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실천연구소

중국의 현실적인 생산관계는 무엇인가(我國現實的生産關係到底是什麽) 본문

실천지 (2007년)/2007년 3월호

중국의 현실적인 생산관계는 무엇인가(我國現實的生産關係到底是什麽)

사회실천연구소 2014. 11. 7. 14:11

중국의 현실적인 생산관계는 무엇인가(我國現實的生産關係到底是什麽) 1

박영태(朴永泰)


“과학의 입구에는 지옥의 입구에서처럼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내걸어야 한다. 여기에서는 모든 의혹을 버려야 한다. 어떤 비겁한 짓도 여기에서 행해서는 안 된다.” (맑스).


“가장 근본적인 뜻에서 맑스주의 철학은 세계관 ․ 역사관 ․ 가치관과 방법론으로 시대의 가장 중대한 현실적 과제들을 분석하고 해결하려는 생각과 실천 활동 가운데서 자신을 실현한다.”(劉奔).


A측 : 중국의 현실적인 생산관계는 사회주의다.

B측 : 중국의 현실적인 생산관계는 자본주의다.



A : 중국에서 실행하고 있는 사회주의 제도는 국민들에게 익숙할 뿐 아니라, 세계의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는 위와 같은 논제를 제출하고 변론을 진행하는 것은 아무런 의의가 없다. 그러나 상대방인 B가 전혀 믿기지 않는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방을 마음속으로 탄복하게 하려고 중국의 현실을 명확히 밝힐 것이다. 국가가 세워진 다음 중국은 비교적 짧은 시간에 농업․ 수공업과 자본주의 상공업에 대한 사회주의적 개조를 완성했고, 생산수단의 공공소유제(아래에서는 ‘공유제公有制’로 함)와 노동량에 의거한 생활 자료의 분배제도(아래에서는 ‘노동량에 기초한 분배제도’라 함)를 기본특징으로 하는 사회주의제도를 설립․ 실행하였다. 그 결과  세상사람 모두가 주목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와 같이 확실한 객관적 사실을 상대방 B는 왜 보지 못하는가? 사회주의 제도가 중국에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왜 느끼지 못하는가? 주관적인 의지․ 의식 ․ 의도에서 출발하여 임의로 현실을 재정裁定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의해 바뀌지 않는 객관적 사실, 객관적 존재로부터 출발하여 과학적으로 현실을 규정하는 것은 유물론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다. 상대방 B는 중국의 사회주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주관적인 생각대로 “중국의 현실적인 생산관계는 자본주의다.”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유물론에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국민들의 단호한 반대에 부닥치게 될 것이다. 


B : A의 말은 정확하다. 사회주의 제도가 중국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도 인정한다.


A : 그러면 논쟁이 끝난 것 아닌가? 사실 유물론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간략하게 말하면 감성적感性的 사물 또는 존재를 붙잡고 의식과 독립되어 있는 객관적 지위를 인정하기만 하면 기본적으로 유물론은 파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이 웅변보다 낫다. 이 논쟁을 계속할 필요가 있겠는가?


B : 잠깐만. A의 관점은 유물론에 기초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자기도 모르게 관념론을 기초로 한 것이다. A의 관점은 실제를 떠난 것이 아니라면 사물의 현상 ․ 형식만을 에워싸고 빙빙 도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상 ․ 형식을 사물의 본질관계로 여기고 그것이 유물론에 기초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유물론인 것처럼 보이지만 관념론이다. 이러한 A 관점은 사람들을 쉽게 현혹할 수 있다. 


A : 주관적이고 독단적인 관점에 기초하지 않고 충실하게 객관적 존재로부터 출발한 우리의 관점을 관념론이라고 하는 것은 허황하고 터무니없다. 무수히 많은 맑스가 쓴 문헌 가운데 사회주의에 대하여 우리의 관점과 일치하지 않은 곳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달라. 한 곳만이라도 있으면 된다. 중국의 이론진영이 규정한 사회주의의 기본특징, 즉 공유제+노동량에 기초한 분배제도는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한 맑스의 논술로부터 얻어냈다. 그렇다면 맑스 ․ 엥겔스의 이론은 전부 관념론에 기초한 것이고 모두 현상 ․ 형식을 에워싸고 도는 것인가?  우리의 관점이 관념론에 기초한 것이라는 주장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B가 어떤 것을 근거로 이런 불가사의한 논점을 펼치는가에 대해 알고 싶다. 


B : 중국의 이론진영과 맑스 ․ 엥겔스를 동일시하여 우리를 억누르려고 하지 말기를 바란다. 맑스 ․ 엥겔스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다. 엥겔스는 “과학적 사회주의이론은 유물사관과 잉여가치이론에 기초한 것이다.”고 했다. 우리는 맑스 ․ 엥겔스 문헌을 연구하면서 이 점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중국 이론진영의 사회주의이론을 연구할 때, 우리는 유물사관의 ‘숨결’과 ‘영혼’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말할 것도 없이 잉여가치이론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의 유행어를 따른다면, “맑스는 그 자리에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 이론진영의 사회주의이론은 창시자의 과학적 사회주의이론에 견주어 볼 때 모습만 닮았을 뿐이다. 본질은 아주 다르다. 


우리는 현실적인 생산관계를 분석하고 규정할 때, 사람들이 선택하여 세우고 법률형식으로 확정하여 생산과정에 첨가한 생산관계에서 출발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산관계는 세워진 다음 확실히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생산관계의 직접적인 생성 근원은 사람들의 주관적인 의지 ․ 의식 또는 의도였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주관적 의식의 산물이었다. 맑스가 어떻게 말했는지 살펴보자. “나의 분석방법은 인간에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사회경제적 시대에서부터 출발한 것임을 그[바그너]는 몰랐다.”(?바그너의 「정치경제학 교과서」에 대한 평주?). “이 책에서 나의 연구대상은 자본주의 생산방식과 그것에 대응하는 생산관계와 교환관계다.”(?자본론?제1권 제1판 서문. 김수행 번역 ?자본론?I(상): 4쪽). 이 말은 우리에게 사회-경제 형태를 연구할 때 인간에서부터 출발하면 안 되며, 따라서 인간이 선택하여 세운 생산관계에서부터 출발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깨우쳐준다. 


본질적인 관계를 추구하려면, 먼저 인위적으로 만든 관계를 사상捨象하고, 비록 인간의 의식적이고 목적적인 생산 활동 가운데서 생겼지만 인간의 의지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경제관계 또는 형식(보기를 들어 상품형식에 숨어있는 관계)을 파악해야 하며, 더 나아가서 이런 관계와 분리될 수 없는 생산방식과 이에 상응하는 생산관계 ․ 교환관계를 탐구해야 한다. 


A는 인간이 선택하여 세우고 법률형식으로 확정하여 생산과정에 첨가한 생산관계(이런 속성의 생산관계를 우리는 ‘인위적 생산관계’ 또는 외부 생산관계, 상부上部 생산관계라 말할 수 있다)를 현실적인 생산관계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우리는 일정한 생산력의 발전단계에 적합한 생산방식과 이로부터 생긴 생산관계를 정치 ․ 법률 등 상층구조(인위적 생산관계를 포함)가 수립될 수 있는 현실적인 기초라고 파악한다. 이런 속성과 지위를 갖춘 생산관계를 우리는 ‘필연적 생산관계’ 또는 기초 생산관계, 내부 생산관계, 하부下部 생산관계라고 한다. 인위적 생산관계와 필연적 생산관계는 위와 아래, 겉과 속, 건물과 기초 등 대치對置 관계로 볼 수 있다. 인위적 생산관계는 오늘날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또한 생산과정에 확실히 첨가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현실적이라고 여기고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고 현실적인 생산관계로 여긴다. 


그리하여 A는 자신도 모르게 주관적인 사물(의식의 산물)로 현실을 재정裁定하게 된 것이다. 사회-역사 영역이 지닌 특수성 때문에 A의 관점은 비록 객관존재에서부터 출발함으로써 유물론에 근거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의식이 존재를 결정한다.”는 관념론의 길을 걸은 것이다. 


필연적 생산관계는 인위적 생산관계에 의해 좌우되거나 지배될 수 없고 인간의 의식에 의해 바뀌지 않는 물질적 객체인 생산방식의 필연적 속성으로 자신의 법칙에 따라 발전하고 나아가서 진일보한 형태에 이르게 된다. 인위적 생산관계는 필연적 생산관계를 결정하거나 바꾸어놓지 못한다.  그 뿐만 아니라 인위적 생산관계는 오히려 필연적 생산관계의 상황(또는 성질)에 적합할 때에만 비로소 존재의 가치와 의의를 가지게 되며 현실적인 품격品格을 갖추게 된다. 필연적 생산관계는 ‘본本’이고 경제기초이며 본질적인 관계이다. 반면에 인위적 생산관계는 ‘말末’이고 상층구조이며 현상 ․ 형식이다. 맑스가 제시한 방향을 따라 인위적 생산관계를 사상捨象하고 필연적 생산관계를 발견하여 제시하고 파악해야만, 우리는 유물론을 견지했고 정치형식(인위적 생산관계)의 껍질을 꿰뚫고 사회생활의 가장 밑 부분을 명확히 관찰하여 현실적인 생산관계를 파악했다고 말할 수 있다.


A : 우리는 논제를 이해하고 오늘날 맑스주의의 발전을 촉진하려고 논쟁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논쟁이 감정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냉정하게 상대방의 관점을 고려하지 못하고 따라서 문제를 정확히 파악할 수도 없다. 우리는 변론의 형식을 담화 또는 토론의 형식으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우리의 관점은 교과서 ․  잡지와 전문가 ․ 학자들의 저서들에서 광범하게 논의되고 서술되었다. 하지만 B의 관점은 스스로 체계를 이루어야 하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관점이다. 우리는 논쟁점에 대한 그들의 관점을 좀 더 많이 듣게 되기를 바란다. B는 동의하는가?


B : 동의한다. A가 우리에게 더 많은 진술 기회를 준 데 대해 감사를 표한다. 그와 함께 우리의 관점을 발표할 수 있는 무대를 우리가 더욱 많이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바란다. 


A : B는 중국의 현실적인 생산관계를 분석하는 출발점이 상품이라고 보는가? 만일 그러하다면 한 가지 더 묻자. 상품은 사람의 지배를 받지 않는 객관적 실재實在인가? 왜 상품으로부터 출발하는가? 


B : 맑스는 ?자본론?의 첫머리에 이렇게 적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富는 ‘상품의 방대한 집적’으로 나타나며,  하나하나의 상품은 이런 부의 기본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구는 상품의 분석에서 시작한다.”(?자본론?I(상): 43). 우리도 ?자본론?을 처음 접했을 때 “상품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의 근거(원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자본론?에 대한 연구가 깊어짐에 따라 드디어 그 심층 원인을 찾은 것 같다. (1) 상품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을 통해 표현된 경제의 사회관계다. 상품은 자본주의 사회의 전용품 專用品이 아니라, 원시사회의 해체기부터 있었다. 그때 사람들은 상품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으며 다만 그들이 쓰고 남은 사물을 교환하는 것이 쌍방에 모두 유리하고 각자의 이익에 적합하다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우리는 상품이 그때의 교환 실천 가운데 자연적으로 생긴 경제적 연계連繫이고, 노예사회 ․ 봉건사회 ․ 자본주의 사회를 거쳤으며,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 비로소 노동생산물의 보편적 형식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상품은 자본주의적 사회의식의 산물이 아니고 자산계급資産階級[부르주아계급]의 인위적인 제도의 산물도 아니다. 다만 역사적으로 전해져 내려온 생명력이 있는 경제관계다. (2) 사회적 생산은 생명유기체의 변증법적 성질, 다시 말해 자체 생산 ․ 자체 발전 ․ 자체 부정否定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를 보자. 자본주의는 사유제도私有制度를 기초로 사유제도의 유지(재생산)와 확대생산을 진행한다. 즉 자본주의적 사유제도를 기초로 자본주의적 사유제도를 유지(재생산)하고 확대 생산하는 사회생산 유기체다. 


노동생산물이 어떤 경제형식[형식은 ‘형태’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을 취하면, 사회생산의 기초형식도 노동생산물의 경제형식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산출의 형식과 투입의 형식 사이에는 밑바닥에서 동일성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생산물이 취하는 상품형식이 내포하는 점유占有의 사적 성질과, 생산을 진행하는 기초형식, 즉 자본주의적 사유私有성질은 일치하며, 다만 자본주의적 사유제도는 자신의 노동을 기초로 하는 사유제도의 발전형태(변증법적 부정否定)일 뿐이다.  


우리가 고심하여 상품을 현실적인 생산관계를 분석하는 출발점으로 잡은 것이 아니라 ?자본론?에 대한 연구로부터 머리가 깨여 사회의 노동생산물이 취하는 경제형식을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오늘날 상품은 사람에 의해 지배되지 않을 뿐더러 도리어 사람을 지배하고 있다. 이것은 상품이 내포한 경제-사회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상품이 사회-경제운행에서 수행하는 결정적 작용 때문이다. 비록 오늘날 세계적인 범위에서 생산력과 과학기술이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렀지만, 첨단기술을 이용해도 각 노동생산물에 내포된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을 계산할 수 없으며 각종 생산물의 사회적 수요량도 계산할 수 없다. 오직 상품교환에 담긴 과학적 힘[지식]에 의해 비로소 간접적으로, 상대적으로 근사한 값을 구할 수 있고, 사회-경제가 순조롭고 효율적으로 운행되며 생산력이 더욱 발전할 수 있게 된다. 인류는 아직 상품의 지배에서 해방될 수 없으며 오직 상품에 의지하여 자신의 해방에 필요한 물질조건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 변증법이다! 그러나 상품은 역사적으로 생긴 것으로 반드시 역사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상품은 결코 자연적이고 영원한 범주가 아니다. 


A : B의 논의를 들어보니 유물론에 대한 이해에서 우리와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사회-역사영역은 자연영역과 구별되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기에 무엇이 유물론이고 무엇이 관념론인지 토론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B는 현재의 실제를 관찰하면서 맑스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필연적 생산관계’와 ‘인위적 생산관계’라는 새로운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B의 논리에 따르면 중국의 필연적 생산관계는 자본주의라는 것인가?


B : 자연계에서 사람은 ‘관중’이고 방관자이므로 대상을 정확히 볼 수 있지만, 역사영역에서는 ‘연기자’이자 ‘관중’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를 볼 수밖에 없다. “당사자는 잘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당사자는 자신의 일이기 때문에 어리석게 되고 자신을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 


맑스가 연구와 혁명을 진행했던 그때, 서유럽 자본주의 국가의 인위적 생산관계는 그와 대치되는 필연적 생산관계와 실제적인 차이가 있었지만(이런 차이는 어느 시기에나 불가피하다), 기본적으로 필연적 생산관계의 상황과 맞물렸기 때문에 양자를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무산계급이 승리를 거둔 뒤 세운 인위적 생산관계는 그와 대치되는 필연적 생산관계와 서로 대립하고 서로 부정하는 관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양자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우리가 사용한 새로운 개념은 맑스주의가 시대와 같이 발전해야 한다는 객관적 요구에 따라 맑스 학설 내부에서 ‘찾아낸’ 것으로써, 결코 급조해낸 ‘혁신제품’이 아니며 서방에서 빌려 온 ‘서양제품’은 더더욱 아니다.) 만일 이 둘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사상-이론의 혼란과 잘못된 인식을 가져오게 되고(사실상 이미 가져왔다), 유물사관과 과학적 사회주의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맑스가 ?자본론?에서 어떻게 유물론을 사용했는지 한번 살펴보자.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고 자본주의 생산의 비밀을 밝힐 때, 그는 사람으로부터 또는 자산계급이 세운 법정法定제도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그가 연구한 사회에서 가장 완강하고 가장 일반적이며 가장 간단한 경제형식인 상품(노동생산물의 상품형식)에서 출발하고 상품생산 가운데서 형성된 점유법칙, 즉 필연적인 사유제도를 지적했다. 그는 상품생산이 내재적 변증법에 의해 잉여가치 생산을 본질적 특징으로 하는 특별한 상품생산으로 진일보 발전하면, 이런 생산방식에 상응하는 점유법칙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적 사유제도라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믿을 수 있도록 논증했다. 전반적인 논증은 오직 경제적 원인(법칙)으로 설명되었고 자산계급의 인위적 제도로 설명된 부분은 전혀 없었다. 맑스가 봤을 때, 잉여가치 생산과 연관된 필연적인 자본주의적 사유제도는 자산계급이 인위적으로 세운 정치 ․ 법률제도가 성립되어 생존할 수 있는 현실기초 또는 근거이었고, 인위적인 제도는 오직 이 필연적 생산관계의 일정한 법률표현(또는 법률용어)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중국 인민이 선택하여 세운 공유제와 노동량에 기초한 분배방식 등 인위적 생산관계를 제쳐두고 맑스가 제시한 유물주의 노선을 따르면, 우리는 아래와 같은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중국은 생산력발전이 불균등하고 노동생산물이 아직 가치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교환가치가 지배하는 경향이 날로 보편화되고 있다. 맑스는 자본주의 생산에 대해 투철한 과학적 추상抽象을 행했다. “노동생산물의 가치형태는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의 가장 추상적인, 그리고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고, 바로 이 형태에 의해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은 사회적 생산의 특수한 한 종류가 되며 역사적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자본론?I(상): 103 주 34). 


중국에서 인위적 공유제를 확대하고 순수하게 함으로써 착취계급과 착취현상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깨끗이 사라졌다고 가정하자. 이렇게 깨끗해진 공유제 아래에서도 노동생산물이 여전히 가치형식을 유지한다면, 가치생산액[상품의 총 가치에서 소모된 생산수단의 가치를 뺀 것으로 부가 가치액이라 부를 수 있다] 가운데 노동자들에게 임금(이 임금은 노동력의 가치에 의해 규정된 것이다.)을 지불한 뒤 남은 부분은 확대재생산을 위해 사용된다. 그런데 확대재생산을 위해 남겨진 가치는 잉여가치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생산의 자본주의적 성질은 어쩔 수 없다.(엥겔스의 ?반 뒤링? 3편 4장 ‘분배’ 가운데 뒤링의 경제 코뮌을 비판하는 부분을 참조하라). 즉 인위적 생산관계가 자본주의를 제한하고 없애려고 애를 쓸지라도 사회는 상품 ․ 화폐의 존재에 대해 어찌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경제운행運行에서 상품 ․ 화폐의 역할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고, 이에 따라 상품에 내포된 경제관계인 사유제도가 유지되고 확대 재생산될 때 생산방식과 필연적 생산관계는 자본주의적 성질을 초월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더욱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내재적 변증법의 힘에 의해 끊임없이 인위적 생산관계의 제한과 가로막음을 돌파하고 자신을 발전시키며(즉 필연적 생산관계를 생산하고 확대 생산한다), 유기체의 새로운 ‘기관器官’들을 만들어내고 발육 ․ 성숙하게 한다. 이와 함께 끊임없이 사람들의 머리 속에 “인위적 생산관계는 필연적 생산관계의 상황에 적합해야만 생산력이 순조롭게 발전한다.”(다른 말로 하면 “경제기초가 상층구조를 결정한다.”)는 사회의식 또는 관념을 주입하거나 그런 의식 또는  관념이 생기게 하여 인위적 생산관계가 필연적 생산관계에 적응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도록 한다. 중국의 인위적 생산관계, 즉 공유제+노동량에 기초한 분배제도는 그것의 현실기초인 노동생산물의 상품형식이 아닌 산출물産出物 형식과 이것에 상응하는 생산방식을 생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뿌리가 없는 나무와 같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위축되고 시들어서 결국 사라지게 될 것이다. 


공유제+노동량에 기초한 분배제도 따위의 인위적인 제도들을 사회주의 경제의 기본특징으로 보는 것은 현상 ․ 형식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다. 공유제 하에서 노동생산물이 가치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생산이라는 것이 바로 현상 ․ 형식 뒤에 숨은 본질관계다. 우리는 반드시 양자를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오늘날 유행하는 사유思惟형식에 의해 직접적으로 자동적으로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후자는 오직 과학에 의해 발견되고 제시될 수 있을 뿐이다. 과학의 목적은 바로 현상관계의 뒤바뀐 형식을 밝히는 것이다. 


물질생산의 사회적 자태姿態는 생산방식의 본성本性에 의해서 결정되어야만 하며 인위적 생산관계의 성질에 의해 개변되거나 결정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경제적 사회구성의 발전을 자연사적 과정으로 보는 나의 입장에서는 다른 입장과는 달리 개인이 이런 [계급]관계들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개인은 주관적으로는 아무리 이런 관계들을 초월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그것들의 산물이다”(?자본론? 제1권 제1판 서문. I(상): 7-8). 과학적인 견해 즉 유물론적인 견해에서 볼 때 중국의 경제 형태는 발전하지 못한 자본주의다. 마오쩌둥毛澤東이 만일 유물사관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중국의 필연적 생산관계의 자본주의적 성질을 파악했더라면, 자본주의의 부활을 방지하기 위해 무산계급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을 개시하여 나라와 국민에게 극심한 재난과 손실을 입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난날 우리는 자본주의가 영국과 미국에 있는 체제이고, 사회주의가 우리의 체제라고 믿었다. 그러나 사실상 자본주의는 바로 우리 발아래에 있다. 여기가 바로 로도스Rhodes 섬이다. 


A : B는 사회주의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B : 사회주의의 인위적 생산관계 형태는 공유제와 노동량에 기초한 분배제도다. 유물사관과 잉여가치이론에 근거하여, 우리는 노동생산물이 가치형식을 벗어던지고 진일보 발전한 형식인 산출물産出物형식을 취할 때 사회주의는 공유제와 노동량에 기초한 분배제도를 내용으로 하는 필연적 생산관계를 끊임없이 만들어 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기의 사회형태는 안(경제기초)에서 겉(상층구조)에 이르기까지 직접 통일된 과학적 사회주의다. 하지만 반드시 강조해야 할 점은, 사회주의가 생명을 획득하려면 먼저 일정한 물적 기초 또는 물질적 생존조건을 필요로 하며 이런 기초 또는 조건은 자본주의 발전사의 자연적인 산물이라는 것이다. 맑스의 말을 빌어서 얘기하면 “하나의 길고 고통에 찬 역사적 발전의 자연발생적 산물이다”(?자본론?I(상): 102). 


맑스의 논리를 빌리면 우리는 사회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과학적으로 추상할 수 있다. “노동생산물의 산출물형태는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의 가장 추상적이고 동시에 가장 일반적인 형태다. 바로 이 형태에 의해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은 사회적 생산의 특수한 한 종류가 되며 역사적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우리가 봤을 때 맑스의 사회주의 이론은 공상적空想的 성분이 전혀 없는 완벽한 과학체계다. 사회주의는 착취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착취를 만들어 내지도 않으므로 착취를 끝낼 필요가 없다. 한걸음 물러서서 말하면, 만일 사회주의가 착취를 만들어내면 착취를 끝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회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사물을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맑스의 사회주의이론은 과학의 힘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철학적 품격을 지니고 있기에 불가항력적이다. 


A : 동유럽에서 일어난 급격한 전환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B : 동유럽에서 일어난 급격한 전환은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평화적인 변화이지만, 역사 유물론의 입장에서 보면 동유럽 나라들의 인위적 생산관계가 필연적 생산관계에 적합한 방향으로 급격하게 전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로 존재한 사회주의국가들’의 인위적 생산관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실상 필연적 생산관계의 상황에 적합하게 변화하는 과정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어떤 나라들에서는 현저한 질적 변화가 일어나 쉽게 알 수 있었고 다른 나라들에서는 완만한 양적 변화가 일어나 그 실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뿐이었다. 하지만 질적 변화나 양적 변화 모두 맑스의 유물사관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예측 가능한 자연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동유럽에서 일어난 급격한 전환은 현상 형태에서는 맑스주의에 대한 부정否定이었다. 이 급격한 전환은 자산계급과 그들의 대변인들이 신바람 나서 ‘역사의 종말’이라고 망언하게 했으며, 맑스를 신봉하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드러내놓거나 또는 남몰래 맑스를 떠나가게 했다. 하지만 합리적인 형태에서 볼 때, 이 급격한 전환은 역사가 맑스주의를 정확하게 실천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이 급격한 전환은 무산계급이 지난날에 습득한 잘못된 인식을 검토 ․ 비판하고 맑스를 정확히 이해한 기초 위에서 자신의 실천방향을 조정하도록 했다. 


맑스 ․ 엥겔스가 세상을 떠난 다음, 유물사관은 실제 내용에 있어서 전혀 유물․변증법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맑스와 엥겔스를 뒤이은 사람들은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유물 변증법으로 꾸며 놓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유물사관은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무산계급의 사상-이론에 아주 커다란 잘못을 심어 놓았고 실천에서도 매우 큰 손실을 입혔다. 더 중요한 것은 후세 사람들의 유물사관이 아주 심각한 ‘신념의 위기’를 초래했다. 중국의 이론진영이 만일 변증법과 유물사관에 대한 기존의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모순 ․ 미혹 ․ 곤혹은 점점 더 많아지게 되고 철학 ․ 사회과학의 번영과 발전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오늘날 이론진영이 맑스의 탄탄대로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서양 철학에서 탈출구를 찾는데 열중한다면 전망이 없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의 견해에 지나지 않지만. 


A : B는 논술할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또한 자본주의에 아첨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부당하다.


B : 우리는 결코 근거 없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관점은 이 글의 논제에 대해 이해관계를 벗어나서 아무런 속박을 받지 않고 과학적인 연구를 거쳐 얻어낸 것이다. 우리는 얻어낸 결과를 말했을 뿐, 발표 시기가 적절했는지 아닌지의 문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엥겔스는 과학이 그 무엇도 돌보지 않고 공평무사할수록 노동자의 이익과 소망에 더 적합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객관적 진리만을 존중하고 다른 어떤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비록 우리의 관점이 아직 발표되지 않았거나 토론을 거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약간 유감이 있지만 맑스가 제창한 ‘과학적 성실’을 지켰다는 점에서 마음이 놓이고 자유를 느끼며 이 위대한 시대에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결코 자본주의적 생산의 자태를 장미 빛으로 그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사회에 미친 나쁜 결과는 심각하다. 우리가 표명하려고 하는 것은 다만 유물사관에서 볼 때,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사람들이 의식․ 승인․ 동의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리고 제한하거나 없애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다 하더라도, 생산력발전의 일정한 단계와 언제나 연결되어 자신의 위치를 확정하고 자신의 생명을 시작하며, 또한 자신의 여정旅程을 다 마치기 전에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물사관이 자본주의 발전의 객관적인 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산물인 무산계급은 민주주의를 쟁취한 뒤에 실천전략과 책략, 임무와 방향에 대해 다시 고려하고 조정할 필요가 있지 않는가?


A : B는 필연적 생산관계가 인위적 생산관계의 현실기초이고 인위적 생산관계가 필연적 생산관계에 적합할 경우에만 생산력이 순조롭게 발전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근거와 메커니즘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B : 핵심적 근거는 변증법에 있다.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에서 우리 모두가 익숙히 알고 있는 말을 했다. 사람들은 생활수단을 사회적으로 생산할 때 자신의 의지와는 독립적인 일정한 관계들을 필연적으로 맺게 된다. 즉 그들은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알맞은 생산관계들을 형성한다. 이런 생산관계들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구조를 형성하며, 이 경제구조를 현실적 기초로 하여 그 위에 법률적 ․ 정치적 상층구조가 확고하게 세워지고 아울러 그 현실적 기초와 어울리는 일정한 형식의 사회의식이 생겨난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몇 개의 요점을 얻어 냈다. 먼저 맑스스가 말한 ‘생산관계’는 ‘인위적 생산관계’가 아니라 ‘필연적 생산관계’다(아래에서는 ‘생산관계’는 ‘필연적 생산관계’를 가리킨다). 다음으로, 유물사관의 기본원리를 뽑아내었다. (1)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상황에 적합해야 한다(원리1 또는 적합원리라고 하자). (2) 경제기초(생산관계들의 총체)가 정치 ․ 법률적 상층구조(인위적 생산관계를 포함)와 일정한 사회의식의 형식을 결정한다(원리2라고 하자).


원리 1, 즉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상황에 적합해야 한다.”에서  ‘적합’은 생산관계와 생산력이 무턱대고 절대적으로 적합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적합하지 않는’ 것을 포함한 적합이다. 다시 말해 변증법적 뜻의 적합이다. 적합은 ‘적합하지 않는 것’이 사라진 것이며, 아울러 계속해서 나타나는 ‘적합하지 않은 것’에 의지한다. ‘적합하지 않는 것’은 ‘적합한 것’의 내재적 일환이며, ‘적합한 것’과 ‘적합하지 않는 것’은 생산관계와 생산력 양자 사이의 내재적인 대립 즉 모순을 구성한다. 이 모순은 변증법적인 것이다. 모순이 존재하므로 자연적으로 모순운동과 그것의 형식이 생기게 되고, 모순의 운동형식, 즉 생산력의 발전단계에 적합한 일정한 생산관계는 이 모순이 실현되고 해결될 수 있는 즉 모순 진전의 단 하나의 형식이다. 역사결정론의 논리적 기초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일정한 생산력과 생산방식, 그것에 적합한 생산관계는 동일한 개념군(槪念群)으로 볼 수 있으므로 가끔 바꾸어 사용해도 인식상의 혼란을 가져오지 않는다. 보기를 들면 “인위적 생산관계는 반드시 생산관계의 상황에 적합해야 한다.”는 말을 “인위적 생산관계는 반드시 생산방식의 상황 또는 생산력의 상황에 적합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생산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운동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생산관계와 생산력이 서로 적합하게 되는 과정에서 적합하지 않는 것들이 나타나면(이것은 예컨대 사람들이 생산 활동 가운데 인식 ․ 실천능력이 향상되어 생산력이 진일보하면서 나타난다), 사회는 내부에서 문제(적합하지 않는 것)를 해결하는 ‘기관(器官 organ)’ 또는 방법을 만들어 내어 생산관계와 생산력을 더 높은 차원에서 적합하게 하여 생산력의 발전을 추진한다. 여기서 “적합하게 한다.”는 것은 모순의 해결을 의미할 뿐 아니라 모순의 내재적 성장도 뜻한다. 그와 함께 문제와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은 동시에 나타나고 모순과 생산력이 보조를 맞춰서 증가한다. 생산력 발전단계에 적합한 사회-경제 형태는 이런 모순운동의 내재적 메커니즘에 의해 끊임없이 그 유기체의 기관들을 만들어내며 시초 형태에서 성숙된 형태로 발전한다. 생산력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러 충분히 성숙함으로써 주어진 사회형태가 극한상태에 도달하면, 생산관계에 질적 변화가 일어나 더 높은 형태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생산력 상황에 적합하지 않게 되고 따라서 사회혁명의 시대가 오게 된다.


이상의 생산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운동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회-경제의 기관은 끊임없이 생겨나서 생산력을 추진하는 사회기능을 집행한다는 점이다. 인위적 생산관계가 이것을 방해하거나 심하게는 일정한 생산관계의 기본구조를 파괴하고, 주관적으로 설계한 어떤 형식의 제도를 강행하여 사회생산을 조직할 경우, 생산력은 발전에 유리한 형식을 잃게 되어 정체되거나 심하게는 역행할 수도 있다. 발전은 법칙이다. 생산력 발전을 막은 인위적 생산관계는 언젠가는 사회주체에 의해 버림 받게 되고 그 대신 생산력(또는 생산관계)의 상황에 적합한 인위적 생산관계로 대체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원리1(적합원리)은 원리2의 근거다. 원리1을 이해하면 A는 방금 제기한 문제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말한 원리1과 2는 맑스의 유명한 다음의 논단論斷과 긴밀히 연결된다. “한 사회가 비록 자기 발전의 자연법칙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자연적인 발전단계들을 뛰어넘을 수도 없으며 법령으로 폐지할 수 도 없다. 그러나 그 사회는 그런 발전의 진통을 단축시키거나 경감시킬 수는 있다.”(?자본론? 제1권 제1판 서문. I(상): 6). “어떤 사회질서도 그 안에서 작용하는 모든 생산력이 발전하기 전에는 파괴되지 않으며, 새로운 더 높은 생산관계도 그것의 존재에 필요한 물질조건이 낡은 사회의 틀 안에서 성숙되기 전에는 낡은 생산관계를 대체하지 않는다.”(?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


우리의 이해에 따르면 변증법은 견고하고 깊은 학문으로 실질적인 정확한 이해와 구체과학의 일정한 기초가 없으면 그 실례를 들기 매우 어렵다. 우리는 ?자본론? 중 상품에서 화폐로, 화폐에서 자본의 범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변증법의 실제 응용을 체득했다. 이런 응용은 맑스 만이 해냈다. 아래에서 화폐와 자본을 보기로 변증법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설명하겠다. 화폐의 유통은 상품교환의 내재적 법칙인 등가교환等價交換을 따른다. 등가교환의 내부에서 부등가교환이 발생할 때, 양자는 내재적인 대립모순, 즉 등가교환인 동시에 부등가교환 또는 등가교환을 견지하는 부등가교환을 구성한다. 이 모순이 실현되고 해결될 수 있는 운동형식이 바로 자본(모순의 두 개 측면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형식이다. 맑스는 ?자본론? 에서 이 변증법적 모순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실증적으로 분석하고 우리에게 변증법의 실제 응용 범례를 보여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순의 두 개 방면이 공존하고 투쟁하며 결합되어 하나의 새로운 범주가 되는데, 그것이 바로 변증법적 운동의 실질實質이다”(?哲學硏究?,1990年 第1期: 125). 자본운동의 내재적 대립이 그것에 상응하는 외부대립물, 즉 무산계급과 자산계급을 낳았다. 철학교과서에서는 무산계급과 자산계급은 서로 상대방의 존재를 자신이 존재하는 전제 또는 조건으로 하고 서로 투쟁하면서 하나의 자본주의 사회통일체에 공존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변증법의 실질을 파악한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것은 외부 현상의 대립을 사물의 내재적이고 본질적인 대립으로 간주했으므로 변증법처럼 보이지만, 변증법적 운동을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다른 보기를 들어보자.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모순은 생산의 사회적 성질과 점유占有의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 사이의 모순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변증법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바로 이 모순이 실현되고 해결될 수 있는 운동형식이기에 사회는 자연적인 발전단계를 뛰어넘거나 법령으로 폐지할 수 없다. 그러나 교과서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이 모순을 극복할 수 없으므로 그 생산방식을 없애고(또는 전복하고) (자신이 처한 발전단계와 상관없이) 사회주의적 생산방식을 도입해야 한다. 교과서에서는 모순을 ‘적합하지 않는 것’, ‘충돌’, ‘대항’ 등으로, 즉 지성적知性的 의미로 이해하고 지성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변증법의 실질을 파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 앞에 놓여 진 모순세계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지성적 모순으로 한 측면의 대립 ․ 대항 ․ 불일치 ․ 차이 등으로 구성된다. 인민의 내부모순, 적敵과 나의 모순 등이 이런 모순에 속하는데 이 모순들은 지성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변증법적 모순으로 대립 ․ 통일의 완전한 모순이다. 생산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 상품의 내재적 사용가치와 가치, 구체적인 노동과 추상적인 노동, 개인노동과 사회노동 사이의 모순, 물리학에서 물체의 곡선운동의 내재적인 원심력과 구심력 사이의 모순 등이 이런 모순으로 이들은 지성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고 변증법적 방법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 두 가지 부류의 모순을 정확히 구분하고 서로 다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A : B는 맑스를 너무 믿고 있으면 그를 절대적으로 정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B : 우리는 맑스를 존경하고 맑스주의를 신봉하는데 그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그의 학설이 진리로 향하는 길을 밝혀주었기 때문이다. 맑스는 위인이고 전례 없는 사상가이지만 신은 아니다. 그의 말은 “구구절절 진리이고 한마디가 일만 마디보다 낫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타고난 것 중 내가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맑스는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맑스 ․ 엥겔스가 그때의 역사조건에서 내린 평가와 판단이 전부 정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봤을 때, 그들은 사실상 그때 자본주의의 성숙 정도를 너무 높게 평가했고(이것은 당시 빈번히 발생한 경제위기와 관련이 있다), 상품의 생명력을 너무 낮게 평가했는데(?반 뒤링? 3편 4장 ‘분배’에서 볼 수 있다), 이런 평가들은 그 뒤의 역사실천에 의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 일부 사람들이 맑스 ․ 엥겔스의 공상적인 부분이라고 지적한 개별적인 논단에 동의하지 않으며, 또한 일부 사람들이 맑스주의를 문제를 연구하고 실천을 지도하는 지침으로 삼지 않고 다만 ‘현실’을 변호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A : B는 문제를 보는 시야視野가 독특하고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있다. B가 제기한 논제와 그것에 관련된 여러 논점들에서 세계관과 방법론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오늘날 유물사관(변증법을 포함하여), 자본주의관과 사회주의관, 맑스의 학설에 대해 참신한 연구와 토론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B : A는 우리가 독특한 시야로 문제를 보며 관점이 새롭다고 하는데 우리는 다만 “후세 사람들에 의해 잘못 이해된 맑스의 학설을 정확히 이해한 것”뿐이다. 우리의 관점이 진리성을 가지고 있다면 사회-역사실천의 검증을 받아야 하고 사람들의 질의와 비판에도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질의 ․ 비판과 학술적 논쟁은 발전에 필요한 요소들이다. 우리는 과학에 기초한 모든 엄숙한 비판을 즐겁게 받아들일 것이다.   

                                                                                 

옮긴이: 김명옥

  1. 이 글은 중국 흑룡강성의 朴永泰가 기고한 '我國現實的生産關係到底是什麽'을 번역한 것이다. [본문으로]