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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2007년)/2007년 10월호

Anarcho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4:08

1921 크론슈타트: 볼셰비키 신화가 끝나다.

 

아나르코

 

 

크론슈타트의 무용담은 러시아혁명의 소우주이다. 그것은 권위에서부터 상대적인 독립을 유지했던 1917년 자유로운 코뮌을 형성한 소비에트 권력을 지지했고 실천했다. 크론슈타트 수병은 1905년과 1917년의 혁명적 사건의 전위에 있었다. 트로츠키는 그들을 러시아혁명의 자부심이자 영광으로 불렀다. 1921년에 그와 레닌은 그들이 일으킨 반란을 분쇄했다. 아나키스트들에게, 크론슈타트는 볼셰비즘이 사회주의의 진짜 형식이었다는 신화를 들춰낸 사건이다. 크론슈타트는 러시아혁명의 죽음을 특징지었다.

 

 

 

반란이 일어나다.

 

19212/3월의 반란은 고립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러시아 내전은 크림 지역에서 브랑겔 장군이 패배함으로써 192011월에 러시아 서부 지역에서 끝났다. 러시아 대중 저항은 농촌과 작은 도시와 대도시에서 일어났다. 농민봉기는 공산당의 식량징발정책에 맞서 일어나고 있었다. 도시 지역에서, 자발적인 파업의 물결이 일어났다. 크론슈타트는 이러한 파업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3명의 방어 위원회가 페트로그라드에 형성되었고 지노비예프가 224일에 계엄령을 선언했던페트로그라드로 퍼지기 전에, 파업은 모스크바에서 시작되었다. “밤사이 페트로그라드는 무장 캠프가 되어 버렸다. 도시의 모든 구역에는 나다니는 사람이 없었고 검문이 있었다.…… 통행금지가 엄격히 강화되었다.” 페트로그라드 체카는 많은 사람을 체포했다.(Avrich, Kronstadt 1921, pp. 35-9 and pp. 46-7.)

226일에, 이러한 파업의 물결에 대응하여, 전함 페트로파블로프스크와 세바스토폴에 있는 병사들은 비상 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상황을 조사하고 되돌아 와 상황을 보고하려고 도시로 대표자를 보내는 데 동의했다. 2틀 뒤 돌아온 대표자들은 파업과 파업자에 대한 정부의 탄압을 동료 수병에게 알렸다. 그들은 페트로파블로프스크에서 열린 회의에 출석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15개의 요구 조건을 담은 결의안을 승인했다.

 

1. 즉각 새로운 소비에트 선거. 지금 소비에트는 더는 노동자와 농민의 바람을 표현하지 못한다. 새로운 선거가 비밀 투표로 열려야 하고 투표가 있기 전에 먼저 자유로운 선거전이 있어야 한다.

2. 노동자와 농민, 아나키스트, 좌익 사회주의당에게 말할 자유와 언론의 자유.

3. 집회의 권리, 노동조합과 농민 조직의 자유.

4. 1921310일을 마지막으로 열린 페트로그라드와 크론슈타트, 페트로그라드 구역의 당원이 아닌 노동자와 병사와 수병들의 대회의 조직화

5. 사회주의 정당의 모든 정치범, 그리고 노동자계급과 농민 조직에 속한 감옥에 갇힌 모든 노동자와 농민, 병사, 수병들의 석방

6. 감옥과 강제노동수용소에 갇힌 모든 사람들과 관련된 서류를 검토할 위원회 선출

7. 군대에 있는 모든 정치 분파 폐지. 어떤 정당도 자신의 이념을 선전하는 특권을 지녀서는 안 되거나 이러한 목적을 위해 국가의 보조금을 받아서는 안 된다.

8. 도시와 농촌에 있는 민병대의 즉각 폐지

9. 위험하거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빼고 모든 노동자에게 배급을 같게 할 것.

10. 모든 군사 조직에서 당 전투 요원 파견을 폐지할 것. 공장과 기업에서 당 수비대의 폐지. 만일 수비대가 필요하다면, 그들은 노동자의 처지를 고려하여 지명되어야 한다.

11. 농민들이 토지와 가축을 스스로 돌보고 세습 노동에 고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농민들에게 그들 자신의 토지에서 행동의 자유와 자신의 가축을 키울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

12. 우리는 모든 군대의 병사와 장교 훈련 집단이 이런 결의에 결합할 것을 요청한다.

13. 우리는 언론이 이런 결의를 적절히 알릴 것을 요구한다.

14. 우리는 비숙련노동자의 통제 집단의 제도를 요구한다.

15. 우리는 만일 수공업이 인정받았다면 임금노동을 쓰지 말 것을 요구한다. [Ida Mett, The Kronstadt Revolt, pp. 37-8]

 

 

31일에 15~16만 명이 모인 대중 집회가 열렸고 페트로파블로프스크 결의(Petropavlovsk resolution)라고 알려진 것이 통과되었다. 오직 두 명의 볼셰비키 장교가 결의안에 반대했다. 크론슈타트 소비에트의 엄무 기일이 거의 끝나갈 때, 대증 집회는 32일에 대표자 대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했다. 이 대회는 배의 승무원, 군대, 부두, 작업장, 노동조합과 소비에트 제도 각각에서 두 명씩 뽑은 대표들로 이루어졌다. 이 대회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결의안을 시인했고 5명의 임시 혁명 위원회”(Provisional Revolutionary Committee) (이틀 뒤 또 다른 대회에서 15명으로 늘어났다)를 뽑았다.

붉은 크론슈타트는 공산당 정부에 맞섰고 1917년 혁명의 슬로건 당이 아니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내걸었다. 그들은 이 반란을 3의 혁명으로 보았고 자유롭게 뽑히고 자주 관리되는, 즉 소비에트를 바탕으로 삼은 진짜 피착취계급의 공화국을 세움으로써 1917년에 일어난 두 번째 러시아 혁명의 작업을 완결할 것이다. 공산당 정부는 32일에 최후통첩으로 대응했다. 이것은 반란이 틀림없이 프랑스 반혁명첩자에 의해 준비되었고페트로파블로프스크 결의가 사회혁명당-검은 백인대”(SR-Black Hundred) 결의였다고 평가했다. 그들은 망명한 코즐로프스키 장군이 이끈 망명한 차르 장교들이 반란을 조직했다고 주장했다. 코즐로프스키는 얄궂게도 트로츠키가 임명한 군사 전문가로서 요새에 있었고 반란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크론슈타트 반란이 평화적이었던 반면, 볼셰비키의 대응은 그렇지 않았다. 실질적인 반란의 출발을 알린 32대표자 대회뒤 얼음이 녹기까지는 적어도 3~4주가 있었던 반면에, 볼셰비키는 37일 오후 645분에 군사작전을 시작했다. 빅토르 세르주에 따르면, “당장에는 옳았다, 갈등을 쉽게 누그러뜨릴 수 있었을 때, 볼셰비키는 강제적 방법 말고는 다른 것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Victor Serge, Memoirs of a Revolutionary, p. 127)

반란은 고립되었고 외부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는 계엄령 하에 있었고 크론슈타트를 지원하는 데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했다. 힘과 선전, 경제적 양보 등이 어우러져 정부는 파업을 분쇄했다. “질서를 되찾는 어쩔 수 없는 과제를 지닌 당국에 의한 지칠 줄 모르는 선전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군사력의 투입과 광범위한 체포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이와 관련해서 인상적인 것은 지역 당 조직이 보여주었던 규율이었다. 그들의 내부 논쟁은 제쳐두고,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는 재빠르게 불쾌하지만 탄압의 임무를 수행했다.”(Avrich, Kronstadt 1921, pp. 48-50.)

공산당 정부는 37일에 크론슈타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0일 동안 벌어진 공격 뒤에 크론슈타트 반란은 붉은 군대에 의해 진압 당했다. 다음날,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볼셰비키는 파리 코뮌 50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크론슈타트를 공격한 이 해는 앞으로 레닌주의자들이 스탈린이즘에 의한 1956년 헝가리 봉기 진압 50주년을 기념할 것이다.

패배당한 수병들은 혁명에 몸을 바쳤다: 그들은 러시아 사람들의 고통과 의지를 대변했다.” 하지만 수백 명의 죄수는 페트로그라드로 이송되었다. 몇 개월 뒤 그들은 총살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의미 없고 범죄적인 고통을 받았다.” “볼셰비키 중앙 위원회의 책임은 너무 컸고” “뒤 이은 탄압은 …… 쓸데없이 야만적이었다.” (Serge, Memoirs of a Revolutionary, p. 131, p. 348.)

레닌주의자들은 처음부터 그것을 거짓으로 선전했다. 오늘날 레닌과 트로츠키의 추종자들은 여전히 똑같은 거짓을 되풀이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혁명가들에게 크론슈타트가 왜 중요하고 그것이 지닌 교훈이 무엇인지를 토론하기 전에 이러한 주장을 되받아치는 것이 필요하다.

 

 

백군 반란?

 

처음부터 볼셰비키는 봉기에 대해 속였다. 그들은 반란을 백군이 이끌고 조직했던 것으로 그리려고 시도했다. 세르주는 크론슈타트가 백군의 손아귀에 있고 반혁명 장군 코즐로프스키가 음모와 배반을 통해 크론슈타트를 장악했다고 선전한 포스터가 텅 빈 거리에 있는 벽에 나붙었다.”는 것을 그가 처음 들었다고 회고했다. 나중에 거짓으로 도배한 언론이 만들어놓은 연막을 뚫고 진실이 서서히 퍼져 나갔다.” 볼셰비키 언론은 체계적으로 거짓말을 했고공식 노선은 형편없는 거짓이었다. 사실 수병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그것은 소비에트가 이끈 해군 반란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나쁜 것은 우리가 공식 왜곡을 통해 불구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우리 당이 이처럼 우리를 속이는 것은 전에 결코 없었다. ‘그것은 대중의 이익을 위해 필요했다.’ …… 페트로그라드에서 파업은 이제 전반적이었다.” (Serge, Memoirs of a Revolutionary, pp. 124-6)

심지어 아이작 도이처도 볼셰비키가 크론슈타트의 수병들을 백군 장군이 이끈 반혁명적 폭동자로 비난했다. 비난은 근거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The Prophet Armed) 레닌은 315일 열린 제 10차 당 대회에서 그들이 백군 수비대를 바라지 않았고, 그들은 우리 권력을 바라지도 않았다.”(Avrich, Kronstadt 1921, p. 129)

 

백군의 음모?

 

크론슈타트에 대한 사실이 좀 더 잘 알려졌을 때, 반란에 대한 레닌주의자들의 주장은 바뀌었다. 그들은 백군 반란이라기보다는, 반란이 백군 음모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수병들은 음모자들에 의해 잘못 지도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증거는 없다. 트로츠키는 “2월 중순크론슈타트에서 일어난 봉기에 대한 외국 신문의 보도를 지적했고 이것이 예정된 러시아 반혁명 조직가의 작업을 입증했다고 주장했다. “급보를 기초로 하여그는 나의 해군 동료에게 경고했다. (Lenin and Trotsky, Kronstadt, p. 68)

이러한 주장의 진실을 알기 위해 볼셰비키가 크론슈타트 봉기에 대한 이러한 발표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검토하는 것도 하나의 사례이다.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라이트(J. G. Wright)는 트로츠키의 처지를 감싸면서 붉은 군대 사령부폭동 때문에 수비대를 통제하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Lenin and Trotsky, Kronstadt, p. 123.) 이것은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신문보도가 얼마나 가벼웠는지를 또렷이 보여준다.

백군 음모의 증거로서, 이러한 증거는 형편없다. “러시아에 대한 잘못된 소식을 펴내는 것이 전혀 예외적이지 않았다. 그런 소식은 크론슈타트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나 일어나고 있을 때, 일어나고 난 뒤에서 나왔다. …… 이러한 종류의 증거를 바탕으로 삼는 것은 인정할 수 없고 비도덕적이다.”(Mett, The Kronstadt Uprisings, p. 76.) 레닌과 트로츠키 모두 제국주의 언론이 러시아에 대한 많은 허구의 보도를 내보냈다는 데 동의했지만, 크론슈타트에 대한 보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주장했다.(Lenin and Trotsky, Kronstadt, p. 69, p. 50 and p. 51) 왜 반혁명 음모자가 그들의 적에게 자신들의 계획에 대한 사전 통지를 주었는지에 대한 문제는 그들의 정신을 결코 방해하지 못했다.

몇 십 년이 지나고 나서 폴 애브리치는 일급비밀이라는 딱지가 붙고 크론슈타트에서 봉기를 조직하는 문제에 대한 각서라는 제목을 단 서명 없는 손으로 쓴 초고를 발견했다. 그러나 문서를 재빨리 읽어보면 크론슈타트가 백군의 음모의 산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애브리치는 그들이 이러한 계획을 효과 있게 만들 수 있는 시간을 지니지못했다고 주장하면서 각서에 나타난 설명을 잘못된 것으로 생각했다. “폭발은 음모의 기본 조건이 …… 충족될 수 있기 몇 주 전에 곧 일어났다.” 그는 망명자가 반란에 힘을 주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반란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발적이고 자기억제적인 운동이었다. 게다가 반란은 망명자들을 쩔쩔매게 만들었고” “그 어떤 것도 …… 비밀 각서를 이행하지 못했으며 저자의 경고는 완전히 확증되었다.”(Paul Avrich, Kronstadt 1921, pp. 106-7, pp. 111-2, pp. 126-7, p. 212 and p. 123) 만일 크론슈타트가 백군의 음모였다면 어떻게 음모가는 불의의 습격을 당했는가?

마지막으로 우리는 크론슈타트 혁명 위원회의 위원이 약 8,000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핀란드로 도망쳤다는 사실에 대해 논평해야 한다. 이것은 그들이 그곳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백위대”(white guardist)에 가담하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소비에트 러시아에 있는 어느 곳이든 볼셰비키 감옥과 끝내 죽음이 기다릴 뿐이다.

 

 

백군의 위협

 

크론슈타트 반란 동안 외국의 간섭이 없었던 것은 반란이 백군의 음모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준다. 백군이 반란의 이득을 볼 처지에 있지 않았거나 그것을 지지할 처지도 아니었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이것은 소비에트 국가가 백군과(또는) 외국간섭의 위협에 있었기 때문에 볼셰비키와 그들의 지지자들은 반란을 탄압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첫째, 크론슈타트 반란은 서부 러시에서 내전이 끝나고 나서 몇 개월 뒤에 일어났다. 브랑겔은 192011월에 크림에서 도망쳤다. 볼셰비키는 백군이 다시 공격할 까 두려워 아예 1921년 초에 붉은 군대의 절반(2,500,000)을 무장해제 해버렸다. 두 번째, 러시아 망명자들은 아무런 협력에 대한 전망 없이 이전보다 훨씬 더 분열되었고 영향이 없었다.” 세 번째, 마지막 백군 장군 브랑겔에 관한 한, 자신의 병력으로 러시아를 다시 침공할 처지에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병력은 흩어졌고 도덕적 사기를 잃었으며” “그의 병력을 동원하고 지중해에서 발트 해로 이송하는 데만도 ……몇 개월걸릴 것이다. 남쪽에서 제2전선은 거의 확실한 재앙을 뜻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35일에 페트로그라드 방어 위원회가 한 호소에는 그들이 반란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굶주림과 질병 때문에 수천 명씩 파리처럼 떼죽음 당하고 있다는 브랑겔의 병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당신들은 듣지 못했는가?”(Avrich, Kronstadt 1921, p. 13, p. 219, p. 146 and p. 105)

틀림없이 백군이 공격할 가능성은 아주 적었다. 이것은 자본주의 정부의 문제를 남겨놓는다. 애브리치는 그들 자신의 적극적인 기금 모금 캠페인과 별도로, 망명자들이 추축국의 지원을 얻으려 했다. …… 내전 동안 간섭주의 정책을 다시 펼치는 것을 지긋지긋해 한 미국정부가 모든 그런 호소에 귀머거리가 되기로 했다. 영국의 지원 가능성이 너무 희미했고 …… 외국 지원의 최고의 희망은 프랑스에서 나왔다. …… 프랑스는 위기에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간섭하는 것을 거절했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정부는 또한 “192011월에 브랑겔의 효력을 잃은 정부에 대한 승인을 취소했지만, “그에게 해산할 것을 설득하면서도 인간적 이유에서 자국 군대를 계속 공급했다.” (Avrich, Kronstadt 1921, pp. 117-9 and p. 105)

따라서 외국의 간섭이 근거 없는 것으로 보였다는 주장이다. 레닌 스스로도 316일에 볼셰비키 국가를 둘러싼 적들더는 그들의 간섭 전쟁을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Lenin and Trotsky, Kronstadt, p. 52)

 

 

농민 반란?

 

레닌주의자들에게 반란이 농민이나 꿀락의 반란이었고 따라서 그것을 즉석에서 해산시켜야 한다는 것은 공동의 생각이다.

하지만 반란의 사건과 페트로파블로프스크 결의안에 대한 피상적 분석은 독자들에게 그것이 꿀락의 문서(“kulak” document)였다는 레닌주의적 주장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 “꿀락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정의에 따르면, 그 용어는 토지를 소유했고 토지에서 일할 가난한 농민을 고용한 부자이다. 크론슈타트 요구조건의 제11조는 그와 반대로 또렷이 농촌의 임금 노동을 진술한 것이다. 토지에 고용된 임금 노동의 폐지를 요구했을 때, 어떻게 크론슈타트가 꿀락을 대표할 수 있는가? 얄궂게도 레닌이 실시한 네프는 임노동을 허용했고 따라서 꿀락의 이해관계를 대표했다.

그렇기 때문에 요구조건은 농민층(꿀락이 아닌)의 이해관계를 요구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요구조건이 공업 노동자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아야 한다. 만일 그 요구조건이 공업 노동자와 다른 프롤레타리아트의 인자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다면, 그땐 우리는 이러한 주장을 쉽게 걷어치울 수 있다. 요구조건은 크론슈타트 반란보다 먼저 일어났던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 파업 동안 제기되었던 것을 그대로 되풀이 한 것이다.(Avrich, Kronstadt 1921, pp. 42-3) 따라서 크론슈타트 요구가 농민의 필요를 반영하고 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그 요구는 내전 시기 내내 파업에서 끊임없이 이러한 요구를 제기했던 도시 노동계급을 포함한 전체 노동 인구의 필요를 반영한 것이다.

 

 

농민 출신 수병(Peasant sailors)?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탄압을 정당화하려는 가장 공통적인 주장은 트로츠키의 주장이다. 1921년 수병들이 1917년의 수병과 달랐다고 주장한다. 트로츠키는 발트 함대의 선원들이 어쩔 수 없이 줄어들었고따라서 1917년의 많은 혁명적 수병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고 진술하면서, 반란 동안 이러한 정당화 근거를 처음 내놓았다. 그들은 우연적인 요소에 의해 대부분 대체되었다. 이것은 크론슈타트를 고른” “반혁명적 조직가의 활동을 촉진했다.” (Lenin and Trotsky, Kronstadt, pp. 68-9)

최근 연구는 트로츠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게츨러(Getzler)192111일에 발트 함대에서 일한 선원들 가운데 적어도 75.5%1918년 전에 징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80%가 넘는 수병은 대 러시아 지역 출신이었고, 우크라이나 출신 10%와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폴란들 출신이 7%였다. 따라서 노련한 정치적인 붉은 수병이 여전히 1920년 말에 크론슈타트에서 우세했다.” 그는 또한 페트로파블로프스크와 세바스토폴의 선원들을 조사했다. 그 결과 결론은 이와 같다. 언제 어디서 징집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2,028명의 수병 가운데 93.9%1917년 이전과 1917년 혁명 동안 충원되었다. 그런 수병 가운데 6.8%만이 1918~1921년에 충원되었다.[Getzler, Kronstadt 1917-1921, pp. 207-8] 게다가 혁명 위원회의 다수는 크론슈타트 소비에트와 10월 혁명의 베테랑이었다.

왜 수병들이 남게 되었는가? 가장 뚜렷한 까닭은 크론슈타트에 있는 공산주의자 사령관이 페트로그라드를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남겨 두길 바라지 않았던 것이었다. 또한 크론슈타트의 배와 방어는 수병이 거기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 아주 높은 기술적 지식과 경험의 수준을 필요로 했다. 게다가 다른 전선으로 보냈던 수병들이 1919년 말 경에 되돌아왔다. [Getzler, Kronstadt 1917-1921, p. 208 and pp. 197-8]

 

 

크론슈타트: 1917 1921

 

이러한 개인들의 연속성은 반란의 정치에 반영되었다. 1917년에 크론슈타트는 결코 볼셰비키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그들은 크론슈타트에서 늘 소수였다. 오히려 사회혁명당 최대강령파와 사회혁명당 좌파의 급진적 인민주의 동맹”(radical populist coalition of Maximalists and Left SRs)이 비록 위태롭지만 크론슈타트와 크론슈타트 소비에트 내에서 지배했다. (“대외적으로 크론슈타트가 볼셰비키 정권의 충성스러운 버팀목이긴 했지만.”[Getzler, Kronstadt 1917-1921, p. 179]

심지어 10월 혁명에서 볼셰비키가 압도하지 않았다. 소비에트 다수파는 사회혁명당 최대강령파와 사회혁명당 좌파로 이루어졌다. 19181월 선거에서 볼셰비키는 의석의 46%를 얻음으로써 자신들의 지위를 좀 더 개선했다. 소비에트는 여전히 자신의 의장을 사회혁명당 좌파를 의장으로 뽑았고 최대강령파, 아나키스트와 볼셰비키를 소비에트 제4차 대회로 파견했다. 19184월 선거가 열릴 쯤, 러시아의 대부분 지역에서 볼셰비키가 자신들에 대한 지지가 줄었음을 알게 되었다(29%로 떨어졌다). 그들의 영향력은 418일에 크론슈타트 소비에트가 모스크바에 있는 아나키스트에 맞선 볼셰비키의 공격을 비난했을 만큼 약했다. [Getzler, Kronstadt 1917-1921, pp. 182-4]

정치적으로, 1917년 크론슈타트의 분위기는 사회혁명당에서 떨어져 나온 좌파, 즉 사회혁명당 최대강령파의 정치에 훨씬 가까웠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사회혁명당 좌파와 아나키스트 사이에 있었다. 그들은 당 권력이 아니라 소비에트 권력, 그리고 볼셰비키의 국가 자본주의보다 노동자의 자주 관리(workers' self-management)를 주장했다. 그들은 당 분파주의를 거절했고” “순수한 소비에트주의를 지지했다.” 그들은 사회주의를 향한 첫 단계로서 직접 선거와 즉각적인 소환을 바탕으로 삼은 소비에트의 연방에 의해 조직될 토지와 공장에 대한 권력의 사회화”(socialisation of power, of the land and of the factories)를 요구한 직접적인 농촌과 도시 사회혁명을 추구했다. [Getzler, Kronstadt 1917-1921, p. 135]

이러한 정치적 전망은 1921년에 다시 나타났다. “거의 모든 중요한 점에서 크론슈타트 강령은 반란자들이 펴낸 이즈베스치야(Izvestiia)에 제시되었듯이 최대강령파의 계획과 일치했다.”[Avrich, Kronstadt 1921, p. 171] 1917년과 1921년에 수병들의 연속성을 감안하면, 이것은 예상될 수 있는 것이었다. 1917년에 아나키스트와 준-아나키스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면 1921년에 똑같은 정치적 이념은 크론슈타트 시민들이 볼셰비키 독재에서 스스로를 해방시켰을 때 또 다시 전면에 나타난 것이었다.

 

 

페트로그라드와 크론슈타트

 

레닌주의자들에게, 반란 동안 페트로그라드 노동자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것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계급적 관점에서 이러한 결정적인 나날 동안에 크론슈타트의 행동을 페트로그라드의 행동과 견주어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봉기는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를 끌어들이지 못했다. 봉기는 그들을 퇴짜 놓았다. 계층화는 계급노선을 따라 이루어졌다. 노동자는 즉시 크론슈타트 반란자가 바리케이드 반대편에 서 있다는 것을 느꼈다. …… 그리고 그들은 소비에트 권력을 편들었다. 크론슈타트의 정치적 고립은 내부의 불확실성과 군사적 패배 때문이었다.(Lenin and Trotsky, Kronstadt, pp. 90-1)

 

그러나 트로츠키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 그의 독자들의 지적 능력을 욕보였다. 트로츠키는 분명히 사실을 일부러 왜곡하고 있다.”[Emma Goldman, Trotsky Protests Too Much] 만일 볼셰비키가 노동계급에 의존했다면, 그 뒤 그들은 페트로그라드를 무장 캠프로 전환할 수도, 파업을 억압할 수도, 계엄령을 부과할 수도, 전투적 노동자를 체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포위 상태는 크론슈타트를 분쇄하고 난 뒤 5일 지난 322일에 마침내 제거되었다.

 

 

혁명 때문에 너무 지쳤는가?

 

모든 거짓과 비방이 옳았다고 하자마자, 레닌주의자들은 여전히 반란을 분쇄한 것을 지지하려고 한다. 빅토르 세르주는 이러한 관점을 가장 또렷이 표현했다.

 

 

나라는 소진되었고, 생산은 실제로 정지되었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비축되지 못했고 심지어 대중의 마음속에 끈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구체제에 맞선 투쟁에서 형성된 노동계급 엘리트는 문자 그대로 많이 죽었다. 당은 권력을 쫓는 사람들의 유입을 통해 몸집이 불어났고 신념을 불어넣지도 못했다.……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지도력, 제도, 영감이 모자랐다.

대중적 반혁명은 자유롭게 선출된 소비에트에 대한 요구를 공산주의자 없는 소비에트에 대한 요구고 전환되었다. 볼셰비키 독재가 무너진다면, 그것은 혼란으로 이어질 뿐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혼란을 거쳐 농민 봉기, 공산주의자에 대한 대향학살, 망명자들의 귀환, 그리고 결국에는 사건의 공백을 이용해서 또 다른 독재, 즉 이번에는 반-프롤레타리아트적인 독재가 들어설 것이다.(Serge, Memoirs of a Revolutionary, 128-9)

 

 

다른 말로 하면, 나라는 내전 때문에 힘을 다 써버렸고 아나키스트는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면서 볼셰비키에게 반란을 진압하도록 강제한 객관적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는 혁명이 부닥친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때 페트로그라드에 있었던 베크만은 오랜 전쟁, 혁명, 시민투쟁으로 러시아는 소진되었고 러시아인들은 절망을 자락으로 떨어졌다고 지적했다. [The Russian Tragedy, p. 61] 러시아에 있는 모든 노동자, 농민, 수병들처럼, 아나키스트들도 재건설이 하룻밤 새에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크론슈타트 반란자들도 이것을 인정했고 기계적이고 정부적인 공산주의적건설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새로운 사회주의 건설을 주장했다. [No Gods, No Masters, vol. 2, p. 194]

그렇다, 러시아 노동계급이 부닥친 문제는 아주 어려웠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는 그때 러시아 전체에서 파업을 일으킨 수 천 명 노동자를 빼고 그 누구에 의해서도 풀릴 수 없었다. “만일 프롤레타리아트가 지쳐버렸다면, 어떻게 가장 커다랗고 가장 중요한 공업 도시에서 총파업을 일으킬 수 있었겠는가?” [Ida Mett, Op. Cit., p. 81]

아나키스트들에게 문제는 이러한 재건설을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노동계급의 저항과 집단행동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조짐을 분쇄했던 독재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사회주의 방식으로 다시 건설될 수 있을까. 러시아에는 재건설을 위해 두 개의, 즉 위로부터나 아래로부터 나온 가능성이 있다. 필요로 하는 것과 그것을 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데 노동대중의 직접 참여를 포함한 것이라면, 그러한 재건설은 본질에서 사회주의적일 수 있다. 관료주의적, 위에서 아래로 재건설은 소수에게 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사회를 재건설할 수 있다. 일어난 것은 어느 것이었는가.

크론슈타트 반란을 방어했고 볼셰비키의 행동을 반대했던 아나키스트와 자유의지론적인 사회주의자들은 크론슈타트의 3혁명이 완전히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실리가(Ante Ciliga)는 이렇게 말했다.

 

 

일반적으로 퍼져 있는 마지막 비난을 고려해보자. 즉 크론슈타트에서와 같은 행동이 간접적으로 반혁명 세력을 자유롭게 해준다는 것. 노동자 민주주의의 기초 위에 스스로를 위치지음으로써 혁명은 타도될 수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은 실제로 가능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혁명이 지쳐버렸고 자신의 지도자의 정책 때문에 지쳐버렸다는 것이다. 러시아 공산당에 의한 크론슈타트에 대한 탄압, 노동자 민주주의와 소비에트에 대한 탄압, 공업의 관리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제거, 네프의 도입은 이미 혁명의 죽음을 뜻했다.[Kronstadt Revolt, p. 335]

 

 

 

크론슈타트의 3의 혁명은 패배로 귀결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1917년이 그랬던 것처럼 가능한 것이다. 한 가지, 즉 볼셰비키 독재를 지탱함으로써 러시아혁명이 분쇄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독재가 스스로를 개혁한다?

 

좌익 반대파3혁명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 당 독재의 자기 개혁일 수 있다고 시도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독재가 스스로를 개혁할 수 있는가?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이미 심각한 수준의 부패, 관료제, 전제정으로 특징 지워진 국가 내부에서 당에 대한 통제되지 않는 독재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인가? 역사는 스탈린이 등장함으로써 답변했다. 좌익 반대파는 레닌과 트로츠키가 1921년에 씨를 뿌렸던 농작물을 거두어들였다.

좌익 반대파가 대안의 많은 것을 드러내지도 못했다. 한 번도 그들은 당 독재가 필요한 것인지 문제 삼지 않았다. 당 독재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위해 통치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보장은 당의 좋은 계획일 수 있다. 그러나 대중에게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보장은 가치 없는 것일 수 있다. 역사가 보여주고 있듯이, 크론슈타트는 그런 정치의 명백한 최종 결과이다.

레닌주의자들이 크론슈타트가 반혁명에 문을 열어줄 수 있었다고 주장했을 때, 그들은 볼셰비키가 반혁명적이었고 그들의 정권이 세르주가 말한 -프롤레타리아트적독재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왜 크론슈타트가 중요한가

 

크론슈타트는 1917년 혁명을 만들어냈던 병사와 수병, 노동자와 똑같은 사람들에 의한 아래로부터 일어난 대중봉기였다. 크론슈타트에 대한 탄압은 볼셰비즘이 사회주의 사회를 창조할 수 없고 오직 당 독재에 바탕을 둔 국가 자본주의 정권을 창출할 수 있는 결점을 지닌 정치 이데올로기임을 입증한 것이다. 이것은 크론슈타트가 보여준 것이다. 즉 노동자 권력과 당 권력 사이의 선택이 주어졌다면, 볼셰비즘은 당 권력을 확보하려고 노동자 권력을 파괴할 것이다.

이 점에서, 크론슈타트는 따로 떨어진 사건이 아니다. 볼셰비키 국가는 191710월 이래 계속해서 반혁명적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크론슈타트는 소비에트 민주주의와 권력을 위해 레닌주의적 주장을 죽이려는 마지막 시도였다. 내전은 끝났지만, 정권은 달라질 조짐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정권은 내전이 시작되기 전에 실시되었던 권위주의와 탄압을 계속 이어갔다.

비슷하게, 레닌주의자가 자신들의 권력과 크론슈타트에서 한 행동을 옳다고 하는 것은 현재의 활동과 미래의 혁명에 직접적인 함의를 지닌다. 이러한 합리성의 논리는 그저 오늘날 레닌주의자들이 같은 처지에 있다면 소비에트 권력”, 즉 그들 당의 권력을 방어하려고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파괴하게 될 것임을 뜻한다.

쟁점은 사회주의가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을 뜻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단순하다. 레닌주의자들이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한 것은 그저 볼셰비즘의 추종자들에게는 필요하다면 당이 온정주의적으로 그들 자신의 선을 위해 노동계급을 탄압하게 될 것임을 뜻한다. 만일 당 지도자가 대중에 의한 결정을 잘못된 것으로 결정한다면, 그때 대중은 짓밟히고 탄압 당한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또는 노동자의 권력을 요구하면 그런 일을 당한다.

크론슈타트는 레닌주의의 실재와 그것의 수사 사이의 충돌이었다. “크론슈타트 경험은 이름이나 형식이 어떠하든 국가가 자유와 대중의 자기 결정에 대한 치명적인 적이라는 것을 한 번 더 입증한 것이다. 국가는 영혼도 원칙도 갖지 않았다. 국가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권력을 확보하고 권력을 유지한다는 하나의 목적을 지녔을 뿐이다. 바로 그것이 크론슈타트가 남긴 정치적 교훈이다.” [Berkman, The Kronstadt Rebellion, p. 89]

 

 

참고문헌

An Anarchist FAQ”와 거기에 나온 보론 Kronstadt Rebellion

Paul Avrich, Kronstadt 1921, W.W. Norton and Company Inc., New York, 1970.

Israel Getzler Kronstadt 1917-1921: The Fate of a Soviet Democracy,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83.

Ida Mett, The Kronstadt Uprising, Solidarity, London, date unknown.

Alexander Berkman, The Kronstadt Rebellion: The Russian Tragedy, Pluto Press, London, 1989.

Daniel Guerin (ed.), No Gods, No Masters, vol. 2, AK Press, Edinburgh/San Francisco, 1998.

Emma Goldman, Trotsky Protests Too Much

Anton Ciliga, Kronstadt Revolt, The Raven, no, 8, Freedom Press.

Lenin and Trotsky, Kronstadt, Monad Press, New York, 1986.

Victor Serge, Memoirs of a Revolutionary, 1901-41, 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1963.

 

 

 

옮긴이: 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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