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전쟁에서부터 해산까지, 1939년~1943년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10월호

전쟁에서부터 해산까지, 1939년~1943년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6. 09:19

전쟁에서부터 해산까지, 1939~1943

 

케빈 맥더모트 & 제레미 애그뉴

 

 

19398~19436월은 대체로 코민테른이 스탈린의 외교정치적 명령에 가장 종속된 때로 여겨졌다. 나치-소비에트 조약의 결과로서, 19399월의 극적인 방향선회와 독일의 소련 침공 뒤 19416월의 방향전환, 그리고 19435월 코민테른의 해산은 이러한 견해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는 증거이다. 새롭게 발견된 문서는 디미트로프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국이 많은 경우에 스탈린이 바라는 대로 행동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료는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각국 공산당의 경험에 대한 최근 연구는 조금은 더 미묘한 차이를 보여준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엄격한 스탈린주의의 원칙소비에트 대의에 대한 헌신과 여러 국가 또는 지역에 제한되었던 자율적인 대응이 모호하게 공존했다는 것이다. 아주 어려운 전시의 조건에서, 모든 것을 지휘하던 코민테른의 역할은 차츰 사라지고 알려진 것처럼 1945년 뒤에 사회주의에 이르는 다양한 길로 들어서는 새로운 시험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책이 철저히 쫓고 있는 모스크바의 중앙집중화민족적 특수성이라는 이분법은 비록 어쩔 수 없는 숨겨진 구실이긴 하지만 코민테른의 해산까지 명확하다. 실제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의장단이 이러한 중요한 행위를 위해 제출했던 설명 가운데 하나는 코민테른의 조직형식그것의 분파의 독자성사이에 긴장이 있음을 함축한 것이었다.

이 마지막 장은 다음의 두 가지 중요한 계기를 설명함으로써 이러한 쟁점을 다룰 것이다. 즉 첫째로는 나치-소비에트 조약의 영향과 19399~19416월의 시기에 있은 전쟁에 대한 스탈린의 제국주의적특징부여이고, 둘째로는 1943년 봄 코민테른의 사망이다. 각국 공산당은 모스크바의 엄명에 따라 결정되었던 해산에 어떤 대응을 했는가? 공산당 지도자와 많은 당원은 이때 코민테른 정책의 뚜렷한 변화를 지지했는가? 도대체 얼마만큼, 각국 공산당이 지역의 조건에 알맞게 하기 위해 코민테른의 전략을 적응시킬 수 있었는가? 전쟁 시기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완전한 스탈린주의화를 나타내었던 것인가?

 

 

나치-소비에트 조약과 제국주의전쟁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어떤 하나의 사건도 나치-소비에트 불가침조약처럼 거센 논쟁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클로뎅은 코민테른이 했던 선회가운데 그 어떤 것도 19398월의 소련-독일 조약에서 일어났던 것보다 노동계급 운동의 이해관계에 훨씬 더 반대되거나 코민테른 그 자체에 훨씬 더 불리한 것은 없다.”면서 마땅찮게 여겼다. 그러나 여기서 조약을 체결하게 한 외교적 배경을 토론하거나 스탈린의 동기를 추측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 몰로토프와 폰 리벤트로프의 서명에 잉크가 마르자마자 줄곧 이 주제를 다룬 많은 문서가 있다. 우리의 과제는 좀 더 좁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방향전환에 대한 코민테른 지도자와 중요한 공산당의 대응을 평가하고 코민테른의 이전 경험에 비추어 조약의 영향을 평가할 것이다. 1930년대 중반에서 말까지 일어났던 반파시스트 투쟁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나치-소비에트 화해가 불러온 강력한 정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먼저 19398월 말과 9월의 극적인 날들을 서술적으로 설명해야만 한다. 822일에, 조약을 체결하기 직전에,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국은 소련-독일 협정의 전망이 영국과 프랑스, 소련 사이의 협정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배제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게다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각국 공산당에 침략자, 특히 독일 파시즘에 맞선 투쟁을 훨씬 더 강력하게 이어가도록 격려했다. 코민테른의 선언은 실제로는 여전히 제7차 대회의 반파시스트 노선을 제시한 것이었고 여전히 평화적인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과 호전적인파시스트 정권을 구별한 것이었다. 분명히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국은 조약이 체결되리라고 전혀 내다보지 못했다. 그것은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디미트로프와 마누일스키가 스탈린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지 못했거나, 소비에트 지도자가 이론적 정확성을 생각하지 않고 소모적인 임시변통의 책략에 착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822일에 발표한 결의안과 뒤이어 9월 초에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발표한 성명서를 바탕으로 삼아, 소련 역사가들은 2차 세계대전의 처음 며칠 동안에 …… 코민테른 지도자는 여전히 독일 파시즘을 주된 위협이자 침략국으로 여겼다. …… 본질적으로 이는 폴란드 민족이 이 전쟁에서 그들의 독립을 방어하고 있었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곧 급격히 바뀌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스탈린이 이러한 선회의 건축가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95일에 디미트로프는 중앙위원회 의장 안드레이 즈다노프에게 새로운 국제 정세 속에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각국 공산당의 과업을 작성하는데 아주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알리는 편지를 썼다. 스탈린의 직접적인 원조를 이전보다 훨씬 더 요구했다. 이틀 뒤, 97일에 디미트로프는 몰로토프와 즈다노프의 면전에서 스탈린과 개인적인 인터뷰를 했다. 그 만남은 국제공산주의운동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다. 디미트로프의 일기 목록에 따르면, 스탈린은 전쟁이란 세계를 다시 분할하기 위해 두 그룹의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투쟁이라고 특징지었다. 따라서 자본주의 국가를 파시스트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로 나눈 것은 이전의 의미를 잃게 되었다.” 그는 인민전선 슬로건을 폐기할 것을 요구했고, 운이 나쁜 폴란드를 말하면서 그는 현재의 조건에서 이 국가의 파괴가 이류의 부르주아적 파시스트 국가의 파괴를 뜻할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논평했다. 미래의 발전에 비추어 훨씬 더 강력하게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폴란드가 분쇄된 결과로서 사회주의 체제를 새로운 영토와 주민에게 퍼트린다면, 그것은 나쁜 일인가?” 마지막으로 그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의장단이 전쟁과 전쟁의 가해자를 단호하게 비난하는 테제를 발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스탈린의 말은 문자 그대로 99일 회의에 뒤이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국이 공산당에 발표했던 중요한 단기 테제’(short thesis)로 구체화되었다. 이 지시는 모든 곳에 있는 노동계급이나 공산당이 전쟁을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었다. 그와 반대로, 교전국에 있는 국가의 공산당은 반파시스트 본질보다는 제국주의적 본질을 폭로하는 불공정한 전쟁에 적극적으로 반대해야만 한다. 좀 더 특수하게, 그 테제는 공산당, 특히 이 관점과 일치하지 않는 의견을 취했던 프랑스와 영국, 벨기에와 미국의 공산당이 그들의 정치적 노선을 곧바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공산당은 또 종파적인 제3시기를 강하게 떠오르게 하는 전술인 사회민주주의의 배반적인 정책에 맞서 단호한 공세를 착수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대부분 설명되지 않은 이유 때문에, 그러한 지시가 목적지에 다다르는 데 걸리는 시간은 가지각색이었는데, 그러한 지체는 부분적으로 각국 공산당의 일반 당원이 느끼는 혼란 탓이었다.

이러한 노선 변화의 역사적 수입은 분명했다. 코민테른과 그 회원국은 공개적인 반파시스트 선전선동을 피하고, 자본주의 국가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구별하지 않으며 교전 중인 부르주아 정부에 대한 그 어떤 지지도 포기하게 될 것이었다. 그 결과로서, 독일을 묘사하기 위한 파시스트라는 말은 코민테른 간행물에서 사라졌고 영-프 제국주의의 특수한 위험이 공산주의의 선전에서 전면에 등장했다. ‘위로부터밑으로부터의 반파시스트 동맹이라는 이전의 인민전선 전술 대신에, 새로운 정책은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사회주의적 아첨꾼에 맞선 강력한 반대로 밑으로부터의반전 단결을 옹호한 것이었다. 새로운 노선을 가장 열성적으로 지지한 사람들은 전쟁이 앞으로 혁명적 투쟁과 전환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가정했다. 비록 이것이 혁명적 패배주의라는 레닌주의 원칙으로 회귀하는 것으로 파악될지라도, 실제로 이러한 슬로건은 결코 공식적인 코민테른 정책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선회1934~1935년 이래 코민테른이 썼던 반파시스트 전략을 근본적으로 수정한 것이었다. 또 그것은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조합 운동에서 공산주의자의 진지한 동맹자로부터 공산주의자를 고립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조약의 냉소적인 본질과 특히 코민테른이 전쟁을 양측 모두의 제국주의적이고 불공정한것으로 성격을 규정한 것은 충직한 공산주의자들의 생각에서는 모호하지만 끈질긴 불확실성을 일으켰던 것이다. 가장 대담한 사람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대한 소비에트의 약속을 의문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몇몇 당에서는 내부 토론이 격렬하게 이루어졌다. 영국공산당에서 이루어진 팽팽한 논쟁은 주된 보기가 되었다. 19399월과 10월에 영국공산당 권력자 집단 전체에 휘몰아쳤던 신랄한 역 비난은 1980년대 말에 모스크바에서 관련 문서자료가 반환되었기 때문에 이제 잘 정리되었다.

모든 공산당처럼 영국공산당은 나치-소비에트 조약 때문에 심하게 흔들렸고 충격에 휩싸였지만, 그것을 소련 정부에 의한 발 빠른 외교적 움직임으로 승인했다. 그러나 영국공산당의 중앙위원회는 그것이 해외에서 온 것이든 국내에서 나타난 것이든 파시즘에 저항할필요성을 계속해서 지지했다. 군사적으로 나치 독일에 맞서고 정치적으로 체임벌린 정부에 맞서는 이러한 두 전선에서의 투쟁은 어쩔 수 없이 영국인의 전쟁 수행 노력에 대한 지지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10월 초까지 영국공산당의 공식적인 의견이 되었다. 그 의견은 새로운 반전 코민테른 노선과 심하게 불화했다. 914일에 두 전선의 투쟁의 주요한 대표자인 해리 폴리트(Harry Pollitt)가 전쟁에 대한 책임이 두 제국주의 강대국 집단의 손아귀에놓여 있다고 한 소련 신문의 전문을 공개하는 것을 막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그런 행동은 중요한 외국 공산주의자에 의한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여태껏 단결되었던 영국공산당 정치국에 처음으로 나타난 분열을 막지 못했다.

이러한 분열은 모스크바에 있던 영국공산당 대표자인 데이브 스프링홀(Dave Springhall)이 런던에 도착한 뒤에 더욱 가속화되었다. 925일에 그는 당 중앙위원회에 코민테른 서기국의 단기 테제’(short thesis)를 알려주었다. 그 뒤 두 개의 적대 진영이 만들어졌다. 하나는 새로운 노선에 거세게 반대했던 폴리트와 캘러처와 캠벨을 중심으로 한 진영이고, 다른 하나는 더트와 러스트와 스프링홀을 주축으로 한 모스크바의 지시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진영이다. 나머지 다른 당원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102~3일에 중앙위원회의 보복적인 회의에서, 양 진영 사이의 논쟁이 결판났다. ‘코민테른의 노선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일것을 요구한 더트는 공산주의자의 의무가 노선을 따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다.”고 놀랄만한 말을 했다. 그러나 폴리트의 가장 절절한 확신은 단호하게 파시스트 짐승을 때려 부수는 것이었다. 그는 주된 적이 파시즘이었고 전쟁은 본질적으로 공정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리 조국의 국가적 영예를 추구하고” “영국인을 방어할필요성을 말한 애국적 경향을 드러내었다. 새로운 코민테른 노선에 대한 그의 의심과 짝을 이루었던 이러한 애국적 경향은 마치 이단과 같았다. 디미트로프와 스탈린의 완전한 권위에 기대어, 더트와 그의 동료들은 중앙 위원회의 다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그 결과 단기 테제를 놓고 이루어진 투표는 찬성16표 대 반대 2(폴리트와 캠벨)로 되었다. 그가 곧바로 새로운 노선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와 자기비판에도, 폴리트는 사실상 교체되었고 냉정한 지식인더트가 서기장이 되었다.

왜 영국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의 본능적인 반파시즘에 반대하고 코민테른 노선을 택했는가? 이에 대한 설명은 전간기 시기에 공산주의의 경험의 핵심을 건드리는 것이다. 더트와 러스트와 같은 몇몇 사람들에게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국의 단기 테제의 타당성은 분명했다. 그의 주장을 모든 종류의 이론적 억지로 표현하고 있는 더트는 영국과 프랑스가 소련과의 평화 전선을 형성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전체 국제 상황은 바뀌었다고 맹렬하게 주장했다. 역사적 도약이 일어났고 따라서 당 노선은 이 사실에 순응해야만 했다. 즉 전쟁은 약탈적이고 불공정한 것이다. -프 제국주의는 전쟁으로 나아가게 한 주요한 자극이었다. 게다가 더트에게는 중앙집중화된 세계당이라는 좀 더 폭넓은 전망은 어쩔 수 없이 그 어떤 훨씬 더 좁은 고려사항보다 중대했다.

많은 다른 중앙위원회 위원은 선뜻 더트만큼 코민테른 노선이 정확하다고 확신하지 못했다. 여러 사람은 단기 테제에 표현되었던 정치적인 백팔십도 전환이 어떤 실질적인 공감에서가 아니라, 코민테른과 소련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모리스 콘퍼스(Maurice Cornforth)가 결정적인 10월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듯이, “나는 어떤 사람이 소련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린다면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신념을 잃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아마도 가장 뜻이 깊은 말은 존 캠벨의 말일 것이다. 캠벨은 여러 해가 지난 뒤 다음과 같이 곰곰이 생각했다. “당신이 그때 살지 않았다면, 당신은, 우리가 예전에 모스크바 재판을 두고 했던 것처럼, 압력 때문에 코민테른의 노선과 소련이 옳다는 것을 확신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다른 요소는 의심할 나위 없이 이러한 아주 어려운 순간에 당 통일을 유지할 필요 때문이었다. 지도부는 일반 당원이 통일된 중앙위원회를 중심으로 모여야 할 것이고 성마른 싸움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간단히 말해서, 스탈린과 소련에 대한 화강암 같은 믿음과 결합된 당과 코민테른에 대한 깊은 충성심은 노선 변화에 대한 영국 공산주의자들의 대응을 결정하는 데서 지배적인 정서였던 것 같다.

그러나 케빈 모건(Kevin Morgan)에 따르면, “새로운 노선으로 이행한 것을 그저 볼셰비키적 규율 연습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전체로서 당을 지배한 감정은 혼란의 느낌이었다. 복잡하고 빠르게 발달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다양한 대응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많은 당원에게는, 영국과 스페인에서 반파시스트 활동을 했던 이전의 경험이 태도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고 두 전선에서의 전쟁정책은 체임벌린 정부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나치를 공격할 수 있는 기회로서 환영을 받았다. 다른 사람은 대전의 공포와 공격적인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증오 때문에 마음에서 우러나 평화주의를 열심히 가르치게 되었다. 반전 노선은 그런 공산주의자에게 하나의 위안이었다.

다른 경우에, 나치-소비에트 조약과 단기 테제는 가지각색의 효력과 혼란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끝내 결과는 모스크바 노선과 똑같이 되었다. 프랑스에서 상황은 여러 가지 점에서 영국보다 훨씬 더 비극적이었다. 프랑스 공산주의자의 실망과 혼동은 깊었다. 전투가들은 당을 떼 지어 떠났다. 공산당의 의원 가운데 3분의 1은 사임했다.”나치 침략자에 맞선 방어적인 전쟁 수행 노력에 대한 프랑스공산당의 처음 지지는 코민테른의 압력을 받아 뒤집혔다. 그리고 921일에 당의 중앙위원회는 전쟁이 더는 반파시스트적이지 않다고 선언하면서 평화를 호소했다. 그 뒤 프랑스공산당은 불법화되었고 공산당이 발행하는 신문은 금지되었다. 의회 대표를 포함한 수천 명의 당원은 체포되었고 많은 지도자는 추방되었다. 이와 함께 당은 일시적으로 조직적 혼란에 빠졌고, 전쟁의 요구에 자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책략을 쓸 처지에 있지 않았다. 규모가 작은 벨기에 공산당이 보인 첫 반응은 영국공산당과 프랑스공산당의 반응과 비슷했다. 히틀러가 벨기에를 공격한다면, 공산주의자는 손에 무기를 들고 전면에 서서 국가의 독립과 주민의 자유를 방어할 것이다.” 그러나 스프리아노(Spriano)가 지적했듯이, 서구 공산당이 취했던 태도는 아무런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개념집이 되어버렸다.”

좀 더 폭넓게, 코민테른이 전쟁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성격지운 것에 내재한 좌익으로의 선회는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민주적요소에 대한 종파주의적경향이 일시적으로 승리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견해에서, 스페인내전의 처참한 경험은 코민테른을 스페인공산당에서 뛰어난 인물과 나중에 공산당이 훨씬 더 독립적이고 공세적 역할을 요구했던 티토(Josip Tito)를 생각나게 했던 혁명파’, 그리고 인민전선의 폭넓은 규정과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적 의회주의의 길에 전념했던 톨리야티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로 나누어 놓았다. 이러한 두 경향은 1938~1948년의 시기 내내 전략을 놓고 변화하는 국제 상황에 따라 처음에 어느 한쪽을 지지하다가 그 뒤 다른 쪽을 지지한 스탈린과 계속 경쟁했다. 요점은 민주주의국가에 대해 아주 적대적인 스페인 공산주의자가 영국과 프랑스 동지들보다 나치-소비에트 조약의 결과에 훨씬 쉽게 적응했다는 것이었다. 몇몇은 공개적으로 좌익 선회를 환영했다. 따라서 모스크바가 새로운 노선을 포괄적으로 강요했다는 이야기는 전쟁이 혁명적 기회를 제공했다고 생각했던 그 지역에 고유한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다.

실제로 외국 공산주의자들의 다른 대응을 설명하는 데서 소련과 코민테른 정책에서 연속성의 측면을 놓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영국과 프랑스와의 집단안보와 인민전선 경험은 이른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아주 깊이 배어든 의혹을 극복하지 못했다. 스탈린이 소련에 대한 영국의 의도를 끈질기고 깊게 불신한 것은 많은 일반 공산주의자들과 강력한 심금을 울린 것이었다. 이러한 투사들이 나치-소비에트 조약과 영-프 제국주의에 대한 독설을 통해 지난 실천과 날카롭게 단절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다. 지금까지 19399~10월의 선회는 일반적으로 뒤틀린 사건이 아니었지만, 아마도 당 활동가의 중요한 소수의 인식과 확신을 담아낸 것이었다.

이렇게 말하자, 코민테른과 나치-소비에트 조약의 이야기는 더러운 것이다. 그 어떤 이론적 궤변도 코민테른이 소련외교정책의 불협화음에 복종했다는 사실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스탈린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무시해버렸고 모스크바에 있는 코민테른 지도부를 완전히 통제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단기테제에 구체화되었던 노선의 변화는 각국 공산당에 필요한 것을 주의 깊게 평가한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의 새로운 독일 동맹자를 적대하지 않고 히틀러에게 조약을 위반할 핑계를 주지 않으려는 스탈린의 직접적인 관심에서 나왔다. 따라서 코민테른의 반파시스트에 치우친 정책을 빠르게 억누르면서 스탈린은 무심코 두 개의 지금까지 분명히 표현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중요하고 서로 연관된 과정을 드러냈다. 즉 첫째로 국제노동계급의 이익은 소련의 직접적인 외교적 이해에 종속된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국제노동계급의 전위, 즉 코민테른과 공산당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스탈린주의적 소련 지도부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코민테른은 소비에트 국가의 단순한 부속물이 되었다. ‘스탈린주의화과정의 명백한 완성을 뜻했던 19399월의 선회1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논쟁은 남아 있다. 즉 스탈린의 의심할 나위 없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국에 대한 통제는 전쟁에 대한 태도를 두고 벌인 모든 논쟁을 막았는가? 이런 통제는 코민테른과 그것의 회원국 사이의 좀 더 폭넓은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는가? , 어느 정도까지 모스크바의 지시가 각국 공산당에 의해 현지에서 실제로 이행되었는가? 실제로, 전시 혼란의 조건에서 얼마나 코민테른이 각국 공산당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가? 이러한 쟁점을 풀려면 우리는 193910~19416월 사이에 코민테른과 주요 공산당의 활동으로 돌아가야 한다.

코민테른은 실제로 전쟁 시기에 무엇을 는가? 문제는 겉보기만큼 독특한 것이 아니다. 코민테른의 전시 경험의 많은 측면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보기를 들면, 우리는 어떠한 쟁점으로 지도자가 분열했는지, 또 얼마나 규칙적으로 디미트로프와 마누일스키가 스탈린과 만났는지를 확신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떠한 지시와 훈령이 모스크바에서 각국 공산당에 유포되었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우리는 전쟁 때문에 그동안의 소통의 길은 심각히 무너졌고 코민테른 잡지와 선언서가 이따금 발행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코민테른이 각국 공산당과 접촉한 주요한 형식은 라디오를 통해서였다. 코민테른 지도부는 유럽 공산주의자들과의 비밀의 라디오 연결을 발전시키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고, 그에 필요한 간부를 훈련시키는 데 많은 힘을 썼다. 그럼에도, 점령된 나라를 위한 암호화한 메시지는 목적지에 늘 다다르지 못했고 특사 파견은 훨씬 더 위험한 일이었다. 우리는 또 1941년 가을에 독일군이 모스크바의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코민테른 사령부가 일시적으로 우랄의 우파로 이전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곳에서 주된 과업은 나치가 통제한 유럽에 선전 방송을 할 예정이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스탈린이 1940년에 그리고 또 1941년에 코민테른을 해산할 것을 고려하고 있었지만, 변화하는 국제정세 때문에 단념했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장의 다음 부문에서 이 문제를 다룰 것이다.

1939년 가을과 1943년 봄 사이에 코민테른 역사의 표준적인 시기구분은 바르바로사 작전, 1941622일에 착수되었던 소련에 대한 나치의 침공으로 둘로 깔끔하게 나뉘었다. 첫 시기는 본질적으로 제국주의전쟁에 대한 거센 반대의 시기였는데, 마치 프랑스와 같은 나라가 독일 점령군과 협력한 꼴이 되었다. 코민테른 전략에서 또 다른 전환을 뜻했던 둘째 시기는 불안한 스탈린주의 지도부가 설계했다. 전쟁에 대한 코민테른의 무관심은 이제 하룻밤 새에 나치의 어둠의 세력에 맞서 죽기 살기의 투쟁으로 확 바뀌었다. 소련을 원조하기 위해 모든 것은 바쳐져야 했다. 공산주의자는 그들의 반파시스트 노력에서 연합국 정부에 대한 무조건의 지지를 할 것이었다. 폭넓은 민족전선과 저항운동은 보통 있는 일이었고 전쟁이 가져 올 혁명적 사회주의의 결과를 부주의하게 말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부르주아지를 달래기 위해 중단될 것이었다. 두 국면 모두에서, 공산주의자는 한 치의 실수도 없이 크렘린 노선을 수행했다.

이런 해석에는 꽤 진실이 담겨 있다. 증거는 실제로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권력자 집단이 무비판적으로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지시를 지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략적 쟁점을 두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국에서 내부 논쟁의 여지는 엄격히 제한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법은 상황의 복잡성을 아주 공정하게 다루지 못했다. 첫째, 무엇보다도 아주 난처하고 줄곧 변화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상층부가 처한 혼동이나 동요의 정도를 부인함으로써, 그 해석은 스탈린주의 지도부의 능력을 넘어서는 인위적인 명령과 전면적인 방향감을 강제한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지도적인 행위자에 의존한 위로부터의획일적인 견해는 다양한 지역의 맥락과 장소에서 활동하는 하급 공산주의자들의 다면적인 대응을 놓치는 경향을 띠고, 따라서 아마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일원적인 볼셰비키적 단결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그 해석은 코민테른이 전쟁으로 파괴된 유럽에서 곤경에 빠진 공산당에 대해 실행할 수 있었던 통제를 계속한 정도를 과대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전쟁 동안 공식적인 코민테른의 지시가 소련외교정책이 시시각각 달라지는 관심사를 고분고분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19399월에서 1941622일까지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갈등에서 중립 정책, 그리고 그 뒤 폭넓은 반파시스트 투쟁에 대한 필사적인 추구 등이다. 하나의 보기로도 충분할 것이다. -소 국경우호조약이 1939928일에 체결되고 나서, 코민테른은 아주 어리석게 히틀러의 평화 제의를 무시한 채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심했던 영-프 제국주의의 사악한 역할을 특별하게 강조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치 공격은 냉소적으로 잘못 전달되었고 10월 말에 몰로토프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면서 이데올로기 전쟁의 개념을 비웃었다.

 

 

프랑스에서처럼, 영국에서 전쟁의 빨치산은 독일에 맞선 이데올로기 전쟁을 선언했다. …… 이러한 종류의 전쟁은 오늘날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이데올로기처럼 히틀러주의 이데올로기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 이것은 개인의 정치적 견해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 누구라도 이데올로기가 무력을 통해 파괴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라는 거짓 깃발 아래 이러한 전쟁을 히틀러주의를 파괴하기 위한 투쟁으로 그리는 것은 무분별할 뿐 아니라, 철저한 범죄이기도 하다.”

 

 

충실하게, 코민테른은 똑같이 아주 불쾌하게 행동했다. 스탈린이 개인적으로 초고를 고치고 나서 193911월에 발표했던 전쟁에 대한 중요한 글에서, 디미트로프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자들은 공세로 나아가고 있고, 그들의 국민을 독일에 맞선 전쟁으로 몰아대고 있었다. …… 이제 전쟁을 지속하고 더욱 자극한 가장 탐욕스러운 지지자로서 나선 사람은 [그들] 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이루어진 영국에 대한 깊은 불신과 결합되었던 독일의 의도에 대한 스탈린의 공포는 소련과 그 다음 코민테른 정책의 주된 결정인자였다. 전쟁을 제국주의적인 것으로 특징지운 것은 1940년과 1941년 초 내내 본질적으로 그대로이어졌다. 그러나 흥미있게도 소련 역사가들은 1940년 여름 프랑스의 급속한 붕괴가 크렘린에 다급한 경고 신호를 보낸 것이자 코민테른이 자신의 태도를 시험적으로 다시 생각할 첫 조짐을 예고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코민테른 지도자는 이제 점령된 영토에서 나타나고 있는 반나치 저항운동에 공산주의자가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 스탈린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619일에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국은 스탈린과 즈다노프와 상담한 뒤에 프랑스 공산당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진술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 프랑스 공산주의자는 …… 외국 제국주의자에 의해 우리 국가의 노예화에 맞서 단호하고도 거세게 싸울 것이다.” 이러한 성명서의 영향을 받아, 영국공산당은 적어도 일시적으로 전시생산과 공장의 노동자의 무장화할 필요를 강조하는 좀 더 방어적인태도를 취했다. 1940~1941년에 스탈린주의 도그마를 극복하는 이러한 고통스러운 느린 과정은 1933~1934년의 비슷한 과정과 비교가 되었다.

그때 비록 아주 금지되긴 했지만 디미트로프와 마누일스키에게는 코민테른 정책의 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확실한 여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스탈린은 진공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았다. 고위급 오스트리아인으로서 코민테른 선전가인 에른스트 피셔는 디미트로프가 몰로토프의 친독일 지향에 완전히 만족하지 않았다고 넌지시 비쳤다. 이미 1940년 봄에 피셔는 디미트로프에게 코민테른이 책임 있게 프랑스와 영국 노동자에게 전쟁을 하도록 요구하기를 계속할 것인지 아닌지를, 그리고 공산당이 차라리 단호하고 일관된 호전적인 당(war party)”이 되어야 하는지 아닌지를 물어보았다. 디미트로프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당신은 그것을 받아 적어야 한다! You must that down!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지를 아주 조심해야 해, 충분히 알아듣게 하지만, 베를린에서 놀라움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만큼 명백히 하지 않으면서. 나는 당신과 같은 생각이지만, 내가 내 힘으로 결정할 수 없는 복잡한 상황이 있고 무엇인가가 있다.”

1940년 봄에 디미트로프는 좀 덜 교조적인 태도를 열심히 추진할 수 없었거나 그럴 마음도 없었지만, 19414월 독일이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침공한 뒤 좀 덜 교조적인 태도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이제 나치의 침략에 맞서 유고슬라비아인들과 그리스인들이 싸운 짓이 정당했다는 것에 동의했다. 작전의 무대가 소련의 영향권에 가까워졌을 때, 독일군에 맞선 저항 활동은 조심스럽게 승인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전면적인 개념과 전투원의 역할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이것은 1941622일에야 비로소 바뀌었다.

토론을 위한 마지막 주제는 전쟁으로 가장 영향을 받았던 공산당이 현지에서 어떻게 코민테른 노선을 수행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코민테른 그리고 영국공산당과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사이의 관계를 개략적으로 살필 것인데, 상황이 복잡함을 드러낼 것이다. 널리 알려졌듯이, 영국공산당이 전쟁에서 했던 역할을 아주 좋지 않게 평가했던 보르케나우(Borkenau)는 영국공산당이 코민테른에 가입한 다른 당들처럼 크렘린의 철저한 도구로 전환되었고 ……결코 다시 포기하지 않았고 일관되게 그 자신의 나라에 대한 배반적인 태도를 취했다. …… 영국 공산주의자는 패배주의적인 선전 뿐 아니라 패배주의적 행동의 노선을 따랐다.”고 썼다. 이러한 행동은 파업을 조직하고 혼란을 퍼트리며, 영국정부의 파시즘 투쟁 의도를 의심하는 것을 포함한 것이었다. 당의 본질적인 친-독일적 태도는 모스크바가 명령한것이었고 영국노동자의 지지를 크게 잃게 되었다.

그러나 케빈 모건이 1935~1941년에 영국공산당에 대한 상세한 연구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모스크바와 영국 공산주의자 사이의 관계는 보르케나우가 설명할 수 있었던 것보다 좀 더 복잡했다. “독일과의 불변의 우호에 대한 소련의 고백이 공산당이 자진해서 히틀러를 전쟁의 책임에서 면제해주고 싶다는 것을 반영한 것임에동의하면서, 모건은 코민테른의 압력이 1941622일 이전에 공산당의 정치를 특징 지웠던 많은 요소 가운데 하나 일 뿐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전쟁에 대한 모스크바의 제국주의적 개념화에 대한 영국공산당의 대응에서 경제주의’, ‘평화주의그리고 영국인이 지녔던 훌륭한 옛 상식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런 태도는 더트가 두서없이 혁명적 문구를 말하는 것과 상관없이 일반 당원뿐 아니라 지도부 수준에서도 분명했다. 따라서 공장과 광산에서 많은 공산주의자-노동조합주의자는 대대적으로 인기 없는 반전 캠페인을 선전함으로써 어렵게 얻어냈던 인민전선의 성과를 위기에 빠트리는 것이 싫었다. 중앙위원회 위원인 아서 호너(Arthur Horner)와 같은 노동조합활동가는 전쟁에 대한 당의 공식적인 태도를 경시했고 광부의 단결과 권리를 위한 캠페인을 계속했다. 따라서 한편으로 흔히 모순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코민테른의 전쟁에 대한 재앙적인 비난에 기꺼이 따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지역의 분위기와 태도에 알맞게 고치고 있는 파편화된 공산당에 대한 그림이 그려진다. 모건은 모스크바가 그들에게 요구했던 것처럼 영국 공산주의자가 경제투쟁을 정치화하기 위한 시도에 실패한 것이 당이 코민테른의 발언을 그대로 복사했던 터무니없는 방식과 암묵적일지라도 나날의 활동을 지도했던 철저한 정치적 분석 사이의 엄청난 분리를 드러낸 것이었다.”고 결론 내린다.

발칸의 상황은 또 달랐다. 이곳에서 그 지역의 사회적 전환을 소련외교정책의 필요와 균형 맞추는 것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종파적이고 혁명적인 유고슬라비아 공산당과 좀 더 조심하는 코민테른 지도부 사이에 긴장이 있었다. 1940년 무렵 유고슬라비아 공산당(KPJ)은 코민테른이 경쟁을 위해 지지했던 모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왜냐하면 주로 그것이 노동계급의 소요를 일으키기 위해 합법적 활동과 비합법적 활동을 결합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의 승인 신호는 그 해 6월에 코민테른이 중유럽과 남동 유럽의 공산당들과 소통했던 비밀 라디오 송신기를 자그레브에 설치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이었다. 부분적으로 이러한 공식적인 승인의 결과로서, 1939년 초에 정식으로 당 지도자로 임명되었던 티토는 유고슬라비아에서 혁명적 변화의 전망에 대한 코민테른의 신중한 평가에 도전할 만큼 꽤 자신만만해졌다.

KPJ와 모스크바 사이의 불일치의 깊이와 일관성을 지나치게 평가함으로써 티토 신화를 보강하는 것은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분명히 티토가 책략을 부리고 반대할 수 있는 여지는 제한되었고 많은 경우에 그는 타협하고 물러설 수 있을 만큼 현명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1948년의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의 분열을 전시의 적대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결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죠프리 스웨인(Geoffrey Swain)의 말에 따르면, 이미 1939년에 티토는 코민테른을 평가하게 되었다.” 그는 국제 사태와 소련의 안보와 관련된 쟁점을 두고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근본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던 국내 문제에 대한 지시를 무시하는 것을 택했다.” 보기를 들면, 1940~1941년 가을에 유고슬라비아에 곧 닥쳐올 것 같은 혁명적 전망을 주장했던 티토와 KPJ 지도부는 순수한 인민의 정부라는 슬로건에 바탕을 두었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이것을 소련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대한 외국의 간섭을 불러 올 지도 모르는, ‘때 이른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한 호소로 여겼다. 모스크바의 충고를 무시한,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들은 194010월에 제5차 당 대회와 1941년 당의 신년 성명서에서 불쾌감을 주는 슬로건을 확정했다. 스웨인은 이것을 본질에 있어서 코민테른에 대한 냉대로 해석했다. 따라서 소련에 대한 티토의 틀림없는 국제주의적 충성은 유고슬라비아 인민의 민족적 이해에서 파악했던 정책에 대한 헌신과 거북하게 공존했다. 1948년까지는 후자의 정서가 우세했다.

 

 

코민테른의 해산

 

1943년 봄 코민테른이 해산하는 바로 그 순간의 코민테른의 모습에 집중해서 역사적 논쟁을 시작한다. , 언제, 그리고 누가 이러한 결정을 내렸는가? 그것은 세계혁명에 대한 소련의 공약이 파산한 궁극적인 증거이자 스탈린의 교묘한 현실정치에 코민테른이 완전히 종속한 마지막 증거가 아니었는가? 해산은 코민테른과 각국 공산당과의 연계의 실질적이고 조직적인 붕괴를 뜻하는 것인가 또는 소비에트 통제의 기구와 메커니즘이 전쟁이 끝나고 나서 코민포름의 형태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었는가?

코민테른의 해산을 1943515일로 권유한 공식적인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의장단 결의안은 그것의 역사적 맥락에서 확고히 위치지어야만 한다. 그때 전쟁의 흐름은 바뀌고 있었다. 붉은 군대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이겼고 나치가 점령한 영토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은 그들의 작전을 확대하고 있었으며, 소비에트 지도부는 시급히 북서 유럽에 제2 전선을 설치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스탈린이 코민테른을 해산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사건의 정확한 결과는 아직도 아주 명확하지 않지만, 최근의 러시아 연구는 코민테른의 죽음에서 스탈린의 결정적인 의견을 확증했다.

19435월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결의안은 많은 공산당 활동가, 심지어 모스크바에 살고 있는 활동가에게 여전히 또 다른 충격이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만은 제안된 해산에 대해 엉성하게 의견을 물었던 것 같다. 결의안은 코민테른의 해체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미 전쟁이 터지기 전에 여러 국가의 국내외 관계에서 복잡함이 늘어남으로써 일종의 국제적 중심이 개별 국가의 운동이 맞닥트린 문제를 푸는 데 어려운 장애를 만나곤 했다는 사실이 차츰 분명해졌다.” 따라서 코민테른 제1차 대회가 택했던 노동자를 단결시키는 조직적 형식은 …… 각국의 노동계급당을 한층 더 강화시키는 것을 지연시키게 되었다.” 게다가 세계대전은 개별 국가의 상황에서 차이를 더욱 예리하게 했다.” 미리 정한 것이 아니지만 암시적인 결론은 공산당이 더욱 큰 독자성을 얻었고 반파시스트 투쟁을 수행할 수 있는 책략의 자유를 확보했다. 이러한 발전이 있었고, 그리고 몇몇 분파가 코민테른의 해산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기때문에,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의장단은 해체를 위해 모든 당의 재가를 구하기로 결정했다. 4주 안에 코민테른의 65개 제휴 분파 가운데 3분의 1에서 동의가 준비되었다. 이러한 안정적이지 못한 위임으로, 의장단은 정식으로 1943610일부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그 의장단과 서기국, 국제통제위원회가 해산될 것임을 공표했다. “조직과 기구, 코민테른의 재산 문제를 실질적으로 결산하는 일을 맡아 하기 위해디미트로프와 마누일스키와 톨리야티를 포함한 위원회는 만들어졌다.

528일에 보기 드문 인터뷰에서, 스탈린은 해산을 못 박아 말하면서 코민테른을 해체하는 이유를 다시 보기로 들어 설명했다. 그는 해산이 아주 적절했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 ‘모스크바가 이른바 다른 나라의 생활에 간섭하고 그들을 볼셰비키화할 생각을 품었다는 취지로 말한 히틀러 도당의 거짓을 폭로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코민테른의 폐지는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를 히틀러주의의 세계 지배 위협에 맞선 전투를 위한 하나의 국제 진영으로 통일시키기 위해 모든 나라의 애국자들의 활동을 촉진할 것이다.”

이제 코민테른의 해산에 대한 소련과 서구의 여러 해석을 설명해보자. 위에 요약했던 공식적인 견해는 1980년 중반에 글라스노스트가 오기 전까지 여전히 소련 역사서술에서 표준적인 정설이었다. 1943년 봄에 겨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의장단에서 나온 이른바 자극인 해산에서 스탈린의 중대한 역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 시기의 소련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진짜 이야기의 서투른 모방이다. 위에 지적했듯이, 그것은 히틀러 독일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그의 동기 때문에, “스탈린이 대체로 19414월에 코민테른의 해산을 편들어 자기 생각을 표현했다는 것을 주장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은 이러한 계획을 망치게 했다. 1941622일에 스탈린은 디미트로프를 크렘린으로 소환했고 그에게 코민테른과 각국 공산당의 과업이 이제 사회주의 혁명의 이상을 선전하는 것이 아니라, 소련을 방어하고 파시즘을 무찌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지시는 19435월까지 코민테른 활동의 토대를 이루었다.

그 달에 사태는 빠르게 움직였다. 디미트로프의 일기를 증거로 이용한, 피르소프는 사건의 과정을 이어 맞추었다. 58일에 몰로토프는 디미트로프와 마누일스키에게 보냈고 이제 불필요한 코민테른의 해산에 대한 문서를 작성하기 위한 결정을 내렸다. 3일 뒤에 디미트로프는 결의안의 초안을 스탈린에게 보냈다. 그날 밤 스탈린의 사무실에서 있는 회의에서 그들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의장단이 초안을 검토하고 그것을 회원국에 제안하며, 그들의 동의를 요청하여 받은 뒤 결의안을 발표할 것임을 동의했다. 스탈린은 분명히 크게 서두르지 않았다. 519일 모임은 10일 안에 결의안 원고를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에 흥분한 서기장은 디미트로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장단의 결의안을 오늘 인쇄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출판을 서둘러야 해.” 피르소프는 스탈린의 조바심을 그의 외교정치적 고려 탓으로 돌렸다. 520일에 스탈린은 미국 외교관 조셉 데이비스(Joseph Davies)를 만났다. 데이비스의 공식 임무는 코민테른의 해산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러시아 공산당 정치국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비준했다. 522일에 그 사실은 프라브다에 실렸다. 피르소프는 공산당의 이해관계 뿐 아니라, 반히틀러 동맹에서 연합국과의 관계를 강화시키기 위한 소련의 외교적 필요에 자극받았던 스탈린이 코민테른 해체의 선창자였다고 결론 내렸다. 스탈린이 코민테른의 해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이러한 견해는 최근에 보리스 포뇨마레프(Boris Ponomarev)에 의해 실체화되었다. 포뇨마레프는 러시아공산당에서 오랫동안 지도적인 관리였고 1943년에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기구에서 디미트로프의 긴밀한 협력자였다.

알렉산드르 바틀린은 1941년과 1943년 사이에 다른 요소가 작동했다고 본다. 그는 대조국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이미 중앙집중화된 코민테른 기구가 실질적으로 해산되었다고 주장한다. 각국 공산당이 지도를 위해 그들의 어깨너머로 모스크바를 더는 보지 않게 됨으로써 차차 브레이크가 느슨해지고있었다. 바틀린은 전쟁이 국내에서 소련 지도부로부터 양보를 강제하게 되자, “외부에서 파괴의 위협을 받은 스탈린주의 체제가해외의 공산주의운동을 어쩔 수 없이 해방시켰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코민테른은 스탈린에게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만일 마지막 목표가 세계혁명이라면, 붉은 군대는 코민테른보다 더 잘 준비되어 있었다. 코민테른은 본질적으로 세계의 노동자와 소련을 단결하게 하는 우호 사회’(friendship)에 지나지 않았다. 바틀린은 또 영토의 팽창을 탐색하고 있는 스탈린으로서는 아마도 범-슬라브주의의 이데올로기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보다 더 매력적이었을 것이라고 흥미 있게 지적했다. 정확히 19435월에 모스크바에서 슬라브인들의 대회가 열렸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바틀린에 따르면, 코민테른의 해산은 영국과 미국을 유화시키기 위한 스탈린의 관심보다 이러한 고려에 의해 더 잘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틀린의 강조는 공산주의자이든 비공산주의자이든 대부분의 서구 관찰자들의 주장과는 어느 정도 다르다. 코민테른의 해산을 스탈린 외교정책의 정략적인 방편으로 보는 데서 합의가 나왔다. 당대의 논평가와 공산주의 전기 작가, 현대의 역사가들은 피르소프처럼 코민테른의 해산을 나치 독일에 맞선 공동의 투쟁에서 그의 서구 동맹국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스탈린의 시도로 해석했다. 아마 이런 견해의 가장 뛰어난 보기는 스페인의 반체제 공산주의자인 클로뎅의 저작일 것이다. 그는 19435~6월의 사건을 아마도 가장 비판적으로 분석한 저작을 썼다. 그는 해산의 직접적인 원인이 코민테른과 각국 공산당에 영향을 미친 객관적 환경이 아니라, 스탈린의 국가적 이해관계 때문이었다고 열렬히 주장했다. 코민테른을 해체하기로 한 결정은 서구 동맹국과의 타협을 맺으려는 스탈린의 노력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었다. 즉 부르주아지에게는 골칫거리였던 코민테른을 제거하는 양보행위는 소련이 세계혁명의 이데올로기를 특히 서유럽에 적용할 뜻이 없음을 구체적으로 표명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미국과 영국은 전후 동유럽에서 소련의 영향권을 인정했을 것이다. 클로뎅은 이것이 역사의 아이러니였다고 말한다. 머지않은 미래에 세계혁명의 강령으로 태어났던 코민테른은 소비에트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형제적인 협력의 전망을 요구한 25년 뒤에 사망했다.”

그러나 클로뎅에 따르면, 코민테른의 사망은 이보다 더 많은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파산을 승인한것을 뜻했고 코민테른의 역사적 위기를 표현했던 것이었다.” 하나의 지도적인 중심이 여러 나라의 역사적 발전의 길의 깊은 차이와 양립할 수 없음을 뚜렷이 인정함으로써,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결의안은 실제로 코민테른 역사의 좀 더 커다란 부분에서는, “코민테른은 노동계급 운동이 꼭 가져야만 했던 국제조직의 형식이 아니었다.”는 것을 동의하고 있었다. “주변이 중심에 엄격히 종속됨으로써코민테른은 민족성의 현실로”, “국제적 규모에서 일종의 거대한 내전으로서 레닌의 세계혁명 개념에 기원을 두었던 이론적정치적조직적 위기의 희생으로 좌초되었다.” 코민테른의 초 중앙집중화된 구조와 노동계급운동의 실질적 필요사이의 모순은 자본주의의 경제적 위기와 제2차 세계대전의 충격에도 코민테른이 단일한 혁명적 승리를 확보하는 데 실패한 핵심이었다.

스프리아노는 코민테른의 해산과 해산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이런 해석을 자세히 설명했다. 코민테른의 해체가 전후 평화적 공존을 위한 전망이라는 모스크바의 일반적 견해와 관련해서만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스프리아노는 해산이 연합국과 협상하는 데 유용할 수도 있다는 스탈린의 가정의 결과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이 틀림없이 최종 결정을 했지만, 아마도 해산의 동기는 클로뎅과 다른 사람이 추측했던 것보다 훨씬 다양했다는 것이다. 스프리아노는 각국 공산당의 국가적 외관, 즉 그들이 사실상 애국적 동맹에 매수되었다는 사실이해산에서 중요한 요소였다고 주장하면서 내생적인투입이 있었다고 말했다. 게다가 코민테른의 사망은 여러 공산당의 전술의 자유를 넓혔고 그들 각자의 국가적 현실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강화시켰으며, 어느 정도 그것은 각국 공산당에 독자적인 정책에 전념하도록 고무했던 것이다.”

각국 공산당의 관심이 모스크바에 일부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는 표시도 있다. 1943521일에 코민테른의 해산 제안을 토론하기 위해 소집되었던 소련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스탈린은 각국 공산당이 좀 더 많은 자율성을 필요로 한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코민테른 사령부를 런던으로 옮길 수도 있다는 암시에 답하여, ‘보스는 다음과 같이 드러내놓고 말했다.

 

 

맑스가 살았을 때에도, 레닌이 살았을 때에도, 그리고 또 오늘날에도 하나의 중심이 국제노동계급의 운동을 이끌 수는 없다는 사실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오늘날, 전쟁의 조건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와 다른 나라들의 공산당이 그들 정부를 전복하고 패배주의 전술을 수행하려고 애쓰고 있을 때, 그와 반대로 소련과 영국과 미국과 다른 나라의 공산당이 적을 가능한 한 신속히 파괴할 수 있도록 그들 정부를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지지하려고 애쓰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코민테른을 만들고 우리가 모든 나라의 운동을 이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우리의 힘을 과대평가했다. 이것은 우리의 과오였다.…… 제안된 조치는 의심할 나위 없이 민족적 노동자의 당으로서 각국 공산당을 강화시킬 것이고 아울러 일반 대중의 국제주의, 소련이 근거로 한 토대를 강화시켜줄 것이다.

 

 

민족적 자율성을 위한 열망에 대한 이러한 명백한 민감함을 개의치 않고, 우리는 스탈린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 소련의 안보였고, 여기서 코민테른이 자신의 목적을 완수했다고 결론지어야만 한다. 사실 코민테른은 전쟁의 성공적인 수행과 소련의 전후 전망에 대한 긍정적인 장애물이었다. 결정적으로 코민테른의 해산은 국제공산주의운동에 대한 모스크바의 통제가 실질적으로 약해진다는 것을 뜻하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련의 위신과 위대한 전시 대원수인 스탈린의 위신이 전 세계 공산주의자가 소련의 노선을 억지로 적용시키는 코민테른이 없어도 소련의 노선을 지지하게 될 것이라는 신화가 생겼다. 스프리아노에게는, “정말로 신기한 것은 모스크바와 각국 공산당 사이의 더 엄격하고 위계적인 관계가 전후의 결과였다는 사실에 있다. 요약하면, 스탈린주의 원칙과 정설은 이러한 깊은 신념을 서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훼손하기 위해서는 1956년과 1968, 그리고 1980~1981년의 지각변동을 일으킬 만큼 특히 지도부의 수준에서 너무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이것은 우리를 마지막 주장으로 이끈다. 즉 코민테른이 정말로 해산되었는가? 역사가들은 19436월의 공식적인 선언에도, 조직적 틀이 여전히 모스크바에 실재했다는 것을 여러 해 동안 알고 있었다. 코민테른의 기구처럼 부피가 큰 기구는 하룻밤 새에 거의 제거될 수 없고 디미트로프와 톨리야티와 다른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관리들이 중요 공산당의 감독관으로서 계속 활동했던 것처럼 생각되었다. 1950년대 초에 보르케나우는 그가 다음과 같이 주장했을 때 지나쳤다고 썼다. “코민테른은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한 러시아 학자는 좀 더 최근에 사료를 숙지하면 실제로 코민테른이 해산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지지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디미트로프가 대표하고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구에 딸린 코민테른 간부의 특별 그룹이 1943년에 만들어진 것에 근거한 것이다. 정치국의 지시에 따른 이 부문은 공식적으로 19447월에 중앙위원회의 국제정보국으로 다시 조직되었다. 디미트로프는 그 부서의 책임자로 자신의 지위를 다시 얻었다. 게다가, 세 개의 특별 연구소가 해산 직후 세워졌다. 수수께끼 같은 99, 100, 205라는 숫자를 붙였던 이들 비밀 연구소는 대부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소련과 외국 간부들로 다시 충원되었고, 똑같은 건물에 위치해 있었으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각 부서가 착수했던 것과 비슷한 조직적, 기술적 활동을 수행했다.

‘99연구소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바른간부를 훈련시키려는 목적으로 독일과 이탈리아와 헝가리와 루마니아 전쟁 포로를 대상으로 활동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1945년 뒤에 지역 공산당을 맡기기 위해 고국으로 보내졌다. ‘100 연구소는 유럽 공산당과 라디오 교신과 다른 지하 접촉선을 유지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국제 통신국(OMS)의 많은 과업을 떠맡았던 것 같다. 따라서 모스크바의 지시와 권고는 해외에서 방송되었고 각국 당에서 나온 정보는 로 거꾸로 사령부에 다다랐다. ‘205 연구소는 코민테른 보도국에서 만들어진 것이었고 해외의 공산주의운동과 노동계급운동의 발전에 대한 최신의 정보를 갖고 있는 소련 지도자를 위한 정보 여과장치로 행동했다. 그것은 또 외국의 국가 지도자와 당 지도자에 대한 방대한 카드식 색인을 보전했다.

이러한 증거는 코민테른의 집행 조직이 1943년에 해산되었지만, 스탈린은 국제운동, 특히 곧 해방될 중유럽과 동유럽에서 통제 기구를 유지하길 열망했다는 것을 제시한 것이다. 실제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제거되고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딸린 기관에 의해 대체됨으로써, 아마 소련의 영향력은 훨씬 더 직접적이었던 것 같아 보인다. 코민테른의 해산은 몇몇 외국 공산주의자에 의해 해방의 제스처로 해석될 수도 있을 테지만, 그것은 결코 공산당들을 위한 실질적인 자율적 시기의 막을 열어준 것을 뜻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루이기 론고(Luigi Longo)가 나중에 다음과 같이 되돌아보았다. “소련의 중앙위원회는 여전히 기준점이었다. 노동계급 운동의 새로운 동력 하에서 고려해야 할 집단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3인터내셔널의 논리는 살아있었고, …… 모든 또는 거의 모든 공산당의 행동을 결정했다.”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다원구조로의 길은 멀고도 어려운 것이었다.

 

 

 

옮긴이: 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