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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미래의전투에서10월혁명의타당성[번역] 본문

실천지 (2007년)/2007년 10월호

(그림) 미래의전투에서10월혁명의타당성[번역]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4:28

10월 혁명과 앞날의 전투

 

199710, 노동자투쟁

 

 

노동자의 투쟁 속에서 늘 나오는 온통 세상을 바꾸자는 슬로건이 어느 때보다 힘없이 느껴지는 때입니다. 적어도 방어투쟁에서 자본주의체제와 맞닥뜨리면서 노동자가 어렴풋이 갖게 되는 체제변혁의 필요성을 담아낸 구호이지만, 실제로는 그 열망조차 제대로 담아내고 있지 못합니다. 그것은 계급정치의 부재를 뜻할 것입니다. 역사적 패배를 이론의 오류로 그대로 등치시키면서 지난 혁명에서 교훈을 이끌어 내지 못하고 모두다 내다버리거나 희화화하는 모습에서도 그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은 러시아혁명이 지금도 가지는 뜻을 담은 글입니다. 이 글에서 두둔하고 있는 혁명의 정치와 핵심적인 요소는 그것을 추구하는 오늘의 우리가 이어받아 노동자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끄집어 내야할 핵심적 교훈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좋은 글입니다.

 

 

세계를 뒤흔든 2

 

19172월은 제국주의세력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들의 주요 군사거점 가운데 하나였던 페트로그라드는 바로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갑자기 불구가 되었다. 혁명은 전쟁에 휩쓸린 모든 곳에서 어려움을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유럽에서 가장 억압적인 절대 권력이 누더기를 걸친 군중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

그것은 반란의 도화선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빵이 턱없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1차 세계대전 때문에 1917년의 차르 러시아는 악화일로에 있는 심각한 위기로 빠져들었다. 노쇠한 봉건체제는 후방에 있는 인민은 물론이고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자신의 군대조차 먹일 수가 없었다. 정부는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정부는 밀정과 첩보망, 공무원들, 수많은 경찰들, 엘리트 군대, 넘쳐나는 감옥에 의존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17223일에 마침내 차르 체제는 무너졌다. 223일은 사회주의조직들이 국제 여성의 날을 기념하려고 정한 날이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빵을 배급받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던 배고픈 군중이 여성시위대에 합류했다. 곧바로 시위는 분노한 식량폭동으로 바뀌었다. 파업을 하고 있던 공장의 노동자가 불어나고 있던 도로의 군중과 합류했다. 소요가 커지자 경찰이 군중을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군중의 행진을 막아 세우기는커녕 오히려 결의를 더욱 드높이게 할뿐이었다. 이제 경찰에 맞선 전면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모든 공장에서 쏟아져 나온 노동자는 손에 들 수 있는 것은 무엇으로든 무장을 하고 경찰을 무장 해제시키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더 많은 무기를 구하려고 병영으로 달려갔다. 전선으로 가려고 대기하고 있던 병영의 군인도 반란에 합류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예전의 혁명가와 함께 재빨리 주도권을 잡은 노동자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차르 경찰을 도우려고 출동하라는 장교들의 필사적인 명령을 거부했다. 장교들에게 항명한 첫 연대가 나타나면서, 병사들은 파업노동자가 공장들을 순회하듯이 동지를 불러내려고 이 병영에서 저 병영으로 뛰어다녔다.

운동은 차르 세력을 5일 만에 무릎 꿇게 할 만큼 강력하고도 전면적인 것이었다. 227일이 되어 반란자들은 스스로도 놀라면서 혁명을 완수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혁명을 내다보지 못했으며, 물론 계획하거나 준비하지도 않았다. 혁명은 들불처럼 갑자기 터져 나와 곳곳으로 퍼졌다. 모스크바와 다른 중심지들에서 노동자와 병사는 페트로그라드의 선례를 뒤쫓았다. 정권은 무너지고 말았다.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반란자들은 곧 스스로를 조직했다. 1905년 혁명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거의 12년 전에 그들은 투쟁과 활동에서 협력하려고 러시아에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라고 부르는 혁명의회인, 노동자와 병사 위원회를 세웠다.

아직 도망가지 못한 차르의 장관들을 구속시켰고 모든 주요 통신시설을 점령했다. 감옥과 요새의 죄수들은 풀려났고,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곧바로 합류하여 정치활동을 지도한다. 혁명은 국영은행, 조폐소, 국영인쇄소를 접수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또한 혁명은 모든 식량분배기구와 운송기관을 접수했다. 3월까지 혁명은 군사위원회가 군대 내의 모든 계급을 폐지하고, 모든 부대에서 소비에트선거가 실시되도록 책임질 것이라고 선포했다. 이러한 조치들의 직접적인 목표는 봉기 때 내걸은 요구인 평화, , 토지를 필요한 이들에게 주는 것이었다.

물론 노동자가 주도권을 잡았다고 해서 자본가가 멍청하게 서있지만은 않았다. 자본가는 봉기를 통해 얻어낸 것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소비에트의 해산을 명령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혁명을 자신들이 통제하려고 애썼다. 신뢰를 잃은 차르체제의 거수기 의회인 두마는 부르주아민주주의자들과 입헌군주주의자들이연합해서 임시정부를 스스로 구성했다. 더 나아가 새로운 정부는 권력을 행사하고자했다.

병사는 병영으로, 노동자는 공장으로, 여성은 부엌으로 돌아가라는 그들의 요청은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은 소비에트의 지도부로 선출된 정치 활동가에게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결국 이들 활동가는 혁명이 차르 전복과 부르주아민주주의공화국 수립을 거의 마무리 지었고 이제 새로운 정부를 뒷받침하려고 내달리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에는 반란자들 사이에 퍼져있던 환상도 적지 않게 담겨 있었다. 어쨌든 병사와 노동자는 곧 이른바 민주주의자들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

 

 

젊고 활력 있는 노동자계급

 

만일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가진 특별한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1917년 전야에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다른 어떤 제국주의 강국의 노동자계급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적었다. 또한 그들은 이제 갓 노동자계급이 된 새내기였다. 사실상 러시아의 공업화는 19세기 말에야 시작되었고, 1905년이 지나고 나서야 해외투자가 러시아로 흘러들면서 활기를 띄게 되었다. 대규모 기계, 화학, 원유, 제철공업은 거의 모두 외국인 소유였다. 그러나 대부분 새로 세워진 공장들은 발전된 자본주의국가들에서와 똑같은 최신식 과학기술을 도입했다. 그것들은 또한 모두 매우 큰 공장들로서 두 개의 주요 산업도시인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 살고 있는 모두 2백만에 달하는 노동자를 커다란 규모로 집중시켰다. 키예프, 바쿠, 니즈니 노브고로드와 같은 다른 산업중심지에서도 조금 작은 규모로 비슷한 집중이 이루어졌다.

 

물론 페트로그라드에 있는 커다란 현대식 공장의 공업노동자와 17세기 영국의 것과 비슷한 방식들을 사용하면서 여전히 토지를 바란 농촌의 노동자-농민들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었다. 그러나 인클로저가 영국소작농을 도시자본가의 자비를 찾는 임금노예로 전락시킨 것 이상으로, 러시아의 가난한 소작농은 살길을 찾아 도시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에서 임시직 일자리를 찾은 이들 가난한 소작농은 도시노동자계급과 농촌지역을 연결하는 고리가 되었다.

농촌의 유산에서 비롯된 문화적 결핍과 상대적 후진성이 있었지만, 이들은 젊고 활기 넘치는 노동자계급이었다. 차르 전제체제에서 겪은 경험 때문에, 틀림없이 이들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일종의 합법주의의 환상에 의해 마비되지는 않았다. 또한 이들은 이미 부자나라들의 노동자계급을 약화시킨 어떤 종류의 사기를 꺾는 배신도 경험하지 않았다. 정치적 권리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착취에 맞서서 싸우는 러시아노동자계급은 많은 측면에서 첫 차티스트물결시기의 영국노동자계급에 걸맞을 것이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자당의 활동가들은 러시아 노동자계급대중 사이에 맑스주의 사상을 들여왔다. 그리고 이미 이들은 정치투쟁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자계급과 마주한 주요 세력은 차르 정권과 귀족계급 말고도 자본가계급이었다. 모든 가난한 나라들에서처럼, 이들 자본가계급은 사회경제적으로 허약했다. 이들의 주된 활동은 해외투자가를 위한 중개인으로서 행동하는 것이었다. 또한 러시아경제는 너무도 가난해서 부르주아민주주의체제가 밑바탕을 삼을 수 있는 광대한 농촌의 쁘띠 부르주아지를 떠받칠 수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자본가가 차리즘을 떠나서 민주주의의 길을 제시하는 일은 결코 있을 법하지 않았다.

이미 1905년 혁명은 러시아자본가의 무능력을 가장 뚜렷이 들춰냈다. 노동자가 개혁과 좀 더 나은 조건을 요구하며 수도와 모스크바의 거리를 점령했을 때, 자본가는 때 흐름에 얹혀 탔다. 심지어 처음에 사장들은 노동자가 시위에 참여할 수 있도록 공장을 휴업하면서 파업을 다그치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자는 자본가가 바랐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나아갔다. 노동자는 무기를 들었고 노동자권력의 싹으로서 첫 소비에트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특히 8시간 노동제와 같은 노동조건에 대한 고유의 요구를 제안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자본가가 지닌 자유주의 관점에서는 너무 지나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협하고 있는 붉은 군중에 맞서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차르가 제시한 제한적인 타협을 받아들이려고 기를 쓰고 나섰다. 그러한 쩨쩨한 태도는 틀림없이 러시아 자본가들의 전형이었다.

반대로, 1905년 혁명이 패배했지만 노동자계급은 보기 드문 풍부한 경험과 전혀 새로운 정치적 전통을 얻어 냈다. 노동자는 소비에트 기구를 통해서 스스로를 하나의 계급으로 조직하는 것을 배웠다. 그들은 이러한 유형의 독립적인 조직이 자유주의 자본가와 같은 일시적인 동맹자의 배신에 맞서는 오직 하나의 보호수단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들은 또한 경제적 요구를 위한 투쟁은 정치적 목표를 설정하지 않고서는 전진하지 못하고 가로막히곤 한다는 점을 배웠다. 또한 노동자는 계급고유의 무기를 이용하여 차르 국가를 실제로 떠맡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인쇄노동자의 대표자는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서 얻은 이러한 교훈을 간추렸다.

 

 

우리는 수세적인 투쟁과 단순한 작업 중단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노동자계급을 파업군대에서 혁명군대로 전환시키기로, 다시 말해 무장노동자의 부대를 곧 조직하기로 결정한다. 필요하다면 가능한 곳의 무기고를 습격하고 경찰과 군대의 무기를 징발하여 이들 부대가 나머지 노동대중을 무장시키도록 하자.

 

 

마지막으로,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1905년에서 또 다른 사활적인 교훈을 배웠다. 그들은 군대의 많은 부위를 같은 편으로 얻어내지 않고서는, 결국 대부분의 병사가 농촌출신이기 때문에 소작농을 얻어내지 않고서는 유산계급의 정부와 직접적으로 맞서는 데서 이길 수 없음을 배웠다. 이것은 코사크들이 혁명을 부수려고 쳐들어왔을 때, 노동자가 목숨을 바치는 매우 커다란 대가를 치루며 얻은 경험이었다.

1905년에 노동자계급이 쌓은 정치적 경험은 볼셰비키 강령에 꼭 필요한 부분이 되었다. 이 경험은 19172월과 10월 사이의 끔찍한 9개월 동안 결정적인 중요성을 밝혔다.

 

 

볼셰비키 정당 - 결정적인 도구

 

 

 

 

1917년 혁명에서 노동자계급에게 또 다른 결정적인 요소는 볼셰비키정당의 존재였다. 그들은 누구인가?

볼셰비키는 러시아사회민주당의 한 분파로 1903년에 나타났다. 당의 사회적 본성에 대한 문제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 분열이 생겼다. 볼셰비키는 멘셰비키로 알려진 그들의 반대파에 맞서 비 노동계급 세력과 한때 동맹을 맺어야 하는 특정한 조건에서조차도 노동자의 계급적 이해만을 대변하는 정당을 주장했다. 그 때문에 볼셰비키는 특히 차르 정권이 강요한 속박에 분노한 젊은 부르주아지식인이 당에 가입하려고 했을 때, 당원규정이 튼실하고 바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다쟁이들은 빼어버려야 했다. 노동자계급에게 미더운 책임감을 가진 이들만이 당에 들어가야 했다.

겉보기에 이러한 차이는 그저 조직상의 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두 분파의 차이는 곧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태도와 같은 정치에도 담겨 있었다. 레닌은 노동자계급이 폭넓은 소작농 대중을 이끌면서 차르에 맞선 투쟁에서 지도적 역할을 차지해야만 한다고 거듭 강조한 반면, 멘셰비키는 먼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동맹을 해야 한다고 여겼다.

어쨌든 1차 세계대전이 터질 때까지 두 분파는 서로 반대진영에 있었다. 멘셰비키 다수파와 사회혁명당과 같은 다른 사회주의 그룹은 전쟁에서 차르 정권과 한편이 되었던 반면, 볼셰비키는 차르 정권에 반대했다. 볼셰비키는 그저 한 제국주의의 전리품을 희생시켜 다른 제국주의의 전리품을 늘리려고 계획된 전쟁에서 자신의 착취자를 뒷받침하는 것에서 노동자는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와 달리 노동자계급정치정당의 목표는 제국주의 지배계급의 권력을 뒤엎으려고 제국주의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어야만 했다.

191411월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차르 의회의 볼셰비키 대표는 전쟁을 드러내놓고 반대했기 때문에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탄압이 더욱 늘어났지만, 여전히 볼셰비키 조직은 공업거점에서 지하에 전쟁반대파를 조직할 수 있었다. 반대로 멘셰비키 다수파와 사회혁명당은 전쟁 물자를 위한 생산의 조직을 돕기 위해 전시산업위원회에 뛰어들었다. 전쟁초기에는 이것이 인기를 얻을 수 있었지만, 1916년에 가서 전선에서는 군대가 반항하고 후방에서는 노동자가 파업을 벌이는 상황에서는 완전히 반대였다. 그리고 전쟁에 대한 반대 입장 때문에 볼셰비키가 초기에 겪었던 상대적 고립은 1917년에 가서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애국주의에 대한 굴복을 확고하게 거부하면서 그들은 가장 계급의식적인 노동자 사이에서 많은 신뢰를 획득했다.

 

 

가혹한 시기 - 10월 혁명을 위한 준비기

 

2월 혁명이 일어났을 때, 볼셰비키는 분명하게도 그것을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그것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이 직면한 문제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2월 이후 초기단계의 국가권력이 사실상 두 개가 존재했다. 한편에는 낡은 국가기구의 개혁적 형태로서, 권위를 회복하고 유산계급들의 질서를 강요하고자하는 임시정부가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전혀 새로운 질서를 대변하는 봉기한 가난한 대중들의 성장하고 있는 소비에트 조직이 있었다.

페트로그라드소비에트는 더는 하나뿐인 소비에트가 아니었다. 많은 작은 도시들과 교외지역에서, 그리고 농촌지역에서도 소비에트가 솟구쳐 올랐다. 이들 소비에트는 공장들과 병영들에서, 지구들과 부락들에서 총회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들로 이루어졌다. 민중이 정규적으로 집회를 갖는 동안, 이들 대표자들은 자신들이 대변하는 사람들의 바람을 실행하지 않았을 때 즉시 소환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실제로 소비에트는 살아있는 대중의 표현이었고, 그들이 사건들을 이해한 정도를 반영했다.

곧 소비에트는 구역, 지구, 지방 수준에서 연합했다. 이것은 마땅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볼셰비키가 주도권을 가졌다. 소비에트가 순수하게 지역적 조직으로 남은 채, 결국 아무런 실제적인 권력도 가지지 않기를 바랐던 자들의 책략을 제압하기 위한 대표권을 획득하는데서 볼셰비키는 사실상 아무런 실제적 어려움도 겪지 않았다. 그 결과, 혁명러시아는 반란대중을 조율하고 차르행정부의 붕괴로부터 남겨진 가장 절박한 실제적 문제들을 고유의 방식으로 처리하는, 모두가 똑같은 계급노선에 따라 행동하는 혁명적 조직들의 분권화된 연결망으로 뒤덮였다. 그러한 점에서 소비에트는 이미 노동자국가권력의 초기형태로서 작동했다.

유산계급의 힘과 노동자계급의 힘이 거의 비슷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것은 이들 두개의 국가권력이 공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떤 시점에서 세력균형은 변화할 것이고, 두 권력 가운데 하나는 상대에 맞서는 행동을 시작할 것이었다. 볼셰비키에게 운동의 과제는 소비에트가 먼저 행동에 나서도록 하는 것이었다.

결국 문제는 평범한 노동자 내에서 정치의식의 문제였다. 후반기에 합류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을 포함하여 임시정부의 정치인들은 그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았고, 그들의 목표는 부르주아국가기구를 건설하고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 소비에트대표자들은 그들의 단기적 요구가 노동하는 이들을 위한 평화, , 토지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대다수는 소비에트가 자신의 수단들을 동원해 권력을 장악하고 나라를 운영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러한 단기적 요구들을 강제하는 능력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그들은 이러한 과제들을 위해 임시정부의 전문정치인들에게 의지했다. 이것은 2월 이후의 시기에 실제로 소비에트에서 선출된 지도자들이 대부분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이었다는 사실로 나타났다. 이들은 소비에트가 임시정부의 권위에 복종할 것을 공개적으로 주장해왔다.

볼셰비키가 목표로 삼았던 노동자의 정치의식성장은 실제로는 말처럼 쉽지 않았다. 선전의 확대만으로 그것을 이루어낼 수는 없었다. 노동자계급은 자본가들과 개량주의세력들의 과오와 배신을 경험해야만 했고, 자신의 힘을 시험해야만 했다. 그런 뒤에야 노동자계급은 권력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움켜쥘 필요성을 이해하고, 그렇게 하는 것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볼셰비키가 해야만 하는 일은 모든 단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노동자계급이 가능한 명백하게 이해하도록 책임지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또한 노동자계급이 소비에트를 통한 독립적인 개입으로까지 나아가도록 모든 가능한 기회들을 활용해야만 했다. 그것이 이제까지 노동자가 획득한 지위를 방어하고 강화하기 위해서건, 혁명의 요구들을 밀어붙이기 위해서건, 또는 노동자계급을 뒤따르는 모든 착취 받는 계급들의 진영을 강화시키기 위해서건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것을 위한 시간은 제한되어 있었다. 몇 주가 지나자, 반혁명세력은 스스로를 재조직하고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노동자와 맞서기 위해 준비했다.

5월에는 사회혁명당과 가까운 변호사인 케렌스키가 이끄는 새로운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소비에트가 추천한 6명의 장관들이 거기에 포함되었고, 이것은 소비에트 내 노동자계급의 무장해제에 영향을 끼쳤다. 케렌스키는 무장한 노동자를 두려워했고, 혁명을 지지하는 페트로그라드수비대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을 회복하고 소비에트 민병대와 적위대를 무장 해제시키고자 시도했다.

케렌스키체제 하에서 자본가의 반격은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정부가 시도한 혁명의 무장해제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이해한 가장 정치화된 노동자와 병사만이 케렌스키의 정책을 꿰뚫어 보았다. 그렇게 해서 두 달 내에 케렌스키는 혁명의 가장 급진적인 인자들을 도발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7월에 핀란드로 탈출한 레닌을 제외한 모든 볼셰비키지도자들이 감옥에 갇혔고 당의 신문은 불법화되었다.

 

 

권력 장악

 

어쨌든 반혁명의 공격이 다음 국면으로 접어들었던 9월 말에 전환점이 찾아왔다. 케렌스키의 비밀스런 협력을 얻어 코르닐로프라는 차르 장군이 군사쿠데타 음모를 꾀했다. 코르닐로프의 코사크 기병대들이 페트로그라드로 진군을 시작했을 때, 그제 서야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코르닐로프의 첫 번째 목표가 볼셰비키이고 그 다음은 자신들일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몇 시간 내에 트로츠키는 적위대의 재무장과 결집에 협력하기 위해 감방에서 풀려났다. 곧바로 러시아서부는 총파업으로 마비되었고, 페트로그라드 노동자와 병사들은 코르닐로프의 쿠데타시도에 맞서기 위해 모두가 모였다.

이것은 코르닐로프반란의 종말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케렌스키에 대한 환상의 종말이었다. 이제 볼셰비키는 주요도시들의 소비에트에서 다수파가 되었다. 임시정부는 여전히 명목적인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대중들과 군대 내에서 모든 권위를 잃었다. 세력균형은 바뀌었다.

임시정부를 물리적으로 일소하고 소비에트로 조직된 노동자계급에게 권력을 넘김으로서 소비에트 권력을 공식화할 시간이 볼셰비키에게 찾아왔다. 다시는 올 수 없는 그처럼 유리한 상황에서 재빠르게 행동해야만 했다. 1016일에 볼셰비키가 이끄는 소비에트는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했고 봉기를 준비했다.

이것은 역사상 결코 나타난 일이 없었던 가장 민주적인 쿠데타였다. 봉기를 반대하는 주장들이 공개적으로 토론되었다. 봉기의 목적과 방식에 대해서도 토론되었다. 노동자계급이 모든 주어진 단계를 넘어서는 것은 사활적으로 중요한 문제였다. 마찬가지로 볼셰비키는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노동자의 반응을 거의 시간마다 평가해야만 했다. 봉기를 위한 날짜와 시간만이 오로지 비밀로 남았다. 어쨌든 케렌스키가 봉기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세력관계의 상황이었고, 결국 그는 달아났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1022일에 대규모 대중 집회를 조직했다. 트로츠키의 연설이 있었다. 그것은 봉기를 지지하는 민회였다. 25일에는 크론슈타트함대가 필요한 지원을 위해 네바 강을 항해하여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했다. 이날 적위대는 임시정부의 본부인 동궁을 포위 공격했다. 소수가 저항했다. 이미 대부분의 주요 통신시설, 행정부, 국방부가 혁명가들에게 점령된 상황이었다.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렸던 그날 저녁에 동궁의 함락이 발표되었다. 노동자혁명이 승리했다. 수도에서의 봉기는 거의 피를 흘리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에 평화, 농민들을 위한 토지, 노동자의 생산통제에 관한 대대적인 포고령들이 투표로 통과되었다. 마지막에 레닌은 단상에 올라 연설을 다음과 같이 끝맺었다. “우리는 사회주의질서를 계속해서 건설해나갈 것이다.” 이 연설을 통해 그는 이제 전혀 다른 이해를 대변하는 새로운 국가가 수립되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이것은 노동자계급독재의 시작이었다.

 

 

세계 첫 노동자국가

 

혁명은 러시아 서부의 작은 지역에서만 안전했다. 곧바로 국내외의 반혁명이 혁명을 위협했다. 가장 먼저 풀어야 할 과제는 러시아의 다른 지역들과 특히 농촌지역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혁명적 대중의 요구인 평화, , 자유에 대한 응답이 시급했다.

소비에트총회가 선출한 새로운 정부인, 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인민위원회의 첫 번째 조치들은 주로 정치적인 것들이었다. 새로 등장한 국가는 그것들을 실행할 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볼셰비키는 새로운 권력이 방어하고자 했던 사회적 이해를 확실하게 강제하기 위해 이러한 방식의 조치들을 계획했다. 그들은 새로운 정부가 공격을 받았을 때, 농촌대중이 자신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이 정부를 방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듦으로서 소농들을 노동자정부의 편으로 이끄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또한 이러한 조치들은 가난한 계급을 새로운 권력 주위로 결집시키는 것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계획되었다. 무엇보다도 노동자정부는 이러한 결집에서 태어난 의식성과 활동에 의지했기 때문이다.

전러시아 소비에트 의회로 체현된 새로운 혁명 권력은 다음과 같은 평화에 관한 첫 포고령을 통과시켰다. “1024~25일의 혁명으로 수립되었고 소비에트에 기초한 노동자와 농민의 정부는 즉각적이고 민주적인 강화조약을 위한 공개적인 협상에 모든 교전국들과 그들의 정부를 지체하지 않고 초대한다.……

그 다음 포고령은 토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에 따르면 경지에 대한 지주들의 소유권은 보상 없이 즉시 폐지된다.” 농민들 자신들은 광대한 토지재산이 농민소비에트로 이전되는 동안 그들이 일해 왔던 땅을 지키고자했다.

레닌은 자신의 정당강령이 제안하고 있는 토지를 국유화하는 대신에 사회혁명당의 강령을 실행하는 것에 대한 비판에 응답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민주정부로서 인민대중의 염원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 누가 옳은지를 삶이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정부를 발전시키는데서, 인민대중의 창조적 활동을 위해 삶의 요구들을 따르고 완전한 자유를 허락해야만 한다. 지난 정부는 요지부동의 차르 관료들인 과거 세력과 협정을 통해 토지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관료체제는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단순히 소농들을 공격했다... 그러자 소농들은 토지문제를 스스로 풀고자 했다. 그들이 계획을 실행하도록 그대로 두자! 소농들의 행동이 우리 강령의 정신에 부합하는가 아니면 사회혁명당 강령의 정신에 부합하는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지주들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 자신의 생활을 꾸려나가는데 착수할 수 있는 확실한 보장책을 갖는 것이다.”

 

 

사실 레닌은 봉기 몇 주 전에 이러한 추론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노동자정부가 오래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 응답하면서, 그는 팸플릿에 이렇게 썼다.

 

 

노동자정부가 부자들에게 굽실거리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돕는다는 것, 혁명적 조치들을 주저하지 않고 채택한다는 것, 기생충들의 잉여자본과 예비 자본을 몰수하여 배고픈 이들에게 나누어준다는 것, 집 없는 이들이 부자들의 집들에서 묵을 수 있도록 강력한 조치를 취한다는 것, 모든 가난한 가족들의 아이들이 충분한 우유를 공급받을 때까지 한 방울도 분배받지 못하는 부자들에게 우유 값을 지불하도록 강제한다는 것, 토지를 노동인민들을 위해 이전시키고 공장과 은행을 노동자의 통제 하에 두며, 자신들의 재산을 감추는 백만장자들은 즉각 엄격한 처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모든 가난한 이들, 즉 일꾼들, 고용 노동자, 요리사들, 몰락한 농민들이 신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게 될 때, 수십억 민중을 속여 온 자본가들, 지주세력들, 세계금융자본세력들은 혁명을 분쇄할 수 없을 것이며, 반대로 사회주의혁명이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무르익게 하는데서 성공할 것이다.”

 

 

 

혁명 확산의 필요성

 

볼셰비키는 러시아 노동자혁명이 승리한 뒤 터져 나온 문제들에 대해서 참으로 완전하게 이해했다. 맑스주의자가 아니라면, 곧바로 뒤이어 한 개 이상의 발전된 자본주의국가에서 혁명이 터져 나오지 않는 한, 가난한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러시아와 같은 나라에서 혁명이 매우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레닌은 10월 혁명 이전에 그것을 다루었다. “전쟁 때문에 한동안 억눌렸지만 괴멸되지 않은, 오히려 전쟁이 그 수를 배가시키고 있는, 더 많이 성장했고 더 많이 조직된, 우리의 뒤를 따르고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전 세계 노동자를 위해 혁명자체를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권력을 노동자에게 넘긴다면, 혁명은 결코 정복되지 않을 것이다.”

몇 십 년 사이에 전체 노동자운동은 다가오는 혁명이 세계혁명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뒤 스탈린이 일국사회주의슬로건 하에서 볼셰비즘의 희화화는 10월 혁명이 내세웠던 모든 것들을 부정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레닌은 그처럼 의도적으로 왜곡된 동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그는 만일 러시아혁명이 고립된 채 남는다면 또 다른 발전된 국가에서 혁명이 러시아를 구하려고 터져 나올 때까지 노동자정부는 일시적으로 현상유지책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볼셰비키는 다른 곳에서 혁명이 승리할 수 있다면, 특히 독일에서 혁명을 승리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러시아 혁명을 희생시킬 준비까지도 되어있었다. 소비에트러시아와 독일장군들 사이에 평화협상이 있었던 191712월과 19183월 사이에 레닌은 이렇게 선언했다.

 

 

만일 우리가 협상이 결렬되자마자 독일혁명운동이 터져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면, 독일혁명이 우리의 혁명보다 훨씬 더 중요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자신을 희생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우리는 전면적인 사회주의혁명이 터져 나올 때까지 버텨야만 한다.……

 

 

전면적인 사회주의혁명은 공상적인 꿈이 아니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러시아혁명의 충격파는 먼저 스칸디나비아반도와 중부유럽의 나라들에 충격을 가했다. 혁명의 물결은 19181월에 가장 먼저 핀란드를 덮쳤다. 그리고 191811월에는 유럽의 오랜 수도들인 비엔나와 부다페스트, 베를린으로 한꺼번에 퍼져 나갔다. 노동자와 병사 위원회가 나타났다. 이 시기에 그들 대부분이 사회민주주의운동 출신이었던 수천 명의 투사들은 전쟁의 종말이 사회주의의 도래를 예견하는 것이라는 희망에 차 있었다.

다른 지역들에서는 충격파가 실제혁명의 형태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총파업이나 미국을 강타한 대중파업물결과 같은 거대한 파업들을 불러왔다. 투쟁에 참가한 대중은 이따금 러시아혁명에 대해 명료하게 언급했다.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던 곳인 아일랜드의 리머릭과 미국의 시애틀 같은 곳에서 소비에트가 선포되었다.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공산당이 들어섰고, 스페인의 무정부적조합주의자들인 CNT와 같은 지난날 맑스주의를 반대한 사람들조차 새로운 제3인터내셔널에 가입할 만큼 혁명의 호소력은 너무도 강력했다.

 

 

국제적 반혁명

 

반혁명의 첫 번째 타격은 핀란드에서 19185월에 핀란드, 스웨덴, 독일의 정예군 동맹이 혁명을 피의 강에 빠트려 죽인 것이었다. 독일은 바로 뒤이어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와 군 참모진이 연합하여 피의 억압을 조직하면서 19191월에 혁명의 지도자들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죽임으로서 혁명을 참수시켰다. 비엔나와 헝가리에서도 비슷한 패배를 경험했다.

노동자계급은 러시아 말고는 그 어느 곳에서도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노동자운동과 전체사회가 지불해야 했던 대가는 너무 컸다. 중부유럽에서 그것은 공통적으로 헝가리의 호르티와 폴란드의 필수드스키와 같은 군사독재의 형태를 취했다.

심지어 오랜 민주주의국가들에서도 자본가들은 그들이 느꼈던 죽음의 공포에 대해 복수했다. 미국에서는 아나키스트인 사코와 반제티에 대한 사형선고와 집행에서 최절정에 달했던 팔머레이즈라고 알려진 노동계급활동가들에 대한 보기 드문 억압의 물결로 나타났다. 모든 종류의 자유와 심지어 모든 진보사상을 탄압하는 반공주의가 널리 퍼졌다.

사회전체는 반동의 물결을 경험하면서, 노동자계급과 사회전체의 운명이 모두 함께 부정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 노동자계급이 패배하면서 전체 서구사회는 퇴보했다. 혁명이 국제적인 것이었던 만큼이나, 반혁명도 그러했다. 그것은 야만성의 정도를 달리하면서 유럽의 모든 곳에서 승리했다. 그것은 또한 소비에트 러시아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보기 드물게 많은 피를 흘린 4년 동안의 전쟁이 끝나고 나서, 이전에는 서로 싸웠던 제국주의 강국들이 소비에트러시아를 짓밟으려고 힘을 합쳤다. 이제 그들은 주로 차르의 잔존세력들을 도우면서 직접 끼어들었다. 19184월에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했고, 터키는 그루지아 지방의 바툼을 점령했다. 독일군은 지방 멘셰비키정부의 승인 하에 5월에 돈, 크리미아, 우크라이나 지역을 점령했고, 그루지아로 이동했다. 19187월에 영국과 프랑스 군대는 무르만스크에 상륙하였고, 8월에 아르한겔스크를 점령했다. 같은 달 영국, 독일, 터키의 군대들이 바쿠의 유전지대를 향해 진격하고 있는 동안 미군은 시베리아에 상륙했다.

러시아인민은 극도의 피로상태에 빠져있었고, 전쟁으로 농촌이 심각하게 황폐화되면서 거의 굶주리고 있었다. 그러나 혁명은 제국주의 적들에 대한 재공격을 위해 여전히 힘을 끌어 모았다. 트로츠키의 지휘 하에 미성숙했고 분열되어 있던 소비에트의 적위대를 중심으로 적군이 조직되었고, 곧 막강한 세력이 되어 결국은 제국주의자들의 공격을 격퇴했다.

 

 

 

 

러시아에서 반동의 물결

 

노동자정부는 내전의 대가를 엄청나게 거대하게 지불해야했다. 3년 동안 일어난 내전이 끝나고 나서 경제는 폐허가 되었고, 노동자계급은 물리적으로 파괴되었고, 농민들은 적대적으로 변했으며, 황폐화로 인해 징발과 기근이 강요되었다.

이러한 위기상황과 피할 수 없는 인민의 사기저하는 결국 정부에 대한 적대감을 표면화시켰고, 모든 곤란을 무릅쓰고 필사적으로 고수했던 성과들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최우선의 문제는 순전히 생존의 문제였다. 이것은 소비에트를 마비시켰고, 주요 도시들을 제외하고는 매우 자주 쉽게 활동이 중단되었다. 어떤 소비에트도 더는 혁명적 노동자계급이 만든 권력조직이 아니었다. 그 결과 노동자정부는 유지되었지만 볼셰비키정당만이 혁명과 살아있는 연결을 유지한 채, 말하자면 위태롭게 사회에 매달려있었다.

노동자정부는 포위된 상태였다. 인민의 사기저하 위에서 반혁명이 만들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극적인 조치들이 취해져야만 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볼셰비키의 신념과 맞지 않는 것이었지만 역시 생존을 위해 계속된 투쟁에서 얼마 남지 않은 선택의 일부였다. 당내에 분파를 금지시키고, 특히 크론슈타트에 대해 억압적 방식을 사용한 것은 이러한 조건에서였다.

볼셰비키가 전념해야만 했던 가장 긴급한 문제는 경제적 상황이었다. 여기에서도 주된 목표는 생존이었다. 농민들의 숨통을 터주고 굶주린 도시들을 위한 주요 식량의 생산을 늘리려고 내전 시기의 집산화는 완화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도 볼셰비키는 또 다른 위험을 경고했는데, 그것은 노동자정부 자체에서 나타난 관료주의의 성장이었다. 혁명적노동자의 몰살과 하층계급들의 후퇴가 뜻한 것은 정부공무원들의 다수가 대부분 혁명에 참여하지 않았고 이해관계도 갖지 않은 지난날 차르 관료 신분들이거나 교육받은 계급들에서 충원되는 것이었다.

트로츠키가 언급했던 것처럼, 극도의 내핍은 누군가가 자원의 배급을 결정해야만 하는 것을 뜻했다. “상품이 부족할 때, 구매자들은 줄을 서야만 한다. 줄이 아주 길어질 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경찰을 임명할 수밖에 없다. 그 순간 소비에트관료기구의 권력이 시작된다. 그들은 누가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지 누가 기다려야 하는지를 안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야심을 가졌고, 당의 지도그룹들에서 늘 좋은 지위를 차지했으며, 언제나 다수의 편에 섰음이 확인된 스탈린이 이와 같은 성장하는 관료기구의 대변자로서 나타났다. 또한 그는 당과 정부기구 내에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높은 자리에 앉히려 하면서 이러한 성장을 촉진시켰다.

1924년의 레닌의 죽음과 그의 지위를 계승하기 위한 싸움을 거치면서 스탈린의 야심은 더 높은 수준에 다다랐다. 모든 맑스주의와 국제주의의 원칙들에 맞서서, 특히 트로츠키와 같은 혁명전통을 대변했던 이들에 맞서서 그의 파벌은 현재의 일국사회주의이론을 퍼뜨렸다. 자신이 처한 모든 곤경들을 물리치려고 스탈린은 레닌생존시기에는 당 바깥에서 줄을 서서 기다렸던 출세주의자들에게 당의 문호를 개방했다. 소위 레닌의 삶을 받들기 위한 것으로 알려진 수만 명에 달하는 신규당원들의 레닌입당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관료들은 전혀 새로운 계급이 아니지만, 새로운 모습을 갖춘 지난날의 자본가계급도 아니었다. 그들은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현상을 유지하고 싶어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필요했던 계획경제를 마지못해 발전시키는 한편, 소련내외에서 노동자계급의 어떠한 혁명적 전진도 반대했다.

퇴보의 과정은 내전의 종결과 함께 시작되었다. 1920년대 말에 관료체제는 10월 혁명과 마지막 연결고리를 마침내 끊어놓았다. 그 연결고리는 10월 혁명을 조직하여 그것을 이끌었으며, 내전에 참가하여 혁명의 성과를 지키려고 싸웠던 볼셰비키로, 10월 혁명의 깃발을 지키려고 남았던 트로츠키 주위의 한줌뿐인 활동가들이었다. 결국 그들은 퇴보과정이 시작되는 것을 막기에는 너무도 허약했다.

 

 

노동자국가의 퇴보는 어쩔 수 없었는가?

 

10월 혁명이 노동자국가의 퇴보를 노정했다는 주장은 혁명운동 내에서 많은 의문들을 불러일으켰다.

보기를 들어 몇몇 사람은 볼셰비키가 내전이 끝나고 나서 권력에 매달렸어야만 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은 노동자계급이 무너진 상태에서 소비에트 내에서 계급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불가능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아마도 볼셰비키의 다수는 더는 노동자계급출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볼셰비키는 왜 민주주의를 위해 물러나지 않았던 것인가?

노동자계급의 이해와 분리될 수 없는 이해를 가진 노동해방주의활동가들인 볼셰비키의 관점에서 이러한 식의 추론은 전혀 터무니없다. 실로 역사는 늘 선택의 기회를 주지 않으며, 형식적 민주주의의 사치를 주지도 않는다. 위기의 조건에서 그러한 관념은 보통 부적절하다. 이러한 특수한 맥락에서 볼셰비키는 다른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권력을 포기하는 것은 반혁명을 위해 길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그것은 러시아노동자계급과 가난한 농민들에 대한 자본가계급과 유산계급의 복수를 폭발시켰을 것이다. 이것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든 혁명에서 밝혀졌다. 혁명의 자취를 완전히 파괴하기 위해 계획된 그러한 대학살의 위험을 허용하거나 심지어 받아들이는 것이 노동자계급에게 좀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가져다 줄 수는 없었다. 그것은 명백한 배신이었다.

게다가 러시아에서 권력을 포기하는 것은 러시아혁명을 희망의 횃불로 삼았던 전 세계 수백만 노동자를 실망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저 도덕적 문제가 아니었다. 전 세계노동자계급은 신생노동자정부가 제공할 수 있었던 모든 도움을 절박하게 필요로 했다.

또한 세계적 차원에서는 러시아에서처럼 최악의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오늘날 노동자국가의 퇴보로 알고 있는 그러한 미래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혁명은 나중이 아니라 곧 터져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든 제국주의자들의 거점들에서 노동자의 승리는 러시아에서 일시적 곤경을 완전히 반전시키는 것을 뜻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동안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세계혁명의 첫 전투가 유지되면서 노동자가 얻은 기반을 지키는 것이 사활적이었다.

 

 

러시아혁명에서 다른 길은 없었나?

 

부르주아 지식인 사이에서 러시아혁명만큼 강렬한 증오를 만들어낸 역사적 사건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191710월부터 계속해서 그들은 혁명과 그 주요지도자들에 대한 거짓말과 비방을 쏟아내려고 핏발이 섰다.

10월에 대한 오늘날의 반대자들은 냉전시대의 빨갱이사냥 방식 대신에 상대적으로 많은 이해력을 갖춘 자유주의의 음색으로 바꿨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것은 10월 혁명을 러시아의 가난한 민중이 가졌던 문화적 후진성에 대해 비난할 수 있을 뿐인, 어떤 역사적 의미도 없는 그저 하나의 사건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른바 그러한 역사적 작업의 한 사례는 캠브리지 대학이 올랜도 파이지스의 이름으로 올해에 발간한 세간의 이목을 끄는 900페이지에 달하는 종이뭉치이다. 그 제목인 인민의 비극에서부터 이미 의도적인 모호함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 목적은 모호하지 않으며, 그것을 책 서문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다. “혁명이 볼셰비키 독재로 끝나게 된 것은 결코 피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다. …… 1917년이나 그 이전이나 러시아가 좀 더 민주적인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들이 몇 차례 있었다.”

이 역사가가 언급한 결정적인 순간들에 대해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자. 보기를 들어 파이지스는 혁명이전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러시아의 권력문제가 평화적 방식으로 해결되도록 이끌 수 있는 현대적 사회진보의 징후가 충분히 있었다. 모든 것은 차르 체제의 개혁도입의지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장애물이 있었다.” 그리고는 그 장애물로 독재 권력이 그러한 개혁에 대한 의지를 갖지 않으려 했다는 확실한 사실을 발견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차르 체제의 몰락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어리석음이 그렇게 만들었다.”

개혁된 형태라 하더라도 차르가 러시아 인민들을 위해 좀 더 나은 형태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인가? 파이지스는 그것에 대해 말하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어리석은차르 체제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없애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없다. 차리즘이 귀족들의 계급적 이해를 표현하는 처음이자 가장 좋은 형태가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모든 부에 대한 도전받을 수 없는 통제권에 직접적으로 반하는 개혁에 대해 왜 귀족들이 동의해야만 하는가? 사실 파이지스는 차리즘의 어리석음에 대해 비난하기보다는 아주 취약한 러시아 부르주아계급과 그 탓에 빚어진 그들의 소심함을 비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러시아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위한 어떠한 여지도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똑똑하게도 파이지스는 또 다른 사례로 10월의 전야에 소비에트의 지도부였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이 좀 더 민주적인 체제를 위한 길을 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파이지스는 말한다.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부르주아혁명의 필요성에 대한 교조적 선입견 때문에 소비에트를 통한 권력을 가정하면서 그러한 체제를 세울 수 있는 하나뿐인 기회를 놓쳤다.” 파이지스는 그들이 그렇게 했다면 으레 볼셰비키독재와 반대되는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새로운 정권을 태어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제 그것은 어리석음의 문제가 아니라 교조적 선입견의 문제이다. 그러나 사실 파이지스 자신의 선입견이 소비에트에서 지도적 지위는 선출되고 통제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이들 소비에트는 이미 새로운 형태의 국가권력인 노동자계급독재로서 행동하고 있었다.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소비에트의 편에서 권력을 잡는 것을 거부했다면, 그것은 주되게는 바로 볼셰비키가 10월에서 권력 장악을 조직함으로서 했던 일인 노동자대중에게 권력을 넘기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가 조직했던 것은, 80년이 지난 뒤에 파이지스가 러시아를 위해 제안하는 민주적 체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사실 러시아에서 합법적 사유재산에 기초한 민주적 길이 있었다는 선전에 무게를 둔 파이지스의 이러한 시도는 자신들에게 월급을 지불하는 부르주아의회민주주의 말고는 다른 어떤 정치체제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 없는 부르주아 지식인의 소시민적 심성을 보여줄 뿐이다. 그가 볼셰비키의 지지자들로 묘사하곤 하는 수염을 깎지 않고 씻지 않은러시아노동자가 훨씬 더 민주적이고 효율적인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는 생각은 그러한 기질의 상상, 이해력, 사회적 편견을 뛰어넘는 것이다.

 

 

소련에서 10월이 성취한 것들.

 

물론 러시아혁명을 비방하는 이들은 10월 혁명 덕분에 러시아사회가 경험했던 발전과 같은 것을 만들어내는 데서 러시아자본가계급이 무능력했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노동자정부의 퇴보로 소련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10월은 지난날에는 말할 것도 없이 앞으로도 러시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발전된 수준에서 출발한 자유주의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그 뒤 제3세계에서 생긴 어떤 급진민족주의혁명도 결코 성취하지 못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러시아 관료체제가 경제적이고 행정적인 혼란을 만들어냈지만, 소련은 계획경제를 통해 수십 년 동안 자본주의 세계의 어떤 나라도 이루지 못한 높은 수준의 산업발전을 성취했다. 이것은 계획경제의 파탄으로 인해, 특히 소련의 붕괴로 인해 발생한 절망적인 위기를 통해 부정적인 방식으로 증명된다.

소비에트 계획경제의 효과는 주로 노동자 스스로가 실행한 자본가 재산의 몰수에 기초했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처음에 새로운 노동자정부는 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결코 완화하지는 않았지만, 자본가가 경제적 역할 일부를 유지하도록 허락하면서 자본가계급과 타협했다. 결국 노동자가 자본가의 재산을 완전히 몰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지난날 특권계급이 축적한 모든 자원들은 나라의 발전을 위해 사용되었다. 그 뒤 비슷한 조치들을 취한 다른 나라들에서와는 다르게, 특정 사회계층이나 다른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면제나 특별한 허가는 없었다. 결국 노동자계급에게서 정치권력을 박탈한 뒤에도 관료기구 그 자체는 혁명이 남긴 경제구조 내에서 작동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의 길이 없었다.

계획경제는 이러한 철저한 몰수 덕분에,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그 이전은 물론 그 뒤에도 결코 성취할 수 없었던 수준의 합리화를 위해 경제 자원을 이용할 수 있었다.

계획경제의 우월성은 그저 높은 성장률에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균형 있는 발전으로 나타났다. 일부 제3세계국가들도 일정한 산업화를 경험했다. 그러나 오직 하나의 동기가 이윤이었기 때문에 계급과 지역 사이의 불평등이 늘어났다. 나라의 다른 지역들을 대가로 성취된 고립된 몇몇 산업중심지들이 발전하면서, 사무실 빌딩들이 들어서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빈민가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대조적으로 그것이 대부분 잔혹한 스탈린독재 하에서 시행되었지만, 소련의 산업화는 이윤법칙에 굴복하지 않았다. 소련은 코카서스나 서부지역에서처럼 상대적으로 발전되었거나 자원이 풍부한 일부지역들을 차르 정권에서부터 물려받았다. 그러나 석기시대는 아니라하더라도 중세시대에 겨우 나타난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에 펼쳐진 광활한 지역들도 또한 물려받았다. 그리고 이윤보다는 합리화를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소련의 산업발전은 이러한 심각한 격차들을 줄여놓았다.

스탈린정권에서 대러시아인들이 소수민족을 짓눌렀지만, 요즘 10년 전까지 소련이 쪼개지지 않은 것은 관료기구의 고압적 태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혁명의 회오리에 휩싸인 소수민족들은 새로운 삶과 새로운 존엄을 발견했다. 과거 차르 제국의 인민들 사이에서 혁명이 만들어낸 결합력은 스탈린정권에 대한 일반적인 증오보다 강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계획경제의 이점들이 이러한 결합력을 강화시켰다.

10월 혁명의 유산이 소련이 그처럼 오랫동안 단결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은 자본주의 유럽의 상황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밀접하게 엮여있던 유럽경제는 국경에 의해 가로막혔다. 그 결과 유럽자본가들은 유럽통합을 꿈꿔왔다. 그러나 떠들썩한 역사가 보여준 오직 하나의 경향은 경쟁에 저항하려는 자본가의 민족 이기주의와 각각의 민족국가에 대한 의존이 제한된 방식일지라도 여전히 유럽경제통합에 대한 열망보다 더 강하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측면에서는 노쇠한 자본주의체제의 무기력과 견줄 수 있는 노동자혁명의 커다란 잠재력이 더욱 밝게 빛난다. 지구의 대부분을 계속해서 지배해 온 자본주의는 1세기가 넘는 세월동안의 기술적 진보에도, 오늘날의 경제 위기가 전 세계에서 사회재앙을 낳는 것을 막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시장의 등락을 통제하는 데서도 무능력한 채로 남아있다.

대조적으로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자신들의 혁명적 에너지를 사회변화를 위해 쏟아 부을 수 있는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그것도 전쟁과 굶주림으로 인해 전염병이 창궐한 단 몇 년 만을 가졌다. 그러나 소련에서 단 몇 년 사이에 나타난 변화들은, 그 뒤 스탈린 관료체제가 정치권력을 강탈했지만, 보기 드문 경제발전의 기반을 제공하면서 70년이 넘는 세월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를 하나로 묶어 줄 만큼 근본적이었다.

 

 

노동자혁명 - 역사의 필연

 

인류의 앞날은 세계노동자계급과 세계자본가계급 사이의 역관계와 노동자혁명의 전진에 달려있다.

지금의 위기가 시작되기 전에도 자본주의는 인류에게 사활적인 문제들 가운데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그것은 특권을 가진 소수와 착취 받는 다수사이의 틈, 잘 사는 나라들과 착취 받는 가난한 나라들 사이의 틈새를 더 벌려놓았을 뿐이다.

게다가 1970년대에 세계위기가 다시 나타났기 때문에, 그동안 보장되었던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눈에 띄었던 사회적 소득은 점점 더 의문시 되었다. 전에는 제3세계들에서만 발견할 수 있었던 수준의 착취와 가난을 이제는 산업화된 세계 전체에서 경험하고 있다. 한편 제3세계 나라들은 극적인 붕괴과정을 겪으며 끊이지 않는 전쟁들과 경제-환경의 붕괴 때문에 사실상 모든 지역들이 파괴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10월 혁명이 타당한 것은 무엇보다도 노동자혁명이 역사의 필연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사회발전은 틀림없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시장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법칙들과 이윤추구는 부자 국가를 포함하여 세계 위기를 낳았고, 또한 국가들 사이의 불평등과 국가내의 계급 사이의 불평등을 만들어냈다.

인류는 정복할 공간이 보장되어있는 한 과학 지식과 기술의 숙련을 계속해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인류의 과학적 엄밀성과 금융시장의 등락을 지배하는 통제할 수 없는 힘에 대한 의존 사이에서 모순이 또렷해졌다. 어쨌든 이 모순은 문화나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조직의 문제이다.

오늘날 노동자혁명은 인류의 진보를 위한 객관적 필요성이라는 측면에서 1917년 그 이상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때만큼 충분한 의제이다. 그러나 객관적 필요성만으로 노동자혁명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그것은 또한 이러한 필요성을 인식하고 낡은 세계의 억압적 힘을 깨뜨리기로 굳게 마음먹은 노동자계급이 필요하다.

1917년이나 30년대, 또는 심지어 2차 세계대전에 뒤이은 식민지 혁명의 시기와 견줄 수 있는 혁명의 물결은 지난 몇 십 년 동안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은 결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적이 없었다.

훨씬 제한된 수준이었지만, 1953년의 동베를린 사건들에서, 1956년의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그리고 1980년대 초에는 폴란드에서 노동자계급은 가장 앞에 섰다. 중앙아메리카, 남아프리카, 필리핀에서 노동자계급은 제국주의의 지배 하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봉기에 물리적으로 개입했다. 브라질, 나이지리아, 남한에서 노동자계급은 어느 정도 좀 더 폭넓은 전망들을 열려고 많은 강력한 경제투쟁을 벌였다.

보수당과 사민당처럼 계급투쟁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려면 역사를 가릴 수 있는 커다란 눈가리개나 뻔뻔스런 위선이 필요하다. 실제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이라는 두 주요 사회계급 사이의 대립은 지구상의 모든 곳에서 약화되지 않고 지속되어왔다.

다른 한편, 지나온 시기를 통틀어 세계적 규모에서 자본가계급을 타도할 의식적 전망이 어떤 대중투쟁을 통해서도 표현되었던 적이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경제위기는 결국 상황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제국주의 나라들을 포함하여 많은 나라에서 전 세계 노동자계급에 대한 억압의 지속적인 증가는 노동자계급이 모든 곳에서 같은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동시에 또는 잇달아 싸우도록 밀어붙인다.

전 세계 노동자계급이 자신들의 공통된 계급 이해를 의식적으로 방어하도록 이끌 수 있는 정치적 전망, 혁명적 전망을 제공할 수 있는 지도부를 찾아 낼 수 있는가가 결정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또한 그러한 정치는 위협적인 사회위기에서부터 새로운 혁명의 물결이 성공적으로 나타나기 위한 기반을 준비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것이다.

물론 역사가 앞으로 나갈 것인지 뒤로 물러설 것인지를 미리 내다볼 수는 없으며, 그저 전체로서 세계가 새로운 사회적 불안과 첨예한 계급투쟁의 시기에 다다랐음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고립되어 있는 혁명가일지라도 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일은 노동계급 대열 내에서 191710월의 혁명적 전통이 되살아나도록 보장하는 투사로서 노력에 전념함으로서, 그러한 가능성을 준비하는 것이다.

 

 

노동자 독재

 

소비에트를 통해 구현된 노동자계급독재는 10월 혁명 전통의 한 부분이다. 소비에트국가는 혁명 뒤에 도입된 경제적 변화들 때문이 아니라, 정치권력을 집행하려고 노동자계급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국가였다.

보통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의 특성은 약간의 공무원들을 임명하는 의회가 보통선거의 방식으로 선출된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소비에트국가는 이러한 매우 제한된 형태의 민주주의를 훨씬 뛰어넘었다. 공장이나 마을수준의 소비에트까지 뻗어있는 각 소비에트 기구는 입법권과 집행권의 일부를 실제로 행사했다.

이것을 위해서는 주로 대중이 할 수 있는 한 주도권을 갖고, 실행 가능할 때는 언제라도 자신들의 결정을 스스로 그리고 최대치로 이행하는 것이 필요했다. 5년 마다 선출된 의원들이 결정하고 선출되지 않는 공무원 상층이 그것을 실행하도록 내버려두는 것보다 이것은 의문의 여지없이 훨씬 더 민주적이다! 이제 이러한 많은 창조적인 것들은 헌법과 법률에 대한 존중으로 눈이 먼 오늘날의 공식 민주주의의 승리자들에게는 소름끼치는 일일 것이다.

보기를 들어, 10월 혁명 뒤 초기에 페트로그라드의 바실리오스트로프 소비에트는 일부러 혁명을 술독에 빠뜨리려고 하는 자본가진영의 시도에 맞닥뜨렸다. 주류창고를 소유한 자들에게 일정형태의 통제를 가하려고 등록하도록 강제할 실제적 방법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소비에트는 스스로 해법을 찾아냈다. 주류 창고주들에게 소비에트에 등록할 3시간의 말미를 주는 포고를 발표했다. 기한을 어긴 자들에게는 그들이 창고들 안에 있건 없건 관계없이 등록되지 않는 창고들을 폭파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곧 포고를 위반하려던 자들은 소비에트 사무실 밖으로 걱정스럽게 줄을 섰다.

10월 뒤 혁명의 시기에 실행된 노동자독재는 참으로 역사상 가장 민주적 정부였다. 이 정부의 독재는 지난날 특권계급의 지위들로 돌아가려고 싸웠던 자들에 대한 독재였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이해를 사회에 강요했다는 점에서 독재였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에 의해 의식적이고 민주적으로 실행된 독재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대중에 반하는 극소수 자본가의 독재기구일 수밖에 없는 민주적자본가정권에 반대하는 절대 다수에 의한 독재였다.

다시 말해 소비에트조직은 러시아만의 특별한 형태가 아니었다. 모든 혁명의 물결에서 소비에트는 다른 많은 나라에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소비에트민주주의가 10월이라는 조건에서 태어난 산물이 아니라, 노동자혁명 그 자체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미래의 혁명에서도 이런 저런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결국 노동자혁명은 대중의 높은 의식수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정치의식은 민주주의 없이는 있을 수 없다.

 

 

혁명정당

 

10월의 또 다른 중요한 유산은 볼셰비키의 조직 전통이다. 몇몇 좌파는 혁명정당에 대한 볼셰비키의 구상이 차르 러시아라는 특별한 조건에서 채택된 것이고, 오늘날 서구 부르주아민주주의사회에서는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올바를 수 있지만, 레닌의 정당형태의 근본에 관해서는 전혀 틀리다.

혁명시기를 통틀어 볼셰비키정당은 노동자계급이 일련의 정치적 경험을 통해 시야를 넓히는데 꼭 필요한 요소였다. 곤경에 처했을 때, 또는 10월의 결정적인 순간들에서, 그것은 노동자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대체할 수 없는 무기가 되었다. 어떻게 볼셰비키 정당이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었는가?

스탈린은 반공선전의 도움을 통해 레닌시대의 실제 볼셰비키 정당과는 전혀 관계없는 획일적인 상상을 만들어냈다. 볼셰비키 내부제도의 기초였던 민주집중제는 오늘날 많은 좌파에게서 금기시 된다. 그러나 볼셰비키정당은 소비에트조직 그 자체만큼 민주적이었다. 이따금 충돌했던 다른 생각과 견해는 당의 혁명적 능률을 갉아먹지 않으면서 당의 모든 단위에서 토론되었다.

레닌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당의 지도자였지만, 당의 지도부 가운데 한명일 뿐이었다. 많은 경우에, 특히 19172월과 10월 사이의 결정적 시기에 레닌은 소수파였다. 그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생각을 평당원들에게 믿게 하려고 싸워야만 했다.

당내에서 주요한 차이가 드러난 토론 뒤에는 다양한 관점의 여러 분파들이 조직되었다. 때때로 이들 분파들은 자신들만의 신문을 발행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가장 위험한 혁명의 전환점에서도 볼셰비키는 결코 이러한 공개토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당의 힘이 긴밀하게 결합된 활동가들의 공통된 인식과 책임에 전적으로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정당은 노동자의 정당이 아니었다. 볼셰비키정당은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방어한다고 주장하면서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했으며, 무엇보다도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혁명의 길을 이끌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세력이라고 여겼다.

이것이 10월 이전에 볼셰비키가 자신들의 정치를 오직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도록 노동자계급 다수를 믿게 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례적인 것은 아니다. 노동자계급은 그 역사적 역할의 측면에서는 혁명적이지만 항상 혁명적인 것은 아니며, 다른 조건에서는 혁명의 필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매우 드물고 특별한 시기가 아니라면, 대개 혁명정당은 노동계급 자체 내에서조차도 소수정당이다. 그러나 소수정당일 때조차도 혁명정당은 많은 노동계급의 믿음을 얻어낼 수 있다.

볼셰비키정당은 몇 년 동안 대중 속에서 끈기 있고 힘든 작업을 통해 쌓아온 믿음이라는 자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산 때문에 볼셰비키정당은 결정적인 순간에 대중에 대한 지도력을 얻을 수 있었다. 2월 뒤 러시아대중의 다수는 볼셰비키보다 온건하고 현실적으로 보이는 다른 사회주의정당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몇 달 뒤, 노동자대중은 이들의 온건한 정치가 위기를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바랐던 자본가에서부터 정치적 독립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볼셰비키가 기본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삼아 마침내 노동자에 대한 지도력을 얻어냈던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노동자계급은 보통 인민의 다수를 대표하지 않는다. 모든 가난한 나라들에서처럼 러시아에서 노동자계급은 인민의 작은 소수를 차지했을 뿐이다. 그러나 어떤 나라에서도 경제적으로 담당하는 핵심역할 때문에 노동자계급은 언제나 중요한 사회적 힘을 가진다. 그리고 다른 착취 받는 계급을 지도하려고 이러한 힘을 쓸 수 있다.

볼셰비키는 공장을 통제할 수 있는 자가 나라전체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점을 알았고, 공장을 통제했다. 150만 명가량의 노동자를 지도하는 몇 만 명의 활동가를 지닌 정당이 15천만 명의 거친 나라의 운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실제로 볼셰비키정당은 혁명 이전시기에는 한 번도 몇 십만에 이르는 활동가를 가진 적이 없었다. 19172월이 돼서야 겨우 7만의 당원을 지녔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 당원은 결코 종이 당원이 아니었다. 그들은 활동가들이었다. 이들 여성과 남성에게 노동해방을 위한 싸움은 몇 시간의 여가시간을 할애하는 취미가 아니라, 대부분의 정력과 능력을 쏟는 삶의 주된 관심사였다. 볼셰비키정당이 그러한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1903년에 이루어진 정치적 선택의 결과였다. 그리고 10월 혁명은 이러한 선택이 옳았음을 가장 또렷이 두둔하는 것이었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노동자계급이 세계정치무대의 뒤편에 묶여 있었던 곳에서는 그러한 정당이 없었다. 세계 모든 곳에서 그러한 노동자계급정당은 건설되어야할 것으로 남아있다. 혁명가의 임무는 특히 젊은 층 가운데서 노동자계급을 선택할 만큼 충분히 인류의 미래를 매우 걱정하고, 이러한 혁명정당을 세우려고 자신의 정력, 능력, 열정을 쏟을 수 있는 남성과 여성을 찾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혁명의 전망

 

우리 노동해방주의자는 혁명가이자 국제주의자이다. 우리에게 이것은 앞으로 벌어질 국제노동자계급의 결정적인 전투들을 위한 준비로서, 볼셰비키의 경험과 소비에트국가의 10월과 그 뒤 몇 년 동안의 경험에서부터 많은 것을 뽑아내야만 한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자본주의 경제 위기가 새로운 계급투쟁의 시대를 열었을 때, 노동자계급이 세계노동자혁명의 이름으로 자신의 계급적 깃발아래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일이 벌어졌을 때, 그리고 계급투쟁의 발전이 새로운 혁명 위기를 가져왔을 때, 국제 자본가는 1917년 직후에 극적인 결과를 가져왔던 봉쇄전략이라는 적어도 하나의 무기를 더는 쓸 수 없을 것이다.

19172월 이전에 참호를 마주했던 병사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친교가 있었다. 군복과 언어의 차이에 더는 개의치 않고 제국주의전쟁의 광기를 거부하기 시작하면서, 지난 3년 동안 일어난 전쟁에서 형제들끼리 서로 죽여야 했던 고통스러운 경험은 이제 공통의 경험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유럽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던 레닌이나 몇몇 국제주의그룹과 같은 한줌 개인들의 요청은 커다란 충격이자 열광적인 응답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노동자는 스스로의 손으로 자신의 운명과 존엄을 움켜잡으라고 요청하는, 그들을 함께 연결시키고 현실을 반영하는 목소리에 공감할 수 있었다.

감옥, 철조망, 국경이 노동자국제주의의 목소리가 모든 곳의 노동자에게 다다를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 목소리는 유산계급이 만들어 놓은 곤경에서 탈출하려는 강력하고 집단적인 열망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노동자를 세계노동자계급혁명의 깃발 주위로 조직하는 것을 훨씬다 쉽게 만들었다. 통신에서 기술적 진보의 결과, 어떤 사회적 또는 경제적 사건들도 훨씬 빨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 때문에 훨씬 더 큰 파급력을 갖게 되었다. 주식시장 투기자는 손해를 보면서 이미 이것을 경험하고 있다. 컴퓨터와 인공위성이 그들의 투기를 돕고 있지만, 주식시장이 말 그대로 광란상태에 빠졌을 때 똑같은 기술이 그들의 부를 파괴하는 데서도 효과적이라는 점이 증명되었다.

전화, 컴퓨터, 인터넷과 같은 장치들이 그만큼 빠르게 사실과 사상을 전파할 있게 된 것은 노동자혁명에 이득이다. 오늘날 뉴스들이 대륙을 뛰어넘는 속도는 20세기초반에 이웃마을로 전해지는 것보다 더 빠르다.

제국주의는 다른 방식에서도 사람들, 특히 노동자를 가깝게 만들었다. 자본은 다른 나라와 다른 대륙 출신의 노동자를 제국주의 국가들의 공장으로 끌어 모았다.

오늘날 고용주는 노동자계급을 분할하고 약화시키려고 민족적 적대감과 인종적 편견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중앙아프리카, 아시아, 카리브해, 터키 출신의 노동자는 잘 사는 서유럽나라의 노동자 바로 옆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미국노동자는 흑인과 백인이 라틴아메리카, 카리브해, 심지어 중동출신의 노동자와 곁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자본주의시장의 도가니에서 민족과 인종이 뒤섞이는 것은 앞으로 혁명적 노동자운동의 확산을 도울 것이다. 서로를 다르게 바라보고 경쟁상대로 여겼던 이들이 경험 속에서 서로가 형제이고 같은 계급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할 때, 그것은 오랜 자본주의질서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날이 될 것이다.

 

 

옮긴이: 정원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