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노동당 좌파에서 사회주의노동당으로: 급진 개량주의의 한계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3월호

노동당 좌파에서 사회주의노동당으로: 급진 개량주의의 한계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4:58

노동당 좌파에서 사회주의노동당1으로: 급진 개량주의의 한계2

 

Internationalist Communist Union

 

 

노동당주의: 노동계급에 대한 역사적인 속박

 

누구도 모래 위에 집을 지을 순 없다. 만일 노동계급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진정으로 대변하는 당이 출현하려면, 그 당은 오늘날 노동당이 무엇인지, 과거에는 무엇이었는지, 왜 노동당 좌파 가운데 있는 노동당 비판자들이 정치적 무대에서 어떠한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데 거듭해서 실패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평가를 바탕으로 해서 세워져야 할 것이다.

최근 한 세기 동안 노동당은 이 나라에서 노동계급 정치를 전적으로 지배해 왔다. 80년이라는 그 시간 동안, 1차 세계대전 이래 줄곧, 노동당 지도부는 정부 안에서 영국 자본의 사무를 관리하는 특권을 얻기 위한 협상카드로서 노동조합을 통한 노동계급 통제를 일관되게 추구하였다.

이 기간 내내 부르주아지는 노동계급 통제에 대한 대가로 개량을 승인할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노동당이 자본에 도움이 될 만큼 충분한 세력을 얻었을 때에, 영국 부르주아지는 이미 패권을 잃어가고 있었다. 영국 부르주아지는 그들의 이윤이 해외의 좀 더 젊고 중요하게는 더 역동적인 경쟁자들에 의해 위협받았던 연로한 계급이었다.

노동당이 총선거의 결과로 정부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것은 늘 자본가 계급의 동의 아래서 였다. 매번 부르주아의 목표는 사회적 평화라는 주문(呪文)을 얻는 것이었는데, 이는 그들 사업의 대규모 확장을 촉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런저런 위기에 처한 그들을 끝까지 돌볼 수 있도록 하고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여 그들의 이윤을 보호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영국 부르주아지는 여전히 노동당 관료들과 그 동료들에게 국가기구 내 지위들을 제공함으로써 보상할 여유가 있었으나, 그러나 그들은 노동계급에게 이익이 될 진정한 개량을 최소한 그들 자신의 계급 지배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한 더는 스스로 제공할 수는 없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노동당은 진정한 개량주의 정당으로 역할하기에는 역사에 너무 늦게 왔다.

사적 이윤과 사회적 불평등을 타파할 새로운 사회체제에 대한 사상, 즉 사회주의 사상은 노동당이 존재하기 전에 노동계급의 독자적인 정당을 향한 투쟁에 이바지했던 대다수 활동가들의 공통된 동기였다. 그러나 매우 빠르게 노동당의 정책이라는 속박이 이러한 참다운 사상을 그 머리에서 돌려놓았다. 사회변혁(social change)노동계급을 위한 가장 가능성 있는 거래, 즉 자본가 계급의 이해관계를 보살피는 다양한 기구·위원회·공사에 소수의 노동당·노동조합 지명자들을 거느린 노동당 정부로 축소하면서.

이러한 정책들이 도전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세기의 전환 이전에 독립적인 노동자 정당 드라이브에 서막을 열었던 노동조합 폭발로부터 1차 대전 당시 비공인 파업물결이나 1926년 총파업에 이르기까지, 노동당의 초창기로부터 줄곧 노동계급의 많은 반란들이 사회변혁(social change)의 필요성을 재차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노동자가 열망을 표현하고 집단적인 힘을 시험한 이래, 그들은 (노동당의 몇몇 전신들에 대하여 엥겔스가 만들어냈던 문구를 사용하자면) ‘의회주의 백치병이라는 노동당의 관점이 아닌 다른 어떤 관점도 갖지 못한 채로 남겨졌다.

모든 경우에, 명확한 정치적 관점의 결여는 노동당에 의하여 제공된 오래된 술책들과 곤경에 맞닿아 있으며, 노동자 계급을 무장해제된 상태로 남겨 놓았고, 궁극적으로 패배하게 만들었다.

패배를 반복한 이러한 것들의 비용은 영국 노동계급에게는 값비싼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의 민족 연립정부로부터 2차 세계대전의 그것까지, 세계대공황의 위기 정부들로부터 1970년대의 사회계약 정부들까지, 노동당 지도부는 노동계급을 비록 마지못해서이긴 하지만 자본가들의 요구에 굴복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위기로부터 위기까지 영국 부르주아들은 그들의 생존 또는 적어도 노동자로부터 좀 더 많은 땀을 훔쳐내는 데서의 성공을 노동당 지도부에 의해 노동계급의 목에 휘감긴 올가미에 의지했다.

이 긴 시기를 통틀어 노동당주의에 맞선 유일한 실질적 도전은 노동당 당원들 바깥으로부터 왔다. 2~30년 동안 공산당이 사회주의 혁명의 붉은 깃발을 치켜 올렸을 때다. 그러나 그때조차도, 공산당의 노동계급 활동가들의 용기와 헌신은 스탈린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그들 지도부의 퇴화를 만회할 수 없었다. 그들은 노동계급에 대한 노동당 관료들의 장악력을 뒤흔들거나 또는 유의미하게 약화시키는 것조차 실패했다.

노동당을 출범시키는 데 관건적 역할을 했으며, 이후로 늘 당원들 사이에서 두드러졌던 어떤 사회주의 흐름들이 있는가? 왜 지난 수십 년 동안 노동당 좌파로 알려진 흐름들의 활동가들은 노동자에게 결정적인 계급적 관점을 제공함으로써 노동당의 정책들을 바꿔내지 못하고 노동당 관료제의 노동계급에 대한 사이비 독점 반대편에 홀로 남아 있어야 했는가? 오늘날의 위기에서 노동당의 정책에 도전하려는 목표를 가진 누구도, 특히 노동당이 정부를 다시 장악한다면, 이 문제에 대해 명쾌하게 답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당의 비사회주의적 근원으로부터

 

노동당 좌파에 의해 퍼져 있으며, 노동당의 역사적 근원으로 돌아가자고 고취하면서 스카길이 환상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근거없는 신화와 반대로, 노동당의 원래 목표는 사회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노동조합 지도자들 스스로는 정치적 사상들에 의심이 많았다. 만일 그들의 공감이 누군가에게 향한다면, 그 대상은 사회주의자들이라기보다는 자유당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의회 안에 그들의 대변자를 가져야 할 필요, 그래서 의회 선거에 노동조합이 후원하는 독립적인 후보들을 내세워야 할 필요를 놓고 그들 가운데 일부를 설득시켰던 자유당 파트너들에게 반복해서 실망했던 바로 그 길이었다.

 

노동당을 설립하려는 운동은 처음에는 그 자체로 정치적인 조직을 창설하려는 목표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사회를 다시 만들려고 하는 노동자에게 투쟁적인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은 명확히 아니었다. 노동당은 처음에는 1906년 총선거에서 당선된 29명의 노조후원 하원의원들을 조정하려는 목적으로 단지 하원 내 의회당으로 존재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 국면에서도, 대다수는 아닐지라도 많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여전히 자유당에 충성하고 있었으며, 자유당의 직접적인 경쟁자로 등장할 게 분명한 당을 건설하는 것에 적대적이었다. 그것은 단지 노조후원 하원의원들의 선거운동을 위한 기금 모금을 보다 효율적으로 조직하기 위한 필요 때문이었으며, 노조 기구들이 하원의원들을 통제할 수 있는 메카니즘을 갖추려는 필요 때문이었는데, 그 점이 의회 밖에서 노동당의 전국적 구조를 발전시키는 것을 자극했다. 심지어 그때까지도 새로운 당에 주어진 첫째 역할은 노동자의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대한 입법행위를 증진시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이것은 사회주의자들이 노동당을 건설하는 데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독립적인 계급 강령을 가진 노동자 당이라는 사상은 1880년대로 거슬러 가면 프리드리히 엥겔스 자신에 의해서 처음으로 주장되었었다. 이미 19세기 중반에 맑스와 엥겔스는 가장 두드러진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명확한 사회주의 강령에 기초하고 있는 제1차 인터내셔널로 데려오려고 시도하는 데 큰 수고를 쏟았었다. 그들의 목표는 사회주의 사상들을 굳건하고 명확한 노동계급 기초 위에 세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쁘띠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사회주의 흐름을 노동계급 운동으로 전환하게 하며 그리고 희망적으로는 사회주의 분파들 사이의 끝없는 말다툼에 종지부를 찍게 하는 노동조합 운동을 위한 사회주의자의 목소리라는 미래의 노동자 당에 엥겔스가 부여한 그러한 역할은 여전했다.

결국은 그러한 사회주의자 목소리가 되는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노동당은 단지 사회주의 사상들에는 전혀 공간을 제공하지 않는 대신 의회 정치의 일상과 절충 속에 사회주의 활동가들을 익사시키는 데는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입증된 선거 기구로서 출현했다. 그로부터 적어도 25년 동안 노동당은 사회주의 흐름들이 노동당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노동자의 거대한 층 앞에 계급적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일련의 위기상황에 응답하기 위하여 사용할 수단을 제공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비록 그 시기를 관통하여 사회주의 흐름이 항상 노동당 내에서 상당한 규모의 힘을 대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차대한 위기적 순간들에 노동계급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걸기 위하여 노동당 기구에 대항하고 그 당권파들을 뛰어넘는 정치적 승리를 한 번도 획득하지 못했다.

 

 

노동당 좌파의 탄생으로

 

그 때 사회주의 흐름의 상태는 어땠는가? 비틀비틀 휘청거리고 있었다. 1893년에 노동자 당을 건설하려는 드라이브가 막 시작되었을 때, 사회주의 흐름은 대략 세 개의 주요한 서로 싸우는 경향들로 분리되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힌드만의 사회민주주의연맹은 엥겔스가 독일 사회주의자 아돌프 조르게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앵글로색슨 종파주의는 노동운동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유행한다. 사회민주주의연맹은 …… 우리의 이론을 진부한 종파의 경직된 도그마로 변형시켜 취급해 왔다. 그것은 협소하고, 배타적이며, 힌드만 덕택으로 인터내셔널 정치 안에서 철저하게 타락한 전통을 갖고 있다.” 실로 사회민주주의연맹은 중간계급 도덕주의와 사회주의의 기괴한 혼합물이었다. 이를테면 1889년 파업 물결이라는 기회를 새로운 노조를 건설하는 데 사용하려는 쏜, 번즈, 만과 같은 사회주의자들에 의한 시도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연맹의 응답은 이것이 깃발을 내리는 것, 살아있는 선전으로부터의 이탈, 에너지의 낭비라는 것이었다.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설립된 전통에서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사회주의 사상은 계급투쟁을 통해서 노동계급에게 무기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은 사회민주주의연맹의 중간계급 도덕주의에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었으며, 사실 모든 영국의 사회주의 흐름들에게 그러했다.

사회민주주의연맹 다음으로 독립노동당이 왔다. 1893년에 사회주의 클럽들의 느슨한 연합으로 설립된 그것은 또 다른 종류의 혼합이었다. 독립노동당은 1880년대 후반의 파업물결에 의해 정치화되었던 젊은 숙련 노동자 사이에서 작지만 상당한 규모의 노동계급 기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독립노동당은 화이트칼라와 전문가 층에 의해 지배되었다. 독립노동당의 창시자는 이전에 사회민주주의연맹 성원이었는데, 그는 좋고 나쁜 모든 종류의 이유 때문에 하인드먼에 의해 그의 조직에 부과된 빈틈없는 기율을 반대했었다. 로버트 블랫포드처럼 독립노동당의 지도적인 인물들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자는 사회민주주의연맹의 도덕주의적 접근을 간직하고 있었고, 그들의 과제는 단지 전도자가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말했다.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가장 좋은 길은 사회주의자들을 만드는 것이다. …… 우리에게 사회주의자 사람들을 달라, 그러면 사회주의는 저절로 성취될 것이다.” 이러한 교육적 접근은, 잠재적인 지지자들을 쫓아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그 설립 대회부터 새로운 당의 이름에서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포함시키는 것에 성공적으로 반대함으로써 스스로 명백히 했던, 독립노동당 지도부 사이에 지배적인 의회주의 경향에 자유로운 행동을 주었다.

이러한 선거주의 지향은 생각이 맞는 개인들, 이를테면 램지 맥도날드 같은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선거 전문가인 그는 자유당의 설립 때 사이가 나빠졌는데, 독립노동당에서 잘 알려지고 가장 미움 받는 인물이 되었다. 카이르 하디에 대해서 보자면, 오늘날 확실히 노동당 좌파의 전통에서 가장 저명한 인물인데, 엥겔스는 그를 조르게에게 보낸 같은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매우 교활한 스코틀랜드 사람으로 그의 데마고기 속임수는 1분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사람은 현재로서는 가장 거대한 장애물이다. 그는 의회에 오로지 선동하는 경우에만 나타나는데, 실업자들에 대해 말로만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마지막으로, 페이비언 협회가 있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정치조직이 아니지만, 사회주의를 견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저명한 지식인들을 끌어 모은 정치 클럽이었다. 의미심장하게 그들은 주류 의회 정당들과 구분되어 사회주의 조직을 건설하려는 모든 초기 시도들에 관계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안정된 자유당 정치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엥겔스는 페이비안 협회에 대해 그의 친구 카우츠키에게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출세주의자부터 감상적인 사회주의자, 그리고 박애주의자까지 다양한 등급의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의 파벌이다. 오로지 노동자의 위협적인 지배에 대한 그들의 공포 때문에 결합되어 있으며, 그들의 고유한 지도력, 교육받은 자에 의해 실행되는 지도력을 확고하게 만드는 것을 통해 이러한 위험을 제거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있다. 페이비언 협회에 의해 사용된 수단들은 부패한 의회 정치인들의 수단들과 똑같다 : , 음모, 출세주의. 영국식 출세주의에 따르면 모든 정치 정당은 그 행위자들에게 이러저러한 형태로 급료를 지불하거나 지위를 통해 보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유당의 음모들에 깊숙이 몰두하고 있으며, 자유당 일을 계속 하고 있다. 이를테면 일반적으로 순수한 영국 정치인이라고 할 시드니 웹처럼. 이러한 신사들은 노동자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모든 일을 하고 있다.”

이것들이 노동당 출범 직전에 노동조합 기구들과 협력하고 있던 사회주의 흐름들이었다. 그리고 당시 영국에서 단연 가장 경험 많은 사회주의 활동가였던 엥겔스의 평가로부터 판단해 본다면, 그들 모두는 이미 이러저러하게 사회주의 강령으로부터 떠나 있었다.

사회민주주의연맹은 초기 국면에는 의회주의 방향에 반대하며 (노동당 창당) 기획으로부터 발을 빼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이 출범하였을 때 노동당 바깥에 남아 있는 동안 사회민주주의연맹은 자신의 세력권 안에 갇혀야 했다. 10년 후, 사회민주주의연맹은 영국사회주의당(BSP)이라는 이름 아래 노동당에 결합했다.

독립노동당과 페이비언 협회는 노동당 안에서 주요한 사회주의 흐름들로 유지되었다. 초창기 그들의 역할은 꽤 의미심장했는데, 이를테면 1906년 당선된 노동당 하원의원 가운데 다수가 그들의 회원들 가운데서 배출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그들의 상대적으로 작은 인원은 노동조합의 비중에 상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도적인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누구도 그들의 사상과 강령을 매우 강력하게 주장하는 데 특별히 열중하는 자가 없었다.

의회 안에서 사회주의자 하원의원들은 노동조합 관료들의 자유당과의 동맹정부 안에서 그들을 지지하는 것을 통한에 충실했다. 그들은 다음 선거에서 그들의 의석을 상실할 가능성 보다는 사회주의자 성원들의 분노에 직면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리고 노동당의 1908년 대회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회주의자들이 당헌에 사회주의 원칙들을 써 넣는 것을 반대하기 위하여 노동조합 관료들과 결탁했다. 심지어 대회에서 통과된 결의안이 이러한 같은 원칙들을 뒷받침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해, 독립노동당 대회에서, 카이르 하디와 맥도널드를 포함한 당의 중진들이 만일 당 대회가 독립노동당 하원의원으로서 노동당 원내총무를 맡은 빅터 그레이슨의 사퇴를 잘못된 것으로 판정하지 않는다면 사임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레이슨의 동기가 실업자들에 맞선 (노동당·자유당 동맹에 따른) 자유당 정부의 정책노동당 원내총무가 반대했던 것을 폭로하기 위하여 의회 연단을 활용하려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아랑곳없이. 그러나 독립노동당 지도부에게 의회의 제휴와 책략은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보다 항상 더 중요했다. 몇 년 후에 레닌이 다음과 같이 쓴 것처럼. “이 당은 오로지 사회주의로부터 독립적인 반면 자유당에게는 실로 의존적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정당한 말이다.”

이러한 타협 아래에 깔린 논리구조는 간단하다. 의회 내에 얻은 지위와 노동조합에 의해 제공되는 정규적인 기금을 잃으면서 노동당 대열 바깥의 황야로 돌아가는 위험을 취하기보다는 일정한 양보의 대가로 노동당 권력집단과 사이좋게 지내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구조는 최악의 자포자기를 포함하는 어떤 것이든 정당화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랬다. 출발지점이라는 게 노동당 바깥에는 사회주의 사상을 위한 미래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으므로, 사회주의자들이 노동당 권력집단 내 그들의 파트너들로부터 모욕을 감수하려고 하는 데에는 거의 한계가 없었다. 이러한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는 이후 노동당 좌파로 되는 세력들의 트레이드마크로 남았다.

 

 

첫 번째 제국주의 전쟁에 마주쳐

 

노동당이 출범하고 8년 후, 노동계급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라는 유럽을 관통하는 격렬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최근 대회에서 노동자는 함께 평화를 지지한다! 전쟁을 타도하라! 계급지배를 타도하라!”는 호소에 열광적으로 찬성했던 바로 그 노동계급 지도자들이 그들의 존경하는 자본가 계급들 뒤에서 결속을 굳히고 있었으며 가장 맹목적인 애국주의 정책들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노동당도 예외가 아니었다. 노동당의 전쟁 반대는 전쟁 발발 후 정확히 사흘 동안만 지속되었다. 그리고 노동조합회의(TUC)와 노동당 기구는 전쟁 노력에 결합했다. 1915년부터 전직 노조관료이자 자유당 하원의원이었으며 당시 의회 노동당의 의장이었던 아더 핸더슨이 정부에 결합했다. 다음해 그는 전쟁 내각의 장관 다섯 명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다른 노동당 인물들이 더 낮은 지위로 정부에 결합했다.

노동당 좌파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1914년에 전쟁을 지지하는 당에 저항하여 맥도널드가 의회 노동당 의장 지위를 사임하였고, 그의 자리가 핸더슨에게 넘어갔다. 독립노동당 성원으로서 하원의원이 된 7명 가운데 5명이 노동당의 전쟁노력 지지에 반대했다. 비록 그렇지 않은 2명에게 독립노동당으로부터 아무런 규율상의 행동이 취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독립노동당의 주요한 지도자로서 스노우덴은 이미 전쟁 이전 4년여 산업소요 시기의 파업행동에 대한 그의 일관되고 거침없는 비난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가 영국 노동자에게 전쟁노력에 반대하기 위하여 그들의 계급 무기를 사용하라고 고취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분명했다!

맥도널드가 전쟁에 반대한 이유를 보자면, 그것은 국제주의 또는 그 문제에 대한 노동계급 이해관계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1914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의 활동의 주된 추진력은, 외무부가 의회에게 보다 책임있게 되어야 한다는 요구 주위로 (대부분 자유당 출신인) 정치인들을 재조직하는 데 목표를 둔 민주적 통제를 위한 연합이라고 불리는 압력 그룹을 운영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정부와 전쟁노력에의 노동당 참여에 대한 그의 태도를 공식화하게 되자, 그의 노선은 평화의 마음이 전쟁기간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과 전쟁의 기원이 어디에 있다고 여기든 우리는 그것을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노동당으로서는 정부 자리에 앉아야 하는 첫 번째 기회를 헛되이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의미였다. 전체적으로 영국의 전쟁참여에 대한 맥도널드의 비판은 선출된 정치인들에 의하여 적절하게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반면 독립노동당 평당원들은 진심으로 전쟁에 반대했다. 그들은 징병반대협회를 뒤에서 밀어가는 힘이었으며, 그래서 그들 중 수백 명이 그 이유로 수감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전망은 평화주의를 넘어 나아가지 못했다. 전쟁노력에 대한 반대가 군수산업에서 터진 파업 때문에 폭발해 나왔을 때, 수십만 노동자가 이 나라에서 있었던 가장 거대한 비관료적 소요사태 속에서 그들의 집단적인 힘을 깨닫도록 허용되었을 때, 노동당의 사회주의 좌파는 그들에게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파업물결의 지도적인 인물들은 종종 이제 막 노동당에 결합한 작은 영국사회주의당(BSP) 또는 완전히 노동당 바깥에 있던 사회주의노동당(SLP) 성원이었다. 그러나 연단으로서 노동당을 사용할 지위에 있는 유일한 사회주의자들이었던 독립노동당의 지도적 인물들은 아무도 노동자의 대중적 반란에 정치적 전망을 제공하기 위하여 연단을 사용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회피는 연단의 이점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연단이 결정적일 수 있을 때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애당초 이러한 연단을 가진 목적이 무엇이란 말인가?

1917년 러시아 노동계급이 그랬던 것처럼 영국 노동계급이 권력에 도전하는 지점까지 도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영국 노동계급은 전쟁에 책임 있는 자들이 바로 전쟁 전에 산업소요의 4년 동안 이미 그렇게 격렬하게 맞섰던 탐욕의 소유자들인 바로 그 자본가들이라는 것, 그리고 미래는 하원에서의 연설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내 세력 사이의 사회적 균형에 특히 정치적 무대에 대한 노동계급 군대의 개입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지점까지는 분명히 도달했다. 아마도 역동하고 있는 노동계급과 (당시 정부 위원회에 안락하게 앉아서 사장들에게 노동계급으로부터 더 많은 땀과 피를 훔치도록 돕고 있었던) 자칭 정치 지도자와 노동조합 지도자 사이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을 훌륭한 기회가 있었다. 아마도 엥겔스가 이십년 전에 주장했던 것처럼 독립적인 계급 강령을 가진’, 즉 그 시기의 조건에서는 혁명적 사회주의 강령을 가진 순수한 대중적 노동계급 정당을 건설할 기회가 있었다. 노동당 좌파는 이 기회를 무시하는 쪽으로 선택했다. 그들은 이미 노동당의 구조를 통하여 자본가 사회 제도 안에 너무 많이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꺼이 그들의 안락한 지위를 위협하려고 할 수 없었다.

 

노동당 좌파의 전성기

 

전쟁의 끝은 다시 한 번 엥겔스의 목표를 현실화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들 수 있는 요소들의 동시발생으로 특징지어졌다. 많은 노동자가 전쟁에 대한 지지를 이유로 노동당 지도부를 청산하려는 판단을 갖고 있었다. 일련의 노동계급 활동가들이 독립적인 현장활동가 조직을 발전시켰고 그 뒤에서 수만 명의 노동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노조 기구들의 활발한 반대에 맞서 수행된 대규모 파업의 경험을 통과했다. 마침내 191710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제기된 거대한 희망이 있었다. 영국 노동계급 속에 사회주의 강령을 뿌리내리기 위한 기회가 그렇게 전도유망한 적은 없었다.

노동당 기구는 자신의 노동계급에 대한 통제를 위협하는 가능성을 잘 깨닫고 있었다. 노동당 재건이라는 거짓 구호 아래, 그들은 사회주의 사상과 노동계급 투사들의 점증하는 영향력으로부터 노동당을 보호하려는 데 주된 목적을 두고 일련의 운동들을 먼저 착수했다. 노동당의 전국집행위원회를 선출하는 규정이 바뀌었다. 전국집행위원회는 이제 전당대회에서 선출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거대한 블록투표를 휘두르는 노조관료들이 독립노동당을 대신하여 누가 전국집행위원회에 들어갈 것인지를 효과적으로 제어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독립노동당을 대표한 맥도널드의 반응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만일 몇몇 거대 노조들의 압제적인 블록투표 사용 때문에 분열이 야기된다면, 나는 정치적 목적으로 새로운 노동당 연합을 형성하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것이다.” 스카길이 당시에 있었다면, 그는 여전히 사회주의 사상을 희생하며 노조 블록투표에 우호적이었을까, 또는 분열을 위협하며 독립노동당에 결합했을까? 하나의 불가사의다.

이듬해, 노동당 지도부는 독립노동당의 지역 지부들과 사실상 경쟁하고 있는 새로운 지역 지부들을 통해 개인들이 노동당에 가입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독립노동당에 맞선 또 다른 선제 조치를 취했다. 전국집행위원회에 4개의 추가 의석이 여성들을 위해 예약된 반면 새로운 지부들을 대표하기 위해 5개의 의석이 예약되었다. 나중에 독립노동당의 두드러진 지도자가 된 페너 브로크웨이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1918년에 노동당의 개인 섹션들이 설립되었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들은 독립노동당과 경쟁을 시작했다. 독립노동당의 대다수는 개인회원[체계]를 건설하려는 노동당의 노력이 바뀌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바람은 스코틀랜드, 브래드포드, 노르위치와 같은 지역에서 강하게 갖고 있었는데, 독립노동당이 강력했던 그 지역들에서 독립노동당은 모든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노동당의 개인회원[체계]로 역할하고 있었다.”

추가로 사회주의 비슷한 언어로 가득 찬 새로운 당헌의 채택을 통하여 전후 현대화론자들은 시대정신에 그들 나름대로 적응했다. 이것은 대부분 시드니 웹의 작품이었는데, 그는 그의 부인 베아트리체가 자랑한 것처럼 그때까지 노동당의 지적 지도자로 보여지고 있었다. 특히 유명한 ‘4는 노동당 당헌에 새로운 좌파적 겉치레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쁜 큰 늑대가 빨간모자 소녀의 할머니로 변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확실히 순진한 사람들을 집어 삼키는 데 목표를 둔 것이었다. 그것은 [러시아 혁명에 의해 이끌리고 있는 것]으로 나아가는 중간역을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될 만큼 충분히 모호했지만, 동시에 웹 부부의 점진주의와 맑스주의를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상징적으로 새로운 당헌을 보증하기 위하여 19186월에 열린 특별 당 대회는 (10월 혁명에 의해 전복된 친자본주의적인 러시아 임시정부의 개량주의 지도자인) 케렌스키를 초청하여 대표자들에게 연설하도록 했다.

한편, 노동계급 속에서 불안이 다시 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마지막 달 서부전선에서 거대한 인명손실과 독일 초계잠수함의 영불해협 차단으로 인한 심각한 식량부족 이후에. 이러한 분위기는 전쟁연립내각이 사임하는 192210월까지 유지되었다. 석탄지대에서, 클라이드에서, 그리고 다른 산업지대에서 지속적인 파업물결들이 있었다.

나중에 공산당의 창당멤버가 되는 아서 호너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전후 투쟁의 후기 국면에서 마디는 작은 모스크바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전체 웨일즈 석탄지대와 영국의 대다수 산업지대는 붉은 색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전쟁기간 주어진 약속들이 깨지고 있다는 늘어나는 증거에 대한 쓰라림과 분노가 있었다.”

사실 호너 자신은 전쟁 이전 웨일즈 석탄지대에서의 사회주의 선동의 산물이며, 독립노동당의 성원이었고, <광산노동자 비공인 개혁 운동>의 의장이었다. 그는 1916년 부활절 봉기의 궤멸 이후에 코널리의 아일랜드 시민군에 입대하기 위하여 아일랜드로 밀항했다. 그는 평화주의가 아니라 맑스주의에 입각하여 전쟁에 반대했으며, 집에 방문하는 동안 체포되어 웜우드 스크럽스 감옥에서 6개월 중노동에 처해졌다. 그는 전쟁에 의해 정치화된, 노동자 가운데 의미심장한 층 사이에서 결코 예외적이지 않았다.

호너가 회상하길, 1920년에 영국의 러시아 간섭에 맞선 노동자 사이에서의 저항은 탄력을 얻기 시작했다. “우리는 간섭 군대에 결합하는 걸 설득당하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늘 호소하는 캠페인을 지지하면서 석탄지대의 모든 부분에서 모임들을 가졌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지원해 준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쟁을 직접적으로 알고 있으며 아무런 관련이 없는 싸움에 연루되지 않아야 한다고 결심한 제대군인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마침내 운동은 매우 강력하게 성장해서 노동당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그것을 인정해야만 했으며, 런던의 부두 노동자가 폴란드에 있는 간섭 군대를 위한 무기 승선을 거부했을 때 정부는 물러서야만 했다.”

독립노동당은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들은 노동당과 관계 단절을 선택할 수 있었으며, 1920년 출범한 새로운 공산당의 건설에 그들의 힘을 실을 수도 있었다. 마치 영국사회주의당(BSP)의 다수가 독립노동당의 규모 있는 소수와 더불어 그랬던 것처럼. 이러한 힘들을 갖고, 러시아 혁명의 배경과 영국의 점증하는 산업불안에 기대어, 공산당의 출범은 노동계급 속에서 사회주의 강령의 부활을 알리는 것이 될 수 있었다. 대신 독립노동당 지도부 중 하나였던 맥도널드는 1922년 노동당 대회에서 새로운 공산당을 공격하는 것을 선택했다. 노동당에 결합하려는 공산당의 시도는 오로지 노동당을 등 뒤에서 찌르려는 목표를 가진 것이라고 선언하고, 그들의 입당을 거절해야 한다고 요청하면서. 그는 노동당 의장과 공동전선을 폈는데,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아시아식 사고방식의 지적 노예라고 묘사했다. 독립노동당에 어떤 부분적인 저항이라도 있었다면 덜했을 것이지만, 그들은 나중에 맥도널드를 한 번 더 노동당 지도자로 추천했다.

192210월 연립정부가 마침내 붕괴했을 때, 산업불안과 실업증가의 한복판에서, 독립노동당은 이 기회를 투쟁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하원에 그들의 의석을 얻기 위해 노동당 권력자들의 환심을 되찾으려 사용하는 쪽으로 선택했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당 승리야말로 노동자가 갈망하는 석탄과 산업의 국유화를 얻기 위한 가장 좋은 길이라고 약속하면서, 노동당 승리를 위한 캠페인에 힘을 쏟았다. 이것은 노동당 그 자체가 정부에 들어감으로써 사회주의로 가는 수단이 될 것이라는 그들의 급진적인 개량주의 접근과 부합했다. 노동계급이 밀집한 글래스고우에서 노동당은 15석 가운데 10석을 차지했는데, 그 모두가 독립노동당 성원들이었다. 더불어 노동당은 162석을 얻었는데, 그중 30석이 스코틀랜드 하원의원들이 차지했다.

글래스고우 하원의원인 제임스 맥스턴은 이제 독립노동당 안에서 주도적인 등불의 하나가 되었다. 그는 그의 혁명적 사회주의어투로 유명했는데, 전쟁기간 치안방해로 감옥에서 1년을 보냈다는 점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붉은 클라이드사이더의 일원이 되었고, 공산주의자 윌리암 갤러쳐와 많은 기반을 공유하고 있었다. 맥도널드에게 의회노동당의 지도자로서 그의 색깔을 보여줄 첫 번째 진정한 기회를 준 것은 맥스턴과 다른 클라이드사이드 하원의원들이었다. 하원에서의 연설에서, 맥스턴은 경제정책의 일환으로 우유·식량 공급과 무료 병원 시설을 철회함으로써 어린이들을 살해했다며 보수당을 고발했다. 그와 다른 세 명이 하원으로부터 정지당했지만, 맥도널드와 야당 주요간부들은 투표에 기권했다. 그때 노동당 지도부는 사과를 거부하고 의회로부터 추방당하겠다고 한 이른바 클라이드사이드 파괴자들에 대한 나름의 군법회의를 열었던 것이다. 맥스턴과 독립노동당은 나라를 가로질러 의회를 혼란시킨 그들의 행동에 지지를 보내는 회합과 시위를 조직하는 구실로 이것을 활용했다. 그것은 실제로 수천 명이 독립노동당에 가입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는데, 그러나 또한 같은 이유로 노동당에도 가입하는 것이었다.

 

말뿐인 독립노동당의 좌선회

 

1920년대 초반부터, 이때부터 더욱 확연해졌는데, 독립노동당은 이 시기에 벌어진 거친 투쟁에서 기인한 노동계급의 정치화로부터 애송이 공산당보다 더 급속한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독립노동당은 상대적으로 후한 급여를 받는 상근 조직가를 가진 전국적인 조직으로 스스로를 세울 수 있었다. 1922년에 독립노동당의 회계담담자로 선출된 클리포드 알렌은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호화로운 본부로 독립노동당을 이주시켰다.

물론 알렌은 급진적이지 않았다. 사실 1920년 소련 방문 후에 브로크웨이에게 설명하면서 그는 레닌의 방법이 너무너무 과격하다는 생각을 밝혔다. 그는 말했다. “우리의 과제는 사회주의로 가는 근본적인 변화를 러시아에서 진행된 것처럼 빠르고 철저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폭력보다는 설득의 방법에 의거해야 한다. 우리는 지성과 호의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돌아서도록 사회주의의 정당성을 매우 설득력 있게 주장해야 한다.”

그는 신문의 이름을 노동자 리더’(Labour Leader)에서 새로운 리더’(New Leader)로 바꾸었다. 목판화가, 이론가, 문학가 등 자연 노트’(Nature Notes) 인물들과 함께 하는 그럴싸한 평론지로 바꾸면서. 그의 목표는 명확히 평범한 노동자가 아니라 중간계급 지식인이었다.

1923년과 1924년 사이에 독립노동당 지부의 수는 637개에서 1,028개로 늘었다. 당시 독립노동당 비서였던 브로크웨이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노동당은 힘의 정점에 이르고 있었고, 부유한 출세주의자들이 후보로 지명되기를 열망하며 우리 주위를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오래된 당들처럼 보상을 얻으리라는 기대로 기부를 제공하면서.”

그러나 독립노동당은 몇 가지 속임수를 갖고 있었다. 그들이 중간계급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한 반면에 그들의 충원은 노동계급으로부터 왔다. 이것은 1923년 새롭게 급진화된 노동자를 끌어들이려고 고안된 당 강령 우리 시대의 사회주의에 사용된 급진적인 어구에 반영되었다. 강령은 모두를 위한 최저생활수입을 주장하면서, 기업들에게 정해진 기간 내에 이것을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강령은 은행, 토지, 광산, 발전과 배전, 수송의 국유화를 주장했다. 최저임금 지급을 거부하는 모든 기업은 국가에 의해 접수되거나 상응하는 공적 통제의 대가로 보조금을 지급받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누가 이런 급진적인 강령을 강제할 것인가? 그들은 말하지 않았다. 추론해 보자면, 그것은 노동당 스스로에 의해 수행될 것이었다. 물론 정부에 들어가면.

맥도널드가 이 강령의 수용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우리 시대의 사회주의라는 제목 하나만으로도 그가 싫어하게 하기에는 충분했을 것인데, 그가 1924년에 의회노동당의 지도부로 취임했을 때 독립노동당은 그것을 매우 행복하게 지지했다. 노동계급은 노동당 정부의 효용성을 판단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를 맞았다. 아서 호너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당시 <기관사·소방관 연합공동체>(ASLEF)는 국가임금위원회가 요구한 기관사에 대한 임금삭감과 근로조건 악화에 맞서 파업을 호소했다. 전국철도노조(NUR)는 임금삭감을 수용했고, 새 정부는 파업을 비공인으로 규정함으로써 빠르게 생각을 드러냈다. 파업이 노동당에 결합된 노조에 의해 호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클린스 2세는 파업에 대한 접근에서 정부가 계급’(class) 정부로서가 아니라 민족’(national) 정부로서 행동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항만 노동자가 파업했을 때, 어네스트 베빈은 차라리 보수당 정부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의 위협에 그렇게 소스라치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독립노동당이 노동당 정부에게 있다고 주장한 장점이란 이런 것이었다!

맥도널드 정부가 몰락하고 나서야, 맥스턴은 그에 맞선 도전을 감히 제기하고 나섰다. 192510월 맥도널드는 사회주의 평론편집인의 지위를 박탈당했고, 1926년 부활절에 맥스턴은 사상 최대 다수로 독립노동당 전국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맥도널드에 의해 대표된 점진주의에 맞서 맥스턴의 진정한 사회주의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맥스턴의 진정한 사회주의가 어떻게 달랐는가? 독립노동당 지도부 자리를 수용하면서 맥스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회적 경제적 상황에 변화를 야기하는 데서, 또한 빠르지만 재앙 없는 사회주의를 위해 일하고 보급하는 데서, 인간의 마음과 의지에 결정적인 요소로서의 강조점을 두는 것이 독립노동당의 입장이다.” 그러나 물론 그 결정적인 요소는 의회에서 노동당이 다수파를 이루는 것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것은 모호한 휴머니스트 공식이었으며, 독립노동당이 노동당의 (매우 확실하게 그 전투적인 부분이 아니라) 착한 사회주의 양심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보다 중요하게, 그것은 누구든 그가 이해하기 바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있어 충분히 모호한 것이었다. 이것은 독립노동당의 급진적으로 들리는 강령을 넘어 맥스턴, 즉 노동당의 근본적인 목표를 비판하는데 나서려고 준비되어 있었던 이른바 붉은 클라이드사이더까지였다. 이를테면 의미심장하게도 이 붉음은 맥도널드가 구성원 자격을 계속 유지하는 걸 독립노동당이 허용하는 것에 대해 결코 막지 않았다.

 

 

총파업, 또다시 놓친 기회

 

1926년에 독립노동당은 이른바 좌파의 수중에 있었다. 관료들에게 주는 높은 급여는 중단되었고, ‘새로운 리더’(New Leader)'는 일시적으로 휴간되었다. 그때 총파업, 즉 급진적인 조직이 계급투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전례 없는 기회가 왔다.

1926년 메이데이 때 광부들이 마침내 직장폐쇄를 당했다. 정부는 노동조합회의(TUC)의 총평의회 성원들과 항상 교섭을 하고 있었으며, 노조 지도자들이 책임지고 총파업을 원한다는 걸 매우 정당하게 믿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데일리 메일>에서 일하는 인쇄 노동자가 광부들을 비난하는 사설의 인쇄를 거부했을 때, 정부는 엄포에 대항하기 위해서 TUC와의 교섭을 중단했다.

그래서 그 유명한 9일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소수파 운동이 TUC 공식 지도부의 반대에 맞서 3월말 이래 투쟁위원회들(councils of action)을 준비하려고 시도해 왔었으나, 매우 제한된 범위에서만 성공하고 있었다. 스탈린의 대외정책에 의해 고무되고, ‘모든 권력을 총평의회로라는 슬로건에 표현된 그들의 파멸적인 전략은 노동자를 (최소한 공산당으로부터는) 어떤 지도도 받지 못하는 상태로 남겨두고 말았다.

그러나 독립노동당은 무엇을 했는가? 맥스턴은 스코틀랜드 노동당 의원들을 이끌고 노동자를 투쟁으로 조직하기 위하여 글래스고우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폭동에 참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노동자에게 명확히 했다. 그는 일주일 후에 다음과 같이 광부들을 지지하는 선언을 발행하기 위하여 런던으로 되돌아 왔다. “전국 평의회는 산하 1,100개 지부들에게 광부들에 대한 처분 앞에서, 그리고 영국의 노동자가 역대 가장 큰 투쟁을 벌이고 있는 노동조합 운동 앞에서 기탄없이 스스로를 걸어야 한다고 호소한다.”

그렇다. 독립노동당은 TUC의 처분 앞에서 스스로 수동적으로 임했으며, 심지어 파업 기간 TUC 공식 신문의 편집과 출판을 맡았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페너 브로크웨이가 선임되어 원만하게 처리하도록 맨체스터로 보내졌다. 그리고 512일에 그는 특별한 편집을 하기를 기대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그들이 받았던 파업 중지 선언에 대한 메시지를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요청받은 문구를 만들었으며, 그리고 그 문서는 배포되었다. 결과적인 분노를 갖고 그는 나중에 위선적으로 말했다. “파업의 끝은 혁명의 시작이었을 수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그가 내렸던 평가는 단지 TUC가 정부에 의해 오도된것이라는 얘기였다. 확실히 독립노동당에는, 진행될 수도 있었다고 브로크웨이가 느꼈던 이 혁명에 지도를 제공하려는 어떤 경향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공산당이 다가가려고 노력했던 좌파 노동조합 지도자들에 의한 노동계급의 배신에 직면하여, 그 중대한 국면에 필요했던 것은 독립적인 계급적 전망이었다. 많은 노동자는 심지어 파업 중지 선언 이후에도 파업을 지속했다. 실제로 일부 지역에서는 파업 중지 선언 이후에 오히려 파업이 확대되었으며, 광부들은 이듬해까지 파업을 지속했다. 독립노동당은 확실히 파업기간과 그 직접적인 여파가 남아있는 동안 많은 지역에서 설립되었던 투쟁위원회들’(councils of action)을 통하여 대안적인 전망을 제공하려는 최소한의 시도를 단행하는 데 있어 실질적인 수단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택했다. 그래서 체제에 맞서 승리를 기록할 수 있었던 노동계급의 또 다른 기회는 패배와 사기저하로 끝났다. 그리고 독립노동당은 이 패배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비록 그 책임이 노동조합회의(TUC)보다는 덜 두드러진다 하더라도.

 

분열을 향하여

 

1928년 노동당의 새 강령 <노동당과 민족>은 국유화를 뒷전으로 밀어 넣는 눈에 띄는 우선회로 노동계급의 패배를 반영했다. 스노우덴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우리의 사회주의를 주로 가장 훌륭한 전문가들과 사업가들에 의해 공공을 위하여 통제되는 공공법인을 통하여 얻게 될 것이다.” 블레어가 말하는 사적 기업과의 파트너십하고 닮은꼴은 전혀 우연이 아니었다.

1929년 총선거는 맥도널드가 이끄는 또 다른 노동당-자유당 연립정부를 만들었다. 맥도널드는 그의 계획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동당 정부는 윈스턴 처칠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당 대회는 실업에 대한 준비는 인도적이며 적절한 것으로서, 노동자 기부금이나 생산비용을 건드리지 않고 국가 보조금에 의하여 추가적인 비용을 지불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견지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한 모든 조치를 취한다는 공약을 승인했다. 그러나 노동당 정부가 한 모든 것은 남에게 의지해야 하지만 실업자는 아닌 사람들에 대한 수당을 약간 증가시킨 것뿐이었다. “진정으로 구직활동을 하지 않는 자구절은 삭제되지 않았다. 이것은 독립노동당으로 하여금 그들 나름의 최소 요구들을 의회에 상정하게 이끌었는데, 사실 그 요구들은 선거 이전 노동당의 약속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1930년에 맥스턴은 노동당 정부에 맞선 투표와 연설 때문에 시느웰 같은 독립노동당 하원의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는 독립노동당 성원 다수의 지지를 겨우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1930년 버밍햄에서 열린 연례 대회에서 독립노동당 지도자로 다시 선출되었으며, 정부에 맞선 투표에서 그가 취한 입장이 승인되었다. 그러나 독립노동당 소속 하원의원 140명 가운데 17명만이 이 결정을 이행하는 데 동의했다.

노동당의 차기 대회가 열렸을 때, 독립노동당은 여전히 대담한 사회주의 강령을 도입하고 자본가 정당들에게 용감히 맞서라고 정부에 요청하는 것보다 더 믿을만한 정책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당의 정책이 갖는 노동계급적 본질에 대해 명확히 폭로하는 것을 그만 두는 것이었다.

마침내 정부 안에서 30만 명의 실업자들이 수급권을 상실하도록 만드는 삭감 조치의 이행을 둘러싸고 충돌이 있었다. 맥도널드가 즉석 선거라고 불렀던, 보수당과 자유당과 노동당 하원의원 소수가 참여하는 민족 연립정부가 형성되면서. 노동조합 기구들은 맥도널드의 민족적노동당에 의하여 노동당 기구에서 실행된 밀착에 반대하여 자기 성원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노동당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를 단행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좌파가 상황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좌파에게도 적대적 조치를 취했다. 독립노동당 후보들은 선거에서 노동당의 승인을 얻는 데 실패했고, 독립노동당 하원의원으로 단지 세 명만이 선출되었다.

다음 대회에서 독립노동당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분열되었다. 일부는 즉시 노동당을 떠나 코민테른에 가입하자는 것을 지지했다. 결국 다수파는 독립노동당 정책을 표현할 자유가 보장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하면서, 노동당 내에 머무는 쪽에 표를 던졌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 밝혀지면서, 19327월 브래드포드에서 독립노동당의 특별 대회가 열려 탈퇴가 62% 다수의 표를 얻었다.

브로크웨이는 독립노동당이 노동계급 속에 자신의 뿌리가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독립노동당 성원인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노동조합 지부에서 열린 정치토론에 참여하는 것을 자주 허용 받지 못했으며, 그들이 갖고 있던 공식 지위로부터 제거되었고, <노동조합·노동당 연석회의>에서의 그들의 파견자 지위를 사임해야 했다고 불평했다. 처음으로 독립노동당 활동가들은 공산당 활동가들이 수년 동안 견뎌왔던 동일한 취급을 노조관료들로부터 경험하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공산당원들은 그들의 입장을 견지하였던 반면에, 독립노동당 성원들은 그러한 드라마틱한 변화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에 많은 이들이 이러한 억압의 결과로 독립노동당을 떠났다는 것이다.

 

개량주의와 혁명 사이에서

 

독립노동당은 그 성원들 내에서의 불일치로 충만해 있었다. 브로크웨이는 이 시대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이러한 내부 투쟁의 과정에서 독립노동당은 많은 방향을 실험했다. 한 때는 코민테른에 접근했고, 또 다른 때에는 트로츠키주의 입장으로 이동했다. 어느 국면에서는 통일전선에 희망을 걸었고, 또 다른 국면에서는 순수주의로 되돌아갔다. 한 시기에는 소비에트를 준비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했고, 다른 시기에는 의회의 가치를 다시 인정했다... 1932년부터 당은 개량주의에서 혁명주의까지 왔다 갔다 하는 가혹한 시련을 겪었다. 모든 생각과 모든 전술이 그 시련의 도가니 속에 내던져졌고, 스스로 빠져 나왔다. 그것은 세계 운동을 매우 깊게 휘저었던 모든 이론과 실천이 충돌하는 소우주였다.”

물론 독립노동당은 스탈린주의 공산당이 그랬던 것처럼 혁명을 위한 가능성 있는 시련의 도가니 이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확실히 국내적으로 국제적으로 이러한 발전들에 영향을 미친 많은 것들이 있었다. 하나의 예로, 당시 히틀러가 독일에서 당선되었고, 일련의 활동가들은 노동당의 의회주의 노선을 거부하면서 혁명적 수단을 갖고 파시즘의 성장과 싸울 필요성을 보기 시작했다. 이러한 급진화는 공산당과 독립노동당 양자에게 새로운 활력을 제공했다.

트로츠키가 독립노동당을 의회주의와 혁명 사이 중간에 있다고 묘사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물론 그는 지도부가 아니라 오래 전에 자기 선택을 했던 구성원들에 관해 얘기한 것이었다. 그들은 노동당 내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얻어질 단기 이득의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노동계급 속에 하나의 경향을 형성하기 위해 노동당으로부터 이탈하는 선택을 했었다. 그들은 일정한 영향력을 획득하기를 희망했고, 마침내 급진화된 노동자를 끌어들였지만, 국내 정치 무대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지 못한 채로 남아 있었다. 그들은 너무 급진적이라고 여겼던 트로츠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스탈린주의의 그물 속에 사로잡혀 있었다.

동등한 기초 위에서의 독립노동당과 공산당의 단결을 제안했던 것은 공산당의 해리 폴리트였다. “공산당은 대중적인 혁명적 정당을 건설하는 데 실패했다. 독립노동당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함께 한다면 그것을 할 수 있다.” 그래서 1933년 독립노동당 대회는 당의 전국평의회가 독립노동당이 어떤 방식으로 코민테른의 일을 도울 수 있는지를 확인하도록지시하는 것을 근소한 표차로 가결시켰다.

그러나 코민테른과 일련의 길고 세부적인 서신 교환 후에, 차기 대회는 동조가입(sympathetic affiliation)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거부했다. 이것에도 불구하고 독립노동당 의장 브로크웨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하는 대처 없이 공산당과의 통일전선에 빠져 들어갔었다.” 그는 다양한 캠페인과 실업자 시위에서, 수급권 삭감과 임대료 분쟁, 비공인 파업을 둘러싼 포괄적 선동에서 공산당과 협력하는 것에 대해 폴리트에게 설득되었었다.

그러나 이것은 독립노동당 성원들 내에서 다시 분열을 야기했으며, 공산당 지도자들이 히틀러 정권에 의해 수감되어 있고 공산당원들이 총살당하거나 수용소에 갇혀 있는데도 스탈린이 독일과의 무역협정에 서명했을 때 독립노동당은 격분했다. 러시아가 국제연맹에 가입하고 프랑스 정부와 정치적 군사적 동맹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을 때, 브로크웨이는 공산당으로부터 독립노동당의 거리를 벌리기 위하여 도둑놈들의 소굴이라는 국제연맹에 대한 레닌의 묘사를 사용했다. 그의 주장은 의심할 바 없이 약간의 위선과 공산주의로 오염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독립노동당 성원들 사이에 스탈린주의에 대해 존재했던 순수한 의심들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모스크바 재판이 열렸다. 브로크웨이는 주장했다. “스탈린은 그의 비판자들을 숙청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재판은 소비에트 러시아를 위해서는 나쁜 일이다. 가장 우호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사회주의자들이 모든 곳에서 희망했던 자유롭고 행복하며 단합된 사회와 거리가 먼 어떤 것이 러시아에서 건설되고 있다는 적대와 억압의 그림을 마음속에 남긴다.” 그러나 이것은 독립노동당이 1936~7년 이른바 일치단결 캠페인속에서 공산당과의 통일전선에 다시 가입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이것의 배후에 있는 생각은 독립노동당과 공산당이 노동당 가입단체로서의 용인을 얻는 것이었다. 이 캠페인에서 그들은 아직 노동당 내에 있던 좌파 그룹이며 스태포드 크립스 경이 이끌던 <사회주의 동맹>과 결합했다. 이 캠페인은 실제로 많은 성원들과 일반 대중 사이에서 심금을 울렸다. 수만 명이 좌파의 단결을 지지하여 서약 카드에 서명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자들의 속임수는 곧 <사회주의 동맹>의 해체로 귀결되었으며, 모스크바 재판이 계속되고 독립노동당의 스페인 자매조직 <맑스주의 통일노동자당>(POUM)에 대해 코민테른에 의해 조직된 억압에 관한 소식이 도착하였을 때, ‘일치단결 캠페인은 붕괴되었다.

이 시기의 끝에, 전쟁의 전야에, 독립노동당 성원 수는 전례 없이 줄어들었다. 지도부의 동요와 더불어 조직화를 위한 어떤 명확한 전망도 부재하다는 점은 독립노동당의 급진적인 언어를 믿었었던 많은 이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다른 많은 이들은, 특히 그 청년 조직에서, 적어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공산당으로 넘어갔다. 다른 중요한 부분은 그때까지 노동당이 야당이니까 최소한 보수당의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데 있어서는 그들이 보다 효과적일 것이라고 느끼면서 단순히 노동당에 재가입했다. 한동안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급진적인 사상과 급진적인 수사를 가지고 장난이나 치고 있었던 한줌의 개량주의 지도자들이 보인 비일관성 때문에, 상당한 정도의 순수하고 급진적인 에너지와 열정이 낭비되어 버렸던 것이다.

 

또 다른 전쟁, 또 다른 배신

 

역사는 스스로 반복되지 않으며, 2차 세계대전으로 만들어진 정치적 상황은 1차 대전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혁명적인 고조는 세계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1916년 이후 비공인 현장 활동가 운동과 더불어 일어났던 사건과 같은 노동계급 속에서의 상대적으로 구조화된 전쟁반대 운동의 출현을, 전쟁의 마지막 몇 년은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번 경우에는 전쟁의 종결에 의해 열린 정치적 기회가 확실히 보다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몇몇 기회들은 있었다. 이를테면 1944년의 초반 몇 달처럼. 2월에 10만 명의 광부들이 사우스웨일즈에서 비공인 파업에 돌입하였고, 이어서 요크셔에서 8만 명이 뒤따라왔다. 그리고 3월 말에는 5만 명의 기술 견습공들이 광부들의 부족을 줄이기 위해 청년 노동자를 갱으로 내려가도록 강제하려는 계획을 포기하도록 베빈을 압박하면서, 북부지방 도처에서 파업에 들어갔다. 그 해 말, 전쟁 시기 파업금지법에 반대하는 캠페인은 노동계급 거주구역에서 매우 많은 청중을 끌어들였다. 계급반란이 곧 터질 것 같은 신호는 없었을지 모르지만, 노동계급 속에 성장하고 있는 전투성과 정치화, 다시 한 번의 대량학살에 책임 있는 자들에게 원한을 풀겠다는 결심에 관한 명확한 신호가 있었다.

이러한 발전을 준비하면서, 독립노동당과 노동당 좌파가 한 일은 무엇인가? 우선 노동당 좌파는 공산당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도중 내내 전쟁노력을 지지하였다. 다음으로 독립노동당은 1차 대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수동성과 평화주의에 뒤섞여 스스로 무덤을 팠다. 독립노동당의 성원 수는 명백히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하원의원 네 명과 사회주의 운동에서 가장 이름 있는 인물들 몇몇을 보유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들의 성원 수는 조그마한 <노동자 국제동맹>, 즉 그 지도자들이 견습공들의 파업 조직을 지원하는 데서 한 역할 때문에 체포되어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던 트로츠키주의 그룹의 수보다 작을 수는 없었다. 맥스턴과 다른 이들이 이따금씩 하는 불같은 연설 이외에 전쟁 기간 동안 독립노동당이 더 높은 태도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은, 1930년대 후반에 그들을 형편없는 쇠퇴로 귀결시켰던 것과 동일한 정치적 선택을 한 결과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노동당 정부의 가능성이 현안으로 부상하자마자, 노동당 바깥과 안에 있는 좌파들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대중들 사이에 있는 변화에 대한 갈망을 건드릴 뿐인 노동당 지도부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를 제공하기 위하여.

독립노동당을 이끄는 인물들 가운데 다수는 이제 노동당 후보로서 뛸 위치에 있지 않다는 점을 쓰라리게 후회했다. 그들은 재가입을 요청하기 위하여 즉각 노동당 지도부에게 접근했다. 그들은 먼저 자기 집부터 정돈하라고 얘기를 들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1944년 견습공 파업 건설을 지원하는 데서 트로츠키주의자들과 함께 일했다는 이유로 비난받은 독립노동당 타인사이드 조직의 대부분을 포함하여 다수의 문제아들을 대열에서 추방함으로써 예의바르게 행동했다. 독립노동당은 심지어 총선거에 단지 5명의 후보만을 내세우고 다른 곳에서도 노동당에 투표해 달라고 거리낌 없이 호소하는 추가적인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람이 없었다. 노동당 지도부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고, 독립노동당의 야심에 찬 정치인들은 황야에 남았다. 사실 오래지 않아서 그들 대부분이 개인적으로 노동당의 품 안으로 돌아갔으며, 거기서 결국 상당한 경력 만들기를 허용 받았다. 아무런 정책을 갖지 않으면서 이제 독립노동당은 어떤 지도자도 없어졌으며, 어떤 정치적 역할을 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반면, 당시 아마도 노동당 좌파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던 웨일즈의 애뉴어린 베반은 다가오는 선거를, “거대 기업과 민중 사이의 권력을 향한 진정한 투쟁이며 승리로 가는 핵심은 노동당이 정부를 구성하도록 투표하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배로우인퍼니스에서, 또 다른 노동당 좌파 후보는 오로지 사회의 완전한 사회주의적 이행만이 우리 시대의 경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매우 정확하게 주장하면서 더 멀리 나아갔으나, 다가오는 노동당 정부에 대해 뻔뻔스럽게도 보통사람들의 확고한 후원을 받는 사회주의 정부는 빈곤과 불안정을 영원히 떨쳐버리게 될 새로운 계급 없는 사회를 향한 길을 포장할 사회주의 조치들을 도입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좌파로부터의 열광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서, 전쟁 시기 연립정부의 내무장관 허버트 모리슨은 BBC에 나온 다음 성명에서처럼 몇몇 널리 알려진 민중선동을 할 수 있었다. “만일 국가가 거대 기업에게 출동 명령을 내려야 한다면 국가는 그것을 해야만 한다... 거대 기업은 공공의 필요에 따른 통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노동당은 영국 부르주아지의 더러운 일을 하면서 정부에서 6년을 보냈다. 자본주의 착취의 나사를 다른 쪽으로 돌리는 대신 노동계급의 일부를 전쟁이라는 도살장으로 보내면서. 그러나 그것은 아직 노동당 좌파에게 충분하지 않았다. 노동당 권력자들에 대한 그들의 굴종을 입증하고 그 호의를 얻으려는 광련에 빠져, 그들은 비참했던 만큼 뻔뻔스러운 거짓말에 의지해야만 했다. 노동계급에게는 고난과 박탈이었던 6년의 뒤를 이으면서.

그러나 마침내 하나의 정치적 경향으로서 노동당 좌파는 그들의 비겁함으로부터 아무런 이득을 보지 못했다. 대체로 그들은 1945년 노동당 정부에 살아남지 못했으며, 오히려 이 시기를 지나면서 노동계급과 어떤 실질적 연결도 잃어버리고 그래서 정치적 무대에 실질적 비중을 가질 어떤 기회도 잃어버린 다른 유형의 경향으로 되었다.

 

커다란 신화

 

그 선거가 노동당 좌파에게는 거대 기업과 민중 사이의 권력을 향한 진정한 투쟁을 의미하는 것으로 상상되었던 이 사회주의 정부의 이미지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노동당 내 좌파와 우파를 막론한 모든 경향에게 남아 있다. 투표함이 노동계급을 위하여 뭔가 놀라운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아서 스카길의 사례를 포함하여. 하지만 1945년 정부는 역대 노동당 정부 가운데 가장 억압적이고 압제적인 정부였음이 결국 드러났다.

국유화, 국가보건시스템(NHS)의 창설, 사회보장제도 등 이른바 애틀리 정부가 성취한 것의 실질적인 중요성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루지 않겠지만, 이것들이 전쟁 시기 경제의 논리적 연속으로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계획들이 오래 전에 문제를 다룬 자본가 서클들에서 논의되고 동의되었었다는 점은 말해야겠다. 애틀리 대신 처칠이 수상이었다 해도, 이러한 계획들은 어떤 식으로든 아마도 더 철저히 이행되었을 것이다. 보수당은 노동당과 달리 자본가 계급을 당황하게 하리라는 두려움을 갖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측면에서 처칠이 결정권을 쥐고 있었다면, 노동계급은 노동조합 관료들에 의해 손이 묶이고, 계획들 가운데 가장 수용할 수 없는 측면들조차 반대하지 못했던 일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영국 부르주아들에게 지급한 거대한 보상금, 복지국가 아래서 실업자와 노령자에게 수여된제도화된 만성적 빈곤에 대해서.

애틀리 정부의 정책에는 노동당 정부만이 노조 관료들의 도움을 얻어 노동계급에게 부과하려고 희망할 수 있는 다른 많은 측면들이 존재했다. 예를 들어 전쟁 시기 군대 동원을 평화 시기인 1950년대까지 지속했다. 무엇을 위하여? 해외의 일부 전체주의 정권을 쳐부수기 위하여? 아니다. 그리스 공산당에 의해 주도된 대중봉기를 때려 부수기 위해서, 또는 영국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이란의 석유지대를 점령하기 위해서, 또는 중동, 버마, 말레이시아, 그리고 마침내 한국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궤멸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심지어 독일에서조차 중단된 이후에도 영국에서 1954년까지 강제되었던 식량배급은 말할 것도 없이 노동자 임금에 대한 심각한 압력이었고, 그래서 임금은 정부 임기 내내 평화 얻기라는 잘 알려진 슬로건 아래 묶여 있었다.

영국 부르주아들의 해외 제국주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하여, 그리고 국유화된 산업의 주주들에게 지급되어 그들이 신흥시장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한 보상금을 위하여, 누군가는 지불해야 했다. 노동당은 다른 누가 아니라 노동계급이 그 금액을 지불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이러한 부도덕한 내핍에 저항하는 노동자는 단지 사장과 국가만이 아니라 모든 정치가들과 노조 관료들에 맞서야만 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군대와도 맞서야 했다. 애틀리 정부는 6년 조금 안 되는 동안 14번이나 파업을 진압하러 군대를 파견했는데, 이는 이후 어떤 정부보다도 훨씬 많은 것이었다. 그리고 정권의 후반기에 노동당이 자기 나름의 목적을 위하여 미국에서 맥카시 상원의원에 의해 시작된 빨갱이 사냥을 사용하기로 선택했을 때, 그 주요한 타겟은 다시 한 번 노동계급 대열 내에서 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있던 전투적 활동가들이었다.

그렇다. 오히려 전후 노동당 정부는 20세기 영국에서 나타난 가장 반동적인 정부 가운데 하나였으며, 정부를 구성할 당시 노동계급 속에서의 열망과 비교해 본다면 확실히 가장 반동적인 정부였다. 그러나 노동당 좌파는 심지어 말로라도 그 정책에 저항했는가? 아니다. 그들은 정부의 대외정책과 새로 출현하는 두 진영에 대한 관계를 둘러싼 한가한 다툼에 머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19472월에 석탄 배급이 도입되었을 때, 노동당 좌파는 노동자에게 너무 부드럽게 하고 있다면서 애틀리를 공격했다. 이와 관련 해롤드 라스키는 데일리 헤럴드에 다음과 같이 썼다. “수영, 개 경주, 주중 축구로 수천 명의 노동자를 낭비할 수는 없다. 매우 솔직하게 마주쳐 보자. 우리는 한 세대 안에 두 개의 세계 전쟁을 치를 수는 없으며, 고통의 시간을 갖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물론 자본가 계급은 그럴 수 있었다! 이 시기 가장 두드러진 좌파 분파가 등장하게 된 것은 이 이슈를 둘러싸고서였다. “Keep Left” 그룹은 마이클 풋, 이안 미카도, 해럴드 윌슨, 짐 캘러헌 등과 같은 인물들을 포함하였는데, 그들 모두는 차기 노동당 정부에서 각료 또는 당 간부에 이르렀으며, 윌슨의 경우에는 단지 몇 주 만에 그렇게 되었다. 이 그룹의 주요한 행동은 영국이 위기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수출을 전쟁 이전 수준보다 높은 65%로 증가시키는 것이며, 그러한 수준에 이르기 위해 보다 열심히 일하려는 노동자의 에너지가 전쟁시기 합동생산위원회의 부활을 통해 결집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팜플렛을 발행하는 것이었다. 전쟁 기간 노조관료들이 노동계급에게 군사적인 규율을 강요하는 수단이었던 바로 그 합동생산위원회 말이다. 부르주아들의 경제 약탈에 대한 노동당 좌파의 유일한 응답은 노동계급을 군사화하는 것이었다!

1951년 국가보건시스템(NHS)에서 처방료를 부과하도록 하는 것에 저항하며 베반이 극적으로 노동당 정부 각료직을 사임하였고, 해럴드 윌슨을 비롯한 다른 좌파들이 뒤를 이었다. 의심할 바 없이 이러한 제스처로 그들은 일정한 신뢰를 얻었다. 그러나 만일 노동당 정부의 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시점에 그것이 일어났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정치인들은 늘 이미 가라앉고 있을 때 보트를 뒤흔드는 일을 매우 잘 한다. 그의 모든 재능으로 볼 때, 애뉴어린 베반도 예외가 아니었다.

 

노동당의 좌파 그림자

 

1951년에 노동당 관료들은 국가기구 내로 전례 없는 수준으로 통합되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구조를 형성하는 무수한 위원회와 제도에 참여함으로써, 노동당 관료들은 민중으로부터, 노동당과 노조 성원들로부터, 그리고 양당 체제 덕분에 투표할 다른 어떤 믿을만한 정당을 갖지 못한 노동계급 유권자들로부터 의미심장한 수준의 독립성을 가져다 준 사회적 비중을 획득했다. 이러한 독립성은 심지어 노동당이 야당이 된 기간에도 그렇게 크게 약화되지 않았다. 1979년 이래 보수당 정부가 16년 연속 집권한 기간에도. 노동당과 노동조합 내부의 우경화에 의해 지난 10년 동안 가장 생생한 방식으로 나타난 것처럼. 물론 지난 10년 동안 노동계급 속에서의 낮은 수준의 전투성과 정치화는 오로지 관료들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데 공헌해 왔을 뿐이다.

이러한 변화야말로 노동당 좌파가 1930년대까지 즐겼던 잠재적인 비중을 전쟁 이후에는 결코 다시 얻을 수 없었던 주된 이유다. 한편으로 정치인들이 노동계급의 전투적이고 사회적인 열망을 표현하는데 자신의 경력을 거는 것은, 그러한 열망이 계급투쟁 속에서 의미심장한 힘으로 대표되지 않는 한 위험한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열망이 노동당 내에서 목소리를 갖도록 노동당 권력자들이 허용하게 할 만한 동기가 거의 없었는데, 그들 자신의 사회적 비중이나 정부로 돌아갈 그들의 기회가 노동계급의 적극적인 지지에 달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동당 내에서 최근 몇 년간 일어난 우경화는, 토니 블레어 아래서 보다 노골적으로 되었지만 오래 전에 키녹 아래서 시작되었던 것으로, 단지 같은 현상의 다른 실례일 뿐이다. 그것은 10년간의 매우 낮은 수준의 전투성이 부르주아들로 하여금 노동계급의 열망에 가장 하찮게 관련되는 것조차도 덜 관용적일려고 하게끔 만든 상황에 대한 노동당 관료들의 자발적인 적응을 반영한다. 그리고 노동당 관료들은 기꺼이 기쁘게 해 주려고 한다. 비록 그것이 스카길 같은 몇몇 작은 노동조합의 지도자들, 또한 이러한 전환으로 인해 그들의 노동당 내 비중이 약화될 수밖에 없는 다른 우파 노동조합 임원들을 당황스럽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더라도.

1951년 이후 노동당 좌파의 훨씬 무기력한 역사를 일일이 거론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 그들이 존재했던 것의 창백한 그림자일 뿐이었다는 점만 말하겠다. 그들의 활동은 핵무장 해제, 여성의 권리 등 사회의 계급간 세력균형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당 지도부의 정책에도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이슈들에 주되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심지어 불만의 겨울1979년 총선거 이후 1980년대 초반에 짧은 시기 동안 그들이 일정한 힘을 다시 얻었을 때조차도, 노동당 좌파는 노동계급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다. 노동계급이 부르주아들의 이윤 드라이브에 저항하고 효과적인 반격을 기획하도록 할 필요성이라는 (그 때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진정한 이슈보다는 명목상의 제스처에 집중하면서.

1950년대와 1960년대의 풋주의자들 또는 1980년대의 스키너주의자들과 벤주의자들 등 노동당 좌파의 지도적인 인물들은 맥스턴 같은 선배들에 비하자면 단지 그림자들일 뿐이었다. 그들은 연설을 할 수는 있었지만, 독립노동당이 1930년대에 했던 것 같은 노동계급 속에서 관심과 지지를 끌어내는 것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지지를 건설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대비하지 않았기에, 심지어 그것을 갖는 데서의 실패를 걱정하지도 않았기에, 노동당 좌파는 그것이 노동당 권력자들에게 유용할 때 노동당을 위해 좌파 이미지를 제공하고, 그것이 요구될 때 무조건적인 후원을 보내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것으로 한정되었다.

 

 

위기와 노동계급

 

이것은 대조적으로 스카길과 사회주의노동당(SLP)에 의해 사용되는 전투적인 언어들이 왜 불만에 찬 노동당 활동가들과 지지자들에게 새로울 수 있으며 어떤 환상을 만들 수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사실 스카길에 의해 사용되는 전체 수사는 그의 정치적 선택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남기지 않는다. 노동계급의 열망을 진정으로 대표했었다면서 노동당의 신화적인 좋았던 옛날로 돌아가자는 그의 주장, 노동조합 블록투표와 당헌 4조의 긍정적 역할에 대한 그의 이상화, 사회 변화의 필요성을 그러한 변화가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지를 한 번도 자세히 설명하지 않은 채 자주 언급하는 것, 이러한 모든 것들은 노동당 좌파가 늘 노동당 지도부의 정책들 앞에서 자신의 포기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했던 오래된 신화의 수정판일 뿐이다.

1932년 독립노동당 분열의 경험은 위기의 시기에 의회주의 정치에 지배되어 있으면서 급진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또한 노동당 바깥에 있다는 것이 독립노동당이 노동당 좌파의 전통을 고수하는 것을 막아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1932년의 독립노동당은 그 손에 오늘날의 사회주의노동당보다는 좀 더 많은 재산을 갖고 있었다. 지도적인 활동가들의 질과 경험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노동계급 사이에서의 그 영향력이라는 점에서 공히.

사회주의 노동당이 내일 무엇이 되어 있을지, 노동당과 노동조합 성원들로부터 얼마나 세력을 얻게 될지, 노동계급 대열로부터 얼마나 신선한 세력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지에 대해 우리는 오늘 말할 수 없다. 스카길은 지금 노동당이 정권을 잡기 전에 사회주의노동당에 큰 세력보강이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마찬가지로 그 때가 되면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의미심장한 부분을 끌어당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그의 계산이 정확한 것으로 입증될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사회주의노동당이 현재 모습을 유지한다면, 이럭저럭 더 많은 세력들을 끌어들이고 더 많은 희망을 만들어 낼수록 그 정책이 노동계급에게 해악적임이 드러날 것이다.

이십년 이상 구축되어 온 위기와 이 나라 노동계급의 상당한 부분의 삶에 이미 영향을 미친 자본가 계급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서, 노동계급은 스스로를 무장하고 자기 대열을 결집시킬 효과적인 무기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미래의 전투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사장들과 노동당을 비롯한 정부안의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관료기구들과도 맞설 능력에 전적으로 달려 있을 것임을 어떤 모호함도 없이 이해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대다수 노동자가 노동조합 지도자들에 대해 의심하는 것과 필요하다면 그들에 맞서 조직하려고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준비되어 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것은 확신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일련의 경험들을 관통하는 걸 필요로 한다.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아마도 작은 규모에서, 그러한 방향으로 진정한 시도들이 만들어지고 교훈들을 배우면서. 아마도 많은 부분적 패배들을 대가로 치르면서. 이것은 정확히 노동계급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대표하려고 목표하는 정당이 스스로 세워 가야 할 주요한 과제들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리고 예상과 다름없이 스카길은 이러한 문제를 주의 깊게 피해 왔다. 그는 미래는 말할 것도 없고 지난날과 오늘날의 노동조합 지도부의 정책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정당을 출범시킨다. 그리고 아마도 사회주의노동당은 이것에 대해 침묵을 지킬 것이다. 스카길 자신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노동당 설립자들 가운데 다수의 그의 동료들, 즉 그들의 모습이 나머지 노동조합 관료들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노동조합 관료들에게 익숙한 자들과 더불어.

좀 더 폭넓은 수준에서, 가두에서 공장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전투에 단지 하나가 아니라 많은 부분의 노동자를 대열로 결합시키며 참여시키는 거대한 대결에 몰두하지 않고서, 노동계급이 위기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일부 되찾기 시작할 수 있다는 환상은 치명적일 수 있다. 자본가 계급은 심각한 압력 아래서는 임금 요구에 대해 심지어 큰 규모로까지 굴복할 수 있다. 최근 수년 동안 그들의 이윤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보다 더 멀리 나가려면, 그리고 이것이 잃어버린 것들을 일부 되찾기 시작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인데,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게 필요하다.

이를테면 이 나라에서 20년 동안 지배적이었던 대중실업을 의미심장하게 축소시켜 내는 것을 노동계급은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그다지 많은 가능성이 있지는 않다. 하나는 최소한 이윤을 내는 기업에서는 추가적인 일자리 삭감에 대한 효과적인 금지를 강제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장들에 의해 지급되는 새로운 일자리들을 만드는 것과 모든 노동자 사이에서 누구도 임금삭감 없이 일의 양 나누기를 강제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모든 종류의 채널을 통해 사적 이윤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데 매년 사용되는 수백억 파운드의 국가 기금이 공공서비스에서 필요한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하여, 적당한 주택과 운송 등을 건설하기 위하여 국가에 의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제하는 것이다. 어떤 길이 선택되든 그것은 자본가들의 현재와 미래 이윤이 엄청나게 감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어떤 회사가 일자리 삭감을 허용 받아야 할 것인지, 어떤 회사가 그리고 얼마나 많이 일자리를 창출하도록 명령받아야 할 것인지, 누가 결정할 것인가? 공무원들? 회계사들? 노동조합 지도자들? 아니면 사장들 스스로? 그들 가운데 누구를 믿을 수 있는가? 이것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스스로에 의한 회사 재정의 직접적인 통제가 실제로 필요하게 될 것이다. 실업의 성장을 멈추기 위해서는 오로지 최소한의 비상조치들을 이행하는 이 모든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요구이긴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은 것이다.

정부가 이러한 조치들을 이행할 정치적 의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만일 누군가가 순진하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어떻게 그것들을 자본가 계급에게 강요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왜 사회주의노동당 강령의 희망적인 사고를 갖고서는, 불가사의한 사회주의정부가 그 마술 지팡이를 사용하여 자본가 계급에게 자신의 법률을 강요하게 될 개혁에 대한 믿음을 갖고서는, 노동자 계급은 오로지 패배의 길로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는가의 이유다.

따르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다고 그들이 느낄 만큼 매우 강력한 노동계급의 결집과 매우 불리한 사회의 계급 사이 세력균형에 마주치지 않는 한, 부르주아들은 이처럼 매우 중대한 문제들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그 시점에서 혁명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자본주의 시스템에 노동자의 통제를 강제한다는 스스로의 목표에 대한 명확한 의식으로 결심하고 무장한, 다시 말하면 노동계급을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실로 혁명의 길이라는 것을 단호하게 결의해 온 정당의 혁명적 강령으로 무장한 노동계급에 의한 사회적 반란을 뜻할 것이다.

 

옮긴이: 양준석

  1. Socialist Labour Party : 사회주의 노동당. 1996년 노동당이 국유화를 명시한 당헌 4조를 폐기하자 이에 반발하여 전국광산노조 지도자 아서 스카길을 중심으로 설립된 정당. IS 계열의 SWP(Socialist Workers' Party)와는 전혀 다른 당이다. -역자 [본문으로]
  2. 원문: http://www.union-communiste.org/?EN-archp-show-1996-7-425-2080-x.html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