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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2007년)/200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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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4:26

소비에트 문서 보관소에서 발견된 새로운 문헌이 볼셰비키의 견해를 뒷받침해주다: 크론슈타트 트로츠키가 옳았다.

 

A. 크래머

 

여러 해 동안 자본가 언론, 박식한 교수들, 부르주아 분석가들은 계속해서 소비에트 문서 보관소의 비밀들에 대해 지껄여 왔다. 그들은 공산주의의 사악한 성격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해 줄 공산주의 치하의 끔찍한 비밀들이 있을 것이라고 수없이 추측해왔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일어난 사건들 이후, 역사가들은 소비에트 문서 보관소 출입을 허락받았다. 그래서 누군가는 사실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흐름이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그 결과에 대해 참으로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은 스탈린주의의 범죄를 뒷받침하는 많은 증거들을 찾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는 결코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았다. 트로츠키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 범죄들에 대해 서고가 개방되기 오래 전부터 비난해 왔다. 1920년대와 1930년데 소비에트 러시아의 트로츠키 지지자들은 이 범죄들에 대하여 경험에서 얻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스탈린주의적 퇴보의 결과, 고통당했던 첫 번째 세대였기 때문이다. 그들 중 수천 명이 스탈린의 하수인들에 의해서 살해당했다.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스탈린주의 체제와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끌었던 혁명의 첫 번째 시기의 건강한 체제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없다는 증거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이 혁명의 지도자인 레닌과 트로츠키를 깎아내리는데 이용될 수 있는 문서들을 찾으려고 하자 사실상 난관에 봉착했다. 예전에는 접근하기 가장 어려웠던 문서들은 좌익 반대파의 지도자들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 모든 역사가들에게 왜 그러한지가 명백하다. 문서고는 이 지도자들이 1917년 혁명과 소비에트 국가를 만드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었다.

 

지난 10년 동안 러시아 혁명이 위기에 빠졌던 기간에 대해 서술한 여러 흥미로운 자료들이 출판되었다. 그것들 가운데에는 러시아 혁명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인 소위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한 책 두 권이 있다.

 

여기에서 이 잘 알려진 사건의 모든 국면들에 대해서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 19213월 초는 소비에트 공화국 건국 이래 가장 어려운 시기 중 하나였다. 그 때 페트로그라드 인근의 크론슈타트 해군 기지에서 소비에트 정부에 반대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 당시 소비에트 공화국이 겪고 있던 위기 때문에 레닌과 트로츠키는 그 반란을 신속하게 처리해야 했다. 항복을 요구하는 정부의 최후통첩이 거절당하자, 적군은 크론슈타트에 공세를 감행하여 두 차례의 공격 끝에 함락시켰다. 반란 지도부는 핀란드로 도망갔다.

 

1930년대 말에 빅토르 세르쥬, 막스 이스트만, 수바린 등, 과거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반란기간 동안 트로츠키의 행보를 비난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세르쥬는 반란 기간에 표현했던 그 자신의 과거의 관점과 모순되는 태도를 취했다.) 그들은 크론슈타트 사건을 "볼셰비키 독재"에 맞선 노동자와 수병의 반란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이 반란에 대한 진압을 "스탈린주의를 향한 일보 전진"이라고 보았다. 나중에, 이 비난은 다른 반공주의 이데올로그들과 선전가들에 의해 이용되었다. 트로츠키는 1938년 이 사람들에게 이 반란의 소부르주아적 본성을 분석한 그의 논문 크론슈타트에 대한 항의으로 답변했다.

 

여기에서 트로츠키의 주장을 다시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어느 누구라도 이를 위에 언급된 사이트에 접속해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에서 의도하는 바는 최근에 출판된 크론슈타트에 대한 문헌자료 모음에 나타난 최신 정보들을 간략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첫 번째 책은 수상한 제목인 알려지지 않은 트로츠키 : 붉은 보나파르트(V. G. 크라스노프, 모스크바, 2000)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러시아 내전기에 트로츠키의 역할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두 번째 책 크론슈타트 1921(모스크바, 2001)은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한 문서들의 모음집이다. 두 책의 저자들 모두 볼셰비키에 공감하지 않음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볼셰비키 비평들에서 나타나는 인기 있는 관념은 적군 병사들 사이에 반란에 대한 광범위한 공감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병사들이 정치적 이유로 공세에 참여하는 문제에 대해 혼란스러워했을 것이라고 흔히들 추측해 왔다. 또한 적군 병사들 사이에 대중적인 탈영이 일어나서 그들 중 상당수가 크론슈타트 반란의 편으로 넘어간다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신화일 뿐이다.

 

실제로 일어났던 것은 완전히 다르다. 한 부대가 크론슈타트 수비대의 편으로 넘어간 경우가 있었다. 이것은 실패한 1차 공세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그 부대는 561 적군연대 소속 1개 대대였다. 이 연대는 과거 마흐노, 브랑겔, 데니킨 부대의 포로들로부터 충원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몇몇 농민 부대들이 군사적 실패의 결과로 매우 여러 번 자신의 편을 바꾸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른 경우로 236237 보병연대가 공격을 거부한 사건이 있다. 그들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 “우리는 얼음 위로는 진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 농민부대들은 얼음 위를 가로질러서 전함이 방위하는 최상급 요새를 공격한다는 생각에 겁에 질렸다. 다른 이유로 명령 수행을 거부한 부대들에 대한 보고서들이 더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 이유는 질 낮은 음식과 의류, 군복과 같은 것이지 어떠한 정치적 이유도 찾아 볼 수가 없다. 만약 우리가 젊은 소비에트 체제가 어떻게 후진적인 경제를 물려받았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혁명을 진압하려는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서 지원받는 백군에 맞서서 소비에트 정부가 자신을 방어하는데 사용할 수 있었던 자원이 얼마나 부족했는가를 상기한다면, 이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크론슈타트 내부의 상황은 그 신화와 달라 보인다. 반란을 굳건히 지지하는 확고한 병사 대중은 없었다. 크라스노프와 같은 부르주아 역사가들조차도 이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크론슈타트 내부에서 혁명적인 고참 수병들과 농민 및 소부르주아 출신의 신참 수병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몇몇 전함들이 중립을 선언하고 다른 몇몇은 반란에 반대하여 행동했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여기에서 여러 전함 승무원들의 언급들을 인용할 필요가 있다. 그들 가운데에는 기뢰 제거선인 우랄”, “오르페이”, “포베디텔이 있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반란을 이끄는 백위대는 공화국에 엄청난 손상을 끼칠 수 있다. 그들은 심지어 페트로그라드를 날려 버리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반란 함대들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나타났다. 7군 참모부 보고서를 보면 우리는 많은 반란 수병들과 병사들이 볼셰비키의 편으로 넘어가고 싶었지만 그들의 지휘관에 의해서 위협 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크론슈타트와 관련하여 만들어진 반()볼셰비키 신화에 대한 궁극적인 반박은 다음부분이다. 이 책들에 실려 있는 문서들에서는 크론슈타트 주변의 마을에서 일어난 일들이 나온다. 크론슈타트 공격 기간에 마을 노동자들은 반란자들에 맞서서 행동하여 적군의 주력부대들이 도착하기 전에 마을을 해방시켰다. 그러므로 사실상 우리가 접하게 되는 것은 볼셰비즘에 반대하는 노동자와 수병들의 반란이 아니라 반란에 반대하는 노동자와 수병들의 볼셰비키 봉기이다!

 

크론슈타트 수병들의 선언문에서 우리는 반란을 이끌고 있는 백위대의 사람들에 대한 언급을 본다. 이것은 그냥 말뿐인 것이 아니다. 반란을 진정으로 지휘한 것은 몇몇 단순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크론슈타트 소비에트가 아니라 소위 크론슈타트 요새의 방어를 위한 위원회였다. 그 지도자 중의 하나는 S. H. 디미트로프 해군 소장이었다.(그는 요새가 함락되고 나서 처형되었다.) 또 다른 봉기의 지도자는 A. H. 코슬로프스키 장군이었다. 그런데 그는 핀란드로 탈출했다. 이 두 장성들은 볼셰비키와 함께하든 볼셰비키 없이하든 사회주의에 대하여 어떠한 공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또한 수병이자 반()볼셰비키 지도자인 S. M. 페트리첸코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다.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은 1927년에 이 사람이 스탈린의 GPU에 채용되었고 1944년 핀란드 당국에 의해서 체포될 때까지 스탈린의 요원으로 활약했다는 것이다. 이듬 해 그는 핀란드 강제 수용소에서 죽었다.

 

그러므로 사실은 크론슈타트 노동자들과 수병들이 이 반란의 진정한 본질을 크론슈타트 신화를 만들려고 한 후대의 지식인들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크론슈타트에서 공작을 펼치고 있던 반혁명 세력에 대해서도 똑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과거 차르 시대의 총리이자 재무 장관이었으며, 파리에 있는 해외 러시아 은행의 감독관인 코코프초프는 225천 프랑을 크론슈타트 반란군에 전달했다. 러시아-아시아 은행은 20만 파운드를 전달했다. 프랑스 총리인 브리앙은 케렌스키 정부의 대사였던 말라키노프와 가진 회합에서 크론슈타트에게 어떠한 필요한 도움이라도 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트로츠키가 설명한 것처럼, 소위 크론슈타트 반란은 내전과 혁명기에 일어난 최초의 소부르주아, 반 볼셰비키 운동이 아니었다.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등의 구호 하에 봉기한 사람들이 이끈 많은 운동들이 있었다. 우랄과 아리에스 코사크에 있는 몇몇 공장에서 그러한 운동들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명백히 알 수 있다. 비타협적인 계급 전쟁의 환경에서는 이러한 유의 슬로건이 중세적 반동과 야만주의로 바로 연결될 수 있다. 혁명정당 없이 혁명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다시, 그 당시 보통 러시아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이것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늘날 좌익에 있는 몇몇 사람들보다도 그것을 훨씬 잘 이해하고 있었다.

 

사실상 많은 평범한 아나키스트, 멘셰비키, 사회혁명당원들과 다른 당의 당원들이 소비에트에 볼셰비키와 함께 참여했다. 그들과 함께 소비에트를 만들지 않았던 게 아니다. 이 정당의 평당원들과 완전히 반()볼셰비키적 감정을 가지고 있던 그 지도부 사이에는 꽤 차이가 있었다.

 

1920년대 초반에 몇몇 우크라이나 유대인 지역 소비에트 당국들은 완전히 분트의 멤버들로 충원되었다.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혁명과 내전에서 볼셰비키의 편에서 백군 반동에 맞서서 싸웠다. 그들은 또한 스탈린주의가 출현하기 전까지 새로운 권력에 협력했다. 지금에 이르러, 그러한 용기 있는 사람들은 몇몇 현대 아나키스트들에 의해서 배신자들로 여긴다. 어떤 사람들은 결코 배우지 못했다!

 

우리는 소비에트 문서고에서 앞으로 더 많은 새로운 자료들이 나온다고 할지라도 두렵지 않다. 우리는 앞으로 몇 년 동안 길고 영광스러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에 대한 자료들이 더 많이 이 문서고에서 발견되기를 바란다. 그것들은 분명히 러시아 노동자들의 혁명적 전통들에 대해 더 많은 정보들을 제공할 것이다.

 

200312

 

 

부록 : 크론슈타트의 테드 그랜트

 

상당수의 소비에트 문서고의 자료들이 이용가능하게 되기 전에, 테드 그랜트는 그의 책, 러시아 : 혁명에서 반혁명까지를 출판했다. 그가 크론슈타트 사건에 대해서 썼던 것은 A. 크래머가 이 기사에서 쓴 글에서 확인된다. 우리는 그 책의 186~88쪽에서 인용한다.

 

가장 심각한 상황 중 하나는 크론슈타트 해군 수비대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발생했다. 이 사건에 대해 왜곡하는 글들이 많이 나왔다. 그런데 그것은 실제로는 신화로 판명되었다. 그 목적은 지금까지 레닌과 트로츠키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볼셰비즘과 스탈린주의가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참 흥미롭게도 크론슈타트에 대한 공공연한 항의가 10월 혁명을 반대하는 부르주아지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와 초좌익 세력들을 결합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결코 사실관계를 견뎌낼 수 없다.

 

첫 번째 거짓말은 1921년 크론슈타트 반란자들을 1917년 영웅적인 붉은 수병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떠한 공통점도 없었다. 1917년 크론슈타트 수병대는 노동자들과 볼셰비키였다. 그들은 페트로그라드 근교의 노동자들과 함께 10월 혁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거의 전체 페트로그라드 수비대는 내전 동안 적군병사로 싸우기 위해서 자원하여 전선으로 나갔다. 그들은 각각의 전선으로 흩어졌고 대부분 그곳으로부터 결코 돌아오지 못했다. 1921년 크론슈타트 수비대는 주로 흑해함대에서 온 순수한 농민 징집병으로 구성되었다. 반란자들의 성을 살짝 들여다보면 그들이 대체로 우크라이나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거짓말은 크론슈타트 사태에서 트로츠키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그는 전쟁인민위원이자 소비에트 정부의 각료로서 정부의 이러저러한 활동에 대해서 완전히 정치적 책임을 졌지만 사실상 그는 어떤 직접적인 역할도 하지 않았다. 반란자들에 의한 크론슈타트 요새의 접수는 소비에트 정부를 극도로 위기에 놓이게 했다. 그들은 이제 막 피의 내전에서 벗어난 상황이었다. 사실, 이미 사태의 심각성에 분노한 칼리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협상대표들이 수비대와의 협상을 서투르게 다루었다. 그러나 일단 반란자들이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해군기지를 접수하자마자 협상의 여지는 결코 없었다.

 

주된 두려움은 영국과 프랑스가 반란자들을 앞세워서 크론슈타트를 점령하기 위해서 그들의 해군을 동원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것은 페트로그라드를 그들의 점령 하에 두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크론슈타트를 통제하는 자가 페트로그라드를 통제했기 때문이다. 유일한 가능성 있는 결과는 자본주의 반혁명이었다. 수병들 중에 사실상 반혁명분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라는 슬로건을 보면 알 수 있다. 볼셰비키에게는 단 하나의 선택만이 있었다. 요새는 힘으로 되찾아야 했다. 진압은 제10차 당 대회 기간 동안 일어났고 대회는 대의원들이 그 공격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기 위해서 회기를 중단했다. 흥미롭게도 노동자반대파, 즉 반쯤 아나코-생디칼리스트 경향인 사람들이 대회에 참석해서 진압군에도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거짓말로 이어진다. 이 거짓말은 크론슈타트-아니키즘-노동자반대파를 서투르게 한 가지 색깔로 덧칠하기 위한 시도이다. 하지만 세 가지 사이에는 결코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

 

아나키즘에 많이 공감했던 빅토르 세르쥬는 무자비하게 크론슈타트 반란자들에게 반대했다. 다음 단락은 그것을 보여준다.

 

인기 있는 반혁명은 소비에트 자유선거 요구를 공산주의자 없는 소비에트로 바꿔치기 했다. 만약 볼셰비키 독재가 무너졌다면, 그것은 단지 혼란으로의 한 걸음일 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농민 봉기의 혼란을 틈타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학살, 왕당파의 복귀, 그리고 결국 이러한 사태를 통해서, 또 다른 독재, 하지만 이번에는 반()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낳았을 것이다. 스톡홀름과 탈린으로부터의 전보는 왕당파들이 바로 이러한 전망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그 전보들은 크론슈타트를 무엇보다도 재빠르게 진압하고자 하는 볼셰비키 지도부의 의도를 강화시켰다. 우리는 관념적으로 추론한 게 아니었다. 우리는 유럽 쪽 러시아에서만 적어도 50개의 농민 봉기부대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스크바 남쪽에 있는 탐보프 지역에, 우익 사회혁명당원 무리의 스승인 안토노프는 소비에트 권력의 폐지와 제헌의회의 재건을 선언했으며, 그의 지휘 하에 수만 명을 헤아리는 훌륭하게 조직된 농민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백군과 협상을 벌였다.(투하체프스키가 이 장사꾼을 1921년 진압했다.)”(빅토르 세르쥬, 어느 혁명가의 회고록(1901-1904), pp.128~9)

 

 

옮긴이: 김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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