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그림) 30년 뒤 본문

실천지 (2007년)/2007년 10월호

(그림) 30년 뒤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4:07

30년 뒤, 러시아혁명이 품은 이상과 현실.

 

빅토르 세르주

 

 

.

 

우리가 여행하려고 하는 지난 30년은 얼마나 끔직한 길이 될까. 우리 시대에서 가장 커다란 사건, 가장 많은 희망을 안겨준 사건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듯 보인다. 이제 1917년을 휩쓸었던 잊지 못할 열광주의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공산주의 활동가의 첫 성원이었던 나의 세대의 많은 사람에게 남아 있는 것은 러시아 혁명에 대한 비참함뿐이다. 혁명에 가담했던 사람과 목격자 가운데 그 누구도 거의 살아남지 못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만든 당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총살당했다. 문서는 모조리 파괴되었거나, 감춰졌거나 또는 왜곡되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혁명에 늘 반대했던 망명자뿐이다. 그들은 책을 썼고, 가르쳤으며, 여전히 보수주의의 강력한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지구적 봉기의 시기에 그 세력은 모든 진실한 객관성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스탈린주의 러시아에 대한 어두운 광경에 비난의 칼날을 들이댄 이름뿐인 볼품없는 논리는 볼셰비즘의 실패와 더 나아가 맑스주의와 사회주의의 실패를 입증하려고 시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얕은 술수는 세계를 감싸고 있는 모든 문제에 부닥쳐서 쉽게 이어졌고 내다볼 수 있는 미래에 자신의 지배력을 느슨하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당신은 다른 실패를 잊고 있는가? 사회 재앙의 시기 동안 기독교는 어디에 있었는가? 자유주의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계몽의 형태이거나 반동의 형식이거나 보수주의가 낳았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무솔리니, 히틀러, 살라자르, 그리고 프랑코를 주지 않았던가? 만일 그것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의 많은 실패를 솔직하게 생각하는 문제라면,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에게 막혀 있던 우리의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끝난 게 아니다.

모든 사건은 한정적이고 이행기적이다. 흔히 잊혀 지곤 하지만, 모든 사건은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시대적 맥락에서 발전한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견해를 세우기 전에, 프랑스 혁명에 대한 견해와 전망에서 생긴 많은 변화를 회상해보자. 칸트가 바스티유가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열광했던 모습, 테러, 테르미도르, 집정부, 나폴레옹. 1789년과 1802년 사이에 자유와 우애, 평등의 공화국은 완전히 선회했고 그 자신의 기원을 부정한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운 질서의 창조자인 나폴레옹의 정복은 히틀러가 만들어낸 것과 비슷하다는 점 때문에 두드러진 것이다. 황제는 괴물이 되었다. 문명화된 세계는 그에 맞서 힘을 합했다. 그리고 신성 동맹은 유럽 전체에서 낡은 정권을 다시 세우려고 싸웠다. 그럼에도 우리는 부르주아지에게 권력을 안겨 준 프랑스 혁명, 공업의 정신, 과학적 문의는 19세기를 실제로 살찌우게 했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사건이 터지고 난 뒤 30년째, 1819, 루이 18세와 차르 알렉산드르가 지배하던 시기는 역사에서 가장 비싼 대가를 치른 실수로 생각되지 않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길로틴에서 죽었고, 수많은 전쟁과 투쟁이 어떻게 군주제를 가증스럽게 복구시켰는가.

 

 

.

 

역사의 왜곡은 으레 그때의 질서로 될 수밖에 없었다. 부정확한 과학 사이에서, 역사는 물질적이고 심리적으로 대부분의 관심을 위협한 오직 하나의 것이다. 비록 사실이 쉽게 이용될 수 있지만, 러시아혁명에 대한 신화, 실수, 목적이 있는 해석은 난무했다. 틀림없이 먼저 자신을 알리지 않고 말하고 쓰는 것은 훨씬 더 단순하고 매력적이다.

“191710월과 11월에 볼셰비키가 일으켰던 폭력적인 쿠데타가 민주주의의 싹을 뽑아버렸다는 주장이 있다. 그 어떤 것도 사실과 아주 다르다. 그 어떤 공화국도 러시아에서 선언되지 않았고 소비에트와 노동자농민병사 위원회 말고 그 어떤 단일한 민주주의 제도도 없었다. 케렌스키가 이끈 임시정부는 농업 개혁을 실시하는 것을 거부했고, 대중이 요구했던 평화 협상을 여는 것을 거부했으며, 반동 세력에 맞서 효율적 조치를 취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행기적이고 단명한 국가는 두 개의 커다랗고 앞서 나아가고 있는 집단, 즉 장군들의 집단과 혁명적 대중 집단 사이에 끼어있었다. 그 어떤 것도 사회주의적 경향을 띤 민주주의의 발전을 지시하지 않았다. 19179월쯤에 오직 하나의 대안은 반동적 장군들의 독재냐 또는 소비에트의 독재냐 였다. 그러한 쟁점에 서로 반대되는 쪽에 있는 두 역사가들, 트로츠키와 우익-자유주의적 정치가인 밀류코프는 이 문제에 똑똑히 동의했다. 소비에트 또는 볼셰비키 혁명은 전제정이 무너지고 난 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와 기회주의적인 사회주의 정당이 이끌었던 불안전하고 비효율적인 온건 민주주의 혁명이 실패한 결과였다.

또한 117(옛 달력에 따르면 1025)의 봉기가 한줌 밖에 안 되는 음모가, 즉 볼셰비키 당의 작품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것보다 실제 사실에 훨씬 더 모순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1917년은 대중 행동의 시기였다. 그러한 행동은 변화, 다양성, 힘에서, 그리고 갈증을 느낀 대중의 주도가 뚜렷이 볼셰비즘 쪽으로 나아갔던 끈기에서 놀라웠다. 농민 소요는 러시아 전체로 퍼졌다. 군인들 사이에 있는 낡은 규율은 폭넓은 반항으로 무너져 버렸다. 크론슈타트와 발트 함대는 임시정부에 대한 복종을 딱 잘라 거부했다. 트로츠키만이 해군 기지에서 일어난 무장 갈등을 소비에트와 만나 막을 수 있었다. 투르게스탄에서 타쉬겐트 소비에트는 그 자신의 이름으로 권력을 잡았다. 케렌스키는 칼루가 소비에트를 그의 포병으로 위협하고 있었고 볼가에서 50만 병사가 케렌스키의 명령을 거부했다.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주변 지역에서, 노동자 적위대가 세워졌다. 페트로그라드 요새는 소비에트의 권위로 스스로를 위치 지었다. 소비에트 사이에서, 다수파는 평화적이고 합법적으로 온건한 사회주의자와 볼셰비키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온건한 사회주의자는 케렌스키에게 등을 돌렸다. 페트로그라드에서 봉기가 열광주의의 커다란 물결 속에서 거의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성공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존 리드와 자크 사둘이 쓴 책을 다시 읽어보자. 그 사람 모두 그 열광주의의 장면을 목격한 사람 아닌가! 그렇다, 볼셰비키 음모라고 하는 것은 대중적 정서의 커다랗게 떠오르는 물결에 의해 권력을 실행했다.

 

 

제국이 페트로그라드 교외의 무장되지 않은 주민의 압력 하에 19172~3월에 무너졌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가치 있다. 요새의 군대와 시위하고 있는 노동자 사이에 자발적인 친교는 전제정의 운명을 정해버렸다. 나중에 이러한 친교를 부추겼던 잘 알려지지 않은 개인들을 동질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몇몇은 이름이 있었지만, 다수는 이름 없는 상태로 남았다. 모든 혁명 정당의 지도자와 가장 능력 있는 전투가는 그 순간에 감옥에 있거나 또는 외국에 있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활동한 소규모 집단은 볼셰비키가 노동자를 공장으로 복귀하라는 호소를 내걸으려고 계획했던 사건의 전환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가! 4개월 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와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이 잡고 있는 연립 정부의 경험은 7월 초에 요새와 교외 주민이 소비에트로 권력 이전을 요구하는 슬로건을 들고 일어난 커다란 시위를 조직했던 깊은 분노를 낳았다. 볼셰비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자가 이끌었던 이러한 조치를 받아들였고 고통스럽고 위험한 결론으로 끝난 시위에 마음 내키지 않았지만 결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나라의 나머지가 수도에서 일어난 사건을 결코 따르지 않을 것임을 느꼈다. 으레 그들은 희생양이 되었다. 그들은 중상(“독일 간첩”)과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압박당했다. 그 순간부터 볼셰비키는 만일 그들이 이러한 대중 운동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장군들은 힘으로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179월에 코르닐로프 장군은 케렌스키 정부에 있는 공개적인 공범과 함께 전투에 들어섰다. 레닌과 지노비예프는 잠적했고, 트로츠키는 감옥에 갇혔고, 볼셰비키는 지하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 군대는 철도 노동자와 다른 전투적 노동자와 접촉의 결과로 저절로 흩어졌다.

전제정의 문관은 또렷이 다가올 혁명을 보았다. 그들은 그것을 막을 수단을 지니지 않았다. 혁명 정당은 혁명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혁명을 할 수도 없었고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도 없었다. 사건이 그러한 과정을 밟았고 봉기가 그들에게 다가왔을 때, 누구에게든 남겨진 것은 의지와 비전을 갖고 참여하는 것이었다.

 

.

 

볼셰비키는 권력을 잡았다. 혁명 정당 사이에서 일어났던 자연도태의 과정에서 볼셰비키가 힘을 모은 대중의 열망을 일관되고 현명하게, 그리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에 가장 정통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권력을 장악했고 내전에서 이겼다. 왜냐하면 많은 주저와 갈등이 있었지만 대중은 발트 해에서 태평양 연안까지 볼셰비키를 편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커다란 역사적 사실은 러시아에 있는 많은 볼셰비즘의 적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망명한 자유주의 출판업자인 헬레나 쿠스코바(Helena Kuskova)는 얼마 전에 이렇게 썼다. “사람들이 백군도 ……제헌의회를 위한 투쟁도 밀지 않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백군은 군주제적 반혁명, 입헌주의, 민주적인 반-볼셰비즘을 대변했다. 그러므로 1920~1921년에 내전이 끝날 때까지, 러시아 혁명은 볼셰비키가 지도자와 중견 요원의 형식으로 두뇌와 신경 조직을 제공했던 커다란 대중 운동의 양상을 띠었다.

볼셰비키가 지닌 직접적인 목표가 국가권력을 독점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것도 또 다른 신화이다! 사실 그들은 권력이 고립될 수 있다는 위험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일찍이 연립 사회주의 정권의 수립을 열렬히 지지한 사람들이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원칙적으로는 온건 사회주의 정당과 연립을 거절했다. 왜냐하면 온건 사회주의 정당은 3월 혁명(옮긴이: 2월 혁명)을 실패로 이끌었고 소비에트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그러나 볼셰비키 당은 전반적으로 맑스주의에 적대적인 이상주의자이자 지식인이 이끈 농촌을 바탕으로 삼은 사회혁명당 좌파의 협력을 구했고 얻었다. 191711월에서 191876일까지, 사회혁명당 좌파는 정부에 참여했다. 그들은 볼셰비키 가운데 잘 알려진 몇몇 사람들(1/3)처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1876일에 그들은 볼셰비키가 혼자서 통치하려는의도를 지녔고 독일 제국주의에 맞서 전쟁을 다시 해야한다고 선언하면서 모스크바에서 폭동에 가까운 반란을 시작했다. 그때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던 그들의 성명서는 혼자서 통치하려는 의도를 지닌 어떤 당이 한 첫 선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패배 당했고 볼셰비키가 혼자서 통치하도록 남겨 놓았다. 그 순간부터 볼셰비키의 책임은 늘어났고 그들의 정서는 바뀌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다수파(볼셰비키)와 소수파(멘셰비키)로 분열되기 전에 그들은 다른 러시아 혁명 정당과 바탕부터 달랐는가? 볼셰비키가 권위주의적 특성, 수단의 선택에서 편협성과 비도덕성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관료주의적 국가주의의 싹을 포함하고 있는 중앙집중화되고 아주 규율적인 조직, 독재적이고 비인간적인 특성. 잘난 체 하는 작가와 뭘 모르고 떠드는 작가는 이와 관련해서 레닌의 비도덕주의”, 즉 그의 프롤레타리아적 자코뱅주의직업적 혁명주의를 인용하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다.

1870~80년부터 모든 러시아 혁명 정당은 그들이 처한 조건에서 비합법적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비합법적 활동 때문에 실제로 권위주의적이고 아주 중앙집중화되었고 규율에 의존했다. 모든 사람은 직업적 혁명가로 훈련받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의 삶을 투쟁에 모두 바친 사람이었다. 모든 사람은 그때 감히 실천적비도덕성을 지닌 유형의 사람이 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비록 우리가 그들을 열렬하고 이타적인 이상주의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이 공평하긴 했지만. 프롤레타리아트이든 아니든 간에 거의 모든 사람은 자코뱅적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모든 것은 영웅과 광신자를 낳았다. 멘셰비키를 빼고 모든 사람은 독재를 열망했고 그루지야 멘셰비키도 빈번히 독재의 방법을 이용했다. 모든 커다란 정당은 그들의 구조 상 그들 스스로에게 할당한 목표 때문에 국가주의적이었다. 실제로 그들이 지닌 교의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지만, 거기에는 하나의 혁명적 정서가 있었다.

우리는 아나키스트 바쿠닌이 지닌 권위주의 정서와 그가 제1 인터내셔널에서 쓴 비밀 조직의 방법을 잊었는가? 그가 쓴 고백에서 바쿠닌은 계몽된 독재를 두둔했다. 그러나 그가 사람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독재를 썼다는 점은 매정한 것이다. 공화주의의 이상을 지니고 있고 사회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었던 사회혁명당은 아주 중앙 집중적이고 규율 잡혔고 권위주의적 기구를 발전시켰다. 그 기구는 테러주의적으로 독재와 싸울 것을 목표로 했다. 바로 그것은 경찰이 도발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되기도 했다. 전체로서 러시아 사회-민주 세력은 국가권력에 대한 정복을 목표로 했다. 그 누구도 그들의 지도자인 플레하노프보다 훨씬 더 자코뱅적 말로 다가올 혁명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지배 세력이었던 케렌스키 정부는 사실 비효율적이긴 했지만 독재적 색채를 띠었다. 네스토르 마흐노의 검은 군대가 점령했던 지역에서 아나키스트들조차도 몰수, 징발, 체포, 처형을 갖춘 진짜 독재를 실행했다. 그리고 마흐노는 그 독재의 두목이자 대부또는 주인이었다.

단과 체레텔리 같은 멘셰비키 우파도 권위주의의 통치를 바랐다. 체레텔리는 더 늦기 전에 볼셰비즘을 탄압할 것을 편들었다. 마르토프 같은 멘셰비키 좌파는 아마 민주주의 혁명의 이상을 진지하게 붙잡았던 하나의 그룹이었을 것이다.

볼셰비즘이 갖고 있는 뚜렷한 특성은 공동의 견해를 함께 지닌 그들의 경쟁 정당에 대한 타고난 우위였다. 그 특성은 맑스주의 신념, 혁명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교의, 고집스런 국제주의, 사상과 행동의 통일이었다. 많은 개인 속에 이러한 사상과 행동의 통일은 그들 자신의 견해에 대한 강력한 신념과 함께 있었다.

1917년 맑스주의의 이상주의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느 정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는 달라졌고 사회 투쟁은 그들이 그때로 돌아와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동안 역사적경제적 현실에 대한 강한 인식에 중점을 두었던 이러한 이상주의는 그때와 환경에 적합했다. 그것은 그때의 자유주의적 표현, 이중거래, 자기 강화하는 미루는 짓, 책임성의 포기에 대한 해결방법을 포함한 것이었다. 온건 사회주의자들은 나라가 자본주의로 나아갈 수 있게 한 부르주아 혁명을 진행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정치 구조의 발전으로 반드시 이끌게 된다.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이러한 부르주아혁명을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사회주의가 그런 뒤떨어진 무대에서 일어날 수 없지만 사회주의 발전의 길에 들어선 러시아가 궁극적으로 유럽 노동계급을 위한 본보기가 될 것임을 믿었다. 1917년에 레닌은 모든 생산 수단에 대한 국유화를 계획하지 않았으나 그 대신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를 마음에 그리고 있었다. 나중에 레닌은 자본주의와 국가 통제로 이루어진 혼합 체제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섰다. 19187월에 비로소 내전의 발발은 수세적 필요로서 완전한 국유화를 강제하게 되었다. 볼셰비키가 지닌 타협하지 않은 국제주의는 러시아에서 혁명보다 훨씬 더 발전되고 훨씬 더 기름진 것으로 될 다가올 유럽 혁명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 의존했다. 앞날에 대한 이런 비전은 그들의 것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럽 사회주의가 함께 지닌 토대의 일부였다. 비록 실제로 거대 정당이 전체 혁명이라고 하는 이러한 구상을 이미 포기해버렸지만. 맑스의 독일 후계자인 칼 카우츠키는 1908년까지 이러한 혁명의 주요 이론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프란츠 메링, 칼 리프크네히트 모두는 같은 믿음을 지녔다. 볼셰비키가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혁명적 인텔리겐치아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발전했던 특수한 환경 때문에 생긴 심리적인 것으로 보였다. 차르 제국에는 의회주의적 기회주의와 일상적 타협이 자리할 공간이 없었다. 잔인하고 단순한 사회적 현실은 적극적이기도 하고 아울러 전체적이기도 한 신념을 생기게 했다. 이 점에서 볼셰비키는 좀 더 러시아적이었고 혁명적 사회주의자나 멘셰비키보다 러시아 대중의 기질에 훨씬 더 잘 어울렸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나 멘셰비키는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의 뜻에서 서구적이고, 진화론적 정서, 민주주의적인 특성을 몸에 익힌 당원을 지녔다.

 

 

.

 

이제 잘못과 실수라는 다른 문제로 넘어가보자. 이런 짧은 연구에서 볼셰비키-사회주의 혁명에 대항해 싸웠던 권력과 정당이 저지른 결점, 잘못, 범죄를 똑같이 헤아릴 수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유감스럽다. 그와 같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맥락이 빠진 가운데, 우리는 일방적인 견해와 똑똑히 싸워야 할 것이다.

1939년에 나는 파리에서 펴낸스탈린 초상(Portrait de Staline)에서 이렇게 썼다. “……정확히 그들의 역사에 대한 인식 때문에 사회주의자(볼셰비키)가 저질렀다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잘못은 반혁명, 투기, 간첩활동, 의무 불이행에 대한 탄압을 위한 비상 위원회의 창설이었다. 나중에 그 위원회는 체카로 짧게 줄여 불렸다. 그 위원회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즉 적어도 방어할 여지도 없는 피의자, 단순한 수상쩍은 사람에게 판결을 내렸다. 그들은 비밀리에 선고를 받았고 비밀리에 처형되었다. 취조가 아니라면, 이것은 무엇이었는가? 틀림없이 포위 상태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고 처참한 내전은 예외적인 조치를 강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사회주의자는 공개 재판이 독단적이고 부패한 행동에 맞선 하나의 보증임을 잊었다. 어떻게 푸키에탕빌(Fouquier-Tinville)이 쓴 임시변통 수단보다 훨씬 더 처진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이것은 틀림없이 실수이고 비난받아야 한다. 그 탓에 소름끼치는 결과가 나왔다. 체카의 훨씬 더 힘 있는 계승자인 GPU도 볼셰비키의 전체 혁명 세대를 뿌리 뽑았다. 어쨌든 사회학자의 눈으로 볼 때 그러한 환경은 실질적인 중요성을 띠었다. 젊은 공화국은 치명적인 곤경에서 살았다. 크라스노프와 코르닐로프와 같은 장군에 대한 공화국의 관대함은 피의 강으로 물들이게 하는 희생을 치렀다. 옛 정권은 또다시 테러의 이용에 호소했다. 191711월에 백군은 크렘린 병기고 노동자를 대량 학살함으로써 내전에서 테러를 이용하는 주도권을 잡았다. 1918년 첫 몇 개월 동안 핀란드 반혁명세력은 러시아에서 적색 테러가 선언되기 전에 테러를 이용했다. 18486월의 날들에서 시작한 19세기 사회 전쟁과 1871년 파리코뮌은 정복당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대규모로 없애버렸다는 것으로 특징지어졌다. 러시아 혁명가들은 자신들이 졌을 때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럼에도 체카는 처음부터 1918년 여름까지 상대적으로 너그러웠다. 반혁명 봉기가 터진 뒤, 볼셰비키 볼로다르스키와 우리츠키가 암살당하고 난 뒤, 그리고 레닌을 암살하려는 두 번의 시도가 있은 뒤, 체카가 적색 테러를 시작하고 인질과 수상쩍은 사람들, 적들을 총살하기 시작하자, 그것은 대중의 분노를 통제하고 다른 데로 돌리는 수단이 되었다. 제르진스키는 지역 체카의 과도함에 대해 걱정했다. 체키스트 자체의 통계는 이러한 공세가 매우 교훈적일 것으로 어림짐작 한 것이다. 최근에 나는 이 주제에 대한 작은 책, 사회혁명당 좌파인 스타인베르그가 쓴 어느 인민위원의 회고를 다시 펴 보았다. 그 책에서 나는 두 개의 의미 있는 이야기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음을 알았다. 1917년 말에, 총알 두 발이 레닌에게 발사되었다. 레닌을 암살하려 한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난 뒤, 노동자 대표가 레닌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반혁명가들이 당신의 피한방울을 흘리게 한다면, 페트로그라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백배로 보복할 것이다. 스타인베르그는 이 구상(암살)에 따라 레닌을 어떻게 없앨 것인지를 꼼꼼히 적었다. 극적 결과를 막으려고 사건은 특별히 비밀에 부쳤다. 나는 다른 자료를 통해 총을 쏘았던 두 명의 사회혁명당원이 체포되었지만 곧 풀려났다는 것을 알았다. 나중에 그들은 볼셰비키 지지자가 되었다. 두 명의 자유주의자인 전직 장관, 쉰가레프와 코코쉬킨은 감옥에 있는 동안 병을 앓았다. 그들을 병원으로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병원에서 그들은 자신의 침대에서 암살당했다. 레닌이 그 범죄에 대해 들었을 때, 그는 아주 충격을 받았다. 정부가 조사를 지시했고, 범인은 많은 동지의 지지를 받고 보호를 받았던 혁명적 수병이었음이 발견되었다. 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려는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수병들은 테러리즘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행동을 취했다. 사실 함대의 병사들은 암살자를 넘겨주길 거부했고 인민위원은 사건 전체를 잊어버리라는 강요를 받았다. 수병의 지지가 혁명에 아주 중요한 문제였을 때에, 그들은 자발적인 테러리즘 행동을 둘러싸고 갈등을 일으킬 수 있었겠는가?

1920년에 중요한 처벌은 러시아에서 폐지되었다. 그것은 내전이 거의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조짐이었다. 나는 당 내의 모든 사람이 정권의 정상화, 포위 상태의 종식, 소비에트 민주주의로 선회, 폐지가 아니지만 체카 권력에 대한 제한을 바랐다는 것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은 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은 혁명 그 자체가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피폐화된 나라는 재건을 시작하기만을 바랐다. 그 나라는 여전히 신념과 열광주의의 커다란 저수지였다. 1920년 여름은 혁명의 역사에서 중대한 순간이었다. 모든 러시아사람이 상황이 평화스러워지길 바랐던 때에, 필수드스키는 폴란드 군대를 우크라이나에 맞선 전장으로 몰아넣었다. 틀림없이 정복에 대한 열망 때문에 빚어진 이러한 공격은 영국과 프랑스가 크림 지방을 점령하고 있던 브랑겔 장군을 승인했던 것과 일치했다. 그것이 혁명에 끼친 나쁜 영향은 즉시 나타났다. 폴란드를 패배시킨 중앙위원회는 폴란드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레닌의 이러한 계획은 바르샤바 문 앞에서 붉은 군대가 패배함으로써 실패했다. 훨씬 더 나쁜 것은 고통스럽고 피로 더렵혀진 전쟁이 끝났음에도 나라가 황폐해졌고 파괴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거기에는 더는 주요 처벌을 폐지하거나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밑바탕으로 삼아 국가를 다시 세우는 일을 시작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비참과 위험은 주민을 참을 수 없게 하는 경제체제에서 당-국가를 불구로 만들었고 그것에서부터 전시 공산주의”(War Communism)라고 하는 체제의 운명이 정해져버렸다.

1921년 초에 크론슈타트 수병 봉기는 정확히 이러한 경제체제와 당 독재에 대항한 저항이었다. 봉기가 지닌 실질적 의도가 무엇이든지 간에, 당은 굶주린 국가를 통치할 수 없었고 그것의 인기를 지탱할 수 없었다. 대중의 자발적인 열광주의는 사라져 버렸다. 희생과 결핍은 혁명 안에서 여전히 적극적인 소수를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지독히 추운 겨울, 불충분한 배급, 전염병, 농촌에 대한 끊임없는 징발 등 이 모든 것은 곳곳에 비참함, 일종의 절망, 빵과 반혁명 사이의 이데올로기의 혼동을 퍼트렸다. 이런 상황에서 볼셰비키가 권력을 고삐를 놓아버린다면, 그들의 자리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 볼셰비키가 자신의 의무를 계속하지 않았다면? 사실 그들이 계속하는 것이 옳았다. 그들의 잘못은 크론슈타트 반란에 부닥쳐서 제정신을 잃었던 것이었다.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에 있었던 우리가 잘 알았듯이 크론슈타트 반란을 갖가지 방식으로 다룰 수 있었다.

권력의 잘못과 실수는 1921년 크론슈타트와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수병들은 칼리닌이 냉정하게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 설득과 이해가 필요했던 곳에,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은 위협과 모욕을 썼을 뿐이었다. 형제로 받아들이는 대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로 간 크론슈타트 대표들은 체카에 의해 모두 체포되었다. 갈등에 대한 진실은 당과 나라 전체에서 언론을 통해 숨겨졌다. 크론슈타트를 책임지고 있던 백군 장군 코즐로프스키가 말했듯이, 그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미국 아나키스트인 엠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이 선의에서 한 중재 시도는 거절당했다. 그 대신 대포가 동포들끼리 전투에 쓰였다. 체카는 나중에 죄수를 쏘았다. 만일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수병이 1918년 이래 바뀌었고 이제 후진적인 농민층의 열망 말고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았다면, 지배집단도 바뀌었다고 말해야 한다.

전시 공산주의의 폐지와 네프의 시작을 알리면서, 레닌은 전투와 대량학살이 끝난 뒤 크론슈타트 반란자가 내건 경제적 요구를 만족시켰다. 그럼으로써 그는 정권, 그리고 그 자신이 지킬 수 없는 처지에 빠졌음을 인정했다. 네프가 실시되자 농촌에서 징발이 폐지되었다. 그 대신 일종의 현물세가 들어섰다. 그것은 상업과 소규모 기업의 자유를 다시 세웠다. 다른 말로 하면, 네프는 생산과 교환에 대한 완전한 국가 통제를 통해 나라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누그러뜨렸다. 그와 함께, 인내와 화해를 통해 소비에트 헌법의 권위를 받아들이기로 했던 다른 사회주의자와 자유의지적 요소에 대한 정부정책을 자유화하는 것도 정상적이 되었다. 라파엘 아브라모비치는 올바르게 1921년에 이러한 노선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볼셰비키를 꾸짖었다. 그 대신 중앙위원회는 멘셰비키와 아나키스트를 불법화했다. 연립정부가 이 때 세워졌다면, 그것은 확실한 위험을 국제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 입증되었다. 그들은 결코 이러한 권력 독점을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사실 당과 노동계급 안에서 불만이 퍼지자, 중앙위원회는 그 순간부터 포위 상태임을 어쩔 수 없이 선언했다. 이러한 포위 상태가 당 그 자체에 미친 영향은 너그러웠던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계급 반대파는 비난당했고 숙청당했으며 추방당했다.

 

 

.

중앙위원회가 권력 독점을 유지하고 강화하도록 동기를 부여했던 좀 더 깊은 까닭은 무엇이었나?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시기 동안 볼셰비키는 자신들 말고는 그 누구도 믿지 못했다. 크론슈타트 사건에 의해 악화되었던 무거운 책임을 지닌 그들은 멘셰비키 사회민주주의자와 좌익 사회혁명적 농민당의 경쟁에 정치 무대를 열어놓길 두려워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볼셰비키는 세계혁명, 유럽에서 곧 닥쳐올 혁명, 특히 중유럽에서 혁명을 믿었다. 러시아에서 연립정부는 다가올 혁명을 안내하고 지시할 운명을 지녔던 코민테른을 약화시킬 수 있다.

아마도 여기서 우리는 레닌과 트로츠키 당의 가장 크고 무거운 잘못을 건드릴 것이다. 여기에는 언제나 창조적 사고, 진실, 잘못, 바람직한 사고, 주체적 직관 등 모두가 뒤섞여 있었다. 그 어떤 것도 기업에 대한 믿음 없이, 실체적인 당연한 일을 평가하지 않고, 성공을 바라지 않고, 문제적이고 불확실한 영역으로 들어서지 않고는 착수되지 않았다. 모든 행동은 알지 못하는 미래로 실질적이고/현재적인 순간에서부터 투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 태도에서, 정당한 행동은 맹목적으로 앞으로 내던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처지에서 본다면, 유럽 혁명의 교의는 정당한 것이었는가? 나는 우리가 그 문제에 만족스럽게 대응할 처지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지닌 하나의 의도는 그것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다.

안정적이고 점증하는, 상대적으로 평화적인 자본주의의 시기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끝났다는 것은 틀림없다. 전지구적 혁명적 시기의 개막을 알렸던 맑스주의 혁명가들은 사회주의가 적어도 유럽 강대국에서 스스로 세워지지 않는다면 또 다른 야만의 시기와 전쟁과 혁명의 순환”(엥겔스를 인용해서 레닌이 지적했던 것처럼)이 뒤따라 올 수 있다고 하는 옳았다. 미래의 부르주아 유럽에 대해 믿는 쪽을 선택했던 보수주의자, 진화론자, 개량주의자들은 베르사유에서 조심스럽게 칼로 조각을 내었고, 로카르노에서 완패했으며, 국제연합에서 밝혀졌던 문구로 진저리를 나게 했던 오늘날 눈 먼 정치의 정치인으로 기억되었다. 사회관계, 생산 관계의 지구적 전환이 아니라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국제 관계, 권력 관계, 사상과 관습에 대해서. 줄이면 세계혁명이 유럽에서는 시기상조였고 불확실했을 때 인도네시아에서 결정적이고 첨예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에도, 거대한 기술적 조류, 결정적인 국제적 책임, 모순적인 사회운동을 지닌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잘 조직된 공업국에 어울리게 특별한 지위를 지녔다. 다른 한편으로 일본이나 그리스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 절대 비밀로 소련의 시베리아 볼모지에 세워지고 있는 것, 트리에스터나 마드리드에서 일어나고 있거나 몰려들고 있는 것은 이러한 혁명의 겉모습이다. 볼셰비키 학파의 맑스주의 혁명가들은 노동대중의 자각과 새로운 사회의 합리적이고 공정한 재조직화를 통한 유럽과 세계의 사회적 전환을 기다리면서 활동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게 될 때를 기다리면서 계속 활동했다. 그때 그들은 잘못했고, 그들은 패배 당했다. 그 대신 세계의 전환은 제도, 운동, 믿음의 무서운 혼동 한 가운데서 기다리던 비전의 명쾌함 없이, 회복된 인간주의에 대한 의식 없이, 그리고 사람의 가치와 희망 모두를 위태롭게 하는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전반적 조류는 집단화와 경제의 계획화, 세계의 국제화, 억압당하고 식민화된 사람들의 해방, 그리고 새로운 종류의 대중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의 형성을 향해 1917~20년의 사회주의자들이 규정했던 경향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또한 대안을 내다보았다. 즉 야만주의와 전쟁, 전쟁과 야만주의는 두 개의 머리를 지닌 괴물이다.

볼셰비키는 예상한 독일혁명에서 러시아 혁명의 구원을 보았다. 이 점에서 그들이 잘못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사회주의 정권 하에서 농업 러시아와 공업 독일은 틀림없이 평화롭고 풍부한 발전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테제 하에서, 러시아는 발전하고 있는 내부 관료제에 의한 교살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은 나치즘의 어두운 밤과 재앙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확실히 세계는 다른 투쟁을 알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그러한 투쟁이 히틀러주의와 스탈린이즘이라는 소름끼치는 기계를 생산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그와 달리 모든 지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 갈 때 승리한 독일 혁명이 전체로서 인류의 사회적 진보를 풍부하게 해주었을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끈다. 여러 가지 있을 수 있는 역사의 가설에 대한 추론은 만일 우리가 과거를 이해하고 지금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알길 바란다면 적법하고 필요하다. 그런 추론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역사가 시간의 흐름에서 인간의 삶의 전개가 아니라 일련의 숙명론적이고 기계적인 발생 사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혁명을 위해 싸우면서 독일 스파르타쿠스단, 러시아 볼셰비키, 그리고 모든 그들의 전 세계 동지들은 지구 전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정치적 대변동을 막으려고 투쟁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이 다가오고 있었는지를 알았다. 그들은 해방에 대한 커다란 의지를 통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한 혁명가와 어깨를 맞대고 싸웠던 사람은 누구든지 그 점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역사에서 그 어떤 사람도 전체로서 인간의 대의에 그처럼 헌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1917~27년의 혁명가들에게 헤게모니와 세계 정복 열망을 귀속시키려 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지만, 어떠한 종류의 비참함과 이해관계가 역사적 진실이 지닌 특성을 빼앗으려는 그런 시도의 뿌리에 놓여 있는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때 볼셰비즘이 잘못한 것도 틀림없다. 유럽은 불안정했고, 사회주의 혁명이 이론적으로 가능하고 이성적으로 필요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서구에서 노동자 계급의 압도적인 다수는 투쟁을 뒷받침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그 대신에 전쟁 전 시기의 사회적 진보로 돌아가는 것을 믿었다. 그들은 위험에 연루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복지에 대한 감정을 간신히 생각해내었다. 온건하고 평범한 지도자들이 이끌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191811월에 쉽게 일어날 수 있었던 혁명이 치룰 희생을 두려워했다. 그 대신에 그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적인 길을 따르는 것을 선택했다. 우리가 볼셰비즘을 폭력을 통한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불러왔다고 꾸짖었을 때, 역사적 대안, 즉 독일에서 개량주의적이고, 온건한 사회주의의 길을 고려하는 것은 오직 올바른 것일 수 있을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다써버리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그러한 대안은 히틀러주의의 승리로 직접 이끌었다.

볼셰비키는 서구, 주로 독일 노동계급의 정치적 이해와 에너지를 잘못 보았다. 볼셰비키가 지닌 전투적 이상주의 때문에 생겨났던 이러한 실수는 가장 심각할 수도 있는 결과를 생기게 했다. 그들은 서구 노동계급과 접촉을 잃었다. 코민테른은 소비에트 당-국가의 창조물로 되었다. 마지막으로 일국 사회주의라는 그릇된 교의는 속임수에서 생겨났다. 스탈린주의화된 코민테른의 바보스럽기도 하고 형편없는 전술은 독일에서 나치즘의 승리를 촉진하게 되었다.

 

 

.

 

러시아 혁명에 대한 첫 설명은 1927년쯤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10년이 흘렀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1920~21년 이래 공산당의 독재, 즉 그 자체로 볼셰비키 친위대”(Bolshevik old-guard)의 독재로 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친위대는 오히려 뛰어난, 즉 지적이고 이타적이며, 적극적이고 완고한 엘리트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성취한 결과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해외에서 소련은 인정받았고 존경과 흔히 감탄의 대상이었다. 국내에서, 전쟁 시기에 파괴에서부터 경제는 이용할 수 있는 재원이 거의 없었지만 대중의 에너지를 통해 되살아났다. 집단화된 생산의 새로운 체제는 낡은 자본주의 생산을 대체했고 꽤 잘 작동하고 있었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투쟁에서 승리하고 조직하며, 생산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노동자에 대한 새로운 믿음과 새로운 존엄감은 뿌리내렸다. 부르주아 철학에서 인간에 내재되었다고 생각한 사유재산에 대한 본능은 자연스럽게 멸종하는 길에 있었다. 농업은 평균 수준으로 재건되었고 1913년 수준을 뛰어넘기 시작하고 있다. 노동자의 봉급은 1913년보다 아주 높았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평가는 틀림없이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재건설이 아니라 공업(자동차, 항공, 화학, 알루미늄, )의 진전과 새로운 발전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제 활력을 되찾은 농업 부문과 상대적으로 약한 공업 부문 사이의 불균형을 고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소련은 고립되었고 위협을 받고 있다. 소련의 방어를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 맑스주의자는 전쟁을 금지한브리앙-켈로그 조약에 환상을 갖지 않았다. 정권은 갈림길에 있다. 당은 권력 투쟁으로 갈기갈기 찢어졌고 예전 권력이 세워놓은 강령을 둘러싸고 -볼셰비키를 서로서로 경쟁시킨 투쟁으로 찢어졌다. “영웅적 시기의 후계자 가운데 가장 명석한 사람들은 트로츠키의 주의에 몰려 재그룹화되었다. 그들은 전술적 실수를 할 여지도 있고, 완전하지 못한 이론을 지닐 수도 있으며, 머뭇거릴 여지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이 지닌 용기와 장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공업화와 계획화의 필요, 뿐만 아니라 반동 세력, 무엇보다 관료제와 싸울 필요를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전투적 국제주의와 정권의 민주화의 명백한 필요를 알고 있다. 그들은 서기들의 위계제를 통해 패배 당했다.

사회주의 이상에 대한 헌신을 뚜렷이 보여준 소련의 몇 천 명의 설립자는 권력에서 쫓겨나 감옥에 갇히거나 추방되었다. 그들이 비난당했던 것은 모순적이고 아무런 뜻도 없었다. 중요하고 지배적인 사실은 1927~1928년에 당 내에서 쿠데타 세력때문에 혁명적 당-국가가 관료주의적 경찰국가로 되었다는 것이다. 그 국가는 혁명의 이상에 대해서는 모든 중요한 점에서 반동적이었다. 이데올로기적 변화는 야만스럽게 빠르게 일어났다. 공직에서 태어난 죽은 슬로건인 맑스주의는 생각하는 사람의 비판적 맑스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지도자 숭배가 시작되었다. “일국사회주의는 지도자 숭배를 통해 자신들이 지닌 새로운 특권을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신참자들의 표어가 되었다. 정권의 반대자들이 고뇌에 찬 짧은 생각에 동의했던 것은 새로운 나타나고 있는 국가, 전체주의 정권의 단면이다. 트로츠키주의 반대파를 적대한 많은 구 볼셰비키, 즉 부하린, 릐코프, 톰스키, 류틴은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자마자 소름끼쳤고 저항할 시기를 놓쳐버렸다. 너무 늦었다.

전체주의에 맞선 혁명 세대의 투쟁은 1927년에서 1937년까지 10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러한 투쟁이 취한 혼란스럽고 때때로 일치하지 않은 방법은 투쟁이 지닌 실질적인 중요성을 우리에게 비밀로 해서는 안 된다. 투쟁을 이끈 지도적인 인물은 서로 서로 반목했고, 싸웠으며, 화해하기도 했고, 심지어 배반했다. 그들은 길을 잃었고, 독재 앞에서 굴욕감을 느꼈으며 폭력배의 허를 찌르려고 애썼고 스스로를 지치게 했으며, 죽기 살기로 반란을 일으켰다. 전체주의 정권은 그들을 서로 대항하는데 이용했다. 이 모든 것은 그들 정신에 영향을 남겼기 때문에 훨씬 더 효과가 있었다. 화석화된 당과 혁명에 대한 애국심, 헌신, 실질적 결과, 위대한 미래에 대한 커다란 비전, 공통의 위험 의식, 이 모든 것은 심지어 가장 명석한 정신 속에도 현실감각을 없애버렸다. 이 모든 것에도, 구 사회주의 볼셰비키가 대표했던 혁명 세대의 저항은 참 완고했고, 그러한 저항은 1936~38(모스크바 재판 시기)에 새로운 정권이 자신을 굳히려고 제거되어야 할 운명인 전체 세대에 필요한 것이었다. 이것은 역사에서 가장 피로 더렵혀진 탈취였다. 볼셰비키는 첫 10년의 업적 때문에 망했다. 유기체와 사회의 순환적 발전을 연구한 두 명의 미국 사상가가 그러한 업적을 바라보면서 “1917~18년에, 러시아가 팽창과 성장의 시기에 들어섰고, 그 때문에 지금(1940년대) 러시아가 지구의 강력한 국가 가운데 가장 젊은 국가로 서게 만들었다”(Edward R. Dewey & Edwin F. Dakin, Cycles, New York, 1947)고 지적했을 만큼, 그러한 업적은 실질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스탈린주의적 전체주의가 러시아의 새로운 활기를 어떻게 약하게 만들었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이와 관련해서, 달린(David J. Dallin)은 우리에게 하나의 지표를 준다. 1차 세계대전 동안, 러시아는 연합국의 30%에 맞먹는 주민을 잃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는 1,200~1,600명이나 연합국의 80%에 이르는 사람의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전장에서 붉은 군대는 침략국의 병사들의 죽음보다 4배 많은 병사를 잃었다.

러시아 혁명이 터졌을 때, 모든 혁명정당이 이용할 수 있는 실질적으로 조직된 당원은 제국 주민의 1%도 못되었다. 이러한 1% 가운데 볼셰비키는 오직 하나의 분파를 이루었다. 이러한 아주 적은 사람은 자신의 목적에 이바지했고 탈진해버렸다. 191710-11월 혁명은 젊은 사람의 당에 의해 인도되었다. 그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레닌은 47살이었다. 트로츠키는 38, 부하린은 29,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34살이었다. 10년에서 20년 뒤,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은 나이 든 세대가 했다. 그리고 이 세대는 권력의 특권에 매수된 젊은 경찰-관료제의 무게에 굴복하지 않았지만, 대중의 수동성 때문에 무너지기 직전에 지쳐 떨어졌다. 대중은 테러주의 정권 때문에 영양부족상태에 있었고 불구가 되었으며, 선전에 취해 있었다. 게다가 나이 든 세대는 외부세계에서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다. 그들이 소련 안에서 저항하고 있는 동안 전 세계의 반동세력은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었다. 위대한 민주주의자들은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화해했거나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인민전선의 수명, 서구 노동계급의 후위 투쟁은 나치즘, 파시즘, 프랑코의 동맹을 통해 스페인에서 박살났다. 바로 그 순간에 스탈린의 폭력배는 러시아에서 볼셰비즘을 청산하려고 움직이고 있었다.

 

 

.

 

승리하여 의기양양한 첫 10년과 뒤이은 암흑의 10년 뒤에 우리가 러시아혁명에서 방어할 것은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역사적 경험, 아주 당당한 회고록 이것들은 이미 행운이 될 것이다. 그러나 볼셰비즘의 교의와 전술은 비판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나는 연구실이 현장에 대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생산 체제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가 저절로 나타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도덕적이고 정치적 방식으로 헤게모니의 포기를 뜻하는 게 아니라면. 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다시 나타날 것이고 미래의 투쟁에서 확실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틀림없이 미래에는 이런 저런 종류의 혁명적 독재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경우에 노동자 운동의 역할이 이러한 정부의 민주적인 성격을 보증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프롤레타리아트 단독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노동자와 심지어 민족들을 위해서. 이런 뜻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더는 우리의 목적일 수 없다. 우리가 이바지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혁명은 오직 사회주의적그 말의 인간주의적 뜻에서, 또는 좀 더 정확히 민주주의적이고 자유의지적인 수단을 통한 사회화한(socializing) 것일 수 있다. 러시아의 국경을 넘어, 당에 대한 볼셰비키 이념은 완전히 실패했다. 다양한 이해관계와 심리적 배경은 불쌍한 부하린이 그렇게 당당하게 칭찬했던 이상에 헌신했던 동질적인 전투가 집단의 그룹화를 불가능하게 했다. 중앙집중주의, 규율, 그리고 지도된 이데올로기는 비록 우리가 조직적 틀을 필요로 하는 것이 나쁘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건강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이것에서 러시아인들이 지지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역사의 저항할 수 없는 아이러니를 통해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사슬 말고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누군가 달린과 보리스 니콜라예프스키(Boris I Nikolaevski)가 쓴 객관적이고 타협하지 않은 저작 소련에서 강제노동(Forced Labor in the Soviet Union)을 곧 프랑스어로 번역해주길 바란다. 그 책은 우리에게 1928, 즉 소련의 테르미도르 동안 GPU 강제노동수용소에는 약 3,000이 못 되는 사람이 갇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오늘날 스탈린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몇 백만의 노예가 갇혔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가장 적절한 평가는 1,000 또는 1,200만 명이다. 즉 이들 저자에 따르면, 적어도 성인 남성 인구의 16%(그리고 아주 낮은 비율의 여성)이다. 최근에 대중(Masses)에서 나는 이러한 수치가 지닌 결정적인 중요성을 낮게 보았다. 주민의 15%에 달하는 사람들이 유럽인의 생활수준과 같은 것을 누리는 특권을 지녔다고 보면서, 나는 “7% 특권 노동자, 15% 천민, 78%가 비참과 가난에 살고 있는 착취당한 사람들이었음을 알았다. 사람들은 그러한 사회체제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방어할 가치가 있는가?

러시아의 국경을 넘어, 이러한 강제노동수용소 소우주”(concentration-camp universe)의 영향은 유럽에서 사회주의와 사회적 재조직화의 발전을 봉쇄하게 되었다. 따라서 비극은 러시아 하나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이다. 이러한 과정의 논리적 결론은 제3차 세계대전일 것으로 보인다. 다른 가능성이 가까워 있는 한, 우리는 체념하고 재앙적 결과에 맡겨서는 안 된다. 국제 사건에서 스탈린주의 정권의 공격성은 내부 상황의 중력을 통해 결정된다. 이러한 정권에 맞서 러시아와 비러시아 대중이 반란을 일으킬 잠재적 경향은 공격(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소련 침공-옮긴이)이 시작될 때 그들의 패배주의와, 그들이 침략자(독일군-옮긴이)를 해방자로 환영했던 방법을 통해 입증되었다. 그것은 또한 승리에 뒤따랐던 곤경”, 그리고 블라소프(Vlasov) 군대의 운동을 통해 입증되었다. 그것은 독일군의 포로가 된 2~3십만 명을 통해, 그리고 강제노동수용소가 꽉 들어찬 것을 통해 입증되었다. 나는 전체주의 정권이 반란의 훌륭한 공장이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것은 러시아 사람들이 지닌 혁명적 전통 때문에 훨씬 더 그럴 것이다.

러시아 대중의 사기에 대한 문서자료는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정권의 철의 장악 속에서, 누군가 러시아를 알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듯이, 여전히 중요한 생명력(활기)이 있다. 일하고 건설하고 발명하고 관리하고 있는 사람의 9/10는 비록 그들의 사슬이 부서졌지만 노동자 민주주의에서 적극적인 시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전쟁을 막으려고 사회주의 러시아를 위해 제때에 그들의 사슬을 부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스탈린주의 정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회주의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을 지닌 억압받는 대중을 얼마나 설득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반동의 강력한 세력은 러시아에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리고 심지어 비러시아 사람들 사이에서 훨씬 더 쉽게 반동 세력이 나타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오랜 동안 범 이슬람주의의 영향에 배여 있었던 중앙아시아 무슬림들 사이에서. 그럼에도 나는 억압이 가장 잔인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 동안 소련에서 실행한 나의 관찰을 바탕으로 삼아 커다란 다수가 틀림없이 공식 사회주의(official socialism)의 사기 행각을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제로 돌아가는 것도 심지어 자본주의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러시아에서 일어난 국가가 통제한 생산을 통해 얻어진 발전이 아주 높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그때 유럽 전체에서 국유화와 계획화 바람이 일어났다.) 진짜 러시아 민주주의는 생산자의 이익에서 사회화된 생산을 재조직하는 데서 건강과 효율성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생산의 기술적 명령은 사회정의에 대한 열망과 공동체의 이익에 따라 경제를 또 다시 세울 수 있는 새로 발견된 자유와 결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이고 깊이 느낀 희망이 우리에게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잃지 않았다.

 

 

빅토르 세르주

멕시코,

19477~8

Michel Bolsey가 불어본을 영어로 옮기다.

 

 

 

옮긴이: 정인

 

 

 

 

 

'실천지 (2007년) > 2007년 10월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일혁명과코민테른  (0) 2014.12.15
(그림) Spartacist  (0) 2014.12.15
kronstadt1  (0) 2014.12.15
IBT  (0) 2014.12.15
Anarcho  (0) 2014.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