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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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지 (2008년)/2008년 10월호

미국의 노동계급 운동과 이주노동자의 문제

사회실천연구소 2014. 12. 16. 09:19

미국의 노동계급 운동과 이주노동자의 문제

 

제리 그레빈

 

 

노동자 사이에는 종족인종언어의 차이가 있지만, 노동계급 운동은 역사적으로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원칙에 의해 지도되었다. 이 원칙에 대한 그 어떤 타협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투항하는 것을 뜻한다.

백 년 전 1907년 제2인터내셔널의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기회주의자들이 부르주아 정부에 의한 중국과 일본 이주자의 규제를 지지하려고 했던 시도는 압도적으로 패배했다. 실제로 기회주의자가 결의안을 어쩔 수 없이 철회할 만큼 반대는 컸다. 그 대신 대회는 모든 나라의 노동계급 운동에서 차별을 반대한다고 결의를 다졌다. 레닌은 이 대회를 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거기에는 협소한 숙련공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후진국에서 노동자(보기를 들면 중국의 쿨리)의 이주를 금지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는 몇몇 문명화된나라에 있는 노동자 사이에서 발견되는 귀족주의의 정신과 같은 것이다. 그들 노동자는 그들의 특권 지위에서 이득을 얻어내고 있고 따라서 국제적 연대의 필요성을 잊어버리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대회에서 그 누구도 이러한 숙련공과 쁘띠부르주아적 편협성을 방어하지 않았다. 결의안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필요에 완전히 따른 것이다.” 미국에서 기회주의자들은 1908년과 1910년과 1912년에 사회당 당 대회에서 슈투트가르트 대회의 결정을 빠져 나가기 위한 결의안을 통과시키려고 했고 이주노동자에 대한 AFL의 반대를 지지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노동자의 국제적 단결을 옹호하는 동지에 의해 번번이 패배 당했다. 한 대표는 기회주의자들에게 노동계급에게는 국외자가 없다.”는 것을 훈계했다. 다른 사람은 노동계급운동이 노동자의 집단에 맞서고 있는 자본가와 결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1915년에 사회주의 선전동맹(Socialist Propaganda League)에 보낸 편지에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참된 국제주의를 지지하고 맹목적 애국자 - 사회주의’(jingo-socialism)에 맞서는 우리의 투쟁에서, 우리는 늘 우리의 신문에 (특히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 이후, 슈투트가르트 결의안에 반대하여) 중국과 일본 노동자의 규제를 지지한 미국 사회당의 기회주의 지도자의 사례를 인용하곤 한다. 우리는 그들이 국제주의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이주노동자는 미국의 노동계급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초의 맑스주의 혁명가는 1848년 독일혁명의 실패 뒤에 미국으로 갔고 나중에 제1인터내셔널의 유럽 센터에 미국 사회주의 운동이 연결될 수 있는 다리를 놓았다. 엥겔스는 미국의 사회주의 운동에 이주노동자에 대한 다소 불확실한 개념을 도입했다. 그 개념은 어떤 점에서는 정확했지만 다른 점에서는 잘못된 것이었다. 그것 가운데 일부는 미국의 혁명적 운동의 조직적 활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미국에서 처음에 노동계급운동이 더디게 발전하는 것에 대해 걱정을 했다. 그는 미국의 상황에서 어떤 특수성이 강력한 계급체계인 봉건적 전통의 결여를 포함하여 불만을 품은 노동자가 서부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서 농부로 될 수 있게 한, 부르주아지의 안전망으로 이바지했던 변방의 존재였다는 것을 알았다. 또 다른 것은 경제적 기회와 급진화된 이주노동자가 토착 노동자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라는 점에서 토착 노동자와 이주노동자 사이의 격차였다. 보기를 들면, 그가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 사회주의자가 영어를 배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판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들은 그들의 외국적인 모든 찌꺼기를 벗어던져야만 할 것이다. 그들은 누가 보아도 미국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미국인이 그들에게 다가오길 바랄 수 없다. 소수자이자 이주자인 그들은 다수자이고 토박이인 미국인이 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무엇보다 영어를 배워야 한다.” 1880년대에 독일인 이주 혁명가가 이론적 작업에만 국한하고 토박이, 즉 영어로 말하는 노동자와 대중적 활동을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또 이주자가 주도한 혁명운동이 실제로 영어로 말하는 미국노동자에게 열려 있었지만, 그 운동이 가장 정치적이고 이론적으로 발전했고 경험 많은 노동자를 부차적인 역할로 밀어 넣었으며 형편없는 투사의 손아귀에 지도부를 맡겨놓게 되었을 때 결국 운동의 미국화에 대한 강조가 노동계급 운동에 재앙적인 결과를 안겨 주었음이 입증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뒤, 코민테른이 추구했던 이러한 똑같은 정책은 초기 미국공산당에 훨씬 더 재앙적인 결과를 안겨주었다. 지도부를 차지한 미국에서 태어난 토박이 투사가 William Z. Foster와 같은 기회주의자와 입신출세자를 지도부 지위로 뛰어 오르게 했다는 모스크바의 주장은 좌익공산주의경향의 동유럽 혁명가들을 지도부 자리에서 완전히 축출한 것이었고, 미국 공산당에서 스탈린주의의 승리를 가속화한 것이었다.

비슷하게, 엥겔스가 미국에서 커다란 장애가 토박이 노동자의 예외적인 지위에 있는 것 같다.…… (토박이 노동계급은) 발전했고 대부분 노동조합 노선에 따라 조직적으로 단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토박이 노동계급은 여전히 귀족적인 태도를 취했고 이주노동자에게 열악한 임금을 받는 직업을 남겨 놓았다. 이주노동자 가운데 오직 작은 부분만이 귀족적인 직종에 들어갔다.”고 말했을 때도 문제는 있었다.

비록 토박이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가 서로에 맞서 어떻게 분열되었는지를 정확히 서술했지만, 그것은 노동계급의 다른 부문 사이에 놓인 차이에 대한 책임이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토박이 노동자에게 있다는 것을 잘못 뜻한 것이었다. 비록 이러한 논평이 백인 이주노동계급에서 생긴 분열을 묘사한 것이었지만, 1960년대에 새로운 좌파는 그것을 백인특권이론(white skin privilege theory)”의 토대로 해석했다.

어쨌든, 미국에서 계급투쟁의 역사는 이주노동자의 미국화가 미국에서 강력한 사회주의 운동을 세우기 위한 조건이었다고 한 엥겔스의 견해가 틀렸음을 증명한 것이었다. 인종과 언어를 넘나든 계급 연대와 단결은 20세기의 전환기에 노동계급운동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미국의 사회당은 여러 언어로 된 일간신문과 주간신문을 출판했던 외국어 출판국을 지녔다. 1912년에 사회당은 영어로 된 5종의 일간신문과 외국어로 된 8종의 일간신문, 262종의 영어 주간지와 36종의 외국어 주간지, 그리고 10종의 영어 월간지와 2종의 외국어 월간지를 펴냈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노동당의 출판물을 포함한 것이 아니었다. 사회당은 그 안에 31개 외국인 연합을 지녔다. 즉 아르메니아인, 보헤미아인, 불가리아인, 크로아티아인, 체코인, 덴마크인, 에스토니아인, 핀란드인, 프랑스인, 독일인, 그리스인, 히스패닉인, 헝가리인, 아일랜드인, 이탈리아인, 일본인, 유대인, 라트비아인, 레트인, 리투아니아인, 노르웨이인, 폴란드인, 루마니아인, 러시아인, 스칸디나비아인, 세르비아인, 슬로바크인, 슬로베니아인, 남 슬라브인, 스페인인, 스웨덴인, 우크라이나인, 유고슬라비아인이다. 이들 연합은 조직의 다수를 이루었다. 1919년에 세워진 공산당과 공산주의 계열의 노동당(communist labor parties)에는 이주자 당원이 다수를 차지했다. 비슷하게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에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의 당원이 증가한 것은 주로 이주자의 유입 때문이었다. 심지어 대부분 토박이당원으로 이루어졌던 서부IWW도 수천 명의 슬라브인, 치카오인, 스칸디나비아인의 당원을 지녔다.

가장 유명한 IWW 투쟁인 1912년의 로렌스섬유노동자파업은 이주노동자와 비이주노동자가 연대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로렌스는 매사추세츠에 있는 공장 도시였다. 그곳의 노동자는 처참한 조건에서 일을 했다. 노동자의 절반은 14~18살 가량의 틴에이저 소녀였다. 숙련노동자는 영국과 아일랜드, 독일 출신의 영어 구사 노동자로 이루어졌다. 비숙련노동자는 주로 프랑스- 캐나다, 이탈리아, 슬라브, 헝가리, 포르투갈, 시리아, 폴란드 출신의 이주자로 이루어졌다. 강제적인 임금삭감은 파업을 부추겼다. 어느 공장에서 폴란드 여성 직조공이 파업을 일으켰는데, 눈 깜작할 새에 20,000명의 노동자가 가담했다. IWW의 지도하에 조직된 파업위원회는 각 인종 집단에서 두 명의 대표자가 포함되었고 15퍼센트의 임금상승과 파업자에 대한 보복중단을 요구했다. 파업 집회는 25개 언어로 통역되었다. 당국이 폭력적인 탄압으로 대응했을 때, 파업 위원회는 파업 노동자의 수백 명 어린이를 뉴욕시에 노동계급 지지자들과 함께 머물게 하려고 보냄으로써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100명의 어린이를 실은 두 번째 기차가 뉴저지에 있는 노동자 지지자에게 보내졌을 때, 당국은 각 신문사가 취재하고 있는 데도 어린이와 그들의 어머니를 공격해서 그들을 구타하고 체포했다. 그 사실은 전국적인 연대의 분출로 귀결되었다. 1913년에 뉴저지의 페터슨 실크 노동자의 파업 동안, IWW는 다른 도시에 있는 파업 어머니’(strike's mothers)와 함께 머물게 하려고 파업자의 아이들을 그들에게 보내는 비슷한 전술을 이용했다. 그런 전술은 또 다시 인종을 넘나든 계급 연대를 보여준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사회주의 운동의 좌익에서 망명자와 이주자의 역할은 특히 중요했다. 보기를 들면, 1917114일 독일 출신 이주자인 루두비히 로레(Ludwig Lore)의 뉴욕 집인 브루클린에서 열린 회의는 미국 사회주의운동에서 좌익 세력을 위한 행동강령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 회의에는 하루 전 날 뉴욕에 도착했던 트로츠키를 포함해서, 부하린(러시아사회주의동맹의 기관지인 노브이 미르의 편집자로 망명해 거주하고 있었다.)과 여러 명의 러시아 망명자, 판네쿡의 동지였던 네덜란드 혁명가 S. J. 루츠거(Rutgers), 일본 망명자 센 카타야마(Sen Katayama)가 참여했다. 목격자의 설명에 따르면, 토론은 좌파가 사회당에서 곧 떨어져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 부하린과 좌파가 잠시 동안 당에 남아 있어야 하지만 독자적인 격월간 기관지를 발행함으로써 당에 대한 비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트로츠키 등 러시아인들이 주로 발언했다. 그 회의는 결국 트로츠키의 견해를 채택했다. 만일 트로츠키가 2월 혁명 뒤에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도 미국 운동에서 좌익 진영의 지도자로 이바지했을 것이다. 많은 언어의 공존은 운동에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그것은 운동의 힘을 반영한 것이었다. 1917년에 있을 한 대중 집회에서 트로츠키는 러시아어로 군중에게 연설했고, 다른 사람들은 독일어, 핀란드어, 영어, 레트어, 이디쉬어, 리투아니아어로 연설했다.

우리는 노동계급의 국제적 단결을 방어하는 것에 찬성해야 한다. 우리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비합리적 두려움과 불신을 합법적인 것으로 볼 수 없다. 또 우리는 이주노동자를 문제 해결을 위한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부르주아지의 시도를 합법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자로서 우리는 문화적 공해”, “언어 공해”, “민족 정체성”, “외국인 불신또는 공동체나 이웃의 방어와 같은 것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구성물로 기각한다.

우리는 노동계급운동의 역사에서 얻은 중요한 성과로서 노동자가 조국을 갖지 않았다는 점, 민족문화나 언어 또는 민족정체성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업이거나 관심사항이 아니라는 점, 노동계급 안에 차이를 깊게 하고 노동계급의 단결을 훼손하기 위한 이러한 부르주아적 개념을 이용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노력을 거부해야 한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방어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보다 프롤레타리아의 단결과 우리에 맞서 우리를 분열시키려는 시도에도 국제프롤레타리아연대를 강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혁명적 원칙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옮긴이: 김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