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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2007년)/2007년 10월호

(그림) 러시아혁명머피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4:27

우리는 러시아 혁명의 역사를 쓸 수 있을까? 에릭 홉스봄에 대한 뒤늦은 대응(Can We Writ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A Belated Response to Eric Hobsbawm)

 

 

Kevin J. Murphy

 

 

요약

10년 전, 에릭 홉스봄은 우리가 러시아혁명의 역사를 쓸 수 있을까?’라는 제목으로 독일에서 강연했다. 이 에세이는 홉스봄이 소련이 무너지고 나서 좌파 진영의 폭넓은 청중들이 공유했던 러시아 혁명의 전망에 대해 똑똑히 말했고 이러한 주장 대부분이 오늘날 계속 울리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러시아혁명의 역사서술에 대한 토론의 형세를 좀 더 폭넓은 정치적 맥락에 놓으면서, 나는 학계가 러시아혁명을 설명할 때 맑스주의 해석을 얼마나 무시했는가를 홉스봄이 애써 못 본 채 했다고 주장한다. 홉스봄은 10월 혁명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였고 스탈린주의의 기원에 대해 뚜렷이 밝히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반 맑스주의자가 주장하는 해석을 꽤 정당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요즘 나온 연구를 통해 뒷받침 되지 못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소련 문서고에서 나온 새로운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맑스주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교묘히 삭제해 버렸다. 이런 점에서 새로이 발견된 문서고 자료는 요즘 유행하고 있는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10년 전, 에릭 홉스봄은 우리가 러시아혁명의 역사를 쓸 수 있을까라는 주제로 독일에서 강연했다. 평생 마르크스주의자이자 19세기 자본주의의 발전에 대한 일련의 선구적 작품을 내놓은 저자로서, 홉스봄을 우리 시대의 잘 알려진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로서 인정하는 것은 전혀 틀리지 않다. 소련이 무너진 결과로서, 홉스봄이 20세기에서 결정적인 사회운동에 대해 균형 잡힌 평가를 한 것은 아주 적절했다.

그러나 앞으로 내가 주장하겠지만, 홉스봄이 뚜렷이 밝혔던 몇몇 견해는 결코 납득이 가지 않는다. 여기서 핵심은 역사가 홉스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는 소련이 무너지고 난 뒤 좌파의 많은 청중이 러시아혁명에 대해 어느 정도 모순되게 전망한 것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 부분을 다시 설명할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주장의 많은 것은 여전히 오늘날에도 울려 퍼지고 있다. 소련의 문서고가 약 16년 동안 열려 있다고 가정하면, 나는 홉스봄이 제기한 몇 가지 쟁점을 제기하고 싶고, 훨씬 더 폭넓은 러시아혁명에 대한 역사서술경향 안에 이러한 토론을 위치 짓고 싶으며, 그리고 이를 통해 나 자신의 작업에 좀 더 박차를 가하고 싶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자신의 논의에 뼈대를 만들면서, 홉스봄은 우리가 모두 동의할 수 있다고 내가 믿은 몇 가지 주장을 했다. 첫째, 아이작 도이처(Isaac Deutscher)가 쓴 트로츠키 3부작에 대한 그의 찬사는 곧 다음의 질문에 답한 것이다. 즉 홉스봄이 지적했듯이, 그러한 정치적으로 논쟁을 일으킬 만한 주제에 대한 어떤 명확한 역사가 논쟁적이지만, 러시아 혁명의 역사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러시아 혁명에 대한 다른 고전적인 맑스주의 설명을 그냥 덮어둘 수 없다는 것을 덧붙일 것이다. 1917년에 연루되었던 계급 세력의 종합으로서, 트로츠키가 쓴 걸작 러시아혁명사(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는 매우 뛰어난 것이다. 빅토르 세르주(Victor Serge)가 쓴 러시아 혁명, 첫 해의 경험(Year one of the Russian Revolution)은 여전히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반혁명의 공격이 가능했다는 점을 분석한 중요한 책이다. 만일 우리가 러시아혁명을 좀 더 폭넓은 유럽의 맥락에서 알려고 한다면, 우리는 피에르 부르에(Pierre Broué)가 쓴 독일 혁명에 대한 권위 있는 연구를 포함해야만 한다. 에르네스트 만델(Ernest Mandel)이 쓴 트로츠키와 스탈린이즘에 대한 책, 토니 클리프가 쓴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 체제의 계급 성격에 대한 책은 혁명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꼭 읽어야 할 작품이다. 러시아 혁명 시기에 대한 고전적 맑스주의 해석의 목록은 틀림없이 이러한 책들보다 훨씬 더 많다. 그러나 여기서 핵심은 우리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지난 16년 동안 문서고를 이용할 수 있었지만, 우리가 학계의 업적에 맞먹을 수 있는 아주 풍부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에릭 홉스봄에 대한 모든 마땅한 존경과 함께, 나는 그가 이러한 전통에 훨씬 더 친숙했다면 그가 역사서술에 널리 퍼져 있는 러시아 혁명에 대한 되살아난 적대감에 항복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또한 제시할 것이다.

둘째, 홉스봄은 소련 문서고가 열리자 소비에트 사회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고쳐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일어났던 많은 것은 이제 알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꽉 닫아 건 기록 문서고 문과 거짓말이거나 반쪽짜리 진실인 관료의 증언 뒤에 숨겨진정보가 마침내 이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더 나은 또는 더 많은 완벽한 자료를 이용할 수 있을 때, 그 자료들은 빈약하거나 완벽하지 못한 자료를 대체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불행하게도, 러시아혁명에 대한 쟁점은 훨씬 더 꼬여 있다. 앞으로 내가 주장하겠지만, 만일 그것이 단순히 자료의 문제였다면, 러시아 혁명에 대한 표준적인 교과서 해석은 왼쪽으로, 즉 고전적 맑스주의 해석으로 움직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 우리는 그 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역사해석이 오른쪽으로 전환하고 있고 표준적인 해석이 바탕으로 삼고 있는 자료와 빈번히 모순되는 낡은 주장을 다시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으로 바뀌고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에 러시아 혁명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계에서 지배적인 해석이 지닌 결점은 기본적으로 자료에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정치적 전망의 문제였다. 혁명은 어쩔 수 없이 당파성을 불러일으켰다. 잘 알려져 있듯이 트로츠키는 두 진영을 나누고 있는 벽을 기어오르면서중립적인 태도를 지닌 것처럼 꾸민 역사가들을 비웃었다. 다른 한편으로 홉스봄은 물론 오랫동안 러시아 혁명의 역사를 쓴 사람들의 열정이 종교개혁의 역사를 오늘날 쓰는 사람들의 열의 없는 체온으로까지 떨어지려면 틀림없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종교개혁과 이러한 유추는 아주 그릇된 추론이다. 여기서 홉스봄은 러시아 혁명에 대한 학계의 표준적인 해석의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동력과 맑스주의 해석이 일부러 사회적으로 무시해버린 정도를 낮게 평가했다.

러시아 연구는 냉전이 낳은 의붓자식으로 미국에서 처음 나타났고 소비에트 국가가 지원하는 소련 연구와 공동으로 많은 것을 공유했다. CIA의 전신인 전략 서비스 국(the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은 중요한 학문 연구 제도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용할 수 있는 과거를 구성하려고 학자들은 단순히 전체주의 패러다임으로 이전했다. 그것은 나치 정권과 대결에서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이제는 그들의 이전 동맹과 새로운 적인 소련을 겨냥한 것이다. 냉전 시기에 서구 학계는 스티븐 코헨이 연속성 테제라고 적절히 규정했던 것이 지배했다. 그 테제는 초기 볼셰비키의 조직적 실천에서 굴락으로 단순하고 자연적인 발전을 긍정한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전형적으로 이미 혁명 이전에 완전한 이론으로 만들어진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태생적인 독재의 청사진으로서 제시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볼셰비키라는 음모적인 소수파가 군사 쿠데타를 통해 1917년에 권력을 장악했고,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잔인한 힘과 테러를 통해 국가를 독점했으며, 결국 전체주의 일당 국가를 창조했다는 견해가 나왔다.

물론 레닌이 스탈린으로 이어졌다는 연속성 테제라는 냉전 교과서 판은 이제 도전받지 않는다. 1960년대의 사회 운동은 아래로부터역사를 연구하는 역사가 세대를 고취했다. 그들은 이전에 역사에서 빠진 사람들의 행동과 영감을 다시 세우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사는 그 어떤 영역보다도 러시아 연구의 논쟁적인 분야에서 훨씬 더 철저한 수정을 가했다. 10년 넘게 재능 있는 역사가 집단은 많은 맑스주의자가 오랫동안 주장했던 것, 1917년에 소비에트로 권력 이전이 대규모 대중 반란의 정점이었다는 점을 뚜렷이 증명해주었다. 알렉산더 라비노비치(Alexander Rabinowitch)와 스티브 스미스(Steve Smith) 같은 러시아 혁명의 대담한 사회사가는 전체주의 학파에 도전했을 뿐만 아니라 끝내 몰아냈다.

그러나 초기 소비에트 사회에 대한 냉전 해석에 도전했던 서구 학계는 두 가지 이유에서 훨씬 더 사변적이고 논쟁적이었다. 첫째, 혁명 시기에 해당하는 중요한 원사료를 이용할 수 있었지만, 소비에트시기에 대한 자료는 대체로 이용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둘째, 몇몇 학자가 지닌 이데올로기 견해는 냉전이 안겨 준 이중적인 틀을 받아들이게 했다. 부분적으로 스탈린이즘의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서구의 선전 역사에 간단하게 대응했던 이들 학자는 훨씬 더 다른 쪽으로, 다시 말해 스탈린이즘의 대중적 뿌리에 대한 터무니없고 실체가 없는 주장으로 막대를 구부렸다. 그러나 이러한 학계가 역사가로서 드러내었던 결점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은 자신들의 학파를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데 아주 능숙했다. 스탈린이즘이 많은 노동계급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는 생각은 10년 전에 어느 공업 전문가가 주장했던 것처럼 점점 더 받아들여지는 견해로 되었다.

소련이 무너지고 문서고를 이용할 수 있게 된 이래 몇 가지 요소는 러시아 혁명에 대한 학계 연구를 이루었다. 첫째, 냉전 뒤 걸출한 세계 권력으로서 미국의 출현은 어쩔 수 없이 훨씬 더 폭넓은 정치적 조류의 일부로서 역사서술에서 오른쪽으로 전환을 북돋웠다. 많은 서구 학자들에게 소련의 붕괴는 엉뚱한 믿음과 새롭게 귀에 거슬리는 반-공산주의를 위한 촉매로서 작용했다. 그때의 정치적 기후가 20세기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열정적인 사건을 평가하는 데에 영향을 주고 있다면, 미국 정치에서 우편향은 역사서술에 영향을 미쳤다. 역사서술 분야에서 보수주의가 거듭 주장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 자유주의의 정치적도덕적 붕괴가 러시아혁명에 대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전문가들 사이에 있는 선을 흐릿하게 했기 때문이다. 리차드 파이프스(Richard Pipes)는 소련이 무너지자 자신이 러시아 혁명에 대해 쓴 책을 펴냈을 때, 미국 역사가 피터 케네즈(Peter Kenez)는 파이프스가 러시아 혁명을 기소하고 있다고 조소했을 때 역사서술 분야에서 여전히 아주 살아 있는 자유주의 전통을 대변하고 있었다. 한 세대 전에, 이러한 자유주의 역사가들의 몇몇은 맑스주의를 집적거리기도 했지만, 그들은 이제 연속성 테제의 재출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역사 서술에 미친 다른 부정적 영향은 몇몇 아주 혼란스러운 역사가들의 작품에 지적 세련의 겉치장을 주는 데 이바지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과도한 영향 때문일 수도 있다. 내가 혁명과 반혁명(Revolution and Counterrevolution) 서문에 자세히 썼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은 원사료에 대한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분석을 2차 자료에 대한 손쉽고 교묘한 속임수적(smoke-and-mirrors) 접근을 부추겼다. 짧게 말해, 러시아혁명 연구에서 학문적 진전을 가져올 수 있는 흥미 있는 시기이어야 할 것은 대체로 탕진되어 버렸다. 러시아 혁명을 잘못 이끌어진 열망으로 비난하고 기소하는 것은 지난 16년 넘게 역사서술 분야에서 거듭 주장되었다. 홉스봄이 뛰어난 연구로 갈채를 보냈던 올란드 파이지스의 러시아 비극(Russian Tragedy)에서처럼 그러한 연구에서 두드러진 것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쓰일 새로운 증거가 모자랐다는 것이다.

아마도 혁명 시기에 대한 서구 연구에서 근본적인 결점을 꼬집은 책은 라스 리(Lars Lih's)가 쓴 레닌을 재발견하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쓴 맥락을 찾아서(Lenin Rediscovered: ‘What Is tod Be Done?’ in Context)이다. 리가 주장하고 있듯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표준 교과서적 번역문은 그것을 끝내 스탈린이즘으로 이끈 억압적인 볼셰비키의 일련의 사슬에서 첫 연결로 추정되는 것으로 제시했다. 이 신화는 조지 부시가 몇 개월 전에 자신의 레퍼토리에 그것을 덧붙이기까지 할 만큼 널리 퍼졌다. 부시는 그때 이렇게 주장했다.

 

 

1900년대 초에, 어느 망명 변호사가 유럽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불린 팸플릿을 내놓았다. 그 팸플릿에서 그는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착수할 자신의 계획을 자세히 설명했다. 세계는 이제 레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고 세계는 이미 잔인한 대가를 치렀다.

 

 

리는 체계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표준 교과서적 설명의 정체를 폭로하고 러시아 혁명 운동에서 정치적 자유에 대한 가장 확고한 승자가 레닌(V. I. Lenin)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입증했다. 리는 역사서술을 사람들이 때때로 당 내에서 실질적인 분열이 의젓하고 매력적인개인의 분파 대 비도덕적이고 광신적인폭력배 분파 사이에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고 평가했다.

참을 성 있게 이 개척적인 책을 죽 읽어 내려가는 사람들에게, 레닌에 대한 널리 퍼져 있는 쳐 죽일 만한 일에 대한 오직 하나의 설명이 있다. 이 분야에서 무게를 지닌 사람들 가운데 틀림없는 학계 전문가들은 레닌을 악마로 만드는데 서두른 나머지 레닌을 읽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1970년대의 사회사가와 맑스주의 전통 모두는 1905년과 1917년의 대중 반란, 즉 고용주와 갈등을 통해 배우고 있는 노동자, 파업 운동, 소비에트의 형성, 공장 위원회 등등에 대한 자신들의 관심을 집중했다. 맑스주의자가 사회사가와 다른 점은 매개자(agency)의 문제에 대한 것이다. 존 마로트(John Marot)가 주장했듯이, 자유주의적인 사회 사가는 대중을 급진적으로 만든 데서 통합 부분으로서 혁명가, 특히 볼셰비키의 역할을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우리는 1912년에서 1916년까지 세계 역사에서 가장 지체된 정치적 파업 운동 동안 당대 지도자들 모두가 레나 금광 노동자의 살해자와 두마의 정회와 같은 그런 쟁점을 둘러싼 30개 행동에서 혁명가의 역할을 인정했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다. 나는 혁명가가 이러한 파업에 참여한 특별한 공장이 무엇인지 뿐만 아니라 특수한 작업장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치산업 행동에 대한 주장은 작업 현장에서 얻어져야만 한다. 오흐라나에 대한 한 보고에 나와 있듯이, “공장에서 가장 나쁜 깡패이고 다른 사람에게 (운동)의 성격을 제시하는 사람을 찾아냈다.” 가장 나쁜 악당은 노동자에게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용기를 주는 운동에서 전투적 노동자를 단순한 희생물로서 여겨서는 안 된다. 혁명적 인자는 오흐라나가 정규적으로 체포하고 전투적 노동자가 전선으로 보내져도 끊임없이 충원되었다. 경영자와 오흐라나가 취한 급격한 조치는 실제로 더 나은 노동 조직을 육성했을 뿐이다. 노동자는 대표를 뽑았고 희생을 피하려고 일제히 요구를 내세웠다. 내가 모스크바 금속공장에 흥미 있음을 알게 된 것은 1917년 혁명 이전조차 숙련, , 세대에 바탕을 둔 작업장에서 여러 가지 구분이 이러한 과정에서 이겨냈다는 것이다. 실제로 율리 구존(Iulii Guzhon)이라는 공장 소유자와 최종 대결로 이끈 쟁점은 덜 숙련된 직공과 여성 노동자의 최저 임금 비율을 올리라는 노동자의 요구였다. 이 요구는 전쟁 때 이윤을 얻은 구존에게 공장 폐쇄로 위협하도록 부추겼다. 그의 처지에서 최저 임금에 대한 요구가 주민의 다른 계급을 대가로 자신의 생존 수단을 보장받았던 특권적인사람들의 계층을 만들었기 때문에 반국가적이고 반민주적이었던것이었다.

이제 냉전 전사의 작고 움츠린 환경은 제쳐놓고, 오늘날 몇몇 역사가는 시계추를 거꾸로 돌리고 사회사가의 중요한 이바지를 깡그리 무시하려고 시도하곤 했다. 홉스봄이 주장했듯이, “우리는 물론 볼셰비키가 주요하게 이득을 보았던 1917년 가을에 엄청난 대중의 급진화가 임시정부를 위축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말하기를 “10월이 일종의 음모 쿠데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은 더는 설득력을 지니지 못할 것이다.”는 것이다.

그러나 10월을 둘러싼 홉스봄 자신의 모호함은 일련의 조건법적 서술또는 만일 그랬다면의 문제에 드러났다. 이러한 뜻에서, 홉스봄은 그가 이렇게 물었을 때 오늘날 지배적인 역사서술과 훨씬 더 많이 일치하고 있다. “10월 혁명을 피할 수 있었을까? 볼셰비키가 권력 장악을 굳히지 않았다거나 다른 사회주의정당과 사회혁명당과 폭넓은 동맹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홉스봄은 민주적인 러시아가 혁명에서 나타났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점은 대부분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것 가운데 중요한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10월에 대한 이러한 모호성은 계속해서 역사서술을 지배하고 있다. 많은 역사가에게 10월은 그들이 진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이래야 한다고 믿는 것에 들어맞지 않았다. 반 맑스주의 역사가가 진짜 혁명이 어떠해야 하는 지에 대한 날카로운 이해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은 조금 이상야릇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고 추정하도록 하자. 만일 당신이 필립 포너(Philip Foner)가 쓴 러시아혁명이 미국정치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에 대한 아주 재미있는 설명을 읽었다면, 당신은 러시아 혁명이 희망과 용기의 훌륭한 봉화불이었다는 것을 알아낼 것이다. 보기를 들면 뉴욕의 파크뷰 궁전에서 열린 대중 집회에서, 수백 명의 노동여성이 혁명을 지지하려고 자신들이 지닌 보석을 연단 위로 던진 반면, 5백 명 노동자는 독일의 침공에 맞서 소련을 방어하려고 붉은 수비대와 함께 하려고 자원했다. 그러나 이들 노동자는 속았을지도 모른다. 로이드조지(Lloyd George)유럽 전체가 혁명의 정신으로 가득 찼다.”고 슬퍼했을 때, 아마 수십만 명이 공산당에 가입하고 있던 유럽 노동자는 러시아혁명의 더러운 본질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했을 지도 모른다. 아마도 학계 전문가는 그들이 진짜 혁명이 어때야 하는지와 왜 러시아 혁명이 그들이 제시한 기준에 들어맞지 않았는지에 대해 훨씬 더 좋은 이해를 지녔다는 것을 정확히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우리에게 10월에 대해 지난날에는 알려지지 않은 내용을 가르칠 수 있다.

실제로 새로이 발견된 것은 우리가 10월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나 알아야 하는 것의 진실을 문제 삼지 않게 한다. 우리는 소비에트 제2차 대회에 참석한 670명의 대표자 가운데 507명이 소비에트로 권력 이양을 좋아했고 그 자리에서 항의하고 퇴장했던 사람들 모두가 거의 소비에트 권력에 반대했던 163명의 소수파 대표자들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힘의 사용에 대한 주장은 1917년에도 그랬지만 오늘날에도 관심을 딴 데로 돌리게 하는 것이다.

 

 

 

소비에트 2차 대회가 열리기 전과 열리고 있을 때, 또는 대회가 끝나고 난 뒤 사회혁명당 우파와 멘셰비키의 기록은 사회혁명당 우파와 멘셰비키가 소비에트 권력을 어쨌든 지지하고 싶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기록에는 볼셰비키만이 폭력을 쓰는 것을 막았다는 것, 즉 온건 사회주의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노력으로 소비에트 정권을 뒤엎으려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 틀림없이 여기에서 이중의 잣대가 쓰였다. 즉 볼셰비키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군사 혁명 위원회에서 자신들의 지배적인 위치를 이용해서 임시정부를 뒤엎고 소비에트 대회로 정치권력을 넘겼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는 또한 눈에 띄게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군사 기구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

1917년 내내 자유주의 정당의 귀에 거슬리는 반혁명 기록이 주어졌다고 하면, 홉스봄은 심지어 자유주의 역사가도 민주주의적의회제적 러시아가 훨씬 더 가능했다는 확신을 갖고 주장할 수 없었다고 지적하면서 카데츠를 민주주의의 승자로 간단히 처리해 버렸다. 그것은 틀림없이 10년 전에는 진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Slavic Review지의 편집장인 마르크 슈타인베르크(Mark Steinberg)고귀한 정치적 꿈과 실제적인 정치적 용기를 북돋아주었던 자유주의자들이 새로운 민주주의 정체를 세우려고시도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오래 전에 죽은 카데츠를 다시 살려내려는 믿기 어려운 시도를 하고 있다. 끝내 이러한 민주주의 노력은 전혀 알려지지 않거나 아주 작은 소규모 활동가 서클로 이해되었던레닌주의자들의 권위주의를 통해 좌절되었다.

홉스봄이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폭넓은 동맹을 맺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 것은 훨씬 더 심각하지만 결국에는 결점 있는 전제이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과 협력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어떠한 밑바탕에서 그러한 협력을 세울 수 있었을까? 카데츠는 코르닐로프가 꾸민 군사 쿠데타 시도에 동의함으로써 인기를 잃었다. 온건 사회주의자들이 지난 6개월의 교훈을 기꺼이 이끌어냈고 신망을 잃은 지배 계급 당과 관계를 끊었다면, 레닌은 소비에트로 평화적인 권력 이전을 제안했을 것이다. 사실 제2차 소비에트 대회는 만장일치로 소비에트를 대표했던 여러 정당들의 연립 정부를 이루는 데 투표했지만, 몇몇 사회주의자들은 금방 찬성했던 결의안을 곧 무시해버렸고 볼셰비키가 임시정부를 뒤엎으려 한다고 비난했으며 대회장 밖으로 성을 내며 뛰쳐나갔다. 알렉산더 라비노비치는 11월 토론 동안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우파가 볼셰비키 정권과 교섭하는 데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거나 빅토르 세르주가 주장했던 것처럼,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우파는 승자 측에 완전 투항을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요약하면, 1917년의 계급 분할은 트로츠키와 세르주, 그리고 오늘날 홉스봄과 자유주의 역사가들이 무시했던 다른 사람들이 쓴 맑스주의 고전에 잘 나와 있다. 미국에서 학계의 영세 기업(cottage industry)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옹호자로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신화에 계속 침투해들어 갔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문서 자료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알려주는 게 필요할 뿐이다. 세르주는 사회혁명당 우파와 멘셰비키가 제2차 소비에트 대회장 밖으로 뛰어나간 뒤 소비에트 권력을 뒤엎으려고 군대에 드러내놓고 호소했지만 그 어떤 부대도 그러한 호소에 따르지 않자 곧이어 공공안전위원회(the Committee of Public Safety)를 만들려고 카데츠와 공업 거물들과 연합했던 방식을 자세히 썼다. 아브라함 고츠(Abraham Gotz)가 이끌고 멘셰비키의 지지를 받았단 사회혁명당 우파는 왕당파, 군 장교, 그리고 반소비에트 사회주의자들의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동맹을 통해 실패한 융커 폭동을 조직하려고 시도했다. 몇 주 뒤에, 사회혁명당 우파는 페트로그라드로 진군하고 있었던 코사크 전쟁광과 앞으로 나치의 협력자가 될 표트르 크라스노프(Petr Krasnov)에게 군사적 지원을 했다. 나중에 멘셰비키인 단은 볼셰비키를 무력으로 청산할 수 있다고 그들이 바랐다는 데 동의했다. 세르주는 이렇게 평가했다. “이 국면에서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의 두 개의 커다란 정당의 도덕적 붕괴보다 훨씬 더 비극적인 것은 없다.” 따라서 새로운 자료는 노동계급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우파가 러시아 대중을 대표했던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 밖으로 뛰어나가 반동세력과 결합했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사회혁명당 우파와 멘셰비키의 원칙 없는 전술은 끝내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좌파와 사회주의적 연립 정부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제헌의회 선거를 연구한 역사가 올리버 라드키(Oliver Radkey)는 선거구가 사회주의자도 아니고 혁명가도 아닌 사회혁명당 우파에 아주 유리했지만, “사회혁명당 우파가 없었다면선거구는 카데츠에게 유리하게 되었을 것임을 보여주었다. 또한 우리는 사회혁명당 좌파와 우파 사이를 구별 지었던 세 곳에서 사회혁명당 좌파는 다수를 얻었다는 점을 이제 알게 되었다. 사회혁명당 좌파는 발트 함대에서 2, 카잔에서 9, 페트로그라드에서 32표 넘는 차이로 사회혁명당 우파를 이겼다. 사라토프 지방에 대한 최근 연구는 그곳의 농민들이 강요를 받아 사회혁명당에 투표를 했고 당의 토지 칙령 때문에 자신의 표를 볼셰비키로 바꾸길 바랐다고 불평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누구도 지주에 맞선 대규모 반란에서 농민층이 사회혁명당의 옷을 입은 카데츠에게 권력을 되돌려주는 데 투표하고 있었다고 믿길 바라지 않는 한, 결론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즉 볼셰비키 25%와 사회혁명당 가운데 좌파 사회혁명당 다수파 40%는 대중 선거를 승리로 이끄는 데 연합했다.

 

 

그러나 에릭 홉스봄에게 10월 혁명은 실수였다. 그는 볼셰비키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아주 비현실적인 강령을 가지고 권력을 잡기로 마음먹게 한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볼셰비키가 바랐지만, 러시아 혁명을 돕는데 실패했던 독일혁명의 신화라고 스스로 불렀던 것을 그 까닭으로 제시하고 있다. 홉스봄은 나의 세대는 1918년 독일 혁명의 배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고 떠올렸지만, 홉스봄에 따르면,

 

 

독일은 유럽의 혁명적 부분에 속하지 않았다. 적어도 나는 독일에서 사회혁명이 1913년에 일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차르와는 달리, 전쟁이 없었더라면 카이저 독일은 자신의 정치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것은 전쟁이 예상되지 않은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물론 온건한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은 사회주의자도 혁명가도 아니었기 때문에, 독일 혁명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손아귀로 떨어지는 것을 막길 바랐다. 사실상 그들은 독일 황제가 제거되는 것조차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요점이 아니다. 독일판 10월 혁명 같은 사건이나 그와 같은 어떤 것도 진지하게 지지받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배신당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피에르 브루에가 쓴 독일혁명에 대한 비할 데 없는 연구가 신화로서 독일 혁명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거부하고 있다고 믿는다.

홉스봄은 올란도 파이지스(Olando Figes)가 내전을 평가한 것에 동의하고 있다. 파이지스는 볼셰비키가 붉은 깃발 아래, 그리고 오해하기 쉽긴 하지만 소비에트라는 이름으로 싸웠기 때문에 이겼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홉스봄은 내전의 기원에 대한 쟁점을 제기하지 못했다. 맑스주의자들에게 내전은 2월에 시작되었던 계급 전쟁의 연장이었다. 1917년 내내, 극우파와 자유주의자들은 거듭해서 폭력이 반란에 대한 그들의 계급적 해결책이었다고 또렷이 밝혔다. 그러나 일반 교과서에는 볼셰비키가 비열하게 싸웠다고 비난했고 내전이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이나 1월에 제헌의회 해산으로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나온다.

나는 문서고에서 가장 중요하게 드러난 것은 소련에서가 아니라 윌슨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의 문서고에서 발견되었다고 생각한다. 데이비드 포글리송(David Foglesong)이 쓴 책 볼셰비즘에 대항한 미국의 비밀 전쟁10월 혁명이 몇 주 지나고 나서 미국이 소비에트 권력에 적대적인 백군 세력에 어마어마한 현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개적으로 미국이 러시아에서 민주주의를 조장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고 주장한 반면, 개인적으로 국무장관 로버트 란싱(Robert Lansing)은 동부 전선에서 전쟁 수행 노력을 지속하는 것이 군사 독재를 통해 안정적인 러시아 정부를 세우는 데 필요조건이라고 대통령 윌슨을 설득했다. 다음 몇 년 동안, 미국은 미국의 이해에 따르는 군사독재를 세우려는 시도로 반유대주의자인 코사크 전쟁광에 수천만 달러를 지원했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러시아 연구 전문가들이 이 점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러시아 혁명에 대한 학계 연구에서 그 사실을 언급한 것을 하나도 찾지 못했다. 심지어 돈 코사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책에서도.

맑스주의자는 미국, 영국, 프랑스 군대가 백군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러시아 혁명의 타락에 대한 모든 진지한 토론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해야만 한다. 그러한 지원 없이, 백군은 결코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트로츠키가 백군이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창조되었던 용병이었다고 주장한 것이 아주 옳았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다. 물론 우리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그리고 그들의 동맹국이 소비에트 영토로 수십 만 명의 병사를 보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이러한 병력을 반볼셰비키 세력을 하나로 지탱해 준 고정 핀이라고 묘사했다. 우리는 백군에 대한 서구의 지원이 1919년 말에 끝났을 때, 내전도 빠르게 종결되었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있다.

내전의 결과로, 홉스봄은 러시아 혁명이 뒤떨어지고 아주 심하게 파괴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세워야 할 운명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제가 실제로 무너졌다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없지만, 그런 맥락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은 아무리 줄잡아 말하더라도 문제 있는 것이다. 맑스주의 전통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추진된 정치보다는 이러한 사회경제의 재앙은 스탈린이즘이 태어나게 되는 물질적 밑바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1921년에서 1928년까지 신경제정책 시기에 소비에트와 당 내 민주주의 모두가 소멸했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소멸은 미리 예정되거나 직선적인 것이 아니었다. 1922년에 사회혁명당 재판이 있은 뒤에, 군사쿠데타를 조직하고 레닌을 암살하려고 애썼던 이 조직의 구성원은 자유롭게 <망치와 낫 공장>(the Hammer and Sickle)에서 말했고 모스크바 소비에트에 후보를 냈다. 1923년 분파 투쟁에서 다수파 출신과 소수파 출신인 볼셰비키 중앙 위원회 위원은 공장 세포의 면전에서 그들 저마다의 처지를 주장했다. 그러나 1926년쯤에 당 내 민주주의는 엉터리였다. <망치와 낫 공장> 선거는 4백 명 넘는 표가 축출에 찬성한 것이고 반대 2표로써 전형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반대파의 선동과 청중에 대한 익명의 각서는 이것이 뒤에서 조종된 사건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추방 회의에서 17개의 무기명 각서 가운데 16개는 정치국 노선에 적대하거나 반대파를 위한 공청회를 바랐다.

반대파를 조용하게 만든 것은 공장 당 조직을 경제적 양보를 부과하고 노동력에 규율을 갖추도록 시도했던 제도로 바꾸려는 시도와 부합했다. 그러나 노동조합 안에 공개적인 반대파는 당 내 반대파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1926년에 노동조합 대회에서, <망치와 낫 공장> 노동자는 이렇게 불평했다. “감독관청(trust administration)은 자동차공장에서 쫓겨났다. 임금 삭감은 노동자의 등 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들은 농민을 속였고 쥐어짰다. 이것이 노동자와 농민 사이의 동맹(Smychka)라고 불린 것이다.” 심지어 19279월에, 당은 그 자신의 힘이 미치는 범위 밖에서 반대파를 침묵시킬 수 있었다. 한 보고는 세포가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불평했다. “우리 세포에서 이데올로기 상황은 나쁘다. 거기에는 술 취한 공산주의자가 있었다. 노동자는 공산주의자와 그들의 활동을 괴롭히고 있지만, 공산주의자는 조용히 있었다. 우리는 그룹을 갖지도 않았고 개인적 선동도 하지 않았다.”

1917년과 스탈린이즘 사이에 돛을 놓으려고 한 역사가들에게, 네프는 중요한 문제를 내놓았다. 내가 <망치와 낫 공장>에 대한 연구에서 보기를 들어 설명하려고 애쓴 것은 1917년이 품은 이상이 끝내는 작업 현장에서 점점 높아지는 스탈린이즘과 충돌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장에는 제15개년 계획의 강제와 전혀 달랐던 매우 활기 있고, 적극적이며, 비교적 아량이 있는 생활도 있었다. 네프 시기 동안, 당 밖에서 반대파의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노동자는 공장에서 종교를 믿을 수 있었고 믿었다. 노동여성의 다수는 정규적으로 여성 회의에 참석했다. 왜냐하면 이 회의는 그들의 불만을 듣고 의결하는 포럼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노동자는 금속노동자의 노동조합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그들의 대표에게 1924년과 1925년에 13,000건이 넘는 불만사항을 제출한 그들의 관심거리를 좋게 해결해줄 수 있기를 기대를 걸었다. 많은 것이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풀렸다. 노동조합이 나중에는 그렇게 되었지만, 노동계급에 맞서 배치된 국가 제도이기는커녕 노동자는 스스로 노동조합 조직을 쓸모 있는 힘의 원천으로 여겼다. 나중에 공장 감독관이 경영자라기보다는 노동조합 대의원이 공장에서 실제 권력을 지녔다고 썼던 것처럼 1925년에 노동조합 조직은 강했다. 7년 동안 전쟁이 경제의 재앙을 가져왔지만, 노동자의 실질 임금은 1926년쯤에 전쟁 이전 수준과 비슷하게 올랐다. 간단히 말해, 문서고에서 나온 증거는 네프의 많은 시기 동안 공장에서 정치적 고려, 즉 공장에서 친노동계급 정치는 경제적 편의보다 앞섰다. 디안 쾬커(Diane Koenker)는 인쇄 노동자에 대한 최근 연구에서 강력한 노동조합 조직에 대한 비슷한 증거를 찾았다. 쾬커에 따르면, 네프 중반 동안 인쇄노동자는 감독자, 규율의 문제, 임금 수단, 작업 과정에 대한 협의와 관련해서 4개의 중요한 지역을통제했다. 나는 이것이 자본주의와 아주 다른 체제에 대한 묘사임을 암시하고 싶다.

이것은 쾬커가 주장했던 것보다 네프 시기 동안에 공업 관계에 대한 매우 다른 평가이다. 쾬커는 내전에서 태어난 사회주의가 국가가 중심으로 정한 목적과 정책들에 대한 버팀목을 확보하려고 체카와 강제노동수용소와 같은 국가 대리체의 힘에 의존했다10년 전에 주장한 적이 있었다. 사회를 판단하기 위한 리트머스 시험지로서, 대대적인 테러와 함께 수감자 비율은 쓸모 있는 바로미터로 될 수도 있지만, 미국 학자들은 일관된 바탕 위에 그러한 척도를 쓰는 논리를 통해 생각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우리는 초기 소비에트 국가가 아주 적은 노동자와 시민의 적은 수를 감옥에 가두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최근에 나온 1922년에서 1928년까지 GPU 일람에는 3,000 건이 넘는 파업에 대한 보고가 있지만, 당국이 뛰어난 노동자를 체포했던 6개의 우발적 사건에 대한 언급이 들어있다. 전체 소비에트 수감자 인구는 1925년에 비로소 100,000명을 넘어섰다. 그 가운데 정치적 공격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은 아주 작았다. 굴락에 대한 연구로 퓰리처상을 받은 앤 애플봄(Anne Applebaum)1927년 말쯤에 오직 300,000의 소비에트 시민이 감옥에 갇혔고 정치범은 1925년까지 특별한 특권 지위를 받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오직 1930년대에 그들의 지위는 일반 범죄의 지위보다 낮아졌다. 올례그 흘레브니우크가 쓴 1929년에 시작된 굴락에 대한 좀 더 체계적인 연구에서 그는 이렇게 지적했다. “스탈린주의적 처형제도가 1930년대 동안 만들어졌고 강화되었다. 특히 1929년과 1941년 사이에.”

오늘날 초기 소비에트 사회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는 가장 흥미 있는 분야는 소수민족에 대한 연구이다. 테리 마틴(Terry Martin)은 다음과 같은 대담한 논평을 했다.

 

 

소련은 세계에서 첫 적극적인 행동 제국(Affirmative Action Empire)이었다. 러시아의 새로운 혁명 정부는 민족주의의 늘어나는 조류에 직면하고 인종적 소수의 민족적 자각을 체계적으로 조장함으로써 대응했던 옛 유럽의 다인종 국가 가운데 처음이었다.

 

 

불행하게도, 마틴은 비러시아 민족에 대한 초기 소비에트의 지지와 스탈린의 훨씬 더 잔인한 민족정책 사이를 적절히 서술하는데 실패했다.

우리는 네프의 상대적 관용이 제15개년 계획 동안 뒤집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공장에서 노동자는 훨씬 더 오랜 노동 시간을 강요당하면서 실질임금은 반으로 줄었다. 지난날 자신의 노동자를 방어했던 공장 위원회는 경영 생산성 기구로 전환되었고 공개적인 반대파는 무참히 침묵 당했다. 국가 간첩이 노동자를 체포했던 반면에, 스탈린이즘이 노동계급에 맞서 선택한 무기는 소비에트 노동 문제에 대한 지도적인 역사가인 도날드 필처(Donald Filtzer)가 오랫동안 주장했듯이 노동자를 여러 가지 생산성 캠페인에 결합하도록 강제한 무기로서 식량에 대한 전략적 이용이었다. 제프리 로스만(Jeffery Rossman)이 한 이바노보 섬유 공장 노동자에 대한 연구 때문에, 우리는 국가의 공격에 노동계급이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이것이 흔히 있는 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외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최근에 나온 가장 은밀한 GPU 보고서는 가혹한 스탈린주의 노동정책에 대항한 마음을 품었지만 비조직적인 증오가 소련 전역에 울려 퍼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네 비올라(Lynne Viola)의 집단화에 대한 연구는 상황이 농촌에서 훨씬 더 휘발성 있는 것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30년에만, 250만 농민이 집단 농장을 만들려고 보내진 국가 대리인을 겨냥해서 싸웠던 무장 저항의 대규모 소요가 13,754건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문서고에서 나온 사료 증거와 오래 전에 이용했던 자료에서 나온 증거를 검토한다면, 우리는 역사서술의 데이터와 방향 사이에 커다란 불일치를 볼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위계 조직을 위한 반 민주주의적 선언문이 아니라 정치적 자유와 그것을 얻는 실천적 방식을 지지했던 문서였다. 볼셰비키는 권력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소비에트 권력을 지지했던 대규모 대중 봉기에 지도력을 제공했던 것이다. 내전은 볼셰비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1917년의 계급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었고 서방 강대국의 적극적 개입 때문에 격화되었다. 7년에 걸쳐 1차 세계대전과 내전을 겪고 나서 국가가 결딴났지만, 소비에트 시민은 공개적으로 정권을 비판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종교를 믿을 수 있는 권리를 지녔다. 노동자는 공장에 대한 꽤 많은 통제를 계속 지녔다. 7백만 여성은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운동에 참여했다. 정권은 소수 민족에 유리한 정책을 법률로 정했다. 농민층만이 현상태를 그대로 유지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소비에트 사회의 모든 측면에서 강제와 탄압이 관용과 설득을 대체했을 때인 제15개년 계획 동안 달라졌다.

많은 역사가는 이러한 쟁점에 대한 몇몇 세부 내용을 인정했을 지도 모르지만, 이데올로기적인 까닭 때문에 초기 소비에트 사회가 근본적으로 나중에 스탈린이즘과 아주 달랐다는 결론에 완강히 저항하고 있다. 조지타운 대학 학자가 쓴 새로운 러시아의 역사교과서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문화적 만개라는 점에서 네프와 뒤따른 25년 동안 피로 흠뻑 젖은 스탈린이즘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그러나 공개재판, 강제노동수용소, 무고한 인민의 처형 등과 같은 몇몇 공포는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당과 이데올로기를 통한 통치를 특징으로 하는 소비에트 체제의 구조는 스탈린이 완전한 권력을 잡기 전에 잘 세워졌고 그러한 이데올로기는 집단화와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의 완전 현실화를 기대하고 있었다.

 

 

서구 역사가들이 1917년과 스탈린이즘 사이의 돛을 연결시키려고 또다시 노력하고 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혁명 시기를 이데올로기 잣대로 가려 뽑아 상세히 설명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서술에서 우편향은 도전에 맞서는 데 실패했던 좌파의 상대적인 허약함 없이 일어날 수 없었다. 나는 주류 주장에서 우리의 고립이 부분적으로 우리 자신의 결점이었다는 것을 또렷이 말하고 싶다. 러시아혁명을 연구하는 맑스주의 역사가는 너무 작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은 오늘밤 이러한 방에 있다. 나는 우리가 러시아 혁명에 대한 맑스주의 역사가 집단을 조직하고 혁명의 문제 있는 쟁점에 대한 토론을 조장하며 그 분야에서 지배적인 조류에 맞서는 일에 몰두하는 데 초석을 놓아야 한다는 것을 제안하고 싶다. 활동가의 새로운 세대는 어쩔 수 없이 러시아 혁명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에서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이 역사를 반공산주의자에게 넘겨 줄 수 없다. 그러나 다시,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학계가 이룬 업적과 맞먹는 아주 풍부한 전통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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