공급하면서, 그 통화가치가 미국 달러화에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일본 자본은 대만과 남한으로 몰려갔으나, 나중에 임금이 오르기 시작하면서 동아시아 호랑이들로 알려지게 된 나라들로 투자가 몰려가게 되었다. 이는 동아시아 경제호황으로 연결되었는데, 자국의 견고한 노동계급을 따돌릴 투자처를 찾고 있던 미국과 유럽 자본이 가세하면서 그 열기가 더 높아졌다.

1990년대 초반 해외자본들은 중국의 값싸고 고분고분한 노동력에 접근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엄청난 이윤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눈뜨기 시작했다. 사실 중국은 이미 임금노동에 단련된 값싸고 고분고분한 엄청난 양의 노동력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마오시대와 첫 번째 개혁 물결을 거치는 동안 이루어진 자본축적의 결과로 중국은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발전되고 폭넓은 산업기반을 갖고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중국은 또한 산업생산을 지원할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기반시설이 상대적으로 발전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값싸고 고분고분한 엄청난 양의 노동력이 제공하는 거대한 이윤에 접근해 보려는 해외자본들은 중국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사업 세계가 당-국가 구조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상황에서 중국 국가와 거래하는 것 외에 사실상 방법이 없었다. 실제로 중국 국가는 거대 초국적 기업과 상대할지라도 강한 협상력을 발휘했으며 조건을 제시하는 데 잘 준비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해외자본은 실제 생산자본, 즉 설비·기계·공장 등에 직접 투자하는 형태를 취할 때에만 중국으로 접근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대규모 투자에서는 보통 국유 기업과 초국적 기업의 합작기업이라는 조직형태를 취했는데, 이 경우 국가는 대개 지배적 소유권을 보유했다. 그러한 합작기업에서 초국적 기업은 현대적인 설비·기계류에 구현된 선진 기술과 그것을 활용할 기술적 노하우와 경영능력을 제공한다. 또한 생산된 상품을 세계 시장에 판매하는 데 필요한 마케팅·판매·배급 네트워크를 제공한다. 반대로 중국 국가는 사회경제적 기반, 즉 노동자 숙소, 도로, 통신 네트워크 등을 제공한다. 물론 값싸고 고분고분한 노동력도 제공한다. 이 노동력은 때때로 국가 고용부서를 거쳐 중국 내륙으로부터 실려 온다. 이 합작기업에서 나오는 이윤은 국가와 초국적 기업이 나눠 갖는다.

1992년까지 중국에 들어온 해외투자의 대부분은 중소규모 투자로 홍콩, 대만, (그보다는 적지만) 일본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 이후 새로이 우호적인 태도를 갖고 대규모 투자들이 훨씬 먼 곳으로부터 봇물 터지듯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9210억 달러를 약간 넘던 해외직접투자가 1994500억 달러 이상으로 솟구쳤다. 밀물 같은 해외직접투자 물결은 수출지향 제조업의 빠른 성장을 낳았고, 이는 1990년대 초반 이래 중국에서의 자본축적에서 주도적인 산업부문이 되었다.

그런데 해외직접투자의 범람은 중국 국가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유리한 효과들을 가져왔다. 첫째, 합작기업에서 나오는 이윤이 국가금고로 몰려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국가는 예산적자에 생긴 구멍을 메울 수 있게 되었다. 둘째, 해외직접투자로 수출이 늘어나면서 중국의 해외무역적자는 무역흑자로 전환되었다. 무역흑자 덕분에 국가는 외환보유를 하게 되었고, 이는 중국에 흉년이 들 경우 세계시장에서 곡물을 사들이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셋째, 고용을 창출하고 기업 관행을 고위 국가 관료들에게 확산시키면서, 합작기업은 여전히 중앙 국가가 소유하고 운영하는 점점 더 낡아빠져 가는 산업들의 구조조정을 위한 보다 우호적인 조건을 만들 수 있었다.

 

 

중앙 국가산업의 구조조정

 

우리가 보았듯이, 1980년대 첫 번째 개혁물결은 중소규모 산업과 농업에 초점을 두었다. 도시 공동체들, 향진기업들, 그리고 사무역과 사기업이 확장되면서, 마오시대부터 이어져 온 대규모 중공업은 투자에 굶주렸고 쇠퇴해 갔다. 이제 두 번째 개혁물결은 이 방치된 중앙 국가부문에 주의를 돌렸다.

생산량 부과와 공식가격 책정을 통해 이루어지던 국가의 직접 계획 시스템은 1990년대 중반에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리고 공장 경영진들에게 보다 많은 재정 자율권을 부여하는 방향으로의 전환이 1980년대에 시험적으로 도입되었다가 중앙 국가부문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다가 1997년 제15차 당 대회에서 중앙 국가부문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선언되었다. 그 목적은 이른바 국유기업들을 오로지 이윤만 추구하는 기업들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첫 단계는 상대적으로 작은 국유기업들의 사유화였는데, 주로 경영자나 노동자가 인수하는 형태였다. 다음 단계는 남아있는 국유기업들을 보다 서구적인 주식회사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록 일부 지분이 중국에 새로 설립된 주식시장에서 사적 투자자에게 팔렸지만, 대부분의 지분은 매매할 수 없는것으로 대개 다양한 국가기구들이 보유하였다. 그 결과 중국 국가는 대부분의 대기업들 지분의 대다수를 소유한 거대한 지주회사로 사실상 전환되었다.

이러한 조직 개혁을 통해 서구 기업의 노선을 따라 소유와 경영을 분리함으로써 해외 자본과 합작기업을 훨씬 쉽게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그들은 국유기업들을 오로지 이윤만 추구하는 조직들로 전환하는 것을 통해 민영화의 세 번째 단계를 위한 길을 닦았다. 이러한 전환에서 국가 관료들에게 중요한 것은 국유기업의 사회적 기능을 바꾸는 것이었다. , 단웨이 체제를 해체하고 그를 통해 중국 노동계급 다수가 갖고 있던 견고한 지위에 직접적인 공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국유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의 세 번째 단계는 제2부에서 보게 되겠지만 가장 어렵고 질질 끌며 늘어지는 것이었다.

 

 

무역 자유화와 WTO 가입

 

이처럼 중앙 국가부문 구조조정을 위한 야심찬 계획을 발표하던 무렵, 중국은 동아시아 전반을 휩쓸었던 경제 태풍에 타격을 받고 있었다.

우리가 보았듯이 중국은 선진자본주의 나라들로부터 자본축적이 재배치됨에 따라 일어났던 동아시아 경제호황에 끌려 들어갔었다. 1990년대 초반, 미국 정부의 압력 아래 동아시아 호랑이들은 대부 자본의 유입을 허용하기 위해 자본통제를 느슨하게 했다. 서구 은행과 투자펀드들은 동아시아의 기적 같은 경제들에서 거대한 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보고, 동아시아 은행과 기업에 금융자본을 빌려주거나 신규 사업에서 지분을 확보하려고 몰려들었다. 이러한 해외 금융자본의 범람은 처음에는 동아시아 호랑이들에서 실물자본의 축적을 가속화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노동력 부족을 비롯한 여러 장애물들이 실물 축적률을 낮추기 시작하자, 이러한 투자들은 점점 더 투기적으로 되었다. 그러다 1997, 이 투기적인 투자에 기초한 이윤이 장차 실현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명확해지기 시작하자, 해외 금융자본이 앞 다투어 빠져 나갔다. 그들이 투자 자본을 달러화로 앞 다투어 환전하자 동아시아 호랑이들의 통화는 더 이상 달러화 대비 적정 환율을 지킬 수 없게 되었고 차례차례 무너졌다. 달러화로 대출하였지만 이윤과 수익은 자국 통화로 얻고 있던 동아시아 나라들의 많은 은행과 기업들은 이제 부채를 감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고 파산하거나 국유화되었다. 그 결과 18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동아시아 노동자 몇 천만 명이 잉여인력이 되면서 절대빈곤으로 내몰렸다.

동아시아 위기로부터 솟아나온 공황(패닉)은 빠르게 전 세계로 퍼져나갔는데, 세계 금융자본이 이른바 신흥 경제들’(이머징마켓)에 대한 투자에 두려움을 갖게 되면서 남미와 러시아에 심각한 금융위기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동아시아 호랑이들에서의 자본축적에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지만 큰 어려움 없이 경제폭풍을 헤치고 나아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국가가 경제에 대한 통제를 계속했다는 점이었다. 중국 국가가 해외 자본으로 하여금 실물 생산자본 투자에 묶여 있도록 강요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중국 당국이 나라 안팎으로의 자본이동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고집스럽게 유지했기 때문에, 해외 자본가들은 금융공황이 터졌을 때 투자를 청산하고 밖으로 나갈 위치에 있지 못했다. 그래서 중국 국가는 동아시아 위기로부터 금융공황이 건너오는 것을 억제할 수 있었으며, 경제적 파국을 막을 수 있었다.

신흥 경제들’(이머징마켓)에 대한 투자로 손실을 입은 국제 투자자들은 이제 그들의 주의를 미국의 닷컴 벼락경기로 돌렸다. 그렇게 동아시아 위기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중국에 대한 해외투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것은 중국의 수출주도 자본축적 전략이 중단될 수도 있다는 위협이 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다소 성가신 가입조건을 받아들인다 해도 WTO에 가입함으로써 세계 자본축적에 통합해 들어가는 데서 돌이킬 수 없는 발걸음을 내딛기로 결정했다.

오랜 협상 끝에, 중국은 2001년 말 WTO에 가입했다. 5년의 이행기 동안 중국은 자국 경제를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해외 경쟁에 개방하도록 요구받았다. 그 결과 수입상품에 붙이는 평균 관세가 40% 이상에서 단지 6%로 줄어들었다. 이는 전 세계 주요한 개발도상나라들 가운데 가장 낮은 것이다. 반면 수출 보조금은 폐지되었다. 이런 경제 자유화는 특히 중국의 후진적인 농업에 문제를 야기했지만, WTO 회원 자격은 중국의 수출에 맞서 특히 미국 쪽에서 벌이는 보호무역주의 흐름을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회원 자격은 중국공산당이 세계 자본축적에 자국 경제를 돌이킬 수 없게 통합시킬 것임을 약속해서 해외 투자자들을 안심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실제로 닷컴 붕괴 이후 해외자본은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와 수출주도 성장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2004년 중국은 세계 최대의 해외직접투자 유치국이 되었다.

2부에서 우리는 중국이 세계 자본축적으로 통합되는 과정과 이것이 미래에 갖는 함의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그 전에 중국의 경제 변화에 대한 우리의 스케치를 몇 마디로 간단하게 요약해 보자.

 

 

중국은 무엇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가 지적했듯이, 중국에 대한 부르주아들의 지배적인 견해는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향한 점진적인 전환 속에 있다는 것이다. 점진적인 신자유주의자들이 볼 때, 그 전환은 경제적 번영을 낳는 것이면서, 또한 민주주의를 약속하는 것이다. 그들이 볼 때 자유 시장은 필연적으로 서구식 부르주아 자유민주주의를 낳는다. 그러나 중국의 폐쇄된 사업 세계에 막혀 있는, 그리고 중국에서 만들어지는 거대한 이윤에 보다 평등하고 공평하게접근할 수 있는 민주적인 도전을 기대하는 서구의 사업가들은 시장경제 사회를 향한 중국의 예상되는 전환에 대해 훨씬 덜 희망적이다.

많은 빅뱅신자유주의자들(‘big bang’ neo-liberals)이 지적하듯이, 중국은 25년 이상 자유주의 경제개혁을 겪어 왔지만 여전히 많은 측면에서 서구식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이상과는 전혀 가까워지지 않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경제의 절반 이상을 소유한 채 지속되는 국가의 지배력을 문제 삼고 있다. 실제로 그들이 지적하는 바대로, 1990년대 후반 상대적으로 작은 국유기업들을 매각하면서 국유자본 비율이 낮아졌지만, 초국적 기업들과 국가기구가 만든 합작기업들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국유자본 비율은 이제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들 빅뱅신자유주의자들은 만일 과감한 정치개혁과 일당국가 해체를 통해 사회적 긴장을 해소하지 않는다면, 중국은 솟구치는 사회적 긴장 때문에 빠른 경제성장을 계속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나중에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만일 과감한 정치개혁에 대한 그들의 희망이 실현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가 보았듯이, 중국의 변화와 오늘날의 빠른 경제성장은 자유로운 시장경제로의 이행이라는 마법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지난 25년 동안의 자유주의 경제개혁이 경제적 관계의 상품화와 금융화로 귀결되었으며, 이로부터 자본축적과 국가의 관계가 마오시대에 존재했던 방식에서 중요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자본축적과 국가의 변화된 관계는 중국이 세계경제 권력 속으로 들어가는 오늘날의 변화를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일 뿐이다.

이러한 변화의 근원은 세계 자본축적으로 통합됨으로써 중국의 엄청난 노동력을 착취하는 데서 해외자본을 활용하고 관리하는 중국 국가의 능력이다. 이것은 중국 국가가 계급투쟁을 억제함으로써 사회적 평화를 유지하는 데에, 그리고 자본축적에 필요한 물질적 사회적 기반시설을 공급하는 데에 주된 역할을 해야만 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이것은 또한 중국 국가가 (1998년 동아시아 위기 때 중국의 생존이 명확하게 보여주듯이) 세계 금융시장의 단기주의를 넘어 더 멀리 내다보며 노동계급이 생산한 잉여가치의 많은 부분을 국가적 축적을 위해 보유하는 데서도 주요한 역할을 해야만 했다는 것을 뜻한다.

 

 

 

2부 중국과 세계 자본축적

 

1부에서 주장했듯이, 오늘날 중국의 변화와 빠른 경제성장은 세계 자본축적에 또 하나의 중심으로서 통합된 결과물이다. 이제 제2부에서는 세계경제로 중국의 통합이 지금까지 세계 자본주의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고 미국의 경제패권을 다시 세우는 데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나아가 세계 자본주의 속에서 중국의 지위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미국의 경제패권에 중국이 준 영향을 살피는 데서부터 시작해 보자.

 

 

미국과 세계 자본축적

 

1980년대 후반, 많은 사람들에게는 만일 20세기가 미국의 세기였다면 다가오는 세기는 아시아의 세기가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당시 세계경제 패권국으로 장차 미국을 대신하리라 여겨진 나라는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국가·은행·독점산업재벌 사이에 밀접한 연계를 가진 일본식 자본주의 모델, 2차 대전 이후 일본 노동계급의 패배를 바탕으로 꾸준히 발전하여 일본을 세계 제2위 경제국으로 바꿔 놓았다. 기업 조직의 선구적인 형태, 고분고분한 노동력, 상업적 목표를 위해 신기술을 흡수하고 개발하는 능력을 갖춘 일본이 경제적 우위를 향해 상승해 가는 것은, 특히 겉보기에 죽어가고 있던 미국 경제와 비교해 보았을 때, 필연으로 보였다.

1960년대부터 미국 경제는 일본과 유럽에 대해 약세를 보였다. 고임금과 결합된 노동생산성의 느린 향상은 이윤율의 하락을 낳았다. 레이건의 첫 임기 동안 이런 상대적인 경제쇠퇴를 치유하려고 벌인 다소 맹렬한 시도 또한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금융긴축정책은 이자율 상승과 달러화의 과도한 고평가를 낳았다. 이것은, 수출은 줄고 수입은 늘어나면서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이 없는 미국 산업의 거대한 부분이 공장폐쇄로 치닫고 실업과 무역적자를 늘리도록 만드는 데 기여할 뿐인 것으로 보였다. 동시에 부자들에 대한 감세, 그리고 레이건이 소련과 무기경쟁을 가속함에 따른 군비지출 증가는 공공부문 적자가 점점 확대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미국은 1980년대가 시작될 때에는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었지만, 1980년대가 끝날 때에는 세계 최대의 채무국이 되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미국 경제의 성장은 단지 어느 때보다 막대한 채무를 투입함으로써 겨우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미국의 지위는 나머지 세계가 미국에 기꺼이 돈을 빌려주려 하고 빌려줄 수 있는 경우에만 유지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다 동구권이 붕괴하자, 미국은 최대의 적 소련을 무너뜨림으로써 권력의 최정점에 도달한 반면, 경제 문제들을 해결해 내지 못함으로써 일본과 유럽으로부터 솟구치는 경쟁에 직면하여 서서히 정치적 경제적 쇠퇴의 길로 들어설 운명인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1990, 이전 시기 동안 쌓여 왔던 일본의 부동산 거품이 터져 일본 경제의 숨은 약점을 폭로했다. 일본은 장기간의 경제 침체기로 내몰렸으며, 지금까지도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은 빠르게 점점 더 강력해졌다. 오늘날에 와서 보자면, 1980년대 초반의 레이거노믹스는 미국 경제에 대한 거대한 구조조정의 일부로서, 자본축적이 다시 활기를 띠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자율 상승과 과도 평가된 달러화에 직면하여 이윤을 낼 수 없게 된 미국 제조업에 대한 대학살은, 이전까지 이들 산업에 고정되어 있던 막대한 자본을 청산하고서 새로 올라오는 전기·통신·정보기술 등에 기초를 둔 새로운 산업에 재투자하게 함으로써, 1990년대에 이른바 무게 없는 신경제의 근간을 형성할 수 있게 했다. 낡은 산업에서 새로운 산업으로의 이러한 이동은 (스타워즈로도 알려진) 미사일방어망(MD) 시스템 같은 프로젝트들을 통한 높은 군비지출로 더욱 촉진되었다. 이 프로젝트들은 새로운 정보통신기술 연구개발에 대한 막대한 국가보조금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북동부의 노조 조직률이 높은 기존 제조업에서 남부와 서부의 노조 조직률이 매우 낮은 새로운 산업으로의 이동은 미국 노동계급이 1930년대 이래 구축해 온 견고한 지위를 한 방에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임금은 억제된 반면, 노동자들은 더 오래 일하도록 강요받았다. 즉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이 증대되었다. 동시에 더 고분고분한 노동력은 더 유연한 노동시간을 가능케 했으며, 이는 새로운 정보통신기술을 사용하는 것과 결합되어 보다 빠른 자본회전을 가능케 했다. 이것은 신기술의 가격하락으로 인한 생산수단 가치하락과 더불어 19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미국 자본의 이윤율이 계속해서 상승하는 결과를 낳았다. 실제로 1990년대 말 이윤율은 1950~60년대 전후 호황의 시기 이래 보지 못했던 수준에 이르렀다.

1997~8년 동아시아 위기 이후, ‘신흥 경제들’(이머징마켓)에서 빠른 수익을 추구했던 투기자본은 새롭게 부상하는 신경제에서 점점 늘어나는 투자기회를 활용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인터넷 같은 신기술이 어떻게 세계를 혁명적으로 바꿔놓을지 그리고 신경제출현과 더불어 금융과 경제에 관한 모든 법칙이 어떻게 다시 쓰일 필요가 있는지에 관한 많은 과장된 이야기들이 떠도는 가운데, 이들 투기자본의 쇄도는 1990년대 후반 거대한 닷컴거품이 만들어지는 데 연료를 공급했다.

2000, 닷컴거품의 광기는 필연적으로 종말로 치달았다. 닷컴거품이 정점에 있을 때, 한 번도 이윤을 낸 적도 없고 단지 몇 십 명을 고용하고 있을 뿐인 닷컴기업들은 주식시장에서 GM보다 더 가치가 크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닷컴거품의 폭발은, 1990년대 후반의 분별없는 번창에 사로잡혔던 신경제바깥의 다수 기업들을 포함하여, 많은 기업들을 위험스럽게 과도 확장된 상태로 남겨 놓았다. 거대한 채무비용과 판매수입 감소 전망이 안긴 부담 때문에 많은 미국 자본이 파산에 직면했다. 미국 경제는 깊은 경제공황으로 소용돌이쳐 들어가는 언저리에 이르렀고, 이는 신경제에 기반을 둔 미국의 소생이 초기 단계에서 끝장날 것임을 위협했다.

그러나 미국 관료들은 재빨리 대응하는 능력이 있었는데, 경제공황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으려고 대담한 케인스주의 경기부양 정책을 채택했다. 먼저 6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연방준비은행은 기본 금리를 6.5%에서 1%로 낮춤으로써, 무너지는 미국 주식시장을 지탱해 내면서 동시에 과도 확장된 많은 자본에게 숨통을 터주었다. 이어서 대통령에 당선된 부시(주니어)는 주로 부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일련의 상당한 세금감면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이 감세 조치는 군비지출의 상당한 증가와 결합하여 정부의 적자를 빠르게 늘려 놓았다. 클린턴의 두 번째 임기 마지막 해(2000)에는 GDP 대비 2%의 예산 흑자가 있었으나, 4년 후(2004)에는 GDP 대비 4%의 예산 적자로 돌아섰다.

미국 관료들이 편 경기부양 정책으로 미국 경제는 약간의 불황을 겪는 수준에서 닷컴붕괴 여파를 이겨낼 수 있었다. 거품이 터진 지 5년이 지난 지금, 미국 경제는 매년 4% 이상 성장하고 있다. 실업은 2년 이상 꾸준히 떨어졌다. 달러화는 강화되고 있으며, 물가는 낮게 유지되고 있다. 프랑스·독일·이탈리아 같은 유럽 경제의 핵심들이 여전히 불황에서 벗어나려고 싸우고 있고, 일본은 15년 이상 된 경제 불황에서 탈출하려고 아직도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세계에서 지배적이고 가장 역동적인 선진자본주의 경제라는 자신의 지위를 다시 세울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미국 경제가 지금 보여주는 역동성은 빚으로 만든 그래서 지속될 수 없는 소비 붐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 소비 붐은 미국에서의 자본 축적이 갖는 본질적인 약점을 감추고 있다는 주장이 때때로 논란이 된다. 최근 15년 동안 미국이 회춘기를 맞이한 것처럼 보이지만, 황혼기에 접어든 미국의 패권은 전성기 때 구축된 지배적인 금융적 지위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며, 이는 미국 경제가 속빈 강정임을 감춘 채 마지막 번영의 시기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조만간 나머지 세계는 미국에 돈 꿔주기를 멈출 것이고, 따라서 미국의 회춘기는 종말로 치달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미국 경제가 장기간 빚으로 만든 소비 붐 덕분에 지탱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세금감면은 부자들에게 지출할 돈이 풍족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동시에 낮은 이자율은 최근 몇 년 동안 투기적인 주택가격 거품을 낳았는데, 이는 주택 소유자들이 빠르게 오르는 집값을 보며 대출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정부 부채만 빠르게 늘어난 것이 아니라, 개인 부채 또한 전례 없는 수준으로 치솟았다.

동시에 소비 수요의 빠른 성장은 계속되는 특히 중국으로부터의 수입 범람과 맞물리면서, 상당한 국제수지 적자를 낳았다. 국제수지 적자와 정부예산 적자는 대부분 해외로부터 빚을 내서 메워졌다.

그러나 이처럼 장기간 빚으로 만든 소비탐닉이 미국 경제를 금융적으로 위험한 위치에 몰아넣었을까? 이제까지 미국의 부채에 늘 돈을 대주면서 달러화와 달러가 지배하는 금융자산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해외 채권자들이 고갈되어 버려서, 이제는 간단히 말해서 미국의 해외 채권자들이 가진 선의의 문제이기 이전에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부시(주니어) 정부가 추구했던 경기부양 정책은 미국 자본주의의 쇠퇴를 불가피하게 폭로하게 될 위기를 그저 지연시켰을 뿐일까?

지난 4년여 동안 연방정부의 총누적채무와 미국 전체가 외국인에게 빚진 채무가 공히 빠르게 늘어났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2000년에서 2003년 사이, 연방정부의 총채무는 1/4 이상 늘어나서 4조 달러에 이르렀다. 외국인에게 진 미국인의 총채무는 10조 달러 이상으로 늘었다. 3년 동안 순채무는 60%가 늘어 26천억 달러에 이르렀다. (순채무 = 미국이 세계에 진 채무 - 나머지 세계가 미국에 진 채무)

그러나 이 수치들을 그저 천문학적인 것으로만 볼 수도 있겠지만, 이는 미국 경제의 엄청난 규모를 무시하는 것이다. 연방정부 채무는 여전히 미국 GDP40%에 못 미치고 있는데, 이는 국제적인 기준으로든 역사적인 기준으로든 그렇게 높은 것이 아니다. 매우 구속적이라고 여겨졌던 유럽 안정화 협약은 유로에 참여하려는 나라들에게 정부 채무가 GDP60% 이하가 되도록 하고 공공지출 적자가 GDP3% 이하가 되도록 할 것을 요구했다. 1980년대 레이건 정부 시절에 적자가 급증해서 1990년대 초반 연방정부 채무는 50% 이상에 이르렀다. 그러나 부시(시니어) 정부와 클린턴 정부 아래서 정부예산 적자를 줄이려고 물가상승과 경제성장을 통해 혼신의 노력을 벌인 끝에 2000년에는 연방정부 채무가 35% 이하로 줄어들었다. 전체 미국 경제가 축적한 순해외채무 26천억 달러는 여전히 미국 GDP25% 미만이다. 게다가 세계 금융시스템에서 미국이 가진 지배적 지위 때문에, 미국이 나머지 세계에서 투자와 대부를 통해 벌어들이는 수익률은 축적된 채무에 대해 지불해야 하는 수익률보다 평균적으로 높다. 결국 미국으로 들어오는 투자소득의 순유입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미국은 채무에 대한 이자를 지불하기 위해 다시 돈을 빌려야 하는 파멸적인 국면에는 아직 그 언저리조차 이르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 닷컴 벼락경기를 몰고 왔던 광란은 정보기술과 컴퓨터 관련 회사들의 신경제를 훨씬 뛰어넘는 범위까지 퍼졌다. 닷컴 혁명의 역동성은 과거의 모든 경제·금융 법칙을 순식간에 바꿔 버렸으며 거대한 이윤을 낼 전망을 가졌기에 서둘러 투자하는 데 망설일 필요가 없는 대상들을 제공했다는 믿음이 널리 퍼졌다. 결국 크든 작든 미국 기업들은 투자를 하려고 거대한 규모로 빚을 냈다. 그 결과 닷컴거품이 터졌을 때, 즉 장차 이윤이 날 전망이 크게 쪼그라들고 있던 바로 그 때, 미국 기업들은 그들의 이윤을 놓고 이자지급이나 주식배당의 형태로 거대한 금액이 청구되는 상황에 놓였다. 대다수 닷컴 기업들이 사라져갔지만, 연방준비은행이 이자율을 빠르게 대폭 낮추면서 대다수 기존 미국 기업들은 파산을 면할 수 있었다.

닷컴붕괴에서 살아남은 미국 자본은 합리화와 비용절감의 시대로 들어갔다. 이는 2001년과 2003년 사이에 실업의 급격한 증가를 낳았다. 일자리를 지킨 이들도 더 열심히 더 오래 일하도록 강제당하면서, 신기술 도입은 보다 합리적으로 비용을 절감하고 자본회전을 늘리는 데 사용되었다. 그 결과 미국의 이윤율은 상승추세를 회복했다. 지금까지 이윤증대의 많은 몫은 주식회사 미국의 금융적 지위를 회복하는 데 사용되었다. 부채가 상환되고, 자사주가 매입되었다. 그리하여 증권을 내던진 소각된 의제자본은 미래 잉여가치에게 장차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실현할 전망이 현실적임을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미국 자본의 금융적 지위가 회복되면서, 실물 생산자본 확장을 위해 투자를 재개할 수 있는 조건들이 적절하게 놓이고 있다. 실제로 그러한 투자주도 성장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지표들이 있다. 만일 주택가격 거품 붕괴나 계속되는 석유가격 인상으로 야기될 소비자 수요에서의 날카로운 모순 때문에 탈선하지만 않는다면, 다음 몇 년 동안 미국 자본의 자립적인 실질 축적에 기초한 투자주도 호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4년 동안 달러화 가치가 30% 이상 하락했지만 해외 투자자들이 미국 경제에 대한 투자를 유지했다는 사실은 미국 경제의 기초가 견실하다는 데 대한 계속된 믿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거대한 채무는 아마도 미국 자본주의의 약함이 아니라 강함의 신호로 여겨야 할 것이다.

첫째, 미국 국민대중 사이에 종교적인 비합리주의가 늘어나고는 있지만, 미국은 여전히 세계 과학과 기술의 중심이다. 미국 기업들은 여전히 대다수 첨단기술의 최전선에 서 있으며, 이는 그들이 새로운 상품을 가진 분야에서 선두주자가 됨으로써 초과이윤(surplus profits)을 거머쥘 수 있게 한다. 둘째, 1980년대 구조조정이 있었지만 미국은 여전히 폭넓은 산업기반을 갖고 있다. 대다수 산업부문에서 미국 노동자들의 생산성은 다른 선진자본주의 나라 노동자들보다 높다. 셋째, 미국 시장은 단연 세계 최대의 단일 시장이다. 미국이 세계 무역의 중심이긴 하지만, 미국 내에서 생산·판매되는 상품의 가치는 국제무역으로 거래되는 상품의 전체 가치보다 실질적으로 더 크다. 그러나 미국은 단지 최대 상품시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미국은 금융자본에서도 단연 세계 최대의 중심이다.

물론 과학과 기술에서 미국의 주도성은 1950~60년대만큼 크지는 않다. 독일과 일본 노동자들은 거의 미국 노동자들만큼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 노동계급의 견고함과 달리, 미국 자본가들은 미국 노동자들을 더 오래 더 유연하게 일하도록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동유럽의 막대한 산업예비군이 유럽연합으로 통합되어 오면서, 서유럽 노동계급의 견고한 지위가 침해당하는 경향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당분간 미국은 잉여가치의 생산·실현·전유에 있어 세계의 중심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미국은 산업·상업·금융에 있어 가장 앞선 경제 권력이다. 그러므로 해외투자자들에게 미국은 여전히 가장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곳으로 남아 있다.

1980년대의 구조조정 이후 미국은 세계 자본축적의 중심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다시 세웠다. 일본과 유럽이라는 가까운 경쟁자들의 도전이 거의 실패한 상황에서, 멀리서 떠올라 미국 패권에 심각한 도전을 제기하는 중국의 전망은 무엇일까? 여기에 답하려면, 우리는 먼저 지금까지 지난 10여 년 동안 중국이 어떻게 세계 자본축적에 통합되어 왔는지, 그리고 이것이 미국과의 경제적 관계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를 살펴야 한다.

 

 

중국과 세계 자본축적

 

1980년대 자본축적의 구조조정에서 본질적인 요소이자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노동계급이 가진 견고한 지위를 한 방에 허물어뜨리는 데 결정적이었던 것은 이른바 주변부 신흥공업국으로 생산 자본을 거점이동(재배치)하는 것이었다.

생산 자본의 이러한 거점이동은 대개 서로 다른 두 가지 유형의 제조업 생산과 관련된다. 첫째, 대체로 상대적으로 노동집약적인, 성숙한 산업이다. 생산방식을 더 개선할 여지가 제한되어 있거나 터무니없이 비싼 경우다. 그러한 산업으로는 섬유·의류·신발·장난감 등이 있다. 둘째, 정보·통신·컴퓨터 기술 주변에서 형성되어 부품과 하드웨어를 공급하며 새롭고 빠르게 성장하는 산업이다. 이 두 유형의 제조업은, 처음에는 1980년대 후반에 일본과 함께 그리고 1990년대에는 점점 미국과 함께 자본축적의 역동적인 과정을 만들었던, 이른바 아시아의 경제기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앞서 보았듯이, 1998동아시아 호랑이들을 강타한 파괴적인 금융경제위기 이후 중국은 아시아의 축적을 자신의 목표에 맞추어 구조조정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원래 1990년대 중반 동아시아 상품생산에서 좀 더 노동집약적인 조립단계를 장악하며 아시아 자본축적 시스템에 치고 들어갔었다. 중국이 더 많은 생산품목에서 조립단계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아시아에서 생산되는 상품들은 일반적으로 거대한 미국 시장으로 가는 도정에서 점점 더 중국으로 집중되었다. 이것이 다른 아시아 나라들이 최종 조립단계와 관련된 생산 자본을 중국에 빼앗겼다는 뜻은 아니지만, 중국의 조립 생산에 드는 더 낮은 비용이 최종 상품 가격을 낮추고 그래서 더 많은 판매를 가능케 한다는 사실이 만드는 것 이상이긴 했다.

그러나 이러한 업종 다양화에 덧붙여 중국은 1998년부터 점점 더 생산 사슬을 구성해 나갔다.’ 즉 중국은 미국 시장과 세계 시장을 목표로 한 아시아 제조업 상품의 단계들을 점점 더 장악해 나갔다. 그 결과 아시아의 제조업은 중국으로 재배치되었고 집중되었다. 이처럼 제조업 자본이 중국으로 재배치된 것은, 1990년대만 해도 아시아 경제 기적의 중심이었으며 신흥 경제들’(이머징마켓)에 대한 서구의 투자에서 최우선 대상이었던 이전의 동아시아 호랑이들에게 특별히 심각한 충격을 안겼다. 그러나 제조업 상실은 어느 때보다 늘어나는 중국의 원료 수요로 보상되었다. 이전의 동아시아 호랑이들1990년대 이전 그들의 전통적인 수출품으로 되돌아가, 원료와 원자재에 대한 중국의 지칠 줄 모르는 식욕을 채워 주는 데서 아시아 전역, 심지어 멀리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의 다른 많은 나라들과 합류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중국이 더 복잡한 생산 단계들까지 차지하여 생산 사슬을 구성하게 되자공작기계와 다른 산업장비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이러한 수요는 기술적으로 더 앞선 중국의 이웃인 남한과 일본으로부터 수입으로 해결되었다. 실제로 중국에 대한 수출확장은 15년을 끌어온 경제 불황을 마침내 끝내고자 하는 일본의 주요한 희망사항이 되었다.

그 결과 중국은 세계 자본축적에서 또 하나의 중심으로 등장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일본의 최대 무역파트너가 되면서 경제대국 일본마저 중국의 궤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제기되는 질문은 중국-아시아 자본축적이라는 또 하나의 중심이 미국과 유럽에 중심을 둔 세계 자본축적과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느냐는 것이다.

1970~80년대,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이윤율 하락과 견고한 노동계급 양자에 압박당한 자본은 막다른 골목에 몰려 전 세계에서 값싸고 고분고분한 노동력 자원을 찾아내게 된다. 그러나 단지 값싸고 고분고분한 예비 노동력을 찾아내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런 노동력이라면 개발도상 세계도처에 충분히 널려 있었다. 사회적 노동생산성이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에 비길 만한 수준으로 올라올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또한 필요했다. 동아시아의 권위주의 정권들은 제조업 자본의 거점이동(재배치)에 필수적인 그러한 전제조건들을 공급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나라들은 값싸고 고분고분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냉전 시기 동안 허용되었던 보호받는 국가적 자본축적을 몇 십 년 동안 거치면서 세계시장에서 충분히 경쟁할 수 있을 만큼 높은 사회적 노동생산성을 보증할 수 있는 필수적인 경제적 기반을 발전시켜 놓고 있었다.

그 결과 동아시아의 신흥공업국들은 제조업 자본의 거점이동(재배치)에서 최우선 대상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동아시아 노동자들을 서구 노동자들에 비해 낮은 임금으로 더 오래 더 힘들게 일하도록 만들면서, 자본은 착취율을 올릴 수 있었으며 세계적인 이윤율 하락을 되돌릴 수 있었다. 중국은 아시아의 자본축적에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기본적인 필요조건들을 훨씬 더 큰 규모에서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 인구의 1/5을 갖고 있으면서 50년 동안의 빠른 국가적 자본축적을 거친 뒤라서, 중국은 값싼 노동력의 엄청난 잠재적 자원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높은 사회적 노동생산성에 필수적인 경제적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다. 이처럼 세계자본주의로 중국이 통합된 것은 1970~80년대 자본의 구조조정 이후 자본축적에 거대한 탄력을 제공해 왔다.

우선 첫째로, 착취율 증가로 만들어진 성과물은, 특정 상품의 국제 시장가격과 중국에서의 생산가격 사이의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초과이윤의 형태를 취한다. (초과이윤은 자본의 주어진 발달수준에서 기대될 수 있는 평균치를 넘는 이윤이다.) 이 초과이윤은 무엇보다 먼저 중국에서의 합작기업에 관련된 초국적 기업과 중국 국가가 취한다. 그러나 월마트처럼 서구 시장에 대한 접근을 제공하는 수입업자들 또한 초과이윤의 상당한 몫을 취할 수 있다. 그래서 중국과 함께 사업을 할 수 있는 선진자본주의 나라의 자본들은 발생된 초과이윤의 상당한 몫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특정 상품의 중국 생산이 확대되고 세계 시장에서 더 많은 몫을 차지할수록, 그 상품의 국제 시장가격은 중국에서 통용되는 생산가격을 향해 떨어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중국 노동력에 대한 증가된 착취수준으로부터 나오는 성과물은 생산수단 비용 하락과 생계수단 가격 하락 양자를 통해 일반화된다. 실제로 중국에서의 제조업 상품생산의 증가는 일반적인 제조 가격을 낮추는 상당한 압력으로 작용해 왔다. 이처럼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압력은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에서 1970~80년대의 격화된 계급투쟁과 구조조정 시기 동안 만들어진 고질적인 인플레이션을 치유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중국식 경쟁의 위협은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신자유주의 정책 채택과 더 유연한노동관행을 관철하려고 압력을 가하는 논거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과 달리, 중국산 수입품이 선진자본주의 나라들, 특히 미국으로 몰려들어온 것은 지금까지 기존의 생산 자본을 그리 많이 대체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고용에 미친 충격도 대부분 주변적인 것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제조업 자본 그리고 그에 따르는 일자리는 대부분 1980년대 구조조정 동안에 아시아로 거점이동(재배치)되었다. 그러므로 중국산 수입품은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생산된 상품들과 경쟁하지 않는다.

중국의 등장과 세계 자본축적 안으로의 통합은 1970~80년대 구조조정의 산물인 자본주의 활기회복이 길고 깊게 가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덧붙여 중국은 미국과 전 세계에서 활기를 되찾은 자본축적이 뒤틀리는 것을 위협했던 닷컴붕괴로부터 미국이 회복되는 것을 돕는 데도 기여했다.

우리가 이미 언급했듯이, 닷컴붕괴에 대응하여 미국 연방준비은행은 6개월 남짓한 기간에 이자율을 6.5%에서 1%로 과감하게 낮추었다. 이것은 미국이 해외투자자들에게 덜 매력적이도록 만들었으며, 따라서 해외자본 유입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달러화에 대한 하락 압력이 있었다. 실제로 이후 3년 동안 달러화는 유로화에 대해 30% 이상 하락했다. 이는 미국이 유럽 경쟁자들보다 더 경쟁력을 갖추도록 만들었고 닷컴붕괴로 인한 디플레이션 짐 일부를 유럽으로 넘기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자율을 그렇게 급격히 낮춘 것은, 만일 중국과 일본 그리고 다른 아시아 나라의 중앙은행들이 달러화와 자국 통화 사이에 안정된 환율을 유지하려고 여분의 달러를 매입하지 않았다면, 달러화가 자유낙하 상태에 빠지도록 위협했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 중앙은행 혼자서만 위안화의 달러화 환율 수준을 고정시키려고 지난 4년 동안 거의 5천억 달러를 매입했다.

게다가 연방준비은행이 주로 세금감면과 군비지출 확대로 인해 빠르게 늘어나는 정부예산 적자에 직면하면서도 그러한 낮은 이자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과 다른 아시아 중앙은행들이 자국 통화의 달러화 대비 상승을 막으려고 축적된 달러화를 미국 정부 채무를 메우려고 발행된 재무부 채권으로 바꿀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사실상 중국은 닷컴 벼락경기의 분별없는 번창이 거대한 공황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으려던 경기부양 정책의 자금을 조달하는 데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

중국은 세계 자본축적에서 또 하나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이처럼 중국은 일반적으로 선진자본주의 나라들과,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주된 무역파트너인 미국과 서로 성장을 보강하는 관계를 수립했다. 게다가 중국은 세계 자본축적에서 미국의 지배력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제로 지금까지 중국의 등장은 미국의 경제 패권에 도전한 것이 아니라 패권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제 제기되는 질문은, 어떤 정치적 경제적 요인이 서로 자본축적을 보강하면서 영글어 온 중국과 미국 사이의 충분히 온화한 관계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냐는 것이다. 첫 번째 문제는 부족한 천연자원을 둘러싼 경쟁이다.

 

부족한 자원을 둘러싼 경쟁

(중략)

 

중국의 에너지 수요

(중략)

 

변화무쌍한 석유지정학

(중략)

 

거대한 파워게임

(중략)

 

트로이의 목마?

(중략)

 

금융 개혁

(중략)

 

 

미래의 권력이동?

 

지금까지 세계 자본축적에서 주요 세력으로 등장한 중국은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지 않았다. 실제로 우리가 주장했듯이, 중국의 국가주도 수출지향 성장은 사실상 미국의 경제적 지위와 자본주의 세계화를 향한 경향들을 뒷받침하는 데 기여했다. 물론 우리가 살폈듯이 중국의 앞날에는 심각한 함정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제기하려는 문제는 다른 것이다. 만일 중국의 붉은 부르주아들이 내부적인 계급대립을 억제하고, 세계 금융자본의 넘나드는 힘에 맞서 지금의 결속을 유지하며, 석유와 다른 천연자원을 둘러싼 미국과의 갈등을 피할 수 있다면, 미국과 자본축적을 서로 보강하는 지금의 관계는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중국 경제가 지금처럼 아주 빠른 속도로 순조로운 확장을 계속해서 독일과 일본 그리고 결국엔 미국을 따라잡아 세계적인 경제 초강대국이 되는 것은 가능한가? 답은 매우 확실하게 아니다이다!

이미 중국은 전 세계 장난감의 90%, 의류의 60%를 생산한다. 또한 중국은 전 세계 텔레비전의 30%, 카메라의 50%, 복사기의 70%를 생산하거나 최소한 조립한다. 중국이 지배적인 아시아 생산자가 되면서, 이들 생산품목의 세계 가격은 점점 더 중국 내 생산가격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세계 가격이 중국의 생산가격을 향해 떨어질수록, 두 가격 사이의 차이로부터 비롯되는 초과 이윤 또한 떨어질 것이다. 결국 초과이윤에 대한 전망을 갖고 흡수했던 해외직접투자의 거대한 유입은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다.

그 결과, 중국 내 자본축적의 발걸음이 느려지면서 계급투쟁 억제의 결과를 예견할 수 없게 되든지, 아니면 더 정교하고 복잡한 기술과 디자인이 필요한 상품 생산으로 중국이 치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처럼 새로운 고도기술(하이테크) 생산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중국은 점점 더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에 있는 생산자들과 직접 경쟁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고도기술 생산에서 벌어지는 경쟁에서는 값싸고 단순한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지금까지와 달리 훨씬 덜 이로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최근 20년 남짓 국가가 교육에 투자한 결과, 중국은 상당한 수준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배출해 냈다. 실제로 중국과 인도를 합하면 이제 미국과 유럽보다 더 많은 대학 졸업자를 배출하고 있으며, 대학 졸업자 가운데 과학자와 기술자가 차지하는 비중 또한 더 높다.

고도기술 생산으로 중국이 이동하는 것을 보여주는 예로 중국 자동차산업의 출현을 들 수 있다. 전면적으로 발전된 토착 자동차산업의 개발은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경제전략 속에서 오랜 숙원이었다. 지난 4년 동안 이러한 목표를 향해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중국이 WTO에 가입한 이래, 세계 유수 자동차 제조업체 대다수는 중국 기업들과 합작기업을 만들어 들어갔다. 그 결과, 중국에서의 자동차 생산 또는 적어도 자동차 조립은 빠르게 늘어났다. 2001년 중국은 연간 1백만 대의 자동차를 생산했지만, 2004년에는 5백만 대를 생산하게 되었으며, 2010년 무렵이면 1천만 대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중국의 신흥 자동차산업은 대부분 국내시장에 공급하려고 자동차를 조립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저임금 경제인만큼 자동차 수요는 대부분 부유하지만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중산계급에 한정되어 있다. 자동차생산에서는 규모의 경제가 매우 중요한데, 전면적으로 발전된 중국의 자동차산업이 경제적으로 생존할 수 있도록 장기간의 충분한 수요를 중국 국내시장이 유지해 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중국은 만일 전면적으로 발전된 자동차 산업을 수립하게 된다면, 점점 더 수출을 향해 눈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럴 경우 심각한 장벽에 부딪치게 된다. 먼저 지금까지 생산대수가 적은 까닭에 규모의 경제가 부족한데, 이는 조립에 필요한 부품을 수입하는 데 높은 비용이 든다는 점과 결부되어, 중국의 낮은 노동력 비용만으로는 중국산 자동차가 해외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기에 불충분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둘째, 비록 중국의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여 자동차를 조립하려고 열심이긴 하지만, 세계 유수의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그들의 디자인·기술·마케팅기법 등을 중국 파트너들(아마도 미래의 경쟁자들)과 너무 많이 공유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또한 핵심부품의 제조공정을 중국으로 이전하는 것도 꺼려했다. 그 결과 중국의 신흥 자동차 산업은 해외시장을 공략하는 데 필요한 디자인·공장건설·마케팅 수단들을 지금까지 갖추지 못했다.

생산 디자인과 개발에서 전문기술이 부족하다는 문제를 극복하려고, 중국 국가는 허약한 해외 자동차 기업들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그러한 전문기술을 사들임으로써 국유 자동차 회사들을 지원해 왔다. 한 예가 최근 Rover MG를 인수한 것이다. 상하이자동차산업기업, 난징자동차기업 두 곳의 중국 기업과 BMWRover 인수를 둘러싸고 벌인 복잡한 협상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두 중국 기업 모두 특별히 영국에서 자동차를 생산하는 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주된 목적은 Rover의 차량과 엔진 디자인들 그리고 연구개발 기술들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국내기반의 제한된 규모 때문에 규모의 경제가 부족하다는 문제를 최소화하려고 중국의 자동차산업은 고급사양 차량과 스포츠차량(SUV) 수출에 집중하고 있다. 올해(2006) 초 중국의 자동차 회사 Cherry는 미국에 25만 대를 판매할 계획을 세웠으며, 2010년대 초반까지는 1백만 대까지 끌어올릴 것을 희망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자동차산업은 국가의 후원이 있다 해도 이미 과포화 상태인 해외 자동차시장에 치고 들어간다는 것이 여전히 어려운 숙제일 수밖에 없다. 장차 미국과 유럽의 엄격한 환경규제에도 직면하게 될 것이다.

만일 중국이 끝내 잠재적으로 수지가 맞는 미국과 유럽 시장으로 치고 들어간다 하더라도, 당분간은 아닐 것이다. 새로운 시장을 겨냥한 새로운 모델을 생산하기 위한 컨셉·디자인·공장건설은 여러 해가 걸리는 일이다. 중국이 이제 겨우 대량 수출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적어도 2010년대에 들어설 때까지는 중국이 틈새시장을 넘어서 주요하게 활약할 것 같지는 않다.

만일 중국이 자동차 같은 고도기술 품목 생산을 둘러싼 경쟁에서 승리한다면, 이는 아마도 1970~80년대를 훨씬 더 능가하는 규모의 세계자본주의 구조조정을 수반하게 될 것이다. 미국과 다른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의 제조업 자본은 파산하든지 아니면 그들의 생산 자본을 저임금 국가들 또는 심지어 중국으로 이동시키든지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산업자본이 이동하면서, 미국과 다른 선진공업국들은 텅 비게될 것이다. 그 나라들은 이자로 연명하는 경제가 될 것이며, 점점 더 중국과 다른 곳에 한 금융투자로 얻는 수익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미국·유럽·일본의 경제는 매우 확실하게 황혼기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생산자본의 이러한 이동은 또한 제조업 일자리의 대대적인 이동을 수반하게 될 것이며, 이는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대량 실업을 야기할 것이다. 결국 중국은 더 이상 구매 능력이 없는 실업 노동자들에게 소비자 상품을 수출해야 하는 역설에 빠질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아마도 세계는 거대한 경제공황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이처럼 강화된 경제적 경쟁의 조건 속에서, 우리는 아마도 보호주의와 민족주의의 부상을 보게 될 것인데, 이는 점점 더 무역전쟁, 나아가 제국주의 사이의 대립과 전쟁으로 치달아 갈 것이다. 단결된 국제 부르주아 공동체에 기초를 둔, 그리고 미국 중심의 제국에 기초를 둔, 나아가 지금까지 중국의 등장에 힘입어 유지되어 온 자유무역과 세계화의 시대는 종말로 치달아 갈 것이다.

그러나 그 조짐이 이미 분명하다 하더라도 그러한 세계화 이후시대, 그리고 미국 패권의 최종적 쇠퇴는 여전히 얼마간의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

 

 

결론

 

중국은 앞으로도 지금의 경제성장률을 유지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중국은 마침내 미국 패권에 심각한 도전을 제기할 수 있을까? 이것은 계급투쟁에 어떤 함의를 갖고 있을까?

우리가 앞서 보았듯이, 중국의 거대한 노동계급을 착취하는 데 해외자본을 활용하면서, 중국은 미국 중심의 세계 자본축적에서 또 하나의 중심으로 스스로를 세웠다. 그러면서 중국은 지금까지 선진자본주의 나라들, 특히 미국과 자본축적을 서로 보강하는 관계를 수립했으며, 이는 중국과 세계의 경제성장률 둘 다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이처럼 자본축적을 서로 보강하는 순환을 통해, 중국은 적어도 중단기적으로는 지금의 경제성장률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고 세계의 새로운 패권국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가? 그것은 훨씬 덜 확실하다. 중국은 여전히 가야할 길이 멀다. 중국 경제는 여전히 총생산 측면에서 미국의 1/5 규모밖에 되지 않는 개발도상 경제일 뿐이다. GDP에서 중국은 영국을 따라잡아 세계 4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지만, 이는 중국의 거대한 인구를 무시하는 것이다. 1인당 GDP에서 중국은 여전히 세계 빈국의 하나에 위치하고 있다.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중국의 자동차 산업에서 보았듯이, 중국은 여전히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의 기술이나 공학과 연구개발 전문기술에 매우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중국과 미국이 서로 이익을 얻는 관계는 중국의 빠른 경제성장을 지탱해 주었지만,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지적했듯이, 특히 석유를 비롯한 천연자원을 둘러싸고 중국과 미국 사이에 대립이 치솟게 될 것이다. 추가적인 자유주의 경제개혁은 중국의 국가주도 자본축적을 허물어뜨리고 세계 자본축적에서 또 하나의 중심으로서의 지위를 붕괴시키든지, 아니면 세계 금융자본의 넘나드는 힘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중국이 세계패권으로 나아가는 길에 놓인 이러한 함정들을 피한다 하더라도, 조만간 (아마도 다음 10년 안의 어느 시점에) 중국과 선진자본주의 나라들 사이에 자본축적을 서로 보강하는 관계는 그 반대로 바뀔 것이다. 그러면 중국은 세계경제 질서 속에서 자신이 수립한 위치를 받아들이거나 세계 패권을 향한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야 할 것이다. 그 싸움은 세계 부르주아들의 불안정한 단결을 산산이 부수기 시작할 것이다. 만일 이번 세기가 아시아의 세기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지난 세기처럼 피로 물든 과정을 통해서일 것이다.

중국이 세계 경제로 통합된 것은 1970~80년대 구조조정 이후 세계 자본축적의 활기회복을 지속하는 데 기여했다. 중국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는 전 세계에 걸쳐 이윤율을 회복하고 자본축적에 신선한 탄력을 공급하는 데 기여했다.

영국 부르주아들은 이러한 세계 자본축적의 활기회복으로부터 아마도 어느 누구보다 이득을 얻었다. 계속된 경제성장, 실업 감소, 낮은 물가, 실질임금 증가라는 전례 없는 시대가 펼쳐지면서 신노동당(New Labor)은 노동운동을 패퇴시키고 전후 협약을 뒤흔들었던 대처의 정책을 강화하고 연장할 수 있었다. 현실의 물질적 성과를 양보할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영국 자본은 노동계급에게서 과거의 집단주의와 연대의 잔재를 떼어놓고 개별 소비자/시민으로 재통합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보았듯이, 지금의 상대적인 부르주아적 평화·번영, 사회적 평온의 시기는 우연적이고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아마도 우리는 이미 이 시기의 정점을 지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얘기한 모든 것은 중국 노동계급에 대한 계속된 착취를 전제로 한 것이다. 중국의 변화는 중국 노동계급의 거대한 재형성과 새로운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형성을 수반했다. 다음 호에서 우리는 이러한 중국 노동계급의 재구성을 보다 자세하게 살피고자 한다.

 

 

옮긴이: 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