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백인과 계급투쟁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3월호

백인과 계급투쟁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4:58

백인과 계급투쟁1


Noel Ignatiev

 

최근 인터넷에서 백인(whiteness)'이란 단어로 책 제목을 검색해보면 51권의 책을 찾을 수 있다. 그 가운데 거의 모두가 최근 10년 동안, 특히 대다수가 최근 5년 동안 출판된 책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단어로 기사 제목이나 인용 또는 개요를 검색해보면, 1985년 이후의 것으로만 373개의 기사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이 목록들은 정확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목록 안에는 백인이라는 주제와는 관계없는 물리학 관련 글들을 포함하고 있다[‘whiteness'백색이란 뜻도 있기 때문에 광학, 색도 등 물리학 관련 글들도 검색된다는 얘기다. - 옮긴이]. 또한 제목에 백인이라는 단어를 포함하지 않은 작품들은 빠져있기 때문이다. 또한 분절된 단어들의 조합으로도 검색되는 경우가 있을 테니[이를테면 ‘white'‘ness'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경우 - 옮긴이] 목록의 숫자는 실제보다 더 늘어난 상태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러한 수치가 보여주는 것은, 백인의 사회적·역사적 차원을 다루는 학문이 최근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가운데 몇몇 글은 거의 자기풍자에 가까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유치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인종 문제, 특히 백인 문제를 사회과학적 범주로서 분석하려는 노력은, 노동계급 정치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학자들 가운데서 보자면, 백인 노동자의 문제에 최초로 관심을 가진 것은 W. E. B. 듀보이스였다. 그는 1932년에 쓴 에세이에서 한 가지 에피소드를 자세히 기술한 바 있다. 이는 영국 대사관을 워싱턴에서 새로 짓는 현장에서 노동조합의 백인 조합원들이 흑인 노동자를 일자리에서 쫓아낸 사건에 대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때 그 조합원들은 노동자 연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활동하던 노동당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흑인 형제 여러분,” 그는 이 사건을 언급하며 이렇게 반문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류의 사람들이[흑인을 일자리에서 쫓아내는데 앞장서는 백인 노동자 - 옮긴이] 주도하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지지할 수 있겠습니까?” 흑인이 미국을 다시 세우다라는 책에서 그는 백인 노동자의 강요에 의해 유색인종 노동자가 백인들의 이익을 위해 예속되게 되었다고 썼다. 백인 노동자의 강요에 의해서 …… 암묵적인 동의가 아니라 강요에 의해서라고 말이다. 도대체 백인 노동자는 왜 이런 방식으로 행동했을까? 듀보이스[듀보이스(W.E.B. Du Bois): 미국의 흑인 운동 지도자(1868~1963). 흑인 해방을 위한 잡지 크라이시스(Crisis)를 주재하고, 흑인 해방 운동·평화 운동에 힘썼다. 저서에 흑인의 영혼이 있다 - 옮긴이]가 보기에 그 이유는 백인 노동자가 후진적이거나 잘못 지도되어서가 아니며, 그가 공적이고 심리적인 임금이라고 이름붙인 것으로 백인 노동자가 보상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백인들의 특권으로 직접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마땅히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늘 연구해왔다. 특히, 미국의 흑인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백인종이 생물학적으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백인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자신을 재생산하려는 구성원들의 자발성이 백인종의 존재를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1960년대 전세계적인 민족해방운동과 미국에서 흑인 투쟁의 엄청난 파고에 영향을 받아 급진적인 세대가 새롭게 형성되었다. 이들은 백인 문제를 말하려고 애썼다. 1967년이 지나고 나서 백인 우월주의가 미국 혁명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내부 장벽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 따라서 그에 맞서 싸우는 것이야말로 혁명 전략의 핵심이라는 생각은,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연합(SDS)' 내에서 좋건 나쁘건 상당한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이러한 흐름이 영향력을 꽤 잃게 되고, 더 나아가 본래의 계급적 원칙에서부터 벗어나게 되면서 결국 혁명적인 조류가 퇴조한 뒤에는 다양한 상담자들이나 떨거지 좌파들 사이에 의미론적인 찌꺼기로만 남게 되고 만다. 그 뒤 비로소 1990년에 이르러 알렉산더 색스턴이 백인공화국의 흥망성쇠(아래에서는 흥망성쇠라고 함)를 내놓고, 1년 뒤에는 데이빗 로디거가 백인의 임금이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다시 한 번 백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특히 로디거는 왜 사람들이 백인이 되고 싶어 하는 지를 묻고, 그들이 백인이 되었던 역사적 순간들을 밝혀내려고 시도함으로써,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다. 색스턴과 로디거의 연구는 나중에 오랫동안 이 문제를 연구해온 테오도르 앨런의 연구와, 내가 쓴 아일랜드인은 어떻게 백인이 되었는가라는 책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연구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 즉 백인에 대한 다른 연구들과 구별되는 점은, 바로 이 연구들은 계급투쟁을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으며, 노동계급의 일부 구성원들이 어째서 계급의 이해가 아니라 특정 집단의 이해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지, 다시 말해 왜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백인으로서 행동하게 되는지를 설명하려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특히 노동 역사가라면 당연히 이러한 노선에 따른 연구를 환영할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꼭 그렇게 되지는 않는 것 같다. 에릭 아네센은 인간의 이기심이 때로 조직노동자를 부추겨 인종적 분할을 지지하고 그 분할에 따라 협력을 추구하도록만들기도 한다는 요지의 실증적 연구들을 강조하면서, 최근에 이뤄진 백인 연구에 대한 학문적 성과를 해체하고 있다. 그는 핵심을 완전히 놓치고 있다. 문제는 백인 노동자가 스스로의 임금을 올리려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할 때 기꺼이 나서려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백인 노동자가 자신들은 뭔가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그룹이라는 생각에 집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의 인용문을 보면 아네센의 세계관이 무엇인지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노동계급 단결의 이론…… 백인 노동자가 흑인들과 공동의 이해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유색인종을 배제한 채 노동운동을 조직하려 한다거나 인종적 특권을 옹호하려는 백인 노동자의 행동은 설명이 필요하다. …… 백인 문제에 대한 연구는 결국 사라지지 않는 오래된 질문,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존재하지 않는가또는 적어도 왜 미국에는 노동계급 단결이 존재하지 않는가등의 문제를 다시 던지게 된다. …… 이미 백인 학자들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노동 역사가들이 스스로 버린 관념인, ‘노동계급 공동의 이해가 일원론적으로 존재한다는 바로 그 개념이 이제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 문제는 듀보이스가 내놓은 가정들 가운데 일부가 불멸의 맑스주의 요체의 형태로 여전히 살아 있다는 점이다. 즉 대중적 억압 또는 공동의 적들이 노동계급의 단결을 촉진할 것이며, 결국 모든 노동자는 인종 문제를 떠나 계급적 이해를 공유하게 될 것이고, 노동계급은 급진적 이론이 그들에게 부여한 역사적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라는 예견들 말이다.”

 

아네센은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게 될 계급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거부하는 것을 모조리 맑스주의 요체라고 이름붙이는 것은 맑스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노동계급은 혁명적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네센에게는 노동계급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결국 이러한 견해를 갖고 있는 덕에, 그는 노동역사가 집단을 미국 노동조합의 충실한 직원이 되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아네센의 백인 노동자 옹호론이 혁명적 전망으로부터 아주 손쉽게 배척될 수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백인 문제가 계급투쟁에 미치는 효과를 연구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심각한 질문들이 남게 된다.

앞서 쓴 것처럼 나는 방금 색스턴의 흥망성쇠개정판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로디거가 특유의 겸손함으로 적은 서문이 들어 있다. 그는 이 작품을 흑인이 미국을 다시 세우다이 나온 이래 최고의 연구라고 평가했다. 흥망성쇠19세기에 백인 우월주의가 어떻게 지배자 동맹의 이해를 충족시키기 위해 적용되었는가를 아주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색스턴에게 백인 우월주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특정 집단이 자신의 이해를 마치 전체 사회의 이해처럼 보이게 하려고 경험을 합리화하는 신념 체계와 비슷한 것이다. 그는 백인 우월주의 신념 체계가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만들고 인디언을 착취하며 나중에는 멕시코와 중국을 약탈함으로써 부유하게 된 유산계급을 정당화하기 위한 필요에서 태어나게 되었으며, 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이해하는데 거의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째서 재산을 거의 갖고 있지 못한 백인들까지도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암묵적으로 동의를 표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이 질문에 대해 그들이 “(비록 유산계급과) 공평한 수준으로 받지는 못하지만, 인종적 착취에서부터 나오는 이윤을 기꺼이 나눠가려 하기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대답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과거에도 나온 적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이윤 나누기가 어떻게 벌어지는지를 설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지위를 누리면서도 정리해고 예정자 명단의 맨 뒤에 서는 것, 양질의 일자리를 독점하고 구속의 위험에서부터 자유로운 것은 의심할 바 없는 특권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권들이 곧 인종적 착취에서부터 나온 (잉여가치) 이윤을 분배받는 행위를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책에서 색스턴은 이 쟁점을 다루지 않고 뛰어넘어 버렸는데, 그의 주장만을 보자면 꼭 이 쟁점을 다뤄야만 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혁명가들에게는 이 쟁점이 매우 중요한 정치적 질문을 제기하는 주제로서 다가온다.

백인의 임금흥망성쇠와 정반대 방향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백인 노동자를 글자 그대로의 착취자의 일부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전제하고 나서, 로디거는 왜 그들이 프롤레타리아처럼 행동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는데, 바로 색스턴이 범하고 있는 문제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만일 물질적인 이익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도대체 백색 피부를 갖고 있는 것만으로 주어지는 심리적 가치가 무엇이란 말인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지위를 누리면서도 정리해고 예정자 명단의 맨 뒤에 서는 것, 양질의 일자리를 독점하고 구속의 위험에서부터 자유로운 것이 곧장 백인 노동자에게 경제적 이윤의 일부를 분배해주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임금이야말로 훨씬 심리적인 요소가 아닌가. 로디거는 아마도 신좌파 운동의 마지막 시절에 나타난 반노동계급적 흐름인 제3세계주의자들에 맞서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 문제는 한 번도 토론한 바가 없지만, 아직은 내 추측일 뿐이다. 나는 정신분석이 그 자체로 얼마나 많은 것을 설명해줄 수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정신분석학을 잘 알지는 못한다. 흥망성쇠의 개정판 서문에서 로디거는 백인 우월주의에서 더 노골적인 금전적 수익을 말했다. 이 또한 내 추측이지만 그는 이러한 경제적 수익 문제가 너무 명백해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가 백인의 임금에서 이 문제를 심도 깊게 논의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시장경제 원리와는 상관없는 심리적, 문화적 요소를 너무 강조함으로써 아네센이 그에게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쟁점에 대해 논쟁적으로 다루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 백인 문제에 대한 최근 연구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단연 앨런의 연구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몇 가지 열거하자면 첫째, 앨런은 인종적 억압에 대한 세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 인종적 억압 내에서 일부 피착취계급은 가장 타락한 기득권층조차 억압받는 계층보다 상위의 삶을 살도록 보장해주는 특권 보장 체계를 통해 지배계급의 통치를 지탱하는데 합류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그는 식민 시대 인종적 억압의 기원, 따라서 백인의 기원이기도 한 사례를 보여주는 방대한 양의 증거를 수집해 놓았다. 셋째, 그는 인종 차별을 일종의 선입관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철저히 반박함으로써 인종적 억압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넷째, 그는 백인 특권 체계야말로 미국에서 자본주의를 뒤집기 위한 노동계급 투쟁이 실패한 주요 요인임을 생생히 고발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성과들을 두 권 분량의 책에 담았는데, 그 안에서 그는 백인 문제에 대한 모든 쟁점을 남김없이 연구하고 엄밀한 논의를 담았으며, 논쟁 상대방에게도 매우 공평한 논의를 보장하고 당당하게 계급적 당파성을 담아내고 있다. 이런 성과들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며, 아마도 내가 언급하지 못한 많은 성과들이 앨런의 연구 속에 더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앨런은 인종적 억압의 기원은, 노동 통제를 해야 할 특별한 상황에 처해있던 체사피크 만 지역 담배 재배 농장의 부르주아가 의식적으로 행한 결단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물론 문서상의 증거가 모자라다는 문제가 있다. 즉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인종적 억압은 증기 엔진보다, 경찰병력보다, 보수 양당 체계보다 훨씬 가치 있는 발명품이었다. 앨런은 증거의 불충분을 인정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미국의 피부색에 따른 억압 체제를 설명할 때, 영국의 정신과 결부시키는 것보다 더 간명한 설명은 없을 것이다. 본토와 서인도지역 식민지들 모두에서 아프리카 출신 민중은 노예 노동력을 이루었으며, 그 결과 검은 피부색 자체가 노예의 낙인을 뜻하는 표시가 되고 말았다. 피부색과 사회적 지위와의 이런 관계는 식민지 섬들에 견주어 본토에서는 좀 더 서서히 발전했다. 그 까닭은 본토 노동자의 대다수가 임시계약직으로 일하던 영국인이었으며, 따라서 노예와 자유인들의 경계가 흐릿할 뿐 아니라 그리 중요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노동자 사이에서는 상호교류와 연대의식이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오직 금전적인 고려에 따른 것이고 인종적호불호와 상관없이 농장주들이 점점 더 많은 노예들을 수입하게 되고 노예 제도를 분명한 제도로 확립시키게 되자, 검은 피부색과 노예와의 관계는 더욱 중요해지게 되었다. 그 결과 아프리카 출신 후손이 아닌 모든 사람들, 즉 노예가 아닌 모든 이들이 나중에 인종이 되는 하나의 집단을 이루게 되고, 사회질서의 안정성은 이 집단에 대한 충성에 의존하게 되었다. 체사피크 만 농장주들이 백인을 발명할 때 어떤 결정을 내렸는가에 대해 얘기하자면, “우리에게 그러한 가설은 아무런 필요가 없다.”[ 그 가설은 아무런 필요가 없다”(je n‘ai besoin de cette hypothèse): 라플라스가 선물한 자신의 역작 천체역학전집을 읽고 나서 나폴레옹은 라플라스에게 토성과 목성의 궤도 운동에 대한 설명 어디에도 신에 대한 설명은 존재하지 않는데,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다. 라플라스는 이에 대해 나는 그 가설에 대한 아무런 필요성도 느끼지 않네.” 라고 답했다. 라플라스는 태양계의 안정성은 뉴턴역학에 의해 충분히 증명될 수 있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힘인 이란 존재가 필요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여기서는 서류상의 증거가 불충분하다 할지라도, 체사피크 만에서 벌어진 일련의 과정이 인종적 억압의 기원이라는 점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는 뜻으로 쓰였다. - 옮긴이]

서인도 제도에서 농장주들은 엄청난 숫자의 노예를 통제할 필요성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아프리카 후손들로 이루어진 민병대에 적극 협력했다. 이 때문에 피부색과 자유와의 상관관계는 더욱 복잡해졌다. 농장주들의 의식적인 결단이 결정적 역할을 했던 곳은 본토가 아니라 서인도 제도였으며, 역사적 기록들 또한 그곳에서 벌어진 많은 논란 속에서도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앨런은 마지막 순간으로 갈수록, 그리고 그 순간을 넘어서면, 설탕 농장주들은 그(백인이라는) 의식성을 손상시키려는 모든 시도에 맞서 저항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인종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매우 어려운 것이 있다면, 바로 새로운 이민자들의 참뜻을 이해하는 문제이다. (인용 부호를 이렇게 쓴 이유는, 이 개념에서 쟁점이 되는 문제들의 대다수가 새롭다는 것도 아니고 이민자도 아닌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시아 또는 다른 지역에서 온 이민자들이 어쩌면 과거에 유럽 출신 이민자들이 겪었던 것처럼 현재 백인화 과정을 겪고 있는 것 같다는 수많은 징표들이 나오고 있다. 물론 미국에서 고전적인 유색인종에 대한 선입관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중국인이나 멕시코인, 심지어는 에티오피아인들이, 과거 아일랜드인이나 이탈리아인들이 받았던 것 이상으로 공식 사회나 미국의 대중에게서 적대적인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도 틀린 생각인 것 같다.



미국 정치의 안정성은 전통적으로 인종 개념에 의해 뭉쳐지게 된 다수에 의존해왔다. 백인은 지배계급을 위한 일종의 재난 보험처럼 기능해왔다. 물론 몇몇 집단들은 사회적으로 중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즉 잘 알다시피 미국으로 이주한 유럽 민족들은 경제적 부와 사회적 지위에서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를 백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인종 개념으로 배제된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접근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이다. 미국을 두고 다민족 국가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계급 지배의 전통적인 형식을 따르자면 특권을 보장받는 인종과 억압받는 인종, 단 두 개의 인종만을 필요로 한다. 캘리포니아를 비롯해 몇몇 주에 억압받는 인종들의 다수가 몰려들게 되면서, 언제든지 로드니 킹 반란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으로 발전해가고 있다. 다민족 모델이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은 뉴욕에서 일하는 남아시아 출신 택시 운전사들을 마치 인종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전위로 칭송하는 최근 나온 책에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불과 몇 달 전에, 흑인들에게 택시 승차를 거부해온 주요 세력이 바로 그들이었음이 입증되었는데 말이다.뉴욕의 아일랜드 출신 이주민들이 토박이 고집불통들을 상대로 완강한 투쟁을 전개하던 1863년 상황이라면 그들을 백인 우월주의에 맞선 투사라고 칭송해도 좋을 것이다. 19세기 때만 해도 백인종은 재구성되고 있는 중이었으며, 당시까지 경계선은 모호한 상태였다. ‘유색인중간인종들 사이에 벌어진 분쟁의 대다수가 바로 21세기에 어떤 그룹이 사회적으로 백인종 안에 편입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또한 지배 계급의 재구성과 관련하여 유일하게 빠진 것이 있었다면, 바로 미국에서 태어난 흑인 대중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합의가 아직 등장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짚어야 한다. 물론, 증거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며 결론은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해 미리 결론을 전제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종의 미래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확실치 않다. 백인종이 여전히 사회적 통제의 기제로 효과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백인들 가운데 가장 타락한 이들조차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색인종에 견주어 자신이 사회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느낄 수 있게 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미 인종을 넘어 다인종출신의 유산 계급이 존재함으로 해서 이러한 의식은 차츰 흔들리고 있다. 이것과 관련해서 현재 미국은 마찬가지로 변화하고 있는 중이다. 이미 백만장자 흑인이 수 천 명 존재하고 있다. 물론 시대가 변화해 백만 달러라는 액수가 과거처럼 엄청난 부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 출신의 이민자들 가운데서도 엄청난 부를 축적한 사례들이 늘 있어왔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분명히 달라진 것이 있다면, 부유한 흑인들은 이제 인종적으로 격리된 아프리카 출신 이민자들 사회 밖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흑인들은 이미 대법원에도, 내각에도, 의회에도, 대도시 시장으로도, 영향력 있는 민간 재단의 대표로도, 심지어 군대의 고위직에도 진출했거나 최근에 진출하고 있는 중이다. 1996년에는 한 흑인이 대통령 후보[1991년 걸프전 당시 합참의장으로 이라크전을 이끌어 국민적 인기를 획득한 콜린 파월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임 - 옮긴이]로 대중에게 회자되며 광범한 지지를 받는 일도 있었다. 그때 나온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만일 그가 실제로 후보로 나섰다면 당선되었을 것임에 틀림없으며, 아마도 흑인보다 백인들의 지지를 더 많이 받았을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이들은 흑인들 머리 위에서 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백인들의 것으로 여겨왔던 기구들 위에서도 권위주의적인 지위를 뽐내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공장소에서 흑인 남성이나 여성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그들이 걸레를 갖고 청소할 때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흑인들은 서류가방을 들고 휴대폰으로 통화하며 공항과 법인 본부조직을 누비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변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흑인 경찰관들의 등장일 것이다. 1940년만 해도 미국의 최남부 주에서는 단 한명의 흑인 경찰관도 없었으며, 북부의 도시들에서도 손에 꼽히는 숫자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국 어느 주요 대도시를 가도 흑인 경찰들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경찰서장을 하는 흑인도 볼 수 있다. 그들은 심지어 백인들을 체포할 수 있는 권능을 부여받고 있기도 하다. 이는 단순한 보여주기식 정책이 아니다.



노동조합과 맺었던 뉴딜 협약은 백인 노동자에게 보장된 지위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주었던 것인데, 이 협약은 이미 붕괴된 상태이다. 그 결과 많은 백인은 자신들이 흑인 빈민층의 생활조건과 그리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최근에 나온 <8 마일>이란 영화에 잘 묘사되어 있다.) 미국이 점점 브라질과 같은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징표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브라질에서는 피부색이 카스트(신분)를 드러내는 유일한 표식이라기보다 신분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 어두운 피부색이 곧 바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듯 밝은 피부색이 곧 높은 지위를 뜻하지도 않으며, 오직 돈만이 백인을 만들어줄 뿐이다.

백인 우월주의가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의 미국식 쌍대를 이루는 것이라면, 미국판 역사적 타협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계급 일부와 지배계급이 맺은 협약의 붕괴는 그 연원이 무엇이든 환영할 만한 것이다. 존 가베이가 조롱하듯 뇌까린 것처럼, 우리는 승리를 선언하고 그냥 집에 가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부색에 따른 차별의 정도가 묽어지는 것과 함께 흑인 대중 부문의 빈곤화와 주변화는 더욱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경제가 부흥하는 지역에서 아프리카 출신 이민자들을 거의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대학을 졸업하는 흑인 숫자의 100배에 달하는 흑인이 감옥에 갇히고 있다. 이는 매우 불길한 통계 수치임에 틀림없다. 여느 대중적 승리와 다르지 않게, 전통적인 인종적 억압의 형태가 퇴조하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기 마련이다. 바로 노동계급의 자주성 문제가 지난날과 견주어 볼 때 더욱 결정적인 문제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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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xton, Alexander 1990, The Rise and Fall of the White Republic: Class Politics and Mass Culture in Nineteenth-Century America, London: Verso.

 

 

옮긴이: 오민규

 

  1. 이 글은 『역사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 11권 4호, 227~235쪽에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