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이주와 자본주의, 그리고 오늘날 노동계급의 잠재력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10월호

이주와 자본주의, 그리고 오늘날 노동계급의 잠재력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6. 09:18

이주와 자본주의, 그리고 오늘날 노동계급의 잠재력

 

20005, ‘노동자투쟁’(영국)

 

 

노예무역

 

산업이 발전하지 않았을 때 장인과 소규모 수공업자가 생산을 담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 생산에 필요한 인력을 외부에서 공급할 수 있는 원천이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영국 자본가계급이 풍요로운 식민지 열대를 점령하면서부터, 토착인구가 공급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영국 자본가계급은 노예무역을 통해 이주를 거대한 규모로 조직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리버풀은 노예무역을 통해 뚱뚱하게 살쪘다. 이것이 리버풀에서 자본의 시초축적방식이었다. 그리고 리버풀의 자랑이자 심지어 지금까지도 특징으로 남아있는 리버풀에 급속한 번영을 가져다준 대담한 모험심과 함께해온 노예무역은 리버풀의 찬가(Pindar)였다. 또한 그것은 해운업과 항해사들의 거대한 고용을 불러왔으며, 국내 수공업을 위한 막대한 수요를 일으켰다. …… 면직공업이 영국에서 아동노동을 도입했다면, 미국에서는 초기의 가부장적 노예제도를 상업적 착취제도로서 전환시키도록 자극하였다. 사실, 유럽에서 임금노동자의 감추어진 노예제도는 그 기초로, 신세계에서 순수하고 단순한 노예제도를 필요로 했다.

노예무역상의 채찍에 의한 이와 같은 거대한 인구의 이동은 기존 사회에서 새로운 세대의 생산을 파괴하면서 식민지세계 인구의 물리적 변화를 가져왔다. 결국 유럽에서 상업계급의 성장은 다른 상품들과 똑같이 인류의 거대한 거래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노예들만 강제적으로 이주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영국에서 범죄가 입증된 사람들의 오스트레일리아로의 추방, 프랑스에서 뉴칼레도니아로의 추방과 같이, 오늘의 유럽 자본주의의 선조들은 또 다른 방식을 통해 인구를 세계 곳곳으로 분산시켰다.

엘리자베스여왕 시대의 영국은 해적들과의 연합과 이어진 전쟁을 통해,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대서양에서 노예무역을 장악하였다. 2백만 명이 넘는 노예들이 산채로 팔리거나 신분이 속박되었으며, 적어도 6백만 명 이상이 이러한 야만적인 무역과정에서 죽어간 것으로 추정되는 노예무역이 350년 넘게 번성하였다.

다시 말해, 그것은 대규모 사업이었다. 1780년대까지 리버풀에 있는 선박 가운데 4분의 1이 아프리카 노예무역에 개입하였다. 항구를 이용하는 무역의 절반 이상이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의 무역과 관계한 것이었다. 1783년부터 1793년 사이에 리버풀에 있는 약 360개의 회사가 노예무역에 개입하였다.

이러한 노예무역의 잔혹함 때문에, 순전히 도덕적 이유에서 폐지를 주장하는 운동이 성장하였다. 리버풀의 펜린 경에 따르면, 폐지주의자들이 도덕적 입장에서 노예제도에 대해 반대하고, 일반인들까지 노예제 폐지를 위해 투표하려고 하자, 시대의 경제적 압력이 그들에 맞서 끼어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7천만 파운드의 재산을 위해 싸우곤 했다. ……

노예무역 폐지에 맞선 자가 누구였던가? 왕가의 일원들, 해군의 최고 제독들, 토지소유주들, 그리고 물론 런던에서 상업적 이익을 구하는 자들이 그들이었다. 설탕과 면화는 문제가 되는 주요한 필수품이었다. 당시 총리였던 윌리엄 피트는 서인도제도 농장에서 얻는 4백만 파운드 가까운 수입은 세계 나머지 지역에서 얻는 1백만 파운드의 수입과 비교되었다고 평가하였다.

마침내 1807년에 영국하원이 노예무역을 폐지하였을 때, 그 이유는 노예제도에서 이익 창출이 떨어졌거나, 대농장 소유주들이 임금노동자가 더 효율적일 수 있도록 지불할 수 있는 충분한 축적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결국, 폐지된 것은 그저 노예무역이었을 뿐, 노예들의 이용은 유지되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더 높은 도덕을 위해 스스로 변화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기에 영국은 대부분의 무역 항로들을 지배하게 되었고, 설탕, 담배, 면화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배적 경제력을 갖춘 상태에서 영국 자본가계급은 이제 이 혐오스러운 무역을 아프리카 내외의 모든 무역 통로를 통제하여 일소하겠다는 도덕적 근거를 구실로 해서, 해군과 육군의 충분한 힘을 사용하여 경쟁자들을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계약 노동으로

 

영국 식민지에서 노예노동의 사용은 1834년에 금지되었다. 해방된 노예의 많은 수가 더 이상의 농장노동을 거부한 반면, 다른 이들은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임금을 요구하였다. 식민지 자본가계급은 여전히 농장 운영을 위해서 막대한 노동자를 필요로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외견상으로는 자유롭고 공정한 계약에 기초한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종류의 노예제도를 찾아내었다. 이것이 이른바 계약노동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인력 모집관들의 거짓 약속 하에 인도와 중국으로부터 온 노동자는 낮은 임금과 적은 옷가지들, 그리고 보통은 마지막에 가서야 얻게 되는 임시거처를 위해 3~5년 동안 농장에서 일할 것을 강요받았다.

인도인 노동자는 1830년대부터 서인도제도의 설탕농장으로 이주되었다. 이러한 이주는 영국의 식민정책에서 비롯된 전통적 인도경제의 파괴와 농촌 실업자 군대의 증가에 의해 복합적으로 촉진되었다. 1834년과 1870년 사이에, 5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해외로 보내졌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반이 넘는 노동자가 모리셔스, 통일 아일랜드와 남아프리카 설탕농장으로 보내졌다.

이 새로운 인간노동의 매매는 돈벌이가 되는 밀매로 발전하였다. 인도에서는 아카디스(Arkathis)’라고 불리는 중개인들이 온갖 감언으로 농촌지역에서 노동자를 수급하기 위해 고용되었다. 노동자는 봄베이와 캘커타로 보내졌으며, 이따금 자신들이 어디로 가게 되는지, 무엇을 하게 되는지를 모른 채 항해가 시작되기 전까지 무장대의 경비 하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일들은 1917년까지 그대로 계속되었다.

서인도제도 농장에서는 탈 노예들이 인도인들로 대체되었다. 1866년에 임금 인상을 위한 파업이 발생하였을 때, 인도인 노동자들은 파업파괴자로 이용되었다. 고용주들은 인도 노동자군대에 대한 보존이 없다면, 25%에 달하는 임금인상을 강요받게 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계약 노동자는 인도대륙의 새로운 차 농장에서도 필요하였다. 1895년과 1928년 사이에 인도의 차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수는 50만 명에서 100만 명으로, 두 배로 증가하였다. 그와 함께 또 다시 강제적 이주가 발생하였고, 주요하게는 아셈 지방으로 보내졌다. 영국 자본가가 이 산업분야를 독점적으로 지배하게 되었고, 노동자의 노예와 같은 상태는 너무도 악랄하였기 때문에, 심지어, 식민지정부 조차도 고착된 관례를 불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 법은 농장주들을 제지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는 오늘날까지도, 차 농장에서의 지독한 환경으로 뿌리 깊게 이어지고 있다. 스리랑카에서 차 농장이 커피 농장을 대체하기 시작했던 19세기 후반기에, 영국은 타밀지역을 중심으로 계약 노동자를 들여왔고, 이러한 농장노동이 커피에서와는 다르게 계절노동이 아니었기 때문에 노동자는 섬의 영구 정착민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서 사실상 격리되었으며, 북쪽의 차 재배단지에 갇혀 지냈다. 그들의 체계적인 인력모집은 1950년대 문턱에 까지 끊어졌다 이어졌다 했다.

 

 

강제 이주에서 챠티즘 운동으로

 

자본가계급이 성장하는 전 기간에 걸쳐 영국은 커다란 규모는 아니더라도 식민지 민중을 영국으로 수입하였다. 물론 오래 전인 서기 100년에서 400년 사이에 로마인들이 노예들을 불러들였지만, 노예제도는 봉건시대 동안 사라졌다가, 대략 엘리자베스1세 때 시작된 식민지시대에 재도입되었다. 이 시기는 엘리자베스의 약탈자들이 스페인 배들을 묶어놓고 노략질하며, 그들의 대서양과 카리브해에 걸친 항로를 파괴하고 강탈하던 시기였다. 1555년에 최초로 일단의 흑인 노예들이 일하기 위해 영국에 도착하였고, 1563년에는 호킨스(영국의 귀족, 악명 높은 노예상인이자 해적)가 자신소유의 노예들과 함께 서아프리카에서 서인도제도까지 첫 번째 여행을 하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는 오델로와 같은 흑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종적 편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새뮤얼 존슨(영국의 문필가)은 흑인 노예 프란시스 바버를 소유했는데, 주인이 죽은 뒤에 그는 연간 100파운드의 수입을 받기도 했다. 16세기 말에 영국을 강타한 기아가 발생했을 때, 뒤이은 가난과 사회적 불안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희생양을 찾도록 자극하였다. 그녀는 최근 다른 혈통의 검은 무어인들이 우리왕국으로 들어왔고, 이미, 이러한 종의 인간들은 다른 나라들에서처럼 우리왕국의 거대한 인구증가가 얼마나 큰 신의 은총인가를 느끼게 되었다며 모든 지방행정관들에게 칙령을 보냈다. 영국에서 아마도 최초의 인종주의적 법률안이 통과되자, 꽤 큰 규모를 차지하게 된 검은 노예들은 자신들이 있는 곳이 스스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춥고, 축축하고, 냉대 받는 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1601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우리 왕국에 들어와 양육되는 깜둥이들과 블랙무어인들은 그녀의 충성스런 국민들에게 커다란 골칫거리이기 때문에 추방되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이 순간 최초로 엘리자베스 여왕으로 대변되는 영국 정치가에 의한 진절머리 나는 인종주의 카드놀이가 시작 되었다.

다음 세기, 서인도제도 농장에서 경제적 성장 때문에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하게 되자, 크롬웰은 아프리카 노예를 사는 비용보다 훨씬 적게 드는 아일랜드 죄수들을 섬들로 추방함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한다.

물론, 18세기 후반에는 노예노동에 대한 자본가들의 요구가 증대하였기 때문에, 자유민과 노예, 둘 다에서 흑인들은 런던과 주요한 무역항들에서 영구적인 구성원이 되었다. 그 시대 영국에서는 노예의 권리를 위한 실질적인 법률이 없었기 때문에, 1772년 써머셋이라고 알려진 가장 유명한 노예들의 탈출사건 이전까지, 많은 법률 소송은 특별한 전례로 남겨졌다. 써머셋 사건은 노예주가 노예를 강제적으로 해외로 보낼 수 없도록 하는 법을 이끌어 냈다. 이렇게 해서 일단 노예들은 영국에 체류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것이 도망친 노예들 모두에게 충분한 보호를 제공한 것은 아니다. 보호는 자유민으로서 남을 수 있도록 하는 합법적 후원을 찾아낸 이들에게만 한정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1834년 노예 해방까지 얼마 동안, 영국이 도망자들의 도피처가 되는 것을 뜻했다. 어쨌든 그들은 완전한 가난 속에서 미천한 존재로 비참하게 내몰렸다. 결국, 이것은 피난민들을 위해 아프리카에 고국을 만들겠다는 계획으로까지 나아갔다. 좋은 의미로 영국의 박애주의자로 불렸던 이들이 세운 계획은 1780년대에 시에라리온의 설립으로 나아갔다.

19세기 초입까지, ‘래스커스라고 알려진 인도인 선원들을 포함하여 고향에서 떨어져 영국에서 살고 있는 흑인은 만 명 가량이었다.

재봉사이자, 챠티스트 운동의 저명한 지도자였던 윌리엄 커페이는 세인트 키츠 출신의 해방된 노예의 아들로서, 노동자계급의 일부로서 그 시대의 사회정의를 위해서 싸웠던 영국 흑인들의 주요한 지도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운동의 전투적인 부위에 섰던 커페이는 결국 챠티스트 동료들과 함께 1849년에 타지메니아로 추방되었으며, 반란을 위한 조직화 시도는 실패하였다.

 

 

아일랜드, 굶주림과 반란

 

아일랜드는 영국의 첫 번째 식민지였고, 영국 해안에서 단지 40마일 떨어져 있다. 자본가의 착취의 본질적 요소로서 아일랜드는 임금노동의 확실한 원천이 되었고, 언제나 수요를 넘어서는 노동력의 공급을 보장하는 아일랜드 산업예비군의 보존은 가능한 한 낮은 임금을 유지하게 해주었다.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아일랜드는 영국으로 이주하는 노동자계급의 전부였다. 그리고 아일랜드 노동자는 1950년대에 흑인 이주민들이 경험했던 것들을 1830년대에 경험하였고, 영국 노동자가 기피하는 일들, 저임금에 단순하고 고된 노동을 해야 했다. 이들은 미국에 가기위한 경비를 마련할 수 없어, 영국으로 건너온 가난한 시골뜨기 이주민이었다. 그리고 동맹 파업이 있을 때, 일손 부족으로 바쁠 때, 나는 10, 15명 또는 20명의 가족(노동자)들을 구하기 위해 아일랜드로 사람을 보냈다는 한 맨체스터 섬유공장주의 말처럼, 가끔씩 새롭게 도착하는 이주민들은 파업파괴자로 이용되었다. 부두와 공사현장에서 아일랜드인과 영국인 단순노동자가 직접적으로 경쟁하게 되자, 때때로 폭력이 일어났다. 1830년과 40년대에는 철로 일꾼들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터졌다.

1848년에 엥겔스에 따르면, “만일 영국이 아일랜드의 거대하고 가난한 인구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 있지 않았다면, 영국 산업은 급속히 확장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일랜드인은 고향에서 잃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으며, 영국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세인트 해협의 동쪽 지역이 억센 팔뚝을 위해 확실한 일자리와 괜찮은 임금을 제공한다는 사실이 아일랜드에 알려지게 되면서부터 아일랜드의 산업예비군이 이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곳은 이미 백만 명이 넘는 이주민들을 끌어 모았고, 여전히 해마다 5만 명에 가까운 노동력이 들어오고 있으며, 특히 거의 모두가 대도시 인근의 하층계급으로서 산업지구에 인입되었다. 이렇게 해서 런던에 120,000, 맨처스터에 40,000, 리버풀에 34,000, 브리스톨 24,000, 글래스고 40,000, 에딘버러에 29,000명의 가난한 아일랜드인이 살게 되었다.”

물론,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의 이주는 외견상으론 자발적 행동이었다. 그러나 미국으로 가기위한 경비를 마련할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의 유일한 현실적 선택으로서 영국이주는 많은 부분이 정치적 요인들로부터 비롯되었다. 1800년의 합병법 이후에 아일랜드 의회는 해산되었고, 아일랜드 의원들은 영국 하원에서 선출되었다. 소작인이었던 아일랜드의 모든 주민들은 40실링 이상의 지대를 지불해야 종교에 관계없이 투표권을 가질 수 있었지만, 여기에도 기만이 존재했다. 그들은 선거 사무관에게 누구에게 투표를 했는지를 밝혀야 했으며, 그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영주가 지명한 후보에게 감히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829년의 새로운 법령은 40실링에서 10파운드로 투표를 위한 지대 기준액을 올림으로서 비천한 소작인들에게서 투표권을 빼앗았다. 그때까지는 임차의 증가가 영주들에 대한 정치적 지지자 수의 증가를 가져왔기 때문에, 영주는 자신의 소유지에서 임차의 증가를 고무하였다. 이제 더 이상 이것이 필요 없게 되자, 영주들은 소작인들을 대량으로 축출하고 경작지를 방목 농장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쫓겨난 소작인들은 영주를 공격하기 위한 비밀 조직을 만들어 반격했지만, 강제적 정리를 막아내는데서, 영국점령 하에서 수세기에 걸친 아일랜드 농촌의 수많은 게릴라 활동들보다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이렇게 궁핍으로 내던져진 소작인 집단은 굶주림을 피하기 위한 희망으로 이주를 강요받게 되었다.

1845년부터 1848년까지의 아일랜드 대기근 동안, 영국은 증기선의 운임을 가족들이 제공할 수 없는 수준으로까지 끌어 올림으로서 절망적 이주를 사실상 막았다. 또한, 어떤 선박들에서는 절망적인 이주민들이 갑판을 수용한계 이상으로 채우는 것을 막지도 않았다. 그 가운데 한 항해는 비극으로 이끌렸다. 증기선 런던 데리호220명의 삼등 선객과 함께 슬리고 항을 출항하였고, 폭풍이 덮쳤다. 선원들은 갑판 위의 여객을 갑판 아래로 내려 보냈고 출입구를 봉쇄하였다. 그 결과 그들 가운데 72명이 질식사하게 되었다.

기근으로 25만 명의 사람들이 죽어간 1847년에, 영국정부는 구빈세라고 불리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것은 작은 임금으로, 공공 부분에서 고용을 제공했다. 그러나 1/4에이커 이상의 차용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고용될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수만 명의 굶주린 아일랜드 소농들은 그저 약간의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땅을 포기하였고, 영주들의 비용과 퇴출문제를 절감해 주었다. 공공사업은 전부 734천여 명에 달하는 이들을 땅에서 끌어내었고, 이 소작인들은 커다란 규모의 자신의 땅을 포기하였다. 제임스 코놀리는 나중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대양 한가운데에 있는 뗏목 위의 인간처럼 도울 수 없는 1838년과 1888년 사이에 축출된 사람들은 3668천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몇 해 동안 빈곤세라고 하는 자선정책으로 자신의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 이 법의 별칭은 축출을 쉽게 하는 법으로, 그들을 파멸로 이끄는 주요한 무기 가운데 하나였다.”

유명한 제임스 브론테레 오브리언과 피거스 오코너가 이끌었던 차티스트 운동은 물론, 러다이트 운동을 포함하여, 19세기 영국의 모든 주요한 사회운동에서 아일랜드인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러다이트의 비밀 결사는 영주에 대한 울분으로 테러를 가했던 가난한 아일랜드인의 비밀결사를 모델로 하였다. 20년이 넘도록, 아일랜드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토지분배를 요구하는 주민들의 폭동이 이어져왔다. 트레셔스(탈곡꾼들), 카더스(털손질꾼들), 그리고 나중에 몰리 맥과이어는 십일조 헌금에 저항하였고, 임대료를 하락시켰으며, 영국인 영주를 몰아냈다.

아일랜드인 노동자는 또한 쉽게 단결하였다. 그들은 19세기말에 부두에서 단순직 노동조합을 건설하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그들 가운데 벤 틸렛은 1887년 부두파업의 지도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에딘버러 출신의 제임스 라킨과 그곳 부두에서 혁명적인 도제시절을 보낸 리버풀 출신의 제임스 코놀리는 모두 아일랜드 이주민 출신이었다. 라킨은 아일랜드 무역노조를 세우려고 노력을 계속하였고 더블린 부두파업을 이끌었다. 라킨과 함께 일찍이 맑스주의자가 된 코놀리는 훨씬 더 나아갔고, 아일랜드 시민군을 조직하여 1916년 더블린 부활절 봉기를 이끌었고, 이 때문에 영국에 의해 사형 당했다.

20세기 내내 아일랜드노동자는 아일랜드와 영국 곳곳에서 운동을 끊임없이 조직하였다. 남부의 가난과 북부의 정치적 탄압이 그 원인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은 아일랜드에 머물기보다는 떠나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일반적인 견해와는 반대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아일랜드 출신들의 영국이주는 카리브 해와 인도대륙으로부터의 이주를 훨씬 능가했다.

 

 

유태인 이주민들과 런던의 이스트엔드(East End)

 

런던 항은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이주물결의 종착지였다. 1870년과 1914년 사이에 런던 동부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카리브 해와 인도대륙으로부터 사람들이 도착할 때까지 거대한 이주민의 유입을 받아들였다.

그들 대다수가 유럽 노동자계급 가운데 가장 박탈당하고 가난했던 러시아인과 유대계 폴란드인 출신으로 12만 명이 넘는 이주민들이 이 기간에 짜르의 서부러시아 학살을 피해 이곳에 왔다.

그들은 이스트엔드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노동집약적인 재봉소들에서 일을 찾을 수 있었다. 노동조건은 경멸스러웠다. 새롭게 도착한 노동자들은 작업실에서 잠을 잤고, 좋게 말하더라도, 이들 대부분의 생활은 불안정하였다.

그러나 유태인 이주민들은 곧 자신들이 반 외국인 정서에 직면해 있음을 발견하였다. 1886년에 폴 몰 신문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이스트엔드의 나라 없는 유대 외국인들은 어찌되었건 간에 가난한 본토인들에게 질병이자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15천에서 2만에 달하는 가장 하층의 유대 난민들은 그곳에 만연된 곤궁의 가장 큰 원인이다.” 심지어는 그 자신이 아일랜드인 이민자의 아들이자 1887년 부두파업의 유명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벤 틸렛도 이스트엔드의 노동자문제에 대해 유대인 피난민들을 비난했다. 그는 부두노동자의 분노의 외침(1889)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대륙으로부터 빈민들의 유입이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도록 상황을 악화시키고 병을 증가시켜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 런던 외국인들의 거대한 규모, 짐승들의 것보다도 못한 밀집된 주거지, 경쟁적으로 더 많은 욕심을 추구하고 약삭빠르도록 강요하는 착취제도는 노동자에 대한 감독을 용이하게 한다.” 1880년대 후반에 실업이 증가하자, 정부는 1888년에 이주에 대한 보고를 위해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입법이 시급하게 필요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리고 노동력 공급과잉이 임금의 하락을 가져온다는 주장에 대해 어떤 의심도 없이) 일반인들 사이에서 반유대주의 흐름은 계속해서 성장했다. 심지어 유대계 언론에서 조차도 그 유명한 토막 살인을 어떤 영국인도 그런 무서운 범죄를 저지를 수는 없다며 비난했다.

1890년대에도 실업은 계속 증가하였고,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서 유대인 대량추방(19세기 판 인종 청소’)과 절대적 궁핍 상태에서 그들 대다수의 런던이주는 입국을 금지시키자는 주장과 반유대주의 캠페인에 기세를 더해 주었다. 1900년에는 런던 동부에서 <영국 형제 동맹>이 설립되었다. 스텝니를 추종하는 토리당원인 에반스 고든 수상은 스텝니의 억제되지 않는 이주라는 결론으로부터 끔찍한 미래를 그려냈고, 여왕의 연설을 수정시켰다. “노동자 계급은 새로운 건물들이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해외 출신의 이방인들을 위해 지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텅 빈 집들에 영국인들의 명패를 붙일 수 없다는 고시를 본다. 그들은 외국 아이들로 가득 찬 교실을 본다. 자신들의 일요일을 빼앗는 것을 본다. …… 만일 불씨가 주어진다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폭풍이 불고 있다.”

그렇다면 변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에노크 포웰이 1968년에 한 연설, 악명 높은 피의 강에서 비롯된 주목할 만한 반향이었다. 그것은 지난 수 십 년간 신문지상에서 늘 있어왔던, 누구라도 찾을 수 있는 문자 그대로의 인종주의였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인도 대륙이나, 심지어 최근에 동유럽으로부터 건너온 이주민들을 표적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자체가 가장 소란스러운 헛소리였음에도 악선동은 받아들여졌고, 이주민 입국제한을 목적으로 하는 첫 번째 외국인 법안은 19061월에 통과되었다. 1914년까지 이주민들의 입국은 매년 4천 명씩 감소하였다. 1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이스트엔드 유대인 거리는 주변 10만 인구에 병합 되었다.

그러나 이주민들은 지난날 모든 이주민 집단들이 가졌던 동일한 정서에서 자신들의 복수심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민족주의와 종교의 부정적 효과를 이용하여 노동자 사이의 분할을 시도하는 것에 맞서, 정의를 보장받기 싸우는 노동자계급의 진보적 조직에 결합하였다. 유태인들은 저항을 조직해본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른바 사회주의와 결합된 확고한 정치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트엔드 지방은 전쟁기간 동안, 초기 공산당의 온상이 되었고, 의류노동조합을 위시로 노동조합들이 설립되어 당과 결합하였다. 파시즘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을 때, 모슬리가 이끈 블랙셔츠당원들의 가옥파괴에 맞선 지역 방어조직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아일랜드 부두노동자들과 유대인 공산주의자들 간의 단결 덕택에 파시즘은 이곳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흑인 이주

 

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도 카리브 해와 아프리카, 그리고 인도대륙에서 건너오는 흑인 이주민들은 소수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을 때, 영국에 정착한 이들의 규모는 알려진 바와 같이 수천 명 정도였다. 성문화되지 않은 전시정책은 식민지로부터의 이주를 사실상 어렵게 만들었다.

아시아인과 흑인들의 주된 집중정착지는 여전히 항구 도시의 부두인근이었고, 대부분 선원들이 정착한 결과였다. 물론, 이 정착민들 가운데 많은 수는 증기선이 영국의 해외무역을 증가시키는 동안 선원으로 일하는 일시 정착민이었다. 선박소유주들은 저임금 때문에 라스커스라고 불리는 인도인 선원들을 선택하였다. 이 때 까지 선원들의 전국노동조합은 꽤 잘 조직되어 있었고, 항운 회사들은 저임금의 선원으로서 이주노동자들의 고용을 유지하는데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할 수 있다면 언제든지 그렇게 했다.

흑인 선원들은 결국 곤란한 지경(22 situation)에 빠지게 되었다. 영국 선원들은 영국 항구와 계약한 그들을 임금을 하락시킨다는 이유로 고소했다. 그리고 동일 임금이 적용되는 곳에서 일자리를 구한 이들을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는 이유로 고소했다. 1911년에 선원들의 총파업이 발생하였을 때, 선박 소유주들은 중국 선원들을 이용해 파업을 파괴하려고 위협하였고, 카디프에서 파업을 지원하는 지역주민들은 200명 규모의 작은 중국인 공동체를 공격하였다.

1차 세계대전 동안 식민지에서 보충된 8천 명의 상업 선원들이 군대에 결합하였다. 전후 그들은 영국항구에서 제대하였고, 노숙자와 실업자로 남았으며, 혼자 힘으로 생활을 꾸려나가야 했다. 이로 인해 송환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이따금 전국선원노조가 흑인 선원들의 귀향시키도록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흑인 선원들은 주머니에 아무것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고, 선원일이나 그 밖의 일을 얻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들은 고용주들에 의한 차별에 맞닥뜨렸다. 1918, 영국령 가이아나에서 불만에 쌓인 제대군인이 식민지 사무소로 보낸 편지에 그것이 쓰여 있다. “아침마다 우리는 정직한 빵을 얻기 위해 일을 구하러 항해 사무실에 내려갔지만, 우리의 피부색 때문에 냉정하게 거부되었다. 다른 국적의 외국인들이 선호되었다.”

수천 명의 아랍, 소말리아와 카리브 선원들이 일자리를 구하느라 헛된 시간을 보냈고, 심지어 NSFU(전국선원화부노조) 간부들이 자신들에 맞서도록 백인 선원들을 선동하는 것에 맞닥뜨려야만 했다. 1919년에 타인사이드에서는 아랍인들과 백인 선원들과의 싸움이 벌어졌다. 리버풀에서는 스칸디나비아인들과 흑인들 사이의 싸움이 일어났다. 경찰은 흑인 선원들이 이용하는 하숙집들을 급습했고, 현지 군중들도 그들을 공격했다.

물론 이러한 폭동의 근본 원인은 전후 불경기와 실업의 거대한 확대, 그리고 생활수준의 하락에 있었다. 그러나 선원들 사이에서는 인종주의가 그 요인이었다. 1922, 조합이 있는 영국선박에 고용되기 위한 등록씨스템-PC5-의 등장은 조합에 빗장이 걸린 흑인 선원들을 더욱 배제했으며, 결국 이 등록증을 주지 않았다.

피부색을 제한의 이유로 정하고 있는 첫 번째 정부 명령인 새로운 특별금지(유색 외국인 선원)명령이 1925년에 도입되었다. 부끄럽게도 그것은 NSFU(전국선원화부노조)의 후퇴를 가져왔다. 모든 흑인 선원들은 영국에 남아 있기 위해서 자신들이 영국민이라는 증거를 제출해야만 했다. 그러나 많은 증거자료들이 가치가 있더라도, 관리들이 인정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없애 버렸기 때문에 체류를 거부당했다.

마땅히 전국선원노동조합의 인종주의는 스스로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1925년에 선박소유주들은 선원들의 임금을 삭감하기로 결정했다. 임금삭감에 사실상 동의하는 하베록 윌슨 지도부의 반대에도 끝내 제국을 가로지르는 첫 번째 국제선원들의 파업이 시작되었다. 파업은 100일 가까이 지속되었지만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실패는 선박소유주들이 파업파괴를 위해 식민지로부터 라스커스(인도선원) 또는 다른 흑인 선원들을 확보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떤 흑인 선원들은 피부색의 장벽을 뛰어넘는 국제적 단결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들의 현장에서 파업의 비공식적 지도부(공산당 지도하에 있는 선원들 사이에서의 소수운동)가 되었지만 이주노동자들의 다수가 파업에 참가하지 않았다.

 

 

전쟁과 복구

 

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노동부장관은 식민지 사무소들과 합동으로 군수 생산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서인도제도에서 영국으로 노동자를 데려올 계획을 세웠다. 전후 일어난 실제 결과와는 다르게, 처음에는 숙련노동자를 데려올 생각이었다. 11개의 서로 다른 집단들이 영국으로 보내졌다. 5개 집단은 자메이카에서, 그리고 나머지는 바다 여기저기에 널린 섬들, 영국령 온두라스, 바하마, 바르바도스, 영국령 기아나에서 데려왔다. 자메이카에서 온 첫 번째 3개의 집단은 이미 섬에서 훈련된 경험 있는 기술자들이었다. 나머지 집단들은 기초적 기술교육을 받기 위해 정부훈련기관에 등록했지만 여전히 기술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마자 서인도제도로 송환된 많은 이들은 그곳에 자신들을 위한 일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되돌아 왔다. 1948년에 492명의 자메이카인들은 윈드러시호를 타고 도착하였고, 그들 가운데 3분의 2는 전쟁기간에 이미 영국의 사회보장을 보았고, “귀향을 환영한다!”는 표제가 붙은 신문에 매혹되었다. 1948년에서 1951년 사이에 그와 같은 수백 명의 이주민들이 다달이 도착하였고, 어떤 통계에 따르면 그 수가 연간 1,750명에 이른다. 영국정부는 이주를 단념시키기 위해 심지어, 영국 한겨울의 가장 나쁜 삶의 단편을 보여주는 필름 제작을 시도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20~44살의 영국 인구가 해마다 10만 명씩 감소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후 경제 확장은 자연스럽게 이주를 불러왔다.

그런데 전후 독립과 탈 식민지화 물결 속에서 영국정부의 정책은 식민지로부터 실업자들을 불러들이는 것에 의존하기보다는, 폴란드와 이탈리아 노동자를 도입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자메이카 정부의 압력 때문에 정부위원회는 요구들 가운데서 식민지 출신 노동자의 공공의료서비스에 대해, 스스로의 표현으로 만족스러운정도까지 동의 하였다.

영국 관리들의 생각은 만일 유럽인 노동자를 전후 복구에 활용한다면, 그들의 특별한 기술에 의존하더라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을 때 스스로 고국으로 돌아가 버릴 것이라는 가정에 기초해 있었다. 먼 곳의 식민지로부터 온 노동자는 돌아갈 가능성이 적었다. 이와 함께, 흑인 노동자는 통제하기 어렵다는 인종주의자들의 생각이 사회적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었다.

 

 

노동력 감소

 

1949, 노동부는 흑인 여성노동자가 면직의류산업 노동자, 가정부, 위생병으로 모집될 수 있으며, 남성노동자는 단순직으로서 중금속산업과 주물공장에 활용할 수 있다고 결정하였다. 사실, 영국에 이미 와 있는 카리브해 노동자 가운데 대다수는 목수, 사무원, 기계공, 용접공, 전기공 등으로서 기술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오직 작은 소수만이 단순직이었다.

광부와 농업노동자의 노동조합에서는 모집에 반대하는 주장이 일어났다. 그 결과, 공식적으로 후퇴한 모집계획은 다소간 비밀리에 추진되었다. 하지만, 두 가지 계획은 1945년부터 50년 사이에 확실히 존재했다. 하나는 시설관리를 위해 국민건강보험에 33명의 바르베이도스 여성들을 데려왔으며, 또 하나는 농업노동을 위해 세인트헬레나로부터 100명의 남성을 데려온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되풀이해서 이른바 유색이주민들의 동화의 어려움에 대한 의심들, ‘인종끼리의 충돌문제가 그들의 유입 제한의 이유로 제기되었다. 실제로 이때 분산 정책은 흑인 이주민들의 집중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제출되었다.

이것은 항의의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결국 1948년에는 뎁포드, 1949년에는 버밍험 이주노동자의 거주지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1951년에 보수주의자들이 권력을 차지하게 되자, 노동력 부족은 해마다 14만 명씩 더 추가되었다.

1955년에는, 국영 운송과 요식 산업분야에서 노동력 부족이 심각해지자, 영국정부는 또다시 바르베이도스 정부와 합동으로 노동력 도입을 실행하였고, 이에 따라 이주민들에 대한 지원으로 영국으로의 운임비를 지원하였고, 영국에서 일자리와 숙박시설을 준비하였다. 이 직접적인 인력도입 계획은 영국운송위원회, 런던운송집행위원회, 영국 호텔-식당 연합과 합동으로 집행되었다. 또한, 지방 병원위원회의 요청에 의해 바르베이도스에서 병원의 시설관리 노동자를 모집하였다. 그러나 바르베이도스는 그들의 두 번째 선택이었다. 인종 문제가 떠오를 수도 있다는 우려로 영국운송위원회는 철도에 고용할 인력으로 이탈리아인들을 먼저 모집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국철도노동조합에 의해 거부되었고, 결국 운송위원회는 그 대신 아일랜드와 서인도제도로부터 모집하기 위한 노력에 집중해야 했다.

1958년 말까지 런던의 운송 분야는 4천명의 흑인노동자를 고용했다. 3천명은 런던에서, 천명은 바르베이도스에서 직접 모집되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들은 2일 동안 훈련을 받고 나서 가장 열악한 곳에 배치되었고, 대부분 그곳에 머물렀다.

1950년대 이르러 서인도제도출신 이주민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출신 이주민의 수를 넘어섰다. 아시아로부터의 이주민들은 영국에 살고 있는 최대의 소수민족이었던 시점보다 그저 60여명 증가하는 데 그쳤다. 1950년대 중반까지 영국에 살고 있는 흑인들은 전부 21만 명에 달했으며, 전체 인구의 0.5%를 넘지 않았다.

 

 

인종주의가 타오르다

 

1958년에 노팅험에는 2~3천명의 주로 서인도제도 출신 이주민들이 빈민가에 집중되어 살고 있었다. 1958823, ‘체이스라 불리는 술집에서 폐점 바로 전에 일어난 흑인과 백인 사이의 싸움이 집단 싸움으로 번졌고, 몇몇 사람들은 중상을 입었다. 천 오백여 명의 군중이 모였고 경찰과 소방대가 출동하였다. 몇 명의 흑인들이 안전을 위한다는 구실로 경찰에 의해 끌려갔다. 그리고 테디보이스라는 백인깡패조직이 지역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나서 얼마 동안 긴장은 높아갔다. 소요를 다루는 언론보도지역은 확대되었고, 심지어는 싸움에 참여하려는 더 많은 백인들을 이 지역으로 끌어들였다. 그 주 토요일에는 4천명에 달하는 군중이 모여들었고, 3명의 서인도제도출신 이주노동자가 탄 자동차가 그 사이를 지나가고 있을 때, 그들을 짓밟으라는 외침이 군중 속에서 터져 나왔다. 그들은 자동차를 뒤집으려고 했지만, 경찰이 그들을 군중 속으로 되돌려 보냈고, 자동차는 도망칠 수 있었다.

감정은 여전히 고조된 상태였고, 백인들은 다른 백인들, 그리고 경찰들과 싸우기까지 했다. 그 뒤 경찰서장은 보고에서 음주폭력과 테디보이스의 무책임을 비난하며, 이 사건이 인종적 폭동이 아니었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그곳에 깜둥이 괴롭히기라고 하는 일에 흥미를 가진 이들이 있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으며, 실제로 흑인들의 가정은 이웃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 해 여름에 셰퍼드 숲으로부터 노팅힐과 메이다베일로 번진, 비슷한 양상으로 발생한 런던 폭동은 더욱 심각했다. 런던에서는 백인의 영국을 지키자”, “켄징턴 시민들이여 지금 나서자와 같은 구호가 등장했다. 이른바 백인방어동맹이라는 단체와 영국파시스트인 모슬리 조합 떨거지들이 모임을 열고, 선전캠페인을 벌였다. 이 단체들은 노골적으로 흑인들을 공격했고, 어떤 집들은 화염병 공격을 받았다. 또한, 맨체스터에서 똑 같은 양상이 작은 규모로 벌어졌다. 상황의 심각성은 자메이카총리 노만 맨레이와 바르베이도스 수상 휴 쿠민스가 영국정부와 회합을 하고, 폭동지역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분명해졌다. 폭력은 깜둥이 사냥을 주도한 9명의 청년들이 엄한 징역형을 받고서야 결국 잔잔해 졌다. 그러나 근본적인 인종주의는 물밑으로 남아 있다.

 

 

벗어날 수 없는 저임금노동의 굴레

 

여권 획득에 수반된 어려움과 비용지불의 어려움 양 측면 모두에서 가난한 아시아 이주민들이 영국에 오는 것은 훨씬 더 힘들었다. 1958년부터 1961년까지 4년 동안 전체 이주는 1956년의 46,050명에서 1959년의 21,600명으로 감소하였다. 그러나 1961년에는 1956년에 최고였던 수치의 3배인 136,400여명이 영국으로 건너와 갑자기 최고치를 경신하였다. 실제로, 그 해에는 인도와 파키스탄으로부터의 이민이 10배로 증가하였다. 이 급격한 증가의 이유는 이주제한규정이 갑작스럽게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62년의 이민법 통과 사이에 영국으로 건너온 제3세계 이주민 50만 명중 절반인 25만 명이 1960년과 1962년 사이에 들어왔다.

[1962년 법] 이전 몇 년 동안 최대의 이주 물결이 실업률이 매우 낮은 상황에서 저임금이 넓게 퍼져있는 공공부문(public sector)의 백인 노동자가 떠나간 사회적으로 기피하는 일들을 위한 교체노동력으로서 노동자를 공급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국민건강보험에 고용된 흑인간호사와 보조사들의 곤궁은 공공부분의 저임금과 단순직 노동력으로서 이주노동자의 운명이 전혀 나아질 전망이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효과적인 피부색장벽 하에서 사실상 흑인 노동자만을 위해 마련된 일이 있었다. 해외로부터 모집된 흑인 여성은 통상, 국가공인자격을 위해 필요한 3년 이후 2년 내에 국가에서 공인된 간호사 자격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것이 흑인여성을 승진에서 제외시킨다거나, 저임금 일자리로 쫓아낸다거나, 심지어 영국 밖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하지 않았다. 사실상 이러한 구분은 국민건강보험을 위해 저임금 간호사를 데려오기 위해 특별히 계획된 것이었다. 1959년에 희망을 품은 6천명의 간호사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모집되었고, 1970년까지 주로 카리브해, 홍콩, 모리셔스와 말레이지아로부터 19천명이 영국으로 이주해왔다.

1972년과 1974년 사이에, 사실상 더 나아질 기회가 없다고 느꼈던 흑인 간호사들은 간호대리인을 더 선호하였고, 적어도 그렇게 해서 국민건강보험에 직접 고용되었을 경우에 얻지 못했던 유연성과 더 높은 임금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병원의 간호사 부족 문제를 경감하기 위해 채택된 간호대리인 사용은, 많은 조합원들이 조직을 떠나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던 노동조합의 가장 무책임한 대응으로 가로막혔다. 그들은 이 문제를 자신들의 교섭력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았고, 간호 대리인들을 함께하는 동료로 바라보는 대신에, 그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거부하는 정책을 선택했다.

국가등록간호사가 국가등록간호사로 상승할 수 있는 기회는 1980년대 초에야 열렸고, 1986년에는 토리당의 프로젝트 2000’에 의해 국가등록간호사의 구별이 폐지되었다.

 

 

이주노동자와 사적 부문(private sector)에서의 파업

 

1962년 뒤에 이주법이 통과되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인도대륙에서 영국으로 건너왔고, 주로 방글라데시에서 이주가 늘어났다. 그러나 이주를 위해서는 일자리를 가져야만 한다는 조건 때문에, 많은 이주노동자는 사적 부문에 집중되었다.

그런데 많은 이주노동자는 영국에 정착하여 차츰 영국전체 노동자계급의 한 부분으로 융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제 문제는 전통적으로 백인노동자가 고용되어 왔던 부문의 고용 장벽을 부수어 버리는 것이었다. 옥스포드 코울리 모리스 공장의 경험이 단적인 보기이다. 1960년대까지 흑인노동자는 청소 분야에서 몇 명만이 일을 하였다. 실제로 인종장벽이 그것에 영향을 미쳤고, 흑인들은 직접 생산을 위한 일자리에는 고용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1967년에 좌익 노조간부들의 압력으로 관리자는 모든 일자리를 흑인들에게 열어주었다. 1960년대 말까지 노동력의 20%를 흑인이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런던 동부에 위치한 다젠함 포드공장은 친척들을 초대하여 공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인도대륙 출신의 이주노동자를 격려하면서 흑인노동자를 모집하는 데 더 활발하게 움직였다. 1970년대 중반까지 흑인이 노동력의 60%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 이래로 계속해서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이 때문에 아시아에서 이주가 서인도제도에서 이주를 넘어서게 되었고, 1977년에는 사실상 영국자동차공업 전체 일자리의 24%를 아시아인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1977년까지 소수 민족들은 상대적으로 많은 비율이 제조업에서 일했다(영국 백인남성의 33%에 비해 소수민족 남성의 47%). 특히, 섬유산업에는 파키스탄인들을 중심으로 아시아인들이 집중되었다. 요크셔와 험버사이드의 산업에는 파키스탄인이 62%로 백인이 그저 6%인 것에 비해 크게 비교되었다.

1965년에는 섬유산업에 속했던 프레스톤에 있는 코탈즈 레드스카 공장에서 첫 번째 이주노동자 파업이 발생하였다. 경영진은 한 생산과정에 투입된 아시아와 서인도제도출신 노동자들에게 더 적은 급여로 더 많은 기계를 돌리도록 결정하였다. 이 결정 뒤에는 지역운송노조와 경영진과의 비밀 거래가 있었고, 노동자가 기계 1대가 아니라 2분의 1대의 기계를 담당하는 대신, 약간의 생산보너스를 주기로 한 거래가 그것이었다. 노동자는 조합의 지역조직가(organiser)들에게 이것은 50%의 생산증가에 대해 그저 3%의 임금인상만을 의미하는 것이며, 제안에 대해 반대투표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경영진은 노동조합의 난처한 처지에도, 이 계획을 반드시 적용해야 한다고 밀어붙였다. 곧 남성노동자는 3일 동안의 농성 파업에 돌입했다. 조합은 책임성 문제가 부각되자 통제할 수 없는 조합원들에게 호통 쳤고, 실제로 파업참가자들을 부족민(tribal)’이라며 이 파업을 인종(racial)파업이라고 불렀다. 120명의 파업참가자들은 몇 주 동안 파업을 계속했지만, 서인도제도 고등위원회로부터 현장에 복귀하라는 판결을 듣게 된다.

1974년에는 한 가지 모범 사례가 생겼다. 레스터에 있는 임페리얼타자소(Imperial Type writers)에서 일어난 파업이 그것이었다. 1968년에서 1972년 사이에 사용자는 모든 백인 노동력을 주로 저임금의 아시아 여성으로, 1600명 가운데 1100명을 아시아 여성으로 교체했다. 1974년 노동절에 임페리얼에 속한 39명의 노동자가 영국제화소속 노동자 300, 벤틀리이그룹(자동차기업) 소속 노동자 300, GEC(자동차기업) 파업노동자 200명과 연대투쟁을 하였다. 그리고 임페리얼노동자는 복귀를 거부하고 며칠을 더 넘겼고, 현장에서 500명의 노동자가 함께 투쟁할 수 있도록 이끌어냈다. 주요한 요구는 초과생산수당 지급문제였지만, 조합위원장 선거 시에 암암리에 작동하는 인종장벽에 대한 문제도 터져 나왔다. 파업과정에서 등장한 아시아 여성노동자 2명은 비공식 파업위원회를 이끄는 지도부의 일원이 되었다. 적어도 노동자의 과반수가 참가한 이 파업은 10주일 동안 50~200명의 대오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파업과 무관한 것처럼 행동하고 파업과 노조를 분리시키면서, 파업참가자(striker)들을 비난했다. 그러나 파업참가자들은 조합이 파업을 공식화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조합에 복종하였고 조합을 방어했다. 결국 경영진이 파업참가자들의 최소요구를 수용하기보다는 공장 문을 닫기로 결정함으로써 파업참가자들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1976년에 있었던 그룬위크 파업은 조합이 후원을 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였다. 그룬위크는 런던의 윌레스덴에 위치한 필름생산 공장이었고, 429명의 노동자를 고용하였으며, 주로 동아프리카출신의 아시아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노동자가 해고되었을 때, 그와 3명의 동료는 공장 입구에서 함께 버텼으며, 다른 한명의 중년인도여성노동자가 행동을 함께 했다. 이렇게 해서 그 유명한 그뤈윅 파업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그 공장에서 조직화를 시도하던 운송노조 기술자부문인 APEX에 도움을 구하고 가입한 것이었지만, 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오히려 해고되었다. APEX는 노조인정을 위해 공식적 파업을 선언하였지만, 논쟁은 법정소송, 중재와 여론 안팎으로 굴곡을 겪으며 2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 사례는 흑인 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한 정당한 의도를 간과한 채, 분열정책(sectional lines)을 뛰어넘는 단결과 대중파업(mass pickets)을 증명하기 위한 노동조합의 시도에 대한 악 선동의 근거로 이용되었다. 어쨌든 이따금 경찰이 직접 공격하곤 했던 이러한 대중시위는 파업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조합 간부들이 주로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파업이 존경받는 영국노동조합협회 지도자들을 난처하게 만들기 시작하자, 지도부는 정부중재기구(government's arbitration body) 회부결의와 법원(court) 항고를 방치하면서 파업에서 손을 뗐다. 결국 법원은 그룬위크 사장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렸고, 파업은 끝장났다.

1970년대 흑인 이주노동자에 의해 촉발되고 이끌린 이러한 파업에서 결론을 이끌어 낸다면, 그것은 그들이 이제 계급투쟁의 완전한 일부가 되었고 영국노동계급의 다른 부위들과 마찬가지로, 조합지도부에 의해 동일한 배신을 경험하였고 동일하게 패배했다는 점이다.

 

 

단일한 노동자계급

 

이후 이십년 동안, 흑인 이주노동자계급은 차츰 더 전체노동계급의 일부로 합류해 갔다. 더 나아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흑인노동자는 더는 이주민이 아니라, 영국노동자계급의 흑인형제로 받아들여졌다. 전후 이주민들의 2세대 또는 3세대가 대부분인 현재의 흑인들은 결국 영국흑인이 되었다.

그런데 노동자계급으로의 통합은 불평등을 해결하거나 차별을 제거한 것이 아니었으며, 현재까지도 그러하다. 흑인 노동자는 반숙련직, 단순직 노동자의 평균수준이상의 비율로, 숙련직, 전문직 노동자의 평균수준이하의 비율로 남아있다. 그들은 평균수준이상의 실업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빈곤과 실업이 증가할 때마다 등장하는 극우의 외침 그들을 고향으로 보내라!”는 반동의 칼날이 흑인들을 겨눈다.

지난 10년 동안 주로 아프리카에서 흑인이주는 내전과 기근, 그리고 빈곤증대의 결과이다. 토리당에 의해 민영화와 규제철폐의 굿판이 벌어지면서 이주민들은 또다시 저임금과 일용직 날품팔이 상태로 내몰렸다. 그에 따라 공공부문에서 민영화된 청소사업 노동자의 대부분은 아프리카출신 이주노동자로 이루어졌다. 이주와 보호시설에 대한 엄격한 통제는 이 부위를 노동계급의 작은 규모로 머물도록 했다. 그리고 오늘날 동유럽에서 건너오는 새로운 이주민들이 결국 일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되었더라도, 불안정한 고용상태는 마찬가지였다.

최근에 이주해 오는 노동자는 대부분 화이트칼라나 전문직 출신으로 지난날의 중간계급상태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그들은 날마다 착취당하는 현실에 의해 대개 고용주에 반대하는 반발심을 갖게 되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상승전망의 부재로부터 필연적으로 미래에 벌어질 투쟁을 위한 계급적 힘의 강화를 통해서만 무언가 찾을 수 있는 새로운 세대의 활동가들로 다시 태어난다.

지난 20년 동안의 경제위기에서 얻은 결론 가운데 하나는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이 전체적으로 낮은 수준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이다. 흑인 노동자 사이에서 넓게 퍼져있던 비정규직(임시노동제)과 저임금은 이제 피부색과 관계없이 노동계급의 많은 부위에서 일반화되었다. 그 만큼 지난 10년 동안 사장들의 공격은 노동계급을 더욱 균일하게 만들어왔다. 마땅히 이것은 자본가들의 파멸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이주에 대한 통제의 강화

 

이주에 대한 통제는 다양한 형태로 늘 존재해 왔고, 심지어는 이주의 물결이 급속히 증가했던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그러했다. 결국, 이것은 영국 장관들이 유권자들 가운데 가장 후진적 편견을 가진 부위의 압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물론, 전후 노동당정부가 도입한 1948년의 영국국적법은 모든 연방시민들에게 영국 국민이라는 지위를 공식적으로 부여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그때까지 관행이었던 것을 명문화한 것일 뿐, 새로운 권리를 주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이법의 주요한 목적은 잠재적인 제국주의 경쟁자들에 맞서, 공식적으로 연방에 소속된 독립국가들을 포함하여, 영국의 식민지들에 대한 영향력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론상으로는 모든 연방 시민들이 영국으로 입국하고 정착할 수 있는 권리가 인정되었지만, 사실상 이 권리는 여행 증서를 얻을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제한되었다.

이러한 제한 때문에 이주는 작은 규모로 통제되었지만, 전후 노동당정부는 이른바 유색식민지들에 대해 우려하였다. 공식간행물의 기록에 따르면, 19506, 영국수상 애틀리는 영국식민영토에서 영국으로 유색인의 입국을 검열하기 위해 채택할 수단을 검토하려고 비밀내각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 위원회가 만들어낸 제안들 가운데 하나는 부적격자들의 자진 송환을 위해 분산, 고용점검, 배치를 통해 문제를 처리하는 특별조사위원회(working party)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결국 내무장관이 제출한 주거와 고용에 대한 보고서에는 유색인에 반대하는 영국인의 편견정도뿐만 아니라, ‘유색 식민지인들의 무규율한 행위가 지적되어 있다. 어쨌든 위원회는 끝내 어떤 발본적인 수단에 의지하지 않고도 일정범위 내에서 문제는 제한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1951년에 토리당이 권력을 잡은 뒤에도 노동당이 설치한 특별조사위원회 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유색 식민지들에 대한 우려는 동일하게 정부의 주요의제로 남았다. 보고의 항목은 특별조사위원회 자신의 견해를 그대로 담고 있다. 보기를 들어, 런던경찰서 보고서는 모든 유색인은 일하기 싫어하고, 국가의 원조로 살아가는데 만족하며, 비도덕적인 방식으로 벌어들인다. 그들은 가난한 노동자들이다. …… 그들의 정신수준은 낮고 짧은 기간 동안만 일하려고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다른 경찰보고에는 인도인들과 파키스탄인들을 염치없다”, 서아프리카 인들을 게으르고 거만하다고 그렸다. 노동부장관은 이주 여성에 대한 보고에서 그들의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고 영국의 노동조건에 적응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고 지적했다. 분명히 내각 전체의 분위기는 인종주의에 깊숙이 빠져있었다. 목소리를 높였던 것은 처칠 수상 자신이었다. 흑인들의 영국정착이 영국을 잡종 사회로 만드는 것이라고 자메이카정부 관리에게 말했던 것처럼, 처칠은 자신이 백인우월주의자로 비쳐지고 싶어 했다. 1952년에 유색노동자의 대영제국 입국유색인들의 사회복지를 제한하는 움직임을 고무한 것은 처칠이었다. 이 정책은 처칠 자신의 관점을 반영한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고, 1955년 총선에서는 처칠 자신이 토리당의 주요 정책으로 백인의 영국을 지키자!”는 슬로건을 제안하였다. 이 슬로건은 인기는 떨어졌지만, 선거승리를 위해 인종주의를 확실한 수단으로 보았던 것이다.

 

 

[1962년 법]

그런데 1950년대에 토리당 정부는 이주를 제한하는 입법추진을 오래지 않아 중단했다. 그 이유는 이 법이 불필요하다고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장애물들이 이 법을 무용지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토리당 정부의 주요한 난제는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그리고 뉴질랜드와 같은 백인 연방국 시민들 앞에는 어떤 장애물도 놓지 않은 채, 흑인 노동자들의 이주를 제한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연방관계장관 스윈튼은 우리가 차별적이지 않은 조항으로 설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주에 관한 입법이 유색인들을 배제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숨길 수는 없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상의 색깔장벽은 특히, 인도와 파키스탄 및 자메이카 편에서는 보복의 위험을 의미했다.

이주통제를 도입하고자 한다는 토리당정부의 첫 공개발표와 함께 노팅험과 노팅힐에서 폭동이 발생하였지만, 19589월에 정부는 그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전망으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발표에서 정부는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은 폭동의 희생자들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1959년 총선 후부터 토리당이 정권에서 물러날 때까지 여전히, 이주제한의 구실로 삼을 수 있는 조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장관들이 비밀리에 관찰했던 이주노동자들의 실업률은 특별한 증가를 보여주고 있지 않았다. 더욱이, 재무부의 보고는 국가경제에 대한 이주노동자들의 기여도가 그들이 소비하거나 고향에 송금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또한, 재무부 보고는 이주를 제한하는 것이 평균 임금을 크게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덧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리당은 그들의 계획을 계속 밀고나가기로 결정했다. 1962년의 연방이주민법은 그 결과이다. 이 법은 영국에 들어오는 모든 연방시민들에게 노동허가증(job voucher)을 받도록 했다. 이 허가증은 일할 곳이 정해진 사람들과 공급부족으로 파악된 특정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동으로 부여되었다. 노동당내각은 추가로 모든 연방 국가들에게 단순직 노동자에 대한 노동허가를 공표하였다. 앞의 두 가지 노동허가는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백인 시민들에게 활짝 열린 문을 보장해주었고, 세 번째 종류의 노동허가는 산업의 요구에 부응한다는 구실로 이주자 수를 나라마다 선별적으로 제한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동시에 이 법은 영국에 정착한 연방시민들의 아내와 아이들이 입국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다른 한편, 이 법은 건강쇠약과 형사판결의 이유로 이주민들을 강제로 송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오직 5년 이상 계속해서 거주해온 사람들만이 그와 같은 취급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법의 충격은 상상할 수 있는 외면적인 것 보다 더 복잡하였다. 한편으로, 이 법은 이주민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위험을 가져온다는 편견이 영국주민들의 공식적인 믿음으로 만들었고, 그런 식으로 인종주의를 키워냈다. 마찬가지로, 이 법은 '불법으로' 나라에 들어온 것이라는 혐의를 씌우면서, 영국 내 모든 이주노동자들의 지위를 침식하였다. 그렇게 해서 노동계급 전체를 약화시켰다.

다른 한편, 이 법은 적어도 최초에는 그렇지 않았더라도, 단순직 이주노동자로서의 유입을 막지 않았고, 그 이유는 토리당이 임금하락을 위한 사장들의 노력을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법은 영국에 존재하는 이주민들의 수를 감소시키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귀향할 전망으로 고국과의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했던 이주노동자들의 다수는 이 법에 의해 법테두리 밖으로 내몰렸고, 결국 영국을 자국으로 삼는 영구 정착을 선택했다. [1962년 법]의 결과는 또한 이주민 규모의 영구적 안정화를 가져왔다.

 

 

노동당이 이주민들에게 등을 돌리다

 

1962년에 노동당은 이주에 대한 통제문제와 관련해서 분열되었다. 당 출신 의원들의 소수는 이주제한에 대해 찬성하는 목소리를 냈고, 아마도 꽤 큰 숫자는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어쨌든 당 지도부는 당 기율을 통해서 이 문제와 관련된 당원들과 지지자들의 편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런데, [1962년 법]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을 때, 당내 우파지도자인 헉 게이트스켈은 법에 대한 확고한 반대를 내세웠다. 그리고 다음 해에 그는 수정안을 제출하였고 정부를 강제하여 승리하였다. 그러나 196311월에 게이트스텔이 죽고, 해럴드 윌슨이 당 지도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윌슨은 당내 좌파들의 신임을 기반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다른 태도를 취했다. 그는 게이트스텔이 했던 법에 대한 원칙적 반대에서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어떤 제안에서는 이주통제에 대한 강화를 찬성하는 주장을 폈다. 나는 현재의 법에 허점이 있고, 우리가 법적 강제력을 강화하는데 대해 찬성해야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 우리는 이주민들의 건강검진이 보다 확실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추방관련법의 변화를 지지할 준비를 해야만 한다. …… 만일 분명한 범죄로 유죄를 선고받았던 사람이 이 나라에서 5년 이상 살아왔다면, 그는 법의 적용에서 제외된다.” 그리고 다음 해에, 노동당은 선거 선언문에서 이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노동당은 대영제국에 들어오는 이주민 숫자가 제한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것을 뒤집을 만족스러운 동의가 연방국들과 합의될 때까지, 노동당 정부는 이주에 관한 통제를 유지할 것이다.” 다른 말로, 분명한 것은 윌슨이 이 문제로 표를 잃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처는 악순환을 가져왔다. 토리당의 반이주악선동 조장과 윌슨의 패배는 이주에 대한 더 많은 통제를 요구하는 극우세력과 인종주의적 흐름을 고무하였다. 심지어, 영국이주 통제연합 버밍험 지부와 소우트홀 주민연합과 같은 집단들이 이러한 분위기에서 선거지원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노동당은 1964년 선거에서 패배했고, 토리당은 노동당의 안정적 기반인 웨스트미들랜드의 스메스위크를 빼앗았다. 그들은 만일 당신이 검둥이를 이웃으로 삼고자 한다면, 노동당에 표를 던져라.”라는 모든 것을 대체하는 구호를 이용해 반이주 참주선동을 정치인들에게 강요하면서 선거에서 승리했다.

권력에서 밀려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윌슨은 하원에서 [1962년 법]치명적 결과에 대해 불평하였다. 1964년 말까지, 미숙련 노동자를 위한 노동허가증은 신청자 3만 명의 절반에게만 발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2년 법]은 다음 해에 더욱 강화되었다. 미숙련노동자들을 위한 노동허가제는 폐지되었고, 몰타공화국에 할당된 1,000장을 포함하여, 다른 허가증들도 해마다 8,500장씩 줄어들었다. 학생들과 방문자들에 대한 기간제한의 도입으로 친척들을 위한 입국의 권리가 제한된 반면, 새로운 규칙을 기피하려하는 사람을 추방하는데서 물리력을 포함한, 더 강력한 추방 제도가 도입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규칙들은 어떤 점에서 보더라도 새로운 미숙련 흑인 이주노동자들을 완벽하게 막아냄으로서, 이전의 토리당 정부가 감히 할 수 없었던 것을 성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슨은 사장들에게 매우 유용한 단순노동자의 저수지를 축소시키는 위험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정착한 이주민들의 아이들과 친척의 일정한 유입은 이 저수지를 유지시키고, 젊어지도록 보증했다. 따라서 노동당은 인종주의적 편견과 자본가의 이익을 동시에 보존하는 기반이었다.

 

 

윌슨에서 대처로

 

자본가계급은 결국 성장을 위해 더 이상 단순노동자들의 저수지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전후 확장을 이끌었던 소비의 증가는 세계적으로 서서히 둔화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이윤폭은 줄어들기 시작했고, 자본은 생산영역에서 빠져나가게 되었다. 1967, 실업자 수는 50년 만에 60%가 증가하였다. 사장들의 관점에서, 실업증가의 압박은 이제 임금수준 저하를 유지시키는데서 충분히 강력한 힘이었고, 결국 이주는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

이제, 노동당 정부가 허용할 수 있는 반이주편견의 터전이 더 이상 충분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곧 그것을 찾아냈다. 영국정부는 독립이 허용된 많은 과거 아프리카식민지들의 유럽과 아시아인 정착민들에게 영국여권을 유지할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했다. 케냐가 그 가운데 하나였는데, 정권의 아프리카화정책으로 인해, 영국으로 이주하는 아시아계 케냐인들의 수가 증가했다. 이것은 반이주 압력단체들이 새로운 침입의 위협에 맞서는 역사적 캠페인을 시작하기에 충분했다. 즉시, 윌슨은 자신 혹은 부모나 조부모 중 적어도 한 명이 영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해외 연방시민들에게도 자동으로 부여된 입국권을 효과적으로 박탈하는 1968년의 새로운 법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것은 케냐의 백인은 영국에 자유롭게 건너올 수 있었지만, 케냐의 인도인들은 그렇지 못함을 의미했다. 그것은 영국에 거주하지 않는 시민들을 두 종류, 모든 특권을 가진 백인들과 어떤 권리도 가지지 않은 나머지사람들로, 영국에 거주하지 않는 시민들로 분류했다.

그리고 이 제안은 아시아계가 우간다와 말라위로부터 빠져 나오는 것을 조금 늦추고자 했다. 1968년에 추진된 법은 1971년에 헤스의 토리당정부에 의해 제정되었고, 이어서 1979년에 칼라칸의 노동당정부가 더욱 이주통제를 강화하여 완전히 새로 고친 이주법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유럽경제공동체(EEC)]의 규정에 따라 영국국경이 유럽백인들에게 더 많은 문호를 개방한 바로 그 때, 영국연방의 흑인구성원들에게는 어느 모로 보더라도 합법적 이주가 완전히 막히게 되었다. 그리고 대처의 1981년 국적법은 과거 식민지였던 나라들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을 세 가지 서로 다른 부류로 나누어 제공된 권리들을 형식적으로 옮겨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반인종주의 입장의 위험들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정책에서 노동당과 토리당 사이에는 차이가 없었다.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면, 이미 영국에 정착한 흑인주민들을 향한 정책에서였다. 그 차이는 노동당정부가 이주에 반대해서 항상 더 강력한 수단을 채택한 동시에, 영국 내에서의 인종차별에 맞서는 수단들을 채택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윌슨에 의한 1965년의 이주규칙 강화는 인종관련법에 의해 상쇄되었다. 이것은 (주거와 고용이라는 생존권들을 제외한 영역에서) 인종차별을 불법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차별 사례들을 조사하는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그러한 정책은 토리당정부는 물론, 노동당정부하에서도 계속해서 규칙화되었고, 성장하는 흑인 유권자들의 표를 잡기위해 양당의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더욱 그러했다. 영국흑인시민들을 인종주의와 차별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셀 수 없이 많은 단체들과 독립정부기관이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이 단체들은 인종주의의 사회적 뿌리를 말하지 않았고, 말할 수 없었으며, 그들의 활동을 최선이 아닌, 최악의 위해성을 막는 것에 한정했다.

결국, 이와 같은 모든 인종관련단체들, 그리고 득표를 위해 행해진 모든 대중홍보는 차별과 싸우기 위해 많은 수단들이 제시되고 있다는 인상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인종주의와 차별의 완전한 폐지를 받아들인 순간에, 흑인노동자들과 실업자들은 자신들이 얻은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면에 그것은 가난한 백인들의 눈에, 흑인들에게만 많은 것이 주어졌고, 자신들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이것은 흑인과 매우 유사한 조건의 공유 때문에 흑인 대다수의 처지로 하락하게 되었다고 느낀 영국노동계급의 가장 소외된 층에서 인종주의 편견이 더욱 성장하는 기초를 제공했다.

지난 30년 동안, 모든 종류의 참주선동가들은 재빠르게 그들 자신을 지원할 수 있는 지팡이로 이것을 이용해 왔다. 예를 들면, 토리당의원 에노크 포웰이 1968년에 버밍험에서 한 연설과 경고가 유명한 사례이다. “나는 앞날을 생각하면서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다. 로마제국에서처럼, 거대한 피의 거품을 이룬 티베르강을 보게 된다.” 포웰이 피를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구시대의 괴팍스러운 인물인 포웰은 인종폭동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그것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귀향이라고 주장하는 백인우월주의자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주요 정당들을 위해 신이 선사한 선물이었다. 토리당은 자신들의 집단에서 그를 축출함으로서 높은 도덕적 권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케냐 아시아인들의 이주를 통제하는 법으로 인해 타격을 받았던 노동당정부는 반인종주의 신용장을 되찾기 위해 포웰에 반대하는 시위를 요청하고 새로운 인종관련법을 제안하면서 얼마간의 신뢰를 다시 얻을 수 있었다.

수백 명의 부두노동자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하원 앞에서 포웰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인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그저 인종주의자들로서 해산되었을 뿐이다. 아직 이 부두노동자는 백인 노동자계급의 가장 후진부위에 속했고 가난한 층이었다. 그들이 인종주의자들이었다고 하더라도, 많은 다른 노동자보다 더 인종주의적 편견에 휩싸였던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것은 명목상의 반인종주의자들이 위험하게 결합하여 인종주의카드를 이용한 것이 직접적으로 빚어낸 현실적 문제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한 직접적 책임은 기계노조에게 있다. 기계노조는 산하 운송노조조직을 통해 인종과 피부색에 관계없이 어떤 이주도 즉시 막기 위한 소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인종주의적 소송이라기보다는, 사장들과 싸우는 것보다 노동력공급을 제한하는 것이 더 쉽다고 느끼는 노동자의 조합주의적 소송이었다. 고용주들에 맞서는 것을 피하고 싶어 했고, 조합원들의 편견에 맞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기계노조의 행위가 인종주의로 쉽게 빠져들 수 있는 이러한 조합주의적 전망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더라도, 고무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도심부 폭발과 이후

 

명목상으로만 반인종주의적인 정당과 단체들의 연합, 인종주의의 일상화, 가난의 증대는 중요한 곳들만 언급하더라도, 1980년의 브리스톨, 19814월의 브릭스톤, 7월의 사우스홀, 리버풀, 맨체스터의 도심 폭발들을 가져왔다. 이 폭동들의 직접적인 이유는 동일하게 경찰의 잔혹함과 명백한 인종차별주의였다. 대처의 새 정부는 폭동에 맞닥뜨리게 되었지만, 그것을 막을 수단은 없었다.

대처가 시작했던 통치방법 때문에 이것은 더욱더 모순적이었다. 그녀는 이 나라는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로 인해 늪으로 더 깊숙이 빠져들고 있다.”라는 말로 뉴스표제를 장식했다. 그 내용은 내부적 통제들과 여권검사에 대한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흑인의 귀환 유도에 대해 처음 제기했던 에노크 포웰에게 선사하는 흑인문제를 해결을 위한 사무차관직을 만들었다. 토리당의 몇몇 지역위원회는 더 나아가 흑인들이 고국으로 귀환하는 경우 경비를 지불하기까지 했다.

말할 것도 없이 도심폭동들이 끝나자마자, 모든 곳에서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참주선동이 시작되었다. 갑자기 대처는 사회공동체의 문제들에 관해 언급하기 시작했고, 실효성이 없었던 도심정비를 위한 국채가 이러한 분노의 폭발을 막기 위해 고안된 모든 종류의 계획들을 위해서 유용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모순적이게도 대처는 오래된 노동당의 훌륭한 비책인 반인종주의적 제스쳐에 의지했다.

입증된 노동당의 비책들 가운데 대처가 이용한 것은 민족분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1960년대에 로이제킨스가 내무장관으로 있을 때 발명된 것이었다. 이 생각은 반인종주의에 대해 분명하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바라는 것을 쉽게 추진할 수 있도록, 집단들 사이에 충분한 경쟁을 부추기기 위한 목적에서, 각각의 민족 또는 종교집단들이라는 분리된 실체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각 집단들은 그들을 대표하는 권위 있는 공동체 대표를 천거하도록 제안 받았다. 이들 지도자들은 이따금 자신들 말고는 아무도 대표하지 않는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경찰과 정부 관리들과 나란히 각종 분쟁해결위원회에 마련된 자리에 앉도록 초대되어 추켜세워졌고, 자신들의 공동체 프로젝트재정을 위한 기금을 제공받았다. 그 규모는 흑인집단의 단결을 막고 분리시키기 위한 일단의 종교집단을 위한 기금보다 크지는 않았다.

대처가 폭동 이전에 폐지하고자 했던 흑인 자활프로그램을 위한 정부기금 사용사업을 관장하는 인종간 평등을 위한 위원회의 활동은 재개되었다. ‘분명한 민족적요구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200개의 새로운 공동체 프로젝트를 재정지원하기 위해 1982년에만 27천만 파운드가 지불되었다. 그러나 이 기금들은 소수의 젊은 급진파들이 새로운 체제에서 자신들을 위한 틈을 찾아내고 체제전체와 통합되도록 했다. 그러나 도심부 전체주민들을 위한 어떤 긍정적 변화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이와 반대로, 폭동에 대한 토리당정부의 대응은 장기적으로 완전한 분리를 추구하는 정책들을 가져왔다. 모든 상담 사업은, 그것의 이행에 대한 감시와 함께 발전했다. 이 정책은 많은 곳에서 인종적 차별과 싸우기보다는 노동자를 분열시키려는 목적에 더 많이 활용되었다. 그것의 중요한 원인은, 노동자의 해고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가 부재할 경우, 경영자들이 경영이익을 위해 이 정책을 관료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이 명목상의 시책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었으며, 직접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흑인 분리주의와 계급의 이해

 

도심부 폭동에 대한 대처정부의 정책은 야심 있는 흑인중간계급에 대한 안정적 지원에 중점을 두면서, 그들에게 의지하여 도심부 화약고에서 열기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 중간계급은 긍정적 차별화 정책의 성공에 대해 감사하며, 대처가 마련해준 새로운 기구들 또는 여러 지역방송매체에서 일자리를 잡게 되었다. 폭동에 의해 이들 중간계급은 갑작스럽게 정치적 관심을 갖게 되었고, 흑인주민들의 특수한 이해라는 명목으로 흑인주민들의 대표로서 초대받게 되었다. 흑인들의 고유한 문제들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흑인 구성원들이 분리되어 조직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노동당 내에서 흑인 분파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세를 모았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노동당이 흑인 당원들을 위한 지도부 자리를 마련하고 의회와 지역선거에서 흑인 후보비율의 설정하여 고유한 긍정적 차별 전략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흑인 분리주의 카드를 활용하는 중간계급 활동가들은 그저 영국 정치가들이 누리는 특권에 대해 열망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영국의 모든 흑인들을 대표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알맞은 역할이라 점을 분명하게 느꼈다. 그러나 백인정치인들이 백인노동자를 대표하지 않는 것보다도 더 그들이 흑인노동자의 이익을 대표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흑인들의 고유한 이해를 내세우는 것은 그저 흑인과 백인노동자 모두가 그들의 착취자들에 대한 싸움에 그 이해가 걸려있는 고유한 계급적 이해를 옆으로 밀쳐버리기 위한 것이었다.

키녹이 당의 규율을 잡아나가던 시기와 같이, 다른 잠재적인 반대 입장이 등장하는 것을 허락하려 하지 않는 당 지도부 때문에, 노동당내 흑인분파 설립을 위한 시도는 실패하였다. 하지만 형편없는 개량주의 당 정책에 기초하고 있는 흑인정치가들의 야심은 계속해서 고무되었다. 결국 흑인 표밭은 노력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 1986년 지역선거에서 160명의 흑인 노동 상담사들이 도심 선거구를 중심으로 당선되었으며, 런던의 세 자치구들에서 흑인 대표가 선출되었다.

오늘날에는 흑인 분리주의는 대부분 정치가들에게 이끌려 노동자계급에 대한 블레어의 공격을 승인하고, 인종주의적 편견을 부추겨 흥정의 대상으로 삼는 노동당 정치인들의 손과 발이 되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노동자 계급은 국제적이다

 

오늘날, 지난날의 이주노동자는 영국노동자계급의 완전한 일부가 되어, 커다란 규모의 흑인노동자계급으로 변화하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노동당 정부는 이들을 가짜망명자들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이 때문에 흑인노동자문제는 또다시 불거졌다. 노동당은 진짜망명자들을 환영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왜 독재가 초래한 가난 때문에, 고국 독재자의 제국주의 시장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경제적 이주민들은 밀로셰비치정권에서 달아난 세르비아지식인들과 다르게 취급되어야 하는가? 어쨌든, 영국 다국적기업들은 제3세계를 노략질하는 데서 꽤 많은 역할을 한다. 그들의 희생자들을 환영하고 그들이 바라는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영국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었다.

영국 노동자계급의 터전이 이주 홍수의 위협에서 보호되어야 한다는 구실은 거짓이다. 그저 영국정부의 국가지출 가운데 몇 가지 새로운 군사 계획을 휴지조각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수십만의 새로운 이주민이 생활할 수 있는 충분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이주민이 이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가들의 위선적인 거짓말에도, 그들은 불쌍하게 구호를 통해 살고자 이곳에 건너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생활수단을 벌고자 이 땅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른 모든 노동자처럼 자본가의 착취를 보장해주고, 자본가와 국가를 위해 경제에서 가져가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준다.

물론 현재 영국노동자계급을 위한 충분한 일자리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수십만의 이주노동자가 내쫓긴다고 해서, 42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는 현실에 결코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실업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큰 회사의 거대한 이익과 자본가의 재정적 이익, 국가의 자원을 포함하여 모든 자원을 유용한 일자리와 생산을 창조하기 위해 동원하는 것이다. 그때, 수십만 이주노동자의 수용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영국노동자계급이 외국노동자과 경쟁하지 않도록 보호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참주선동가들은 흑인 노동자의 귀향을 주장하는 인종주의자들과 동맹을 맺고 있다. 그들은 노동자계급의 적들이다. 그들 조합의 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도록 동의하여, 외국 경쟁자들에 맞서 우리의영국 산업을 방어해야만 한다는 것은 영국 사장들의 이익일 뿐이다. 노동자계급의 이익은 그 구성원들의 분열이 아니라, 단결과 강화에 의해서만 보장된다. 그것을 통해, 자본가들의 이익을 증대시키려는 수고 대신에, 그들의 경제적 소유권과 그들의 이익을 넘겨주도록 강제하는 것에 노동자계급의 이익이 달려 있다.

전체 역사에 걸쳐, 영국 노동자계급은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피와 에너지를 공급해준 이주노동자에 의해 강화되어 왔다. 이러한 고마운 역사에서 비롯된 이주노동자가 실질적으로 지구상의 모든 나라 주민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영국노동자계급은 세계에서 가장 국제적인 노동자계급의 하나이다. 이것은 부담이 아니라, 풍부한 자산이다. 그것은 비용이 많이 드는 은행들과 재정기구들의 네트워크에도 영국 자본가계급이 갖지 못한 것을 영국노동자계급에게 제공한다. 이 자산은 계속해서 개발되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세대 또는 다음세대에 이 자산을 활용하여, 세계를 가로질러 우리계급의 형제자매들과 손을 맞잡고 그들 모두와 계급으로 함께 자본가 체제에 맞서 싸우게 될 것이다.

 

 

옮긴이: 정원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