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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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2007년)/200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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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4:25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의 강령

 

1. 당과 강령

 

" 노동계급의 이해는 강령 (program) 의 형태로만 올바로 표현될 수 있다. 그리고 강령의 내용은 당을 건설하는 것을 통해서만 옹호될 수 있다. 노동계급은 그 자체로는 착취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이해를 옹호하는 정치적 계급으로 변모하는 순간 노동계급은 독자적인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것은 오직 당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당은 노동계급이 계급의식을 획득하는 역사적인 기관이다"--- 트로츠키 , [ 다음에는 무엇이 ?(What Next?)], 1932

 

노동계급은 현대사회에서 철저히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다. 즉 국제 자본주의 질서의 광기를 끝장낼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유일한 계급이다. 노동계급 특히 노동계급의 가장 중요한 부위인 공업노동자들이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인식하여 계급의식으로 각성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공산주의 전위당의 기본 임무이다. 따라서 비노동계급에게서 사회 진보의 추동력을 찾는 중도주의자, 개량주의자, 문화주의자, 부문주의자 등이 제시한 모든 전략들을 명백히 거부해야한다 .

 

노동계급의 해방, 그리고 이와 함께 모든 형태의 사회적 억압의 물질적 기반을 제거하는 과업은 지도력에 달려있다. 잠재적인 " 사회주의적" 지도부들의 다양한 강령들은 개혁과 혁명이라는 두 가지 종류의 강령으로 집약된다. 개량주의는 계급사회의 불평등을 점차 개선하겠다는 실제적인 전략을 제시한다. 그러나 개량주의는 노동계급을 자본의 이해에 화해시키는 기능밖에 하지 못한다. 이와 비교하여 혁명적 맑스주의는 자본가 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에 존재하는 이해의 근본적 적대관계에 기초하고 있다 . 그리고 의미 있는 사회 진보의 전제조건으로 부르조아 계급이 소유하고 있는 사회적 생산수단을 노동계급이 몰수해야할 필요성에 기초하고 있다 .

 

다양한 형태의 부르조아 이데올로기가 노동계급을 지배하는 것을 통해 자본주의는 자신의 지배력을 가장 강력하게 유지한다. 미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역사적 지도자였던 제임스 케넌 (James P. Cannon) [ 미국 공산주의 운동의 첫 10 ](The First Ten Years of American Communism) 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자본주의의 위력은 자본주의 자체에 또는 자본주의가 보유하고 있는 제도에 있지 않다. 노동계급의 조직들 속에서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살아남을 수 있다. 러시아 혁명과 그 여파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듯이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10 분의 9 는 노동자 정당 등 노동자 조직 내부에서 부르조아 계급의 영향력에 대항하는 일에 바쳐지고 있다 ."

 

혁명 조직과 중도주의 또는 개량주의 조직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정치적 최종목표에 대한 추상적인 언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이 제기하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각 조직이 제시하는 입장의 차이에 있다 . 개량주의자들과 중도주의자들은 새로운 상황에서 대중의 환상과 고정관념에 영합하여 강령을 만들어 낸다 .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가의 역할은 노동자와 피억압 인민들에게 이들이 아직 알고 있지 못한 것을 말해주는 데에 있다.

 

" 강령은 노동자의 후진성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객관적인 과업들을 표현해야 한다 . 강령은 후진성을 극복하고 정복하는 도구이다. ( )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객관적인 상황들을 연기시키거나 수정할 수는 없다. 대중들이 위기를 해결할 것이라고 보장할 수는 없다. 다만 현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강령의 과업이다."--- 트로츠키 , [ 미국 노동자들의 정치적 후진성 ], 1938

 

혁명적 강령에 기초한 분파 (caucus) 를 노동조합 내에 구성하는 것을 통해서 노동계급 내부에 공산주의 강령을 뿌리내려야 한다. 공산주의 분파는 노동자의 부분적 개선을 위한 모든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 또한 " 파업 방위선(picket line) 은 건너지 말아야 한다 !" 등의 전투적 전통들을 가장 강인하게 옹호해야 한다 . 동시에 협소한 작업장 내의 전투성을 넘어서서 초미의 관심을 끄는 정치적 문제들을 다루는 세계관을 가지고 정치적으로 가장 의식이 높은 노동자들을 조직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 결국 자본가의 이윤을 위한 생산의 무정부성을 제거하고 대신에 인간의 필요에 부응하는 합리적이며 계획된 생산체제를 수립할 필요성을 노동자들에게 각인시켜야 한다.

 

노동계급 대중조직에 대한 개입은 1938 년 제4 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채택된 이행기 강령의 내용에 기초해야 한다 . 어떤 의미에서 " 완성된 강령 " 이란 맑스주의자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50 년간 진행된 역사 발전을 분석하고 1938 년 이행기 강령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노동계급 부문들 그리고 피억압 인민들의 구체적 투쟁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 . 그러나 그 핵심적인 내용에 있어서 이행기 강령은 모든 면에서 여전히 유효성을 간직하고 있다 . 노동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해야할 필요성의 맥락에서 오늘날 노동계급이 당면하고 있는 객관적인 문제들을 사회주의적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연속혁명(Permanent Revolution)

 

지난 500 여년 동안 자본주의는 국제분업에 기초하여 단일한 세계경제 질서를 구축하여 왔다 . 우리는 현재 자본주의가 쇠퇴해 가고 있는 제국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신식민지 세계의 민족부르조아지가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의 역사적 과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없음을 20 세기의 경험들은 이미 증명하였다. 이런 나라들에게는 대개의 경우 독자적으로 자본주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있지 않다.

 

신식민지 나라들에서 고전적인 부르조아 혁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소유관계를 분쇄하고 제국주의 세계시장의 촉수들을 잘라내어 노동계급에게 고유한 집단적 소유체제를 확립해야 한다 . 민족부르조아지와 대지주들에 대항해서 수행되는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만 생산력을 질적으로 높일 수 있다 .

 

부르조아 계급의 소위 " 진보적" 분파에 노동계급을 종속시키는 스탈린주의 / 멘셰비키 식의 "2 단계" 전략을 거부해야 한다 . 모든 나라에서 노동계급은 완전하고도 무조건적인 정치적 독립성을 확보해야 한다 . " 3 세계 " 민족부르조아지는 예외없이 제국주의 지배의 하수인의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리고 제국주의 세력의 이해는 신식민지의 피착취 인민보다는 세계 주요 도시의 은행가와 실업가의 이해와 더욱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

 

민족의 주권을 위해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쁘띠부르조아 민족주의 운동이나 심지어는 부르조아 정권에 대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정치적 지지가 아니라 군사적 지지를 보낸다. 예를 들어 1935 년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탈리아군의 침략에 저항한 이티오피아의 군사적 승리를 주창했다. 그러나 레닌주의자들은 두 부르조아 국가들이 서로 싸우고 있을 때 이들 국가들의 상대적인 발전수준에 의거하여 자동적으로 입장을 정할 수는 없다 . 1982 년 포클런드(Faukland) 전쟁에서 아르헨티나의 주권은 결코 위협에 처해 있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닌주의자는 영국과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이 " 총뿌리를 돌려 " 양국 지배계급을 혁명적으로 패배시킬 것을 촉구한 바 있다.

 

 

3. 게릴라 노선

 

혁명은 노동계급 대중의 봉기를 통해 성공할 수 있다. 게릴라 노선은 때때로 보완적 전술일 수는 있어도 결코 혁명전략이 되어서는 안된다. 게릴라 노선이 전략이 될 경우 정치의식이 있는 조직노동자들은 수동적인 방관자의 역할 밖에 할 수 없다 . 급진 쁘띠부르조아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농민 게릴라 운동은 이 운동 지도부의 주관적인 의도와는 달리 노동자 정치권력을 결코 수립할 수 없다.

 

유리한 객관적 상황이 주어질 경우 이러한 운동이 성공적으로 자본주의 소유체제를 뿌리뽑을 수 있다는 사실이 제 2 차 세계대전 이후 여러 번에 걸쳐 입증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조직 노동자계급에 기반하지 않기 때문에 기껏해야 러시아 혁명의 스탈린주의적 퇴보와 질적으로 유사한 민족주의적 관료주의 정권 ( 예를 들어 , 유고슬라비아 , 알바니아, 중국 , 월남, 쿠바 ) 을 수립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 기형화된 노동자 국가 (deformed workers state)" 는 노동계급의 정치혁명으로 보완되어야 사회주의적 발전의 길을 열 수 있다.

 

 

4. 특별한 형태의 억압 : 흑인문제와 여성문제

 

오늘날 노동계급은 인종, , 민족 등으로 깊이 분열되어 있다 . 그러나 인종주의, 국수주의, 성차별 등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길들여진 행동 양식이다. 전세계 노동자들은 현재 자신들의 의식수준과는 무관하게 핵심적인 공통점을 하나 가지고 있다 . 즉 모든 형태의 억압과 착취의 사회적 기반을 일소하지 않고서는 노동계급은 근본적으로 자신들의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노동계급이 계급사회를 제거하며 이를 통해 모든 형태의 초계급적 즉 " 특수한" 억압들을 일소하는 역사적 임무를 가지고 있다는 맑스주의자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물질적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있다.

 

미국의 경우 노동자 권력을 향한 투쟁은 흑인해방 투쟁과 분리할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 흑인 노동자와 백인 노동자 사이의 인종적 분리는 역사적으로 계급의식의 발전에 가장 주요한 장애가 되어왔다. 미국 흑인들은 하나의 민족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피부색에 의해서 구분되어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사회집단에 불과하다. 이들은 강제적으로 사회의 밑바닥 생활을 하도록 분리되어 있으며 절대 다수가 노동계급에 속한다. 특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분야들의 공업노동자들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 " 자유인의 나라 (the land of the free)" 에서 폭력과 학대에 시달리고 있으며 체계적으로 차별을 받고 있다. 역사적으로 다수 백인 노동자들에게 침투하여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종주의에 이들은 비교적 덜 감염되어 왔다 . 흑인 노동자들은 일반적으로 노동계급의 가장 전투적인 부위임을 입증해 왔다 .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서 매일처럼 발생하는 인종주의 폭력에 대항해서 흑인을 해방시키려는 투쟁은 북미 대륙의 혁명적 전위당 건설투쟁에서 핵심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 기타 소수인종 특히 수가 점점 증대하고 있는 중남미계 인종 등에 가해지고 있는 특별한 억압에 대항한 투쟁은 미국의 사회주의 혁명에서 또다른 중요한 역할을 점하고 있다 .

 

여성의 억압은 핵가족의 존재라는 물질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 . 핵가족은 부르조아 사회체제의 기본 단위이다. 여성의 완전한 사회 평등을 향한 투쟁은 전세계 모든 나라의 혁명운동에서 전략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 이와 밀접하게 연관된 특별한 억압이 동성연애자들에게 가해지고 있다 . 이들은 핵가족이라는 " 정상적 현상 " 에 의해 강요되어진 성 역할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고 있다. 동성연애자의 문제는 여성문제처럼 전략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 그러나 공산주의 전위당은 동성연애자들의 민주적 권리를 옹호해야 하며 이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모든 차별조치들에 대해 반대해야 한다 .

 

노동조합에 소속된 모든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직종에 누구나 동등하게 참여할 기회 , " 남성이 독점하는" 분야에서 여성과 소수인종들을 채용하고 훈련하는 프로그램, 동일 노동에 대한 동일 임금 등을 주창한다. 동시에 노동조합운동이 역사적으로 획득한 연공서열 체계를 옹호한다. 그리고 선택적 해고와 같이 노동자를 분열시키며 노동조합을 파괴하는 조치들을 반대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인위적으로 조장하는 노동자 분열장치들에 맞서서 계급의 공동 이해를 도모하고 노동계급을 단결시킬 투쟁을 수행하는 것은 공산주의 전위당의 역사적인 책임이다. 이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모든 인민에 대한 차별과 불공정에 대항하여 가차없이 투쟁하며 가장 억압받고 착취받는 자들의 이해를 증진해야 한다 .

 

피억압 계층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없이 자신들을 해방할 수 없다. 즉 이들의 억압을 발생시키고 영구화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틀 내에서는 이들의 해방이 가능하지 않다 . 레닌은 [ 국가와 혁명 ] 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대규모 생산과정 내에서 수행하는 경제적 역할때문에 노동계급만이 모든 근로인민과 피착취 대중의 선두에 서서 투쟁할 수 있다. 부르조아 계급은 이들을 노동계급보다 더욱 착취하고 더욱 억압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해방을 위해서 독립적인 투쟁을 수행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

 

우리는 계급사회에서 살고 있으며 모든 사회운동의 강령은 결국 사회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어느 한쪽의 이해를 대변한다. 노동조합에서 부르조아 이데올로기는 협소한 경제주의로 나타나며 피억압 계층의 운동에서는 부문주의 (sectoralism) 로 나타난다. 흑인 민족주의, 페미니즘, 기타 다른 형태의 부문주의 이데올로기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전제는 억압의 근원이 자본주의 소유체제가 아니라 다른 데에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계급을 포괄하는 부문 운동에 대해서 맑스주의 전위당은 그 운동 내부의 계급분화가 촉진되도록 투쟁한다. 이 결과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망을 획득하고 다양한 부문의 인자들이 결합된 전위당 건설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

 

 

5. 민족과 " 혼합민족" 의 문제

 

" 맑스주의는 민족주의와 화해할 수 없다. 심지어 ` 가장 정당하고', ` 가장 순수하고', 가장 세련되고 품위있는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 모든 형태의 민족주의에 대항하여 맑스주의는 국제주의를 주창한다 "--- 레닌 , [ 민족문제에 대한 비판적 언급 ]

 

맑스주의와 민족주의는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세계관이다. 우리는 모든 나라 사이의 평등한 지위를 옹호해야 하며 어떤 나라의 특권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동시에 맑스주의는 모든 형태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한다. 레닌의 말에 의하면 " 강제와 특권에 기초하지 않은 모든 종류의 민족간 교류와 동화 " 를 환영한다. 민족문제에 대한 레닌주의자의 강령은 부정적인 성격을 띤다 . 즉 계급 문제를 좀더 명확하게 부각시키기 위해 민족문제를 사안에서 제외시키려고 노력하며 쁘띠부르조아 민족주의자들의 호소력을 무력화시키는 데에 중심이 맞추어져 있다 .

 

퀘벡의 경우와 같이 어느 민족이 억압당하는 " 고전적인" 경우에 있어서는 자결권을 옹호한다. 그렇다고 이 자결권이 반드시 행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키프로스, 북아일랜드, 팔레스타인 / 이스라엘 등과 같이 같은 지역에서 두 민족이 혼합되어 사는 좀더 복잡한 경우가 있다 . 이 경우에는 자본주의 소유관계의 틀 내에서 각 민족의 자결권이 동등하게 행사될 수가 없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억압민족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이나 알제리를 식민지로 통치하던 프랑스인과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다. 후자는 현지 노동자들의 악랄한 초과착취를 통해 이들과 질적으로 다른 높은 생활수준을 영위하는 특권집단이다 .

 

아일랜드의 개신교도들과 이스라엘의 히브리어 사용 인구들은 모두 계급으로 분화된 민족들이다. 이들은 모두 부르조아 계급 , 쁘띠부르조아 계급, 그리고 노동계급을 포괄하고 있다 . 죄책감에 사로잡힌 중간계급의 도덕주의자들과는 달리 레닌주의자는 억압받는 민족의 민족주의를 단순히 지지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민족주의를 옹호하는 쁘띠부르조아 정치집단들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할 경우 억압받는 민족 내부의 계급모순을 활용할 가능성을 스스로 봉쇄하게 된다 . 이 결과 억압받는 민족에 대한 민족주의자들의 헤게모니를 영속시킬 수 있다. 그리고 억압하는 민족 내부의 노동계급은 억압받는 민족의 민족주의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이 계급투쟁의 전망을 가지고 자신들의 객관적 이해를 위해 투쟁하도록 공산주의자는 노력해야 한다 .

 

쁘띠부르조아 민족주의에 투항하여 전세계 좌익의 대부분은 1948 , 1967 , 1973 년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아랍국의 통치자들을 지지하였다. 아랍국의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말에 의하면 " 아랍혁명" 을 실현시키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중동전쟁은 자본주의 지배계급들 사이의 전쟁으로 이 지역의 노동계급과 피억압 근로인민은 어느 쪽이 승리하더라도 얻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따라서 레닌주의자는 양국 모두의 패배를 주창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아랍 노동계급과 히브리 노동계급에게 진짜 적은 자기 나라 내부의 자본가 계급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56 년의 중동전쟁은 상황이 달랐다. 이스라엘의 도움을 받아서 프랑스와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당시 이집트에 의해 국유화되었던 수에즈 운하를 다시 점령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이집트의 통치자 나쎄르가 무력으로 저항하였다. 이 경우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아랍 민족주의자 나쎄르에게 군사적 지지를 표명하는 것이 레닌주의자의 올바른 노선이었다 .

 

민족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레닌주의자에게는 하나의 원칙이다. 그러나 억압받는 민족과 억압하는 민족의 국가기구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을 때 레닌주의자는 결코 중립을 지킬 수 없다 . 북아일랜드에서 우리는 영국군이 즉시 무조건 철수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아일랜드 공화군(Irish Republican Army) 이 영국경찰, 영국 군대, 보수당 내각이 회의를 하기 위해 소집된 브라이튼의 호텔을 공격하는 것을 옹호한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군대에 대항해서 투쟁하는 팔레스타인 민족해방기구를 군사적으로 지지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우리는 민간인에 대한 테러행위는 옹호할 수는 없다. 물론 팔레스타인 민족에 대한 이스라엘 국가기구의 범죄적 테러행위, 북아일랜드 구교도에 대한 영국군대와 그 신교도 동맹자들의 테러행위 등은 억압하는 민족 소속 민간인에 대한 테러행위보다는 훨씬 극악하다. 그러나 억압하는 민족의 민간인은 국가기구에 의해 억압받고 있으며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피해자이므로 이들에 대한 테러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6. 이민정책

 

어느 누구도 세계 어느 곳이든 원하는 나라로 이주할 수 있는 민주적 기본권을 가지고 있다 . 이 기본권을 레닌주의자는 지지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민주적 권리들과는 달리 언제나 지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퇴보한 또는 기형화된 노동자국가의 군사 안보에 위협을 초래할 개인들의 이민은 지지될 수 없다. 개인의 이민권이 대규모로 행사될 경우 작은 나라의 자결권을 침해할 수도 있다. 따라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 국경의 개방 " 을 일반적 강령의 내용으로 인정할 수 없다. 예를 들어 1930 년대와 1940 년대에 시온주의 유태인들의 대대적인 유입으로 팔레스타인 민족은 살던 땅에서 강제적으로 추방당했다. 따라서 우리는 티베트에 한족이 그리고 뉴칼레도니아에 프랑스인들이 무제한적으로 이주하는 것을 지지할 수 없다.

 

" 국경의 개방 " 이라는 요구는 대개의 경우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으나 현실에 대한 혼란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자유주의자 / 급진주의자들이 제기하고 있다 . 이들은 제국주의 세계질서가 초래하는 끔찍한 불평등을 고쳐보자는 유토피아적 생각을 가지고 있다 . 그러나 대대적인 이주가 아니라 세계 사회주의혁명만이 자본주의 하에서 온갖 고통과 빈곤에 처한 대다수 인류의 해방을 가능하게 한다 .

 

미국에서 우리는 경찰에 의해 체포된 멕시코 노동자들을 옹호한다. 모든 이주 할당제(immigration quota) 를 반대하며 이민 노동자들에 대한 체포와 강제추방을 반대한다. 노동조합에서 우리는 외국에서 태어난 모든 이민 노동자들에게 즉시 무조건적으로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할 것을 요구하며 이의 실현을 위해 투쟁한다.

 

 

7. 민주집중제

 

상부 기구들이 하위 기구와 조직원들을 지도할 완전한 권한을 갖는 엄격한 중앙집중주의적 조직활동이 혁명조직에게는 반드시 요구된다. 조직원들의 공개 정치활동에 대해서 조직은 완전한 정치적 독점권을 행사해야 한다 . 대신 조직원들에게는 완전한 분파활동이라는 민주적 권리가 인정된다. 분파활동은 조직 내부의 정치투쟁을 통해 지도부의 노선을 수정하거나 지도부의 퇴진을 가져올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조직 내부의 민주주의는 단순한 장식물이거나 평조직원들의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안전밸브도 아니다. 혁명적 전위당이 복잡한 계급투쟁의 현실을 완전히 이해하고 필요한 행동을 취하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요소이다. 그리고 분파활동의 자유는 혁명적 중핵을 양성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전위당 내부의 수정주의에 대항해서 투쟁할 권리는 분파 결성으로 나타난다. 분파 결성이라는 민주적 권리는 혁명조직의 정치적 퇴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 보장책" 이다 .

 

조직 내부의 중요한 정치적 견해 차이를 얼버무리고 정치적 분파의 구분을 흐리고자 하는 시도는 혁명조직을 약화시키고 혼란에 빠뜨릴 뿐이다. 정치적 차이를 명확히 하기 보다는 편의에 입각하여 이것을 얼버무리는 외교술, 견해의 최대공약수에 따라 정치적 이견을 해소하려는 시도, 그리고 강령적 내용의 애매모호함 등은 계급투쟁의 첫 시련이 닥치면 조직을 산산조각 내어 버린다. 따라서 원칙에 입각하여 강령적 내용을 토론에 의해 합의해내고 정치적 명확성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혁명조직의 활동을 위해 필수적이다. 한편 견해 차이의 표현이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금지된 혁명조직은 경직되고 활기가 없는 관료주의적 종파로 전락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노동자운동으로부터 유리되면서 혁명적 전위당의 과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중핵의 재생산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

 

 

8. 인민전선

 

" 현재 존재하는 문제들 중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민전선이다 . 좌파 중도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전술이나 심지어는 기술적인 책략의 문제로 제기하려고 한다. 그리고 인민전선의 그늘 속에서 자신의 물건을 팔아 먹으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인민전선은 이 시대 프롤레타리아 계급 혁명전략의 주요한 문제이다. 또한 인민전선은 볼셰비즘과 멘세비즘의 차이점을 가장 잘 가려낼 수 있는 시금석이다 ."--- 트로츠키 , [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과 인민전선 ], 1936

 

정권 장악을 위해 노동자조직과 부르조아 대표자들 간에 강령적 연합을 체결하는 인민전선 노선은 계급 배신 정책이다. 혁명가들은 인민전선에 참여하는 세력에 대해서 어떠한 지지도 표명할 수 없다. 어떤 세력이 " 비판적으로" 인민전선에 참여한다고 말해도 마찬가지이다 .

 

선거시기에 개량주의 노동자정당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표명하고 이 정당에 표를 던지는 것은 이 정당의 내부 모순을 활용하기 위함이다. 즉 개량주의 노동자 정당은 노동계급이 조직의 기반을 이루고 있으나 강령은 부르조아 계급의 정치적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사회민주주의 또는 스탈린주의 정당이 부르조아 또는 쁘띠부르조아 정치세력들과 연합을 이루거나 선거협정을 체결할 경우 이 모순은 이러한 연합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억압###- 은폐된다. 계급협조주의적 연합인 인민전선의 후보로 나서는 개량주의 노동자 정당의 조직원은 사실상 부르조아 정치세력들의 하수인으로 선거에 나서는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이러한 노동자 정당에 대해서는 비판적 지지 전술이 적용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정당 내부의 모순이 활용될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혁명가들은 개량주의 노동자 정당이 계급협조적 연합을 파기할 경우에만 비판적 지지를 할 수 있다고 선언해야 한다 . " 자본가 장관들을 타도하자!"

 

 

9. 공동전선과 " 전략적 공동전선"

 

공동전선(united front) 은 혁명조직이 대중들이 공동으로 행동해야 할 긴급한 사안이 존재할 때 개량주의 조직이나 중도주의 조직과 공동행동을 제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치적 공동행동을 통해 이들 조직의 노동자들은 자기 지도부의 정치노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결국 조직에서 이탈하여 혁명적 정치를 수용하게 된다 . 특정 사안에 대한 일시적인 합의가 있거나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해 특정 행동이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 혁명조직은 쁘띠부르조아 또는 부르조아 정치세력과 공동전선을 이룰 수 있다. 예를 들어, 1917 7 월 코르닐로프가 반동 쿠데타를 시작했을 때 볼셰비키당은 케렌스키 정부와 공동전선을 형성하여 공동으로 극우 쿠데타를 분쇄하였다. 노동자대중의 이해 증진을 도모하는 공동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실제 행동을 통해 혁명적 강령의 우수성을 입증시켜 혁명조직의 영향력을 넓히고 전위당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확대하기 위해 구사하는 유용한 전술이 바로 공동전선이다 .

 

혁명가들은 혁명 지도부가 중도주의 또는 개량주의 세력과 지속적인 연합 즉 " 전략적 공동전선" 을 유지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트로츠키주의자는 수정주의자들과 공동의 선전적 입장이나 공동선언문을 결코 발표하지 않는다. 이러한 행위는 우선 정직하지 못하다. 혁명조직과 개량주의 조직의 정치적 차이를 감추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혁명조직을 청산하는 배신행위가 된다. " 전략적 공동전선" 은 자신의 미미한 영향력에 절망하여 더 광범위한 연합이나 최대공약수 강령으로 자신을 해소하여 미미한 영향력을 보충하고자 하는 기회주의자들의 단골 책략이기도 하다. [ 중도주의와 제4 인터내셔널 ] 에서 트로츠키는 혁명조직이 " 원칙의 순수성, 입장의 명확함, 정치적 노선의 일관성, 조직적 완벽성" 등을 보유함으로써 중도주의 조직과 구별된다고 설명한 바 있다. 바로 혁명조직의 이러한 특성을 파괴하기 위해 전략적 공동전선이 존재한다.

 

 

10. 노동자 민주주의

 

노동자 대중에게 오직 진실만을 말하는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좌익의 다양한 경향들과 공개적으로 정치투쟁을 수행함으로써만 이득을 볼 수 있다 . 그러나 개량주의 조직과 중도주의 조직들은 그렇지 못하다. 스탈린주의자들 , 사회민주주의자들 , 노동조합 관료들, 기타 노동계급을 삼천포로 인도하는 자들은 모두 혁명적 비판을 두려워하며 혁명조직에게 폭력을 가하고 이 조직을 공개토론장에서 배제함으로써 정치 토론과 논쟁을 무산시키려고 한다.

 

우리는 좌익운동과 노동자 운동 내에서 폭력을 휘두르거나 다른 조직을 공개 토론에서 배제시키는 행위 등을 반대한다. 반면 모든 사람들의 자기방어 권리를 옹호한다. 또한 우리는 " 부드러운" 폭력 즉 비방의 사용을 반대한다. 비방은 물리적인 폭력을 준비하거나 이와 함께 사용된다. 노동자 운동 내에서 자행되고 있는 비방과 폭력은 혁명적 맑스주의 운동과는 완전히 무관하다. 이것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해방의 전제 조건인 노동계급의 혁명 의식 발전을 의도적으로 가로막기 때문이다.

 

 

11. 국가와 혁명

 

혁명 이론에서 국가의 성격은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 자본주의 국가는 부르조아 소유체제를 방어하기 위해 존재하는 " 특별 무장기구들의 집합체" 이다 . 이것이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맑스주의의 정의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국가는 노동 대중의 이해에 봉사하도록 접수되거나 창조될 수 없다. 노동계급의 지배는 현존하는 부르조아 국가기구를 파괴하고 그 대신에 프롤레타리아 소유체제 즉 집단적 소유를 방어하는 데 헌신하는 기구들을 수립해야 가능하다.

 

우리는 부르조아 국가기구가 민주적인 외양을 가지고 있든 아니면 파시즘의 외양을 가지고 있든 노동운동 내부의 사안에 간섭하는 것을 반대한다. 맑스주의자는 자본주의 법정을 통해 관료적 부패를 시정하려는 노동조합 내부의 모든 " 개혁주의자들 " 에 대해서 반대한다. 노동자들은 자기 조직의 일을 스스로 처리해야 한다 . 자기 집안 정리를 남에게 맡길 수 없다 . 또한 우리는 노동조합 운동으로부터 자본주의 억압기구의 일부인 경찰관과 간수들을 추방할 것을 촉구한다.

 

국가는 경쟁하는 사회 세력들 간의 초당파적인 조정자가 아니라 자본가들이 이들 세력에 대항해서 권력을 휘두르는 무기이다. 이 사실을 노동계급 대중에게 가르치는 것이 혁명가들의 임무이다. 따라서 맑스주의자는 부르조아 국가가 파시스트들을 " 금지" 해야 한다는 개량주의/ 유토피아 시각에 반대한다. 이러한 법들은 자본주의적 반동의 돌격대 역할을 하는 파시스트 깡패들보다 노동자 운동과 좌익운동 전체에 대해서 언제나 훨씬 가혹하다.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부르조아 국가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과 피억압 계층을 동원하여 파시즘이 성장하기 전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싹부터 제거해야 한다 . 이것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파시즘 대항 전략이다. 트로츠키는 [ 이행기 강령 ] 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파시즘에 대한 투쟁은 자유주의 신문의 편집실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공장에서 시작하여 거리에서 끝난다."

 

레닌주의자들은 제국주의 군대가 어느 곳에서든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 남부에서 흑인 학생 소년들을 " 보호하거나" 북아일랜드에서 구교도인들을 " 보호하거나" 중동에서 평화를 " 유지한다" 등의 말은 거짓말일 뿐이다. 흑인에 대해 극악한 인종차별을 자행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해 제국주의자들이 경제제재를 가하여 "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압력을 가하는 일도 레닌주의자의 임무와는 무관하다. 대신 " 자유세계" 의 강대국들이 연합하여 남아프리카 백인들이 흑인노동자에 대한 극악무도한 착취를 감행하는 " 권리 " 를 옹호하면서 인종차별 정권과 하나의 이해를 추구하고 있다고 우리는 주장하는 바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노동자들과 효과적인 연대투쟁을 조직하여 국제노동자들의 힘을 동원하는 것만이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12. 러시아 문제

 

" 스탈린주의에 대한 혐오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 노동운동의 매독' 이라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혐오심인가? 당내에 이러한 현상을 포용하기를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노선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 그렇다면 스탈린주의가 국제혁명의 지도사상이 아니라 그 가장 해악적인 적이란 말인가? 아니다. 이것도 스탈린주의에 대한 혐오심과는 거리가 멀다 . 트로츠키의 가르침, 그간의 경험 , 현재 우리가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그렇다. 경찰국가, 강제노동 수용소, 반대 세력에 대한 온갖 공작과 살해 등 스탈린 체제의 온갖 가증스러운 현상에 대한 혐오감은 건강하고 자연스럽고 정상적이며 진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 그런데 이러한 혐오감이 미제국주의와의 화해로 치달을 경우 그리고 스탈린체제에 저항하는 투쟁을 제국주의 세력에게 위임할 경우 지극히 잘못된 노선으로 치닫게 된다 . 이 잘못된 경향이 바로 스탈린주의에 대한 혐오증의 진정한 정체이다."--- 제임스 케넌 , [ 스탈린주의에 대한 화해주의와 혐오증 ], 1953

 

과거 소련의 퇴보한 노동자국가 그리고 동구 , 월남, 라오스, 캄보디아, 중국 , 북한, 쿠바 등 기형화된 노동자국가의 집단적 소유체제를 우리는 무조건 방어해왔다. 그러나 오직 노동자의 정치혁명만이 이 나라들을 지배하고 있는 배신적인 반노동자적 관료집단을 타도하고 지금까지 노동계급의 투쟁의 성과를 유지하며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한시도 잊지 않아왔다.

 

1920 년대 " 일국사회주의 이론" 으로 득세한 스탈린 파벌의 승리는 이로부터 10 년후 레닌이 건설한 당의 중핵들을 전멸시키는 것으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세계혁명의 전망을 포기하고 오직 소련의 안위만을 주창하면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소련 체제 방어와 세계혁명의 전망을 모두 결정적으로 파괴하였다. 노동계급의 정치권력 장악을 위한 노동계급의 정치혁명 노선은 집단적 소유체제의 방어와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분리될 수 없을 만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러시아 문제는 두 사건으로 인해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폴란드 연대노조에 대한 폴란드 관료집단의 탄압과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이 바로 이것이었다. 우리는 연대노조의 자본주의 복귀세력에 대한 폴란드 정부의 탄압과 여성의 노예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아프가니스탄의 봉건주의자들을 제거하려는 소련군의 전투에 모두 군사적 지지를 보냈다. 그렇다고 스탈린 관료집단이 어떠한 진보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이들이 자신의 권력과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집단적 소유체제를 방어할 수밖에 없는 행위에 대해서 군사적 지지를 보냈을 뿐이다.

 

 

13. 4 인터내셔널의 부활을 위하여

 

" 트로츠키주의는 새로운 운동 , 새로운 이론이 아니라 러시아 혁명 당시와 코민테른 초기에 주창되고 실천된 진정한 맑스주의의 회복이요 부활일 뿐이다."--- 제임스 케넌 , [ 미국 트로츠키주의의 역사 ]

 

트로츠키주의는 우리 시대의 혁명적 맑스주의이다 . 그리고 노동계급의 공산주의운동이 150 년이 넘는 동안 축적한 투쟁 경험에서 우러나온 정치이론이다 . 이 이론은 현대 역사의 가장 커다란 사건인 1917 년 러시아 혁명 그리고 러시아 혁명 이후의 역사를 통해 그 올바름이 입증되었다. 볼셰비키당과 코민테른이 관료적으로 질식된 후 러시아 혁명의 실천과 강령인 레닌주의 전통은 오로지 트로츠키가 주도하였던 좌익반대파(Left Opposition) 에 의해서만 계승되었다.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 일국 사회주의" 라는 반동적이며 유토피아적인 이론에 대항하여 혁명적 국제주의를 옹호하는 투쟁을 통해 탄생되었다. 국제적 기반의 혁명조직을 건설해야할 필요성은 세계자본주의 체제로부터 나온다. 각국의 혁명가들은 국제적 차원의 전략에 의해 인도받아야 한다. 이 전략은 국제노동계급의 지도부를 건설하는 것을 통해서만 마련될 수 있다. 부르조아 계급과 이 계급의 하수인들인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스탈린주의자들의 민족주의에 대해 트로츠키주의자는 카알 리이프크네히트 (Karl Liebknecht) 의 불멸의 구호 , " 노동자의 주요한 적은 국내에 있다 !", 를 대항노선으로 제시한다. 우리는 맑스 , 엥겔스, 레닌 ,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등의 혁명적 전통 , 코민테른의 1~4 차 대회 그리고 1938 년 제4 인터내셔널의 창립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적 기본원칙들에 기초하여 투쟁한다.

 

북아메리카 지역 이외의 제 4 인터내셔널 소속 혁명 중핵들은 제 2 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거의 전멸하였다. 그리고 제 4 인터내셔널은 1950 년대 초반 파블로 (Pablo) 의 수정주의로 인해 정치적으로 파산을 선고받았다. 우리는 1951 년에서 1953 년 사이에 진행된 제 4 인터내셔널의 조직분리 과정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파블로가 주도한 국제서기국 (International Secretariat) LANG="KO"에 반대하여 성립한 국제위원회 (International Committee) 를 지지한다. 국제위원회의 투쟁은 정치노선이나 방식에 있어서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제4 인터내셔널의 지도자 파블로는 트로츠키주의 조직 중핵들이 스탈린주의 정당들과 사회민주주의 정당들로 들어가고 조직을 해체해야 한다는 청산주의를 주창하였다. 이에 맞서 역사발전에 있어서 의식적 요인의 필요성을 옹호하며 트로츠키 조직의 필요성을 주창한 국제위원회의 혁명적 본능은 국제위원회가 국제서기국보다 질적으로 우수한 조직임을 증명하였다 .

 

국제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지부는 미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 (Socialist Workers Party) 였다 . 이 당은 제4 인터내셔널의 창립 당시에도 가장 강력한 지부였다. 이 당은 트로츠키의 직접적인 지도를 따랐으며 코민테른 초기에 활동했던 중핵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이 1960 년대 초 쿠바의 카스트로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열광하며 정치적 지지를 보내고 1963 년에는 국제서기국의 파블로 노선으로 돌아서면서 정치적 배신의 절정을 장식한 사건은 국제 트로츠키주의 운동에게 엄청난 타격이었다 .

 

우리는 사회주의노동자당 다수파가 중도주의적 객관주의에 빠진 것에 대해 투쟁하며 당 내부에서 혁명적 강령을 옹호했던 혁명적 경향 (Revolutionary Tendency) 분파의 투쟁에 지지를 보낸다. 우리는 이때 이후 스파르타쿠스 동맹(Spartacist League) 이 옹호하고 발전시킨 트로츠키의 혁명적 강령에 기초하여 투쟁하고 있다 . 그러나 20 여 년 동안 지속된 고립과 좌절의 역사 속에서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질적으로 퇴보하여 기이하게 관료적이고 공공연히 개인숭배적인 정치 사기꾼들의 집단이 되었다. 그래서 그나마 남아있는 혁명적 잠재력을 냉소적으로 " 정통" 을 자처하고 지배계급의 압력에 몸을 사리는 행위를 통해 파괴하였다. 오늘날 " 국제 스파르타쿠스 경향(international Spartacist tendency)" 은 제 4 인터내셔널의 정통임을 자처하는 10 여개의 사이비 트로츠키주의 " 인터내셔널들 " 과 어떤 의미에서도 더 우월하다고 볼 수 없다.

 

트로츠키주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자처하는 사이비 혁명조직들은 이리 저리 분열하면며 온갖 난관에 빠져있다. 이 결과 이들은 급격히 우경화의 길을 걷고 있다 . 이러한 상황은 사회주의 건설의 전망이 영국 노동당, 자본주의 복귀파가 주도하는 폴란드의 연대노조, 칠레의 인민연합 등에 있지 않다고 믿고 있는 세력들 사이의 정치적 재평가와 재편을 촉진하고 있다 . 우리는 진정한 트로츠키주의 강령에 기초하여 국제적 차원에서 혁명적 중핵들의 재편 과정에 참여하려고 고투하고 있다 . 이 재편 과정이야말로 이미 한참 시일이 늦어진 사회주의혁명 승리를 위해 투쟁하는 혁명적 사회주의 세계 정당 즉 제4 인터내셔널의 재탄생을 위한 일보 전진의 길이 될 것이다.

 

" 오랜 역사적 경험에 의하면 기존 사회에 대해 대항하여 혁명을 주도할 정당을 조직하는 혁명적 중핵들은 혁명이 너무 지연될 경우 사회의 계속되는 압력 하에서 혁명을 포기하고 퇴보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이것은 일종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법칙의 예외도 존재하였다. 계속 맑스주의자로 남아 있으면서 혁명의 깃발에 충실하고자 하는 혁명가들이 이러한 예외에 속한다. 혁명정당 건설의 초석인 맑스주의의 기본 사상들은 이제 백 년 동안 계속 현실에 적용되어 왔다 . 혁명정당을 건설하는 맑스주의 사상은 자신이 창조하는 정당들보다 더 강력하고 생명력이 있어서 이들 정당들이 쓰러지고 퇴보하여도 계속 살아남는다. 퇴보한 조직 내에서 다시 혁명 투쟁을 수행할 인자들을 반드시 찾아내기 떄문이다. 지금까지 투쟁하고 있는 혁명 중핵들은 혁명의 계승자이며 정통노선의 수호자들이다 . 혁명조직의 재편을 도모하는 혁명가들의 과업은 새로운 정치적 진리를 발견했다고 선언하는 것에 있지 않다 . 그동안 메시아를 자처하는 자들은 많았다. 그리고 이들은 이제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혁명가의 임무는 오래된 강령을 다시 복원시키고 여기에 지나간 시대의 진화과정과 이미 변화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제임스 케넌 , [ 미국 공산주의운동의 첫 10 ]

 

[For Trotskyism!](1917, NO3)

루비콘강을 건넌 소련과 좌익의 반응

 

3일 천하로 끝난 8월 쿠데타

 

 

819~21일의 쿠데타가 실패한 이후 몇 주일이 지나는 동안 자칭 트로츠키주의 정치조직들 가운데 국제볼세비키그룹(IBT)만이 유일하게 다음 사실을 인정했다: 쿠데타의 실패로 소련 노동자국가는 종말을 고했다. 쿠데타 실패 이후 일어난 모든 사건들은 우리의 견해가 올바르다는 것을 입증했다. 쿠데타 실패 며칠 후 옐친의 지시에 따라 고르바초프는 소련공산당의 해체를 선언했다. 소련인민대의원대회는 표결을 통해 자체 해산을 결정했다. 12월 옐친은 소련의 해체와 소위 독립국가연합(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의 구성을 선언했다. 그는 고르바초프와 상의도 하지 않고 이 중요한 사안들을 선언했다. 고르바초프는 연방 정부의 모양새를 갖추려 여러 번 시도했으나 번번이 무시당했다. 성탄절에 그는 소련의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크렘린궁에 게양되었던 소련 국기는 내려졌고 대신 같은 날 저녁 짜르 시대의 러시아국기가 올라갔다. 고르바초프가 짐을 싸서 나가기도 전에 옐친은 대통령 집무실로 이사를 했다.

 

소련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었으므로 소련의 주요 정치기관들은 무장 저항 없이 해체될 수 있었다. 기가 꺾였으나 그래도 국가기구를 방어하려던 "강경파"는 최후의 필사적인 정치 도박을 감행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패망하고 말았다. 이들의 쿠데타가 실패로 끝난 후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에필로그(후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붕괴되고 있던 국가경제에 대해 옐친은 지체없이 전면전을 감행했다. 19921월초 그는 식량을 비롯한 다수 품목들에 대한 국가 보조금을 중단시켰다. 이 결과 물품 대부분의 가격이 몇 배나 뛰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중앙 집중적 계획을 무정부적 시장질서로 대체하려는 시도의 첫걸음에 불과했다. 이에 대중은 즉시 저항했다. 이들의 반응을 측정하기 위해 옐친이 전국을 순회했을 때 그는 분노한 군중들과 대면했다. 우즈베크의 수도 타쉬켄트에서는 식량폭동이 발생하여 학생 여러 명이 사망했다. 10월 혁명 기념일에 붉은 광장에서는 노동자, 군인, 구 관료들이 새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크렘린궁 앞에는 5천 명의 군대 장교들이 모여 군대를 민족 단위로 분할하려는 옐친의 계획에 항의했다. 2월 모스크바에서는 쿠데타 이후 최대의 시위가 벌어져 5만여 인파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정권에 반대했다. 그러나 시위대의 구성은 대단히 잡다했다. 시위대 일부는 붉은 깃발과 레닌, 스탈린의 사진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극우 자유민주당을 비롯해 왕당파와 유태인 배척주의자들도 뚜렷이 눈에 띄었다. 현재 코커서스 지역은 소련의 붕괴 이후 민족간 살육의 전장이 되고 있다. 한편 옐친은 새로 수립된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정권과 북해 함대의 처리를 놓고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를 보면 구소련이 자본주의로 복귀하는 길은 결코 순탄할 수 없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옐친의 "물가 개혁"은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스타 교수인 제프리 작스의 충고에 따른 것이다. 삭스는 지난 몇 년간 폴란드에 시장 개혁을 도입시켜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준 장본인이다. 물가 개혁은 국가의 예산 적자를 줄이고 루블화를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과거 계획경제에서는 시장이 아니라 경제계획 부처의 사회경제적 결정에 의해 상품 가격이 정해졌다. 루블화는 가치의 척도가 아니라 노동량에 따른 배급표였다. 일반화된 상품생산체제를 확립하고 국내시장을 세계시장에 개방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품 교환 비율을 확립할 보편적 등가물이 필요하다. 이것이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충고이다.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 공화국들은 어떤 조건으로 제국주의 "국가 그룹"에 합류할 것인가? 소련의 노동생산성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언제나 크게 뒤 처졌다. 소련의 제품들은 가격이나 품질에서 서방의 제품들과 경쟁이 되지 않는다. 서방의 자본가들은 러시아보다 선진적인 폴란드나 구동독의 생산설비에 대해서도 투자를 꺼리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산업시설이 외국 자본가에게 팔릴 가능성은 희박하다. 러시아의 "기업인"은 기존의 국가산업시설을 접수만 해서는 돈을 벌기 힘들다. 대대적으로 생산시설을 현대화하고 업그레이드해야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해외에서 자본이 투입되어야한다. 그러나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제국주의 강대국들이 새로 등장한 주요 경쟁국을 위해 돈을 쏟아 부을 이유는 없다. 지금까지 서방이 구소련을 위해 책정한 "원조" 액수는 "악의 제국"과 전쟁하기 위해 매년 책정된 예산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액수는 옐친이 저항하는 대중을 통제하는데 드는 비용 정도에 불과하다. 구소련을 위한 마셜 플랜(Marshall Plan)의 재()판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월스트리트와 프랑크푸르트 주식시장의 약탈자들에게 구소련의 영토는 가치가 없지 않다. 소련은 석유와 목재 생산에서 세계 제 1위였다. 또한 광물자원, 금속, 곡물 등이 풍부하다. 서방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소련 인민의 교육수준은 높다. 따라서 시장 및 노동착취 잠재력은 엄청나다. 그러나 현재 제국주의자들은 구소련을 주로 원료 및 농산물 생산자로 그리고 미국, 유럽, 일본에서 생산된 제품의 소비자로 바라볼 뿐이다. 자본주의 복귀와 함께 기존의 산업체계가 해체되면 구소련 공화국들은 선진국이 아니라 제 3 세계 국가에 전형적인 경제적 종속과 후진성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것이다.

 

그러나 구소련은 제 3 세계 국가가 아니다.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은 짜르 제국이었던 소련을 제국주의 착취질서에서 해방시켜 후진 농민국을 공업 강대국으로 변모시킬 기초를 놓았다. 혁명 당시에는 80%가 넘는 인구가 농촌에서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60%를 넘는 인구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구소련이 국제자본주의 분업체제에 다시 합류할 경우 철강, 기계류, 군사설비, 소비재 등 경제의 모든 분야가 붕괴할 것이며 공업에 의존하는 수천만 노동자들이 궁핍에 빠질 것이다.

 

소련의 해체로 수립될 민족국가들은 제 3 세계 국가로 전락하기 전에 먼저 대중의 분노와 폭발적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자유시장 "충격요법"으로 인해 대중적 분노가 계속 증대할 경우 옐친은 쉽게 권력에서 쫓겨날 수 있다. 이미 그는 대중의 압력으로 악랄한 경제 개혁 일부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옐친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으려는 자들 역시 옐친만큼 자본주의 복귀에 열을 올릴 것이다. 다만 전술과 시점에서 그와 차이를 보일 수는 있을 것이다.

 

 

반혁명을 분쇄하고 노동자 혁명을!

 

노동계급은 반혁명의 대세를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사회 세력이다. 그러나 이들은 수십 년간 스탈린주의자들의 배신으로 지금 혼란과 사기 저하에 빠져있다. 그러나 극도로 허약한 옐친 정권은 대중 투쟁의 폭발과 함께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 구소련 혁명가들은 물건의 가격을 멋대로 올려 폭리를 취하고 식량을 사재기하는 자들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민영화 정책 전반에 대항하는 무기로 전환시켜야 한다. 노동계급의 직장과 거주지역에서 위원회를 조직할 경우 1905년과 1917년의 소비에트를 재현할 수 있다. 이 인민권력 기구들은 필요한 식량을 공정히 분배할 것이다. 그리고 재산 약탈과 공공소유 기업에 대한 도둑질을 막을 것이다. 또한 노동시간 연동제를 구호로 정리해고에 대항할 수 있다. 이런 활동들을 통해 노동자국가를 소생시킬 조직을 건설할 수 있다.

 

옐친의 긴축 조치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현재 우익 민족주의자들과 유태인 배척주의 흑백인조들에 의해 이용되고 있다. 최근 몇 달간의 시위는 스탈린주의 "애국"자들과 러시아 민족주의 파시스트들을 결집시켰다. 또한 자본주의 복귀는 코커서스, 몰도바 등 구소련 지역에서 민족주의 반동의 유혈사태를 폭발시켰다. 맑스주의자들은 모든 민족의 자결권을 옹호하며 옐친의 대러시아 국수주의에 반대한다. 동시에 구소련 민족들에 의한 자발적 사회주의연방 수립을 옹호한다.

 

노동계급은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 혁명 지도부를 시급히 건설해야한다. 혁명정당은 노동계급을 결집시켜 옐친과 기타 민족주의자들을 권력에서 몰아내고 민영화를 저지시킬 수 있다. 이를 통해 세계 최초의 노동자국가가 탄생한 나라를 다시 레닌과 트로츠키의 혁명적 국제주의로 인도할 수 있다.

 

혁명정당을 지향하는 어떤 정치조직도 현실을 인식하고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19918월 반혁명이 승리하여 소련의 노동자국가는 붕괴했다. 이 사실이 현재 국제 정세를 규정하고 있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기타 동구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도 생산수단 대부분을 아직 국가가 소유하고있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한 반혁명 집단은 국가소유 해체에 몰두하고있다. 1920년대 중반 스탈린을 위시한 관료집단의 등장으로 집단적 소유의 창조자이자 옹호자인 노동계급은 정치권력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노동계급에 대한 모든 범죄에도 불구하고 관료집단은 국가소유 경제를 관리하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따라서 자신의 특권과 권력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자본주의 복귀를 저지하여 노동계급의 소유형태를 방어했다. 그리고 내부의 자본주의 분자들을 탄압했다. 깊이 분열되어 있었으며 기가 꺾인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8월 쿠데타의 실패로 완전히 무너졌다. 그리고 10월 혁명으로 성취된 집단적 경제체제의 해체를 공언한 반혁명 세력이 권력을 장악했다.

 

쿠데타가 성공했을 경우 비록 일시적이고 불안정하나마 스탈린주의자들은 반혁명 세력의 장애물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내외 적들의 자본주의 복귀 기도에 대항해 소련을 방어해온 세력은 옐친에 대항한 쿠데타 지도자들의 정치적 성격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동시에 이들을 군사적으로 방어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트로츠키주의를 자임하는 거의 모든 조직들은 소련을 방어하는 마지막 시험에서 실패했다. 대부분은 민주주의의 미명하에 옐친 진영을 지지했다. 또 어떤 그룹은 중립을 선언했다. 이들은 모두 임무를 방기한 변명을 찾아내기 위해 8월 쿠데타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있다. 이제 제 4 인터내셔널 통합서기국(USFI), 노동자 권력(WP), 스파르타쿠스 동맹(SL)의 반응들을 하나 하나 검토해보자.

 

 

USFI: "민주주의자들만 모여 있다"

 

지난 40년간 에르네스트 만델이 주도해온 USFI는 좌익의 최신 정치유행에 영합하기 위해 트로츠키주의 혁명 강령을 왜곡하고 축소시켜왔다. "대중적 영향력"을 얻기 위해 이들은 1960년대에 카스트로와 호지명 등 게릴라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정치적 지지를 보냈다. 또한 이로부터 10년 후 폴란드 연대노조의 반공 노선을 아낌없이 칭찬했다. 지난 15년간 정치 지형이 우경화하자 USFI는 사민주의의 가장자리에서 비빌 구석을 찾았다. 따라서 8월 쿠데타에서 만델 일당이 천명 정도의 자본주의 복귀 자유주의자 및 암시장 패거리들과 함께 옐친을 지지한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국제 부르주아 계급 전부가 일제히 환호한 것과 똑같이 USFI는 국가비상위원회에 대한 옐친의 승리를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환호했다. USFI의 미국 조직 가운데 하나인 제 4 인터내셔널 경향은 이렇게 선언했다: "쿠데타의 패배는 소련 인민의 진정한 승리였다"([맑스주의를 옹호하는 게시판], 199110). USFI의 또 다른 미국 조직은 옐친 진영의 승리를 "레닌과 트로츠키가 지도한 러시아 혁명 이후 거의 유례없는 인민 봉기" ([사회주의 행동], 19919)라고 규정했다. 만델 자신은 이렇게 표현했다:

 

"쿠데타 주동자들은 민주적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거나 억압하려했다....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저지했어야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쿠데타의 실패에 대해 환호해야할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 [국제적 관점], 23

 

잘난 카우츠키주의자들이 모두 그렇듯이 만델의 최대의 기준은 역시 추상적 "민주주의"이다. 옐친의 반혁명 세력과 이들을 지원하는 국제통화기금은 사실 "자유"를 그리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복귀를 위한 잔인한 긴축정책은 연단의 연설이나 선거일의 악수가 아니라 총칼로 대중에게 강요될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계급적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맑스주의자들은 다 알고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 노숙자와 제너럴모터스사 사장 사이에 실제하는 불평등은 형식적 평등권에 의해 제거되지 않고 숨겨질 뿐이다. 의회체제는 대중의 동의라는 포장 속에 부르주아 정부의 계급적 정책을 숨기고 자본의 지배를 정당화시킨다. 자본주의의 민주적 자유를 축소시키거나 정지시키려는 모든 기도에 대해 노동계급은 저항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진보라는 기준에서 보면 10월 혁명의 성과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가치가 있었다. 지구 육지의 6분의 1이나 되는 광대한 지역에서 사적 소유가 철폐되었다. 경제 계획에 의해 시장의 혼란상이 대체되었다. 그리고 공장, 은행, 미디어 그룹 등을 소유하지 않은 수백만 인민에게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할 사회적 기초가 마련되었다. "민주적" 제국주의의 위선자들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증오했다. 이들이 소련 노동자들의 정치 권리를 박탈해서가 아니었다. 이들의 통치가 1917년 러시아 노동계급 혁명의 성과에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소련 관료집단을 타도하는 문제는 소련의 국가 소유체제를 보존하는 문제에 종속된다. 단 한 순간도 이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 [맑스주의를 옹호하며]

 

 

바리케이드 저쪽으로 넘어간 USFI

 

자본주의를 복귀시키는데 골몰한 세력을 한쪽으로 하고 시장 개혁을 둔화시키고 최소한 잠시나마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던 세력을 또 한쪽으로 해서 8월 쿠데타의 바리케이드가 형성되었다. 사회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 등 자본주의 복귀를 공개적으로 옹호했던 세력은 쿠데타와 이것의 실패가 의미하는 바를 금방 인식했다. 그러나 사이비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경우는 다르다. 이들은 소련을 방어할 의무를 회피하고 자유주의 좌파의 여론에 굴종하기 위해서 현실을 날조해야한다. 따라서 쿠데타 주동자들과 옐친 진영의 정치적 목표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증명하는 것"USFI에게 매우 중요하다. [사회주의 행동]19919월 호에 실린 글에서 내트 와인스타인은 이렇게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고르바초프, 쿠데타 주동자들, 옐친 & 세바르드나제 사이에 분열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분열은 시장 중심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한편으로 하고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강경 공산주의자들'을 또 한편으로 하는 분열은 아니다."

 

물론 쿠데타 지도자들은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다. 국가소유 경제를 관리하는 국가중앙기구에 소속되어 권력과 특권을 계속 누리려는 스탈린주의 관료들일 뿐이다. 그리고 이들은 공개적으로 자본주의 지지를 선언한 자들과 대치했을 뿐이다. 만약 쿠데타가 자본주의 복귀 세력과 이것에 저항하는 세력 사이의 싸움이 아니었다면 무엇이었을까? 와인스타인은 이렇게 설명한다:

 

"국가기구 내부의 주요 정치경향들은 모두 자본주의 복귀를 지지했다. 자본주의 복귀 정책을 정치적 수단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가 아니면 이 정책이 요구하는 반노동계급적 조치들을 강제하기 위해 철권 독재가 필요한가에 대해 두 세력은 근본적으로 견해를 달리했을 뿐이다."

 

이 논리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 지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쿠데타 주동자들과 옐친이 똑같이 자본주의 복귀파이며 이것을 실현하는 정치적 수단에 대해서만 방식을 달리했다면 노동계급은 덜 억압적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복귀시키려는 분파의 승리를 원해야 한다. 쿠데타 주동자들의 편을 들지 않은 소위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유일한 논리 정연한 주장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두 세력의 정치적 목적이 같았다는 전제 자체가 틀렸다. 이것이 문제이다.

 

옐친이 소련 관료집단의 한 분파를 대표한다고 만델과 와인스타인은 똑같이 생각한다. 그러나 옐친이나 쿠데타 주동자들이 자본주의를 복귀시킬 의지와 능력이 있는 지에 대해 만델은 의문을 가지고 있다:

 

"소련 관료집단의 규모는 너무 광대하다. 이들의 사회적 연줄은 너무 강력하고 이들이 조종하는 관행, 규범, 방해, 태업 등의 거미줄은 너무 촘촘하다. 따라서 위로부터의 어떤 시도도 이 집단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킬 수 없다....더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옐친도 고르바초프만큼이나 관료집단 상층부의 한 분파를 대표하고 있다. 그의 이력이나 교육적 배경으로 보아 옐친은 국가기구 출신이다. 그가 대중선동가라 하더라도 이 판단을 수정할 수는 없다....애매한 방식으로 계속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부르는 고르바초프와 달리 옐친은 자본주의 복귀를 공개적으로 주창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념 고백만으로 정치인의 정치적 성격을 판단할 수는 없다. 실제 이들이 어떻게 행동하며 어떤 사회적 이해집단에 봉사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소련의 청산을 도모하는 옐친과 그의 동맹세력은 관료집단의 한 분파를 대표할 뿐 진짜 부르주아 세력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물론 양자는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을 수는 있다." --- [국제적 관점], 23

 

소련의 관료집단 전체가 자본주의 복귀에 골몰했다고 와인스타인은 주장한다. 반면 극우 옐친 분파를 비롯해 관료집단의 어느 분파도 이것을 결행할 의지나 능력이 없다고 만델은 주장한다. 이 두 견해는 극과 극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어떤 조직에서든 열띤 논쟁을 유발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같은 정치조직 안에서 행복하게 동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외면적 차이보다 훨씬 중요한 공통점이 두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8월 쿠데타와 이것의 결말이 소련 노동자국가의 생존 문제와 무관하다고 만델과 와인스타인은 동의한다. 또한 이들은 동의한다: 옐친은 민주적 자유의 보존을 원하는 반면 국가비상위원회는 정치적 억압을 선호한다. 따라서 소련 관료집단의 성격과 방향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두 사람의 정치적 결론은 같다: "민주적" 옐친을 지지하자. 그리고 이 실제적 결론이 행복하게 일치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이끄는 USFI는 자유주의 좌파와 사회민주주의의 견해에 편하게 동조한다. 맑스주의자들은 올바른 행동을 위한 지침을 얻기 위해 현실을 분석한다. 반면 기회주의자들은 강령을 왜곡하고 축소시키기 위해 현실을 분석한다. 이들에게는 목적만 같다면 전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옐친 진영과 쿠데타 주동자들: 이해의 충돌

 

모든 근거들이 그러하듯이 와인스타인과 만델의 근거도 일말의 진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일말의 진실을 전체 상황을 오도하기 위해 강조한다. 과거의 스탈린주의자들과는 달리 국가비상위원회는 사회주의에 대한 찬사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려 하지 않았다. 이 점을 와인스타인은 올바르게 지적했다. 국가비상위원회의 성명서들이 집단적 소유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보인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한편으로는 쿠데타 주동자들은 "수십 년간 존재해온 통합적 국가경제 체제에 대한 점증하는 위험과 직업, 교육, 보건, 여가 등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 진행중인 공격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뉴욕 타임즈], 1991819). 또 한편으로는 이들은 사적 소유를 비롯해 소련에서 자라난 다양한 소유형태를 존중할 것이며 페레스트로이카를 계속 추진할 것을 다짐했다.

 

이 애매한 입장에는 원인이 있다: 쿠데타 주동자들은 어떠한 적극적인 역사적 전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들 가운데 "사회주의"는 고사하고 사회주의 소유형태의 우수성에 대한 신념만이라고 가지고 있던 자는 거의 없었다. 1930년대 초 저작에서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다양한 정치적 성향의 잡탕이라고 묘사했다. 기회가 오자마자 곧바로 소련을 배신할 철저히 냉소적인 기회주의자에서 진지한 사회주의 혁명가까지, 부텐코 같은 파시스트에서 라이스 같은 노동계급 국제주의자까지 모든 정치경향이 관료집단 내부에 존재한다고 트로츠키는 보았다. 그러나 브레즈네프 통치시기에 관료집단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정치적 신념을 거의 잠식당했다. 소련 경제가 성장을 멈추자 자기 만족, 냉소주의, 부패 등이 모든 수위의 국가기구를 좀먹었다. 이 타락상은 브레즈네프 자신에 의해 대표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는 멋진 별장과 외제 스포츠카를 모으는 호사 취미로 악명이 높았다. "강경파"를 분기시킨 유일한 이데올로기적 신념은 소련에 대한 애국심 즉 소련의 강대국 지위를 유지시키는 것이었다. "애국심"은 옐친을 반대한 잡다한 세력들을 하나로 묶는 끈이었다. 구세대 관료들과 유태인을 배척하는 왕당파는 모두 강력한 러시아 국가를 유지하고자 했다. 이들에게 강대국 소련을 떠받치는 소유관계는 그리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그러나 관료들의 공개 발언이나 내심의 생각은 맑스주의적 분석의 부차적 요소일 뿐이다. 사회 계급과 계층의 정치 행동을 설명하는 열쇠는 사회 내의 이들의 객관적 지위와 이로부터 파생되는 물질적 이해관계이다. 자본가 계급과는 달리 소련의 관료집단은 특정 소유형태의 담지자가 아니다. 스탈린이 권력의 절정에 있을 때나 19918월이나 할 것 없이 관료집단의 특권은 중앙집중적 국가소유 경제를 관리하는 역할에서 나왔다. 국가 중앙기구의 권력이 분리독립을 원하는 민족들, 이탈하는 관료들, 자유 시장주의자들에 의해 점점 강력한 도전을 받자 국가와 당 중앙기구의 일부 분파가 자신의 특권과 권력을 다시 확인시키려했다. 이것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8월 쿠데타 이전의 당내 권력 투쟁 그리고 8월 쿠데타 시도 자체의 의의가 바로 이것이었다(국제볼세비키그룹(IBT)19919월 성명서 "소련에서 반혁명이 승리하다"를 참조하시오).

 

그러나 동구의 기형적 노동자국가 대부분에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저항도 없이 순순히 타도되었다. 그리고 소련 관료집단 일 분파의 반격은 너무 늦었고 결의 수준이 대단히 낮았으며 행동은 무기력했다. 이 점은 설명이 필요하다. 스탈린주의의 동맥경화증은 1989년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중증으로 진행되어 있었다.

 

"8인방"이 보존하고자 했던 현실은 수천의 헌법이나 의회보다 소련 및 전세계 노동계급에게 훨씬 소중한 생산수단의 공공소유였다. 819일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어느 누구도 이 시도가 그렇게 허무하게 찌그러질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쿠데타 전에 이렇게 견해를 표명한 바 있었다:

 

"관료집단의 지도적 분파가 미래 특정 시점에서 자본주의 복귀 과정을 정지시킬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현실로 드러난다면 옐친 진영에 대항해 '보수파'에게 군사적 지지를 보내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될 것이다. 스탈린주의 지배집단은 '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한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 복귀 과정을 정지시킬 경우 생존에 필요한 시간은 벌 수 있다." --- [1917] 10

 

8월 쿠데타가 실패한 후에도 관료집단이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다고 우리를 안심시키는 만델은 자신의 주장을 진실의 단편들을 통해 강화시킨다. 진정 옐친은 러시아 공산당 및 국가기구의 산물이다. 짜르 시대의 예카테린부르크로 이미 개명된 스베르들로프스크의 시당 서기로 전국적인 악명을 떨친 그는 모스크바 시당 서기로 승진했다. 급한 성격에 과대망상증을 가진 옐친은 고르바초프가 강요한 전제적 당 규율에 불만을 나타냈으며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를 좀더 과감하게 추진하지 않는다고 그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고르바초프의 눈밖에 난 그는 결국 정치국원직과 모스크바 시당 서기직에서 축출되었다. 그러자 그는 곧 공산당을 부정했다.

 

그러나 옐친은 다시 정치 생명을 되찾았다. 고르바초프의 가장 유명한 적수라는 평판이 그를 당외 정치세력의 대변인으로 격상시켰기 때문이다. 소련공산당의 정치권력 독점을 종식시키려는 세력들에 의해 그는 공산당 후보를 제치고 러시아 연방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러시아 연방 의사당 밖에서 쿠데타 주동세력과 대치하며 탱크 위에 올라섰을 때 그는 외국자본, 민족 분리독립 세력, 모스크바의 포주들, 화폐 투기꾼들, 기타 "기업인" 등의 대표가 되었다. 개인 경호원을 거느린 이들은 옐친 지지 군중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옐친이 공산당 및 국가기구의 산물이라고 만델은 말한다. 그러나 이때 그는 옐친이 노동계급의 적들에게 가담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자발적 민영화"와 관료집단

 

관료집단이 아직도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고 만델이 말했을 때 그는 일말의 진실을 하나 더 드러내었다.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으나 관료집단을 구성하고 있던 수백만 개인들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이들 중 많은 수는 일자리를 잃지도 않았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크라프추크와 카자크스탄 대통령 나자르바이예프는 지역 공산당 서기였으나 8월 쿠데타 이후 열렬한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구체제 잔당들과 이들이 의존하는 하급관료들은 새로운 정치적 경제적 질서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완전히 발달한 자본가 계급이 자신의 사적 소유를 보호할 확고한 법체계와 억압적 국가기구를 구비하여야 자본주의 복귀는 완성된다. 그렇다면 과거 집단적 소유체제를 유지했던 나라들은 결코 자본주의를 다시 확립할 수 없을 것이다.

 

[뉴욕 타임즈]지의 19911227일자 보도는 하버드 대학교의 소련학자 그레엄 앨러슨을 인용하여 국영기업 책임자들이 맡아야 할 새로운 역할을 논하고 있다:

 

"그는 말했다: '나는 국영기업의 책임자이다. 예를 들어 종업원이 1만 명인데 상관은 아무도 없다고 상상하기 시작한다. 상부의 지시도 없고 보고했던 행정부처는 사라졌다. 그러면 나는 회사 재산이 내 것이라고 상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원자재를 비롯한 생산 투입요소를 전혀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과 종업원들을 보살펴야 한다. 때때로 회사의 반을 사들여 합작회사를 설립하는 외국인을 나는 만난다. 이것은 자발적 민영화이다.'"

 

USFI[국제적 관점]1992120일자는 학자이자 모스크바 인민 위원회 대의원 유리 마레니치와의 놀라운 회견기사를 싣고 있다. 마레비치는 옐친 진영의 지역 관료들이 부동산을 비롯한 공공소유의 재산들을 자기 소유로 돌리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정권을 맡았으므로 공공소유를 독점에서 해제하여 시장을 통해 경제를 관리하겠다'는 구호로 이들은 선거에 임했다. 그리고 선거에서 승리하여 공공소유를 관리할 권력을 얻자 이들은 이 재산들을 자기 소유로 만들려는 엄청난 유혹을 받았다. 그리고 정부기관의 직책을 정부 상대 개인기업의 직책과 결합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쉽게 공공재산을 가로챌 수 있었다. 민영화를 감독하는 직책에 있는 자는 자기 구역의 재산을 자기 소유 기업으로 이전시켰다. 이제 공공재산은 자기 것이 되었다. 위원회 집행위원들은 모두 자기 기업을 차렸다. 한 기업은 위원회의 정보서비스를 떠맡았고 다른 기업은 법률서비스를 떠맡았다. 또 다른 기업은 관할구역의 부동산을 전부 넘겨받아 이것의 판매권과 임대권을 독식했다....이 일은 아주 간단하다. 1930년대부터 우리는 화폐를 지불하지 않고 재산을 이전하는 체제를 운영해왔다. 그러나 모든 재산은 공공소유였으며 이것이 한 국가기관으로부터 다른 국가기관으로 이전되었다. 당사자들은 모두 국가라는 단일 소유주의 이름으로 거래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개인 소유주들도 있다. 이들은 같은 절차를 이용하여 지역위원회나 국가기관의 부동산을 개인기업에게 이전했다...."

 

마레니치는 이와 비슷한 일이 러시아 전역에서 반복되고 있다고 추측한다. 구 관료들의 다수는 소련 붕괴 이후 새로운 자본가 계급으로 행세할 가능성이 있다. 스탈린주의 관료들을 대체하는 자들은 당분간 공공소유 운영 방식을 계속 유지할 것이다.

 

다른 계급과 계층의 일부로부터 토착 부르주아 계급이 구성되면서 이전 생산양식의 요소들이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체제가 다시 강요될 것이다. 옐친이 8월 쿠데타에 대항해 승리하기 이전에 이미 소련 경제는 강력한 원심력에 의해 해체되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성을 강조하면서 만델은 쿠데타의 패배가 질적인 변화의 분기점이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 모스크바의 국가중앙기구가 경제에 대한 행정적 통제력을 행사하는 한 지역과 지방의 관료들은 상부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 소유주의 특권을 누리려는 이들의 욕구는 객관적인 장애에 부딪쳤다. 8월에 중앙 권력이 확실히 깨진 후에야 이들은 "자발적 민영화"를 자유롭게 추진할 수 있었다. 따라서 8월 쿠데타의 실패는 소련 노동자국가의 종말이었다.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는 만델과 와인스타인의 확신은 반혁명 세력과 한편이 된 책임을 회피하려는 정교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자권력(WP): 말로는 소련 방어, 행동은 옐친 지지

 

그런데 USFI보다 훨씬 더 솔직하게 실패한 쿠데타의 의의를 인정하는 정치조직이 있다. WP와 이 그룹이 이끄는 혁명적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동맹(LRCI)의 산하 조직들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소련 노동자국가가 8월에 망했다는 것을 처음에는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쿠데타 이후를 "이중 권력" 정세로 규정했다. 관료집단을 대표하는 고르바초프가 옐친 진영과 국가권력을 놓고 계속 경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2월 옐친이 고르바초프를 가볍게 권력에서 밀어내자 WP는 마침내 현실을 인정하고 이렇게 말했다: "소련은 망했다. 70년이 넘게 자본가들을 괴롭힌 유령은 드디어 땅속에 고이 묻혔다"([노동자권력], 1월 호).

 

또한 WP는 소련의 멸망과 옐친의 쿠데타 제압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고 있다. LRCI 국제서기국이 1991년 발표한 성명서는 이렇게 주장한다: "쿠데타를 주도한 분파는 819일의 행동을 통해 반자본주의 소유형태에 기초한 자신들의 특권을 방어하고자했다"([노동자권력], 19919, 강조는 인용자). 그리고 옐친 진영을 이렇게 묘사했다:

 

"민주적 민족적 반대 분파들은 '현실 사회주의'를 개혁할 모든 신념을 거의 상실하고 서방의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이상적인 모델로 설정했다. 한때 고르바초프를 지지했던 이들은 그의 '시장 사회주의' 유토피아에 실망했으며 그의 동요와 보수파와의 타협에 분노했다. 결국 이들은 자본주의를 러시아에 복귀시켜 제국주의에 봉사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옐친을 필두로 한 정치연합은 어떤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그와 세바르드나제 그리고 주위의 군부 및 정치계의 추종자들은 자신의 특권과 이 특권의 원천인 퇴보한 노동자국가의 방어를 포기하고 새로운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핵심 성원이 되겠다고 결심한 관료집단 분파를 대표한다."

 

이렇게 LRCI에게는 8월 쿠데타에서 드러난 대결 세력들의 정체가 명확하다: 한쪽에는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려는 일념으로 노동자국가를 방어하려했던 관료집단의 분파가 존재하고 반대쪽에는 노동자국가를 파괴하고 자본주의를 복귀시키려는 민족주의자, "민주적" 지식인, 관료들의 정치연합이 존재했다. 이 대결에서 WP는 편을 드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노동자국가를 파괴하려는 자들의 편을 들었다! [노동자권력] 같은 호는 "쿠데타를 정지시키기 위한 투쟁에서 우리는 앞장을 서야했다"고 선언했다. 자신의 입장을 강조하기 위해 같은 호는 "그들의 노래는 끝났다"는 제목의 글을 실어 "쿠데타를 지지한 좌익"을 맹렬히 비난했다. LRCI는 자기 입장에 대한 확고함에 어떤 의문도 갖지 않게 하기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의 소규모 그룹인 혁명적 트로츠키주의 경향과 조직적 관계를 최근 단절했다. 후자는 옐친 진영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여 국제지도부의 노선을 반대했다.

 

그렇다면 어떤 이론적 곡예를 통해 LRCI는 자신의 공산주의, 트로츠키주의, 소련 방어주의를 이 노선과 일치시킬 수 있을까? LRCI 국제서기국은 자신의 성명서에서 계속 이렇게 주장한다:

 

"이 사건들을 통해 주요한 질문들이 제기된다. 관료집단을 타도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정치혁명은 비현실적인 유토피아였는가? 보수파의 쿠데타에 대한 저항이 반혁명이었는가? 쿠데타가 성공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관료적 탄압이 지속되었을 경우 노동계급은 시간을 벌 수 있었는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 이다. 어떤 의미에서 국가비상위원회가 '계획에 입각한 소유관계를 방어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오직 이것뿐이다: 자신이 기생하고 있던 소유관계가 '숙주'인 한에서만 이것의 철폐에 저항했다. 그러나 이 대대적인 사회적 기생충이야말로 관료적 계획경제의 죽음을 가져온 질병의 주원인이었고 이에 대한 대중의 환멸의 주원인이었다. 전체주의 독재를 통해 스탈린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자기활동, 자기의식, 새로운 전위를 형성할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장애물이었다. 새로운 전위만이 '10월의 성과'를 보존할 뿐 아니라 쇄신시킬 수 있었다." --- [노동자권력], 19919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노동계급의 자기활동에 대한 장애물이었고 계획경제에 대한 기생충이었다. 이들은 계획경제를 엉망으로 관리하여 망가뜨렸고 결국 이것을 방어할 능력도 상실했다. 이것은 트로츠키주의자에게는 기본 상식이다. 계획경제를 보존하기 위해 스탈린주의자들을 타도할 정치혁명이 필요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무엇을 했어야 했는가?

 

허약하고 동요하는 쿠데타 세력과 옐친의 오합지졸이 대결했던 당시의 결정적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소규모의 혁명그룹도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양측의 허약성과 혼란상은 역력했다. 이때 노동자권력의 민주적 기관의 지도를 통해 국가소유를 보존할 정치 목표를 가지고 있던 트로츠키주의 그룹은 절호의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다. 쿠데타 첫날에 당면한 전술적 목표는 러시아 연방 의사당 내부와 주변에 모인 백여 명 정도의 경무장한 옐친 추종자들을 공격해서 해산시키는 것이었다.

 

반혁명 분자들에 대한 결의에 찬 선제공격은 페레스트로이카에 염증을 느낀 노동계급의 광범위한 지지를 획득했을 것이다. 또한 군대 내에서 상당한 부위의 공감을 획득해 이들 가운데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분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결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쿠데타를 주동했으나 허우적거린 백발이 성성한 늙은 관료들은 이 "지원"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노동자권력의 이름으로 수행된 이 지원은 결국에는 이들의 이해마저 위협했을 것이다. 옐친의 어중이떠중이들을 해산시킨 후 모든 공장, 병영, 노동자 거주지구의 대표들에게 러시아 연방 의사당에 모여 진정 민주적인 모스크바 소비에트를 수립할 것을 촉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선제공격의 성공은 소련 전역의 노동계급 투쟁을 촉발시켜 자본주의 복귀세력들을 쓸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소련공산당 관료들의 통제력은 더욱 약화되었을 것이다. 옐친에 대항한 쿠데타 주동자들과의 군사적 동맹은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회복과 충돌하지 않았을 것이다. 19178월 코르닐로프 장군의 반혁명 쿠데타에 대항해 레닌은 케렌스키와 동맹을 맺어 쿠데타를 제압한 후 케렌스키의 부르주아 임시정부마저 타도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옐친의 반혁명 기도에 대항하여 독립적 노동계급 부대는 쿠데타 세력과 함께 총을 옐친에게 겨누어야 했다. 이 군사적 동맹은 노동계급 정치혁명을 수행할 세력을 강화시켜 정치적 억압체제를 복원시키려던 야나예프, 푸고 등 쿠데타 주동자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옐친 진영에 대한 선제공격이 성공했으리란 보장은 없다. 그러나 싸움도 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보다는 유혈이 낭자한 패배가 더 나았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백만 노동자들은 트로츠키주의 정치강령을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본주의 복귀 세력에 대한 투쟁과 직접적 노동자권력 수립 투쟁은 러시아 노동계급의 발전하는 정치의식을 위해 하나의 모범이자 중요한 논쟁거리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우리의 패배는 결코 불가피하지 않았다. 올바른 강령과 응집력을 갖춘 소규모 그룹의 개입은 팽팽한 세력 균형을 깨뜨려 반혁명 세력을 제압할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소련의 노동계급은 쿠데타 상황에서 독립적 정치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권력 투쟁은 숙주를 보존하고자 했던 기생충 스탈린주의자들과 이것을 파괴하고자 했던 옐친 진영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오직" 기생충일 때에만 집단적 소유를 방어한다고 WP는 불평한다. 그러나 이 조그만 "오직"이라는 단어는 쿠데타 당시 노동자국가의 사활이 걸린 시점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 있었던 세력들의 정치적 실체를 숨기고 있다. 기생충은 숙주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보존할 이해를 가지고 있다. 삶과 죽음의 결정적 순간에 기생충이 무장했고 숙주가 무장을 하지 않았다면 숙주의 생존은 기생충의 승리에 달려있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당연히 계획경제를 파멸시켰고 미래에 이것을 보존할 수 없는 집단이다. 그러나 현상을 유지하려는 이들의 목표는 당시 노동계급의 이해와 일치했다. 트로츠키는 소련에 대한 무조건 방어를 주창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권력을 상실했거나 좀더 유능했거나 양심이 좀더 깨끗했을 때에만 소련을 방어해야 한다고 그가 말하지는 않았다.

 

 

옐친이 더 위험했다

 

옐친보다 쿠데타 주동자들이 노동계급에게 더 위험 세력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WP는 옐친 진영을 지지했다. 이들의 사고는 [노동자권력] 9월 호에 실린 글에 표현되어 있다:

 

"국가소유를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노동계급이다. 그러나 파업 금지, 심야 통행금지, 검열, 정치활동의 금지 등으로 노동계급이 족쇄로 묶여있을 때에는 행동을 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쿠데타의 승리로 인해 관료집단이 정치적 억압을 유지하는 감옥과 같은 상황에서 '시간을 벌기'보다 차라리 자본주의 복귀의 물결 가운데에서 이에 대항하는 것이 허약한 노동자 조직들에게는 한결 낫다."

 

그러나 WP가 대단히 소중히 여기는 "민주적" 공간에서의 시간 벌기는 옐친의 통치하에서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이 점은 WP도 인정하고 있다: "옐친이 권력을 잡은 후 새로운 착취계급을 형성하는 상황에서 대중에 대한 완전하고도 일관된 민주적 권리는 허용될 수 없을 것이다"(위와 같은 글). 결국 민주적 권리와 관련하여 옐친과 쿠데타 주동자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민주적 권리를 정지시키는데 필요한 시간의 차이일 뿐이다. 승리했을 경우 스탈린주의자들은 기존의 경찰국가기구를 이용하여 노동자들을 탄압했을 것이다. 반면 옐친은 억압기구를 확립하기 위해 시간이 더 필요했을 것이며 이 동안 민주적 자유를 정지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빈곤, 높은 물가, 실업, 강도 높은 노동, 사회적 억압, 전쟁의 위협, 농촌과 도시 노동자들의 '노동의 결과'에 대한 유례없는 착취"([노동자권력], 199112월 호와 19921월 호)를 러시아 인민에게 가져다 줄 것이다. 이 점을 WP는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복귀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대중의 빈곤보다 스탈린주의자들의 정치적 억압이 노동계급에게 더 해롭다는 말인가? 옐친을 지지한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WP는 이 질문에 대해 긍정적으로 대답해야 한다. 그러나 이 대답은 러시아 문제에 대한 트로츠키의 모든 저작들의 내용에 위배된다. 스탈린주의 과두집단을 타도하는 투쟁은 집단적 소유를 방어하는 투쟁과 충돌하기보다 이 투쟁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궁극적으로 이 투쟁에 종속되어 있었다. 정통 트로츠키주의 조직이라고 자임하는 WP가 자신의 진짜 입장 즉 러시아 혁명의 사회적 성과를 방어할 임무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타도할 임무에 종속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8월 쿠데타에 대한 WP의 입장은 우리에게 이와 다른 결론을 내리게 할 수 없다.

 

혁명을 말하면서 행동은 개량주의인 정치 경향을 중도주의라고 트로츠키는 규정했다. 그렇다면 WP100% 순도를 가진 중도주의 조직이다. 이 조직은 정치 사건들과 세력관계를 정확하게 분석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나 급진/사회민주주의 여론에 추종하는 정치 경향 때문에 자신의 올바른 분석 내용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그리고 종종 자기 논리에 위배되는 실천적 결론을 도출한다. 기회주의적 이론과 실천 사이의 간극은 현실을 왜곡하는 것으로만 좁혀질 수 있다. 이 점을 WPUSFI로부터 배워야 한다. 이 간극을 좁히기 위해 USFI는 옐친과 국가비상위원회는 소유형태에 대해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으나 민주적 또는 권위주의적 방식을 채용하는 데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을 뿐이라고 강변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WP는 두 경쟁 진영이 상반되는 소유형태를 객관적으로 대표하고 있었다고 올바르게 주장한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옐친 진영을 지지하면서 자신의 분석과 실천 사이의 모순을 일련의 "정통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릇된 논리로 포장하고 있다.

 

 

SL: '그놈이 그놈이다'

 

제임스 라버쓴의 스파르타쿠스 동맹(SL)과 이 그룹이 거느리는 국제공산주의동맹(ICL) 산하 조직들은 오랫동안 자신들만이 지구상의 허다한 트로츠키 조직들 가운데 소련을 진정으로 방어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옐친의 승리에 대해 완전한 혼란된 노선을 제시하는 이 조직의 모습과 모순을 이룬다. ICL의 영국조직이 발간하는 [노동자 망치] 1/2월 호에는 혁명적 국제주의 동맹(RIL) 소속 제리 다우닝과의 논쟁이 "RIL: 국가비상위원회도 아니고 옐친도 아니다"라는 제목의 기사에 실려있다. 이 기사는 쿠데타에서 중립을 지킨 RIL을 혹평하고 있다:

 

"관료집단의 일 분파와 세계제국주의 및 자본주의 복귀 세력의 일 분파 사이의 차이를 RIL은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스탈린주의를 제국주의와 동일시한다면 자본주의 복귀 세력에 대항해 관료집단의 일 분파와 군사적 동맹을 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시각에 의하면 '자본주의 복귀 세력'과 동맹을 체결하여 자본주의 동맹 세력에 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윗 글을 읽으면 ICL 역시 자신이 혹평하는 이 중도주의 조직과 똑같은 노선을 주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도 못할 것이다. [노동자 망치]가 쿠데타에 대해 중립 입장을 취한 어떤 조직도 매섭게 비판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자기 국제지도부의 기관지 [노동자 전위]를 비판할 것을 제의한다. 후자의 830일 기사는 이렇게 주장했다:

 

"쿠데타 이전까지는 옐친의 전면적 민영화와 고르바초프의 시장 개혁을 반대했던 선진노동자 대부분이 관료집단의 소위 강경파 '애국주의' 분파에게 눈을 주었다. 그러나 이 환상을 가질 여지는 현재 조금도 없다....쿠데타 주동자들이 선언한 강령은 소련의 해체를 막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결국 글라스노스트(개방) 없는 페레스트로이카(시장 개혁) 즉 시장은 도입하되 너무 빨리 하면 안되고 토론은 금지시킨다는 것으로 집약된다....쿠데타 와중에 모스크바 노동자 위원회는 이렇게 촉구했다: '사회주의 소유를 보존하고 도시의 사회질서를 보호하고 국가비상위원회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노동자 민병대를 조직하자.' 그러나 국가비상위원회를 비판하는 언사는 한마디도 없었다. 옐친의 반혁명 시위를 분쇄할 노동자 민병대를 촉구한 것은 필요했다. 그러나 국가비상위원회가 권력을 공고히 했다면 노동자 민병대를 해체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후자는 전자의 통제에서 불가피하고 급격하게 빠져나갔을 것이다."

 

위의 글을 "국가비상위원회나 옐친이나 그놈이 그놈이다" 이외의 다른 의미로 해석하려면 해석의 천재가 필요할 것이다. 옐친과 국가비상위원회 사이에 근본적인 모순이 없다고 주장하는 SL의 논리는 USFI의 논리와 유사하다. 다른 조직들을 아무리 혹평해도 이 사실을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쿠데타가 실패하든 성공하든 소련의 계급적 성격이 변함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SL은 편들기를 거부한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고 있다. 이 조직의 주장에 의하면 소련은 여전히 건재하며 옐친은 지금도 퇴보한 노동자국가를 통치하고 있다.

 

그러나 만델과 달리 SL'싸우는 놈들은 다 뒈져라' 입장을 주창할 수 없다. 19918월까지 이 조직은 자본주의 복귀 세력에 대항해 스탈린주의자들과 군사적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입장을 주창하면서 좌익의 주류조직들 모두의 비난을 감수해왔기 때문이다. SL은 폴란드 연대노조의 반혁명 세력과 야루젤스키 정권이 1981년 격돌했을 때 후자에 대한 군사적 지지를 올바르게 주창했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제국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은 반동 회교 무자헤딘의 봉기를 진압한 소련군에 대해 군사적 동맹을 주창했었다. 사실 SL은 스탈린주의자들의 편을 너무나 열성적으로 든 나머지 군사적 지지와 정치적 지지의 차이를 모호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들이 8월 쿠데타에서 중립을 선언한 것은 최후의 최상의 소련 방어주의자라는 자신들의 목소리 큰 주장으로부터 급격히 단절한 것이다.

 

 

양심 불량의 중립 선언

 

이 노선 전환은 진정한 강령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SL 지도부는 주요한 노선 전환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기를 꺼려왔다. 따라서 이들은 모든 논리를 거부하고 자신들이 발표한 글들의 내용과는 정반대로 자신들이 결코 중립을 선언하지 않았다고 우긴다. 이들은 쿠데타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이 과거의 노선과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다양한 유보조항, 애매한 표현, 사실의 왜곡으로 자신들의 노선을 숨기고 있다. 그 동안 자신들이 펼쳐왔던 수많은 주장들과 중도주의 및 개량주의 즉 사이비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의 주장들 사이에 존재하는 뚜렷한 유사성을 숨기기 위해 SL은 목소리를 더욱 높여야 한다. 그러나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이들의 뉴욕 본부에서 나오는 불협화음은 더욱 뚜렷이 들릴 뿐이다.

 

SL이 그나마 논리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때는 옐친의 러시아 연방 의사당을 지키기 위해 모인 반혁명 오합지졸을 국가비상위원회가 해산시키려 하지 않았다는 매우 의심스러운 주장을 중심 축으로 놓는다. 논쟁을 진행시키기 위해 이 주장이 옳다고 가정하자. 그럴 경우 이 주장은 쿠데타 지도자들이 옐친과 아예 충돌하지 않았다거나 옐친에 대항을 했으나 너무 허약하고 우유부단하여 그에게 대적할 수 없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어느 것이 진정한 자신의 주장인지 SL은 명확히 하지 않는다. 국가비상위원회의 권력 쟁탈 시도가 "페레스트로이카 쿠데타"라고 이들이 반복해서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전자를 의미하는 것 같다. 쿠데타를 "애처롭다"로 표현하던가 또는 쿠데타 지도자들을 "총도 제대로 쏠 줄 모르는 8인방"으로 묘사하는 것을 보면 후자를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어떻게 결론을 내리든 이들이 제시하는 논리의 모순은 이리저리 엉켜서 해결될 가망이 없다.

 

옐친과 국가비상위원회가 모두 똑같은 정도로 시장 개혁을 찬성한다고 SL은 주장한다. 그러나 같은 글에서 "소련과 전세계 노동계급은 유례없는 대재앙을 맞았다.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10월 혁명의 나라에 반혁명의 홍수가 일어났다"([노동자 전위], 830)고 주장한다. 이 두 주장에는 일관성이 전혀 없다. 반혁명에 대한 주요한 장애물이 제거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반혁명의 홍수가 일어날 수 있는가? 쿠데타 지도자들이 대표한 세력이 이러한 장애물이었는가? 아니면 이들이 승리했을 경우에도 반혁명의 홍수가 일어났을까? 이럴 경우 이들의 패배는 왜 노동계급에게 "유례없는 대재앙"인가? [노동자 전위]는 이 질문들에 대대 명확히 대답할 수 없다.

 

국가비상위원회가 "개방 없는 개혁"을 목표로 했다는 [노동자 전위]의 주장은 와인스타인, 만델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이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민주적 권리의 문제에서만 옐친과 쿠데타 지도자들이 견해를 달리하고 있으며 특히 후자는 "철권 독재"로 자본주의를 강요하기를 원한다. 생각이 깊은 SL 조직원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소련 노동자들은 개방이 있는 민주적 자본주의보다는 개방이 없는 독재 자본주의에 대항하도록 조직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민주적" 옐친 진영을 지지해야한다. 그런데 USFI과는 달리 [노동자 전위]는 이 주장의 논리를 결론으로까지 추구하지 않을 뿐이다.

 

SL의 중립 입장은 또 다른 이유를 들고 나온다: 국가비상위원회는 옐친 진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관료집단의 일 분파를 대표한다; 그러나 이들은 너무 미적지근하고 무능해서 옐친을 패배시킬 수 없었다. 우선 이 판단은 사태가 종결된 후에 내려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쿠데타와 관련된 사건들은 너무 빨리 진행되어 쿠데타에 대한 [노동자 전위]의 글은 쿠데타 실패가 확정된 며칠 뒤에 나왔다. 쿠데타가 형편없이 찌그러질 것이라는 것을 SL은 미리 알고 있었다고 주장할 것인가? 소련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명줄을 다했으며 어떤 경우에도 고르바초프 등장 이전 시기로 소련이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명백했다. 그러나 이 일반적 평가로는 819일 쿠데타 당시의 정확한 계급역관계를 측정할 수 없다. 이것은 실제 행동을 통해서 시험될 수밖에 없었다. 쿠데타 세력의 승리가 자본주의 복귀의 대세를 일시적으로만 정지시켰다 할지라도 이것만으로도 이들과 군사적 동맹을 맺을 이유는 충분했다. 적대 세력들의 결의수준, 전술적 기교, 역량이 아니라 이들의 정치적 성격에 기초하여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편을 든다. 쿠데타 지도자들은 옐친의 기도를 파탄시키는데 관심이 있었을 수도 있었고 없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SL은 이 둘 모두를 원한다. 국가비상위원회가 옐친의 기도를 파탄 낼 생각이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이들이 일을 형편없이 꾸몄다고 SL은 비판한다.

 

더욱이 SL"8인방"이 옐친에 대항해 노동계급을 결집시키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을 통해 비판의 기이한 성격을 더욱 증폭시킨다:

 

"'8인방'은 노동계급을 옐친에 대항해 결집시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모두 직장에서 일이나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8인방'은 폭동을 일으킨 이유가 너무 빈약하여 옐친을 제압할 수 없었다. 이들의 폭동은 '페레스트로이카 쿠데타'였기 때문이다. 옐친보다 더 극악한 반혁명 세력도 패배시킬 수 있었던 노동계급을 쿠데타 지도자들은 동원하기를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이렇게 했을 경우 옐친 진영의 반격과 함께 내전이 터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 [노동자 망치] 19921/2월 호

 

위의 글은 이보다 10년 전에 폴란드 연대노조에 대해 SL이 주창했던 입장을 자랑스럽게 회고한다:

 

"1981년의 폴란드는 지금의 소련과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스탈린주의자들은 일시적으로 반혁명을 제압하기 위한 조치를 확실히 취했다. 이 중요한 대결 상황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소련의 경우 SL은 모호한 태도를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키고 있다. 다만 소련의 상황을 폴란드의 상황과 대비시키는 것은 적절하다. 우리 기억으로 야루젤스키는 보웬사에 대항해 폴란드 노동자들을 동원하지 않았다.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좀처럼 동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료적 특권층의 존재는 정치권력을 독점하는 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 점을 SL은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스탈린주의자들에게 노동계급을 동원할 경우에만 군사적으로 동맹을 맺겠다고 요구하는 것은 이들이 스탈린주의자가 되지 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같은 글에서 [노동자 망치]는 옐친 진영에 대항해 '8인방'이 취했을 어떤 조치에 대해서도 지지를 보냈을 것이라고 암시한다:

 

"노동자들에게 옐친의 바리케이드를 제거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반혁명 오합지졸들을 진압하기 위해 행동했던 쿠데타 세력에 대한 군사적 동맹을 의미했을 것이다....8월 쿠데타에 대한 RIL의 제 3 진영 중립 노선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입장을 밝혔다: '노골적인 자본주의 복귀 세력과 이에 반항하는 관료집단 세력이 대결하는 무장투쟁의 상황에서는 스탈린주의자들의 의도가 어떻든 집단적 소유에 대한 방어가 일정에 올랐을 것이다. 1938년 이행기 강령에서 트로츠키가 주창했듯이 "자본주의 반혁명의 공공연한 공격에 대항해 관료집단의 일 분파"에 대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군사적 동맹을 체결했을 것이다'."

 

1981년 폴란드 상황에서 연대노조는 무장저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야루젤스키의 탄압은 무장투쟁을 촉발시키지 않았다. 일련의 경찰국가적 조치들을 통해 계엄령이 강요되었다. 국가비상위원회가 좀더 단호하게 투쟁하여 계엄령을 선포했을 경우 SL은 이들과 군사적 동맹을 체결했을 것이라고 암시한다. 이 논리에 의하면 군사적 동맹은 스탈린주의자들의 단호함과 기교에 달려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자들의 사회적 성격, 정치적 목표 또는 이들의 승리나 패배의 결과 조성되는 객관적 상황에 기초하여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군사적 동맹을 체결한다. 그런데 SL은 스탈린주의 "강경파"가 쿠데타에서 보인 행위를 통해 이들의 정치적 목표와 사회적 성격을 판단한다.

 

이 주장은 순환논리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국가비상위원회는 옐친과 근본적인 이해관계를 달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옐친에 대한 적절한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이들이 근본적으로 이해관계를 달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들이 적절한 공세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순환논리이다. 관료집단 대다수가 자신의 특권과 권력을 제공하는 국가기구를 방어하는데 객관적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잊어버려라. 고르바초프가 옐친과 민족분리주의자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하여 점점 공격을 받은 쿠데타 이전의 당내 권력투쟁 전체에 대해서도 잊어버려라. 간단히 말해 쿠데타 시도 자체가 옐친 진영에 대한 공격이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려라. SL은 쿠데타의 동기가 불투명하다고 생각하면서 쿠데타를 정치적 맥락이나 배경이 없는 사건으로 치부한다.

 

 

쿠데타 세력이 옐친을 공격했는가?

 

쿠데타 지도자들의 전술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가는 현재의 논쟁에서 부차적일 뿐이다. 그러나 국가비상위원회가 실제로 옐친을 공격할 시도를 했는가? 쿠데타가 실패한 다음 밝혀진 사실들이 있다. 비밀경찰 산하 정예 특공대 부대인 알파부대는 1979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아민을 암살하고 친소 아프간인민당이 쿠데타를 성공시키는데 일조 했다. 이 부대는 쿠데타 당시 옐친의 러시아 연방 의사당을 공격하도록 명령을 받았으나 명령을 거부했다. 이 사실은 옐친 자신이 처음 밝혔으며 나중에 알파부대의 장교들이 이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SL은 무진 애를 써가며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려했다. [노동자 전위] 126일자 "왜 그들은 옐친을 공격하지 않았는가 --- 소련: 쿠데타의 해부"라는 제목의 기사는 [뉴요커]1991114일자에 실린 기사를 인용했다. 이 기사는 라버트 칼런이 쓴 글인데 알파 부대 장교들의 말을 부인하고 있다: "쿠데타가 실패로 끝난 뒤 알파부대원들이 한 회견 내용들은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회견마다 장교들은 자기가 명령을 거부하여 쿠데타를 실패로 만든 영웅이라고 자회자찬했다." 그런데 [노동자 전위]의 기사는 독일 주관지 [슈피겔]지가 출판한 내용의 요약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 독일 주간지의 기사에 의하면 쿠데타 가담자들은 체포된 후 심문을 받았는데 모두 러시아 연방 의사당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했다. 이상하게 [노동자 전위]는 알파부대 장교들의 주장은 크게 의심하면서 목숨이 걸린 재판에 앞서 쿠데타 음모자들이 부인한 내용들은 너무 신뢰하고 있다.

 

더욱이 [노동자 전위]는 칼런이 쓴 [뉴요커]지의 기사를 매우 선택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칼런에 의하면 알파부대는 최소한 한번은 러시아 연방 의사당을 공격하려했다. 이 주장은 공수부대 요원들의 진술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다. 최초의 공격에서 옐친 지지자들이 의사당 영내에 진입한 장갑차를 둘러쌌으며 옐친을 지지한 콘스탄틴 코베츠 장군이 공수부대 지휘관을 만나 공격을 하지 말도록 설득했다고 칼런은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첫 공격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국가비상위원회는 두 번째 공격을 시도했다:

 

"의사당으로 접수된 정보에 의하면 쿠데타 주동자들은 의사당을 포위할 능력이 있으며 자기들 명령을 따를 용의가 있는 부대를 찾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의사당 점거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는 소규모 회의가 국방부에서 열렸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고 코베츠 장군이 나에게 말했다."

 

그런데 두 번째 공격은 성사되지 못했다. 칼런은 이렇게 보도한다:

 

"이 최종적이며 결정적인 실패 후에 쿠데타 주동자들의 무능력에 대한 다양한 설명들이 제시되었다.... 이 설명들은 아전인수식이고 모순적이긴 해도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있었다: 소련군이 쿠데타 주동자들을 위해 피를 흘리기를 거부했다."

 

국가비상위원회가 옐친에 대해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SL이 인용한 보도는 거꾸로 SL의 주장을 틀린 것으로 증명하고 있다.

 

 

옐친의 승리: 반혁명의 승리

 

쿠데타 진행 과정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아직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쿠데타 주동자들의 소심함과 무능력을 이들의 부하들이 명령을 거부한 것과 대비시키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이 두 현상은 서로 대비되기는커녕 서로를 보충해준다. 국가비상위원회의 인물들은 1930년대 스탈린주의자들과는 다르다. 이들은 기가 꺾여 중앙집중적 권한을 완화하고 시장의 작동에 더 많은 여지를 줄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을 이미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이들의 행동 의지는 약화되어 있었다. 이들과 옐친의 차이점은 명확했다: 이들은 관료적 통치를 계속 유지하는 가운데 시장 "개혁"을 허용하고자했다. 위험에 처한 국가중앙기구를 방어하기 위해 공격에 나서야겠다고 이들이 결심했을 때는 이미 국가중앙기구는 한참 썩어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군대의 무조건적인 충성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 요인들은 서로를 강화시켜 결국 쿠데타의 황당한 실패로 결말이 났다. SL은 국가비상위원회와 옐친의 명백한 공통분모를 너무 강조하여 이들의 갈등이 소련 국가권력의 운명에 대한 투쟁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

 

쿠데타의 실패로 관료적 통치의 근간인 스탈린주의 국가기구는 영원히 손상을 입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반혁명의 수문"을 계속 닫아놓으려고 마지막 시도를 했을 때 SL은 이들과 군사적 동맹을 맺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이제 이 판단 착오를 합리화하기 위해 구소련이 심각하게 약화되어 위험에 처해 있으나 여전히 노동자국가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모습은 악명 높은 애완 동물 가게 주인이 손님을 안심시킨 일화를 생각나게 한다. 손님이 최근에 구입한 앵무새가 새장 바닥에 누워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자 손님은 환불을 요구한다. 그러자 가게 주인은 이렇게 주장한다: 앵무새는 죽지 않았습니다; 다만 움직이지 않은 채 잠을 자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뿐입니다.

 

SL은 구소련이 아직도 노동자국가라고 단순히 주장할 뿐 이 주장을 증명하려는 시도를 진지하게 하지 않고 있다. 공개토론회에서나 개인적으로 이들은 다양한 그러나 서로 모순되는 설명들을 제시할 뿐이다.

 

우선, 이들은 구소련 경제의 대부분이 아직 민영화되지 않았으며 공식적으로는 국가 소유로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정부의 포고령으로 복귀하지 않는다. 70년이 넘게 구축된 구조와 조직형태와 삶의 습관들을 무너뜨려야 한다. 193711월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소비에트 통치의 첫 몇 달간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경제 기초 위에서 통치를 했다....소련에서 자본주의가 복귀할 경우 새 정부는 상당기간 국가소유 경제에 기초하여 통치할 수밖에 없다."

 

옐친, 크라브추크 등의 승리는 이후 정치권력이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명확히 복귀시키는데 헌신할 자들의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들의 승리는 반혁명 세력의 승리인 것이다.

 

이런 주장에 마주치면 SL 조직원들은 뒷걸음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옐친은 친자본주의 정권을 주도하고 있으나 아직도 국가기구를 장악하지 못했다. 19922월 뉴욕 시에서 열린 SL 주최 공개토론회에서 구소련 군대의 해체를 항의하는 5천여 장교들이 19921월 크렘린궁 앞에서 시위를 벌인 사실을 SL은 강조했다. 노동계급의 대대적인 공세는 장교들을 분열시켜 상당수가 노동계급의 편으로 넘어올 수 있다고 SL은 주장한다. 이런 사태가 실제로 벌어질 경우 이것은 노동계급의 정치혁명이라는 것이다. SL은 여전히 선전물을 통해 노동계급이 정치혁명을 완수하여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타도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주장은 지금 진행중인 자본주의 복귀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불안정을 악용하고 있다. 소련의 해체로 등장한 정권들은 확고히 안착된 부르주아 국가를 통치하지 않는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은 완성된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다. 옐친의 통치력은 허약하다. 그러나 그의 일당은 새로 손에 넣은 권력을 십분 활용하여 반혁명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제국주의 세력, 페레스트로이카 백만장자, 암시장 마피아 등이 크렘린궁의 정책을 주도하고 있다. 구소련 관료들의 다수는 국가소유 재산들을 크게 도둑질하고 있다. 옐친의 부하들은 군대의 최고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노동자 전위]가 보도했듯이 3월 소련의 복구를 촉구하는 시위대에 대해 모스크바 경찰은 주저 없이 폭력을 행사하여 유혈사태를 초래했다. 일년 전만 하더라도 국가계획위원회는 계획 지시를 하달했고 군대와 경찰의 합동 순찰대는 거리로 나서서 암시장 투기꾼들을 괴롭히고 페레스트로이카 폭리꾼들을 체포하고 이들의 재산을 압류했다. 이제 국가계획위원회는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폭리꾼들과 백만장자들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

 

반혁명은 완전히 정착되지 않았지만 승리하고 있다. 국가권력 장악을 위해 다시 상승하는 노동자 투쟁은 성숙된 자본주의 국가보다 현재의 러시아에서 훨씬 적은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그러나 노동계급 혁명은 암시장 마피아를 일소하고 군대와 경찰기구에서 옐친 추종자들을 제압해야 한다. 또한 민영화 추세를 역전시켜 중앙집중적 계획경제를 회복시켜야한다. 한 달 한 달이 지나갈 때마다 노동계급 혁명이 직면할 과제는 더욱더 정치혁명이 아니라 사회혁명의 성격을 띠고 있다.

 

SL은 우리가 소련을 방어할 의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동자국가가 멸망했다고 우긴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표면적으로도 너무 황당하다. 제국주의 부르주아 계급은 소련 노동자국가가 멸망했다는 사실에 기초해 행동하고 있다. 맑스주의자들도 이 쓰디쓴 진실을 인정해야한다. 반혁명의 대세에 저항하는 구소련 노동자들은 언제 국가권력이 착취자들의 손으로 넘어갔는지 알고싶어할 것이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을 지도하기를 열망하는 자칭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이 그 운명적 순간에 어떤 입장을 제시했는지를 알고싶어할 것이다.

 

 

"유리 안드로포프 여단" --- 먼 옛날 먼 곳에서 일어난 일

 

SL은 자신들이 러시아 문제와 기형적 노동자국가에 대한 정치에 정통하고 있다고 항상 자랑해왔다. 그러나 이들은 스탈린 체제의 최후 위기 과정 내내 언제나 사태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 1989년 후반 동독에서 스탈린주의 정권에 저항하는 봉기가 터졌을 때 이들은 "노동자 정치혁명"이 시작되었다고 선언했다. 자본주의 통일에 대해 노동계급이 충분히 강력하게 저항하여 집권 통일사회당이 분열을 일으켜 이중 상당 부분이 집단적 소유를 방어하는 노동계급을 지지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 전망에 기초하여 SL/ICL은 많은 현금과 동원 가능한 모든 중핵들을 투입하여 사태에 개입했다. 19901월 통일사회당이 SL의 제안을 받아들여 동베를린의 트렙토우 공원에서 반파시즘 시위를 주최했을 때 SL의 위대한 지도자 제임스 라버쓴은 혁명의 성공에 대해 너무 환상에 사로잡혀 당시 통일사회당 당수였던 그레고르 기지와 회담을 주선하려했다.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기대되었던 정치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본주의 흡수통일에 저항하는 대신 동독의 스탈린주의자들은 친자본주의 정당들과 연합하여 동독을 청산시켜버렸다. 동독 의회 선거가 3월에 열렸을 때 통일을 위한 준비는 이미 완료되어 있었다. 그러나 SL은 여전히 노동자 정치혁명이 진행중이라는 환상을 고집하여 노동자와 병사들이 곧 소비에트를 수립하여 공장을 점거하고 허약한 친자본주의 정권에 맞서 이중권력을 수립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SL/ICL 지도부는 수십만 노동자들이 자신의 선거운동을 지지하여 자신들이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노동자들의 지도부로 곧 격상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자신들이 내세운 후보들이 독일맥주애호연합보다 훨씬 더 적은 득표를 기록하였을 때 이들은 진짜 대재앙에 빠졌다. 독일의 대참패는 8월 쿠데타에 대한 SL의 중립 입장을 초래한 직접적 원인이었을 것이다. 독일의 결과는 SL이 그 동안 스탈린주의 정권들에 대해 병적으로 호의를 보인 편향의 절정이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제국주의 공세와 내부 반혁명 기도에 반대해 스탈린주의자들과 군사적 동맹을 맺어왔다. 그러나 퇴보한 그리고 기형화한 노동자국가는 스탈린주의 기생충들을 몰아내는 정치혁명에 의해서만 장기적으로 방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미국 레이건 행정부 시절부터 SL은 군사적 방어와 정치적 지지의 분리선을 너무 자주 침범했다. 1983년 수도 워싱턴에서 열린 KKK단 반대 시위에 동원된 SL의 시위대 이름은 당시 소련공산당 총서기 안드로포프의 이름을 따서 유리 안드로포프 여단이었다. 그러나 안드로포프는 1956년 헝가리 노동자 정치혁명 때 투쟁을 진압한 장본인이었다. 안드로포프가 사망하자 [노동자 전위]는 일면에 그를 칭송하는 부고와 시를 실었다. 폴란드의 스탈린주의 독재자 야루젤스키 장군의 사진은 SL 뉴욕 본부의 벽을 장식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 진주한 소련군의 군사적 승리를 촉구하는 대신 SL은 크렘린궁의 개입을 "환호했다".

 

그러나 1989년 동유럽 전역에서 스탈린주의 정권들이 처참하게 붕괴하자 SL의 스탈린주의 정권지지 편향은 대단히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8월 모스크바 쿠데타가 일어나기 몇 개월 전 [노동자 전위]는 옐친 진영과 SL"애국주의자"라고 단순히 부른 관료집단의 보수파 진영 사이에서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 중용 노선을 걷고 있었다:

 

"소련의 노동자들은 '민주주의자''애국주의자' 사이의 잘못된 구분을 초월해야 한다. 이 두 분파는 반동적이며 기생적인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최종적 퇴보의 산물일 뿐이다. 두 분파 모두 세계 자본주의의 이해를 위해 노동계급을 억압하는 적들이다." --- [노동자 전위], 1991315일자

 

"잘못된 구분"이 노동자들이 편을 들어야 할 대결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노동자 전위]는 단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결이 정말 8월에 나타났을 때 SL은 과거 주장했던 스탈린주의 정권에 대한 정치적 지지 경향에서 극단적으로 이탈하였다. 그리고 공공연한 반혁명 세력에 대항해 스탈린주의자들과 군사적 동맹을 맺어야 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초보적인 전술적 의무를 방기해버렸다. 8월 쿠데타에 대한 SL의 부끄러운 중립 선언과 소련 노동자국가의 멸망을 거부한 이들의 태도는 이들이 그 동안 보유하고 있다고 자임해온 혁명적 지도력의 허세가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4 인터내셔널의 부활을 위해!

 

지금부터 50년도 더 전에 트로츠키는 노동계급의 혁명 지도력을 확립하는 투쟁은 궁극적으로 인류 문화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고 말한 바 있다. 노동계급의 새로운 혁명 지도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주의에 헌신하는 투사들의 의식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진지한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74년 러시아 혁명 가운데 경험되었던 승리, 퇴보, 궁극적 멸망 등과 관련된 교훈들을 흡수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 현재 혁명적 맑스주의 세력은 아주 미약하다. 그러나 강령적 명확성을 위해 투쟁하려는 혁명적 의지와 적극성이 결합될 경우 혁명 중핵들은 다시 결집되어 다시 한번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이 혁명적 재편은 트로츠키주의의 권위를 거짓 주장하는 온갖 개량주의, 중도주의 약장수들의 혼란, 동요, 배신을 정치적으로 폭로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격렬한 정치투쟁, 분열과 통합의 과정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세계정당 즉 제 4 인터내셔널은 부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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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viet Rubicon & the Left]([1917] No.11, 1992)

 

베네수엘라: 국가와 혁명

 

중남미 사회주의연방을 위하여!

 

중남미는 세계에서 소득 격차가 가장 큰 지역이다. 세계은행의 보고서 세계개발지수”(2005)에 따르면 중남미에서 1억이 넘는 인구가 하루 2달러도 안되는 수입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강요해온 긴축 및 민영화 정책으로 이 지역은 수십 년간 피폐에 피폐를 거듭하고 있다. 200575일자 [뉴스위크]지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국영기업을 이 지역보다 빨리 팔아치운 곳은 없다. 1990년대 말까지 개발도상 지역들에서 발생한 민영화 수익의 55%가 이 지역에서 나왔다....”

 

제국주의 금융 자본가들은 공공부문을 축소하여 수도, 전기, 가스 등 공공시설들을 민영화해왔다. 그리고 냉소하며 주장하고 있다: 이 지역에 만연한 처절한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외국자본이 더 많이 유입되어야한다. 그러나 제국주의 기업들에게 거대한 이윤을 안기는 국제통화기금의 긴축정책은 대중의 생활수준을 악화시키기만 했다. 제국주의자들의 뻔뻔한 거짓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신자유주의는 남미 전역에서 대대적인 저항을 불렀다. 20056월 볼리비아는 석유/가스를 민영화한 1996년의 조치를 철회하라는 대대적인 항의시위가 터져 거의 내전에 직면했다. 한편 카리스마를 가진 베네수엘라 대통령 차베스는 미국 주도의 제국주의 정책(“워싱턴 합의”)에 반대하는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볼리바르 혁명의 기치를 내걸고 수백만 빈농과 노동자들의 지지를 구했다. 시몬 볼리바르는 스페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남미의 독립투쟁을 벌인 인민 봉기의 지도자였다. 그의 이름을 딴 차베스의 볼리바르 혁명운동은 미국 기관들의 지원으로 차베스 정권을 위협하고 전복하려는 베네수엘라 지배계급의 끈질긴 공격을 받아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공격은 실패를 거듭했다.

 

한편 국제 좌익 조직들의 상당수는 자본주의 극복”, “21세기 사회주의 건설등 차베스가 남발해 온 언사에 한껏 흥분되어 있다. 이들은 열정적으로 소망하고 있다: 대통령의 지위를 이용하여 차베스가 반동세력에게 결정타를 가하고 베네수엘라를 혁명의 새로운 미래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위험한 환상이 아닐 수 없다. 1871년 파리 코뮌이 패배한 후 맑스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계급이 기존의 (자본주의) 국가기구를 단순히 접수하여 이것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행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 국가기구를 철폐하고 자신에게 고유한 국가기구를 새로 수립해야한다.)”

 

베네수엘라 노동운동의 맑스주의자들일부는 스승의 이 기본적 언명을 무시하고 있다. 테드 그랜트와 앨런 우즈가 주도하며 국제맑스주의경향(International Marxist Tendency)으로도 불리는 맑스주의인터내셔널준비위원회(Committee for a Marxist International, CMI)가 이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조직은 맑스주의 고전에 나오는 정의들과 인용문구들(‘기존의 국가기구를 철폐해야한다등등)을 끊임없이 들먹이는 종파주의자들과 형식주의자들을 비난해왔다. 후자에 의해 맑스주의의 과학적 명제들이 공문구와 종교적 주문으로 돌변했다는 것이다(Marxist.com, 200454). 맑스주의 기본원칙들을 종교처럼 또는 다른 방식으로 추종한다고 CMI를 비난하기는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어느 곳과 마찬가지로 베네수엘라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려면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철폐하고 노동자권력 옹호에 헌신하는 기관들을 수립해야한다.

 

 

 

 

베네수엘라의 계급과 국가

 

북미의 제국주의 공룡 미국은 베네수엘라 사회를 결정적으로 규정해왔다. 자동차 문화의 태동기인 제 1차 세계대전 중에 거대한 석유 매장지가 베네수엘라에서 발견되었다. 이 때문에 이 나라는 전략상 크게 중요해졌다. 현재 이 나라는 세계 제 5위의 석유수출국이다. 석유는 이 나라 국내총생산의 3분의 1과 수출총액의 80%를 넘게 차지하고 있다. 1970년대 유가 상승으로 국내경제는 호황을 누렸고 이 때문에 도시화가 크게 진행되어 지금은 전체 인구의 87%가 도시에 살고 있다. 그러나 심각한 빈부격차 때문에 노동력의 절반은 도시의 거대한 빈민지역에 집중된 비공식 부문에 종사하고 있다. 이에 비해 농업은 국내총생산의 6%를 차지할 뿐이다. 식량 수요의 3분의 2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197611일 페레스 정권은 석유산업을 국유화하고 베네수엘라석유공사(PDVSA)를 발족시켰다. 이로 인해 정부의 석유 수익은 증대되었다. 그러나 기존의 경영진이 새로 수립된 석유공사를 계속 운영했기 때문에 국제 석유 거대회사들은 이 나라의 원유를 상당히 할인된 가격에 계속 구입할 수 있었다. 1980년대에 베네수엘라석유공사는 해외에서 석유의 정제, 유통, 판매 관련 자산들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미국의 시트고 주유소 체인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석유산업은 또 다시 외국자본에 문을 열어주었고 현재 석유생산의 약 4분의 1은 외국기업들의 몫이다([차베스 시대의 베네수엘라 정세], 스티브 엘너 및 대니얼 헬링거 편집, 2003).

 

제국주의자들이 베네수엘라를 움직이는 또 하나의 지렛대는 이 나라의 외채이다. 세계은행의 2005세계개발보고서에 따르면 2002년 현재 베네수엘라의 외채는 325억 달러로 국민총소득의 약 3분의 1이다. 외채의 상당 부분은 1970년대에 발생했다:

 

외채는 1973년의 12억 달러에서 1978년의 110억 달러로 늘어났다. 천문학적 규모의 외국자본이 거대 국책사업들에 투입되었다. 수백만 달러 단위의 사업계약들이 현행법과 헌법을 무시하며 체결되었다. 유착의 고리들이 여기저기 형성되면서 엄청난 액수의 공적자금이 유용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금융자본이 막대한 이윤을 챙겼다. 금융자본의 유명인사들이 국가기구의 요직을 차지했다.”--- 프레데릭 레베크, 중남미정보연대네트워크(RISAL), 2004517

 

베네수엘라의 극소수 지배 엘리트들은 제조업, 수송, 은행, 언론 등 핵심 부문들을 소유하면서 사회와 정치를 장악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수많은 연줄들을 통해 제국주의 금융자본의 중심부와 연결되어있다. 한편 이들의 사촌격인 거대지주들은 농촌을 지배하고 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의 아메리카대륙위원회 선임연구원 씨쓰 들롱에 의하면 1960년의 토지개혁에도 불구하고 개인소유 토지 전체의 약 75% 내지 80%를 전체 지주의 5%가 소유하고 있다”(Venezuelanalysis.com, 2005225). 극소수 백인 지배계급이 누리고 있는 기생적 지위는 인종주의에 의해 합리화되고 있다. 엘리트 유럽인들이 흑인, 인디오, 메스티조 대중보다 인종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카톨릭 교회의 반()계몽주의 반동들은 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신성한 교리로 위조하여 퍼뜨리고 있다.

 

 

 

 

카라카소에서 볼리바르 혁명으로

 

유가 하락과 외채 급등으로 1980년대에 베네수엘라는 심각한 재정적 위기에 직면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페레스 정권은 국제통화기금이 명령한 긴축 및 구조조정정책을 수용했다. 이에 따른 일 단계 조치는 연료 가격의 자유화였다. 1989227일 아침 직장으로 향하던 인민은 버스요금이 밤새 100% 인상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버스가 뒤집히고 불태워졌다. 그러나 이것은 봉기의 첫 징후에 불과했다. 몇 시간 내로 봉기는 확대되어 각종 상점의 약탈과 파괴가 확산되었다. 빈곤과 분노로 열이 오른 빈민지역 청년들이 카라카스의 상업중심지에 몰려다녔고 도시 중심부에 가까운 아빌라산 기슭의 특권 부유층 거주지에 모여들었다. 밤새 그리고 다음날까지 봉기와 약탈이 저지 받지 않고 계속되었다. 카라카소라고 불리는 이 저항운동은 위력을 보이며 장기화되었으나 곧이어 군대의 잔인한 탄압이 며칠간 이어졌다.” ---[해방자의 그림자 속에서], 리처드 가트, 2000

 

곧이어 군대의 발포로 무려 3천 명이 사망했으나 봉기는 진압되지 않았다. 이때부터 기존의 사회통제 방식은 무력화되기 시작했다. 베네수엘라공산당에서 떨어져 나온 민족주의 좌파 조직들인 사회주의운동(MAS)과 급진적 대의(LCR)는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군대의 장교집단도 대중의 저항에 영향을 입었다. 19922월 차베스 대령 주위로 결집한 장교들은 페레스 정권과 신자유주의를 전복하는 쿠데타를 감행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하고 9개월 후 이들은 다시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이 거사는 잠시중단되고 있을 뿐이라고 지지자들에게 공언한 후 차베스는 감옥에 끌려갔다.

 

1969년부터 1974년까지 대통령이었던 칼데라는 1994년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대중의 반감을 샀던 조치 일부를 즉시 철회하고 부도 은행 몇 개를 국유화한 후 차베스를 사면했다. 더욱이 사회주의운동(MAS)의 대표가 장관이 되자 칼데라 정권의 인민주의 색채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새 정부는 경제를 되살릴 수 없었고 19964월 국제통화기금의 구조조정 정책에 다시 합의했다. 1993년부터 1999년까지 실질임금은 급격히 감소했으며 노동조합 조직률은 반감하여 13.5%에 불과했다. 실업률은 6.3%에서 14.9%로 배로 늘어났고 비공식경제부문은 확대되었다:

 

하루 소득이 2 달러가 채 되지 않는 빈곤층의 비율은 1991년의 32.2%에서 2000년의 48.5%로 늘어났다. 마찬가지로 하루 소득이 1 달러가 되지 않는 극빈층의 비율은 11.8%에서 23.5%로 늘어났다.” --- [국가개요: 베네수엘라], 세계은행, 20048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가속화되었다: “극빈층의 소득이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81년의 19.1%에서 1997년의 14.7%로 낮아졌다. 반면 극부층의 소득 비중은 21.8%에서 32.8%로 증가했다”([차베스 시대의 베네수엘라 정세]),

 

19943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차베스는 군민연합의 기치 아래 제5공화국운동(MVR)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패와 신식민지 노예상태에서 베네수엘라를 해방시키자는 강령을 내건 정당연합체 애국의 구심(Polo Patriotica)"에 합류했다. 199812월 선거에서 이 연합체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그는 56%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차베스는 세 가지 공약으로 1998년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첫째, 기독교민주당과 민주행동당의 양당정치체제인 푼토 피호 체제를 철폐한다(푼토 피호는 두 정당이 협약을 맺은 곳); 둘째, 부패를 종식 시킨다; 셋째, 빈곤을 완화시킨다.” --- 그레고리 윌퍼트, Venezuelanalysis.com, 20031111

 

대통령에 당선된 지 수개월 후 차베스는 제헌의회 소집 국민제안을 발의하고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 19997월 제헌의회 선거에서 그의 지지자들은 압도적 의석을 확보하여 다수당이 되었다. 이들은 베네수엘라가 법과 정의에 의거하여 민주주의와 사회발전을 지향하는 국가임을 선언하는 새로운 헌법 초안을 작성했다. 199912월의 국민투표에서 70%의 찬성으로 새 헌법이 비준되었다. 이로써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이라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탄생했다. 이로부터 7개월 후인 20007월 차베스는 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제 국가기구 내부에서 구체제 지지자들과 신체제 지지자들 사이에 갈등이 격화되었다. 차베스는 그의 지지자들 상당수와는 달리 지위를 이용하여 개인적 이해를 추구하는 데 무관심한 것처럼 보였다. 구체제 출신들은 당연히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볼리바르 운동이 빈곤과 세계화를 비난하면서 궁핍한 대중을 선동하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군대 내의 충성파 간부들을 동원하여 차베스가 공무원 사회를 감시하자 이들은 크게 놀랐다:

 

어느 고위급 경제고문이 이렇게 설명했다: ‘군대가 모든 곳에서 움직이고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군대의 정당이 진짜 존재하고 있다. 일부 부처에서는 이중권력이 형성되었다.’” --- 가트, 위의 글

 

미국 역시 차베스의 정책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제국주의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차베스 정부는 외국 자산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가트의 주장에 의하면 이 약속이 발표되었을 때 차베스는 개인적 책임을 회피하려고 국외에 나가 있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를 격렬히 비난하면서도 차베스 정권은 전기 및 알루미늄 공사의 민영화를 제안했다. 다만 석유공사는 계속 국영으로 남겨두었다. 취임연설에서 차베스는 정부의 경제계획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정부의 경제정책은 국가주의도 아니고 신자유주의도 아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국가의 보이는 손을 맞잡는 중도노선을 추구하고 있다. 필요한 만큼의 국가개입과 가능한 많은 시장 질서를 원한다.” --- 위의 글

 

사회정의를 외치면서도 정부는 외채를 계획대로 계속 상환했다. 그리고 반동세력을 안심시키려고 마리차 이사구이레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녀는 칼데라 정권의 장관으로 있을 때 대중의 분노를 산 조치들을 도입했었고 차베스의 지지자들로부터 비난 받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보수적 경제정책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지지하는 대중들은 대통령이 자기편이라고 믿으면서 대담성을 발휘했다. 2001년에 구체제 추종자들과 신체제 추종자들 사이의 갈등이 폭발했다. 인기 하락을 만회하기 위해 차베스는 선거공약의 일부를 실현하는 49개 조치들을 밀어붙였다. 이 중의 하나는 외국기업의 석유산업 통제력을 제한하고 석유 로열티를 배로 인상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우익 야당은 정권 전복 기도를 본격화했다.

 

베네수엘라 자본가들 일부는 차베스 정권과 타협을 원했다. 그러나 대다수 자본가들과 소자본가들은 격렬하게 정부에 저항했다. 베네수엘라노동총연맹(CTV)의 부패한 노동관료들은 노동자들의 올바른 불만사항 일부를 참주선동으로 활용하면서 자본가들 편을 들고 차베스에 대항했다. 썩었으며 냉소적인 좌익 일부, 특히 알바니아를 지지했던 [적기] 그룹의 타락한 스탈린주의자들 역시 제국주의와 손잡은 민주야당을 지지했다. 경영자협회와 석유공사 경영진의 지지를 등에 업고 노동조합총연맹은 20011210일 차베스가 1개월 전에 발표한 포고령에 항의하며 1일 총파업에 나섰다. 그러나 20022월 차베스는 석유공사의 최고 경영진을 해고하면서 이에 맞섰다. 이 조치는 이로부터 2개월 후 미국의 지원을 업고 일어난 쿠데타의 도화선이 되었다.

 

미국민주주의재단(NED)1980년대에 니카라과 반군에게 미국중앙정보국의 자금을 건네는 중간자 역할을 했었다. 그리고 미국노동총연맹(AFL-CIO) 산하 국제노동연대미국쎈터(약칭 연대쎈터)를 통해 베네수엘라노동총연맹에 오랫동안 자금을 제공해왔다. 연대쎈터는 과거 악명 높았던 자유노동개발미국연구소의 최신판이다. 1997년부터 2002년까지 미국민주주의재단은 연대쎈터에 베네수엘라 정부 전복활동 명목으로 70만 달러를 공식적으로 제공했다([월간평론], 20055). 베네수엘라 전복활동을 위한 미국민주주의재단의 예산은 20024월 쿠데타 직전 시기에 4배나 증액되었는데 이것은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닐 것이다. 특히 이 단체는 베네수엘라의 미래전망과 우선적 정책과제들을 논의하는 회의를 20023월에 주재했다. 이 회의에는 베네수엘라노총의 관료들, 경영자연합의 대표들, 카톨릭 교회의 고위층이 참석했다.

 

 

 

 

20024월 쿠데타: 미국산(美國産)

 

2002411일 베네수엘라 군부의 일부 분자들이 차베스 대통령을 체포했다. 그리고 경영자협회 회장 페드로 카르모나가 곧이어 대통령을 자칭했다. 그는 즉시 신헌법을 폐기하고 의회를 해산했으며 대법원의 권한과 운영을 정지시켰다. 또한 차베스의 포고령들을 전부 철회시켰으며 볼리바르 운동 지도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더할 나위 없이 냉소에 차서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자유, 다원주의, 법치 등이 이 나라에서 충분히 존중되고 있다는 것을 모두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연합통신사, 2002412). 그는 언론사, 지식계층 다수, 장교집단, 카톨릭 교회 그리고 물론 대자본가들과 거대지주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쿠데타 정부는 미국, 스페인, 국제통화기금 등에 의해 즉시 인정되었다. 그러나 선거로 수립된 정부를 미국 주도 하에 전복한 행위를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나라는 중남미에는 하나도 없었다. 이 쿠데타에 미국이 개입한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소식통들에 의하면 이미 몇 개월 전에카르모나 자신을 포함하여 쿠데타 모의자들은 미국을 방문하기 시작했고 지난 주말의 거사 몇 주 전까지 이 방문 행렬은 계속되었다. 이들은 백악관에서 부시가 중남미 핵심 정책입안자로 임명한 오토 라이쉬의 영접을 받았다. 라이쉬는 우익 성향의 쿠바계 미국인으로 레이건 행정부 시절에는 공개외교국 책임자였다. 이 기관은 이론상으로는 국무부 소속이었다. 그러나 의회조사 결과 그는 백악관에서 근무하는 레이건의 국가안보 보좌관 알러버 노쓰 대령에게 활동내용을 직접 보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 [옵저버](런던), 2002421

 

미 해군 정보장교였던 웨인 마즌은 이렇게 보고했다:

 

정보분석가 마즌씨가 어제 이렇게 말했다: ‘카라카스의 미국 대사관에서 육군무관 대리였던 제임스 라저스 중령이 쿠데타 기초 작업을 위해 현지로 간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다. 우리의 마약단속반 요원들도 이 일에 일부 관련되었다. 쿠데타와 무관한 작전 때문에 해군은 베네수엘라 해역에 있었으나 쿠데타가 진행되는 동안 통신정보를 지원했다고 알고 있다. 해군은 베네수엘라 군부에게 통신 방해 활동을 지원했으며 차베스 지지를 표명한 쿠바, 리비아, 이란, 이라크 등의 외교공관에서 오고 나가는 통신에 특히 관심을 집중했다.’” --- [가디언](런던), 2002429

 

카르모나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시간은 48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짧은 시간 안에 그는 스페인과 미국 대사들을 만났다. 그러나 차베스를 지지하는 수십만 대중이 미라플로레스 대통령궁 외곽에 집결하여 그의 대통령 직 복귀를 요구했다. 또한 쿠데타에 대한 정보를 미리 입수한 후 대통령궁 지하실에 숨어있던 차베스 충성파 군인 수백 명이 나타나 카르모나를 체포했다. 이로써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애초에 쿠데타에 가담했던 일부 고위 장교들은 쿠데타 첫날 카르모나가 보인 독재적 행동에 너무 구역질이 나 결국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이 사건은 쿠데타 불발 직후 차베스가 보인 행동을 일부 설명해준다. 차베스는 대통령직에 복귀하자마자 우익 대표들과 대화를 시도했으며 개혁조치 일부를 철회했다. 또한 해고된 석유공사 경영진이 복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유화 제스처에 마음을 누그러뜨리기는커녕 우익 대표들은 그가 허약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했다. 그리고 200212월 차베스 정권 타도를 위한 전국 총파업과 직장 폐쇄를 감행했다. 대자본가들 전부와 소수 노동자들은 직장폐쇄를 지지했다. 이 집단행동은 심각한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으나 두세 달 후 와해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차베스가 강경하게 나와 석유공사 경영진을 포함하여 가담자 18천 명을 즉시 해고했다.

 

노동계급 대다수와 중요 노동조합들 일부는 직장폐쇄를 적극 반대했다:

 

석유공사의 직장폐쇄를 저지하고 현장이 복구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특히 엘 일레나데로 데 야구아, 푸에르토 라 크루즈, 엘 팔리토 등의 정유소에서는 노동자들이 생산을 직접 통제하는 실험을 다양하게 전개했다. 후자의 경우 수십 명의 노동자들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경제 사보타지에 저항했다. 노동자들의 압력 때문에 페라리 정유소는 강제로 조업을 재개하여 휘발유를 배급했다.

 

다른 산업에서도 이와 유사한 실험들이 있었다. 직장폐쇄 중에 노동자들은 회사를 점거한 후 조업재개와 노동자에 의한 생산 통제를 요구했다. 마라카이의 섬유공장 텍스달라와 라라주의 설탕공장 쎈트랄 카로라가 이런 경우에 속했다.” --- 프레데릭 레베크, 중남미정보연대네트워크, 200365

 

200442일자 [전국카톨릭기자]지의 보도에 따르면 우익세력은 차베스 정권 전복을 위해 미국으로부터 연간 백만 달러를 지원받고 있었다. 직장폐쇄가 차베스 정권을 타도시키지 못하자 이들은 대통령 소환 국민투표를 위한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결국 2004815일의 국민투표에서도 정권 반대 세력은 처참하게 패배당했다. 소환 국민투표를 주도했던 수마테 그룹의 지도자 마차도는 제국주의 앞잡이로 유명했다. 투표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외국의 자금을 불법으로 사용했다는 죄목으로 그녀는 지금 형사 재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차베스 정권을 압박하기 위해 부시는 20055월 그녀를 백악관에 초대했다.

 

국민투표에서 차베스가 결정적으로 승리하자 정권 반대세력의 위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국민투표 직후 열린 2004년 지방선거에서 차베스 지지 후보들이 승리했다. 대법원에서도 차베스 지지 판사들이 다수파가 되었다. 우익세력이 이렇게 후퇴하자 차베스는 최소한 말로나마 좌경화하여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20051월의 세계사회포럼에서 사회주의정책을 추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정권 반대 세력이 우익 반동이라는 이유로 다수의 국제좌익들은 소환 국민투표에서 차베스를 지지했다. 그러나 차베스를 소환하고 대통령 선거를 새로 실시하자는 제안에 반대표를 던지는 것은 집권 부르주아 정부를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행위이다. 맑스주의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 노동계급의 명확한 대안을 표명할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계급의식에 투철한 베네수엘라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투표용지를 더럽혀 무효표를 만드는 것이었다. 동시에 우익이나 이들의 제국주의 상전들이 법의 한계를 무시하고 차베스 정권을 군사적으로 공격할 때는 무기를 손에 들고 차베스 정부를 즉시 방어할 것이라는 점을 이들은 명확히 해야 했다.

 

 

 

 

사회 개량과 볼리바르 운동

 

차베스 정권은 임무(missions)”라고 불리는 상당한 사회개량 조치들을 시행해왔다. 이로 인해 수백만 빈민은 정부로부터 중요한 지원을 받게 되었다. 임무 메르칼(Mission Mercal)은 대형할인점 체인을 수립하여 정부지원금으로 낮게 책정된 가격의 상품을 제공했다. 대대적인 문맹 퇴치 프로젝트인 임무 로빈슨(Mission Robinson)은 이미 백만 명이 넘는 빈민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쳤다. 임무 리바스(Mission Ribas)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공부를 계속하도록 도와주고 있으며 임무 수크레(Mission Sucre)는 빈곤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하여 대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하고 있다. 임무 부엘반 카라스(Mission Vuelvan Caras)는 임무 리바스 과정을 마쳤거나 기타의 경우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품위 있고 생산적인 직업을 영위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친다.

 

임무 바리오 아덴트로(Mission Barrio Adentro)의 목표는 무상의료 서비스 체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이미 쿠바의 의료전문가 2만 명이 병원을 차려서 도시와 농촌 빈민에게 건강 및 치아 관련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베네수엘라는 국제시장 가격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쿠바에게 석유를 판매하고 있다. 20056월에 시작된 임무 바리오 아덴트로 제 2편은 진료소, 재활 시설은 물론이고 병원도 세우고 있다. 현대 의료장비 구입을 위한 임무 바리오 아덴트로 제 3편은 차베스에 의해 이미 공언되었다. 임무 기적(Mission Miracle)은 환자 수천 명을 쿠바로 보내 돈이 없어서 하지 못한 수술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임무 프로그램들은 대중의 엄청난 호응을 얻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수백 만 빈민이 기층의 참여라는 구호 속에 정치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임무 프로그램들의 다수는 볼리바르 써클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이 써클은 7명에서 10명 단위의 지역 조직이며 대중의 임무프로그램 가입을 돕고 있다. 또한 프로그램의 과정을 지원하고 그 결과를 체크한다. 국가기구에 대해 준()독립적인 볼리바르 써클은 한때 적극 회원 2백만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되었다. 그러나 현재 이 조직의 위세는 한풀 꺾이고 있으며 다른 조직들로 대체되고 있다.

 

20022월 차베스 정부는 '100가구에서 200가구로 구성되는 토지위원회가 빈민지역 주민에게 토지소유권을 부여하겠다'는 내용의 토지 소유와 관련된 획기적 계획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도시지역의 토지위원회가 볼리바르 혁명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볼리바르 써클이 한물가면서 이제 도시지역의 토지개혁이 대중을 동원하는 촉매가 되고 있다....5천 개가 넘는 토지위원회들이 적극 활동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5백만 명 즉 전체 인구의 20%가 토지개혁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제 도시지역의 토지위원회는 베네수엘라 최대의 사회운동이 되었다.” --- 그레고리 윌퍼트, Venezuelanalysis.com, 2005912

 

또한 정부는 여성은행과 인민은행 등 소규모 금융기관들을 수립하여 중소기업과 협동조합에게 저리 융자를 제공하고 있다. 2003년에 수립된 전국주부연합은 토착민 주도 개발계획의 핵심 세력이다:

 

주부연합의 지도자 프라다는 이렇게 설명했다: ‘여성들에게 중소기업 활동과 지역사업을 위한 협동조합 수립 방법을 가르치는 인력도 우리에게 있다. 예를 들어, 바나나와 같은 원재료가 풍부한 지구는 이것을 이용하여 제과점을 차릴 수 있고 사업의 필요에 따라 지역의 수송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 이 모든 활동들이 지역 활동을 좀더 촉진할 것이다.’ 요리법, 식품 유통, 직물, 봉제 등과 관련하여 주부연합에 가맹한 협동조합들도 있다.” --- 벤저민 댕글, ZNet, 2005427

 

그러나 이런 조치들은 극빈층 다수의 삶을 개선시킬 수는 있지만 제국주의 세계질서가 조성한 사회 불평등의 뿌리는 전혀 건드리지 못한다. 최근 차베스는 “21세기 사회주의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시된 조치들은 인도주의적 자기관리형 경쟁 경제체제의 개발을 제시한 1999-2000년의 점진적 경제 프로그램을 크게 넘어서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인도주의적 자기관리형 경쟁 경제체제의 배경에는 사회적 생산체제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체제에서 생산 자원과 요소들을 배분하는 기본 장치인 시장은 협동조합, 전략적 소비자/생산자 조합 등 생산의 역동적 다양화를 촉진하며 가치를 부가시키는 보완적인 사적소유형태들을 통합한다.”

 

경제의 핵심 지렛대들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베네수엘라 자본가들과 이들의 제국주의 상전들의 이해관계는 이 나라 대중들의 이해관계와 깊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충돌하고 있다. 일부 경우에 자본가들은 대중에게 양보하도록 강제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부르주아 국가체제가 그대로 있는 한 노동대중의 투쟁성과는 역관계가 불리하게 바뀔 경우 손쉽게 유실될 수 있다.

 

 

 

 

볼리바르 농업정책의 한계

 

소위 거대농장에 대한 전쟁은 볼리바르 운동의 한계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200111월 차베스가 공포한 49개 포고령 가운데 극소수 지배 엘리트들을 특히 분노시킨 것은 온건 토지개혁의 임무를 띤 전국토지연구소 수립에 대한 포고령이었다. 이 법에 따르면 전체 면적 가운데 80% 이상이 노는 토지에는 세금이 더 부과되고 비옥도가 높은 100 헥타르 이상의 토지 또는 비옥도가 낮은 5,000 헥타르 이상의 토지는 완전 보상을 조건으로 국가가 접수할 수 있다. 이렇게 접수된 토지는 농민협동조합에 관리권을 넘기기로 계획되었다. 이 개혁 조치는 토지 소유에 대한 빈농의 갈증을 해소하고 농촌을 현대화하며 농업생산 증대를 통해 식량 주권을 강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전국토지연구소 소장 레오네테는 이것이 반()자본주의적 조치는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 나라 지주들은 자본가도 아니다. 자본가들은 자기 토지를 이용한다....유럽 자본주의는 이런 종류의 기생적 행태를 이미 오래 전에 제거했다”([외교세계], 200310).

 

그러나 기생 부재지주들을 가끔 말로만 비난했을 뿐 차베스 정권은 3년이 넘게 사유 토지를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이러는 동안 거대지주들의 무장조직은 100명이 넘는 농민 지도자들을 살해했다. 어떤 경우에는 지방 행정 당국이 지주를 편들었다:

 

야라쿠이, 아푸레, 카라보보 등의 주에서 야당 출신 주지사 또는 구체제 정치인들은 우리의 적이다. 그러나 20021월 코헤데스주의 엘 로발에서 적들을 풀어준 자는 바로 랑겔이었다. 그는 여당인 제5공화국운동의 후보로 선거에 당선되었다. ‘그는 농민들을 내쫓고 농장과 농기구들을 파괴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무토지 농민인 바스케스는 그동안 일어난 사태에 대해 아직도 분노하며 말했다. 혁명정부의 주지사가 어떻게 혁명에 반대하는 행동을 할 수 있는가?” --- [외교세계], 200310

 

차베스 정권이 반동들과 화해할 생각이 별로 없었던 20051월에 랑겔은 32천 에이커의 대농장 엘 차르코테에 국가방위군 소속 군인 200명을 보냈다. 이 대농장은 영국의 백만장자 베스티경이 소유했으며 몇 년 동안 수백 명의 무토지 농민들이 이곳에 눌러앉아 있었다. 2005114일자 [워싱턴 포스트]지는 차베스가 민주주의와 자유기업의 근간을 침해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유재산에 대한 공격이라고 이 사건을 즉각 비난했다. 그러나 유럽의 언론은 이 사건에 대해 히스테리를 보이지는 않았다. 영국방송공사(BBC)는 토지개혁이 가속화될 것이라는 차베스의 선언에 대해 다수가 기대했던 것보다 온건한 조치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2005315일 네덜란드국영라디오방송은 이렇게 보도했다:

 

차베스 대통령이 거대농장에 대한 전쟁을 공언했지만 정부는 몰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있다. 언제나 공공재산이었으나 개인 지주들과 기업들이 의심스럽게 차지해온토지는 다시 정부의 손에 들어가는 것일 뿐이다.”

 

최근 정부는 지주들과 조정을 통해 합의를 시도했으며 농민의 거대농장 점거를 지지할 생각이 없음을 계속 보여주었다. 이것은 거대농장에 대한 전쟁에 대한 강한 언사와 실제로 취해진 미온적 조치들 사이의 불일치를 뚜렷하게 증거하고 있다. 급진적 언사들을 수없이 남발했으나 차베스는 잘 알고 있다: 거대농장을 근본적으로 뿌리 뽑는 진정한 농업혁명은 도시의 자본주의 소유관계도 위협한다. 지난 몇 년에 걸쳐 차베스 정부는 거대지주를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빈농을 달래기 위해 2백만 헥타르가 넘는 국가소유 토지를 13만 농민가구와 협동조합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를 통해 정권은 농촌에서 자본주의 시장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거대지주의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

 

 

 

 

차베스와 공식 노동조합

 

차베스 정권은 여러 번에 걸쳐 최저임금을 인상했다. 20055월에는 최저임금을 물가인상율과 거의 맞먹는 26% 인상했으며 고용주들이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이 조치들은 공식경제부문 노동력의 절반에만 적용되고 있지만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것을 더 쉽게 만들었다.

 

차베스가 정권을 잡을 당시 주요 노동조합연맹은 매우 관료화한 베네수엘라노동총연맹이었다. 이 조직은 구체제 양당체제의 한 축이었던 자칭 사회민주주의정당인 민주행동당과 전통적으로 유착되어 있었다. 20003월 차베스는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한 석유공사 노조의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협상을 계속하려면 새 지도부를 선출하라고 요구했다. 정부의 요구를 따르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노동조합 지도부는 파업을 즉시 철회했다. 그러나 7개월 뒤인 10월에 석유 노동자 3만 명이 다시 파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4일간의 파업 후 60%의 임금인상을 따냈다. 이때 정부는 개입을 원치 않았다. 백만 명이 넘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연대파업을 선언했기 때문이었다([영국방송공사 뉴스 온라인], 20001015).

 

노동조합총연맹 관료들의 아성을 깨기 위해 정부는 2001년에 포고령을 내려 모든 노동조합들이 즉시 선거를 치를 것을 강제했다. 물론 노총 관료들에 질린 다수의 노동자들은 차베스의 개입을 지지했다. 그러나 맑스주의자들은 노동조합에 대한 부르주아 국가의 개입을 원칙적으로 반대한다. 노동조합의 부패에 저항하기 위해 관료적인 국가기구에 도움을 요청할 경우 약화되는 것은 노동운동뿐이기 때문이다. 노총 관료들이 선거에서 승리하자 차베스 지지자들은 조직을 나와 20034월 전국노동조합(UNT)을 결성했다. 이후 새 연맹은 급격히 세를 늘려 지금은 공공노동자의 압도적 다수 그리고 민간부문 노동자들의 절반을 대표하고 있다.

 

차베스를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인정하고 싶어 하는 좌익의 일부는 최근 정부의 국유화 조치에 흥분되었다. 맑스주의인터내셔널준비위원회(CMI) 그룹의 지도자 앨런 우즈는 이렇게 선언했다:

 

차베스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사회주의를 지지한 사실은 볼리바르 혁명의 목표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전에는 베네팔(Venepal) 그리고 지금은 발불라스전국건설회사(CNV)의 국유화가 이 목표를 확인시키고 있다. 볼리바르 혁명이 사회주의로 나아가지 않을 경우 실패할 것이라고 우리는 지적해왔다. 이제 우리를 비판한 자들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이 드러났다.” --- Marxist.com, 2005610

 

베네팔 제지공장은 소유주가 2002-2003년의 자본가 총파업에 참여한 후 파산했다. 한편 수백 명의 공장 노동자들은 20049월 직장폐쇄에 대항해 공장을 점거하고 조업을 계속했다. 결국 이 공장에 대한 20051월의 국유화 조치는 정부의 사후 승인에 불과했다. 차베스는 이것이 사회주의를 향한 조치라고 허세를 부리지도 않았다: “베네팔의 몰수는 정치적 조치도 아니고 정부의 조치도 아니다. 그저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하다. 토지가 당신의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몰수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폐쇄되고 버려진 공장은 모두 접수할 것이다”(Venezuelanalysis.com, 2005120). 회사가 파산을 공식 선언한 후인 200412월에야 정부는 국유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소유주에게는 공장의 시장 가치를 전부 보상한 후였다. 발불라스전국건설회사(CNV) 역시 석유공사 사장 출신의 피에트리가 공장을 폐쇄한 후 정부가 나서서 시설을 접수했다. 이 경우에도 정부는 약 60명의 공장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한 후에야 조치를 취했다.

 

한편 정부는 노동자들이 회사측과 공동 관리한 민간기업 일부와 기타 파산 기업들을 사회생산기업(EPS)으로 전환시키는 계획을 발표했다:

 

전기회사 카다페, 수도회사 히드로벤, 수도지하철회사 메트로, 국영항공사 콘비아사 등이 사회생산기업으로 전환될 기업들이다. 석유공사는 자본주의 기업에서 사회생산기업으로 전환이 완료된 기업이다. 이것이 차베스의 설명이다.... 이 계획을 위해 취해질 공장 접수 조치는 최후 수단일 뿐이다. 일단 소유주들과 합의를 도출할 것이다. 이 결과 정부의 지원을 통해 이들은 사회생산기업으로 다시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소유주가 기업의 상황을 개선하고 노동자 참여를 증진하며 제품 유통과 기업이윤 분배에 이들을 참여시키려는 용의가 있을 경우에만합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차베스는 말했다.” --- Venezuelanalysis.com, 2005718

 

좌익 일부의 헛된 소망에도 불구하고 고용주와 노동자의 공동 관리는 사회주의와 아무 관계가 없다:

 

카다페는 베네수엘라 전기 총량의 60%를 제공하는 국영전기회사이다. 이 회사 노동자들은 1998년 차베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공동 관리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24월의 불발 쿠데타 직후 공식으로 공동 관리체제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3년이 지난 후 회사운영 결정과정의 노동자 역할은 5인 관리위원회에 2명이 참여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더욱이 관리위원회는 회사 사장에게 권고를 할 수 있을 뿐 사장은 권고를 받아들일 의무가 없다. 전기연맹의 지도를 받은 회사 노동자들은 공사 경영진에게 진정한 공동 관리를 시행할 기회를 준 후 자신들의 불만을 표현하는 일련의 항의 행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전략이다. 왜냐하면 회사 노동자 대다수가 차베스를 열렬히 지지하고 있는데 이들의 항의는 회사를 관리하는 정부 부처인 동력자원부에 필연적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 [월간평론], 20056

 

공동관리의 최대 성공사례는 알카사이다. 공업도시 푸에르토 오다즈 소재의 이 국영 알루미늄회사는 부서별로 노동위원회를 설치하여 회사의 참여예산을 논의할 수 있게 만들었다. 20054월 이 공장의 노동자 27백 명은 5명의 회사 이사 가운데 2명을 직접 선출했다. 게릴라투쟁 지도자 출신인 이 회사 사장 란즈는 이렇게 제안했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공장 통제 조치이며 바로 이 때문에 21세기 사회주의로 향한 일보 전진이다”([영국방송공사 뉴스 온라인], 2005817). 그러나 실제로는 이 실험은 작업 속도를 높여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조치에 불과하다. 그리고 경영진은 언제든지 이런 것을 환영한다:

 

주물공장의 열 때문에 얼굴에 땀을 줄줄 흘리면서 지게차의 굉음과 공장 선풍기의 소음 속에서 이 회사 노동자 고메스는 이렇게 말했다: ‘경영진과 노동자들이 회사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일하려는 동기를 새로 갖게 된다.’” --- [뉴욕타임즈], 200583

 

차베스를 지지하는 노동조합 지도부는 정권의 공동관리 정책을 사회주의로 규정하기를 좋아한다. 전국노동조합 연맹이 내건 2005년도 노동절의 2대 구호는 공동관리는 혁명이다베네수엘라 노동자들은 볼리바르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다이다([녹색좌익주간지], 2005511). 노동자들이 경영진과 얼굴을 맞대고 결정사항들을 협의하며 국가가 대대적인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분권적 시장경제를 사회주의로 바라보는 것은 베네수엘라 인민 다수에게 고무적인 일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 전체의 이익을 의식하며 인도주의적 지향을 가지면서 노동자들이 관리하는 자본주의는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소자본가의 환상에 불과하다.

 

볼리바르 가짜 사회주의는 회사를 망친 자본가들을 공공자금으로 회생시키는 것에서 시작하여 모든 일이 잘 풀릴 경우 노동자들을 소자본가/직원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 뿐이다:

 

지금은 없어진 베네팔 노동조합의 운영위원 이었으며 현재 인베팔(국유화된 베네팔의 새로운 이름)의 이사 오르네보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제 경영진이 없기 때문에 노동조합도 필요 없다; 노동자들은 이제 협동조합으로 조직되어 회사를 운영한다. 그리고 그는 재빨리 이렇게 지적했다: 협동조합으로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정관에 따라 세금이 면제되는 등 여러 가지 혜택을 누리고 있다; 또한 1999년의 볼리바르 헌법에 의하면 회사 주식의 49%를 보유하고 있는 협동조합은 주식 지분을 95%까지 늘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는다.” --- [월간평론], 20056

 

그렇다면 번창하는 협동조합들은 시장 점유율을 충분히 확보하여 경쟁기업들을 파산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윤율이 떨어지는 협동조합들을 흡수하고 재조직하여 영업을 확장할 기회를 얻으려할 것이다. 또한 자신들의 전문 능력에 대한 보상으로 미래에 창출될 이윤의 일부를 원할 것이 틀림없다. 성공한 협동조합 회원들은 여러 가지 사업을 챙기느라 진짜 필요한 일을 할 시간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의 수입은 갈수록 전체 이윤에 대한 몫인 배당금으로 채워질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이다. 그리고 베네수엘라에 독특한 조화롭고 자비로운 종류의 자본주의라는 환상에 의해 잠시 그 본질이 위장될 것이다. 사회계급인 자본가 집단의 생산수단을 몰수하고 이들의 억압적인 국가기구를 해체해야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경쟁이 아니라 계획과 협동의 원리에 기초한 새로운 경제기관들을 수립해야한다. 바로 이 때에 진정한 사회주의는 시작된다.

 

 

 

 

볼리바르식 보나파르트

 

지금까지 차베스는 반대세력과의 모든 정치적 대결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했으며 현재 국민 대다수의 확실한 지지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생산, 통신, 수송 등의 주요 수단들은 아직도 자본가들의 손에 있으며 이들의 국가기구도 기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그리고 이들 자본가들은 '이후의 주요한 정치 대결에서 자신들은 제국주의 초강대국 미국의 지원을 받는 중남미 자본가 정권들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다. 지금까지 베네수엘라 군부가 차베스를 확고하게 반대하거나 지지하지 않고 불투명한 입장을 보인 것은 최소한 부분적으로 '여타 중남미 국가들에서와는 달리 베네수엘라의 장교들은 상당수가 피억압 대중 출신이다'라는사실에 기인 한다.

 

그런데 심지어는 차베스 지지자들도 자본주의는 좀 덜 그리고 사회주의는 좀더 많이”(ZNet, 2005410)라는 혼란스럽고 민족주의 좌파적인 그의 언사를 의심하고 있다. 차베스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연속선상에 놓인 두 지점이며 국유화 경제의 비율에 따라 체제의 성격이 결정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당연히 두 체제는 혁명 또는 반혁명 즉, 내전에 의해 그 생사가 판가름나는 상호 적대적 사회체제이다. 차베스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어느 여론조사 회사의 2005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 국민의 70% 이상이 전반적으로 대통령의 직무수행을 지지했으며 35%는 정부가 사회주의를 수립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10%는 대통령을 지지할지 말지를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차베스 지지자들 가운데 그가 사회주의를 수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경우는 20%도 되지 않았다(Venezuelanalysis.com, 200553).

 

차베스는 쓸데없이 나서서 예수를 칭송했다: “그는 가장 위대한 혁명가들 가운데 하나이다...진정한 예수는 빈민의 구원자이다”(ZNet, 2005410). 그리고 20057월 이렇게 주장했다: “베네수엘라 역사에서 지금 정부보다 기독교의 원칙에 더 가까운 정부는 존재하지 않았다”(Vheadline.com, 2005714). 사실을 말하자면 차베스 정권의 주요한 원칙은 바로 보나파르트주의이다. 맑스가 가장 먼저 사용한 이 용어는 서로 경쟁하는 사회계급들의 갈등을 초월하여 사회 위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들 사이에 위태롭게 곡예를 하는 강력한정부를 지칭한다.

 

운신의 폭을 유지하기 위해 차베스는 볼리바르 혁명의 특징으로 간주되는 참여 민주주의를 필요에 따라 무시했다:

 

후보들을 뽑기 위해 경선 제도를 도입하자는 세력이 차베스 진영 내에서 점점 대중적 세를 얻자 차베스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입장을 취했다. 지난 달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이미 후보들을 천명했다. 이들이 우리의 후보이다. 단결을 원치 않는 자들은 반대세력에 가담해도 좋다.’ 그러나 이 후보들은 여당인 제5공화국운동이 장악한 전국위원회에서 모두 지명되었다. 이 때문에 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언사를 실천에 옮길 것을 요구하는 다수의 지역들이 이에 맹렬히 반대했다.” --- 20041017

 

200512월의 국회 선거에서 차베스를 지지한 변화 지향 그룹의 후보들도 기층대중이 아니라 전국전술특공대에 의해 임명되었다.

 

차베스의 보나파르트식 행태는 자본주의 소유체제를 침해하지 않은 채 빈민과 짓밟힌 대중의 삶을 개선시키려는 자신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의 근본 이해는 화해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말은 사회주의를 말하지만 차베스는 '자신의 권력은 자본가 국가의 수반이라는 직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독재자처럼 행동할 필요가 없기를 소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볼리바르 운동을 지지하는 대중에 의거하여 중요한 사항들을 결정할 수 없다. 이렇게 할 경우 그의 아슬아슬한 곡예는 끝장날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은 백악관 주위에 모인 다시 태어난 기독교인들보다는 볼리바르 혁명과 같은 것에 좀더 세련되게 반응하고 있다. 이들은 베네수엘라 사태에 대해 크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200510월의 유럽 순방 도중에 차베스는 이탈리아의 우익 수상 베를루스코니와 회담했다. 후자는 나중에 이탈리아 신문 [공화국]지에 이렇게 말했다: 차베스는 우리와 같이 일할 수 있는 실용주의적 인물이다. 차베스는 미국과 이데올로기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양국의 상업 관계는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 나는 차베스를 이제 좀 안다. 나도 그와 좋은 관계에 있다”(Venezuelanalysis.com, 20051018). 현재 경영자협회 회장 베탄쿠르트 역시 공개적으로는 차베스에게 나머지 한쪽 뺨도 갖다댈 태세로 이렇게 선언했다: “공공투자와 민간투자가 합작하는 것이 이 나라를 조화롭게 발전시키는 유일한 길이다”(Venezuelanalysis.com, 20051026). 베탄쿠르트는 겉으로 보기에는 베네수엘라 경제개발 과정에서 소유권이 존중받을 것이라는 차베스의 선언에 대해 적절하게 반응했다”(같은 글).

 

그러나 베네수엘라 지배계급의 압도적 다수는 여전히 차베스를 맹렬히 증오하고 있다. 이들은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과 긴밀한 개인적 재정적 관계를 유지하는데 익숙해 있다. 그런데 국가를 책임지고 있는 자가 좌익적 발언을 일삼는 보나파르트식 독재자인 것이 영 마음에 걸린다. 그러나 차베스가 지배계급으로부터 상대적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이 베네수엘라 자본의 이해를 위해서는 더 좋다. 이 역설을 차베스는 카라카스에서 열린 거시경제원탁회의에서 설명했다. 베네수엘라와 미국의 자본가들 그리고 정부 관료들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말했지만 베네수엘라는 일종의 시한폭탄이다. 우리는 1995년과 1997년에 이렇게 말하곤 했다. 틱톡, 틱톡. 우리는 이 폭탄을 해체하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 이 폭탄이 완전히 해체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198519881989년보다 지금 이 폭탄이 터질 가능성은 훨씬 적어졌다. 그 때에는 폭탄이 이미 터졌다. 1990년에서 1998년까지 빈곤과 불평등은 만연했다.” --- [베네수엘라/미국 기업 대표들에 대한 차베스 대통령의 연설], Venezuelanalysis.com, 200576

 

차베스는 사회주의적 언사를 사용하여 자본주의가 야만 체제라고 말했다. 그런데 사회모순을 해체시키고 있다는 그의 표현은 사회주의적 언사에 크게 대조되면서도 볼리바르 프로젝트의 핵심을 찌르고 있다. 그는 '좀더 포괄적이고 사회적으로 책임지는 토착적형태의 경제개발을 통해 빈민과 제국주의 금융자본의 이해를 동시에 증진시키겠다'는 등의 실현 불가능한 약속을 하고 있다.이를 통해 그는 우익 세력이 이후 강력하게 피의 보복을 감행할 미래를 자기도 모르게 준비하고 있다.

 

 

 

 

볼리바르 혁명의 제국주의 반대

 

미국은 차베스 정권을 가차없이 적대하고 있다. 지구상의 무지몽매한 인민들을 위해 미국이 민주주의자유를 옹호하고 있다는 부시 행정부의 거짓 주장을 이 태도는 생생하게 폭로하고 있다. 미국 관리들은 차베스 세력의 계속된 선거승리가 엄밀한 의미에서는 합법적이라고 마지못해 시인한다. 그러면서도 차베스 정권이 권위주의의 새로운 유형이라고 경고한 후 그가 민주적으로통치하지 않는다고 즉, 미국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차베스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을 비난하고 국제통화기금과 아메리카주 자유무역지대를 맹렬히 비판했다. 그리고 카스트로와 친하게 지내왔다. 최근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은 외환보유고 대부분을 미국 달러에서 유로화로 전환시키기 시작했다(Venezuelanalysis.com, 105). 또한 차베스는 석유수출대금도 유로화로 결제할지도 모른다고 암시했다. 이 모든 것 때문에 미국의 제국주의 선전기구들은 그를 흉악한 짐승으로 묘사하고 있다. 신의 왕국이 건설되어야 한다는 편협한 주장을 일삼으며 부시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복음주의자 팻 라벗슨은 심지어 차베스를 암살하라고 율법에 근거한 명령을 내렸다. 20056월 볼리비아에서는 대대적인 반정부 투쟁이 준혁명적 상황까지 치달았다. 그러자 미국의 서반구담당국무차관보 라저 노리에가는 볼리비아에서 차베스의 영향력은 처음부터 명백히 드러났다”([마이애미헤럴드], 200568)고 주장하며 사태의 책임을 차베스에게 전가했다. 환각에 빠진 반공 광신도들에게 중남미의 악마로 항상 취급받아온 카스트로는 차베스에게 이렇게 농담조로 불평했다: “당신과 친구가 되면서 기존의 나의 이미지가 손상을 입고 있다는 것을 나는 요즘 실감하고 있소”([로이터통신사], 2005430).

 

미국의 이라크 모험이 점점 꼬이면서 베네수엘라에 대한 미국의 즉각적 군사 공격은 가능성이 적어졌다. 그러나 침공 계획은 확실하게 수립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미국은 콜롬비아의 군대를 대대적으로 지원하여 그 덩치를 세배나 불려놓았다. 이제 미국은 이 지역에서 콜롬비아라는 믿을만한 하수인을 두게 되었다. 차베스가 민병대를 소폭 증강하고 러시아제 에이케이 47 소총 10만정과 40대의 헬기를 구입할 계획을 발표하자 부시 행정부는 그가 이 지역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고 투덜거렸다. 미국의 국방장관 럼스펠드는 냉소에 차서 이렇게 질문했다: “도대체 어떤 위협 때문에 베네수엘라는 저렇게 많은 무기들을 구입했는가?”([영국방송공사 뉴스 온라인], 200571).

 

시장을 다원화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베네수엘라는 석유수출의 약 3분의 2를 미국 시장에 의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차베스 추종자들은 미국과 화해할 이유가 충분히 있다고 암시해왔다. 20024월의 쿠데타가 불발로 끝난 후 차베스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은 채 이렇게 선언했다: “내가 정권을 잡고 있기 때문에 미국으로 석유가 제대로 공급되고 있다. 나를 권력에서 밀어내려고 반대세력을 지원한다면 내전과 함께 석유공급이 중단될 것이다”(ZNet, 2002910). 20057월의 원탁회의에서 차베스는 미국 지배계급 양당 모두에 친구들이 있다고 말했다. 세계사회포럼이 열렸던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차베스는 연단을 주먹으로 치며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열변을 토해 자신의 좌익 팬들을 그렇게도 흥분시켰다. 이제 그는 이들을 무시하고 평화”, “이해”, “투명성”, “진정한 통합을 추구하자고 자신의 친애하는 북미 사업가 친구들에게 호소했다. 볼리바르 사회주의를 통해 자본주의를 극복하자고 촉구하기는커녕 '토빈세는 정부와 사회가 인류의 생존을 위해 역사적 동맹을 체결할 기금을 조성시킬 것이다(Venezuelanalysis.com, 200576)'라며 토빈세 실시 등을 주장하면서 제국주의 세계체제가 평화적인 방식으로 개혁될 수 있다는 환상을 유포했다.

 

국제유가의 폭등으로 볼리바르 혁명의 사회개량 프로그램들의 확장에 필요한 자금이 마련되었다. 1998년 차베스가 집권했을 때 석유는 배럴당 약 12 달러였는데 2005년에는 60 달러가 되었다. 그가 집권하면서 외국 석유회사들이 정부에 지불하는 로열티는 총수익의 명목적인 1%에서 16.6%로 올랐다([뉴욕타임즈], 200575). 그러나 정부의 석유 수익은 급등했으나 공공 부채 역시 증가했다. 베네수엘라 은행들에게 넉넉하게 지원금을 퍼주는 의도적인 정책이 이 결과에 큰 몫을 했다:

 

베네수엘라신용은행의 회장 멘도사는 이렇게 말한다: ‘정부는 자신의 석유수익 전부를 약 5%의 이자를 받고 같은 은행들에 예금한다. 그리고 14%의 이자를 주고 이 돈을 다시 빌린다. 미치도록 좋을 지경이다. 은행들이 돈을 벌기가 너무 쉽다. 이 정부가 부자들의 정부라고 내가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크리스티안 파렌티, “차베스와 석유 인민주의”, [나라], 2005411.

 

중남미 국가들 사이에 무역과 경제협력이 확대되면 미국에 대한 이 지역의 종속성이 감소될 것이라고 차베스 추종자들은 상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미국 지배의 아메리카주 자유무역지대에 대한 대안으로 차베스가 제안한 아메리카주의 볼리바르식 대안은 지금까지 쿠바만 반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볼리바르식 연대 프로젝트를 통해 기타 자본주의 국가들을 포섭하려는 계획이 내포하는 논리가 20058월에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투자와 일자리 증대를 요구하며 에콰도르의 석유수출을 중단시킨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항하여 차베스는 에콰도르 정부 편을 들었다. 노동자들의 강점인 연대투쟁을 갉아먹으며 차베스 정권은 이렇게 선언했다: “요즘 에콰도르 정부가 충족시킬 수 없었던 석유수출 약정을 베네수엘라가 대신 이행할 것이다. 에콰도르 정부는 단 한 푼도 낼 필요가 없다”([로이터통신사], 2005821).

 

 

 

 

베네수엘라의 맑스주의와 국가

 

그러나 차베스를 칭송하는 여러 국제 좌익 조직은 그의 파업 파괴 책동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중 맑스주의인터내셔널준비위원회(CMI)는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자본가계급으로부터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자성을 문서상으로는 옹호하고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강령을 실천할 레닌주의 전위당을 주창하고 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에는 자기의 주장과 이론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이 그룹은 생각하는 모양이다.

 

빈민과 무산자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차베스 정부의 조치들을 맑스주의자들은 폄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회주의의 근본 원칙들이 현실에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고 결론내리지도 않는다. 다른 모든 곳과 마찬가지로 베네수엘라에서도 자본가와 노동자는 물질적 이해관계가 서로 대립된다. 볼리바르 연금술사들이 아무리 요술을 부려도 자본주의 착취를 방어하고 증진하는 부르주아 국가기구는 사회해방의 기구로 변신할 수 없다.

 

차베스가 국가기구를 부분적으로 숙청했다”(Marxist.com, 2004520)CMI는 주장한다. 이 조직의 지도자 앨런 우즈는 심지어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와 자본가들을 중재시키려는 차베스의 보나파르트적 시도는 베네수엘라 국가기구가 더 이상 자본가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지 않다”(Marxist.com, 2004520)는 것을 의미한다. 차베스가 부르주아 국가의 수반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이 국가기구가 아직 자리를 잡지 않은 혁명을 위협한다고 경고하면서도 우즈는 이렇게 해결책을 제시 한다: 아직 국가기구 내에 몸을 숨기고 있는 모든 보수주의자들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Marxist.com, 2004520). “혁명의 중심부에서 보내는 목격담에서 이 조직의 지지자는 베네수엘라 부르주아 국가기구 내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주장되는 거대한 혁명투쟁을 숨을 헐떡거리며 이렇게 묘사했다:

 

이 나라 국가기구는 자본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혁명가들과 혁명이 너무 나아갔다고 생각하는 세력 사이에서 무자비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미라플로레스 대통령궁, 정부 부처들 그리고 모든 종류의 공직들은 개량주의자들과 혁명가들에 의해 거대하게 분열되어있다. 일부 부처들 예를 들어 노동부에서는 좌익이 강력하다. 크리스티나 이글레시아스는 전국노동조합 연맹과 협력하여 자본가들의 반노동자적 행태들에 대항하고 있다. 또한 노동조합에서 노동자 참여를 증진시키고 있으며 공동관리 조치들을 더욱 발전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 Marxist.com, 200597

 

혁명을 무력화시키는 베른슈타인의 개량주의 처방이 바로 이 글에서 모두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노동계급은 자본가의 국가기구를 평화적으로 접수하여 이것을 억압의 기구에서 해방의 기구로 서서히 전환시킬 수 있다.

 

CMI는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차베스는 좌경화했으며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이 지향을 지지하고 전진시켜야한다”(Marxist.com, 2004519). 차베스나 그를 칭송하는 CMI를 비판하는 자들은 차베스와 대중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파악하지 못하는 종파주의자로 낙인찍혀 무시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내내 차베스를 비판적으로 지지해왔다. 즉 그가 제국주의와 베네수엘라의 극소수 지배 엘리트들에 타격을 가하는 한에서만 그를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동요하면서 이들에게 양보할 때에는 그를 비판할 것이다.” --- 앨런 우즈, Marxist.com, 2004723

 

이것은 19172월 러시아에서 짜르가 타도된 후 수립된 부르주아 임시정부에게 스탈린, 카메네프 그리고 볼세비키당 우파 전부가 채택했던 바로 그 노선이다. 역사에 길이 남을 문서 “4월 테제를 통해 레닌은 이 노선을 단도직입적으로 거부하고 아무리 진보적이더라도 모든 부르주아 정부에 대한 강경한 반대 노선을 고수했다. 191710월 혁명 승리의 정치적 기초가 된 이 입장은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온갖 기회주의 대표들로부터 종파주의 광기(狂氣)라고 비난받았다. 지금의 CMI처럼 이들은 모두 자본주의 좌파정부에게 압력을 가해 혁명의 역동성이 전개되기를 기다렸다.

 

CMI는 차베스를 혁명의 촉매제로 보고 그의 대담한 조치들이 노동계급을 혁명으로 나아가도록 밀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즈는 말한다: “노동계급이 투쟁의 장에 진입하는 순간, 이들은 나름의 역동성과 운동성을 획득 한다”(Marxist.com, 2005121). 차베스가 혁명으로 도도히 전진하는 역사과정의 담지자라고 보고 CMI는 그에게 모든 희망을 건다. 그리고 차베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노동계급 내부에 유포하는 소자본가적 환상들에 대해 투쟁해야할 책임을 모두 내 던진다:

 

차베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베네수엘라의 극소수 지배 엘리트들과 제국주의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대중의 지지에 의존한다. 이들은 원래 사회주의 전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부패를 척결하고 베네수엘라를 현대화할 생각 밖에 없었다. 이들은 좀더 공정하고 정의로우며 평등한 사회를 원했으나 이것이 자본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고도 가능하다고 상상했다. 그러나 바로 이 생각 때문에 이들은 자본가계급과 제국주의에 즉시 충돌하게 되었다. 대중이 거리로 나서면서 이 과정은 전혀 다른 역동성을 부여받았다. 대중운동은 차베스에게 자극제가 되었으며 그는 이 운동이 혁명을 지향하도록 고무해왔다.” --- 앨런 우즈, Marxist.com, 2004520

 

차베스는 자기를 연모하는 CMI를 주목하고 자신의 주간 텔레비전 프로그램 대통령과 함께에 이 조직의 대표들을 초대했다. CMI는 자랑스럽게 이렇게 보도했다: 우즈와 다른 한명의 조직 회원이 대통령 바로 반대편의 눈에 확 들어오는 앞자리에 앉혀졌다. 이 대담 프로그램 도중 차베스는 우즈의 이름을 최소한 3번 언급했다”(Marxist.com, 2004419).

 

물론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레닌은 제 2 인터내셔널의 세련된 체 하는 속물들을 비웃었다. 이 속물들은 독일제국의 장관들 그리고 유명한 자본가들과 사이좋게 지내면서 노동자들에게는 '사회주의를 선사할 준()자동적인 역사과정의 도도한 물결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라'고 가르쳤다 우즈는 추종자들에게 조만간에 대중은 자신의 행동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를 의식할 것이다”(Marxist.com, 2005121)"라고 확신시켰다. 그러나 그의 확신은 정말이지 별볼일이 없다. 대중이 정치의식을 획득하도록 투쟁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 조직은 전혀 쓸모가 없다. 노동자들이 사회현실을 이해하고 자신의 진정한 이해에 따라 행동하며 이를 통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의해 몽롱해진 즉자적 계급이 아니라 대자적 계급이 되도록 돕는 것이 바로 혁명가들의 진정한 임무이다.

 

 

 

 

혁명인가 반혁명인가?

 

베네수엘라의 빈민과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자신들에게 강요한 빈곤과 절망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는 의지를 반복해서 증명했다. 자본가들을 계급집단으로 바라보고 이들의 생산수단을 몰수한 후 사회주의의 기초 위에 사회 재건을 시작하는 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부여한 임무이다. 이 임무를 선진적 분자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맑스주의자들의 소명이다. 이 소명을 완수하는 데에 필요한 첫 단계는 착취자들과 화해하거나 전략적으로 타협하자는 노선을 격퇴시키는 것이다.

 

베네수엘라는 정지해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회주의로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표류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제국주의 공룡 미국은 이라크에서 된통 당해왔기 때문에 중남미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새로 감행할 의사가 없다. 그러나 이 공룡의 하수인인 콜롬비아의 지배자들은 지금 할 일이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볼리바르 운동에게 3번 연속 패배한 베네수엘라 우익 반동들은 재집결하면서 패배의 상처를 보듬고 있다. 이들의 손에는 언론뿐 아니라 경제의 핵심 지렛대들이 그대로 쥐어져 있다. 따라서 이들이 다시 한번 공세로 나서는 일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칠레의 피노체트나 스페인의 프랑코가 감행했던 우익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해서 베네수엘라 노동자들은 공장, 정유소, 광산 그리고 기타 모든 일터에서 선거를 통해 대표들을 선출해야한다. 그리고 이들의 네트워크를 통하여 자신들을 투쟁 부대로 조직해야한다. 협력의 네트워크를 전국 차원에서 수립하는 노동자평의회 체제는 생필품의 생산과 유통을 장악하고 사회의 피억압 계층 대부분을 정치투쟁의 장으로 동원할 것이다. 그리고 자본가들과 이들의 용역 깡패들이 대중에 대한 잔인한 탄압을 통해 기존의 특권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책동을 모두 효과적으로 격퇴할 것이다.

 

권력 장악 투쟁에 헌신하는 정치 지도부를 노동운동 내부에 수립하는 것, 바로 이것이 지금 베네수엘라에서 필요하다. 이 지도부는 노동계급에 뿌리 내린 레닌주의 전위당이다. 이 정당은 볼리바르 운동을 계급적으로 분화시키고 노동계급을 자본가 계급과의 결전에 대비시켜야한다.

 

좌익 일부는 '차베스 정권이 카스트로의 726일 운동과 같은 길을 갈 것이다'라고 희망하고 있다. 카스트로의 운동은 급진 자유주의 조직으로 시작하여 기존의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분쇄한 후 자본가 계급의 생산수단을 몰수하여 중앙집중화된 명령경제체제를 수립했다. 이 결과 미국 플로리다주 해안에서 약 150 킬로미터 떨어진 쿠바에서 기형적 노동자국가가 수립되었다. 이것은 쿠바 자본가들과 이들의 상전인 미국의 제국주의자들이 고삐를 늦추지 않고 비타협적으로 카스트로 정권을 적대한 결과였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대항 세력으로 소련의 퇴보한 노동자국가가 있었기 때문에 쿠바 노동자국가는 성립될 수 있었다.

 

2006년 베네수엘라와 1960년 쿠바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지금 소련은 사라졌고 베네수엘라의 부르주아 국가기구는 온존하고 있다. 차베스는 정권에 특히 적대적인 분자들을 제거했지만 자본주의 국가체제의 핵심은 건드리지도 않았고 그럴 의사도 없다. “볼리바르 혁명의 실험은 일시적인 막간극에 불과할 것이다. 지금 베네수엘라 사회 앞에 놓인 길은 '노동계급이 자본가 계급의 생산수단을 몰수하여 이 계급을 청산하는 길로 전진하든가 아니면 자본가 계급이 노동계급을 압살하든가'의 두 가지밖에 없다. “3의 길또는 중간의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산수단이 극소수 지배계급의 손에 남아있는 한 중남미 대중의 고통과 불행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의 위대한 혁명가 트로츠키는 지금부터 70년이 넘는 과거에 이미 이렇게 말했다:

 

중남미는 모든 국가들을 하나의 강력한 연방으로 단결시키는 것을 통해서만 후진성과 노예상태에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 그러나 뒤늦게 등장했으며 외국 제국주의에 철저히 굴종하는 남미 자본가 계급은 이 임무를 달성할 수 없다. 이 임무는 피억압 대중 지도자로 선택된 남미의 젊은 노동자들에게 맡겨져 있다. 따라서 세계 제국주의의 폭력과 음모 그리고 식민지의 토착 매판자본 파벌들의 피비린내 나는 더러운 억압에 대항할 구호는 중남미 소비에트 합중국이다.” --- “전쟁과 제 4 인터내셔널”, 1934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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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8, [1917])

러시아: 자본주의 생지옥

 

<반혁명의 정치와 경제>

 

19918월 모스크바의 쿠데타에서 보리스 옐친의 자본주의 복귀 세력이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잔당을 누르고 승리했다. 이때 이후 지금까지 10년 동안 구 소련의 절대다수 인민은 격심한 고통과 절망을 경험했다. 자본주의를 선전하는 자들은 입심 좋게 "번영"을 약속했다. 그러나 국가소유 재산의 큰 덩어리들을 자기 것으로 만든 자들만이 번영을 누렸을 뿐이었다. 구 소련 시절 상점에 늘어선 사람들의 긴 줄은 한때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가난하여 생활필수품조차 구할 수 없는 수백만의 헐벗은 러시아 인민에게 이 긴 줄은 그나마 즐거운 추억으로 아련히 남아있다.

 

옐친은 1992"충격요법"을 도입하면서 짧은 순간의 고통은 몇 달 후 끝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96년 그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러시아 인민을 이렇게 안심시켰다: "나는 확신합니다. 2000년에 러시아는 부강한 민주국가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부르주아 언론도 인정한다: 구 소련에 도입된 자유시장 경제체제는 사회적 대재앙을 불러 들였다.

 

범죄와 부패는 기승을 부리고 있다. 부자와 빽이 좋은 자들은 법을 무시하며 멋대로 행세한다. 자본주의로 복귀하면서 러시아는 선진 경제권 사상 가장 심각한 불황을 기록했다.

 

"러시아 경제는 거의 매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해왔다. 거짓 수치로 악명이 높은 공식 통계를 보더라도 10년 동안 국민총생산은 약 53% 하락했다... 모스크바의 이름 있는 몇 개 건축 사업들을 제외하면 병원, 도로, 감옥, 학교, 철도 등 사회기반시설이 무너지고 있으며 열악한 상태에 있다. 러시아인들은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있다. 이들의 주택은 형편없다. 이들은 제대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인들은 일찍 죽고 있으며 아기들은 너무 적게 태어나고 있다. 이것은 사회붕괴의 가장 명확한 증거이다. 10년 전에 비해 인구는 6백만 명이나 줄었다." --- <이코노미스트 지, 2000330>

 

소련의 업적

 

노동자 혁명이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하게 승리하면서 소련이 탄생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지도한 나이 어린 이 노동자국가는 오래 지속된 내전에서 백군과 이들의 제국주의 동맹군을 물리쳤다. 국내외 자본의 몰수와 외국무역의 독점을 통해 볼세비키 정권은 초기에 계획경제의 기초를 세웠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스탈린이 대표한 반()노동계급적 특권층의 등장으로 경제 운영은 심각하게 기형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 소유체제는 역동성을 발휘하여 농민이 절대 다수인 국가에서 현대화된 공업국으로 소련을 변모시켰다.

 

냉전 시대의 선전가들은 소련을 "자유세계"를 지배하려는 불길한 전체주의 강대국으로 묘사해왔다. 이제 이들은 소련이 70년을 지속하는 동안 항상 붕괴 직전의 위기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들의 주장과 매우 다르다. 관료적 기형화에도 불구하고 소련 경제는 상당 기간 급격히 성장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경제 대공황으로 비척대던 1928년과 1938년 사이 소련의 공업생산은 무려 600%나 증가했다([초강대국들의 등장과 몰락], 폴 케네디).

 

할리우드 영화의 내용과는 달리 제 2차 세계대전의 결정적 전투는 동부 전선에서 벌어졌다. 이곳에서 히틀러의 정예 사단들은 적군에게 패배하여 베를린까지 후퇴했다. 전쟁의 대대적인 참상에서 회복된 소련은 급격한 경제성장을 계속했다. 역사상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가 1957년 성공리에 발사되자 제국주의 수뇌부는 경악했다. 미국 대통령 케네디의 1960년 대통령 선거유세 주제의 하나는 소련의 경제성장을 따라 잡자는 것이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까지 소련은 "3 세계" 지도자들 다수가 흠모하는 모델이었다.

 

사기가 저하된 좌익분자들과 부르주아 정치학도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스탈린 치하 러시아는 새로운 종류의 계급사회이다. 그러나 관료집단의 지배체제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고 트로츠키는 인식했다:

 

"시간이 갈수록 관료집단은 노동자국가 내부에 존재하는 세계부르주아 계급의 기관이 된다. 이들이 집단적 소유체제를 타도하고 러시아를 자본주의로 복귀시키거나 노동계급이 이들을 타도하고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열거나 둘 중의 하나의 길이 있을 뿐이다." --- <이행기 강령>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노동자국가의 생존에 장애가 되므로 타도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자본주의 복귀에 반대하여 퇴보한 러시아 노동자국가를 방어할 임무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 임무를 노동계급의 정치혁명을 통해 관료집단을 타도하고 노동계급의 직접 민주주의 체제를 회복시킬 임무와 결합시켰다. 진정한 사회주의 체제는 이를 통해서만 수립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70년간 퇴보한 노동자국가 소련은 서방 제국주의의 헤게모니를 견제하는 세계적 차원의 대항 축이 되었다. 소련의 관료집단은 제국주의 세력과 "평화공존"을 원했으나 이 소망은 수포로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반제국주의 운동의 결과 중국, 쿠바, 월남 등에서 탄생한 기형화된 노동자국가들의 중요한 물리적 버팀대 역할을 했다.

 

짜르 체제의 타도가 세계노동계급의 가장 커다란 승리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소련의 자본주의 복귀는 국제노동계급 운동의 가장 심각한 패배가 될 것이라고 트로츠키는 주장했다. 구 소련 인민에게 닥친 사회적 대재앙은 그의 견해가 올바르다는 사실을 충분히 증명했다.

 

 

페레스트로이카

 

1960년대 초반부터 소련의 경제성장은 뚜렷하게 둔화되기 시작했다. 사회 및 정치 생활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려는 관료체제의 시도들이 대중의 창조성과 더욱 더 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소련의 공업화가 절정에 달했던 1930년대에 러시아 혁명의 운명을 훌륭하게 연구한 [배반당한 혁명]에서 트로츠키는 이 상황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관료적 명령경제는 "창조적 자발성과 책임의식을 파괴하여 질적인 향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관료의 명령으로 이미 존재하는 서구의 모델에 따라 거대한 공장들을 건설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할 경우 비용은 정상적인 경우보다 3배나 더 많아진다. 수준이 높아질수록 질적 수준을 유지하는데 더욱더 문제가 발생한다. 질적 우수성은 관료집단의 손아귀에서 소리 없이 사라진다. 소련의 제품들은 품질에 관심 없음이라는 잿빛 상표를 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국가소유 경제에서 품질이 향상되려면 생산자와 소비자의 민주주의, 비판과 창의성의 자유 등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두려움, 거짓말, 아첨 등이 난무하는 전체주의 체제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걸쳐 소련의 경제성장률은 꾸준히 하락하여 1980년대 초가 되면 거의 제로 상태가 되었다. 브레즈네프 치하에서 관료들은 국가의 미래를 비관하였으며 자신들이 공언하는 공식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조차 지극히 냉소하였다. 관료화된 계획경제가 즉시 제공할 수 없는 상품과 서비스가 규모가 커진 "지하경제"에 의해 제공되었다.

 

브레즈네프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장악한 안드로포프는 한때 비밀경찰의 총수였다. 그는 경찰력을 동원하여 노동규율을 더욱 강화시키면서 사태를 역전시키려 하였다. 그의 노력과 몇 년간 지속된 풍작으로 1980년대 중반에는 경제성장률이 잠시 상승하였다. 그러나 관료적 명령경제의 구조적 문제들은 국가기구의 행정적 압력을 증대시키는 것으로 극복될 수 없었다.

 

1985년 소련 공산당 총서기가 되어 권력을 장악한 고르바초프는 소위 페레스트로이카를 표방했다. 이 정책은 계획경제 내에 시장경제 "개혁"을 도입하여 효율 증대, 품질 개선, 경제생산 촉진 등을 가져올 것이라고 선전되었다. 고르바초프는 관료집단의 보수적 분자들 특히 중앙기획부처들의 저항을 무력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이 노력은 공개적으로 자본주의 복귀를 주창한 세력의 영향력을 가속화시켰다. 우리는 당시 이렇게 주장했다:

 

"시장 기제에 극도로 의존하고 중앙기획부처들의 역할을 질적으로 감소시키는 고르바초프의 정책은 그 자체로는 자본주의 복귀가 아니다. 그러나 `개혁정책'은 이미 수십 년의 관료적 실정으로 지극히 약화된 경제의 그나마 남은 힘을 소진시킬 위험이 있다. 따라서 이 정책은 소련 사회를 발작적인 반혁명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게 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 <IBT 기관지 [1917] 4, 1987년 가을>

 

고르바초프 개혁의 첫 단계는 1986년 개인 "협동조합"을 합법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자 협동조합은 국가의 자원을 즉각 개인적 용도로 유용하기 시작했다. 다음 해에 그는 행정 명령을 통해 관료기구에 의해 임명되었던 공장 관리자가 공장 종업원 투표로 선출되도록 강제했다. 이 조치로 공장 관리자들은 관료적 서열에 따른 명목상 상관의 통제에서 벗어나 운영의 자유를 대폭 보장받았다. 그러자 이들은 이 새로운 자유를 즉시 이용하여 기업의 자산을 사유화시켰다. 대개의 경우 이들은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원자재나 완제품을 친척이나 친구가 운영하는 협동조합에 넘겼다. 그러자 협동조합은 이것들을 가장 높은 가격에 그리고 특히 현금으로 구입하는 자들에게 팔았다. 그리고 판매 이득을 공장 관리자들과 나누어 가졌다.

 

중앙부처의 권한 약화를 도모한 고르바초프의 정책은 농업, 주택, 소비재 생산 부문에서 지방정부의 권한 확대로 나타났다. 그리고 지역 당조직이 중앙당의 지시를 이행할 의무가 없다는 공식 발표가 1988년에 나왔다:

 

"기존에는 공장, 지구, 지역 단위의 당조직들이 중앙당의 최우선 정책들을 강제하는 핵심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들이 경제 영역에서 권한을 박탈당하자 개별 기업들은 이익 극대화를 추구할 자유를 얻었다. 예를 들어 이들은 생산량을 줄이고 가격을 올리는 수법을 동원했다. 새로 권한을 얻은 공화국 그리고 지방 자치단체들은 자신의 행정 이익을 옹호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외부' 구역에 완제품 배달을 줄이는 단순한 편법을 동원했다." --- <[소련경제체제의 붕괴], 엘먼과 콘트로포비치 공저>

 

개별 기업의 중앙 통제 해제와 동시에 진행된 외국무역 독점 완화는 즉시 국민총소득의 하락을 가져왔다. 소련 국가통계위원회의 1990년 제 4 분기 통계에 따르면 국민총소득은 1년 전에 비해 8.5% 하락했다. 1991년 제 1 분기에는 또 다시 10%가 하락했다([소련 경제 --- 위기에서 파국으로], 하닌 저, 앤더스 애쓸런드 편집자의 잡지 [소련 붕괴 이후의 경제]에서 재인용). 또한 이 때에 "민영화"가 처음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1988년에서 1992년까지 러시아는 두 경제체제의 중간단계에 있었다. 상업과 수출에 대한 국가 통제는 해제되고 있었으나 국내 상품가격은 대단히 낮은 수준으로 여전히 통제되고 있었다. 낮은 통제가격으로 석유, 다이어먼드, 금속 등을 루블화로 구입하고 이것들을 달러화로 외국에 판매할 수 있는 자들은 하룻밤 사이에 떼돈을 벌었다. 물론 허가증을 발급해주고 국경까지 안전한 수송 수단을 제공하는 국가 공무원들의 도움이 있어야 가능했다." --- <[러시아식 자본주의], 테인 구스타프슨 저>

 

외국은행 구좌로 자금이 대대적으로 유출되자 수출액이 급락하고 외채가 급증했다. 이 결과 소련의 금 및 외환 보유고가 급속히 줄어들었다. 이 급격한 출혈을 막기 위해 당국은 1990년에서 1991년 사이 수입 규모를 45%나 줄였다. 그러자 원자재와 필요 부품의 부족으로 생산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제 모든 것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중앙부처의 권한이 없어지자 중앙정부는 생산에 필요한 자원을 개별 기업에게 공급할 수가 없었다. 이제 물물교환을 통해 필요한 물품을 조달할 수밖에 없었다. 공장 관리자들은 완제품 소비자들로부터 차용증서를 받고 원자재 공급자들에게 이것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1988년 한해에 기업간 신용거래는 "156억 루블로 거의 4배가 증가했다"([이코노미스트], 19901020)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진 혼란스러운 민영화를 합법화하라는 압력이 증대했다. 그러자 옐친과 고르바초프는 시장경제로의 급격한 전환을 위한 "500" 프로그램을 공동으로 승인했다. 이 프로그램은 샤탈린이 작성했다. 당시 저명한 자본주의 복귀 "급진" 경제학자였던 예브게니 야신은 이렇게 회고하였다:

 

"19909월 이 프로그램은 소련과 러시아공화국연방 의회에서 심사되었다. 러시아 의회는 옐친의 압력으로 이 프로그램을 일주일 후에 승인했다. 소련 의회에서 이 프로그램은 당과 정부 기구 전체의 저항을 받고 계류되었다. 이들은 사태가 결정적인 국면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자신들이 살아남지 않으면 `500' 개혁 프로그램이 살아남아야 했다." ---<[소련경제체제의 붕괴], 엘먼과 콘토로비치 공저>

 

이 상황에서 스탈린주의 보수파에 의해 고르바초프는 후퇴를 강요받았다. 반면 옐친은 저돌적으로 이 계획을 밀어붙였다. 그는 소련에 보내는 예산 기부금을 3분의 2 삭감하고 대신 러시아의 지출을 배로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다른 공화국들도 즉시 옐친의 조치를 모방했다. 야신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500' 프로그램이 계류되면서 개혁가 고르바초프는 마지막 기회를 상실했다. 그는 자기를 묵사발 낸 공산당 중앙이나 옐친에서 경제적 권한을 넘겨야했다. 이 두 세력간의 권력투쟁이 1991년 사태의 핵심이었다." --- <앞의 책>

 

19918: 마지막 바리케이드

 

19918월 전의를 상실한 스탈린주의 "강경파"를 옐친이 제압한 사건은 자본주의 반혁명 승리의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1933년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계급적' 성격을 이유로 들면서 소련을 가망이 없다고 포기하는 모든 정치 경향들은 수동적으로 제국주의의 하수인이 될 위험이 있다. 최초의 노동자국가가 관료집단에 의해 약화되어 내외 적들의 공격에 쓰러질 비극적인 가능성을 물론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경우 이후 혁명투쟁의 과정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이 재앙에 책임이 있는 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혁명적 국제주의자들은 조금의 오점도 남겨서는 안된다. 최악의 상황에서 이들은 마지막 바리케이드에 남아있어야 한다." --- <소련의 계급적 성격>

 

19918월 쿠데타는 "마지막 바리케이드"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때 IBT는 트로츠키의 엄명에 따라 옐친 세력에 반대하여 전의를 상실한 스탈린주의 잔당들에게 군사적 지지를 표명했다. 당시 이 노선은 여타 모든 국제 "트로츠키주의" 조직들과 IBT를 뚜렷하게 구별시켰다. 제임스 라버츤의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이 결정적 대결 상황에서 중립 노선을 채택했다. 영국의 [노동자 권력], 만델의 [4 인터내셔널 통합서기국], 토니 클리프의 [국제사회주의자들]은 공개적으로 옐친의 반혁명 세력 편에 섰다. 이들이 스탈린주의자들보다 더 "민주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수십 년 동안 소련공산당의 온갖 좌충우돌 노선을 노예처럼 따랐던 각국 공산당들은 정말 필요한 때에 "사회주의 조국"을 방어하지 않았다. 1933년 독일의 나찌당이 권력을 장악할 때 싸움 한번 하지 않고 투항한 코민테른에 대해 트로츠키는 이렇게 예상한 바 있었다:

 

"히틀러에게 저항 한번 하지 못한 것과 똑같이 코민테른은 소련이 위기의 순간을 맞을 때 이 체제를 방어할 능력이 조금도 없을 것이다." --- <앞의 책>

 

반혁명 상황 한가운데에 선 혁명가들의 임무에 대해 트로츠키는 절대적으로 확고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공동의 적에 대항해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게 공동전선을 제안할 것이다. 우리 인터내셔널에게 상황을 좌우할 역량이 있을 경우 관료집단은 위험의 순간에 공동전선을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럴 경우 오랜 세월에 걸쳐 이들이 우리에게 퍼부었던 온갖 거짓말과 비방(예를 들어 제국주의 첩자니 반혁명 분자니 하는 말)은 하루아침에 그 정체를 드러낼 것이다." --- <앞의 책>

 

그러나 진정한 볼세비키주의 분자들에게는 "상황을 좌우할 역량"이 없었다. 따라서 옐친의 반혁명 세력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은 성립될 수 없었다. 이것은 비극이었다.

 

소련의 붕괴를 다룬 귀중한 저서의 저자들인 엘먼과 콘토로비치는 이렇게 주장했다:

 

"1980년대 말 선거, 대중매체, 거리에서 명백히 드러난 스탈린주의 체제에 대한 대중의 저항은 체제 붕괴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다. 따라서 붕괴의 원인은 대중의 불만이 아니라 반혁명 지도세력의 행동에서 찾아야 한다." --- <소련경제체제의 붕괴>

 

고르바초프가 정치적 억압을 완화하자 대중의 불만은 즉시 광범위하게 표출되었다. 이 결과 스탈린주의 체제는 더욱 약화되었다. 이 사실은 소련공산당 통치에 대한 저항이 페레스트로이카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말하고 있다. 더욱이 "반혁명 지도세력의 행동"은 생산 대중의 적극적 충성심을 끌어내지 못한 체제의 무능력에서 나왔다. 체제에 대한 생산 대중의 적극적 충성심만이 트로츠키가 소련의 붕괴 50년 전에 묘사한 "품질에 관심 없음이라는 잿빛 상표"를 극복할 수 있었다.

 

스탈린주의 독재자들의 거짓말과 정치 탄압이 수십 년을 지속하면서 러시아 노동계급의 자랑스러운 혁명전통은 거의 단절되었다. 당 간부급만이 사용하는 특별 상점과 특권적 삶의 양식으로 대표되는 관료집단의 명백한 부패상은 공식적으로 선전되었던 평등 사상을 쓰디쓴 농담으로 변질시켰다. 사회주의를 자신의 통치와 동일시하면서 냉소적인 소련공산당 관료들은 소련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무장 해제시켰다. 이들은 제국주의와 "평화공존"을 추구하면서 국제적으로 노동계급 혁명을 상황마다 배반하고 "일국 사회주의"라는 반동적 망상을 유포하였다. 이 결과 소련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었으며 자신의 기반을 잠식당했다. 소련 노동계급을 원자화시켜 정치적 몽매상태로 이끌고 해외의 혁명적 물결을 적극적으로 잠재운 스탈린주의자들은 이러한 행동을 통해 결국 자신의 통치기반을 파괴했다. 집단적 소유체제의 방어가 자신들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라는 노동 대중의 인식이야말로 노동자국가의 경제적 토대를 방어하는 강력한 힘이었기 때문이다.

 

19918월 사태에서 "강경파"가 보인 무능력, 자신의 해체를 묵묵히 받아들인 소련공산당의 수동성, 모든 연줄을 활용하여 "기업가"로 변신하려는 수많은 전직 관료들의 이전투구 등은 스탈린주의 지배층에 널리 퍼진 냉소주의 그리고 어떤 형태이든 "사회주의"에 대한 이들의 무관심을 잘 드러내 주었다. 재창당된 러시아연방공산당이 공공연한 파시스트 세력과 악명 높은 "적색-갈색" 연합을 체결한 신속성은 이 진실을 확인시켜주었다.

 

 

'공유지의 강탈'

 

1990년대에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자본주의의 "장밋빛 여명기"에 일어났던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 아주 비슷했다:

 

"교회 재산의 약탈, 국유지의 사기적 전용, 공유지의 강탈, 봉건적 씨족적 재산의 몰수, 무자비한 테러 속에서 진행된 봉건적 소유의 근대적 소유로의 변모 등 이 모든 것들이 본원적 축적의 목가적 방식들의 다양한 모습들이었다." --- <자본론 제 1, 맑스>

 

집단적 소유의 자산들을 개별 자본가의 소유 즉 자본으로 변모시켜야 자본주의로의 전환이 일어날 수 있었다. 1988년부터 1995년까지 러시아에는 연줄이 있는 자들이 수 천억 달러 어치의 국가소유 재산을 가로챌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 이 결과 러시아 경제는 경영학 전문대학원 교과서가 "정상적"이라고 인정하는 부르주아 체제로 급격히 변화해갔다. 피라미드의 정점에는 극소수의 엄청난 부자들이 있었다. 이 밑에는 인구의 절대 다수를 구성하는 극도로 가난한 반실업 노동자들이 존재했다.

 

구 소련에서보다 "공유지의 강탈"이 더 공개적이고 거대한 규모로 급격히 진행된 경우는 역사상에 없었다. 똑똑하고 검약하며 근면한 소수의 사람들이 궁핍한 사람들에게 일자리와 지도력을 제공하기 위해 근면과 긴 안목을 바탕으로 사회의 지도자가 된다는 자본주의 신화가 있다. 그러나 이 신화는 지금 러시아 인민들에게 곱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외국무역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풀리면서 본원적 축적의 제 1 단계가 시작되었다. 2 단계는 1990년경에 시작된 대대적인 금융투기였다. 중앙 기획당국의 권한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1987년 고르바초프는 소련 중앙은행의 독점을 해제했다. 이 조치가 내려진 직후 금융투기의 거대한 물결이 일었다. 1991년까지 약 16백 개의 개인 은행들이 설립되었다. 돈을 싸게 빌려 재빨리 부동산을 구입할 수 있는 자들은 단순간에 벼락부자가 될 수 있었다:

 

"과거에는 기업의 제품이 공장 문을 나서자마자 자동적으로 대금이 결제되었다. 구매자 계정에서 생산자 계정으로 대금이 간단히 이체되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1990년과 1991년에 걸쳐 붕괴되었다. 이제 기업들은 유동성 유지를 위해 대금 결제의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신설된 개인은행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주요한 방법이 하나 있었다. 현금 부족에 허덕이는 기업에게 국가의 신용 대출을 이용할 수 있게 알선하는 것이었다. 또한 개인은행 창업자들은 아직도 유효한 구 체제의 규제 조항들을 우회하여 단기 자본을 마련하였다. 이를 통해 주로 외국 무역 분야에서 새로운 이윤 획득에 나섰다. 은행들은 상품 거래나 수출입 거래에 돈을 대주거나 직접 거래 당사자가 되었다. 또한 고객들이 국가 소유의 자산을 현금으로 전환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불법적인 외환거래에도 개입하여 이윤을 해외로 빼돌렸다...." --- <구스타프슨, 위의 책에서>

 

개인은행들은 국영기업과 지방자치단체가 자신들에게 맡긴 저리의 루블화를 현금 등 경화로 바꾸어 수출입 거래의 단기 금융자금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은행들은 거래의 양쪽에서 모두 이익을 보았다. 또한 달러화를 대출하여 높은 이자를 물리고 달러화가 평가 절하된 루블화로 전환되어 저축자의 계정으로 돌아오게 만들면서 이 두 과정에서 이윤을 챙겼다. 1992년 가격 통제가 해제되자 연간 인플레는 2500%로 치솟았다. 이제 며칠 만 금융거래를 지연시키면 막대한 불로소득이 생겼다. 애초에 은행가들에게 저리의 루블화를 대출해 준 관료들도 물론 이익의 일부를 챙겼다.

 

1992년 옐친은 국영기업의 대대적인 민영화를 통해 본원적 자본축적의 제 3 단계를 개시했다. 상품 거래와 은행 영업에서 나온 막대한 이익금으로 신흥 "족벌"들은 민영화된 자산의 대부분을 구입했다.

 

민영화는 처음부터 대단히 부패한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유감스러운 현상이지만 계획경제를 해체하는 데 발생하는 불가피한 경상비용이라고 자유시장주의자들은 생각했다. 결국 자본가 없이 자본주의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옐친의 민영화 책임자는 에고르 가이다르였다. 그는 고르바초프 집권 당시 소련공산당의 주요한 이념잡지인 [공산주의자]의 경제 편집자였다. 그는 자신의 직책을 이용하여 시장경제로의 대대적인 전환을 주장했다. 크리스티아 프릴랜드에 의하면 가이다르의 중앙위원회 경제 책임자 임명은 다음을 의미했다:

 

"무신론을 전파하는 자에게 바티칸 시국을 위한 교리문답을 작성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았다. 소련의 관료집단은 자기 입으로 한 말도 믿지 않는 냉소주의자들이다. 가이다르의 경제 책임자 임명도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또 다른 증거였다."--- <세기의 바겐세일>

 

관료집단의 보수파는 가이다르의 임명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가 고르바초프의 보호를 받아서가 아니라 그의 가문의 명성 때문이었다. 프릴랜드에 의하면 그의 조부는 적군 장교였으며 나중에 인기 있는 동화작가가 되었다. 말하자면 그는 "애국자와 인기 있는 동화 작가"의 짬뽕이었다. 가이다르의 부친은 1960년대 초 쿠바에 파견된 기자였다. 이 때 어린 에고르는 자주 집을 방문한 체 게바라를 보았다.

 

가이다르 경제 팀은 대대적인 민영화와 가격 통제의 즉각 해제를 내용으로 하는 충격요법을 실시했다. 이 결과 천문학적 인플레가 발생하여 소액 저축자들의 돈은 휴지조각이 되었고 연금 수령자 등 고정된 수입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은 거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처참한 결과는 자본주의 신봉자들에게는 전혀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실업은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구조조정의 환영할만한 징조였다. 기업의 파산과 대대적으로 축소된 사회보장 서비스도 문제가 아니었다. 국제통화기금에서 이윤 창출을 위해 숫자를 가지고 노는 냉혈한들조차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민의 고통을 미래의 번영을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라고 강변하는 젊은 개혁가들의 능력에는 혀가 내둘러질 지경이다.'" --- <앞의 책>

 

반혁명의 정치와 경제

 

유엔개발프로그램의 1999년 보고서는 "개혁"에 대해 이렇게 요약했다:

 

"소련이 붕괴할 당시 가장 널리 주창된 개혁 전략은 `충격요법' 또는 `빅뱅'으로 알려졌다.... 약간의 `고통'은 어쩔 수 없다고 모두 인정하였다. 그러나 고통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며 이후의 성과가 상당할 것이라고 믿었다....빅뱅 전략은 크게 3개의 구성부분으로 나뉘어졌다. 첫째, 국영기업은 민영화되고 이 결과 자본주의의 선행 조건인 본원적 축적 없이 자본가 계급이 형성되어야 한다. 둘째, 모든 가격은 완전히 자유화되어야 한다... 이 결과 가격 원리가 자원을 배분하고 경제 효율을 증대시켜야 한다. 셋째, 하락하는 총생산과 총수입이 가져온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 외국자본을 도입해야 한다." --- <중동부 유럽과 독립국가연합의 인적자원 개발 보고서, 강조는 인용자>

 

시장 경제로의 이행은 될 수 있으면 급속히 진행되어야 한다고 "자유 시장"의 선전가들이 주장했다. 그리고 세계시장의 경쟁에 러시아 경제를 개방할 경우 특히 제조업 분야에서 초래될 대대적 구조조정에 대해 이들은 거창한 말을 늘어놓았다. 아담 스미쓰의 "보이지 않는 손" 때문에 러시아 기업가들은 "비교 경쟁력"이 있는 부문들에 투자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경제의 등장은 집단주의의 억압에서 드디어 해방된 인구의 창조적 에너지를 자유롭게 발산시킬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이론에 불과했으며 실제로 상황은 상당히 다르게 전개되었다.

 

옐친과 그를 지원하는 제국주의자들은 중앙집중 경제체제의 파괴와 국가소유의 급격한 감축을 "빅뱅" 전략의 필수 목표로 간주했다. 중앙 계획 경제의 복귀를 어렵게 하고 자본주의 반혁명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소유자 계층이 형성되어야 했다. 따라서 위와 같은 조치들은 필요했다:

 

"1992년 개혁가들의 제 1차 목표는 중앙정부에서 정치인들과 관료들의 지배력을 와해시키는 것이었다. 이들은 경험을 통해 최대의 적은 중앙부처라는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이것을 도려낼 결심을 굳혔다. 이와 대조적으로 공장 관리자들과 지역 정치인들은 지난 10년간 커다란 영향력을 획득했다....1991년과 1992년 개혁가들은 일을 성사시킬 기간은 아주 짧을 것이며 이 기간에 사적 소유를 합법적이며 역전시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 <구스타프슨, 앞의 책>

 

"빅뱅" 전략은 생산의 급격한 붕괴 그리고 광범위한 빈곤과 사회의 혼란상을 가져왔다. 그러나 신흥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과 이들을 지지하는 제국주의자들은 이것을 조건적인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계획은 민영화 대상 기업의 종업원들에게 기업 주식의 40%를 배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직 외국인들과 지하경제 기업가들만이 이것들을 구입할 돈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개혁가들은 너무 명백하게 인식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이 상황은 수용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산은 극도로 저평가 되어 적은 돈으로 구입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대부분의 기업들은 헐값에 노동자와 관리자들에게 주어졌다. 국영기업 자산의 약 20%는 증서의 형태로 모든 러시아 시민들에게 공짜로 배포되었다." --- <앞의 책>

 

증서 제도는 모든 러시아 노동자를 "주주"로 변화시킬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연줄이 있는 내부 인사들과 구 시대 공장 관리인들을 부자로 만드는 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증서는 특별 경매를 통해서만 주식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그러나 특별 경매는 의도적으로 일반 시민의 참여를 거의 불가능하게 조직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증서를 헐값으로 중간 상인에게 팔아야 했다. 경매를 조작한 "적색 관리자들"은 자기 회사의 자산 가치를 낮게 매기고 종업원들의 주식을 강제로 빼앗았다. 중대형 기업의 약 3분의 2는 이런 방식으로 이들의 소유가 되었다.

 

민영화는 새로운 세대의 역동적 기업가들을 탄생시킬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들은 외국 투자자들과 약삭빠르게 전략적 제휴관계를 맺을 것이었다. 그리고 러시아 산업의 국제 경쟁력 강화에 필요한 투자와 기술이전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계획경제의 무질서한 약탈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공장 가동의 방식을 바꾸는 일은 등골이 휠 정도로 힘이 들었으며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따라서 재산을 불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러시아의 광대한 광물자원을 일부나마 가로채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족벌들을 비롯한 러시아 기업가들은 곧 깨달았다...." --- <프릴랜드, 앞의 책>

 

민영화 도박판에서 가장 크게 승리한 자들은 구 소련의 석유와 가스산업 경영자들이었다. 일반적으로 공장 관리인들은 제품의 생산, 판매, 수송, 원자재 수급 등에 골치를 썩여야 했다. 그러나 석유 및 가스산업의 큰 부분을 가로챈 구 관료들에게는 시장과 수송망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은 러시아의 연료 공급체계를 장악하고 수출시장에서 이윤을 챙겼다. 이 결과 이들은 국내 정치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족벌"들은 러시아 산업의 운명에 별 관심이 없다:

 

"새로 정치적 영향력을 장악한 국가와 지역 차원의 `족벌'들은 `민영화' 과정에서 대규모의 자산을 가로챘다. 이들 대부분은 경영에 관심이나 적성이 없었으며 투자와 구조조정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대신 소유 기업의 현금을 해외로 빼돌렸다. 해외로 도피된 자본은 800억 달러에서 3,000억 달러의 범위로 추산되고 있다." --- <동서양 연구소, 1998112>

 

족벌들은 석유화학, 광물 등 원자재를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에 제공하는 나라로 러시아가 탈바꿈하기를 원한다. 반면 구 소련의 공장 관리인 출신이었던 "적색 기업가들"은 녹슬고 낙후한 공장을 업그레이드할 자본의 축적을 위해 좀더 "애국적인" 보호무역 정책을 주창한다.

 

 

`세기의 바겐세일'

 

민영화의 제 1 단계는 세계 최대의 니켈 생산회사인 노일스크 니켈 등 가장 값비싼 전략 기업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기업들은 1995"주식 대출"로 알려진 방식으로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

 

"조작된 경매를 통해 정부는 거대 국영기업들을 단골 개인은행 그룹들에게 배분했다. 주식 대금은 은행이 정부에 제공한 `대출'의 보증금으로 분류되어 은행이 갚을 필요가 없었다." --- <[이코노미스트], 1997710>

 

10억 달러의 "대출"을 은행들로부터 제공받은 옐친은 이보다 가치가 몇 배인 국영기업 자산을 주식의 형태로 은행에 제공했다. 족벌들은 "서로 짜고 정부에 로비공작을 펼치고 심지어는 포고령에 서명까지 했다"([외무], 200011-12월호). 이 군침 넘어가는 사업에 외국기업은 참여가 금지되었다. 이 거저 퍼주기는 199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선심공세로 이루어졌다. 이때 옐친은 반유태인주의를 표방하며 구 소련 붕괴 이후 가장 대규모 정치 세력인 러시아공산당의 당수 게나디 주가노프에게 패배할 것처럼 보였다:

 

"주식 대출 정책을 통해 옐친은 다가올 대통령 선거에서 미래의 족벌이 될 기업가들로부터 정치적, 금융적, 전략적 지지를 얻어냈다. 이것은 러시아의 보물들을 헐값에 팔아 넘기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집권을 막기 위한 대가였기 때문에 젊은 개혁가들은 기꺼이 팔아 넘겼다. 가이다르는 이로부터 3년 후 비오는 어느 날 오후 그의 사무실에서 이렇게 나에게 말했다: `나는 당시 주식 대출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것은 정치적 협약을 창출했다. 이것으로 주가노프의 크렘린궁 입성은 확실히 저지되었다. 이것은 필요한 협약이었다.'" --- <프릴랜드, 앞의 책>

 

러시아에서 "자유시장"은 민주주의, 투명성, 경쟁이라는 거창한 말이 반복되는 이면에 처음부터 조작극으로 일관했다. 물론 최상부에서 치열한 경쟁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금융 "족벌들""주식 대출" 조작극으로 알짜 기업들을 대부분 차지했다. 그러나 매장량이 풍부한 루코일과 수르구트네프테가츠 석유기업들의 경우에는 "적색 기업가들"이 승리했다:

 

"이들은 지역의 모든 영향력을 동원하여 승리를 확보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수르구트네프테가츠 기업의 경매가 있던 날 가장 가까운 공항은 이유 없이 폐쇄되었고 시베리아의 외딴 도시인 수르구트로 가는 주요 도로의 검문소에는 무장 경비들이 배치되었다. 경매에 참여하는 일반인들은 경매가 열리는 이 도시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 <앞의 책>

 

1990년대 말까지 러시아의 급조된 부르주아 계급은 열 개 정도의 씨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의 대표는 외국의 "개발" 차관 등 국가의 자원과 기구를 장악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족벌들이었다. 영국 금융자본의 주요 기관지인 [이코노미스트]지는 최근 음흉하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소련과 러시아에 빌려준 차관은 다 어디로 갔는가? 액수는 전부 합쳐서 15백억 달러가 넘는다. 이론적으로 이 돈은 식량 수입, 산업 현대화, 공공금융 부문 지원에 쓰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엄청난 액수의 돈에 비해 이렇다하게 드러난 것이 없다. 경험이 풍부한 모스크바의 어느 투자은행가는 이 돈이 도난 당했다고 말한다." --- <[이코노미스트], 2001111>

 

1998년까지 서방 금융가들이 제공한 "차관"은 러시아 외채를 국내총생산의 30%로 끌어 올렸다. 최상부의 열댓 명에 불과한 연줄 좋은 기생충들이 이 돈을 전부 가로챈 것이었다. 이 차관은 러시아의 처참한 빈곤 근로계층인 수천만 명이 이자를 붙여 갚아야 할 돈으로 장부에 남아 있다.

 

 

대용(代用) 부르주아 국가

 

구 소련에서 이월된 인자들로 구성된 부르주아 국가 기구는 국영기업들을 민영화시킬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정상적인 부르주아 국가의 많은 기능들을 수행하기에는 능력과 권위가 부족했다. 족벌들 각자는 깡패를 동원하여 계약의 이행을 강제하고 빌려준 돈을 받았다. 또한 이들로 둘러싸여 신변을 보호받아야했다. 이 결과 러시아에 마피아가 등장하여 유약한 자본주의 체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94130일자 [뉴욕타임즈]지 기사에 의하면 기업 특히 대기업 가운데 세금을 내는 곳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전체 기업의 70%에서 80%는 조직 폭력배에게 돈을 주어 경호를 맡겼다:

 

"조직 폭력배는 누구를 협박하여 어떤 액수의 돈을 요구할 지를 알고 있다. 경찰관, 은행 임원, 비밀요원들이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검문소에서 차량을 검사하다가 트렁크에 귀중품이 발견되면 교통경찰은 전방 도로에 있는 폭력배에게 무전기로 연락한다. 그러면 기다리고 있던 폭력배가 차를 멈춘 후 트렁크의 귀중품을 강탈한다....공갈과 협박을 대항하기는 힘들다. 거의 모두가 숨겨야 할 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무서 직원에게 수입을 노출시킬까 두려워 조직 폭력배의 공갈과 협박을 신고하지 않는다.... 강도 건수의 80% 그리고 사기 건수의 90% 정도는 신고되지 않는다고 어느 러시아 소식통이 추산하고 있다." --- <구스타프슨, 앞의 책>

 

그러나 구스타프슨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업가들은 복잡하며 서로 모순되는 규제 법규와 인허가 절차 등이 상업활동의 주요한 장애물이라고 간주한다: "범죄는 자신들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다고 이들은 말한다." 옐친 집권기에 대부분의 대기업들은 인허가 절차 과정에서 돈을 쓰는 것보다 공무원들에게 뇌물과 떡값을 흥정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알았다. 많은 기업들이 세금 납부를 거부한 반면 일부 기업들은 팔리지 않은 물건과 차용 증서로 세금을 "납부했다":

 

"국세청에 따르면 등록된 사업체의 16%만이 세금을 제때에 완납했으며 50%는 가끔 내고 34%는 세금 공무원들을 아예 무시한다." --- <앞의 책>

 

수만 개에 달하는 기업들은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관청에 아예 등록도 하지 않았다. 일부 "기업가들"은 자신들에게 해당되는 기록문서를 파괴하기 위해 세무서에 불을 질렀다. 또는 청부살해업자를 고용하여 특히 골치 아픈 세무서 직원들을 살해했다.

 

 

고위 관료에서 부르주아 계급으로

 

급조된 부르주아 계급 가운데 상당수는 구 소련의 고위 관료 출신들이다. 반면 폴란드나 다른 동유럽 국가들의 경우 이들은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극소수에 불과하다. 구스타프슨은 모스크바의 사회학자 올가 크리쉬타노프스카야의 연구를 인용하고 있다. 이 연구에 의하면 러시아의 자본가 엘리트 가운데 3분의 2 정도가 소련의 고위 관료 출신이다:

 

"이들 중 가장 부유하고 성공적인 부류들은 처음부터 국가기구 내부 세력의 도움을 받았다. 1990년대 최대 상업은행들의 창업자들은 국가기구 내부 세력의 인가된 대표들'에 지나지 않았다....간단히 말해서 이들은 진정한 자본가 계급이 아니었다. 국가와 개인의 이해를 결합시킨 새로운 금융-정치 족벌들이 내세운 앞잡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몇몇 석유 및 가스 족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족벌들은 소련공산당 서열에 따라 지위를 획득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구체제에서 블라디미르 구신스키는 극장 감독이었고 보리스 베레조프스키는 수학자였으며 알파 그룹의 미하일 프리드만은 물리학자였다. 스탈린주의 지배집단 내부의 연줄은 각본에 없는 무질서한 민영화 진흙탕에서 성공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브레즈네프 집권기에 소련공산당의 청년그룹인 콤소몰은 체제에 환멸을 느낀 자들의 피난처였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의 시작과 함께 콤소몰은 새끼 기업가들의 훈련장이 되었다. 콤소몰은 여행사, 건축회사, 경기장, 스포츠클럽, 신문사, 소프트웨어 회사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조직의 간부들은 19918월의 결전에서 절대적으로 옐친의 편을 들었다. 이 결과 공산당이 불법화되었을 때도 콤소몰은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현재 콤소몰 동창들은 러시아 사업가 집단 내에서 영향력이 가장 막강하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의 사업가들이 구체제 고위관료 출신들이며 콤소몰 연줄의 혜택을 입고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있다. 그러나 콤소몰 연줄은 주로 사업을 시작하는 수단을 제공했을 뿐이었다. 성공의 나머지 부분은 개개인의 재능과 활력에 달려 있었다." --- <앞의 책>

 

일부 좌익은 구 고위관료집단과 신흥 부르주아 계급 사이의 계속성을 지나치게 과장한다. 예를 들어 지금은 고인이 된 토니 클리프의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소련이 이미 1928년부터 "국가자본주의 체제"였다고 오랫동안 주장해왔다. 이들은 옐친의 승리를 "한 형태의 자본주의에서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로의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규정하였다. 자신이 쓴 마지막 책 가운데에서 클리프는 이렇게 주장했다:

 

"반혁명으로 소련이 자본주의로 복귀했다면 구 지배계급이 신 지배계급으로 완전한 교체가 되었어야했다. 그러나 사회 정점의 지배집단은 그대로 존속되었다. `사회주의'체제에서 경제, 사회, 국가를 운영했던 고위 관료집단은 지금 `시장'체제에서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 <트로츠키 사후의 트로츠키주의>

 

그의 주장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다만 일말의 진실에 불과할 뿐이다. 예를 들어 옐친은 자본주의 반혁명의 역사적인 지도자이며 소련공산당 관료였다. 그러나 구 소련의 관리인, 경제전문가, 엔지니어 등이 자본주의 복귀 체제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현상은 짜르 치하의 관료, 행정가, 기술자, 군대의 장교 등 수천 명이 볼세비키 정권 초기에 고용된 현상과 별 차이가 없다.

 

한편 고위관료층의 최상부 인자 특히 중앙경제부처 책임자, 이론-선전가, 공산당 조직의 최고위 관료 대부분은 직책이 없어지면서 실업자가 되었다. 옐친의 집권과 함께 구체제의 "경제, 사회, 국가" 운영자들이 계속 권력을 유지했다는 주장을 엘먼과 콘토로비치는 일언지하에 거부한다:

 

"당과 국가기구 관료들이 국가소유를 자신의 개인 소유로 바꾸기 위하여 구체제를 타도했다는 이론이 요즘 유행한다. 그러나 이 주장을 지지할 증거는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관료들은 고르바초프를 혐오했지만 체제 방어를 위한 집단행동을 주도할 능력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는 체제 붕괴를 재촉할 능력도 없었다. 이들이 체제 붕괴 후 자기 자리를 찾았다면 이것은 거대한 음모의 결과가 아니라 개개인의 생존기술 덕분이었다."

 

반혁명의 화려한 독버섯

 

1991년 이후 러시아 사회가 "게걸음처럼 한 형태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또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 체제로 옆 걸음을 쳤다"는 그럴듯한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근로인민이 자본주의 복귀로 인해 처참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점을 무시하고 있다. [유엔개발프로그램]1999년 연구보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1990년대 이전에 중동부 유럽 그리고 구 소련(지금의 독립국가연합) 국가들은 높은 수준의 기본적 사회보장을 인민에게 제공하여 주목을 받았다.... 완전 평생 고용이 보장되었다. 현금 수입은 적었지만 안정적이고 변동이 없었다. 수많은 기본 소비재와 서비스는 국가 보조금을 받아 공급이 규칙적으로 유지되었다. 의식주 문제는 안정적으로 해결되었다. 교육과 의료는 무상으로 보장되었다. 퇴직자들에게 연금이 보장되었고 많은 종류의 사회보장 프로그램으로 이들은 정기적인 혜택을 누렸다."

 

프릴랜드에 의해 "카지노 자본주의의 최대 승리자"로 묘사된 "족벌" 미하일 프리드먼은 1991년 이후 인민의 삶이 질적인 변화를 겪었음을 확실히 인정했다. 심지어 그는 구 소련 시절에 대한 향수를 토로했다:

 

"예전에 나의 생활은 소련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자유분방했다.... 물론 물질적으로 보면 사람들은 그리 잘 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걱정거리가 없었다. 진짜 치열한 관심거리는 친구, 정신적 관심사, 책 등이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지금보다 훨씬 더 열려있었다. 우리는 경쟁에 시달리지 않았다. 지금 존재하는 불평등과 시기심은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 요즘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 <프릴랜드, 앞의 책>

 

자본주의하에서 인민은 생활하기가 더 힘들며 수명도 더 짧아진다. 1991년과 1995년 사이에 러시아 남성의 평균수명은 63세에서 58세로 급격히 떨어졌다. 인구증가율은 1990년의 2.4%에서 1996년의 마이너스 5.4%로 떨어졌다. (이 수치는 다른 나라로 이주한 수백만 명의 숙련 청년노동자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공공의료 체제는 거의 붕괴하였다. 현재 국내총생산의 1%가 공공의료 예산으로 책정되어 있는데 이 수치는 가장 가난한 신식민지 국가들에서나 볼 수 있다. 이 결과 결핵을 비롯해 과거에 근절되었던 전염병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지금 다시 나타나는 질병들은 표준 예방주사로 통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아마비는 현재 서방 선진국에서는 거의 드문 병이 되었는데 다시 나타나고 있다...." --- <[유엔개발프로그램]>

 

1989년과 1995년 사이에 에이즈 발생 건수는 급증했으며 매독 발생률은 40배나 증가했다:

 

"이런 문제들은 표준 예방주사나 성생활 보건프로그램 등 정상적인 공공의료 체제에 의해 해결되거나 최소한 통제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들의 심각성은 자본주의 복귀로 국가의 주요 보건활동이 상당히 약화되었음을 나타낸다." --- <앞의 글>

 

계획경제의 파괴로 수백만 근로인민은 자신과 가족을 먹여 살릴 능력을 박탈당했다. 이 결과 마약 남용에서 배우자 폭행에 이르는 모든 종류의 사회 병리현상이 증가했다. 1991년에서 1995년까지 자살 건수는 거의 두 배로 늘었으며 타살의 비율도 급등했다:

 

"반실업 상태의 청년들은 생활 광고 난에 `높은 보수만 주면 어떤 위험도 감수한다'는 암호 표현을 사용하여 살인청부 광고를 냈다. 피라미 범죄자들은 사소한 이익을 위해 살해를 자행했다: 부동산 사기꾼들은 아파트를 상속받기 위해 잘 속아넘어가는 연금생활자들을 살해했다; 어느 범죄 조직은 자동차 보수공장을 위장하여 자동차 주인들을 죽이고 시체를 토막내었다." --- <프릴랜드, 앞의 책>

 

러시아의 사회 반혁명은 장애인, 연금생활자, 아동, 여성 등 사회의 약자들에게 특히 가혹했다. 유엔개발프로그램의 보고서 작성자들은 이념적 편향을 드러낸 채 놀라움을 표명했다:

 

"좀더 민주적인 자본주의 복귀는 역설적이게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여성들은 과거에 비해 공직에서 더 밀려나고 있다. 동시에 이들의 임금고용 기회가 줄어들었으며 가정과 직장 내에서 이들이 처리할 일의 비중은 전체적으로 늘어났다....여성 폭력은 배우자의 폭행과 함께 증가했으며 ... 범죄에 희생되는 여성의 숫자도 증가했다. 직장과 더 좋은 생활을 필사적으로 원하는 여성들은 폭력배 조직에 의해 매춘을 강요당했다."

 

프릴런드는 여기서 수치스러운 조사 결과를 인용하고 있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나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교에 해당되는 러시아의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여학생들에게 최고로 선택되는 직업은 "달러 매춘"이었다.

 

자본주의 복귀는 제 2차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고아를 발생시켰다. 200161일자 [비비씨(BBC) 뉴스]는 이렇게 보도했다:

 

"25십만 이상의 아동이 거리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양육할 능력이 없는 부모에 의해 버려졌다. 러시아 보건부의 보고서에 의하면 러시아 아동의 거의 전부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시기에 한 두 가지의 고질병을 앓고 있으며 다수는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 17세의 나이가 되면 10명 가운데 1명만이 건강한 것으로 평가된다."

 

[유엔개발프로그램] 보고서는 자본주의 복귀의 결과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러시아 인민은 꽤 좋은 교육, 건강한 생활, 적절한 영양 등을 더 이상 안정적으로 누릴 수 없다. 증가하는 사망률, 곧 닥칠 새롭고 파괴적인 유행병 등으로 생존 자체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구 소련과 동구 국가들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실제로는 대공황의 완곡한 표현일 뿐이다. 생산의 붕괴와 치솟는 인플레는 사상 유례가 없다. 인간의 안정적 삶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보수적인 수치에 의하면 1억이 넘는 인민이 빈곤으로 추락했으며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인민은 불안하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와 반혁명

 

에르네스트 만델의 [4 인터내셔널 통합서기국]과 영국의 [노동자 권력] 등의 조직들은 소련 방어노선을 견지하는 "트로츠키주의" 조직을 자임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19918월에 옐친을 지지했다. 자본주의 복귀세력의 "민주주의"가 집단적 소유체제의 보존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이 이들의 변명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은 레닌과 트로츠키의 볼세비키 정권에 반대한 카우츠키의 논리와 유사하다. 그의 주장을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반공주의자들은 계속 되풀이하고 있다.

 

반혁명의 "민주적 권리"는 빈곤, 노숙, 기아와 질병 등에 시달리는 수천만 러시아 인민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러시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서로 다투고 있는 부르주아 씨족들의 경상비용 절감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어느 순간에도 철회될 수 있는 종이 권리에 불과하다. 옐친은 자신의 회고록 제 3권에서 이 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책에는 주가노프의 집권 가능성에 직면하여 1996년 대통령 선거를 취소하고 러시아공산당을 불법화시킬 조치를 거의 취할 뻔했던 자신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숨길 이유가 없다: 나는 언제나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결정들을 선호해왔다. 알렉산더 대왕이 했던 것처럼 고르디우스 왕의 매듭을 칼로 끊어버리는 것은 이것을 풀기 위해 수년을 고생하는 것보다 쉬운 일로 나에게는 보였다....안보책임자 코르자코프 역시 승리할 선거전략을 찾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지율이 3% 밖에 안될 때 애를 써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선거 게임에 몰두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면 어떤 좋은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비상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자 나는 참모진에게 문서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공산당 불법화, 의회 해산, 대통령 선거 연기 등을 내용으로 한 포고령이 작성되었다. 이 문서들은 헌법이 허용하는 조치로는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나의 판단을 명백히 했다. 공산당 불법화 등 초헌법적 조치는 나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크게 떨어뜨릴 것이라고 나는 예상했다. 맞다. 이것은 커다란 도박이다. 그러나 이 조치는 대통령 임기 초부터 존재했던 주요한 문제 하나를 해결할 수 있었다. 불법화되면 공산당은 러시아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었다." --- <12시에 쓴 일기>

 

결국 옐친의 딸과 그의 핵심 친위 그룹의 여러 명이 그를 설득시켰다.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경우"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이들은 주장했다. 그러나 옐친은 거의 비상 조치를 취할 뻔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당시 러시아 의회선거 결선투표를 "지저분한 광경"이라고 적절하게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옐친과 그의 친구들은 국영 텔레비전방송의 도움을 받고 있다. 크렘린궁은 아양떠는 방송으로 지지자들을 모으고 비방 방송으로 반대세력을 제거할 수 있다." -- <[이코노미스트], 19991216>

 

지배 파벌에게 감히 덤비는 자들은 인생이 괴롭다:

 

"반정부 후보를 지원하는 주지사들은 낭패를 당할 수 있다. 자기 주 석유회사가 국가 의 파이프라인 시설을 이용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이들이 정부를 지지하면 골치 아픈 반대 세력이 감옥에 갇히거나 직위에서 쫓겨날 수 있다. 또한 자기 주 소재 기업들이 짭짤한 세금 감면 혜택을 누릴 수도 있다." --- <앞의 잡지>

 

새로운 지배 집단은 인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정권의 불안정을 노출시킬 수 있다. 이것은 상당한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크게 성공해서 족벌이 된 몇몇 행운의 사나이들도 언제나 불안감을 안고 있었다: 어쩌면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정권을 탈취할 수 있다.... 어쩌면 정적들이 정권을 장악한 후 나를 감옥에 가둘 수 있다. 어쩌면 감옥에서 심장마비가 일어날 수도 있다. 아니면 사업의 호적수가 자동차 폭탄 테러로 내가 죽으면 행운을 잡을 수 있다.... 돈과 보디가드가 아무리 많아도 안전하다고 느껴지지가 않는다." --- <프릴런드, 앞의 책>

 

제국주의 "민주주의 체제"는 권력을 조종하고 매수하는 세련된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의 안정감과 정치과정의 상대적 자율성이 국가기구에 신뢰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모든 부가 정치적 연줄을 통해 공공소유에서 족벌들에게 넘어왔다. 소위 민주주의 체제의 실체가 좀더 투명하게 드러난다:

 

"족벌 기업들의 세금으로 정부는 겨우 버티고 있다. 이들이 바치는 뇌물로 권력자들은 안락한 생활과 안정된 노후를 누린다. 이에 대한 대가로 족벌 기업들은 국가와 그 하수인들이 자기 이권을 보호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예를 들어 국가는 외국기업을 몰아내고 허술한 법을 고치지 말고 경쟁을 배제시켜야 한다." ---<[이코노미스트], 2000330일자>

 

자유시장 몽상가들의 장밋빛 전망과는 정반대로 러시아의 급조된 부르주아 계급은 시설 개선, 효율적 생산 방식의 도입, 생산 확대 등에 대해 놀랄 정도로 무관심하다:

 

"새 러시아에서 번영하는 자들은 초대형 부자들뿐이다.... 이들의 막대한 부는 새로운 기술, 좀더 효율적인 서비스, 좀더 생산성 있는 공장에서 나오지 않았다. 붕괴한 국가소유 즉 유전, 니켈 광산, 텔레비전 방송 채널, 수출 면허장, 심지어는 국가의 은행 계좌 등에서 나왔다. 그리고 일단 러시아의 매판자본가들이 전리품을 확보하자 이들은 이것을 가능한 빨리 더 안전한 해외로 도피시켰다. 1991년과 1999년 사이에 1천억 달러에서 15백억 달러의 자본이 러시아를 빠져나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산했다. 러시아는 왜곡된 시장경제를 탄생시켰다. 10년간 지속된 경제불황, 죽어가면서 더욱 빈곤에 허덕이는 하층 계급, 호화로운 생활에 찌들어 있는 극소수 기생 계층 등으로 러시아는 일종의 자본주의 생지옥이 되었다. 구 소련의 선전가들이 `썩어 들어가는 서구 부르주아 사회'라고 불렀던 끔찍한 삶의 이미지가 러시아에서 현실로 등장했다. -- <프릴런드, 앞의 책>

 

상당한 흑자, 브랜드 명성, 점점 커지는 시장점유율 등이 자본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제공한다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사업의 규모와 성공은 특히 지역 차원에서 조직 폭력배들과 부패한 관료들의 관심을 끈다. 경쟁사를 도태시키면 자기 기업의 시장점유율이 점점 증가하는 즐거움을 목격해야한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경쟁사와 관련된 정치꾼이나 조직 폭력배가 회사를 방문할 위험성이 있다. 상황이 좋으면 자의적이고 약탈적인 세무 경찰이 들이닥치고 상황이 좋지 않으면 자동차 폭탄 테러나 총탄 세례를 받는다. 이 때문에 아무리 능력 있는 경영자도 비용과 타협을 대가로 정치인의 보호를 거의 불가피하게 요청한다." --- <[이코노미스트], 2000330>

 

푸틴의 프로젝트

 

반혁명의 역사적 지도자 옐친도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정권을 넘기기 전에 자신과 가족의 정치적 보호를 보장받아야 했다. 소련 비밀경찰(KGB)에서 잔뼈가 굵은 푸틴은 러시아 자본주의를 "정상화"시키고 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회복할 인물로 기업 경영주, 국가기구, "애국적" 부르주아 계급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권위를 다시 회복하고 세금 납부를 더욱 강제하고 족벌들의 전횡을 억제하는 일에 착수했다. 한때 막강했던 러시아 산업의 위력을 부흥시키기 위해 그는 해외 자본을 유치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위해 그는 외채를 제때에 갚도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주택, 대중교통을 비롯한 공공서비스에 대한 지원금을 삭감하고 자본에 유리한 노동법 "개혁"을 밀어붙였다. 또한 체첸에 대한 반동적 전쟁을 공격적으로 추진하면서 코커서스 지역, 우크라이나 등 구 소련 공화국들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다시 확립했다.

 

1999년에서 2000년 사이 러시아의 국내총생산은 10년의 하락 후에 증가세로 돌아섰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상품 특히 석유 가격의 급등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 요인은 1998년 금융위기에 뒤이어 단행된 75%에 달하는 루블화의 평가절하 때문이었다. 값싼 루블화는 러시아 수출상품의 국제 경쟁력을 강화시켰으며 식료품, 자동차, 섬유, 전자 등 국산 소비재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켰다. 최근 몇 년간 러시아의 일부 대기업들은 소폭이나마 국내에 자본을 투자했으며 우크라이나 등 구 소련 공화국에서 공장을 구입했다.

 

루블화의 평가절하 이후 기업간의 거래는 물물교환에서 현금 거래로 대체되었으며 세수는 증대했다. 정부는 일련의 재정흑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상황은 여전히 암울하다. 임금 수준은 평가절하 이전의 절반에 불과하며 구 소련에서 물려받은 인적 자원은 급속히 소진되고 있다. 교육 관련 예산은 삭감되었고 연구개발비는 고르바초프 치하의 3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원자재와 일부 기본 화학재 외에 러시아는 군수, 핵발전, 우주항공기술 등 몇 분야에서만 국제 경쟁력을 갖추고 있으나 이 분야들에서도 서서히 기반을 잠식당하고 있다. 이것은 전혀 놀라운 현상이 아니다. 러시아 공장설비의 평균 연령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제국주의 국가들의 것보다 3배나 많다.

 

러시아의 도로, 교량, 전선, 상하수도 체제는 급속히 붕괴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러시아 "기업가들"은 약탈한 자본재를 대체하거나 개선하지 않은 채 소모시키기만 했다:

 

"러시아 경제의 쇠퇴에 비해 투자는 더 빨리 쇠퇴했다. 전반적으로 고정투자 총액은 1989년 국내총생산의 45%에서 1996년의 21%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에 국내총생산 자체가 40% 넘게 하락했기 때문에 자본재 투자의 절대 액수는 4분의 3이나 하락한 셈이다. ... 1995년 이후 순고정투자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해왔다. 다른 말로 하면 러시아의 자본 기반은 전체적으로 축소되어왔다. 1997년 순고정투자는 국내총생산의 마이너스 10%를 기록했으며 계속 떨어지고 있다." --- <구스타프슨, 앞의 책>

 

러시아의 기술을 갱신하고 사회 인프라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수천 억 달러가 소요될 것이다. 그러나 2000년의 무역 흑자 600억 달러의 약 절반은 족벌들에 의해 해외 은행계좌로 빠져나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심지어 외화 벌이의 가장 주요한 원천인 석유와 천연가스 부문에서조차 재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아 생산량이 감소해왔다. 구 소련 시대에 건설된 석유 파이프라인은 예상된 수명을 거의 다했으며 매년 2천만 톤으로 추산되는 석유가 새어나와 러시아의 숲, 토지, 강을 오염시키고 있다.

 

 

다시 한번 10월 혁명을!

 

현재 러시아는 짜르 시대와 마찬가지로 강대국과 반식민지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근로인민의 혁명 지도부에 근접하는 정치조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레닌과 볼세비키당 대신 푸틴의 좌에는 반유태인주의와 친자본주의를 표방하는 국수주의적 러시아공산당이 있을 뿐이다.

 

현재 러시아 노동계급의 사회적 비중은 1917년에 비해 엄청나게 높아졌다. 또한 자본주의 민영화에 대한 끔찍한 경험은 시장의 마술에 대한 모든 환상을 날려버렸다:

 

"언어 자체가 거꾸로 뒤집혔다. `개혁'`시장'이란 말은 대다수 러시아인들에게 승리와 희망의 말에서 거의 욕으로 바뀌었다. 자본주의라는 단어 앞에는 야만적이라는 수식어가 점점 자주 붙었다. 따라서 `서방'은 찬탄과 모방의 대상에서 분노의 표적으로 변했다. 한편 `좌익'이라는 말이 다시 유행하고 있다." --- <[이코노미스트], 19981119>

 

러시아의 쇠퇴를 저지할 목적으로 푸틴은 그동안 반혁명이 뒤집어 쓰고 있던 민주주의 가면을 거의 다 벗어 던졌다. 국제시장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러시아 자본가들은 정치적 권리와 노동조합의 자유를 더욱더 강력하게 공격할 것이다. 비록 십 년간 지속된 자본주의 반혁명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했지만 러시아 노동계급은 지금의 세계에서 잠재적으로 강력한 정치적 요인으로 남아있다. 혁명조직은 피억압 인민을 착취자들에게 화해시키려는 정치세력에 대해 비타협적으로 투쟁하고 강력한 계급투쟁 전술 구사해야 한다. 이럴 경우 이 조직은 지금 상황에서 기하급수적으로 세력을 확대할 수 있다.

 

구 소련의 공화국들은 엄청난 천연자원과 상당수의 숙련 노동자, 과학자, 엔지니어 등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자본주의 세계로의 재편입은 지금까지는 대대적인 궁핍과 기존 교육 인프라 및 산업 능력의 대대적인 파괴만을 낳았다. 스웨덴이나 독일보다 나이지리아가 자본주의 러시아의 미래상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

 

러시아 근로인민이 전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본주의 기생충들에 대한 완전한 몰수와 연합 생산자들의 직접 통제에 의한 계획경제의 수립에 있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정치적 유산에 기초하며 강력한 러시아 노동운동의 지도력을 확보하는 투쟁에 헌신하는 새로운 볼세비키당의 중핵을 결집시키는 임무, 이것이야말로 이 시기 혁명가들의 가장 주요한 임무이다.

 

새로운 10월 혁명을 통해서만 러시아 노동자들은 제국주의 체제가 이들에게 강제해온 후진성과 궁핍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새로이 상승하는 러시아 노동계급은 증오의 대상이었던 스탈린주의 체제를 복귀시키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일국 차원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자립경제의 환상도 쫓지 않을 것이다. 오직 세계사회주의혁명의 거대한 질적 변화를 촉발시킬 촉매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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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a: A Capitalist Dystopia]([1917] No. 24)

 

국가자본주의 이론 --- 나사가 빠진 엉터리 시계

 

 

러시아 혁명 당시 저명했던 경제학자 프레오브라젠스키(Preobrazhensky)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치법칙은 상품경제 체제인 자본주의를 자동적으로 조정하는 장치이다."(Preobrazhensky, [The New Economics], p. 147) 그러나 그가 강조했듯이 이 법칙은 사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가치법칙은 상품가격의 관계를 결정한다. 그러나 가치, 가격, 잉여가치 등의 범주 뒤에는 이러한 범주들로 인해 가려지고 신비화된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존재한다.

 

가치법칙은 노동가치론(labor theory of value)에 기초를 두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상품의 교환가치는 상품생산에 투여되는 평균노동시간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 시간은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모든 상품에는 두 종류의 가치가 존재한다. 상품의 효용성을 나타내는 사용가치(use value)가 그 첫 번째이다. 상품의 효용성은 실재할 수도 있고 인간에 의해서 상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없이는 상품이 시장에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다. 두 번째가 교환가치(exchange value)이다. 이것은 상품생산에 투여된 평균노동시간을 나타낸다. 이 시간은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교환가치 즉 가치는 추상적 노동을 내포한다. 즉 상품생산에 투여된 노동의 형태는 갖가지일 수 있으나 이것은 시간이라는 단일한 추상적 단위로 표현된다.

 

사회적으로 결정된 평균노동시간을 조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 평균노동시간이 기술수준과 기술의 응용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맑스의 노동가치론을 저속하게 이해하고 있다.(M. Kidron, [Marx's Theory of Value], International Socialism No. 32) 물론 상품생산에 필요한 평균노동시간은 기술수준에 의해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평균노동시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이것뿐이 아니다. 사회의 계급적 성격, 계급 역관계, 수요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바란(Baran)과 스위지(Sweezy)는 미국 자동차산업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1956년에서 1960년까지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는 데 드는 비용은 자동차 구입가격의 무려 25%에 달했다. 그러나 자동차의 효용성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더욱이 이 비용은 당시 미국 국민총생산량의 2.5%를 차지했다.(Baran and Sweezy, [Monopoly Capital], Ch. 5) 이것은 아주 흥미있는 수치이다. 영국 탈취제 산업의 영업비용도 구입가격의 약 25%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모델 개발이나 영업에 투여되는 노동량도 독점자본주의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 필요노동이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오늘날 투여되고 있는 노동의 많은 부분은 합리적으로 운용되는 계획경제에서는 전혀 생산적이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제품들을 생산-판매하여 이윤을 취하는 자본가들에게는 당연히 필요한 노동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란과 스위지에게도 문제는 있다. 이들은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맑스는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을 생산적 노동이라고 불렀다. 의사의 진료 등과 같은 비생산적 노동도 사회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의사의 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사회의 총잉여가치 중 일부에서 이런 비생산적 노동에 대한 대가가 나온다. 합리적 계획경제 체제에서는 자본주의사회가 필요로 하는 비생산적 노동의 많은 부분은 불필요하게 된다.

 

한편, 수요수준 즉 시장관계도 중요한 요인이 된다. 주어진 기술수준에서 자동차 한 대를 생산하는 데 갑 시간이 든다고 하자. 그러면 갑 시간이 자동차 한 대를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결정된 평균노동시간이 된다. 그러나 생산된 자동차가 모두 소비되지 못할 경우 자동차 생산에 투여된 총노동시간은 낭비라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조정이 뒤따른다. 경쟁이 치열한 상태라면 자동차 가격은 자동차에 투여된 필요노동시간 즉 자동차의 원래 가치 이하로 판매된다. 결국 노동가치론은 기술 요인만 고려해서는 성립할 수 없다. 사회적 필요노동은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이 사실을 잊을 경우 경제 결정주의(economic determinism)라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 이 가치법칙을 토니 클리프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지금 우리가 검토하는 그의 저서에 "노동자국가의 경제"라는 장이 있다. 여기서 그는 가치법칙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자유경쟁의 상태 즉 자본, 상품, 노동력이 자유로이 이동할 때만 가치법칙이 완전히 지배한다. 따라서 가장 초보적인 독점적 조직 형태도 이미 어느 정도 가치법칙을 부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자본과 노동력 배분, 상품가격 등을 통제할 때 이 상태는 당연히 자본주의의 부분적 부정 상태가 된다." (T. Cliff, [Russia: A Marxist Analysis], p. 111)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확증하기 위해 그는 곧바로 레닌을 인용한다:

 

"예를 들어 자본가들이 국방 관련 생산을 하면서 정부 예산으로부터 돈을 받을 때 이 경우는 더 이상 `순수한' 자본주의적 행위가 아니라 국민경제의 특별한 형태가 된다. 순수한 자본주의는 상품생산을 의미한다. 상품생산은 미지의 시장을 위해 물건을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지적할 것은 토니 클리프에게 자유경쟁이란 완벽한 경쟁 즉 정적인 모델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가치법칙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가치법칙은 이러한 조건이 없이도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가격과 가치를 혼동하고 있다. 대개의 경우 상품 가격은 상품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럴 경우에도 가치법칙은 여전히 작동한다. 가격은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표현하는 척도(measure)이기 때문이다. 맑스는 이 점을 그의 저작에서 수없이 강조하고 있다. 하나의 예만 들기로 하자: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더라도 이 현상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상품의 시장가치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정 화폐량으로 표현되는 상품가치가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더욱 모르게 은폐한다." (K. Marx, [Capital], Vol. 3, p. 145)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수요 공급의 균형을 넘어서서 그 근원을 파악해야한다. 가치법칙은 완벽한 경쟁이 지배하지 않더라도 작동한다. 이것이 맑스의 주장이다.

 

그리고 클리프는 또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는 가치법칙의 "부분적 부정(partial negation)"을 말한다. 그러나 부분적 부정이 말이 되는가? 어떤 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그것의 완전한 대립물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는 가치법칙의 "부분적 부정""자본주의의 부분적 부정"이라고 말한다. 사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의 수정(modifications)이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수정되더라도 자본주의는 총체적 의미에서 여전히 자본주의이다. 그렇지 않다면 "부분적으로 부정된" 부분은 무엇이 된다는 것인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확실치 않은 사회질서란 말인가? 독점의 도입이 자본주의를 수정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수정된 이후에도 자본주의는 여전히 자본주의이다. 그리고 클리프는 레닌을 잘못 인용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레닌은 자본주의의 부분적이든 아니면 무엇이든 자본주의의 부정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가치법칙이 "부정되고 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본주의가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 즉 더럽혀지거나 수정되었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이런 오류들은 자체로만 보면 별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들이 애매하고 혼동된 결론을 이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소련 경제의 가치법칙 작동과 관련하여 설명하겠다. 여기서 한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자. 어떤 글을 인용할 때는 인용문이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인용한다. 즉 인용문이 실제로 어떤 주장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클리프가 인용한 레닌의 글은 그의 가정과 똑같은 내용을 주장하고 있을 뿐 이 가정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지는 않다. 이 경우 클리프는 레닌의 권위에 기대기만 할 뿐 자기 주장의 근거를 결코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독점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다른 문제들을 해결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독점체가 시장을 장악할 경우 독점가격은 상당한 정도 독점체의 주관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나 가격이 무한정 주관적으로 책정될 수는 없다. 엄연히 객관적인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 상품을 어느 독점체가 완전히 독점하고 있다고 치자. 이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독점체가 완전한 독점을 유지하며 제품 가격을 무한정 독자적으로 정할 수는 없다. 총수요에서 자신의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다른 생산업체와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 독점체도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가치법칙은 클리프가 주장하듯이 경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교환을 통해 작동한다. 따라서 독점체도 교환과정에 종속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완전경쟁의 상황에 비해서 독점체가 자본의 규모에 걸맞는 시장점유율을 확보할 가능성은 훨씬 높다. 그러나 이것도 경제의 비독점부문을 희생시킨 결과 위에서나 가능하다. 그리고 생산규모, 혁신, 새로운 상품의 개발 등으로 발생하는 생산성의 차이로 인해 독점체가 잉여이윤을 취하는 경우도 상당히 자주 발생한다.

 

클리프는 독점이론을 통해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수립한다. 그리고 늘상 그렇듯이 인용문들을 제시하면서 자기 주장을 강화시킨다. 이번에 그는 힐퍼딩(Hilferding)을 인용한다:

 

"독점체들이 경쟁을 철폐할 경우 이들은 객관적 가격법칙이 실현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제거한다. 가격은 이제 객관적으로 결정되지 않고 가격을 결정하는 자들의 의지와 의식에 의해 계산된다. 결과가 아니라 가정이 되며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이 된다. 자본집중 즉 독점적 합병에 관한 맑스주의 이론은 현실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현실은 곧바로 맑스주의 가치이론을 무력화시킨다." (Cliff, p. 152)

 

"이제 가격은 통제기능을 상실하고 분배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경제 그리고 경제활동의 지수들은 국가에 의해 지배되어 그것의 종속물이 되어 버린다." (Cliff, p. 154)

 

경제현상에 대한 힐퍼딩의 통찰력이 어떻든 그는 확실히 여기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독점은 주어진 영역에서 경쟁을 억제한다. 그러나 다른 수준에서는 더욱 치열한 경쟁을 불러일으킨다. 더욱이 경쟁을 억제하는 독점에 대해서 더 이상 자신있게 얘기할 수 없게 되었다. 독점이 가격경쟁을 주기적으로 억제한다고 얘기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는 독점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여러 거대기업이 공동으로 시장을 장악한다. 맑스의 용어로 과두제 지배가 된다. 경쟁을 종식시키기는커녕 이들 거대기업들은 시장점유율을 더욱 높이기 위해 자기들끼리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그리고 앞에서 얘기한대로 어느 독점체도 총수요 전체를 장악할 수는 없다. 전세계적으로 가장 규모가 큰 기업들도 세계시장 또는 일국시장 내에서 보았을 때 시장의 일부만을 점유할 뿐이다. 더욱이 힐퍼딩은 클리프와 똑같이 가치와 가격을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가격은 가치의 척도일 뿐 사회적 필요노동이 가치를 결정한다. 나무토막의 길이를 재기 위해 사용되는 자가 나무의 길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힐퍼딩은 독점가격이 가치 결정 기능을 상실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거꾸로 전개된 논리이다. 독점체는 일정한 한계 내에서만 주관적으로 가격을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 한계를 넘어설 경우 독점체는 시장에서 객관적으로 결정되는 요인들에 종속된다. 일정 수준에서는 독점가격이 개개 상품의 가치에서 벗어나 주관적으로 결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현상도 가치에 대한 왜곡에 지나지 않는다. 경제의 독점부문이 가격을 상향조정하면 할수록 비독점 경쟁부문은 가격을 하향조정할 수밖에 없다. 한 경제에서 창출되는 잉여가치는 제한되어 있다.

 

힐퍼딩과 클리프는 둘 다 가치법칙이 경쟁을 통해 표현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류이다. 자유무역 시기가 자본주의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들은 잊고 있다.

 

클리프의 방법론은 노동자국가 즉 이행기 체제를 분석할 때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의 방법론은 형식논리에 의존할 뿐 변증법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는 대립물의 통일(unity of opposites)이나 모순의 총체성(contradictory totalities)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의 글을 인용해보자:

 

"국가자본주의와 노동자국가는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의 두 단계이다. 국가자본주의는 사회주의의 반대 극단이다. 이 둘은 완전히 대립하고 있으며 서로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Cliff, p. 113)

 

이 글은 단계라는 용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으며 단선적인 사고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단계란 본성상 중간적 존재를 의미하며 모순적이며 대립적인 현상이다. 더욱이 이 글은 형식과 내용을 혼동하고 있다. 노동자국가는 과거 모순들의 종합이다. 국가소유이면서도 독점자본주의의 요구에 종속된 국가자본주의적 소유형태를 철폐하고 부르조아지의 생산수단을 몰수했기 때문이다. 형식적 법률적 형태가 클리프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국가자본주의와 노동자국가가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두 단계라고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이 사적유물론자가 아니라 경제결정론자임을 명확히 입증했다. 자본주의 체제가 혁명을 겪지 않고도 사회주의로 이행한다는 말이 아닌가. 클리프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는 봉건제와 사회주의 사이의 한 단계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이런 식으로 단계를 말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조잡한 숙명주의, 운명주의에 불과하다.

 

더욱이 국가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단계라면 독일의 철도산업을 국유화한 비스마르크와 미국 철강산업을 국유화한 윌슨의 조치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렇다면 이들이 사회주의 혁명가란 말인가? 국가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완전히 대립하고 있으며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으며 변증법을 우습게 만들고 있다. 이 두 체제가 완전히 대립된 체제인 것은 사실이다. 그가 의미하는 바 국가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 관계들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것이다. 자본주의하에서 이루어지는 국유화는 부르조아 지배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킨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사민주의 정부 하에서 이루어진 국유화는 노동계급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말하자면 국유화로 인해 채산성이 없는 기업들이 국가에 의해 관리되면서 독점자본의 이해에 봉사하였을 뿐이다. 노동자국가의 국유화 조치는 이러한 형태들을 더욱 진전시키고 있는 것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이 조치의 진짜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이러한 조치를 취하는 국가의 성격은 변화된 계급 역관계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부르조아지는 생산수단을 몰수당하고 권력에서 추방된다. 노동자국가는 발전단계 즉 과거와 직접 연결된 고리이기는커녕 과거와의 날카로운 단절이며 변증법적 비약이다. 변증법적 통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클리프와 그의 추종자들은 노동자국가 쿠바와 자본주의 국가 이집트의 국유화를 같은 성격으로 보고 있다. 두 경우 모두 제국주의와의 투쟁에서 나타난 조치들이다. 그러나 이 조치의 결과는 두 나라에서 전혀 다른 계급 역관계를 표현한다. 나세르의 수에즈운하 국유화는 이집트 민족부르조아 계급을 강화시키기 위한 조치이다. 반면 쿠바의 국유화는 제국주의 자본을 몰수하는 것을 통해 집단적 계획경제 체제인 쿠바의 노동계급 경제를 강화시키기 위한 조치이다.

 

클리프는 계속 이렇게 말하고 있다:

 

"노동자국가에서 임노동은 더 이상 상품이 아니다. 노동자국가에서의 노동력 `판매'는 자본주의국가에서의 노동력 판매와 다르다. 노동자국가에서는 노동자들이 개인으로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 내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기 노동력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Cliff, p. 113)

 

노동자국가의 이행기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의 무능력이 바로 여기에서 드러난다. 가치와 물질적 재부는 적대관계에 놓여있다. 왜냐하면 모든 조건이 같을 경우 생산성의 증가는 생산된 상품의 가치를 하락시키기 때문이다. 즉 상품의 가치가 하락할수록 많은 상품이 생산되어 물질적 재부가 증가한다. 생산성의 증가에 따라 상품 하나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평균노동시간이 감소하므로 이 결과는 당연하다. 이행기 사회에서 가치와 물질적 재부 사이에 적대관계가 존재하는 이유는 또 있다. 상품의 상대적인 부족때문에 생산성이 증가될 필요가 있다. 생산성이 증가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에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한편 개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물질적 재부를 증가시키려고 노력한다. 개개 노동자의 물질적 재부가 증가하려면 생산수단에 대한 투자를 될 수 있으면 적게 해야한다. 이 두 요구 사이에는 모순이 존재한다. 이 모순이 존재하는 한 사회 전체의 재부에 대해 개개 노동자가 공헌하는 노동량과 이 재부에서 자신의 몫으로 가져가는 부분을 측정하는(measuring) 수단이 존재해야 한다. 물질적 재부가 풍부하여 사회 성원 전체의 욕구를 전부 충족시킬 수 있다고 하자. 이럴 경우 공동의 재부에서 개개 노동자가 가져가야 할 재부를 분배하고 이 분배량 만큼 노동을 강요할 필요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물질적 재부가 풍부한 사회에서 노동은 더 이상 노동이 되지 않고 개개인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자유행위가 된다.

 

노동자국가가 탄생한 지 얼마 안되는 시점에서 노동자 각자가 생산수단과 맺고 있는 관계는 사회주의보다는 자본주의에 더 가깝다. 이것은 사회의 이행기적 성격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는 재부를 생산하는 노동자의 역할과 지배계급의 일원인 노동자의 역할 사이에 모순이 발생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 힘들게 재부를 생산하는 역할과 자본의 지배를 받는 계급의 일원으로서 갖는 역할은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행기 사회에서 그는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여전히 소외되고 종속되지만 이제 새로운 지배계급의 일원으로서 이런 상태를 경험한다. 이것은 모순이다.

 

이행기 사회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사회에 판매하지 않는다는 클리프의 주장은 말도 안된다. 그리고 자신의 노동력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는 말은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회에서 상품교환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존재하며 소비재를 구하기 위해 노동자가 노동력을 판매하는 현상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여전히 가치법칙 즉 사회적으로 필요한 평균노동에 의해 지배받는다. 비유를 들어보자. 노동조합 상근자는 집단체인 노동조합에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는가? 집단에 속해있는 노동자는 이 집단에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는가? 양으로 측정될 수 있는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을 통해서만 노동자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자기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다. 상품이 모두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해질 때까지 노동력으로 측정되는 가치는 여전히 상품의 분배를 결정할 것이다.

 

클리프의 혼란은 그가 생산수단의 집단적 소유와 노동력의 개인적 소유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노동력은 독특한 상품이다. 즉 개인적으로만 소유될 수 있으며 이것을 소유하고 있는 노동자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클리프는 한술 더 뜬다. 노동자국가에서 노동력이 더 이상 상품이 될 수 없다고 말하더니 곧바로 이어서 노동자국가에서 노동력의 판매는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의 판매와 다르다고 한다. 노동력이 더 이상 상품이 아니라면 그것은 더 이상 노동력이 아닌 것이다. 노동력이 판매되지 않을 경우 생산에 투여된 노동은 소외되고 유리된 노동이 아니라 노동자가 스스로 인간임을 확인하는 자발적 활동이 된다. 더 이상 강제적인 고역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행기 사회에서는 이 강제가 여전히 존재하며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을 여전히 판매해야 한다. 클리프는 노동과 노동력의 범주도 혼동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성립하는 이행기 사회에서 상품이 가장 오래 순환되는 부문은 바로 소비재 부문이다. 노동력이 개인적으로 소유되기 때문이며 계획경제를 담당하는 당국이 소비를 완벽하게 계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부문에서 시장관계를 철폐하기 위해서는 언젠가 폐기될 엄격한 배급제를 실시하거나 모두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풍부한 재부를 생산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이행기 사회는 전자를 통해 후자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클리프는 노동자국가의 경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이 체제의 이행기적 성격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노동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사고는 물질적 재부가 사회성원 모두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회주의에서만 통용될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 노동력을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노동력은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사용가치에 의해서 대체되기 때문이다.

 

클리프는 소련에서 가치법칙이 작동되는 현상을 발견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찾을 수 없다. 이것은 큰 문제이다. "이 체제가 모종의 자본주의 체제라면 가치법칙이 작동해야 한다. 그러면 이 법칙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자본재 부문인 제1부문에는 가치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한다. 맞다. 이 부문에서 국가는 가격을 회계적 장치로만 사용하고 있으며 자본재 시장이 소련 내부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부문의 제품은 필요한 사용처에 정확하게 배분된다. 따라서 이 제품에 대해 `매겨지는' 가격은 회계적 장치에 불과하다. 그러나 스탈린이 나중에 알게 되듯이 이 가격은 자의적으로 매겨질 수가 없다. 이 제품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결정하는 요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요인은 노동력의 구매에서 발생한다. 이 결과 생산가격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클리프는 이 논리를 거부하고 임금재(소비재) 부문 즉 제2부문에서도 가치법칙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소련 경제 내부에서만 본다면 생산의 원동력이자 규제력인 가치법칙의 근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다. 마치 러시아는 중앙에서 직접 관리하는 거대한 공장과 같이 기업, 노동자, 고용주 국가 사이의 관계가 확립되어 있다. 모든 노동자들은 소비재를 일한 대가로 받고 이것을 소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Cliff, p. 159)

 

여기서도 클리프는 혼동을 보이고 있다. 자본주의 공장에도 기술적 분업과 사회적 분업이 존재한다. 이 두 분업 유형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전자는 기술에 의존하고 있으며 후자는 계급적 관계에 의존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사회적 분업의 표현 형태이다. 바로 이 분업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를 특징짓는 근본 요인이다. 클리프가 암시하고 있듯이 기술적 분업이 근본 핵심이 아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다. 가장 근본적인 작동법칙들 중의 하나가 존재하고 있지 않은 사회 체제를 클리프는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의 과감성에 대해서는 경탄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 사회 체제가 어떤 체제이든 이 법칙 즉 가치법칙이 작동하지 않을 경우 소련은 자본주의 사회가 될 수 없다.

 

그러면 이 문제 중의 문제를 클리프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까? 외국무역은 소련 경제의 아주 적은 부분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것이 소련 경제에 가치법칙을 주입한다고 주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기서 그는 위대(胃大)한 발명을 해냈다. 즉 군비경쟁을 통해 가치법칙이 소련에 주입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소련과 서방자본주의 사이에서) 상업적 투쟁보다는 군사적 투쟁이 더 중요한 위치를 점해왔다. 국가 사이의 경쟁이 주로 군사적 형태를 띰으로 가치법칙은 자신의 대립물 즉 사용가치를 향한 투쟁으로 표현되고 있다"

 

"국가는 군비를 받는 대가로 다른 상품을 제공하지 않는다. 경제 전체에서 거둔 세금과 대부금으로 군비에 드는 비용을 지불한다. 다른 말로 하면, 군비의 부담은 경제 전체에 골고루 전가된다. 사용가치가 이제 자본주의 생산의 목적이 되었다."

 

"현재 역사 단계를 표현하는 무정부적 세계시장을 가치법칙이 지배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경제 역시 가치법칙이 지배한다." (Cliff, p. 160 161)

 

클리프의 이 글에는 오류와 혼란이 온데 널려 있다. 두 번째 인용문단에서 클리프는 자본주의 군비경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주장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서 그의 사고를 검토해보자.

 

우선 가치법칙은 교환가치를 통해 표현된다. 이미 말했듯이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다. 사용가치는 교환가치가 입고 있는 옷과 같다. 즉 상품이 시장에 등장할 때 구매자에게 필요한 사용가치가 있어야 한다. 상품에 체현된 사회적으로 결정된 평균필요노동량은 교환가치가 된다.

 

교환가치는 추상적 혹은 일반화된 노동이다. 상품의 상대적 교환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품을 교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환행위 과정에서 구매자들 사이에 그리고 판매자들 사이에 아니면 양자 사이에 경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필요불가결한 요건은 아니다. 경쟁이 없이도 상품이 판매될 수 있는 조건이 존재할 수 있다. 일시적 독점, 품귀, 구매력 저하 등의 상황이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그런데 교환을 경쟁으로 대체하면서 클리프는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딜레마를 이제 해결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가치법칙이 경쟁을 통해 올림픽에도 작동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 판이다! 클리프는 가치법칙을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분석도구로부터 신비주의에 가까운 가장 저열한 주관주의적 도구로 끌어내리고 있다. 그의 사고를 다시 현실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기 위해서는 한마디만 하면 족하다. 즉 침략의 위협을 받고 있는 어떤 노동자국가도 무기를 생산할 필요가 있다는 상식 말이다. 이행기 체제의 경제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가치법칙이 이 체제 내부로 이전되어 작동하고 있다고 클리프와 키드런은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은 지구상에 단 하나의 자본주의 국가만 존재해도 노동자국가가 안정된 기반 위에 성립할 가능성이 없다고 이들은 말한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노동자국가는 국방을 위해 무기를 생산하는 한 가치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된다는 것이다.

 

둘째, 자본주의 체제가 이윤 추구 동기를 사용가치 생산 동기로 대체했다는 주장 역시 상상의 나래에 지나지 않는다. 교환과정에서 상품 구매자는 사용가치 즉 상품의 효용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모든 자본주의적 교환과정에서 상품 판매자는 잉여가치 즉 이윤을 실현하고자 하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국가가 무기를 구매할 때는 구매자임으로 무기의 효용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무기 판매자가 이러한 효용성만을 제공하는 데 관심이 있다는 말인가? 이런 거래에서 이윤은 생기지 않는 것일까? 더욱이 무기 제조업자는 노동력을 구매했으므로 이로부터 잉여가치를 실현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물론 경제 전체가 무기구입에 드는 비용을 지불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누가 이익을 보며 누가 세금을 지불하는 다수를 이루고 있는가? 이제 생산이 시장 즉 수요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맑스주의자(?, !) 클리프는 주장한다. 그는 수요가 생산과 투자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맑스의 견해를 거꾸로 뒤집고 있다.

 

그리고 클리프가 주장하는 대로 가치법칙이 정말 소련경제를 지배하고 있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전혀 그렇지 않다. 가치법칙이 소련을 지배했다면 소련경제는 그렇게 대단한 성장을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련경제가 가치법칙에 의해 지배되었을 경우 시장이 자원의 배분과 우선 품목의 주문 순위를 결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생산수단 부문인 제1부문에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국가가 자본재를 직접 생산하고 배분하고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경제행위는 생산단계 이전에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생산 이후 시장에 의해 조절되지 않았다. 만약 가치법칙이 소련 경제를 지배했다면 자본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실시 초기에 가장 이윤이 높았던 부문인 소비재 산업, 농업으로 흘러들었을 것이며 이 결과 자본재는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가치법칙은 무시되거나 잊혀질 수 없다. 최적 경제성장률을 달성하고자 하는 이행기 사회에서 가치법칙은 의식적으로 통제되어야 한다. 노동계급이 경제의 한 부문에서 다른 부문으로 가치가 이전되는 것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도록 아주 면밀한 회계를 운용할 경우 이것이 가능하다. 물질적 풍요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채 노동생산성을 올리려고 애쓰는 사회에 대해 가치법칙은 당연히 압력을 행사한다. 노동자국가가 이 가치법칙을 의식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계획과 외국무역독점이다.

 

예를 들어, 새로운 산업을 시작하기 위해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노동자국가가 기계를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기계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외국돈이 필요하며 외국돈을 벌기 위해서는 상품을 수출해야 한다. 물론 금으로 수입대금을 결재할 수도 있다. 그런데 수출상품을 생산하는 비용이 국제시장가격보다 높을 경우는 국가가 생산보조금을 지급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이 상품의 본래 가치보다 더 낮은 가치 즉 세계시장가격으로 이 상품을 수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상품에 대한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생산성이 월등히 높은 상황에서 이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 상품이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받아 수출되려면 노동자국가 경제 전체가 세금을 내야한다. 결국 생산보조금만큼 더 많은 부담을 경제 전체가 안게 된다. 이렇게 해야 가치가 이 상품에 이전되어 국제시장의 가격으로 수출될 수 있다. 만약 국가가 외국무역을 독점하지 않을 경우 값싼 수입품이 국내로 들어와 높은 가치를 보유하고 있는 국산품을 몰아낼 것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이행기 경제가 가치법칙을 통제하는 방법은 외국무역의 독점과 계획밖에 없다. 국내적 차원에서 이러한 통제는 계획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윤율은 낮되 사회적 우선순위는 높은 생산수단에 투자를 집중시키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 따라서 가치법칙이 압력을 행사하더라도 경제 전체를 지배할 수는 없게 된다. 이행기 사회에서 의식적 계획과 가치법칙은 서로 우위를 장악하기 위해서 싸우게 된다. 이 사회가 사회주의 체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시장이 종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가 달성되기 전까지 시장은 철폐될 수 없다.

 

이러한 과정에 대해 그리고 이 과정이 소련 경제에 전개되는 방식에 대해 클리프는 전혀 무지하다. 소련이 10월 혁명 이전에 러시아를 지배하고 있던 후진성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소련 경제가 가치법칙에 의해 지배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치법칙 자체를 통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인적 손실이 발생했다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초창기에 노동계급이 잔인하게 착취를 당한 상황을 클리프는 소련 노동계급이 경제성장 과정에서 당했던 희생적 상황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그가 영국의 산업혁명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것을 소련의 공업화 과정과 비교했던들 그는 양자의 발전과정이 서로 달랐다는 사실을 실감했을 것이다. 이 차이점은 시간의 격차에 의해서 설명될 수 없다. 각기 다른 계급이 역사적 상황 속에서 강요한 사회 유형에서 이 차이가 발생했다.

 

클리프는 "가치법칙과 경제위기"를 논의하는 데 무려 29쪽을 할애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관련 서적들을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부하린, 투간-바로노프스키의 저작을 단편적으로 소개하면서 경기침체와 침체 극복을 위한 경제확대 방안을 개괄적으로 논술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경제위기를 1929년의 대공황과 명확하게 동일시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가 소련경제와 관련하여 자신의 경제위기론을 전개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무려 29쪽이 다 끝난 지점에서 그는 이렇게 이 사안을 비켜간다:

 

"지금 세계 정세로 볼 때, 전시경제 `해법'이 소련 관료집단에게는 경제 유지의 유일한 편의책인 것처럼 보인다. 사회주의 또는 야만주의가 정통 자본주의이든 국가자본주의이든 이들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해 있는 모순들을 해결할 때까지 말이다."

 

소련을 `자본주의' 체제라고 규정한 그가 어떻게 이런 근본 문제를 회피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일관된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그가 이 문제를 슬쩍 피하면서도 어떻게 자기 이론의 신빙성을 주장할 수 있는지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 소련에서 `경제위기'가 어떤 형태를 띨 것인지에 대해 클리프는 단 한 번도 주장을 펴려고 하지 않는다. 실업, 주기적 경제파동, 이윤율의 저하, 잉여자본, 자본수출 등 맑스주의 경제학의 기준으로 볼 때 소련은 자본주의 체제가 될 수 없다.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이리도 오래 주장한 클리프가 이제는 이 문제들에 대해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기대해 왔다. 그러나 사태는 전혀 다르다. 이 문제들과 씨름하는 대신 역사가 이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라는 말로 클리프는 이 문제들을 간단히 무시한다. 대단한 이론이다!

 

언뜻 보면 클리프의 이론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그러나 꼼꼼히 검토하면 그의 이론은 인용문들을 무수히 연결시켜놓은 절충적 사고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변증법과 이행기 사회에 대한 이해 부족은 그가 이렇게 이론적으로 실패한 핵심 이유에 속한다. 그는 사물을 흑백으로 즉 형식논리를 통해서만 인식한다. 변증법이 없는 맑스주의 이론은 스프링이 빠진 시계와 같다고 트로츠키가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은 클리프에게 딱 들어맞는다. 클리프의 `시계'는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그의 이론이 발명된 시기는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후퇴하고 고립되었던 때였다. 당시 공산주의운동은 스탈린주의라는 빙하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제국주의 세력은 더 없이 강력해 보였다. 클리프류의 절망적인 이론이 이때 발명된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의 이론은 절망의 이론이다. 이 점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에 의하면 국제혁명의 승리 하나 하나는 국가자본주의의 승리에 불과하다! `관료집단'의 승리에 너무 눈이 박힌 나머지 제국주의 세력의 패배는 그에게 반 정도 잊혀진 현실이 되어 버렸다.

 

클리프가 자신의 이론을 처음 개진했을 때 당시 상황은 예외적이라고 생각되어졌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소련의 후진성과 고립이 `국가자본주의'체제 전개의 주요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그때 이후 중국, 쿠바, 월남 등지에서 혁명이 성공했다. 그런데 이런 거대한 사건들이 그에게는 예외적인 현상으로 비추어진 모양이다. 당시는 그에게 예외가 규칙이 되는 그런 시대였던 모양이다. 정말 대단히 암울한 전망이 아닐 수 없다.

 

 

통계수치의 사용에 대하여

 

클리프의 이 저작은 사실과 관련된 자료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대단히 인상적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완고한 자료들'이 나타나면서 확고하게 논리를 전개한다. 자료의 양과 학자와 같이 꼼꼼한 주석달기에 거의 어안이 벙벙할 지경일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좀더 꼼꼼하게 이 자료들을 들여다보면 자료의 신빙성이 의심가기 시작한다.

 

33쪽에서 클리프는 소련에서 소비가 축적에 종속되는 현상을 논의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대중의 소비는 축적에 종속된다." 그리고 이것이 "기본적인 관계"라고 말하면서 이 주장을 강조한다. 그리고 한 세트의 수치들을 제시하면서 이러한 종속이 소련에서도 지배적이라고 주장한다.

 

총생산량에서 차지하는 생산수단(A)과 소비수단(B)의 비율

1913

1927 8

1932

1937

1940

1950

A

44.3

32.8

53.3

57.8

61.0

68.8

B

55.7

67.2

46.7

42.2

39.0

31.2

 

 

 

이 간단한 표는 많은 것을 지적하게 만든다. 우선, 총생산량을 통해 밝힐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생산수단에 대해서는 순수치를 알아야 한다. 즉 순수치가 있어야 새로 축적된 생산수단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 지를 알 수 있다. 둘째, 이 표에서 1913년 수치는 클리프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가 생산수단의 축적에 종속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수치에서는 생산수단에 대한 비율이 더 적다. 따라서 이 수치에 따르면 1913년 러시아는 자본주의 국가가 아닌 셈이 된다! 셋째, 사용되고 있는 범주의 성격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이 수치들은 가치를 계산한 것인지 가격을 계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일반화된 용어만 나와있을 뿐 이 용어를 규정하는 조건이 없다. 맑스는 생산의 두 부문 즉 생산수단 부문과 소비수단 부문을 매우 추상적인 방식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클리프는 훨씬 낮은 추상의 수준에서 이 범주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혼란을 발생시킨다. 이것은 범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으나 엉터리 방법론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와 소비의 종속에 대한 클리프의 규정은 너무 애매하여 전혀 의미가 없다. 어떤 사회든지 새로운 축적은 소비의 축소를 의미한다. 소비될 수 있는 부분이 소비되지 않은 채 생산수단에 투여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미 소진된 생산수단을 대체하기 위해서 소비를 희생시키지 않는다면 어떤 사회도 살아남을 수 없다. 수확된 밀의 일부를 봄에 파종하기 위해 소비하지 않는 농부 역시 자신의 소비를 축적에 종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해서 얘기한다고 한 후 클리프는 초역사적 범주를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전혀 알맹이가 없다.

 

소비를 축적에 종속시킨다는 주장을 계속하기 위해서 클리프는 수치를 계속 늘어놓는다:

 

"소련에서 개인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면제품의 일인당 수치는 1927 28년의 15.2미터에서 1940년의 10미터 이하로 떨어졌다. 1937년 영국의 수치와 비교하면 이 수치가 얼마나 하락했는지를 알 수 있다. 영국에서는 일인당 60평방미터의 면제품이 생산되었다." (Cliff, p. 37)

 

여기서 클리프는 너무 황당한 실수를 하고 있다. 그는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수치들을 비교대상으로 하고 있다. 모든 산출량이 소비되는 폐쇄된 사회를 상정하지 않는 한 소비량과 산출량을 비교할 수는 없다. 더욱이 1930년대에도 영국의 면제품은 수출되고 있었으므로 총산출량은 국내 소비량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소련에 비해서 당시 영국의 국내 소비량은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클리프가 제시하는 수치로는 알 수가 없다. 이 사실을 그는 잊어버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미터를 평방미터와 비교하고 있다. 미터와 평방미터가 같은 것이라면 이 사실을 명시해야 하지 않을까?

 

주택문제를 비교할 때도 클리프는 똑같은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1923년과 1939년 사이 16년 동안 러시아 도시의 주택면적은 166십만 평방미터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1925년과 1928년 사이 4년 동안 잉글런드와 웨일즈에서 7천만 평방미터 이상의 총건평이 건축되었다." (Cliff, p. 39)

 

여기서도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단위들이 비교되고 있다. 러시아의 경우 농촌과 기타 비도시 지역의 주택은 제외되어 있다. 반면에 잉글런드와 웨일즈의 경우는 이 두 경우가 다 포함되어 있다. 더욱이 소련의 농촌인구는 잉글런드와 웨일즈의 경우보다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 훨씬 많다. 따라서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소련의 농촌지역까지 포함시켜서 계산해야 한다. 주택문제에 대해서 그는 계속 이렇게 말하고 있다:

 

"4평방미터의 생활공간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경우 새로운 주택의 경우 최소한 550에서 950평방피트 즉 방 하나당 51에서 88 평방미터 정도의 넓이가 나온다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Cliff, p. 38)

 

그러나 클리프 자신의 수치에 의하면 부엌, 욕실, 홀 등은 4평방미터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이러한 공간들이 포함될 경우 수치는 4평방미터를 훨씬 넘을 것이다. 물론 이 정도의 공간은 영국의 기준으로 보면 빈약할 것이다. 그렇지만 왜 두 가지 다른 기준들을 들이대면서 실제보다 상황이 더 나쁜 것처럼 포장하는 것일까? 그는 주택을 협소하게 규정된 생활공간과 비교하고 있다.

 

이러한 엉터리 수치 비교는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35쪽에는 비교를 위해 두 지수가 제시된다. 그러나 이것들은 기준년이 서로 다르다. 결국 주장하는 바를 입증하기에는 전혀 쓸모가 없다.

 

소련의 노동자와 농민들은 제15개년 계획 수행 기간 동안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이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생활수준이 하락한 것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문제는 통계수치를 잘못 다루면서 자신의 주장을 강화시키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결국 클리프가 제시하는 증거의 많은 부분은 의심받지 않을 수 없다. 단순한 수치들에 대해서도 오류를 저지르는 만큼 그가 좀더 복잡한 수치들에 대해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은 그만큼 큰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수치들의 제1차 자료를 입수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이것들을 얼마나 올바르게 사용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The Theory of State Capitalism The Clock Without a Spring

 

켄 타벅 지음, [맑스주의 연구] 2권 제 1, 1969-1970년 겨울호에서 번역

 

By Ken Tarbuck, translated from the Winter 1969-70 issue of Marxist Studies, Vol. 2, No.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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