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비관주의를 넘어서 : 사회주의 상상력에 다시 불붙이자 본문

실천지 (2007년)/2007년 1월호

비관주의를 넘어서 : 사회주의 상상력에 다시 불붙이자

사회실천연구소 2014. 11. 7. 03:32

비관주의를 넘어서 : 사회주의 상상력에 다시 불붙이자(“Transcending Pessimism : Rekindling Socialist Imagination)[i] 

글쓴이 : 레오 파니치와 샘 긴딘(Leo Panitch and Sam Gindin) 

 

“빚도 갚았고 …… 이젠 자유로운데.” 린다 로먼이 남편 윌리가 잠들어 있는 무덤 앞에서 흐느끼며 읊조린다. 아서 밀러(Arthur Miller)가 쓴 걸작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에 나오는 마지막 대사이다. ‘반짝거리는 구두에 미소 지으며’ 물건을 팔아야 하는 세일즈맨 윌리 로먼, 그는 생활에 지치고 모아놓은 돈 한 푼 없어 공허함과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생명보험금이 그와 관계가 서먹서먹해진 아들을 ‘성공’시킬 수 있는 쌈짓돈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홀려 있곤 했다. 그러던 윌리 로먼의 자살은 미국식 자본주의 꿈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모진 경쟁이 낳은 비극의 일면을 상징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로먼의 무덤 옆에서 한 아들이 “아버지는 허무하게 돌아가신 게 아냐 ……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것은 당신이 가질 수 있는 단 하나의 꿈이었어.” 그렇기 때문에 “이 힘든 일을 계속하겠어.”라고 다짐할 때, 다른 아들은 “아버지는 당치않은 꿈을 가지고 계셨어. 하나같이 당치않았어!”라며 슬픔에 잠긴다. 마지막에 린다는 홀로 무덤을 가만히 바라본다. 죽은 윌리에게 방금 막 마지막 집세를 냈다고 말하면서 그녀는 목이 메어 운다. “이젠 빚도 없고 홀가분해졌는데 …… 빚도 갚았고 …… 이젠 자유로운데……”[ii]

 

1949, 냉전이 시작될 무렵 처음 무대에 올려 졌을 때, 이 마지막 대사는 ‘자유세계’가 내세운 자유의 애매함을 꾸짖는 것이었다. 50년이 지난 뒤, 브로드웨이 무대에 다시 올려진 『세일즈맨의 죽음』50주년 기념 공연 마지막 장면에서 린다가 “이젠 자유로운데……”라고 흐느끼며 말할 때, 그녀는 20세기 말에 아메리칸 드림에 사로잡힌 전 세계 사람들의 불안을 드러내 보이는 듯했다. 불안, ‘세계화’만큼이나 널리 퍼져 있는 불안은 어디에서나 느껴질 수 있다. 이 불안은 실제로 “이 힘든 일을 계속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그리고 자유 경쟁에 따라 규정되는 삶의 가치에 대해 회의가 늘어나면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여전히 좀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윌리 로먼의 비극을 매우 보편화시킨 것은 이제는 자본주의 꿈이 잘못된 꿈은 아닌지 의심하는 사람들까지도 자본주의를 넘어선 삶을 현실화할 방법을 찾지 못하거나, 또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시도가 단지 또 다른 악몽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람을 맥 빠지게 하는 이런 정치적 비관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진정으로 사회 변혁에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맞닥뜨리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구체적인 유토피아

 

이러한 조건 속에서 어떤 방향을 취해야 할지를 모색하는 사회주의자라면, 지난 날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문제에 부딪쳤다는 사실을 알면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떻게 “패배자를 …… 다시 외부세계에 맞서게” 할 것인가. 이는 1930년대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가 필생의 역작인 ?희망의 원리?(The Principle of Hope)[iii]를 쓰게 했던 문제였다. 그가 부딪쳐야 했던 첫 번째 장애물은 “무기력 그 자체(paralysis per se)”라고 할 수 있는 비관주의였다.

 

“…… 행복한 끝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은 거의 감언이설을 늘어놓는 사기꾼들, 결혼을 사칭하는 사기꾼들, 전형적인 허풍선이들만큼이나 세상 바꾸는 일을 훼방 놓는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비관주의는 인위적으로 조절된 낙관주의만큼이나 반동적 활동을 키워낸다. 그렇다 하더라도 낙관주의는 아무것도 믿지 않을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낙관주의는 고단하고 짧은 목숨에 영원함을 부여하지도 않고, 인류에게 클로로포름으로 처리된 묘비 같은 얼굴을 갖게 하지도 않는다. 앞으로 해볼 가치가 있는 일이 전혀 없는 죽음 같은 슬픈 배경을 세상에 제공하지도 않는다. 그 자체로 타락에 속하는데다 타락을 부추기는 비관주의와는 달리 낙관주의는 오류를 깨달을 때 일반적 목표에 대한 신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올바른 목표를 찾아내서 그 올바름을 입증하는 것이다. ……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대자본 …… 뿐만 아니라 무관심, 절망이라는 짐도 사회주의의 가장 완고한 적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자본은 고립될 것이다.[iv]

 

  블로흐의 대답은 유토피아 사상을 되살리려는 것이었다. 그는 사회주의 정치활동이 업신여겨지고 있는 세상에서도 비록 낮 꿈(daydreams)[v]일 뿐일지라도, 행복과 조화에 대한 인간의 확고한 갈망 즉, 경제적 경쟁, 사유재산, 관료제 국가를 끊임없이 바꾸어내려는 갈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블로흐가 진정한 ‘역사의 동력’이라고 보았던 ‘유토피아 지향성’은 건축, 미술, 문학, 음악, 윤리, 종교에서도 찾아 진다 : “모든 예술 작품과 모든 주요 철학은 지금도 현상 중에 있는 풍경이 펼쳐지는 유토피아로 열린 창을 가졌으며, 또 갖고 있다.” ‘공상적 사회주의’(utopian socialism)에 대한 정통 맑스주의의 전통적 기각에 대해 막대 구부리기를 하면서, 블로흐의 계획은 주로 맑스 자신이 일찍이 세상이 오랫동안 품어왔던 ‘사물에 대한 꿈’(the dream of the matter)이라고 불렀던 것을 복원시키는 것이었다. 블로흐는 “유토피아를 다룬 많은 위대한 고전들은 거의 언제나 같은 것을 가리켰다. , 모든 것을 공유하라(Omnia sint communia)”고 했음을 보여주었다. “많은 뛰어난 이데올로기 특성 말고도 이 유일한 선동적 발언에 열광하고 있다. 어쩌면 바로 이러한 까닭에 맑스보다 앞선 사람들이 쓴 정치 문헌들은 나름대로 존재 가치를 지니는지 모른다. 비록 그 책들이 전혀 선동의 가능성을 지니지 않는다 할지라도, 또한 이데올로기로 꾸며진 유토피아의 참모습이 겉으로 드러난 몽환적 갈망과 모순된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그 속에 그려진 사회는 마치 다른 사람을 부려 먹지 않고도 자신의 이익을 얻어 내듯이, 축재라는 부르주아적 동기 없이도 유지되는 사회였다.” “인류가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 뛰어넘는데” 주요 전제들 가운데 하나가 “사유재산과 이것이 낳은 계급을 폐지하는 것”임을 처음으로 세웠던 것은 바로 이런 문헌들이었다. “또 다른 전제는 국가가 개인을 지배하고, 특권계급에게 맡겨진 억압의 도구인 한, 국가를 부정하려는 일관된 의지이다.[vi]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Utopia)가 “여러 가지 잡다한 내용의 부스러기를 혼합하고 있지만, 민주주의적 공산주의의 바람직한 사회상을 가장 최초로 새롭게 묘사한 그림”이 된 것은 다음과 같은 까닭 때문이었다.

 

 

?유토피아?에서 모어는 처음으로 공적 자유와 관용이라는 뜻에서 인본적인 민주주의는 집단경제와 결부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인본적 민주주의는 관료주의, 좀 더 확실히 말하면 교권주의(clericalism) 때문에 늘 쉽게 위협당할 수 있지만 말이다. …… ?유토피아? 1부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어는 다음과 같이 노골적으로 쓰고 있다 : “사적 소유가 여전히 존재하는 곳, 모든 사람이 돈으로 모든 가치를 평가하는 곳에서는 어떤 진정하고도 복된 정치를 이행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리라. …… 그렇게 된다면 재화는 결코 공정하고 합당한 방법으로 분배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지금 온존하고 있는 소유권이 파기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행복은 결코 정착되지 않을 것이다. 소유권이 계속 존재하는 한, 더욱더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가난과 고된 노동과 근심을 지니게 되며, 이것들을 결코 떨쳐 버릴 수 없는 부담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이러한 부담을 폐지하지 않고, 소유권을 파기시키지 않은 채 약간만 완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vii]

 

 

물론 맑스가 ‘객관적 조건’을 분석하는 것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두게 된 것은 이러한 유토피아 사상이 지니고 있는 추상성 때문이었다. 블로흐는 “완전히 비현실적인 추상적 유토피아 광신주의를 …… 가라앉히고,” 사회관계의 변혁을 통해 꿈을 현실로 실현시키도록 해주는 일종의 실천적 의식을 발전시키려면 객관적 조건을 분석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역사적이고 현재적인 실질적 조건 분석’을 맑스주의의 ‘한류’라고 불렀던 것은 이데올로기와 환상을 여지없이 드러내준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맑스주의 전통의 ‘난류’ 속에 나타나는 ‘주체적 조건’과 언제나 결부되어야 했다. 블로흐는 주장하기를, “실재하는 것 자체의 발효과정은 현실에 입각한 꿈을 촉진한다 : 선행하는 요소는 현실 자체의 한 구성부분이다. 따라서 유토피아를 향한 의지는 객관에 토대한 경향과 전혀 모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경향 안에서 강화되며 정통해 있다.” 맑스주의의 최고 범주는 “열정과 냉정, 목표에 대한 자각과 주어진 현실의 분석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청년 맑스가 사람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제정신이 든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것을 요구했을 때, 그는 목표에 대한 열정을 꺾으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 첨예화시키려고 했다.[viii]

 

요즈음 우리는 사회주의라는 목표의 포기를 통해 ‘미몽에서 깨어나고 있는’ 좌파에 대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환멸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부 좌파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비관주의에 굴복했는데, 이는 정말 ‘무기력 그 자체’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훨씬 더 많은 좌파는 블로흐가 ‘폭동주의적 행동주의의 해악’이라 불렀던 것에서 사회민주주의의 ‘제3의 길’로 완전히 옮아간 것 같다. 3의 길은 효율성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처방이 사회정의와 나란히 설 수 있다는 전제를 갖고 있다. 이런 전제는 블로흐가 이데올로기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 일컬었던 것 즉, 기존 사회관계의 범위 안에서 ‘사회적 모순을 조급하게 평준화시키려는 것’의 현대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행동주의만으로 하룻밤 사이에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한 좌파들이 변혁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찾아온 손님의 키를 자신의 침대 치수에 맞추어 자르거나 늘린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처럼, 자본과 국가가 받아들일만한 정도로 변혁의 뜻을 축소시켜왔다.

 

그러나 지금 ‘제3의 길’이 실제로 막다른 한계에 부딪힌 세계정세에서 조금이라도 진전을 이루려면 사회주의라는 목표를 되살리는 일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은 더욱 또렷해지고 있다. 블로흐는 “목표를 향한 의지를 상실한다면, 아무리 이상적인 선()도 실행되지 못한 채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목표가 남아 있다면, 실현가능성이 없는 것도 이룰 수 있고, 아니면 적어도 훗날의 더 큰 실현가능성에 이바지한다.”고 말했다. 더구나 세계화의 새로움, 필연성, 진보적 성격을 포용하는 ‘제3의 길’과 같은 사고에 견주면 ‘약간의 비관주의조차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블로흐가 암시한 것처럼, “적어도 현실적인 전망을 가진 비관주의는 정확히 자본주의의 발전 속에서 은폐되어왔고, 또 계속 은폐될 소름끼치는 가능성 때문에, 오류와 재앙들 때문에 그렇게 속절없이 당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ix]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에 대한 이런 건전한 비관주의가 정말로 세기말에 증가하고 있다면, 설사 자본주의의 위기가 반복 심화되더라도 좀 더 나은 세계를 실현시킬 가능성에 대한 뿌리 깊은 비관주의도 나란히 같은 정도로 계속된다. 이런 병약한 비관주의는 이룰 것이 전혀 없다거나 심지어 자본주의만이 가능하다는 느낌에서만이 아니라, 유토피아적 비전을 실행하려는 시도가 기대에 어긋나는 결과를 빚음에 따라 생긴 두려움에서도 비롯된다. 이 두려움은 20세기의 경험은 물론 지배계급의 선전 때문에 더욱 공고해진 것이다. 공산주의 체제를 포함한 20세기의 경험에 미루어 볼 때, 이는 놀라운 것도 아니다. ?희망의 원리?에서 이미 암시된 것처럼, 공산주의 체제가 존재했던 곳에서는 ‘강력하게 유토피아로 이끌어주는 불기둥이 소멸될 정도로’ 과학과 기술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혁명적 상상력의 결핍’과 ‘총체성의 도식적이고 실용적인 변형’이 일어났다.[x] 동독에서 망명한 뒤 블로흐가 말했던 것처럼, ‘더욱 더 나쁜 것은 추상적으로 표현되어왔던 이상을 실행할 혁명적 역량이 그곳에는 없다’는 사실이 뚜렷해지자, 공산주의 체제는 ‘구체적으로 나타난 적도 없는 이상을 믿지 못하거나 심지어 가장 나쁜 방법으로 파괴시키려고’ 했다. 이것은 ‘유토피아적 목표를 뚜렷이 하고, 왜곡하거나 단념하지만 않았다면 능동적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을 공산주의 체제 내부의 ‘이행적 경향들’을 숨 막히게 했다.[xi]

 

물론 블로흐의 언급이 결과적으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데에서 정치가 할 노릇을 이론으로 만든다는 측면에서 고전적 맑스주의 유산 가운데 가장 취약한 면을 슬그머니 드러내고 있음은 틀림없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부르주아 국가의 타도’, 그리고 ‘국가의 소멸’과 같은 맑스의 핵심 개념들은 근본적 문제를 또렷이 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애매하게 했다. 20세기의 맑스주의자들은 이 유산이 지닌 한계를 거의 넘어서지 못했다.[xii] 그러나 하나의 사회-경제적 질서에서 다른 사회-경제적 질서로 이행이 달성되거나 실패하는 것은 정치의 차원에서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의 목표를 되살릴 수 있는지 여부가 사회주의 정치이론을 명확히 하고 풍부하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에 좌우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류가 아직도 자신의 잠재력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발견해낼 수 있는 행위자에 달려있다. 맑스주의의 ‘난류’가 전하는 귀중한 식견, 기대할 수 있는 지침, 풍부한 암시 등도 있지만, 동시대의 사회주의자들을 고무했던 맑스의 역사적 낙관주의는 유토피아적 꿈의 크기와 넓이, 그리고 이 꿈을 실행에 옮기는 영예를 부여받거나 또는 책임진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행위자 즉, 노동자계급 사이에 있는 단절에 대한 과소평가가 궤를 같이 한다는 점은 반드시 짚고 가야 한다. 혁명/변혁에 대해 역사적으로 고무된 맑스의 폭넓은 전망과 정치경제학에 대한 그의 상세한 비판 사이에는 분석적, 전략적 공백, 즉 노동자계급의 역량 문제를 다루지 않고서는 좁혀질 것 같지 않은 공백이 있다. 그 뒤 맑스주의자들이 때때로 이 문제를 다뤘지만 누구도 해법을 찾아내지는 못했다.[xiii] 이 문제는 또한 요즈음 나타난 사회운동 이론을 통해서도 극복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많은 새로운 사회운동들이 기존의 노동자운동을 대체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회운동들 안에서도 우리가 노동운동 조직들 속에서 목격한 보상적인 이상의 질식이 나타난다. 모든 진보적 사회운동은 조만간에 틀림없이 자본주의가 우리의 역량을 해치고, 우리의 꿈을 위축시키며, 우리의 정치를 포섭시키려는 피할 수 없는 현실에 부딪칠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을 가능성과 이어주는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어디에서 다시 한 번 숨쉴 공기와 성장할 공간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답하려면 우리는 오늘날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의 목표’를 명확히 하고, 더 나은 세상을 창조하는 우리의 잠재력이 어디에서 나올 것인지에 대한 더 분명한 의식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 글의 나머지 부분이 이러한 물음과 관계가 있지만, 그 전에 몇 가지 예비적 지침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의 목표’는 완전한 인간이 되도록 우리의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것을 중심으로 세워진다. 그 자유주의적 뿌리에서 이런 이상을 떼어놓는 것은 바로 사회주의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이 원칙을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적용되도록 넓히는데 헌신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 능력이 완전히 꽃피는 것은 개인이 사회에서 해방됨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사회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힘주어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은 언제나 정의와 자유라는 개념에 일정 부분 연결되어 있다. 정의라는 개념은 (소득이나 부의 분배와 같은) 어떤 결과에 대한 평등주의, 또는 마지막 결과가 공평하지 않을지라도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정당성(기회균등)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자유라는 개념은 대체로 외부의 자의적 권위(국가)에서부터 자유나 우리 삶의 조건을 구성하고 있는 광범위한 요소들을 결정하는 데에 참여할 자유(오늘날 자유민주주의에서처럼)로 나뉜다. 사회주의적 이상은 이와 다른 도덕적 영역을 배제하지 않지만 이것을 잠재력이라는 특정한 영역에 위치시킨다. , 자본주의가 불공평하고 비민주적인 것은 평등이나 자유에 대한 이러저러한 결함 때문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그 근저에서 일부가 다른 사람의 잠재력의 활용과 발전을 통제하기 때문에, 또 자본주의가 조장하는 경쟁은 사회를 통한 인간의 해방 역량을 뒤틀기 때문에 불공평하고 비민주적인 것이다.

 

  그리고 특히 중요한 것은 잠재력이라는 영역에서 자유와 정의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꿈꾸는 것을 넘어서게 한다는 점이다. , 이상을 변화의 가능성과 연결시킴으로써 정치적으로 실현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블로흐가 말했던 ‘구체적 유토피아’이다. 구체적 유토피아는 언제나 ‘잠재력으로서의 가능성’이라는 수준에서 영향을 미치고, 사회주의적 목표(‘해야 하는 잠재력’)를 이룰 기회를 마련하는 객관적인 모순과 행위자(‘다른 것을 하는 잠재력’)라는 주관적인 요소, 따라서 우리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킬 가능성(‘다른 것이 되는 잠재력’)을 결합시킨다.[xiv]

 

  이런 구체적 유토피아는 현 질서와 전혀 관계가 없는 새로운 질서의 청사진이 아니다. 맑스는 사회주의가 “설정되어야 하는 하나의 상태, 현실이 맞추어야 할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다만] 현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적인 운동이다.[xv]라고 말했다. 이 ‘현실적인 운동’은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의 일상 속에서 실재적인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내는데 필요한 역량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에 그 사활이 달려 있다.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은 이 책의 다른 글에서 “결국, 유일하게 믿을만한 미래상은 현재의 실패”라고 주장한다. 정말 사실이다. 그리고 현재의 실패를 나타내는 더할 나위없는 기준은 인간 잠재력의 편린을 상쇄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이다. 이는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 충분히 설명된다. 바바라 킹솔버(Barbara Kingsolver)의 소설 ?동물의 꿈?(Animal Dreams)에서 한 여인이 자신의 연인에게 묻는다 : “당신이 날 수 있을 거라고 꿈꿔본 적 없나요?” 그는 “하루 종일 호두를 깔 때는 안 되지”라고 대답한다. “정말 그렇더라도 꿈속에서 날아본 적도 없나요?”라고 그녀가 끈질기게 대답을 요구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 “실제 삶 속에서 곧 날을 것 같을 때에만…. 당신의 꿈, 당신이 바라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당신의 삶과 떨어지지 않는 거야. 꿈은 바로 삶에서 싹트는 거야.[xvi] 

 

 

비현실적 유토피아

 

  오늘날 좌파가 ‘대안’을 제시하는 것에 마음을 쏟지 않는다는 말을 곧잘 듣지만 유토피아의 목표를 다시 생각하고 다시 세워보려는 진보적 지식인들의 시도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대안의 제도적 내용은 사회민주주의를 넘어서고 있는 반면에, 우리시대에 알맞은 새로운 유토피아를 주창하는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처럼 패배주의를, 즉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실용주의를 담고 있다. 이들은 이러한 유토피아가 ‘현실성을 갖’으려면 국가에 대한 민주주의적 기대 와/또는 경제적 변화의 규모가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는 블로흐가 ‘추상적 유토피아’라고 언급했던 것이다 : 세상은 너무 초라해서 유토피아가 제공하는 원대한 약속을 이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유토피아에 이르게 하는 정치를 꾸짖고 업신여긴다. 현대사상의 각기 다른 흐름에 영향을 받은 뛰어난 학자들이 작년에 펴낸 세 권의 책을 검토해보면, 오늘날 많은 유토피아적 사고의 정신적 타락과 왜 우리 앞에 놓인 진정한 도전이 영감과 전망을 제공하는 유토피아의 기능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넓히는 것이어야 하는지를 좀 더 뚜렷이 보여준다.

 

  ?국가처럼 보기 : 인간의 조건을 향상시키려는 계획들은 어떻게 실패했는가?(Seeing Like a State : How Certain Schemes to Improve Human Condition Have Failed)[xvii]에서 제임스 스콧(James C. Scott)의 주된 관심사는 소비에트의 집산화와 탄자니아의 우자마(Ujamaa) 협동농업마을(탄자니아의 초대 대통령인 줄리어스 니에레레가 탄자니아의 국가적 목표로 ‘사회주의와 자립’을 설정하고 곳곳에 흩어져 있던 농민들을 협동농업마을 즉, 우자마촌 단위로 모여 살게 하는 조치를 취했다. 우자마(Ujamaa)라는 말은 스와힐리어로 ‘가족애’ 또는 ‘형제애’를 의미하는데, 이는 아프리카 전통사회에 자생적으로 뿌리내리고 있던 가치 - 공동체사회 내의 가족애와 형제애, 집단주의적 삶 - 를 사회주의와 접목시킴으로써 아프리카인들의 정서에 맞는 사회주의를 꽃피우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 옮긴이)로 집약되는 ‘강대국이 뒷받침한 20세기의 재난’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담고 있는 스콧은 유토피아적 이상을 해방과 자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정교하게 조율된 사회통제에 대한 열망’이라는 부정적 관점에서 규정한다. 이러한 사회통제는 ‘기존 사회를 포괄적으로 비판하고 변화시킬 권한을 대중에게서 위임받아 정권을 장악한 … 진보적이고 때때로 혁명적인 엘리트’의 과업으로 추진된다. 이들 엘리트는 사회를 ‘기획’하려고 국가가 채택하는 ‘실용주의적 단순화’를 편들면서 ‘인간 창조성의 원천인 복합적이고 다양하며 실제적인 국지적 지식을 억눌렀다.’ ‘미래를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크로포트킨의 잘 알려진 선언을 따다 쓰면서 스콧은 변화를 위한 전략은 이제 선택에 따라야 할뿐만 아니라 ‘쉽게 고쳐질 수 있는’ 개입과 같은 ‘평범한 조치를 취하는 것’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xviii]

 

  이런 감각적 접근은 ‘피할 수 없는 미래의 우연성과 불확실성’에 대한 불충분한 인식이라는 전제와 ‘보통 사람들의 능력, 이해력과 경험에 대한 확신’에서 시작한다. 동시에 그는 자세하고 지나치게 합리주의적(super-rationalist)인 청사진을 거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맑스가 ‘미래의 철저한 우연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깔보고 있기 때문에 추상적 유토피아라고 비판한 맑스 자신을 떠올리게 할 뿐이다. 이 때문에 맑스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넘어서는 과정에서 해방될 수도 있는 인간의 창조성과 독창성으로서의 잠재력을 위축시킬지도 모르는 계획 세우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무심코 스콧은 “이상주의적 열망 자체가 위험한 것은 아니다”라고 인정한다(그는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말을 만족스러운 듯 인용한다 : “유토피아가 포함되지 않은 세계의 지도는 쳐다 볼 가치조차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류가 끊임없이 도달하고 있는 한 나라를 빼먹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맑스주의를 포함한) 유토피아 사상의 ‘난류’를 매우 제한적으로 인식, 평가하고 있다는 점은 틀림없다. 따라서 그가 비록 룩셈부르크와 콜론타이를 레닌에 대치시키고, 크로포트킨과 바쿠닌 같은 고전적 무정부주의 저자들에게 빚지고 있음을 인정할지라도 사회변혁에 대한 그 자신의 개념은 이들의 혁명적 기상과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다.

 

  지난 세기 사회주의의 실패에 대한 이런 너무도 진부한 반응이 지닌 문제점은 지구적 자본주의(global capitalism)에 대한 전략과 전망 모두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스콧 자신은 지구적 자본주의를 오늘날 ‘동질화를 위한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지나가는 말로는 효율성, 생산성, 비교우위, 기타 등등을 대표하여 사회를 무자비하게 개조하는 지구적 자본주의를 전혀 평가할 수 없다. 스콧은 결코 ‘자유롭지’ 않은 자본주의 시장은 ‘사회관계의 더 광범한 체계’에 좌우되는 ‘협력의 제도화된 형식 체계’라고 인정하지만 그의 ‘어물어물 넘기는 수사’와 ‘횡설수설하는 점진주의’로의 복귀는 그러한 사회관계의 체계를 넘어서려는 더 광범위한 전망과 전략을 제공해주지 못한다.[xix] 그는 ‘사적 부문’을 이질적이고 사회적으로 해로운 괴물로 보기보다는 유토피아의 꿈을 가진 정치지도자들의 월권행위에 대한 일종의 온순한 견제로 간주하는 것 같다.

 

  우리가 단지 푸코주의자의 감시와 베버주의자의 관료적 합리성의 관점에서만 국가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아무런 발전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스콧은 특정한 제도들, 특히 ‘여러 기능을 갖고 있고, 유연하고, 여러 가지 모습을 하고 있으며, 융통성 있는’ 제도들의 긍정적 역할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역사를 관통하여 살아남고 적응해온 국지적 제도들(‘가족, 소규모 공동체, 소규모 농장, 특정 업무의 가족회사’) 밖에는 상상을 못한다. 그는 이것들을 꽤 낭만적으로 그린다. 올바른 국가에 대한 그의 개념은 전적으로 ‘소극적 자유’의 관점에서 정의된다. 국가의 한계를 넘는 활동과 국가 자체에 대한 저항의 여지를 허용하는, 따라서 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어떤 경우에는 국지적 차이와 다양성의 옹호자가 될지도 모르는’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바로 그것이다. 사회공학에 반대하고 실제적인 국지적 인식을 지지하는 그의 주장이 힐러리 웨인라이트(Hilary Wainwright)의 눈길이 쏠리는 책 ?신좌파의 논거?(Arguments for a New Left)[xx]를 되풀이한 것이라 하더라도(그러나 그는 이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녀와 달리, 그는 우리 시대의 페미니즘, 환경보호주의, 노동, 사회주의 의식과 제도적 실천들의 뜻을 거의 설명하지 못한다. 이것들은 더 광범한 사회관계를 바꾸려는 전망에 따라 추진되었으며, 이것들을 정당, 노동조합, 지역사회, 국가와 연계시키려고 애썼던 실제적인 국지적 인식을 높이 평가하고 발전시켜온 것이다. 이를 낭만적으로 그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들을 업신여기는 것은 더 나은 세상을 실현시킬 수도 있는 ‘현실의 과정에서 발효하는’ 더 광범한 세력들의 지적 이바지를 가로막는 것이다.

 

  유토피아의 열망을 되살리려는 좀 더 적극적인 접근은 에릭 올린 라이트(Eric Olin Wright)가 편집해서 베르소(Verso) 출판사에서 발간된 <현실적 유토피아 프로젝트>라는 기획으로 발간된 책들을 들 수 있다. 이 기획서의 목표는 ‘억압을 줄일 근본적 사회변혁을 위한 정치적 의지를 창출하는 작업의 일환으로서, 억압이 없는 사회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무엇을 고려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기르고, … 사회변혁을 위한 불충분한 조건이 마구 뒤섞여 있는 세상에서 우리의 실천적 임무를 알려줄 수 있는 유토피아의 제도를 설계하는 것이다.[xxi] 이 시리즈의 가장 최근 저작인 ?다시 쓰는 평등주의 : 공동체, 국가, 시장의 새로운 규칙들?(Recasting Egalitarianism : New Rules for Communities, States and Markets)에서 보울스(Samuel Bowles)와 긴티스(Herbert Gintis)는 자신들이 생산성 향상에 대한 현실 세계의 필요라고 생각한 것과 고정자산의 급진적 재분배로 표현되는 경제의 민주화를 연결 지어 설명한다. 이것은 공급 측면을 중시하는 경제학의 영향을 받은 유토피아이다.

 

  보울스와 긴티스는 스콧처럼 국가는 결코 실질적으로 민주화될 수 없다고 확신한다. 이들은 기업의 경영자가 민주주의적 책임을 따르게 될 것이라고 서슴없이 가정하는 반면에, ‘정부의 결정에 대한 시민의 책임에는 많은 피할 수 없는 장애가 있음’을 힘주어 강조한다. 따라서 이들은 ‘국가의 관리자와 공무원들은 평등주의적 시민이 자신들에게 맡긴 일을 충실히 수행할 것이라는 가정’을 거부한다.[xxii] 반면에 이들은 다시 스콧처럼, 지역사회 ― 가족, 이웃사회, 작업장 ― 수준에서는 사람들이 경제적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구조적으로 결정된 개인의 동기와 승인’이라는 맥락 안에서 상호이익과 신뢰(비록 이타(利他)주의와 애정은 아닐지라도)를 보장받으려고 기꺼이 서로의 행동을 감시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정적인 것은 국지적 민주주의의 내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개인의 물질적 자기 이해에 의해 좌우되는 시장에서의 공정거래 같은 상호이익이다. 따라서 이들이 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에게 고정자산을 재분배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교육 바우처 제도(school vouchers : 학교의 수업료 대신에 세금의 일부인 공적 자금을 학부모에게 증서로 지급하여 저소득층 자녀의 교육을 지원하는 제도 - 옮긴이)와 사적 주택소유권을 옹호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보울스와 긴티스는 경제의 효율성을 위해서는 시장 경쟁이 필요하다는 원칙을 받아들이지만 자본의 불평등한 분배가 노동규율의 문란과 노력 부족에 부딪쳐서 근로 감독과 안전에 대해 민간부문에 비용을 떠맡김으로써 생산성을 저해한다고 주장한다. 기업들 사이에 ‘시장경쟁이라는 유용한 규율 효과’가 유지됨과 동시에 노동자들이 자신이 일하고 있는 기업의 고정자산을 소유한다면, ‘중노동, 생산설비의 보수, 위험 감수 등과 같은 높은 수준의 생산성을 위한 결정적인 행위들’이 전부 다 나타나게 될 것이다. 종래의 재분배 정책은 모든 정책들이 ‘해당 경제의 경쟁적 위치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되는 오늘날의 세계화 시대에 뒤진 것이므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해당 경제의 경쟁적 위치를 강화’시키기 위해 소유권을 재분배하여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보울스와 긴티스는 ‘정부의 명령’에 의해 예외 없이 지시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 말고는 자신들이 상상하는 고정자산의 재분배가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 분명히 한 적이 없다. 이들은 일종의 연기금 사회주의 개념을 생각하고 있거나, 은행이 비싸지 않은 이자율로 자신의 회사를 살 돈을 노동자에게 빌려주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또한 은행이 노동자 소유가 될 것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지만 여하튼 ‘혁신적인 민간 기업가역을 맡기에 충분한 여지’가 있다고 본다. 여기에는 ‘투기자본’에 바탕을 둔 기업가도 포함된다.[xxiii]

 

  이 계획의 주요 취지는 연대보다는 오히려 경쟁이 노동자계급 자신의 목표, 다시 말하면, 주요한 구조상의 특징임을 확실하게 하려는 것이다. 경쟁이라는 규율이 효과적이려면 노동자들 사이에서 부와 소득의 적지 않은 불평등이 반드시 지속되어야 한다. 또한 위험 감수와 경쟁에 따르는 도산과 해고의 영향을 받을 노동자들이 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소규모 자산을 가진 초라한 회사와는 달리 노동자들이 제너럴모터스를 ‘소유’하는 것에 입각한 원래부터 임의적인 기본재산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할 것이다.[xxiv] 비록 보울스와 긴티스가 시장사회주의에 대한 1980년대의 논쟁에 자신들의 모델을 붙박아 두지는 않더라도 ‘현실성을 갖으려는’ 이들의 시도는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너무 많이 받아들인 결과, ‘그럴듯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결코 유토피아는 아닌 것 같다.[xxv] 1980년대의 논쟁에 이바지 많은 비판은 시장 관계가 부차적이고 사회적으로 무시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는 민주주의적 경제제도를 상상해보는 것에 대단히 창의적이었다. 특히 각 기업 안에서 분업을 줄이는 메커니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들이 그랬다.[xxvi] 그러나 보울스와 긴티스는 노동자 소유의 기업에서 실질적 민주주의의 실제적 요건을 너무 철저히 규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xxvii] 왜냐하면 이들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경쟁적 시장이라는 외적 강제와 노동자 소유자들이 서로를 열심히 일하도록 압박하는 것에서 생기며, 주요한 목표를 도출할 내적 강박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이 암시하는 주요한 목표는 발전된 현재의 자본주의 구조가 달성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큰 생산성과 효율성이다.

 

  보울스와 긴티스는 사람들은 주로 개인주의적 관심이 아니라 집단적 관심에 의해 고무된다는 전망에 넌더리를 낸다. 이들은 ‘지나치게 사회화된 의사 결정자들’의 가정에 근거한 평등주의적 계획은 ‘관련 행위자들의 동기를 유발하는 구조’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평등주의자가 탐욕적 윤리 규범을 바꾸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순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이들의 대답은 낯익은, 반동적인 것이다. 이들은 이 탐욕적 윤리 규범이 ‘유전자와 문화의 일정한 결합’에 근거한 ‘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xxviii] 이 때문에 이들은 당치않게도 장시간에 걸쳐 뿌리내린 사회정의와 상호이익 개념을 조롱하는 사람들의 분노라는 견지에서 혁명과 반란을 설명한 베링턴 무어(Barrington Moore)에 호감을 표한다.[xxix] 그러나 보울스와 긴티스는 사람들이 자본주의적 가치체계에 반란을 일으키라고 권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노동자들에게 주주가 될 것을 권하고 있다.[xxx]

 

  로베르토 웅거(Roberto Unger)의 ‘반()숙명론적’ 사회이론 ― 최근에 그의 책 ?실현된 민주주의 : 진보적 대안?(Democracy Realized : The Progressive Alternative)에서 강령의 형태로 제시되었다 ― 은 우리가 ‘미래를 설계함에 있어 현재에 갇혀 있다’는 보울스와 긴티스의 언명에 해독제를 제공하는 것 같다. 지난 20여 년에 걸쳐 자신이 제안해온 과제를 되풀이하면서 웅거는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의 상황 속에 있는 것보다 많은 것들이 늘 우리 안에 있다. 상황은 제한적이다. 이에 비해 우리는 제한적이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상황이 권력을 초월하는데 더 도움이 되는 제도적이고 문화적인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환경과 인간으로서의 존재 사이의 이러한 불균형을 줄이고 싶어 한다. 이러한 상황은 자체적 수정을 초래하는 바로 그때, 저항을 위한 우리의 역량과 힘을 강화시킬 것이다.[xxxi]

 

  웅거의 저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의 전망을 지닌 급진적 민주주의를 가장 잘 진척시킬 일종의 국가의 재구성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그가 1987년에 ?그릇된 필요?(False Necessity)에서 지적한 것처럼, “자유와 우애보다 평등을 더 중히 여기는 사람을 좌파로 이해하는 것은 좌파가 맡고 있는 임무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그에게는 이것이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의 재분배 강령을 넘어설 것과 ‘실제적 역량의 [일반적인] 발전 조건을 용이하게 하는데 동시에 기여하는 연대의 비전’을 가질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웅거가 판단한 바, 지난 세기 동안 사회민주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점진주의가 아니라 국가 자체의 제도적 뼈대를 그냥 놔두는 동시에 정책 생산에서도 한계를 보인 개량주의였다. 다른 타입의 국가는 오직 “억압받고 가난하고 분노한 이들의 투쟁 조직”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 [그러나] 이 부문들을 동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들은 여전히 동원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들과 그 지도자들은 일과성의 대중동원 경험을 다소 평범한 사회적 일상 속에 항구화시킬 수 있는 경제와 정치 제도를 수립하기 위해 위기, 혁명, 급진적 열정과 같은 유리한 환경을 이용해야 한다.[xxxii]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국가는 스스로를 민주주의적 실험의 부단한 과정에 있다고 생각해야 하며, ‘대중의 참여 증대에 찬성하는’ 새로운 정부 부서들을 키워야 한다. 또한 조직되지 않은, 불리한 조건에 놓인 사람들의 조직화를 진척시킬 정치적 정당성과 실제적 역량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포괄적이고 내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이런 조직들을 옹호할 국가의 개입을 고려하는 공법체계 하에서 운영되어야 하며 동시에 ‘정부의 통제나 감독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어야 한다.[xxxiii]

 

  그런데 ?실현된 민주주의?에서 묘사된 변혁 선언은 여전히 재분배의 개혁보다는 제도적 개혁 전략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정치적 동원이 낮은 수준의 사회는 헌법에 준한 견제와 균형, 의회 정치의 규칙과 선거 관행들을 제거하고, 직접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국가에 대한 대중의 정치적 참여를 고무하며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민주주의적 실험을 촉진하는’ 합법적 개혁을 도입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심화하고 정치적 변화를 앞당기려고 한다.[xxxiv]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민주주의 전략에 어울리는 색다른 국가를 개념화하려는 웅거의 이바지는 불행히도 이 전략에 따른 경제 강령을 통해 꽤 희석된다. 이 경제 강령은 놀랄 만큼 진부한, 그래서 지금은 얼마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유연 전문화’ 개념에 근거한 경제성장 전략을 주창한다. 웅거의 유토피아 전망은 확실히 포스트-포드주의적이다. 따라서 그가 특히 질색하는 것은 용역노동자와 하청노동자의 고용에 대한 자본집약적 산업 노동조합원들의 방어적 반응이다. 이런 경향에서 스스로를 지키려는 수단으로서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노동조합원들에게 자신이 경제성장의 ‘전위’라고 생각하는 ‘작고 새로운’ 기업들에 자금을 공급하려고 벤처 캐피탈에 대한 분산적 이용 방안을 지지하는 하청노동자와 ‘제휴’할 것을 촉구한다. ‘시장경제의 분산적 활력’을 유지하면서도 투자 결정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보장한다는 생각에 대한 실제적인 제도적 동의를 구하기가 어렵게 되자, 웅거는 이제 자본을 도용하거나 전환하려는 시도보다는 ‘더 손쉬운’ 선택을 촉구하고 있으며, 결국 이런 전위 기업들에 자금을 공급하기 위하여 단지 철저한 연기금의 공적 동원에 그칠 뿐이다

 

  그의 초기 저작에서도 나타나는 유연 생산, 첨단기술을 이용한 생산의 이점을 누리기 위해 결합함으로써 숙련 노동자, 경영자, 기술자와 소규모 기업가들이 ‘생산의 전위’로서 제휴한다는 생각은 문제가 많았다. 그렇지만 자금 조달의 사회화라는 가정 말고도 그 효과에 대한 일반적 추상성 때문에 이런 측면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았다. ‘구축된 체계’로서의 자금 조달 방식과 기업의 법적 권한은 대부분 그대로 둔 그의 좀 더 최근 논문은 블로흐가 모순들의 미숙한 조화라고 말했던 것을 뚜렷하게 예증한다. 웅거는 ‘모든 노동자, 구직자, 소규모 자영업자를 자동적으로 노동조합에 가입시키는’ 합법적 개혁은 그 자체로 노동자와 경영자 사이의 분쟁에 대한 ‘성장 친화적’ 절제의 기반을 놓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협업과 기술혁신’이 좌우하는 ‘동반자적 원칙’에 따라 협력할 것이기 때문이다.[xxxv] 여기서 그 실제적 역량을 발현하려는 억압받고 가난하고 분노한 사람들의 투쟁 조직을 강조한 그의 연대에 대한 초기의 전망은 눈에 띄지 않는다.

 

  정말로 웅거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과거 자신의 정치적 지반인 조직 노동자를 보호하려는’ 것에는 무관심한 사회민주주의가 이미 오래 전부터 블레어주의 신봉자의 ‘제3의 길’을 지지해왔다는 사실을 거의 주목하지 않는 것 같다. 3의 길은 대의제적, 행정적 (선거는 아니라 하더라도) 절차에 의해 제도화된 보수주의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진보적’ 경쟁 전략을 통해 경제적 수준에서 국가와 시장 사이의 무익한 논쟁을 넘어서자는 그의 제안과도 매우 비슷해 보인다. 웅거는 (비록 짧은 시사 논평일 뿐이기는 하나) 자신이 ‘유연 전문화와 노동자의 생산계획 참여는 …… 경영 일정에 포섭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로 알고 있음을 드러낸다.[xxxvi] 그러나 그의 제안들은 ‘자본이 자신이 마음에 들어 하는 곳으로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는’ 세상에서 협력에 대한 요구와 유연성에 대한 노동자의 저항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제휴, 기술혁신과 협력이라는 용어로 이 모순들을 은폐한다.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다. 브라질 같은 제3세계 경제에 적합한 경쟁을 통해 성장을 확보하려는 그의 관심은 이미 부유한 미국 경제의 경쟁력을 더 높이려는 보울스와 긴티스의 관심보다는 오히려 덜 저속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포스트-포드주의의 ‘진보적 경쟁’에 대한 약속과 설명되지는 않았지만 (제국주의적 관계에 의해 구조화되었지만 웅거는 거의 주목하지 않는 것 같은) 국제적 자본주의 안에서 한 나라의 경제와 사회를 수출 지향적 전략에 종속시키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것은 문제를 잘 알고 있는 웅거 같은 사람에게도 미래를 설계하는데 현재의 덫을 피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보여준다. 구조적 개혁 계획이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경쟁은 하나의 제약조건이다. 그러나 대안을 제기하는 진짜 목적은 단지 경쟁을 통해서만 우리의 생산능력의 발전을 말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우리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함이다. 가난한 나라에게도, 그리고 진보적 경쟁력을 갖춘 나라에게도 경쟁을 목표라고 여기는 것은 계획에 착수하기도 전에 포기하는 것이다.

 

  매우 많은 현대의 문학작품들은 (테리 이글턴이 지적한 것처럼) ‘자기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없는’ 것 같고, (블로흐가 지적한 것처럼) ‘획득에 대한 부르주아적 충동의 자극 없이’ 계속 유지될 수 있는 사회질서를 계획함에 있어 맑스주의 이전의 몇몇 유토피아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이것은 오늘날 유토피아적 상상력의 한계가 처한 우울한 현실을 말해준다. 이는 행위자(agency)의 문제에 정면으로 대처하지 않았다는 것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행위자의 문제는 스콧으로 하여금 국가 문제를 피해 가게 한다. 보울스와 긴티스는 최종적인 경제적 결정이 여전히 경쟁적 시장에 의해 결정된다면, 노동자들이 고정자산에 대한 통제 투쟁에 전념할 이유를 굳이 말할 것까지도 없다고 한다. 그리고 독자적인 노동자계급의 계획을 수출 지향적 ‘전위’ 기업들과의 계급 간 제휴로 둘둘 마는 웅거의 경우에는 ‘억압받고 가난하고 분노한 이들’의 투쟁 조직의 가능성 자체를 해친다. 이런 점에서 심사숙고한 변혁이 실제로는 결코 변혁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면, 행위자에 대한 많은 걱정은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유토피아와 역량 : 노동과 ‘비()노동’

 

  앞의 저자들과 달리, 그리고 사회주의적 상상력을 되살리는데서 정말 철저하게 생각해야 하는 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데서 훨씬 더 쓸모 있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앙드레 고르즈(André Gorz)의 저작이다. 그는 30년여 전에 ‘비()개량주의적 개혁’ 즉, ‘자본주의적 욕구, 판단기준, 논리적 근거에 자신의 정당성과 존재할 권리의 근거를 두지 않는 전략’[xxxvii]이라는 기본적 원칙에서 출발했다. 평등주의 기획에서 노동시간의 재분배를 가장 먼저 생각하게 한 그의 이바지처럼, 자본주의 발전의 생태학적 모순을 생각하면 생산성주의에 대한 그의 생태-사회주의적 비판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의 접근방식에서 특히 뜻있는 것은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생산성주의의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고, 따라서 모든 변혁 전략의 문제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인간적 잠재력을 힘껏 계발하는 것을 막아내는 방식에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 이데올로기, 정치, 소비자 문화뿐만 아니라 노동자라는 사실 그 자체에 의해서도 봉쇄되고 있다는 것이다. 맑스에 대한 고르즈의 비판이 ‘경제 이성’[xxxviii]에 내재한 생산성주의를 넘어서려는 맑스주의적 사고의 무능력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맑스가 노동자계급에게 부여한 잠재적 변혁능력을 지적한 것이라는 점은 눈여겨 볼만하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앞에서 맑스와 후대의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유토피아적 꿈의 크기와 넓이, 그리고 자본주의에 의해 완전히 가로막혀 있는 노동자계급의 역량 사이의 극복되어야만 했던 단절이 과소평가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노동’과 ‘노동자’에 대해 왜 사회주의 정치는 이런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가?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노동은 엄밀히 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생각해낸 다음, 그것을 현실로 이루어내는 인간 잠재력의 대역이다. 노동을 통해 우리의 물질적 현실을 창조하는 능력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노동은 사회 변혁의 원동력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는 노동을 역사적 용어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노동의 조직화는 사회체제의 모순을 규정하고 노동자계급 정치의 근거를 제공한다. 노동의 이러한 존재론적, 역사적, 사회학적 특성에 입각하여 매우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의 노동능력을 포기하고 있지만, 노동자계급은 전 인류의 해방투쟁을 전략적으로 지도할 위치에 있다고 결론지었던 것이다.

 

  자본주의가 갖가지 사람들을 직접적인 물리적 접촉으로 이끄는 곳이 바로 작업장이다. 그리고 여기 또는 적어도 이런 작업장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사회에서 사람들은 어느 정도 독자적인 이데올로기와 수단을 통해 자신의 분열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지속적인 조직을 처음으로 만든다. 노동자들은 생산과 이윤의 안정성에 영향을 미치는 잠재력을 키우고, 자신의 집단적 힘을 작업장에서 때때로 시험해봄으로써 대항력의 수준을 정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이 정확히 대처해야 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이런 토대에 입각하여 맑스가 자본주의의 폐지를 위한 조건이라고 주장했던 ‘[자본주의의] 전면적 발전’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실제로 발전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작업장은 노동자들의 잠재력과 집단적 희망을 산산조각낼 수도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단지 반신불수적 발전에 그칠 …… 독특한 생활환경” 자체에 의해 운명 지워진 것처럼 보인다.[xxxix] 그리고 자본주의의 논리가 노동자들로 하여금 고용주와 국가에 직접 충돌하게 하더라도, 또 이러한 투쟁이 새로운 욕구를 낳게 하더라도, 이런 욕구가 실용적 개량주의가 아니라 대안적 사회에 대한 비전으로 귀착할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xl] 이는 작업장의 범위를 넘어서는 동맹의 필요성과 국가라는 더 큰 문제에 대처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정치적 강조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런 문제 역시 중요하지만 말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본주의하에서 노동뿐만 아니라, ()노동의 특성에 부과된 장벽에 있다.

 

  경제 안에서 자본가의 능동적 역할 즉, 생산, 과학의 적용, 기술혁신의 도입, 온갖 지역과 매우 다양한 작업장을 넘나드는 경제적 협력 등에 대한 노동자의 의존이라는 상황에서 키우는 역량의 한계를 고려하면, 문제는 더욱 분명해진다. 자본가는 단지 특권만 가진 것이 아니라 필요한 존재이기도 하다. 경제 지도자로서 갖는 이들의 권한은 권한 없이도 할 수 있는 노동자의 불확실한 역량과 대조된다. 상황이 작업장이기만 하다면, 적어도 이미 그 일상적 운용에 익숙해 있는 노동자들로 작업장을 운영하려는 계획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작업장을 연결하고, 투입량과 산출량을 조정하며, 역동적인 변화를 강제하는 경쟁의 역할을 검토하자마자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작업장을 포함하여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난제와 대결해야 한다.

 

  물론 우리의 목표가 단순히 자본주의의 능력을 따라잡는 것이었다면 즉, 자본주의 경제성장의 성격을 문제 삼지 않고 단지 그것을 모방하려고만 했다면, 조금 더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기획은 자본주의를 ‘따라잡고 이어받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본주의에서 접하고 있는 특정한 능력과 제도는 특정한 사회관계 안에서 역사적으로 발전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일부는 적합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들을 단순히 일련의 새로운 관계와 목표에 끼워 맞추기 위해 ‘민주화’하려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본을 넘어서려면 기존의 능력을 일신하고 새로운 능력을 계발하며, 기존의 제도를 바꾸고 역사적으로 비길 바 없는 제도를 고안할 필요가 있다.

 

  경쟁은 언젠가 실시할 노동자 통제 문제를 단지 복잡하게 할 뿐만 아니라 특히 실시 단계에서 요구되는 정치적 능력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축적에 대한 장벽을 서서히 침식하고, 축적 논리에 대한 어떠한 저항도 용납지 않는 경쟁적 과정은 경제와 사회생활 전반에 대한 지속적인 구조조정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자본에게 이 과정은 계급적 단결을 깨뜨리지 않고서도 일어날 수 있다. 자본은 여전히 축적 계획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은 필요한 제도적 혁신을 지속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역량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자본의 응집력 보존을 지원하는 국가를 추가해야 한다. 게다가 자본은 지역적, 전국적 네트워크의 연속성과 엘리트 집단을 포함한 자본의 광범위한 이동성을 결합시킬 수 있는 기술적, 행정적 역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단적 역량을 키우기 위해 사회적, 지리적, 세대 간 연속성에 의지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자본주의적 경쟁과 구조조정은 많은 경우 계급적 단결과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다.[xli]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으로 독자적인 노동자계급의 정체성과 문화를 보존하거나 세움에 있어 자본주의의 역동성에 너무 많이 의지해서는 안 된다. 이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굴하지 않을 때에만 생길 수 있다.

 

  만일 실제 노동시간, 집중되지 않은 힘, 의존성, 경제적 복잡성이 탈()자본주의적 비전을 발전시키려는 노동자계급을 힘겹게 한다면, 고르즈가 제안하는 것처럼 여가, 사생활, 가정 그리고 지역사회의 영역에서는 이것이 가능할 것인가?

 

  그럴 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노동자계급이여 안녕?(Farewell to the Working Class) 말미에서 제시하는 고르즈의 가슴 설레는 유토피아는 여전히 맑스의 평등하고 근본적인 민주주의적 비전에 미치지 못한다. 이는 그가 비록 상당히 축소되기는 했지만 생산의 소외된 영역과 관료주의적 계획과 행정이라는 또 다른 소외된 영역의 체계적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하버마스주의자를 흉내 내기 때문이며, 프랑스라는 부유한 한 나라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생산력이 사회주의를 결정짓는다는 정설을 설득력 있게 비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은 경제 강국의 생산력이 노동해방을 지탱할 것이라는 가정에 의존하고 있다. , 그의 유토피아에는 걱정할 심각한 경제적 문제가 없다. 그러나 노동과 비()노동이 시간과 공간에 의해 따로따로 구획되어 있는 한, 전체 속에서 이런 구획을 어떻게 통합시킬 것인지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자본주의의 수많은 필요는 임금노동의 감소를 위한 물질적 토대를 놓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비()노동 영역에서조차도 특정한 필요를 제한하고 구체화하며 창출한다. 노동시간과 노동할 장소는 여가시간을 얼마나 가질지, 언제 누릴지, 그리고 육체적, 정신적 회복에 걸리는 최소 필요시간이 얼마나 될지 등을 결정한다. 자본주의에서 ‘여가’는 말 그대로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재창출하는 것이다.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가 지적했던 것처럼, 필수적이고 보상적인 소비라고 약속되지 않는 여가라면, 일을 잠깐 쉬는 것으로 바뀌어버리기 쉽다.[xlii] 학교 휴식시간이나 작업 중간의 휴식시간처럼, 여가는 잠시의 휴식이 너무 짧다는 사실에 의해 평가 절하된다. 결국 자유시간은 생각한 만큼 자유롭지 않은 것임이 드러난다. ()노동 시간이 해방적 역할을 하려면, ()노동과 노동 사이의 장벽을 넘어서는 더 광범위한 개인적, 사회적 기획의 일부가 되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단지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만이 아니라 노동과 비()노동 모두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노동 시간이 존재하는 다양한 물리적 공간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이 가정이다. 가정 안에서 성(), 가부장적 분업은 자본주의 이전에 나타난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외부세계와 새롭게 연결된 가정의 본질은 남성과 여성, 노동과 가정생활, 노동과 여가 사이의 관계에 독특한 특징을 부과했다. 그 결과, 여성과 이들의 잠재력, 남성과 ‘전인적’ 인간을 필요로 한다는 이들의 의식 모두에 독특한 특징이 부과되었다. 자본주의 하에서도 가사노동은 계속해서 가정의 존속과 재생산에 필요한 사용가치를 직접 생산했다. 이 때문에 외부적 승인이나 시장적 유인들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생필품을 사기 위한 임금이 필요해지자마자, 일자리를 얻고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은 임금노동과 임금소득자 가정 안에서 특별한 중요성과 지위를 갖게 되었다. 말하자면 가정이 임금노동에 의존하게 됨으로써 가정의 기능, 계획, 분위기, 심지어 그 위치까지도 임금소득자의 필요에 종속되었다. 부수적으로 여성은 보조적, 부차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여성이 빵을 만들더라도 남성의 임금에서 재료비가 나가기 때문에 남성은 ‘돈을 벌어오는 사람’(breadwinner)이라고 생각되었다.

 

  여성의 선택, 능력, 잠재력에 미친 부정적 영향은 상술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문제는 성 평등에 대한 것 이상으로 확대된다. 대체로 남성이 이를 테면 자녀 돌보기, 학교일과에 따른 일상의 조정, 응급의료에 대처할 일상적이고 돌발적인 의무, 이웃의 범죄와 지역사회의 휴식공간의 부족뿐만 아니라 오염이 가족의 건강에 끼칠 영향에 대한 대응 등과 같은 가정과 지역사회의 책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또한 남성 자신의 의식을 불가피하게 제한할 것이다. 단순한 노동자 이상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계급 남성의 보다 광범위한 일상적 참여와 실망 없이 이들이 사회주의 의식의 중심에 있는 자신과 사회에 대한 장래 희망을 키우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이들의 사회주의 의식은 완전한 인간 존재로서의 자신의 잠재력과 사회주의적 꿈을 뒷받침할 사회구조적 요구에 대한 확신이다.

 

  여성운동은 자신감, 능력, 의식을 계발하려는 전통적인 사회주의적 접근방식에 결정적인 것을 더하고 있다. 여성운동은 남성-지배적 정치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변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돕고, ‘보통’ 사람들과 접촉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각별한 감수성을 보여주었다. 여성운동은 국지적인 문제를 과소평가하지 않으면서 대규모 집회에 개입하기보다는 소규모의 토론, 경쟁적이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인 교환, 추상적이기보다는 구체적인 분석에 집중하고 있다. 따라서 여성운동은 노동을 노동자계급 생활의 전부로 간주하지 않는다. , ‘자신이 직접 하는 정치를 만들고 있다.’ 작업장을 넘어서고 있는 이와 같은 정치는 또한 가정이 개인을 넘어서 지역사회와 세대관계에까지 관련하게 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사회주의에 대한 그 어떤 전략적 논쟁도 보편적인 운동의 일부임을 정당하게 주장하고 있는 여성운동의 통찰력, 뉘앙스, 과정에 대한 주의를 차단시킬 수 없다

 

 

 

유토피아와 행위자 : 다른 것을 하는 것에서 다른 것이 되는 것으로

 

  앙드레 고르즈의 저작에는 변혁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잠재적 지도력에 대해 그가 가졌던 상반된 감정의 궤적이 솔직하게 나타나 있다. 그가 비록 80년대 초에 ‘노동자계급이여 안녕’이라고 말했을지라도 ?경제이성 비판?(Critique of Economic Reason)과 같은 그 후 저작에서는 특히 ‘노동과 관계없이’(outside work) 성장했었던 다양한 급진적 사회운동을 떠받쳐온 노동조합운동을 정치적 변화의 핵심적 요소로 되돌려놓지 않을 수 없었다.[xliii]

 

  전문화, 기술관료화, 그리고 화폐화(monetization)에 대한 이들의 저항운동은 더 광범하고 더 근본적인 특정한 형태의 해방투쟁이다. 이 운동은 작업장 투쟁에 영향을 미치는 근본적 잠재력을 포함하고 있으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 노동조합운동이 더 일반적인 운동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조직력을 가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은 노동조합운동에 특별한 책임을 부여한다. 노동조합운동은 다른 모든 사회운동의 성패를 크게 좌우할 것이다. , 노동조합운동이 반대할 것인지 아니면 동맹이나 공동행동방침을 모색할 것인지 여부에 따라, 이런 운동들이 좌파의 일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좌파와 단절할 것인가, 좌파와 함께 집단적 행동에 착수할 것인가 아니면 폭력에 의지하고 싶은 소수로 남을 것인가의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 노동조합운동이 다른 사회운동과 그 목표에 대해 취할 태도 또한 사회운동의 발전과정 자체를 결정할 것이다.[xliv]

 

  웅거가 일찍이 제기했던 전체 노동인력을 노동조합으로 망라하도록 공식적으로 명령하자는 제안도 노동조합의 중요성에 대한 비슷한 인식을 나타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웅거의 경우에는 노동조합의 중요성을 인정한 것이라기보다는 혁신적인 기업의 진정한 전위에 대한 인정과 성장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바람을 표현한 것이다. 그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자본주의 기업의 성격 변화라는 문제는 오늘날 철학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보다는 더 실재적이지만 기업과 노동조합 모두의 탈정치화에 이바지한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자본의 사회적 권력과 이를 변화시키는데 반드시 필요한 대항정치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업이 아니라 노동자조직 자신의 역할과 성격의 변화, 역량을 구축하고 민주화되어야 할 이들의 잠재력, 특히 작업장 너머를 지향하는 이들의 역량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계급과 변혁의 문제를 인간 능력의 완전한 발전을 위해 자본가에 대한 의존성을 극복하는 문제로 접근한다면, 노동자들의 최전선 경제조직인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하여 그 이상의 가능성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투쟁을 어떻게 결정하고 조직할 것인가, 어떤 수단을 쓸 것인가, 내부 민주주의와 참여의 범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생산자이자 서비스 공급자로서의 자신의 역할에 어떻게 응할 것인가, 결국 지역사회, 정당, 국가에 어떻게 부합할 것인가로 환산해보면 다른 종류의 조합주의를 시사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이 안고 있는 문제는 웅거와 다른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노동조합이 지나치게 방어적이라는 데 있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문제는 노동조합이 충분히 방어적이지 않다거나 어쨌든 단지 반동만은 허용하지 않는 정도로 방어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방어적이라는 것이 발전이 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방어 준비에 소홀함이 없는 노동조합주의는 ‘저항의 문화’를 발전시키려 할 것이다. 미래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위해 노동자계급의 현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 자본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하고, 조직적으로 독자적이며, 자신의 종속적 지위를 자각하고, 자신의 요구에 대한 정당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확신하며, 창조적으로 투쟁을 조직하고 이끌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고, 자신의 조직이 대중 행동주의와 전투성의 정신을 구현할 만큼 민주적이고 책임감이 있음을 주장하는 노동자계급이 존재해야 한다. 전통적인 요구들을 쟁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것에 더하여 노동조합이 내건 요구의 내용은 새로운 중요성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노동조합 안에서는 참여 조합원들의 역량이 일반화됨으로써 조합원들의 전반적인 정치적, 행정적 역량의 향상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 예를 들자면, 생산성 증대를 휴직과 작업장 내외에서의 교육 시간으로 삼으려고 노력하기, 건강과 안전 문제를 작업조직 방식과 기술의 우위에 대한 논의 및 요구와 연계시키기, 초보자의 훈련과정을 협의하고 노동조합의 내부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서 자신감을 갖게 함으로써 전 조합원들의 참여 역량을 키우기, 외부적 압력이 모든 내부적 반대를 지도부에 대한 사보타지로 규정하려는 경향을 강화시키는 위기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 토의하고 논쟁할 수 있는 집단적 역량을 확충하기 등이다.

 

  저항의 문화를 형성하는 주요 요소인 방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가 앞서 검토했던 공급 측면을 중시하는 패배주의와 같은 목적에서 ‘역량 구축’과 경제적 ‘권한 이양’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일련의 대안적 노동조합이 존재한다. 이들은 기존 권력의 틀 안에서 아무런 불편 없이 활동하며, ‘진취적 경쟁력’에서 ‘진취적’이라는 말에 대한 이들의 강조는 생산에서의 ‘연대’, 경쟁력을 위한 제휴, 일자리를 위한 동맹, 노동자 대표의 기업 이사회 포진, 그리고 논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회적 투자 목적의 연금 또는 노동기금의 활용 등에 대한 제안에서 잘 드러난다. 이들은 노동과 자본의 공통점이 그 차이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 해결’을 위해 노동자 대표를 경영진과 대등한 위치에 놓으려고 한다. 그 결과 생기는 것은 대안적 역량이 아니라 자본가를 흉내내는 실천뿐이다(예를 들면, 자본가들이 하는 것처럼 사업과 자금을 운영하기). 그리고 이런 것도 ‘기업의 기밀’이라는 이유로 조합원들과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 극소수의 노동자 대표와 노동조합 관료들로 제한되어 있다.[xlv] 영향력 있는 결정에 대한 실제적 접근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조합원들의 동원을 통해 쟁취된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러한 동원을 제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에 도움이 되는 거래, 즉 자본의 물질적인 양보와 조합원들과 노동조합 지도부의 상징적인 거리두기는 일반 조합원들의 의심과 지도부의 진실성에 관한 위험스러운 제도적 함의를 수반한다. 마지막으로, 비록 정보에 대한 접근이나 어떤 결정에 대한 의견 제공 정도에서 약간 긍정적인 것이 나온다고 할지라도 이런 접근을 밀어제치는 조합원의 동원을 통할 때에 대체로 더 적은 비용으로 더 오래 지속되는 결과를 거둘 수 있다.[xlvi]

 

  이런 소위 대안들은 우리를 거꾸로 이끌 뿐이지만 한편으로 고용 안정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대응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노동조합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노동자들의 노동력 판매 기간과 조건이기는 하나 고용 유지 문제가 점점 더 결정적인 조합원들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 노동조합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공유를 협의하려는 것 외에는 확실한 입장을 가진 적이 거의 없다. 이런 방어적 관심사가 인기를 끄는 것은 노동자들이 자기 자신을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라 생산자이자 서비스의 공급자로 생각하는데 기여하고, 따라서 얼마나 많은 일자리가 필요한 것인지, 또한 이런 일자리의 성격과 목적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검토할 수 있는 노동조합의 전략적인 도전을 수반한다. 이는 민간부문 노동조합들로 하여금 작업장과 단일 기업을 넘어서 전체 경제부문의 관점에서 사고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공공부문 노동조합들로 하여금 타인들을 위해 일하는 ‘공무원’이라는 전형적인 역할을 넘어서 사회적 권리와 공간에 대한 접근과 범위를 확대시키는 ‘구실을 하는’ 사람들의 집결을 목표로 삼게 할 것이다. 축적과 경쟁에 의해 추동되는 개별 기업과는 대조적으로 전체 경제부문 수준에서 조직되는 노동자와 소비자위원회는 생산을 사용가치와 경제를 가로지르는 기술적 연계와 더 잘 결합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경제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려는 집단적 역량 계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공공부문위원회에 관한 한, 공공부문 노동자와 그 고객 사이의 구분을 탈피하는 까다로운 과정을 시작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노동과 상품의 소비에 관여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노동의 ‘소비’ 사이의 구분도 탈피해갈 것이다.[xlvii]

 

  이런 식으로 일자리와 서비스 문제를 검토하는 의미는 이것이 자본과 국가에 대한 점진적 잠식과 궁극적 접수를 위해 즉시 실행 가능한 전략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새로운 역량과 비전의 점진적 발전 즉, 노동조합이 어떻게 ‘다른 것이 되기’ 위해 ‘다른 것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독자적인 의식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다양한 위원회에서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발언을 요구하는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 노동자들의 잠재력에 대해 새로운 확신을 가지고 고용주들과 협상하기, 정부 부처가 수집하고 제공하는 정보의 범위를 확대시키는 견지에서 정부 부처에 대한 접근과 노동조합의 연구 사업에 대한 재정지원 등과 같은 요구를 정부에 제기하기, 경제와 사회 전체에서 노동자들이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를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려는 부문 내, 부문 간 노동자들의 모임을 조직하기, 그리고 이런 방침을 실행하려는 직업개발위원회와 지방자치체의 소유권에서부터 자본 흐름을 통제하고 배분하기 위한 민주적 공공 금융기관에 이르는 새로운 정치적, 경제적 구조 창출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기, 등등.

 

  처음에는 고립을 피하려는 이런 특별한 시대의 이해관계에 의해 자극되었을 뿐일지라도 이와 같은 노동운동의 역량 구축은 또한 지역사회와의 새로운 관계설정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여기에 관련된 것은 노동조합을 노동자계급 삶의 잠재적인 중심으로 위치 지우려는 더 광범한 전략적 도전이다. 이는 단순히 노동자들이 ‘타인들’과의 결합을 통해 지역사회 안에서 노동조합에 대한 지지를 구하는 문제가 아니다. 바로 노동자들은 단순한 ‘노동자’ 이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노동자들이 현재 ‘시민’으로 할 수 있는 제한적인 경험에 따라 자신의 잠재력을 어렴풋이나마 감지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욕구에 초점을 맞춰야 하며, 지금 인정되고 있는 노동자라는 사회적 지위보다 더 완전한 인간 존재가 되려는 이들의 기대를 끌어올려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지역사회와의 이러한 관계가 (많은 학자나 정치인들에 못지않게 대개 많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지역사회’에 호소하는 방식인) 수사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의 요구가 고용주와 국가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직장의 환경적 영향, 일자리를 나누기 위한 노동시간 단축, 열악한 지위의 시간제 노동 없애기 등과 같은 문제가 단체교섭에서 최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역노동조합위원회를 학교 교육, 도시와 지역계획, 보건행정 등의 변화를 위해 십대와 배우자들을 포괄하도록 개방함으로써 노동조합 조직체계의 성격을 바꾸어야 한다. 지역사회 생활의 향상에 헌신적인 이러한 새로운 조합주의는 여기서 약술된 급진적 노동조합 전략의 부문적, 공동체적 측면 모두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민주적 행정의 발전을 강제할 것이다. 또 안팎의 모든 수준에서 국가에 적극 관여하는 다른 운동들과의 연대에서 불가피하게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노동조합이 전투적 방어와 자신의 역할을 작업장 너머로 확대시키는 것 모두에서 ‘다르게 하기’ 즉, 반드시 로비활동이나 선거동맹에 대한 지지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지역과 중앙 정부에 적극 관여할 것이라는 사실은 명확하다. 경제를 민주화하는 투쟁은 궁극적으로는 경제와 정치 사이의 구분을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무너뜨리는 것이다. , 국가가 관료적 규제자로서 일상적 경제생활에 대한 외인(外因)으로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관계를 변혁하는 투쟁에 통합되기 때문에 국가의 성격을 바꾸는 것은 ‘다른 것이 되기’ 위한 조건이다. 이에 따라 사람과 제도는 경제의 성격을 바꾸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변화시킬 것이다.

 

 

 

역량의 축적 : 사회주의적 상상력을 되살리기

 

  레닌과 그람시 같은 20세기의 맑스주의자들은 권력을 장악한 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거의 전적으로 국가의 재정비 필요성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민주적 행정 역량을 키우고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대해 확신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현존 국가에 끊임없이 관여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민주주의와 국가의 관계를 새롭게 재고하지 않고는 사회주의적 기획을 진전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대중은 현존 자본주의 국가가 아무리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민주주의 사상을 구현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현존 국가가 자본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비민주적이라고 선언하는 것으로는, 사실이기는 해도 이러한 대중의 생각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결점이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분석적, 수사학적 비판이 성과를 거둘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한계가 드러나고 뭔가 다른 것이 가능함을 보여줄 실천적 경험이 없다면, 이런 비판들은 복잡한 사회 속에서 자본주의 국가가 민주주의에 가능한 한 좋은 것이라는 체념 아니면 완전한 냉소주의에 직면할 것이다. 우리의 비판은 실천적 조치들과 결부되어야 한다. , 단순히 국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다양한 구성요소들이 기능하는 방식의 변화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민주주의와 기타 성과들이 달성될 수 있음을 입증하고, 지금과는 다른 보다 풍부한 민주주의적 요소들이 실현 가능하다는 확신을 불어넣어야 한다. 동시에 민주주의와 경제적, 사회적 변혁이 더욱 긴밀히 결합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성과들이 제한적일 것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국가를 포용할 필요성, 정말로 사회주의적 목적을 가진 이러한 포용을 구조화하는 것, 그 결과로 생긴 역량의 축적, 책임감 있는 새로운 방법의 개발 등의 중요성은 정치적 조직화와 계급의식이라는 아주 오랜 문제들을 제기한다. 그러나 혁명정당에 의한 실천(praxis)과 개입의 선포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되고 계급투쟁이 격화되는 유례없는 순간에 사회주의적 의식과 비전이 역사의 무대 위에 작열할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거나 잘해야 불완전할 뿐이다. 이러한 투쟁과 그 격렬함이 소진되는 것을 막거나 심각한 위기가 운동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막고 지속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존재하는 사회주의 문화,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헌신적인 사회주의자들, 사회주의적 비전, 이미 강조한 바 있는 일상적 역량 구축을 반드시 포함하는 문화가 없다면, 위기와 투쟁의 시기에 혁명투사들도 달리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혁명투사들이 ‘실천’을 통해 갑자기 일관된 혁명적 전망을 채택할 것이라고 기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주의 문화의 근원이라는 문제로 돌아가야 한다.

  

  이 시점에서 사회주의 문화를 세우려고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논점을 교묘히 회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의석을 얻으려고, 사회변혁 과정에서 현존 국가를 포용하는데 필요한 제도 개혁과 실험에 우선순위를 부여하려고,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과 다른 사회운동에 정치적 일관성을 부여하려면 새로운 정당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안에서 사회주의 문화를 발전시키려면 이러한 정당이 할 수 있는 일은 정확히 무엇인가? 사회주의 이론을 발전시키고, 사회주의적 전망을 분명히 하는 것은 대중적 전략, 민주적, 행정적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새로운 정당 건설에서 가장 중요한 첫 단계이다.

  

  ,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주의 기획의 정치뿐만 아니라 그 이론적 토대이다.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에 대한 맑스의 주요 비판은 그 범위가 자본주의의 한계에 머물렀다는 점이었다.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은 역사의 종말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낸 반면에, 맑스는 역사를 시작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그는 더 나은 사회과학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기획은 더 중요한 것을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기획이 잠재력이라는 막연한 바다에서 헤엄치기 때문에, 또 새로운 사회 건설에 착수할 하위계급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사회주의 기획은 오늘날의 과학을 미래의 가능성이나 전략적 사고와 통합시키는 보다 포괄적인 수단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맑스주의를 거부하거나 폐기하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맑스를 교정하거나 능가하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이것은 이전에 놓쳤거나 개발되지 않았던 차원의 문제로, 맑스주의에 새로운 개념적 층위를 더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역량과 잠재력이라는 개념에 중심을 둔 이론적 구상을 뜻하는 것이다. 실제로 사회주의는 생산력의 발전에 관한 것이지만 이 ‘생산력’은 역사적으로 새로운 역량, 특히 일상생활, 경제, 시민사회와 국가 등을 민주적으로 통치하는 집단적 역량을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생산력의 발전이 없다면, 사람들은 설사 권력이 지배계급으로부터 넘어왔더라도 사회를 운영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자본축적만이 아니라 역량의 축적도 분석해야 함을 뜻한다. 이는 우리가 집중하고 있는 분석의 단위와 사회관계를 재고하게 한다. 이를테면, 우리 스스로가 자본주의 기업에 한정하는 한, 우리는 사용가치(전체 경제부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조절(부문 내, 부문 간 연계를 계획하는) , 필요와 이러한 필요에 대처하는 우리의 역량에 대한 논의에 집중하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예를 들자면, 만약 분석 단위가 개별 노동자가 아니라 내부 분업을 통해 노동을 생산 및 재생산하고, 노동력을 판매하고, 소비하는 가정이라면, 우리는 여성의 역량 문제를 더 잘 검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과 비()노동을 연결하는, 따라서 완전한 인간적 잠재력이나 그 좌절이라는 맥락 속에서 남성과 여성을 보다 잘 위치지울 수 있을 것이다. 생산과 가정 모두 실제로 지역사회 안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세대 사이의 계급의식 문제뿐만 아니라 계급 역량의 재구성에 미치는 영향까지도 좀 더 쉽게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생산력인 ‘민주적 행정’에 대한 강조는 경제를 (시장에 맡겨 두는 것이 아니라) 정치화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동시에 민주적인 집단적 역량을 키우는데 부합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어떠한 종류의 국가구조가 모든 수준에서 이러한 정치화에 관여할 것인지 숙고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이론의 인식론적, 전략적, 영감적 의도는 우리로 하여금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도 개인적/제도적 역량들이 사회주의를 의제로 삼도록 어떻게 가교를 놓을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따라서 오늘날 사회주의적 기획에 필요한 것은 사회주의는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 또는 만약 우리가 국가권력을 장악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상술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또한 왜 자본주의로는 안 되는가에 대한 더 많은 기준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블로흐가 지적한 것처럼, “유토피아적 목표를 분명히 보여” 줄 역량을 키우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또 이 가운데에는 이행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유토피아적 감수성을 역량 구축에 대한 관심과 통합시키는, 동기가 부여된 전망은 적어도 다음의 열 가지 요소를 포함해야 한다.

 

 1. 소외를 극복하기. 이것은 우리 인생을 만끽하기 위해 노동을 피하는 문제가 아니다. 반대로 더 이상 ‘오락의 수동적 소비자’가 아니기 위해서 노동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생산적 활동을 포함한 흥미와 자율적 활동을 펼칠 가능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노동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문제이기도 하다.[xlviii]

 

 2. 분업을 줄이기. 우리들 각자가 완전한 인간 존재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회주의 기획의 핵심 원리는 ‘참여를 가로막거나 실현가능성과 영향력 행사를 위한 동등한 기회에 모든 노동자들이 정당하게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거부하는’ 위계구조적 상황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xlix] 이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과정을 자신의 정당, 노동조합, 운동단체, 시민운동단체, 사무실, 공장, 대학 등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소비를 바꾸기. 사회주의자들은 ‘생산관계와 노동조직의 변혁은 생활양식이나 소비양식 등 다른 여러 변화들을 극적일 정도로 조건 지을 것’이라는 점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l] 이는 단지 생태학적 건전성의 문제가 아니라 소비자가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에 대해 결정하고, 균질화된 상품의 소비가 아니라 여러 가지 향유 역량을 키우며, 접근하기 쉽고 대체로 보다 평등주의적인 공적, 집단적 소비 영역을 확대시키는 것과 연결되는 문제이다.

 

 4. 대안적인 생활방식. 사회주의적 역량을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는 공간인 가정에서는 좀 더 공동체적인 형태의 생활을 실험해보자고 할 수 있다. ‘열정적이고 애정 있는 유대’를 핵가족이나 기타 형태의 가족관계를 넘어서 보다 폭넓은 협력적 공동체로 확대시킬 잠재력을 가진 이러한 실험은 ‘새로운 종류의 분담 관계와 새로운 종류의 공적 역할을 제안하는 예시적(prefigurative) 정책의 도입을 위한 설득력 있는 주장’을 제공할 것이다.[li]

 

 5. 시장을 사회화하기. 소비양식과 생활방식의 변혁과 함께 자본 배분에 관한 결정을 민주적인 공공 분야로 바꾸는 것은 우리에게 ‘시장과 화폐를 개선하고 변화시킬 방법을 상상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방법은 경제적 권력이 평등하게 분배된 경제에서 서로 이익이 되는 분업에 입각한 서로 이익이 되는 교환을 촉진할 수단이 된다.[lii] 오직 이와 같은 시장과 사회관계만이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 유토피아적 사고로 통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경쟁이라는 냉혹한 굴레를 피하도록 해줄 것이다.

 

 6. 생태학적으로 계획하기. 사회주의 기획은 각국 안에서 시간과 자원의 민주적 배분, 그리고 생산과 소비 사이의 양적, 질적 균형을 위한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그 목표는 ‘대안적 발전경로를 선택하여 각국의 집단적 역량을 민주적으로 최대한 강화시켜서 …… 금융자본과 생산관계를 세계적 공간에서 일국적, 국지적 경제공간에 다시 포함시킴으로써 타국에 대한 (환경파괴와 같은) 외적 영향을 강제하지 않는’ 것이다.[liii]

 

 7. 평등을 국제화하기. 이러한 유형의 계획을 일국적 수준에서 기획한다는 것은 국제적 동맹, 결국은 이런 노력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촉진시키는 국제적 시스템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국가 안에서 평등주의적 사회관계의 구축에 대비하는 의식과 역량을 키우는 것은 부유한 나라에서 가난한 나라로의 사회연대 자원 이전과 사회주의적 역량의 발전을 가로막는 지정학적 장벽을 넘어서려는 공동투쟁을 통해 가난한 나라의 경제발전을 촉진시키려는 점증하는 의무를 포함해야 한다. 이것은 현대 제국주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존재하는 ‘지리적 조건과 다양성’, 그리고 사회주의 정치를 되살리는 데에서 이러한 다양성과 공간적 범위 사이를 어떻게 ‘중재하고 해석할’ 것인지를 배우는 것에도 익숙해져야 한다는 뜻이다.[liv]

 

 8. 민주적으로 의사소통하기. 사회주의자들은 풍부한 문화적 발전 역량을 키우는 것뿐만 아니라 지성적인 집단적 토론 역량을 준비하기 위해 오늘날의 상품화된 시장주도형 매체를 다양하고 다원적인 통신매체로 대체하려는 비전과 전략의 개발을 최우선시 해야 한다. ‘사회조직의 근본원리에 대한 새로운 집단적 토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새로운 사회주의 기획이 조리 있게 표명되고 발언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새로운 매체질서가 필요하다.[lv]

 

 9.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개인적, 집단적 역량의 발전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사회주의 기획의 진짜 목적은 실현가능한 민주주의를 심화시키고 확장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경영자와 노동자, 정치인과 시민, 지도자와 지도받는 자 사이의 구조적으로 강화된 구분을 제거하고, 현재의 우리와 미래의 우리를 분리시키고 있는 장벽을 극복하는데 기여하는 대의제도와 행정기관의 전형을 수립하려는 매우 진지한 의무를 수반한다.[lvi]

 

10. 모든 것을 공유하라(Omnia sint communia). 우리 시대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맑스주의 이전의 많은 유토피아에 명백했던 것 즉, 생산수단, 재정, 교환, 통신의 사적 소유와 소외되지 않은, 사회적으로 공정하고 민주적인 사회질서는 절대로 병존할 수 없다. 따라서 탐욕적이고 경쟁적인 동기에 근거해서는 유토피아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피하는데 주력해왔다. 특히 민주적인 집단적 역량을 현실적 잠재력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 제기되는 모든 난제들을 피하려는 이유에서 이런 기본 원칙이 손상된다면, 사회주의적 상상력을 되살릴 방법이 없다.  

 

  사회주의자들은 보기 드문 시대를 살고 있다. ,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근본적 변화에 대한 모든 소명을 완전히 포기한 상황은 한 세기에 걸쳐 처음으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목표에 대한 조직적 중심을 갖지 못하게 했다. 그 결과, 우리가 부딪치고 있는 이런 공백이 많은 비관주의를 가져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비관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새롭기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근시안적인 낙관주의를 우기는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반대로 이것은 시간적으로 사회주의보다 선행하는 유토피아적 꿈과 전 세계 사람들이 자신의 인간성을 매우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옹호하려고 애쓴 증거인 구체적인 대중투쟁 사이의 연속성에서 영감을 얻는 것이다. 또한 행동주의 좌파의 정치적 기획이 앞서 우리가 설명한 수많은 이상들을 포함하기 위해 확대되는 것으로부터 격려를 받는 것이다. 특히 자본의 힘이야말로 무의식중에 우리 삶의 모든 양상을 황폐화, 종속화, 협소화시키는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 자본주의는 “잘못된 꿈”이라는 것, 따라서 보편적이고 의욕적이지만 우리의 집단적이고 해방적인 잠재력에 뿌리박혀 있는 대안만이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적 상상력을 되살리고, 이런 대안을 발전시키려고 역량을 쌓는 것은 꼭 필요할 뿐만 아니라 있을 수 있는 일이다.



[i] 이 글은 Socialist Register 2000에 실렸다.

[ii]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London, Penguin, 1998, 111-112. 마침 중국식 공산주의적 자본주의가 시작되었을 때인 1980년대 초에 베이징에서 『세일즈맨의 죽음』이 성황 속에 상연된 것은 이미 높아진 이 연극의 타당성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iii]3) Ernst Bloch, The Principle of Hope, trans. by N. Plaice, S. Plaice and P. Knight, Cambridge, Mass., The MIT Press, 1986, 198. 대부분 미국 망명 중인 1937년에서 1949년 사이에 저술된 이 책의 처음 두 권은 1954-55년에, 그리고 셋째 권은 1959년에 동독에서 첫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 『세일즈맨의 죽음』을 이용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블로흐가 극장을 “그 실제적 가능성에서 이 세상의 의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견지에서 “모범적인 공공시설”로 간주한 것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424). 그는 극장을 사람들의 ‘모방욕구’를 입증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모방욕구는 … 자기 자신을 바꾸고 싶어 하는 열망과 … 실제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막이 오르고, 4의 벽(사실주의 연극에서 무대와 관객 사이에 있다고 상정되는 가상의 벽 - 옮긴이)이 사라지면, 무대가 열린다.… 우리의 삶을 너무도 자주 좌지우지했었던 편협함이 우리의 삶으로부터 사라지게 된다.…”(412-413). 블로흐의 저작에 대한 식견 있는 평가를 위해서는 그의 제자인 스테픈 에릭 브로너(Stephen Eric Bronner)Of Critical Theory and Its Theorists, Cambridge, Mass : Blackwell, 1994의 제9장을 보라. Jamie Owen Daniel and Tom Moylan, eds., Not Yet : Reconsidering Ernst Bloch, Verso, New York, 1997을 참조하라.

[iv] Ibid., 445-446.

[v] 블로흐는 낮 꿈을 실제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그러나 나중에 일치하게 되는 것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에른스트 블로흐, 박설호 옮김,『희망의 원리』1, 열린책들, 2004, 20) ― 편집자 주

[vi] The Principle of Hope, 530, 582쪽을 보라.

[vii] Ibid., 519-520.

[viii] The Principle of Hope, 특히 148, 197-198, 209, 622-623쪽을 보라.

[ix] Ibid., 444.

[x] Ibid., 622.

[xi] A Philosophy of the Future, trans. by John Cummings, New York : Herder and Herder, 1970, 92.

[xii] Leo Panitch, The State and the Future of Socialism,Capital & Class, no.11, Spring 1980 (Working Class Politics in Crisis, London, Verso, 1986 9장으로 전재되었다.)과 “Liberal Democracy and Socialist Democracy,Socialist Register 1981을 보라. 최소한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블로흐 자신도 그가 소련에서 발견한 모순들을 ‘조급하게 평준화시키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xiii] 이런 공백(“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 왜 맑스는 노동자들이 자본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가?)을 검토하려는 가장 가치 있는 시도는 마이크 리보위츠(Mike Lebowitz)의 『자본을 넘어서』(Beyond Capital, New York : Macmillan, 1995)이다.

[xiv] The Principle of Hope, 232-233쪽을 보라.

[xv] The German Ideology, Moscow : International Publishers, 1972, 56-57.

[xvi] Barbara Kingsolver, Animal Dreams, New York : Harper Collins, 1990, 133.

[xvii] James C. Scott, Seeing Like a State : How Certain Schemes to Improve Human Condition Have Failed, New Haven and London :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8.

[xviii] Ibid., 6-7, 88-89, 101-102, 342-344. 동시에 스콧은 이렇게 인식하고 있다 : “혁명가들은 자신이 영원히 추방시키고 싶었던 봉건적이고 가난에 허덕인 불평등한 과거를 경멸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또 간혹 직접 민주주의가 정말로 사회질서를 회복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도 이유가 있었다. … 그러나 고도의 현대적 목표에 헌신적인 이들의 역사와 논리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들의 신념이 권위주의적 국가권력과 결합되었을 때 수반되는 막대한 피해를 간과하도록 내버려두라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의 계몽주의와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은 다른 몇몇 사람들의 비판에도 훨씬 못 미친다. 그에 따르면, 계몽주의와 모더니즘은 “…그 어두운 측면들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 소수에게 포기해서는 안 될 세상에 대한 인식을 제공했다. 나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환경에 진정으로 위험한 것으로 판명된 것은 인식론의 보편주의적 요구와 권위주의적 사회공학의 결합이라고 생각한다. 340-341.

[xix] Ibid., 8, 327.

[xx] Hilary Wainwright, Arguments for a New Left, Oxford : Blackwell, 1994.

[xxi] Eric Olin Wright, Preface to S. Bowles and H. Gintis, Recasting Egalitarianism : New Rules for Communities, States and Markets, New York : Verso, 1998, 9. 라이트는 ‘사회를 제도적으로 철저히 재설계하려는 의도에서’ 보울스와 긴티스의 모델이 진보적인 것인지 여부에 대해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87). 그렇지만 현실의 검증에 의해 수정될 이 시리즈의 이전 두 저작들 ― 연간수입 보증제(guaranteed annual income)와 결사 민주주의(associational democracy)에 관한 ― 도 확신이 없기는 매한가지이다. 분명한 것은 보울스와 긴티스가 비록 경쟁적 시장경제 안에서이기는 하나 실제로 소유권의 재분배에 집중함으로써 자신들이 이전 저작들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xxii] Recasting Egalitarianism, 364.

[xxiii] Ibid., 48.

[xxiv] (주로 차용이나 투자하게 되는 경우, 위험을 마다 않는 노동자들을 유인하는 견지에서 제안된) 후자에 대해 보상하기 위해서 국가는 자체 재원으로 실업보험(외견상, 생산성을 끌어올릴 정도로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을 포함하는 ‘자신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실업에 영향을 준’ 사람들에게는 한정된 급여만이 지불될 것이다)과 파산보험(경기침체 같은 ‘외인성(外因性)’ 위험에 대하여 스스로 재정을 충당하는 기업을 보증하는 것이나 이런 위험을 서툰 경영이나 투자결정 같은 ‘통제할 수 있는’ 위험과 구별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을 제공할 것이다. Recasting Egalitarianism, 50-51.

[xxv] Bertell Ollman, ed., Market Socialism : The Debate Among Socialism, New York : Routledge, 1998을 보라.

[xxvi] 이에 대한 초창기의 개요와 평가가 잘 나타나 있는 문헌으로는 팻 디바인(Pat Devine)의 “Market Socialism or Participatory Planning”을 들 수 있다. 이 논문은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의 특별호(vol. 24, nos. 3 & 4, Fall & Winter, 1992)인 『사회주의의 미래』(The Future of Socialism)’에 실려 있다. 이에 대해 가장 창의적으로 기여했던 저작은 디바인의 Democracy and Economic Planning, Cambridge : Polity Press, 1988, 다이안 엘슨(Diane Elson)의 “Market Socialism or Socialization of the Market?,New Left Review, no. 172, November/December 1988, 특히 혼합경제에서 분업을 완전히 넘어서지는 못하더라도 줄이는 것에 주목한 마이클 앨버트(Michael Albert)와 로빈 하넬(Robin Hahnel)Looking Forward : Participatory Economics for the Twenty-First Century, Boston : South End Press, 1991 등을 들 수 있다.

[xxvii] ‘노동자들이 선출한 대표가 지배하는’ 노동자 소유 기업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위하여 이들이 말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 “우리는 노동자들이 민주적 기업의 경영자들로 하여금 노동자들의 복지를 최대한 확대하도록 투자, 작업감시체계와 기타 정책의 선택권을 고르도록 지시한다고 가정한다.Recasting Egalitarianism, 37.

[xxviii] Recasting Egalitarianism, 390-391.

[xxix] 이들은 베링턴 무어가 문화적 관성이라는 가정에 의존했던 사람들에게 가한 통렬한 반박을 무시한다. 그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렇게 말했다 : “하나의 가치체계를 유지하고 전하기 위하여 인간은 사람을 치기도 하고, 감옥에 보내 괴롭히기도 하며, 강제수용소에 넣어버리기도 한다. 또 감언이설로 속이고, 뇌물을 쓰기도 하며, 영웅을 만들기도 한다. 신문을 읽고 고무되거나 궁지에 몰려 총을 쏘기도 하며, 이따금 사회학을 배우기도 한다.” 그리고 요즈음에는 여기에 공급 측면을 중시하는 경제학을 덧붙일 수도 있겠다. Barrington Moore, Jr., Social Origins of Democracy and Dictatorship, Boston : Beacon, 1967, 486쪽을 보라.

[xxx] 이들의 비판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이렇게 지적한다 : “보울스와 긴티스는 … 마음 약한 효율성 예찬론자들을 평등주의 정책에 찬성하게 하는데 너무 바쁜 나머지 자신의 독자들로 하여금 평등주의가 무엇인지 잊게 하는 위험을 부르고 있다. 평등주의는 모든 가정에서 닌텐도(Nintendo) 비디오게임을 하거나 쇼핑몰에 더 자주 들르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중(自重), 공평, 동등한 관계와 우애에 관한 것이다. … 이런 근본적인 오류는 이들이 경제성장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지 않는다는 점, 따라서 시장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미래를 통제하는 것은 물론 의문시하는 것조차 포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보울스와 긴티스가 효율성에 관심을 가진 이들도 평등주의 정책을 지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옳다고 하더라도 평등주의자들은 … 공급 측면을 중시하는 경제학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Daniel M. Hausman, Problems with Supply-side Egalitarianism,Recasting Egalitarianism, 84. 각 권들이 이런 비판적 시론들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주요 저자들의 응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베르소 출판사의 Real Utopia 시리즈가 지닌 장점 가운데 하나이다.

[xxxi] Roberto Mangabeira Unger, Democracy Realized : The Progressive Alternative, New York : Verso, 1998, 9.

[xxxii] Roberto Mangabeira Unger, False Necessity, Part of Politics: A Work in Constructive Social Theory,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7, 392-395.

[xxxiii] Ibid., 406-409, 438. 이 책이 저술된 1980년대 중반에 이러한 주장은 웅거의 조국인 브라질에서 노동자당을 창설했던 활동가들, 또는 1980년대 초에 토니 벤(Tony Benn)과 런던광역의회(Greater London Council)의 활동가들에 의해 이미 주창된 바 있었던 일종의 정치적 실천을 이론화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웅거 자신은 노동자당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그보다 덜 급진적인 브라질 민주운동당(PMDB)의 결성에서는 카르도수(Cardoso)와 제휴했다. Eyal Press, The Passion of Roberto Unger, Lingua Franca, March 1999를 보라.) 웅거가 ?그릇된 필요?를 썼을 당시에, 그는 ‘위임된 민주주의’(empowered democracy)의 지지자들이 ‘자신의 비전에 가장 솔직한 초당파적 일반대중운동’(409)은 물론이고 막연히 개량조직, 노동자조직, 사회당, 공산당 안에서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10년 뒤 ?실현된 민주주의?를 쓸 때까지, 그는 ‘포괄적 정치에서 행방불명된 행위자’(245)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에 대해 자신감을 많이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xxxiv] Democracy Realized, 1, 213-215, 263쪽 이하.

[xxxv] Ibid., 174.

[xxxvi] Ibid., 43.

[xxxvii] André Gorz, Strategy for Labour : A Radical Proposal, Boston, Beacon : 1967, 7.

[xxxviii] “맑스가 해석한 역사발전의 뜻은 여전히 우리에게 발전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계급의 존재와는 무관하게 역사발전을 추구해야 한다. 이것이 포스트-맑스주의적 인간의 조건이다.Critique of Economic Reason, 96.

[xxxix] The German Ideology, 104.

[xl] Sam Gindin, Socialism with Sober Senses,Socialist Register 1998을 보라.

[xli] Jerry Lembcke, Class Analysis and Studies of the U.S. Working Class : Theoretical, Conceptual, and Methodological Issues in Scott G. McNall, Rhonda Levine and Rick Fantasia eds., Bringing Class Back In, Boulder : Westview Press, 1991을 보라.

[xlii] Henri Lefebvre, Critique of Everyday Life, Volume 1, London, Verso : 1991 (1947), 33.

[xliii] Farewell to the Working Class, Boston : Southend Press, 1982 ; Critique of Economic Reason, London : Verso, 1989.

[xliv] Critique of Economic Reason, 231-233.

[xlv] 노동조합의 의사결정 참여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사례 가운데 하나는 독일의 노동자 경영 참여이다. 그러나 다임러사가 크라이슬러사와 합병하기로 결정했을 때, 이는 독일의 금속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있었던 위원회 수준에서 논의되지 않았다. 너무 민감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사후에 이를 승인하는 의견을 밝혔다. 이와 비슷하게 독일 노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외주화 문제도 위원회 수준에서 대처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논란이” 너무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캐나다에서는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노동자 투자기금’이 우후죽순처럼 번지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기금은 수익성 이외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향에서 특정 계획이나 투자를 통제할 자격이 없거나 또는 창출된 일자리들이 노동조합으로 포괄되어야 한다는 요구도 하지 않은 채, 일자리와 경제정책의 방향에 대해 노동운동에 일정한 통제권을 부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후자에 대한 자세한 비판으로는 Jim Stanford, Labor Investment Funds, Toronto : CAW, 1999를 보라.

[xlvi] 예컨대, 단체협상이나 입법행위를 통해 회사에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이다 : 공인회계사가 아니더라도 이해하기 쉬운 결산보고서, 정보 해석에서 기술적 지원에 의존하지 않을 역량, 노동시간 사이에 경영에 대한 최신 정보를 얻고 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기회, 작업 개편이나 외주화 결정에 대한 노동조합의 승인, 그리고 하부에서 검토된 바에 따른 부문별 위원회를 통한 의견 제공 등.

[xlvii] Greg McElligott, 'An Immodest Proposal, or Democracy Beyond the Capitalist Welfare State', Socialist Studies Bulletin, no. 52, Winnipeg, 1998을 보라.

[xlviii] Gorz, Critique of Economic Reason, 231.

[xlix] Albert and Hahnel, Participatory Economics, 35.

[l] 이 책에 실린 Kate Soper의 논문을 보라. Boston Review, 24 : 3-4, Summer 1999에 실린 Juliet Schors의 ‘The New Politics of Consumption’에 대한 논쟁을 참조하라.

[li] 이 책에 실린 Joanna Brenner의 논문을 보라.

[lii] 이 책에 실린 Diane Elson의 논문을 보라.

[liii] Greg Albo, The World Economy, Market Imperatives and Alternatives, Monthly Review, December 1996, 19. Greg Albo, A World Market of Opportunities? Capitalist Obstacles and Left Economic Policy, Socialist Register 1997에서 제시된 그의 10가지 강령도 보라.

[liv] David Harvey, The Geography of Class Power, Socialist Register 1998, 특히 70.

[lv] Colin Leys, The Public Sphere and the Media : Market Supremacy vs. Democracy, Socialist Register 1999.

[lvi] Greg Albo, David Langile and Leo Panitch, eds., A Different Kind of State, Toronto, Oxford University Press, 1993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