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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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2007년)/2007년 10월호

(그림) 스탈린이즘의 몰락월터다움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4:30

무너진 소련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Theories of Stalinism's Collapse)

 

 

Walter Daum

 

소련이 사회주의인가 아닌가. 이 문제는 역사학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달리 말해 노동계급의 해방이란 무엇인가 하는 원칙의 문제이다.

소련과 동유럽에서 스탈린주의 정권의 몰락은 신자유주의 자유-시장 견해를 합법화해주었다. 소련이 무너지자, 자신을 노동계급 혁명가로 여긴 국제적인 극좌파와 극좌파 조직 모두가 방향을 잃었다. 많은 좌파는 소련을 사회주의 국가 또는 노동자 국가로 여겼던 이론과 믿음에 목숨 바쳤다. 따라서 그들의 처지에서 볼 때, 소련의 몰락은 맑스주의 그 자체를 위한 중요한 패배로 묘사되었다. 스탈린주의 정권을 반혁명 정권으로 여긴 다른 사람들도 사기를 잃었다. 왜냐하면 앞으로 몇 년 동안 사회주의 이상에 찬성한 노동계급 청중이 스탈린주의의 붕괴의 영향으로 심각하게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미국과 다른 제국주의 국가에서 점점 더 깊어지는 경제혼란이 자본주의의 승리를 의심하게 만들었고 노동계급 안에서 사회주의가 품은 이상이 무엇인지를 마음을 열고 또다시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아주 중요해졌음을 뜻한다. 자본주의 착취의 왜곡된 형식이자 전 세계의 규모에서 자본주의의 안정에 이바지한 결정적인 지주로서 스탈린주의가 한 역할을 이해하지 않고서 오늘날 세계를 알 수는 없다. 스탈린주의는 우리에게 두 가지 악을 남겨놓았다. 하나는 1930년대에 죽음의 고통 속에 허덕이던 자본주의를 되살아나게 했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대안을 생각하고 있던 노동계급의 의식을 송두리째 깨부순 것이다.

소련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대안체제로서 역사상 처음 세워진 나라였다. 그런 나라가 70여년의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문제는 소련이라고 하는 하나의 국가가 무너졌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 나라가 계급 없는 사회라는 맑스주의의 이상을 구현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소련의 몰락은 자본주의 사회가 지닌 모순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그 대안을 제시한 맑스주의의 몰락을 뜻했다.

 

 

 

국가화된 자본주의(Statified Capitialism)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는 1917년에 볼셰비키 혁명으로 태어났다. 사회주의가 지닌 목적, 즉 모든 사람에게 풍요를 제공하는 계급 없는 사회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가장 발전한 국가로 확산시키는 데 달려 있었다. 그러나 혁명을 이루고 나서 곧바로 소비에트 국가는 4년 동안 내전에 휩쓸렸다. 그 내전에서 소비에트 국가가 자국을 공격했던 제국주의국가의 군대와 차르 군대를 누르고 살아남았다. 1차 세계대전에 뒤이어 내전까지 일어나자 소비에트 국가는 말 그대로 폐허가 되었고, 그 탓에 소련은 이전보다 훨씬 더 뒤떨어진 사회가 되어버렸다. 프롤레타리아트, 무엇보다도 혁명의 후보는 죄다 없어졌다. 게다가 유럽의 다른 곳에서 노동자의 혁명적 봉기가 모두 패배하자, 소비에트 국가는 더욱 외톨이가 되어 버렸다. 허약해진 소비에트 국가는 가치와 임금 체계에 따른 상품의 교환과 같은 자본주의의 치장을 제거할 수 없었다. 그 결과로서, 1920년대 동안 스탈린이 이끈 보수적 관료제가 국가와 통치하는 공산당의 앞에 서서 자신의 권력을 굳건히 했다.

[사회주의] 왜곡은 1930년대에 더욱 심하게 일어났다. 30년대 후반에 일어난 대숙청 동안 스탈린주의자들은 당 안에서 살아있는 혁명적 요소를 모조리 쓸어버렸고 붉은 군대의 장교 집단을 없애버렸다. 국가권력에 꼭 필요한 핵심 인자들은 볼셰비즘의 모든 흔적이 없어질 때까지 숙청당했고 또 숙청당했다. 따라서 국가 기구는 분쇄되었고 새로운 자본주의 계급, 파괴당한 부르주아지를 대신해서 지배하는 통치계급인 상층 관료제의 도구로 재편성되었다. 그것은 반혁명의 완성을 뜻했다. 노동자 국가는 파괴되었다. 비록 국가화된 공업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스탈린주의 관료제는 임금노동의 기제를 통해 노동자에게서 잉여가치를 뽑아내는 자본가처럼 스스로 지배계급이 되었다. 그 탓에 야만적인 체제가 들어섰는데, 우리는 그것을 국가화된 자본주의(statified capitalism)”라고 불렀다.

국제적으로, 2차 세계대전 뒤 소련은 서구 제국주의에 맞선 민족 해방 투쟁을 지지했지만, 이러한 운동이 자본주의의 틀을 넘어서지 않게 했다. 유럽에서 소련은 노동자의 투쟁을 억제함으로써 미국과 다른 서방 강대국의 세력권을 보증했다. 소련이 한 역할은 전쟁이 끝나고 난 뒤 노동자의 혁명적 운동에서 핵심이었다. 따라서 냉전 시기 동안 소련과 서구가 경쟁했지만, 스탈린주의는 미국이 이끈 세계 제국주의 질서를 지탱했다. 이를 통해 스탈린주의는 그 자신에 필요한 지역 제국주의 이익을 얻어냈다.

이러한 분석은 스탈린주의의 삶과 죽음(The Life and Death of Stalinism)이라는 우리의 책에서 자세히 설명되었다. 이 논문에서 우리는 스탈린주의 체제의 몰락과 포스트-스탈린주의 세계의 사건에 비추어 문제를 개관하고, 맑스주의자로서 몇몇 다른 이론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다룰 것이다.

 

 

이론의 붕괴

 

러시아 문제1917년 이래 줄곧, 특히 스탈린주의 체제가 소련을 통제한 이래 노동계급 안에서 논쟁의 대상이었다. 그때 실질적인 독재자였던 스탈린은 1930년대에 소비에트 사회가 계급 없는 사회의 첫 단계인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였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공산주의 운동의 창시자인 칼 맑스와 러시아 노동자 혁명의 지도자인 블라디미르 레닌의 기본 교의에 정면으로 대든 것이다. 그들은 사회주의가 결핍을 없애야만 확보될 수 있다는 것, 즉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가장 발전한 공업 국가로 확산하는 것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기본 교의로 삼고 있다.

레온 트로츠키는 정치적 반혁명이 일어났다고 분석함으로써 스탈린의 도그마에 도전했다. 즉 노동자 국가는 제거되지 않았지만 사회주의를 향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향해 거꾸로 나아가고 있었다. 스탈린의 관료제의 지배를 받는 소련은 타락한 노동자 국가로 되었다. 관료들은 전체로서 노동계급을 실질적인 국가권력의 실행에서 제거해버렸고 자신의 혁명적 성과를 갉아먹었으며, 자본주의 지배를 복원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계속되고 있는 반혁명을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선 예방적인 내전”(preventive civil war)이라고 딱지를 부쳤지만 우리가 사회적 반혁명이 완성되었다고 결론을 내린 것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즉 국가의 계급적 본질은 (비록 타락했지만)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에서 자본주의적 성격으로 바뀌었다.

타락한 노동자 국가가 지속되었다는 잘못된 믿음에 뿌리박고 있던 트로츠키의 예언과 달리, 2차 세계대전은 스탈린주의의 종말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팽창으로 이끌었다. 즉 소련이 동유럽을 정복했고 노동계급을 밑바탕으로 삼고 있지 않은 스탈린주의 당이 이끈 혁명을 통해 중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로 스탈린주의는 팽창했다. 여러 나라에서 독립적인 노동자 봉기는 분쇄 당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처음에 전통적인 부르주아 정당과 인민전선 연합을 통해 통치했다. 노동계급이 포위되고 무력화되었을 때만 비로소, 스탈린주의자들은 그들의 국가화된 자본주의 정권을 굳건히 했다.

트로츠키주의 운동, 즉 제4인터내셔널(FI)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혼란에 빠졌다. (트로츠키 자신은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살해당했다.) FI는 전후 경제 붐 동안 제국주의 나라에서 급속히 자라났던 중간계급의 환경에 적응했다. 스탈린주의가 승리하자, FI는 쁘띠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 사이에서 공통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냉소주의에 감염되었다. 트로츠키가 스탈린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의 개량주의자를 노동계급 사회주의의 반혁명의 적으로 여겼지만, FI는 서유럽에서 이러한 환경에 적응했다. 그들은 사회주의 혁명에 모든 것을 걸지 않았던 자신의 견해를 진보적인 것으로 여겼다. 여기서 동유럽과 다른 곳에 있는 스탈린주의 체제가 대중 투쟁에 의해 자극 받는다면 사회주의 혁명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개념으로 쉽게 나아갔다.

동유럽의 새로운 정권에 대해, FI는 처음에 그러한 정권이 국가 자본주의였다고 정확히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훨씬 더 똑같은 경제 구조를 지닌 소련이 여전히 노동자 국가로 추정하고 있다는 것과 모순되었다. 그 이래 여러 해 동안 파블로(Michel Pablo)가 이끈 정통다수파는 소련의 스탈린주의 체제가 노동계급이 결코 권력을 획득하지 않았기 때문에 타락했다기보다는 변형된노동자 국가로 되었다고 결정함으로써 모순을 풀었다. 그들은 어떻게 노동계급을 분쇄함으로써 창조된 국가가 어떤 종류의 노동자 국가일 수 있었는지를 결코 진지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파블로주의 정통파는 유럽에서 새로운 노동자 국가가 탄생했을 때 정당하게 동의할 수 없었다. 즉 소비에트 군대가 1944-45년에 그들의 이전 나치 정복자에게서 그들을 해방시켰을 때, 또는 공산당이 몇 년 뒤에 단독의 권력을 강화했을 때.(이 문제에 대한 상세한 토론은 우리가 쓴 책 제 7장을 참조할 것. 또한 “Stalinism and the Fourth International” in PR 64.를 참조할 것.)

트로츠키주의 운동 사이에 여러 소수파 그룹은 맑스주의에 대한 이러한 거부에 반대했다. 제임스 캐논(James Cannon), 미국 SWP의 지도자는 이렇게 썼다. “나는 당신이 위에서 조작을 통한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소유관계에서 근본적 변화에 의해 뒤따랐던 혁명을 통해서 오직 행해질 수 있다. …… 만일 당신이 다시 한 번 국가의 계급적 본질이 상층 집단에서 조작을 통해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을 막연히 품기 시작한다면, 당신은 기초 이론에 대한 모든 종류의 수정에 문을 열어야 할 것이다.(SWP International Bulletin, October 1949.)”

에르네스트 만델, 유럽 트로츠키주의 이론가의 대표는 마찬가지로 이렇게 정확히 주장했다. “우리는 계속할 것이다. 우리가 거꾸로 이전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해본 적이 없었던 나라에 주입된 타락한 노동자 국가에 대한 이론들을 어리석인 것으로 여길 수 있는 충분한 증거를 가질 때까지.”(Fourth International, 1947.)

그 뒤 캐논과 만델 둘 다는 이러한 수정과 불합리함에 따랐으며 변형된 노동자 국가의 희화화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다른 반대파는 다른 방식으로 그러한 모순을 풀려고 노력했다. 몇몇은 소련과 그 나라의 모방자가, 소비에트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다른 스탈린주의 범죄를 묘사하고 있는 국가 자본주의였다는 이론을 발전시켰다. 제임스(C. L. R. James)와 라야 두나예프스카야는 자본주의 가치 법칙이 소련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분석하기 시작함으로써 완전히 맑스주의 이해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다. 토니 클리프는 그 체제에 국가 자본주의라는 딱지를 붙였지만, 거기에는 임금 노동과 가치 법칙이 결여되었다고 주장했다. 막스 샤흐트만과 다른 이들은 스탈린이즘이 자본주의적 가치 법칙에 따르지 않았고 따라서 관료주의적 집산주의(bureacratic collectivism)라고 하는 새로운 비자본주의적 착취 사회였다는 데 동의했다.

다른 결점은 제쳐두고서라도, 이러한 조류의 그 어느 것도 소련에서 정권 변화의 역사적 중요성을 적절히 다루지 못한다. 즉 어떻게 그리고 언제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가 죽었는가? “타락한 노동자 국가에 대한 트로츠키의 분석은 꼭 필요한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제임스-두나예프스카야, 클리프와 샤흐트만 모두는 타락한 노동자 국가, 즉 노동자 국가가 도중에 과정에서 뒤집혔고 후진적으로 자본주의를 향해 내던져졌다는 개념을 거절했다. 그들 모두는 스탈린주의자들이 1920년이나 1930년 초에 그들의 권력을 굳힌 순간에 노동자 국가를 끝장냈다고 말하거나 넌지시 내비쳤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 이 문제의 핵심은 자본주의 형식이 노동자 국가 안에 본래 있었다는 것이다. 맑스와 레닌은 노동자 국가가 아직 사회주의가 아니지만 그것으로 나아가고 있는 이행기 국가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가 없는 부르주아 국가이다.” 따라서 초기 소련은 자본주의의 맹목적인 작동, 즉 행동의 무정부주의적 법칙(가치법칙으로 요약된)과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적 방향 사이에 벌어진 전장으로 출발했다.

자기 멋대로의 트로츠키주의자들 사이에서 지배력을 지녔던 3가지 공식화, 즉 변형된 노동자 국가, 관료주의적 집산주의,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는 실제로 공동적 이론의 변종이었다. 그들 모두는 스탈린주의가 지배하는 소련에서 가치 법칙의 중심성을 부인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치를 생산에서 노동자의 착취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치를 시장에서 교환을 통해 결정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모든 3 이론은 오직 경제적 조절자가 통치하는 관료들에 의한 의식적인 계획화였다는 것을 고수했다.

이러한 이론의 변종은 지금도 계속 나오고 있다. 그 어떤 이론도 스탈린주의 체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또는 어떻게 사망했는지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끝내는 붕괴로 귀결된 스탈린주의 체제의 허약성을 미리 내다보거나 설명할 수도 없었다. 사실, 그들 모두는 좋든 싫든 서구 자본주의보다 그 체제가 훨씬 더 강하고 훨씬 더 동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한 태도는 그 이론을 가지고 폭발했던 계급투쟁에 끼어들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 몸부림치다가 끝내 무조건 항복이라는 결점을 남겨놓게 될 것이다.

 

 

붕괴에 대한 이론

 

스탈린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뒤 반세기 동안 세계 권력으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바로 끝날 때까지, 우파든 좌파든 거의 모든 관찰자들은 소비에트 체제가 몇 십 년 동안 고스란히 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서구에서 부르주아지 대변인은 이전에 몇 가지 까닭을 들이대고 소련의 경제적 힘을 과장했다. 즉 엄청난 제국주의적 군대 육성을 정당화하고, 강력한 외부적 반대에 부닥쳐서 국내에서 계급투쟁을 억압하는 것. 몰락 뒤에, 그들은 민주주의자유 시장의 덕을 선언했고 이러한 가정이 그 지역을 침체에서 데리고 나올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것은 전혀 관심을 끌지 못한 견해였다. 왜냐하면 보리스 옐친이 1991년 말에 권력에 이르렀을 때 가속화되었던 옛 러시아 제국의 약탈품을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공유했기 때문이다.

좌파 분석가들도 더 나을 게 없다. the United Secretatiat tendency(USec)의 만델이 이끈 정통 트로츠키주의자는 스탈린주의 국가를 자본주의에 견주어 진보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높은 성장률이 일시적인 것이었다고 받아들이지 않은 채 전쟁 뒤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처음에 아주 높은 성장률을 찬양했다. 그래서 그들은 체제의 내적인 부패가 그 체제의 몰락을 위한 단계를 놓았을 때 놀랐다. 몰락 뒤, 그들의 공동의 이론에도, 그들은 옛 스탈린주의 국가가 자본주의적으로 되었는지의 여부 또는 되었을 때 동의할 수 없었다. “이론은 한때 자본주의의 위기에서 자유로운 듯 보였던 사회를 위한 분석 토대가 아니라 오직 이름이었음이 판명되었다.

중요한 국가 자본주의 경향, 토니 클리프의 국제사회주의경향(International Socialist Tendency: IST)은 국가화된 경제를 자본주의의 중앙화하는 경향의 훨씬 더 동적인 정점으로 보았고 그러므로 스탈린이즘을 자본주의의 미래의 발전으로 해석했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높은 단계로서 제국주의를 이미 대신했다. 그들은 통치자가 추진한 사유화를 미리 내다 볼 수 없었을 것이다. IST 이론가들은 체제의 위기가 뚜렷해졌을 때 그들의 견해를 바꾸었지만, 그들은 그들이 180도 선회를 설명하지 못했다.

관료주의적 집산주의자들은 마찬가지로 스탈린이즘을 미래의 물결로 생각했다. 그들은 훨씬 더 동적인 체제인 스탈린이즘 때문에 세계가 두 개의 대치된 체제 사이의 커다란 투쟁에 맞닥뜨렸다고 여겼다. 막스 샤흐트만(Max Shachtman)이 이끈 지배적인 분파는 기본적으로 스탈린이즘을 자본주의에 견주어 볼 때 훨씬 더 진보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스탈린이즘은 집단화된 소유를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식민지와 옛 식민지 국가의 모든 현실을 무시하면서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상징하고 있고 그 때문에 서구 제국주의를 편드는 것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그와 달리 우리의 이론은 스탈린이즘이 일련의 위기에 빠질 것으로 내다보게 했다. 이 잡지가 1976년에 처음으로 나왔을 때, 우리는 반혁명이 일어나긴 했지만 노동계급이 얻은 중요한 성과물, 즉 공업의 완전한 국유화, 직업과 주택, 건강에 대한 권리 등이 여전히 유지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성과물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전면적인 자본주의 착취는 방해받게 되었고, 그에 따라 스탈린주의 지배자는 서구 스타일의 자본주의 방법, 즉 시장 경쟁, 대량 실업, 급속한 인플레이션과 노동계급의 조건에 대한 다른 공개적 공격을 선택적으로 쓰게 되었다. 즉 스탈린주의 사회들이 부닥친 경제 침체는 그들을 전통적인 자본주의 방향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동구와 서구의 위기

 

우리가 펴낸 책(스탈린주의의 삶과 죽음) 5장은 전후 스탈린이즘 그 자체 안에서 발견된 영속적인 위기에 대해 풍부히 설명하고 있다. 전통적 자본주의는 벼락 경기와 파산 사이클을 통과하고 있다. 과잉생산위기가 이러한 사이클을 유발했고 개별 자본가들이 경제 체제가 견딜 수 있는 것을 넘어선 생산수단을 집단적으로 축적하도록 몰아갔기 때문에 이러한 사이클은 주기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사이클의 침체 단계에서 가장 뒤떨어지고 가장 약한 자본은 파산했고 노동자의 생활수준은 급격히 떨어졌으며, 이를 통해 수익성이 되살아나고 팽창단계가 새로이 시작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국가화된 자본주의의 스탈린주의 체제는 시대에 뒤쳐진 공업의 제거를 막았다. 그래서 위기는 풀릴 수 없었다. 생산은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계속되었지만 생산율은 꾸준히 줄어들고 있었다. 보기를 들면 소련에서 당지도자인 고르바초프의 최고 경제 조언가인 아벨 아간베기얀(Abel Aganbegyan)은 소련의 일인당 성장률이 몇 년 동안 멈췄다는 것을 1980년대 중반에 동의했다. 스탈린주의 지배 계급은 그들의 경제가 서구 제국주의 국가보다 훨씬 더 뒤떨어지고 점점 늘어나고 있는 노동계급의 적대성에 부닥치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그들이 지닌 절박성은 사유화와 유사 민주주의 개혁으로 전환하도록 했다.

우리가 쓴 책의 한 가지 주제는 스탈린이즘의 경제 붕괴가 서구에서 작동되는 것과 비슷한 경향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제국 자본가들은 1930년대의 대공황이 다시 한 번 찾아오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런 대변동은 현존하는 제국주의 경쟁국을 더욱 악화시키고 노동계급의 자본주의 지배에 대한 묵종을 손상시킬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래 그들은 그들의 체제 위기를 꺾고 불황을 미리 내다보려고 경제에 대한 국가 간섭의 여러 가지 형식에 의지했다. 이러한 조치는 이제 수축되고 위기에 이바지하기 시작하는 가공의 자본의 엄청난 거품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어졌다.

동유럽 경제와 옛 소비에트 경제에 대한 공개적 조사를 시작하자, 예전에 믿었던 것보다 훨씬 더 기생적으로 스탈린주의자들이 그들 자신의 자본뿐만 아니라 인적 자연 재원에 얹혀살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동구에서 고정자본은 대체 없이 낭비되었고 환경 붕괴는 끔찍했으며, 공업 노동자는 삶에 대한 기대를 훨씬 더 갖지 못했다. 서구에서 가공 자본의 거품은 고정 자본을 대체하는 데 실패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초과착취당한 3세계가 아니라 동구에서처럼 서구 나라에는 아직 배어들지 않았지만, 이러한 경향은 쇠퇴의 시기에 모든 곳에 있는 자본주의의 전형이다.

우리의 이론은 전체로서 자본주의 세계에서 경제적 격변의 조짐으로서 스탈린이즘의 몰락을 지적한 것이다. 그와 달리 극좌의 많은 이론은 스탈린이즘의 몰락을 서구 제국주의가 더 오래 견딜 수 있게 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역사적 패배로 여겼다. 틀림없이 서구 자본가는 동구의 재원과 노동자에게서 많은 잉여가치를 착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10년의 파티 뒤에 체제의 모순은 이제 훨씬 더 강력해지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역할

 

경제 위기와 점점 늘어나는 불평등은 1989년에 시작되었던 사건의 밑받침을 놓았다. 노동계급의 저항, 특히 1980~81년의 대규모 폴란드 노동자의 봉기는 맑스주의의 근본 교의를, 즉 지금 단계에서 사회적 진보를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중심성을 다시 한 번 보여주면서 스탈린주의 지배계급의 자기 믿음을 갉아먹었고 사회에 대한 그들의 통제력을 무너트렸다. 19808월에 폴란드 노동자가 만들었던 공장끼리의 파업 위원회(Interfactory Strike Committees)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 소비에트(1917년에 국가권력에 대한 노동자 장악의 토대), 1956년의 헝가리 노동자 평의회, 그리고 노동자가 그들의 자본주의 지배자에 맞선 혁명적 투쟁에서 일어났을 때 뽑은 많은 비슷한 조직의 반향이었다.

스탈린주의 왕국 곳곳에서 노동자 투쟁은 착취를 강화하려는 지배계급의 강제에 의해 유발되었다. 그 착취는 맑스가 알아낸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작동 법칙에서 나왔다. 우리의 책이 설명하고 있듯이, 이러한 법칙은 동구의 국가화된 자본주의 국가뿐만 아니라 서구의 정상적인 자본주의 사회에도 적용되었다.

서구와 동구에서 국가소유에서 도피는 국가화된 소유가 노동계급이 얻은 이득의 요소를 본질적으로 구체화했던 것을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자본가가 필요로 한 전면적인 착취를 가로 막았다. 동유럽과 중국, 소련에서 일고 있는 사유화 기획은 국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국내적으로 자본주의 지배를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노동계급은 미움 받은 스탈린주의자들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했지만, 지난 급격한 고조가 노동계급 형식(파업, 공장 점거 등)을 실수 없이 취했지만, 1989년에 시작된 사건에서 저항하는 노동자는 몇몇 경우에는 반대하는 스탈린주의 관료인, 중간계급 출신들의 지도를 받았다. 우리가 1990년 초에 이미 썼듯이,

 

 

이러한 대규모 혁명들은 역사적 성과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과는 부분적 승리일 뿐이다. 정부는 무너졌지만, 기본적인 착취의 사회적 관계는 남아 있다. …… 비록 노동계급이 다른 사회세력이 이끌었을 때조차 스탈린이즘을 뒤엎는 데서 실질적 힘이었지만, 위험은 그들이 뒤 따른 중간계급 개혁자를 함정에 빠트리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동유럽은 혁명적 과정의 시작에 있을 뿐이다. 다가올 시기에 우리는 경제적 붕괴를 막을 수 없고 대륙적 대중격변을 다룰 수 없는 정부가 세워지고 무너지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러나 관료제와 새로운 개혁가와 서구 부르주아 동맹의 경제 권력이 깨지지 않는다면, 동유럽 노동자는 그러한 경제 권력에 맞서 자신의 혁명을 돌려놓고 그들이 이전보다 훨씬 더 심한 착취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볼 것이다. (“Revolution Sweeps East Europe,” PR 36.)

 

 

놓치고 있는 핵심 요소는 스탈린주의자와 개혁주의 반대파의 계급 본질과 정치 역할을 또렷이 폭로할 수 있고 순수한 노동자 국가로 이르는 길을 노동자에게 보여주는 강령의 윤곽을 제시할 수 있는 혁명적 지도력, 즉 프롤레타리아 당이다. 그러한 당이 없이, 스탈린이즘에 맞선 투쟁은 쇠퇴하고 있는 체제가 키워낸 스탈린주의자와 부르주아 인자들에게서 나온 폭력을 통해 타도될 것이다.

황폐해진 경제 위기와 노동계급 소요에 부닥쳐서 자신들의 계급 지배를 유지하려고, 지배계급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 개인적부르주아 분파에 국가와 경제 권력의 몫을 양보하면서 반혁명을 꾀했다. 동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지배자는 그들의 계급 지배를 유지하려고 대중 운동을 강탈했다. 소련을 포함한 다른 나라에서는 전환이 먼저 있었다. 모든 경우에 국가화된 자본주의의 스탈린주의 체제는 지배계급에게 이전에는 사회주의라는 거짓 이름으로 어쩔 수 없이 유지했던 노동계급이 얻은 성과물의 나머지를 싹 쓸어버리도록 허용했던 혼합 체제에 굴복했다.

그 탓에 러시아와 다른 소련의 국가에서, 노동자는 재앙을 겪었다. 그곳에서는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졌고, 임금은 아예 받지도 못했고, 건강보험은 파괴되었고 사망률은 급격히 높아졌다. 동유럽에서, 비록 급격히는 아니지만, 노동자의 조건은 나빠졌다. 그러나 노동자의 생활수준에서 끔찍한 하락은 공산당 정권의 몰락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소비재의 심각한 부족, 환경오염에서 나온 질병, 알코올 중독이 널리 퍼졌고 유아사망률이 올랐고 삶에 대한 기대감은 줄어들었다. 1989~91년의 체제 전환은 이러한 전율을 주도하진 않았다. 그러한 체제전환은 더욱 부추겼다.

 

 

정치 혁명

 

국가를 부숴버리지 않고 스탈린주의 사회가 공개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은 국가의 계급 본질이 바뀌지 않았다는, 즉 스탈린이즘이 처음부터 자본주의적이었다는 우리의 분석을 확증해준다. 따라서 새로운 정권을 강화시켰던 1989~91년의 전환은 정치 혁명이었다. 기본적인 착취 체제가 자본주의적으로 남았지만, 지배계급 안에서 우세한 힘은 같은 계급의 중첩된 분파로 전환되었다. 새로운 정권은 대중 투쟁의 추진력을 대중 그 자체에 대항하게 만들었고 노동자가 비참하게 왜곡된 조건 속에서도 몇 십 년 동안 유지해온 성과물의 찌꺼기를 파괴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러한 정치혁명은 1930년대에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를 분쇄했을 때 스탈린주의 사회적 반혁명이 수행할 수 없었던 단계를 완전히 끝냈다. 그때 국가 기구의 옷을 벗기는 것과 달리, 1989~91년의 정치적 전복에서 국가 기구와 채널은 거의 같은 것으로 남았다. 소련의 막대한 군대, 5백만 병사는 베를린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주둔했다. 그 군대는 1989년에 소련 제국이나 1991년에 소련 그 자체를 유지시키려고 이동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배의 방식을 부르주아화하려는 열망을 지녔던 지배계급의 무기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폴란드에서 국방장관 플로리아 시비츠키(Florian Siwicki) 장군은 후퇴하고 있는 스탈린주의자와 레흐 바웬사(Lech Walesa)가 이끈 솔리다리티 운동의 분파 사이에 연립 정부를 통해 다시 임명되었다. 그는 국가 형태가 달라진 것처럼 군대도 그렇게 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이제 우리, 모든 폴란드 사람 각자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미래의 도전에 맞설 수 있는지 하는 문제는. 이러한 도전은 국가의 민주주의적, 의회주의적이고 시민적 형식의 전환 을 포함한 것이다.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지지하면서, 우리는 또한 군대의 형태를 바꾸고 있다. (New York Times, Aug. 29, 1989.)

 

 

민주주의적이고 의회주의적이며 시민적국가는 사적 소유를 말할 때 쓰는 암호이다. 군사 기구는 새로운 정권처럼 옛 정권이 자본주의 착취를 방어했기 때문에 아주 쉽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국가 또는 사적 소유를 통해 일어나고 있는지 하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각각의 경우에 국가는 착취자에 속해 있고 노동자를 탄압하려고 존재한다.

중국도 국가화된 자본주의에서 사적 소유와 국가 소유의 혼합으로 중요한 전환을 진행하고 있었다. 1989년에 천안문 운동은 학생운동을 뛰어 넘어 노동계급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군사력을 통한 천안문 운동의 분쇄는 정권이 이전에 강요할 수 없었던 개혁을 수행하게 할 수 있었다. 공산당 관료는 국가에서 자신의 지배력을 유지했고 일자리와 수입과 국가가 운영하는 공업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공격하면서 꽤 많은 비-국가 경제의 성장을 꾀했다.

 

 

핵심: 혁명 지도부

 

자유의 이름을 내건 혁명들은 노동자계급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그들을 수동성을 시기로 몰아넣었다. 왜냐하면 동유럽 노동자는 1953년에 동베를린에서 1980년에 그단스크까지 스탈린이즘에 맞선 많은 봉기에서 자신들의 힘을 보여주었고 스탈린체제를 전복할 방법을 찾고 있고 그것을 순수한 노동자 국가로 대체하려고 한 모든 곳에서 노동계급 투사들 사이에서 희망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어떤 혁명적 노동자 정당이 세워지지 않았다는 것은 주로 1930년대에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데 도움을 주었던 대대적인 숙청에서 스탈린주의자가 1917년의 10월 혁명의 목표를 여전히 지지하고 있던 남아 있는 지도부를 일소했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비슷하게 1940년대에 동유럽에서 소련 군대의 힘을 등에 업은 스탈린주의자들은 나치 정복을 이겨냈던 진짜 혁명가들을 제거했다.

나타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대안이 실패한 것에 대한 비난의 꽤 많은 몫은 트로츠키주의를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조직들에 놓여있다. 이론과 실천에서 그들의 항복은 그 어떤 진지한 세력도 세계무대에서 노동계급 혁명의 강령을 또렷하게 표현하고 그를 위해 싸우지 못했다는 것을 뜻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그들의 많은 부분은 혁명적 전진을 위해 학생운동, 농민을 바탕으로 삼은 게릴라와/또는 사회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 세력으로 기울어졌다. 그들은 그들의 비참한 실패 때문에 이러한 개념을 포기했지만, 그러한 운동을 담아낸 기본적인 계급적 태도와 이론들은 오늘날에서 똑같이 남아 있다. 트로츠키주의 그룹을 위장한 몇몇 조직은 옛 소련 지역과 동유럽에 지부를 두었고 작지만 재앙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노동계급이 그 자신의 이름으로 권력을 잡을 수 있는 능력에 대해 냉소적인 그들은 옛 스탈린주의 정권이나 새로운 민주주의정권을 진보적인 것으로 보았던 이론을 가지고 그럭저럭 해나갔다.

따라서 소련과 동유럽의 노동자는 스탈린이즘이나 전통적인 자본주의에 대한 그 어떤 혁명적 대안 지도부를 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노동자의 반란은 새로운 혁명적 세계관과 전위 지도부를 생기게 하기 전에 새로운 부르주아인 포스트-스탈린주의 지도자의 손아귀로 그것을 이끌게 했다. 진짜 맑스주의자는 노동계급의 의식을 미화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적 강령은 주어진 순간에 대중적일 수 없겠지만, 그것은 가짜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러한 강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객관적 필요에서 나온다. 계급투쟁이 깊어질 때,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는 그들의 강령과 과업에 대해 의식적으로 되고 스스로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당의 핵으로 조직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나머지 그들 계급과 다른 억압당한 주민 계층을 지도한다. 프롤레타리아 당의 창조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진짜 전제조건인 오직 하나의 단계이다.

소련의 계급적 성격을 논쟁하는 까닭은 이론적 주장을 평가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려고 의식적으로 투쟁하는 의식적이고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의 중심성을 다시 세우게 하려는 것이다. 다른 계급에, 높은 계급 출신의 구세주에게 기대를 걸려고 하는 좌파는 맑스주의의 중심 교의를 거절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점점 늘어나는 억압과 착취를 위해 노동자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을 직업으로 지닌 신-스탈린주의자와 사회 민주주의자를 따르도록 노동자를 잘못 이끌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옐친 쿠데타

 

1989년 이전에 소련과 그의 동맹국이 비-자본주의적이었지만 이제는 자본주의적이라고 믿는 맑스주의자는 모든 나라에 이렇게 질문을 해야 한다. 언제 반혁명이 일어났는가? 우리는 1940년대에 정통 트로츠키주의자가 반혁명 시기의 문제와 꽤 곤란을 겪었다는 것을 이미 언급했다. 즉 동유럽과 중국 등의 나라가 언제 노동자 국가였는가? 1989년이 지난 뒤 반대의 문제는 마찬가지로 어려웠다.

 

소련에서 옐친의 반-쿠데타는 권력에서 공산당의 축출에서 핵심 사건이었다. 관료주의적 자본가 지배계급 분파 사이의 그러한 갈등에서, 부통령 겐나디 야나예프가 이끈 스탈린주의적 강경파는 혼자만의 권력을 차지하려고 시도했고 고르바초프가 그들과 훨씬 더 급진적인 사유화주의자들 사이에서 취한 교묘한 세력균형을 끝장냈다. 쿠데타는 노동계급에게 심한 위험을 부가했다. 왜냐하면 쿠데타 지도자가 이전 5년 동안에 고르바초프가 굴복해서 이루어진 글라스노스트 캠페인에서 얻은 제한적인 민주주의 성과를 다시 거둬들였고 파업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혁명적 노동자는 쿠데타를 반대하고 전술적으로 노동자의 이해관계에 대한 즉각적인 위협을 없애려고 옐친과 군사 동맹으로 제휴할 수 있었다.

원칙의 문제로서 혁명가들은 그 어떤 자본주의 지배계급의 분파에 대해서도 정치적으로 지지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다른 쪽이 노동계급에게 훨씬 더 심한 위협을 줄 것으로 판단할 경우, 우리는 전술적으로 그리고 일시적으로 내전이나 무장 갈등에서 어느 한 쪽을 방어할 수는 있다. 그것은 1917년에 반동적인 코르닐로프에 맞서 반동적인 케렌스키를 방어하는 데서 볼셰비키가 쓴 방법이었고 마찬가지로 1936년에 파시스트에 맞서 부르주아적인 스페인 공화국을 방어하는 데서 트로츠키가 쓴 방법이다. 우리의 처지는 옐친 측에 군사적 지지를 하는 것이었다. 즉 노동계급이 곧바로 옐친을 상대해야 한다고 경고하는 한편, 우리는 그때 야나예프에 맞서 총구를 겨눈 노동자 편이었다. 실제로 쿠데타가 수포로 돌아가고 난 뒤, 옐친과 고르바초프는 다른 것 가운데 파업을 금지하는 데 애쓴다는 조약을 체결했다. 야나예프처럼 옐친은 칠레의 피노체트가 자신의 모델이었다는 견해를 밝혔다.

강경파 반란이 실패했을 때, 고르바초프가 한 균형자적인 행동은 무너졌고 옐친은 권력 정상에 나타났다. 그의 승리는 한 줌 밖에 안 되는 사람을 잘 살게 하고 수백만을 가난하게 하는 있는 그대로의 자본주의적 강탈의 시대로 빨려들었다. 심지어 야나예프 팀이 자유-시장개혁에 전념했지만, 그것이 예상했던 과정은 좀 더 느렸다. 따라서 모든 왜곡된 노동자 국가주의자는 노동자를 분쇄하는 직접적인 위협이 있긴 했지만 전술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의 문제로서 야나예프 측을 방어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적은 사람만 그렇게 했다. 대부분은 모호한 민주주의의 배경 때문에 옐친을 지지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노동자 국가 이론이 말뿐인 텅 빈 이론임을 한 번 더 입증했다.

 

 

클리프와 국제사회주의자 (Cliff and the International Socialists)

 

실제로 스탈린이즘에 대한 모든 이론가들이 스탈린이즘의 몰락을 예상하는 데 실패한 것은 붕괴가 그들의 견해를 확증해주었다고 주장하지 못하게 그들을 막지 못했다. 우리는 그들의 주장에 도전하려고 많은 서로 다른 맑스주의 이론과 조류를 점검할 것이다.

1990년에 토니 클리프의 동료인 크리스 하먼은 스탈린이즘의 몰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국가자본주의에서 다민족적 자본주의로 이행은 앞으로 나아간 것도 뒤로 후퇴한 것도 아니다. 그저 옆 걸음질 친 것뿐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체로서 노동계급에 대한 하나의 착취형식에서 다른 착취 형식으로 바뀐 것일 뿐이다. 심지어 몇몇 개별 노동자 그룹이 …… 그들의 조건을 나아지게 할 수 있는 좀 더 좋은 위치를 찾아냈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조건이 더욱 나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International Socialism No. 46, 1990.)

 

 

1998년에 클리프는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이론이 정당성을 입증되었다고 주장한 시간의 시험”(The Test of Time)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펴냈다. 그 글에서 그는 옆 걸음”(step sidewards) 분석을 거듭 내놓았다. 1990년에 관찰자들이 사유화와 국가 재산의 강탈의 결과로 일어났던 모든 노동자의 권리와 생활수준에 대한 위협을 못보고 지나칠 수도 있었다는 점은 간접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1990년대 말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클리프와 그의 동조자들은 모든 노동계급의 성과물이 스탈린이즘 하에서도 살아남았다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고 따라서 그러한 성과물이 소실되었을 때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스탈린주의의 전환은 IST의 이론이 모든 본질적인 사항에서 틀렸다는 것을 입증했다. 클리프는 스탈린주의 경제를 하나의 자본주의 회사가 가치법칙이나 경쟁 없이 내적으로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설명했다. (우리는 우리가 쓴 책에서 클리프의 이론이 자본주의의 이론이 아니라 오히려 관료주의적 집산주의로 가장한 것이었다고 썼다.) 따라서 클리프에게는 과잉생산의 주기적 위기가 제거되었다. 클리프는 국가자본주의에서 경제추진력이 지배계급의 소비 욕구라고 밝힌 소비에트 이론가 니콜라이 부하린을 따왔다. 이러한 욕구가 물질적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체제 하에서 경제 성장은 정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클리프는 소비에트 경제가 부하린의 해결’”을 피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소비에트 경제가 또 다른 추진력, 즉 무기 생산 필요를 지녔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로운 자본과 새로운 축적 가능성을 확보하는 수단이었다. (러시아에서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m in Russia), 1988 edition, pp. 243-4.) 클리프는 무기 생산 지출을 엄청난 경제적 상승으로 여겼다. 실제로 그것은 모든 경제에서, 특히 정체 상태에 있는 경제에서 커다란 배출구였다. 소비재뿐만 아니라, 자본재도 서구에서 생산되는 비율보다 훨씬 뒤처져 있다. 미국과 무기 경쟁에서 소련의 활발하지만 끝내 실패로 운명 지어진 시도는 체제의 붕괴를 강제하는 마지막 지푸라기였다. (IST영속적인 무기 경제”(permanent arms economy)에 대한 비판은 우리의 책 제 7장에 있다.) 클리프가 상대적 허약성과 경제적 혼란으로 이끈 스탈린이즘의 내적 법칙과 모순을 아는 데 실패한 것은 스탈린이즘이 자본주의의 좀 더 높은 단계를 나타내고, 의식적인 계획화가 실제로 추진력이었다는 개념의 뒤에 일어났다. 그는 1955년에 처음 출판된 자신의 주요 이론 작업에서 이렇게 썼다. “국가 소유와 계획 경제에서 무정부적이고 사적 소유 경제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 대규모 국가 공업을 사공업으로 대체는 기술적-경제적 퇴보일 것이다.”(State Capitalism in Russia, p. 273.)

좀 더 최근에, 클리프주의 이론가들은(Cliffite theorists) 스탈린이즘의 위기에 대한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체제가 치명적인 혼란에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그들의 편견과 우리의 편견(Their Predictions and Ours)을 볼 것) IST 이론에서 근본적인 잘못은 그들이 스탈린이즘이 노동계급의 중요한 혁명적 이득을 파괴할 수 없을 만큼 뒤틀린 자본주의의 야만적 형식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스탈린이즘을 자본주의의 극단적 형식으로만 여겼고 체제가 지닌 근본적인 허약성과 노동자가 1917년을 방어하려고 한 몇몇 자취를 남겼던 현실에 대해 눈을 감았다.

 

 

변형된 노동자 국가주의자(The Deformed Workers-Statists)

 

변형된 노동자국가의 핵심 이론가들은 노동자 국가가 자본주의의 복원에 부닥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스탈린이즘을 안정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자본주의가 위협이 아니었다는 견해를 유지함으로써, 만델과 그의 동조자는 스탈린이즘을 자유주의적 개혁가와 뒤섞을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자유주의적 개혁가를 조심했던 선진 노동자를 잘못 이끌었다.

 

 

2차 세계대전과 스탈린이즘의 몰락 사이에 있는 전체 시기동안, 만델과 클리프는 트로츠키주의를 고수하거나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스스로를 규정했던 폭넓은 환경에서 주도적인 이론가로서 스탈린이즘의 본질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에 끼어들었다. …… 그러한 경향 모두는 붕괴의 나날들에서 스탈린이즘에 맞선 투쟁에서 중간계급의 구원자를 뒤따랐다. 손꼽히는 보기는 폴란드였다. 폴란드에서 만델이 이끈 USec와 클리프의 IST 모두는 스탈린주의자의 정부와 1990년에 탈-스탈린주의적 긴축 경제 자본주의(post-Stalinist austerity capitalism)를 관리하고 있었던 옛 솔리다리티 고문을 도왔다.(“The Left and East Europe,” PR 36.)

 

 

몇몇 정통 트로츠키주의자는 탈-스탈린주의 국가에서 노동자에 대한 셀 수 없이 많은 방해가 그들의 계급적 특성을 바꾸어놓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맑스주의 국가 이론에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만일 스탈린주의 국가가 변형되긴 했지만 노동자 국가였다면, 그러한 국가를 전복하는 것은 국가 기구를 분쇄하는 것을 뜻해야만 한다. (And a Peaceful Counterrevolution Was Had by All을 볼 것) 얼마 전에 프롤레타리아소유를 방어했던 똑같은 군대가 어떻게 지금 자본주의 소유를 방어할 수 있는가? 그리고 왜 노동계급의 중요한 패배가 정치적이 아니라 사회적 패배를 필요로 했는가? 1933년에 독일에서 나치의 등장은 노동자 제도를 폭력적으로 파괴한 것이었지만, 자본주의 지배의 범위 안에서 정치적 반혁명이었다.

게다가, 스탈린주의 국가가 노동자 국가였다면, 왜 변형된 노동자 국가 이론에 따른 통치자가 그들이 타고난 대로 국가 소유를 방어하는 데 관심을 갖는 대신 국가 소유를 사유화하는 것을 선택했는가? 왜 스탈린주의 통치자 사이에 논쟁이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 탈국가화(destatification)의 속도를 둘러싸고 일어났는가?

변형된 노동자 국가의 신봉자들은 언제나 두 개의 반대되는 경향으로 쪼개졌다. 한쪽에는, 미국에 있는 노동자 세계와 같은 경향들과 스파르타시스트(the Spartacists)노동자 국가를 방어한다는 이름으로 노동자에 맞선 스탈린주의자를 두둔했다. 다른 쪽에는, 만델과 그의 지지자들은 노동계급의 순수한 지도자인 노동자 조직 솔리다리티를 잘못 이끌었던 중간계급의 개혁주의적 반대파를 택했다. 전체 정통파에 가장 일반적인 비난은 그들의 변형된 노동자 국가이론이 나온 50년에서 그들의 이론가 가운데 그 누구도 그러한 사회의 작동법칙을 설명하고 분명한 모순을 갖고 있는 명칭(노동자국가)을 정당화하는 진지한 이론적 분석이나 책을 내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파르타시스트 경향(The Spartacist Tendency)

 

스파르타시스트는 소비에트 노동자국가가 언제 죽었는지를 결정하는데 되게 혼이 났다. 그들은 반혁명이 정확히 언제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바로 몇 년 전에 일어났다고 1992년 말에 소급해서 선언했다. (“Spartacists Terminate Russian ‘Workers' State’ Not with a Bang but a Whimper,” PR 43.) 그 이론의 지지자들에게 결정적인 사건이 전 세계의 평범한 견해에서 일어났을 때 노동자 국가”, 즉 볼셰비키 혁명의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지나쳐 버리게 했던 이론은 노동계급에게는 쓸모가 없었다.

스파르타시스트는 강경 스탈린주의자들이 베를린 장벽을 방어했고 1982년에 폴란드 스탈린주의자들이 수천만 노동자에 대한 탄압에 갈채를 보냈던 노동자에 맞선 강경파 스탈린주의자를 지지했다. 그들은 1991년에 고르바초프에 맞서 야나예프 쿠데타를 지지하는 것을 전혀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그들은 편들지 않았다. 그들은 야나예프를 편드는 것을 피하려고 이론적 곡해를 밟았다. 그렇게 한 한 가지 까닭은 야나예프를 지지했던 그들의 경쟁자인 the International Bolshevik Tendency (IBT)가 그들이 틀렸을 때 옳았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을 뜻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볼셰비키 강령에 충실하다고 떠벌렸지만, 스파르타시스트는 흔히 작은 조직의 필요에 의해 동기 부여되고 있다.

친 스탈린주의 견해에서 논리적인 IBT의 접근은 더 일관적이지 않다. IBT가 옐친에 맞선 야나예프를 방어하게 한 논거는 198912월에 루마니아에서 권력을 잡은 스탈린주의 개혁가뿐만 아니라 차우세스쿠가 야만적으로 탄압했던 대중 봉기에 맞서 차우세스쿠를 방어하도록 그들을 이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스탈린주의 국가 기구를 약하게 함으로써 노동자 국가를 파괴했던 것은 개혁가였고 모든 죄를 책임지고, 그 자신의 권력과 강탈물을 지키려고 국가 소유를 유지하는 쪽으로 기울었던 것은 바로 차우세스쿠였다. 그러나 그 자신의 소유를 방어하는데서 차우세스쿠는 국가화된 소유를 방어하고 있었고 따라서 IBTSL의 처지에서 볼 때, 그 나라는 노동자 국가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특히 마음에 들지 않는 스탈린주의적 도살자를 방어하는 것을 뜻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스파르타시스트도 IBT도 친 스탈린주의적 원리와 일치하는 견해를 지니지 않았다.

좀 더 최근에 스파르타시스트는 다시 한 번 스탈린주의적 노동자 국가의 붕괴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내놓으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관료주의자들이 60년 동안 잘못 통치하자 …… 소련의 노동 대중 사이에 깊은 정치적 냉소주의가 생겼다.”고 썼다. 그럼으로써 잘못 통치라고 반혁명 정권을 겉치레하면서 노동계급을 비난하고 있다. (Workers Vanguard, Aug. 6, 1999.) 스탈린주의 계획화를 칭송한 그들 자신의 역사를 덮으려고, 그들은 서구와 견주어 볼 때 소비에트 경제의 지체를 오랫동안 이해했다고 속였다.

 

 

1960년에, 흐루시초프는 소련이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지구적 지배를 달성할 뿐만 아니라, 20년 안에 완전한 공산주의를 이룰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자본주의 서방에 도전했다. “우리는 당신들을 뭍을 것이다.” 그는 크렘린 올리가르히의 잘못된 인식을 여기서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스파르타시스트는 스스로 스탈린이즘의 경제적 우위를 크게 선언했다. 만델과 다른 노동자 국가 동조자들처럼, 그들은 소련 경제가 구조적 위기에서 벗어났고 생산력의 급속하고 꾸준한 성장을 확보했다”, 심지어 레닌 시대 러시아의 사회구조가 브레즈네프 시대 러시아의 사회구조보다 자본주의적 복원에 훨씬 더 도움이 된다고 명백한 허튼소리를 주장했다.(Quotes from the Spartacists’ 1977 pamphlet, Why the USSR is Not Capitalist, pp.59, 90.) 또 다른 재치가 번뜩이는 예언 아닌가!

 

 

스파르타시스트는 피상적으로 소련이 1974년에서 75년에 연평균 18%의 성장률을 보였다고 큰소리쳤다. 그때 자본주의 세계가 불황에 빠져 있었다.(p. 58.) 그러한 놀라운 수치는 완벽히 거짓이었다. 크렘린도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다. 우리는 Socialist Voice No. 4에 소련의 떨어지는 성장률을 따오면서 소비에트의 경제적 우위에 대한 특정 수치와 전체 그림에 도전했다. 그들은 결코 답변하지 않았거나 왜곡을 고치지도 않았다. 이제 그들은 그들 자신과 같은 주장을 스탈린주의의 틀린 인식으로서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있다. 이번만은 그들이 옳았다.

 

 

노동자 권력(Workers Power: LRCI)

 

혁명적 공산주의자 국제 동맹(the League for a Revolutionary Communist International: LRCI)의 중추인 영국의 노동자 권력 그룹은 이론을 바탕으로 삼아 자신의 정책을 정당화하려고 애쓰는 몇 안 되는 노동자 국가 경향의 하나이다. 우리는 그들의 견해를 여러 번 분석했고 해부했다.(On Stalinism, see issues 20, 21, 48 and 49 of our magazine.) 그러나 이론적으로 그들의 모든 시도에도, 모든 다른 것과 LRCI를 구분 지어주는 것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자신들의 견해를 바꾸는 것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소련이 무너졌을 때, LRCI은 처음에 소비에트 노동자 국가를 약하게 만드는 비-러시아계 소비에트 공화국의 독립에 반대했다. 따라서 그들은 1990년 초에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고르바초프의 공격을 두둔했다. 그러나 모스크바가 1991년에 리투아니아를 탄압했을 때, LRCI은 심지어 러시아의 관료주의적 보수주의 반혁명이 자본주의를 복원하는 데 결정적이었던 변화를 막는데 돕고 있지만,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자결권을 내세웠다! 몇 년 뒤에 LRCI은 유고슬라비아 전쟁 동안 보스니아의 자결권을 둘러싸고 여러 번 자신의 마음을 바꾸었다. (PR 43를 볼 것.)

 

 

포스트-스탈린주의 국가의 계급 본질에 대해, LRCI은 요즘 또 다시 태도를 바꾸었고 아마도 중도파의 우유부단함에서는 세계 최고일 것이다. 부르주아 정권이 공개적으로 권력을 잡았을 때, LRCI는 자본주의적인 것으로서 국가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그들은 노동자 국가 안에서 오직 하나의 정치 혁명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그 결과를 빈사상태의 노동자 국가로 이름 붙였다. 여기에 사회가 자본주의적이었다고 그들을 납득시키려고 의존했던 것을 그들이 설명했던 방법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선진적인 전통적 이행기 국가 또는 빈사상태의 노동자 국가에 마지막으로 강제하는 자본주의에 필요하게 될 중요한 구조적 변화를 대충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효과적으로 완수되었을 때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 부르주아 경제 지표의 기만적인 프리즘을 통해 우리는 보기를 들면 회복의 명확한 주기가 분명하다는 점에서 국민생산이 동유럽에서 깊은 침체에서 되살아났을 때 확실한 특징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때 이러한 성장은 통화팽창이 아니고 예산 적자의 폭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Trotskyist International No. 9, 1992.)

 

 

그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논평했다.

 

 

WPLRCI는 그들의 가치 법칙 이론을 모순적이게 했다. …… 자본주의는 경제가 노동자 국가아래서 침체에서 벗어나 결정적으로 도약했을 때 승리한다. , LRCI에게는 자본주의가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다룰 수 없었던 경제적 위기를 해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각하게 생각해보면, 이것은 마땅히 자본주의가 진보적인 것을 뜻하는 것이다.(PR 48, 1995.)

 

 

우리는 우리가 알았던 것보다 이 이론이 지닌 모순을 훨씬 더 정확히 보았다. 왜냐하면 이 글 뒤에 줄곧 우리는 이렇게 썼기 때문이다. “LRCI가 의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노동자 국가의 방어가 분명히 후진성의 방어를 뜻했다.” 그러나 우리는 LRCI빈사상태의 노동자국가가 노동계급 혁명가들이 전쟁의 시기에 방어하지 못하게 한 국가였다는 점을 그때 지나쳐 버렸다. 따라서 이러한 노동자 국가는 노동계급이 결코 만들지 않았고 노동자가 국가권력을 지니지 못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방어할 가치가 있는 사회주의 요소의 찌꺼기도 없다. LRCI는 자본주의 국가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그것을 노동자 국가로 불렀다. 변형된 노동자 국가 이론이 실제로 세 번째 -체제 이론(the third-system theories)이 되었다는 우리의 관찰은 다시 한 번 확증되었다.

 

 

2년 전에 LRCI는 자신의 노선을 완전하게 바꾸었다. 그들은 빈사상태에 있는 노동자 국가라는 용어를 거부했고 그것을 되살아나고 있는 부르주아 국가”(restorationist bourgeois state)로 대체했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의 이전 이론을 급격히 잘못되고 잘못 이끌어진”, “비변증법적이고” “혼동되고” “불합리한것으로 특징지었다.(Capitalist Restoration and the State, November 2000.)

 

 

LRCI가 제시한 새로운 이론은 경제가 완전히 자본주의적인 노선을 따라 작동되지 않는 이전의 스탈린주의 나라들이 그 어떤 형태의 노동자 국가가 아니다. 중요한 결정자는 지배적인 소유 관계가 아니라, 국가권력이 조장하고 방어하는 계급과 경제제도이다.”는 것을 뜻했다. 보기를 들면, 그러한 변화는 옐친이 자신의 정부를 세웠을 때인, 소련에서 1991년에 일어났다. LRCI노동자 국가의 종말을 예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일어났을 때에도 그에 대해 주목하지 못했다. 그들은 거의 10년 동안 그러한 상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LRCI은 우크라이나에 분파를 지니고 있었는데, 노동계급으로 이루어진 분파 회원이 빈사상태이지만 정상적인 지배계급의 일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2000년에 알고 나서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LRCI은 또한 2차 세계대전 뒤 동유럽 국가가 노동자 국가였다고 시기를 정한 것을 다시 생각해야만 했다. 그들의 이전 노선은 전환점을 경제가 완전히 국가화되었을 때, 1950~51년으로 규정했었다. 이제 그들은 정부와 국가가 결정적으로 자본과 자본주의에 맞서기 시작했고 스탈린 모델에 따른 관료주의적으로 계획된 경제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1948~49년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PR 20호와 21호에 지적했던 중요한 문제를 거의 풀지 못하게 한다. 1948~49년도 1950~51년에도 국가 기구는 바뀌지 않았다. 즉 거기에는 혁명이 없었다. 오직 관련된 국가 권력 변화는 소련 군대가 1944~45년에 동유럽을 정복했을 때 일어났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입된 정권은 분명히 노골적으로 부르주아 정당과 결탁한 스탈린주의자가 이끈 자본주의적 인민전선이었다. 노동자 권력의 새로운 또는 낡은 이론에 따르면, 이러한 자본주의 정권은 그들 자신의 국가를 부르주아적인 것에서 프롤레타리아 국가로 전환시키고 있었다. 즉 자본주의 국가가 사회주의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론의 풍자적 희극은 그들이 지금 자기비판을 하고 있음에도 LRCI가 그들 이론의 모든 판에서 실질적인 모순을, 즉 노동계급 없는 노동자 국가를 다루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관료주의적 집산주의

 

관료주의적 집산주의 이론은 샤흐트만이 제국주의에 공개적으로 순응함으로써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론은 오늘날 연대 그룹(Solidarity group)이지만 1960년대 말의 독립 사회주의자들(Independent Socialists) 사이에서 미국에 좌파적 형식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론은 그들이 서술했다고 주장했던 스탈린주의 체제의 장치가 어떠한 것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그들의 편견과 우리의 편견에서 인용한 로버트 브레너)

영국에서, Sean Matgamna가 이끈 노동자의 자유 경향(the Workers’ Liberty tendency)은 관료주의적 집산주의를 되살려 놓았다. 1998년에 Matgamna는 그 자신이 쓴 150 쪽 분량의 서문을 함께 붙인 샤흐트만과 다른 관료주의적 집산주의 이론가들의 저술집을 발간했다. Matgamna의 목적은 샤흐트만과 그의 동조자들이 기본적으로 옳았던 반면에 트로츠키가 러시아 문제를 잘못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Matgamna는 스탈린이즘의 붕괴를 설명하려고 그의 이론적 선구자에서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 실제로 그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스탈린이즘이 지닌 전반적 전망을 잘못 보았다. 우리의 유리한 관점에서 트로츠키, 그리고 1946년 또는 47년까지 샤흐트만이 올바르게 스탈린주의 현상을 역사의 폭넓은 진보에서 변이로 생각하는 것은 틀림없다. 1944년 뒤 지구의 6분의 1로 스탈린이즘의 확산이 샤흐트만을 잘못 이해하도록 만들 수밖에 없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제 스탈린주의 체제가 자본주의를 이은 체제가 아니라, 자본주의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들은 역사의 막다른 골목이었다. (The Fate of the Russian Revolution: Lost Texts of Critical Marxism, Vol.1, pp.155-6.)

 

 

Matgamna는 러시아에 대한 특수한 분석에서가 아니라 냉전에서 서구에 유리하다는 점에서 샤흐트만에 가장 근본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소련이 두 번째 강대국이었던 전후 세계에서 미국과 서유럽이, 즉 선진 자본주의가 경쟁하고 있는 진영에 대해 훨씬 더 진보적이었다는 인식, 즉 건설하고 있는 사회주의보다 좀 더 부유해질 수 있고 훨씬 더 자유롭다는 인식은 사회주의 정치에 대한 맑스주의적 균형을 복원하는 데 필요한 일부였다고 나는 믿는다. (p.145.)

 

 

그러나 서구 자본주의는 제국주의이다. 그리고 전체로서 세계에서 자본주의가 옛 식민 세계의 대중에게 주었던 가능성은 거의 적었다. 15년 전에, 이 잡지는 Matgamna가 변형된 노동자 국가라는 그의 이론에서 관료주의적 집산주의로 전환하고 있을 뿐이었다는 것을 관찰했다. 그는 또는 노동계급이 지닌 혁명적 역량에 대해 지나치게 냉소주의를 채택하고 친 제국주의적 개량주의에 순응하고 있었다. 보기를 들면, 그는 1982년에 말비나스 섬을 둘러싸고 아르헨티나에 맞선 영국 제국주의 전쟁에 대해 중립 태도를 취했다.(“Where Are the Matgamnaites Going?” in PR 28; “Malvinas War Tests Leftists”, Socialist Voice No. 17.) Matgamna는 자신이 쓴 책에서 샤흐트만이 제국주의에 가장 공개적으로 투항했다고 개탄했다. 즉 쿠바에 대한 미국의 공격과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전쟁을 지지한 것. 그러나 그 자신의 적응도 같은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잡지 New Politics에 글을 쓴 또 다른 미국 관료주의적 집산주의 경향, 즉 그 잡지의 공동 편집자인 줄리우스 제이콥슨(Julius Jacobson)은 스탈린이즘의 몰락에 대한 평가를 시도했다. 제이콥슨도 기본적인 딜레마에 맞닥트려야만 했다. 즉 소련이 1991년 이전에 자본주의적이지 않았다면, 그땐 어떻게 낡은 지배계급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전환할 수 있었는가? 제이콥슨은 자신의 이론에 따라 다음과 같은 논리적 결론을 이끌었다.

 

 

러시아 공화국에서, 즉 소련에서 떨어져 나간 대부분의 국가에는 옛 공산주의 지배계급의 지도적인 인자들이 생존을 위한 개인적사회적 본능에 따라 추진되었고, 그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전투적으로 반-공산주의적 부르주아지의 행정 위원회와 금융 엘리트로 자기 변태를 위해 서로 다툴 때 서로서로를 거칠게 다루면서 일어난 변칙, 비극, 터무니없는 일이 있다. 지배계급이 스스로를 뒤엎으려고 거칠게 싸우고 있던 독특하지만 일방적인 계급 투쟁의 종류이다. (New Politics, Winter 1995.)

 

 

지배계급이 스스로를 뒤엎으려 한다는 불합리는 둘 다 똑같은 계급을 이루고 있지만, 한 계급을 다른 계급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여길 필요에 의해 지시되었다. 이것이 계급투쟁이라는 개념은 사장과 노동자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실질적인 계급투쟁을 깔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중요하지 않은 사실을 지나치는 것은 지배자와 생산자 사이의 착취 관계에 대한 계급적 분석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그런 이론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러시아 문제는 스탈린주의 체제에 대한 좀 더 적절한 묘사를 둘러싼 논쟁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노동계급 혁명가가 자본주의 아래서 몇 백 만 사람들이 겪는 비참함을 끝장낼 수 있는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는 데서 그들 자신의 계급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이 핵심이다. 1917년 러시아 노동자 혁명은 우리 계급의 150년 역사에서 중요한 성과였다. 스탈린이즘의 몰락은 그러한 성과의 뒤틀린 여파였다. 왜냐하면 붕괴의 중요한 까닭이 노동자의 남아 있는 성과물을 제거하려는 국가화된 자본주의 지배계급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트로츠키는 흔히 노동계급의 지난날 성과를 방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새로운 성과물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없었다고 소련에 대해 말했다. 이 말은 그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에게도 진실이다.

 

 

옮긴이: 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