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재앙의 그늘 속에서 사회주의 희망 본문

실천지 (2007년)/2007년 1월호

재앙의 그늘 속에서 사회주의 희망

사회실천연구소 2014. 11. 7. 03:19

재앙의 그늘 속에서 사회주의 희망1 

노만 제라스




랄프 밀리반트(Rahlf Milliband)는 자신의 마지막 책에서 인간의 잔혹성, 무시무시한 분열과 충돌, 조직적인 대규모 살육을 일삼는 듯한 인간이라는 종의 성향에 대한 방대한 증거(특히 20세기에서 얻을 수 있는 증거)를 사회주의자가 검토할 필요가 있는 아주 중요한 문제(사회주의 기획 자체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문제) 가운데 하나로 평가했다. 그런 ‘인간 재료’를 가지고 조화로운 협력과 이타주의를 목표로 하여 사회를 근본적으로 다시 조직하는 일은 유토피아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지 하는 회의적 의문이 제기되었다고 밀리반트는 말한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에게 그런 의문에 비관적으로 답하는 것에 맞서라고 촉구하면서, “대규모의 악은 인간 조건의 일부라거나 그런 악을 정복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궁여지책”1)이라고 평가한다. 이 글은 흔들림 없이 사회주의를 옹호하고 명료함으로 일관한 밀리반트의 필생의 작업에 바치는 글이다. 나는 밀리반트의 관점을 전반적으로 지지하지만,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표현하면서 그가 논평하거나 활용한 인간 본성에 대한 가정들을 자세히 검토하는 과정을 거칠 것이다. 


밀리반트는 이렇게 자신의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역사는 “사회주의 기획에 스며 있는 인간 능력에 대한 근본적인 낙관주의, 즉 계몽주의에서 유래한 인간의 무한한 완전성에 대한 믿음”에 도전하고 있다. 나는 이를 인간 본성에 대한 독특한 관점으로 보고 당분간 가정 (1)로 간주하겠다. 이렇게 표현하고 나서 밀리반트는 동일한 것을 다르게 표현할 뿐인 것처럼 그것을 (그의 표현대로 하면) “좀 더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사실 제2의 다른 관점을 재구성해 제시하거나 적어도 허용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인간은 모든 충돌이 확실하게 제거되지는 않겠지만 그 빈도와 예리함만큼은 줄어들, 협조적이고 민주적이고 평등한 자치 공동체를 조직할 완전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믿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당분간 이를 가정 (2)라고 부르고자 한다. 가정 (1)이 인간의 완전성을 주장하는 데 견주어 가정 (2)는 그런 야심적인 주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 이 두 가정은 구별된다. 가정 (2)는 오직 인간이 어떤 불완전성을 지녔더라도 이 불완전성이 사회주의 공동체와 같은 특정 성격을 갖는 공동체를 창조할 가능성을 배제할 정도로까지는 크지 않다는 점만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 가정은 충돌이 훨씬 줄어들고 온건해지더라도 충돌이 지속된다고 언급하면서 인간의 결점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추론을 인정하기조차 한다. 이런 인간의 결점으로는 아마도 이기심,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한 무관심, 과도한 자부심이나 허영심, 필요 없는 공격성이나 그 밖의 인간의 성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정에서 볼 때, 그런 성향은 또한 인간의 더 선한 특질과 더불어 인간의 기질에 영구적인 부분일 것이다.


어쨌든 더 야심적인 주장에 기대건 덜 야심적인 주장에 기대건, 인간은 완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건 인간 본성의 결점이 인간의 장점으로부터 상상할 수 있는 집단적 노력을 항상 무력화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오염되어 있지도 않기 때문이건, “사회주의의 본질적인 출발점은 인류가 영원히 분열과 대립 속에서 살게 될 운명이라는 회복 불가능한 저주라는 것이 없다는 점이다(점이어야 한다)”고 밀리반트는 말한다. 물론 이 마지막 명제를 부정함으로써 우리는 원래의 회의적 의문의 원천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회복 불가능한 저주가 있다 사실에 준해서 인간 본성을 조망할 것이다. 이를 가정 (3)이라고 하자. 우리가 이미 그런 표현을 보았듯이, 이는 “대규모의 악은 인간 조건의 일부분이다”고 하는 가정이다. 이는 “인류는 ······ 도살장에서 도망칠 수 없고, 종말에 이를 때까지 세대를 이어 집단적 잔혹성의 목록을 더할 운명이다”고 하는 가정이다. 이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아동에게 또는 동물에 가한” 수많은 더 작은 규모의 “개인적 잔혹 행위들”에 관해서도, 이런 행위들은 “인간 본성에 지워지지 않게 각인된 특성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고 하는 가정이다. 


내가 구별하고자 하는 관점의 목록을 완성해 줄 다른 구절 하나를 더 살펴보겠다. 이 구절은 밀리반트가 보기에 앞의 마지막 비관주의적 관점보다 더 그럴듯한 생각이다.


그런 [잔혹] 행위들은 ······ 주로 지배와 착취에 기초한 계급사회의 내재적 부분을 구성하는 불안전, 좌절, 불안, 소외에서 비롯된다. 인종, 성, 종교와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의 상처들과 더불어, ‘계급의 상처(injuries of class)’는 즉각적으로 인간관계에 적대적으로 깊은 악영향을 미치는 병리학적이며 병적인 기형을 불러온다. 이것은 연대, 협동, 안전, 존중을 조장하는 조건이 만들어진 사회에서, 그리고 이런 가치들이 모든 생활 영역에서 다양한 풀뿌리 조직들에 의해 실체화된 사회에서만 효과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사회주의가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조건이다. 


이제 나는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이 말해야겠다. 밀리반트 자신이 의도한 의미에 관한 한, 여기서 그의 주장은 사회주의적 담론이나 기타 급진주의적 담론에서도 공통적인 것으로, 인간 본성에 대하여 더 이상 특별한 관점을 제시하지 않는 것 같다. 이런 논의는 특히 가정 (2)와 일치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가정 (2)에 포함된 것으로 본 관념, 즉 인간은 미덕과 악덕의 조합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관념, 또는 (달리 표현하면) 인간 본성은 상이한 그리고 심지어는 정반대의 내적 잠재성이나 성향을 체현한다는 관념은, 느슨하게 말해, 어떤 특질들을 나타나게 하면서도 다른 특질들을 차단하거나 좌절시킴으로써 그런 사람들을 형성하는 것이 바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적 조건이라는 생각과 완전히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밀리반트의 텍스트에는 딱 그런 식의 생각을 나타내는 몇몇 측면들이 있다. 나는 이 문제를 다시 다룰 것이다.


나는 위에서 인용한 구절에서 또 다른 의미를 뽑아낼 것을 제안한다. 이 의미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적 조건들이 인간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다양한 특질들을 단순히 끌어내거나 좌절시키고, 촉진하거나 기형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그 조건들이 그런 특질들을 창조한다. 달리 정식화하면, 사회적 조건 또는 관계나 제도가 어느 주어진 사회적 행위자 집단의 타고난 특성들을 완전히 결정한다. 달리 말해, 인간의 본성이란 원래 이렇다거나 원래 저렇다거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의 본성이란 것은 없기 때문이다. 단지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으로 생산된 특이성들과 차이들이 있을 뿐이다. 나는 이를 가정 (4)라고 부르며, 두 가지 이유로 밀리반트의 말에서 무리하게 그런 가정을 추출했다. 첫 번째 이유는 이 가정은 일반적인 영역의 문제들에 관해 표준적인 관점으로 남아있고 그래서 여기서 고려해야 할 사항이 몇 가지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엄격히 말해 밀리반트의 관점이 그런 가정으로 귀결되지는 않아도, 뒤에서 다시 논의하겠지만 그의 글에는 지나친 사회화나 역사화의 경향을 보이는 측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극단화 경향을 보이는 입장을 포함시켜 다루는 것이 토론 절차상 합리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이제 내가 도출한 네 가지 다른 관점들을 모아 다시 구성하여 각각을 간단하고 표준화된 문구로 제시하겠다.


3)에서 (a) 인간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악하다.

(1)에서 (b) 인간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선하다.

(4)에서 (c) 인간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백지 상태다.

(2)에서 (d) 인간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혼합적이다.


이 정식화된 문구의 목록은 단지 편의를 위한 것이며 두 가지 지나친 단순화(곧 원상태로 돌려놓겠다)를 대가로 지불하고 의식적으로 만든 것이다. 비관주의적 가정(a)이 사람들이 본성상 전적으로 악하다거나, 심지어는 아주 극악하다는 전제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악을 향한 충동은 아주 강하고 광범위해서 항구적으로 가라앉지 못하며 틀림없이 크고 작은 이런 저런 공포를 지속적으로 생산한다는 형태를 취할 수 있으며, 어쩌면 그것이 더 그럴듯하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낙관주의적 가정(b)도 인간이 비열함, 심지어 심각한 수준의 비열함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완전성의 공식에서 가정 (b)를 도출하는 것은 인간이 정말 아주 능력 있음을 함의한다. (b)에서 볼 때, 이런 능력은 인간 종에 덜 전형적이거나 인간 종 내에서 덜 강력한 것으로, 우발적인 것으로, 그리고 사람을 타락시키는 열악한 환경이나 부적절한 교육의 영향 때문에 제거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선의 잠재성은 더욱 필요하며 더욱 깊이 뿌리박고 있다. 다시 말해 (a)와 (b)는 모두 인간 본성이, 내가 공식 (d)에서 언급했듯이, 혼합적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속에서 추론될 수 있다. 그런데 (a)와 (b)의 입장은 ‘혼합’ 내에서 선과 악이 각각 어떤 비중을 갖느냐에 따라 갈리는데, 그 결과 특별히 선과 악 중 하나가 장기적으로 중심적인 지위를 갖게 된다. 단순화된 각각의 공식은 단지 가정 (d)와 날카롭게 구별하기 위해 그 관점을 강조한 것이다. 가정 (d)에서는 인간의 선과 악 사이의 균형이 좀 더 미결정 상태로 남아 있다. 


가정 (c)에서처럼 인간의 본성을 백지 상태라고 보는 관점은 그 공식에서 단순화되기보다는 순화된다는 점을 지적해두는 것도 신중한 태도일 것이다. 이는 이 관점이 누구에게서도 순수한 형태로 견지되지 않고 오히려 이 관점과 모순되는 다른 명제들과 결합된 형태로 견지된다는 뜻이다. 이 관점을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으로 파악하지 않고 달리 파악하는 것은 합당한 이유가 없다. 어쨌든 (b)와 (c)는 인간의 악은 제거될 수 없다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믿음의 기초는 서로 다르다. (b)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선이 존재하기 때문에 악은 인간 본성에 본질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c)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선과 악은 모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악은 인간 본성에 본질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미 말한 바 있듯이, 여기서 (d)는 분명하게 그리고 진정으로 (a)나 (b)와 구별되는 형태로 받아들여야 한다. 즉, (d)에서는 (a)나 (b)에서보다 선의 잠재성과 악의 잠재성 사이의 균형이 좀 더 미결정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어떤 하나의 잠재성이 다른 잠재성에 대해 압도적일 정도로 커지거나, 지금이든 언제든 다른 잠재성의 영향력을 없애거나 무력화할 정도로 커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정 (d)에서는, 저열하고 악독한 인간의 충동이 거대하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악을 영원히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 만큼 그렇게 압도적이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충동이 세월이 지나면 완전히 제거될 것으로, 현재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 다른 어떤 것, 즉 결국 인간의 충동이 아니라 소외된, 자본주의적인, 계급적으로 억압/피억압적인, 가부장적인, 부패한 충동으로 생각될 만큼 약하거나 하찮지도 않다. 그와는 반대로 가정 (d)에서는, 상서롭고 훌륭한 성향이 중대한 인간의 악의 가능성을 어느 날 지나가버릴 수도 있는 일시적인(비록 긴 시간일지라도) 역사적 국면으로 만들어버릴 만큼 그렇게 지배적이지도 않지만, 그런 해로운 가능성을 제한하고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무의미한 탐색으로 만들어버릴 만큼 상서롭고 훌륭한 성향이 그렇게 약하거나 희박하지도 않다. (d)에서는 이런 이중적인 충동이나 성향이 인간 본성의 영구적인 특징으로, 즉 우리가 교섭하고 함께 살아가고 가능하면 이해해야 할(그리고 가능하면 점 더 상서롭고 훌륭한 쪽으로 기울어져야 할) 현실로 생각한다.  


네 개의 가정들에 대한 설명을 완성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나올 것을 예상하고 있다. 다른 급진적인 인간 진보 사상과 더불어, 사회주의 기획은 일반적으로, 밀리반트가 말했듯이, 가정 (a)의 부정을 전제한다는 주장 말이다. 나는 그렇게 심각하게 맞선다면(그는 우리가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가정 (a)의 지지자들이 제기한 회의적 의문은 결국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고 주장하고 싶다. 사회주의자들은 앞으로 가정 (b)나 가정 (c)의 손쉬운 편익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들 가정 중 어느 하나를 채택하는 것은 밀리반트가 앞에서 진지하게 언급했던 다량의 증거를 수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그런 증거를 경시하는 행위이다. 사회주의의 희망은 가정 (d)에 기초해 유지돼야 한다. 더 선하고 더 공정한 사회의 목표를 위해 싸우는 일은 인간이 본성상 압도적으로 또는 본질적으로 선하기 때문도 아니고, 인간이 내재적 본성을 갖고 있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런 투쟁은 인간의 본성 속에 악한 충동과 선한 충동의 결합 때문에 그리고 그런 결합에도 불구하고 일어난다. 악한 충동들 때문에, 이런 투쟁은 필수적이다. 그런 악한 충동들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사회주의 사회가 가능하길 바란다.


사회주의 옹호는 나무나 많이 그리고 너무나 자주 가정 (b)와 (c)에서 요약한 그런 식의 사상에 의해 통지된다. 그런데, 되풀이해서 이야기하자면, 이 두 개의 가정이 낙관주의적 전망을 정당화하는 방식에서 동일하지 않다. 거대 악의 영구성에 대해, 가정 (b)는 인류에게 내재한 선을 향한 깊은 아주 강력한 경향이 있다는 주장을 대비시키는 데 반해, 가정 (c)는 단지 인간의 무한한 적응성이라는 관념을 대비시킨다. 이 차이는 하찮은 것이 아니다. 가정 (b)는 가정 (c)가 부정하는 공통의 인간 본성의 개념을 기꺼이 다루려고 한다는 중요한 이점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이를 이점이라고 부르는데, 인간 본성이 전혀 없다는 주장은 기껏해야 경솔한 과장, 즉 제정신을 갖고 옹호하기에는 불가능한 과장이기 때문이다. 이 점이 그 옹호자들이 자기들이 이내 부정한 것을 그리도 자유롭게 제안하고 가정하는 이유이며, 필요한 순간마다 여기서 말하고서 저기서 번복하는 이유다. 나는 이 사례를 상당한 분량으로 이미 두 차례나 논의했다. 그 한번은 맑스주의 안에서 역사주의와 구조주의적 입장과 관련된 것이며, 좀 더 최근에 나는 맑스주의 안에 있는 ‘탈근대적’ 변종을 비판하였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다시 논의하지는 않겠다.2) 


그 대신 관점 (b)와 (c)의 공통의 약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집중하겠다. 약점은 이 두 관점 모두 인간의 기질 가운데 온정적이지 않은 성향들(이를테면 이기심과 질투, 악의적인 환희, 다른 사람들보다 우위에 있는 권력이나 유리한 입장의 향유, 배제의 열정, 잔혹함, 파괴성 같은 것들)을 인간사에서 독립적인 설명적 가중치를 지닌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실재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런 성향들이 역사 기록에 큰 흔적을 남긴 것처럼 보인다면. 그럴 경우 이 성향들은 실제적으로(그 시사점이 그러하다) 항상 다른 어떤 것의 산물이거나 발현이다. 어떤 개념에서는 아주 선량한 것으로 표현되고 어떤 개념에서는 고정된 내용이 없는 빈 것으로 표현됨으로써, 인간 본성은 그 자체로는 사태가 나빠지는 데에 어떤 역할도 하지 않으며, 인간이 악을 수용하는 능력은 단지 부수현상이 된다. 그런데 과연 이런 사유 방식은 실제 역사 기록이 얼마나 엄격한지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견뎌낼 수 있을까?


이제 많은 사회주의자들의 논의에서 발견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더욱 분명하게 낙관적인 가정들을 살펴보자. 그에 대한 몇몇 견해는 저 기록(밀리반트 자신이 현재의 맥락에서 언급한 20세기의 사건들 중에서 대부분이 미래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대체로 우울함을 갖도록 부추겼던 기록)속의 어떤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이제는 잘 알려진 그 용어에 대한 몇 가지 유보 사항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언급할 홀로코스트는 현대의 의식 속에서 두드러진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홀로코스트는 생존자들로부터 그리고 역사학자와 신학자, 사회 과학자, 정신분석학자, 소설가, 시인, 드라마 작가, 문학 비평가들로부터 광범위한 문헌을 만들게 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는 사회주의 윤리학과 정치철학에는 뚜렷한 징표를 남기지 못했다. 이는 윤리학자와 정치 철학자들이 홀로코스트에 관심을 갖고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홀로코스트는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변화에 헌신하는 사람에게 몇 가지 까다로운 문제를 제기한 인간의 재앙이었는데, 문제의 본질이 까다롭다는 사실이 이런  문제를 무시할 타당한 이유는 될 수 없다. 아우슈비츠에 수감된 적이 있었던 폴란드 사회학자 안나 파벨친스카(Anna Pawelczynska)의 말은 문제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오늘날 유럽 문명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상상력이 부족하여 자신들의 경험 속에서 비슷한 것을 찾을 수 없는 사실들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고 있다. ······ 살인자와 그 희생자가 속한 동일한 인간 종의 구성원으로서, 그런 사람들은 살인자나 희생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기를 거부한다. ······ [그들은] 강제 수용소를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악의 차원, 그리고 사람이 빠질 수 있는 깊은 경멸의 차원으로 이해할 때 생기는 결과로부터 자신의 세계관, 즉 자신의 낙관주의적 생활 철학을 보호한다.3)


진지하게 다룰 가치가 있는 사회주의 철학은 그런 ‘보호된’ 낙관주의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는데, 이런 식의 낙관주의는 냉혹한 현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런 현실을 차단한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보로프스키(Tadeusz Borowski)는 훗날 죽기 전까지 자신의 경험을 불굴의 공포스러운 이야기 시리즈로 만들어냈다. 그가 쓴 『방문』(The Visit)에서 나래이터는 수용소에서 목격한 인간이 처한 비참한 광경을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습진, 급성 결체 조직염이나 장티푸스 때문에, 또는 단순히 너무 여위었기 때문에 가스 방으로 옮겨진 사람들은 모두 화장터로 향하는 트럭에 그들을 실어 나르는 당번병들에게 자신들이 목격한 것을 기억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걸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간에 대한 진실을 말해달라고.4)


또 다른 생존자인 이레네(Irene W.)는 몇 년 동안, 삶을 억누르고 정상적으로 살 수 없게 만드는 자신의 기억(아우슈비츠 수감)을 떨쳐내지 않고는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웠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런데 그것은 항상 거기에 있어요. 그건 세계관 이상이지요. ······ 극단적 비관주의의 총체적인 세계관, ······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람들, 즉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정말이지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느낌 같은 것이지요.5)


그들은 그것을 ‘인류에 대한 진실’과 ‘사람들, 즉 인간 본성에 대한 진실’이라고 말한다. 두 사람 모두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진실이라고 말한다. 이 진실은 무엇일까?


그것[인류에 대하 진실: 옮긴이]에 다른 측면이 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몇몇 작가들이 쓴 홀로코스트에 대한 좀 더 이론적인 문헌에서 그것은 우리의 가정 (a)와 다소 닮았다. 따라서 신학자 루빈슈타인(Richard Rubenstein)에 따르면, “심층 심리학이 인간성의 지울 수 없는 어두운 측면을 노출할 수 있었던 것처럼”, 죽음의 수용소의 세계는 “문명과 야만적 잔혹성을 안티테제로 생각하는 것이 오류임을 보여주었다. ······ 인류는 결코 야만에서 출현하여 문명으로 발전해간 것이 아니었다.”6) 또 다른 신학자 코헨(Arthur Cohen)에게 홀로코스트는 공포, 일종의 가늠할 수 없는 악의 심연, ‘죽음의 향연’인데, 그는 비슷한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자유주의(그리고 그 급진적 형태인 맑스주의)는 유태인의 추락한 메시아주의, 즉 유태인의 유토피아적 희망의 친근한 세속적 전도 형태일지 모른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공포가 파괴했던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잠재적인 교육 가능성에 관한 가정들에 입각하고 있다. 홀로코스트에는 악의 형상이 있다. 그것은 주로 처음부터 인정되어야 했었던 것(악의 적대적, 파괴적 성격은 19세기의 ······ 합리적 낙관주의가 필요로 한 선의 지속적인 목적론이라는 관념의 신뢰도를 훼손시킨다는 것)을 크게 부각시킨다.7)


비슷한 것을 좀 더 간접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나는 간단하게나마 홀로코스트의 주제를 다룬 몇 안 되는 잘 알려진 현대의 정치 철학자들 중 한사람인 노직(Robert Nozick)을 그런 보기로 들겠다. 노직은 다양하고 무자비한 야만성을 열거하는데, 자세히 읽어 보면, 그가 썼듯이, 그런 야만성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정도이다.” 그는 더 나아가 홀로코스트를 “인간의 조건과 상태를 근본적으로 철저하게 바꾼” 사건으로 본다. 그는 그런 생각을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홀로코스트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주장하지 않겠지만, 조금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인류가 종말에 처하게 된다면, 즉 인간 종이 핵전쟁으로 파괴되거나 지구가 어떤 구름에 덮여 인류가 재생산을 지속할 수 없게 된다면, 홀로코스트는 특별난 비극이 아닐 것이다. ······ 다른 은하에서 온 생물체가 우리의 역사를 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만일 그 이야기가 끝나버린다면, 즉 그들이 목격한 인간 종이 핵전쟁으로 자신을 파괴하거나 다른 사정으로 지속할 수 없게 됨으로써 그 역사와 더불어 종말을 고한다면, 그들에게는 홀로코스트가 부적절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사실 노직은 또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에 제한을 가한다. 그가 인간에게 이런 일이 벌어져도 좋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일에는 많은 고통과 개인의 손실이 뒤따른다. 누군가가 실제로 그런 일이 생기도록 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노직이 다른 잔혹성이나 재난을 못 본 채 하는 것도 아니다. 그가 말했듯이, 어쩌면 진실은 “홀로코스트가 상황을 결정하고(sealed) 명확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그때마다 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다면, 우리가 하나의 종으로서 우리자신을 구제할 수도 있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이점이 인상적이긴 하다. 그러나 여기서 요점은 이런 다양한 조건들이 있는데도 이런 조건들에 의해 제한된 판단이 인류의 실제 과거와 가능한 미래 사이의 대차대조표를 결정한다는 점이다. 만일 “이제 그런 손실이 관련된 개인들의 손실을 넘어서는 특별난 손실이 아니”라면, 인류가 “지속 자격”을 이미 상실했다면(노직은 이미 상실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게 사실이라면, 구제 노력에 관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결국 과거에 저질러진 악의 잔악행위들에 의해 형성된 인간 종의 본성이 바뀌지 않게 되어 더 좋은 미래의 가능성은 낮아지지 않겠는가? 이미 이루어진 선은 말할 것도 없이 어떤 선에 의해서든 우리는 여전히 그 이상의 것이 생기기를 희망하지만, 형이상학적 체념과 절망의 판단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이미 저질러진 잔학행위와 범죄행위에 의해 특징지어질 뿐이다.8) 


노직이 여기서 숙고한 심도 깊은 경험을 고찰하면서, 똑같은 감정을 공유하지 않을 수 없다. 살인자 본인 또는 무수한 살인 방관자들의 성의 때문에 우리가 갖게 된 살인과정을 찍은 사진들, 홀로코스트의 ‘스냅사진들’을 참조해서 비젤(Elie Wiesel)이 이와 관련된 맥락에서 한 말은 적절하다. “그것들을 조사하라,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누군지를 잊게 될 것이다. ······ 어떤 것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당신은 밝히지 않았다면 좋았을 심연을 보게 될 것이다. 너무 늦었다.”라고 그는 쓰고 있다.9) 이런 커다란 공포에 같은 반응을 보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마도 불행할 것이다. 그런 공포에 부딪힐 때 생기는 체념이나 절망의 감정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들은 똑같이 저항해야만 한다. 우리는 노직의 판단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비관주의에 저항해야 한다. 오직 또는 원리상 최악의 과도함이라고 인간 본성을 일방적으로 정의하려는 시도에 저항해야 한다. 우리는 나치의 죽음의 영역과 인류에 대한 진실(the truth)을 같은 것으로 보는 이러한 판단에 맞서야 한다. 그래서 어쨌든 나는 궁극적으로 이런 논의에 착수할 것이다. 


그런데 노직의 판단에 맞설 때, 우리는 여기서 진실(a truth)이 무엇인지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단지 무심코 사회주의와 다른 유토피아적 기획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이런 진실을 방기해서는 안 된다. 보기를 들면, 이런 주장이 있다. 홀로코스트가 우리에게 드러내는 행동 양식과 인성적 특성은 전적으로 또는 크게 역사적으로 결정되는 사회적이고 상황적인 사건의 조건들에 놓여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홀로코스트 같은 사건을 통해 인간의 내적 또는 본성적 성향을 밝혀낼 수 없다. 나는 이런 주장이 제기하고 있는 진실의 방기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런 주장은 극단적인 사례를 설명하는 데 아주 타당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런데 삶과 죽음이라는 예외적인 조건들에 근거해, 인간이 처한 결코 전형적이지 않은 지옥 같은 상황에 근거해 인간 본성을 판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겉보기에는 아주 그럴듯하다. 이에 대한 첫 대답은 그런 특별한 지옥에서 얻은 그리고 그런 지옥에 대한 상당한 지혜를 우리가 보유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 지혜는, 명백히 존재 방식에 충격적이고 예외적인 특성들, 즉 지옥에서 구성되는 인성과 자세, 행위와 반작용이 또한 더 평범한 상황에 처한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그리고 그런 평범한 사람들에게 친숙한 특성들과 더불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경고한다. 이것이 괴물과 짐승이 아니라(또는 이런 괴물과 짐승이 도덕적 의미에서 어느 정도 필요하고 여전히 사용가능하므로, 괴물과 짐승뿐만 아니라), 너무나 알아보기 쉬운 인간의 악덕과 약점, 공통된 잘못과 결점을 특징으로 하는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살았던 세계였다.


이 점에서 가장 알아보기 쉬운 것은 방관자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대량 학살 과정에 직접적으로 적극 가담하진 않았지만 그걸 막기 위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르는 체 하고, 알려는 관심도 없고, 밝혀내지도 않는다. 또는 이들은 알고는 있지만 신경 쓰지 않으며 그에 무관심한 사람들이다. 또는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힘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다. 또는 (대부분의 우리들처럼) 자기 자신의 삶의 목표를 추구하는 데 짓눌려 있거나 산란하거나 여념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유럽에서 유태인들이 당한 비극의 배경을 이루었다. 그들은 잇달아 곳곳에서 크고 작은 다른 비극, 그리고 크지만 피할 수도 있는 고통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고 있다. 이런 방관자가 곳곳에 널려 있다는 점은 확실히 다른 사람의 거대한 고통을 보고서도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우리 인간 종의 주목할 만한 특성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보기 쉬운 것은 방관자만이 아니다. 범법자들도 있다. 이 주제는 어렵지만 주의 깊게 다뤄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주제는 그렇지 않을 경우 경박하고 신랄한 도덕적 냉소주의를 조장하고, 실제적으로 오직 보기만 한다는 태도를 촉진하기 때문이다. 이해할 필요는 있지만, 너무 이해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주제 자체는 회피할 수 없다. 우리가 예상하듯이, 만일 범법자 가운데 엄청나게 많은 새디스트와 흉악범들이 발견되어야 한다면, 그들을 좀 더 일반적으로 캠프 직원, 사형집행인, 노예 노동 사용 민간인(극도로 사용했음을 의미한다), 기획자와 관료, 그리고 죽음의 의사들로 구분해볼 수 있다. 이들 나치 인종학살 가담자들은 심리적으로 정상적인 상태였음을 기록한 방대한 문헌이 현재 있다. 그들은 대부분 정신병자가 아니라 정상인이었다.


같은 문헌을 통해 우리는 그런 보통 사람들이 스스로 또는 다른 사람에게 유인되어 악을 공유하게 되는 심리적, 사회적 메커니즘을 광범위하게 탐구할 수 있다. 이런 메커니즘은 많지만 나는 여기서 몇 가지만을 다루겠다. 즉 자기와는 다른 사람에 집중된 공포와 원한, 다른 사람에게 가해진 재앙을 보고 가진 자기 우월감 또는 심지어 우쭐함. 또 합법적인 고위층에 의해 행동권한을 부여받았다는 생각 또는 자기의 행동이 전체 과정에서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고 도덕적으로 말해 결정적인 행위가 아니었다는 생각. 또 그것은 단지 비인격적인 역할이나 일일뿐, 강한 의미에서 그 일을 완수하는 데 있어 특별한 개인에 귀책사유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 경력을 쌓겠다는 이기적인 동기. 동료의 의견과 다른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 압력에 간단히 굴복함. 그리고 점진적으로  누적적으로 연루됨. 일상적인 방식에 습관화됨. 많은 사람들의 경우 그 과정에서 희생자에게 궁극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서. 그들을 도덕적으로 무의미하게 여겨서. 처음에는 생각으로, 다음에는 사회적이고 상징적인 실천으로, 궁극적으로는 물리적인 의미에서 비열하고 야만적인 실천으로, 비인간화됨. 이러한 수단들이 합쳐지면서 그들은 선을 넘게 된다.10)


무엇이 말해지고 있는가를 강조하는 것만큼이나 무엇이 말해지고 있지 않은가에 대해 천착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런 일은 단지 그럴만한 상황이 되면 우리가 도덕 범죄의 교사자나 공범이 될 수도 있을 만큼 마음속 깊이 아주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를 확신시켜주는 일반적으로 믿어지는 비관주의와 인식 양식에서 생기는 게 아니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항상 거부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들이 있고, 비록 이런 일을 할 세력을 찾을 수 없어도, 여전히 문제의 범죄에 반대하거나 그 결과를 완화시키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다고 느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형 범죄행위에 가담하거나 순응하는 동기들을 탐구하는 일은 이런 동기들이 불가피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때로는 제한되고 위험할 수도 있는 선택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즉 더 좋은 이유로 다른 동기들에 비해 단지 숙달된 충동과 사유의 습관에 대항해 행동하겠다는 선택.


그러므로 핵심은 냉소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이다. 심지어 이런(때때로 말해지듯이) 극악무도한 20세기의 공포는 우리에게 친숙한 인간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잘 알려진 편견, 야망, 유혹, 권력의 맛, 책임회피, 도덕적 실패의 합성물이다. 철학을 하지 않거나 이론적 정치를 채택하지 않을 때, 사회주의자와 여타 급진주의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존중할만한 특질과 탁월성, 또 덜 존중할만하고 아주 혐오스러운 요소들로 구성된 동기의 범위를 알고 있다. 이 범위는 단순히 보통 사람이 지닌 특성의 일부다. 이것은 모든 생활 영역에서 취해진 실천적 경험의 형태다. 즉 모든 가족, 친구와 지인, 모든 이웃.  모든 주위 환경, 사회 계층, 직업, 조직. 그것은 질투와 허영, 사소한 불친절과 증오, 사기, 자기 중시와 자기 PR의 경험, 다시 말해 관대함, 사랑, 용기 등을 합쳐놓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홀로코스트 자체에서 얻게 된 지식을 보완해준다. 즉 다른 상황이나 맥락에서 갑자기 지나치게 변할 수 있는 그런 공통의 악덕과 인간의 결점, 그리고 커다란 악의 통상적인 소재에 대한 지식이다


이런 맥락에서 마지막으로, 심각하게 고려해야만 하는 희생자 집단이 있다. 그런 집단에 불균등하게 퍼져있지만 공통의 악덕과 결점을 똑같이 공유한다는 점에서, 그 집단 역시 범법자들의 범죄 때문에 더렵혀진다. 이는 또 다른 어려운 주제다. 외부에서 이 주제를 있는 그대로 쓴다는 것은 타자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 보일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외부자들은 모두 이 점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레비(Primo Levi)가 지적했듯이, “우리가, 비슷한 상황에 처해본 적이 있는 사람들, 그래서 강압적인 상황에서 한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스스로에게 시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맡기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판단이다.”11) 나는 나치 수용소와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전하는 좀 더 일반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레비를 통해 제시하고자 한다. 스스로 명명한 ‘회색 지대’를 검토하면서, 레비는 이런 주제에 대해 어떠한 냉소주의도 물리치고 확고하게  썼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살인자가 어른거리고 있는지에 대해 나는 알지 못하며 그것에 대해 별 흥미도 없다. 그러나 나는 죄 없는 희생자이지 살인자가 아니라는 사실 …… 그리고 [살인자]와 희생자를 뒤섞어 놓는 일은 도덕적 질병이거나 미학적 오염이거나  불길한 공범의 징후… … 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12)


그러나  또 “국가 사회주의와 같은 극악무도한 체제가 있어, 그것이  희생자들을 신성화했다고 믿는 것은 순진하고 터무니없으며 역사적으로도 오류다. 그와는 반대로 그러한 신성화는 오히려 희생자들을 타락시킨다.”고 레비는 말한다. 회색 지대는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가운데 한 특징이다. 그는 이 개념으로 ‘희생자와 박해자를 분리시키는(그리고 나치 수용소에서뿐 아니라) 공간’에 대해 언급한다. 


오직 도식적 수사만이 그런 공간이 텅 비어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비어있지 않다. 그 공간은, 우리가 인간 종을 알고 싶다면,  동일한 시험이 또 우리 앞에 나타날 때 우리의 영혼을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지 알고 싶다면, 또는 심지어는 큰 공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 원한다면, 우리가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추잡하거나 애처로운 인물들(때로는 이들은 동시에 이런 두 가지 특성을 갖고 있다)로 점점이 박혀있다.13)


회색지대는 ‘주인과 노예의 양 진영을 분리시키면서 동시에 결합하는 모호한 경계’를 갖고 있다고 레비는 말한다. 만일 그곳이 전혀 비어있지 않다면, 이는 ‘수용소 안팎에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는 회색의 모호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기’14)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레비가 나치 수용소와 다른 계서제 권력의 장소를 쉽사리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런 비교는 우리들의 그리고 우리 가운데 ‘표시를 당한’, ‘문신을 당한’ 사람들의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 절대권력(Fiat)에는 가스방이 없다.” 그러므로 막 인용한 이런 구절에서 그가 되풀이해서  ‘수용소 안팎의’ 몇몇 비슷한 요소들을 언급한 것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나치 수용소는 그에게 그곳 너머에 있는 세계의 단순한 ‘축소판’이나 소우주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데도 그는 나치 수용소를 그런 세계의 ‘일그러진 거울’로 기술한다.15)


그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공통으로 전하는 풍경이다. 레비는 또 말한다. “자기 동지의 등 뒤에서 이익을 얻는 죄수는 어디든 존재한다.” 레비-하스(Hanna Levy-Hass)는 벨젠에 수용되어 있는 동안 쓴 일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본 모든 것, 내가 경험하고 배운 모든 것, 인간 본성이 내게 보여준 모든 것을 ······ 확실히 기억할 것이다. 나는 우리를 둘러싼 이런 조건에서 사람들이 했던 행동 또는 할 수도 있었던 행동 방식에 따라 그들을 평가할 것이다.”  프란클(Viktor Frankl)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본성상 오직 선악의 공존이라는 인간의 특성을 마음속 깊이 또 다시 발견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일까?” “수용소에서 … 우리는 다른 동지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비열한 돼지처럼 행동한 사람들을 목격했다. 사람은 자신의 내부에 두 개의 잠재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16)


세레니(Gitta Sereny)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가진 대화를 토대로 “그들 자신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불가피한 인간적 결함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숙명적으로 열정을 결여하고 있다”17)고 말한다. 그리하여 나치의 야만성에서 얻은,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 얻은 지혜와 함께 고대의 아주 상식적인 지식이 그녀가 밝힌 태도 속에 결합된다.


이제, 이런 종류의 의견들에 대해 표준적인 사회주의의 반론과 더 광범위하게 말해 진보진영의 반론이 있다. 이런 반론은 일격에 그런 의견들이 순수한 지혜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상식은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라고들 한다. 그리고 소위 실천적 경험도 오직 경험 구속적이라고들 한다. 둘 다 모두 특별한 사회적 형태, 역사적으로 특이한 세계의 산물이다. 그 자체로, 상식이나 실천적 경험은 모두 미래의 가능한 세계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다른 사회적 형태를 가진 행동 양식으로 이끄는 신뢰할만한 이정표가 될 수 없다. 캠프 안이든 밖이든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은 기형적인 사회 환경에서 자랐던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우주는 보통 사람들이 살아온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치자. 그렇지만 이들 보통 사람들은 자본주의와 계급, 가부장제 등에 의해, 그리고 권력 상의 총체적 불평등과 차별에 의해 주조된 인간,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그들의 태도를 깊이 제한하고 타락시키는 효과들에 영향을 받은 인간이다. 그 결과 홀로코스트의 경험에서 우리가 얻은 것은 그것을 낳았거나 또는 그것을 받아들였던 사회 유형에만 해당된다. 그것은 급진적으로 변형될 미래 사회의 전망과 성격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 가운데 진보적인 혁명적 변화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이런 일반적인 논증들에 비중을 두지만, 전체적인 면에서 볼 때 그런 논증들은 부적절하다. 즉 그들의 답변 대상이 되며 또 인간에 대한 이야기 거리가 많은 무서운 범죄행위와 좀 더 평범한 개별적 결점들 둘 다에 부딪힐 경우에. 나는 여기서 단지 이런 이야기의 부정적 특징들을 역사적으로 특이하고 치유할 수 있는 종류의 사회 공학적 결점으로 환원함으로써, 그런 부정적인 특징들을 ‘중립화’하려는 일이 왜 설득력이 없는지 그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하겠다. 그런 일은 인간 진보의 희망에 빈곤한 기초일 뿐이다.


첫째, 이런 영역을 다루는 맑스주의 계열의 논증이 있을 수 있는데, 사변적 성격의 대형 기획에 회의적인 사람도 있기 때문에, 이런 논증은 또한 훨씬 광범위한 설득력을 가져야만 한다. 이런 논증은 더 좋은 미래 사회는 현재의 실제적인 경향에서 출현할 것으로 생각되고 쟁취되는 것이지, 현존하는 경험적 세력들에 또는 그런 세력들의 적절한 통제에 매어있지 않은 단순한 추상적인 이상으로서 현재에 대립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런 논증은 가령 가시적으로 실현 가능한 정치 경제적 목표는 무엇인가 또는 그 달성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많이 이용됐지만(그리고 맑시스트만 이용한 것은 아니다), 논의되고 있는 주제와 관련하여서는 사회주의자들이 자주 도입하는 논증은 아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또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좀 더 특별히 말하면 그들이 갖고 있는 한계는 무엇이고 이런 한계가 실행 가능한 대안적 미래의 모습을 어떻게 제한하게 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될 때, 사회주의 옹호가 상당히 주목할 만큼 도약했다고 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로써 우리는 현재 모습을 가진 존재에서 인간의 친숙한 결함과 악덕으로부터 훌륭하게 해방된 존재로 또는 이런 결함과 악덕으로 하여금 불유쾌한 외적 효과를 드러내게 만들었던 상태로부터 어느 정도 구제된 존재로 바뀔 수 있다. 즉 잘 알려진 어구로 말하자면 ‘괄목상대할(beyond recognition)’ 만큼 개선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서있는 지점에서, 즉 우리가 친숙한 도덕적 강점만큼이나 도덕적 약점을 가진 인간적 동기부여의 현실에서 출발해야지, 단순히 사변적 이상을 향해 날아가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다른 사유 영역에서만큼 이런 사유 영역에도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은 그런 실체 없는 이상에서 안이한 피난처를 찾는 것은 맑스주의 형태의 사회주의자든 다소 현실적인 마음을 가진 다른 사회주의자든 그들에게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이상을 이보다는 더 멀리 가져가고 싶다. 일부 사람들이 그것을 단순히 정치적인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국면의 비중을 최소화하려는 유혹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근사적인 실천적 성공의 희망을 주려고 하지만, 장기적으로 인간성의 변성(變性)이나 고정성의 정도에 대한 깊은 이론적 중요성이나 함의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면은 더 깊어져간다고 나는 주장한다.  이로써 어떤 해방 기획의 틀에서도 인간 역사는 연속성과 저항, 그리고 일부는 유물론적이라 말하겠지만 특유의 관련성이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게 된다. 이런 역사는 확실히 불연속성뿐만 아니라 연속성을 포괄한다. 몇몇 연속성은 장기적이다. 이들 장기적인 연속성들은 정확히 외적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적인 자연(맑스가 자신의 저작에서 역사적 특수성과 변화를 강조한 것을 볼 때, 그가 부수적으로 인식한 상황)에 결부되기 때문에 장기적이다.


인간에 보편적인 정서들을 들어보겠다. 말하자면 분노, 욕망, 사랑, 공포심, 자부심, 수치심, 우울, 혐오감. 또 몇 가지 익숙한 성벽, 즉 성적 맥락이든 그렇지 않든 굴종과 지배, 그리고 공동체, 자생성, 항구성, 자존심. 좀 더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와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능력처럼, 그런 정서와 성벽은 명백히 일반적이고 초역사적인 토대다. 그런 정서와 성벽의 형태가 어떠한 문화적 변형태를 내보이더라도, 그것들이 모두 전적으로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 사회의 관념이 ‘괄목상대’라는 구절에 제대로 그리고 참되게 의미를 준다고 말하는 것은 개연성이 없을 것이다.  이런 세계는 우리가 실제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세계다. 그런 세계가 새로운 종류의 ‘인간’에게 유토피아가 될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여기서 볼 때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제 역으로, 그리고 똑같지 않지만, 덜 매력적인 인간의 특성과 성향을 알아보자. 즉 (앞서 열거한 것들에 느슨하게 상응하는 목록) 증오나 복수심, 탐욕, 갈망과 질투심, 과도한 애착, 도덕적 비겁함, 허영심, 자기비하, 파괴성. 그리고 노예근성, 권력욕, 잔혹성. 그리고 인종적 편견, 무법성, 광신성, 무제한적 특권. 우리는 이런 특성들이 아주 적은,  특히 커다란 특권의 계서제, 난폭한 권력의 장소, 연속적인 집단적 폭력 등을 통해 얻은 진보나 성장의 수단 그리고 합의된 공적 공간이 적은 세계의 가능성을 믿고 싶다. 그런데 인간의 이런 추한 속성들이 사라지기까지 한 세계는 얼마나 더 개연성이 있거나 상상될 수 있겠는가? 그런 특성들은 일반적으로  보편적인 정서와 성벽들에 이러 저러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런 특성들의 과장되고 악화된 형태들, 그것들의 고착화, 퇴화, 불균형의 방식으로. 이는 아주 다양한 인간 상호간의 조건과 관계(또한 다소 공정하게 배분된 자유의 사회에서 항상 존재하게 되어 있는)에 의해 그런 특성들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해도, 그런 특성들 역시 어느 정도까지 지속 가능한 자연적 기초를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 인류는 어느 정도 이런 덜 유익한 인간의 속성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좀 더 현실적일 것이다. 어쨌든 만일 사회주의가 앞으로도 여전히 인간의 사회라고 한다면, 많은 부분이 동일할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보편적인 결점과 악덕이 사라지거나 거의 사라질 수 있다고 말해줄 수 있는 것은 가장 공허한 억측밖에는 없다. 중대한 해악을 생산한 모든 것은 역사의 불연속성에, 그리고 사회적으로 산출된 것에 속하며, 그 가운데 어떤 것도 우리의 근본적인 인간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해줄 수 있는 것도 억측이다.


이런 논의는 내가 제시한 세 가지 이유 가운데 두 번째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어떤 것도 전혀 또는 거의 인간 본성에 귀속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런 사회학적 유형의 논의들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 특이한 특징들이 어느 경우에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말하자면 고정된 양으로 설명하는 방식, 즉 (짧게 말해) 인간 본성에 대한 사회학적 설명과 자연주의적 설명은 반드시 거꾸로 변동한다는 식의 가정이다. 만일 인간 행동이 사회적 조건과 많이 관련이 있다면, 그 행동은 자연적 특성과 거의 관계가 없게 된다. 만일 인간의 행동이 사회적 조건과 아주 많이 관련이 있다면, 그 행동은 자연적 특성과 아주 거의 관계가 없게 된다. 등등. 또는 질적인 차원에서 표현할 수도 있는데, 만일 사회적인 것이 인간 행동을 설명하는데 아주 중요하다면, 인간 본성은(만일 이런 본성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해도 된다면) 아주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이런 방식이 주제에 대한 유일한 사유방식은 아니며,  가장 설득력 있는 방식도 아니다. 그와는 달리 사회 구조와 문화적 관습이 갖는 설명적 가중치가 얼마나 되든지 간에(그리고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하다) 우리의 자연적 특성과 관련된, 그 자체로 상당히 중요한 설명적 가중치 역시 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와 문화의 특수성이 인간의 행위 형태와 성향의 흐름과 가치들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만큼, 그런 특수성은, 대담하게 말해서, 사람들의 잠재적 행위와 존재에 대해 작용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그런 가중치 역시 존재한다. 그런 특수성은 일정한 한도 내에서 우리 종의 자연에 의해 설정된 잠재성들에 대해 작용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신은 다양한 사물들에 적응하도록 말을 훈련시킬 수 있고 고양이를 그런 사물들에 익숙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말을 읽을 수 있도록 가르치거나 고양이를 채식하게 만들 수 없다. 당신은 물건처럼 영원히 꼼짝도 하지 않고 지낼 수도 없다. 그런 것처럼, 인간의 행동과 지속 가능성에는 자연적 한도가 있다. 하나 또는  또 다른 하나의 사회적 표현 형태를 갖는 자연적 욕구와 역량 그리고 충동이 있다. 그런 자연적 결정인자가 사회적 형태의 풍부한 다양성, 그리고 억압할 수 없는 인간 의지의 자유와 상상력의 창조성이라는 인간사(人間事)에 끼친 기여는 티끌만큼도 뺄 수 없다.


랄프 밀리반트의 의견으로 돌아가 이런 점이 우리의 주제에 타당한가를 살펴보겠다. 나는 일찍이 그의 의견에는 인간 본성은 선과 악의 잠재성이 혼합돼 있다는 가정(d)에 근거해 진보의 희망을 긍정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는 측면들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그의 정식화가 인간의 갈등이 상당히 줄어들겠지만 여전히 지속하는 사회주의를 상상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이런 정식화는 그 자체 필연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지속적인 악행의 가능성을 허용하고 있다. 사실 밀리반트는 “집단적 악행과 개인적 악행이 점차 주변적인 현상으로 바뀔 수 있는” 같은 상황의 맥락에서 쓰고 있다. 그리고 그는 또한 “집단적 잔혹성은 그것이 초래하게 될 저항 때문에 불가능하게 되는” 맥락에 대해서도 쓴다.18) 이런 두 가지 예측은, 이 말을 쓸 수 있다면, 잠재적 악의 공간이 지속될 것임을 시사한다.


사회생활의 주변으로 밀려갔던 것은 여전히 주변에 공간을 갖고 있고, 아마 그래서 또 그 삶의 터전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주변적인 것이, 기어서든 난입해서든, 종종 중심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초래할’ 저항에 의해 불가능하게 된 것(집단적 잔혹성)은 그것을 여전히 지속시키는 충동을 갖고 있어, 예전엔 존재했었지만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이미 제거됐거나 서서히 사라진 것에 대한 역사적 기억과 생생한 역량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추론에 비추어 나는 “연대와 협동, 안전과 존중을 촉진하는 조건, 그리고 이런 가치들이 생활의 전 영역에 걸쳐 다양한 풀뿌리 제도들에 의해 실체로 주어지는 …… 조건”19)을 언급한  밀리반트의 말을 해석해 보겠다. 그런 조건과 제도들은, 최소한 부분적으로, 외적으로 막거나 방해하며, 동시에 수용하고 조장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그런 조건과 제도들은 일정 유형의 인간의 성향이나 충동에 장애물을 설치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유형에는 여지를 남겨둔다. 그런 조건과 제도들에 대한 그러한 개념화는 정확히 내가 명명한 잠재적 악의 공간의 존재를 허용한다. 이는 교육이나 사회화 등으로는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 지속성 있는 까다로운 성향과 충동이 막힐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블로킹 은유에서 그러하다.


이와는 다르게 개념화하면 인간 또는  사악한 인간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조건과 제도들의 산물이라는 명제를 얻을 수 있다. 즉 이런 조건과 제도들을 개인적 자아의 내적인 핵심을 ‘소유’하는 것으로 개념화하거나 그것을 파괴하는 것으로 개념화한다. 그래서 일단 좋은 사회적 환경이 주어지면, 우리는 오직 선량한 개인들을 갖게 되어 유의미할 정도의 악의나 사악함이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다. 이제, 물론, 사람을 적절히 개념화하려면 이런 후자의 개념화에서  상당히 큰 요소가 필요할 것이다. 확실히 사회구조와 문화가 사람의 성향 속으로 ‘들어가서’ 그 고유의 정체성을 구성하기 때문에, 그런 사회구조와 문화는 개인들의 인간의 자연적 성벽들이 자기 길을 만들어 나갈 때 넘어서고 따라가야 할 장벽이나 통로로서 또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관점의 전체적인 균형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 내가 지금까지 초점을 두었던 것과는 다른 측면을 보이고 있는 밀리반트의 의견은, 내가 보기에, 정당화될 수 있는 이상으로 그를  사회적 조건에 대한 이런 소유적 또는  파괴적 개념화의 극한에까지 밀고가게 한다.  


그가 병리학 은유를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해야겠다. 이 에세이의 초두에 인용한 긴 구절을 다시 언급하면, 우리는 밀리반트가 거기서 계급과 인종, 성과 종교의 ‘상처들’을 언급했음을 알 수 있다-비록 잔혹 행위나 다른 범죄들이 정상적인 유기체의 내적 가능성들에서 유래하지 않은 손상의 결과였다고 해도. 동시에, ‘병리학적이고 병적인 기형’을 다루면서 그가 한 말은 건강한 신체와 무관한 질병 이미지를 환기시키며, 외재적 기원의 이미지를 또 한 번 환기시킨다.  잔혹성이 ‘착취와 지배에 기초한 사회’의 심리적 부산물이라는 설명과 ‘인간 본성에 제거할 수 없게 고착된 성향’이라는 설명을 대조하면서, 밀리반트는 잔혹성이  ‘주로’ 전자에 의해 생산된다고 말한다.20) 그러나-그리고 이 문제는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핵심적인 난제다-이런 공식은 일방적이고 오해를 주는 공식이다. 이런 맥락에서 무엇이 ‘주로’인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지금보다 또는  거의 그렇지 않은 때보다 훨씬 덜 잔인하게 행동하게 될 다른 사회적 조건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잔혹성이 원리상 적대적인 사회적 조건에서 기인한다는 판단을 입증하는 데에는 이런 공식이면 충분하다고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인간을 상상할 수도 있다. 즉 적대적인 조건에서도, 인간이  아주 수없이 저질러 왔던 잔혹성과 억압, 무절제와 폭력 등의 극단에 이를 정도로 격분하지 않는 인간 말이다. 핵심은 적대적인 사회적 조건이 자연적으로 한정지어진 잠재성과 성벽들의 일정한 배치에 대해서만 영향을 끼치는 효과를 갖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이게 사실이라면, 그런 잠재성과 성벽은 또한 ‘주로’라고 설명될 수 있는 특징을 가질 만하다.


이 주제는 밀리반트의 논의에 있는 다른 측면을 고려함으로써 더 자세히 설명될 수 있다. 그는 자기 의식적으로 그리고 명시적으로,  ‘인간 본성에 죄가 있다는 입장’에 대해 ‘대량 학살의 시작과 조직화는 거의 항상 위로부터 내려왔다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을 대비한다. ‘보통 사람인 대중’은 대량 학살을 낳은 결정에 거의 책임이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런 집단행동은 대부분 자신들을 움직였던 목적과 환상을 추구하는 권력자들에 의해 주창되고 조직됐다.’ 밀리반트는 동시에 보통 사람들이 그럼에도 종종 권력자들에 의해 주창된 유혈극에 충분히 순응하거나 들뜨거나 가담했다는 사실을 덧붙임으로써 이런 사실에 대한 너무 안이한 낙관주의에 제한을 가하고 있다.21) 그러나 그런 제한은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권력자들은 다른 데서 온 게 아니라 우리들 사이에서 온 것이라는 점을 또한 분명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 인간 종의 구성원, 즉 단순히 권력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권력과 특권의 장소를 점하려는 후보자들로 넘쳐나는 우리 인간 종의 구성원이다. 인간은 이런 측면을 이용할 수 있고 또 능숙하다는 점을 스스로에게 보여주었으며, 이런 측면이 그들이 갖고 있는 내재적 본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믿는 것은 헛된 믿음이다.


자칭 맑스주의(또는 단지 사회학적) 논의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본성이 계급, 권력, 특권 등의 효과이지, 이들 중 어느 것도 우리의 본성의 효과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답변을 하는 맑시즘(그리고 사회학) 도 역시 있을 수 있다. 그런 맑시즘에 따르면 사회조직의 계급 선택권과 권력 및 특권의 이익이 인간 자신의 어떤 기질적 충동과 맞아떨어지지 않았다면, 인간은 그것들에 대해 지리적인 차원에서 보편적으로 그리고 시간적 차원에서 장기적으로  개방되지(그리고 개방적이지도 아주 유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 인간은, 만장일치로 또는  유효할 정도로 충분히 많은 숫자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 강력한 권력과 유리한 입장을 향유할 기회를 인간 자신에게 견딜 수 없고 인간적으로 사는 보람이 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딱 거절하지 않았는가? 이는 마치, 일생동안 악한 행동을 할 만한 수많은 기회를 맞아서, 그런 기회를 취해, 사람들을 속이고, 그들의 희생의 대가로 부당 이익을 취하며, 공개적으로 사람들을 해치고, 잠도 안자면서 이런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이런 행동은 자신의 내적 성격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오직 외적 환경의 결과일 뿐이라고 변명하는 것과 같다. 그런 사람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자기 본성에 다른 인생을 창조할 수도 있었을 간과된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감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가능성으로 하여금  그가 실제로 행동의 자유를 주기에 적합한 것으로  보았던 성격의 특성들을 모호하게 만들도록 할 만큼 지혜롭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악행을 저지르는 개인에 대한 또 하나의 의견을 다룸으로써, 나는 인간이 저질렀던 모든 악행을 결함이 있지만 교정 가능한 사회적 조건들의 영향에 귀속시키려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 세 번째 이유를 제시하겠다. 우리가 종종 인간의 성격 속의 사악함을 보기 싫어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관대한 충동이 있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른 적이 있더라도 앞으로는 더 선한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그런 악행에 이르게 했던 사항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도덕적 자유의 급부를 준다. 이런 가능성을 상상하면서, 우리는 그 사람이 저질렀던 악은 그 사람의 실제 성격에 외재적인 것으로(그 사람이 그렇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음을 확신하면서) 다룬다. 진보적인 정치 담론과 보다 일반적으로는 사회과학과 인문학에서 발견되듯이, 그리고 앞서 내가 명명한 가정(b)와 (c)에 공식화된 인간 본성에 내재적인 악성을 부정하려는 강한 욕망은 그 자체로 아마도 이런 관대한 충동의 방법론적 일반화로 보일 수 있다. 이는 미래의 유토피아에 존재하게 될 더 유망하고 포괄적인 조건과 제도들 내에서 인류의 성격은 선할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입장이 전반적으로 보아 사회주의적 가설의 특징이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전체로서의 인류는 다른 제도적, 문화적 조건에서 인류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것보다 훨씬 더 선한 성격(이런 용어를 사용한다면)을 가질 수 있음을 증명할 수 없다면, 사회주의의 희망은 망상으로 간주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제안을 인간이 선하게 개선되리라는 광범한 기대 이상으로서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상당히 큰 인간의 추악함이 거의 사라진 세계가 존재하게 되리라는 희망으로서 받아들인다면, 그 제안은 자멸적이다. 왜냐하면 그런 제안의 정신에 비추어, 사람들이 좋은 부양 조건에서 자라고, 상상만큼 사람들에게 겁을 주거나 위축되게 만드는 사회악에 의해 위협받지 않고 삶을 영위하며, 자신들의 모든 태도 속에 인본적이고 관용적인 문화가 강화되는 조건에서도,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지속적인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는데, 왜 그런지에 대해 질문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간단한 답은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선한 행동 양식의 기회가 있는 만큼, 악행은 단지 그들이 갖고 있는 자유의 가능한 산물이 된다.


 미래의 사회주의에서는 엄청나게 확장되고 고양된 자유를 가진 존재들이 거주하리라고 보는 것, 그리고 동시에 그런 존재들이 현재의 양호한 사회적 조건의 피조물이어서 악한 선택의 창시자가 될 수 없다고 상상하는 것은 사실 사회주의적 미래에 대한 보편적인 사유방식의 한 가지 변종이다. 그런 존재가 존재할 수 있다. 이런 가설에 따르면, 그들이 자신들을 둘러싼 조건들에 철저히 구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자유가 함축하는 바다. 그리고 이 점은, 내가 이미 지나가면서 독자들에게 고려해보라고 요청한 바 있듯이,  범위와 다양성의 측면에서 인간 상호간에 어떤 관계가 지속되어야 하는가를 고려할 때 특히 더 그러하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형제와 자매의 관계, 연인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연인들과 가능성이 있거나 현재 진행 중인 다른 연인들의 관계 등. 친구, 이웃, 협력자, 동지, 직장 동료, 보행인, 지인들의 관계. 보호자와 피보호자, 의사와 환자, 공무원과 민간인의 관계. 대담성과 신중함, 질서와 혼돈, 정력과 사고력 또는 지루함의 관계. 동의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 ‘내부자’와 ‘외부자’의 관계. 그리고 그 다음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범주에서 차이의 복수성을 가진 관계-이것은 인간의 접촉과 상황에 대한 끝없이 이동하는 그림일 것이다. 이런 형태들의 복수성 내에서, 추정상 선례가 없는 영역의 자유는 단지 양호한 ‘효과’(즉 일반적으로 양호한 상황의 효과)로서의 사회주의 인간상을 설득력 없게 만든다. 


시야를 넘어 사회주의 기획의 심장부에 그늘이 깔리고 있다. 이 그늘은 거리상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이는, 농축된 우주의 심연으로부터 거기까지 뻗어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거의 무한한 잠재성의 세계로 생각된 적이 많았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지구의 모든 사람들에게 다소 안전한 생존의 기회까지 제공됨으로써 활짝 열리게 더 풍부한 창조력을 우리는 이제 예상하거나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풍부한 창조성을 보기만 한다면,  누구나 화들짝 놀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계 없는 인간의 가능성이라는 관념을 다룬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또 다른 나치 학살 장의 감금 그리고 노예 생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정확히 그런 점에서 거기서 배우게 된 것을 명확히 말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른다. 비록 증거가 그들의 지성으로 하여금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한다고 해도, 그들의 근육은 그걸 믿지 않는다. 피수감자는 …… 알고 있다.’고 로셋(David Rousset)은 썼다. 그와 비슷하게, 잭슨(Livia E. Bitton Jackson)은 ‘[그녀]가 인간의 잔혹성에는 한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기 전’의 시간에 대해 썼다. 델보(Charlotte Delbo)도 ‘당신은 고통이 무제한적이고, 공포는 누그러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가?’라고 물었다. 레비는 “수용소에서 그리고 좀 더 일반적으로 인간의 무대에서 모든 일이 발생한다 …… 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비젤도 “선보다 악이 무한성을 더 시사한다”22)고 말한다.  


 무엇이 알려졌는가라는 질문 양식으로, 세레니가 말한 열정이 없는데도, 확신에 찼지만 도그마를 강조하지 않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악이 무한성을 나타낸다고  말하는 것은 우연일까? 그들은 사회주의적 비전이 홀로코스트의 경험과 공유한 부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인간의 최선의 희망과  인간 정신의 가장 극악한 최악의 산물을 비교하기 때문에,  확실히 그것은 ‘작은’ 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작아도, 그것은 상상하고 선택하는 능력, 시간이든 상황이든 경계든 주어진 것을 뛰어 넘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아주 풍부하다. 일단 큰 악을 낳는 커다란 (사회적) 원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그런 큰 악이 더 이상 지속적인 위협이 될 수 없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큰 악은 위대한 선의의 행위들처럼, 명작처럼, 상상력과 의지를 매개로 확대되거나 변형된 일련의 작은 원인들로부터 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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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비극이 지금 지난 2세기에 걸쳐 신봉되어온 서구의 문명화와 근대성의 가정들을 심각하게 의문에  부치고 있다는 사실은 홀로코스트 논의에서 보편적인 주제가 됐다. 프리드랜더(Henry Friedlander)가 썼듯이, “18세기 이래 우리는 진보의 관념을 비롯해 대체로 계몽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 홀로코스트를 심각하게 고려함으로써 그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또는 다른 작가가 요즈음 표현한 것처럼, “아우슈비츠는 이성, 도덕적 개선과 행복의 조화로운 성장을 믿은 계몽주의 시대를 결정적으로 폐쇄했다.”23) 나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실제적인 재평가가 필요하며 인간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에 동의하면서 이 에세이의 결론을 내리려 한다. 그러나 그런데도 인간의 진보에 대한 희망과 특히 사회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은 필요하고 또 지지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희망에 대한 다른 대안은 아주 호소력이 없다는 것을 논증함으로써 결론을 내리려 한다. 


 목적론, 필연성, 완전성, 또는 이상향 같은 가정들에 휩싸여 있는 한, 사회주의적 전통 그리고 좀 더 일반적으로는 민주적이고 급진적인 정치적 전통을 특징지은 진보의 개념은 확실히 완화될 필요가 있다. 퇴보와 재앙의 가능성이 없는 꾸준한 전진 운동의 필연성은 결코 없다. 완전성이나 이상향은 말할 것도 없이 심지어 ‘온건한’ 유토피아도 미리 정해진 진리나 인류의 운명도 심지어는 유력한 경향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은(우리는 희망해야 한다) 그 가능성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가능성은 다른 더 어두운 가능성에 의해 내부로부터 영원히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지난 세기(19세기)의 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이런 종류의 무시무시하고, 이제 증명됐듯이, 중단 없는 학살 장소들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그 자체로 그들이 공유했던 진보 사상이 결여했던 것, 잠재적 재앙의 그림자, 우리의 최상의 이해력에 도전하는 악의 형태들의 위협에 대한 증언이다. 


우리는 오늘날 인간의 진보에 대해 궁극적 진리나 종착점, 직선적인 중단 없는 전진의 진보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진보를 단순히 우리에게 익숙한 가장 중대한 사회적, 정치적 악이 제거된 사회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는 끈질긴 전투, 그리고 개방적인 과정으로 생각해야 한다. 즉 사라진 악의 부활, 바람직하지 않은 불평등과 특권의 재출현, 모든 박해, 간헐적이거나 그리 간헐적이지 않은 불법행위, 크고 작은 폭정, 다른 사람들에 대한 범죄,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악의 형태 등을 예방하거나 물리치거나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진보의 모든 이미지를 어쨌든 모든 실천적 목적에 본질적인 여행 경로, 길, 여행으로서 또는 발전의 전개도나 선, 끝없는 투쟁 정신24)으로 바꾸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앞에서 벌어진 일에 비추어, 나는 우리가 또한 소외의 종말이든, 치안 걱정 없는 사회적 조화든, 심각한 악행의 제거든, 새로운 정치적 위협이나 오래됐지만 새로워질 수 있는 위협의 부재든, 훨씬 더 야심적인 모든 비전을, 정확히 말해, 온건하거나 최소한의 유토피아로 작업가설을 대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온건한 또는 최소한의 유토피아란 개념이란 일반적으로 사회 구성원들에게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충족된 물질적, 사회적 기초를 제공하는 사회 형태, 우리에게 익숙한 가장 중대한 사회적, 정치적 악이 제거된 사회 형태를 뜻한다. 이런 대체의 핵심은 그 자체로 더 야심적인 비전들, 다시 말해 보편적이고 전면적인 개인의 발전, 영구 평화, 편재적인 이타주의 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대체는 다음과 같은 것에 초점을 둘 뿐이다. 즉 전체적으로 잘 알려진 특정의 악들이, 최소한 가능할 경우, 궁극적으로 치유되어야 하느냐가 중대한 문제거나 긴급한 요구인지를 알기 위해서, 어떤 비전이 인류에게 실제적으로 가능한지를 우리가 알 필요는 없고, 사실 알지도 못한다는 점이다.


급진적인 제도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데 완전성이나 유사 완전성, 심지어 놀랄만한 탁월성이라는 이상이, 그리고 외적 사태로서나 인간의 내적 성격으로나 우리에게 필요치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 변화가 없다면 불법행위나 때로는 끔찍한 불법행위의 관계들 그리고 비참하고 무시무시한 생활조건들이 지속하게 되리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런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면,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좀 더 최대주의적인 꿈들은 스스로를 돌보게 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런 꿈들은 스스로를 돌보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런 꿈들은 또 다른 날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그건 덜 중요하다. 나는 지구의 모든 사람들에게 다소 안전한 생존을 펼쳐주기에 가능한 창조적인 결과에 관해 성찰해 보겠다. 그런데 이것을 하는 경우는 성찰의 힘으로 생각될 수 있는 것과 상관없을 정도로 아주 강력하다.


나는 그래서 진보와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제한된 관념을 지지한다. 이에 대해 두 가지 또 다른 핵심적인 사항을 간단히 다룰 필요가 있다. 첫째, 제안된 개념이 제한적이거나 온건하거나 가장 적은 것이라고 해도, 이 개념을 단지 널리 퍼져있는 경제적, 사회적 질서, 세계 자본주의의 질서에 대한 작은 수정을 통해 가시적인 목표들이 얻어질 수 있다는 생각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개념은 전형적으로 유토피아 관념과 연관된 좀 더 광범위한 몇몇 열망들과 견줄 때에만 온건하거나 최소적인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세계와 견주어,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충족된 생존의 물질적, 사회적 기초를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가장 중대한 사회적, 정치적 악을 제거하려고 하는 기획은 철저하게 혁명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지속적으로 재생산하고 있는 부와 빈(貧)의 극단화, 노력과 보상의 양식, 그리고 경제력과 사회적 무력(無力)의 구조와 양립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두 번째의 핵심 사항을 고려해 볼 때 첫 번째 핵심 사항에 대한 강조가 더 필요할지 모르겠다. 이는 인간 본성의 ‘혼합된’ 잠재성에 대해 내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즉 제한된 사회주의 유토피아는 또한 자유주의 정치 질서라는 특정 의미에서 제한되어야만 한다는 논증에서 도출된다. 완전성이나 내재적 선의라는 관념에 반대하고, 악의 위협을 영구적인 인간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소위 보편적인 박애와 조화에 대한 확신 또는 법적 지배가 종말하리라는 전망에 대한 확신을 품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인간이 서로에게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왔는가에 비추어 볼 때, 더 해롭고 위협적인 유형의 인간의 잠재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제한을 가하고자 하는 갖가지 이유를 갖게 된다. 모든 법적 지배 장치, 즉 확고하고 강화된 인권, 민주적 입법, 권력 감시, 독립적인 사법 과정, 불평등의 해소 수단, 공격으로부터 시민과 공동체를 방어할 수단 등은 필연적이다. 자유의 왕국은 이때 넘을 수 없는 물질적 필연의 왕국의 경계선으로 인해서만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다른 내적 한계로 인해 제한된다. 즉 지금까지 너무 가볍게 다루지 말아야 할 충분한 근거 이상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한계로 인해 제한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말했을 때, 우리는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희망과 진보의 희망을 포기할 수 없다. 밀리반트가 말했듯이 ‘절망’이기도 한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이를 테면 아주 중대한 불평등, 보편적인 착취, 광범위한 정치적 억압, 곪아터져 가는 공동체적 증오, 인종 학살, 재발하는 전쟁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라고 충고하는 것은 느슨하며 낙관적인 목적론을 피해  훨씬 더 엄격한 또 다른 목적론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추악한 도덕적 힘들의 자발적인 목소리로 만들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상황에 따른다는 관점의 뜻은 여기서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있다. 구렁 속에서도, 금세기에 인간이 창조한  가장 악명 높은 지옥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다른 많은 사람들은 포기했지만, 그것으로 인해 비난받을 수는 없다(때로는 불행히도 그리고 다소 우회적인 방식으로 비난받기도 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이 문제는 홀로코스트 문헌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주제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겠다. 나는 이런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으려고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끔찍한 야만성의 조건25)에서 존엄과 가치를 보존하려고 싸웠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더 낳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스스로 인간의 패배라는 담론의 옹호자가 돼야만 했을까?


만일 인간이 더 착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지속된 희망이, 가끔 ‘저 아래서’ 왔던 것처럼,  여분의 빵, 대가없이 베푼 친절이나 연대 행위, 몇몇 시구절의 기억으로부터 올 수 있다면, 거대한 불평등과 고통의 사회적, 제도적 원인들과 수백만의 사람들의 생존을 충족시키는 데 장애가 되는 경제적 장벽들이 평준화되고 낮춰질 경우, 누가 지금 우리가 합리적으로 희망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 확실히, 바로 개인들의 ‘도덕적 개선’에서 얻은 성과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처럼, 그런 목표가 성취될 수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 그런 목표가 성취될 수 없다거나, 그런 목표가 도덕적 개선에 대해 주는 효과가 하찮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히 없다. 


우리가 서있는 지점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을 알 도리가 없다. 그것은 어느 유토피아보다 더 공허한 사변이다. 분명한 이유로 이 에세이에서 초점을 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기록이 도덕적으로 영웅적이며 뛰어난 행위들과 보통의 사소한 일상적인 품위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인간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지 않고,  고문하거나 심각하게 해치지 않고 전 인생을 살고 있다. 인간 상호간의 공감과 선행은 깊고 넓게 흐른다. 미래에 이들 선한 성향과 악한 성향 사이에 균형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추정상 전자를 더 장려하는 조건에서도,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이런 조건에서 진보 사상을 비난하는 합창에 목소리를 더하는 것은, 그 목소리가 어떤 영향력을 가질지 모르지만, 수많은 진보의 장애물에 조금 더 무게를 실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그런 행위는 진보가 불가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거리가 있고 더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하는 데 약간 도움이 될 뿐이다. 


보기를 들면, 아우슈비츠가 우리에게 인간 본성에 대한 진실(the truth), 즉 단순히 하나의 진실(a truth)이 아니라 바로 그 진실(the truth)을 준다고 가르치는 것은 그것이 불행하게도 갖고 있는 어떤 진실을 단순히 강화할 뿐이다. 그런 한계를 갖고 있는 홀로코스트는 자신의 역사성과 조건을 가진 비극적이고 끔찍한 사건, 진보의 개념과는 정반대로 인간의 냉혹한 운명의 상징이 된다. 인간이 저지른 범죄는 계속 쌓이는데, 그리고 마치 그런 범죄들이 지속되어야만 하듯이, 우리가 경계하고 싸워야 할 것에 대한 기억, 악한 인간에 대한 기억이 지속될 수 있듯이 그렇게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범죄들은 이것을 ‘그 진실’로서 배우는 데 굴복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런 게 우리의 본질이고 우리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는 사유의 형태로 지속된다. 우리는 이것이 단지 호소력을 갖지 못한 선택만은 아니라는 점을 말해야만 한다. 그것은 혐오감을 준다. 우리는 유토피아의 희망이나 사회주의를 포기할 수 없다. 우리는 진보를 포기할 수 없다. 그것들은 우리가 인간 본성의 악한 측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 견주어 볼 때 덜 적절하지는 않다. 그것들은 더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덧붙이겠다. 세계를 (많건 적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중대한 위험의 상태를 연장시킬 것이다.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 되는 것, 다시 말해 분명하고 지속적인 불법행위, 뚜렷하고 피할 수 없는 인간의 고통을 너무 많이 받아들이고 허용하고 있는 이 세계는 현재와 미래의 잔학성을 지나치게 받아들이는 세계, 방관자들로 꽉 찬 세계다. 이런 세계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방관하고 있을 때, 사람들에게 가해질 수 있는 잔혹행위에 저항한다는 생각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런 결과도 생기지 않는다. 그런 상황이 지속되는 한, 이 세계는 우리 행성의 도덕적 문화를 타락시킨다. 또 그 세계는 인류의 양심에 독이 된다. 


옮긴이 : 정인(丁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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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alph Miliband,  Socialism for a Sceptical Age, Cambridge 1994, pp. 58-62. 


2) Norman Geras, Marx and Human Nature: Refutation of a Legend, London 1983 (reprinted 1994); Norman Geras, Solidarity in the Conversation of Humankind: The Ungroundable Liberalism of Richard Rorfy, London 1995, chap. 2. 


3) Anna Pawelczynska, Values and Violence in Auschwitz, Berkeley 1979, p. 4. 


4) Tadeusz Borowski, This Way for the Gas, Ladies and Gentlemen, London 1976, p. 175. 


5) Cited in Lawrence Langer, Holocaust Testimonies, New Haven 1991, p. 59. 


6) Richard L. Rubenstein, The Cunning of History: The Holocaust and the American 


7) Arthur A. Cohen, The Tremendum: A 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the Holocaust, New 


York 1993, pp. 15-21,467. For an account of Cohen, see Dan Cohn-Sherbok, Holocaust 


Theology, London 1989, pp. 68-79. 


8) Robert Nozick, The Examined Life, New York 1989, pp. 236-42. 


9) Elie Wiesel, one Generation After, New York 1970, p. 46. 


10) The theses of Hannah Arendt (Eichmann in Jerusalem, London 1977) and, more lately, 


Zygmunt Bauman (Modernity and the Holocaust, Cambridge 1989) are widely known. 


See also in this connection: Gitta Sereny, Into That Darkness, London 1991; Christopher 


R. Browning, Ordinary Men, New York 1993; John Sabini and Maury Silver, 'on 


Destroying the Innocent with a Clear Conscience', in Joel Dimsdale, ed., Survivors, 


Victims and Perpetrators, Washington 1980, pp. 329-58 (and reprinted in their 


Moralities of Everyday Life, Oxford 1982, pp. 55-87); Herbert Kelman, 'Violence 


without Moral Restraint', Journal of Social Issues 2914 (1973), pp. 25-61; and Henri 


Zukier, 'The Tivisted Road to Genocide: on the Psychological Development of Evil 


During the Holocaust', Social Research 61 (1994), pp. 423-55. 


11) Primo Levi, The Drowned and the Saved, London 1989, pp. 28-9. 


12) Ibid., pp. 32-3. 


13)  Ibid., pp. 25-6. 


14)  Ibid., pp. 27, 33. 


15) See Ferdinand0 Camon, Conversations with Primo Levi, Marlboro (Vermont) 1989, pp. 


16)  Ibid., p. 20; Hanna Levy-Hass, Inside Belsen, Brighton 1982, p. 41; Viktor E. Frankl, 


Man's Search for Meaning, London 1987, pp. 87,136. 


17) Sereny, Into That Darkness, p. 208. 


18)Socialism for a Sceptical Age, p. 61 (and New Left Review 206, p. 7). Emphasis added. 


19) Ibid. -and see above. 


20) Ibid. 


21) ibid., p. 60 (and New Left Review 206, p. 6). 


22) David Rousset, The Other Kingdom, New York 1947, p. 168; Livia E. Bitton Jackson, 


Elli: Coming of Age in the Holocaust, London 1984, p. 120; Charlotte Delbo, Auschwitz 


and After, New Haven and London 1995, p. 11; Primo Levi, The Drownedand the Saved, 


p. 33; Elie Wiesel, one Generation After, p. 47. 


23) Henry Friedlander, 'Postscript: Toward a Methodology of Teaching about the Holocaust', 


in Henry Friedlander and Sybil Milton, eds., The Holocaust: Ideology, Bureaucracy, and 


Genocide, New York 1980, p. 324; and Henri Zukier, 'The l'kisted Road to Genocide', 


p. 424. 


24) Cf. Primo Levi, The Drowned and the Saved, p. 27 - notwithstanding the 'sociological 


pessimism' there registered. 


25)  Outstanding in this connection is Terrence Des Pres, The Survivor, New York 1976. 


  1. 이 글은 Socialist Register 1996에 실린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