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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부시의 권력 게임에 잡힌 또 하나의 볼모 본문

실천지 (2007년)/2007년 1월호

북한, 부시의 권력 게임에 잡힌 또 하나의 볼모

사회실천연구소 2014. 11. 7. 03:08

북한, 부시의 권력 게임에 잡힌 또 하나의 볼모

영국의 <노동자 투쟁>이 발행하는 『계급투쟁』48호1

2003년 1월 2일



2002년 1월 29일 “연두교서” 연설에서 부시는 북한·이라크·이란을 그의 “악의 축” 속에서 한 덩어리로 만들었다. 그 날부터 지금까지, 북한은 미국 측에서 점점 더 공세적인 수사를 쓰는 대상이 되어 왔다.


이러한 공세적인 수사는 2002년 12월 미국이 북한에 대해 농축 우라늄과 궁극적으로 핵탄두를 생산하려는 비밀 연구 프로그램을 추구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조치가 다시 한 번 강화되었다. 워싱턴이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실시하던 원조는 유보되었다. 더 중요하게, 1994년 미국과 맺은 제네바 합의의 일부이며 북한에게 필수적인 중유 공급이 중단되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12월 22일 평양은 1994년 이래 중단되었던 영변 핵발전소에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봉인과 감시 장치를 제거하고 민간용 전기를 생산하기 위하여 발전소를 다시 가동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발표가 있자, 부시 행정부가 반발했다. 상원 외교위원회 의장을 사임하는 요셉 바이든 상원의원은 이 위기가 “미국의 이익에 사담 후세인보다 더 크고 즉각적인 위험”이라고 경고했다. 부시 정부의 국방장관 도날드 럼스펠드는 미국이 지금 이라크에 집중하고 있다고 해서 “까불지 말라”고 평양에 충고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두개의 주요한 지역 분쟁에서 싸울 수 있다. 우리는 한 쪽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하고 나아가 재빨리 다른 쪽을 무찌를 수 있다. 그에 대해 어떤 의심도 하지 말라.” 같은 때에 부시 정부의 국무장관 콜린 파월이 평양의 도전적 태도에 백악관이 군사적 보복이라는 형식이든, 그렇지 않은 형식이든, 어쨌든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미디어에 조심스럽게 표현했다.


사실 부시가 이라크에 대한 전쟁도발 또는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미국의 대북 정책은 뚜렷하게 경직되고 있었다. 부시의 전임자인 클린턴 시절에, 미국과 북한 사이에는 여러 번의 “위기들”이 있었다. 그러나 클린턴 정부는 마지막 해(2000년)에 세간의 이목을 끄는 일련의 외교 조치를 취했다. 그 조치에 따라, 미국의 대북 경제 원조는 꽤 늘어났다.


그러나 부시가 대통령이 되자, 새로운 행정부는 클린턴이 했던 약속을 갑자기 취소하고 북한에 대한 자신의 요구를 늘렸다. 2001년 6월, 미 국무부가 단호하게 발표한 공식 성명에 따르면, 평양과의 협상은 “투명성”, “검증”, “상호주의”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투명성”, “검증”, “상호주의”라는 외교 용어가 뜻하는 것은 북한이 먼저 미국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덧붙여, 이 성명은 이제부터 그 어떤 협상에서도 워싱턴이 세 가지 주요 문제로 간주하고 있는 것들, 즉 제네바 합의 이행, 미사일 수출 금지, 북한의 재래식 무기 감축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해주었다. 아울러 부시 정부 관료들은 미국의 대한 정책을 다시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북한에 대한 이러한 정책 선회에서 정치공작의 요소가 틀림없이 있었다. 부시는 다른 모든 분야들처럼 여기서도 자신의 정책이 그의 전임자의 정책과 뚜렷이 다르다는 인상을 확실히 심어주고 싶어 했다. 그밖에도, 군수산업뿐만 아니라 부시의 공화당과 잘 알고 지내는 남한 측 로비가 미 의회에 준 강한 압력도 확실히 일정한 역할을 했다. 더욱 더 남한에서 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가 점점 다가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한 측 로비는 전통적으로 남한의 주요 야당인 우파 한나라당과 가깝다. 떠나는 대통령 김대중이 옹호했던 북한과 협상을 통한 재통일 정책(이른바 “햇볕 정책”)은 선거운동에서 주요한 초점 가운데 하나로 될 것 같다. 그래서 남한 측의 로비는 부시 행정부가 북한 정권의 “악하고” 위험한 본질, 즉 집권당이 추진한 “햇볕 정책”의 부적합성을 시끄럽게 다시 주장하게 함으로써 한나라당을 돕는 일에 매우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의 정치공작을 넘어서서, 미국 지도자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늘 전체 아시아 대륙에 대한 미 제국주의의 이해관계 속에서 북한을 다루었다. 사실 미국의 이러한 이해관계가 아니라면, 처음부터 두 개의 한국은 결코 있지도 않았을 텐데. 그리고 특히 북한 주민은 서방의 봉쇄 때문에 지난 10년 동안 시달려 온 절대적인 궁핍으로 내몰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로 2차 대전 이래로 북한과 남한은, 아시아 대륙을 약탈하는데 알맞은 세력균형을 만들려는 미국과 일본 제국주의 권력 게임에서 볼모 일 뿐이었고 여전히 그렇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부시 정부의 정책은 전혀 새로운 것이 없다. 단지 예외가 있다면, 부시는 일괄거래 방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58년 된 “일시” 분할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40년 동안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1905년 미국과 일본은 조약을 맺어 동아시아에서 두 나라의 세력권을 규정했다. 필리핀이 미국에 귀속당한 반면, 일본에는 대만(이미 1895년에 합병됨)과 조선(이제 막 점령되었음)에 대한 통제권, 시베리아와의 연안 무역이 할당되었다.


조선은 광대한 천연자원과 값싼 인적자원 덕분에 몇 십 년 동안 일본의 산업 노역장이 되었다. 1945년까지 조선은 대규모 철도와 도로 연결망, 발달된 은행 시스템, 현대적인 섬유·철강·토목 산업들, 거대한 수력발전소와 광대한 광산 설비들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조선의 경제는 조선인의 요구가 아니라 완전히 일본 자본의 필요에 이바지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조선 경제는 일본을 제외하면 다른 어떤 아시아 국가보다 앞선 수준이었다.


이런 이유만으로도 경쟁하는 연합국은 조선의 독립을 서둘러 준비할 생각이 없었다. 미국·영국·중국은 1943년 12월 카이로 선언에 서명했다. 이 선언에서 그들은 가증스럽게 밝혔다. “세 나라는 조선인들의 노예 같은 상태를 마음에 새기면서 때가 되면 조선이 자유를 얻고 독립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결국 “때가 되면”이 뜻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속내를 드러냈다. 얄타에서 루즈벨트는 조선이 완전히 독립하기 전에, 20년에서 30년 동안 미국·영국·소련·중국의 “공동 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 지점에서 워싱턴 정부는 규모 있는 산업과 제법 되는 광물 자원을 가진 조선이 당분간 미국 기업에 문을 열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확실히 해두려고 했다.


루즈벨트가 소련이 함께 하는 “공동 신탁통치”를 제안한 것은 일본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해 달라며 스탈린에게 먼저 제공한 하나의 선물이었다. 물론 “공동 신탁통치”와 같은 단어가, 제국주의 국가가 소비에트 관료주의를 장기간 승인한다는 형식을 담고 있는 한, 스탈린에게는 틀림없이 듣기 좋은 소리였다. 하지만 미국 지도자들에게는 이러한 단어들은 정치적 편의주의의 한 표현일 뿐이었다. 사실 미군은 지나치게 퍼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군은 지역의 식민 통치기구는 말할 것도 없이, 조선과 만주에 근거를 둔 일본의 정예 병력의 예상되는 격렬한 저항을 처리할 수 없었다. 붉은 군대가 이 병력을 붙들어 둘 때, 미군은 일본 본토에 대한 마지막 공격에 집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전쟁 수행 자체와 전쟁 뒤 제국주의 세계 질서의 복구라는 양 측면에서 연합군에 대한 스탈린의 협력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소련을 향한 일련의 상징적인 제스처가 필요했다. 루즈벨트가 그런 “공동 신탁통치”를 제안한 것은 그런 제스처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실제로 루즈벨트의 실질적인 의제는, 붉은 군대가 북쪽으로부터 조선 땅에 들어서자마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일본이 항복했을 때 드러났다. 갑자기 미국의 지도자들은 미군이 지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닐 때 조선 땅으로 붉은 군대가 급속히 전진하는 것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45년 8월 11일 워싱턴 정부는 한국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두 개의 점령 지역으로 나뉘어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인구의 1/3이 살고 있는 북쪽 지역이 소련에게 할당된 반면, 남쪽 지역은 미국의 통제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까지 단 한 명의 미군 병사도 한국 땅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1945년 9월 8일 미 해병대의 첫 부대가 마침내 상륙하기까지 4주나 더 걸렸는데도 그렇게 되었다. 루즈벨트가 갑자기 제안한 것이었지만, 스탈린도 망설임 없이 그의 결정을 넙죽 받아먹었다.


물론 서류상으로 이 분할은 일본의 식민 총독부를 새로운 조선의 국가기구로 대체할 때까지 일시적이었다. 조선의 지위를 “공동 신탁통치”로 공식화한 1945년 12월 협정서에서 그들은 조선의 독립이 언제인지 입을 다물었지만, 조선을 하나의 제도를 가진 하나의 나라로 승인했다.


그런데도 58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한국은 1945년 8월 미 당국이 포고한 그 경계선을 따라 여전히 둘로 나뉘어 있다.


미국의 “민주적인” 점령


미국 지도자들은 한국을 질서정연하게 점령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첫 번째 미군 해병대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틀어졌다.


일본 식민 총독부가 갑자기 무너지자, 숨죽인 대중 조직이 들고 일어났다. 지하조직인 공산당은 수면 위로 떠올라 여러 민족주의 세력들과 연합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CPKI)가 모든 지역에서 솟아 올라왔다. 1945년 9월 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국대회가 서울에서 열려 조선인민공화국(KPR)을 선포했다.


조선공산당은 이런 움직임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세력이었다. 조선공산당은 모스크바 노선을 따랐다. 그래서 그들은 피착취 대중이 자신들에게 고유한 사회적 이해관계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어떤 공간도 허용하지 않으려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조선공산당은 다른 어떤 정책도 “조선 민족”을 분열시킬 것이라고 잘못 생각했다. 그들은 지금은 사회적 해방을 추구하는 시기가 아니라 “민족 해방”을 추구하는 시기라고 주장했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 당시 다른 모든 나라들처럼 조선공산당은 가난한 대중들을 그들의 착취자들이 이끄는 대열로 밀어 넣고 있었으며, 자본주의 지배를 계속 보장하려고 대중동원을 이용했다.


그러나 그들이 자본주의 질서를 존중하려고 애썼지만, 미국 지도자들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미국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보통 선거권과 민주적인 국가제도에 대한 요구를 포함하는 조선인민공화국의 기본적인 민주적 강령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국유화와 토지개혁에 대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요구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한국의 산업과 거대한 농업자산의 대부분은 일본인 소유였기 때문에 더 이상 거기에는 어떤 소유주도 없었다. 미국 지도자들이 가장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풋내기 정권이 미국의 사전 승인 없이 대중 동원을 토대로 세워졌다는 사실이었다. 그 정권은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위하여 미국을 필요로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미국은 그 정권이 미국의 이해관계에 얌전히 따를 것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선인민공화국 집행위원회가 협력을 제안하며 미군 참모진에 접근하였을 때, 그들이 들은 얘기는 ‘꺼져버려’였다.


그 대신 미군정은 그들이 점령한 지역에 그들 스스로 연출한 “민주적인” 정권을 들어앉히는 일을 시작했다. 과거의 식민지 경찰대가 복구되었다. 사실상 그들은 일본 점령 아래 경찰과 같은 인물들이었고 심지어 제복마저 같았다. 새로운 제도 아래에서 이러저러한 자리들은, 식민지 시대에 일본인들과 협력했거나 또는 중국의 군사독재자 장개석의 보호 아래서 피난처를 찾아다녔던 잡동사니 정치인들에게 돌아갔다. 어느 쪽이든 그들은 내놓고 공산주의를 반대한 사람들이었고, 한국의 지주 계급과 강력한 사회적 유대를 갖고 있었다. 워싱턴 정부는 새로운 정권을 이끄는 데 잘 알려진 우익 민족주의자 이승만을 선택했다. 그는 미국과 장개석 정권 모두에 꽤 많은 연줄을 갖고 있었다. 1946년 2월 미국은 이승만을 의장으로 하여 남한임시정부(남조선대표민주의원-역자)를 설립했다. 그 구성원의 절반은 미군정이 직접 지명했고 나머지 절반은 일제 시절의 규칙과 규정에 따라 가진 자들이 선출했다.


새로운 정권의 정책은 정부의 사회적 구성에서 예상되는 것처럼 반동적이고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것이었다. 포괄적인 토지 개혁에 대한 요구는 묵살된 반면, 관료들은 이전에 일본인 소유 재산의 토지를 가로챔으로써 거대한 재산을 쌓아 올렸고, 땅 없는 농민들은 굶주리도록 내버려졌다. 부패와 암시장이 널리 퍼졌다.


1948년 8월 대한민국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미국이 지원하는 이 정권과 이전의 일본 식민 총독부 사이에는 모든 지향과 목적에서 거의 차이가 없었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그것도 전부는 아닌데, 제복의 차이 뿐이었다.


북한의 형성


반면 소련이 점령한 지역에서 점령당국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을 일상 업무를 관장하는 지역 주민의 대표자로 승인했다. 조선공산당은 조선의 특권층과 미국에 대해 호의의 태도로 자신의 힘을 뽐내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기독교 민족주의자 조만식이 북쪽의 조선인민공화국 수장이 되는 것을 지원했다. 나중에 서방의 골칫거리가 된 김일성은 1945년 말에야 무대에 등장했다. 그는 그때조차도 조선공산당을 분할하고 있는 여러 정파들 가운데 하나를 대표하는 인물일 뿐이었다.


남쪽의 미국과 달리, 북쪽의 붉은 군대는 국가 기구나 경찰 등을 세우려고 하지 않음으로써 “공동 신탁통치” 협정을 지켰다. 하지만 1946년 2월 미국이 먼저 남쪽에서 정부를 세우자, 임시인민위원회가 평양에서 결성되었다. 이 때 김일성이 지도자로 나섰다. 김일성이 나선 것은 모스크바와 관련 있어서가 아니라, 별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실제로 많은 공산당 지도자들과 달리 김일성은 모스크바에서 지낸 적이 거의 없다. 그는 만주에서 일본에 맞서 중국인 저항세력과 연계한 조선인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고 있었다. 그는 지하 공산당 지도자들처럼 일본이 무너지자 솟구쳐 오른 대중적 분출과 결합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만주에서 활동한 덕택에 일본에 맞선 민족 저항의 영웅 노릇을  맡을 수 있었다. 모든 측면에서 김일성은 “민족적인” 정부 수립에 딱 알 맞는 대변자였다.


새로운 정권은 형성되자마자, 일본인이 소유했던 산업을 2년 동안 국유화하였으며, 동시에 거대한 재산을 무상 몰수하여 땅 없는 농민들에게 무상 분배를 포함하는 전면적인 토지개혁을 시작했다. 노동법과 초보적인 복지 프로그램도 도입되었다.


결국 1948년 9월, 남쪽에서 대한민국을 선포한지 3주 뒤에, 평양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들어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군 부대가 몇 백 명의 군사 고문단만 남기고 한국 땅에서 철수했다.


그 사이에 1946년 8월 조선공산당과 다양한 급진 민족주의 그룹들이 통합하여 북조선노동당이 결성되었다. 새로운 당에 결합하지 않은 정치세력들은 정권에 맞설 때 처음에는 무시되다가 나중에는 기소 당했다.


북한 정권은 확실히 하나의 억압적인 정권이었다. 북한은 그 시기 많은 제3세계 군사독재가 지닌 모든 특징을 갖고 있었다. 붉은 군대의 보호 아래 세워진 유럽의 인민 민주주의 국가들처럼 정권의 첫 번째 희생자는 노동자 계급이었다. 노동자 계급은 정치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희생당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경제 재건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속에 막대한 짐을 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反제국주의적인 태도, 급진적인 토지 개혁, 국유화 프로그램은 북한만이 아니라 남한에서 제법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 까닭은 남쪽에서 지주 기생적인 지배와 뚜렷이 견주어졌기 때문이다.


UN이 후원하는 독재


그 사이에 남쪽에서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모든 “불허가” 정당들과 함께 불법화되었다. 여기에는 조선공산당과 새로 만들어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도 포함되었다. 1945년 11월 미군과 한국 경찰은 정치 활동가와 노조활동가를 체포하러 나섰다. 아울러 과거 일본인 소유 공장을 접수하고 있던 노동자들을 몰아내려고 미군 병사들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대중들과 활동가들은 이러한 탄압 앞에서 겁먹지 않았다. 북한에서 취해진 급진적인 조치들에 관한 소식이 널리 알려지자, 주민들 사이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1946년 가을까지 식민지 시대의 노동 규율을 복구하려 하는 새 공장 주인들과 경영자들에 맞선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미군 병사들을 주민들로부터 떨어뜨려 놓으려는 미군 참모부의 노력이 있었지만, 늘 마찰이 빚어졌고 종종 시위와 폭동으로까지 이어졌다.


결국 1946년 9월 남쪽의 항구도시 부산에서 철도파업이 일어났다. 이는 곧바로 총파업으로 번졌다. 그 때 상황은 더 이상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나빠졌다. 파업은 철도에서 다른 산업으로 퍼졌고, 며칠 만에 25만 명의 노동자가 남한 전역을 가로질러 파업에 참여했다. 파업이 들불처럼 퍼지자, 노동자들은 △임금과 노동조건의 개선 △북한에서 채택된 것과 유사한 노동법의 채택 △정치범들의 석방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합법화 등을 과감히 요구했다.


파업을 깨뜨리려고 미군과 한국 경찰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잔인하게 진압해도, 파업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결의를 조금도 꺾지 않았다. 오히려 주요 도시에서 거대한 항의 행진과 소요가 잇달아 일어났을 뿐이다. 경찰관들이 거리의 대결에서 살해당했으며, 경찰서가 습격당하고 불에 타버렸다. 정부 관료들의 집이 파괴되었다. 뜻하지 않은 사태에 놀란 미군 참모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미군 병사들은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발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탱크와 병사들이 곧 터질듯 한 위기를 처리하기 위해 보내졌다.


이처럼 억압적인 조치가 취해졌지만 봉기 참여자는 곳곳에서 늘어났다. 처음에 운동은 도시 지역으로만 퍼졌으나, 이제 시골구석까지도 확산되고 있었다. 남쪽의 농촌지역에서, 즉각적인 토지 개혁과 “조선인의 정부를 인민위원회로 되돌리라”고 요구하는 현수막을 앞세운 많은 시위가 일어났다.


지하의 조선공산당은 의심할 바 없이 이 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은 무엇보다 미국 지도자들이 조선공산당의 도움 없이는 남한을 운영해 나갈 수 없다는 점을 깨닫기 바라면서 힘을 과시했다. 따라서 조선공산당은 대중이 그들 스스로 민주적인 지도력을 건설함으로써 전국적인 수준에서 투쟁을 이끌어 나갈 능력을 갖추는 정책을 결집한 대중들에게 제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니 아마도 그럴 능력 또한 없었다. 부분적으로는 이것 덕분에, 또한 부분적으로는 미군의 중무장 덕분에, 미군은 한 마을 두 마을, 한 도시 두 도시, 한 지역 두 지역, 반란을 분쇄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1946년 12월말 모든 반란을 진압하기까지는 세 달이나 더 걸렸다.


탄압의 결과, 공식적으로 1천 명 이상이 죽고 활동가 3만 명이 체포되었다. 하지만 많은 활동가들이 탈출하여 식민지 시대의 게릴라 전쟁으로 돌아가, 4년 이상 게릴라 전쟁을 벌였다. 미군의 짓이든 이승만 군대의 짓이든, 탄압은 늘 잔인했다. 1948년 6월 한국군은 민족주의 게릴라 부대가 통제권을 장악했던 남쪽의 제주도를 공격했다. 거의 1년 동안 연이은 전투에서 섬 주민 12%가 죽었고 주민의 1/3이 “보호 부락”으로 강제이주 당했다. 이 일이 벌어지는 동안 여수항에 주둔하고 있던 한국군 몇 개 연대는 제주도 진압에 합류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출동을 거부했다. 도시의 통제권을 장악한 그들은 이웃 도시들의 통제권을 장악하자고 병사들을 초청하는 대표단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군이 반란 진압을 떠맡고 나섰다. 포로들은 이승만의 경찰들에게 넘겨졌는데, 그들이 전 동료를 추적하는 데 협조하지 않을 경우 처형되었다.


1940년대 말까지 미국은 이승만 정권을 지탱하려고 남한에 또 다른 분야의 군사 지원을 쏟아 부었다. 미국은 사태가 안정되자 미군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미국 지도자들은 그들이 남한에 만들어 놓은 정권을 지키는 데 비록 꼴사납긴 하지만 전보다 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1947년 봄, 냉전과 트루먼의 봉쇄 정책이 소련에 맞서, 그러나 무엇보다 제3세계 민족주의에 맞서 선언되었다. 그들이 영향을 미치는 곳에서 단 1인치의 땅이라도 내준다는 것은 미국 지도자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오쩌둥이 1949년 중국에서 승리를 거두자, 미국의 봉쇄 정책은 처음으로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다. 아, 패배라니!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가 미국이 지원하는 장개석 정권을 무찌르면서 제국주의에 공공연히 맞섰다.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주의국가가 그에 맞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암흑시대로 내몰린 북한


1950년 6월 25일, 병력 7만 명과 탱크 몇 십 대를 앞세운 북한군이, 겉으로 보기에는 모스크바의 승인을 구하려고 애쓰지 않은 가운데 38선을 넘었다. 김일성은 나라를 재통일하겠다는 결심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게다가 이승만 정권이 먼저 공격할 수 있다는 좋은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남쪽에 있는 모든 반대세력이 깨질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미국 지도자들은, 가난한 나라들이 제국주의국가에 맞서도록 용기를 북돋은 중국의 선례를 더 이상 허용하지 않겠다는 점을 명확히 알릴 수 있는 본보기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조치를 취하고, 그리고 군사적 개입을 지지하려고 UN이 소집되었다. 미군이 투입되기 시작했고, 영국·프랑스·호주 등에서 군대가 파견되어 보강되었다.


처음에는 북한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다. 남한 민중은 4년 동안 기다려 왔던 재통일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라며 환영했고 무엇보다도 토지 개혁이 실시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미군이 개입했지만 북한군은 미군을 뒤로 밀어낼 수 있었다. 1950년 9월까지 미군은 남쪽의 부산항을 둘러싼 작은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미 해군은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38선 바로 남쪽에서 대규모 상륙 작전을 펼쳤다. 이로써 미군은 뒤에서 북한군을 쳐서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이제 상황은 완전한 미군의 승리로 뒤집어졌다. 더욱이 북한은 공군도 대공 방어망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승만 군대는 즉각 “반역자들”의 서울을 “싹쓸이”했다. 미국의 군사문서에 따르면 이 대학살에서 10만 명이 죽었다.


이 때 트루먼 대통령은 미군에 38선을 넘어 북한을 완전히 무너뜨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두 달 뒤, 미군이 중국 국경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중국군 20만 명의 반격을 받았다. 트루먼은 드러내놓고 대결하려 하지 않았다. 미군은 38선 뒤로 허둥지둥 물러났다. 이때부터 전쟁은 참호전이 되었다. 병사들은 때때로 가스 공격을 받거나 산채로 불태워진 채 참호 속에서 썩어갔다. 그들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꼭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서 언덕이나 겨우 1야드의 땅 때문에 죽어 나갔다. 그것은 잔인할 뿐만 아니라 또한 끔찍하게 불균형적인 전쟁이었다. 중국군 몇 백 만 명은 아주 작은 성과를 얻으려고 몇 천 명의 목숨을 잃어가며 로켓탄이나 네이팜탄 아래 탱크도 비행기도 없이 싸우고 있었다.


1951년 7월 소련의 지원 아래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국 지도자들은 한국 민중에게 물릴 “징벌”을 극대화하려고 협상에 뜻이 없는 척했다. 그들은 앞으로 2년 동안 전쟁을 더 이어갈 궁리만 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어느 쪽도 자신 있게 승리를 선언할 수 없었다. 북한과 남한 사이의 경계선은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았다. 북한과 남한의 갈등은 풀리지 않았다. 어느 쪽도 서로를 승인하게 될 평화 협정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두 나라는 전쟁 중이며,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죽은 한국 사람은 얼추 1백만 명에 달했다. 북한은 체계적인 폭격을 당했고, 서 있는 현대식 건물이 거의 남아나지 않았다. 북한이 일본에서 물려받았던 도로, 교량, 발전소, 제강공장, 석탄 광산은 사실상 모두 부서졌다. 나라 전체는 대략 20세기 초로 되돌아갔다. 그것은 정확히 제국주의의 의도였고, 제국주의 정책의 목표였다.


제국주의가 숨통을 조이고 있는 북한


미디어가 늘 퍼트리고 있는 것처럼, 북한을 “은둔한” 또는 “비밀스런” 나라라고 말하는 것은 그럴듯한 겉발림이다. 이것은 북한이 반세기 이상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들의 포괄적인 봉쇄 때문에 제물이 되었고, 그래서 세계 시장에 전혀 다가갈 수 없었다는 사실을 덮어버리는 편리한 방법이다.


그러나 같은 취급을 받았던 중국과 달리 북한은 인구도 많지 않고 천연자원도 그렇게 많지 않다. 북한은 오로지 ‘흔쾌히’ 무역을 하려는 나라에 의존해야만 상품과 천연자원을 얻을 수 있었다. 그 파트너들은 미국이 강요한 봉쇄 때문에 제국주의 블록 밖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말까지 이러한 무역 파트너들은 주로 중국, 소련, 그리고 동유럽 국가들이었다. 그러나 동구권이 무너지고 중국의 대미관계가 나아진 뒤, 북한은 낭떠러지로 몰렸다. 소련이 무너진 뒤, 2001년 7월 출판된 미국의 어느 학술 논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요즈음 몇 년 동안, 지원받은 원유 선적량, 기술 원조, 소련이 설계한 공장들의 부품 수입이 1990년 이전 수준보다 엄청나게 줄었다. 또한 소련의 붕괴는, 소련과 동유럽의 소비자와 공장으로 수출될 북한 물품이 갑자기 어떤 시장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 전체적으로 북한 경제는 지난 10년 동안 중국과 소련에서 해마다 10억 달러를 지원받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북한의 빈곤과 남한의 “경제 성장 신화”가 때때로 견주어진다. 마치 북한에서 정치적 독재, 국가적인 빈곤, 강압적인 전제정치가 처음부터 공산주의와 어떤 관계라도 있는 것처럼, 그런 비교가 북한에서 “공산주의의 실패를 입증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면, 이는 썰렁한 우스갯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서, 이를테면 1945년 뒤 30년 동안 미국이 남한에 약 60억 달러, 즉 같은 기간 모든 아프리카 나라들이 받은 원조 총액과 거의 맞먹는 규모의 경제 원조를 쏟아 부었다는 사실은 생각해야 한다. 또한 1950년대에 한국이 수입한 물건의 80% 이상이 미국이 지원한 돈으로 사들였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베트남 전쟁 동안 남한이 베트남에 주둔한 미군에 물품을 보낸 국가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보급품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남한의 전체 수출품 가운데 20%를 차지했다.


그런데 미국이 남한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지만, 1976년까지 남한과 북한이 1인당 국민총생산(GDP)에서 거의 차이가 없었다고 미정보국(CIA)은 평가했다. 이러한 평가에 비추어보면, 남한의 경제는 북한 경제보다 더 “효율적”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1970년대 말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남쪽이 앞서 나갔다. 왜냐하면 거의 1990년대 초까지 오랫동안 남한을 지배했던 잔인한 군사독재가 남한의 노동자 계급에게 강요했던 초과착취 때문이었다. 이처럼 남한 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는, 제국주의 은행들에서 서울이 빌릴 수 있었던 많은 돈과 더불어, 일본과 미국 기업들의 요구에 맞추어 하청 생산에 기초한 수출지향적인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남한의 “정치적 안정”과 미국 지도자들의 지원은 북한과 달리 남한에 가장 높은 신용등급을 매겨 주었다.) 북한은 확실히 이러한 기회를 가져보지 못했다. 비록 이렇게 경제를 발전시키려고 땀 흘리고 건강까지 나빠진 남한 노동자의 처지에서 보면, “기회”라는 단어가 쓰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기는 하지만 말이다.


북한이 정치적 경제적 고립을 강제당한 결과는 최근 10년 사이에 파멸적인 것이 되었다. 위에서 인용한 학술 논문은 이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북한의 에너지 기반 시설은 여러 형태로 무너지고 있다. 국가 차원의 전력망은 실제로 거의 없다. 지역 단위 전력망이 겨우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50년이나 써먹어서  거의 ‘고물’과 같았다.  (…) 전기, 디젤 연료, 열차와 트럭에 쓰일 예비 부품이 동이 나자, (석탄을 포함한) 물자수송과 여객운송 시스템도 못 쓰게 되어 버렸다. 아울러 에너지와 상품 시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자, 중공업 생산은 1990년보다 아주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주거용과 상업용 전등·전열·요리기구가 에너지 부족 때문에 제 때에 쓸 수 없었다. 이것은 건강과 생산성, 그리고 삶의 질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병원은 겨울에도 난방을 하지 못했다. 전등과 의료장비에 쓸 전기도 모자랐고, 심지어 사람이 마실 물을 끓일 연료조차 축났다. (…) 전력 부족 때문에 광산이 가동되지 못했고, 이는 다시 발전소에 석탄을 공급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다.”


이 끔찍한 상황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또 하나가 보태져야 한다. “1990년대 초 빈약한 곡물 수확이 1990년대 말에 가뭄과 홍수, 주기적인 해일과 태풍 때문에 더욱 악화”되자, 북한은 “거의 10년 동안 몹시 심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그런데도 부시는 북한을 핵을 갖고 나머지 세계를 위협하는 나라, 자기 주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나라, 자신의 전력망조차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나라로 묘사하려고 애쓰고 있다!


고립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들


북한 정권의 “은둔” 혐의가 있지만, 그 누구도 북한이 심지어 1994년 김일성이 죽기 전부터 오래 동안 고립에서 벗어나려고 모든 측면에서 애쓰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1970년대 초까지는 미국이 중국에 대한 보이콧을 강제하자, 북한은 완전히 찌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1971년 닉슨이 먼저 중국에 대한 완전 봉쇄를 중단하고 그 다음에 중국이 국제연합(UN)에 가입하게 함으로써 처음으로 중국의 빗장을 열게 되자, 김일성은 남한과 고위급 대화를 시작하여 양측이 평화 통일을 추구한다는 공동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2년 뒤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하였고, 이어서 국제원자력기구가 소련이 건설한 두 개의 핵발전소를 감독하는데 찬성했다.


그 때부터 서구 강대국과 정치적 소통을 위한 공식 라인이 만들어져 긴 외교역사소설이 이어졌다. 그들 사이의 외교에서 제국주의 지도자들의 태도는 늘 기본적으로 고난을 겪는 것은 평양 지도자들의 몫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무엇을 하건, 그들의 양보는 결코 워싱턴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워싱턴은 거래에서 자신의 몫을 결코 이행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1985년 서구 강대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조치를 풀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북한 지도자들은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에 동의함으로써 화답했다. 남한에 주둔한 4만 7천명의 미군과 가까운 일본에 주둔한 비슷한 수의 미군이 가하는 위협 아래서 늘 살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큰 양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양보는 헛수고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3년 뒤에 미국이 갑자기 북한이 그 전 해에 일어난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에 “연루된” 혐의가 있다는 구실을 핑계로 삼았기 때문이다. 사실 워싱턴은 북한이 이 사건에 관계있다는 증거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그 혐의를 ‘핑계’ 삼아  북한을 “테러 지원 국가” 목록에 넣으면서 경제 제재조치를 다시 취했다.


평양은 협상을 하고 또 협상을 했지만, 경제적 고립이라는 목조르기를 누그러뜨리려 했지만, 몇 번이나 똑같은 장벽에 부딪쳤다. 양보를 하면 할수록,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더욱 많은 양보가 요구되었을 뿐이다. 1970년대 내내 북한이 서방에 폐기된 구식 발전소를 바꾸려고 “완성품 구매 방식으로” 발전소를 사겠다고 도움을 청했을 때, 일본이 관심을 표명한 유일한 나라였으며 그것도 아주 작은 프로젝트만을 제시할 뿐이었다.


최근 20년 사이에 북한은 외국 기업에 사업 기회를 주려고 무진 애를 써왔다. 1985년부터 외국 기업들과 합작 사업을 위한 틀을 규정하는 합법적인 절차가 마련되었다. 그에 따르면 지방의 산업 시설들을 하도급업체로 제공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성공은 제한적이었다. 왜냐하면 특히 평양이 이 사업들에 대한 통제권을 지니고 있으려 했기 때문이다. 2001년까지 이러한 합작 사업은 고작 250개였다. 그것도 대부분은 남한 기업들과의 합작이었다. 남한 기업들은 1990년대 말 금융 위기가 터지고 난 뒤부터 북한의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을 이용하려고 갈망해 왔다.


외국 기업이 보인 소극적 태도를 바꿔놓으려고,  북한은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10년 전에 걸었던 길, 즉 경제특구 조성에 나섰다.


1989년 금강산에서 문을 연 첫 번째 경제특구는 전적으로 고급 관광을 목적으로 설계되었다.2 이것은 남한 거대기업의 자회사인 현대아산이 운영하고 있는데, 최종적으로는 9천 개의 호텔 객실, 3개의 골프 코스, 스키 리조트, 테마 파크 등을 포함할 예정이다. 하지만 대다수 북한 사람들이 이용하게 될 시설은 없다. 이어서 1991년에 라진·선봉지구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북한의 동북쪽, 즉 중국과 러시아 국경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아직 카지노가 불법이기 때문에, 주로 중국 도박꾼들을 끌어들이는 고급 호텔과 카지노 말고, 라진·선봉지구는 대부분 통과무역, 창고보관, 재포장을 위한 항구로 쓰이고 있다. 이것은 외국 기업들이 그 시설을 꽤 많은 돈을 내고 쓰고 있지만, 정작 그 시설에 어떤 투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항구 시설은 아주 뒤떨어져 있어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외국 기업들이 비용을 내려 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가 메워야만 할 것이다.


중국에서 홍콩이 차지하는 지위를 모델로 삼은 또 다른 경제특구가 지난 2002년에 중국 국경과 맞닿은 북서쪽 신의주에서 문을 열었다. 서방 기업들에게 좀 더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평양은 중국 출신의 네덜란드 거물 양빙을 신의주 경제특구의 행정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 뒤 곧바로 양빙은 탈세 때문에 홍콩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신의주에서 이루어진 유일한 투자는 양빙의 회사를 위해 아주 많은 꽃을 생산한다는 웅대한 프로젝트뿐이다!


2002년에 현대 아산이 개성에 세운 공업 경제특구는 2010년까지 16만 명의 노동자들을 고용할 계획인데, 좀 더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제 한국의 국영기업이 기반시설 조성을 위한 자금을 빌려줄 예정이다. 왜냐하면 현대가 막대한 부채로 과중한 부담을 져서 감당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영기업이 자금을 빌려준다고 해서, 기업들이 그곳에 투자할 것인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한다.


잠재적인 투자자들이 북한의 경제특구로 오는 것을 꺼리는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평양 정부가 노동법과 임금규정을 누그러뜨리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로 알 수 있는 것은,  경제특구가 성공하려면 북한 노동자들의 건강과 삶의 질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위기와 부시의 계획


미국과 북한 관계에서 일어난 지금의 위기는 절망적인 고립과 경제적인 파국이라는 이러한 배경을 놓고 보아야만 한다.


1994년에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북한과 이른바 제네바 합의를 협상했다. 북한 혼자서 만든 5 메가와트(MEGA WATT) 흑연감속 원자로를 국제원자력기구가 중단시키는 대가로, 2003년에 북한은 두 개의  1 기가와트(GIGA WATT) 경수로 냉각 핵발전소를 양도받고 아울러 그 사이에 생긴 에너지 부족을 보상받기 위하여 중유 50만 톤을 해마다 미국에서 공급받기로 약속받았다. 덧붙여 여느 때처럼 경제 제재조치를 풀겠다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은 막연한 약속도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건설 계획은 거듭해서 지체되어 왔고, 두 개의 약속된 핵발전소는 아무리 잘 해도 2005년 전까지는 작동하게 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부시는 “악의 축”이라는 수사적 표현을 더욱 힘주어 말하는데 이어 북한에 대한 모든 에너지 공급을 끊고 미국의 인도주의적인 원조를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핵 강대국 대통령인 부시가 이 5 메가와트 원자로를 놓고 무기급 우라늄을 만드는 데 쓰일 수 있을 것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이 원자로가 무엇보다도 전기가 크게 모자라는 북한에 전기를 생산하려고 설계되었음을 생각하면, 웃기는 일이다. 그것을 가지고 핵탄두를 만들려면, 기술적으로 긴 시간이 필요한데도 말이다. 또한 부시가 북한이 세계를 군사적으로 위협하고 있다는 표현은, 북한의 1년 전체 예산이 영국군보다 4배가 큰 군대를 지닌 남한 국방예산의 80%에 지나지 않고 미군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쓰고 있는 예산의 1/5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더욱 더 웃기는 일이다!


물론 제국주의는 북한에 대해, 북한의 핵폭탄 혐의나 미사일에 대해 어떤 두려움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부시는 미국의 지역적 이해관계에서 이익을 얻으려고 북한을 하나의 도깨비로 활용해야 할, 전 영역에 걸친 전략적 이유들을 갖고 있다.


남한과 대만은 모두 2차 대전이 끝난 뒤 미국이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늘리는데 필요한 주요한 기둥이었다. 지난 30년 동안 중국이 느리지만 결국에는 세계 시장에 통합되자, 제국주의는 이제 이 지역에서 힘 있는 경찰관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처지에서, 중국은 너무 큰 나라이고 따라서 어떤 조건에서든지 자국의 자원을 미국 기업들이 마음대로 처분하게 하거나 미국 기업들의 이해관계를 먼저 나서서 챙겨줄 나라가 아니다. 남한이나 대만은 미국 자본의 이해관계에 맞서기는커녕 미국과 흥정할 수 있는 위치에도 있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 제국주의는 남한의 군대를 주의 깊게 통제하고, 악랄한 독재를 일삼은 남한 정권을 여러 차례 위협했던 남한 주민을 빈틈없이 감시하면서 될 수 있는 한 단단히 남한을 움켜쥐어야 할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다. 만일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특히 남한이 금융위기를 맞고 난 뒤부터, 미 제국주의는 여러 가지 위험을 갖게 될 것이다. 남한 경제는 피폐한 북한을 흡수할 수 없기 때문에, 7천만 명에 이를 통일된 한국 주민 속에서 사회적 화약고가 자라날 것이다.


게다가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한 번 드러난 것처럼 남한에는 통일에 우호적인 흐름이 강하다. 이런 경향은 주민들 속에서 반미감정이 늘어나는 것과 함께 더욱 강해지고 있다. 반미감정은 지난해 6월 두 여중생이 미군 전차에 치어 죽자, 남한에서 미군 4만 7천 명의 철수를 요구하는 시위 물결로 증명되었다.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들에 미군이 다시 주둔하는 것을 정당화하려고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을 활용하려고 애쓰고 있다. 바로 이 때 미국이 남한에서 철수해야 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어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북한이 “위협적”이지 않다면, 미국은 자국 군대가 남한에 계속 있을 수 있는 더 좋은 구실을 찾을 수 있을까?


미국 안의 여론도 그와 같은 논리에 따라 휘둘린다. 만일 북한이 가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위협이 중대한 것이 아니라면, 미국이 지금 일본과 남한에 주둔한 10만 명의 미군 병력을 위해 해마다 500억 달러를 쓰고 있는 것을 어떤 방법으로 미국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단 말인가? 중국을 위협적인 존재라며 몰아붙일 수도 없고, 자본주의가 잘 굴러간다는 사실을 “경제 기적”으로 입증할 수도 없기 때문에, 미국의 처지에서 북한이라는 도깨비는 여전히 해야 할 노릇이 있는 것이다. 보기를 들자. 부시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북한을 장거리 핵미사일을 갖고 있는 유일한 “불량” 국가로 만들고 있다. 왜냐하면 미사일 방어 시스템에 쏟아 부은 아주 큰 액수의 국가예산지출과 아울러 군수산업체들이 커다란 이윤을 남기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북한이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제국주의자들이 자신의 실리만을 저울질하고 있을 때, 북한 민중은 경제 제재조치와 보복조치 때문에 말도 안 되는 값을 치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민중은 늘 그들이 직접적인 표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제국주의 질서의 첫 번째 희생양이기 때문이다.

  1. 이 글은 영국의 <노동자 투쟁>(Workers' Fight)이 발행하는 <계급투쟁>(Class Struggle) 48호(2003년 1~2월호)에 실렸던 글이다. 영국의 <노동자 투쟁>은 프랑스의 <노동자 투쟁>(Lutte Ouvrière, LO)이 주도하는 트로츠키주의 국제조직 <국제주의 공산주의자 연합>(Internationalist Communist Union, ICU)의 영국 지부다. -역자 주 [본문으로]
  2. 1989년 1월 23일,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북한을 방문하여 금강산 남북공동개발에 관한 의정서를 체결한다. 그러나 이 계약서는 1998년에 이르러서야 빛을 보게 된다. -역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