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오늘날 중국에서 천안문의 기억과 노동자 투쟁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4월호

오늘날 중국에서 천안문의 기억과 노동자 투쟁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5. 15:02

오늘날 중국에서 천안문의 기억과 노동자 투쟁1

 

Keith Markin

 

 

중국과 관련하여 세계를 통틀어 가장 뜨거운 논란이 되는 주제들 가운데 하나는 중국이 자본주의 사회인가 아니면 사회주의 사회인가 이다. 1989년 봄에 일어난 천안문 봉기의 의미는 중국에 관한 또 다른 논란의 주제이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중국이 아주 안정된 사회는 아니라는 점이다. 중국의 지식인이 발행한 하나의 중국, 많은 진로라는 아주 적절한 제목을 붙인 책이 이러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나는 이 책의 주장들을 참조할 것이다.

중국경제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 중국은 세계에서 제1의 철강생산국이 되었다. 아울러 중국은 몇몇 나라를 빼고는 사회적 불평등이 점점 커지는 나라다. 어떤 사람들은 3만 달러의 차를 현금으로 살 수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 특히 지방과 서부 지역 사람들은 비참한 빈곤 속에서 살고 있다. 동부와 남부해안지방의 부유한 삶은 가장 현대적인 안락함을 누리고 있다.

중국식 사회주의의 건설이라는 거짓말로 1995년부터 2002년 사이에 중국에서는 국가소유 기업들에서 15백만 개의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졌다. 매춘이 크게 늘었고 지방에서는 여아 살해가 만연하고 있다. 1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연소득 106달러 미만으로 살고 있다. 미국의 경지면적이 중국과 견주어 약 40퍼센트 이상 작지만 중국의 노동력은 미국에 견주어 100배 이상 많다. 또한 중국은 미국에 비해 1/6미만의 트랙터를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끔찍한 조건이 13천만이나 되는 중국 농촌인구가 동부와 남부해안지방에서 일자리를 찾는 이주노동자가 되도록 압박하였다.

노동자는 더는 국영기업들에서 일자리와 소득이 보장되는 철 밥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수백만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은 중국 북동부를 여행하고 있는 한 저널리스트는 지난날 보통노동자는 오늘날의 신용카드나 특권적 지위와 같은 것으로서 소개장에 기초해서 병원에서 훌륭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역사를 알지 못하는 중국의 젊은 노동자에게 전설과 같은 것이다.”

스탈린주의 정권은 1989년의 천안문봉기를 분쇄하고 나서 몇 년을 기다린 뒤에 제국주의와 연안 자본가들을 위해 노동력을 공급하는 기능을 스탈린주의 관료체제의 역할로 삼는 자유무역지대의 증대와 같은 좀 더 공격적인 시장정책을 시작했다. 그러나 노동자와 농민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경찰의 보고에 따르면 1993년부터 1999년까지 연간 8,500건에서 32,000건으로 항의시위가 증가하였다. 비공식적인 중국보고에 따르면 대중의 항의시위는 지난 3년 동안 해마다 늘어났다.

2002년 봄 북동지방에서 수천 명의 노동자가 대대적인 해고, 임금과 연금 체불에 맞서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이 지역은 중국 산업의 중심지였으나 사양 산업지역이 되었다. 항의시위에서 산업노동자군대는 생존을 바란다!” “연금 횡령은 범죄다!”와 같은 구호를 담은 플랭카드를 내걸었다.

천안문 봉기의 망령은 점점 더 커져갔다. 이로 인해 후진타오-원자바오 정권은 기술관료적인 장쩌민정권이 그랬던 것보다 더욱 더 대중적인형식을 채택해야만 했다. 중앙정부는 노동자를 달래려고 동북지역에 투자를 약속해왔다.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것은 사회적 투쟁을 통해 결정될 것이다.

영국에 중앙을 둔 좌파그룹 사회당의 지도자 피터 타페는 2년 전에 중국공산당 16차대회에 대해 중국은 완전한 자본주의로 복구의 길에 있지만 지배파벌은 이것을 서서히 그리고 자신들의 억압적인 독재의 손아귀를 유지하면서 시도하고 있다.”(20021122, 사회주의자)고 말했다. 혁명적 공산당과 같은 중국 밖의 마오주의자들과 신마오주의자들은 중국이 자본주의이고 얼마 전에 자본주화 되었다고 믿는다.

관료기구 안의 신마오주의자들은 정책의 변화를 통해 관료기구를 개혁할 수 있길 바란다. 그들은 중국을 여전히 사회주의사회로 여기지만, “시장사회주의경제에 대해 반대한다. 중국의 신좌파는 이질적이다. 대부분 시장경제를 지지하지만, 혼란, 부자와 가난한 자들 사이의 차이 등과 같은 시장의 결과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반세계화운동의 일부로 여긴다. 중국 신좌파의 잘 알려진 대변인인 왕휴이는 천안문운동이 일어나고 난 뒤 중국이 자본의 독재와 시장의 활동에 완전히 순응했다고 말한다. 우리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중국의 신좌파가 그려낸 중국의 이러한 성격들과 결론에 완전하게 동의한다.

나는 오늘날 세 가지 점을 명확하게 하고 싶다. 첫째로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중국은 경제의 중심이 집단 소유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관료적으로 기형화된 노동자국가이다. 이것은 제국주의와 내부 반혁명에 맞서 국제공산주의 동맹이 중국을 무조건적으로 군사적 방어를 주창하는 기초이다. 둘째로 중국에는 노동자의 국가를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특권적인 관료적 특권계급이 존재한다. 관료의 시장사회주의 정책은 자본주의로 복귀 또는 새로운 혁명적 폭발을 위한 길을 놓고 있다. 중국의 천안문 봉기는 물론이고 최근의 계급투쟁 동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기형화된 노동자국가의 모순과 관료기구의 이중적 성격을 보여준다. 셋째로 중국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임무는 스탈린주의나 마오주의적으로 타락한 정당이 아닌 혁명정당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 혁명정당은 노동자계급이 노동자민주주의를 수립했던 노동자계급 정치혁명이었던 1949년 혁명에서 획득한 것들을 방어하기 위해 노동자, 농민들, 억압받는 사람들을 이끌어야만 한다. 그러한 정당을 위한 정치적 문제의 핵심은 중국 노동자계급이 일국 사회주의라는 민족주의 교리와 단절하고 국제주의, 노동자계급의 전망을 획득하도록 하는 것이다. 맑스주의를 위한 이러한 새로운 것들을 위해 나는 다만 이것이 의미하는 모든 것들을 설명할 뿐이다.

 

 

맑스주의란 무엇인가?

 

국제공산주의동맹(4인터내셔널)은 혁명적이고 국제적인 노동자계급의 경향이다. 우리는 맑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의 정책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논쟁들은 맑스주의를 마오주의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

내가 말하고자하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다른 정치적 경향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몇 가지 맑스주의의 기초에 대해 설명하려고 한다. 무엇보다도 맑스주의는 과학이다. 메리엄 웹스터(Merriam-Webster) 사전은 물리학을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그 상호작용을 다루는 과학으로 정의한다. 맑스주의는 국제 노동자계급 혁명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과학이다. 그것은 계급투쟁에서 계급의 역관계와 국제 노동자계급의 정치의식을 다룬다. 맑스주의의 출발점은 자본가들과 노동자의 이익이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나는 이미 앞질러 나갔다. 여러분은 이렇게 묻는다. 즉 계급이 무엇인가? 레온 트로츠키를 인용하도록 하겠다. 레닌과 함께 러시아혁명을 이끈 그는 노동자혁명을 이론의 영역에서 끄집어내어 현실성을 부여했다. 소비에트국가의 계급적 본성에 대해 트로츠키는 계급이 무엇이며 왜 중국 관료기구가 계급이 아닌가에 대해 설명한다(그는 과거 소련을 참조했다).

맑스에게 계급은 매우 중요성을 가지며 게다가 과학적으로 엄격한 의미를 갖는다. 계급은 국민소득분배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정의내릴 수 없으며, 전체 경제구조에서 독립적인 역할과 사회의 경제적 기초에서 독립적 뿌리에 의해서 정의된다. 각 계급(봉건 귀족, 농민, 소자본가, 자본가, 노동자)은 고유의 특별한 소유형태를 결정한다. 관료기구는 이러한 모든 사회적 특성을 결여하고 있다. 그들은 생산과 분배과정에서 독립적 지위를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독립적인 소유의 뿌리를 갖지 않는다. 그들의 기능은 기본적으로 계급지배의 정치적 기술과 관계된 것이다. 그들의 형태상의 모든 다양성과 특별한 비중차이에서 관료기구의 존재는 모든 계급정부를 특징짓는다. 관료기구의 권력은 반영된 성질의 것이다. 관료기구는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계급과 파기할 수 없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의 사회적 뿌리로부터 생명력을 얻고 그것과 함께 유지되고 몰락한다.”

또 다른 중요한 맑스주의적 관점은 국가에 관한 것이다. 국가는 무장한 인민들과 특별한 소유양식을 방어하는 제도로 구성된다. 자본가국가는 공장, 자연자원, 은행(생산수단으로 불리는)에 대한 사적소유를 방어한다. 자본주의 생산은 사적자본을 위한 최대의 이윤을 기초로 한다. 노동자국가는 생산수단에 대한 공동소유를 방어한다. 생산은 실제로 사회의 필요성에 기초를 둔다. 노동자국가의 또 다른 이름은 노동자계급독재이다.

국제 노동자혁명을 통해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체제는 생산수단에 대한 공동소유체제로 교체된다. 사회주의혁명은 토착자본가들과 제국주의에 맞서 집단소유를 방어하기 위한 노동자국가를 건설해야만 한다.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지배를 제거하기 위해서 사회적 반혁명은 자본주의 국가의 재수립, 자본가들의 계급독재를 필요로 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인류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것은 현대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이끌었다. 인류는 세계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되었지만 제국주의 전쟁을 낳는 자본가들과 그들의 생산체제는 제거되어야할 장애물이다. 맑스주의는 국제 노동자혁명을 통해 전 세계의 의식주의 결핍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사회주의는 물질적 풍요에 기초를 둔 계급이 없고, 평등한, 국제적인 경제체제이다.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전 세계의 결핍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1949년의 중국혁명과 러시아혁명은 모두 생산수단에 대한 집단적 소유와 이러한 소유형태를 방어하기 위한 노동자국가를 수립했다. 소련과 중국에서 집산화된 경제는 사회진보로 도약할 수 있는 기초, 특히 여성들을 위한 기초를 놓았다. 중국에서 여성들의 비참한 지위를 상징하는 야만적인 전족 관습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두 혁명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존재했다. 191710월의 러시아혁명은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끈 계급의식적인 노동자에 의해 수행되어, 가난한 농민들의 지지를 획득하였고, 국가권력 장악을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향한 첫 걸음으로 바라보았다. 중국혁명은 마오가 이끈 농민게릴라전의 결과였다. 중국에서 노동자는 권력에 대한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투쟁하지 않았다.

1949년 혁명은 마오의 중국공산당 정권하에서 그 출발부터 기형화되었다. 마오는 중국의 스탈린이었다. 중국노동자국가의 정치제도는 1923~24년의 노동자에게서 정치권력을 강탈한 소련의 특권적 관료기구로 대변되는 스탈린의 제도를 모델로 했다.

관료기구는 기생충처럼 집산화된 경제의 꼭대기에 자리를 잡으면서 그 모든 특권들을 획득했다. 이것인 우리가 관료적으로 기형화된 노동자국가로 묘사하는 것의 모순된 성격의 기초이다. 중국, 쿠바, 베트남, 북한은 모두 기형적인 노동자국가들이다. 스탈린 관료기구가 1923~24년에 정치권력을 강탈하기 전에 소련에서는 노동자민주주의가 존재했기 때문에, 우리는 소련을 기형적인노동자국가라기보다는 타락한노동자국가로 그 성격을 규정한다. 알다시피 볼셰비키 당은 1917년에 노동자와 병사들의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획득했다. 중국, 쿠바, 북한, 베트남에서는 노동자민주주의가 결코 없었다.

그 모든 특권이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소유에 기원하고 있기 때문에 관료기구는 노동자 계급의 이름으로 지배한다. 그것은 노동자국가의 꼭대기에서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보존할 수 있는 범위에서 노동자국가를 방어한다. 그렇게 그것은 그 고유의 방식으로 노동자국가를 방어한다.

관료기구는 노동자의 국제적 혁명전망에 대해 반대한다. 스탈린주의 관료들은 물질적 풍요에 기초를 둔 국제적이고, 계급이 없는 평등한 사회인 사회주의가 일국에서 건설되었다는 일국적 교의를 채택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관료기구가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세계제국주의 순응함으로서 노동자국가에 대한 기생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관료기구의 정치적 지배를 대신하여 노동자국가의 정치적 형태를 노동자민주주의로 바꾸기 위해서는 사회혁명이 아니라 정치혁명이 필요하다. 국가의 경제적 기초는 그대로 유지된다.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의 또 다른 중요한 차이는 러시아 자본가들이 계급으로서 분쇄되었지만 중국 자본가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만과 홍콩에 있는 제국주의와 협력하는 연근해 자본가들은 중국에서 반혁명을 위한 주요한 세력이며 스탈린주의 관료기구들은 이들 세력들을 강화시킨다.

중국에서는 이제 출간된 우리의 글 중국: 제국주의의 반혁명 공세를 저지하다!(20031121, 125)에서 우리는 왜 중국이 관료적으로 기형적인 노동자국가인지를 설명한다. 그것은 집산화된 주요 요소들이 경제에서 확고하지는 않지만 지배적인 것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에 일치하는 태도이다. (외국인이 소유한 것을 포함하여) 사적 부분은 대부분 노동집약적 방식에 의해 경공업제품을 생산하는 공장들을 구성한다. 중공업, 하이테크 부문, 술집약적 부문, 현대적 군수품 생산부문은 압도적으로 국영기업들에 집중되어있다. 중국이 미 제국주의의 핵무기 선제공격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해 핵무기와 장거리미사일을 비축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이들 기업들이다. 또한 중국에서 주요은행들은 국가가 소유하고 있다. 금융체계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국영기업에서 생산을 유지하고 확대하며, 국영부문의 전체적인 확장을 위한 핵심적 역할을 해왔다. 북경의 관료기구가 해외무역에 대한 국가의 엄격한 독점을 포기한 것은 월스트리트가 반혁명 계획을 촉진할 수 있도록 돕는다. 전 세계 제국주의 세력들이 제거하고 분쇄하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중국 경제의 핵심인 이러한 집산화된 요소들이다.

ICL은 이들 기형적 노동자국가들이 집산화된 소유를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제국주의와 국내 자본가들의 반혁명에 맞서 이들 국가들의 군사적 방어를 위해 무조건적으로 싸운다. 그것은 우리가 중국 방어의 조건으로서 스탈린관료기구의 전복을 내걸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과 세계의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만일, 미국, 일본, 독일의 노동자가 집산화된 경제와 같은 중국혁명이 획득한 것들의 역사적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그 자신의자본가들에 맞서 혁명을 만드는 것의 중요성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대만이 중국과 혁명적으로 통일하는 것을 추구한다. 이것은 대만에서의 사회주의 혁명, 홍콩에서의 자본가 재산의 징발, 본토에서 노동자 정치혁명을 의미한다.

 

천안문, 노동자 정치혁명의 시작

 

무엇보다도 천안문 봉기의 배경이자 그것을 빚어낸 중국에서 세 가지 주요사건들은 문화혁명(1966-76), 미국과의 반소련 동맹, 1978년에 시작된 시장개혁이다.

마오의 문화혁명은 1980년대에 걸쳐 중국 노동자, 농민들, 학생들, 지식인들의 정치의식을 규정지은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두 날개들 사이의 싸움이었다. 마오주의자들은 1950년대 후반에 마오의 대약진이 가져온 파괴적인 결과로부터 회복하는 동안 중국을 이끌어 온 관료기구의 보수적 파벌(유소기와 등소평이 이끌었던)을 쫓아내야만 했다.

수백만의 학생들이 관료주의에 맞서 싸우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그리고 러시아공산당에 의하면 자본주의로의 복귀에 맞서서 홍위병으로 동원되었다. 그것은 현실에서는 전혀 다르게 행동했다. 1967년에 상해의 노동자가 자신들의 생활수준을 방어하기 위해 전국철도파업과 함께 총파업을 조직했을 때, 마오는 홍위병을 보내 파업을 분쇄했다. 홍위병들이 마오로부터 받은 명령은 두 가지 무엇이든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마오 주석이 내린 정책결정은 무엇이든지 지지하고 마오 주석이 내린 지시는 무엇이든지 따라라

계급사회에는 그 사회가 만들어낸 지배자들은 오직 머리로 일하고 노예들은 오직 손으로 일한다는 편견이 존재한다. 중국 지식인들의 이러한 계급적 편견을 학생들, 지식인들, 교수들을 일정기간동안 농촌으로 보내 농민들과 함께 고난을 배움으로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실제로 장점을 갖는다. 그러나 마오의 관료기구의 도구가 되어 이것은 마오에게 동의하지 않는 많은 이들, 특히 지식인들과 교수들을 오랜 기간 동안 잔인한 처벌수단이 되었다.

문화혁명은 관념적으로 혁명적인 청년학생들을 생활수준을 방어하고자하는 노동자에게 대항하도록 하는 잘못된 노선에 따라 중국사회를 분열시켰다. 스탈린주의 관료체제 하에서 이 싸움에서 혁명가들이 선택할 다른 길은 없었다. 천안문 압살 때보다 문화혁명기에 더 많은 민중들이 죽었다. 그러나 러시아공산당은 마오의 문화혁명에 대해 환호했다.

마오가 죽은 이후 관료기구의 등소평 파벌은 정부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장악했다. 1978년에 시작된 시장개혁은 농촌의 부유한 농민과 중소기업가라는 새로운 계급을 탄생시켰다. 이것은 도시들에서 실업을 증가시키면서 오늘날 중국에서 존재하는 거대한 부의 격차를 위한 기초를 놓았다.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시장개혁의 열렬한 지지자들이었다. 등소평은 문화혁명을 비난했고 이것은 1980년대 초반에 지식인들 사이에서의 논쟁의 시기를 촉발시켰다. 이 시기에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형성된 전망에 대한 주요 흐름은 정통 맑스주의로 생각했던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 대체로 바라보았던 신계몽주의로 불리는 것으로 나아갔다. 천안문에서 항의하는 학생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신계몽주의지식인들은 중국역사에 대해 별로 알지 못했다. 그들은 서구 사상을 개혁과정에 단순하게 도입했다. 특히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민주주의가 필연적으로 시장경제와 함께할 것이라는 커다란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맑스주의자는 민주주의를 국가의 정치형태들 가운데 하나로 바라본다. 앞서서 언급했던 것처럼, 국가의 계급적 본성은 경찰과 군대가 방어하는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형태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 맑스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언급할 때 우리는 물어야만 한다? 어떤 계급을 위한 민주주의인가? 많은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미국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가졌다. 이것은 중국의 미제국주의와의 동맹에 의해 조성되었다.

중국의 신좌파왕휘는 신평론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중국이 계속해서 해외무역에 개입하면서 등소평의 개방정책은 더욱 더 깊이 중국을 세계시장으로 편입시키고자 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그 과정에서 일어난 중대한 발걸음은 1949년에 중국인민공화국이 세워지고 나서 첫 번째 침략전쟁인 1979년 베트남 침공이었다.” 중국이 베트남을 침략했을 때, 미국의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중국,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되지 마라!”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왜 중국이 베트남을 침략했는가? 첫째로 그것은 베트남노동자와 농민들이 미국을 그들의 나라 밖으로 내몬지 단지 4년이 지난 일이었다. 이것은 미 제국주의가 군사적 패배를 당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중국에서도 자원병들이 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기 위해 베트남에 건너갔다.

문화혁명동안에 마오의 중국은 소련에 대해 매우 적대적으로 바뀌었다. 마오는 미 제국주의가 아니라 소련이 가장 큰 세계적 위협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1972년에 닉슨대통령의 베이징을 방문을 이끌어냈고, 그가 마오와 포옹하는 바로 그 순간에 미국 전투기는 베트남을 폭격하고 있었다! 베트남은 소련과 긴밀한 동맹국이었다. 1979년의 베트남 침공(그런데, 그들은 경험 많은 베트남 군대에게 패배를 당했다)뿐만 아니라, 중국은 CIA가 후원하는 아프카니스탄의 무자헤딘을 원조했다.

마오와 등소평은 모두 사회주의가 일국에서 건설될 수 있다는 민족주의적이고 반맑스주의적 교리에 기반한 거대한 열망을 공유했다. 미국과의 범죄적인 중국의 반소련 동맹은 거꾸로가 아니라 미국이 중국에 대한 정책을 변화시켰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일국사회주의는 제국주의에 대한 순응을 필요로 한다. 중국과 미 제국주의의 동맹은 타락한 소비에트 노동자국가의 파별에 기여했다. 소련의 핵방패가 없었다면 정말로 중국혁명은 미 제국주의의 핵공격에 직면했을 것이라는 점은 사실이다.

시장개혁으로부터 부가 증대된 것은 중국 사람들 가운데 매우 작은 부분의 일일 뿐이다. 치솟는 인플레이션은 일반화된 경제적 격차와 부패를 격화시켰다. ‘신계몽주의는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자오 쯔양이 이끈 정부는 반부패 캠페인을 시작했지만 학생들은 더 실질적인 캠페인을 요구했다.

중국내에서 미국식 민주주의와 미 제국주의의 선의에 대한 환상은 1972년에 사라지기 시작했다. 19892월 중순에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적군을 철수시켰다. 천안문 시위는 약 두 달 후에 시작되었다.



천안문 점거는 415일에 죽은 전 공산당총서기 후야오방 기념집회와 함께 시작되었다. 후야오방은 그가 몇 안 되는 개인적으로 부패로 더럽혀지지 않은 지도 간부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폭넓게 존경받아왔다. 청년들은 그들이 정부나 정당에 반대하는 것이 아님을 표현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을 위한 요구를 내걸었다.

54일에는 30만 명의 사람들이 천안문에 보여 들었다. 그날은 반제국주의 학생시위가 시작되었고 2년 후에 중국공산당이 설립되게 된 1919년의 54운동 70주년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198954일에 시위 학생들과 노동자는 혁명적노동자의 노래 인터내셔널가를 함께 부르고 있었다. 어떤 사회적 힘도 없었고 노동자계급이 결집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학생지도자들은 54일 시위에 이어 정부가 양보하도록 압박하기 위해 단식투쟁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단식투쟁에 대한 공감이 517일에 또 다른 거대한 집회를 이끌어냈다. 이 집회에는 북경 인근의 공장노동자가 대중적으로 참가했다. 매우 작은 사회세력과 함께 학생들은 들끓고 있던 중국노동자의 경제적 불만에 불을 붙였다. 노동자는 과거에는 보장되었던 일자리와 사회보장기금이라는 자신들의 철밥그릇에 대한 공격과 치솟는 인플레이션에 대해 무언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북경노동자자치연합과 같은 관료기구로부터 독립적인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북경 노동자자치연합은 임금인상, 물가안정, 공산당 내의 부패척결을 요구했다. 그들은 최고위 당간부들의 사적 소득과 재산을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힘은 그들의 잠재되어 있던 혁명적 본성을 보여주었다.

등소평과 그의 정부를 위한 살인청부업자 리펑은 학생들의 시위에 대해 공감하고 있던 노동자를 낙담시키고 협박하기 위해 북경철강 노동자를 찾아갔다. 리펑과 등소평이 520일에 계엄령을 선포하게 만든 것은 총파업의 위협이었다. 38사단은 소위 반혁명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 군대는 북경에 머물면서 군중들을 향해 이동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제 막 탄생한 중국노동자의 조직들은 계엄령 선포에 대한 저항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억압에 맞서 항의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동자 피켓단결사대를 구성했다. 학생들과 노동자는 병사들과 우애를 나누었다. 북경의 거리들은 정치에 대해 토론하고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는 평범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길거리에서 경찰은 사라졌다.

베이징에서 정부의 영향력이 증발된 이후, 노동자 그룹들은 식량을 포함한 필수품수송과 같은 필수공공서비스와 공공안전에 대한 책임을 떠맡기 시작했다. 한 인민해방군 장군그룹은 등소평에게 항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군대는 정치적으로 분열되었다. 사회혁명에서 현장노동자가 간부들과 분열되는 것처럼 수평적으로가 아니라 수직적으로 분열되었다. 이것은 노동자정치혁명 초기에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두 주 동안 계엄령은 실행되지 못했다.

63일에 등소평은 계엄령을 실행하기 위해 27사단을 동원할 수 있었다. 살육이 시작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64일의 이른 아침에 군대가 천안문에 도달했을 때, 그들의 첫 번째 표적은 서쪽 끝에 자리 잡고 있던 노동자의 천막들이었다. 한 학생지도자는 탱크들이 북경노동자자치연합의 천막들을 짓밟으면서 20명의 노동자를 죽이는 것을 보았다. 도시 노동민중에 대해 행한 전쟁과는 대조적으로 대부분의 학생들은 처벌을 받지 않고 천안문광장을 떠나도록 허락해 주었다.

왜 잔인한 진압은 바로 무엇보다도 노동자를 향했는가? 스탈린주의 관료들은 집산화된 경제에 기초를 둔 기생 계급이다. 관료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재산소유권을 자신들의 아이들에게 넘겨줄 권리와 같은 자본가 지배계급의 사회적 통제를 위한 무수한 실타래와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의 권력은 정부기구에 대한 독점적인 정치적통제로부터 나온다. 그들은 노동자의 이름으로 지배를 주장하기 때문에, 어떠한 독립적인 노동자조직에 대해서도 묵인할 수 없다. 어떤 진정한 노동자운동도 필연적으로 스탈린주의 관료체제의 정당성에 대해 도전한다. 이것은 모든 기형적 노동자국가의 모순이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숫자를 정확히 집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거의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거나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군대의 테러는 반란을 중단시키는데서 실패했다. 실제로 그것은 처음에는 결사대들이 중국 전역에서 폭발한 것처럼, 전반적인 노동자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공식적 집계만으로도 항의 집회는 80개 도시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확고한 지도부의 부재로 봉기는 결국 국가의 공격에 타격을 입게 되었다.

 

 

천안문의 교훈

 

왕휘는 “1989년의 사회운동과 중국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뿌리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운동이 실패한 직접적인 원인은 국가의 폭력적 억압이었다. 그러나 운동은 또한 그 정치적 민주주의를 위한 요구와 힘을 결집시켰던 사회적 평등을 위한 요구 사이의 간극에 다리를 놓을 수 없었던 무능력이라는 간접적 실패의 원인을 내재했다.” 이것은 매우 통찰력 있는 분석이다. 어떤 정치 강령이 이 간극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었을 것인가?

문화혁명기에, 사회는 학생들과 노동자로 양분되었다. 천안문에서 학생들과 노동자는 관료기구에 대항하여 함께 항의행동에 나섰다. 노동자 정치혁명을 위해 싸우는 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 정당들만이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평등을 위한 요구들 사이의 간극에 다리를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노동자 그룹들은 관료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로서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것을 뛰어넘지 못했다. 과거 투쟁의 교훈들을 노동자의 정치의식 속에 불어넣을 수 있는 혁명정당이 필요했다.

군대가 계엄령 수행을 거부했던 두 주는 필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다. 정치적 진공의 시기였다. 심지어 미약한 중국 볼셰비키 조직이라도 특히 1989년의 그 두 주 동안에는 결정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민중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도시를 통제하기 시작한 이중권력의 초기상황은 정치권력을 위한 투쟁으로 전진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비공식적인 노동자 회의들을 공공연하게 반혁명적인 경향들을 제외한 모두에게 공개된 노동자평의회로 바꾸기 위한 투쟁을 의미할 것이다.

레닌은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자신의 국가를 조직하고 운영하도록 돕는 노동자와 민중 스스로의 직접적인 조직으로 설명한다. 이주노동자는 이러한 형태의 조직이 농촌공동체들로 확산되도록 돕는 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직들의 전국적 협동은 스탈린주의에 맞서면서 자본주의로의 복귀에 맞서는 결사적인 싸우는 노동자민주주의 혁명정권을 위한 기반을 가질 수 있었다.

국민당을 찬양하는 구호를 내세운 이들을 포함하여 때때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먹혀들게 할 수 있었던 공공연한 반동적 분자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지도부의 부재 때문이었다. 사회주의적 열망은 민주의 여신상으로 대변되는 미국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커다란 환상과 섞이곤 했다. 그러나 초기부터, 보다 많은 민주적 권리와 부패의 청산으로 집약된 항의자들의 요구는 본질적으로 노동자국가체제 내에서의 평등이었다. 노동자는 장개석이 아니라 모택동과 주은래의 초상을 들고 천안문 광장으로 행진했다.

볼셰비키 당이었다면 노동자, 병사들, 학생들의 승리를 위해서 일국사회주의의 민족주의에 정면으로 맞서서 마오와 등소평은 단지 반소비에트 관료체제라는 동전의 양면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것은 동유럽, 중국, 북한, 베트남, 쿠바와 같은 타락한 노동자국가, 기형적 노동자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군사적 방어를 위해 세계의 노동자사이에서 호소력을 만드는 중요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중국에서의 정치혁명은 일본과 남한에서부터 서유럽과 미국, 특히 소련에서, 전세계 노동자가 타오르도록 만드는 불씨가 되었을 것이다.

혁명적 노동자1999년 발행물에 실린 인터뷰에서, 1989년에 천안문봉기에 학생으로 참여했던 리민기는 그가 봉기로부터 배운 교훈과 어떻게 맑스주의를 신념으로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처음에 나는 중국학생들 사이에 존재했던 일반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우위를 공유했다. 학생운동은 대중적인 민주화운동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517일에 실제로 노동자가 거리로 나왔을 때, 나는 이것이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점점 더 혁명적인 상황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발전에 대해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운동 속에서 나는 이미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학생지도부는 감히 노동자를 불러 모으지 않았고 감히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조직화로 나아가지 않았으며 그것은 운동의 패배라는 결과를 불러왔다. 그래서 나는 내가 믿어 왔던 것, 내가 인정하고 있던 서구의 이데올로기와 서구형식의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마도 어떤 대안적인 사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명백한 대안적 사상은 맑스주의다.”

등소평 정권은 그를 구속했고 2년간 감옥에 가두었다. 그는 이제 마오주의를 대안으로 바라보는 대신, 패배로부터 부분적으로 잘못된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는 중국의 민족주의가 새로운 중국자본주의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중국은 자본주의국가가 아니고 현재 중국 민족주의의 기초는 일국 사회주의에 있다. 대담을 기록한 하나의 중국, 여러 길에서 그는 중국의 베트남과의 1979년 전쟁에 대한 관점에 대해 질문을 받자, 그는 그 문제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경험은 천안문봉기동안 자신들의 사회적 힘을 행사한 노동자계급의 충격이 어떻게 일부 학생들의 정치의식을 변화시켰는지를 보여준다. 혁명적 맑스주의 지도부와 함께 노동자계급은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오늘날 천안문의 망령, 지식인과 노동자계급의 투쟁

 

봉기가 분쇄된 지 몇 년 후, 관료체제는 그들의 시장정책을 공격적으로 밀고 나갔다. 1993년과 1999년 사이에 시장개혁에 대한 항의행동은 4배로 증가했다. 1990년대 말에는 시장개혁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투쟁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 분열이 발생했다. 신자유주의 지식인들과 중국공산당 내 강경파들은 본질적으로 천안문 진압을 지지한다. 그들은 만일 운동이 중단되지 않았다면 중국은 더 부유한 국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 지식인들은 자신들과 대립하고 있는 신좌파가 대중의 조건이 악화되는 것에 대해 반대했기 때문에, “신좌파에게 맑스주의자들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들은 역시도 천안문 봉기에 대한 진압을 반대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충분한 사유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중국은 여전히 사회주의국가라고 불평한다. “신좌파는 중국을 자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사유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왕휘는 중국이 1997-98년 동아시아 금융-경제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유일한 국가였기 때문에 다른 자본주의국가와는 다르다는 점을 인정한다. 왕은 이것이 민족국가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태국과 남한 역시도 민족국가들이었다. 왕휘는 국제주의와 맑스주의는 낡은 옷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이 금융-경제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능력은 집산화된 소유구조에 있었다. 금융시스템에 대한 지속적인 국가소유는 화폐자본이 중국을 드나드는 데 대해 (완전히는 아니지만) 중국정부가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중국화폐 위안(인민폐라고도 불리는)은 자유롭게 태환할 수 있는 화폐가 아니다. 국제화폐시장에서 그것은 (합법적으로) 거래되지 않는다.

서구 제국주의의 교활한 대변자들은 금융시스템의 사유화와 특히 국제화가 중국공산당 정권의 은행장악을 깨뜨리기 위해 필요한 발걸음으로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료들은 자본가들의 영토인 홍콩을 통한 양방향으로의 불법적인 화폐거래가 보기 드물게 확대되었다는 사실을 통제할 수 없다. 홍콩의 금융자본가들과 다른 부문의 자본가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은 중국경제를 제국주의 은행들의 파괴적은 공습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사활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과거 소련의 반혁명에 뒤따른 맹렬한 사유화를 사례로 들면서, 왕휘는 불가침적인 사유재산권을 표현하는 중국헌법 수정에 대한 논란을 언급했다. “10년 사이에 재산권문제는 중국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회문제가 되었다. 사유재산이 법에 의해 보호받아야만 한다는 원리에 대해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론은 없었다.” 왕휘는 사유재산이 핵심적 문제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해하지만, 그와 신좌파는 잘못된 결론을 이끌어낸다. 신자유주의자들과 그들 간의 차이는 재산을 모으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불법적으로 재산을 모으는 것을 허용한 반면 신좌파는 그것에 대해 반대한다. 이것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의미한다. 왕휘는 토지사유화 문제로 나아가면서 모순에 처한다. 그는 만일 토지가 사유화된다면 일반 농민들은 하룻밤 사이에 황폐화될 것이라고 인정한다. 맑스주의자들은 가난한 농민들과 함께 토지의 사유화에 맞서는 것에 이해관계를 가진 유일한 계급은 노동자계급임을 이해한다.

2004년 봄에 열린 전국인민대회는 시민들의 법적인 재산권은 불가침의 권리이다.”라고 정해진 법률을 통과시켰다. 그러한 법률이 통과되는 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였다. 지난해에 그들은 기업인들이 당에 가입할 수 있도록 규정을 변경하였다. 사실상 그 법은 66백만 명의 당원을 보유한 중국공산당의 사회적 구성에서나 실용주의적 이데올로기에서나 주요한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공식 조사에 따르면 중국의 2백만 사기업 소유주 가운데 60만 명이 당원이거나 과거에 당원이었다. 이들 가운데 압도적 다수는 지난 몇 년 동안에 사유화된 국가소유 소기업들을 오랫동안 운영해오던 중국공산당 핵심 관리자들이었다.

국가소유 제조업들은 은행을 통한 추가적인 자금지원을 통해 증대된 수입경쟁 충격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다. 그러나 소규모 자작농민들은 미국과 주요 식량수출국들의 자본집약적이고 과학적으로 운영되는 농업기업들과 경쟁할 다른 방법이 없다. 정부 농업정책의 기본노선은 다수의 소규모 자작농민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대규모 농업, 사실상 사적으로 소유된 농장을 향하는 것이다.

결국, 노동자와 가난한 농민들을 위하여 중국의 경작지 부족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일본과 같은 공업적으로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로 혁명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렇지만 관료기구는 이러한 전망에 대해 반대한다. 반대로 노동자 농민평의회에 기반을 둔 정부는 노동자의 해고와 부유한 농민에 대한 더 많은 땅의 임대를 금지하거나 제한할 뿐만 아니라, 농업의 재집산화를 촉진할 것이다. 집산화에 참여한 농민들에게 최상의 트랙터와 화학비료와 같은 물질적 지원, 세금 감면과 값싼 신용의 제공과 같은 것을 제안할 것이다. 농업생산의 증대는 농촌에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막대한 잉여 노동력을 흡수하기 위한 도시지역에서의 공업 일자리의 거대한 확장을 필요로 하게 만들 것이다. 특히 중국 공업기반의 제한된 규모와 상대적으로 낮은 생산수준 하에서 이것은 장기적인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전망은 중국이 사회주의 일본과 사회주의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을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는 점을 깨닫게 될 때, 모든 길은 국제혁명의 필요성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점을 알게 된다. 중국 농민들이 겪고 있는 끔찍한 생활조건과 그 조건이 계속해서 악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바로 왜 지난 10년 동안 중국에서 그토록 많은 대규모의 농민 항의시위와 폭동들이 특히 증가하는 세금과 부패에 맞서 일어났는가 하는 이유이다.

스탈린 관료체제가 부닥치고 있는 심각한 문제를 63일자 헤럴드 트리뷴이 지적하고 있다. “1989년의 천안문에서와는 대조적으로 점점 더 경찰은 대부분의 시위참가자들이 단지 반공산당 음모가들의 앞잡이가 아니라, 탐욕스런 경영진과 부패한 지역관리들에 대한 정당한 불만 때문에 나섰다고 인정한다. 경찰은 항의행동들이 확산되고 있으며 대중들 사이에서 공감대가 증가하고 있다고 인정하면서 집회 참가자들을 잔인하게 진압하기보다는 이들을 가라앉히기 위한 새로운 기법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관료체제의 시장개혁 속도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두려움, 특히 또 다른 천안문봉기에 대한 두려움으로 제한되고 있다. 중국 동북지방에 위치하고 있으며, 선양시 북서부에 있는 푸신에서는 2000년에 53천만 톤의 석탄을 생산했다. 그것은 석탄을 가득 실은 60톤 트럭을 일렬로 세워 지구를 4.3바퀴 돌 수 있는 양이다. 원자바오 총리는 2003131일의 설 전날을 지하 720미터에서 광부들과 함께 보냈다. 그렇게 했던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공식적 통계는 푸신 광산사업소의 40만 광부들 가운데 2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음을 보여준다. 한 기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노동자가 생각하는 방식 속에는 한 가지 부서질 수 없는 믿음이 존재한다. 중국의 광산자원은 국가에 속하고 노동자계급은 국가의 주인이며 산업의 주인이다. 그런데 왜 실제로는 얼마 되지 않는 생존대책을 대가로 주인의 일자리가 하나하나 팔려나갈 수 있는가?”

이것은 기형적인 중국 노동자국가가 가진 모순의 심장을 겨냥한다. 다음 사례들은 노동자계급의 일부가 공유재산을 방어할 필요성과 자본주의로 아직 부활하지 않았음을 이해하지만 그들의 정치의식은 사실상 제한적이고 모순적임을 보여준다.

홍콩에서 발행된 중국에서 산업 구조조정과 노동자의 저항이라는 제목의 또 다른 흥미로운 기사에서 팽첸은 국가소유기업의 노동자가 개인소유 기업의 노동자와 다르게 소유권에 대한 어떻게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는지를 묘사한다. 후자의 노동자는 주로 임금과 노동조건을 위해 파업을 하는 반면 국가소유기업의 노동자는 그들의 공장이 구조조정(사유화)’되었을 때 그에 상응하는 소유의 형태와 소유 관계 문제에 대해 걱정한다. 펭첸에 따르면 일부 공장들에서 자본주의적 소유관계로 전환되는 것에 드러내놓고 도전했다.

사유화를 저지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공장 점거가 있었다. 보기를 들어, 상해에 있는 한 플라스틱 공장의 노동자는 그 공장이 다른 공장과 합병하도록(일자리 축소와 함께) 강요받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을 때, 그들은 모든 출입구를 봉쇄하고 당비서가 들어오는 것을 거부했다. 노동자는 공장점거를 그들이 가진 합법적 권리인 공동소유를 방어하는 것으로 정당화했다.

펭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러한 행동 형식은 중국 혁명의 마지막 해에 노동계급 투쟁의 전통으로 더듬어 올라갈 수 있다. 몇몇 노동자가 긍지를 가지고 그것에 대해 묘사했듯이, 공장을 방어하고 있는 그들의 행동은 1949년에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접수하기 직전에 그들의 선조들의 행동과 비슷했다. 그때 친 공산주의적 노동자가 국민당의 사보타지에서 공장을 방어하기 위해 노동자 수비팀(gongren jiuchadui)을 세웠다.”(interview, January 2000).

몇 가지 사례에서, 구조조정에 맞선 노동자의 저항은 분쟁을 노동자와 간부 위원회(WSC)에 제기한 것이었다. 이러한 WSCs는 법에 따르면 경영을 철저히 검사하는 것을 뜻했지만, 그들은 실제로 거의 힘이 없었다. 왜냐하면 WSCs가 바탕으로 삼고 있는 노동조합이 작업장에서 권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WSCs에 대해 꽤 냉소적이긴 했지만, 그것은 논쟁적인 구조조정을 위한 결정적 무대로 된 되었던 사례가 있다.

SL 회사에서, WSC는 회사 안에서 선거를 열었고 노동자와 간부의 80%가 사유화 계획을 거부했다. 그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에 따르면, 노동자가 그들의 이해관계에 중요한 무언가를 결정하기 위해 투표를 했다는 것은 공장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19997월에 장강 설탕 공장(Changjiang Sugar Factory)의 노동자는 지방 노동조합에 보낸 청원서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소유의 형식을 재구축하는 방법이 노동자에 의해 민주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주 정부는 그것을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 노동자는 기업의 주인이고 개혁의 주체(zhuti). 노동자와 간부 위원회와 상의 없는 구조조정과 노동자에게 알리지 않고 공장을 매각하는 것은 노동자 민주주의 권리를 심각히 침해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민주주의 권리를 되찾을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노동자가 집단 소유에 관한 한 백기를 들어 올릴 준비를 하지 않는 강인한 보기이다. 그들은 어떤 계급을 위한 민주주의인가라는 질문에 대답을 갖고 있다. 즉 집단 소유를 방어하며 싸우는 노동자를 위한 민주주의. 중요한 정치적 한계가 그들이 그들의 공장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노동자 국가의 집단 소유를 방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한 부분임을 알 필요가 있다.

내가 다루고 싶지 않은 중요한 오해는 생산성과 평등주의를 극대화하는 것이 노동자 국가에서 대치되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오직 시장이 생산을 극대화하기 위해 관리자와 노동자를 훈련시킬 수 있고 평등주의가 명령-계획경제를 통해 오직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좁은 견해의 잘못된 정치적 틀은 노동자 국가의 유일한 정치 형태가 스탈린주의 관료제의 정치적 독점이다는 것이다.

관료제 안에서 신-마오주의자가 제공할 수 있는 오직 하나는 명령-계획 경제이다. 그것의 한계는 노동자와 기술 인텔리겐치아, 경영자가 그들 자신을 계획을 발표한 정부와 동일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탈린주의 정권에는 노동자와 관리자를 훈련시키기 위해 중앙집중화된 계획과 관리를 시장 메커니즘으로 대체하려는 타고난 경향이 있다. 배반당한 혁명에서 스탈린 지배시기에 명령계획경제를 논평하면서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소비에트 생산물은 회색 라벨로 촌스럽게 브랜드 표시를 달고 있다. 국유화된 경제 속에서, (생산물의) 질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민주주의, 비판과 주도권의 자유를 필요로 한 것이다. 이는 공포와 거짓, 아첨이라고 하는 전체주의 정권과 양립할 수 없는 조건이다.” 노동자 민주주의는 노동자 국가 안에서 생산성과 평등주의를 극대화하는 과업을 달성하기 위한 열쇠다. 이것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당에 꼭 필요한 조건이다.

 

 

옮긴이: 정원섭

  1. 이 글은 Workers Vanguard No. 836 and 837, 12 and 26 November 2004에 있다. 그 가운데 일부를 옮겼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