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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2007년)/2007년 10월호

(그림) 비극적필요크론슈타트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4:30

크론슈타트: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

Abbie Bakan (1990)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EM0001.jpg

사람들은 흔히 1921년 크론슈타트 반란을 언급함으로써 레닌과 스탈린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아비 베이컨(Abbie Bakan)이 설명했듯이, 크론슈타트 반란을 진압한 것은 혁명을 방어하는 데 필요했다.

볼셰비키 전통의 역사에서 크론슈타트 사건과 같이 논쟁을 불러일으킨 몇 가지 쟁점이 있다. 사건 자체의 과정은 불안하게 한다. 그러나 볼셰비키 역사의 이러한 부분이 남긴 교훈은 오늘날 사회주의자들에게 중요하다.

볼셰비키가 1921년에 크론슈타트 요새에서 일어난 봉기를 진압한 것은 트로츠키가 19408월에 묘사했듯이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tragic Necessity)이었다.

볼셰비키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약 600명의 크론슈타트 수병이 사건 속에서 죽었고 약 2,500명이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은 비극이었다. 죽은 자들 가운데 군사적 갈등의 마지막 단계에서 일방적으로 살해당한 몇몇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 숫자는 크론슈타트 반란군의 손에 잡혀 죽음을 당한 젊은 노동자 국가의 충성스런 볼셰비키 방어자들의 사상자 명단보다 못하다. 죽은 자, 부상당한 사람과 실종된 사람의 숫자는 약 10,000명에 이른다. 죽은 사람 가운데 볼셰비키 10차 당대회에 파견된 15명의 대표자도 포함되어 있다.

크론슈타트 반란은 볼셰비키 군 지도부와 국가에 맞선 폭동의 성격을 지닌다. 이것은 국가가 아주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 했던 때에 일어났다.

군사 투쟁은 온실 속에서 하나뿐인 정치였고, 개인의 삶은 역사적 사회변화의 격한 물결에 매인다. 그리고 이것은 왜 크론슈타트가 비극일 뿐만 아니라,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 하는 것을 상징으로 나타내준다.

어쩔 수 없는 일, 그것은 볼셰비키가 언제나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모든 적극적인 혁명가들처럼 많은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크론슈타트 반란을 짓누른 것은 크론슈타트 반란이 성공했다면, 레닌이 말했듯이 그때 이미 뚜렷이 있었던 반혁명이 승리할 수 있는 단계, 사다리, 가교로 쓰일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크론슈타트 반란이 성공했더라면, 동요하고 있고 고립되어 있는 노동자 국가를 대규모로 공격한 외국군대와 군주주의자들, 사회민주주의적 멘셰비키와 결합한 반혁명 세력인 백군이 되살아날 수 있게 길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면 반란은 실제로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 이를 알려면, 우리는 혁명 러시아에서 사건을 터지게 한 배경을 보아야 한다.

1921년에 러시아는 깊은 위기에 빠진 세계체제의 한 부분이었다.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자본가는 자본주의 유럽의 심장과 그 너머로 혁명을 퍼트리려고 위협했던 젊은 노동자 국가를 고립시키고 목 졸라 죽여야 했다.

러시아 볼셰비키는 백군이 이끈 모진 반혁명 작전을 도왔던 약 14개의 침략적인 제국주의 군대에 맞서 성공적으로 혁명을 방어했다. 1921년 봄쯤에 내전이 적어도 중요한 군사적 갈등이라는 뜻에서 끝났다.

백군은 패배했지만, 이것이 영구적인 것인지 또는 일시적인 패배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백군이 그들의 군대를 완전히 무장해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군 장군 브랑겔은 프랑스 정부의 지원과 동맹을 통해 터키에서 전체7~8만 남짓한 부대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러시아는 기아 속에 허덕이며 제3세계 국가와 같았다. 1918년에서 1920년 사이에 러시아 사람 750만 명이 기근과 전염병 때문에 죽었다. 이 숫자에는 전쟁 때문에 죽은 사람이 빠져 있다.

내전의 마지막 단계에서 러시아의 1인당 수입은 1913년의 형편없는 수준의 1/3로 줄어들었다. 공업 생산은 전쟁 이전 수준의 1/5로 줄어들었다. 석탄 생산은 1/10, 철강 생산은 전쟁 이전 평균수준의 1/40에 지나지 않았다. 철도 체계는 거의 무너져버렸다.

고립의 대가는 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기도 했다. 공업의 붕괴와 함께 볼셰비키가 승리하는데 뼈대인 도시는 위기에 빠졌다. 몇몇 도시의 노동계급은 전쟁 때문에 급격히 줄어들었고 실업자가 농촌에 있는 그들의 가족에게 돌아감으로써 도시 주민은 크게 줄었다. 노동생산성은 전쟁 이전의 1/3으로 떨어졌다. 혁명의 핵심인 소비에트 또는 노동자 평의회는 그러한 조건에서 전혀 기능하지 못했다.

농촌 생산자와 노동계급 소비자 모두 빵을 위해 처절한 투쟁에 부딪혔다. 노동자 민주주의는 그들의 생존을 위한 물질적 토대가 마련될 때에만 발전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농민은 도시에 바탕을 둔 볼셰비키와 혁명적 동맹을 통해 토지를 얻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사적 시장에 내다 팔 생산물을 거둬들이려고 싸우고 있다.

볼셰비키는 농촌의 곡물을 강제 징발하는 정책을 핵심으로 하는 전시공산주의로 대응했다. 내전 동안 농민은 붉은 군대와 볼셰비키 당에 결합했다. 그러나 1921년 초쯤 백군에 가담한 250만 농민은 뿔뿔이 흩어졌다.

전시공산주의 정책 내내 무장한 농민 집단은 곡물 징발대에 맞서 싸웠지만 볼셰비키가 그들을 빠르게 진압했다. 이제 농민 봉기의 물결이 러시아 농촌 곳곳을 휩쓸었다. 크론슈타트 봉기가 일어나기 한 달 전인 19212월에만, 118건이 넘는 농민반란이 러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보고가 나왔다.

그러나 대다수 농민층에 대한 양보는 노동계급의 고통을 늘렸고 그들의 신념과 힘을 떨어드렸다. 러시아와 국제사회주의의 앞날이 노동계급의 손아귀에 달려 있었다. 19211월에 볼셰비키는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 형편없는 빵 배급량을 1/3로 줄인다고 알렸다.

볼셰비키도 이러한 축소를 내키지 않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날마다 쏟아지는 눈과 연료 부족은 곡물 기차를 멈추게 했다. 여기에 농민이 정부에 비협력적인 태도도 위기를 늘려놓았다.

이러한 조건에서 심지어 혁명의 주된 버팀줄인 노동계급도 빵을 위해 파업을 했다. 파업은 페트로그라드 전체로 퍼졌고 세계혁명에 이르는 사회주의의 교두보의 생존은 심각한 위협과 맞닥뜨렸다

레닌은 1921년에 뒤떨어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이렇게 기술했다. “공업 노동자가 소수이고 쁘띠 농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은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승리할 수 있다. 첫째, 하나 또는 여러 선진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제때에 러시아를 돕는 것. 둘째, 자신의 독재를 실행하고 있는, 즉 국가 권력을 쥐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대다수 농민 사이의 동맹이다.”

1921년 러시아는 이러한 조건들을 충족하지 못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혁명이 아직 결정적으로 패배하지는 않았다. 백군이 패배함으로써, 힘이 없는 노동자 국가와 영국 사이에 상업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이 추진되고 있고 폴란드와 평화 조약도 협상 중이다. 볼셰비키의 목적은 권력을 지탱하는 것이고 하나 또는 여러 선진국에서 자본주의에 맞선 노동자의 투쟁이 성공할 수 있게 용기를 북돋으려고 싸우는 것이다.

이는 크론슈타트 봉기가 일어날 때 갓 태어난 국가가 맞닥뜨린 상황이었다.

1917년 혁명 동안 크론슈타트 수병은 전체 노동계급 운동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선진적인 요소였다. 트로츠키는 혁명 동안 이들에 의존했었다. 크론슈타트 수병은 주로 반동적인 배경에서 볼셰비즘으로 아주 빠르게 전환했던 농민 신참자로 이루어진 군대의 정치적 중심이었다.

그러나 크론슈타트 수병이 싸우고 이끌었지만, 그들은 죽고 부상당했으며, 그들을 대신해 농촌 지역에서 온 풋내기 병사가 발트 함대를 메웠다. 볼셰비키는 그들을 오히려 수병의 옷을 입은 농민 청년”(peasant lads in sailor suits)라고 애정 없이 불렀다.

러시아의 모든 곳에서, 내전이 끝나가고 있을 때, 붉은 군대의 중심에서 싸웠던 노동계급 전위는 사라졌다.

1921년에 크론슈타트에 주둔한 발트 함대에 있는 수병의 1/4 이상은 최근에 농촌출신에서 충원된 신병들이었다. 이것은 1917년의 상황과 반대였다. 그때 대다수는 러시아에서 노동자 혁명의 중심인 페트로그라드의 공업 중심에서 충원되었다.

19213월 봉기의 지도자인 페트리첸코는 우크라이나 출신 농민이었고 많은 그의 동료 반란자는 볼셰비키에 맞선 농민 반대파 운동에 동조했던 남부 출신의 농민이었다.

19211월에만 약 5,000명의 발트 함대 수병들은 공산당에 저항했다. 크론슈타트 당 조직에서 19208월과 19213월 사이에 4,000명 회원 가운데 반이 넘는 사람이 사임했다. 전시 공산주의는 세계 자본주의와 그 동맹국에 의한 공산주의에 맞선 공격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공산주의의 산물로 생각되었다.  

반유대주의는 부도덕했지만 널리 퍼져 있었다. 크론슈타트 반란자들 사이에서 가장 분노의 대상이 된 사람은 볼셰비키 사이에서 유대인 희생양으로 다루어진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였다. 유대인에 맞선 인종주의는 우크라이나와 서부 변경지방에서 온 농민들 사이에서 공통되었다. 그것에서부터 크론슈타트 반란에 가담한 많은 사람들은 최근에 새로이 충원되었고 반란 지도부, 즉 크론슈타트 혁명위원회를 이룬 많은 사람이 그곳에서 왔다. 위원회 가운데 한 사람인, 베르쉬닌(Vershinin)은 소비에트 분견대에 자신들의 요구를 진술하려고 38일 섬에서 나왔을 때 이렇게 알렸다. “큰 소리로, 우리와 함께 해서 유대인을 무찌르자. 우리 노동자와 농민이 참고 견디어야 하는 것은 저들 유대인의 저주받을 통치뿐이다.”

부도덕한 반 유대주의에 대한 또 다른 증거는 크론슈타트 봉기에 가담한 선원의 회고록에 나와 있다. “첫 유대인 공화국으로 볼셰비키 정권을 언급하는 문장에서, 그는 소비에트 정부의 최후통첩을 유대인 트로츠키의 최후통첩으로 처리할 것을 요청했다.

크론슈타트 수병의 요구는 농민층의 가장 후진적인 부문의 사상을 담고 있었다.

좀 더 커다란 자유를 얻으려는 것이라고 했지만, 중요한 경제적 목표는 농업 생산물에 대한 강제 징발 계획이었고 곡물을 암시장에 내다파는 것을 막으려는 봉쇄 파견대 계획이었다. 볼셰비키는 나중에 신경제정책이라 이름이 붙은 농민층에 대한 양보 계획을 위하여 이미 전시공산주의의 폐지를 논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란자가 내걸은 요구는 더 많았다. 수병들은 군대와 공장, 작업장에서 볼셰비키 권위를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 “지금 소비에트는 노동자와 농민의 의지를 표현해주지 못한다라는 수병들의 공개적인 선언은 반란의 실질적인 성격을 나타낸 것이다.

228일 회의에서 15개 조항의 강령 채택은 페트로그라드에서 빵 배급에 맞서 일어난 파업물결에 의해 자극 받은 것이었다. 파업이 비슷하게 반볼셰비키적이었고 노동자가 수병 반란을 도울 것이라는 전제가 있었다. 사실 공업 투쟁은 끝나가고 있었고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는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한 볼셰비키의 탄압을 뒷받침했다.

다음날, 31일에 크론슈타드 도시에서 수병과 병사들의 대중 집회에서 약 15,000명은 가까운 페트로그라드에서 반란자의 마음을 되돌려보려고 파견된 두 명의 볼셰비키 고위 장교인 칼리닌과 쿠즈민의 진술을 들으려고 나왔다. 협상을 책임지고 있는 지노비예프는 그의 신변이 위협받았기 때문에 크론슈타트로 가지 못했다.

건설적인 토론이나 협상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연설자들이 중단과 방해, 휘파람불기와 야유 없이 끝낼 수 없을 만큼 집회는 타락했다.

강령은 선거에 부쳐졌고 두 명의 볼셰비키 대표와 볼셰비키의 크론슈타트 지부의 지도자인 바실리예프가 그것에 반대했다. 당에 새로이 충원된 농민을 포함한 모든 다른 사람들은 그 강령에 찬성했다.

칼리닌은 섬을 떠났다. 쿠즈민은 크론슈타트 소비에트의 재선거 날로 이미 잡혀 있던 다음날 회의에서 연설하려고 남았다. 300명의 대표자가 출석했다. 회의는 아무런 원칙이 없었다. 회의장 문은 수병 수비대가 지키고 있었고 회의 진행을 이끌 당원의 일반적인 역할도 부정되었다.

쿠즈민과 바실리예프는 회의에서 연설했고 안팎에서 혁명을 위협했던 조건을 또다시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들은 반란을 취소하라고 애원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볼셰비키가 반란을 군사적으로 탄압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야유가 빗발치는 가운데 두 명의 의장과 코르쇼노프(Korshonov)라고 불리는 공산주의 관료는 곧 체포되었고 회의장에서 끌려 나갔다.

선출되지 않은 임시 혁명위원회는 점령된 도시를 관리하는 책임을 졌다. 모든 군사적 이동은 취소되었고, 통행금지가 강요되었고 섬에서 모든 사람들의 출입은 특별한 허가 없이 금지되었다. 그것은 볼셰비키 국가에 대한 전쟁 선포였다.  

이것이 농민 반란의 가장 크거나 가장 심각한 것이 아니었지만, 페트로그라드에 가까이 있는 핀란드 만의 크론슈타트가 지닌 전략적 위치와 그 시기는 크론슈타트 반란을 백군을 다시 모을 수 있는 은밀한 교두보로 만들 수 있다.

크론슈타트 사건과 연계되었던 국제적인 음모에 대한 레닌의 의심은 콜럼비아 대학 러시아 문서보관소에 있는 1921년자로 고급 비밀이 찍혀 있는 손으로 쓴 각서가 발견됨으로써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문서에는 재원, 개인, 무기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크론슈타트 반란의 계획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또한 크론슈타트 수병이 일으킨 3월 반란을 백군과 프랑스 정부가 돕는 계획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그 문서의 제목은 크론슈타트에서 봉기를 조직하는 문제에 관한 각서”(Memorandum on the Question of Organising an Uprising in Kronstadt)이다.

각서는 1918년에 만들어진 볼셰비키에 맞선 투쟁을 위해 러시아에서 형성된 지하조직으로 스스로를 정의했던 민족 중앙파(the National Centre)라 불린 조직이 쓴 문서집 일부를 담고 있다. 군사적 패배로 고통 받고 핵심 조직원이 체포되고 나서, 그 그룹은 1920년대 말 경에 망명지에서 다시 조직을 세웠다. 브란겔 장군은 그들을 돕는 주요 군사적 토대였다. 핀란드에 있는 National Centre의 대변인이 19212월과 2월 초 사이에 이 각서를 썼다.

반란자가 백군에 끈이 닿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반란 수병이 외부, 특히 브랑겔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 군대의 동정과 지지를 믿지 않았다면 수병들 사이에서 사기는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게다가, 봉기는 크론슈타트를 장악하고 볼셰비즘에 결코 회복될 수 없는 가장 무거운 타격을 가하는 데 참 좋은 기회, 아마도 패배 당하지 않을 기회로 생각되었다.

물론 볼셰비키는 이 각서에 대해 알지 못했다. 레닌과 볼셰비키 지도부가 아주 정확히 계급 세력의 균형을 평가할 수 있고 위험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했다는 것은 핵심이다. 볼셰비키뿐만 아니라 백군과 세계지배계급도 크론슈타트를 반혁명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으로 여겼다.

탄압의 시기에 관해서는 두 가지 헤아려볼 점이 있다. 핀란드 만은 11월 말에서 3월 말 또는 4월 초까지 얼어붙는다.

크론슈타트 반란이 일어난 지 2주 뒤 얼음은 녹기 시작했다. 얼음이 녹을 때 수병들이 배를 통제한다면, 반란자는 볼셰비키 정부를 뒤엎을 수 있는 전략적, 군사적 토대를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얼음이 녹을 때까지 버티는 것은 각서에서 결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 시기 뒤 반혁명은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반란은 군사적으로 진압되었다. 첫 번째 공격은 볼셰비키의 실패로 끝났지만, 310일에 공격은 성공리에 끝났다. 8,000명의 크론슈타트 반란자는 핀란드로 달아났다. 핀란드에서 페트리첸코를 포함한 몇몇은 드러내놓고 백군과의 제휴를 인정했다.

사건은 비극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비록 크론슈타트 반란이 성공했다면 비극은 훨씬 더 컸을 것이고 이미 약해진 볼셰비키 국가는 궤멸되었을지도 모른다.

 

 

옮긴이: 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