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오직 하나의 길 - 7. 경제순환으로 본 계급투쟁 본문

실천지 (2008년)/2008년 10월호

오직 하나의 길 - 7. 경제순환으로 본 계급투쟁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6. 09:20

오직 하나의 길

 

레온 트로츠키

 

* 트로츠키는 1930년대 초반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기 전에 주요한 정세와 전술 관련 글들을 계속 써냈다. 이 글들은 나중에 오직 하나의 길이라는 제목을 단 팸플릿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지난 호에 이어 이번 호에는 7, 8, 9장과 후기를 싣는다. (옮긴이)

 

 

7. 경제순환으로 본 계급투쟁

 

우리는 보나파르트 체제와 파시즘을 구별할 것을 끈질기게 요구해왔지만, 이는 이론적인 현학에서가 아니었다. 명칭은 개념을 구별하는 데 이용된다. 개념은 정치에서 실제 세력을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된다. 파시즘의 분쇄는 보나파르트 체제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을 것이며, 사회혁명의 직접적 서곡을 의미할 것이다.

다만, 노동자계급이 혁명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한편으로 사민당과 보나파르트주의 정부의 상호관계, 다른 한편으로 보나파르트 체제와 파시즘의 상호관계는 이것들이 근본 문제를 결정하지는 않지만 노동자계급과 파시스트 반()혁명의 투쟁이 어떠한 길을 통과하고 어떠한 템포로 준비될 것인지에 의해 구별된다. 슐라이허, 히틀러, 벨스 3자 사이의 모순은 일정한 상황에서는 파시즘의 승리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고, 공산당에게 새로운 신뢰, 그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즉 제때에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파시즘은 냉혹한 방식으로 정권을 장악할 것이다.” 스탈린주의 이론가에게서 우리는 이런 소리를 여러 차례 들었다. 이 정식은 파시스트가 공공연한 격변을 필요로 하지 않은 채 합법적으로, 평화적으로, 연립정부를 통해서 정권을 장악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사태는 이미 이러한 예측을 반박하고 있다. 파펜 정부는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으며, 프로이센의 7.20 쿠데타로 이를 보완했다. 비록 나치와 중앙당의 연립정권이 보나파르트주의적 파펜 정부를 입헌적방법으로 전복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는 여전히 사태를 결정지을 수 없다. 히틀러에 의한 평화적인정권 인수와 파시스트 체제의 수립 사이에는 여전히 긴 도정이 가로놓여 있다. 연립정부는 쿠데타를 용이하게 할 뿐 대체되지 않을 것이다. 바이마르 헌법의 완전한 폐지와 함께 노동자 민주주의 기관의 폐지라는 가장 중요한 임무가 남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냉혹한 방식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는 노동자 측이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파펜의 보나파르트주의적 쿠데타는 실제로 아무런 반격을 받지 않았다. 히틀러의 파시스트 쿠데타도 아무런 반격을 받지 않을 것인가? ‘냉혹한 방식에 관한 추측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바로 이 문제를 중심으로 한다.

만약 공산당이 압도적인 세력을 대표하고, 노동자계급이 즉각적인 권력 장악을 위해 전진하고 있었다면, 유산계급 진영의 모든 모순이 일시적으로 사라져 파시스트, 보나파르트주의자, 민주주의자는 노동자혁명에 대항하는 동일한 전선에 설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그렇지 않다. 공산당의 허약함과 노동자계급의 분열은 유산계급과 이들에게 봉사하는 정당들의 모순을 밖으로 끌어내게 한다. 공산당이 이러한 모순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면 스스로를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도로 산업화된 독일에서 파시즘은 혹시 자신의 전권 요구를 비준하라고 결정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의심할 여지없이 독일의 노동자계급은 이탈리아의 노동자계급보다 수적으로도 훨씬 많고 잠재적으로도 더 강력하다. 독일의 파시즘은 같은 시기의 이탈리아 파시즘보다 수가 많고, 더 잘 조직된 입장을 대표하지만, 아직 맑스주의를 청산하는 임무는 틀림없이 독일의 파시스트에게는 어렵고 위험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게다가 히틀러가 정치적으로 이미 정점을 지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너무 오래 기다린 데다가 보나파르트 체제의 형태로 도상에 새로운 장애물이 가로막고 선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파시즘을 약화시키고, 그 내분을 증대시키고, 그 압력을 대단히 약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현재 미리 예측할 수 없는 경향적 가능성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오직 능동적인 투쟁만이 이런 문제들에 답할 수 있다. 나치즘이 불가피하게 도중에 멈춰 설 것이라는 가정을 미리 세우는 것은 가장 경솔한 짓이다.

그 결론까지 간다면, ‘냉혹한 방식이론은 사회파시즘이론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다. 더 정확히는 사회파시즘 이론의 이면을 나타낼 뿐이다. 두 경우 모두, 적 진영의 구성원 사이의 모순이 완전히 무시되어 사태 추이의 연속적 단계가 모호해졌다. 공산당은 완전히 보류되었다. ‘냉혹한 방식의 이론가인 히르쉬가 동시에 사회파시즘의 이론가인 것은 이유가 없지 않았다.

독일의 정치적 위기는 경제위기를 기초로 하여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도 고정된 것이 아니다. 어제 우리가 주기적인 위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유기적 위기를 격화시킬 뿐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더라도, 오늘 우리는 자본주의의 일반적 쇠퇴는 주기적인 변동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현재의 위기는 언제까지나 계속되지 않을 것이다. 위기의 전환을 바라는 자본주의 세계의 바람은 최대한으로 과장되어 있지만 근거가 없지는 않다. 정치세력의 투쟁 문제는 경제적 전망에 통합되어야 한다. 파펜 정부의 강령은 경제적 상황이 곧 호전된다는 추정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그만큼 더 이 문제를 연기시킬 수 없다.

현장의 생산회복 국면은 증대하는 상품의 회전율, 생산율 상승, 취업노동자 수의 증대라는 형태로 표현되자마자, 모두에게 인지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식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생산회복에 앞서 통화 유통과 신용 분야에서의 준비 과정이 존재한다. 이익이 남지 않는 기업이나 산업 부문에 투자된 자본은 풀려나야 하고, 투자처를 찾는 유동자본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 과다한 재고, 성장, 팽창이 제거된 시장은 진정한 수요를 나타내야 한다. 기업은 시장과 기업 상호간에 신뢰를 획득해야 한다. 반면에, 모든 신문이 그렇게 크게 떠드는 이 신뢰는 경제적 요인뿐만 아니라 정치적 요인(배상금, 전시 채무, 군축과 재무장 등)에 의해서도 자극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상품의 회전율, 생산율, 취업노동자 수의 증대는 아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거꾸로 감소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위기의 전환을 위한 준비 과정에 관해 말한다면, 이것에 맡겨진 임무의 거의 대부분을 분명히 완수하고 있다. 많은 징후가 정말로 우리로 하여금 경제순환의 전환 시기가 바로 눈앞에 와 있는 것은 아니라도 접근했다고 생각하게 한다. 이것이 세계적 규모로 살펴본 경제정세의 평가이다.

그러나 우리는 채권국(미국, 영국, 프랑스)과 채무국(더 정확하게는 파산국)을 구별해야 한다. 후자 그룹에서 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독일이다. 독일은 유동자본이 전혀 없다. 독일 경제는 외부로부터의 자본 유입에 의해서만 자극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기존 채무를 갚지 못한 나라는 새로운 대부를 받을 수 없다. 어쨌든 채권자들은 독일이 수입해야 하는 것보다 다시 더 많은 양을 수출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 않는 한, 틀림없이 그 지갑을 먼저 열지 않을 것이다 : 그 차액이 채무를 메우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독일 상품에 대한 수요는 주로 농업국, 첫째로 남동 유럽 나라들로부터 예상될 수 있다. 그러나 농업국 입장에서는 원료나 식료품에 대한 공업국의 수요에 의존한다. 따라서 독일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즉 생명의 시냇물(the stream of life)은 먼저 독일 자신의 경제적 성과에 영향을 끼치기 이전에 일련의 자본주의 경쟁자나 그 농업 동맹국을 관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자본가계급은 기다릴 수 없다. 보나파르트주의 도당은 더욱 기다릴 수 없다. 파펜 정부는 통화의 안정성을 해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서도 실질적인 인플레이션을 도입하고 있다. 경제적 자유주의의 부활에 관한 담화와 함께 파펜 정부는 경제순환에 대한 행정적 결정을 취하고, 개인적 창의성의 자유에 호소하여 납세자를 직접적으로 자본주의 기업가에게 종속시킨다.

정부의 계획이 변화하는 중심축은 위기의 전환이 가깝다는 희망이다. 이 전환이 곧 일어나지 않으면, 20억 마르크는 새빨갛게 단 난로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증발해버릴 것이다. 파펜의 계획은 지금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승 움직임보다 훨씬 더 사행적이고 투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어쨌든 보나파르트주의적 도박이 파산하면, 그 결과는 훨씬 더 파멸적일 것이다.

정부의 계획과 시장의 실제 움직임 사이의 큰 격차가 빚은 가장 직접적이고 명백한 결과는 마르크화의 하락에 있다. 인플레이션에 의해 격렬해진 사회적 고통은 참기 어려운 성격을 띨 것이다. 파펜의 경제 강령의 파산은 다른, 그리고 더 효과적인 강령으로의 대체를 필요로 할 것이다. 어떤 강령으로? 아무리 보아도 파시즘의 강령이다. 보나파르트적 치료를 통해 억지로 경기를 회복시키려는 시도가 실패했다면, 틀림없이 파시스트의 외과적 처치가 시도될 것이다. 그 사이에 사민당은 좌익적제스처를 하면서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공산당은 나름의 방해만 없다면, 성장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는 혁명 정세를 의미할 것이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승리에 대한 전망 문제는 그 4분의 3이 공산당의 전략에 달려 있다.

그러나 혁명정당은 다른 전망, 즉 위기의 전환이 예상보다 빨리 나타나는 경우에 대해서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슐라이허-파펜 정부가 상업과 공업에서 회복이 시작될 때까지 자활하는데 성공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로 인해 파펜 정부가 구제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경기의 상승세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보나파르트 체제의 일정한 종말을 의미할 것이고, 어쩌면 훨씬 더한 종말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독일 노동자계급의 힘은 소진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힘은 1914년부터 시작된 희생, 패배, 환멸에 의해, 그리고 사민당의 체계적인 배신, 공산당 스스로가 쌓은 불신에 의해 서서히 약화되어왔다. 600~700만의 실업자는 노동자계급의 발을 질질 끌게 하는 무거운 짐이다. 브뤼닝과 파펜의 긴급포고는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았다. 720일의 쿠데타는 여전히 처벌받지 않고 있다.

순환의 상승 전환이 현재 쇠퇴하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활동에 강력한 자극을 줄 것이라는 전적인 확신을 가지고 예측할 수 있다. 공장이 노동자의 해고를 중지하고, 새로운 노동자를 고용할 때, 노동자의 자신감이 강화된다. 이들은 다시 필요한 존재가 된다. 꽉 눌린 용수철이 다시 팽창하기 시작한다. 노동자는 항상 새로운 진지를 획득하는 것에 비해 더 쉽게 잃어버린 진지를 만회하는 투쟁에 돌입한다. 그리고 독일 노동자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 긴급포고도, 제국군대의 투입도 상승 물결을 타고 발전하는 대중파업을 일소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사회적 휴전을 통해서만 자활할 수 있는 보나파르트주의 체제는 순환의 상승에서 첫 희생자가 될 것이다.

파업투쟁의 증대는 이미 여러 나라들에서 볼 수 있다(벨기에, 영국, 폴란드, 그리고 미국의 일부. 그러나 독일에서는 볼 수 없다). 현재 발전하고 있는 대중파업을 세계적인 경제순환에 비추어 평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통계는 불가피하게 경기순환의 변동을 뒤늦게 나타낸다. 경기회복이 통계에 기록될 수 있으려면, 먼저 경기회복이 사실이 되어 있어야 한다. 노동자는 대개 통계학자보다 빨리 경제활동의 회복을 감지한다. 새로운 주문이나 그 가능성, 생산 확장을 위한 기업의 재조직이나 적어도 노동자 해고의 중단은 즉시 노동자의 저항력과 요구를 증대시킨다. 영국의 랭커셔 지방 섬유 노동자의 방어적 파업은 의심할 여지없이 섬유산업의 일정한 상승에 의해 야기되었다. 벨기에의 파업에 관해서 말하면, 그것은 분명히 계속 심각해지고 있는 석탄산업의 위기에 근거하여 일어나고 있다. 세계 경제순환의 현 국면의 과도적이고 위기적인 성격은 가장 최근 파업의 근거인 경제적 자극의 다양성과 일치한다. 그러나 대체로 대중운동의 성장은 이제 막 인지할 수 있게 된 상승 경향이 꽤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어쨌든 경제활동의 진정한 회복은 그 첫 단계에서조차 대중투쟁의 광범한 고양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모든 나라의 지배계급은 생산 향상에서 기적을 바란다. 이미 발생한 주식투기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만약 자본주의가 정말로 새로운 번영 국면, 또는 점차적이지만 지속적인 상승 국면에 돌입했다면, 이는 자본주의의 안정화를 수반함은 물론 파시즘의 약화와 동시에 개량주의의 강화를 동반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불가피한 경제회복이 세계경제, 특히 유럽경제의 일반적인 쇠퇴 경향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기대하거나 우려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전전(戰前) 자본주의가 상품의 확대생산 공식에 따라 발전했다면, 오늘의 자본주의는 그 주기적 변동에도 불구하고 궁핍과 파국의 확대생산을 표현한다. 새로운 경제순환은 자본주의 진영 전체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개별 국가 내부에서도 주로 유럽으로부터 미국 쪽으로 불가피한 힘의 이동과 재조정을 수반할 것이다. 그러나 극히 단기간 내에 새로운 경제순환은 자본주의 세계가 해결 불가능한 모순에 직면하고, 새로운, 그리고 더욱 더 끔찍한 격동에 처하게 할 것이다.

오류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예측할 수 있다. 즉 경제회복은 노동자의 자신감을 강화시키고, 이들의 투쟁에 새로운 자극을 주기에는 충분하지만 자본주의, 특히 유럽 자본주의의 회복 가능성을 제시하기에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쇠퇴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주기적 상승이 노동운동에 열어주는 실제적 성과는 필연적으로 매우 제한된 성격을 지닐 것이다. 독일 자본주의는 경제활동의 새로운 회복의 정점에서, 현재의 위기 이전에 존재한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회복시킬 수 있는가?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런 질문에 미리 그렇지 않다고 답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자각한 대중운동은 그만큼 더 신속히 정치적 길을 따라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생산 회복의 바로 첫 단계에서조차 사민당은 매우 위험해질 것이다. 노동자는 잃은 것을 되찾기 위한 투쟁에 뛰어들 것이다. 사민당의 지도자들은 다시 정상적인질서의 회복에 자신의 희망을 세울 것이다. 이들의 주요한 고려사항은 연립정부 참여에 적합한 자신의 본래 역할의 회복일 것이다. 지도자와 대중은 반대 방향으로 끌릴 것이다. 개량주의의 새로운 위기를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서 공산당은 주기적 변화에 대한 올바른 상황 판단과 충분히 앞선 실천적인 행동강령의 준비가 필요하다. 이 행동강령은 무엇보다도 위기의 시기 중에 노동자가 입은 손실을 되찾는 것으로부터 착수해야 한다.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의 이행은 혁명적 노동자당의 힘과 영향력을 강화시키는데 특히 적절한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분야에서처럼 이 분야에서도 공동전선 정책의 올바른 적용이라는 조건에서만 성공을 이룰 수 있다. 독일공산당에게 이것은 무엇보다도, 노동조합 분야에서 두 마리 토끼를 쫓는 현재의 정책을 끝내는 것, 자유노동조합에 대해 확고한 방침을 취하고, 혁명적 노동조합 반대파(RGO)의 현재 중핵들을 자유노동조합의 대오로 끌어들이는 것, 노동조합을 통해서 공장위원회에 영향력을 끼치기 위한 체계적인 투쟁에 착수하는 것, 생산의 노동자 통제 슬로건 아래 광범위한 캠페인을 준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8. 사회주의로 가는 길

 

여러 사람들 가운데 특히 카우츠키와 힐퍼딩은 최근에 자신들은 자본주의의 붕괴이론을 결코 공유한 적이 없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일찍이 수정주의자는 자본주의 붕괴이론을 맑스주의자에게 돌렸으며, 이제는 흔히 카우츠키주의자가 그것을 공산주의자에게 돌리고 있다.

베른슈타인주의자는 두 가지 전망을 이렇게 약술했다. 하나는 비현실적인, 이른바 정통 맑스주의전망으로 이것에 따르면, 결국 자본주의의 내부 모순의 영향 아래 기계적 붕괴가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 다른 하나는 현실적인전망으로 이것에 따르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진화가 실현되게 되어 있었다. 이 두 가지 도식은 얼핏 대조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혁명적 요소의 결여라는 공통된 특징으로 묶여 있다. 맑스주의자는 자신들에게 돌려진 자본주의의 자동적 붕괴라는 희화화를 부정하는 동시에, 자본주의의 객관적 모순이 그 자동적 붕괴에 이르기 훨씬 전에 노동자계급은 격화하는 계급투쟁의 영향 아래 혁명을 완수할 것이라는 점을 입증했다.

이 논쟁은 지난 세기(19세기) 말에 처음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전쟁 이후의 자본주의의 현실은 어떤 점에서 누구나, 특히 수정주의자 자신이 추측했을지도 모르는 것보다 훨씬 더 맑스주의의 베른슈타인적 희화화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수정주의자는 오로지 맑스주의의 비현실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붕괴의 망령을 불러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의 운명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개입이 지연될수록, 자본주의는 실제로 자동적 쇠퇴에 더 가까워진다.

붕괴론의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는 궁핍화론이었다. 맑스주의자는 신중하게 사회적 모순의 격화가 대중의 생활수준의 절대적 하락을 무조건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바로 이 후자의 과정이 전개되고 있다. 만성적 실업과 사회보장의 파괴 즉, 사회질서가 자신의 노예를 부양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더 예리하게 자본주의의 붕괴를 표현할 수 있는가?

노동자계급 내부의 기회주의적 제동기는 노쇠한 자본주의의 자연력에 추가로 수 십 년분의 수명을 부여할 만큼 강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결과, 자본주의의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전환이라는 목가적 광경이 아니라 사회적 쇠퇴에 훨씬 더 가까운 상황이 벌어졌다.

개량주의자는 오랫동안 현 사회상태에 대한 책임을 전쟁에 전가하려고 했다. 그러나 첫째로, 전쟁은 자본주의의 파괴적 경향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폭로하고 가속화시켰을 뿐이다. 둘째로, 전쟁은 개량주의의 정치적 지지가 없었으면, 자신의 파괴적 임무를 완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셋째로, 자본주의의 절망적 모순은 다양한 방면에서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개량주의는 자신의 역사적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에너지를 마비시키고 억제시킴으로써 국제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붕괴 과정에 가장 맹목적이고, 가장 난폭하고, 가장 파국적이고, 가장 잔혹한 형태를 부여하고 있다.

물론 맑스주의의 수정주의적 희화화의 실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일정한 역사적 시기에 조건부로 적용할 때뿐이다. 그렇지만 쇠퇴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타개책은 상당한 지연을 겪더라도 자동적 붕괴의 길이 아니라 혁명의 길에서 발견될 것이다.

오늘의 위기는 개량주의적 공상주의의 찌꺼기를 마지막 빗자루 질로 쓸어 내버렸다. 기회주의적 실천은 현재, 어떠한 이론적 덮개도 가지고 있지 않다. 결국 벨스, 힐퍼딩, 그르제진스키, 노스케에게 자신의 이해가 영향을 받지 않기만 하다면, 얼마나 많은 재앙이 인민대중의 머리에 떨어지는가는 거의 사소한 일이다. 그러나 요컨대, 부르주아 체제의 위기는 개량주의 지도자도 공격한다는 것이다.

사민당은 얼마 전에 파시즘의 기세에 밀려 퇴각하면서 국가가 중재에 나서라!’고 외쳤다. 그리고 국가가 행동에 나섰다. 즉 오토 브라운과 제버링은 거리로 내쫓겼다. 이제 포어베르츠(Vorwärts, 전진)지는 누구나 독재체제보다 민주주의의 이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민주주의가 가진 실질적인 이점을 감옥을 알게 된 그르제진스키가 안쪽에서 반추했다.

이 경험에서 사회화로 나아갈 때!’라는 결론이 나왔다. 어제까지도 자본주의의 주술사였던 타르노프는 갑자기 그 무덤을 파는 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자본주의가 개량주의 장관, 경찰청장, 주지사를 실업자로 바꾸고 있는 지금, 자본주의는 역력히 기진맥진해졌다. 벨스는 사회화의 시각이 왔다!’는 강령적 논문을 작성하고 있다. 슐라이허에게 남은 것은 단지 국회의원의 세비와 전직 장관의 연금을 빼앗는 것뿐이다. 그리고 힐퍼딩은 총파업의 역사적 역할에 관한 연구논문을 쓸 것이다. 사민당 지도자들의 좌선회는 그 어리석음과 기만성으로 인해 사람을 놀라게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책략이 사전에 실패하게 되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죄를 진 이 당은 여전히 수백만 노동자의 선두에 서 있다. 이 당은 저절로 몰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 당을 꺼꾸러뜨릴 방법을 알아야 한다.

공산당은 사회주의를 향한 벨스-타르노프 노선은 대중을 기만하는 새로운 형태라고 강조할 것이고, 이는 완전히 올바르다. 공산당은 지난 14년간 사민당의 사회화연혁을 설명할 것이다. 이는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불충분하다. 즉 가장 최근의 역사도 적극적인 정치를 대신할 수 없다.

타르노프는 사회주의로 가는 혁명적인 길이나 개량적인 길이라는 문제를 단순한 전환의 템포문제로 정리하려고 한다. 이보다 더 큰 폭으로 타락한 이론가는 없다. 사회주의적 전환의 템포는 실제로 그 나라의 생산력, 문화수준, 국방에 부과된 총경비의 양 등에 좌우된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전환은 급속한 경우도 완만한 경우도, 사회의 정점에 서 있는 계급이 사회주의에 관심이 있고, 이 계급의 선두에 피착취자를 속이지 않고, 언제라도 착취자의 저항을 제압할 준비가 되어 있는 당이 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우리는 이것이 바로 노동자계급의 독재체제에 내재한다는 것을 노동자에게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조차도 충분하지 않다. 세계 노동자계급의 긴급한 문제 중의 문제라면 소비에트 연방의 존재라는 사실을 코민테른과 같이 잊어서는 안 된다. 독일에 관해서 말하면, 지금의 임무는 처음으로 사회주의 건설을 시작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일의 생산력, 문화, 기술적조직적 특징을 이미 소비에트 연방에서 진행 중인 사회주의 건설과 함께 하려는 것에 있다.

독일공산당은 단지 소비에트의 성공을 칭찬하는 데 그치고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조잡하고 위험한 과장을 범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공산당은 소련의 사회주의 건설, 그 거대한 경험, 귀중한 성과를 독일의 노동자혁명의 임무와 결부시킬 능력이 전혀 없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으로서는 특히 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에서 독일공산당에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없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전망은 일국으로 제한되어 있다.

사민당의 일관되지 않는, 겁이 많은 국가자본주의 계획은 소련과 독일의 공동의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전반적 계획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상세한 계획이 즉시 작성되어야 한다고 아무도 요구하지 않는다. 예비적인 초안으로 충분하다. 중심적인 근거가 필요하다. 이 계획은 가능한 한 신속하게 독일 노동자계급의 모든 조직, 특히 노동조합 조직의 행동 목표가 되어야 한다.

독일의 기술자, 통계학자, 경제학자 가운데 진보적 세력을 이 행동에 끌어들여야 한다. 독일에서는 독일 자본주의의 무능함을 반영하는 계획경제에 관한 논쟁이 매우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순전히 학구적이고, 관료주의적이고, 생기가 없으며, 현학적인 것에 머물러 있다. 공산주의 전위만이 이 문제의 취급방법을 악순환에서 끌어올릴 수 있다.

사회주의 건설은 이미 진행 중이다. 이 임무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국경 너머로 다리를 놓아야 한다. 이것을 연구, 개량, 구체화하는 것이 첫 번째 계획이다! 노동자여, 특별계획위원회를 선출하라. 그리고 이것에 소비에트의 경제기관과 개개 노동조합의 연락교섭을 담당하는 임무를 주어라. 독일 노동조합, 공장평의회, 그 밖의 노동자 조직에 근거하여 중앙계획위원회를 수립하고, 소련의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와 교섭하는 임무를 맡기자. 독일의 기사, 조직자, 경제학자를 이 임무에 끌어들이자! 

이것이 소비에트가 생존한지 15, 독일 자본주의 공화국이 경련을 일으킨 지 14년이 지난 1932년 오늘, 계획경제 문제에 대해 유일하게 올바른 접근이다.

사회주의에 찬가(Song of Solomon)를 바친 벨스를 위시하여 사민당 관료집단을 조소하는 것만큼 쉬운 것도 없다. 그러나 개량주의적 노동자가 사회주의의 문제에 대해서 정말로 진지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개량주의적 노동자에 대해서 진지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 점에서 다시 공동전선의 문제가 전면적인 형태로 제기되는 것이다.

사민당이 자본주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임무(알다시피 말뿐이다)를 세운다면, 사민당은 중앙당이 아니라 공산주의자와의 협정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산당은 이러한 협정을 거부해야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반대로 이러한 협정을 제의하고, 최근 서명 날인한 사회주의적 약속어음의 상환을 대중의 면전에서 요구할 것이다.

사민당에 대한 공산당의 공격은 현재 세 전선을 따라 진척되어야 한다. 파시즘을 분쇄하는 임무는 최대한의 매서움을 유지한다. 파시즘과 노동자계급의 결전은 동시에 보나파르트적 국가기구와의 충돌 신호가 될 것이다. 이는 총파업을 불가결한 투쟁 무기로 한다. 그 준비를 해야 한다. 독자적인 총파업 계획 즉, 총파업 수행을 위한 세력 동원 계획을 꼼꼼하게 가다듬어야 한다. 이 계획에 따라 대중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 이 운동에 근거하여 사민당에 대해서 명확한 정치적 조건 하에 총파업 수행을 위한 협정이 제안되어야 한다. 모든 새로운 단계에서 거듭 제기되고 구체화되어야 하는 이 제안은 그 발전 과정에서 최고의 공동전선 기관인 소비에트의 창출로 이어질 것이다.

지금 원칙이 되어 있는 파펜의 경제계획이 독일 노동자계급을 전에 없이 궁핍하게 한다는 것은 사민당이나 노동조합의 지도자들도 말로는 인정하고 있다. 신문지상에서 이들은 오랫동안 표현한 적이 없는 격렬함으로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있다. 이들의 말과 행동과의 사이에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우리는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이 자기 말에 얽매이도록 할 줄 알아야 한다. 긴급포고와 보나파르트주의 체제에 대한 일련의 공동투쟁 조치를 가다듬어야 한다. 상황 전체에 의해 노동자계급에게 부과된 이 투쟁은 그 본질에서 민주주의의 틀 내에서 수행될 수 없다. 히틀러가 40만의 군대를 가지고 있고, 파펜-슐라이허가 제국군대 외에 20만의 반()사병적인 철모단(Stahlhelm)을 가지고 있고,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묵인하고 있는 국기단, 공산당이 금지된 적색 전선군(Red Front army)을 가지고 있는 상황 - 이러한 상황은 자동적으로 국가의 문제가 권력의 문제라는 것을 드러낸다. 더 좋은 혁명의 학습소를 상상할 수 없다!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에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슐라이허는 의회주의 놀음으로 타도되지 않는다. 사민당이 다른 수단으로 보나파르트주의 정부를 전복하는 임무에 착수하고 싶다면, 공산당은 온힘을 다해 사민당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동시에 공산주의자는 사민당이 대다수 노동자계급에 입각하는 한, 공산당에 선동과 조직 활동의 자유를 보증하는 한, 사민당 정부에 대해서 어떠한 폭력적 수단도 사용하지 않을 것을 미리 약속할 것이다. 이렇게 문제를 제기해야 모든 사민당 노동자와 무당파 노동자에게 이해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전선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다. 여기에서도 쇠는 반드시 뜨거울 동안에 벼려야 하는 까닭에 소련과의 협력이라는 구체적인 계획으로 사민당을 궁지에 몰아넣어야 한다. 이 점에 대해 필요한 것은 이미 잎에서 말한 바 있다.

당연히 문자 그대로 전략적 전망에서 다른 의의를 가지는 이런 투쟁 분야는 서로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서로 겹치고 융합한다. 사회의 정치적 위기는 부분적 문제를 전체적 문제와 결합시킬 것을 요구한다. 바로 여기에 혁명 정세의 본질이 있다.

 

 

9. 오직 하나의 길

 

독일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독자적으로 올바른 길로 전환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가? 당의 과거 전체는 이렇게 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준다.

중앙위원회가 자신의 노선을 수정하기 시작하자마자, 당 기구는 자신이 트로츠키주의의 전망에 직면해 있음을 알아차렸다. 텔만 자신이 이를 곧바로 파악하지 못했다면, 그는 모스크바로부터 전체를 위해서 부분을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즉 스탈린주의 기구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독일혁명의 이해를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충고 받았을 것이다. 정책을 수정하려는 겸연쩍은 시도는 또다시 철회되었다. 관료주의적 반동이 다시 전면적으로 승리를 거뒀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텔만의 입장이 아니다. 현재의 코민테른이 그 지부에 대해서 스스로 생활하고, 사고하고, 발전할 가능성을 부여했다면, 각 지부는 오래 전에, 지난 15년 사이에 자신의 지도적 중핵을 선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대신에 관료집단은 지도자의 지명과 인위적 선전을 통한 이들의 지지라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텔만은 이 시스템의 산물인 동시에 그 희생자이다.

자기 발전의 길이 막힌 중핵은 당을 약화시킨다. 이들은 자신의 무능력을 억압으로 보완한다. 당의 동요와 애매함은 가차 없이 계급 전체에 전달된다. 당 자신이 혁명적 결단력을 탈취 당했다면, 대중에게 대담한 행동을 요구할 수 없다.

비록 텔만이 내일 공동전선 정책으로의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는 마누일스키의 전보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상부의 새로운 지그재그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지도부는 너무 권위가 실추되었다. 올바른 정책은 건전한 체제를 필요로 한다. 현재, 관료집단의 노리개인 당내 민주주의는 하나의 실체로 되살아나야 한다. 당은 당다워야 한다. 그래야 대중이 당을 신뢰할 것이다. 사실상 이것은 임시 당대회와 코민테른 임시대회를 일정에 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당대회에 앞서 철저한 토론이 이루어져야 한다. 장애가 되는 모든 기구는 제거되어야 한다. 모든 당 조직, 당 세포는 자신의 의견을 정립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현 당원 또는 제명된 당원을 불문하고 모든 공산주의자의 회합을 소집하고, 그 의견을 들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당의 기관지는 토론에 기여해야 한다. 당의 모든 신문에 매일 비판적 기사를 게재할 충분한 지면이 할애되어야 한다. 당원들의 대중 집회에서 선출된 임시 언론출판위원회는 신문이 관료집단이 아니라 당에 봉사하도록 배려해야 한다.

분명히 토론은 적지 않은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할 것이다. 당 기구는 이렇게 주장할 것이다. 즉 이러한 결정적 시기에 어떻게 당이 토론의 사치를 누릴 수 있는가? 관료적 구세주는 어려운 조건에서는 당이 침묵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와 반대로 마르크스주의자는 어려운 정세일수록 당의 독자적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고 믿는다.

볼셰비키당 지도부는 1917년에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도 1917년 내내 당내에서는 근본적인 논쟁이 전개되었다. 10월 혁명 직전에 중앙위원회의 두 분파, 즉 봉기에 찬성한 다수파와 봉기에 반대한 소수파 중 어느 쪽이 올바른가를 둘러싸고 당은 열정적으로 논쟁했다.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제명이나 억압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이 논쟁은 무당파 대중도 끌어당겼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비당원인 여성노동자들의 집회가 다수파를 지지하기 위해서 중앙위원회에 대표단을 보냈다. 물론 토론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 덕분에 위협, 거짓말, 곡해가 없는 공개토론에서 당의 정책의 올바름에 대한 전반적인, 불굴의 확신 즉, 이것만이 승리를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던 것이다.

독일의 사태는 어떤 경로를 취할 것인가? 반대파의 작은 바퀴가 제때에 당의 큰 바퀴를 회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은 이런 식으로 문제가 제기된다. 대개 비관적인 견해가 목소리를 높인다. 그 주변에서뿐만 아니라 당내에서도 서로 다른 공산주의 그룹들에서는 이렇게 생각하는 분자들이 적지 않다. 모든 중요한 문제에서 좌익반대파는 올바른 입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좌익반대파는 약하다. 그 중핵들은 수도 적고, 정치 경험도 부족하다. 소규모 주간지(Die Permanente Revolution, 연속혁명) 하나를 가진 이러한 조직이 코민테른의 강력한 기구에 온전히 대항할 수 있는가? 

그러나 사태의 교훈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보다 강하다. 우리는 공산주의 대중에게 이 교훈의 해석자가 되고 싶다. 여기에 한 분파로서의 우리의 역사적 역할이 있다. 우리는 자이데비츠 일당이 하는 것처럼, 혁명적 노동자계급에게 외상으로 우리를 신뢰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더 겸손한 역할을 맡을 것이다. 즉 우리는 올바른 방침을 세우는 것으로 공산주의 전위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 이 임무를 위해서 우리는 자체의 중핵을 모아 훈련시키고 있다. 이 준비 단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 투쟁의 모든 새로운 단계는 가장 훌륭하고 가장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노동자계급을 우리 쪽으로 밀어낼 것이다.

혁명정당은 계급사회의 가장 강력한 기구를 겨냥한 하나의 사상, 하나의 강령으로부터 시작된다. 중핵이 사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상이 중핵을 만든다. 이 기구의 힘에 대한 공포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양성하는 이 특수한 기회주의의 가장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맑스주의의 비판은 그 어떤 기구보다도 더 강력하다.

좌익반대파의 향후 발전이 취할 조직 형태는 역사적 타격의 여세,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저항력의 정도, 일반 공산당원의 활동, 반대파 자신의 에너지 등 많은 사정에 달려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싸웠던 원칙과 방법은 세계사의 최대 사건에 의해, 패배뿐만 아니라 승리에 의해서도 충분히 검증되어왔다. 이 원칙과 방법은 자신의 길을 열어갈 것이다.

독일을 포함한 모든 나라들에서 반대파의 성공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것이다. 그러나 반대파는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는 더 완만하게 발전하고 있다. 유감스러울지도 모르지만 놀랄 필요는 없다. 좌익반대파에게 귀 기울이기 시작하는 모든 공산주의자에 대해서 관료집단은 냉소적으로 이런 선택을 들이댄다. 트로츠키주의못살게 굴기에 가담할 것인가 아니면, 코민테른 대오에서 내쫓길 것인가. 당의 관료에게 이것은 지위와 봉급의 문제이다. 즉 스탈린주의 기구는 이 수단을 더할 나위 없이 잘 사용한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헌신과 코민테른 대오로부터의 추방 위협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일반 공산주의자가 많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공식 공산당의 대오에는 부분적인, 협박을 받거나 정체를 숨긴 반대파가 많은 것이다.

이런 역사적 조건의 이상한 조합은 좌익반대파의 완만한 조직적 성장을 충분히 설명해준다. 동시에 이런 완만함에도 불구하고 코민테른의 정신생활은 오늘날, 이전보다 더 많이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투쟁에 집중한다. 코민테른의 다른 지부뿐만 아니라 소련공산당의 이론 잡지나 신문의 이론적 기사도 때로는 공공연하게, 때로는 은밀하게 주로 좌익반대파에 대한 투쟁에 충당되고 있다. 그 의미에서 더욱 더 징후적인 것은 당 기구가 반대파에 대해서 가하는 조직적 박해가 광적이라는 것이다. 즉 곤봉 등 폭력적 방식에 의한 반대파 집회의 파행, 온갖 종류의 물리적 폭력 행사, ‘트로츠키주의자에 대항하는 부르주아 평화주의자, 프랑스 급진당, 프리메이슨과의 막후 협정, 스탈린주의 중앙에서 나온 독기 띤 비방 유포 등등.

스탈린주의자는 우리의 사상이 자기 당 기구의 지주를 어느 정도나 훼손시키는가에 대해서 반대파들보다 더 잘 알고 있으며, 거의 바로 감지한다. 그렇지만 스탈린주의 분파의 자기방어 방식은 이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일정한 순간까지는 위협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배신과 폭력체제에 대한 대중적 반발을 준비한다.

19177,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정부가 볼셰비키를 독일 참모부의 첩자라고 낙인찍었을 때, 이 비열한 조치는 처음에 병사, 농민, 후진적인 노동자층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그 이후의 모든 사태가 볼셰비키가 옳았음을 뚜렷하게 확증해주자, 대중은 이렇게 보기 시작했다. 즉 레닌주의자들이 옳았다는 이유만으로 그토록 이들을 중상하고, 그토록 비열하게 꼬드긴 것인가? 그 결과, 볼셰비키에 대한 불신감은 볼셰비키에 대한 열렬한 헌신과 애정으로 바뀌었다. 다른 조건 아래에서지만 매우 복잡한 이런 과정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비방과 탄압의 엄청난 축적을 통해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틀림없이 일반 당원을 위협하는데 일정기간 동안 성공을 거뒀다. 그렇지만 이것은 혁명적 대중이 보기에는 볼셰비키-레닌주의자의 대규모 명예 회복을 준비하는 것이다. 현재, 이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조금도 의심할 수 없다.

그렇다, 오늘 우리는 여전히 허약하다. 공산당은 아직 대중적 기반을 가지고 있지만 이미 이론도 전략적 방침도 없었다. 좌익반대파는 이미 마르크스주의적 방침을 마련했지만, 아직 대중적 기반이 없다. ‘좌익진영의 나머지 그룹은 이도저도 가진 것이 없다. 진지한 원칙적 정책을 우르반스의 개인적 환상과 변덕으로 대신한 덕분에 레닌분트는 대책 없이 초췌해지고 있다. 브란들러 파는 그 기구 중핵의 뜻에 반하여 점차로 쇠퇴하고 있다 : 사소한 전술적 처방은 혁명적전략적 입장을 대신할 수 없다. 사회주의노동자당(SAP)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지도부에 입후보했다. 근거 없는 야망이다! 의 가장 진지한 대표조차도 프리츠 슈테른베르크의 최근 저작이 보여주는 것처럼, 좌익 중도주의의 경계를 넘지 않는다. 이들은 독자적인교의를 만들려고 부지런히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이 탈하이머의 제자임을 더욱 더 드러낸다. 이 유파는 생명을 잃은 것만큼이나 공허하다.

새로운 역사적 당은 단지 많은 구 사민당원이 뒤늦게나마 에베르트-벨스 정책의 반()혁명적 성격을 확신했다고 해서 생길 수 없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당은 노동자계급의 지도적 지위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아직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 일개 공산주의자 그룹에 의해 즉흥적으로 생길 수도 없다. 새로운 정당이 출현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기존 정당의 등뼈를 깨부술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 필요하고, 다른 한편으로 제반사건의 경험 속에서 확립된 원칙적 입장과 검증된 중핵이 필요하다.

우리는 코민테른의 소생과 그 새로운 발전을 위해서 온힘을 다해 싸우면서도, 조직의 물신숭배에는 조금도 동의하지 않는다. 세계 노동자혁명의 운명이 우리에게는 코민테른의 조직적 운명에 우선한다. 최악의 변종이 가시화되면, 우리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공식 당이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의해 붕괴에 이른다면,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다시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그 계보를 공산주의 좌익반대파의 사상과 중핵으로부터 더듬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단기간의 비관주의낙관주의는 우리가 수행하고 있는 임무에 통하지 않는다. 이는 개개의 단계, 부분적인 패배와 승리를 초월해 있다. 우리의 정책은 장래의 일을 고려한 정책이다.

 

 

후기

 

각각의 부분이 서로 다른 시기에 조금씩 작성된 이 팸플릿은 베를린에서 온 전보가 제국의회의 다수파와 폰 파펜 정부, 따라서 제국 대통령과의 충돌 소식을 전했을 때에는 이미 완성된 상태였다. 우리는 그 이후 사태의 구체적 전개를 연속혁명지 지상에서 쫓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몇 가지 일반적 결론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이 일반적 결론은 이 팸플릿을 쓰기 시작한 단계에서는 비판을 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뒤 사실의 증언 덕분에 논란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1. 슐라이허-파펜 정부의 보나파르트적 성격은 제국의회에서 처한 고립된 입장에 의해 완전히 폭로되었다. 대통령제 정부를 곧바로 지지한 농업자본가 집단이 독일 국민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제국의회에서 파펜에 찬성 투표한 비율보다 훨씬 더 적다.

2. 파펜과 히틀러의 대립은 농업자본가 지도부와 반동적 소부르주아 계급의 대립이다. 일찍이 자유주의 자본가계급이 소부르주아 계급의 혁명운동을 이용하면서도 모든 수단을 동원해 권력 장악을 저지한 것과 마찬가지로, 독점 자본가계급은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 하인인 히틀러에게 보수를 줄 준비가 되어 있다. 마지못한 필요성이 없다면, 이들은 파시즘에게 전권을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3. 소부르주아 계급의 다양한 분파가 매우 위험한 충돌을 피하지 않고 권력을 위한 공개적인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에게 당장 위협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찌와 중앙당은 물론이고 사민당의 지도자들까지 감히 헌법 투쟁을 시작한 것은 이 헌법 투쟁이 혁명 투쟁으로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4. 혁명적 목적에서 파펜에 반대표를 던진 유일한 당은 공산당이다. 그러나 혁명적 목적과 그 혁명적 획득 사이에는 아직도 긴 도정이 있다.

5. 이러한 의회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모든 사민당 노동자에게 권력의 문제가 된다. 이는 사태의 당연한 귀결이다. 여기에 혁명의 관점에서 보는 모든 충돌의 핵심이 있다. 권력의 문제는 행동에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단결의 문제이다. 사민당에 대한 공동전선 정책은 틀림없이 아주 가까운 장래에 노동자 민주주의 대의제도에 근거하여 계급투쟁 기관 즉, 노동자 소비에트의 창설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6. 자본가에 대한 정부의 기증이나 노동자계급의 생활수준에 대한 극악무도한 공격을 고려하여 공산당은 생산의 노동자 통제 슬로건을 제기해야 한다.

7. 유산계급의 제분파가 자기들끼리 싸울 수 있다는 것은 오직 혁명정당이 허약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혁명정당이 유산계급의 다툼을 올바르게 이용한다면, 훨씬 더 강력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여러 분파를 한 덩어리로 뭉뚱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적 구성에 따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완전하게, 그리고 결정적으로 파산한 사회파시즘이론은 무익한 허섭스레기로서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내던져버려야 한다.

 

프린키포에서,

1932914

 

옮긴이: 김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