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경쟁 자본주의 위기 계급에 관한 초고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3월호

경쟁 자본주의 위기 계급에 관한 초고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4:57

경쟁, 자본주의 위기, 그리고 계급에 관한 초고1

 

Werner Bonefeld


197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노동계급의 투쟁성이 차츰 약해졌지만 이윤율은 회복되지 않고 자본주의 위기가 지속되고 있다. 특히 1990년대 후반 동아시아, 러시아, 브라질 등으로 이어진 위기는 그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 지를 경고했다. 장기 불황․이윤율 저하 등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전후 세계 경제 위기의 원인에 대해서, Robert Brenner는 1998년 『신좌파평론』(New Left Review)에 「불균등 발전과 장기 침체: 호황에서 정체까지 선진 자본주의 경제 1950~1998년」라는 논문에서 1970년대 이후 세계 경제 위기는 제조업 부문 자본의 경쟁 격화(주요하게는 미국, 일본, 독일 3개국을 중심으로 경쟁을 분석하고 있음)로 인한 과잉설비와 과잉생산 때문에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Bonefeld는 이 논문에서 1970년대 이후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Brenner의 설명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그는 Brenner가 자본주의 재생산을 계급투쟁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닌 자본 사이의 계급투쟁, 즉 자본주의 경쟁 때문에 형성된 것으로 잘못 파악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Bonefeld는 노동계급 투쟁이 없는데도 자본주의의 위기가 지속되었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자본과 노동 간 투쟁의 사회적 관계를 뜻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Brenner의 경쟁이론을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Bonefeld는 Brenner의 경쟁이론이 ‘이윤율 저하를 희소한 투자 출구를 위한 자본 사이의 증가하는 경쟁의 결과로서 설명했던’ 아담 스미스의 주장과 비슷함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그는 Brenner의 경쟁이론이 자본주의 사회관계, 즉 자본과 노동 사이의 대립 및 투쟁을 빠트리고 있으며, 노동착취에 의한 잉여가치의 발생이라는 문제가 전혀 제기되지 않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경쟁’에 대한 Marx의 개념화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개별 자본의 생산결정들에 따른 Brenner의 경쟁이론이 자본주의 경쟁에 의한 자본과 노동 사이의 계급관계를 은폐시키고 있지만, 이와 달리 맑스의 노동가치이론은 자본 사이의 관계가 자본과 노동 사이의 계급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드러내며, 자본주의의 물신성을 비판한다. Marx에 의하면 자본주의 경쟁 자체는 자본주의 재생산 및 자본주의 재생산 위기의 토대가 되지 않으며, 경쟁은 개별 자본에게 자신의 존재 구성, 즉 노동착취를 강요할 뿐이다.

경쟁과 계급투쟁에 관한 마지막 섹션에서는 자본 간 경쟁이 자본과 노동 간 계급관계, 즉 계급투쟁을 전제로 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Bonefeld는 이윤압박설을 비판한 Brenner의 설명이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또 다른 ‘현상학적’ 설명에 머무르고 있음을 지적하고, 경쟁은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의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노동의 생산능력의 발전이 자본주의 축적을 가속화함으로써 자본주의 재생산 위기와 한계를 초래하며, 노동의 생산능력 발전은 또한 자본에 의해 제한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 재생산의 한계는 자본 그 자체의 모순적 속성에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러한 자본주의 재생산 위기와 그것의 한계는, 생산수단을 해방의 수단으로 전환하고 노동을 해방하는 새로운 사회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역사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른바 아시아의 위기, 러시아에서 터진 재앙, 브라질에서 일어난 경기 하강은 오랫동안 질질 끌며 진행된 자본주의 축적의 위기가 또 다른 파국에 이르렀다는 것을 냉엄하게 보여준 것이다. 도대체 그것 모두는 어디에서 끝날까?

지금 나타나고 있는 위기의 역설은 자본이 그 자체로 위기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1960년대 폭발적으로 터진 노동계급의 전투성은 1970년대 동안 쇠퇴했다. 1980년대 동안 노동계급은 심각한 일격을 당했다. 1990년대에도 노동계급의 전투성은 대체로 되살아나지 못했다. 그 대신에, 우리는 많은 노동계급 가족이 임금을 삭감당하고, 노동 강도가 세지며, 낮은 임금으로 고통을 받고 있음을 보았다. 노동계급이 생활조건과 복지, 임금 수준에서 이루어낸 성과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무효화된 듯했다. 임금 노예가 결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형태의 임금 노예는 다시 나타났다기보다는 오히려 지구 전체에서 다시 강조되었고 일반적으로 되었다. 요약하면 노동계급은 자본에 의해 패배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깊은 위기에 빠져있다. 노동계급의 투쟁 때문에 생긴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역사적인 노동의 패배에도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은 자본 그 자체가 위기에 빠졌다는 사례라고 하면 어떨까?

자본이 위기에 빠져 있으며, 노동계급 운동이 패배했지만 그 위기가 계속되었다는 개념은, 1980년대 동안 사이먼 클락(Simon Clarke)이 내놓았던 것이다. 조지 카펜치스(George Caffentzis)도 비슷한 관점을 내놓았다. 그는 임금 노예의 조건이 폭넓게 퍼져 있지만 미국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난 이십년 동안 아주 크게 패배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프레드 모슬리(Fred Moseley)와 함께 그는 아직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노동계급 운동이 패배했지만 자본주의의 위기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은 노동계급 투쟁이 자본주의적 축적 위기를 낳은 부대 현상임을 암시하지 않는다는 걸까? 다른 말로 하면, 노동계급 투쟁의 부재 속에서 자본주의적 위기의 지속은 자본주의가 자본과 노동 간 투쟁의 사회적 관계가 아니였음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일까?

최근 로버트 브레너가 쓴 긴 논문은 자본주의 재생산이 계급투쟁에서 그리고 계급투쟁을 통해서 형성된다는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노동자는 대체로 매우 오랫동안 자본주의의 수익성에 압력을 넣을 수 없고, 따라서 실제 위기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이다.(p. 58) 브레너는 자본주의 재생산의 궤도와 위기에 훨씬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요소가 자본 관계이며, 그것은 바로, 자본과 자본 사이의 관계를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결정짓는 것이 계급투쟁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의 경쟁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출발점은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비할 수 없을 만큼 발전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그리고 무계획적이고 경쟁적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파괴적인 방식으로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견해이다.”(p. 23) 그는 노동계급 투쟁을 자본주의의 위기를 이해하는 데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기각하고 만다. 그 대신에, 

 

고용주의 공세는 오랜 경기하강을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를 위한 출발점을 이루어야만 한다. 높고 증가하는 실업의 배경 속에서 만일 노동계급의 경제정치 조직들에 대한 거센 공격이 노동의 저항을 심각하게 약화시켰고 노동자의 사적 그리고 사회적 임금을 결정적으로 삭감하게 했다면, 왜 수익성은 회복되지 못했으며 경기는 오랫동안 곤두박질치고 있는가?”(p. 139) 

 

브레너의 수사적인 질문은 계급투쟁 접근의 명백한 역설에 잘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역설의 초점을 노동에서 자본으로 변경시킨 것으로 보인다. 노동계급 투쟁이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면 왜 자본은 노동계급을 공격하는가? 실제로는, 브레너가 주장하고 있듯이, “위기를 불러오는 부분이 노동에서부터 압력이 아니라 경쟁에서 감소였다면, 자본은 임금을 줄이고 노동 강도를 점점 더 높여야만 하는가? 브레너는 퍼즐을 짜 맞추려고 두 가지 서로 영향을 미치는 논리들을 증명하고 있다. 첫 번째로, 경제 성장과 경기 침체의 리듬을 지배하는 경쟁의 논리가 있다. 두 번째로, 계급투쟁은 그것이 자본주의 경쟁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한에서 중요하다. 간단히 말해, 자본은 경쟁 압력을 견뎌내려고 노동을 공격하는 것을 필요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존하기 위한 이러한 시도는 생산자들의 체납과 파산과 자산의 청산, 그리고 현 자본의 꽤 많은 가치 감소를 통해서 자본주의의 경쟁이 완화되지 않았는데도 경쟁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경제 위기를 더욱 깊고 더욱 동요하게 하며, 한층 더 나아간 노동에 대한 공격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다. 따라서 브레너는 계급투쟁을 자본주의 경쟁의 논리에서 끌어낸다.’ 요약하면, 노동계급 투쟁은 자본주의 위기에 관해서는 거의 중요성을 갖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자본은 경영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계급을 공격하지 않을 수 없다. 계급투쟁은 개별 자본이 경쟁의 압력에 따르려고 애쓰는 것을 통한 자본주의 계급투쟁’, 위로부터 투쟁처럼 이해된다. 브레너에 따르면, 자본주의 계급투쟁의 토대는 자본주의 재생산의 무계획적 본질이며, 이른바 경제 발전의 법칙들을 규정한 경쟁의 논리이다. 줄여 말하면 계급투쟁은 경쟁의 논리에서 나온 파생물처럼 보인다.

브레너의 기여는 1950년대와 1998년 사이 세계 경제 발전에 대한 꼼꼼한 역사적 보고를 제공한 것이다. 나는 그의 경험에 근거한 설명이 얼마나 정확한 지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위기의 원인으로서 자본주의 경쟁이라는 그의 개념이다. 부르주아 이론에서, 자본 사이의 경쟁은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 발전을 지배하는 경제 법칙으로서 승인된다. 이러한 이유에 대해, 존 윅스(John Week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르주아 이론에서 자본 사이의 경쟁은 그저 경제 법칙이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법칙들의 기원과 원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교환의 영역 안에서 경쟁 이론을 말하지 않고 논의될 수 있는 현상은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 생산 위기는 교환 관계에 뿌리를 둔 것이다. 보기를 들면 세계화에 대한 금융 압박이나 또는 학문적 설명들에서 자본주의 경쟁은 그것의 착한본성 또는 그것의 악한결과들이라는 특유의 표현으로 강조되어왔다. 자유주의 사상가들에게 경쟁은 시장경제의 수단이자 기능, 그리고 법칙이었다. 하지만 맑스는 경쟁이론을 가지지 못했다. 맑스에게는 축적 이론과 반대되는 공황론[위기이론]’도 또는 무언가의 이론도 없다. 맑스는 경쟁범주에 대한 개념화를 포함한 정치경제학 비판을 내놓았다. 이 개념화는 이 논문의 두 번째 부분에서 논의될 것이다.

브레너의 설명은 경쟁이 자본주의 세계를 지배한다는 견해를 강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쟁이 무엇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가? 자본주의 경쟁이 정말 모든 악의 근원인가? 이 초고는 첫 번째 부분에서 브레너가 내놓은 경쟁 이론을 평가한다. 하지만 목표는 그의 견해를 설명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쟁을 통해 무엇을 이해할 수 있는지를 묻는데 있다. 다음 부분에서는 맑스가 경쟁을 어떻게 개념화했는지를 논의할 것이다. 경쟁과 계급투쟁이라는 마지막 부분에서는 자본 사이의 경쟁이 자본과 노동 사이의 계급관계, 그리고 그러니까 계급투쟁을 전제조건으로 한다는 것을 논증함으로써 결론짓고자 한다.

 

 

1. 브레너의 논의: 자본주의의 경쟁과 위기

 

브레너는 자본주의를 경제 단위들사이의 교환 관계를 통해 특징짓고 있다. 이들 경제 단위는 자본주의가 지닌 생산력의 끊임없으며 체계적인 발전때문에 다른 생산양식들로부터 자본주의를 구별 짓고 있는 모든 것을 위한 시장에 의존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의 토대는 자본 사이의 경쟁이다. “그들의 조건을 유지하고 개선하기 위해 개별 단위들은 전문화의 증진, 잉여가치 축적, 최저비용 기술 채택, 그리고 재화와 서비스의 공급에 관해서는 수요 측 변화에 대응한 라인 간 이동에 의해이윤율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채택한다.” 게다가 전체로서 자본주의 경제는 충분한 이윤율을 생산하는데 실패한 그러한 경제 단위들을 제거하는 시장에서 경쟁에 의해서 자연도태의 장을 형성한다.” 자본주의 경제가 생산력을 증진시키는것은 바로 자본주의 경쟁에서 그리고 자본주의 경쟁을 통해서이며, 자본주의가 주기적 위기로 진입하는 것은 경쟁을 통해서이다(p. 10).

지난 사반세기(25)를 걸쳐, “이윤은 압박되었는데, 이는 노동자들에 의한 증대된 힘의 사용에서 초래된 비용 상승 압력의 증대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제조업 시장에서 과잉설비와 과잉생산이 초래한 강화된 국제 경쟁을 반영한 가격 하락 압력의 증대로 인한 것이었다.”(p. 95). 다른 말로 하자면, 수익성은 생산자들이 그들의 기정 수익률들을 유지하기 위해 비용 대비 가격의 충분한 인상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p. 96) 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자본주의의 과잉생산을 초래하며, 또한 이는 과잉생산이 생산적 투자율에 미친 영향 때문에 총 제조업 수익성을 줄어들게 한다.

브레너가 보기에 자본주의의 무계획적, 경쟁적 본성은 균형 잡힌, 보완적인 또는 상호간에 강화되는 경제의 성장 양식을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여긴다. 총수익성을 증가시키기 위한 가능성을 창조하는 기업들에 의한 동일한 비용절감은 총수익성을 하락시키기 위한 잠재적 위험성을 증가시키며, 이는 거시 경제의 어려움을 불러온다.”(p. 24) 노동생산성을 증가시키는 그러한 경제 단위들, “비용 절감자들(비용 절감 기업들)에 비하여 원가가 너무 높은 생산자들에 손해를 끼쳐 상품의 원가를 줄인다. 하지만 고비용 생산자들은 간단히 끝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그들은 가격을 인하하는 방법, 이를 테면 그들의 최초 투자에 견주어 줄어든 투자 수익을 가져오는 방법에 의해서나 또는 비용 절감 수단들, 즉 생산성을 증가시키며 그리하여 다른 이들에게 응전을 강요하는 방법을 취함으로써, 기업을 유지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시장점유율을 유지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 ‘개별 경제행위자들이 그들(개별 경제행위자들) 자신의 감소된 수익성에 반하여 취해야만 하는 수단들이 총계 수준에서 줄어든 수익성의 문제를 재생산하는데 이바지한다.”(p. 33).

브레너는 계급투쟁에 초점을 맞춘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접근법들에 강하게 반대한다. 그는 이러한 것들을 이윤압박(1960년대 완전고용이 수익성에 피해를 주며 노동자의 임금을 상승시키는 것을 허락했으며, 이는 경제위기를 초래했다)과 동일시한다. 브레너는 계급투쟁에 초점을 맞춘 자본주의 위기 접근법을 거부하려고 맑스를 인용한다. 이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없다. …… 이윤율의 저하를 임금율의 상승을 통해 설명하는 것보다. 비록 이것이 예외로서 가능하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공격적 임금교섭이나 또는 생산 현장에서 투쟁 행위에 의한 노동계급의 투쟁성을 강조하는 접근법들에 대한 브레너의 기각은, 오직 이윤율 저하의 경향적 법칙만을 가능한 대안으로 남기는 듯하다. 하지만 이 법칙(이윤율 저하의 경향적 법칙)도 기각된 상태다.

맑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윤율은 떨어진다. 그런데 그것은 노동이 덜 생산적이 되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더욱 생산적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잉여가치율과 이윤율의 하락 양자 모두는 증가하는 노동생산성이 자본주의 하에서 표현되는 것을 통한 특정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생산성을 늘리는 데 힘을 쏟는 자본은 같은 양의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더 적은 노동자를 쓸 수 있게 하는 노동절약적 기계를 들여온다. 이는 불변 자본에 비해 가변자본의 감소를 기초로 한 노동의 생산능력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착취 가능한 원천’, 즉 노동이 불변자본에 비해 줄어들기 때문에 이윤율 하락을 초래한다. 브레너는 이윤율 저하 경향의 반경향과 관련하여 이러한 설명을 간단히 처리해버린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윤율 저하의 경향적 법칙은 자본가들은 그들 자신의 이윤율을 저하시키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며, 그리고 다시 마침내 총 생산성 감소로 귀결된다.”(p. 12, 각주 1)는 역설적 가정을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이윤율 저하의 경향적 법칙의 이론적 가치가 무엇이든 간에, 브레너의 재빠른 기각은 엄밀한 분석이라기보다는 직관적 통찰력에 따른 것처럼 보인다.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새로운 생산방법들의 일반화는 이윤율을 저하시킬 수 없다. 새로운 생산방법들은 노동생산성을 증가시키며 이러한 증가(노동생산성 증가)의 성과는 경쟁하는 자본가들 사이에서 재분배된다.

브레너에 따르면, 수익성 하락이라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생기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가 지닌 경쟁의 본성이다. 이윤 저하는 과잉설비와 과잉생산때문이다.(p. 33) 이는 생산자들이 그들의 상품을 충분한 이윤율로 팔 수 없는 것과 같이 시장이 제한되었다는 데서 비롯된다. 한 라인(생산 라인)에서 과잉생산은 신규투자율과 효율적 수요 모두를 감소시키기 때문에, “이윤율에서 한층 더 하락 압력을 낳음으로써 다른 곳에서 스스로를(과잉생산을) 일반화 한다. 투자 증대에서 감소는 노동생산성 증대를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다.”(p. 33). 따라서 생산성 증가율의 감소는 수익성의 장기적 문제들의 결과이다.(p. 35) 자본주의 경쟁은 총 수익성이 고정비용의 축소경향에 부닥쳐 감소된 가격에 의해 압박받게 된 결과로써 현재 투자들과 그것(현재 투자)을 현실화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을 고려하지 않고서생산자들에게 노동생산성을 증가시키도록 강요한다(p. 24). 간단히 말해, 브레너는 생산성의 위기가 노동착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한다. 수익성 저하의 일반화는 생산자들이 포화된 시장에 맞닥트림으로써 투자율 감소에 의해 초래된다.

브레너가 제시한 경쟁이론의 사회적 토대는 무엇인가? ‘경제 단위가 무엇을 위해 경쟁하는가? 브레너에 따르면, 개별 자본들은 기능하는 경제 단위들로서 그들의 존재를 유지하도록 각각의 비용 가격을 실현하기 위해 경쟁한다. 자본과 자본 사이의 경쟁 관계에 의한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이러한 개념화는 속류 경제학 사상이 지닌 도그마를 되풀이한다. 맑스는 고전 정치경제학과 속류경제학 사상 사이의 경계선이 잉여가치의 발생이라는 문제가 제기되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에 의해 구분된다고 보았다.경쟁이라는 관점에서 이는 문제[문제꺼리]가 아닌데, 왜냐하면 자본이 동일성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의 사회적 구성은 결정될 수 없다. ‘무엇이 자본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전제로 하고 있다. 즉 자본은 자본이며 역도 그러하다!

그러나 브레너의 주장은 다른 견해에서 (속류) 경제 사상의 견해로 발전한 것이다. 그 자신의 견해에서 그는 맑스주의 전통 내부에서부터 논쟁하였고 사회 맬서스주의적 설명을 채택함으로써 작업현장에서 전투적 임금 협상이나 노동계급의 저항에 초점을 맞추는 좌파에 그러한 논쟁의 책임을 지운다. 자본주의 법칙으로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또한 사회 맬서스주의자들처럼 내쫓긴다.’(p. 11). 브레너는 물론 맬서스와 그리고 훨씬 더 중요하게는 데이비드 리카르도가 스태그네이션의 어쩔 수 없는 경향이나 위기를 농업에서 노동생산성을 떨어트리는 엄연한 경향으로 여겼다고 주장하는 것이 올바르다.(pp. 10 - 11). 맬서스는 위기가 인간이 지녔다고 추정되는 제한 없는 재생산을 향한 욕구와 식료품의 제한된 증가 사이에 있는 자연적모순의 결과였다고 보았다. 그는 위기를 노동 대중에 의해 생산되었던 어떤 것으로 생각했다. 블로흐(Bloch)가 맬서스에 대해 냉소적으로 비평했듯이, 프롤레타리아트는 성적 행위에서 야만적이기 때문에 죄를 지었다. 즉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나치게 색을 밝힌다는 것이다. 인구가 늘어나자, 점점 더 쓸모없는 토지도 경작해야만 한다. 이는 이윤 압박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지대 상승으로 식료품 가격이 더욱 비싸지는 것처럼 생존 임금이 증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맬서스는 위기가 생산과 소비(잉여가치를 흡수하고 과잉생산을 피하는 책임을 진 토지소유계급에 의한 소비) 사이의 관계를 무너지게 하는 과소소비에 의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물론 브레너는 정치적 좌파들에게 이러한 종류의 맬서스주의의 책임을 떠넘기지는 않았다. 그는 노동생산성(labour productivity) 감소를 자본주의 위기의 원천으로 여기는 접근법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럼에도 경제 위기에 대한 브레너의 설명에는 모호함이 있다. 그의 경쟁이론은 경쟁이 과잉생산과 과잉설비를 일으키기 때문에 위기-내재적인 것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늘어난 빈곤에 맞서, 몇몇 자료에 따르면, 실업자가 직장을 찾기 위해 타야만 하는 자전거와 같은 사치품은 말할 것도 없이, ‘생활필수품에 대한 수요가 없었다는 것은 정말 사실일까?

또는 과잉생산이 교환을 통해, 자본의 누진적 축적을 조성하는 수준에서 상품을 화폐자본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잉여가치를 실현하는 자본의 제한된 기회들에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사실일까? 브레너는 이것이 진실로 그러하다고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만일 이것이 그의 주장이라면, 그의 경쟁이론은 노동가치이론에 대한 분석으로 더 심화되어야만 한다. 브레너는 시장관계들, 즉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의 관계의 본질을 개념화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것들(시장관계들)을 당연히 여겼을 뿐이다. 왜 자본주의 사회가 노동력을 포함하여 상품의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의 교환 관계[에 기초한] 사회인가? 브레너가 주장한 것과 같이, 자본주의의 무계획적이고 경쟁적 본성때문에 소비자와 생산자, 그리고 노동시장이 존재하는 것인가? 또는 노동시장의 존재가, 노동이 그것의 조건(노동조건)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인류의 생산적인 습관이 노동하는 상품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사실과 관련 있는 것일까? 자본주의 경쟁의 유형, 그리고 그것과 함께 자본주의의 무계획적 본성, 다음 부분에서 논증할 바와 같이, 임노동 상품에 의한 노동의 조직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경쟁이론의 심화는 자본주의 위기의 개념화를 위한 핵심적인 이론적 초점으로서 경쟁의 포기를 필요로 한다. 그 대신에, 초점은 자본주의 사회 관계의 모순적인 본질, 즉 자본과 노동 간 계급 대립으로 변경해야만 한다. 맑스에 따르면, 계급 관계들은 개별 경제 집단들에 의해 축적된 수입의 원천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계급 관계는 소유 관계, 이를테면 한편으로는 자본에 맡겨진 생산수단의 집중,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노동자의 존재에 의해 구성된다. 자본은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노동자를 자본가의 소득과 자신의 임금모두를 생산하게 하는 노동착취이다. 자본과 자본 사이의 경쟁은 그리하여 착취 관계들에 기초를 둔다. 이러한 관계들은 경쟁의 논리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 자본의 자본에 대한 관계는 잉여가치 생산의 토대로서 노동착취를 전제조건으로 한다. 사회적 노동으로부터 퍼 올려 진 잉여가치가 없을 때 자본은 무엇을 위해 경쟁하게 될까?

브레너가 거부한 이윤압박론은 맬서스에 의해 영향 받았다기보다는, 브레너가 제시한 것과 같이, 오히려 리카도의 노동가치이론을 수정한 것이다. 리카도에 따르면, 상품의 가치는 그것(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 가치의 실체는 상품에 체화된 노동이다. 리카도에게 있어서는, “경쟁은 이윤율을 저하시킬 수 없으며”, 그 대신에 그는 이윤율이 임금 상승의 결과로서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는 임금이 인구증가와 함께 토지 비옥도의 감소때문에 증가한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이윤율의 저하는 농업생산성 감소로 초래된 노동력 가치 증가에 의해 설명된다.” 따라서 브레너는 그가 맬서스를 거부한 것과 같은 이유로 리카도를 거부한다. 양쪽 모두는 농업에서 노동생산성(labour productivity)의 저하를 경제 위기의 원인이라고 여긴다. 브레너는 생산성(productivity) 저하또는 이윤에 대한 임금 압박이라는 견해에 기초한 접근법들은 그저 근본적으로 전자본주의 농업 사회에 적합한 위기 이론을 뒷받침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브레너의 자신의 설명은 리카도주의자의 통찰력에 어느 정도 의존한다. 보기를 들면, 그는 개별 자본들이 그것들(개별 자본들)’ 각각의 비용 가격을 실현하기 위해 경쟁하며, 그것들은(개별 자본들은) ‘그들(개별 자본들)’ 각각의 시장 가격을 낮춤으로써 시장을 유지하고자 노력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그저 각각의개별 자본은 그것(각각의 개별 자본의)’ 고유한 이윤과 그것(각각의 개별 자본)고유한 상품 가격을 생산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브레너가 살펴보고 있는 바와 같이, 모든 이러한 개별 이윤율과 상품가격은 시장에 따른 것이고 각각의 자본은 가격에 대한 경쟁 압력에 부닥쳐서 그것각자의 비용 가격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몇몇 생산자들은 다른 생산자들이 그들(생산자들)생산성을 증가시킴으로써 그들(생산자들)비용을 줄이는 것을 감당하기 때문에 낮은 가격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며, 그리고 이 때문에 고비용 생산자들의 희생과 그들(생산자들)을 적응하도록 강요하면서 시장에서 더 큰 점유율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경쟁은 각각의 개별 자본들이 그것(각각의 개별 자본들)시장 가격을 충분히 얻어낼 수 있게 하는 시장의 몫을 결정한다. 이러한 설명의 리카도학파적인 요소는 각각의 생산자가 시장에 그의고유한 가격을 제시한다는 것인데, 마치 가격이 평균 시장 가격을 결정하는 경쟁을 통해 개별 상품들에 체화된 것인 양 말이다.

게다가 브레너는 고비용 가격의 생산자들은 간단히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생산자들의) 유동 자본에서 평균수익률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p. 26). 물론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구별은 매우 중요하며, 그것을 개발했던 사람은 바로 리카도이다. 고정 자본, 이를 테면 생산과정에서 벽돌, 모르타르 그리고 기계류는 노동과정에서 가치를 전달함에 있어 유동자본에 비해 훨씬 오래 걸린다. 유동자본의 가치, 즉 노동력과 원료는 노동과정 동안 즉시 상품으로 전달된다.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유형들은 가치들의 유동에서 다른 속도들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생산의 단일 섹터 내에서, 자본가 A에 의해 도입된 새로운 착취 기술들은 자본가 B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정자본에서 B의 투자는 가치가 떨어지며, 도덕적 감가가 이루어지며, 그는 투자한 만큼 수익을 얻지 못할 것이다. B생산 방법들은 더욱 생산적인 생산자가 상품을 생산하는데 요구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줄이기 때문에 가치가 떨어진다. ‘구식으로 생산하는 자본가는, 이제 가치가 떨어지고’, 고정자본은 투자를 완전하게 실현시킴에 있어 어려움에 직면한다. 하지만, 브레너에게는 실례지만, 잉여가치와 그것과 함께 이윤을 생산하는 것은 고정자본도 유동자본도 아니다. 맑스에게 있어서는, 가치를 생산하고 또한 노동과정에서 노동생산물에 생산수단의 가치를 전달하는 것은 바로 노동이다. 따라서 근본적인 유형들은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이다. 브레너는 고정자본과 유동자본 간의 관계를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관계와 동일시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고정자본이 더 높은 비용 가격을 생산하는자본가들은 유동자본에서 평균수익률을 얻음으로써 시장 점유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p. 26),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자본은 원료를 착취하지 않는다; 그것(자본)은 노동을 착취한다. 원료는 이윤을 생산하지 않는다; 잉여가치와 그러므로 이윤을 생산하는 것은 바로 노동착취이다.

요약하면, 브레너의 경쟁이론은 상품들의 시장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경쟁이며, 과잉설비와 과잉생산을 낳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경쟁적 본성이라고 주장한다. 생산성 증가율은 수익성 저하 때문에 저하하며, 수익성은 과잉생산 때문에 저하한다. 과잉생산은 투자율을 저하시키며, 이는 생산성 증가율에서 저하를 초래한다. 정치경제학적 전통에서, 이러한 견해는 이윤율 저하를 희소한 투자 출구를 위한 자본 간 증가하는 경쟁의 결과로서 설명했던아담 스미스에 의해 채택되었다[지지되었다]. 브레너가 주장한 것과 같이, ‘자본주의 사회의 소유 관계들 하에서, () 체제 규모에서 경쟁력 압력과 결합된 수익성 극대화의 개별적 표준[기준]의 일반화는 생산력과 총 생산성의 증가를 초래하는 경향이 있다(p. 24). 이상-상징적 세계에서, 이러한 과정의 결과는 이윤율과 이윤량 모두의 증가일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얼마간의 총괄적인[원대한, 명확한] 계획에 따르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그것(자본주의)의 경제적 본성에 의해 정의된다. 따라서 문제들은 발생한다[일어난다]. 문제는 수익성과 생산성에서 증가는 실현 문제와 관련된다는 것이다. 이상-상징적 세계에서, ‘기업들이 그들의 경쟁자들이 하는 바와 완벽하게 적응하는 것을 예측할 수 있는 곳에서는, 비용을 절감하는 기술적 변화는 아무런 문제도 내놓지 않는다’. 이상-상징적 세계에서는, 고비용 기업들은 퇴출할것이며, 그들의 이전 시장 점유율들은 더욱 동적이고, 비용 절감적인 생산자들에게 남겨질 것이다.

따라서 이상-상징적으로는, 과잉생산 위기는 슘페터가 살펴보았던 것처럼, 자본의 창조적 파괴를 통하여 해결되며, ‘자본주의를 훨씬 더 생산적으로 만드는것은 바로 이러한 창조적 파괴이다(p. 26). 아아[슬프도다], 슘페터는 그의 창조적 파괴의 잠재적으로 파괴적 측면을 과소평가했다.’ 브레너가 보는[살펴보는] 바와 같이,

 

 

그들 라인에서 비용절감자에 의한 더 낮은 비용과 더 낮은 가격의 상품들의 도입 결과로서 저하된 수익성을 유지했던 기업들은 다소간 즉각적으로 퇴출함으로써 대응한다고 가정될 수 없다; 이는 그들에게 있어 새로운, 더 낮은 가격이 그들을 최소한 그들의 유동자본에 있어 평균수익률을 내도록 허용하는 한 생산라인을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 그것은, 그들의 고정자본을 운동 상태로 두는데 요구되는 노동력, 원료, 그리고 반제품에서의 추가적 투자이다.”(p. 26)

 

 

따라서 고비용 생산자들은 노동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이윤에 있어 부분적 압박을 수익성 저하에 적응하기 위해 노동을 강요하는[강제하는] 자본의 무능[무력] 탓으로 돌리는 것은 노동으로부터 그러한 저하를 직접적으로 노동으로부터의 압력의 증가 탓으로 돌리는 것과 동일하지 않다’(p. 75). 수익성(profitability)단지 생산자들이 그들의 기정 수익률들(established rates of return)을 유지하기 위해 충분하게 비용 대비 가격을 올리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저하했다(p. 96). 요약하면, ‘이윤은 압박되었는데, 그것은 노동자들에 의한 증가된 힘 행사로부터 기인한 비용에서의 상승 압력의 증가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제조업 시장에서 과잉설비와 과잉생산이 초래한 강화된 국제 경쟁을 반영한 가격에서의 하락 압력의 증가로 인해서이다(p. 95).

따라서 경쟁은 단지 자본주의가 고도로 생산적인 체제로 만드는 긍정적인[좋은]’ 힘일 뿐만이 아니다. 그것(경쟁)은 또한 해로운, 파괴적인 힘이기도 하다. 브레너가 강조한 바와 같이, 이상-상징적 자본주의는 매우 생산적인 체제이다 - ‘자본주의 경제가 위기-내재적이며 파괴적인 것은 바로 단지 그것(자본주의 경제)의 무계획적이고 경쟁적 본성 때문일 뿐이다. 따라서 브레너는 이윤율의 저하는 투자에 있어 제한된 기회에 관련한 자본의 과잉생산으로의 장기적 경향의 결과이며, 그러한 자본가들 사이의 너무도 증가된 경쟁은 가격을 저하시키고, 그러므로 이윤율을 저하시킨다는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주장을 승인한다. 브레너는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할 때 유사한 논지를 보인다.

 

 

충분한 공황론[위기이론]은 단지 왜 개인들과 집단들이 그들의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행동한 것들이 수익성(profitability)이 잠식되고, 그 때문에 투자할 능력과 유인을 감소시키는 생산과 분배의 총계적인[집합적인] 유형[양식]을 초래하는지 설명해야만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공황론[위기이론])은 왜 동일한 유형[양식]이 생산자들이 적응을 야기하는데 실패한 치료 조치를 취하도록 초래하는지, 그리고 마침내 최초 상황의 어려움들을 한층 악화시키게 되는지를 또한 설명해야만 한다.”(p. 23)

 

 

치료 조치는 꽤 합리적으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혁신적인 저비용생산자에 의해 비용을 덜 효율적으로만들어온 거대한 양의 고정자본에 맞서[직면하여] 고비용 생산자들은 그들의 유동자본에서 평균이윤율들을 얻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브레너에게서 자본주의 소유 관계의 구성은 어디서 발견될 수 있는가? 자본주의는 단지 개별 자본들의 자기이익과, 그들 각각의 다수 자본에 직면한 자기이익의 한계에 의해 기초를 두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그의 대답은 명백하게 스미스주의적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경쟁이 생산력을 격증시킴으로써 자본주의 체제에 동력을 제공한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이미 그를 인용했다. 브레너에게는, 경쟁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인사고방식은 그것의 다른 측면을 결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위기들의 기원과 원인은 또한 자본의 경쟁적 속성으로 파악된다. 자본주의 재생산은 자본을 통해서 조직되고 자본에 의해 지배되며, 경쟁의 결과는 긍정적이거나(생산성 증가) 부정적이다(위기). 자본주의는 무계획적이기 때문에, 자본 간 상호작용은 번영 또는 잠재적으로 비참한 경제 침체를 낳는다. 경쟁법칙의 양 측면을 이해하기 위해서, 브레너는 따라서 우리는 아담 스미스의 긍정적인 보이지 않는 손과 함께 가는 부정적인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이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p. 23). 따라서 브레너로서는, 자본주의 경쟁의 사회적 구성은 비판적 판단과 인류의 변화하는 힘 너머에 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영역들에 속하며, 그것은 손,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지배된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적극적인 손의 궤도에 대해 연구하는 것뿐이다.

 

 

2. 맑스의 경쟁 개념

 

브레너의 경쟁이론은 개별 자본의 생산 결정들에 입각한다. 각각의 개별 자본은 그것의 고유한 비용 가격을 가지며 자본 저량에서 평균이윤율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p. 6). 하지만 투자자들은 시장을 예측하거나 지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들은 대개 기대이윤율을 추정하기 위해 그리고 그러한 원칙에서, 그들의 펀드를 어떻게 할당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실현된 이윤율에 의존해야만 한다. 비용 가격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브레너의 설명에서, 비용 가격은 - 이는 고정 자본의 연장된 유동 시간 그리고 추가적으로 이전 생산 순환을 기초로 하여 계산된 평균이윤율로 구성된 계산과 함께 그저 특정한 생산 순환 동안 경제 단위에 의해 만들어진 총투자합계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상품의 판매 가격은 부기에 의해 도달된다. 판매가격이 경제 단위의 재생산적 요건에 충분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생산이 수행된 후 경쟁에 의한 시장 가격의 결정에 의존한다.

물론 경쟁의 유리한 지위로부터, 개별 자본가는 언제나 세계 시장에서 그의 고유한 비용 가격을 자국에서의 시장 가격과 세계 전체적인 시장 가격과 비교하고 또한 끊임없이 비교해야만 한다.” 따라서 브레너가 경쟁적인 압력이 개별 자본가들을 그들 각각의 노동력에 맞서도록 강요한다고 지적한 것은 옳다. 하지만 모든 자본가와 그의 고유의 노동자들과의 관계는 자본과 노동 간 관계, 본질적인 관계다.” 자본은 끊임없이 누진적 축적을 통해서 현 자본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생산적인 노동력을 증가시키려고 필요노동시간, 즉 잉여노동시간의 구성적인 측면을 줄여야만 한다. “열광적으로 힘을 쏟는 가치 스스로의 팽창은, [인격화된 자본가]는 잔인하게 인류를 생산하기 위하여 생산하도록 강요하며,” “착취당하는 인간 대중을 증가시킨다. 경쟁의 자본 관계들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자본과 노동 간 관계, 즉 계급 관계다. 다른 말로 하면, 자본 간 경쟁 관계는 그것의 수단으로부터 노동의 분리를 기초로 두고 있다. “생산수단은 그저 그것(생산수단)이 노동으로부터 분리되고 노동을 독립적인 힘으로서 직면함에 한에서 자본으로 된다.” 이러한 주장은 브레너에게는 실례지만, 자본 간 관계는 계급관계, 다시 말해 계급투쟁으로부터의 분리로서 개념화될 수 없다. 경쟁은 계급관계를 전제조건으로 하며 경쟁은 그것들(계급관계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며, 이는 그것들(계급관계들)의 존재를 부정한다. 자본은 자본과 노동 간 사회적 관계라기보다는 단지 사물처럼 보인다. 맑스에게 있어서는 사물로서 자본의 외관은 경쟁 개념에 의해 획득된다. 자본의 명백한 사물임과 경쟁의 개념은 상품이 표현하는 동일한 물신숭배 세계의 다른 표현들처럼 합쳐서 전체를 이룬다.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에 따르면, 자본의 존재(Dasein)는 자본과 다른 자본 간의 관계의 존재이며, 그것(자본)스스로를 쫓아내며, 다수 자본이 상호간에 서로 상당히 관계없는무엇이다. 이러한 점에서 경쟁은 자본의 내적 본성이라기보다는 그것(경쟁)의 본질적 특성이 다수 자본의 서로 간 상반되는 상호작용으로 나타나고 실현되는 것이며, 내적 경향이라기보다는 외부적 필요와 같다. 따라서 자본주의 재생산의 사회적 과정은 개별 자본 간 경쟁적 상호작용에 기초를 둔 사회적 통합체처럼 보인다. 이는 마치 시장에서 자본들이 서로 쫓아내고 끌어들이는 자본주의 경쟁의 산물인 듯이 보인다. 하지만 자본들은 그들각각의 비용 가격을 실현하는 데서는 경쟁에서 서로 쫓아내거나 교환에서 서로 끌어들이는 경쟁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사회적 노동에 의해 생산된 이윤의 형태에서 잉여가치를 실현하려고 서로 경쟁한다. 물론 노동은 그것의 조건(노동조건)에서부터 분리되며, 이러한 분리는 자본의 개념을 형성한다.” 경쟁은 자본의 내적 본성으로서 이러한 분리를 가정한다. 따라서 경쟁은 개별 자본을 위한 외적 필요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의 역사적 본성에 따르는 필요조건이다. 경쟁은 경제 법칙의 기원과 원인을 증명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경쟁은 또한 그저 노동착취에 외부적으로 존재하는 무언가도 아니다. 경쟁은 오히려 자본과 노동 간 본질적인 관계를 통하여 형태가 드러나는 것, 즉 자본과 노동 간 계급 관계 속에 있는 형태가 자본들 스스로 간의 관계, 즉 자본 사이의 관계로서 스스로를 증명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경쟁은 자본주의 노동 착취의 이해를 숨긴다. 즉 그것(경쟁)가치의 결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생산의 운동을 지배하는것은 가치의 결정과 가치들, 이를테면 생산가격에 내재하는 가치들이다. 상품의 가치는 그것(상품)의 생산에 요구되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다른 말로 하면, 개별 자본들은 총 자본에 의해 생산과정에서 노동으로부터 추출된 총 사회적 가치에서 분배를 놓고 경쟁한다. 경쟁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의 결정을 보여주지 않으며, 또한 경쟁은 이윤이 잉여가치, 즉 노동이 총 자본의 지배하에 생산하도록 강요되는 것에 의해 구성되어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따라서 경쟁이론에서, 이윤은 단지 자본 투자에서 수익으로서 나타난다. 이윤은 자본의 수익처럼 보이며, 동일한 방법으로 임금은 단지 노동자의 수익처럼 보인다. 요약하면, “모든 것은 경쟁에서 거꾸로 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브레너의 경쟁이론은 세계경제발전을 구체화된 세계의 렌즈를 통해서 설명한다. “하지만 만일 겉모습과 사물의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불필요할 것이다.” 브레너에게서, 본질과 겉모습은 똑같다. 즉 경쟁은 자본주의의 본질이자 겉모습이다. 하지만 과학을 구성하는 것은 본질과 겉모습 사이의 차이이다. 경쟁의 유형, 즉 경쟁의 현상 형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신비화의 토대이다. 이러한 신비화는 상품들의 가치노동이 아닌 다른 토대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보기를 들면, 브레너는 자본과 이윤, 임노동과 노동을 동일시한다. 이것은 가변자본이 노동에 의해 생산된 가치와 동일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가변자본에 의해 대표되는 가치의 구성요소에 더하여 존재하는 상품의 그러한 가치 구성요소들은 고정자본 또는 원료와 같은 다른 것들에 의해 발생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그의 강조점은 유동자본에서 평균이윤율을 얻기 위한 자본주의적 노력이다. 따라서 또한 그의 강조점[역점]은 경쟁이 시장가격을 결정한다는 것이며, 상품에 내재하는 가격에 의한 생산비용가격이라는 그의 개념화이다. 다른 말로 하면, 브레너는 착취 관계들을 개념화하는데 실패했다. 대신에 그는 자본주의 사회 관계의 일반적 법칙들의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증명으로서 경쟁에 초점을 맞춘다.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상품의 가격들은 그들의가치들과 달라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생산의 서로 다른 영역들에서 잉여가치의 균등화는 이러한 총 잉여가치의 절대적 크기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단지 생산의 서로 다른 영역들 사이의 분배를 변경시킬[바꿀]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잉여가치의 결정 그 자체는 오직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결정으로부터 발생한다. 이것 없이는, 이윤율은 무[nothing]의 평균, 즉 순수한 공상이다. 그리고 따라서 그것(이윤율)1,000퍼센트 또는 10퍼센트로 동등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경쟁은 그저 실현된 이윤, 즉 사회적 필요에 의한 가치로서 이미 결정된 것의 견지에서 개별자본가들에게 분배할 뿐이다. 따라서 상품의 개별 시장가격은 개별 상품이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치와 상당히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총 이윤은 보기를 들면, 1년 동안에, 모든 이러한 자본들이 생산한 총 잉여가치와 같을 것이다. 누군가가 가치의 정의를 기초로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평균 이윤, 그리고 따라서 또한 비용가격들도 순수하게 상상적인 것이 되며 지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요약하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결정 없이, 상품의 가격은 토대가 없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저 기호로 될 것이다.

서로 다른 개별 자본들 사이에 실현된 시장가격들에 의한 총 사회적 가치의 분배는 경쟁을 통해서 달성된다. 다른 말로 하면, 시장가격들을 결정하는 것은 경쟁이 아니다. 경쟁은

 

 

시장가치 또는 시장가격은 개개 생산영역 안에서 이윤의 균등화를 통해 야기하지 않는다. …… 반대로, 여기서 경쟁은 서로 다른 개별 가치들을 동일한, 균등한, 차별받지 않는 시장가치로 균등화한다. 즉 개별 이윤 간 차이, 개별 자본가들의 이윤, 그리고 그 영역에서 평균이윤율로부터 그것들(개별 자본가들의 이윤율)과의 편차들을 인정함으로써.”

 

 

덧붙여, 경쟁은 생산의 서로 다른 영역들에서 이윤을 균등하게 할 수 있다. …… 하지만 그것(경쟁)은 일반이윤율을 저하시킬 수는 없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통한 가치의 결정은 명백하다. ‘그들의노동력을 다른 이들보다 덜 효율적으로 착취하는 그러한 자본가들은 평균율보다 더 낮은 이윤율을 얻을 것이다. 따라서 경쟁은 시장가격을 결정하지 않고, 단지 세계적 규모에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의 제한 내에서 노동을 착취하는 그들의 효율성에 따라서 개별 자본가들에게 가치를 분배할 뿐이다. ‘개별적가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의 양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적가치만 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맑스의 가치이론은 부르주아 이론이 보이지 않는 손과 그것(보이지 않는 손)의 합리적 교활함으로 승인하는 것을 비-물신화시킨다. 자본주의 축적의 위기-내재적 특성을 구성하고 지시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노동착취인 것이다. ‘경쟁의 유형은 가치의 사회적 구성을 전제한다. 이러한 구성은 자본 간 자기-관계가 자본과 노동 간 계급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따라서 경쟁이론은 자본과 노동 간 계급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가정하며, 그것을(자본과 노동 간 계급관계를) 경쟁 스스로에 의해 결정되는 시장가격들의 실현을 위해 자본 스스로와 경쟁하는 객관적인 사물로서의 자본에 대한 초점으로 대체한다. 가치의 생산자로서 노동에 대한 이해는 자본주의 경쟁이 자본주의 재생산과 그것(자본주의 재생산)의 위기의 토대가 아님을 폭로한다. 경쟁은 오직 착취를 넘어선 계급투쟁을 조정하며; 또는, 더 나아가 경쟁은 각각의 개별 자본에게 그것의 존재 구성을 강요한다. 그것은 바로 노동착취이다. 다음 부분에서는 경쟁은 계급투쟁의 개념화를 전제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논의를 마무리 짓고자 한다.

 

 

3. 결론: 경쟁과 계급투쟁

브레너는 1960년대 후반 노동의 협상력을 위기의 원인으로 여기는 접근법을 정확히 비판한다. 하지만 그는 그가 위기의 공급 측접근이라고 말한 것을 똑같은 관점을 기초로 하여 거부했다. 즉 그의 접근은 자본주의의 경쟁이라는 견해에서 수요 공급도그마의 재공식화를 제공할 뿐이다. 자본 사이의 경쟁 관계에 기초를 둔 자본주의 재생산과 자본주의 재생산의 위기에 대한 이해는 국내 시장에서하락한 임금이 세계 시장에서 효율적인수요를 위한 자본주의 경쟁을 강화하고 과잉생산때문에 수익성(profitability)을 억제하는 수출주도 성장을 필요로 한다는 견해를 낳는다. 이것이 브레너의 시나리오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현상학적설명을 거부하지만 자본주의 위기를 자본주의 경쟁의 개념이 제출하는 똑같이 현상학적설명으로 대체한다. 양쪽 모두는 계급관계를 보이지 않게끔 하며, 진실로 그 관계의 직접적인 반대를 보여준다.

가치의 생산자로서 노동에 대한 이해는 이윤’, ‘임금’, ‘이자’, 그리고 지대라는 유형들 사이의 소득의 배분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사실상 자본주의의 노동 착취는 자본이 노동에 대해 지불하지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즉 노동과정에서, 노동은 가변자본의 가치를 노동 상품으로 보낸다. 노동은 그저 잉여가치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노동)의 고유한 임금을 재생산한다. 요약하면, 위기가 임금 압박에 의해 초래되었다고 하는 공급 측 주장은 “‘노동의 가격이라는 표현이 yellow logarithm만큼이나 불합리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는다. ‘노동의 가격또는 노동의 가치라는 표현에 대해서,

 

 

가치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제거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전도되었다. 그것(노동의 가치 또는 노동의 가격)은 지구의 가치라는 것만큼이나 공상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상적인 표현들은 생산관계(the relations of production) 그 자체로부터 발생한다. 그것들은 본질적인 관계들의 현상 형태들에 대한 유형들이다.”

 

 

누군가가 사회적 소득의 서로 다른 형태 사이에서 가치의 분배라는 시각으로부터 자본주의 재생산과 그것(자본주의 재생산)의 위기를 분석하고자 한다면, 가치의 원천으로서 노동에 대한 이해는 진실로 제거될 것이다. 동일한 평가가 경쟁의 현상 형태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노동의 가격경쟁모두는 노동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사실을 속인다. 착취 가능한 원천으로서 인류의 생산능력(human productive power)의 자본주의적 구성은 노동과 노동조건 사이의 관계를 가정한다. 노동조건들은 자본의 조건과 같다. 맑스는 거듭해서 만일 노동이 임금노동과 일치한다면, 노동조건이 노동과 직면하는 특정한 사회적 형태는 그것들의 물질적 존재와 일치하게 될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노동과 관련된 이러한 노동조건의 형식적 독립성, 임금노동에 대해서 이러한 독립성의 독특한 형식은 소유를 사물들로서 그것들과 분리할 수 없다.” 요약하면, “자본은 만일 자본이 노동과 직면하지 않는다면 자본과 직면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자본은 오직 비-노동으로서만이 자본이기 때문이며자본은 노동에 대한 지배안에서, 그리고 그것을(노동에 대한 지배를) 통해서만이 그러한 비-노동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윤에서 임금 압박을 가하는 임노동에 의한 또는 수익성에서 저비용 압박을 강화하는 자본주의 경쟁에 의한 위기 이해는 자본주의 사회 재생산의 구성을 폭로하기보다는 신비화시킨다. 진실로, 양쪽 시각 모두는 동일한 호두의 두 개의 반쪽만큼이나 상호 보완적이다. 양쪽 모두는 서로 의존하는 물신 형태들을 보고한다.

요약하면, 브레너는 경쟁의 현상학적 형태를 자본주의 발전의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법칙으로 나타내는 어떤 것으로 여긴다. 그의 경쟁이론은 자본의 객관적’, 구체화된 특성을 결정될 수 없는 무언가를 넘어서는 스스로와 경쟁하는 물자체와 같이 강화한다. 브레너는 가치의 발생에 달라붙지 않으며 단지 가치를 자본이 그들각자의 비용 가격들의 실현을 위해 자본과 경쟁할 때 아무튼 존재하는어떤 것처럼 가정할 뿐이다. 요약하면, 그의 설명은 사실상 가치이론이 자본주의 경쟁이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가치의 실체로서 노동은 이론적으로 추방되었으며 계급투쟁은 사용자들이 그들의 유동자본에서 수익성을 유지하기 위해 직면하거나 또는 저비용 지역들로 생산을 이동시킴으로써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한 국가의 또는 한 기업의 노동계급에 의해서만 얻어질 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불공정은 자본주의 경쟁에서부터 도출되며, 자본주의 사적 소유, 즉 자본이 단지 누진적 노동착취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누진적 노동착취를) 통해서만 유지할 수 있는 소유 관계들의 구성으로부터는 도출되지 않는다.

위기가 스스로 평균이윤율의 실현을 위한 제한된 시장들에서 격렬한경쟁에서 스스로를 증명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수요 공급 사이의 관계들, 구매와 판매 사이의 관계들에서 붕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부르주아적 사고는 위기를 경쟁에 관련하여 접근한다. 경쟁은 그것(경쟁)이 그래야만 하는 것만큼 자유롭지 않거나 또는 너무도 족쇄가 풀렸으며, 따라서 예를 들면 보호무역론자가 측정하는 것을 통한 제한들이 필요하다. 물론 브레너는 자본주의 경쟁이 임노동에 강요하는 사회적 불공평을 보고 있고 강조한다. 하지만 불공평은 그저 무계획적인, 경쟁적인, 자본의 본성의 결과일 뿐이다. 그는 만약 자본주의가 계획될수 있기만 하면, 사회적 불공평들은 더 나은 것으로 수정될지 모른다고 주장하는 듯이 보인다. 자본주의는 그저 무계획적이기 때문에 불공평을 발생시키는 것일까? ‘불공평은 긍정적인 가능성에 찬성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부정적 측면들을 억제하면서 경쟁 관계들에 대한 적절하고 공평한 규제에 의해 극복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과잉생산을 초래하고 따라서 공급과 수요 사이의 관계들에서 붕괴, 즉 과잉경쟁, 수익성(profitability) 저하, 실업 그리고 증대된 불공평을 초래하는 것은 단지 자본주의의 족쇄가 풀린 본성인가?

맑스에게 있어서는, ‘공급과 수요에서 붕괴는 공황의 추상적 형태를 나타낸다. 공급과 수요, 구매와 판매는,

 

 

한 짝이며, 두 개의 서로 관련된 측면들의 독립성은 단지 강력하게, 파괴적 과정으로서, 스스로를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그것들이(공급과 수요, 구매와 판매가) 그것들(공급과 수요, 구매와 판매)의 통일, 즉 서로 다른 측면들의 통일을 옹호하는 곳은 바로 공황에서이다. 이러한 두 가지 연결되어 있고 상호보완적인 면들이 서로 간의 관계에서 가정하고 있는 독립성은 강력하게 파괴된다.”

 

 

공급과 수요, 구매와 판매의 통일은 그것들의 분리 안에서 나타난다. 맑스는 공급과 수요 사이의 관계들은 생산과 소비 간 관계들과 분리할 수 없이 연결되어 있으며,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생산력(the productive forces)의 구속을 벗어난[자유로운] 발전과 다른 편으로는 구속된, 압박당하는 소비의 발전 간의 모순을 구성한다고, 여기서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구매와 판매 간, 생산과 소비 간 분리는, 공황의 현실적 발생을 …… 설명하지않는다.

 

 

그것들은(구매와 판매 간, 생산과 소비 간 분리는) 과정의 국면들이 구매와 판매, 생산과 소비의 내적 통일이 단지 공황을 통해서, 격렬한 과정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는 충돌이 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이러한 분리는 공황에서 나타난다. 그것은(분리는) 공황의 기본이 되는 형태이다. 이것, 즉 공황의 기본적인 형태를 기초로 두고 공황을 설명하는 것은, 그것의 가장 추상적 형태를 기술함으로써 공황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인데, 이는 즉, 공황에 의해 공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설명될 필요가 있는 것은 왜 사회의 구성원들이 일반적인 시장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노동 시장에서 판매자와 구매자로서 서로 관계하고 만나느냐 하는 것이다.

판매자와 구매자의 존재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 , 자본과 노동 간 계급대립, 다시 말해 생산수단이 자본으로서 가정되고, 인류의 생산능력(human productive power)이 노동 상품과 그리고 착취 가능한 원천으로서 표현되는 곳의 대립을 전제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들은

 

 

사회적 개인들로서 사회 안에서 또한 사회를 위해 생산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개인들)의 생산은 그들(개인들)의 개별성을 구체화하는 단순한 수단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개인들)은 자연적 공동체 내에서 포섭되지도, 반면에, 의식적인 공동체로서 포섭되지도 않기 때문에, 독립적인 주체들은 동등하게 독립적인, 우연적인, 구체화된 것의 존재에 의해 직면한다. 이것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 사적 개인들로서 그들의 존재 조건이다.”

 

 

게다가, “사적 개인의 사회적 특성은 그들 존재의 사회적 맥락에 의해 결정된다.” 다른 말로 하면, 계급관계는 단지 자본을 생산수단으로 가정하지 않으며, 또한 결과로서, 사회적 개인을 사회적 존재가 그 사물들 스스로 간의 관계들로부터 도출된 것처럼 보이는 개별화된 개인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이것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은 공급과 수요 간, 구매와 판매 간 관계들, 이를 테면 자본과 노동 간 계급관계가 거부된 존재양식 내에서 존재하는 내에서 또한 그것(자본과 노동 간 계급관계가 거부된 존재양식 내에서 존재함)을 통하여 존재하는 물신형태들을 언급하는 것이다. 하지만, 물신형태들의 존재를 통해서 물신형태들의 발전을 설명하는 것은 물신주의를 통해서 물신주의를 설명하는 것이다. 위기는 위기를 통해서도, 그리고 또한 경쟁을 통한 자본주의 경쟁을 통해서도 설명될 수 없다. 그리고 동일한 이유로, 경쟁을 통해서는 위기가 설명될 수 없다.

Clarke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생산의 추진력은 소비가 아니라, 잉여가치의 생산과 전유이다. 축적의 장애물들은 생산과 소비 간 어떠한 모순에서도 발견되지 않으며, 잉여가치의 생산과 실현에서 고유한 모순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중요한 점은 위기는 궁극적으로, 제한 없는 생산력(forces of production), 그리고 자본의 증식으로의 생산의 종속을 발달시키는 경향에 대한, 하나 또는 또 다른 표현이다라는 것이다.제한 없는 생산력을 발달시키는 경향은 각각의 개별 자본에게 자본의 내적 본성’, 즉 경쟁을 통해서 스스로를 속인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주어진 산업적 기업[사업] 내에서 펼쳐진 자본양의 증가를 유지하는 것이 끊임없이 필요하도록 만들며, 그리고 경쟁은 각각의 개별 자본가들이 자본주의 생산의 내재적 법칙들을 외부의 강제적 법칙들로서 느끼도록 만든다. 그것(경쟁)은 그(개별 자본가)에게 끊임없이 그(개별 자본가)의 자본을 확장하도록- 그것(자본)을 보존하기 위해 - 강제하지만, (개별 자본가)는 누진적 축적에 의한 방법을 제외하고는 그것(자본)을 확장시킬 수 없다.”

 

 

하지만, 축적은 그것(축적)의 내용, 즉 축적을 위한 누진적 노동착취로부터 추상적으로 논의될 수 없다.

따라서 경쟁은 경제적 법칙들의 기원과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의 내적 본성이다. 따라서 각각의 개별 자본은 교환에서 스스로를 실현하기 위해서 경쟁해야만 한다. 하지만 자본의 보존을 위해서, 교환에서 가치의 실현은 충분치 않다. 자본은 단지 누진적 노동착취를 통해서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자본의 재생산은 단순한 경제적 재생산그 이상이다. 그것(자본주의 재생산)은 그것(자본주의 재생산)소외된 노동에 대한 지배의 재생산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지배의 유지는 자본을 팽창시킴으로써 가치를 보존시키기 위해 자본이 운동하도록 박차를 가한다.” 하지만 가치는 한계 없이 팽창될 수는 없다. 노동에 대한 자본주의적 지배의 재생산은 실현된 잉여가치가 자본의 축적을 팽창시키기 위한 생산으로 전환되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팽창은 자본 관계의 너머의 자본주의적 노동착취를 발전시키는 생산적 노동력을 증가시키는데, , 그것은 자본의 과잉축적이다.

위기는 생산을 위한 생산에서 자본의 부단한 노동착취의 사회적 한계들을 신호로 알린다. 그것은(위기는) 잉여가치의 실현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중요하게는 누진적 축적에 기초를 둔 자본의 유지, 즉 누진적 노동착취에 관해서, 자본의 과잉축적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자본주의 위기는 자본의 개념 안에 있는 노동의 존재를 드러낸다. 노동의 생산능력(labour's productive power)에 대한 착취의 다른 면은 자본주의 과잉축적 위기이다. , Bologna가 지적하듯이, 과잉축적은 과잉착취를 기술하는 잘못된 이름이다.”

종합하면, ‘경쟁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계급관계를 전제로 한다. 그것(경쟁)은 자본주의 노동착취 위기가 개별 자본가에게 경험되는 형태이다. 그들(개별 자본가들)의 현존하는 자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개별 자본가는 노동을 강화하고, 임금을 하락시키며, 노동자를 해고하고, 새로운 생산방법을 도입하며, 새로운 시장을 찾아야 하고 더욱 유순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이는 조건들을 가진 새로운 노동자들을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경쟁 압력을 완화시키는 시도는 그저 노동 과잉착취 또는 좀 더 우호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 자본의 과잉축적을 강화할 뿐이다. 따라서 자본가의 시각에서 볼 때 위기의 해결책은 노동 강화, 새로운 생산수단의 도입과 자본이 비본질적인 것으로서 소홀히 하는 사람들에 대한 생산으로부터의 배제를 통한 노동생산성(labour productivity) 증가를 훨씬 더 많이 포함하는 것이다. 그것은 필요노동과 잉여노동 사이의 관계를 바꾸어 놓는다. 현대의 위기를 고려할 때, 그러한 변화는 그것(자본)의 바로 그 토대를 흔들지도 모르는 규모에서 자본의 파괴를 의미할 것이다.

경쟁은, Clarke가 설득력 있게 주장했듯이, 단지 생산력(the forces of production)과 생산관계(the relations of production) 사이의 모순의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명백히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자본을 계속되는 누진적 축적에 적합한 이윤율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것보다 더욱 많이 생산함으로써 축적의 위기 속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바로 노동의 생산능력(labour's productive power) 발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재생산의 한계는 자본 그 자체이다: 자본으로서 생산수단의 존재는, 생산을 위한 생산의 누진적 팽창에 의해 자본으로서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자본의 부단한 탐색의 한계를 가정한다.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자본에 있어서, 그것(자본)의 위기에 대한 해결책은 생산적 설비의 엄청난 파괴와 노동력(하지만 이 힘은 자본이 가치의 생산을 위해 의존하는 것이다)의 폐기에 있다. 자본은 살아있는 모순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것(자본)은 노동과 가치의 창조를 제한한다. …… 그리고 그것(자본)은 잉여노동과 잉여가치를 가정하는 동일한 이유와 동일한 범위로 제한하기때문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통해 훨씬 분명해진다. 요약하면, 자본주의 축적의 위기는 자본 안에 그리고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의 존재를 드러낸다. 따라서 노동의 시각으로부터, 그것의 생산 능력에 대한 착취는 그저 자본의 과잉축적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은 아니다. 노동의 생산 능력의 발전은 또한 자본에 의해 제한된다. 완전고용은 인류가 착취 가능한 원천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서 존재하는 사회 안에서 그저 이상-상징적인 일의 상황으로서만 명료하게 표현되는 것이다. 노동, 그리고 노동해방을 위해서, 노동의 생산 능력의 자유로운 발전은 생산수단을 해방의 수단으로 전환하는 것을 수반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브레너에게 빚지고 있다. 그가 경쟁이론을 고안하기 위해 애쓴 것은 그저 자본주의 사회의 개념화에서 계급대립의 기본적인 중요성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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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이 건민

  1. Werner Bonefeld, “Notes on Competition, Capitalist Crises, and Class,” Historical Materialism, vol. 5, no. 1 (1999), pp. 5-28.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