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맑스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오늘날의 민족주의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11월호

맑스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오늘날의 민족주의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6. 09:23

맑스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오늘날의 민족주의

 

 

데이비드 맥날리(David McNally)

 

 

맑스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의 도전

 

민족주의는 놀라울 정도로 손쉽게 세계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일간지를 읽어보아도, 책을 들여다보고 대학에서의 논의를 들어보아도, 텔레비전 뉴스를 보아도, 대학의 커리큘럼을 들여다보아도, 전지구적인 인구를 민족이라고 부르는 실체로 나누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시된다. 하계올림픽이 아틀란타에서 개최되었다. 올림픽에 참여한 모든 선수들은 민족국가에 따라 나뉘었고, “자신들의국가를 대표하였고, 자신들의 국가의 국기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었다. 선수들이 딴 메달은 국가의 메달 집계에 포함되었고, 선수들은 명예와 자긍심을 국가에 바쳤다. 올림픽 기간 내내 국가의 메달 순위는 올림픽 경기를 지켜보던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중계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들 속에서 어떠한 이상함도, 교활함도 또는 위험성도 느끼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민족국가의 구성원임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국가가 성취한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벤 존슨의 경우를 기억해 본다면) 국가가 난처함을 당하거나 굴욕을 당했을 때 자신들의 일인 양 괴로워한다. 사람들은 민족국가 체계란 인간 역사에 있어서 가장 최근의 발명품이며,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대부분의 인간 사회는 민족과 같은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고, 민족국가의 등장은 자본주의의 국제적인 발전과 시대적으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설사 인식한다 해도 아주 드물다. 또한 민족국가가 자본의 착취를 용이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규제하고, 통제하며, 규율한다는 견해는 정치적 논쟁에서 거의 논의되지 않는다. 일본의 자동차, 캐나다의 철강, 미국의 영화, 러시아의 선수들, 자메이카 음악 등등과 같이 민족적인 용어로 표현된 사물들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정치적문화적 이해를 구성하는 상식인 정신적인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수십 만 명의 학살을 몰고 온 전()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의 종족­민족주의나 부룬디와 르완다 종족­민족주의와 같은 치명적인 종족­민족주의조차도 우리가 민족이라는 관념 또는 민족주의에 대해 질문을 던지도록 만들지 못했다. 이러한 치명적인 종족­민족주의는 문제가 있는 다른 사람들의 민족주의일 뿐 우리들의 민족주의는 아니었던 셈이다.

 

이러한 모든 이유 때문에, 민족주의는 이론의 여지없이 맑스주의가 맞닥뜨린 가장 큰 도전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에서 노동자에게는 조국은 없다라고 선언했다. 맑스는 진정으로 국제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고 전 세계적인 인간해방과 민족국가의 소멸을 최고의 목적으로 선언하는 정치운동을 최초로 출범시켰다. 1864년에 출범한 국제노동자협회는(1 인터내셔널) 이러한 관점에 맞아 떨어지는 조직형태였으며, 노동자계급의 국제적인 정치운동을 대표하였다.

그러나 공산당선언이 출판된 지 150년이 지난 지금, (1917년에서 1923년의 막간극을 제외한다면) 민족주의는 차츰 노동자계급 운동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 결과 조직의 측면에서 노동자운동은 전적으로 민족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한 국가 내에서만 노동자를 조직하려고 하였고, 다른 나라의 노동자 형제자매에 대해서는 거의 고려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민족주의가 노동자운동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노동자운동은 자신들의 일자리자신들의삶을 보호하기 위해서 수입통제를 (그리고 다른 형태의 보호주의를) 지지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전 세계에 걸쳐 좌익민족주의가 노동자운동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니다.

민족주의가 깨지지 않고서는, 국제사회주의 정치의 전망은 사실상 어둡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민족문제에 대한 논의는 사회주의운동 내에서 거듭 제기되어왔던 문제이다. 이제부터 나는 민족주의에 대한 맑스주의 논쟁의 몇몇 주요한 견해를 다시 검토해보고, 이런 견해가 갖고 있는 강점과 약점을 평가해 보도록 하겠다. 그러고 난 뒤 이 견해가 제시해 주고 있는 통찰을 오늘날의 캐나다 민족문제에 대한 논의에 적용해 보도록 하겠다.

 

 

맑스에서 트로츠키까지의 민족문제

 

민족주의가 계속 이어지고 민족주의 투쟁이 벌어지자, 사회주의자는 어쩔 수 없이 민족문제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러나 민족문제에 대해서라면 상황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많은 사회주의자는 민족주의에 적응하고 순응하였으며, (“전 세계적인 비참한 사람들의 국제화된 투쟁을 통해서 민족국가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계몽적이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민족국가를 통치하는 것을 자신들의 프로젝트로 보았다. 몇몇 사회주의자는 그저 민족주의 투쟁의 현실을 무시하려만 했고, 끊임없이 전 세계 노동자의 국제적인 단결을 외쳤다. 그러나 이런 외침으로는 그 누구도 설득할 수 없다. 그것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민족문제를 무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주의자가 국제주의적인 관점에서 민족의 억압이라는 현실을 접근하기 위해 분투했던 몇몇 중요한 사례가 있다. 그것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1860년대의 아일랜드에 대한 맑스의 태도와 차르의 통치시기에 억압받던 민중에 대한 레닌의 접근이다. 이런 보기를 살펴보기 전에 내가 넌지시 말했던 두 조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세계사회주의운동은 1880년대 후반 독일에서 최초로 대중적인 면모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그 때 독일은 의회제도(소수의 성인 인구층만을 대변했다)를 가지고 있던 군주제 국가였다. 시간이 지나, 점점 더 많은 노동자가 투표권을 얻게 되었고, 노동자계급의 정당인 사회민주주의당(SPD)은 중요한 정치세력이 되었다. SPD는 곧 독일국가의 전복이 아닌 독일국가의 점령(, 집권)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SPD의 지도자들은 민족의 이익에 점점 더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SPD의 지도자들은 차츰 진보적인독일의 식민주의를 옹호하게 되었다. SPD의 지도자들은 SPD가 집권을 한다 해도 독일의 식민지를 해방하지 않고 그저 더 나은 방식으로 통치하겠다고 말했다. SPD 지도부의 민족국가와의 동일시는 너무나도 강력했고 대부분의 SPD 지도부가 19148월에 국가를 넘겨받는다는 계획에 전념했기 때문에, SPD는 독일의 1차 세계대전 참전에 찬성하게 되었다. (1889년에 설립된) 2 인터내셔널의 대부분의 정당은 즉시 SPD의 태도를 따랐다.

폴란드 출신 독일 맑스주의자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러시아 맑스주의자인 레닌은 선두에 서서 전쟁에 대한 사회주의적인 반대를 외쳤다. 둘 모두는 그때의 전쟁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그리고 세계를 분할하려는 자본주의 세력의 경쟁적 투쟁으로 비난하였다. 룩셈부르크와 레닌은 전쟁에 반대하는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정책을 개발하였다. 룩셈부르크와 레닌은 노동자가 자신들의민족의 지배계급을 지원하기를 거부하고, 전쟁이 불러온 사회적 위기를 자본주의 체계에 대항하는 노동자의 계급내전으로 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룩셈부르크와 레닌은 사회주의운동의 매우 중요한 국제주의적이며 반­제국주의적인 조류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룩셈부르크와 레닌은 이러한 점들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 했지만, 민족투쟁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태도라는 문제에서는 의견을 달리했다. 룩셈부르크는 제국주의 시대와 자본주의가 완전하게 세계화된 시대에서는 민족주의 투쟁이란 시대에 뒤떨어진 투쟁이며, 세계경제가 너무나도 강력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독립된 민족국가라는 관념(또는 기획)은 어리석은 관념(또는 기획)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구()제국을 해체하고 새로운 부르주아­민주주의 국가를 창조해 냈던 19세기 중반의 민족주의 전쟁은 진보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러한 시대는 지나갔다. 국제적인 자본주의의 시대에는, 새로운 민족국가의 설립을 지지하는 것은 반동적이다. 이제 임무는 세계자본주의에 맞서기 위해서 전 세계의 노동자계급을 동원하는 것이다. 그녀는 광포한 제국주의 시대에는 민족주의 전쟁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했다. 민족주의 투쟁이란 대중을 기만하고 속이는 수단으로 기능할 뿐이다.”

룩셈부르크의 견해는 원칙적인 국제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격렬한 반대라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레닌이 주장했듯이, 룩셈부르크의 견해는 두 가지 중요한 약점이 있다. 첫째, 룩셈부르크의 견해는 민족관계가 지닌 위계적인 특성, 즉 어떤 민족은 지배하지만 다른 민족은 억압받는다는 특성을 간과하고 있다. 이러한 간과는 사회주의자들이 압제적인 민족과 억압받는 민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에 대해서 냉담하고 중립적인 태도를 띄게 만든다. 둘째, 룩셈부르크의 견해는 사회주의자가 억압받는 민족의 자결권을 옹호하는 것의 중요성을, 즉 이러한 옹호가 지배하는 민족의 노동자들을 타락시켰던 국수주의에 대한 대항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과소평가하였다. 따라서 룩셈부르크의 실수는 그녀가 민족주의 투쟁을 세계경제라는 다소간 추상적인 수준에서 바라보았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었다. 이 결과로 그녀는 민족 사이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정치 동학을 보지 못했고, 민족 사이의 갈등이 정치투쟁의 지형을 만들고 노동자계급의 의식을 이루는 방식을 보지 못했다. 맑스주의가 정치적인 논쟁의 실재적인 용어들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할지라도, “모든 민족주의 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진 투쟁이다와 같은 종류의 추상적이고 시대를 초월한 견해는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레닌은 주장했다. 대신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라면, 그들은 현재의 민족주의 투쟁이 정치투쟁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평가해야 하고 그 속에서 대안을 기획해야만 한다. 레닌은 아일랜드 독립투쟁에 대해서 맑스가 보였던 태도를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러나 사실 레닌의 주장이 맑스의 주장보다 더 독창적이다. 레닌은 민족주의 투쟁이 제기하는 모든 문제에 대한 매우 새로운 접근법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일단 아일랜드에 대한 맑스의 접근법을 살펴보고 난 뒤, 레닌이 맑스의 접근법을 어느 방향으로 발전시켰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맑스와 엥겔스는 원래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기 위한 아일랜드의 투쟁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보기를 들자면, 맑스와 엥겔스는 1848년 영국의 대중적인 노동자운동(차티즘 운동)이 아일랜드 독립 문제를 다룰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아일랜드 문제를 영국 노동자계급 투쟁의 부수적인 측면으로 보았고,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이 차티즘 운동과 연합하는데 실패한 점을 들어 이들을 비판하였다. 차티즘 운동이 쇠퇴하고 난 뒤, ()아일랜드 감정이 영국 정치에서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1860년대에 아일랜드 독립을 위한 페니아 운동이 다시 일어나자, 맑스는 자신의 태도를 바꾸었다.

맑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맑스는 영국 노동자가 자신들의 지배자와 동일시하게 했던 반()아일랜드 감정이 독자적인 노동자계급의 정치에서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주장했다.

 

 

보통의 영국 노동자는 아일랜드 노동자가 자신들의 생활수준을 떨어뜨리는 경쟁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일랜드 노동자를 증오하였다. 영국 노동자는 아일랜드 노동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지배하는 민족의 구성원으로 생각했으며, 자신들을 아일랜드에 대항하는 귀족들과 자본가들의 도구로 전락시켰고, 결국에는 자신들을 지배하는 지배세력의 힘을 강하게 만들었다.……이러한 적대가 영국 노동자계급의 무능력에 대한 비밀이었다.…….

 

 

둘째, 맑스는 이제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민족주의 투쟁은 영국의 노동자혁명에 불을 붙일 핵심적인 요소라고 주장했다. 맑스도 시인했듯이, 이러한 태도는 그가 지닌 옛 태도를 뒤집은 것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영국 노동자계급의 우세한 세력을 통해 아일랜드 체제를 전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나는 이 문제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를 통해 이와 반대되는 입장을 확신하게 되었다. 영국 노동자계급은 아일랜드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 ……레버는 아일랜드에서 당겨져야만 한다.

 

 

이로부터 아일랜드 문제는 영국의 노동자계급 정치에서 최전선이 되어야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맑스는 아일랜드 문제가 제1 인터내셔널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갈등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 그리고 공개적으로 아일랜드의 편에 서는 것이 인터내셔널의 과제이다.” 맑스와 엥겔스가 아일랜드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경험은 더 일반적인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보기를 들자면, 이 경험을 통해 맑스는 다음과 같은 멋진 말을 만들어 내었다.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어떠한 민족도 결국은 자기 자신의 사슬을 벼려내게 될 것이다.” 많은 측면에서 레닌이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맑스의 통찰을 받아들이고, 맑스의 통찰을 체계적으로 정치적 상황에 적용했던 것이다.

러시아 차르 제국은 12개의 민족을 지배하고 있다. 차르 제국 전역에 걸쳐 노동자계급운동을 조직하는 과정 속에서 러시아 맑스주의자들은 어쩔 수 없이 민족주의 열망과 충돌하게 되었다. 많은 러시아 맑스주의자는 민족문제란 맑스주의 운동 안에서 차지할 위치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민족주의 열망을 간단히 처리해 버렸다. 레닌의 초기 저술은 민족문제에 대해 관심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민족문제는 레닌의 사유에서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 무렵 레닌은 민족문제에 대한 독창적인 견해를 발전시켰다.

레닌의 관점은 다음의 주장들을 담고 있다. 첫째, 제국주의 세계 질서에는 필연적으로 민족주의적인 반란을 초래하는 민족 사이의 위계가 존재한다. 둘째, 맑스주의자에게 핵심적인 문제는 민족갈등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 국제주의자의 적절한 행동방침을 찾아내는가?”이다. 셋째, 중요한 전략적인 문제는 노동자의 민족주의 정서를 국제주의 정서로 대체하는 것이다. 넷째, 이러한 문제의 가장 큰 장애물은 지배하는 민족의 노동자가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이다. 그리고 (맑스가 아일랜드 문제를 다루면서 영국 노동자에 대해서 주장했듯이) 이러한 민족주의는 노동자로 하여금 자신들의 지배계급과 동일시하게 만들며, 억압받는 민족의 노동자가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를 강화한다(왜냐하면 억압받는 민족의 노동자는 지배하는 민족의 노동자가 민족적인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자신들의 열망에 일말의 공감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레닌에 따르면,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맑스주의자는 자신들만의 독립된 국가를 형성할 권리까지 포함하는 억압받는 민족의 자결권을 지지해야만 한다.

레닌의 주장의 핵심은 (룩셈부르크의 경제적 주장과는 달리) 정치에 대한 그의 강조이다. 레닌은 민족주의가 노동자계급 내의 정치적인 분열을 드러내준다고 주장했다. 맑스주의적인 접근법은, 노동자계급 내의 정치적인 분열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속에서, 이러한 정치적인 분열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이 목적을 이루려면 먼저 다음과 같은 핵심 질문을 해야 한다. 그것은 민족국가의 경제적인 생존능력에 대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국제주의를 건설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레닌의 대답은 명확했다. 억압받는 민족의 자결권에 대한 캠페인을 공개적으로 벌여서 지배하는 민족의 노동자가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적인 국수주의를 침식하는 것이다. 지배하는 민족의 노동자가 이러한 태도를 취하게 만드는 것은 민족주의적인 동일시에 대한 결정적인 타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레닌은 이러한 주장이 뜻하는 것을 맑스주의자가 더욱더 많은 독립국가가 세워지기를 바란다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맑스주의자는 국제주의자로서 더 많은 노동자를 공동의 정치적 삶으로 묶어낼 수 있는 연방정부를 지지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방정부는 자발적으로 세워져야만 한다.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정치연맹의 형태에는 반대해야 한다.

 

 

우리가 어떠한 예외도 없이 몽골인, 페르시아인, 이집트인, 그리고 모든 억압받고 불평등한 처지에 놓인 민족들을 위해 연방탈퇴의 자유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연방탈퇴를 지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 자발적인 연맹, 강압적인 연맹과는 전혀 다른 통합을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민족의 자결권을 지지하는 것은 노동자의 국제적인 연대를 건설하는 전략에서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민족의 자결권을 지지하지 않는 것은 지배적인 민족주의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며, 민족지배의 경험의 중요성을 인정하는데 실패한 또는 레닌이 민족문제에서 매우 중요한 심리학이라고 부른 것을 인정하는데 실패한 추상적인 국제주의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다. 즉 국제적인 연대는 지배하는 민족의 노동자가 연방탈퇴의 권리까지 포함한 자신들의국가 내에 거주하고 있는 억압받는 민족의 자결권을 가장 열렬하게 옹호할 것을 요구한다.

이와 함께 레닌은 지배적인 민족주의에 대한 원칙적인 반대가 억압받는 민족의 노동자가 민족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전향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압제적인 민족의 사회주의자들이 억압받는 민족의 자결권을 옹호한다면, 억압받는 민족의 사회주의자들은 압제적인 민족의 노동자와의 단결에 일차적인 중요성을 부여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부지불식간에 자신들의 민족 부르주아지와 한 편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정신에서, 3 인터내셔널의 민족문제와 식민지문제에 대한 테제는 식민주의에 맞서는 부르주아지의 민족주의 투쟁을 지지할 때조차도 사회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의 독자성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접근법은 사회주의자들이 국제주의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도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민족주의 투쟁에 참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커다란 강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맑스의 저술과 민족문제에 대한 레닌의 저술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와 함께 맑스와 레닌의 저술은 원칙 이외에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지 못한다. 즉 분리권(연방탈퇴권)을 옹호해야 한다는 원칙은 우리가 어떤 조건에서 이 권리를 옹호해야 하는지를 말해주지 못한다. 맑스와 레닌의 저술에 주목하는 것이 실제적인 조건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 투쟁의 구체적인 분석을 대체할 수는 없다. 맑스와 레닌의 저술은 모든 상황에 쉽게 적용될 수 있는 공식을 제공해 주기보다는 구체적인 분석을 위한 출발점만을 제공해 준다. “캐나다의 민족주의 투쟁에 접근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맑스와 레닌의 통찰을 사용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논의하기 전에, 1924년 레닌이 죽은 뒤 터진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국제공산주의 운동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타락의 여파와 스탈린주의의 출현 때문에 국제주의에서 민족주의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이미 1923년에 민족적인 볼셰비즘이라는 기획이 독일공산당에서 발전되고 있었다. 스탈린이 일국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선언하자마자, 지배적인 민족주의를 수용하면서 각 민족의 사회주의 투쟁의 기획으로 나아가는 문이 열렸다. 보기를 들면, 캐나다 공산당은 곧 캐나다의 민족주의가 진보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반면 퀘벡의 민족주의 투쟁에 대한 더욱 섬세한 이해를 증진하려 했던 퀘벡의 공산당원들은 부르주아 민족주의라는 혐의를 받고 정식으로 당에서 추방되었다.

일국사회주의 기획에 저항하고 맑스주의적인 국제주의 관점을 확고하게 지켰던 것은 레온 트로츠키의 위대한 역사적인 이바지 가운데 하나이다. 모든 혹독한 조건에도, 트로츠키 그룹은 민족주의가 좌파를 지배하고 있을 때에도 국제주의의 원칙을 지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트로츠키가 국제주의에 이바지한 것은 그의 연속혁명이다. 트로츠키는 도래할 러시아혁명의 전략적인 관점으로 영구혁명론을 처음으로 정식화했으며, 1920년대 후반에는 제국주의 시대의 계급투쟁과 민족주의 투쟁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론으로 재정식화했다. 연속혁명은 맑스주의에 훌륭하고도 독창적으로 이바지했다. 트로츠키는 사회주의 투쟁이 제기되기 전에 주어진 역사적 단계가 성취되어야만 한다는, 즉 사회주의 투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봉건제가 극복되고 완전한 자본주의 사회가 성취되어야만 한다는 도식적이고 선형적이며, 기계론적인 관점을 거부함으로써, 계급역학을 현재 사회와 세계경제와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대부분의 러시아 맑스주의자가 노동자의 권력 장악 투쟁을 의제로 올리기 전에 차리즘에 맞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수행하고 자본주의 발전 단계를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트로츠키는 러시아의 성숙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점증하는 힘이 반() 차리즘 투쟁을 이끌게 될 것을 러시아의 부르주아지가 두려워한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1905년에 실제로 일어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혁명적인 운동이 대중파업을 촉발시켰고 분노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들의 계급적인 요구를 성취하기 위해 가두투쟁을 벌인 것에 놀랐기 때문에, 곧 이러한 투쟁을 저버릴 것이다. 그 결과로, () 차리즘 투쟁의 지도권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넘어갈 것이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투쟁에 자신들만의 독특한 소인을 찍을 것이며, 이 투쟁을 노동자들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이끌고 나갈 것이다. 트로츠키는 맑스의 한 구문을 인용하면서 이 투쟁을 <연속혁명>자유민주주의를 위한 혁명적인 운동으로 시작되었던 것은 곧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자권력을 위한 투쟁으로 발전할 것이다으로 기술하였다.

(1905~06년 동안 발전된) 트로츠키의 이론은 1917년 러시아혁명 과정의 계급역학에 대한 심원한 예측이었다는 점이 증명되었다. 트로츠키는 1920년대 중국혁명운동을 보면서 자신의 이론의 범위를 러시아에서 식민지 세계 일반으로 확대하였다. 그는 식민지에서도 동일한 패턴이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트로츠키는 겁먹은 부르주아들은 반()식민지 투쟁으로부터 물러날 것이고, ()식민지 투쟁은 혁명적인 노동자계급 정당에 의해 지도될 경우에만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몇몇의 통찰을 얻을 수 있겠지만, 이 주장은 과도한 일반화의 위험을 안고 있다.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 노동운동만큼 스스로 조직되고 전투적인 노동자계급이 없다고 한들, 왜 쁘띠 부르주아지 또는 부르주아지는 민족주의 투쟁으로부터 물러나야만 하는가? 사실 쁘띠 부르주아지와 부르주아지는 민족주의 투쟁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인도, 알제리,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그리고 많은 다른 나라에서 노동자계급에 의해 지도되지 않았던 민족주의 운동이 독립적인 민족국가를 세웠다. 중국의 경우, 공산당은 민족주의 투쟁을 자기­활동적인 노동자 계급 없이 그리고 노동자의 민주적인 조직의 건설 없이 이끌었다.

사실 1945년 이후의 세계는 노동자계급의 운동이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던 일련의 민족해방투쟁을 경험하게 되었다. 명백하게도 이러한 사실은 트로츠키 이론의 수정을 요구한다. 트로츠키 이론의 강점이 무엇이든 간에 상관없이, 트로츠키의 이론은 제국주의 시대의 민족주의 투쟁에 대한 보편적이고 타당한 예측으로 적용될 수 없다.

어떤 트로츠키주의자는 트로츠키의 이론에 부합하지 않는 사실을 따라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다른 트로츠키주의자는 교조적으로 트로츠키 이론의 문자 하나하나에 계속 집착했다. 미국의 가장 큰 트로츠키 그룹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문서를 작성했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산업이 발전하지 못한 나라의 민족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혁명을 배반한다. 민족의 독립을 포함하는 부르주아지의 민주주의적인 과제는 오직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주장이 틀렸다는 사실은 (, 민족의 독립은 사회주의 혁명 없이도 성취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트로츠키도 이렇게 말했으며, 사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방침을 채택한 많은 트로츠키주의자는 알제리, 이집트, 그리고 진보적인 민족주의 체제가 권력을 장악한 모든 곳에서 사회주의 혁명과 노동자 국가를 보기 시작했다. 결국 민족의 독립이 사회주의 혁명 없이 성취될 수 없다면, 민족의 독립의 성취는 그저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사회주의 혁명과 비슷한 어떤 것, 즉 수백만의 억압받는 인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오고, 권력을 장악하고, 군대를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또는 공장과 지역사회에서 인민들의 자치­정부가 세워지는 것과 같은 것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은 문제가 될 것 같지 않다. 어떤 그룹들은 트로츠키보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숨겨진 논리가 모든 민족주의 투쟁을 사회주의 혁명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부르주아지와 쁘띠 부르주아지는 이 숨겨진 논리는 모르겠지만, 이들은 실제로 노동자의 혁명을 수행한다. 노동자의 자기­해방의 우선성은 거의 모든 사회집단들이 이제 사회주의를 만들어가기 때문에 곧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가르는 선은 희미해진다. 이러한 견해에 경도된 어떤 트로츠키주의자는 결국 진보적으로 보이는 민족주의(쿠바, 나이지리아, 그레나다)를 무비판적으로 포용하게 되면서, 연속혁명론이라는 전체적인 기획과 민족주의 투쟁 내에서 독립적인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 조직을 유지해야 한다는 연속혁명론의 요구도 포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이 걸었던 길이다.

나는 민족주의 투쟁을 평가할 때 단순한 공식을 거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기 위해 앞의 사례들을 제시했다. 오늘날의 민족주의 투쟁에 대한 일반적인 법칙 또는 역학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지도 않았다. 많은 맑스주의자들의 실수들 중 하나는 특정한 민족주의 투쟁을 주어진 역사적 국면에서 구체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민족주의 투쟁에 대한 일반적인 법칙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나는 이점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캐나다의 민족주의 투쟁에 대한 예비적인 고찰을 하고자 한다. 그러나 민족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적인 설명은 여전히 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현대 세계의 민족주의에 대한 완전하고 포괄적인 이해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작업의 영역들이 무엇인지를 먼저 지적해 보고자 한다.

 

 

맑스주의적인 민족주의 이론을 위한 문제들

 

아일랜드에 대한 맑스의 관점과 민족문제에 대한 레닌의 저술들이 가지고 있는 강점들 가운데 하나는 그 저술들이 민족주의 자체를 옹호하는 일 없이 억압받는 사람들의 투쟁을 (비판적으로) 지지할 방법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맑스와 레닌의 유산을 중요하게 만들어 준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맑스와 레닌 모두 우리가 실제로 직면하고 있는 커다란 문제, 즉 민족주의와 민족정체성의 믿기 어려운 위력과 지속이라는 문제를 설명해 주는 이론을 실제로 제공하지 않았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민족주의란 더욱 강력한 계급의식의 일시적이거나 삽화적인 일탈이 아니라 대다수의 노동계급과 억압받는 사람들의 관념을 계속해서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이유에 대한 완전한 대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나는 탐구할만하고 발전될만한 가치가 있는 네 개의 부분적인 설명을 요약해 보겠다.

 

첫 번째 문제는 시민권의 흡인력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초기 노동자계급 운동은 대다수의 노동자가 선거권을 가지고 있지 못한 환경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을 기억해 보자.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민주적인 권리를 위한 투쟁, 특히 선거권을 위한 투쟁은 그때 사회주의자들이 외친 구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구호였다. 사실 일반적으로 사회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알려진 사회주의는 주로 노동자계급을 자본주의적인 민주주의에 포함하려는 데 열중했던 것 같다. 그 결과로, 자본주의적인 민주주의를 그저 충분히 포괄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역사적 전통이 발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부르주아 민족국가라는 자본주의 정치권력의 형식과 내재적인 문제, 즉 관료주의, 시민권에 대한 민족주의적인 정의, 경제 권력과 정치권력의 분리와 같은 문제에 대한 질문은 거의 제기되지 않았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노동자계급 운동이 자본주의적인 민주주의 안에서 완벽한 시민권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누구도 이러한 투쟁의 중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권리를 위한 투쟁과 완전한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한 전투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투쟁이 진행되면서 노동자는 때때로 이념의 한 종류였던 부르주아 민주주의 권리에 집착하였다. 그 결과로 노동자는 자유민주주의 그 자체의 내재적인 한계와 편향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정치적인 전통과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권리와 시민권에 대한 자유주의적자본주의적인 정의는 노동자계급 운동에 깊숙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자유주의적자본주의적인 정의 속에서, 인민은 개인이라고 하는 완전히 분리된 실체로서, 즉 경쟁적인 시장에 모이게 되는 사람과 주로 상품과 서비스의 구매자와 판매자인 개인의 (그리고 그 개인들의 가족들의) 권리만을 인정하는 법에 따라 규제되는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들은 개혁주의라고 한 것의 한 측면이다. 그렇다고 맑스주의자들이, 주로 사회주의운동을 배신한 타락한 지도자에만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시민권에 대한 이러한 정의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힘에 관심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우리가 개혁주의에 대한 진지한 대안을 발전시켜야만 한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은 나쁜 지도자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거친 구호들처럼 들리는 비판만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권리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노동자계급의 경험과 공명하는 자본주의적인 민주주의와 시민권에 대한 비판을 제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첫 번째 문제와 관련된 두 번째 문제가 있다. 이 문제는 바로 20세기를 지배해왔던 사회주의에 대한 국가중심적인 관점이다. 수많은 역사적 시기에 걸쳐서 좌파의 대부분은 국가권력의 장악을 사회주의의 사회적경제적 본질로 제시하였다. 맑스는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의 모든 강조점을 사회적 생산관계에 놓았다. 맑스가 사회적 생산관계 개념을 통해서 의미하고자 했던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가 생산되는 방식을 지시하는 지배, 통제, 소외, 그리고 착취의 관계였다.

이 강조로부터 뒤따라 나오는 것은 사회주의란 노동자 인민이 직접 운영하는 통제의 탈­소외된 형식들과 생산의 자기관리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회적 생산관계의 발전을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이다.

특히 스탈린주의화된 공산당이 사회주의 좌파를 지배하고 있던 시기 동안에는, 이러한 대의는 사라져버렸다. 생산수단의 국가소유와 계획경제는 새로운 사회의 본질이라고 말해졌다. 트로츠키주의자들도, 그들의 최선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같은 것을 강조했다. 그 결과로, 국가소유가 본질적으로 진보적이라는 관념, 즉 국가소유가 본질적으로 사회주의적이라는 관념은 좌파 사이에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관념들은 국가­중심적인정치, 즉 국가규제와 국가계획을 사회주의 선전의 최고지위로까지 격상시켰던 정치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국가­중심적인정치가 빚은 결과 가운데 하나는 민족국가의 본래적으로 억압적인 성격을 제기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사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좌파 진영의 많은 사람은 이와 같은 관점을 계속 유지하고 있으며, 세계의 많은 지역의 노동자 인민 사이에서 불거져 나오는 중앙집중화된 국가관료주의에 대한 대중적인 적대감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다.

이러한 국가­중심적인사회주의 정치, 이를테면 우리가 위로부터의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에서 잊혀 진 것은 민족국가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계급은 법과 세금의 통합된 체계, 공동의 언어, 통합된 정부, 그리고 외국자본가로부터 자신들의 권리를 방어하고 외국자본가에 맞서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군대를 통해 통합된 전국적인 시장을 구축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맑스가 프랑스에서의 내전에서 강조했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관료주의 형식에 대한 인식도 잊혀졌다.

결국 사회주의에 대한 국가­중심적인 관점은 전국적인 구조들과 제도들로서의 민족국가가 (현재의 국가에 속한) “우리(외국인, 즉 외부인인) “그들사이의 분열을 영구화한다는 사실을 차츰 잊어버리게 되었다. 따라서 국가­중심적인 사회주의의 결과는 국제주의의 희생을 통한 민족주의의 강화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나로 하여금 세 번째 문제, 즉 공간의 정치라는 문제를 제기하게 만든다. 맑스주의자들은 이상하게도 공간문제, 특히 인민의 정체성이 공간적이고 지리적인 참조점을 갖게 된 방식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그러나 개인적인 기억은 반드시 공간적 차원을 갖고 있다. , 우리는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디에서 살아왔고 자라왔으며, 어느 지방의 학교를 다녔는지 등등의 공간적 관점에서 과거를 생각한다. 인간의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공간과 인간과의 관계는 민족귀속성과 별다른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귀속감에 대한 우리의 감각과 공동체에 대한 우리의 필요에 민족적 형식을 새겨 넣었다. 사실 사람들은 크건 작던 간에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라고 기술한 것을 구성했다. 따라서 민족은 민족국가라 불리는 행정적인 단일체와 결합된 국기, 국가, 인위적인 신화와 역사와 같은 상징을 중심으로 조직된 상상의 공동체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의 공동체가 사람들을 흡입하는 실재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우리는 상상의 공동체의 흡입력을 실현하고 있는 올림픽과 같은 현상을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실켄 로우만이나 도노반 베일리를 전혀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조차도 이 선수들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 선수들의 패배는 괴로워하면서 마치 상상의 공동체가 살과 뼈를 가지고 있다는 듯이 행동한다.

나는 필연적인 무언가가 민족적인 동일시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말들을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러나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이 민족적인 동일시는 실제적인 필요, 즉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에 귀속되고자 하는 욕망, 공동의 목적을 갖고자 하는 욕망에 말을 걸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미래를 위한 대중적인 사회주의 운동이 공동체에 대한 진정한 국제주의적인 감수성, 즉 지역적인 경험과 세계적인 경험을 연결해 주는 공동체에 대한 감수성을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되어야만 한다는 분별력을 경시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에게 민족주의는 적이라고 말하는 전위를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공동의 투쟁에서 벼려진 새로운 연대와 새로운 동일시를 창조할 수 있는 조직과 민족국가를 넘어서는 조직 형태에 바탕을 둔 새로운 공간의 경험을 창조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세계화 시대의 민족주의 발흥이라는 네 번째 문제를 제기해 보겠다. 경제적인 세계화는 범역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초국적 기업과 전지구적 금융시장의 패권에 영향을 받지 않는 지역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민족국가는 거대한 초국적 기업보다 경제적인 규모가 더 작다. 그리고 전지구적인 금융시장은 모든 중앙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돈의 합계를 훨씬 초과하는 돈을 날마다 유통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전지구적인 경제적 실체는 사람들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공장이 문을 닫고 모든 지역사회가 무너지고 있으며, 공공병원, 학교, 우체국 등의 공공서비스가 거세게 비난받고 있으며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민족주의는 이러한 힘들을 이해하고 이러한 힘들에 저항하기 위한 최선의 수단이 되고 있다. 멀리 떨어진 다른 민족의 정부가 초국적 기업 또는 사이버공간에 집중된 전자적인 전지구적 금융시장보다 더 가깝고 더 확실하게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세계은행의 수장 또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기업의 경영진의 말보다는 분노한 농민집단과 해고된 광부의 말이 들려올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나 전지구적 자본에서 우리를보호해 달라고 민족국가에게 요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문제를 민족적인 관점에서 보게 만든다. 외국인과 외국제품은 우리의 안전과 복지의 적이 된다. 비열하고 비도덕적인 정치가는 곧 이러한 감정에 기름을 끼얹고 조작하는데 능숙하게 된다. 따라서 미국의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는 일본산 자동차를 맹렬히 비난하는데 참여하게 되고, 독일의 젊은이는 터키 이주노동자에 대한 노골적인 분노를 드러내며, 캘리포니아의 사람이 멕시코 불법체류자를 엄하게 단속해야 한다는 태도를 지지하게 되고, 영어를 말하는 캐나다인들이 탐욕스러운퀘백인들을 비난하게 되고, ()유고 연방의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그리고 무슬림들이 서로 싸우게 되며, 르완다와 부룬디에서 후투족과 투티족은 유혈적인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이러한 목록은 아주 많다.

그렇다면, 자본이 거세게 전지구적으로 재구조화되는 시기에 구()민족주의와 신()민족주의가 소리를 높이고 있으며, 많은 민족주의가 공격적이고 폭력적으로 되고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반()식민주의적인 민족주의의 나팔소리를 거의 듣지 못한다. 왜냐하면 반()식민주의적인 민족주의의 대부분은 발전에 대한 희망을 충족시키는데 실패함으로써 믿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구역질나고 불화를 일삼으며, 점점 더 종족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민족주의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분노와 절망의 환경 속에서, 특히 좌파와 노동운동이 소진된 모든 지역에서, 종족적인 우익 민족주의가 정치적인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거듭 말하지만, 이러한 현상에는 어떤 필연적인 것도 없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민족주의의 쇄도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주의의 쇄도는 대다수의 좌파가 민족주의를 받아들인 1914년 뒤 그 어느 때보다도 사회주의자가 국제주의적인 의무를 강조할 필요가 더 절박해지고 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사회주의적 국제주의자가 제공해 왔던 중요한 통찰들을 받아들이고, 공간의 정치, 민족국가와 경제의 세계화와 같은 문제의 맥락 속에서 이러한 통찰을 더 발전시키고,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라는 관점에서 부르주아 민족국가에 대한 비판을 더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오늘날 캐나다의 민족문제

 

캐나다는 유럽세력이 제국주의적으로 팽창한 결과이다. 캐나다는 영국의 식민지 개척민 국가로 건설되었기 때문에, 원주민과 뉴프랑스 지역과 1759년 영국이 점령한 캐나다의 다른 지역에서 살고 있었던 프랑스 이주자에 대한 지배와 억압과 예속에 기반하고 있다. 캐나다는 이러한 집단의 억압에 기초해서 세워졌다. 이러한 이유로, 캐나다의 정치는 두 민족주의 투쟁, 즉 원주민[또는 ()민족(First Nations)”]과 퀘백인의 민족주의 투쟁에 의해 틀지어 졌다.

원주민들은 인디언 법이라는 아파라헤이트 정책을 통해 경제적으로 주변화되었으며 정치적으로 선거권을 박탈당했고 지독하게 억압받았기 때문에, 정치적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정치적으로 조직된 원주민 운동이 자신들의 표시를 남기기 시작했던 것은 바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사회적 저항이 폭발할 때였다. 원주민 활동가들은 미국의 블랙팬더당과 미국인디언운동과 같은 단체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더욱 전투적이고 더욱 일치된 투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의 격변 이래로, 원주민 운동을 전문화하려는 노력과 원주민 운동을 더욱 관습적인 로비활동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가장 앞에는 원()민족회의(Assembly of First Nations: AFN)의 지도부가 있었다. AFN의 중점사업들 가운데 대부분은 헌법상의 변화에 대한 것이었으며, 특히 헌법에 명시된 원주민들의 자치권에 대한 승인을 얻어내려는 시도들이었다. 이러한 요구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지지는 아주 중요했다. 원주민이 캐나다 정부의 통치에 결코 찬성하지 않는다면, 자신들이 원하는 자치정부의 형태를 선택할 수 있는 원주민의 권리는 인정되어야만 하고 옹호되어야만 한다.

이와 함께 우리는 원주민 활동가들 가운데 많은 활동가들이(AFN 지도부보다 더 젊은 세대의 대부분들은) 법을 통한 권리주장과 헌법상의 변화, 즉 주류 원주민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 변화에 집중하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해야만 한다. 이러한 활동가들은, 우리가 오카, 구스타프센 호수 그리고 이퍼와쉬에서 보아왔듯이, 도로와 고속도로의 봉쇄나 역사적인 고토(故土)의 점거와 같은 시민불복종이라는 직접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AFN과 같은 단체의 요구를 옹호하면서 이와 같은 더 전투적인 원주민 투쟁과의 연대를 조직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전투적인 원주민들의 자기­조직화와 자발적인 행동들을 지지한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만 하며, 폭력을 불러일으키는 캐나다 정부의 식민주의적 정책을 비난하고 있다는 점 또한 명확히 해야만 한다.

캐나다의 공식적인 정치를 지배해 온 민족문제는 퀘벡인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뉴프랑스의 농업적 발전과 상업적 발전에서 이익을 얻기를 바라고 있으며 프랑스 농민들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땅에서 일해주기를 바라며 아울러 식민지의 인민을 이주시키는데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원주민들은 점점 더 경제적인 생활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동안에, 프랑스 이주민과 관련된 상황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처음에 영국인들은 카톨릭 교회와 프랑스어를 억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퀘벡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엘리트, 즉 지주와 성직자와 얼마 안 되는 자본가와 연대할 필요가 있음을 곧 깨닫게 되었다. 그 결과로, 영국인들은 뉴프랑스를 영국인(약속된 자유재량권)이 지배하는 식민지 관계 속에 가두어 두는 동시에 프랑스어, 카톨릭 교회, 그리고 프랑스 법전의 허용과 같은 양보를 하였다. 영국인들이 1860년대 북아메리카의 영국식민지를 통합하려는 시도하였을 때, 퀘벡인들은 주 의회의 부활과 같은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내었다. 그 결과로, 퀘벡 주라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만들어 졌다. 퀘벡 주는 캐나다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다. 주민 대부분은 프랑스어로 말하고, 농업과 매뉴팩처와 상업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들 가운데 몇몇 중심지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영어를 말하는 지배계급이 퀘벡의 불만과 타협을 해야만 했다는 점이다.

민족주의자의 압력이 정기적으로 퀘벡에서 나왔지만, 카톨릭 교회가 문화생활과 정치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한 퀘벡의 민족주의는 캐나다의 지배계급을 위협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에 세속적인 중간계급과 새로운 노동자운동이 일어난 뒤 교회의 지배가 무너졌고 퀘벡 독립당의 창당으로 구체화되었던 새로운 종류의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자 변화가 일어났다. 1960년대의 퀘벡혁명, 트루디외 정부가 퀘벡해방전선을 분쇄하기 위해서 군대와 경찰력을 동원했던 197010월 위기, 그리고 1976년 르네 레베꾸 정부의 출현은 퀘벡문제를 정치적 논쟁의 전면으로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퀘벡문제는 30여 년 동안 지속되고 있다. 게다가 퀘벡문제를 풀어야겠다는 연방정부 정치인들의 강박관념은 퀘벡인이 특별한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던 우익 정치인들에 의해 이용당했다.

먼저 사회주의자들의 태도는 충분히 명백해야 한다. 퀘벡인들은 캐나다에서 억압받는 민족이다. 퀘벡은 영국인들에 의해 점령당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민주적인 권리를 박탈당해 왔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캐나다 연방 탈퇴권까지 포함한 퀘벡의 자결권을 옹호해야 한다(그렇다고 이것이 퀘벡주에 있는 원주민들의 동일한 권리까지 퀘벡주정부가 박탈할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부터 문제는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내가 앞에서 지적했듯이, 분리 또는 탈퇴를 옹호해야할지 아니면 반대해야할지를 사회주의자들에게 지시해 주는 일반적인 규칙 또는 보편적인 법칙은 없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면, 우리는 더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자들의 태도는 아마도 아일랜드에 대한 맑스의 태도와 비슷할 것이다. 만약 강력하고 단결된 노동자운동이 민족적 압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민족의 독립이 불필요할 것이다. 맑스는 1848년 정점에 이르렀던 차티즘 시대의 영국이 이 경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만약 억압받는 민족을 겨냥한 국수주의가 노동자계급의 독자적인 정치를 가로막는 수단이 된다면, 좌파 정치를 제지하는 민족 간의 적대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독립을 지지하는 것은 이치에 맞을 것이다.

과거에 대해서 누가 무엇을 말했었건 간에 상관없이, (퀘벡 주의 새로운 언어법) 101조와 172조에 대한 논쟁과 미치레이크협정과 샬로트타운협정에 대한 논쟁의 여파 속에서 반()퀘벡 국수주의자들이, 퀘벡주의 인정, 즉 퀘벡주를 별개의 사회로 인정하는 것을 전국적으로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1860년대의 반()아일랜드 국수주의자가 했던 기능과 꽤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즉 영국­캐나다 정부의 지배자와 정통성에 영어를 말하는 노동자를 동일시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퀘벡의 민족주의적인 요구를 다루려는 모든 시도는 영어를 말하는 보통사람 가운데 꽤 많은 비율의 사람들에게서 나온 반대와 대면하게 된다. 이와 같은 반()퀘벡적인 외침의 한 가운데에서, 노동자 인민을 캐나다의 정통과 결합하는 민족정체성은 단언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캐나다의 사회주의자들이 퀘벡의 분리를 지지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다. 일단 우리가 첫 번째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정한다면, 맑스가 영국과 아일랜드의 사례에서 제안했던 평등하고 자유로운 연합의 주창과 같은 문제들을 다룰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지점에서 사회주의자들이 퀘벡독립을 지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새로운 퀘벡 국가가 본래적으로 진보적이라는 생각이나 퀘벡독립을 위한 투쟁이 필연적으로 급진적인 사회운동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생각과 관련이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겠다. 나는, 좌파사회주의자 그룹의 동지들 가운데 몇몇 동지들이 예상하는 것과는 달리, 대중적인 사회운동 없이도 부르주아적인 퀘벡이 독립할 가능성은 아주 높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이민을 통제하고, 인종주의적인 정책을 펼치고, 원주민에게 적대감을 보이는 독립국 퀘벡이 세워질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루시앙 부카르와 같은 퀘벡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자가 진심으로 주권국가를 바라지 않고 있으며 사회주의자들이 주권연합지지자들보다 더한 주권연합지지자가 됨으로써 이들의 허를 찌를 수 있다고 주장했을 때, 좌파사회주의자 동지들이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이러한 입장이 퀘벡 민족주의와 민족국가에 대한 불충분한 비판이라는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캐나다 민족문제에 관해서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될 필요가 있다. 민족문제를 제기하는 대부분의 좌파는 유색 이민자와 유색 인민이 정치적으로 아직 조직되지 못했을 때 등장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자주 캐나다의 다종족, 다인종적 성격에 대해 무지한 영국인의 캐나다라는 동질적인 실체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 결과로, 캐나다의 체계적인 인종주의적 성격이 자주 무시된다. 이것은 교정해야할 문제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캐나다의 유색 인민의 인종적인 억압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원주민 문제와 퀘벡문제에 특권을 주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종주의에 대한 일관된 대의는 원주민과 퀘벡인의 자결권에 대한 원칙적인 대의와 함께 가야만 한다.

민족문제는 다가오는 세기의 세계 정치에서 훨씬 더 중요해질 것이다.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는 민족문제가 만들어내는 논쟁과 위기를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할 의무가 있다. 이 과제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구체적인 분석에 지침이 되어 줄 과거 맑스주의자들의 역사적인 공헌을 이용하면서 아울러 민족문제의 복잡성을 정당하게 다루는 데 실패한 교조적이고 단세포적인 반응에서 우리를 보호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억압받는 민족의 자결권을 지지하고 그와 함께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즉 민족국가 없는 세계 공동체라는 대의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옮긴이: 이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